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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토퍼 콜럼버스
영어: Christopher Columbus, 이탈리아어: Cristoforo Colombo, 스페인어: Cristóbal Colón
(1451년 경 - 1506년 5월 20일) 이탈리아의 탐험가이자 항해가이다.
1451년 이탈리아의 해안 도시 제노바에서 부유한 양모 직조공의 아들로 태어났다. 22살까지 제노바에 살았던 콜럼버스는 지중해를 통해 동양과 해상 무역을 하는 무역선을 보며 동양에 대한 탐험의 꿈을 키웠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해안 도시 태생이기 때문에 일찍부터 항해에 종사하였다고 하며, 천문, 지리학자들과의 잦은 교류로 (지구가 둥글기 때문에) 서쪽으로 가면 인도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수학자 토스카넬리에게서 지도(地圖)를 구해 연구한 결과 서쪽으로 항해하여도 인도에 도달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는 설도 있다). 1477년, 제노바를 떠나 포르투갈의 리스본에 정착하였다.
그는 1484년 포르투갈의 왕 주앙 2세에게 대서양 항해 탐험을 제안하고 지원을 요청하였으나, ring of king 루트를 준비 중이던 왕이 허락하지 않자, 에스파냐로 갔다. 당시 에스파냐는 카스티야와 아라곤으로 구분되어 있어, 카스티야 여왕 이사벨 1세와 아라곤 왕 페르난도 2세가 카스티야를 공동 통치하고 페르난도가 아라곤을 단독 통치하는 상태였다. 정치, 지리, 종교적 통일을 이룩하고 국가의 비상을 꾀하던 이사벨과 페르난도 부부는 해외 진출에 관심을 갖고 있던 터라 이사벨이 콜럼버스를 등용하였다.
이사벨 여왕은 콜럼버스를 해군 제독에 임명하였고, 그가 발견하는 것의 10%를 콜럼버스의 소유로 한다는 조건 하에 선박 2척(핀타호와 니나호)를 내주고 과거에 죄를 지은 자들은 면죄해 준다는 조건으로 승무원 모집에도 협력해 주었으며, 또 팔로스항(Palos)에 사는 핀손이라는 선장이 자기 소유의 선박인 산타마리아호와 함께 참가하였다.
계약 후에도 이사벨 여왕이 계속 지원을 미뤘기 때문에, 실질적인 항해까지 걸린 시간은 6년이나 되었다.
그가 아메리카 탐험을 시작한 것은 당대 유럽인이 가지고 있던 중요한 사명인 기독교의 전파 혹은 미지의 세계에 대한 순수한 탐구심이 아닌 새로운 땅에서 얻을 수 있는 황금이 가장 큰 이유였다. 실제로 그의 항해일지를 보면 금과 보물에 대한 언급이 10일 분량에 수백 차례나 등장한다. 또한 이사벨 여왕과의 계약 내용에서도 알 수 있듯이 가장 중요한 목적은 부의 축적이었다. 그는 총 4차례나 아메리카 대륙을 항해하였는데, 아메리카에 상륙한 것은 그 가운데 제1항해의 일이다.
제1회 항해의 출범은 1492년 8월 3일이었으며, 같은 해 10월 12일에 현재의 바하마 제도(Bahamas)에서 과나하니 섬(추정)에 도달했고, 이 섬을 산살바도르(San Salvador, 구세주의 섬)이라 칭하였다. 이 날은 아메리카 대륙의 역사상 가장 중요한 날 중 하나로 여겨지고 있다. 이어서 그는 쿠바·히스파니올라(아이티, Haiti)에 도달하여, 이곳을 인도의 일부라고 생각하고 원주민을 인디언이라 칭하였다.
이후 항해 도중, 산타마리아호가 파손되어 한 섬에 약 40명의 선원을 남긴 후에 이스파니올라(후 스페인)라고 이름지었다.
1493년 3월에 귀국하여 왕 부부로부터 ‘신세계’의 부왕으로 임명되었고, 당시 그가 가져온 금제품이 전 유럽에 센세이션을 일으켰고, ‘콜럼버스의 달걀’이란 일화도 생겨났다. 17척에다 1,500명의 대선단에 의한 제2회 항해(1493년)는 그의 선전에 따라 금을 캐러 가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히스파니올라에 남겨 두었던 식민지 개척자는 인디오의 저항으로 전멸해 버렸으나, 콜럼버스는 여기다 식민지 행정관으로서 이사벨라 시를 건설하는 한편, 토지를 에스파냐인 경영자에게 분할해 주고 인디언에게는 공납(貢納)과 부역(경작과 금 채굴)을 명령하였다. 그러나 금의 산출량이 보잘것없자, 항해자들은 인디언을 학대 ·살육하였으며 노예화하였다. 이 항해에서 에스파냐로 보낸 산물은 주로 노예였으며, 이 때문에 본국으로 돌아오자(1496년) 문책당하였다.
제3회 항해(1498년∼1500년)에서 트리니다드 토바고와 오리노코 강 하구(河口)를 발견하였다. 콜럼버스는 제3회 항해에서 칼데아 신아람어와 히브리어에 능통한 선원 두 명을 데리고 갔다. 목적지인 남아시아에 다다르게 될 경우, 에덴동산의 거주자들이 이 두 언어를 쓸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오리노코 강 하구를 에덴동산의 관문이라고 착각했다. 하지만 신의 명으로 불꽃의 검을 들고 그곳을 지키고 있는 케루빔이 자신의 배들을 공격하지 않을까 두려운 마음에 그 강을 거슬러 올라가지는 않았다.[1] 제3회 항해 도중, 히스파니올라에서 내부 반란으로 그의 행정적 무능이 문제화하여 본국으로 송환되었다. 제4회 항해(1502∼1504)의 허가는 바스쿠 다 가마의 성공에 자극을 받은 때문인 것으로 보이나, 그 사정은 명백하지 않다. 이 항해에서 그는 온두라스와 파나마 지협(地峽)을 발견하고 가장 고생스러운 항해를 마치고 귀국하였다.
그는 죽을 때까지(1506년) 자기가 발견한 땅을 인도라고 믿었는데, 그의 서인도 항로 발견으로 인하여 신대륙이 비로소 유럽인의 활동무대가 되었고, 현재의 미국(United States of America)이 탄생할 수 있었던 근본적인 토대가 생길 수 있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지니고 있다. 하지만 그의 신대륙 발견 이후 일부 유럽인들의 침략적인 행위로 원주민들이 노예로 잡혀가는 등의 부정적인 결과를 낳기도 하였다.
혹자는 선사 시대에 아시아인들이 이미 베링 해협을 건너 아메리카 대륙에 정착하였고 그 뒤로도 바이킹들이 발견 한 바 있다는 점을 강조하기도 하지만, 당시에 아메리카 대륙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던 유럽인들의 세계관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는 점은 분명하다.
<출처: 위키백과>
콜롬버스와 신대륙 이야기
"16~17세기에는 종교개혁(宗敎改革)이 진행됨과 동시에, 붕괴하는 봉건사회에 이어 자본주의 사회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1492년 10월 12일 바하마 제도의 산살바도르섬(와틀링섬)에 이르렀다."
이것이 우리가 알고있는 세계사요, 백과사전에 나와있는 신대륙 발견의 요체이다. 콜롬버스는 왜 신대륙 개척에 목메달았을까? 궁금증이 생기면 못참는 필자는 인터넷 자료들을 종합하여 역사를 근거로 콜럼버스와 그와 관련된 이야기를 살펴보았다.
콜롬버스가 서쪽으로 간 까닭은? 일부 자료에 의하면 콜롬버스는 황금의 대륙을 발견하기위해 항해를 시작하였다고 쓰여져 있다. 그는 해양학과 지구 물리학에 풍부한 지식이 있었기에 신대륙 개척을 위한 항해를 시작하게 된 것이다.
평소에 마르코 폴로를 존경하였던 그는 투르크의 이슬람 교도들과 맞닥드리지 않고, 안전하게 인도와 교역하는 길을 열려고 하고 있었다. 그러던 도중, 대서양을 건너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게 된다. 처음 도착했을 때 그는 아메리카 대륙을 인도(India) 동편이라 믿었다. 그래서 아메리카 원주민을 인디언(Indian) 이라고 하지 않는가?
현재 대항해시대 온라인에서 카리브해에는 총 5개의 항구가 존재한다. 지난 콜롬버스가 여러차례에 걸친 항해를 통해 밝혀진 중, 남미의 항구 도시들 역시 곧 업데이트 될 것이다. 그런데 한가지 짚고 넘어가야할 부분이 있는데, 중, 남미는 스페인령으로 되어있다는 것이다.
현재까지도 브라질, 아르헨티나, 칠레는 그 언어가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스페인어를 중심으로 어느정도 의사소통이 가능하다고 한다. 특히 칠레는 국어가 스페인어이기도 하다. 역사 그대로를 반영하여 업데이트 된다면 대다수의 중,남미는 스페인의 초 강세로 중요한 거점들을 차지하게될 것이다. (이를 반영하듯 이벤트를 통해 스페인은 카리브해에 가장 일찍 진출한다.)
꼭 이대로 패치된다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유추일 뿐이다. 중, 남미는 삼림자원이 풍부하기로 유명하다. 풍부한 삼림자원이라함은 바로 광물자원과도 직결되는데, 이는 아메리카 대륙에 금과 다이아몬드같은 천연 광물 등이 앞으로 인도 온라인을 대체할 것으로 보인다.
앞서 나왔던 이야기에서 콜롬버스는 안전한 인도 교역로를 찾기위해 서쪽으로 갔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투르크 함대의 수탈이 심했던 이 시기에 어떠한 함선으로 아메리카 대륙까지 갈 수 있었을까? 기록에 의하면 콜럼버스는 3척의 카락선과 78명의 선원을 거느리고 항해를 하였다고 한다.
이후 콜롬버스는 수 차례 더 항해를 계속하였고, 이에 소문이 퍼져 주변 국가들도 너도나도 대서양 서쪽 신대륙 항로개척에 열을 올리게 된다. 포르투갈이 이에 참여하게되고 점차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도 이에 동참하였다.
이후 16세기 말에는 영국 과 에스파니아로 압축되었고, 서로의 이권다툼이 시작되었다. 따라서 사략함선들이 다수 생겨났으며 승리를 쟁취하기 위해 그들은 해군력을 키우기 시작했다. 이 시기 강한 해군력이 필요함을 느꼈고 그 결과 '갤리온'이라는 새로운 군함이 개발되었다. 새로운 군선이 바다의 주인공으로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당시 대서양을 건너는 일이 결코 쉽지만은 않았다. 날이 가면 갈수록 떨어져가는 물과 식량들에 선원들은 두려움에 떨었고, 그 끝을 알 수 없는 항해가 계속되었기에 선원들의 불만은 극에 달했다. 이에 콜럼버스는 태연히 책을 읽으며 차분한 마음으로 항해에 임하고 있었는데, 절망하고 있던 선원들을 향해 말했다.
"나는 나침판이나 선박의 성능을 믿고 항해를 시작한 것이 아니다. 나를 움직이는 동력은 꿈과 소망이다. 나는 지금 이사야서를 읽으며 새로운 에너지를 충전하고 있다."
새로운 것을 얻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도전이 필요하며, 그것의 원동력은 호기심이다. 게임을 더욱 재미있게 즐겨보기 위해 필자는 오늘 ′콜럼버스′라는 이름으로 일반 카락선을 이끌고 카리브해로 항해를 해볼까 한다. 15세기 콜럼버스가 했던 것 처럼...
<lewie@wonee.com>
콜럼버스의 달걀
콜럼버스는 서쪽으로 계속 가다보면 인도를 틀림없이 발견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지구가 평평하여 바다의 끝에 이르면 폭포처럼 밑으로 떨어질 것이라고 믿는
선원들을 달래며 콜럼버스는 향해를 계속해 나갔다.
1492년 10월, 마침내 육지에 도착한 그는 섬에 내리자마자 스페인 국기를 꽂고
당당히 돌아왔다.
콜럼버스가 7개월만에 돌아오자, 사람들은 그를 개선장군처럼 맞이했다.
이사벨라 여왕은 그를 위해 큰 환영회를 열어 그의 공적을 칭찬했다.
그 때 한 남자가 나서서 말했다. 그 남자는 스페인 사람도 아니면서 여왕의 신임을
받고 있는 콜럼버스를 미워해 그 환영회를 몹시 못마땅해 하고 있었다.
"어느 누구라도 배를 타고 서쪽으로 가면 섬을 발견할 수 있소.
당신이 한 일은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오?"
콜럼버스는 조용히 미소를 지으며 일어섰다.
"여러분, 이 탁자에 달걀을 세워 볼 수 있는 사람은 나와 주십시오."
사람들이 여러명 앞으로 나와 달걀을 세우려 했지만 계란은 모두 기우뚱거리며
옆으로 누워버렸다.
그러자 옆에 조용히 서있던 콜럼버스가 달걀의 끝을 탁자에 가볍게 친 후 탁자에
보란 듯이 세웠다.
사람들은 또 다시 웅성거렸다. 그것 역시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여러분, 제가 이렇게 해보이기 전까지는 아무도 깨닫지 못했습니다.
남이 한 것을 나중에 보면 누구라도 간단하게 할 수 있습니다.
처음으로 한다는 것이 어려운 것입니다.
가장 최초에 할 수 있다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해내기까지 그 사람이 겪는 노고를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콜럼버스의 말이 끝나자 사람들은 한결같이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콜럼버스의 평가
-문명의 전파였나 인디언 침탈이었나
최근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재검토되고 있다. 지금까지 대부분의 인식은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했고, 이는 신대륙에 대한 ‘구원’이라는 것이 주류였다. 즉 미개한 원주민밖에 없던 아메리카 대륙에 유럽의 문명을 전해주고 원주민의 삶을 향상시켰으며, 이것이 오늘날 가장 발달된 문명의 중심지로 만드는 밑거름이 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메리카 원주민의 생각은 이와 전혀 다르다. 그들은 콜럼버스의 도착을 ‘침략’이자 ‘약탈’의 시작으로 본다.
자신의 문명과 역사를 이루며 평화롭게 살아가던 자신의 땅 아메리카는 유럽인들에 의해 철저하게 파괴되었을 뿐만 아니라, 식민지화되고 엄청난 희생이 강요되었으며, 서양 문명은 이러한 희생으로 발전했다는 것이다.
먼저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과정을 살펴보자. 대서양 연안의 포르투갈과 에스파냐가 앞 다투어 신대륙 발견에 열을 올린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십자군 전쟁 이후 동방 무역이 부활해 향료, 비단, 보석과 같은 동방 물산이 유럽에 전해지면서 동양에 관한 관심이 높아졌다.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은 출판된 지 100여 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야 비로소 세인의 관심을 끌게 되었고, 황금의 나라 지팡구(일본) 등에 관한 이야기는 동방에 진출하고자 하는 유럽인의 욕구를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특히 인도는 황금으로 가득 차 있으며 귀하고 값비싼 향료가 넘쳐흐르는 꿈의 나라로 여겨졌다. 당시 유럽의 웬만한 모험가라면 인도에 가서 벼락부자가 되고 싶어 했다.
이슬람 국가인 오스만튀르크가 동로마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한 탓에 유럽에서 동방으로 가는 길을 차단당한 무역상인들 역시 인도로 가는 새로운 무역로를 찾아야 할 필요에 직면했다. 기술적으로는 장거리 항해가 가능한 지리 지식과 항해술의 발달하였고, 토스카넬리는 지구 구형설을 주장하여 인도 항로의 발견과 세계 일주에 이론적으로 힘을 실어 주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콜럼버스는 지구가 둥글다고 확신하며, 서쪽으로 바다를 건너 인도에 갈 결심을 한 후 에스파냐의 이사벨 여왕을 찾아갔다. 항해에는 막대한 비용이 필요해 후원자를 찾아야 했기 때문이다. 당시 에스파냐는 인도로 가는 신항로 개척을 두고 포르투갈과 경쟁하고 있었기에 에스파냐의 이사벨 여왕은 콜럼버스의 후원자로 나선다.
콜럼버스는 1492년 8월 3일에 제1회 항해를 시작하여, 10월 12일에 현재의 바하마 제도의 어느 섬에 도착하여 산살바도르(‘성스러운 구세주’라는 뜻)라고 이름 지었다. 그는 이곳이 인도의 일부라고 생각하였다. 귀국 후 신세계의 부왕으로 임명된 그는 17척에 1500명의 대선단을 이끌고 2차 항해를 떠났다. 그는 그곳에 여왕의 이름을 딴 이사벨라 시를 건설하는 한편 인디언들을 동원하여 금을 채굴하였다. 그러나 금의 산출량이 보잘것없자, 인디언을 살육하고 노예화하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한다.
황금 대신 노예가 본국으로 보내졌고, 콜럼버스는 문책을 당했다. 3차, 4차 항해도 별 소득이 없었다. 1504년 이사벨라 여왕이 죽은 후 콜럼버스의 지위는 더욱 하락했다. 결국 그는 초라한 모습으로 잊혀진 인물이 되어 죽는다. 그는 죽을 때까지도 자신이 발견한 땅이 인도라고 믿었다. 그가 발견한 서인도 항로 덕분에 아메리카 대륙은 유럽인의 활동 무대가 되었다. 반면에 인디언들에게는 수난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에스파냐는 중앙·남아메리카에서 대규모의 금 은광을 개발해 막대한 양의 귀금속을 유럽으로 가져왔다. 1520∼1860년에 에스파냐에 수입된 은은 1만8000t나 되었으며, 금도 200t이 넘었다. 당시 유럽의 화폐는 금화나 은화였다. 하지만 금은이 좋은 일만을 만들지는 않았다. 귀금속이 대량으로 유입되자 유럽의 화폐 가치는 곧바로 하락하였고, 이는 물가 상승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유럽의 물가는 16세기 동안에 평균 2∼4배 올랐는데, 이것은 당시로 볼 때 엄청난 일이었기 때문에 가격혁명(the price revolution)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러한 가격혁명은 임금 노동자나 고정된 지대로 생활하는 지주에게는 불리했으나, 상인이나 수공업자에게는 유리하게 작용하여 이들은 자본을 축적할 수 있었다. 또한, 아시아, 아프리카, 아메리카 대륙의 광대한 해외시장은 상업혁명을 일으켜 시민 계급과 자본주의 성장을 촉진시켰다.
이와 함께 무역의 중심지가 대서양으로 이동하여 지중해 무역이 쇠퇴하고 대서양 연안 국가들이 번영하게 되었다. 그에 따라 유럽인들의 생활에도 큰 변화가 일어났다. 동양의 산물이 대량으로 유입되었고, 신대륙에서 담배, 코코아, 감자 등이 수입되었다. 새로 생긴 넓은 시장을 토대로 유럽의 상공업과 금융업도 급속히 발전했다. 결국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은 신항로 개척으로 연결되었고, 이것은 지구상의 여러 지역과 문명이 서로 밀접한 연관성을 맺는 진정한 의미의 세계사가 성립된 의미 있고 중요한 사건이 되었다.
하지만 이것은 서유럽의 관점에서 신대륙 발견과 정복을 해석한 근대화론적 시각에 가깝다. 이는 인디오의 역사를 문명 이전의 야만적이고 미개한 것으로 치부하여 에스파냐의 문명이 원주민 아메리카에 진보를 가져다 주었다는 서구 중심적인 해석과 일맥상통한다.
반면,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아메리카의 역사를 야만적이고 미개한 한 것이 아니라 위대한 문명을 지닌 자랑스러운 과거로 인식한다. 이들에게 유럽의 아메리카 정복은 원주민 학살, 환경 파괴를 가져온 재난의 시작이었을 뿐이며, 현재까지 계속되는 중남미의 가난과 저발전의 원인이기도 하다.
신대륙 발견 후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타의에 의해 사회 정치 경제 종교 등 모든 분야에서 큰 변화를 겪어야만 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변화는 인구의 급속한 감소다. 인구가 감소한 것은 유럽인들의 잔혹한 살육과 약탈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서구인들을 통해서 들어온 각종 전염병이었다. 천연두를 비롯한 유럽에서 옮겨진 질병 때문에, 신대륙 발견 이후 100년 동안에 원주민 인구의 90% 이상이 사망하였다.
베네수엘라 대통령인 우고 차베스가 ‘콜럼버스의 날’로 지정된 10월 12일을 ‘원주민 저항의 날’로 바꾼 것은 콜럼버스의 발견에 대한 원주민의 재해석이라고 볼 수 있다. 그는 “콜럼버스와 그 뒤를 이은 외국 정복자들은 히틀러보다 더 잔인한 살육행위를 저질렀다. 역사상 최악의 대학살을 초래한 이 날을 기념할 이유가 없다”고 말하며 콜럼버스야말로 ‘인류 역사상 최대의 학살’을 자행한 인물이기에 중남미인들은 ‘콜럼버스의 날’을 기념하지 말 것을 촉구했다.
차베스는 TV·라디오 연설을 통해 “1492년 콜럼버스 상륙 당시 1억여 명이던 대륙 원주민 수가 불과 150년 만에 300만 명으로 줄어들었다”면서 “정복자들은 10분에 한 명꼴로 원주민을 죽인 셈”이라고 규탄했다. 콜럼버스의 발견은 원주민에게 구원이 아니라 침략과 희생의 역사인 것이다.
<자료: 박승렬 LC교육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