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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자성상(孔子聖像) 공씨(孔氏)는 곡부(曲阜) 단본이며, 시조는 문선왕(文宣王) 공자(孔子: 휘 丘)이다. 그의 53세손 완(浣)의 둘째아들 소(紹)가 1351년(충정왕3) 원나라의 한림학사로서 공민왕비인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를 배행하고 고려에 와서 귀화, 평장사(平章事)가 되었으며, 회원군(檜原君)에 봉해지고 창원(昌原)을 사적(賜籍)받았다. 그래서 후손들이 그를 중시조로 하고 본관을 창원으로 하였다. 그러나 1794년(정조18) 노(魯)나라의 공씨와 본관을 같이 하기 위해 공자의 고향인 곡부를 관향으로 하사받아 그로부터 곡부공씨라 일컫게 되었다. 중시조 공소(孔紹)의 본명은 소(昭)였는데, 이는 고려 제4대 광종(光宗)의 이름과 같아 이를 피하여 소(紹)로 개명하였다. 중시조의 묘소는 마산시 예곡동에 있고, 매년 음력 10월 1일에 향사하고 있다. 공씨는 고려조에서는 소의 아들 공여(孔帑)와 손자 공부(孔俯)·공은(孔隱) 형제가 이름을 떨쳤고, 조선조에서는 문과 급제자 8명을 배출했다. 공여는 고려 말에 집현전 태학사(集賢殿太學士)로 평장사와 지응양군 천우위대장(知鷹揚軍千牛衛大將) 등을 지냈다. 어촌(漁村) 공부는 당대의 문장가로 이집(李集)·김사렴(金士廉)·이유(李裕)·민유(閔愉)·구홍(具鴻)·윤규(尹珪)·김준(金浚) 등과 함께 〈8청(八淸)〉이라 불리었다. 조선 초에 태종이 보문각 제학(寶文閣提學)으로 불렀으나 나가지 않고 광덕(廣德)의 어촌으로 은거, 어촌(漁村)이라 자호(自號)했다. 그는 일찍이 정몽주(鄭夢周)·이색(李穡) 등과 깊이 사귀었고, 서예에도 일가를 이루어 이색의 신도비문을 썼다. 그의 아우 고산(孤山) 공은은 우왕 때 문과에 급제, 평장사를 지내고 조선 개국 후 은퇴하여 태종이 여러 차례 불렀으나 응하지 않고 절개를 지켰다. 이온(李온)·박침(朴침)·김영비(金英庇)·강필(姜泌)·류방선(柳方善)·최안택(崔安澤)·민보문(閔普文)·차원석(車元碩) 등과 함께 〈구일(九逸)〉로 불리었다. 조선조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문헌공(文獻云) 공서린(孔瑞麟)을 꼽을 수 있다. 그는 중종 때 문과에 급제, 승지(承旨)가 되었는데, 일찍이 김굉필(金宏弼)의 문하에서 공부를 할 때 조광조(趙光祖)와 가까이 지냈다 하여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자 조광조와 함께 투옥되었으나 곧 풀려났다. 그는 여러 차례 조정의 권신들을 공격하는 상소를 올리고 기묘사화에 화를 입은 선비들의 무죄를 주장, 관직을 삭탈당하기도 하였으나 뒤에 경기도 관찰사·대사헌·황해도 관찰사 등을 지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