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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주목한그리스도인(1) 세상과 구별되었던 한 사람 그리스도인 (요1:19-23)
먼저 작자미상의 시 한편을 소개합니다.
어쩌면 꽃의 눈부신 자태와 향기가 벌레를 감동시켰는지 모른다.
이 모습으로 이렇게 살아서는 안되겠다고....
저 꽃과 어울리는 존재가 되어야겠다고...
꽃은 그렇게 추한 벌레에게마저 희망이 되었다.
꽃을 사랑한 벌레는
결국 목숨을 걸고 변화되고 변화되어 나비가 되었다.
꽃과 어울릴 멋진 날개를 펄럭이는..
그리스도인!
그 꽃과 같았던 향기로운 존재가 이제는 시들고 져서, 바닥에 떨어졌습니다. 그 존재감이 요즘은 땅에 떨어진 정도가 아니라 시궁창에 처박혀 있는 것 같습니다. 학교, 직장, 세상 어디에서도 교회 다니는 사람을 비정상적인 모자란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전혀 매력적이지 못한 존재, 그것이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입니다. 과연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모습도 그러했을까요?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의 주목을 받고 강력하게 영향을 끼친 사람 중 한 사람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그가 바로 세례요한입니다. 헤롯왕은 세례요한을 목베어 죽인 후에, 예수님의 활동 소식을 접하면서 세례요한이 다시 살아났다고 할 정도였지요? 사람들은 세례요한을 메시아나 ‘오실 그 선지자’라고까지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요한 만큼 큰 자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무수한 사람들이 세례 요한에게 몰려와서 구원의 길을, 살 길을 물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말대로 회개하며, 세례를 받았습니다. 복음서는 예수님의 이야기보다 먼저, 세례요한의 이야기를 그렇게 다루고 있습니다.
도대체 세상은 세례요한의 무엇을 보고 그토록 그를 주목했던 것일까요? 그에게는 오늘날 우리에게 없는 그 어떤 것이 있었던 것일까요? 그 이야기를 새로운 설교시리즈로 시작해보려 합니다.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무엇으로 세상 앞에 서야 할까요? 우리는 이 땅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어떻게 세워나갈 수 있을까요? 그리고 무엇을 위해서 어떻게 사는 것이 평범함 속에 위대함을 창출해내는 삶이 될 수 있을까요? 세례요한으로부터 살펴보고자 합니다.
세상이 주목한, 첫 번째 그리스도인 세례요한, 그의 삶의 핵심 가치들을 살펴보시면서 저와 여러분의 삶도, 그리스도인으로서 분명하고 신선한 향기와 감동을 주는 삶으로 세워지길, 저 벌레들도 이렇게 살아서는 안되겠다 자신을 추스르고 나아가 희망이 되는, 아름다운 꽃으로 세워지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은 모두 나름대로의 고유한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시골의 돌담길을 지나다보면 돌과 돌 사이에 난 조그만 구멍 안에도 거미가 예쁘게 집을 짓고 바지런히 살아가는 것을 볼 수 있지요? 무심한 듯 놓여진 돌들 사이에도 생기도는 삶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바람에 떨어져 있는 낙엽을 들춰 보세요. 낙엽 아래 이름을 알 수 없는 생물들이 모여서 오밀 조밀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스팔트가 깔린 도로 틈 사이로 흙이 한 줌만 있어도 뿌리를 내리고 파릇파릇 돋아나는 이름 모를 풀들도 있지요? 그런 것들을 가만히 들여다 보고 있노라면, 온몸이 떨리는 감격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내 나를 향한 준엄한 꾸지람이 들려옵니다. 그 앞에서 통렬한 반성을 해보게 됩니다.
저 척박한 땅에서도 따가운 햇살과 싸우며 저렇게 생명의 움을 틔워내고 있는데, 나는 어찌 이리도 나약한가하고 말이지요. 나는 저에 비해 이루 말할 수 없이 풍요로운 삶을 누리고 있는데, 왜 이토록 무력하게 살아가고 있는가 말이지요. 어째서 나는 그보다 아름다운 삶을 틔워내지 못하고 있는가? 어디를 둘러봐도 우리 주님 지으신 모든 것들이 아름다운데, 왜 나에게는, 가장 아름다운 형상으로 지음받은 나에게는 그런 아름다움이 보이질 않는 것일까요?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내 마음 속에 그분을 모시고 산다는데, 어찌하여 어느 누구하나 주목해 바라볼만한 매력이 없는 것일까요?
성경 속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천하를 소동케 하는 자들’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어디를 가나 인기가 많아서 천하가 소동하든지, 아니면, 하도 시기하는 사람이 많아서 가만두지 않는 사람들 때문에 소요가 일어나곤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어떤가요? 인기가 많아서 사람들이 구름떼처럼 몰려드는가요? 가만두면 안되겠다고 시기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소요와 폭동이 일어나나요? 오늘 우리는 어째 그래 매력적이지도 못하고 영향력을 미치지도 못하고 있는 것일까요?
성경에 예수님 만큼이나 세상을 놀라게 한 인물이 있습니다. 신구약 중간기 400년의 세월을 넘어, 세상이 다시 주목했던 사람이 있습니다. 그가 세례요한입니다. 그는 온 유대와 이스라엘의 사람들이 찾아와 만나고자 했던, 세상이 주목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종교지도자들, 노동자들, 농민들, 어부들, 상인들, 지식인들 등, 나이와 계급, 지위와 성별을 막론하고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서 그의 앞에 와서 가르침을 받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세례요한이 죽은 뒤에도 그를 따르고 추종하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이지요?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부활한 세례요한이라고 믿었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보면 당시 세례요한은 예수님보다도 사회적인 영향력이 더 컸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도대체 세례요한의 어떤 점들이 그토록 사람들을 매료시켰던 것일까요? 세례요한의 무엇이 그토록 매력적이었기에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고 추종했던 것일까요? 이것을 배워보고자 합니다. 인기를 위해서가 아니라,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 앞에 그리고 세상을 향해 회복해야할 기본적인 가치가 그에게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 그렇다면 그가 지녔던 매력적인 항목들, 가치들, 무엇일까요?
성경은 먼저 이야기합니다. 입은 옷도 아니고, 먹는 음식도 아니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주목을 받을 수 있는 방법으로 쉽게 외적인 부분들을 생각합니다. 아름다워지기 위해 주목받기 위해 옷에 얼굴에 헤어스타일에 신발에 악세사리에 신경을 씁니다. 유행하는 스타일, 세련된 디자인의 옷, 그리고 알 사람들은 알아보는 명품들로 자신을 꾸미려합니다. 그리고 더 잘 꾸미고, 수준을 높이기 위해 연구하고 공부하고 구하기 위해 노력을 합니다. 그런데 더 좋은 옷, 더 예쁜 옷을 입으면, 더 비싼 악세사리를 하고 더 비싼 가방을 메면, 우리는 매력적인 사람, 아름다운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오히려 덕지덕지 매고 차고 끼고 걸쳐서 천박스러운 경우들이 더 많지 않더냐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의 인기가 그런 외적인 부분으로 말미암은 것이겠느냐는 것이지요? 성경은 그를 이렇게 소개합니다.
“이 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이었더라”(마3:4)
세례요한은 낙타털옷을 입고 다녔다고 합니다. 이 낙타털은 무슨 밍크코트 같은 것으로 생각하시면 곤란합니다. 무스탕 이런 것 아닙니다. 이 낙타털옷은 당시 노동자들이 막일을 하기 위해서 주로 입던 거친 가죽옷입니다. 무거운 돌이나 나무를 나를 때, 어깨가 상하지 않도록, 질기고 두꺼운 이 옷을 입었던 것이지요? 다시 말씀드리면, 고상하게 제사장들이 입는 옷이 아니었습니다. 하루 하루 땀흘려 먹고 살아야하는 노동자들이 입는 옷이요, 사회적으로 비천한 사람들이 낮의 더위를 견디고 밤의 추위를 이기기 위해 이불겸 입었던 옷입니다. 그러니 그가 입은 옷이 남들보다 세련되고 있어보여서 사람들이 주목하거나 따른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그가 먹은 음식이 남달랐을까요? 말씀을 보니 그것도 아닙니다. 세례요한의 음식을 보고 자연주의 식단이니, 웰빙식단이니, 베지테리언이니 뭐 이런 이야기를 하시는 분들도 계시는데, 먹을게 없어서 먹은 것입니다. 세례요한은 메뚜기와 석청으로 끼니를 때웠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 발견할 수 있으면 먹었고, 발견 못하면 못 먹는 음식을 먹은 것입니다. 이것은 광야생활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광야를 떠돌다 메뚜기를 잡아 먹었고, 토굴 속이나 바위틈에서 잠을 청하며 석청을 발견하고 먹었던 것이지요? 그렇다면 당시 웰빙 바람이 거세게 불어서 당시 사람들이 세례요한을 추종했던 것일까요? 당시 사람들은 하루하루 끼니를 해결하기도 어려울 만큼 가난했습니다. 육해공의 물품들이 편의점과 마트가 난립해서 원활하다 못해 넘치게 수요와 공급이 이뤄지던 때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있는 것 먹고 없으면 굶고 사는 사람들이었던 것이지요? 그런 사람들이 먹는 것들을 보면서 웰빙이네, 자연주의 식단이네, 베지테리언이시네요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무지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당시 사람들이 세례요한의 학식에 매료된 것일까요? 학식은 당대최고석학 가말리엘이지요, 그리고 그의 제자 사도바울이지요. 그러나 세례요한에게는 바울처럼 내세울만한 학벌이 없었습니다.
그럼 무엇일까요? 놀라운 성령의 기적이나 이적이 나타났던 것일까요? 성경에 세례요한이 기적을 베풀었다는 기록은 한 구절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럼 도대체 무엇일까요? 왜 저 헤롯대왕은 저 세례요한을 두려워했을까요? 왜 수많은 사람들이 오늘 그에게 가서 새로운 삶을 꿈꾸고 기대하고 세례를 받았을까요?
세례요한이 입은 옷 때문도, 음식 때문도, 학벌 때문도, 기적과 능력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그가 입은 옷, 먹은 음식 지지리도 가난한 사람이었다는 반증일 뿐입니다. 내세울만한 지식도 없었고 학식도 없었습니다. 기적도 이적도 치유도 축귀도 세례요한은 행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오늘 세례요한을 추종했고, 두려워했고, 그 앞에 찾아온 많은 이들이 죄된 삶을 회개하고 새로운 삶을 결단했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그것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세례요한이 세상으로부터 주목받았던 첫 번째 이유,
그에게는 외칠 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담아두고 사는 인생이었기에 그는 그것을 외치지 않고 살 수 없었을까요? 그가 외쳤던 내용을 함께 한번 읽어보시지요? 요한복음 1장 29절입니다.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요1:29)
어느 날 예수님께서 요단강에 나오셨습니다. 그때 세례요한은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하고 외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사람들이 그 말에 반응했던 것이지요? 이 한 마디에 진리가, 하늘과 땅에 대한 충만한 지식이 담겨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간다’는 말에는 현재 이 땅을 진단하고 있는, 세례요한의 통찰이 담겨져 있습니다. 지금 그는 세상 속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세상에 동화되어 있지 않습니다. 세상과 한통속이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과 한걸음 떨어져서 세상을 진단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 참된 진리를 모른 채, 어떤 이들은 하루하루를 불안과 두려움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때에, 어떤 이들은 세상에서의 영화를 누리며 허랑방탕하게 살아가고 있던 때에, 나머지는 무의미하게 인생을 보내고 있던 때, 세례요한은 세상을 진단합니다. 죄악이 관영한 세상, 구원받아야하는 세상, 완전하지 않은 진리로 새롭게 변화되어야하는 세상을 진단하고 있습니다. 회개하고 천국을 준비해야할 세상으로 말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외쳤던 것입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3:2)
그가 외친 “회개하라”는 말은 오늘 그가 내린 진단에 대한 처방입니다. 죄악 가운데 있는 세상이 멸망하지 않으려면, 심판받지 않으려면, 세상은 돌이켜야 합니다. 변화되어야 합니다. 새로워져야 합니다. 세례요한은 그런 세상을 비난하고 조롱하고 도피하지 않습니다. 그런 세상을 변화시키려 하고 있습니다. 그런 세상을 위해 울고 있고, 아파하고 있고,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비판하고 비난하고 숨어버리는 나몰라라 하는 그런 부류의 사람이 아닙니다. 책임을 통감하고 그것을 변혁하고자, 고쳐내고자 그는 외치고 있었더 것입니다.
사람들이 세례요한에게 열광하고 그를 주목했던 포인트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세상에 대해서 썩었다고 진단하는 이들은 많았습니다. 희망이 없다고 포기하는 이들도 많았습니다. 오히려 그 가운데 수탈하고 자기 배만 불리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속세를 떠나 숨어드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폭력으로 살인으로 로마에만 저항하면 되는 것처럼 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죄악을, 고통을, 절망을 책임감있게 아파하고 고쳐내려고 하는 사람들이 없었던 것입니다. 용기와 희망을 선포하고 보여주는 사람이 없었던 것입니다.
보십시오. 세례요한은 그런 세상 속에 살면서 개인의 무기력함을 호소하며 세상 속으로 섞여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이런 세상 아무리 해도 바뀌지 않는다며 계란으로 바위치기라면서 체념하고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하여가를 부르지도 않았고 그 노랫소리에 마음을 빼앗기지도 않았습니다. '에라 나도 모르겠다. 될대로 되라.' 고 내 뚱이와 인생을 내던지지 않았습니다. 세상이 정화될 수 있기까지의 얼마 되지 않지만 주어진 마지막 골든타임, 그 초침을 바라보며 그는 끝까지 노력했고 외쳐대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자기 색깔을 포기하고 세상과 동화되면서 문제가 생겨납니다. 그리스도인이 매력을 잃게 되는 것은, 자기의 무기력함을 고백하고 세상의 흐름에 한통속이 되어 흘러가버릴 때입니다. 아뇨,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사람들이 아닙니다. 역시 무기력합니다. 그러나,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분께서 이 죄악된 세상을 망하게 내버려두지 않으신다는 것을 신뢰하는 사람들입니다. 고치시고 회복하시고 새롭게 하실 것임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게 매력적인 존재가 되지 못하고, 오히려 세상이 그리스도인들에게 매력적인 존재가 되어버렸습니다. 우리가 구하고 추구하는 것을 하찮게 여기고, 저들이 구하고 추구하는 것을 대단하게 여깁니다. 그렇게 세상 사람들을 부러워하는 것입니다. 저들이 가진 것, 저들이 누리는 것, 저들이 보는 것, 저들이 만지는 것을 나도 갖고 누리고 보고 만지고 싶어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을 부러워하는 그리스도인들, 세상을 흠모하여 뒤쫓는 그리스도인들, 세상은 그래서 오늘도 우리를 멸시하고 천시하고 조롱하고 있습니다.
자기들도 압니다. 자신들이 추구하는 것들이 얼마나 허무하고 부패하며 무의미한 것들인지를 말입니다. 그래서 그들도 마지막 희망과 소망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두고 있는 것이지요? 너희들만큼은 세상의 소망으로 빛으로 소금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기를 말입니다. 그런 우리가 어느 순간부터 자신들이 가는 허무한 길로 뒤쫓아 들어오고 있으니 욕하는 것입니다. 너희들마저 들어오면 어떻게 하냐고 말이지요? 유일하게 마지막 날에 생명선을 타고 와서 건져주어야할 사람들마저 정신 못차리고 물속에 텀벙텀벙 뛰어들고 있으니 말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끝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어야 합니다. 모두가 술자리에서 술에 취해 정신을 잃어갈 때, 끝까지 정신차리고 있다가 한 놈씩 택시 태워서 집에 보내주어야 합니다. 썩어져갈 세상과 동화되어서는 안됩니다. 그 세상에 내 몸과 마음을 내던져서도 안됩니다.
그렇게 세례요한은 구별되었습니다. 그래서 매력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정신차린 사람들이 그에게 나아와서 구원의 길을 물었습니다. 그에게 와서 살 길을 찾았습니다. 그래서 회개를 했습니다. 그래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러면서 다짐했습니다. 소망을 품었습니다. 나도 당신처럼 살겠습니다. 예전과 같은 삶을 살던 나는 죽었습니다. 새로운 삶을 살아보겠습니다. 매력적인 그리스도인이 되겠습니다. 그렇게 그들은 새로운 발걸음으로 세상을 향해 나아갔던 것입니다.
여러분, 저와 여러분이 끝까지, 여러분들 곁의 사람들에게 세례요한 같은 존재로 기억되고 인정되길 축복합니다. 쟤도 별 수 없어. 똑같애, 그리스도인은 무슨! 우리보다 더해! 이런 이야기를 들으시면 곤란합니다. 오늘부터 다시 시작하시자구요. 세상과 동화되지 말고, 세상을 진단하고 세상의 회복을 위해 책임을 통감하며 외치는 그리스도인 이 시대 세례요한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그러면서 보십시오. 오늘 세례요한은 땅에 대한 지식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하늘에 대한 지식도 풍성했습니다. 예수님을 보며 선언합니다.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무슨 말입니까?
세례요한의 이 말은 죄로 가득한 세상에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것은 당연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골든타임을 놓치지 않고 사랑의 하나님께서 당신의 어린양을 보내 세상을 구원해 주실 것임을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외치던 세례요한은 오늘 그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 그 정점을 놓치지 않고 선언할 수 있었던 사람인 것입니다. 다시말해, 하나님의 시선으로 세상을 진단함과 동시에, 그런 세상을 구원할 수 있는 방법을 깨닫고 선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보십시오. 땅에 대한 통찰력이 있다고 해서 다 같은 통찰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도 세상에 압도당하지 않고 세상 바깥에서 세상을 바라보며 땅에 대한 지식과 분별력으로 사람들을 놀라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만 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입만 열면 세상을 비판하고 정죄하고 잘못되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가 비판하는 이유도, 근거도, 논리도 타당해보입니다. 틀린 말이 아닙니다. 그런데? 세상을 변화시킬 능력이나 의지가 없는 것입니다. 그저 비판만 합니다. 뭐 일만 하나 생겼다 싶으면 득달같이 달려들어 까대기 시작합니다. 이게 문제고, 저게 문제고, 그게 문제다 이야기 합니다. 그러곤 끝입니다. 그런 사람을 보고 비판주의자, 그들이 가지고 있는 태도를 염세주의라고 이야기합니다.
사람들은 비판주의자, 염세주의자를 보면서 아주 잠깐 호기심을 느껴볼 수는 있습니다. 잘 모르는 사람들은 나와 다른 그런 사람들을 보면서, 뇌섹남이라고 뇌섹녀라고, 뇌까지 섹시한 사람이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그런 사람을 오래도록 곁에 두고 사귀고 싶어하지는 않습니다. 결국 가까이하기는 꺼려지는 사람인 것이지요? 결국 나를 보면서도 문제점만 찾고 지적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이니 찾아가서 살 길을 묻게 되는 일은 더더욱 없는 것입니다.
이 똑똑한 염세주의자와 세례요한의 차이는, 자기가 입으로 내뱉은 비판의 말에 대한 책임을 질 수 있느냐 없느냐입니다. 그 비판을 하기까지 얼마나 통감하고 아파하고 기도를 했는가의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고치고 회복하기 위해서 내가 희생하고 헌신할 준비가 그리고 그런 뛰어듬이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가 있는 것이지요.
여전히 거름망 없이 쏟아져 내리는 책임감 없는 비판들이 오늘도 사람을 죽게 만들고 있습니다. 책임감 없는 난무하는 비판들이 오늘도 수많은 사람들을 지치게, 피곤하게, 희망이 사라지게, 절망하고 좌절하게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이 땅의 젊은이들이 그것만 배웠습니다. 비판하는 법만 배웠습니다. 정확하게는 비난입니다. 그렇게 비난만 하고 나서 나는 훌쩍 이민을 가겠다고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공부하고 훌륭한 사람이 되어서 세상을 바꿔볼 노력은, 힘들고 피곤하고 바쁘고 어려워서 못하겠고, 또한 이게 잘못됐고 그게 잘못돼서 하고 싶어도 할 수도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누군가가 이걸 안했다고 책임전가하고 떠넘기기하고 희생양 찾기만 하는 것입니다. 정부와 대통령을 비판만 하다가 이민이나 가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요즘 선전하나 재미난 것 나오더라구요. “중고차 판매, 차 주인은 A, 판매는 B가 하고 정비는 C가 했는데, 문제가 생기면 아무도 그 차에 대해서 책임을 지지 않는다.” 비판한 사람이 하나씩, 아니 하나씩이 아니라도 한 부분, 작고 작은 한 부분씩만이라도 책임을 져왔다면, 이 나라가 얼마나 달라져있을까요? 아닌게 아니라, 고치고 수정하고 개혁하고 싸우는 일에 대해서 왜 긁어부스럼이냐고 이야기합니다.
삼손이 생각나시지요? “그래, 아무도 안하겠다는데도, 그렇게 싸워보겠다면 그건 삼손 너 혼자 할 일이고, 우리는 쳐다보다가 훈수두고, 쳐다보다가 몰려가서 왜 이렇게 했냐고 하고, 쳐다보다가 몰려가서 다 네 책임이니 너를 결박해서 넘겨줘야겠다.” 이게 지금 이 나라 대다수 지식인들이 젊은이들이 하고 있는 모습인 것이지요. 그렇게 잘못했다고 하고 집어넣고 하면, 다음은 누가 책임을 질 거냐 말입니다. 애써서 또 싸워보겠다는 사람 나오면, “긁어 부스럼 없게 해라. 너 혼자 해라, 또 쳐다보다가 훈수두고, 또 몰려가서 왜 이렇게 했냐고 하고, 또 쳐다보다가 몰려가서 너를 결박해서 넘겨줘야겠다”. 이렇게 되고 말지 않겠습니까? 왜 성경이 지적한 유다사람 삼천 명, 성경이 고발하는 저 하나님의 백성답지 못하고, 그리스도인답지 못한 모습으로 왜 오늘도 우리는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까?
잘못을 지적하고 문제의 심각성을 이야기하는 것은 삼척동자들도 합니다. 초등학생들도 비판하고 지적하는 것, 욕하는 것 잘합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대부분 딱 그 초딩 수준입니다. 책임지지 않습니다. 나몰라라 합니다. 그래놓고 비판만 해댑니다. 아닙니다. 내가 비판을 했으면, 그 일에 대해서 내가 책임감을 느끼고, 대안을 제시하고, 그 대안을 위해서 나를 희생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을 세상은 못합니다. 남탓하고 비난하고 떠넘기고 희생양몰이만 하는 이 세상은 못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됩니다. 이 세상을 하나님이 이토록 사랑하신 세상으로 고백하는 사람들이 해야 합니다. 이 세상을 위해 하나님의 어린양이 세상에 오셔서 죽으셨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이 해야 합니다. 오늘도 내가 그 은혜를 입고 생명을 얻어 살아가고 있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이 해야 합니다. 죄된 나는 죽고 이제 는 우리 주님 기뻐하시는 삶을 살겠노라고 세례받은 사람들이 해야합니다. 오늘도 하나님이 제일로 기뻐하시는 교회, 하나님의 일꾼되어 하나님의 일을 내겠다고 하는 사람들, 우리 하일교회 성도들이 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기업가가 되고, 여러분이 교사가 되고, 여러분이 정치인이 되시어, 이 세상을 하나님의 뜻 가운데 바르게 세우고 바꾸어 나가셔야 됩니다. 그런데 왜? 아무 것도 하지 않으십니까? 왜 오늘 해야할 일을 내일로 미루십니까? 왜 지금 기도하지 못하고 잠들어 버리십니까? 왜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수업시간에 잠을 자고 딴생각을 하고 있습니까? 왜 연습하고 훈련할 시간에 게임을 하고 동영상을 보며 히득거리고 있습니까? 그렇게 준비되지 않은 상태로 갑작스럽게 주어진 무대에 서면 아무 것도 못하고 망신만 당하고 끌려내려질 것이 두렵지도 않으십니까?
세례요한은 땅에 대한 통찰도 있었지만, 그에 대한 하늘의 대안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일을 위해서 자신이 해야할 일도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땅에 대한 지식으로 끝나서 안됩니다. 하늘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내가 해야할 일을 온 생애를 걸고 감당해야, 세상과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그때에야 비로소 세상이 주목할 만한 그리스도인으로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저와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사람들이 우리를 믿고 따르고 있습니까? 질문이 너무 멀지요?
범위를 좁혀보겠습니다. 저도 포함시켜서 묻습니다.
“사람들이 당신을 믿고 따르고 있습니까? 만약 그렇지 않다면, 왜 그렇다고 생각하십니까? 어째서 당신은 세례요한과 같은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되지 못하는 것일까요? 세례요한보다 없는 것이 무엇입니까? 많이 배우셨습니다. 많이 가지셨습니다. 쉴새없이 말씀도 많이 하십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당신 곁에 머물기를 피곤해하고 힘들어 할까요?”
그것은 오늘 당신, 서설원이! 그리스도인이 되어서 땅의 것을 제대로 통찰하지도 못하고, 하늘의 것을 제대로 소유하지도 못했기 때문입니다.
부패할 것에 눈과 마음을 빼앗기지 마시고, 저 세상, 뜨거운 불에 다 풀어지고 사라져버릴 땅의 것에 목숨을 걸지 마시고, 영원한 하늘의 것을 소유하길 소망하시길 바랍니다. ‘나는 저 하늘의 것을 따놓은 당상이니 이제 세상을 좀 즐기며 살아도 된다.’는 터무니 없는 착각을 버리시길 바랍니다.
주의 말씀이 충만해서 입을 열면 하늘의 진리가 쏟아져 나오는 사람이 되십시오. 입만 열면 저 세상의 썩어질 이야기들밖에 늘어놓질 않으니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매력이 없는 것입니다. 세상의 이야기는 저 부자들, 저 높은 권세자들에게서 듣고 싶어하지, 우리에게서 뭘 들어서 뭘 건져보겠다고 듣고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저들이 할 수 없는 이야기를 하십시오. 세상에 대한 통찰을 넘어 하늘의 비전을 소개하십시오. 놀라운 하나님의 구원을 이야기 하십시다.
세례요한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인생을 걸만큼 매력적인 리더가 없었던 당시, 왕도, 제사장도 다 매력적이 못하게 세상에 빠져살던 당시, 세례요한에 열광했던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몰라도, 내 가족들만큼이라도 내 배우자만큼이라도, 나를 보면서 자기 인생을 걸어도 좋을 그런 사람으로 인정해주는, 그런 그리스도인이 되셔야하지 않겠습니까? 말뿐이지 책임감이 없는 사람이었으면 여러분, 지금의 남편, 지금의 아내와 살겠습니까? 세상도 그러합니다. 우리가 한 말과 행동에 책임감이 있는 사람이 될 때, 세상은 우리에게 매력을 느낄 것입니다. 세상이 이야기할 수 없는 하늘의 지식과 하늘의 대안을 소개할 때, 그렇게 우리가 세상과 다른 구별된 모습으로 그들 곁에 한결같이 서 있을 때 그들은 우리를 찾아올 것입니다. 그리고 물을 것입니다. 살 길을 물을 것입니다. 구원의 길을 물을 것입니다. 그들의 인생을 새롭게 시작하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길을 물을 것입니다. 지금도 묻고 싶은 데 물을 곳이 없어서 저들은 오늘도 다시금 에라 모르겠다하며 세상의 기가막힐 웅덩이와 수렁으로 몸을 던지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세례요한과 같은 사람,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힌 사람, 세례요한 같은 사람으로 이 시대의 리더들이 되셔야 합니다. 더욱 예수님을 더욱 닮고 뒤쫓는 그런 그리스도인이 되셔야 합니다.
우리 인생의 길을 물을 수 있는 리더, 나도 내 길을 몰라서, 다른 사람에게 길을 제시하지 못하는(마15:14) 그런 우리로 남아 있어서는 아니되겠습니다. 남은 인생의 시간 더욱 예수님을 따르며 내 십자가와 내 길이 분명한 사람들, 그렇게 다른 사람들에게도 분명히 생명의 길을 소개하고 안내할 수 있는 사람들, 오늘 세상의 때와 하늘의 때를 분별하며 준비하고 외치는 사람들, 그 사명을 위해 인생을 건 사람들,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억하십시오. 세상과 동화되는 것이 아닙니다. 한통속이 되어 세상과 함께 흘러 떠내려가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을 위해 기도하고, 죽어가는 이들을 건져내기 위해 끝까지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는 사람들, 생명선을 타고 저들을 건져줄 수 있는 사람들, 언제든지 손 내미는 이에게 살려달라 호소하는 이들에게 늦지 않게 달려갈 수 있는 사람들, 그런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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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SW0gTnZfkyE 설교에 등장했던 광고 "나도 잘 물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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