自序
다시 한 권의 책으로 묶었다. 부질없이 세상을 향하여 또 한 번 종주먹을 들이대는 일일지 모르지만.
어느 누가 살아 온 삶을 다 말로 할 수 있으랴마는 가슴속 한 켠에 꼭꼭 묻어두고 힘들게 사느니 차라리 진솔한 노래로 승화시키고 싶었다.
내 치부를 드러내는 것들이지만 착하게 살아가면서도 늘 가슴 시려하는 이웃들에게 한 가닥 햇살이 될 수 있다면 보람으로 알고 이 일을 계속하고 싶다.
2006년 4월 秋月산방에서 姜大實
1. 동네 경사가 났다
물려받은 산밭
산발치 칙칙한 오솔길 앞장선 기억 따라 찾아들면
찔레나무 두렁을 파고들어 여기저기다 진치고
개망초 우북이 모여들어 한바탕 새하얀 춤판인데
좋은 미영밭 다 묵혔다고 솜구름 눈흘기며 영을 넘는다.
형수
잊지 않고 쌍태리 찾는 까닭은 큰댁 형수가 기다리시기 때문입니다 일에 찌들어 시들마른 낙엽같이 있다가도 발부리에 차이는 돌멩이 소리 들리면 구부정한 허리 가뿐히 일으켜 맨발로 뛰쳐나오시는 형수 두 손 덥석 받아 쥐고 한사코 안으로만 들자 십니다 마주앉아 그간을 나누다 보면 세월은 가리마 끝에 맴돌고 고생 흔적 상형문자로 선연합니다.
국수
고향 찾아갈 때는 관방제 초입 포장친 집에 들러 국수 한 대접 하고 간다 처마 밑 비집고 들어서 틈서리 목로에 자리 잡고 앉으면 국수 한 그릇 꼬옥 먹고 잡더라만, 그냥 왔다시며 허리춤에 묻어온 박하사탕 몰려든 자식들에게 물리시던 어머니, 흔흔한 미소 뒤에 갈앉친 허기진 그 모습 원추리 새순처럼 솟아 국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배고픔 대신 채우고 간다.
생가 찾아가던 날
강담에 기대인 철문 밀치자 꽃초롱 밝혀 든 참깨 두엄자리에 나와 멀끔히 쳐다본다 주인 영감님 낮잠 자다 권하는 때에 절은 마루턱에 그리움 걸치면 발길 뜨음한 마당 여기저기에서 돌부리 수군댄다 주춧돌에 붙들린 기둥뿌리 삭고 바람은 사방간데 들쑤시고 다닌다 소복소복 꿈 키우던 윗방엔 상한 책상이 쯩기고 앉아 있다 눈감고도 훤한 뒤꼍 돌아가자 반질반질한 장독 온데간데없고 아픈 항아리 몇 쌜쭉 토라져 있다 웃자란 옥수숫대가 헉헉거리며 골방 허물어진 슬레이트 떠받고 서까래에 얹힌 흰 구름 무심타 울안으로 기다란 팔 내밀고 홍시 떨구던 감나무 뵈질 않고 자두나무랑 까치발 딛던 죽나무 우뚝이 갈맷빛 뽐낸다.
동네 경사가 났다
넷째야! 동네 경사가 났다 아랫고샅 너의 큰집 형네 그 순하디순하고 일 잘하는 점순이 산고의 울부짖음을 앞산이 다 쩌렁쩌렁 따라 울더니 순산했나 보구나, 또 몇 배 째인지 모르겠다만 잠잠해졌다 아까부터 넷째야! 낼 아침엔 일찌거니 일어나 식전에 밀기울 한 소쿠리 갖다 주어라, 꼬옥 먹고 얼른 힘 얻으라고 농골 산밭 골갈이랑 큰 배미 써레질까지 맡았니라 올봄에도 그리고 단단히 일러라 암수간에 젖떨어지면 우리 외양간에 틀림없이 넣게 하라고.
금살 같은 소울음 소리에 망각을 깨고 들려오는 아버님 말씀.
뜬소문
그래도 향리 쪽에다 너와집이라도 한 칸 마련하여 시詩와 고즈넉이 사는 것이 제일 좋을 것 같아
호젓한 산섶 양지바른 데 미리 봐두고 싶어 아내와 여기저기 둘러보다 친분 있는 몇몇 만났더니
이젠 다 망해 들어오는갑다고 비아냥거리고 숨어 들어오는 게 틀림없다고 수런댄다는 소문 자자하네
애년 넘도록 호박꽃 소망 고이 품고 고향 하늘 부끄럼 없이 우러르며 살아 온 나를 누가 알기나 할까.
생금밭
다랑논 부쳐서는 층층이 커가는 자식들 지겟다리나 두드리게 할 뿐이라고
하많은 빚 예제서 끌어대 대톱 하나로 뭉칫돈 캐내는 생금밭 동네 초입에 마련하셔
보람 반 꿈 반으로 꼭두새벽 이슬을 쓸다 앞산 해 바지게에 짊어지시니
촌로村老들 입살에도 세세연년 수북이 생금은 쏟아져 청맹과니 벗은 자식들
두 분 어른 대꽃 따라 가시자 어느 결에 들앉은 주춧돌 보기 싫어 멀어지는 향리가 서럽다.
고향집
굴뚝새 포로롱 달아나는 어스레한 헛청에 거미줄 어지럽다
등태 흘린 빈 지게 주인을 기다리고
날근날근한 덕석 외로 누워 잠이 깊다
속 탄 괭이며 쇠스랑 절단난 삽 수선스레 뒹구는데
능청스런 호미 응석 부리며 발목을 잡는다.
자작골 봄밤
쑥잎 나붓나붓 피어나 하늘 희뿌연 봄날 산잔등이 내려다보는 자작골 산막에 모여들었다 한 번 사는 것같이 살아보자더니 남은 건 켜켜이 채인 세월이요 도갓집 강아지 같은 눈치뿐이라고 골짜기 깊은 시름에 앞산 자락 어느새 어둠이 깊다 천근만근 무거워지는 내일은 방 안 가득 심란히 흐르다 섰다판으로 익어가고 노래방 옛 노래 목 메이는데 바람은 꽃잎 몰아다 문 흔들고 속절없는 봄밤 깊어만 간다.
고향 산하山河
아래로 아래로 몸 낮추어 살으라
무겁디무겁게 입 다스려 살으라
허나, 마음속 텃밭은 청청히 가꾸거라
고향은 나볏이 책 펴놓고 기다린다.
고향의 만추晩秋
일손 거둔 촌로 토담 밑 웅크리고 앉아 절은 노을 좇고
사립 잠든 빈집 앞 누렁이 한 마리 졸다 눈 부라린다
빛 잃은 먹감나무 까치 기다리다 홍시 흘리고
유년의 추억은 개울 가 갈꽃으로 피어나 하이얀 바람 날린다.
산방 일기?1
지금 드느냐며 산은 마중 나와 손 내미는데
어이 사나 보자고 개울물 쑥덕이며 뒤따라오고
얼간이가 발붙인다며 새앙쥐 곁눈질로 지나가고
속없는 살쾡이 가족 잔칫상 없냐며 내다본다.
산방 일기?2
헌 살림살이 몰아 실은 톤 반 화물차와 승용차 질퍽한 마당길에 세워놓고 여기저기 놓을 자리 재다 산창 열어젖뜨린다 어둠은 부끄러이 찾아들고 산은 길마중 나와 반색하며 손 흔들어댄다 한데, 어떤 놈이냐 할까 재수 되게 없다 산마을 개들 짖어대는데 개울 건너 늙은 주막집 외등 밝히지 않는다 이따금씩 전조등 질주하는 신작로 나와 어정거리는 사람 못 본 채 그냥 들어간다.
산방 일기?3
추적추적 내리던 겨울비 숨돌리는 틈에 누더기 짐 후다닥 내려놓고 들이키는 산수山水 한 대접에 세사는 흔적 없이 녹는다 세간 정리는 밤 깊은 줄 모르고 걸레질이 흥겨운 아내는 처제와 입 맞아 선뜩선뜩한 방에 모닥불 놓는다 옳아, 내 왜 모르겠는가! 삼십 년을 하루같이 외통수 따르다 깊은 속 괴인 짜디짠 그 눈물을 예가 목마르게 노래한 낙원이라오 산주 되어 거처 한 칸 내고 무시로 들고 날 열쇠까지 거저 쥐었으니.
산방 일기?4
돌둑길 느티 형제가 허리를 일으키며 말 건넨다 왜 오지 않았느냐 지나는 길에라도 한 번 들러가지 아니 하였느냐고 삼십 년 전쯤 여름 무거운 하루를 쉬어가더니 말쑥이 잃었더냐 기억의 갈피를 더듬는다 냇가 돌멩이같이 닳진 않아 다행이라며 산바람 불어오니 어여 들라 돌앉는다 어떻든 허몽을 품지 말라 신신 당부한다.
2. 봄날 엽서
말바우 시장?1
하늘 허탄해 일손 무거워지는 날엔 저린 그리움 새떼같이 몰려와 말바우 저자 거리로 나선다 향리를 떠나 본 사람은 안다 남모르게 눈물 흘려 본 사람은 안다 현란한 네온의 길섶 길나무 그림자에 밟혀 그믐처럼 졸고 있는 고향을 꿈 한 동이 땀 한 섬 휜 허리 짊어지고 살다 별이 되는 어머니를.
말바우 시장?2
북적대는 틈새에 발붙이자 가리사니 없는 다섯 자식 버리고 낙향하여 움막 친 꺽다리 영감 폭설에 망조 든 하우스 농사 멈다쉬다 찾아드는 농촌 버스 산덩이 조합빚에 신발끈 동여맨 주막집 이야기가 소곤거린다 망령 든 노모 수발에 장가들 나이 흘려버린 이장 구제역에 고삐 놓친 외양간 더위와 추위에 쓸어버린 닭과 오리 달포 전 저승 열차 올라 탄 방앗간집 이야기가 퍼덕거린다 내 고향 상골 신음 소리가 파장 막걸리에 취해 눈물 자국 위를 절뚝인다.
회초리
단잠 버겁게 털고 일어나 여명 첫자락 밟으며 동산에 오른다 동천강東天江 마알간 물에 마음 씻고 바위 품고 내려오는 길 아버님 말씀 불현듯 떠올라 회초리 하나 꺾어 든다 두 아들 다 크도록 오래오래 되새길 수 있는 훈계 한마디 심어 주지 못했음은 진흙탕 속 살아온 탓이리 매끈히 다듬어 잘 보이는 데 올려놓고 들고 날 때마다 속 깊이 품게 하리라.
봄앓이?1
양지 쪽 빈 화분에 잡풀이 가득
지천명 시린 가슴에 그리움 한가득.
봄날 엽서
황사바람이 쓸어 간 하늘에 금빛 햇살 넘실댑니다 구례 산동면 지리산 들머리 고향 마을 실개천 가 산수유 어느새 여울여울 꽃불 탑니다 그대여, 지금 내가 못 견뎌 하는 건 봄이 너무 좋아서가 아닙니다 무심히 흘러가는 강물 때문도 아닙니다 그대 떠난 자리 외로 남은 차디찬 돌멩이여서도 아니고 솟구치는 그리움 탓도 아닙니다 그대여, 내가 봄밤 망연히 지새는 건 꿈의 싹 파릇이 키워내지 못하고 떨쳐 버리지 못해서가 아닙니다 가슴을 쓸어안고 피다 이우는 민둥제비꽃 어르는 봄비의 아픔도 아니고 거기 그냥 있는 산 갈마들어 보듬는 계절의 목마름도 아닙니다 그대여, 지금 내가 못 견뎌 하는 건 서천에 연기 없이 붉게 타는 지는 해의 아름다움 그대는 잘 모를 성싶어 입니다.
꽃마중
광양 다압면 섬진강변 매화꽃 소식에
꽃마중 간다 꽃마음 싣고
하늘에 산천에 꽃보다 더 고운 눈꽃 날리고
바람은 꽃잎 따다 꽃길을 연다
산발치 매화밭에 꽃바람 높고 단꿈 깊은 매화나무
잔가지 꽃눈 위에 난분분 난분분 눈꽃 진다.
쑥잎
강변에 누운 쑥대에서도 우리 님 무덤가 쑥잎에서도 쑥 냄새나요
기다리다 기다리다 사랑이 되던 쑥이여 끝끝내 그리움 부르는 몹쓸 잎이여
보면은 왠지 서글퍼져요 그윽한 향기에 눈물이 다 나요.
며느리밑씻개
돌아보면 볼수록 기막힌 일도 앙가슴 속 묻어 두고 산그늘에 홀로 앉아 숨어 짓던 한숨도 세월물로 흘러 흘러 억척스런 걸음마다 하얀 별이 흐드러지고 뭣 모른 마파람 밑 씻더만 울며 간다.
아카시아꽃 그리움
달이 떠오르면 그대는 누구 얼굴 보이시나요 별이 총총한 하늘 방황하며 누구 이름 불러 보시나요
잊으셨나요 하마 달 이울자 개구리도 잠들고 아련한 두견이 노래에 별이 쏟아지는 호숫가 손잡고 거닐다
아카시아꽃 향기 너무 좋다고 그래서 슬프다고 몰래 눈물 훔치다 들키면 그만 엉엉 울어버리던 그대
길 잃은 휘파람새 한 마리 파르르 품으로 날아들자 가엽다며 오지랖에 품고 고이 지새우던 밤 진정 잊으셨나요.
사모곡
아들 딸 맘대로 둘 수 있냐고 둘러앉은 손자들 어르며 꽃터 하나씩 팔아보라고 훤히 웃으시더니
사는 것 맘대로 할 수 있냐고 허줄히 지나는 이 손짓하여 옷가지 요깃거리 챙겨 주시며 흔흔해 하시더니
죽는 것 맘대로 안 된다고 사자 귀신 원망하며 용한 의원 예제 찾아 헤매다 삼베옷 한 벌로 떠나신 당신
어머니, 이젠 편안하신가요 하늘 세상 좋고 좋은지 한 아름 미소로 꿈길 들러 가시고.
성묘?1
설날 아침 큰집 작은집 조카들 앞세우고 장형 아우 같이 성묘 드릴 제 올 한 해도 들은 말 들은 데 버리고, 본 말 본 데 버리라 가슴은 따뜻해야 이뿐 꽃을 안는다 환한 햇살 넘실거려 돌아서는 발길 가벼운데 어머니는 서낭당 고개 다 넘도록 손사래 치신다.
그리움?2
가신 님 그리워 찾아왔더니 보리밭에 까투리 뒷산 두견이 함께 듣던 고향 노래 불러댑니다 언덕 위 찔레꽃 올해도 곱고 삐비꽃 들판을 하늘대는데 혼자 듣는 그 노래 눈물 납니다.
아픈 회상回想
그 무렵, 한밤중에 돌담 무너지더니 돼지가 제 새끼 물어 쫓더니 감나무 새순 시들어가더니
곱게 물들던 장동할머니 어지러워 돌아눕더만 바람 자듯 가셨습니다
묵정밭 일구던 돌담집 형님 실족 후 가쁜 숨 몰아쉬더만 땡감 떨어지듯 가셨습니다
축산에 꿈 걸었던 안고샅 어르신 빈 우사 우두커니 바라보더만 하늘 내려앉듯 가셨습니다.
가을이 보내는 메일
행여 보고 싶으면 오시오 이왕 오려면 이 가을로 거기 순한 앞바다 안고 오시오 출구에서 새초롬히 기다리다 눈길 마주치면 통성명하고 불붙은 산 들앉은 호변 한갓진 데로 갑시다 개켜 둔 보고자움 붉게 털어내고 잠깐 사자산 턱 밑 산방 들러 시 향香에 취해 봅시다 절집 없는 절도 둘러보고 꽃무릇 잉걸불로 그리움 사른 뒤 해 넘어가기 전 서둘러 돌아섭시다 다시 그리움 키워 살기로 하고.
낙엽 지면 생각나는 그대
얼마나 많은 밤을 뒤척였을까 하늘 끝 별을 붙들고 젖은 독백 나눴을까
잡혀가는 짐승 같은 속울음 소리 차창 밖 가을 산은 알아챘을까 바람은 새살대 달래 주었을까
하마 망각의 강 건넜을까 방천길 쓰러진 구절초 추세우며 추억의 불씨 지피고 있을까
낙엽 지면 생각나는 낙엽 따라 멀리 간 그대 깊은 속 쌓여드는 그리움.
골목길
골목길을 좋아한다 풀잎 향 진동한 들판길이나 갯바람 잇는 바닷길도 좋지만 골목길을 더 좋아한다 삽사리 종종걸음쳐 나와 얼씬거리며 정 주어 좋고 삐그시 열린 쪽문 틈으로 질퍽한 삶 엿보여 좋다 울 위로 고개 내밀고 새빨간 미소 붓는 장밀 만나 좋다 먼동 트면 집 앞 깔끔히 쓸어 이웃을 개운케하는 마음이 곱고 문 앞까지 나와 보내고 맞는 살가운 정이 있어 좋다 담장 그늘 아래 둘러앉아 피우는 얘기꽃 화사하고 개구쟁이들 가댁질 치다 쏟는 하이얀 웃음 뒹굴어 좋다 나지막한 울 넘어 흐르는 갓난애 보채는 소리 정말로 좋다.
가을
여보, 저어기 좀 보소!
버얼건 물이 올라 멍석에 널린 고추 새색시 적 당신의 갑사 치마
여보 여보, 저어기도 보소!
두웅실한 배를 부등코 감나무에 달린 호박 큰애 가졌을 적 만삭의 당신.
3. 오동꽃 피는 날
일출日出
앞냇물에 세수하고 슬그-미 일어서며 보드-득 보드-득 물기 훔치는 열일곱 앳된 큰 애기 해맑은 얼굴.
봄비
온몸이 그리도 쑤시고 어딘가 소리 없이 아파 오더니
가즉이 산 울어대는 소리 지붕 위에 바스러지는 정적
냉기 서성이는 기인 기다림의 창을 열어젖뜨리면
빼곡히 들어찬 어둠 곤한 대지를 어르는 속삭임
비가 내린다 반가운 봄비가 착하게 잠든 산천에.
격포의 봄
갈매기 개켜 올린 남녘 바람 어줍은 미소로 아장거리고
가뿐 숨 토해내던 파도 시샘으로 종잘대며 갯가에 입맞춤하면
볕 뉘 떨어지는 갯바위에 이지렁스레 올라앉은 성근진 여린 생명들
얼었던 계절 녹이며 애잔한 봄을 캔다.
매화와 산수유 입술 터졌다
처마 밑 고드름 끝에선 송알송알 땀 영그는 소리
눈 덮인 텃밭에선 쫑긋쫑긋 마늘순 기지개 켜는 소리
깨어진 얼음 사이론 낮게 흐르는 피아노 소리
강바람에 실려오는 산까치 짝꿍 부르는 소리에 매화와 산수유 입술 터졌다.
담쟁이?2
지가 무슨 변강쇠라고
두 팔이 부러지고도
담장 위에 올라앉아
앞집 큰 애기 훔쳐보네.
오동꽃 피는 날
양에밭 윗머리 푸른 산 불러냅니다 마루에 걸린 흰 구름 선뜻 올라탑니다 널바위에 걸터앉아 새소리 줍습니다 스쳐 가는 바람 자락 붙잡습니다 넓적넓적 피어난 감잎 오월 햇살 붙들고 파닥이면 씨갓 넣는 아내의 호미 앞에서 노오란 쌍나비 사랑놀이 한창입니다.
석류화 지는 해거름
뜨락 한 켠 휘늘어선 짙푸름 속에 자지러지는 선홍빛
실바람 하르르 하르르르 꽃잎을 실어 내리고
석류 꼭지 토-? 도르르 스러진 꽃잎 찾아 나서면
졸고 있던 강아지 깨갱! 놀라 깨어지는 노을.
원추리꽃
볕 뉘 받아먹고 쫑깃쫑깃 움터 올라
어느 결에 기른 청모靑毛 찬이슬로 감아 빗고
깊은 속 그리움인 양 오롯 세운 꽃대 끝에
별빛 모아 고이 빚은 금쪽같은 꿈송아리
해변의 밤
해풍은 찌든 영혼 어르다 노송 가지 끝에 종잘대고
외로움 곱게 빗질한 달 바다에 떨어져 도도하다
쏟아지는 별빛에 취해 파도는 합주를 멈추고
속객의 발자국 닦는 갯돌 이슥토록 무어라 웅얼거린다
벗들의 정리 푸르러 밤은 늪인 양 깊어만 가고
멀리서 시새우는 등대 전설의 별로 숨 쉰다.
소래 포구
가슴에 달무리 진 사람은 시흥에서 가까운 월곶 소래 포구에 한 번쯤 가볼 일이다 징검징검 걸어 나가던 물살이 깃발 달고 연줄연줄 찾는 그곳에 꼬옥 들려 볼 일이다 기차가 길 잃어 추억으로 남은 철교, 수없이 높고 낮은 어깨 스치면 안주는 거저라며 권하는 대포잔에 잠깐 마음을 축여 볼 일이다 저잣거리에 종종걸음 내려놓고 서해의 퍼덕이는 은빛 얼굴로 질척이는 장바닥 좌판 위에서 풋풋한 눈망울을 맞아 볼 일이다 졸깃졸깃 씹히는 바다 한 접시에 권커니 잣거니 소주 몇 잔으로 자욱한 먹구름도 걷어내는 포구에 한 번쯤 가 볼 일이다.
연동사煙洞寺
빠-?한 길 없다 일주문도 없다
절 집 없다 객님도 없다
마당에 나이 든 석불 하나 오백나한 기다리며 경을 왼다
잠 깬 석탑 천 년 빛 품고 사바 중생 부른다
석실 피어오르는 향연 적막 속 극락 세상 연다.
*연동사 : 담양 금성산성 초입에 위치한 국내 유일의 자연석실 노천법당. 고려시대 창건되어 수 차례의 전란 속에 몇 백 년 간 폐사 되었으나 현재 복원 중에 있음.
풍경?2
서녘 하늘가엔 눈흘기는 반달
터엉 빈 차도엔 주검 같은 적막
기다란 골목길엔 엉금 썰썰 고양이
문간에 들어서면 냉가슴 앓는 철문.
홍시
빈 가지에 대롱대롱 까치밥 하나
곧추선 허기 살째기 다가서면
돌팍 위에 파-삭 바스러지는 하늘.
가을 나그네
어이 보여드려야 합니까 이 깊은 속내를
누가 알아주겠습니까 이 영롱한 속울음을
돌아서라, 돌아서라 하얗게 손 흔들어대
스산한 가슴 한 자락 여울목에 내려놓고
처연한 바람 됩니다 가을 나그네.
바람
잎도 꽃도 다 가고 없는 들녘 허둥대다가
하늘 바라 기도하는 마른 가지에 매달리다가
묵정밭 곰삭은 쑥대밭에 곤두박질치다가
어디에도 영원은 없다고 흐르는 샛강 같은 것이라고 울부짖다가
길 잃은 짐승 되어 송림 속으로 꽁지 감춘다.
겨울 나무?1
온몸에 계절로 매단 넘치는 희열
훌훌 털어 날려 보내고 심념深念에 젖다
찾아든 삭풍 목 쉰 노래에 별이 잠들면
하늘 바라 독백으로 언 강 넘는다.
겨울산
산에 갔습니다 냅다 시루봉에 올라 솔폭 밑에서 숨 돌리고는 산자락 바라보면 한낮이 설핏한데도 이고 지고 옹옹대는 건 나뿐 머언 산정으로 눈 돌리면 자잘한 바람에 흔들리다 벌러덩 나자빠진 것도 나뿐 산도 나무도 다 털고 새하얀 숫눈밭에서 살풍을 버텨내고 있었습니다.
4. 부끄러운 날
수양산에 가다?1
턱에 차 오르는 숨 수양산 그늘에 내려놓고 하늘강물에 목 축인다 길 가다보면 눈에 헛거무가 잡힌다 애먼 데로 닿기 쉬우니 쌍초롱 켜 달아라 그늘잎에 이르는 노송 얘기 엿듣는다 손 내밀면 잡힐 듯 한 욕망의 긴긴 여정 지름길 생각 솟대 같지만 참아낸 고통만큼 끝은 번듯하리 뿌리 없는 구름 걷히자 별빛 청청히 쏟아져 안긴다.
걸레질을 하며
걸레질을 한다 사옥 계단 마음도 함께 닦으며 위에서부터 차근차근히 널브러진 흔적 샅샅이 닦아 내린다 깨끗해지는 계단같이 연신 선연해지는 심령 소롯이 차 오르는 기쁨 배인 얼룩까지 깔끔히 지우고 빨아 말간 물에 헹궈 놓고나면 마음 걸레, 어느새 유리알같이 투명해지고 한없이 작아지는 내 안의 나 오늘을 걸레질 시작한다
살아내기?1
짜고 맵고 쓰디쓰지만
꿀 꺽 받아 삼킨다
지명의 日月.
살아내기?2
사는 길은 끝까지 살아남는 방법은 납작 죽어 사는 것이라고
바람 앞에 나서서 가려운 데 찾아 긁어주고 입 맞춰 그림자로 따르다가도
어언간 각심의 울안에 서면 스르르 무너지고 마는 위선 뽀로통 머리 내미는 내 안의 나
비럭질 할 망정 다리아랫짓 서툴러 물린 밥상 차지한 오늘도 눈 들어 하늘 우러른다.
오늘 하루?2
가슴에 대못이 들어와도 벌레 씹은 상 말아야 한다 속에 방망이가 치밀어도 청강수 품어 삭혀야 한다 알몸으로 불 속을 뒹굴고 벼랑에선 대신 굴러야 한다 산을 옮기고 대낮에 별을 따와야 한다 불어 닥치는 바람머리 돌리고 바닷물 모두 품어 내야 한다 원이라면, 땅도 핥아야 한다 죽은 시늉이라도 내야 한다.
부끄러운 날?6
출근 시각 재며 뜨락 버정이다 채 햇살 놀지 않는 울 밑 웃자란 잔디 사이 풋풋한 잡풀 하나 본다 실낱 줄기 훌쩍 하늘 바라보고 꽃은 어느새 피웠는지 씨알 몇 낱 노랗게 여물인다 쑤욱 뽑아버리려 하자 지지직 뼈마디 늘어나는 소리 손 끝 발동하는 질긴 고집에 끝내, 울컥 쏟아 내는 우짖음 컴컴한 땅 속에서 얼마나 쓰디쓴 땀 흘려 버둥질 쳤으면 이리도 튼실히 욕망을 다졌을고 흘렸을 땀방울 헤아리다 빈 소가지에 갖은 여우 짓으로 알토란같은 세월 다 흘리며 안락만을 고무래질한 내게 돌멩이 날아들까 두려워 얼른 자리에 놓고 문을 나선다.
산 찾아가는 날?1
씻은 듯 잊었더냐 산이 문 열며 시답잖게 내뱉는다
무엇에 발목 잡혔더냐 으루나무가 비켜서서 쳐다본다
어디에 마음 흘렸더냐 바위가 매서운 눈길 던진다
하여간 중심 단단히 잡고 허방짚지 말라고 당부들 한다.
정도리 구계등에서
매 맞는다 발가벗고 앉아 하루에도 수천 수만 번 물매 맞는다
갯돌밭 걸으려다 부끄러워 한 발짝도 달싹하지 못한 채
밤돌 하나 집어 들고 우두커니 먼 섬만 바라보다 돌아서자 비아냥스레 등 떠미는 소리 가슴 갈기는 물매 소리.
산사 찾아가는 날?2
빠-?한 동공엔 별이 울고
자우-?한 안개 속 사려 깊은 산자락
벚나무 잇는 길등은 외롭고
채인 돌멩이에 깨어지는 적막
인적 끊긴 산사 향연에 취해 졸고
외로 선 석탑 맡아 앓는 번뇌.
산사 찾아가는 날?3
바람도 없는 가지에서 낙엽 한 잎 호수에 내려앉아 물살에 흔들리는 욕망 떠도는 하늘에 싣는다 산그림자 속 헤매이다 끝내 잡지 못한 바람 침잠해 버린 하늘마저 잃는다 잔물결에 너울지는 육신 어둑발 속 법고 소리에 훌훌 낙엽으로 털고 빈 바랑 메고 나선다.
잡풀을 뽑다
댓돌 위 올라선 풀섶에 갇혀 애틋이 낯꼴하는 빈집 어머니 떠올리며 마당에 엎디어 풀을 뽑는다 온 몸 후줄근히 땀에 젖자 맷방석만큼 환해지는 뒷자리 연신 사그라지는 마음속 잡풀 당신도 마음의 정처 없었을까 그때에 하늘 사려 물고 처연히 지심을 매셨을까 곁눈질하던 햇살 앞집 그늘 마당에 드리우고 뉘엿뉘엿 서녘으로 기운다.
화분을 들이며
천더기로 버려진 너 측은해 퇴근길에 품어 왔다 초초히 음지 양지 찾아 주고 때 맞춰 정을 챙겨 부었다 천연스레 낯설음 딛고 뜨락에 미소 담더니 스산한 바람결 속 달마중 하다 무서리 먹고 숙연해진 너 저어하지만 안으로 맞아 삼동의 긴 강 함께 넘고자 함은 좋아한다는 것은 목숨까지도 끝까지 책임져야 함을 알기 때문이란다.
집 없는 달팽이
다음 역이냐 종점까지 버텨 볼 것이냐 이슥토록 번뇌와 씨름하다 산새 울음소리에 여윈잠 깨이어 호반 산보길 나선다 아내의 침묵 속 수심 훔쳐보다 스멀스멀 자갈길 무질러 가는 집 없는 달팽이 만난다 쪼그리고 이런저런 말 걸자 어느 결에 욕망의 촉수 접더니 도르르 몸 사리고 죽은 시늉한다 물가양에 조심 옮겨 주고 수심 깊은 곳으로 눈길 돌리자 파리한 그림자 하나 어른거린다 초초한 내가 보인다.
낙엽을 밟으며
주검을 밟는다 아름답게 살더니 어느새 스르르 스러진 낙엽 하이얀 얼굴 지르밟고 걷는다 빠사삭 천지가 바숴지는 소리 내 영혼 채질하는 찬란한 노래여 결코 아파하지 말자, 끝 날까지 사랑으로 보듬자며 깊숙이 바위 하나 품고 훌쩍 바람으로 떠나 왔건만 장미꽃 꽃눈 하나 틔어내지 못하고 어스름 강둑에 가시눈으로 서서 찬 강물에 종주먹만 들이대니 어이 죄 없달 수 있으랴 사랑을 말할 수 있으랴.
아름다운 낙화를 꿈꾸며
지명이 되면 삼십 년 일손 거두고 고향 깊숙이 들어가 호수가 잘 보이는 산발 양지녘 동박새 연년이 알 치는 데다 초막이라도 한 칸 마련하여 한적히 살기로 맘먹었소
눈앞에 두어 뙈기 산밭 일구며 가축도 갖가지로 몇 마리씩 치고 틈틈이 물가장에 나란히 나앉아 좋아하는 시도 짓고 살자고 당신과도 단단히 언약하였소
허나, 눈 딱 감고 오 년만 더 벌어
철딱서니 없는 자식 졸업은 시켜 제냥으로 숟가락 들게 하자고 스스로의 약속을 뒤집은 터에 물려줄 정년까지 따라 맞춰졌으니 얼마나 잘 된 일이요
이정표 바라보면 앞길 빤히 보여 얼마큼 발잔등이 부어올라야 하야스름한 여정에 보람의 종지부를 남길지 두려워 오늘도 하루를 채질 한다오.
귀로歸路
메마른 바람 저무는 뚝방에 올라
애증愛憎의 긴긴 강줄기 거스르고 있는 억새풀
이제 해야 할 일은 죄다 비우는 것이라고
쓰적쓰적 털어 내고는 흰 계절로 채운다.
5. 행복 에감
화롯불 곁에서
새해 초일, 소망을 비는 아내의 순수 마당에 화롯불로 놓였다 솟아오르는 파아란 정열 그물그물 바람 잡고 춤춘다 어느 결에 얼얼히 취하여 냉한 손 녹인다 눈자위 쓸고 볼과 귀 훔쳐낸다 닫힌 속 문 스르르 열리자 들려오는 불의 혼령소리 제 몸 태운다.
아들 전 하서下書
한사코, 좁은 길을 가겠다는 널 좇아 삼년지교三年之敎 한 것이야 부모 도리로 알았다 끝까지 모둠발로 받치고 싶었지만 이내 손 닿지 않아 서글펐고 바등대는 모습 안쓰러워 기도만 할 뿐이었다 너는 칼 가는 바람 속에서도 스스로를 회초리질 하더니 맨발로 차돌밭 용케 건넜구나 더 큰 산 앞에 있으리니 길이 참아라 버리지 못한 것 혹여 있다면 죄다 살라버려라 더디 가는 걸음 같지만 종국은 빨리 닿아 우듬지 열매 쥘 때 오리니.
그대의 고독을 위하여
이웃도 우정도 사랑까지도 헌신짝 버리듯 내던지고 뒤돌아보지 않는데
얼굴 알아보고 눈인사 건네는 이만 있어도 얼마나 반가운 일이요
이름 기억하고 다정히 불러 주는 이만 있어도 얼마나 든든한 일이요
거처 어이 알고 청장請狀 한 장 보내 주는 이만 있어도 얼마나 즐거운 일이요
고독에 슬픈 그대여! 그대 슬픔에 아픈 나 있음이 얼마나 살맛 나는 세상이요.
세상 눈뜨기
짙어 오는 풀 뽑고 흩널린 돌멩이만 치워도 길이 빤히 보이는 것을
창을 가린 책장 옮기고 한 쪽 문만 열어도 세상이 환히 보이는 것을
집착의 요 깔고 누워 문풍지만 풀질하는 어리석음이여.
공空은 생生이다?1
하늘 부끄러이 바라보지 않기로 합니다 물소리 실은 바람도 영을 넘어옵니다 먼 산자락 바람꽃 거기서 이울 듯 돈과 빛의 슬픈 집착도 사르기로 합니다 가느다란 숨결 운명같이 움켜쥐고 홀연히 눈귀 막고 가기로 합니다 까투리 비상하는 소리에 찢어지는 적막 마른 솔잎 하나 내려앉는 산정의 한나절.
또 다른 출근
귀가 새파랬을 적 첫 출근의 벅찬 감격 떠올리며 지명의 한낮이 기운 몰골이 면접도 이력서도 한 장 없는 새 터전으로 나선다 번질번질 다림질 된 와이셔츠에 때때로 바꾸어 매던 넥타이도 버리고 자유로움 하나 걸치고 간다 손가방에 시집 한 권 메모지와 볼펜 하나 달랑 챙겨 들고 걸음걸음을 느긋이 헤아려도 좋고 찻길이 막혀도 여유롭다 문은 사방으로 열려 있고 일면식 없었어도 모두가 반갑다 꼭 지킬 건 흠뻑 땀에 젖으란다 솔잎향 실어오는 바람에 취하고 산자락 타고 드는 산그늘에 안겨 겹겹한 그간의 고뇌 녹여라 한다.
행복 예감
곰곰이 생각치 않아도 낯 들고 살 수 없는 부끄럼 많고 일일이 따져보지 않고도 드러난 죄 헤아릴 수 없는지라
가시관 쓰고 옹아리 앓느니 차라리 죽어 진토 됨이 마땅하나 질긴 것이 목숨인지라 명줄 세월강에 묻고 버텨 왔지만
동기간에는 다정다감한 형제요 이웃들은 잔정이라도 나누자 하고 친구들 몹쓸 놈이라 침 배앝지 않으니 얼마나 감사 할 일인가
아직도 육신 멀쩡하고 욕망은 끓어 마음은 앞산이라도 옮길 것 같으나 피고 질 때를 알아 지키자고 꽃자리 밤사이 잎새에게 내주고
산 찾으면 둘러서서 반기고 하늘 더없이 높고 바람 서늘하니 이제는 찾아올 것 같은 행복 예감에 마음은 새털같이 창공을 난다.
어느 여름날?1
벗님네들 얼굴 한 번 볼 양으로 너릿재 새털같이 넘었지요
술 익는 냄새 좇아가다 농주 한 통 실었지요 도갓집에서
주춧돌 놓일 날 기다리는 계절 엉클어져 잔치 마당 한창이라
떡느릅나무 그늘 깔고 둘러앉아 마악 타는 목 축이려는데
건너 편 앞산 아는 시늉하여 어서 오라 손짓해 옆자리 내주고
건하게 들었지요 너나들이해가며 바람도 함께 취해 따다바리고
설움에 겨운 해 버얼거니 눕자 텃새들 시나브로 둥지에 모여들어
흥얼흥얼 어둑발 붙들고 넘었지요 어느 여름날 그 하루 햇살 좋던 날.
어느 여름날?2
갈맷빛 동산에 계절이 무르익고
심곡에 열린 가슴 맑은 물 지즐이니
한 마리 꽃나비 되어 시심에 젖는다.
갈매 치마 저고리 덧입은 시 동산
고운 님 노래에 만화가 찾아드니
바람도 시새워하다 시 향香에 취한다.
산중에서 받은 편지
남새밭 푸성귀 여기저기로 퍼져나가 달래 고사리 더덕 천지가 나물이라고!
우리 속 가축 이 들 저 골로 뛰쳐나가 토끼 까투리 고라니 우글대는 것이 짐승이라고!
참 잘된 일일세 가꾸고 돌볼 필요도 없다니 찬이슬 먼 별빛 석간수에 산열매 먹고산다니
여보게 친구! 머루 다래주 익거들랑 이참엔 꼬옥 잊지 말고 나도 좀 불러주게나
어우렁더우렁 산보길 나물 캐고 사냥도 하여 거나하게 취하고 두투머니 정분 쌓아보게.
미움
마음의 뜨락에 가시나무 키우는 일입니다 싹둑 잘라내 살라버리지 않으면 서슬 퍼런 청룡도 됩니다 도사리고 있다 가차없이 찌르고 찢어대 죽을 영금 보고 앞산이 뒤집힙니다 끝내는, 시공도 없이 도져 스스로를 태질하고 세상 밖에 밀뜨려 남세스럽게 합니다 .
산을 바라봅니다
왠지 모르게 산이 그리운 날 있습니다 버릇처럼 머언 산 바라볼 때 있습니다
욕망의 구렁에서 허우적이다 한없이 내가 부끄러워질 때는 산을 바라봅니다 산같이 살고파
오뇌의 동아줄에 꽁꽁 옥죄여 한없이 내가 나약해질 때는 산을 바라봅니다 산같이 살고파
세월의 불씨 노을로 사르며 한없이 내가 허망해질 때는 산을 바라봅니다 산같이 살고파.
제야의 세목洗沐
묵은 해 꼬리 감추는 섣달그믐 세파에 오염된 영육을 씻어낸다 표피에 엉기어 땀의 분비 경멸하는 나태의 각질을 벗기고 이해득실 따져 입과 눈귀 속여 대는 구린내 밴 양심 우려내고 고열에 녹이고 땀으로 걸러 세포 사이 증오의 홀씨 녹여낸다 얼굴과 심장의 검은 털 밀고 뇌 속 구태의 녹까지 벗겨낸 뒤 냉수에 헹구고 거울 앞에 서면 생기 넘치는 투명한 영혼 짐 벗은 아침 같은 마음이어라 옷까지 정갈히 갈아입고 나니 심금 울리는 제야의 종소리 새해 새날이 활짝 열리고 새 부대에 간간한 꿈 장만한다.
또 한 해를 위하여
한 삼십 년쯤 흘러 길을 만들었을까 한 오십 년쯤 불어 방향을 잡았을까
들 가운데 굽이쳐 흐르는 저 강 흔전만전 찾아드는 이 바람
해가 뜬다고 달리고 진다고 누웠을까 꽃이 좋아하여 웃고 싫다해 서운했을까
맵고 쓰고 짜고 떫고 신 것까지도 운명으로 알고 꿀꺽 넘겨 보지만
묻어 둔 괴롭고 슬픈 기억이 하도 시려 뾰로퉁 돌아앉아 발등을 찧다가도
흔적이라도 남기려면 이 길 뿐이라고 연륜의 거울 꺼내 헤며 길을 독촉한다.
새해 기도
밝아오는 새해에는 마음속 바위 하나 품게 하소서, 모진 세파 몰아쳐도 굴하지 않고 앞만 보고 다소곳이 살게 하소서
밝아오는 새해에는 마음속 다순 눈 뜨게 하소서, 그릇된 편견 떨쳐 버리고 속내 읽고 다독여 살게 하소서
밝아오는 새해에는 마음속 호수로 채워 주소서, 굴욕과 가위눌림 안으로 삭여 화평과 평안 안고 살게 하소서
밝아오는 새해에는 마음속 촛불 하나 켜게 하소서, 질투와 외면의 빗장 살라버리고 축복을 기도하며 살게 하소서
밝아오는 새해에는 마음속 등불 하나 밝혀 주소서, 음울의 터널 허위허위 뚫고 광명과 진리 좇아 살게 하소서.
발문
시와 고향의 만남 -삶의 근원을 찾는 생명의식
문병란(前 조선대교수, 시인, 서은문학회 명예회장)
1
모낸 논다랑치 불 꺼진 외딴집, 쑥불 타는 마당 한 켠에 누런 황소 한 마리 누워 어둠 씹어먹고 편히 쉬는 밤
접동새만 검고 깊은 뒷산에서 밤을 지새기 외로워 처량한 울음으로 고향 여름밤을 지키고 있다.
-〈고향의 여름밤〉전문
1999년 20세기가 끝나갈 무렵 펴낸〈잎새에게 꽃자리 내주고〉1)라는 첫 시집에 실린 고향 시이다. 2연 11행 30여 단어로 된 서정시이다. 함축도 함축이지만 아직 오염되지 않은 용추산 영산강 시원지 산골물 만큼이나 맑은 서정이 쇄락한 정감을 우려내고 있다. 그가 도시에 나와 살면서도 고향 가까이 맴돌며 쑥불 타는 내음새나 생솔가지 군불 지피는 취미, 장독대 소박한 세간, 새김질하는 황소, 산중의 비련가수 접동새 울음을 마음에 지니고 사는 것은 예삿일이 아니다. 누구나 가진 회향의 정이나 귀소본능2) 그런 것보다 거기서 어떤 생명의 근원을 놓치지 않으려는 끈질긴 생명의식이 아닌가 여겨진다. 그는〈山中에서 온 편지〉라는 시에서도「올 겨울 길 열리면/ 재 너머 추월산 뒷켠/ 내 집 한번 찾아주게나.」이렇게 은근히 유혹하는 서간체 형식의 시에서도 그의 삶이 도시체질이 아님을 밝히고 있다. 이러한 그의 시적 발상지 고향의 향기는 7년 지난 지금에도 변함이 없고 다시 버리고 온 고향으로 돌아갈 요량으로 궁리하고 있음이 근작 시 곳곳에 나타나고 있다.
그래도 향리 쪽에다 너와집이라도 한 칸 마련하여 시詩와 고즈넉이 사는 것이 제일 좋을 것 같아
호젓한 산섶 양지바른 데 미리 봐두고 싶어 아내와 여기저기 둘러보다 친분 있는 몇몇 만났더니
이젠 다 망해 들어오는 갑다고 비아냥거리고 숨어 들어오는 게 틀림없다고 수런댄다는 소문 자자하네
애년 넘도록 호박꽃 소망 고이 품고 고향 하늘 부끄럼 없이 우러르며 살아 온 나를 누가 알기나 할까.
-〈뜬소문〉전문
이 시야말로 그의 귀향의지의 확징이 아니고 무엇이냐. 노는 육신은 도시에 살아도 마음은 그의 허물어져 가는 생가에 있으며 사시사철 그는 고향 쪽을 바라보며 사는 게 너무도 분명하다.
강담에 기대인 철문 밀치자 꽃초롱 밝혀 든 참깨 두엄자리에 나와 멀끔히 쳐다본다 주인 영감님 낮잠 자다 권하는 때에 절은 마루턱에 그리움 걸치면 발길 뜨음한 마당 여기저기에서 돌부리 수군댄다
-〈생가 찾아가던 날〉전반부
이 시에서도 그의 숨은 생각 숨은 계획은 여지없이 들통나고 있다. 이러한 그의 숨은 생각은 근작시 도처에 중심 정서가 되어 있고 그의 시적 근원이 두고 온 산골 마을 고향임을 쉽사리 짐작하고 남는다. 그렇다면 그의 속마음 귀향에의 의지는 무엇일까. 우선 그가 생계를 유지하고 있는 직장이나 삶의 현장인 도시라는 곳이 진실이나 생명이 뿌리내릴 곳이 아니요, 허위와 반생명적 요소로 가득하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다. 참다운 삶을 갈구하는 적어도 시인이라면 이 허위와 반생명적 세계에서 삶을 영위하고 시를 쓴다는 것은 어쩌면 자기기만이나 타의적 부평초의 삶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도시에서 돈을 벌고 그 돈으로 도시 밥을 먹으면서도 그의 시는 온통 흙내음 산소리 새 소리로 가득하고 식물성이거나 향토성이다. 체질도 느껴지지만 그의 의도나 지향하는 바가 오로지 진실이 있는 삶의 근원을 찾아 숨쉴 곳을 찾다가 보니 저절로 시정이 그 쪽으로 쏠리고 있음을 본다. 그의 시적 감동이나 독자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매력 또한 우리 모두 고향 상실자의 공통점에서 그를 따라 고향의 산마을을 맛보게 피는 기쁨을 나눈다. 비슷비슷한 생각과 사연으로 부평초 도시생활에 쩌든 우리들에게 그의 시는 청량제가 아닐 수 없다.〈꽃마중〉〈석류화 지는 해거름〉〈가을이 보내는 메일〉〈자작골 봄밤〉직접 제목이 되었거나 소재로 취택하고 있는 대부분의 시적 발상이 고향과 자연 향토에 근원을 두고 있다. 세청 자연파라 했던 청록파3) 이후 많이 노을 핀 도시의 탁한 공기와 변화무쌍한 시대적 질곡 속에서 많이 이지러진 이 땅의 서정시의 원류를 상기시키는 노의 향토적 멋과 그리움들은 매우 귀한 몸짓으로 여겨진다. 다 털어 내고 라도 이만한 생동감이라면 이 시집 간행의 의미는 매우 크다고 생각한다.
2
요즈음???????????경제의 거품???????????이 바지면서 한국경제의 모순이 드러나고 있다. 양극화의 심화, IMF 이후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차관, 부동산 투기의 망국병, 곰곰이 생각하면 발붙이고 사는 것이 무서우리 만큼 그 허위의???????????거품???????????이 온 세상을 뒤덮고 있다. 그런데 그 거품이 어찌 경제뿐이겠느냐. 각계 각층 모든 분야에 이 거품병은 만연되어 있고 문학작품에도 이 거품에 비유할???????????허위???????????와 저질스런???????????타락현상???????????은 만연되어 있다고 생각된다.4) 강 詩人의 시를 보면서 초기 시에서도 그랬듯 그 간결한 시적 구조나 운율은 신시 100년의 비게살로 인하여 많이 산문화 되고 거칠어진 한국 서정시의 불감증을 걷어낸 듯한 맑음이 있다.
광양 다압면 섬진강변 매화꽃 소식에
꽃마중 간다 꽃마음 싣고
하늘에 산천에 꽃보다 더 고운 눈꽃 날리고
바람은 꽃잎 따라 꽃길을 연다
산발치 매화밭에 꽃바람 높고 단꿈 깊은 매화나무
잔가지 꽃눈 위에 난분분 난분분 눈꽃 진다.
-〈꽃마중〉전문
전혀 가성이나 꾸밈이 없는 것은 아니나 그 시적 가락이나 형태미가 말쑥하여 눈길을 끈다. 흙냄새 두엄냄새보다 신지식인 냄새가 조금은 염려되지만 언어의 탁마나 시적 형태미의 유미적 배려는 그의 발전적 충분조건의 모색으로 보여진다. 꽃이라는 말이 10회나 쓰인 것은 유미주의적 발상이며 의도적이다. 첫시집의 소박한 시상이나 패턴, 물씬 풍기는 시골 냄새에 비하여 도시생활의 기교가 스며든 언어표현이5) 조금은 마음에 걸리기도 하지만 시가 길어지고 산문성이 도입된 것은 사업사회가 된 현대적 환경에 대한 자기 방어적 태도로 보인다.
넷째야! 동네 경사가 났다 아랫고샅 너의 큰집 형네 그 순하디 순하고 일 잘하는 점순이 산고의 울부짖음을 앞산이 다 쩌렁쩌렁 따라 울더니 순산했나 보구나, 또 몇 배 째인지 모르겠다만 잠잠해졌다 아까부터 넷째야!
-〈동네 경사가 났다〉전반부
이 말은 송아지 분만을 알리는 돌아가신 아버지의 말씀을 추억하는 인용 부분이다. 이것은 아버지 집에서 자라던 유년시절의 고향 풍경으로 그날의 순후한 인정미 넘치는 농경사회는 이제는 사라지고 없어졌다. 이른바 농촌해체, 그 해체의 주범 침략자는6) 누구인가. 제국주의의 앞잡이 자본을 핀 도시인 것이다. 강 詩人이 돌아가고자 하는 고향, 기실은 도시생활에서 얼마쯤의 자본이 축적되면 전원주택을 짓고 살고 싶은 그 욕망인지 모른다. 이미 고향은 죽었고 도시의 침략을 받아 망한 지 오래고 그 인정이란 것 풍류라는 것 어쩌면 모두 시인의 추억 속에 있은 유년기의 아련한 향수일 것이다. 1927년에7) 이미 정지용이〈향수〉라는 시에서 읊조린 그 얼룩배기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질화로, 짚벼개, 말달리던 밤바람 소리, 발 벗은 누이, 서리 까마귀 우지짖는 지붕, 모두 노래에나 남아있는 그리움인 것이다. 강대실 시인의 첫시집〈잎새에게 꽃자리 내주고〉의 주조를 이룬 귀향사에서 볼 수 있었던 흙냄새 풀냄새가 많이 가시었거나 그 내음이 달라진 것은 두엄보다는 인공적 비료나 농약재배의 농촌의 변화뿐만 아니라 강대실 시인의 도시적 정서가 그 유년기의 향토적 그리움을 조금씩 도시풍으로 윤색하고 있는 증거이다. 평자의 입장에서 볼 때 1시집의 시에 비하여 어느 것은 발전했으나 어느 것은 뒷걸음치고 그 정서적 취향도 변화인지 변질인지 구분이 잘 안 서는 대목이 있기도 하다. 금융기관에서 퇴직한 후, 어느 건설 회사의 사장 자리도 지내고 있는 터이니 그가 담양의 산골사람 그대로이겠는가. 시인 자신도 변화는 불가피 했을 것이다.
가슴에 대못이 들어와도 벌레 씹은 상 말아야 한다 속에 방망이가 치밀어도 청강수 품어 삭혀야 한다 알몸으로 불 속을 뒹굴고 벼랑에선 대신 굴러야 한다 산을 옮기고 대낮에 별을 따와야 한다 불어닥치는 바람머리 돌리고 바닷물 모두 뿜어내야 한다 원이라면, 땅도 핥아야 한다 죽은 시늉이라도 내야한다.
-〈오늘 하루?2〉전문
몇 년 사이지만 많이 달라진 것을 직감할 수 있다. 위의 정서는 바로 삶의 싸움터 도시의 정성이다. 다 무너져 가는 버리고 온 낡은 생가로 돌아가기엔 노는 이미 도시인이 되어가고 있다는 증거이다. 고향에 가더라도 이른바 전원주택 그 꿈이 아닐까.8)
상수리 한 톨 투두둑 내려앉는 소리에 멧새 한 마리 찬 공기 가르며 잊었던 길 찾아 나서면
반가이 주어든 추억 한 알에 연방 움터오는 빛바랜 시절 잔디 위에 뒹굴던 친구는 고향에도 없어라
-〈羊角山 산보길〉전문
위의 시는 제1시집에 실린 시이다. 이미 현실이 아닌 유년기의 추억을 노래했지만 그 언어엔 인정과 향토적 흙내가 묻혀 있다. 서정시의 맛이나 운치가 있었다. 비록 일시 방문자로서 산책이긴 하나 그리움이 있었다. 상수리는 시의 맛을 내는데 부족함이 없는 향토적 사물이었다.
씻은 듯 잊었더냐
산이 문 열며 시답잖게 내뱉는다.
무엇에 발목 잡혔더냐 으루나무가 비켜서서 쳐다본다
어디에 마음 흘렸더냐 바위가 매서운 눈길 던진다
하여간 중심 단단히 잡고 허방짚지 말라고 당부를 한다
-〈산 찾아가는 날?1〉전문
몇 년 사이 아니지만 산의 벗들이 이미 도회지 물든 자시에게 던지는 눈총이 정답지 않고 냉차다.???????????시답잖다??????????????????????비켜서서??????????????????????매서운 눈길???????????은 예년의 자연이 보내준 정겨움과는 대조적이다. 그만큼 그는 등산객이 되었지만 산사람이기 보단 산을 괴롭히고 오염시키는 도시인의 레저붐에9) 편승했음을 느끼게 한다. 이는 자연 그 자체의 변화이기보다 어쩌면 자신의 자격지심인지도 모른다. 그가 최초의 시심으로 돌아가 자연과 고향을 다시 찾아 생명의 근원, 뿌리를 뻗을 흙의 품속 생명의 원천을 다시 찾아야 할 것이다.13)
3.
말바우 시장은 신인의 고향 가까운데 있는 토속적 상품 향토적 내음으로 가득한 재래시장이다. 거기 가면 바로 고향을 만나듯 다정하고 가난한 사람과 그의 식성에 맞는 푸성귀며 신토불이식품을 대할 수 있다.〈말바우 시장 1, 2〉두 편은 그가 방황이긴 해도 그의 천석고황이나14) 귀소본능을 달랠 수 있는 탈출구이다.「하늘 허탄해/ 일손 무거워지는 날엔/ 저린 그리움 새떼 같이 몰려와/ 말바우 저자 거리로 나선다/……/ 현란한 네온의 길섶/ 길나무 그림자에 밟혀/ 그믐처럼 졸고 있는 고향을/ 꿈 한 동이 땀 한 섬/ 휜 허리 짊어지고 살다/ 별이 되는 어머니를」다시 만나는 날이다.
북적대는 틈새에 발붙이자 가리사니 없는 다섯 자식 버리고 낙향하여 움막 친 꺽다리 영감 폭설에 망조든 하우스 농사 멈다쉬다 찾아드는 농촌 버스 산덩이 조합빛에 신발끈 동여맨 주막집 이야기가 소곤거린다 망령든 노모 수발에 장가들 나이 흘러버린 이장 구제역에 고삐 놓친 외양간 더위와 추위에 쓸어버린 닭과 오리 달포 전 저승 열차 올라 탄 방앗간집 이야기가 퍼덕거린다 내 고향 상골 신음 소리가 파장 막걸리에 취해 눈물 자국 위를 절뚝인다.
-〈말바우 시장?2〉전문
고통뿐인 고향 소식이지만 그의 마음의 거처를 찾은 것이다. 막연한 관념으로서가 아니라 현실적 사실로써14) 그 어머니와 아버지 이웃 친구 모두를 만난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그 시적 지향점이며 사랑의 대상이 아니겠는가. 할 일을 알았고 해체된 고향의 병처를 알았다면 그에겐 과제가 주어진 것이다. 향수의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싸움의 현장으로서 생명의 고향 지키기라는 시적 사명이 부여된 것이다.15) 그리하여 그는 과감하게 도시의 때를 떨쳐버리고 자연으로 돌아가 생태계나 환경을 지키는 생명문학으로 발전시켜야 할 것이다 .거기서 고향을 전국적으로 확산시켜 공간적 개념을 극복함으로써 이 땅의 자연 살리기 생태계 지키기 민족 민족문화 지키기라는 무한한 가능성을 개척해야 할 것이다.16)
가슴에 달무리 진 사람은 시흥에서 가까운 월곶 소래 포구에 한 번쯤 가볼 일이다. 징검징검 걸어나가던 물살이 깃발 달고 연줄연줄 찾는 그곳에 꼬옥 들려 볼 일이다 기차가 갈 길 잃어 추억으로 남은 철교, 수없이 높고 낮은 어깨 스치면 안주는 거저라며 권하는 대포잔에 잠깐 마음을 축여 볼 일이다 저잣거리에 종종걸음 내려놓고 서해의 퍼덕이는 은빛 얼굴로 질척이는 장바닥 좌판 위에서 풋풋한 눈망울을 맞아 볼 일이다 졸깃졸깃 씹히는 바다 한 접시에 권커니 잣거니 소주 몇 잔으로 자욱한 먹구름도 걷어내는 포구에 한 번쯤 가볼 일이다.
-소래포구〉
언어의 운행이나 구성미가 새로운 경지를 열고 있어 그 시적 수준이 상승하고 있을 뿐 아니라, 고향에의 확산으로 보아 그의 시적 스케일이 이른바 전국구로 발전하였다. 담양 추월산 밑만 찾아가 향수를 반추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의 눈과 귀는 이 땅의 곳곳에 숨어있는 생명의 고향, 아름다운 전원을 찾아내고 있다 .비로소 그는 그의 시안(詩眼)을 담양이나 전남에서 이 땅의 모든 향토로 확대시킨 것이다.17) 그가 고향에 머물면 시가 궁색해지고 좌절감에 빠지는 경우가 많다.「굴뚝새 포로롱 달아나는/ 어스레한 헛청에/ 거미줄 어지럽다/ 등태 흘린 빈 지게/ 주인을 기다리고/ 날근날근한 덕석. 외로 누워 잠이 깊다」이 구절에 의하면 이미 고향은 죽어있다. 죽은 고향에는 이미 희망이 없다. 같은 시라도 고향이 아닌〈해변의 밤〉이라는 시에선 생명감이 넘친다.「해풍은 찌든 영혼 어르다/ 노송 가지 끝에 조잘대고/ 외로움 곱게 빗질한 달/ 바다에 떨어져 도도하다」그야말로 도도한 시상이 활달하고 막힘이 없다. 그의 고향을 전국으로 확대하여 그 생명감을 민족시의 차원으로 승화시키길 권하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격포의 봄〉「갈매기 개켜 올린/ 남녘 바람/ 어줍은 미소로 아장거리고/ 가쁜 숨 토해내던 파도/ 시샘으로 종잘대며/ 갯가에 입맞춤하면 볕 뉘 떨어지는 갯바위에/ 이지렁스레 올라앉은/ 성근진 여린 생명들/ 얼었던 계절 녹이며. 애잔한 봄을 캔다」말들이 영롱하게 살아있고???????????이지렁스레???????????같은 고유어의 구수한 뉘앙스가 장인적 빼어난 솜씨를 엿보게 한다. 고향 상실의 아픔에서 그는 확대한 국토 산하에서 제2의 고향을 얼마든지 찾아내고 있음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4.
〈새해 기도〉〈행복 예감〉〈산중에서 받은 편지〉는 괄목상대할 그의 심중을 엿보기에 이색적인 작품이다. 비교적 호흡이 짧고 단시형태인 그가 이 3편의 시는 비교적 장시에 속한 것도 그의 시적 역량을 평가하기에 주목할 만한 작품이다.
밝아오는 새해에는 마음속 바위 하나 품게 하소서 모진 세파 몰아쳐도 굴하지 않고 앞만 보고 다소곳이 살게 하소서
-〈새해기도 1연〉
6연으로 된 이 시에선 새해 아침의 다짐으로써 그의 생활자세를 보여준다. 기도란 반드시 신에게만 드리는 것은 아니다. 일종의 자기 다짐인 것이다.
아직도 육신 멀쩡하고 욕망은 끓어 마음은 앞산이라도 옮길 것 같으나 피고 질 때를 알아 지키자고 꽃자리 밤사이 잎새에게 내주고
-〈행복예감 4연〉
제1시집의 표제였던「꽃자리 밤사이 잎새에게 내주고」를 되풀이 하였는 바 이는 그가 겸양의 덕을 삶의 자세로 취하고 있음을 과시하고 있다.
여보게 친구! 머루 다래주 익거들랑 이참에 꼬옥 잊지 말고 나도 좀 불러주게나.
-〈산중에서 받은 편지 4연〉
친구와 더불어 전원생활에의 꿈을 포기하지 않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가 장차〈귀거래사〉를 읊조린 도연명의 길을 꿈꾸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18) 1999년 제1시집의 시들은 순수하고 풋풋하여 인정미가 넘치고 거의 무기교의 기교라 할만큼 소박미 진솔미로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작품들은 완성도나 시적 충분조건을 다 갖추었다고 말하기는 어려웠다. 금번 이 시집에선 예술성이나 언어 표현면에서 진일보하여 그 완성도가 괄목상대할 만하다 하겠다.
주검을 밟는다 아름답게 살더니 어느새 스르르 스러진 낙엽 하이얀 얼굴 지르밟고 걷는다 빠사삭 천지가 바숴지는 소리 내 영혼 채질하는 찬란한 노래여 결코 아파하지 말자, 끝날까지 사랑으로 보듬자며 깊숙이 바위하나 품고 훌쩍 바람으로 떠나 왔건만 장미꽃 꽃눈하나 틔어내지 못하고 어스름 강둑에 가시눈으로 서서 찬 강물에 종주먹만 들이대니 어이 죄 없달 수 있으랴 사랑을 말할 수 있으랴.
-〈낙엽을 밟으며〉전문
테크니샹을 과시하는 모더니즘 수법에 의한 그 능숙성을 본다. 거침없는 그의 메타퍼 만드는 솜씨는 그가 이미 언어로써 장인(匠人)의 경지에 이르고 있음을 보여준다.???????????낙엽???????????을 소재로 한 명시가 많고도 많지만 경쟁대열에 끼어도 아무 손색이 없는 쾌작이 아닌가 한다. 시는 경이감(驚異感)의 발견이라고 말하였는바〈집 없는 달팽이〉는 또 한번 경탄할 기회를 주었다. 우기때 비가 뜸한 경우 흔히 집 없는 민달팽기가 산길이나 노변에 온 몸으로 포복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스멀스멀 자갈길 무질러 가는/ 집 없는 달팽이 만난다/ 쪼그리고 이런저런 말 걸자/ 어느 결에 욕망의 촉수 접더니/ 도르르 몸사리고 죽은 시늉한다/ 물가양에 조심 옮겨주고/ 수심 깊은 곳으로 눈길 돌리자/ 파리한 그림자 하나 어른거린다/ 초초한 내가 보인다.」관찰력은 곤충학자의 경지, 미물에 베푼 자비는 고승의 경지, 시인은 도인이 될 수 있으나 도인은 시인이 되지 못한다 했다.20) 향토애건 국토애건 고향 사람이건 시인은 결코 계몽자도 과락자도 캠페인 홍보자도 아니다. 무엇을 하던 시인은 시를 무기나 담보로써 교훈도 주고 쾌락도 주고 제반 주장과 발언 현실참여를 한다.21) 시인으로서 기본기를 갖추지 못했을 때 그것은 아무런 효과를 얻을 수 없다. 말을 아낄 줄 모르는 시인은 파산한다. 시인에 있어 말은 재산이다. 그 재산을 낭비한다면 파산할 것은 당연한 이치다. 강 詩人의 시적 장점 중의 하나가 말을 아낄 줄 아는 간결한 표현이다. 제1시집에 비하여 말이 많이 늘어났다. 다소 헤프게 쓰였다는 얘기가 된다. 말은 공것이니 아낄 것까지는 없을지 모르나 말이 늘어나면 산문화의 위험이 따른다. 자기 장점은 지키고 단점은 지양 극복하여 시공을 초월하여 퇴락하지 않는 서정시를 써야 할 것이다. 「산문은 도보(徒步)요, 운문은 무도(舞蹈)」라 하였다.22) 무도는 실용성이나 의미 전달의 목적성보다는 흥취나 즐거움을 중시한다. 할 말을 다하지 않고 함축과 암시로 독자의 몫을 남겨 여백과 여운을 풍겨야 한다.23) 시나 시집이 문화적 장식품이기 보다 그 삶의 현장을 지키는 싸움의 무기가 되어야만 그 진정한 사명감의 발로가 될 수 있다는 주문을 하면서 이 논고의 끝을 장식한다. 더욱 정진하여 자기 몫을 감당하는 뚜렷한 목소릴 지니기 바란다.
1)강대실 시인은 1999년 9월 15일자로 제1시집을 도서출판 시와사람에서 시와사람시선7(강경호)로 간행했다. 정소파시인의 발문, 김용관 시인 강경호 시인의 표지 글이 있다.
2)歸巢本能, 많은 시인들이 남긴 명시 중에 고향을 소재로 한 시가 많다. 도연명, 최치원, 휄데를린, 정지용등 명시를 남겼다.
3)일제 말기 등장한 박목월, 박두진, 조지훈은 문장지에 정지용 추천으로 등장, 당시 시대상에 따라 우일문학적 성격을 띠었으며, 광복 후 3인 시가집〈靑鹿集〉을 발간 청록파, 자연파라 하였다.
4)포스트모더니즘을 필두로 포르노 그래피 시대를 맞아 모더니즘의 장점보다는 대중 추수주의적 선정문학과 상업주의적 베스트 셀러는 퇴폐문학 향락문학을 양산하고 있다.
5)예술이나 문학에서 technic이나 technician(기교파)은 반드시 좋은 말로 쓰이지 않는다. 지나친 기교는 오히려 그 진실성을 감소시킬 우려가 있다.
6)제국주의의 침탈은 후진국을 식민지화시켜 착취하듯, 도시중심의 산업구조는 농촌을 그 경제적 침략 대상으로 지배하여 마침내 해체시키고 공업도시로 그 인력을 흡수해 간다.
7)정지용은 1927년 조선지광이라는 잡지에〈향수〉라는 시를 발표한다. 내용은 매우 전근대적 농촌이지만 세련된 언어표현으로 애송되었고 작곡되어 노래로 불린다.
8)도시에서 운이 좋아 한 몫 잡아(부동산 투기 등)돈을 벌면 고향에 가서 전원주택을 짓고 연금이나 저축한 돈으로 잘 살 수 있다. 이는 진정한 의미의 농촌 귀의는 아닐 것이다.
9)주말농장이니 휴양림이니 모두 다 자연보호나 농촌사랑은 아니다. 도시인의 소비를 부추겨 재화를 노리는 장사수단이다. 도시인의 레저붐이 바로 상업주의적 의도라고 할 수 있다.
10)자연으로 돌아가라(루소) 인류문화가 병들 때마다 인간이 외치는 구호이다. 자연파, 생명파, 전원파들은 모두 자연에 돌아가 병든 문학을 구원받고자 했다.
11)泉石膏?(천석고황)고황은 낫기 어려운 병인데, 자연을 떠나서는 살 수 없다는 비유로 사용되었다.(하물며 천석(자연))고황을 고쳐 무삼하리요? 등…….
12)향토나 농촌은 결코 선경이 아니다. 고통스런 삶의 현장이다. 농촌의 비명소리를 듣지 못하고 산도화 두어송이 벙을이는 곡식의 관조는 진정한 고향 사랑이 아니다.
13)시적 사명이란 도피나 은거가 아니라, 현실참여(engagement)이다. 농촌이나 전원 어디가도 은일주의(Decagement)는 가능하지 않다. 현실은 모두 일종의 싸움터이다.
14)고향사랑은 민중문학 민족문학 분단극복문학으로 발전시켜야한다. 시인은 자연의 품에 가서 숨기보다 오염시키는 외래문화와 경제침략에 맞서 싸워야 할 것이다.
15)강대실 시인이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더라도 그가 서있는 현장에서 확대된 고향관으로 국토산하 사랑 내 땅 내 민족 지킴이로 거듭나는 민족시의 길을 열 것을 권장한다.
16)이미 전장에서 언급했지만 전근대적〈귀거래사〉는 별로 의미가 없다. 전원주택의 안일주의보다는 이땅의 국권회복 민족통일 그 의식이 더 중요하다.
17)technician : 기교파 기교주의자를 지칭한다. 흔히 모더니즘 시인들이 감각파로서 기교를 사용할 때 쓰는 말로 반드시 긍정적인 표현은 아니다.
18)도인(道人)은 시인이 될 수 없으나 시인은 도인이 될 수 있다. 도인은 도밖에 모르나 시인은 시로써 노래하여 즐겁게 하며 가르치기 때문이다.
19)시인의 현실참여는 삶을 영위하는 자로서 당연하다. 다만 시의 무기화에 있어 시는 시가 되어 있어야지 시는 결코 지식이나 웅변이 아니다. 시는 시여야 한다.
20)프랑스의 상징파 시인 발레리의 말이다. 도보는 목적지에 가기 위한 수고이다. 무도(Dance)는 춤으로서 즐거운 유희이다. 시는 실용성이기보다 비실용성이다.
21)含蓄, 暗喩, 餘白, 餘韻등 metaphor라는 것은 겉에 드러나지 않고 내면에 지니고 있는 아름다움이란 뜻으로 비실용적인 흥취나 재미가 중시되는 시의 표현에 많이 사용된다. |
출처: 月靜 강대실 시인의 블로그 원문보기 글쓴이: 월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