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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문화교육 스크랩 다문화란?
조은이 추천 0 조회 69 10.05.25 09:43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한국은 정신 없는 나라이다.
모든 것이 너무 빨리 변해서. 단지 2년 만에 왔는데 다문화 열풍이 불고 있었다. 
호주에서 복지회 운영에 관여하고 있는 나로서는 호주정부의 다문화 정책의 수혜자인 셈이다.
다문화 정책의 수혜자로서 느끼는 다문화에 대한 강의를 하게 되었다.

 

차이와 차별


다문화’ (multiculture)라는 용어를 공식적으로 1950년에 제일 먼저 사용한 나라는 놀랍게도 인도였다. 1971년에 캐나다에서 ‘다문화’라는 용어를 차용했는데 영어를 사용하는 구역과 불어를 사용하는 구역이 구별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호주의 경우는 캐나다와는 전혀 다른 의미로 처음에 사용되었다. 호주는 1967년부터 백호주의에 대한 논쟁들이 지속되다가 1978년 공식적으로 ‘다문화’를 국가 정책으로 채택했다.

나와 네가 서로 다르다는 차이는 참으로 미묘한 것이다. 이 차이라는 것이 우월한 강자의 입장에서는 차별로, 약자의 입장에서는 열등의식으로 발전 되는 것이다.


죠센징 논리


‘다문화’에 대한 이해는 양가성 (ambivalence)을 띠고 있다. 처음에는 피 식민주의자들이나 혹은 다수가 아닌 소수들에게  백인들의 선진 문화나 언어를 배우라고 설득하는 일종의 ‘모방’정책을 강요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막상 피식민주의자들이나 소수 인종 가운데 누가 천신만고 끝에 서구 백인사회의 중심사회로 들어가려고 하면 그 때 가서는 ‘차이’를 강조한다. 말하자면 자기들 보다 열등 할 때는 ‘너는 우리와 같다’는 것을 강조하고 대등한 관계가 되면 ‘너는 우리는 다르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즉 차이가 차별, 배제로 나타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일본 애들이 조선을 식민지로 가지고 놀 때 겉으로는 ‘내선일체’를 부르짖지만 속으로는 “조센징”을 차별적 의미를 지닌 용어로 사용한 것이다.


정신대원의 자살


한 개인의 정체성은 어떤 공동체나 국가라는 거대한 이념체계를 장악하고 있는 구조가 만들어 내는 집단적인 의식에서 영향을 받는다.

일본 식민주의자들의 침략전쟁에 강제로 동원된 정신대 할머니들 가운데 전쟁이 끝나고 지옥 같은 위안부 생활을 끝내고 돌아올 때 현해탄을 건너다 바다에 몸을 던져 죽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것은 정조관념 등 남성들 중심의 가치관에 경도된 즉 일본 제국주의 총칼 보다 더 무서운 유교 사회의 ’사회문법‘ 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순결의 문법‘이 사회화되어 있는 조선 땅에 다시 들어온다는 것은 곧 ’사회적 죽음‘이었기 때문이었다.


조영남이 한 인터뷰에서 자신은 문화권력을 가졌다고 말한 적이 있다. 문화권력이란 무엇인가?

예를 들어 레인보우나 세세미 스트리트 같은 어린이들을 위한 연속극이나 영화들을 보자.

비록 여러 색깔을 지닌 아이들을 출연한다고 하더라도 이 영화들이 남미나 아프리카 그리고 아시아에 수출되어 그 나라의 아이들이 이 영화를 볼 때 가장 중요한 주인공은 바로 같은 유색인종의 어린이가 아니라 백인 아이들이다. 그것은 오랫동안 백인들의 문화는 고급문화이고 선진문화라고 배워왔고 다양한 매체들을 통해서 그렇게 오랫동안 학습 받아왔기 때문에 비 서구 아이들의 눈에는 백인 아이들이 우월하고 선진적인 문화를 대표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특히 비 서구 아이들에게도 오랫동안 서구 백인들의 중심된 제국주의의 역사를 직, 간접적으로 경험했기 때문에 더욱 백색문화는 선망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대중매체들 특히 헐리우드 영화가 만들어내는 ‘평화’나 ‘평등’ 혹은 ‘권선징악’과 같은 논리들은 사실은 보이지 않는 백인문화를 보편화 시키는 일종의 문화권력을 담지하고 있다.

헐리우드의 ‘문화자본’은 이데올로기 차원에서 보면 ‘백인문화’의 우월성을 ‘문화 상품’들을 통해서 생성해 내고 재생산하게 된다.


여러 색깔로 구성된 무지개는 아름답다. 다양한 색깔들로 구성되어 있는 색종이의 조화는 환상적이다. 그러나 인간들이 오랫동안 갈등과 모순의 반복 속에서 형성된 문화들 간의 만남을 결코 아름답지만은 않다.

문화와 문화가 만난다는 것은 인간들의 삶의 집단성과 만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 집단들 사이에 힘의 역학관계가 존재하듯이 그 문화들 사이에는 ‘지배-피지배’관계가 작동되고 있다. 따라서 문화와 문화가 만난다는 것은 하나의 ‘충돌’을 낳게 된다.

백인 문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앵글로 중심 미국문화 (Anglo-centered American culture) 속에 한국인들이나 다른 소수인들은 자기들의 문화를 가지고 수평적인 공존의 관계 맺음을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하위문화’ (sub-culture)로 '환영받지 못한 손님‘으로 ’기생‘하는 형태로 공존하게 된다.

 문화 연구가 호미바바 (Homi Bhabha)는 이러한 형태의 문화상황을 ‘문화의 차이’ (cultural difference)라고 명명했는데 그것은 결국 문화들 사이에 위계성과 서열화를 이루면서 하위문화들은 백인 지배문화에 대해서 ‘종속’과 ‘저항’이 동시에 일어나는 일종의 ‘애매모한 관계’ (ambiguous relation)를 형성하게 된다. 말하자면 하위문화들은 저항을 하면서도 한 편으로는 지배문화를 선호하여 ‘종속화’하려는 성향이 있다.


인종주의


백인우월주의 혹은 ‘백인 인종주의’의 단초는 15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포르투갈 선박들이 이슬람의 세력들을 누르고 서 아프리카 해안에서 흑인들을 납치하여 포르투갈에 노예들을 팔기 시작하면서 백인들의 우월주의가 형성되기 시작한다. 그 이전 까지는 ‘색깔이나 얼굴형태’를 중심으로 한 인종주의는 보편적인 현상은 아니었다.

서구 백인들은 문화 인류학이나 자연과학 심지어 신학이나 철학 등을 동원하여 식민주의를 정당화는 제국주의 이데올로기를 만들어 갔다. 그들은 학문적인 연구들을 통해서 이성과 문명은 오로지 백인 서유럽 인들이고 유럽 외부의 비백인들 흑인들이나 황인종들은 비이성적인 야만인들로 동일화 시켰다.


그들은 비서구 인종들에 대한 삶의 양식과 그들의 역사와 문화를 그들이 주조한 ‘유사 과학’주의‘에 근거해서 다시 쓰기 시작했는데 이것을 에드워드 사이드 (Edward Said)는 '동양주의’ (Orientalism)이라고 명명했다.

오리엔탈주의자들은 서구를 벗어나 동양을 여행해 본 경험이 없이 주로 피 식미주의 나라에 파견되어있는 정치인들 과학자 인류학자들 그리고 행정관과 선교사들이 보내준 편지나 간단한 정보를 분석하여 그들의 서재에서 피 식민주의 인종들의 삶의 성격이나 가치관을 포함한 문화를 ‘재구성’하고 ‘재창조’했다.

이렇게 형성된 오리엔탈리즘에 의하면 백인들은 비백인들이 그들에게 주어진 환경 속에서 나름대로 창조해 가고 있던 고유의 문화를 하나의 '차이'와 '특징'으로 보지 않고 '야만성'과 '후진성'으로 인식했다. 따라서 백인들이 비백인들을 근대성으로 '계몽' 해야 한다는 일종의 'manifest destiny' 같은 허위 강박 관념을 갖기 시작했다.

요즘은 많이 사라졌지만 우리 어렸을 때만해도 툭하면 한국 사람들 스스로 “‘전이 별 수 있나? ‘ 하는 자조적인 소리를 많이 했었다. 즉 식민지근성이 자신도 모르게 의식과 몸에 베이는 것이다.
뉴라이트의 이영훈 교수가 ‘식민지근대화론’을 펴서 소란했던 적이 있었다. 한 마디로 일본 덕에 우리의 근대화가 빨랐다는 것이다. 학자로서 충분히 주장할 수 있는 이론이지만 문제는 그의 논리를 입증하기 위한 자료가 조선총독부 자료라는 것이다. 하기는 자료하라고 그것 밖에 없으니 어쩔 수가 없겠지만 일제가 수탈을 위해 만든 자료들, 인체생체 실험 전문 731 부대, 위안부의 존재는 전혀 없는 그런 자료에 기초해서 논리를 세워 나간 것이니 그것을 어떻게 신뢰 할 수 있겠는가?


아일랜드인과 중국인


아일랜드의 대기근과 1848년의 유럽 혁명 이후 아일랜드와 독일에서 수백만의 이민자가 백인으로 향했다. 어느 정도의 재산과 기술을 가지고 백인으로 건너간 독일계는 수공업자나 자영농으로 살아가면서 백인 사회에 좀 더 수월하게 적응했지만, 오랜 세월 영국의 억압을 받던, 가난한 농민 출신의 아일랜드계는 영어를 사용한다는 것 이외에는 정말로 가진 것이 없던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이들은 “하얀 흑인”으로 취급받으며 대다수가 막노동과 하녀 일 등으로 생계를 꾸려야 했다.

그래도 아일랜드인들은 유럽인이었고, 1870년대가 지나면서 서서히 백인의 일원으로 인정받게 된다. 하지만 비슷한 시기에 백인에 들어온 중국인들은 그렇지 않았다. 중국인들이 본격적으로 백인에 오게 된 것은 캘리포니아에서 금이 발견되고 나서였다.

이렇게 광산이나 철도 공사장 등 힘든 일에 종사했기 때문에 중국인들은 처음에 환영받는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낮은 임금도 마다않고 일했기 때문에 백인 노동자들이 보기에 이들은 자신들의 일자리를 빼앗아 가는 사람들이었다. 이렇게 캘리포니아를 중심으로 중국인을 배척하는 분위기가 생긴 상태에서 1882년 중국인을 배척하는 이민법이 만들어졌는데, 10년 간 중국인 이민을 금지하는 것이었다. 인구의 이동은 한 마디로 ‘고무줄 놀이’라는 것이다.


티핑 포인트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의 유래는 백인이 살고 있는 마을에 흑인들이 이주하면서, 흑인의 비율이 일정한 비율에 도달하면 모든 백인이 마을 떠나는 현상을 이야기한다. 21 세기에도 여전히 이런 현상이 발생하고 있다. 왜 그럴까? 물론 어느 인종 (race)이든 타 인종들을 경계하고 위협을 느끼는 xenophobia (외래인종 공포증)이 있다. 그러나 인종주의는 심리적 경계의 차원을 넘어 구조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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