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한 번 돌리니 극락이 예 있구나" 1./법성스님◆
출가전 관세음보살님 가피부분 포함.
제1부,달이 꽃 그림자를 사랑하여
어머니 스님
나는 아버지 권오봉씨와
어머니 신규씨 사이에서 둘째딸로 태어났다.
그 해가 갑인년(1914년)이어서 이름을 갑순이라고 지었다.
나보다 여섯 살 위인 언니는
무신년에 태어나서 무순이라고 불렀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결코 금슬이 좋은 부부는 아니었다.
그 첫째 이유는
어머니가 대를 이을 아들을 출산하지 못한 때문이었다.
둘째는, 어머니가 아버지보다 무려
다섯 살이나 연상이라는 데 있었다.
아버지의 고향은 충청북도 괴산이다.
그래서 나의 본적이 충북으로 되어 있지만
정작 내가 태어난 곳은 경기도 이천이었다.
내가 철이 들기도 전에 아버지는 수원에서
그리멀리 떨어지지 않은 상귀라는 곳으로 이사를 갔다.
내 의식이 미치는 가장 어릴 때의 기억은
바로 상귀 시절부터다.
아버지는 한의사인 동시에 훈장이셨다.
앉은뱅이도 고친다는 소문이
원근에 자자하게 나있던 명의로서,
멀리서 당나귀를 몰고 와
아버지를 모셔가던 것을 본 일이 있다.
우리 집은 용하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온
환자들로 매일 분주했다.
그런 중에도 아버지는
하루에 몇 시간씩 마을의 학동들을 가르치셨다.
나는 남복을 입고 다섯 살 때부터
국민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 아버지에게 한문 교육을 받았다.
총기가 남다르다는 소리를 들었던 나는
한번 배운 것이면 절대 잊지 않았다.
이때 아버지로부터 한문을 배운 것이
후일 경전을 읽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무순이 언니가 인천의 약대라는 곳으로 시집을 간 것은
그녀의 나이 열일곱이 되던 해였다.
우리 가족은 언니를 시집보낸 직후에 서울로 이사를 왔다.
지금은 후암동을 옛날에는 삼판동이라고 불렀다.
나는 그곳에서 지금의 국민학교 과정인 소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아들을 포기할 수 없었던 아버지는
서울로 이사 온 직후부터 외도를 하시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소실을 얻어 만리동에다 살림을 차렸다.
아들을 낳아 주지 못했던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차라리 두 집 살림을 할 것이 아니라
시앗을 집으로 데리고 들어와서 같이 살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살림을 합치지 않고 주로 만리동에서 지냈으며,
삼판동의 우리 집에는 아주 이따끔 찾아올 뿐이었다.
아침 상에 아버지가 함께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늘 허전함을 느끼게 했다.
나는 아버지가 우리와 함께 식사를 할 수 있는 아침이
다시 찾아올 수 있게 되기를 고대했다.
나도 이렇게 아버지 없는 자리를 허전해 했는데,
당시 어머니의 내면적 갈등은 더 말할 것 없이 치열했을 것이다.
어머니는 아마도 인생에 대한 회의와
허무의 깊은 수렁에 빠졌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그 허무를 불가에 귀의하는 것으로 극복하려 했다.
그런 어머니에게 나란 존재는 애물일 수 밖에 없었다.
당신이 낳은 자식 중에서
첫딸은 이미 성혼했기에 걸릴 것이 없는데,
어린 내가 딸려 있어 어머니는 훌쩍 출가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내가 소학교 5 학년이 되던 해의 일이다.
수업이 끝나 교문 밖으로 나가니 어머니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어머니에게 물었다.
"어머니, 왜 여기서 나를 기다리고 있어요?"
"너하고 같이 갈 데가 있다."
어머니는 나를 서대문 형무소가 내려다보이는
옥천동 언덕에 자리잡고 있던 홍련암으로 데리고 갔다.
그 절에는 홍철우라는 큰스님이 계셨다.
어머니는 나를 그 스님에게 인사시킨 다음 말했다.
"너 이곳에 있거라. 나는 어디 좀 갔다올 데가 있으니까."
나는 어머니가 잠깐 근처에 볼일을 보고 돌아오는 것으로 알았다.
그러나 어머니는 밤이 되어도 나타나지 않았다.
나는 그날 밤, 홍련암의 공양주 보살과 함께 자게 되었다.
내가 보살에게 물었다.
"우리 어머니 언제 오시는 거예요?"
"좀 오래 걸리실 게야."
"어디를 가셨는데요?"
"너를 이곳에 맡겨 두고 먼 곳으로 공부하러 떠나셨다.
내가 돌봐줄 테니 너는 걱정말고 이곳에서 학교를 계속 다니거라.
그러다 보면 어머니를 만나게 되는 날도 있을 거야."
그제서야 어머니가 나를 절에다 맡겨 두고
스님이 될 결심을 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믿기지 않는 일이지만 어머니가 나를 버린 것이다.
나는 그 밤을 뜬눈으로 지새웠다
새벽이 되자 전차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슬며시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대웅전의 뜨락은 아직도 짙은 어둠에 싸여 있었다.
나는 전차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어머니가 아직은 떠나지 않았을 것 같았다.
나를 절에 맡기고서 떠날 준비를 하고 있으리라 여겼다.
나의 예상은 들어맞았다.
어머니는 벌써 일어나 보따리를 싸놓고 있었다.
내가 들어오자 깜짝 놀라며 소리를 질렀다.
"아이구 이 웬수. 거기 있지 왜 찾아왔어?"
"밖에 내다 버리려면 왜 낳았어요?"
그 말을 한 다음 나는 울기 시작했다.
어머니가 나를 버리려고 했다는 사실은
나를 충분히 서럽게 만든 사건이었다. 나는 흐느꼈다.
나를 바라보는 어머니의 눈에도 이슬이맺혔다.
어머니가 한숨을 내쉬었다.
"알았어. 알았으니까 그쳐라. 어디 안 가마."
어머니는 내가 모르는 사이에 집을 팔았다.
그리고 나를 절에 맡긴 다음 짐을 싸가지고
출발하려던 차에 나에게 꼬리를 잡힌 것이었다.
자식을 떼어 놓고 떠나려고 했었지만
역시 모질게 떨치고 갈 수가 없었던 어머니는
다시 삼판동의 감나무골에 집 한 채를 샀다.
어머니의 첫번째 출가 시도는 이렇게 해서 실패했다.
나의 조부는 아버지를 낳으신 다음 상처를 했다.
그래서 새로운 부인을 맞아들여 아들 하나를 더 두었다.
어머니가 우리 아버지에게 시집을 왔을 때
아버지의 이복 동생인 내 삼촌은 나이는 세 살이었다고 한다.
어머니는 세 살짜리 시동생을 업어서 길렀다.
그러기에 삼촌은 어머니를 형수라기보다 어머니처럼 대했다.
조부는 고향인 괴산에서 별세했다.
어머니가 서할머니를 모셨다.
서할머니가 돌아가신 것은 우리가 상귀에 살 때였다.
삼촌은 철이 들면서 가출을 했다.
어디 가서 살았는지 죽었는지 모른다며
어머니는 시동생의 안부를 늘 걱정하던 터였다.
그 삼촌이 감나무골 삼판동의 우리 집으로
여자를 하나 데리고 나타난 것은 내가 열다섯 살이 되던 해였다.
숙모감은 나와 동갑내기였다.
어머니는 삼촌 내외를 일년 동안 데리고 살다가 살림을 내주었다.
살림난 지 일년 만에 삼촌은 아들을 얻었다.
내가 삼촌 집에 가서 미역국을 끓여 주며 산모를 돌보았다.
나의 동갑내기 숙모는 아들을 낳았는데,
나는 이때 기독교 재단에서 운영하는 여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집을 나갔기에 외로웠겠지만
나는 형제도 없고,어머니가 나를 두고 자꾸만
출가를 하려고 했기 때문에 외로운 사춘기를 맞았다.
중학교를 미션스쿨에 다닌 것이 계기가 되어
외로웠던 나는 열렬한 크리스천이 되었다.
어머니에게 나를 버려도 좋으니 제발 스님은 되지 말라고
애원을 했을 만큼 골수 기독교 신자의 길을 가고 있었다.
천지간에 외로운 모녀였건만
종교가 다르자 서로 뜻이 맞지 않았다.
나는 잠자리에 들기 전에 예수께 기도를 드리고 찬송가를 불렀다.
어머니는 염주를 돌리며 염불을 했다.
예수교 신자인 나는 어머니가
사탄의 유혹에 빠졌다고 몰아붙이곤 했다.
어머니를 교회로 전도시키려 무진 애를 쓸 때면
어머니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씀했다.
"얘 갑순아, 옛날부터 우리 나라에 내려온 불교라는
좋은 종교가 있는데 너는 왜 서양귀신을 받드는 사람이 되었니?
아무래도 내가 너를 학교에 잘못 보낸 것 같다."
"예수님은 서양 귀신이 아니라
전지전능하신 유일신이란 말이에요"
"눈이 파랗고 머리가 노라니 틀림없는 서양 사람인데 뭘 그래."
"예수는 사람이 아니라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신 주님이시라니까요?"
"말도 안 된다. 동정녀가 어떻게 애를 낳는다고 그러니?
그런 허무맹랑한 소리에 귀기울이고 다니지 말아라!"
어머니는 나에게 전도되기는커녕
나와 나의 신을 싸잡아 매도하고는 했다.
주여, 이 일을 어찌하란 말이옵니까.
나는 교회의 마룻바닥에 엎드려 통성으로 기도를 드렸다.
어머니가 두번째 출가를 시도한 것은 이 무렵이었다.
하루는 학교에서 돌아오니 웬 낯선 사람들이
우리 집에 들어와 이삿짐들을 옮기고 있었다.
나는 놀라서 물었다.
"당신들은 누구예요?"
"우리는 새로 이 집에 이사 온 사람들이다."
"우리 어머니는 어디 가셨어요?"
"네가 갑순인 모양이구나.
네가 돌아오면 주라고 너의 어머니가 맡긴 편지가 있다.
그걸읽어 보면 자세한 내막을 알수 있을 게야."
나는 새로운 집주인이 내주는 어머니의 편지를 읽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편지에 앞으로는 모든 것을
삼촌과 상의해서 살아가라고 썼다.
너도 이제는 철이 들 만큼 들었으니
엄마의 앞길을 막는 딸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네가 공부를 마치고 시집을 가는 데 드는 비용은
이 집을 팔아 삼촌에게 맡겨 두었으니
경제적으로 곤란을 받지는 않을 것으로 안다.
나는 생각하고 생각한 끝에 절에가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기로 했다.
갑순아!
어머니를 원망하기보다 슬기롭게 너에게 주어진 길을
꿋꿋이 걸어가 수 있기를 빌겠다.
어머니의 편지를 읽고 난 나는 슬프고 기가 막혀서
혼이 나간 듯 우두커니 서 있었다.
가까스로 정신을 수습하여 삼촌을 찾아갔다.
삼촌이 원망스러웠다.
"삼촌은 처음부터 다 알고 있었으면서
왜 나한테 알려 주지 않았어요?"
나는 삼촌에게 대들었다.
"네 어머니의 뜻이었다."
"나를 버린 어머니는 어머니가 아니에요."
나는 그대로 돌아서서 삼촌 집을 뛰쳐나왔다.
모두에게서 버림을 받은 느낌이었다.
참았던 눈물이 볼을 타고 뜨겁게 흘러내렸다.
지향없이 걸음을 옮기다가 정신을 차려 보니
한강 다리 위에 서 있었다.
다리 아래에는 강물이 굽어쳐 흐르고 있었다.
차라리 그곳에 뛰어들어 죽어 버리자는 생각이
간단없이 내 뇌리를 스쳐 갔다.
나는 한없이 복받치는설움에 정신없이 울고 있었다.
이때 내 어깨에 손을 얹어 놓는 사람이 있었다.
돌아보니 삼촌이 서 있었다.
삼촌은 내가집을 뛰쳐나가자 뒤따라왔던 것이다.
삼촌이 나를 돌려 세우며 말했다.
"너 강물로 뛰어들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거지?"
나는 뿌리치며 부르짖었다,
"놔요. 난 죽어 버릴 거예요."
"못하는 소리가 없구나. 어서 집으로 가자."
"싫어요."
"이러면 못쓴다.
내가 네 어머니에게 연락할 테니까 집으로 같이 가자."
나는 삼촌이 어머니가 가 있는 곳을 알고 있으리라 여겼다.
어머니를 사탄의 품에서 구원하여
나에게 데려다 줄 수 있는 사람이 삼촌이었던 것이다.
삼촌의 마음을 움직여 어머니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았고,
그러면 나는 죽지 않아도 되었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그날부터 학교도 가지 않고
단식 투쟁에 들어갔다.
굶으니까 병이 난 것이지만,
병이 나서 먹을 수가 없는 것으로 보이도록
이불을 싸 덮고 누워 버렸다.
나는 결사적이었다.
이러다간 애 죽는다고 판단한 삼촌은 어머니에게 연락을 했다.
내가 다 죽게 생겼다는 연락을 받은 어머니는
아무리 독한 마음을 품고 산으로 올라갔지만
다시 내려오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어머니는 사탄의 품에서 나의 곁으로 돌아왔다.
나는 어머니를 전도시키지 못하면
언젠가는 다시 절로 달아날 거라고 믿었다.
그래서 어머니를 기독교 신자로 만들기 위해
온갖 지혜를 다 동원했지만 우리가 다시 만나
2 년이 지나도록 전도하는 데 실패하고 말았다.
내가 기독교 신자가 된 것은
처음 미션스쿨에 다닌 것이 계기였지만
우리 나라가 일제의식민지였던 시대적 상황과도
전혀 무관하지 않았다.
당시 기독교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이 전개되고 있었고
주체 사상 고양에 기독교가 기여한 바가 적지 않았다.
물론 나는 독립운동에 관여할 만큼 대단한 여자는 아니었지만
나라를 잃은 백성의 한 사람으로서
독립을 쟁취해야 한다는 데 공감하고 있었다.
동시에 그련 운동의 모태가 된 기독교에
차츰 깊이 빠져들어 갔던 것이다.
또 하나,
이때까지도 이 땅의 여자들은 남자들에 의해
여권이 수탈되는 운명의 굴레에서 거의 벗어나지 못했다.
기독교는 여권 신장과 개인의 존엄을 일깨우는 데 일익을 담당했다.
우국지사나 신여성들 대부분이 기독교 신자들이라는 데 대해
나는 고무되고 매료당해 있었다.
기독교 신앙이야말로 남자들에 의해 억압받고 있는 여자들과,
일본에 의해 억눌려 있는 우리나라에 해방을
가져다 줄 수 있는 신앙이라고 굳게 믿었다.
세월은 유수같이 흘러 내 나이 열아홉 살이 되었다.
나는 그해 10 월에 결혼식을 올리고 어머니 곁을 떠났다.
어머니를 전도시키지 못하고 시집을 가는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우리 모녀는 서로를 매우 사랑했다.
누구든 어머니가 딸을 사랑하지 않는 이는 없을 것이고,
딸이 또한 어머니를 사랑하지 않는 경우도 없겠지만
우리 모녀 사이는 좀 특별했다.
아버지와 의가 좋지 않았던 어머니는
출가하여 정진하기가 소원이었다.
내가 없었으면 당신이 하고 싶었던 대로
진작에 스님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나는 어머니의 출가를 막는 유일한 장애물이었다.
어머니는 나를 증오하면서도 사랑했다.
나에게 사랑을 쏟을 수 있었기에 사는 보람을 느꼈던 분이다.
나는 어머니의 전부였다.
나는 어머니 없이 살아 남지 못했을 것이다.
어머니의 사랑이 있었기에 학교도 다닐 수 있었다.
어머니에게 우리 두 모녀가 충분히 먹고
살아갈 수 있는 돈이 있었다.
결국 그 돈은 아버지가 상귀에서 번 것이겠지만
어머니가 그것을 잘 늘리고 축내지 않았기에
나는 남부러울 것 없이 성장할 수 있었다.
어머니를 부처님께 빼앗기고 싶지 않을 만큼 사랑했으며,
어머니는 나의 전부였다.
우리 모녀의 그 시절을 추억할 때면
어머니가 깊은 밤 소리없이 흘리던 눈물이 떠오른다.
어머니는 한 많은 이 땅의 여인이었다.
남존여비와 칠거지악의 악습이 채 사라지지 않은
여명기를 살아낸 분이었다.
어머니가 불교라는 종교에 귀의하는 것으로
새롭게 태어날 수 없었다면 그야말로 한으로 점철된
인생을 살다 가셨을 것이다.
나는 어머니가 선택한 종교를
훨씬 뒤에야 바로 볼 수 있게 되었다.
긴 아품의 세월
중매로 만난 나의 남편은 강덕근이었다.
시집은 시흥의 새점이라는 곳이었다.
그는 오남매의 맏이었고, 그 집안의 장손이었다.
적당한 키에 이목구비가 반듯한,
관옥 같은인물의 미남자였다.
변호사 사무실의 사무장으로 일하여 수입도 만만찮았다.
10 월에 결혼식을 올려 겨우 두 달이 꿈결처럼 흐른
그해 섣달 중순께의 일이었다.
나는 부엌에서 저녁 지을 쌀을 씻다가 편지 한 통을 받았다.
그것은 어머니의 친구분이 보낸 것이었다.
나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 묻은 손으로 봉투를 열었다.
갑순이 보아라.
모든 것이 낯선 시집살이에 어려움이 많을 줄 안다.
처음에는 힘들겠지만 서러움의 날을 참고 지내다 보면
여자의 행복이 이런 것이구나, 하고
깨닫게 되는 날이 있을 줄 안다.
부디 시부모 공경 잘하고,
지아비 뜻을 받들어 행복한 가정을 이룰 수 있기를 빌겠다.
뜻하지 않은 내 편지를 받고 의아하게 생각했을 줄 안다.
그러면 본론을 꺼내기로 하겠다.
갑순아, 놀라지 말거라.
얼마 전에 너의 어머니께서는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었다.
어머니가 진작에 출가를 하고 싶어했다는 것은
너도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오직 너 때문에 출가 시기를 늦출 수밖에 없었느니라.
이제 네가 임자를 만나 혼인을 했으니
너의 어머니로서는 어머니된 도리는 다 했다고 여겼다.
그러니 미루어 왔던 입산 수도를 단행해도
되리라는 것이 당신의 뜻이었다.
물론 너로서는 어머니가 집에 있는 것이 좋으리라 여기겠지만
너도 이제는 어머니의 인생을 이해해 주어야 할 줄로 안다.
나중에 이 사실을 알고 크게 놀라지 않도록
미리 알려 주라는 것이 너의 어머니 분부였다.
너의 어머니가 안 계시니 친정 나들이를 올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 편지에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내용이 적혀 이었다 해도
그렇게 놀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머니가 스님이 되었다는 소식은
돌아가셨다는 말보다 더 심한 충격을 주었다.
기어이 어머니는 나를 시집보내 놓고 삭발위승이 되고 만 것이다.
나는 편지를 읽다가 끝까지 다 읽지 못하고
쌀을 담아 놓았던 그릇 위로 쓰러졌다.
손아래 시누이가 부엌으로 들어오다가
내가 쓰러져 있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나보다 세 살 아래로, 붙임성이 있고 성품이 싹싹했다.
마음이 고와 늘 나를 감싸 주던 아가씨였다는
기억이 지금까지도 남아 있다.
그녀는 깜짝 놀라 황급히 달려왔다.
"언니, 왜 그래요?"
시집살이가 무섭기는 무서웠던지
그 경황 중에도 쌀을 엎지른 것이 걱정되었다.
"어떡하죠, 쌀을 엎질러서?"
"괜찮아, 언니. 엄마가 뭐라고 하면 내가 그런 것이라고 할게."
속없는 여자 같으면 시어머니에게 일러
야단을 맞도록 할 텐데 이런 식으로 나를 감싸주니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시누이는 엎질러진 쌀을 쓸어 담으며 말했다.
"언니,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많이 놀란 것 같아요.
밥은 내가 지을 테니까 방에 들어가서 좀 누워요."
나는 도저히 다시 일을 할 수가 없었다.
가슴이 마구 방망이질을 치기 때문이었다.
숨이 차고,
목에서는 물방아 돌아가는 소리가 났다.
골이 쑤시다 못해 쏟아질 것만 같았다.
나는 시누이의 말을 듣고 방으로 들어가 이불을 쓰고 누웠다.
그로부터 나는 내 힘으로 일어날 수 없는
긴 어둠의 터널에 버려지고 말았다.
온몸이 용광로 속에 처넣어진 쇳덩이처럼 달아오르더니,
3 일째되는 날부터 열이 좀 내리는가 했는데,
이번에는 물에 빠진 솜뭉치처럼 퉁퉁 부어올랐다.
갑자기 아무것도 먹을 수가 없게 되었다.
죽 한 숟갈을 넘겨도 배가 뒤틀리며 요동을 치다가
신물과 함께 올려 버리는 것이었다.
결코 쉽게 훌훌 털어 버리고
일어날 수 있는 병이 아닌 것 같았다.
동네의 양의사도 다녀갔고,
용하다는 한의사를 불러다가 진맥을 짚고
첩약을 달여 먹어 보았지만 차도가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젊은 새댁이 느닷없이 병이 나 누워 있으니
그 신랑되는 이의 당황함과 시부모들의 걱정은 매우 컸다.
내가 이렇게 누워 있은지
몇 달쯤 지났을 때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짧은 겨울해가 진 뒤여서
어둠에 묻히기 시작하던 무렵이었다.
동네 아이 하나가 나를 찾아와서 슬며시 말을 전해 주었다.
"밖에 누가 찾아오셨어요."
"나를?"
"네. 집 식구들 모르게 살짝 전해 달라고 하시더군요.
기다리고 있으니까 나가 보세요."
시집 식구들 모르게 나를 불러낸 사람이라면.
어머니가 찾아온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빠르게 내 뇌리를 스쳐갔다.
나는 가까스로 몸을 일으켜 세우고 옷을 툭툭하게 걸쳐 입었다.
때는 엄동설한이어서 문고리를 잡으면
손이 쩍쩍 달라붙는 매서운 추위가 몰려와 있었다.
대문 밖을 나서자 벌써 골목에는 한치 앞의 분별이 서지 않는
칠흑 같은 그믐밤의 어둠이 진을 치고 있었다.
혼신의 힘을 기울여 한걸음 한걸음 걸어가려니까
어둠 속에서 나직이 들려오는 목소리가 있었다.
"나다."
내가 예상했던 대로 어머니였다.
나는 어머니의 "나다."하는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머리에 모자를 쓰고 목도리를 친친 두른 어머니가
어둠 속에서 한 발 앞으로 다가왔다.
나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차갑게 말했다.
"왜 오셨어요?"
"네가 병이 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얼굴이라도 잠깐 보고 가려고, 좀 어떠니?"
"어머니 때문에 난 병이에요."
"그러면 못써요.
사람이 왜 그리 용렬한고. 의젓하지 못하고."
"......."
"갑순아, 관세음보살을 속으로 지성껏 외거라.
관세음보살을 외면 병이 나을 수가 있어요."
"그런 소리 하시려거든 어서 가세요.
저는 죽어도 사탄에는 빠지지 않겠어요."
"부처님은 의사의 왕이란다.
내 말을 흘려듣지 말고 관세음보살에게
지성껏 매달리면 네 병을 고쳐 주실 거야."
"또 그런 말씀을."
어머니는 무슨 말씀인가를 더 하려다가 입을 다무셨다.
나를 보는 어머니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어머니는 고개를 떨구며 나직이 말씀했다.
"그럼, 난 간다."
어머니는 차마 떨어지지 않는
걸음을 옮겨 놓듯 한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돌아서서 몇 걸음 걸어가다가 뒤돌아보고,
또 돌아보면서 어둠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골목을 빠져나가는 바람은 매서웠다.
나뭇가지의 울부짖는 소리가 메마르게 들려왔다.
어머니는 이렇게 병든 딸을 보러 찾아왔다가
집에도 들어오지 못하고 밖으로 불러내어 잠깐 얼굴만 본 다음
부엉이 울던 그 밤에 걸어서 관악산의 상불암까지 갔을 터였다.
그곳은 새점에서 눈 쌓인 산길로 이십 리가 넘었다.
어머니는 무슨 생각을 하면서 고행의 밤길을 걸어갔을까.
나의 무사 회복을 당신이 믿는 관세음보살에게 빌었겠지.
염불을 외며 산짐승이 곧 달려들 것 같은
무서움을 잊었을 것이다.
나는 먼 길을 찾아온 어머니에게 따뜻한 밥 한 끼
대접해 드리는 것은 고사하고,
언 몸을 녹이고 길을 떠날 수 있게 해드리지도 못했다.
시집식구들의 눈이 어머니나 나나 다같이 무서웠고,
승복을 입고 있다는 것이 또한 남의 이목을 피해야 하는
요인 중에 하나가 되었다.
그때만 해도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이다.
지금 같으면 친정 어머니가 밤에 남의 눈을 피해
병든 딸을 찾아오지는 않을 것이다.
어머니가 다녀간 후에 나의 병은 더욱 악화되었다.
남편은 아무래도 집에서 고칠 수 없다고 판단하여
나를 서울의 의전병원으로 데리고 갔다.
의전병원은 지금의 육군병원으로 당시에는 가장 큰 병원이었다.
의사는 급성 신장염이라는 진단을 내렸다.
소피를 보려고 하면 요도를 바늘로 찌르는 것처럼 따가웠다.
주사를 맞은 다음 용을 쓰며 억지로 힘을 주어야
피같이 새빨간 오줌이 한 종기턱이나 나올 뿐이었다.
신장염과 동시에 오줌소태가 된 것이다.
그것뿐이 아니었다.
다음으로 의사들은 나에게 심장병이 있다는 진단을 내렸다.
심장의 고동이 일정하지 않고 늘 불규칙하게 툭툭툭 뛰다가
벌렁벌렁 숨이 목으로 차오른다.
심하면 숨이 목에 닿으면서 2 분 가량 멈추는 것이었다.
이것을 심장경막증이라고 했다.
강심제를 놓고 마사지를 하면서 부산을 떠는 가운데
매번 아슬아슬하게 절명의 고비를 넘기고는 했다.
손발을 자칫 잘못 움직여도 일단 멎었던 벌렁거림이
요동을 치며 일어나기 때문에 절대 안정 상태에서
미동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어야만 했다.
누워 있어서도 안 된다.
그래서 나는 발병 이후 늘 두꺼운 이불을 쌓아 놓고 기댄
상태로 지냈다.
두 다리 쭉 뻗고 잠을 편히 잘 수가 없었다.
신장염에 오줌소태가 겹치듯 심장병에 심장경막증이
복합적으로 뒤엉킨 것이었다.
기관지가 극도로 악화되면서 해소 천식증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딸국질이 끊임없이 이어지며 항상 목에서는 가래 끓는 소리가 났다.
기침을 한번 하면 창자가 끊어지는 것 같았다.
글깡글깡 가래 끓는 소리가 어찌나 요란했던지
입원실 밖의 복도에서도 들릴정도였다.
나중에 퇴원을 했을 땐 방안에서 나는 소리가
담 밖으로까지 흘러나가,
길 가던사람이 무슨 소리인가 싶어 걸음을 멈추기도 했다.
방앗간의 발동기 돌아가는 소리와도 같았다.
심장이 뛸 때 목에서 가래가 같이 끓다가
심장 뛰는 것이 가라앉으면 가래도 동시에 스르르 잦아들고는 했다.
숨이 목으로 차오르면서 심하게 가래까지 끓게 되면 숨이 막히고
온몸이 금세 파열해 버릴 것처럼 답답해지기 때문에
손에 닿는 것은 무엇이든 마구 쥐어뜯기도 했다.
회오리처럼 또는 폭풍처럼 한바탕의 분탕질이 지나가고 나면
잡히는 것이 없어 방바닥을 마구 헤집었던
내 손가락 끝에 피멍이 들어 있기 일수였다.
병원에 입원할 때는 없었던 증상인데,
입원하고 있던 중에 복막염과 위장병이 생겼다.
온몸이 신장염으로 인해 부어 있지만 특히
배가 소복히 부어오르는 증상이 생겼는데,
복막염 탓이라고 했다.
독한 약과 주사를 맞게 되면서부터 소화가 안 되고
속이 늘 더부룩하게 느껴지기 시작하더니
얼마 후 속앓이가 일어나면서 가
슴을 한 바퀴씩 요동을 치며 틀어제치는 증세가 나타났다.
그러면 창자까지 덩달아 꾸불텅거리며 홰를 쳤다.
속앓이가 치밀고,심장의 고동이 툭툭툭 뛰다가
가래가 목구멍으로 숨가쁘게 솟아오르고,
경막이 막히면서 뚝 숨이 꺼졌다가 막혔던 것이 터지면서
죽음의 고비를 넘기는 악순환이
반복 되었다.
그렇게 하루에도 몇 번씩 죽음의 고비를 넘나들었다.
특히 한달 중에 월경 때가 되면 더했다.
월경불순도 그러기에
나를 초죽음로 몰아넣는 지독한 병 중 하나였다.
거기다가 편두통이 있었다.
앞골만 패는 것이 아니라 뒷골도 패고,
앞뒤로 골이 패는 가운데
금세라도 터질 것 같은 압박 상태로 빠져든다.
귀에서는 늘 도랑물이 흐르는 것처럼 괄괄괄 소리를 냈다.
기가 허해서 그러는 것이려니 했는데 그것도
이비인후과 의사의 치료를 받아야 하는 귓병의 일종이었다.
바늘을 한 움큼 손에 쥐고 몸의 여기저기를
콕콕 쑤시는 것 같은 신경통 증세도 나타났다.
바늘 하나로 몸을 찔러도 견딜 수가 없는 법인데
여러 개로 마구 쑤시는 것 같은 통증은
상상만으로도 몸이 떨릴 것이다.
처음에는 몸 전체가 마구 쑤시기 시작하더니
기일이 경과하면서 양 무릎이 집중적으로 쑤셔대기 시작했다.
그것을 관절염이라고 했다.
신경통과 관절염이 또 합병증이 된 것이다.
피가 얼굴로 한꺼번에 몰리는 것 같은가 하면
화끈거리기 시작하고 골이 패다가,
온몸에 이어 무릎을 특히 바늘로 쑤시는 것 같은
식으로 연쇄 반응을 일으킨다.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은 상기병 때문이라고 했다.
마지막으로 나는 심한 불면증에 시달렸다.
발병 이후 하루도 편한 잠을 자 본 일이 없었다.
제대로 눕지도 못하고 이불에 기대어 설핏 잠이 들었는가 하면
악몽에 빠져 허우적거리다가 이내 혼수상태로 들어가는 식이었다.
잠을 이루려고 애를 쓸수록 잠은 더 멀리 달아나고
눈만 벌겋게 충혈되었다.
수면제의 힘을 빌려 간신히 하루에 서너 시간 정도
눈을 붙이는 것이 고작이었다.
숙면을 하지 못하니 내 병세는 호전될 수가 없었다.
내가 앓게 된 병은 모두 열네 가지였다.
의사 한 사람이 치료할 수 있는 병이 아니었다.
몇 명의 전문의들이 함께 매달렸지만 조금도
차도를 보이지 않을 뿐더러 더욱 증세가 악화되어 가기만 했다.
의사들은 나를 불치병과 난치병을 함께 앓고 있는
환자로 분류해 놓았다.
그들은 병을 고치러 병원에 왔다가 치료되기는커녕
하루가 지나고 나면 없던 병이 생기는 식으로
여려 병을 동시다발적으로 앓게 된 나를
연구 가치가 있는 대상으로 여겼다.
그래서 죽은 뒤에 신체를 병원측에 양도한다는 조건하에
무료로 시술을 해주겠다고 제의해 왔다.
의사들은 내가 소생하여
퇴원할 수 있으리라고는 믿지 않았던 것이다.
나 자신도 병이 나아 집으로 돌아가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엄청난 병원비를 남편에게 부담시키느니
나를 실험용으로 내놓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았다.
그러나 남편은 그럴 수 없다고 반대했다.
다 죽어가는 몸뚱인데다가,
두 달도 채 함께 살지 못한 처지라 부부의 정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병이나
자기에게 골칫덩어리가 되어 줄 뿐인데도,
그는 나를 끔찍이 위하며 소생하기를 애타게 기원했다.
민망하고 눈물이 저절로 날 만큼 고마울 따름이었다.
절대로 연구 대상이 되어 줄 수 없다고 밝혔는데도
보호자가 없는 틈을 이용하여 일본인 의사들이 대거 몰려왔다.
그들은 나를 병원 내의 소강당으로 데리고 갔다.
여러 분야의 의사들이 한꺼번에 몰려와
나를 앞에 놓고 서로 의견을 주고받았다.
뿐만 아니라 한 의사가 내 신체 부위를 이곳저곳 가리키며
수십 명의 레지던트들에게 강의를 시작했다.
나는 남편에게 피해를 덜 주기 위해 나 자신을
연구 대상으로 제공하고 무료 시술을 받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잠깐 하기도 했지만,
막상 이리 되고 보니 윤간을 당하는 것만큼이나 치욕스러웠다.
죽은 뒤에는 죽었으니까 모르겠지만
살아 있는 동안에는 도저히 견뎌낼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이 사실을 안 남편은 의사들의 처사에 분개하면서
병원을 상대로 고소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의사들은 워낙 많은 병을 동시에 앓고 있기 때문에
여러 의사들이 한꺼번에 모여 치료방법을
강구하는 것이 필요했다며 변명을 늘어놓았다.
나는 펄펄 뛰는 그에게 애원했다.
"퇴원시켜 주세요. 죽어도 집에 가서 죽고 싶어요."
그는 애처로운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이렇게 해서 나는 병원에 입원한 지
몇 달 만에 퇴원을 하고 말았다.
병이 낫기는커녕 중환자가 되어 돌아온 나를
시어머니는 한숨을 쉬며 맞아들였다.
퇴원한 후에도 집 근처의 양의사가 내 주치의가 되어 보살폈으며,
용하다는 한의사를 모두 불러 치료케 했지만
차도가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위태한 중에도
가물거리는 불이 꺼지지 않고 타고 있는 것이
오히려 신기할 지경이었다.
나는 곧 죽을 것 같으면서도 그렇게 가물거리며 살아있었다.
남의 집안 장손에게 시집을 와서 원하는 자식을
낳아 주지는 못할망정 젊디 젊은 나이에 제 몸 하나도
추스르지 못하는 중환자가 되어 누워 있으니,
어쩌다 시어머니의 땅이 꺼지는 한숨 소리라도 듣게 되면
차라리 모진 마음 먹고 자진이라도 해야 한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내가 이렇게 앓아 누워 있는 중에도 세월의 흐름은
한치의 유예가 없어서 겨울이 가고 봄이 돌아왔다.
창문 틈으로 들어오는 햇살은 화사했다.
시할머니가 내 방으로 들어오시며 말씀했다.
"아가, 밖에는 지금 꽃이 피고 새가 울고
그렇게 좋을 수가 없는데 젊은 네가
방에만 누워 있으니 이게 무슨 변고니?"
"......"
시할머니는 애써 환하게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이 과일 좀 먹어 보렴. 이것 좀 먹고 기운을 차려야지."
시할머니의 말이 아니더라도 대문 밖을 나서면
온갖 꽃들이 어우러져 있고, 나무들이잎새를 내어
푸르게 약진하고 있으리라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봄이 되면 차도가 좀있으려니 했는데 봄이 되어도
병세가 조금도 호전되지 않아 나는 억울하고 분하고 슬펐다.
시할머니가 방에 나간 후부터
나는 내 설움에 겨워 울기 시작했다.
어찌나 울었던지 얼굴이 퉁퉁부었다.
퇴근해서 돌아온 남편이 내 부운 얼굴을 보더니
그길로 시어머니에게로 달려갔다.
그가 시어머니에게 따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환자는 마음이 편해야 병이 낫는 건데
집사람에게 무슨 말씀을 하신 겁니까?"
시어머니는 펄쩍 뛰었다.
"얘, 나는 오늘 바빠서 그 방에 들어가 보지도 못했다.
그런 나한테 무슨 소리를 했느냐고 따지는 게냐?"
그가 폭탄선언을 했다.
"살림을 나야겠습니다."
"뭐야?"
"살림나는 것을 병원에 입원시킨 것이나
마찬가지로 생각하십시오."
"얘가 지금 무슨 소리야.밖에 있다가도
병이 나면 집으로 데리고 들어와야 하는 법이거늘."
"글쎄, 저 사람 마음을 편하게 해주지 않으면
병이 안 나을 것 같아서 그러는 겁니다."
그는 그길로 휑하니 밖으로 나가 버렸다.
시어머니가 내 방으로 오셨다.
"네 남편이 왜 저러니?"
나는 기어들어가는 소리도 답했다.
"모르겠어요."
시어머니는 퉁퉁 부어오른 내 얼굴을 살피더니 말했다.
"네 얼굴이 이 모양이라 저러는 것 같구나.
낮에 무슨 일이 있었니?"
"아무 일도 없었어요, 어머님."
"아무 일도 없었는데 얼굴이 퉁퉁 붓도록 울었니?
제발 집안 좀 편하자."
나는 송구스러워 몸둘 바를 몰랐다.
그는 그길로 나가서 우리가 살림을 날 수 있는 집을 마련했다.
그는 변호사 사무장으로서 많은 돈을 벌고 있었다.
일정 때인데도 자가용을 타고 다닌 사람이었다.
그가 밤늦게 돌아와서 말했다.
"역전 앞에 가게가 셋 딸린 큰 집을 사 버렸소.
가게에서 나오는 세만 해도 살림 꾸려 나갈 돈은 될게요."
"난 이사 가고 싶지 않아요."
"당신은 환자고, 나는 당신의 보호자야.
환자는 보호자의 말만 따르면 되는 거요.
당신이 아무래도 시할머니, 시어머니 계신 집에서는
누워 있기조차 불편할 것이라는 사실을 내 모르는 바 아니오.
진작에 살림을 나려고 생각하면서도 미루어 왔는데
더는 안 되겠어."
남편이 박박 우기니 어쩔 수가 없었다.
시부모들도 그의 서슬에 못마땅해하면서도 끝내만류하지 않았다.
나는 그 동안 살았던 새점에서 시흥 역정으로 살림을 났다.
당시 무순이 언니에게 열세 살자리 딸이 있었다.
나는 그 조카를 불러다가 내 병구완을 하게 했다.
미상불, 층층시하의 시집에 살 때보다는 마음이 좀 편했다.
남편은 집에 딸린 가게를 시계포와 양복점, 이발소로 빌려주었다.
나에 대한 그의 사랑은 끔찍했다.
살림을 나서 살게 되고부터 그는 퇴근하여
집으로 돌아올 때면 차에 과자며 사탕, 인형을 비롯하여
장난감들을 잔뜩 사오고는 했다
과자를 먹어 보라고 권하며,
내 앞에서 장난감을 가지고 놀면서 나를 즐겁게 해주기 위해
온갖 지혜를 다 동원했다.
그 당시 과자나 장난감들은 돈을 주고 사려고 해도 귀했고,
가격으로 쳐도 말할 수 없이 비쌌다.
시어머니는 새점에서 역전 앞의 우리 집에
다녀가실 때면 늘 그를 못마땅했다.
하루는 그가 백원을 주고 으리으리하게 번쩍거리는
양복장을 백화점에서 사들여 왔다.
쌀 한 가마 값이 6 원밖에 안 하던 때이니
백원이면 쌀 16 가마 값에 해당하는 거금이었다.
시어머니는 집안에 우환이 있을 때는
살림을 들여오는 것이 아니라며 혀를 찼다.
그는 시어머니의 눈총을 웃음으로 태연히 받아넘겼다.
"저 사람에게 무슨 재미가 있겠어요.
살림 느는 재미라도 느끼라고 한 일이니
어머님은 아무 말씀 마십시오."
그는 불가 식으로 말하면 전생에 나에게
많은 빚을 졌던 사람이 아니었는지 모르겠다.
자기를 위해 밥 한 그릇 변변히 지어 주지 못나는 나를
이렇게 끔찍이도 위했으니 말이다.
그뿐이 아니었다.
시어른들은 내가 오랫동안 앓아 누워 있으니
아무래도 소생하기가 힘들다고 판단한 것 같았다.
소생을 한다고 해도 대 이을 아들을 낳을 수 있을 정도로
건강을 회복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 보였다.
나도 이러다가 죽지 싶었고,
주위의 누구도 내가 살아나리라고 믿는 사람은 없었다.
의사로부터 불치병이라는 선고를 받은 나는
사실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는 셈이었다.
이러니 부모들로서는 그에게 소실을 얻어주어
자식을 얻을 수 있도록 해야겠다는 마음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가 시부모들이 계신 새점으로 불려갔다가 왔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온 그는 무엇 때문에
불려갔었다는 말을 나에게 하지 않았다.
얼마 후 새점에 사는 이웃집 아낙이 역전에 나왔다가
나를 찾아왔다. 그녀는 나를 위로한 다음 말했다.
"새댁은 병이 나서 그렇지,
남편 복 하나는 있는 여자라니까요."
"왜요?"
"새댁의 시부모님이 신랑에게 새장가를 들이겠다고 요새 난리예요.
시집을 오겠다는 사람도 구했어요.
그런데 정작 신랑이 펄펄 뛰면서 마누라가 버젓이 살아 있는데
사람의 도리로서 그럴 수는 없다고 말도 못 꺼내게 한다군요."
나는 그제야 그 이가 새점에 불려가 장가를 들라는
압력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요즘 같으면 아무리 환자라고 해도 사람이 살아 있는데
장가를 들이겠다는 시부모는 없을 테고,
아내가 살아 있는 남자에게 시집을 오겠다는 여자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내가 살아나지 못하여 죽는다고 가정하면
이만한 자리가 쉽지 않았다.
가정 형편이 어려운 사람 중에서는
딸을 내주겠다고 나설 만도 했다.
그러나 그는 부모로부터 그런 압력을 받아도,
내가 죽으면 몰라도 살아 있는 한은 시앗을 보아서
환자의 마음을 어지럽게 해줄 수는 없다며
자신의 생각을 굽히지 않았다.
나는 그에게 진심으로 미안했다.
배운 것이 많고 능력이 있어 돈도 잘 벌고,
나만 성했다면 남부러울 것이 없을 사람인데
장가 한번 잘못 들었다가 좋은 시절을 그렇게 다 보내고 말았다.
그는 나에게 참으로 과분한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그에게 유난히 쌀쌀맞게 대하기 시작했다.
기왕에 살아나지도 못할 바에야 정을 완전히
떼어 놓는 것이 좋겠다는 판단이 들어서였다.
아닌게 아니라 시어머니는 노상 그가 쓸데없는 것을
사들인다고 핀잔인데,
내가 꼬시켜서 그러는 것 같은 자격지심도 들었다.
나는 그에게 필요도 없는 것을 사들고 들어온다고
심하게 양탈을 부리고는 했다.
남편에 대한 거부가 도에 지나쳤던가 보다.
누워 있는 주제에 남편을 타박하는 내가
눈에 거슬렸던지 시삼촌댁이 혀를 찼다.
"내가 보기에 네가 좀 지나친 것 같다."
그러나 옆에 있던 그이는 사람 좋은 미소를
입가에 떠올리며 말했다.
"저 사람은 환자예요.
자기 몸이 괴롭다 보니까 그러는 겁니다.
지나친 것이 아니에요."
삼촌댁은 그를 좀 모자란 것이 아니냐는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를 위해 정을 떼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또한 그를 위해서라도 어떻게든 살아나고 싶은 것이
내 진심이었다.
그러나 나는 좀체로 소생할 기미가 없었다.
병세는 갈수록 악화되어 가기만 했다.
확실히 절대 안정을 취하면 좀 나았고 심화를 끓이면
내 병은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되었다.
그에 대해 평소보다 극도로 신경을 쓴 것이 빌미가 되어
나는 곧 숨이 넘어갈 것처럼 자지러진 적이 있었다.
퇴근을 하여 집으로 돌아왔던 그가 내 병세가 갑자기
더 악화된 것을 발견하고 급히 의사를 불렀다.
의사가 가지고 온 주사약은 한겨울 추위에 꽁꽁 얼어 있었다.
그는 그것을 급히 녹여 나에게 주사를 놓았는데,
이 과정에서 무엇이 잘못된 모양이었다.
잠시 헐떡거리며 숨이 가라앉는가 싶더니
이번엔 방이 빙그르 돌아가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한없이 가라앉는 것 같았다.
나는 물을 좀 마시면 정신을 차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물 대접은 머리맡에 놓여 있었다.
물 대접을 집으려고 바라보니 그것은 한 개가 아니라
두 개로 보였다가 세 개로도보였다.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 오는 것을 느껴 옷을 쥐어뜯으며
허우적거리기 시작했다.
내 입에서는 거품이 흘러나왔다.
그는 아무래도 내가 그 밤을 못 넘기고
세상을 뜨려나 보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급히 시부모가 있는 새점으로 사람을 보내어
일이 나게 생겼다는 것을 알리는 한편,
다시 의사를 불러왔다.
왕진 온 의사는 주사 맞은 것이 부작용이 났다며
새로운 처방을 했지만 나는 좀체로 평정을 되찾지 못했다.
새점으로부터 시부모뿐만 아니라
대소간의 집안 사람들이 몰려왔다.
나는 이번이야말로 죽게 되는가 보다고 생각했다.
마치 간질병 환자처럼 발작을 계속하던 나는
어느 순간 혼절하고 말았다.
얼마의 시간이 흐른 것일까.
내가 눈을 떴을 때 제일 먼저 시야에 들어온 것은
다섯 개의 거대한 기둥이었다.
나는 그것을 하늘 나라의 어디메쯤에 있는
무슨 기둥이려니 여겨 부지불식간에 비명을 질렀다.
비명이라고는 하지만 모기 소리처럼 흘러나왔을 것이다.
"아이구 무서워!"
내 말소리에 옆에 있던 사람들이 일어났다.
시어머니가 나에게 말했다.
"말을 하는구나. 나를 알아보겠니? 정신이 좀 나느냐?"
의식은 아주 천천히 돌아왔다.
희미하게 보이던 남편과 시어머니의 얼굴이
차츰 또렷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다섯 개의 기둥이 발가락이었을음 알았다.
시어머니는 부리나케 부엌으로 나가 미음을 끓여 왔다.
"이것 좀 먹어 보겠니?"
이제는 하다하다가 발작까지 했는가 싶어 민망하고,
자신이 참혹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남편과 시집 식구들은 나에게 오만 정이 다 떨어졌을 터였다.
시어머니의 시선을 피하는 내 눈에서
눈물 한 줄기가 솟구쳐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나는 염라대왕 앞까지 거의 다 갔다가 되돌아왔다.
곧 숨이 넘어갈 것 같으면서도 다시 뽀시락거리며 되살아나
오욕스러운 생명을 연명하는 것이다.
이 무렵의 내 꿈은 이런 것이었다.
그저 밤이 주는 휴식 속에 불면 없이 빠져들었다가
상큼하고 신선한 아침을 맞이하고 싶다는 것,
정성껏 마련한 음식을 차려 놓고 남편과 마주앉아
식사를 할 수 있는 아침을 맞이하고 싶다는 것,
그것뿐이었다.
아니면 아침이 돌아오기 전에
차라리 세상을 떠나 있고 싶을 뿐이었다.
출근하는 그를 위해 아침상을 마련해 줄 수 없다는 것은
죽음보다 더 큰 아픔이 되어 나를 짓이기곤 했다.
하늘이 무너지는 슬픔
나는 그렇게 7 년을 앓아 누워 있었다. 그
리고 마침내 1940년이 되었다.
그해 9 월의 일이었다.
그날도 남편은 평소와 같이 변호사 사무실에 출근을 했다.
그가 집으로 돌아온 것은 자정이 다되어 갈 무렵이었다.
그는 타고 온 차에서 자기 스스로 내리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부축을 받아서야 내렸다.
출근할 때 멀쩡하던 사람이 업혀서 집안으로 들어오니,
나는 내 몸이 아파 경황 없는 중에도 가슴이 철렁했다.
"어떻게 된 일이에요?"
함께 온 사무실 직원이 설명했다.
"저녁에 회식을 했거든요.
대구매운탕을 드셨는데 체한 것 같습니다.
혼자 가시게 할 수 없어 제가 모시고 왔습니다."
대구탕을 먹고 체했다는데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라는 것은 납득이 가지 않았다.
그의몸은 퉁퉁 부어 있었다.
나는 식중독이 아닐까 생각했다.
"아픈 사람을 병원으로 데리고 가야지 집으로 오면 어떻게 해요?"
"사무장님이 집으로 데려다 달라고 하셨기 때문에"
나는 그에게 물었다.
"괜찮겠어요?"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아무래도 심상치 않았다.
그대로 집에 있도록 할 수가 없었다.
나는 사람을 시켜
새점의 시부모에게 연락을 하는 한편 의사를 불렀다.
왕진을 온 동네의 의사는 응급처치를 한 다음
서울의 큰 병원에 입원을 시키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고개를 갸우뚱하며 병명을 얘기해 주지 않았지만
분명 식중독은 아닌 것같다.
그는 이튿날 아침 일찍 내가 입원했던
서울의 의전병원으로 실려 갔다.
그래도 그 병원이 당시로서는 가장 큰 종합병원이었다.
내가 내 몸을 못 다스리니 이런 위급한 중에도
그를 따라 병원까지 가지 못하는 것이 못내 안타깝다 못해 서러웠다.
그가 병원으로 실려 가고 나자 갑자기 신경을 쓴 탓인지
속앓이가 치밀고, 심장이불규칙하게 뛰다가 턱까지 막혀 오고,
가래가 끓고, 골이 쏟아질 듯 지끈거렸다.
온몸은 바늘로 마구 짓쑤시는 것 같았다. 꼭 죽을 것만 같았다.
내 코가 열자나 빠졌으니 그이를
걱정하고 있을 여가도 없는 상태였다.
그렇게 하루가 가고 이틀이 가고 열흘이 흘렀다.
나는 그가 입원해 있는 동안 젖먹던 힘까지 다해
딱 한 번 병원으로 면회를 갔다.
열흘 만에 보는 그의 몰골은 나보다도 더 참혹했다.
그에게 내려진 병명은 급성 신장염이었다.
그가 일하는 사무실의 변호사가 급히 손을 써서,
일본 본토로부터 좋다는 약을 공수해다가 투약하고,
의사들도 최선을 다했지만 그의 병은 워낙 질이 나쁜
악성이어서 급속도로 악화일로를 치달았다.
그 스스로도 살아나기 힘들다고 판단한 것 같았다.
남편은 죽을 바에야 집에 가서 죽겠다며 퇴원을 고집했다.
결국, 치료를 받았으나 아무효험도 얻지 못하고
사경을 해매는 지경에 이르러 다시 집으로 실려 왔다.
억장이 무너질 노릇이었다.
집으로 돌아온 직후에 그의 친구들이 병문안을 왔다.
그는 친구들에게 말했다.
"나 죽는 것은 괜찮은데 저 사람이 불쌍해서 어쩔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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