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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예술론 - 미학적 분석
architecture as art - an esthetic analysis
스텐리 에버크롬비 저
by stanley abercrombie
제 1 장 서문 : 예술로서의 건축
-건축은 동결된 음악이다. -
프레드릭 본 셀링 [예술 철학] 중에서
-그러나, 음악은 용해된 건축이 아니다. -
수잔 k. 링거 [예술의 제문제들] 중에서
건축은 우리가 피할 수 없는 예술이다. 건축은 타 예술과는 다르게 우리의 생활을 위탁해 맡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건축은 어떤 목적을 위해서 세워지고 있다. 우리는 개개의 목적에 따라 건축을 하고 있는 것이다. 때때로 건축은 두 가지 목적-기능의 보호와 이익의 산출-을 위해 세워져 왔다. 따라서 건축은 예술 중에서 가장 돈을 목적으로 하는 예술형태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만약 건축이 금전위주의 목적(상업)에 적합하다면, 또한 건축은 여러 이상에도 적합할 수 있다. 건축은 사회적 목표-좀 더 효율적인 병원, 좀 더 인간적인 공장, 좀 더 민주적인 주택군, 좀 더 조화로운 인간과 자연의 관계 등-를 설정할 수 있으며, 건축은 이러한 목적의 성취에 가장 도움을 줄 수 있는 예술이다.
다른 의미에서 건축은 또한 사회적이다. 즉, 우리는 결단코 건축을 단독으로 보지 않고, 항상 도시 구조의 다른 구성체들과 함께, 또는 자연과 함께 공동체 속에서 건축을 보아야 한다. 건축은 한 예술가의 작품이 아니라 모두의 협동의 산물인 것이다.
이러한 기능과 맥락이라는 측면을 예술로써의 건축에서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비록 그들이 미학적인 측면 그 자체는 아니지만, 그들은 건축의 특별한 성질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예술은 결코, 실제적이고 비예술적인 관심사를 희생하고서 존재해서는 안 되며, 그 관심사에 도움을 주면서 존재해야만 된다. 결국 건축은 양(기능)과 질(미학)의 구분이 절대적으로 따로 있는 것이 아니며, 두 가지 모두 다 상충할 수 있다는 것을 배워야 한다.
예술가가 우리에게 부여한 작품에서 우리가 지각하는 것과, 시대와 장소의 특별한 맥락을 지닌 채 그 작품의 다양한 상호 접촉에서 우리가 지각하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건축에서 우리가 이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바로 두 번째의 순간적 유형의 지각이며, 우리가 그들을 예술로 만들 수 있도록 하는 것도 첫 번째의 지속적 유형의 지각이다. 즉, 건축을 기능적 측면에서 순간적으로 지각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두 번째의 목표이며 지속적으로 예술적 측면에서 지각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첫 번째 목표라는 이야기다.
제 2 장 건축의 크기
-완벽한 어느 것도 영원한 추억을 위해서는 너무 작다. -
아서 시몬
-다른 한편으로는, 단순한 크기는 정말로 모든 불리한 상태에서도 약간의 명백한 가치를 지닌다. -
존 러스킨 [플로넨스에서의 아침] 중
우리는 자신의 크기를 이용하여 대상의 크기를 판단한다. 그렇다고 해서 거대한 크기의 대상이 그만한 가치를 가진다고 생각하는 것도 오판이다. 선물의 크기가 크다고 모두 다 그만한 가치를 지닌 것은 아니므로, 가치로부터 크기를 분리하는 것이 정당할 것이다. 크기는 건축이라는 예술로부터 우리가 획득하는 즐거움중의 일부를 위한 원천이다.
우리가 '장엄함'이라고 일컫어지는 것에는 크기의 요소가 매우 효과적이며 필수적인 요소이다. 우리는 '장엄하다'라는 말을 쓸 때 중압감, 다시 말해 무게를 느끼고 있다. 거대한 무게로 인한 중압감등에서 우리는 '장엄'을 느끼는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러한 '장엄함'은 거대한 무게를 꼭 필요치는 않는다. 거대한 무게의 부재를 어떻게 쌓느냐에 따라서 장엄함을 느낄 수도 있겠으나, 가벼운 부재를 어느 정도나 정교하게 다듬느냐에 따라서도 바뀔 수 있다. James stirling의 Cambridg 공학관이나 Frei Otto의 Munich Olympic Stadium, 그리고 Buckminster Fuller의 Geodesic Dome에서 이러한 장엄함을 느낄 수 있다.
건물의 크기가 우리에게 감흥을 주는 세 가지 방법 중 첫 번째로 건물의 크기와 지구의 크기를 관련시키는 방법이다. 물론 지구의 크기를 볼 수는 없지만, 지구는 실재(實在)하는 현상이며, 지구의 중력으로부터 벗어나려는 것이 인간 최초의 투쟁인 것이다. 이러한 지구의 힘의 크기와 건물의 크기의 관계는, 다시 말해서 건물의 구조에 관한 이야기인 것이다.
"만일, 성냥개비가 2인치이고, 비슷한 막대기가 6피트(또는 36배 긴 것)이라면, 후자는 전자의 1300배나 되는 자중 때문에 쳐질 것이다. 이러한 현상에 대응하기 위해, 동물은 크기가 증가함에 따라 손발은 두꺼워지고 짧아지려는 경향이 있으며, 전체 골격은 더욱 크게 되고 무거워지는 경향이 있다."
sir d'arcy Thompson
이것은 건축에서도 마찬가지인데, 각각의 유형은 한계가 있으며, 그 한계를 넘어서면 구조체계는 바뀌어야만 하는 것이다.
p31 Goldsmith의 그림
건물의 크기 변화는 건물의 성격의 변화를 요구한다.
두 번째로 우리의 신체와 건물의 관계이다. St. Peter 대성당의 예를 들어보면 Frank lloyd wright나 Ruskin을 st. peter 대성당이 Human scale로서 부적합하다고 했다. 물론 크기가 정확하게 지각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의도된 효과와는 전혀 다른 효과를 낼 것이다. 이는 거대한 건물에서 인간이 스스로 비교할만한 형체가 없다면 있을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st. peter 대성당에는 비교를 위한 친숙한 형태들이 필연적으로 약간은 존재한다. 다시 말해서 이는 어디까지나 urban scale로서 판단한 기우일 뿐이다. 수많은 거대한 다른 구조물들이 장엄한 효과를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은, 이상적인 건물과 건물요소들이 규모면에서 인간적이어야 한다는 그릇된 관념을 변화시켜야만 한다. 이는 우리의 신체가 요구하는 크기를 매번 적용하는 것도 정확하지만, 그러한 크기로 그것들을 제한하는 것도 건축가의 형태언어나 감동을 파괴적으로 삭감시키는 것이다.
세 번째로 크기가 감동을 주는 이유는 중력의 힘과 인간의 힘과의 관계이다. 이는 위대한 건물은 위대한 노력 없이는 세워질 수 없다는 것이다. 비록 현대에 들어와 육체적 노력은 기계적 요소에 의해 많이 감소는 되었지만, 그러한 기계적 요소는 정신적 노력의 산물인 것이다. 인간의 위대한 노력에 감동하는 것이 세 번째 요소인 것이다.
제 3 장 건축의 형태
-형태는 정의(定義)를 교묘히 회피하지만, 사회적 원조와는 전혀 다른 방법으로 사람을 즐겁게 하는 불가사의이다. -
알바 알토
·Gestalt : 합(合)에서 그 부분들로부터 파생되지 않은 성질을 지닌, 기능적 단위를 구성하기 위해 통합된 구조 또는 구성
형태는 특별한 메시지를 지닌 채 나타나기 때문에, 그 일부는 우리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방법으로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며, 그 밖의 것을 설명하기 어려운 방법으로 우리에게 영향을 미친다. 우리는 외부표면을 가질 뿐 아니라, 그 내부 공간 및 내부조직의 일부를 암시하기도 하는 것을 building form이라 한다. 건축은 내부와 외부가 하나로서 이해될 수 있을 때, 즉 평면(기능)과 볼륨(외부형태)이 분리될 수 없도록 결합될 때, le corbusier의 표현을 빌리자면 "단면이 입면이 될 때", 그 최고의 상태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가장 크게 영향을 미치는 형태의 내부 볼륨이 외부와의 동질성을 결여하는 경우도 있다.
형태는 다른 형태에 의해서 강화되거나 모호해질 수 있다. 단일 형태로 된 건물이 강력할 수 있지만, 그러한 건물은 매우 드물다. 왜냐하면, 우리의 기능적 프로그램은 일반적으로 다양한 건축요소들의 복잡한 결합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각각의 건축요소들은 각각의 형태를 지닌다고 볼 수 있으며, 이러한 건축요소들의 복잡한 결합은 단일 형태의 건물로 나타나기도 매우 힘들다는 이야기다.
건축의 기쁨을 발견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것을 표면에서뿐 아니라 그 실체 이면에서도 고찰해야만 한다. 장식이 형태에서 피상적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면의 형태가 안전한 이상 그 일관성에 대해서 매우 관대해질 수 있다. -form, 즉 volume이 완벽하다면, 피상적이고 가식적인 장식을 필요치 않으며, 이것이 본질적인 건축의 즐거움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것이 감추고 있는 바를 우리가 볼 수 있도록 도와주는 유형의 장식도 있다. 이 장식은 건물형태나 구조물의 잘 알려진 결과로서 생겨나는 장식이다.
ex)기와무늬 → 지붕아래의 경사도, 곡선표출.
모서리돌 → 모서리의 굴곡강조
장식쇠시리→두 재료의 접합 강조
전체에 대한 고려는 초기부터 존재해야만 한다. 형태가 윤곽선(out-line)이상일 때 형태가 그 자체의 구성과 그들이 포함하는 공간을 생생하게 표현할 때-shape가 form의 명칭을 부여받을 가치가 있을 때-그 메시지는 특히 풍요롭다. 즉 form이란 out-line 이상의 조직으로서의 형태이다.
건축가가 design하는 방법 중 내려져야할 결정의 대부분은 전체를 취급하는 것이 아니라 그 구성요소를 취급하는 것이다. 여기서도 또한 형태의 고려도 중시되지만, 고려되어야만 하는 바는 고립상태에서 형태의 영향이 아니라 요소들 사이의 관계나, 전체와 요소 사이의 관계이다. 마찬가지로 건물을 하나의 구성요소로 보았을 때 전체 가로나 도시구조와의 관계도 고려되어야만 한다. 주변의 text 性, 즉 context에 대한 이야기인데, 이는 주변의 맥락과 연결되는 형태가 우리에게 독자적으로 말할 수 있는 특권이 있는 극소수의 형태이다.
제 4 장 건축 내부의 형태
-우리는 건축 작품을 그 내부의 모든 측면들이 동일한 리듬을 따라야만 하는, 생명력 있는 유기체로서 간주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이것을 결여하면 건축 작품은 성공할 수 없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
Andre Lurcat [건축] 중에서
형태들은 유사성, 반복, 또는 비례의 수단에 의해 구성의 일관성을 연출하기 위해서 서로 협력할 수 있다. 약간의 보완적인 것이 존재할 수 없는 특정 상태를 상상하기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유사성을 통한 일의 원리는, 고립상태에서 전혀 색다르거나, 말로 묘사할 수 없거나, 명백히 추한 형태들까지도 서로 적절하게 결합시키기 때문이다.
하나의 형태가 단순히 유사한 형태가 아니라 정확하게 복제된 다른 형태와 결합될 때, 우리는 module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독자적으로 고안된 각각의 bay보다는 오히려 동일한 구조적 bay의 사용에 만족스런 느낌을 얻는다.) 모듈의 순수한 미적 장점은 조화를 이루며 중복된 unit사이에서 반복되고 있으며, 방향성이 강조되지 않으며, 일직선으로 정돈되고 있다. 그러나 약간의 변화도 없이 정사각형 모듈에 의해 제공되는 시각적 수법은 연출하기에 지나치게 쉬운 것일 수도 있다. 유사하거나 반복되는 형태를 이용하여 구성의 일관성을 추구하는 것은 많은 다양성과 복합성을 제공한다. 그러나 보다 복합적이며, 비밀스런 분석에 속하는 것은 비례의 사용이다. 비례는 다음 네 가지의 범주-음악, 시대, 자연, 산술-중 한 가지이거나, 아니면 그들의 조합에 속한다.
◎비례 체계의 첫 번째 범주 : 음악
-비례체계의 가장 영속적 범주중의 하나는, 그 음악적 유추에 의해서 생긴다. 그러한 체계의 제안자들은 악기의 현의 길이와 진동하는 공기 파장의 길이에서 간단한 수학적 관계를 관찰하였는데, 이 관계로 음률의 고저를 만들어 내기 위해서 조합된 것이다.
조화는 그것이 음악이나 혹성 또는 건축에 관련되었든 간에 그것은 단순함으로 해서 쉽게 알려진 비율에서 서로 연관된 숫자들의 사용으로부터 결과하는 듯하다. 이해될 수 있는 균형은 건축적 조화의 근원인 듯하다. 눈이 건물요소들 사이의 수학적 관계를 식별함으로써 만족감을 느끼며, 가장 단순한 수학적 관계만이 가장 쉽게 식별될 수 있다고 추정하는 것도 합당하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이해도 음악적 조화의 근원은 아니다. le corbusier가 주장하였듯이 "음악과 건축은 다 같이 측정의 문제지만, 그들은 전혀 다른 두 가지 방법으로 측정되는 문제들이며, 두 가지 측정체계는 매우 다양하다. 두 가지 예술은 그들이 정신적으로 이해되는 성질, 즉 음악의 경우는 시간의 증가, 건축의 경우에는 공간의 증가(그리고 공간을 통해서 움직이는데 필요한 시간)라는 성질을 공유하고 있다는 의미에서만 진정으로 관련되어있다." 그러나 건축의 비례체계를 정당화하기 위하여 음악적 조화의 기법을 탐구하는 것은 전혀 성공할 수 없는 노력이다.
◎비례체계의 두 번째 범주 : 시대
-이집트의 피라미드나 그리스의 파르테논 신전은 고대의 비례체계 연구의 확실한 희생물이다. 만일 그러한 건물의 비례체계가 우수하다면, 어째서 오늘날까지 그러한 비례법칙을 사용하지 않는 것일까? 분명 고대의 건축물중 일부는 부정할 수 없는 걸작품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모든 고대 건축물이 그렇지는 않으며, 걸작품의 창조가 일련의 규칙에 의해서 "쉽게 이루어진다면", 그 법칙이 왜 번번이 사용되지 않았는지 다시 생각해 보라.
◎비례체계의 세 번째 범주 : 자연
-눈(雪)의 결정체가 지닌 기하학이나, 해바라기 꽃에서 볼 수 있는 교차곡선과 같은 자연의 경이로움에서 지각될 수 있는 비례체계는 무엇이든 간에 가치가 있다고 주장한다. alberti의 표현을 빌리자면. "자연은 만물의 가장 우수하고, 신성한 교육자이다." 그러나 자연과 관련된 비례이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건물이란 결정체처럼 보여야만 된다고 주장하는 것은 부당하며, 단지 건물들이 결정체와 같은 자연형태들에서 깨달아진 디자인 원리들을 이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정당하다.
자연의 비례이론을 중요시하는 것 중 인체의 비례탐구를 하는 것도 주목받을 가치가 존재한다. 왜냐하면, 인간은 건축의 사용자이며, 나아가서 건축의 참된 이용도 건물과 인체사이의 직접적인 접촉을 유발하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점에서 볼 때, 인체와 건축의 관계를 무시할 수 있는 훌륭한 건축물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비례체계의 네 번째 범주 : 산술
-다른 세 가지 범주들로부터 분리될 수 없는 것은 그 자체의 산술에서 정당성을 발견하는 비례체계들이다. 수(數) 사이의 관계는, 그 자체의 관계가 지속적인 것이기 때문에, 산술의 정당화는 그것에 관하여 시대의 정당화라는 분위기를 일부 지니고 있다. 가장 간단한 산술의 예를 들자면, 1을 2배하면 2가 되고, (관련된 단위수열: 1,2,4,8 등) 1에 1을 더하면 2가 된다는(또 다른 유사한 수열 : 1,2,3,4 등) 평범한 사실 때문에 그렇다. 이러한 기초적인 산술의 기하학적 응용도 두 가지 형태를 우리에게 제공해 준다.
-펠레의 급수 직사각형 ; 1: sqrt { 2} (p93上)
2:1+ sqrt { 5} (p93下)
우리는 이상의 체계에서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는데,이것도 이러한 비례에 정수뿐 아니라, 무리수가 사용된다는 점이다. Jay Harbridge는 정수를 사용한 비례체계는 정적이며 무리수가 사용되는, 다시 말해서 무한한 소수점의 수만으로 정의할 수 있는 비례체계는 동적이며 2:1+sqrt { 5}의 직사각형을 회전하는, 정사각형으로 이루어진 직사각형이라 부르며, 이러한 비례체계를 동적 균형(dynamic symmetry)이라 불렀다.
마침내 우리는 모든 것 중에서 가장 유명한 비례체계에 이르게 되었으며, 이 체계는 le corbusier의 modulor에서 통합되었으며, 황금비의 직사각형과 황금비의 분할이라는 것에 그 바탕을 두고 있다. p94下
어떠한 비례체계이든 간에 비례체계의 사용은 비록 그것이 희미하게만 지각될지라도, 시각적으로 만족을 주며, 건물 부분사이에서 질서를 이루는 관계를 건물에 부여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것이 비례의 진정한 가치이며, 유일한 가치이다. 형태의 유사성과 모듈의 성질(modularity)이라는, 보다 단순한 질서부여 기법들에 의해 일부 비례체계를 사용하는 것은, 건축가의 중요한 수단중의 하나이다.
제 5장 배치
사람은 모든 것 - 인간 개개인의 행위의 적합성뿐 아니라, 의미 및 가치, 혹은 원자의 에너지 상태, - 이 사물 그 자체와 그 환경의 상호작용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사실을 지나치게 강조할 수 없다. -
Cyril Stanley Smith
건축은 진공상태에서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모든 측면에서 그 맥락(context)에 의해서 영향을 받는다. 건축은 창조되기 전에 지역조례와 건축법규, 상업적 가치와 가능성, 지역사회의 일반경제, 건축주의 경제적 능력 등의 결정 요인들에 그 바탕을 두어야 한다. 이러한 결정요인들에 알맞은 적합성이 일단 발견되면, 건축가는 그 물리적 환경 사이의 적합성을 고려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이 예술로서 건축의 출발이다. 그 최악의 상태에서 건축은 이질적이며 부당하고, 불필요한 존재로 세워지며, 가장 평범한 상태에서 아무런 부담 없이 흡수되어 버린다. 그러나 가장 최상의 상태에서 건축은 맥락을 한 곳으로 모으며, 집중시키는 새로운 실체가 된다.
건축이 이와 같이 맥락을 한곳으로 모을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은, 건물이 대지에 적합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적합이 이루어지는 방법은 명백히 다양하게 존재한다. 그러한 방법 중 한 가지는 재료를 깎아내는 방법이며, 또 다른 방법은 재료를 부가(附加)시키는-쌓아 올리는 방법이다. 전자의 경우는 자연과 일치되어 자연의 맥락과 동질성을 지니는 방법이지만, 현재는 거의 쓰이지 않는다. 후자의 경우가 현대에 가장 많이 쓰이는 방법이며, 앞으로 다루고자 하는 내용이다.
건축은 환경을 일부 창조함으로써 혹은, 그 디자인이나 보충적인 디자인을 경관 속으로 확장함으로써, 그 주변 환경과 관련을 맺을 기회를 지닌다. 맥락을 모으는 과정 중 또 다른 근본적인 측면은 새로운 건물이 황무지나 사막에 건설되지 않는다면, 그 건물을 주위의 보다 오래된 건물과 관련시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기존의 건물들은 그 지역적인 성격에 이미 실질적인 공헌을 했기 때문이다. 지역적인 전통건물의 회상은 단절감보다는 연속감, 낯설음보다는 친숙함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전통은 기후나 지역적 건축에 대한 반응에서 성장하기 때문에, 그것은 종종 실질적인 장점을 지닌다. 그러나 건축가가 이러한 지역적 전통을 인식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그 전통을 맹종하여 무조건 모방하는 것은 주의해야 한다.
이전의 제한요소들을 고려하고, 현재의 실용성을 무시하며 건설하는 행위는 훌륭한 건축을 위한 타당한 기반이 아니다. 그러나 특정 장소에 적합하다는 것은 형태만의 문제 이상이다. 그것은 적당한 크기와 적당한 마무리, 그리고 적당한 태도를 선택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건축이 우리의 환경에 공헌하는 주요한 방법은 주목할 만한 대비를 창조함으로써, 장소의 중요성을 확립하고, 전달하는, 의미 있는 행동을 제공하는 것이다.
예술이 그 문화나 기후에 건물을 조화시킴으로서 창출되지는 않지만, 다른 측면에서 그러한 조화는 만족스러운 것이다. 문화와 기후는 분명히 디자인 결정 요소들이지만, 우리가 그들에 바탕을 두어야만 하는 것은 미적 판단기준이 아니라, 기능적 판단기준이다.
만일 장소에 대한 존경이 건축이 성취할 수 있는 최고의 업적이 아니라면, 배치가 미학적 성질에 미칠 수 있다는 사실은 여전히 인정되어야만 한다. 건물과 대지의 효과적인 관계는 건축의 근본적 문제이며, 만일 그 관계가 서투른 것이라면, 완벽하게 만족스러운 결과가 존재할 수 없다고 우리는 말했었다. 이러한 원리의 확장은 자연적이거나 구축된 대지의 전체 지형과 건물의 관계 속에서 미학적 함축 의미가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비록 각 과정마다 설계과정이 다르지만, 때로는 전체 도시, 때로는 전체 지역과 건물의 관계 속에서 미학적 함축의미가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다만 건축의 역할은 항상 순응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요소를 도입함으로써 기존의 대지를 자주 변형시키는 것이라는 점을 기억해야만 한다. 이러한 환경적인 역할은 건축의 중요한 기능이며, 건물외피를 초월하여 가장 멀리 이동하는 것이며 더 작은 예술에는 유용하지 않는 것이다.
제 6장 기능
-건축의 목적은 완벽함. 즉, 가장 뛰어난 능률의 창조이다.
Bruno Taut [Morden Architecture]
-그러나, 이보다 더욱 설득력 있는 것은 다음과 같은 말일 것이다. ; 즉, 건축은 그 자체가 예술이며 그 용도를 초월하기 때문에 영원하다.-
Gio ponti [In Prase of Architecture]
미적가치를 기능의 부산물로 여기는 대부분의 이론들은 두 가지 일반적인 방법으로 언급된다. 첫째로 독일의 표현주의 건축가 bruno taut의 말에서 인용한 것과 같이 그 기능을 충족시키는 건물은 아름답다는 사실이다. 둘째로, 그 기능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건물은 아름다울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러한 두 가지 견해는 세 번째 견해를 함축한다. 즉, 형태는 기능의 부산물이여야 하기 때문에, 이것은 디자이너의 주요 관심사가 될 가치가 없으며, 따라서 건축이 단순히 응용예술-순수 예술이 아닌-임에 틀림없다는 사실이다.
건축이 가구와는 현저하게 다른 강력한 예술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인정한다면, 건축이 항상 기능을 수용해야 한다는 사실이 진심이 아니라는 점을 우리는 알고 있다.
건축의 모든 기능주의 이론은 세 가지 유추중 하나에 그 기본을 두고 있다. geffry scott의 [architecture of humanism]에 저술된 4가지 개탄 중 세 가지 유추의 표현을 빌리자면 다음과 같다.
1) 기계적 유추 (mechanical) ; Le Corbusier "주택은 살기위한 기계이다."
산업혁명 이후 기계 숭배 사상의 대두.
2) 윤리적 유추 (ethical) ; Socrates - 미(美)와 유용성(有用性) 사이에의 연관성,
선(善)과 유용성(有用性) 사이의 연관성
Shaftesbury 백작 - "예술적 감상능력의 개발이 도덕적 발전의 준비."
3) 생물학적 유추 (biogical) ; Frank Lloyd Wright - 최고의 건축 작품은 모든 부분이 필연적으로 기능적 방법으로 연관되어 있는 단일의 유기체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 ←Louis Sullivan의 적극적 지지
건축은 여러 측면에서 복잡한 기능을 갖는다. 기본적인 차폐의 기능에서 시작하여, 특별한 활동의 좀 더 특별한 수용, 기계적 기능, 음향적 기능, 구조적 기능, 구축적 기능, 환경 속에서 건물의 기능 등을 포함 한다.
1. 구조적 기능
구조적 기능은 건축에 근본적인 것이다. 이것은 중력의 당김으로부터 벗어나려는 구조물의 노력이다. 가치가 있는 구조적 태도중 하나는 그 자체와 그 내용을 지지하는 건물의 기본적 역할이다. 그 예로 Cantilever가 있는데, 이는 실제로는 보에 하중을 주는 예민하고 효과적인 방법이지만, 그 수직 지지체 위에 돌출하고 있는 건축의 하중을 남겨놓는 구조법이다. 또 다른 비범한 구조적 행동은 지구의 중력에 대해서가 아니라 높은 바람이나 지구와 관련된 다른 힘에 대해서 고정된 것이다. 초고층 빌딩의 cantilever로 볼 수 있다.
구조적으로 중요한 것은 건물이 서있다는 사실이며, 미학적으로 중요한 것은 오직 표현이다.
ex) 1.그리스의 건축물 (주로 신전)
Rhys carpenter "이 신전에는 '어떤 구조적 부적절함'이 존재하지 않지만, 구조적 창의성이나 야망이 존재하지 않는다."
2. John Hancock Building의 교차형 버팀대
자연의 힘에 대항하여 작용하는 건축의 힘이라는 인상을 받지만, 실제 작용하지 않는다. 즉, 미학적으로 분열되는 것은 그 실제의 강도에 관련 없이 약하게 보이는 부재이다. 우리는 구조적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지만, 상부와 하부가 서로 어울리지 않는 이러한 구성은 전체적으로 예술과 접할 기회가 없다. 그러나 명백한 구조적 불안정성이 예술가에 의해서 이점으로 전환된 경우도 있다. 1924년 el lissitzky와 mart stom에 의하여 제안된 '구릉의 지주(cloud props)계획안'이 그것이다.
2. 구축적 기능
구축적 기능주의는 구조적 기능주의와 유사하지만, 건물을 함께 묶는 요소보다는 오히려 건물을 형성하기 위해 조립되는 요소를 취급하고 있다.
·Eero Sarrinen의 General Motors 기술연구소
"공업용 건물의 경우에서 항상 그러했던 것처럼, 좀 더 전문화된 일정한 단위의 기능은 시각적으로 조직화하기에 가장 흥미로운 요소를 건축가에게 제공한다. 그러므로 양쪽에 쌍을 이룬 원형서가가 열을 지어있는 엔진 시험소 건물은 가장 개인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으며, 또한 건축적으로도 가장 우수한 성질을 지니고 있다."
-Henry Russel Hitchicock & Philip Johnson [the building we see]
그러나 조심성 있는 구축적 문제들도 과장될 수 있다. 그 형태가 무엇이든 간에 어느 건물도 일체화된 것은 아니며, 그 구성요소를 함께 결합시키는 일은 건축가의 노력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서로 결합시키는 최고의 상태에서, 건축은 다른 종류들의 결합 및 연결의 본성, 그리고 접합되는 재료의 본성에 정확한 감수성을 전달해 준다. 이중 건축의 촉감은 무시될 수 없는 기능적 측면이다. 이 단순한 존재에 의해 우리의 마음에서 직접적인 미학적 반응을 유도해 낼 수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만 한다. 이러한 역학은 반기능적인 것이 아니다. 이러한 가치나 기능 중 그 어느 것도 우리의 정신적 매개체를 통하지 않고서는 우리에 의해 인식되지 않는다.
제 7 장 지각(知覺)
- 모든 미는 그것을 지각하는 마음의 감각에 따른다.-
frank hutcheson [도덕철학의 체계]
건축 예술의 많은 측면이 매우 주관적인 반면에, 우리가 건물을 지각하는 행위는 우리 자신에 관한 생물학적인 일부이며, 따라서 과학의 일부이다. 우리 눈의 구조와 뇌의 용량은 변하지 않고 지속되는 반면에, 우리가 우리 자신을 이용하는 것은 매우 변화하기 쉬우며, 그러한 변화는 우리의 지각의 구조(Mechanics)를 특정 짓는다.
1. 정보를 수집하는 첫 번째 방법 ; 미학적 반응의 기반
건물 형태로부터 우리에게 굴절된 빛에 반응하는 일련의 물리적 환경, 즉 물체는 어느 것이나 한 번에 보여지는 것이 아니라, 근육운동 지각과정의 결과로서 보여진다.
2. 정보를 수집하는 두 번째 방법 ; 미학적 반응의 수정 및 비교·분석
수집된 정보 중 일부를 뇌세포에 저장하여 他정보와 비교·분석하는 활동을 말한다.
지각의 순간에 우리의 감성, 편견, 의향뿐만 아니라, 축적된 부수적인 사실들도 지니고 완성될 때조차도, 본래의 사실을 일부 보충하는 것은 유용하기 때문이다.
건축을 잘 감상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건축 형태의 시각적 증거가 비시각적 자료에 의해 모호하게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만 한다. 우리의 눈이 건물에 관해서 우리에게 말해주는 내용 전체가 진실인 것은 결코 아니다. 그것은 단지 진실의 중요한 부분이다. 시각적 사실들에 대해 이와 같이 정신적인 보충이 작용할 수 있는 명확한 방법 중 하나는, 우리가 보는 형태가 그와 같은 단순성을 불완전하게 나타낼 때, 우리가 근본적인 단순성을 추구하는 것이다.
우리의 지각적 보충은 여러 가지 방법-하나로 전체를, 전체로 하나를-으로 예술을 도와준다. 즉, 우리는 구성의 논리를 추구한다. 동시에 건축가는 역설적인 논리의 형태에서 벗어남으로써, 우리가 그러한 논리를 발견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ex) 1. 그리스 신전의 거의 지각될 수 없는 '정교한 처리'에 대한 설명 중 한 가지는, 정교하게 처리된 부분들이 좀 더 규칙적인 간격설정, 좀 더 획일적으로 가늘어지는 기둥, 좀 더 균형 잡힌 표면에서 발생할 수 있는 착시현상을 교정하도록 design되었다는 사실.
2. 미묘한 왜곡에 대한 설명 중 다른 것은, 이러한 왜곡된 처리가 구조물의 하중에 대해 인간적인 반응을 암시하도록 의도되었다는 사실.(stylobate의 상승추진. 기둥의 배흘림(entasis)) 그러나 건축이 지각되는 대상만은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다른 대상을 지각하는 일종의 무대로서 이용된다.
? 건물 유형에 의존한다면 ; 더 작은 예술품, 무용, 오페라, 예배 등을 지각.
? 건물 유형과 무관하다면 ; 건축은 항상 우리가 다른 사람을 지각하는 하나의 무대이다.
그리고 구축된 공간속에서
a) 내부와 외부의 대(大)공간에서는 먼 거리에서 사람을 인식시키며,
b) 작은 공간에서는 사람을 친밀하게 만들며,
c) 수직적인 축 ; 사람을 위에서 아래로 보도록 함.
d) 경사로·계단 ; 사람의 시선을 대각선으로 보도록 함
인체의 전시는 건축이 지닌 영원한 즐거움의 원천 중 하나이다. 건축은 또한 신체에 의해 측정된다. 우리가 건축의 크기와 성격을 지각하는 것은, 우리 자신을 참고물로 이용하는 방법을 통해서이다.
scale ; 상대적인 크기를 의미한다. 왜냐하면, 크기에 대한 우리의 지각은 다른 어떤 대상에 대해 항상 상대적이기 때문이다.
-Charls Moore & Gerald Allen [Diamension] 중에서
건축은 지각될 수 있는 대상이며, 다른 유형의 대상을 위한 무대이며, 우리 자신을 위한 연병장이며, 이것은 또한 우리가 무형의 정보를 배우는 수단이기도 하다. 여기서 우리는 대단히 기계적인 시각적 현상의 지각을 떠나, 좀 더 복잡한 의미의 지각을 만난다.
제 8 장 건축의 의미
-순수 예술로서의 건축은 표현 예술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건축의 임무는 세상에 관한 이야기 혹은 인류의, 또는 신학의 이야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
russell sturgis [미국 건축가와 건축뉴스] 1980
-그러나, 예술은 항상 상징적 이야기의 형식 이였으며, 그러한 형식으로 존재해야만 한다. 그리고 상징이 존재하지 않고, 따라서 이야기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는 예술도 존재하지 않는다. -
herbert read [the origins of form in art]
건축은 세상의, 그리고 세상에 관한 것이다. 그것은 결코 단순하게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그것은 서로 다른 의사를 전달하며, 내용을 지니며, 메시지를 전달한다. 이러한 메시지 중에서 가장 뚜렷한 것은 우리가 외연적이라 부르는 것이며, 이것은 명백하며 특유한 것이다. (외연적 의미)
내연적 의미는 주로 독자적인 현저한 구조나 그 자체를 지지하는 방법에 관한 메시지이다. 기본적인 내연적 의미는 다른 종류의 구조, 건물의 일반적 성질, 비례의 정확성, 세부표현에 대한 몰두, 또는 재료의 적절한 사용 등에 관계할 수 있다. 어느 정도까지는, 건물재료나 기술이 실제적인 목적을 위한 수단뿐만 아니라, 그들 자신의 목적이다.
"건축가의 임무는 건물재료들에 생명을 불어넣는 것이며, 이들에게 사상이나 감정의 상태를 고무시키는 것이며, 이들에게 주관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Louis Sullivan
"건축의 임무는 천연재료들을 이용하여 감정적인 관계를 확립하는 것이다."
-Le Corbusier
건물의 내연적 의미는, 건물의 소유주나 거주자 또는 이용자들에게 관하여 무엇인가를 암시하려는 건축가에 의해 잘 처리될 수 있다. 고정된 성격은 여러 가지 근원-주로 건축주, 건설자, 그리고 일반사회의 가치-들의 결합에서 유래하고 있다. 그러한 성격은 우리에게 그와 같은 근원들에 관하여 알려주며, 그러한 사회학적 정보는 건축 작품의 의미 중 일부다. 물론 하찮은 것에서 문명을 추론하는 것도 가능하고 건축을 확대 해석하는 것도 가능하다. 극단적인 예는 1878년 [미국건축가와 건축뉴스]에 게재된 내용이다.
p160 하단그림.
다른 장식적 형식은 다른 종류의 정보를 전달해 준다. 건물의 연륜으로서 그 표면은, 그들에게 작용하는 자연의 여러 가지 힘에 관해 우리에게 이야기해 준다. (비, 바람, 눈 등으로 인한 부식 등) 질감도 역시,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성질을 건물에 제공할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스스로 우리자신의 질감과 매우 밀접하게 지내기 때문이다. 거친 것이 부드러운 것보다 항상 우수하다는 제안은 적당하지 않다. 매우 우수한 건축물 중 일부는, 그 우수성의 많은 부분을 매끄럽게 가공한 표현에서 유도해낸다. 우리는 질감이 독자적으로 건물을 예술로 승화시킬 수 있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그러나 질감이 건물을 평범한 것에서 특별한 것으로 승화시킬 수는 있다.
"당신이 건물에 관련된 사실을 모두 안다면, 당신은 건물형태를 결정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곤란한 점은 '관련'이 주로 문제에 대한 디자이너의 견해에 의존한다는 사실이다."
-Nigel Melhuish [교회 건축을 향하여] 중에서
이러한 관점의 실천은 건축을 과학 이상의 것으로 만드는데 도움을 주는 요소이며, 건축가가 행하는 특수한 선택은 건물에 또 다른 내면적인 다른 의미를 부여한다.; 즉 건축가에 대한 정보와 그 건물의 애용자에 대한 건축가의 태도에 관한 정보가 그것이다.
건축이 전달하는 또 다른 부차적 메시지가 있다. 메시지가 독특하고 외연적인 줄거리를 말하지 않을 때에도, 그 표현적인 요소들은 초기부터 건축에 포함되어 왔다; 즉 동물의 형태, 식물의 형태, 그리고 인간 자신의 형태가 그것이다. 우리가 예상한대로, 지어진 건물들은 이것이 자연이나 인간의 형태의 작은 부분을 표현할 때, 우리에게 많은 영향력을 미친다. 그러한 표현이 의도되지 않았을 때조차도, 우리는 건물에게서 우리 자신의 모습과 유사한 것을 본다. 건물요소는 직접적으로 닮지 않고서도 의인화 될 수 있다. 어떤 의미에서는 기둥은 남자를 나타내고, 상부를 덮는 아치는 여자를 나타낸다고 생각할 수 있다. 또 다른 의미에서는, Mars나 Hercules와 같은 강력한 신(神)을 위한 성전은 전통적으로 강력한 doria식 주범(柱範)으로 디자인된 반면에, 좀 더 우아한 Carintion식 주범은 venus나 Flora와 같은 신에 적합한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러한 내연적 의미, 그러한 연상과 의인화는 건축의 핵심은 아니지만, 이들은 건축의 맛에 많은 것을 첨가해 줄 수 있으며, 숙련된 건축가는 이들을 항상 이용해 왔다.
ex) vanna venturi house. 1962년 robert venturi
이 주택은 특이성이 충만한 작은 건물이다. 그러나 이것은 관찰자로 하여금 진부한 주택을 상기하도록 의도되었다. 마치 어린이가 그리는 종류의 주택-경사진 지붕, 중앙의 굴뚝과 중앙 진입구등-과 같다.
"나는 이것이 주택이라는 기본적인 약식의 본질을 성취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Robert Venturi
"건물은 건물 그 자체의 종류와 같이 보여야 한다."
-A.W.N Pugin
"건축은 우리에게 분위기를 유발시킨다. 그러므로 이러한 분위기를 정확하게 만드는 것이 건축가의 임무이다."
-Adolf Loos
이 건물의 메시지는 그것이 주택이라는 사실뿐만 아니라, 포근하며 아늑하고 편안한 종류의 주택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말하고 있으며, 또한 이것은 전통적이며 풍토적인 형태와 장식에 매료되어 관습적인 추상을 피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의미가 끝나고 연상이 시작되는 곳은 일반적으로 파악하기 어렵다. 마찬가지로, 건물이 의미하는 바와 우리가 건물이 어떠하다고 알고 있는 바를 서로 구분하는 것은 어렵다. 아마도 건축 예술의 최고 수준에서, 우리는 수단과 목적, 매개체와 메시지를 구분할 수 없을 것이다. 완벽한 작품에서 내용은 내재적이고 구조나 매스에 의해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건물과 그 의미는 서로 분리될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그것을 출현시킨 형태와 일체화 시켜 보고자 하는 것은 다른 의미이다. 그것은 말로는 완전하게 파악될 수 없는 의미, 즉 건축 이외의 다른 어떤 매개체로도 충분하게 표현될 수 없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곧바로 식별될 수 있는 의미일 것이다. 번역할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며, 건축적 의미의 명료성은 건축적 질서에 의존한다.
제 9 장 건축적 질서
-만일 연극의 제 1막에서 벽에 걸려있는 총이 보였다면, 마지막 장에서 그 총은 발사되어야만 한다.-
Chekov에게서 인용
-다른 한편으로는, 사건의 발생가능성이 적으면 적을수록, 그 발생은 더욱 많은 정보를 제시한다.
-Rudolf ambein [entropy & art]
-그리고, 어떤 기회를 포착하는 고양이만이 가치 있는 고양이이다. 때때로 나는 내 자신이 결코 듣지 못했던 것을 연주한다. -
Thelonius monk에게서 인용
이상에서 질서에 관한 많은 것이 이미 언급되었다. 부분과 부분, 부분과 전체, 건물과 장소 등이 추론된 관계, 반복된 규칙성의 효과, 완벽한 개체의 지각, 건설된 실체의 표현, 내재적 의미의 중요성 등은 모두 연의 산물이 아니라 질서의 산물이다. 디자인의 논리적 질서 확립은 축가의 임무 중 핵심적인 것이다. 어떠한 예술작품에서도 완전한 질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완전한 무질서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건축은 완전한 질서와 무질서, 동질성과 혼란 사이의 어딘가에 위치해야만 한다.
"위계질서는, 완벽하게 질서를 이루거나 완전하게 무질서를 이룬 것만을 제외한 모든 체제에 필수불가결한 것이 된다. 왜냐하면 이러한 것들은 구성단위와 전체 조합 사이에 어떤 표준도 지니지 않기 때문이다."
-Cyril Stankey Smith
건축에 있어서도 위계질서는 구성단위와 전체 조합을 서로 연결시키고 모든 부분들을 하나의 단위로서 지각될 수 있는 것으로 만들기 위해 역시 필요하다. 그러나 구조적 질서가 자연에 항상 존재할지라도, 자연이 건축적 질서를 위한 모델이 될 수는 없다.
"화면에서 불필요한 것들은 모두 해로운 것들이다."
-Matisse
그러므로 우리는 예술적 질서를 자연에 반대되는 창조물로서. 즉, 우연이 아닌 인간의 계획의 결과로서 생각할 수 있다. 예술은 자연에 대한 인간의 승리를 보여주는 증거물이다.
"미개인의 건물의 경우에서 조차도 '가장 임의적이고 일치하지 않는 형태와 선들이 조화를 이룬다. 왜냐하면 그들에 대한 감정의 통일은 특징적인 전체를 창조하기 때문이다."
-Goethe
그러므로 건축적 질서는 우리가 친밀한 질서일 필요는 없다.; 그것은 예술가에게는 대단히 개인적일 수 있으며, 관찰자에게는 완전히 새로울 수 있다. 우리는 건축이 지각될 수 있는 시각적 대상으로서 뿐만 아니라, 실용적인 대상으로서 우리 자신의 용도에 적합한 것이 되도록 건축에 논리를 불어넣는다.
건축에는 예상되지 않았던 놀라움이 존재할 수 있으며 논리성은 놀라움을 배제할 필요가 없다. 여전히 논리성과 놀라움은 자주 상충한다. 이러한 갈등은 어떻게 해결될 것인가? 어떠한 놀라움이 질서를 유지하며, 어떠한 놀라움이 질서를 파괴하는가?
상상할 수 없는 것을 상상해보자; 즉, 절대적으로 중립적인 건물이 그것이다. 이것은 훌륭한 건물도 아니고, 나쁜 건물도 아니다. 이 건물은 너무나 평범해서 그 구조나 그 건설재료에 관해 읽혀질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이 건물은 훌륭하지만, 명백히 흥미가 없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의 소규모 건물이 반응할 여러 가지 조건들을 상상해 보자. 경사진 대지는 불규칙한 기초를 요구할 것이며, 설하중(雪荷重)은 경사지붕을 요구할 것이다. 건물의 한쪽 면에 주차장을 배치하면 입구가 그곳에서 가장 가까운 쪽에 위치할 것이며, 이러한 위치는 내부의 동선 자체를 변화시킬 것이다. 내부의 기능은 중립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효과를 필연적으로 산출할 것이다. 이러한 효과는 대부분은, 우리가 우리의 변형된 건물을 처음으로 대할 때 우리를 놀라게 할 것이다. 그러나 처음에만 그러하며, 우리가 건축의 결정요소를 알게 된 이후로 그들은 더 이상 놀라움을 주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최초의 "앗?" 하는 놀라움은 "아하!"하는 감탄이 될 것이다. 좀 더 개인적이고, 다소 덜 실질적인 요구사항에 응답하는 놀라움에서 이와 같은 반응이 나타날 수도 있는데, 이것은 건물의 내연적 의미를 강화하거나 또는 일부 무형의 예술적 충동을 표현하기 위한 예술적 조작이다.
모든 건축가들은 개념을 약간씩은 지니고 작업한다.; 건축은 너무나 복잡해서 어떤 임기응변적인 방법으로는 성공적으로 완성될 수 없다.
ex) calrence sohmidt의 수공주택 ; 장대함과 화려함
greek의 건축물들 ; 모든 건물요소 사이의 관계를 지배하는 불변의 법칙
오늘날의 단순한 창고 ; 구조적 격자(grid)
사무실 내부 ; 작업 장소의 크기와 형태에 바탕을 분 모듈(module)
그러나 훌륭하게 디자인된 건물의 핵심에는 항상 개념이 존재한다.
"건축 작품은 의미심장하고 유기적이고 극적일 수 있지만, 그것은 도식적(schematic)이지 않다면, 예술 작품이 되지 못할 것이다. '도식적'이란 동등한 원리에 따라 부분들을 체계적으로 배치하는 것을 의미한다."
-Claude Bragdon
우리는 이러한 두 가지 종류의 즐거움을 서로 구분해야만 한다.; 즉, 정보를 전달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해야 한다. 전자의 종류는, 항상 좀처럼 말하지 않는 중립성에 개성을 만들어 낸다. 후자의 종류는, 중립성을 무질서의 상태로 타락시킨다. 그러므로 질서는 놀라움에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의미 없는 놀라움에 반대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장(章)을 시작할 때 인용했던 "기회를 포착하는 고양이"에 대한 Monk의 진정한 의미의 기회는 우연적인 기회가 아니라, 재능과 경험에 바탕을 둔 직관적인 도약이다. 건축은 비록 번역할 수 없는 것일지라도 하나의 의미를 지녀야 하며, 건축에서 논리적 질서는 목적이 아니라 그 의미를 분명하게 하고 그것이 지각되도록 하는 수단이다.
제 10 장 결론 : 세 가지 관계
-"문이 잠긴 것을 알았을 때, 나는 밀고 당기고 차고 두드렸다.
문이 닫힌 것을 알았을 때, 나는 손잡이를 돌리려 했다. 그러나 "오랜 휴지(休止)가 있었다.
"그것이 전부야?" alice가 겁에 질려 물었다.
"그것이 전부야." humpty dumpty가 응답했다.
" 안녕"
-Lewis Carroll [through the looking-glass]
우리는 건축의 실제적인 책임에 의해 방해받지 않는 건축 예술을 실험하기 위해서 건축의 다양한 측면들을 서로 분리시켜 고찰하려 하였다. 이것은 단지 부분적인 성공이었다. 우리는 미와 기능의 밀착은 결합력이 적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도 있었지만, 그들이 분리된 상태에서는 건축예술을 파악할 수 없었다. 그 대신 분명해진 것은, 점차적으로 분명해지고, 때로는 암시되고, 때로는 아주 함축적인 세 가지 관계가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건축의 미와 기능이라는 두 가지 측면은 서로 무관하지는 않지만, 이 둘은 상호 종속적인 것이 아니라, 형제관계로서 서로 관련되어 있다.
건축의 핵심에 있는 세 가지 관계는,
1.대지와 건물의 관계,
2.인간과 건물의 관계,
3.건물과 건물 자체의 관계이다.
1. 대지와 건물의 관계 ; 건물은 우리가 지각할 수 있는 방법으로 대지의 크기나 힘을 알려주어야 한다. 대지의 힘을 표출하는 것 중 가장 명백한 것은 중력이며, 그와 같은 감각은 중력의 인력에 대한 시각적 양보, 혹은 그것에 대한 시각적 반작용 등으로 표현될 수 있다.
중력에 대한 반응처럼, 환경에 대한 건축의 반응은 실용적인 장점은 물론 시각적 장점이 될 수도 있다. 건물은 그것이 변화를 보여줄 때, 그 음영의 패턴이 계절을 반영할 때, 그들이 예상되고 계산되었음을 알도록 수년에 걸쳐 풍화나 얼룩이 발생될 때 가장 생명력이 있다.
건축이 가지는 가장 큰 즐거움의 잠재력중 하나는 변화를 통해서 스스로 표현하는 방식이다. 건축은 또한 지구의 자원과 그 상대적 가치에 대한 의식을 보여줌으로서 대지와 관련되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가장 경제적인 해결책이 항상 최대는 아니며, 가장 값비싼 것이 가장 최선은 아니기 때문이다.
2. 건물과 인간의 관계 ; 가장 간단한 차원에서, 이것은 크기와 형태의 문제이다. 모든 건물요소들은 사용자의 육체적 특성을 고려하여 설계되어야만 한다. 더욱 미묘한 것은, 건물이 인간의 심리상태에 관련되는 방법들이다.
"건물의 중심은 인체이다. 그 방법은 돌로 인체의 적절한 상태를 복사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정신의 분위기는 윤곽선을 따라서 나타나는 형태에 힘과 웃음, 공포와 평온을 준다."
- Geaffrey Scott
건물과 건축요소들이 건축을 창조해 내려면, 이용자의 지각을 의식하고서 설계되어야만 한다. 인간과 건물의 결합은 불가피하며, 그 관계는 오로지 적합한 표현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인간은 선택에 의해서가 아니라 필연에 의해서 자신의 세계를 건물과 함께 공유한다.
3. 건물과 그 자체의 관계 ; 전체 속에서 부분과 부분, 그리고 부분들을 서로 결합시켜 일관성을 유지하는 관계. 우리에게 건축과 그것을 구성하는 세부표현들은 같은 장소에서 공존한다. 우리는 다만 우리가 전체와 그 부분들에 관한 지식을 악간씩 개발하고 그들이 함께 속한다는 사실을 이해한 후에야, 이 예술이 이해될 수 있을 뿐이다.
우리는 건축 작품이란 이 세 가지 관계를 모두 성공적으로 다룬 건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 만약 어느 작품이 이러한 방법 중 어느 한가지에서라도 실패한다면, 그것은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예술로서 실패한 것임에 틀림없다.
우리의 세 가지 관계는 가장 단순하고 직설적인 방법으로 해결될 수 있다. 일부 경우에서 (예를 들면, 건물과 대지의 관계에서, 건물과 대지가 불규칙성이나 독특함을 모두 결여하고 있을 때) 단순하고 직설적인 관계는 우리를 확신시킬 수 있는 유일한 관계이다. 다른 경우들에서, 건축가는 놀랍고, 예측할 수 없고, 대담한, 상상력의 도약에 의해서만 성공할 수 있다. 이러한 후자의 접근 방법은 가장 흥미 있는 건축을 만들어 내지만, 건축가가 이러한 경로를 선택함에 있어 피해야만 하는 유혹이 존재하고 있다. 건축가는 극적인 사건에 우리의 관심을 집중시킴으로서 우리의 기대를 불러일으키면서, 우리에게 과거 예상했던 것보다 더 많은 정보를 남겨 놓아야만 한다. 우리가 이미 언급했듯이, 그러한 놀라움은 우리로 하여금 "앗!"하고 질문하게 하지 않고 "아하!"라고 감탄하게 하여야만 한다.
건물을 건축의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과정의 핵심으로서 세 가지 관계를 제시하는 것은, 확실히 미학적 성공을 위해 처방을 제공하는 것은 명백히 아니며, 관찰자에게 세 가지 질문을 제공하는 것도 아니다. 우리가 건축가의 작품에 반응하는 방법도, 건축을 바라봄에도 논리적인 과정이 존재하고 있는데, 만일 우리가 그 과정을 알고 있고 그 과정을 경험하였다면, 만일 우리가 무엇보다도 먼저 건축의 미학과 그것의 수많은 다른 속성들을 구별하고, 근본적 형태와 피상적 장식을 서로 구별한다면, 우리의 관찰은 더욱 많은 정보를 제공받을 것이다. 충분한 정보를 제공받는 것도 자발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건축예술에서는 분석을 피하는 것, 우리 마음의 가장 비밀스런 부분에서 우리를 감동시키는 것, 즉 유효성을 초월할 뿐만 아니라 합리적이고 일상적인 것을 모두 초월한 무엇이 존재한다. 건축은 우리의 가장 크고, 가장 견고하고, 가장 복잡하고, 가장 영원하고, 가장 강력한 예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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