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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4.3이 발발한지 59년을 맞고 있습니다. 정부는 지난 3월14일 4.3중앙위에서 지금까지 보류됐던 사형수와 무기수 등 수형인을 희생자로 인정하면서 4.3명예회복을 사실상 마무리 했다고 밝혔습니다. 하지만 제주에서는 아직도 4.3의 아픔이 가시질 않고 있습니다. 명예회복이 이뤄지지 않는 현장이 있습니다. 독립운동가. 그들은 여전히 '4.3의 덫'에서 신음하고 있습니다. 제주의 소리가 4.3 59주년을 맞아 4.3 명예회복의 허상을 추적합니다./편집자주 |
김용욱(61) 용민(59) 형제는 정부가 제주4.3 희생자들에게 ‘완전한 명예회복’을 해줬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코웃음을 칠 수 밖에 없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부아도 치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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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항일독립관에 전시돼 조천만세운동 독립운동가. 김시범 선생(윗줄 맨 왼쪽)이 맨 처음을 차지하고 있다. | ||
4.3의 덫에 걸린 조천만세운동 주동자 김시범 선생의 이야기
용욱 용민 형제의 할아버지는 독립운동가인 김시범(1890~1948) 선생이다. 그는 1919년 조천만세운동의 주동자로 미밋동산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제주의 대표적 항일독립운동가다. 서울보다 다소 늦은 3월21일, 14의 동자들이 3.1 만세시위를 벌여 제주도민들 가슴속에 독립의 활화산을 끓게 만든 장본인이다. 21일부터 24일까지 연속적으로 전개됐으며 시위지역도 조천리에서 함덕리, 신흥리, 신촌리로 확대됐고 3000여명의 만세운동에 참여했다. 이 사건으로 모두 29명이 기소되고 23명이 보안법 위반으로 서울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 등을 치렀다. 이중 주동자인 김시범 선생은 거사모의와 시위주동으로 최고형인 1년 옥살이를 했다.
만기 출옥 후 사숙(私塾)과 야학을 통해 독립의 의지를 후생들에게 가르쳤으며, 조천소비조합운동에도 참여하는 등 조천일대 독립운동의 선봉에 서 왔다. 제주 항일운동의 성지인 제주시 조천읍 만세동산에 있는 제주항일기념관과 3.1운동기념탑을 보면 제주항일운동사에서 김시범 선생이 차지하는 위상이 얼마나 큰지 단번에 알 수 있다. 모든 자료와 사진마다 김시범 선생이 첫 번째다. 해방 후에는 조천면장까지 지냈다.
하지만 김시범 선생은 조국이 광복 된지 60년이 넘도록 아직도 독립운동 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조천만세운동을 이끈 14명의 동지 중 10명이 이미 오래전에 독립유공자로 인정돼 정부로부터 포상을 받았으나 김시범 선생은 아직도 제주지역사회와 가족들만이 인정하는 독립운동가일 뿐이다. 김시범 선생뿐만 아니라 조천만세운동의 도화선으로, 서울에서 3.1 독립운동에 가담해 활동하다 시위자 색출작업이 강화되자 독립선언서를 숨겨 제주에 온 당시 휘문고보 4학년인 김장환(김시범 조카) 선생도 생사가 불명확해 역시 독립유공자 포상에서 제외돼 있다.
14명 동지 중 주동자인 김시범 선생 아무런 이유없이 독립유공자 심사 탈락
“1983년에 부산에 있는 정부문서보관소를 뒤진 끝에 할아버지의 조천만세운동 재판기록을 찾아내 당시 함께 했던 독립운동가 후손들을 불러보아 놓고 내가 앞장서 독립유공자 신청을 냈습니다. 그해에 처음으로 김시은(김시범 선생의 6촌 형제) 할아버지가 대통령표창(90년 애족장)을 받은 것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모두 10명이 독립유공자로 정부 포상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우리 할아버지는 20년이 지나도록 아무런 소식이 없습니다.” 김시범 선생의 장손인 용욱씨 이야기다.
▲ 제주항일기념관에 전시돼 있는 김시범 선생의 재판기록부와 수형기록표.
“그래도 예전에 할머니가 살아계실 때는 3.1절이나 광복절 행사 때 할머니가 참석하면 면사무소나 군청에서 놋그릇이라도 줘 할머니가 흡족해 했습니다. 보훈대상자는 아니지만 따뜻한 마음이 있었죠. 하지만 정부가 조천만세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들에게 서훈을 주기시작하면서부터 마음이 참으로 아팠습니다. 분명히 만세운동탑(3.1운동기념탑)에는 할아버지가 주동자로 제일 먼저 이름이 올라가 있고, 지역에서는 물론 독립운동을 연구하는 모든 학자들도 할아버지가 3.1운동의 중심인물이라고 하는데 독립유공자 심사에서는 계속 탈락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제는 3.1만세운동 기념식이나 광복절 행사에는 아예 참가하질 않습니다. 가면 화만 나고 분통이 터질 뿐입니다.”
용옥씨는 1984년 첫 신청에 이어 2005년 1월에도 재신청을 했다. 하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용욱씨 형제를 더욱 화나게 하는 것은 국가보훈처가 왜 탈락했는지 이유를 지금껏 단 한 번도 알려준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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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시범 선생의 장손인 용욱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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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욱씨의 동생인 용민씨. | ||
용민씨는 광복60주년이던 2005년 KBS광복60주년 특집프로그램 촬영을 위해 제주보훈지청을 찾았다. 자신의 할아버지가 왜 국가유공자로 선정이 안되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과장이 저에게 통사정을 했습니다. ‘어쩔 수 없다. 이해해 달라’고 말이죠. 그러면서도 서면으로 안되는 이유를 밝히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선 ‘우리들도 모른다’는 이야기만 되풀이 할 뿐이었습니다. 보훈처 차원에서 ‘사상검증’을 했는데 그 말을 차마 우리에게는 못하는 것 같았습니다.”
용민씨 입에서 중요한 단서가 나왔다. ‘사상검증’이었다. 이게 무슨 말인가. 독립운동가에게 누가 무슨 사상검증을 한단 말인가. 제주 제1의 독립운동가인 김시범 선생에게 사상검증의 칼날을 겨누게 한 것은 바로 4.3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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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자 김용민씨가 조부 김시범 선생의 쓸쓸한 묘소를 가리키며 "할아버지의 명예를 정당히 찾아드리지 못해 한없이 죄송스럽다"는 소회를 밝히고 있다. 현재 김시범 선생의 묘소는 조천 미밋동산 항일기념관 북쪽 인근에 그 흔한 묘비도 산담도 없이 초라하고 외롭게 자리하고 있다. | ||
해방직후 조천면 건준위원장·조천면장 맡은 지역 유지라는 게 '죄라면 죄'
해방이 되면서 남한에는 각 지역마다 민족해방운동을 주도했던 독립운동가들을 중심으로 건국준비위원회가 결성되고 김시범 선생은 조천면건준위원장에 이어 초대 조천면장(1945년 9월~1946년 7월)을 지낸다. 4.3의 도화선이 된 1947년 3.1절 기념대회 준비위 조천면 부위원장을 맡았다. 북초등학교에서 열린 3.1절 집회 시위대가 관덕정 쪽으로 나오는 과정에서 경찰이 시민들에게 발포, 초등학생을 포함해 6명이 숨지고 6명이 중상을 입는다. 김시범 선생은 이 과정에서 미군정 포고령 위반으로 재판에 회부돼 벌금 3000원을 선고받는다. 또한 박경훈 전 제주도지사가 의장으로 선출된 민전의 부의장으로 뽑힌다. 이게 전부였다.
그 후 제주에는 4.3의 광풍이 몰아친다.
토벌대는 제주에서 4.3이 발발하자 1948년 10월말경부터 초토화작전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제주읍내 유지들에 대한 일제검속을 강행하고, 집에서 농사일을 하면서 살고 있던 김시범 선생도 군인들에게 연행돼 희생된다.
1948년 초토화작전 일환으로 김시범 선생 함덕 서우봉에서 '총살'
▲ 3.1운동기념탐 뒷면에는 조천만세운동 주동자들의 이름과 형량등이 적혀 있다. 역시 김시범 선생이 맨 처음에 있어 그 위치를 말해주고 있다.
당시 3살이었던 용욱씨의 이야기다.
“어느 날 집에서 할아버지께서 책을 보고 있는데 순찰대들이 잡자기 들어 닥쳐 강제로 연행해 갔고, 1948년 11월 25일 함덕리 서우봉에서 총살당했다는 소문을 듣고 가족들이 찾아 나선 끝에 함덕리 서우봉 밑 해변에서 총상을 입고 희생당한 것을 발견해 시신을 겨우 수습한 후 조천리 밭에 안치시켰다고 합니다” 나중에 할머니로부터 들은 이야기다. 이때를 전후해 김 선생의 아들(용욱씨 아버지)과 딸도 토벌대에 의해 아무런 이유 없이 죽었다.
그 후로부터 조천만세운동의 주동자로 자랑스런 독립운동가였던 김시범 선생에게는 60년 가까이 ‘빨간 딱지’가 붙었다. 제주지역 독립운동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 인물이라는 사실은 부인하는 사람이 하나 없음에도 불구하고 김시범 선생은 4.3의 덫에 걸려 아직까지 헤어나질 못하고 있는 것이다.
2000년 1월 정부가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을 제정하고 3년에 걸친 진상조사 끝에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국가가 발간하는 과거사 백서를 통해 노무현 대통령이 지난 2003년 10월 제주에 내려와 4.3당시 억울하게 숨져간 희생자들과 도민들에게 공식적으로 사과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김시범 선생에게 씌워진 억울한 누명은 아직까지 남아 있는 현실이다.
용욱 용민 형제는 지난해 4월 제주4.3실무위원회로부터 ‘제주4.3사건희생자 및 유족 결정 통지서’를 받았다. 이 통지서는 할아버지인 김시범 선생이 아무런 잘못 없이 억울하게 희생됐음을 정부가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문서다. 할아버지가 군인들에게 총살당한지 59년만에 정부가 명예를 회복시켜 준 셈이다.
한낱 종이 쪼가리에 불과한 '4.3희생자 결정 통지서'...국가보훈처는 '외면'
그러나 이 두 형제에게 희생자 통지서는 한낱 종이쪽지에 불과하다.
“국가가 4.3희생자로 인정해 주면 뭘 합니까. 다른 한쪽에서는 여전히 소용없다고 하는데 말입니다. 정부말대로, 노무현 대통령 말대로 4.3이 국가의 잘못이라고 인정했다면 할아버지의 과거 독립운동행정을 인정해 줘야 할 게 아닙니까. 왜 아무런 말을 하지 않는 겁니까. 예전의 현경대 의원부터 강창일 의원, 그리고 4.3중앙위원이자 독립유공자심사위원장을 맡았던 신용하 교수님에게도 이 문제를 말씀 드렸지만 그 때뿐입니다. 아무런 이야기가 없어요. 국가보훈처는 꿀먹은 멍어리가 되고 맙니다. 할아버지 이야기만 나오면 입을 닫아요.”
장손인 용욱씨는 시간이 흐를수록 괴롭기만 하다. 독립운동가의 후손으로서 자랑스럽기는커녕 아직도 말 못하는 죄인인 느낌이다. 주변의 눈총이 따갑다.
“오히려 할아버지가 독립운동 공적이 부족하다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또 아니라고 합니다. 주변에서는 ‘4.3은 현 정부에서 모른 것을 해결하지 않았느냐. 그런데 왜 안되느냐’고 이야기 합니다. 직접적으로 말은 못하지만 혹시 말 못할 무엇이 있어서, ‘일제말기에 친일한 것은 아니냐’는 소리도 간혹 들립니다.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정말 후손으로서 죄스럽고 죽고만 싶은 심정입니다. 정부가, 국가보훈처가 제발 속 시원하게 이야기를 해 줬으면 합니다. 무엇이 문제인지를 말입니다.”
▲ 정부가 김시범 선생의 죽음을 억울한 희생으로 인정하고 명예회복을 시켜주는 4.3희생자 인정 통지서.
조천리에 있는 김시범 선생의 묘는 이게 과연 조천만세운동의 지도자의 묘인지, 일반인들이 보기에는 너무나 초라하다. 묘비가 없는 것은 물론이고, 그 흔한 산담도 없다.
“정말 울고 싶은 심정입니다. 저희 가족들 모두 할아버지 묘를 볼 때마다 가슴 속으로 눈물을 삭힙니다. 왜 우리라고 남들처럼 산담도 쌓고 묘비도 만들고 싶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우리는 지금 국가가 할아버지의 명예를 회복시켜 줄 때까지 기다리는 겁니다. 안되면 왜 안되는지 정확하게 말해주면 됩니다. 지금처럼 후손들에게 아무런 말 없이 ‘침묵’으로만 일관하는 것은 국가가 과거에 조국을 위해 몸 받쳤던 독립운동가에 할 태도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말로는 4.3명예회복....독립운동가에겐 여전히 덧씌워진 '4.3 굴레'
김시범 선생의 독립운동 활약상을 보기 위해 제주항일독립관을 찾은 29일. 이곳에서 문화관광해설사를 맡고 있는 송인식(78)선생은 이렇게 말했다.
“관람객들에게 조천만세운동을 설명하면서 김시범 선생을 이야기 하죠. 그런데 왜 그분이 독립유공자 포상을 받지 못하고 있는지를 말할 때 너무나 힘들어요. 관람객들도 이해를 못하죠. 가끔 김 선생의 손자분이 이 곳을 찾아옵니다. 그 분을 볼 때 정말 가슴이 아픔니다. 4.3은 이제 다 해결됐다고 하는데 말이죠. 김시범 선생에게만은 아닌지. 우리가 독립운동가들을 이렇게 해도 되는 것인지 정말 미안할 뿐입니다.”
1948년 2만~3만명의 무고한 양민을 학살했던 근거 없는 ‘사상검증’은 59년이 지난 지금도 자기 스스로 학살의 명분을 쌓기 위해 독립운동가를 여전히 짓누르고 있다.
제주의 소리는 김시범 선생과 같은 유사한 사례를 제보받습니다. 이 같은 아픔을 겪는 유족이나 이를 알고 있는 독자들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여러분의 적극적인 참여가 진정한 4.3명예회복을 이뤄나갑니다. (webmaster@jejusori.net 064-711-7021) |
첫댓글 우리 카페 [자작글 자작시]에 있는 비전의 글 [만세거리]를 보고 용민이 얘기해준 내용을 듣고, 바로 [제주의 소리]에서 발췌하여 싣습니다. 많은 댓글을 부탁합니다.
김용민 동창의 심정 이해가 됩니다. 조부님께서는 항일독립운동가이자 미군정 하에서 초대 조천면장을 지내셨고,조천면 건국준비위원장, 제주 민주주의민족전선 부의장 ....해방직후 읍,면의 건국준비위원회나 인민위원회 위원장들은 대체로 이념과 무관하게 지역 원로들이 추대되었지요 ...4.3사건은 참으로 비극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저도 1980년대에 국회도서관 자료에서 처의 큰아버지가 1929년 항일독립운동 주동자로 검거되어 재판받고 투옥되었던 사실과 기록들을 찾이내어서 결국에는 독립유공자가 될 수 있었던 추억이 있습니다. 아무쪼록 소원 성취하시기를 기원합니다
비전 글올리느라고 수고했네 제주의소리 인터넷 신문기사 잘도 찾았구려
제주 4.3 사건이라는 말은 많이 들었는데 많은 희생이 있었다는 정도로만 알고 있답니다 소원 성취하실 날이 빨리 오길 기도합니다
해방정국의 혼란기에 빚어진 이 사건으로 제주도민들은 엄청난 인명피해 뿐만 아니라 재산 손실을 입었습니다. 인명피해는 25,000 ~ 30,000명으로 추정.
엄청난 인명피해였군요 답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