연혁과 수리실적
창원항교는 고려 충렬왕 2년(1276)에 세웠다고 전해지나, 확실한 근거는 없고 ‘창원 군지’의 기록에는 조선 초기에 창건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조선 태조7년(서기1398)무인년에 전국에 360개소의 향교를 증설할 당시에 같이 설치된 듯하다.
1530년에 간행된 ‘신중동국여지승람’에는 ‘향교는 부의 북쪽 1리 지점에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조선 초기에 건립된 사실을 뒷받침 해준다.
창원향교는 처음 소답동에 창건되었다가 1705년(현종1)에 당시 부사 신명식과 도감 박봉윤, 도유사 안념, 장의 김창하, 김임 등이 발의하여 마산 합성동 내살리의 청룡산 아래로 이건하였는데 그 곳 옥봉의 지세가 ‘숭무(崇武)’의 땅이지 숭문(崇文)의 땅이 못된다′고 하여 1749년 (영조 25)에 당시 부사 이윤덕과 도유사 정한열, 장의 조대연, 도감 허세환, 김진상, 김장대 등이 현 위치로 옮겼으며 1764년 부사 임익창에 의해 풍화루가 창건되었다고 한다.
창원향교의 창건부터 최근까지의 연혁에 대하여 ‘창원향교지(2004)’에는 다음과 같이 정리되어 있다.
1276년 (고려 충열왕2)에 건립되었다고 하나 가증할 만한 문헌이 없다.
1398년 (조선 태조7) 전국 360 향교를 지방에 증설할 당시 건축된 듯하다.
1405년 현재의 위치로부터 서편 50보 지점에 창건하였다.
1482년 부사 신명식과 도감 박태윤이 현 마산시 합성동 내상리의 청룡산 아래에 이건하였으나 후대에 대지가 좁고 지세가 흉하여 ‘승무의 땅이지 숭문의 땅이 못된다(可以尙武 不可尙文)’하여 계속 이건을 논의하다.
1748년 지부(知府) 이윤덕이 안절도(安節道) 남태양에게 품의하여 여향사림(與鄕士林) 노세완, 노세환, 안성집, 김진환, 김장대, 정한걸, 조대윤, 김광정이 정지우(定址于), 태을산(太乙山) 아래에 터를 정하고(현 구룡산) 동년 12월 8일 이안향축(移安香祝)이 경사(京師)로부터 하송(下送)하다.
1749년 정월 9일에 상량하고 동년 3월 3일 이교봉안(移校奉安) 하였다.
1761년 신사에 부사 임익창이 독담(獨擔)으로 풍화루를 창건하였다.
1780년 경자에 부사 최병교가 향유 김규혁, 김근과 상의하여 명륜당을 중수하였다.
1799년 기미에 임후의 아들 통제사 율이 풍화루 창건비를 건립하였다.
1802년 임술에 부사 박효진이 육영재를 창건하였다.
1841년 신축에 부사 이정현이 품어하여 오백금으로 풍화루와 서재를 중수하였다.
1886년 병술에 상례현(商禮鉉)이 항유 김만주, 이병림, 김 경우, 김원두와 함께 오백금을 독담하여 명륜당, 서재, 풍화루를 중수하였다.
1904년 갑진에 교궁(校宮) 후편에 철도부설을 강행할 때에 직원 전근효가 자담으로 재임(齋任) 노탄, 김동원, 이병우와 함께 향교를 중수하였다.
1908년 무신에 행정구역 폐치분합에 의하여 진해, 웅천 양현이 군에 이관되고 양현향교가 폐지됨에 따라 양 향교의 위패는 구지에 매안한 후, 진해현 유림은 봉양재를 진전면 봉곡에 건립하고, 웅천현 유림은 주자강당을 향교 구지 부근에 건립하여 도의강마(道義講磨)를 계속하고 문묘석전 행사만은 창원문묘에서 봉행하였다.
1935년 을해에 향사가 합의하여 향교를 중수하니 직원 이교민이 시역하고 직원 옥기환이 종역하였다.
1945년 광복 후 종래의 직원제를 폐지하고 전교제도가 실시되어 초대 전교에 김상용이 선입되었으며 향교 관리권 일체를 마산부윤으로부터 인수하였다.
1948년 8월 과도정부 법령 제194호에 의하여 재단법인 경상남도 향교재단이 설립되어 향교 재산 일절을 관리하였으나, 농지개혁법에 따라 소속 농지 대부분을 분배 당했고 문묘 수호답 및 기타 재산은 모종(某種)의 관계로 군내 모학원에 기부행위로서 대부분이 이전된 후 잔여 재산 청구소송에 유도회장 정진환의 주간으로 임시전교 안성호 외 향원다수가 분발 응소한 결과, 1966년 3월 대법원판결로서 환수한 후
1967년 9월 재산관리위원회를 설립하고 전위원 및 당시 전교 김학기와 도 재단이사 배기록이 재산 조사 정리에 착수하고 총 재산 100여건을 처리 및 보존 등기로서 확보하고, 문묘 건봉과 향교관리 운영을 유지하게 되었다.
1949년 전국 유림대회 의결에 의하여 오성위(五聖位)와 송조(宋朝) 두 현만 봉안하고 그 외의 중국 유현위(儒賢位)는 매안하였으며 우리나라 18현을 성묘에 종향케 하고 음 8월27일 공부자 탄강일에 기념석전을 봉행하다.
1956년 전교 안성호와 유림 다수의 합의로서 향내유지의 특별 찬조금을 얻어 장의이근용의 동역으로 향교 보수를 시역하여 등 1960년 경자 3월에 종역하다.
1967년 전교 이근용이 향교 건물일부를 수리하였다.
1970년 전교 김병화가 도비 50만원과 군비 30만원의 보조를 받아 장의 남쾌희, 배기록의 공역으로 동무, 명륜당, 담장 등을 보수하였다.
1972년에 창원향교 재산관리위원회 설립 이래 적립된 기금으로 헌공청(獻供廳), 양현재(養賢齋) 기타 부속건물을 보수하였다.
1972년 7월 도시계획령에 의한 행정구역 폐지 분합으로 인하여 창원향교 소재지가 마산시 의창1동으로 편입되었다.
1974년 6월 창원향교 재산관리 위원회를 발전적으로 해산하고 관리 사무 일절을 전교 김창권에게 인계하였으며, 동년 12월 창원향교 문묘를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35호로 지정받았다.
1975년 전교 김재하가 도비 및 시비 보조 200만원과 지역유지의 특별 찬조금으로서 대성전 및 명륜당 보수 공사와 기금 재산 처분대금 100만원으로서 기타 부속 건물의 보수를 장의 배익구, 김종대, 김태우, 엄학의, 배기록, 문달옥과 협의 공역하였다.
1976년 9월 1일 배기록 전교 때 경상남도 조례 제835호에 의하여 경상남도 창원지구 출장소를 설치함으로써 창원시의 모태가 이루어졌으며,
1980년 4월 1일 배익구 전교 때 법률 제3188호에 의하여 창원지구 출장소의 관할과 마산시의 창동을 합하여 창원시가 설치됨으로서 창원향교 소재지가 창원시 소답동(현 의창동) 433번지로 되었다.
1989년 노병덕 전교 때 도 . 시 지원금 각 1억 원과 자부담 1억 4천 2백만 원으로 유림회관 본관 지하 1층 지상 3층, 연 건평 380평을 건립하였다.
1992년 옛 진해 향교를 진동면에 복원하여 마산향교로서 발족하였으나 삼진을 제외한 대다수 회원이 창원향교에 적을 두고 있는 실정이다.
1993년 김성술 전교 때 노병덕 성균관 부관장의 주선으로 현대건설 정추영 회장의 부담으로 향교 중수 및 양헌재, 전사청, 화장실 등을 중건하였다.
1994년 김성술 전교 때 노병뎍 이사장과 더불어 유림회관 뒤편에 공부자 석상입상과 유림공원 약 500평을 조성하였다.
1995년 김성술 전교와 노병덕 이사장의 주선으로 회관과 공부자 석상 주위 담장을 준역하였다.
1998년 1월에 김갑한 전교 때 노병덕 이사장과 주선으로 공민배 창원시장 당시 시비 지원을 받아 명륜당 서편 담장을 재축조하고 향교 이정표를 3개소에 설치하였다.
2000년 박영기 전교 때 국비지원으로 대성전 기둥 5개를 부분교체하고 지붕의 연목과 기와 일절을 교체 중수하였으며, 태풍으로 인하여 피해가 발생한 동 . 서무, 대성전 소문, 명륜당 동 . 서재 및 풍화루를 부분 보수하였다.
2003년 박영기 전교, 배한성 창원시장 때 시비지원으로 풍화루 연목 교체와 지붕기와 일체를 교체 중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