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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년 국내에서 퀘이커인 전설적인 비폭력평화운동가, 조지 레이키가 국내에서 워크숍을 열었다. 그 때 번역했던 자료인데, 이 곳에 모아 본다. 그 때 맺었던 인연이 2011년 미국의 펜들힐 공동체에 갔을 때로 이어졌고, 한 학기 동안 그 옆에 있는 스와스모어 대학에서 진행된 조지 레이키의 평화수업을 듣게 되기까지 하였다. 지금도 그는 왕성한 활동과 투고활동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해방의 세계화 : 사회운동을 위한 5가지 전략.
변화를 위한 훈련(Training for Change) - 조지 레이키(02.6)
세르비아의 저항운동인 ‘오트푸르’(Otpur)는 수백명으로 시작해서, 수천명, 마침내는 수많은 젊은이들이 자국의 독재자인 슬로바단 밀로세비치를 축출하기 위해 거리로 뛰쳐 나갔다. 청년들은 많은 민주세력 원로들의 신중한 방식을 참지 못하고, 커피점들과 학교들에서 조직하고, 거의 모든 곳에 낙서를 했고, 지배체제를 당혹케 하는 거리 행동들을 감행했다.
밀로세비치는 역공을 했다. 경찰은 거리에서 저항자들을 일상적으로 구타했고, 경찰서에서는 더욱 무자비하게 폭력을 휘둘렀다. 첩자들은 모든 곳에서 득실거렸다. 대중매체를 독점하여 '오트푸르‘를 폭력배와 테러리스트로 매도했다.
2000년 10월, 오트푸르는 승리했다. 수많은 노동자들과 전문직들이 동참하면서, 젊은이들은 밀로세비치를 축출했다. 그의 정당은 해산되었고, 경찰은 혼돈에 빠졌고, 군대는 분열되었다
오트푸르는 시작할 때부터 전략이 있었다. 젊은이들은 대단히 창조적인 전술을 구사했으며, 동시에 일련의 단순한 행동으로는 결코 승리할 수 없음을 절감했다. 오트푸르 활동가들은 광범위하게 분산되어있는 모임들의 연결망을 이끌 수 있는 전략을 창조할 때만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냉소적인 외부인들은 오트푸르 활동가들이 지도자를 거부하고, 그들 모두가 지도자들이며 자신들의 행동과 공동규율에 대한 책임을 공유한다고 주장하는 것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회의론자들이 간과한 점이 있었는데, 세력을 통일시키고, 반역하는 에너지 곁에서 일정한 역할을 감당하는 전략의 힘과, 젊은이들이 공유했던 최근 역사의 교훈들이었다. 오트푸르 활동가들은 자신들에게 행진명령을 내리는 지하의 사령관을 필요로 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믿고 있는 전략을 공유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그러한 전략적 틀 내에서 창조적으로 임기응변할 수 있어서 행복했다.
오트푸르를 훈련시켰던 이들 중 한 명인 보잔 자르코비치(Bojan Zarkovic)는 필라델피아에 있는 A-space 라는 무정부주의자들이 모이는 커피점에서 청중들에게 젊은이들의 무한한 창조성에 대해 말했다. 그는 그들이 실제로 신문의 한 면을 자신들의 전술적 착상들로 채웠다고 언급했다. 그들은 전략적 관점에서 그리고 유머와 농담을 좋아하는 차원에서 선택하였다. 그 결과 그들을 테러리스트로 묘사했던 언론은 신뢰를 상실했다. 사실, 이 젊은이들은 검은 바지와 검은 가죽 자켓, 그리고 정면에 꽉 쥔 주먹을 실크 스크린 인쇄를 한 티셔츠를 입었다. 그렇지만 그들의 행동은 유머가 있었고 대중들과 연결되어 있었다. 지나가면서 그들을 보고 말을 퍼트렸던 사람들은 언론의 거짓묘사를 폭로했다. 그들이 퍼트리면서 했던 말은 “그들은 재미있는 애들이야, 당신들이 알다시피, 밀로세비치에 대한 그들의 비판은 옳다!”는 것이었다
90년대 후반의 세르비아는 여러 가지로 미국이나 다른 나라에서 활동가들이 직면하고 있는 상황과 달랐다. 한 가지 예를 들자면, 미국은 밀로세비치 정권을 향한 나토의 폭격을 이끌었지만, 그를 몰아내는데 실패했고, 좌절중에 젊은 운동권들에 기대를 걸고, 오트푸르가 인쇄물을 만들고 컴퓨터를 구입하는데 자금을 지원했다. 그렇다 하더라도, 오트푸르의 경험을 통해 우리의 사고는 자극을 받을 수 있다. 수많은 활동가들이 아무런 의미도 없어 보이는 수많은 영역의 저항행위들로 지쳐있을 경우에, 오트푸르의 활동가들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큰 선물은, 그들이 전략을 중심으로 통일되고, 전술에 있어서는 창조적이며, 어떤 전술이 의미있고, 어떤 전술이 무의미한지를 전략적으로 판단하였다는 것이다.
전략= 힘
오트푸르를 시작한 젊은이들은 권력이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한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사회를 일종의 피라미드로 보았고, 밀로세비치와 그의 동료들의 정점에 있으며, 사업가, 정당지도자, 그리고 장군들과 동맹을 맺고 있다고 파악했다. 권력의 방향은 전형적으로 정상에서 아래로 향하였고, 군대,경찰, 비밀경찰과 같은 분명한 억압과 언론의 독점과 학교 교과과정과 같은 교활한 억압을 동시에 포함하였다.
바로 이 지점에서 오트푸르는 힘에 대한 관습적인 지혜로부터 벗어났다. 그들은 권력의 각각의 층은 실제로는 밑에 있는 층에 의해 유지되고 있음을 알아차렸고, 명령은 단지 밑에 있는 사람들이 기꺼이 그 명령에 따르기 때문에 유지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밀로세비치는 그들이 이와같은 정상에서 밑으로 라는 해석을 신뢰하고 따르기를 바랬다. 하지만 그들은 그 대신에 세르비아 사회를 독재자를 치켜 세우고 있는 지지기둥들로 조직화된 사회로 묘사하기로 결정했다. 오트푸르는 그 기둥들이 무너진다면, 밀로세비치는 몰락할 것이라고 믿었다.
오트푸르에게는 힘에 대한 이러한 대안적 견해가 매우 핵심적인 생각이었다. 그래서 새로이 들어오는 이들의 모든 훈련에서 이것을 가르쳤다. (오트푸르의 모든 신입 참가자들은 이길 수 있는 전략을 이해하기위해서 그 훈련을 받도록 되어 있었다)
최정상에 있는 권력자들이 자신들의 위치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들 밑에 있는 사람들의 추종에 의존해야 되기 때문에, 오트푸르의 전략은 그 추종을 약화시키고 마침내는 깨버리는 것이었다. 첫 번째로 오트푸르는 다음과 같이 물을 필요가 있었다. 독재유지에 필요한 지지기둥들은 무엇인가? 그리고 그러한 기둥들을 약화시키는 전술들은 무었인가?
다른 나라의 활동가들도 자신들의 전략창출을 위해 이 방법론을 따를 수 있다.
여기에서 설명하는 것은 전략이 세르비아에서 활용된 단지 한 예일 뿐이다. 밀로세비치의 지지기둥중 하나는 경찰이었다. 오트푸르는 체계적으로 그 기둥을 천천히 붕괴시켰다. 젊은 활동가들은 경찰과 싸우게 되면, 경찰은 더욱 밀로세비치에 충성하게 되고 대중매체는 젊은이들을 폭도이자 테러리스트라고 매도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저항하는 동안 경찰의 폭력에 비폭력적 대응하기를 훈련했다. 훈련하면서 그들이 배우는 구호들 중 하나가 “당신이 상처를 입더라도 그것은 단지 다쳤을 뿐이다” 그들은 부상자들의 사진을 찍어서, 그것을 확대해서 상징물을 만들고, 그것을 가해 경찰의 집 앞으로 가져갔다. 그리고는 이웃들과 그것에 대해 이야기했다. 또한 그것들을 경찰관들의 자녀가 다니는 학교에 가져가서는 아이들과 그것에 대해 토의도 하였다. 이러한 활동을 일년 하고 나니, 경찰은 명백하게 구타하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조차도, 그렇게 하기를 꺼려했다. 그것은 가족과 친구들, 이웃으로부터 부정적인 반응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젊은이들은 그들속에 침투하도록 지령을 받은 평상복 차림의 경찰들과 농담을 나누면서, 그들에게 누구나 민주주의를 위해 행동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는 것을 상기시켰다. 활동가들의 단호한 손내밈을 통해 경찰과의 관계가 형성되었고, 심지어 상층부에까지 이루어졌다. 운동이 무리익어, 벨그라데에서 최고조의 시위가 벌어졌을 때, 많은 경찰이 지휘권자에 의해 도시밖으로 전출되기도 했지만, 반면에 다른 경찰들은 단지 군중들이 의회 건물을 접수하는 것을 지켜보기만 했다.
되풀이해서 구타당했던 내 오트푸르 친구들 중 하나가 말하기를 ‘그건 쉽지 않아요’라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하다. 그 전략이 독재자를 지탱시키는 핵심 기둥들 중 하나를 쓰러 트리는 창조적 전술을 발전시키도록 이끈 것이다.
권력에 대한 이 대안적 관점이 다른 곳에서도 작동할 수 있는가?
오트푸르 활동가들이 밀로세비치를 떠받드는 다양한 기둥들을 서서히 무너뜨리는데 그렇게 효과적으로 일할 수 있었던 한 가지 이유는, 많은 이들이 권력에 대한 그들의 견해가 이미 다른 곳에서도 활용되었음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오트푸르에 참여했던 10대들의 생애가운데 일어났던 일들을 생각해 보라. 필리핀의 독재자였던 마르코스는 1986년에 “피플파워”라 불리우는 운동에 의해 몰락했으며, 1989년 동독, 체코슬로바키아, 헝거리, 폴란드에서 피플파워에 의해 공산주의자들의 독재권력이 몰락하면서, 남아프리카 아파르헤이트 체계도 무너졌다. KGB와 군대, 그리고 공산당 속의 권력자들은 피플파워로 인해 1991년에 쿠데타를 실행할 수가 없었다. 1993년 대만에서는 대중들의 비폭력적인 봉기 때문에 최고사령관이 자신의 권력을 강화시킬 수 없었다. 남 아프리카의 백인 독점 정치체계는 10년에 걸친 대규모 비폭력 투쟁 끝에 1994년에 무너졌다. 이 모든 경우에, 기득권자들은 자신들이 의존했던 이들이 더 이상 각본대로 움직이는 걸 거부했기 때문에, 그들의 권력이 붕괴되는 것을 보았다.
나는 젊은 시절에, 학교에서 일상적으로 배워온 것과는 너무나 다른, 권력에 대한 이 대안적 관점을 제대로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있던 차에, 중남부에서 온 비폭력촉진 학생 위원회 간사였던 버나드 라파에트를 우연히 만났다. 그는 그것을 은유를 써서 설명해 주었다. 버나드는 사회는 집과 같은 것이라고 했다. 기초는 협동 또는 굴종이라고 했다. 지붕은 국가와 억압적인 기관들이다. 그는 기초가 무너진다면 집은 어떻게 되겠느냐고 나에게 물었다. 그는 계속해서 “ 더 많은 무기들과 더 큰 탱크들, 더 뛰어난 기술이 지붕에 있게 된다면, 일어나는 일들을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겠는가? 기초가 무너진다면, 집에는 무슨 일이 벌어지겠는가?”라고 내게 물었다.
그 때 나는 깨달았다. 왜 이 대안적 견해가 학교에서 장려되지 않는지를. 어째서 기득권자들이 우리가 힘이 사실은 우리 수중에 있다는 것을 알기를 원하겠는가? 사람들은 경찰, 군대, 집단의 지도자들, 언론의 거두들, 그리고 정치인들에 의해 협박당하는 대신에, 우리가 굴종을 통해서 우리의 힘을 넘겨주었다는 것을, 그래서 비협력을 통해서 다시 권력을 되찾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물론 기득권층은 우리가 권력이란 위계적이고, 우리는 수동적이어야만 한다고, 그리고 폭력은 가장 강력한 힘이라고 믿기를 바랄 것이다. 그들이 피플파워가 일어난 날을 국경일로 선언할 것이라고 기대하지 말라.
그리고 그들이 그렇게 할 필요도 없다. 변화를 강제하는 비폭력 전술의 사용에는 비판적 대중에까지 도달하고 있는 심오한 계보가 있다. 예를 들면, 미국에는 백여년이 넘게 수 많은 유색인들이 운동에서 비폭력 직접행동을 사용해 왔다.(그 중 한 예를 들자면, 1876년 세인트 루이스에서는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 손수레 차 차별이용에 맞서서 자유로이 타기를 실행한 바 있다) 1년 내내 미국 전역에 걸쳐서 유색인들의 공동체에 기반한 조직화가 이루어진다. 그들은 비폭력 행동에 참여하는데, 행진,연좌농성,거리차단,불매운동, 시민불복종, 등과 같은 것들이다. 병원노동자들, 호텔 노동자들, 수위들과 같은 유색인들의 연대가 다른 전술뿐 아니라 파업까지 감행했던 경우는 책을 쓸 수 있을 정도다. 비폭력 행동을 생각할 때에, 쉽게 떠오르는 이름들이 마르틴 루터 킹이나 세자르 차베즈같은 유색인들이고, 비폭력투쟁에 참여하는 비율이 백인들보다 흑인들이 더 높은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단지 “검은 것”만은 아니다. 미국에서 백인들, 특별히 노동자 계급인 백인들 또한 목표를 위해 투쟁하기 위해 비폭력 전술을 사용한 오랜 궤적을 가지고 있다. 도전이 되는 것은,그들이 고양되었을 때, 다양한 사람들을 비폭력 투쟁에 참여하도록 격려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짧은 순간의 투쟁들을 좀더 장기적인 목표들에 연결시키는 작업이다
비협력운동으론 충분치 않다
오프푸르에 있는 내 친구들은 독재자를 무너트리는 대중들의 반정부시위만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것을 인정한 첫 번째 사람들일 수 있다. 반정부운동으로는 온전한 민주주의, 다양성에 대한 존중, 지구와 조화로운 관계를 맺는 경제제도, 또는 그들이 품는 비젼의 다른 부분들을 성취하는데 충분치 않다. 비협력운동을 통해 권력의 공백을 만드는 것은 중요한 일이며, 위대하고 명예로운 성취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누릴만한 민주적 공동체를 확고하게 확립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이를 위해서, 전략은 더 깊어져야한다. 우리는 역사에서 많이 발생했던 경우, 비폭력 투쟁을 통해 불의한 정부들을 타도하는 것을 넘어서야 할 필요가 있다. 파괴와 동시에 건설하는 전략을 창조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대안들을 유효화하고, 자유의 경험을 지지하며, 협력의 기술들을 확대시킬 전략이 필요하다. 우리는 동시에 공동체 전략이기도 한 정치 전략이 필요한데, 그것은 지금,여기에서 창조적 혁신을 “예”라고 긍정하고, 오늘의 창조력을 권력이동 너머에 있는 새로운 사회와 연결시키는 작업이다.
많은 나라의 활동가들의 도움과 의견으로, 나는 오트푸르 활동가들이 자신들의 전략으로 지원받은 방식과 같이, 오늘날의 활동가들을 지원하는 목적을 지닌 전략적 틀을 만들어 냈다. 나는 그것을 살아 움직이는 혁명을 위한 전략이라 부른다.
이 전략은 새 전술을 만들고 더욱 대담하게 가장 좋은 옛날 전술을 사용하는 것을 격려할 뿐만 아니라, 활동가들이 가장 효과적인 전술을 가려 뽑는 것을 도와준다. 마지막으로, 이 전략은 때(time)라는 차원으로 제기한다. 어느 한 순간에 비효과적인 전술들이 다른 시간에는 제대로 적합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것은 시간을 뛰어넘는 유기적이고, 발전적인 전술의 기본 틀을 제공한다.
시간이 중요하다. 역사적 감각이 결여된 것으로 유명하기 때문에, 다른 나라 활동가들이 미국의 활동가들을 비웃는다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이 전략틀의 도움을 받아서, 우리는 문화적 한계를 극복할 수 있고, 실제적으로 역사적 존재들인 우리들처럼 생각하기를 배울 수 있을 것이다.
그 전략 틀에는 다섯 가지 단계가 있다.
- 문화적 준비Cultural preparation
- 조직하기( Organization‐building )
- 대결(Confrontation)
- 대중들의 정치적, 경제적 비협력(Mass political and economic noncooperation)
- 필적하는 제도들(Parallel institutions)
이 단계들은 많은 부분이 겹치는, 순차적인 과정이다. 다른 모델들과 같이, 이것도 좀 더 쉽게 배우고 활용할 수 있도록 지나치게 단순화시킨 것이다. 이 모델을 복잡하게 만드는데 내가 즐겨 쓰는 방식은 사회를, 이러한 단계들에 다른 비율로 조응하는 하위-사회들(sub‐societies)의 집단으로 묘사하는 것이다. 이것은 활동가들이 처음의 몇 단계를 계속해서 겪어야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뜻한다. 실제로 우리는 직선적인 진보보다는 순환하는 운동에서 끝날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이후의 문제다. 지금 당장은 직선적인 방식으로 다섯 단계를 설명하겠다. 독자들이 이를 통해 시간을 초월한 운동감각을 배울 수 있다면 행복하겠다.
첫 번째 단계: 문화적 준비
어떤 이들은 이 단계를 정치화(politicization) 또는 의식고양(consciousness‐raising)이라 부르고, 라틴 아메라카의 몇 몇 사람들은 “의식화”라고 한다. 나는 혁명적 변화를 위해서는 새로운 문화가 필요하다는 판단에서 이것을 첫 단계로 설정한다. 우리가 여전히 머릿속으로 독재수법을 쓴다면, 독재의 위계질서를 “싸움터에서” 제거할 수 없다. 간디가 말했듯이, 우리는 우리가 보기를 원하는 바로 그 변화가 될 필요가 있으며, 이는 단지 개인적 과정이 아닌, 집단적이며 문화적인 전환이다.
모든 종류의 문화일꾼들은 우리가 함께 저항의 문화를 만들어 갈 때 전면적으로 우리를 자극하고 지원한다. 지원 모임이 우리가 인종차별주의, 성차별주의, 종교적 편견, 그 밖의 것들을 버리도록 도와주는 것은 위대한 시간이다. 억압을 당해 온 모임들은 그들을 제한하는 내면화된 말들을 다루기 위해 해야 할 많은 작업이 있다. 예를 들면, 동성애 남자인 나는 계속해서 나의 효율성과 다른 이들과 접속하는 능력을 위축시키는 동성애혐오를 내면화해 왔다.
세계의 많은 나라의 활동가들과 비교해서, 미국 활동가들이 특별히 제한당하는 방식들 중 하나가 계급에 대한 이해에 있다. 계급차별주의는 미국에서 가장 비가시적인 억압중의 하나이며, 따라서 많은 활동가들에게는 해결의 실마리가 없어 보이는 영역이다. 나는 너무나 자주 성전환자들이나 푸에르토리코인들을 언급하면서는 결코 비방하는 말을 쓰지 않은 활동가들이 “가난한 백인 노동자들”(rednecks)들을 “백인 쓰레기”라고 조롱하는 것을 들어왔다. 그러나 계급차별주의는 언어를 훨씬 뛰어넘는 문제다. 활동가들이 무의식적으로 가난한 이들과 노동자계급에 속한 사람들에 대한 주류사회의 억압에 가담하게 되면, 전술에서 소통방식에 이르기까지 영향을 미쳐, 융합을 달성하거나 심지어 거리에서 사람을 만나 가는데 있어서 어려움을 겪게 된다. 만약 오트푸르의 젊은이들이 그렇게나 강력한 계급차별주의의 짐을 지고 갔더라면, 밀로세비치는 여전히 권좌에 있을 것이다! 무의식적인 계급차별주의를 제대로 파악한다면, 미국 활동가들이 정의를 위한 운동을 수행하는 능력에 엄청난 차이가 생길 것이다.
이 단계의 정수는 미래에 대한 꿈(vision)이다. 모든 혁명적 운동의 주요한 과제는 기존 질서를 대체하는, 활동가들이 원하는 비전을 창출하는 것이다.
비전은 사람들을 고취시켜 우리에게 가담하기를 원하게 한다. 그 이유는 그들이 비전을 기득권자들이 지구적 위기를 보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사용하는 소비자주의(consumerist)라는 낡은 계략과 대조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비전은 우리를 고취시키는데, 그것은 우리가 원하는 것을 분명하게 할 뿐 아니라 왜 그것을 원하는지를 상기시켜 주기 때문이다. 비전은 보궐선거( co‐optation)를 제한하는데, 이는 그것의 통합성은 의미없는 타협에 대한 비판이기 때문이다. 비전을 일치를 만드는데, 왜냐하면 전술적 불일치와 인격적 충돌들은 우리의 목표라는 견지에서 보면 자그마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이 단계에서 그릇은 전략이다. 그릇이 없으면 핵심적인 내용을 유지하기가 매우 어렵다. 많은 활동가들은 희망없는 상태(hopelessness) 때문에 비전을 창출하기를 거부하려 한다. 만일 내가 차이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전략이 전혀 없다면, 왜 비전으로 더욱 괴롭힌다 말인가? 그러므로 전략은 비전과 연결되어진다. 오트푸르는 자신의 전략으로 달성될 수 있었던 분명하고도 한정된 비젼이 있었다. 그들이 온 나라에 “그는 끝장났다”라고 선언한 흑백의 포스터를 붙였을 때, 모든 사람들은 먼저는 “그”가 누구인지를, 다음으로는 그가 몰락하는 것은 이제 시간문제일 뿐이라는 것을 알았다.
권력자들을 제거하는 것을 넘어서서 근본적인 변혁으로까지 나아가는 비젼을 가진 우리 같은 이들에게는 보다 큰 전략이 필요하다. 우리가 대규모 ‘피플 파워’를 더 많이 연구하고 참여할수록, 전략은 더욱 커지게 될 것이고, 이미 몸 정치학(body politic)속에 살아있는 전략의 다양한 측면들을 더 많이 알아차리게 될 것이다. 거대 전략은 절망을 포함한다. 거대 전략은 비전을 만들어낸다. 비전은 전략을 활기차게 만든다. 우리에게는 핵심적인 내용과 그릇이 모두 필요하다.
제 2단계 조직하기( ORGANIZATION‐BUILDING)
문화적 준비라는 첫 번째 단계와 마찬가지로, 혁명적 운동은 이 단계를 소규모 사람들로 출발한다. 처음에는, 자신들의 내면화된 억압속에서 일하면서도, 다른 이들을 억압하던 방식을 통제하던 많지 않은 사람들이, 새로운 사회에 대한 공유된 비전을 발전시켰고, 광범위한 전략에 대한 동의를 얻어냈다. 그렇지만 그런 사람들이 나타나게 되는 순간, 그들은 서로를 찾는다! 인간을 사회적 종(種)이다. 사람들이 자신들을 변화시키기 위해 다른 사람들과 조직화를 시도하는 것보다 더 자연스러운 일은 없다.
조직화는 투쟁적인 운동에서는 필수적이다. 왜냐하면 오직 조직화를 통해서만 중요한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는 충분한 힘을 만들어내는 것이 가능하다. 저항의 자동적인 국면들은 더 이상 실질적인 변화를 달성할 수 없다. 그것은 간헐적인 소요에 그칠 것이다. 물론 각각의 소요는 상징적 관점에서는 평가될 수 있는 하나의 증언이다. 그러나 그것이 구조들 변화시키지는 못한다.
미국은, 조직하려 할 때 놀랍도록 상반된 모습을 보여준다. 한편으로 미국은 모든 차원에 깔려 있는 수백만의 자발적인 모임들에서 볼 수 있듯이,“시민사회”의 풍부함으로 세계에서 유명하다. 내가 사는 도시 인근에만도, 학교와 공원, 안전, 문화축제, 고급주택화에 항의하기, 그리고 문자그대로 다른 좋은 뜻들을 위해서 일하는 모임들이 있다. 활동가 훈련을위해 내 지역을 찾아 온 다른 나라의 활동가들은 때때로 소매를 걷어부치고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모임들을 창출해내는 것이 미국에서는 대단히 주요한 흐름이라는 사실에 놀란다.
반면에, 급진적 활동가들은 조직하기가 힘겹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의 바로 그 이상주의가 장애물이 될 수 있다. 우리는 모임이 종종 주류사회의 조직을 병들게 하는 지배경기(domination games)보다는 비전을 담은 가치들을 반영하기를 원한다. 힘겨운 것은 어떻게 하면 비전을 품고 있으면서 동시에 그 일이 이루어지도록 풀어가는 일이다.
활동가로 존재하는 영광중의 하나는 권력자들이 만들어내는 많은 신화와 정책들을 꿰뚫어보는 것이다. 우리는 상부에서 내려온 최근의 발표에 대해 놀랍게도 비판적인 안목을 지닌다. 우리는 자주 권력자들이 제공하는 위선과 신뢰 게임을 얼마나 명석하게 구분해낼 수 있는가에 따라서, 우리자신을 주류로부터 차별화시킨다.
이러한 우리의 탁월함에는 어두운 측면이 있다. 우리들의 능력이나 비판적 자세에 집착할 수 도 있고, 차별화를 습관처럼 할 수도 있다. 차별화시키는 것이 강박적으로 이루어질 수도 있다. 그렇지만, 효과적인 모임들이 차별화만큼이나 필요로 하는 것은 그것의 정반대인, 결합하는 것이다. 모임들, 그리고 사회운동들은 차별화와 결합하기가 조화롭게 진행될 때 번창한다
결합하는 것이 관습이 되어버리면, 순응주의로 귀결되고 모임은 충분히 번창할 수 있는 창조성이 고갈되어 버린다. 차별하는 것이 관성이 되면, 의미있는 무언가를 성취하기에 충분한 통일성이 없어진다. 이 두 작용 - 결합하기와 차별하기는 숨쉬는 것과 같다. 살기 위해서는 들숨과 날숨이 필요하다. 균형이 깨진 모임은 산소가 부족하거나 과잉호흡을 한 개인과도 같다.
기쁜 소식은 관습들은 변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해 도전하는 활동가들은 또한 우리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다! 차별화와 결합하기의 힘을 조화롭게 사용할 때, 우리 자신의 모임들 가운데서 혁신자를 지원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조직적 혁신을 도모하기가 훨씬 쉬워지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우리는 또한 계급과 인종의 차별을 뛰어 넘고, 과거에 성공이냐 실패를 종종 규정했던 접속(connections)을 하는 것이 더욱 쉬어지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내게는 몇 몇 조직적 형태들이 이 단계에서 특별히 유망해 보인다. 예를 들면 대안적 단체들, 활동중인 동질 그룹들( ongoing affinity groups), 변혁적인 네트워크들, 그리고 급진적인 정파들(caucuses), 같은 형태들이다.
대안적 단체들은 비전을 실현할 수 있는 거대한 실험실을 제공한다. 먹거리 협동조합들, 신문들, 노동자소유기업들, 등 등 목록은 광범위하다. 대안단체들 안에서와 밖으로는 이웃들과 인접한 사회적 동아리들 속에서 의식적으로 결합하기를 실천할 때, 대안단체들은 성장할 수 있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강하면서도 민주적이며, 생산성이 높으면서도 개별 노동자들을 지원할 수 있는 체계를 혁신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우리는 비록 언제나 따뜻하고 근면하지는 않더라도, 협동조합을 현격한 규모로 발전시킬 수 있는 복잡한 연관들을 파악할 수 있는, 우리 가운데 있는 조직적 천재들을 지원할 수 있다.
활동하는 동질그룹들은 개인이 어떤 활동영역에 참여해서, 저항하기도 하고 사람들이 상처받는 것을 막아낼 수 있는 인간보호막으로서 갈등에 뛰어들 수 있는 공동체 마당을 만들기 위해 힘을 보탤 수 있도록 지원하는 토대를 제공한다. 어떤 동질그룹은 일정기간 한 가지 문제를 해결하는 운동을 선택할 수 있고, 그들의 힘과 전문기술을 투쟁과 교육적 역할을 감당하는데 보탤 수 있다. 또는 결과적으로 이루어질 연합 형성을 준비하는 인간 관계들의 형성을 위해서 좀 더 융통성을 발휘할 수 있다.
변화를 위한 네트워크들은 모임들이 보다 빠르게 서로에게 배우고 상호도움을 줄 수 있도록 도와준다. 사회변화에 있어서, 가장 가파른 학습곡선을 보이는 모임들은 기꺼이 영향력을 끼치려는 모임들이다. 옛날 식의 의례적인 행동과 상투적인 집회들로는 급격한 변화속에서 지구의 도전에 대응할 수 가 없다. 내 짐작으로는 정부들은 이미 운동하는 활동가들보다 훨씬 더 세밀하게 오트푸르의 경험을 연구해 왔다. 기득권층은 가능하면 사태의 경향보다 앞서 있기를 바라고 목표 뒤에 자료를 숨긴다. 그러나 활동가들은 최근 수십년간 비판적 정보를 신속하게 공유하는 법을 배우는데 향상되어 왔다.
내 견해로는, 정체성이나 정치운동에 기반한 급진적 단체들은 계속해서 중요하다. 특별히 그들이 차별화(단체의 기본적 동력인)와 함께하기(단체들이 피해자들의 함성위에서 활동하도록 만드는)의 힘들을 조화롭게 사용할 경우에 그렇다. 나는 운좋게도 동성애 모임과 노동계급단체들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 속에서 우리는 우리가 그 일부분인 보다 큰 조직을 변화시키기 위해 서로를 도우면서, 동시에 내면화된 억압을 제거하기 위해 서로에게서 도움을 받았다. 나는 복을 받아서, 유색인 단체가 너무나 효과적으로 일을 해서 그 단체가 전체 조직의 조직발전을 위한 의제선정자가 된 전국조직에, 백인으로서 참여할 수 있었다.
은폐하기(covertness)야말로 가장 효과적으로 운동을 손상시키는 조직방식이라 생각한다. 운동들은 내부에 보이지 않은 요인들을 지닌 채로, 가파른 위계질서를 가지고서도 보다 수월하게 전진할 수 조차 있다. 미국에서 가장 최근의 은폐방식의 시위는, 반 세계화 활동가들 사이에 있었던 “보안 문화”(security culture.)였다.
비밀엄수의 규율을 채택하는 것은 어떤 경우나 장소에서는 유용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특별히 경찰국가에서도 그렇게 자주 필요한 경우가 아니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신중한 판단이 필요한 선택이다. 오트푸르운동의 입장에서 본다면, 미국은 전혀 경찰국가가 아니며, 비밀주의 문화는 여러방식으로 운동을 헤친다.
비밀주의 문화가 낳은 결과 중 하나는 신뢰가 유보된다는 점이다. 승리하기 위해서 운동은 확산될 필요가 있다. 확산되기 위해서는 활동가들은 자신들을, 서로를, 그리고 접촉하는 사람들을 신뢰할 필요가 있다. 누군가 당신을 설득해서 행동하도록 만든 가장 최근의 경우를 생각해 보라. 그들이 당신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느낌을 가졌는가? 아마도 당신은 정 반대, 즉 당신이 정보를 얻기만 하면, 참여하기를 원할 것이라는 낙곽주의와 자신감이 생겼을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그가 백인 인종주의라고 느낀 것 때문에, 운동에 혐오감을 느끼고 중간에 그만 둔 한 흑인 남자를 본 적이 있다. 실제로, 그가 느낀 적대적 분위기는 대신 “그가 정보요원일지도 몰라!”라는 것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이 경우는 비밀주의가 얼마나 운동의 생명을 악화시키는지를 보여준다. 비밀주의는 불신을 낳는다. 누군가가 정보요원일지도 모르며, 누군가가 우리를 배신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누구도 쉽게 신뢰할 수는 없게 된다. 비밀주의 문화를 실천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이름을 말하지 않으며, 자신들이 내부작용을 감시하며, 억제한다. 신중함은 활동가들 상호간에 두려움을 키움으로서, 독이 된다. 물론 백인 활동가들이 모인 곳에는 백인 우월주의가 존재한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인종주의의 문화속에서 사회화되어왔기 때문이다. 백인 활동가들이 운동에 진입하는데 낯선 사람들에 대한 두려움같은, 다른 방애물들을 가졌다 해도, 그 방해물들은 쉽게 인종차별주의(이것 또한 낮선 이들에 대한 두려움과 연결되어 있다)로 인식될 수 있다.
유색인종 내부에서조차도, 불신감이 생기면 운동의 성장은 저하된다. 유색인인 한 여성이 내게, 자신을 포함해 새로운 사람들을 다른 두 사람이 보증하기까지는, 유색인 사람들이 자신들의 모임을 진행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에 대해 말하면서 울부짖었다. 이것이야말로 불신의 제도화이다. 불신감이 제도화될 때, 권력층들이 운동을 억누르기가 매우 쉬어진다. 왜냐하면 그 운동은 자신들의 집단 외부에서는 잘 신입회원을 모집할 수 없기 때문이다.
보안 문화는 또한 직접행동가들이 협력관계를 발전시키고 지탱시키는 능력을 제한한다. 성공적인 직접행동운동은 협력자들을 끌어들이기를 배운다. 협력자의 역할은 운동가의 역할과는 다른다. 운동가의 일은 솔선해서 운동을 시작하는 것이고, 협력자들의 역할은 들어와서 일단 시작된 운동의 전개를 돕는 것이다. 우리는 많은 미국의 도시들에서, 한 문제에 대해서는 운동가의 역할을 감당하면서 동시에 다른 문제들 주위에서는 다른 운동가들과 연대하는 수 많은 활동가들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유연성이 잘 작동되며, 활동가들가운데, 급진적 전망에 대해 개방적인 어떤 분위기가 형성되는 것을 돕는다.
그러나 보안문화는 불신을 조장하기 때문에, 운동가들은 협력자들을 신뢰하는데 어려움을 겪는다. 그들은 때때로 정치적으로 고립된 채로 권력과 대결하게 되고, 다른 일들로 바쁜 사람들과 소통을 하는데 실패하곤 한다. 이 모든 것이 철저하게 무너지는 경우는 국가가 억압하는 바로 그 순간인데, 그 때야말로 종종 협력자들이 가장 필요한 때요 또한 분위기가 가장 혼란스러울 때다. 그러한 때, 몇 몇 급진주의자들은 손을 내밀어 잠재적 협력자들을 신뢰하기를 거부하고는, 협력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를 믿고 이러 저러한 행동을 해라!” 협력자들이 즉각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맞이하지 않을 때, 포위당한 저항자들은 낙담하고는, 화를 내기조차 한다!
보안문화를 하는 것이 운동의 내적인 사기를 격감시키고, 성장 잠재성을 줄이고, 협력자들과의 관계를 훼손한다면, 무엇이 목적인가? 한 가지 점은 비밀엄수는 충격에 의존하는 어떤 직접행동전술들에는 가능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러한 전술들을 포기하기를 달가워하지 않을 지도 모른다. 개인적으로 나는 정돈되고 계획적으로 진행되는 감정들을 즐기며, 그 점에 대해서는 나 혼자만은 아닐 것이다. 비밀주의와 은밀한 행동은, 그것들이 내부와 외부사이의 경계를 강화하고, 차별화를 과장하기 때문에, 우리 운동에 나타날 수도 있다.
불행하게도 보안요원들도 역시 운동에 대한 비밀주의의 부정적 영향을 알고 있으며, 그것을 그들 자신의 이익을 위해 적용한다. 그들은 첩자를 넣을 수 있는 풍부한 자원들과 전자 감시로 시작한다. 우리가 더욱 은밀하면 할수록, 저들은 더욱 더 많은 자원들을 동원할 수 있고, 그 결과 이미 있던 보안국가의 추잡한 수완은 증가한다. 그들에게 그것은 권력을 키우고 지하기관들을 늘린다는 견지에서 이익일 뿐만 아니라, 우리 회원들속으로 더 많은 사람들을 침투시키는 것을 정당화한다. 그리고 그들은 결정하는 걸 돕고 때로는 지도력을 행사한다. 그리고 우리가 이것을 더 많이 알게 될수록, 더욱 더 겁먹게 되고 서로를 더욱 더 신뢰할 수 없게 된다. 이것이야말로 국가의 견지에서 보면 정말 잘 된 일이다. 권력층들은 자신들의 지지기반을 강화하고, 우리들의 지지기반은 약화시키기를 원한다!
다행히도 우리는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다. 우리는 비폭력학생통합위원회(Student Nonviolent Coordinating Committee (SNCC)의 선택으로부터 영감을 얻을 수 있다. sncc는 1963-4년에, 아마도 미국에서 그 당시 가장 폭력적인 인종차별주의 주였던 미시시피 주에서 공개적으로 조직활동을 하기로 결정한다. 대부분의 SNCC 흑인활동가들은 낮에는 경찰이면서 밤에는 kkk단인 남자들을 상대했다. SNCC는 종종 교외에 있는 보호받지 못하는 자유의 집(Freedom Houses)에서 살았고, 전혀 권총을 지니지 않았고, 이 점은 모든 일이 알고 있었다. 연방정부의 관리들은 그들을 보호하기를 거부했다. 미시시피 언론은 대부분의 목회자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에 대해 적대적이었다. SNCC 회원들은 그들이 다치고, 옥에 갇히고, 고문당하고, 몇 몇 사람들은 죽을 수도 있음을 알아차렸다. 그들은 억압에 대한 자신들의 태도를 선택할 때는 결코 느슨하지 않았다.
1964년 자유 여름(Freedom Summer)이 시작되던 바로 그 즈음에, 3명의 SNCC 활동가들이 살해당했다. 제임스 찬니(James Chaney), 마첼 스웨너(Michael Schwerner), 그리고 앤드루 구맨(Andrew Goodman)이 그들이다. 이 살해사건은 자원했던 다른 사람들을 위협해서 쫓아내기 위한 방편이었다. SNCC는 비밀스럽게 활동하기를 거부했다. 그들은 더 나은 전략이 있었다. SNCC 전략은 그 운동을 극적으로 미시시피와 전국 모두로 확장시켰고, 강력한 우군들을 얻었으며, 그 주에서 인종차별주의의 정치적 압박을 깨트렸다. 나는 오늘날 운동하는 누구에게라도 1964년 여름에 미시시피에서의 탄압에 대한 SNCC의 입장을 연구하고는, 왜 우리 운동이 비밀주의를 해야만 하는지를 설명해 달라고 도전하고 싶다. 더욱 강력한 선택은 ‘열려있음’ (opennes)이다.
셋째 단계: 대결
문화적 준비와 조직하기는 우리가 조정하지 않는 수 많은 역사적 요인들에 의존하는, 혁명적 운동이 확장되는 시기들이다. 그렇지만 이 두 단계들에서는 아직 혁명적 내용을 지닌 대중 행동이 일어나지는 않는다. 때때로 발생하는 대중들의 저항은 보통 근본적으로 새로운 사회에 대한 비전을 거의 포함하지 못한다. 그들의 요지는, 예를 들자면 큰 그림에 대해 대단히 모호한 채로, WTO에 대해 “아니오”라고 말하는 것이다.
3단계의 목적은 혁명적 운동 그 자체가 급속히 성장해서, 충분한 사람들이 관여하게 되고, 4단계에 진입해서 권력층의 지지기둥들을 심각하게 약화시키는 것을 가능케 하는 지점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3단계는 웅장하고 긴 연극이다. 청중은 아직은 참여하지 않는 대중이다. 배우들은 “좋은 사람들”(우리) 대 “나쁜 사람들”(경찰, 군대, 단체장들,자경단들)이다. 운동이 대중에게 끼쳤던 이전의 영향력은 이제 더욱 활성화되는데, 이는 공개적인 갈등에 의해 그 힘을 공급받기 때문이다. 대중들은 관심을 기울이고, 사건들에 대해 숙고하고, 어떻게 참여할 지를 결정하도록 더욱 자극을 받는다.
비록 아직까지는 이 5단계를 충분히 의식적인 방식으로 진행시켜간 사회운동이 없었지만은, 대중적 비협력으로 움직이는 보다 작은 규모의 대결 단계를 사용한, 우리 용어로는 3단계에서 4단계로 나아가는, 운동의 사례들은 많다.
오트푸르는 대중매체가 그들에게 적대적인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것을 염두에 두면서 대결행동들을 조직했다. 불가피하게 매체에 보도될 수 밖에 없는, 상징적인 장소에서 벌이는 몇 번의 대규모 시위에 집중하는 대신, 그들은 수많은 작고도 간단한 시위들을 벌였다. 그들은 쾌활하고, 장난기어린 행동들을 특화시켜서 상시적으로 체제를 조롱하였다. 또한 지나가는 이들이 최대한 많이 볼 수 있는 곳에서 이러한 행동들을 진행하였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또한 경찰이 젊은이들을 구타하는 것을 보았고, 그 다음날에는 그 소문이 광범위하게 퍼져나갔다. 오트푸르는 계속해서 같은 요점을 만들었다. 우리는 테러리스트가 아니다. 폭력을 휘두른 사람들은 경찰이다. 우리는 민주주의를 원한다. 베오그라드 만큼이나 큰 도시에조차, 창조성과 비폭력의 결합으로 목격자들이 자극을 받고 그 소식을 퍼트렸으며, 대중들이 오트푸르쪽으로 입장이 바뀌기 시작하면서, 낙서와 포스터들이 그 이동을 강화시켰다.
대결 단계는 다루기 힘들다. 많은 운동들이 이 단계에서 졌다. 우리는 미국과 전 세계에서 벌어진 운동들의 성공과 실패로부터 배울 수 있다. 다음의 교훈들을 통해서 우리는 커다란 슬픔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1. “진퇴양난의 시위들”을 창조하라.
2. 누구에게 영향력을 끼칠 것인지를 분명하게 결정하라
3. 반발에서 선호하는 쪽으로( from reactive to proactive) 움직이도록 하는 주된 도구로서 캠페인을 사용하라.
4. 항의자들과 경찰 행동사이의 현격한 차이를 강화하라.
5. 국가의 탄압 조짐에 대해 강력한 태도를 취하라.
“진퇴양난의 시위들을” 창조하라.
이러한 형태의 직접행동은 권력층들을 진퇴양난에 빠트린다. 그들이 우리가 전진해서 하고자 하는 바를 감행하도록 내버려두면, 우리는 문제와 관련된 의미있는 무언가를 성취하게 된다. 만약 그들이 우리를 탄압한다면, 자신들을 나쁜 양상에 빠트리게 되는 것이고, 대중들은 우리 메시지에 대해 교육받는다.
많은 사례들은 우리의 창조성에 영감을 불어넣는다. 오랜 수명의 나무들을 구하고자 하는 몇 몇 운동들은 이러한 딜레마를 제기한다. 예를 들면 항의자들이 나무들 속에 거하는 것이 가능해지면, 그 나무들을 구할 수 있다. 항의자들이 폭력적으로 저지되면, 대중은 교육을 받고 새로운 협력자들을 얻을 수 있다.
1992년에 있었던 콜롬부스 참사(Columbus horror)에 대한 권력층들의 기념축하행사 동안에, 우리들 중 비공식적 모임이 니나, 핀타, 산타 마리아 모형선박의 방문을 이용하기로 결정했다. 우리는 소형보트와 언론으로 가득찬 항구의 중간으로 카누를 저어가서는, 인종차별주의와 노예제도에 반대하는 깃발을 올렸다. 경찰 보트가 즉각적으로 우리를 쫓아왔지만, 그로 인해 군중들의 관심이 수중에서 우리를 붙잡으려는 드라마와 우리의 주장으로 쏠렸다. 언론보도는 중심적으로는 콜롬부스에 대한 존경보다는 오히려 우리들의 주장이었음이 드러났다. 권력층들에게는 우리를 체포할지, 말지가 하나의 딜레마였다. 만약 우리가 항의하도록 내버려 둔다면, 파티가 망치게 될 것이고, 그렇다고 우리를 체포하게 되면, 우리의 주장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되기 때문이었다.
남쪽에서 활동하는 아프리카계 미국인 학생들은 그러한 전술들에 있어 대단히 창조적이었다. 예를 들자면, 커피를 요구하며 점심식사 계산대에 앉아있는 전술을 사용하였다. 만약 그들의 요구가 받아들여지면, 인종차별주의는 타격을 입게 된다. 그들이 시민들에게 공격을 받거나 체포되게 되면, 이 또한 인종차별주의가 타격을 입는 것이었다. 앉아 있는 이들은 그들의 주장을 위해서 어떤 표시들을 할 필요조차도 없었다. 기득권층들은 반복적으로 딜레마에 빠졌다. 그들이 무엇을 하든지간에, 기존지배체제의 기반이 상실되는 결과를 낳았다.
진퇴양난의 시위양식을 기대할 수 있는 하나의 경우는 활동가들이 이미 하고 있는 공동체 작업이다. 예를 들자면, 지역 공원들이 항의가 필요한 장소들로 사용되어졌다. 시에틀 투쟁에서 몇몇 활동가들은 번화가와 부두의 거리에서 반나체로 게릴라식 집회를 감행했다.
누구에게 영향을 끼치려고 할지를 분명하게 결정하라.
“대중(the public)”같은 단어를 사용하는 것은 전략에 대해 생각할 때에 지나치게 단순한 방식이다. 물론 내가 이전 단락에서 그 용어를 언급했지만 말이다. 대중은 많은 하위단위들을 포함하며, 그 중 어떤 단위들은 운동의 성공에 매우 중요하고, 어떤 모임들은 덜 중요하며, 몇 몇 모임들은 단기적 관점에서 볼 때 중요하지 않다. 우리가 정치지형도를 만들어서 어떤 방식으로든 영향을 가장 많이 끼칠 필요가 있는 사람들을 결정하면, 요청되는 힘들을 보다 자주 발휘할 수 있는 전술들을 만들게 될 것이다.
예를 들면, 신사회운동을 하는 작은 모임이 한 번은 직접행동을 통해 누구에게 영향을 끼칠지를 정확히 파악하여, 미국의 외교정책목표를 실패시킨 적이 있었다. 미국은, 자주 그러는 것처럼, 수천의 민중들을 죽이는 군사독재정권을 지원하고 있었다. 실제로 파킨스탄의 독재자인 야아흐 칸(Yayah Khan)은 독립을 원하는 동뱅갈의 수많은 민중들을 학살하고 있었다. 미국정부는 그러한 지원에 대해 거짓말을 했다. 그러나 활동가들은 파키스탄 배가 지속적인 대량학살을 위해 군수물자를 실기 위해 미국 항으로 오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모임은 또한 항만노동자들이 선적을 거부하게 되면, 미국정부가 허를 찔릴 것이라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
문제는 동해안 부두노동자들이, 어쨌든, 정치적으로 정부를 지지하는 경향이고, 가족을 부양하기를 원한다는 것이었다. 활동가들은 반복적으로 부두노동자들이 동벵갈인들과 연대를 맺도록 설득했지만,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직접행동의 시간이 돌아왔다. 그 모임은 다음 파키스탄 화물선이 들어오기로 예정된 항구를 차단할 것을 선언하고는, 소형범선들, 노 젓는 배들, 그리고 나머지 혼성 선단들로 “해상 작전”을 감행하기 시작했다. 언론은 지속적으로 보도했고, 항만노동자들은 직접뿐만이 아니라 텔레비전에서도 작은 선박으로 대형 화물선을 막을 수 있다고 믿는 것 같은 항의자들의 낯선 전술에 대해 증언했다. 그 전술로 인해 항만노동자들은 자극을 받아 활동가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토론하게 되었고, 마침내 활동가들이 저지선을 만든다면, 그것을 넘어가기를 거부하겠다고 동의했다.
그 운동이 그 도시에서 성공하게 되자, 활동가들은 그 전술을 다른 항구도시에도 적용했고 마침내 국제항만노동자조합은 노동자들이 미국의 어느 곳에서도 파키스탄으로 가는 무기들을 실지 않을 것이라고 동의하였다.! 작은 모임에 의해 시작된 차단운동이 성공한 이유는 일반대중이나, 특별히 닉슨 대통령을 향해서가 아니라, 전략적 목표를 이루는데 영향을 가장 많이 끼칠 수 있는 대중의 특정부분을 향해서 정확하게 직접행동전술들을 구사했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WTO나 자본의 처벌, 또는 성 매매에 초점을 맞추는 운동을 계획할 때, 정치적/문화적/경제적 대중지형도를 만들 필요가 있고, 어떤 방식으로 누구에게 영향을 끼칠 것인가를 결정할 필요가 있다. 우리 힘의 주요부분은 사실 그러한 전략적 선택을 통해서 만들어진다
반발보다는 선호하도록 하기 위해, 조직적인 캠페인(campaigns)을 더욱 자주 사용 하라.
때로는 권련층들의 움직임에 대한 강한 반작용이,시에틀에서 그러했듯이, 매우 강력할 수가 있다. WTO 회담장 주변에 모여서 그것을 방해함으로서, 엄청난 성과를 거두었다. 세계화의 부정적 측면이 처음으로 공공의 의제가 되었다. NAFTA(북미자유무역협정)이 실행되는데 실패했다. 새롭게 진행되는 협정들은 애먹이는 가능성들이 되어버렸다. 매우 폭발적인 저항 에너지 그 자체는 긍정적이었다.
때때로 반발하는 것과 반발하는 태도에 머무르는 것은 서로 다른 무엇이다. 지속적인 반발에 적절한 단어는 “권력해체하기”(disempowerment)다. 간디의 제 1의 전략원리는 공세적이 되는 것이었다. 우리의 행동의제가 권력층이 언제 어디서 그들의 모임들을 갖기 원하는지에 의존하는 것은 공세적인 것이 아니다.
우리는 캠페인을 함으로서 공세적이 될 수 있다. 캠페인은 명확한 목표를 가지고 그 목표와 일치된 사람들에 의해 실제적으로 유지될 수 있는 기간에 걸쳐서 힘을 집중해서 동원하는 것이다. 종종 목적은 목표대상이 되는 존재가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요구의 형태속에 들어있다.
착취공장들(Sweatshops)에 반대하는 미국학생들의 운동은 대부분 캠페인을 통해 이루어졌는데, 이것이 그 운동이 대단히 큰 성공을 거둔 한 가지 이유다. 이 학생들이 그들의 목적을 선택하고 입장이 바뀔 필요가 있는 기득권자의 이름을 밝혔을 때, 다른 대부분은 분명해지기 시작한다. 누가 가장 강력하게 그들에게 반대할 것인가? 그리고 누가 그들의 가장 커다란 잠재적 협력자들인가? 캠페인의 초기부터 그들은 협력자들과 소통할 수 있고, 운동가들이 직접행동을 시작할 때까지, 이미 반 정도를 참여시킬 수 있었다.
이것은 새로운 생각은 아니다. 이제는 활동가들이 전해받은 지식중의 일부인 시민권운동의 승리는 캠페인을 통해서 쟁취한 것이다. 예를 들면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 또는 1963년의 버밍햄 투쟁같은, 주 정부가 평등한 공공시설 이용법안을 통과시키도록 강제하기 위해 주요 산업도시를 혼란에 빠트리는 방식이다. 나는 때때로 인종차별과 기득권층의 60년대에 대한 불신이 아니었다면, 오늘날의 젊은 활동가들은 SNCC, CORE, 그리고 남부 기독교지도자협의회의 영광으로부터 뭔가 얻기 위해서, 모든 이용가능한 책들이나 비디오들을 공부할 것이다.
캠패인을 진행하는 것은 확대경을 태양과 종이 사이에 두는 것과 같다. 태양에너지를 집중함으로서, 확대경은 종이를 불태운다. 성공적인 켐페인은 달성가능해 보이는 특정한 요구를 갖고, 인적 자원이 허락하는 한 9개월, 2년, 심지어는 더 오랜 시간에 걸쳐, 자신들의 목표에 초점을 맞춘다.
1980년대 미국에서 일반대중을 대상으로 한 캠페인 조직하기의 가장 큰 승리중의 하나를 대부분의 젊은 활동가들은 잘 모른다. 실제로 언론과 학교 체계의 공모가 너무도 성공적이어서, 나는 최근 운동에서 이 나라에서 핵무기에 대한 대단히 성공적인 투쟁에 대해 알고 있는 젊은 활동가를 거의 만나지 못했다
바닥 모임들(grassroots groups)이 벌인 반핵 투쟁은 엄청난 권력의 배열에 대항한 것이었다. 즉 그것은 민간과 군부 모두에 걸친 연방정부, 자금대여에서부터 물자에 이르기까지 주요한 이득을 만들어내는 은행들, 핵 시설을 만드는 제너럴 일레트릭과 웨스팅하우스 같은 거대 기업들, 건설회사들, 그리고 건축매매조합들 같은 얽혀있는 권력에 맞서는 것이었다. 또한 그 투쟁은 70년대 초반에 있었던, 원자력은 안전하고 값싸다고 믿는 “미국의 고답적인 지혜”에 대한 싸움이었다.
바닥 활동가들은 결합되어 있는 권력층들을 타격했다. 여기서 그 투쟁을 자세하게 묘사할 여유는 없지만, 그들은 70년대 후반까지 미국 공익기업들이 어떠한 새로운 원자력 시설도 주문하지 못하도록 하는 대중 직접행동을 훌륭한 방식으로 감행했다. 바닥모임들은 다양한 전술들을 사용했는데, 청문회에서 증언하는 것부터 시민 불복종에 이르기까지를 포함하는 것이었다. 즐겨 쓰던 전술중 하나는 시설이 건설되기로 한 지점을 대중들이 점령하는 것이었다. 그 운동은 분산적인 채로 진행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각의 지역에서 캠페인을 기획하고 실행하면서 확산되었다. 그것은 사회운동에서 집중화된 지도력을 원치 않는 무정부주의자들과 다른 이들이 공부하기에는 환상적인 켐페인이었다.
항의자들과 경찰행동 간의 현격한 차이를 강화하라.
대결단계의 힘은 연극가운데 있다. 그러나 거리의 연극은 브로드웨이를 벗어난 소극장에서 상연되는 극과는 다르다. 노련한 극장 청중들은 명료하게 “착한 사람”과 “나쁜 사람”이 규정되지 않은 채로, 다양한 면을 지닌 인물들을 선호할 수도 있다. 거리에서 벌어지는 사회변화라는 극은 그렇게 미묘할 수는 없다. 그것은 실제로 감정적으로 “좋은 사람” 대 “나쁜 사람”으로, 우리의 경우 억압당하는 이들 편인 사람 대 탐욕과 특권, 지배의 편에 선 이들의 대결로 귀결된다.
거리의 연극을 보고 있는 대세가운데의 관망자들은 놀랍게도 누가 좋은 사람이고 누가 나쁜 사람인지에 대해 편견이 없다. 그들의 눈에는 좋은 사람들이 항의자들이 될 수도 있으며, 그러다가도 다시 경찰이 좋은 사람들이 될 수도 있다. 연극이 자극하기 때문에, 청중속에 있는 어떤 이들은 누가 어떤 사람으로 판명될 것인지를 궁금해 한다.
2000년에 필라델피아에서 있었던 공화당 전당대회에서의 항의는 이에 대한 분명한 예를 제공한다. 그 집회에 대한 경찰의 이전 폭력이 널리 알려지면서, 경찰의 이미지가 손상을 입었다. 우리들 중에서 그 대회 직전 주에 집중훈련을 조직했던 이들이 효과적인 언론접촉을 했고, 큰 언론으로부터 꽤나 우호적인 평판을 받았다. 전당대회에 들어가면서, 결과는 경찰이 책임있고 조절가능하다는 신임을 재확립하는 증거를 댈 부담은 경찰에 부과되었다. 그리고 항의자들은 도덕적 우위를 차지하였다. 삼일 동안에 연속적인 3번의 평화행진이, 비록 3일째의 시위자들은 체포된다는 협약에도 불구하고, 이루어졌다. 3번째 평화행진을 조직한 단체인, 켄싱톤 복지권 단체(Kensington Welfare Rights Organization)는 정치적으로 고립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였고, 그 결과 그들의 시민 불복종은 협력자들의 지원을 이끌어냈다. 경찰은 3번째 날에 체포협박을 철회할 수 밖에 없다고 느꼈는데, 이는 경찰이 정말로 “나쁜 사람들”인지에 대한 중립자들의 의심을 확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8월 1일에 시작된, 전당대회에 맞선 행동의 두 번째 국면에서는 역할이 뒤바꿨다. 경찰은 유순한 양이 될 필요가 없었다. 대중의 두려움과 기대속에서, 그들은 단지 제한, 유연성 그리고 통제를 보여줄 필요만이 있었다. 그들은 최류탄, 고무탄환들, 말들(horses)과 함께, 또는 말 없이하는 돌격을 피하면서, 이 임무를 수행했다. 시위자들은 경찰의 공적 행동과 극명하게 대비되는 방식이 아닌 형태로 잡혔다. 이로 인해 방해하고 있는 시위자들은 파괴적으로 보였다. 그리고 경찰은 교통의 이동이 원활하도록 대중을 도왔다. 전국 텔레비전에서는 수세적이었던 경찰서장은 지역의 영웅이 되었다. 필라델피아의 주류는 “우리 고향의 경찰은 야만적이고 통제불능인 시에틀의 경찰보다 훨씬 낫다, 이 시위자들은 어디에서 왔는가?” 라며 구원의 신호를 내보낼 수 있었다.
여기서 배우게 되는 큰 교훈은 거리의 연극은 오랜 기간의 정밀분석과 설득이 요구되는 복잡한 분석을 수반할 수 없다는 것이다. 거리에서의 대결 연극은 시위자들의 행동과 경찰의 행동 사이의 단순한 대비를 필요로 한다.
극명한 차이를 강화하기 위해 사용되는 상징들은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흑인학생들은 정장과 코트, 타이를 착용하고, 신경질적인 백인 인종차별주의자들이 그들을 구타하는 동안에도, 조용히 앉은 채로 가만히 있었다. 간디는 시위자들이 경계를 넘을 때 병사들에 의해 구타를 당하면서도 조용히 걸어가는 소금행진을 구상했다. 베트남 승려들은 1963년에 독재권력을 무너뜨리는 것을 돕기위해 휴(Hue) 거리들에서, 탱크 앞에서 명상하는 자세로 앉아 있었다. 필리핀의 ‘민중의 힘’ 대중행동에 참여했던 필리핀 사람들은 독재자의 병사들에게 꽃목걸이를 해 줌으로서 부분적으로 정부를 무너뜨렸다.
젊은 Serb 활동가들이 오트푸르를 시작하기 몇 년 전에, 그들 중 어떤 이들은 학생 시위를 시작함으로서 국가와 맞섰다. 그러나 이러한 활동의 물결은 소멸했는데, 그 한 이유는 젊은이들이 유리창을 깨고 정복 경찰과 싸우기 위해 학생복을 착용하고 시위에 참여했다는 것이다. 평상복의 경찰 첩자는 대중의 관심을 독재권력으로부터 “학생폭력”으로 돌리는데 대단히 효과적이었다. 오프푸르는 그 경험으로부터 배워서 처음부터 정책의 문제로, 오트푸르의 일원으로 보이더라도 경찰과 싸우다가 붙잡힌 사람은 누구라도 경찰 첩자로 가정되어 더 이상 오프푸르의 일원으로 간주하지 않는다는 결정을 내렸다. 오트푸르는 그 내기에 건 돈이 너무 크다고 (밀로세비치를 타도하고 그들의 성원을 보호하는데도 성공하는 것)느껴서, 이에 대해 한계를 정할 필요가 있었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의 힘은 우리의 선택에 달려있다. 우리는 우리가 가장 영향을 끼치길 원하는 대중의 특정부분이, 사람들이 정의를 지지할 때 우리를 볼 수 있도록 적절한 상징학을 사용하는 대결국면을 만들도록 선택할 수 있다. 그것은 우리의 선택이다.
국가의 억압조짐에 대하여 강력한 태도를 취하라.
명백하게, 억압의 목적은 두려움을 조장해서, 사람들이 불의와 싸우는 것을 포기하게 하는 것이리라. 권력층은 일련의 전술들을 숨긴 채로 가지고 있다. 한 예는 필라델피아 공화당 전당대회 시위자들에게 단지 잘못된 행동에 대해 백만 달러의 보석금을 부과한 것을 들 수 있다. 권력층은 우리를 더욱 무력하게 만들기 위해 우리의 행동을 변화시키도록, 우리 안의 두려움을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어떠한 사회운동도 할 수 있는 가장 근본적인 선택중의 하나가 억압에 대해 어떤 종류의 태도를 취할 것인가 하는 이유이다. 우리가 처벌이나 자유의 구속, 직업의 박탈을 두려워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우리도 결국은 인간일 뿐이다. 억압에 직면해서 두려워하는 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워서 우리는 국가의 위협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에 대해 선택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를 수도 있다. 공화당 전당대회 항의를 위한 워크샵에서 많은 참가가들은 선택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들은 모든 운동이 억압에 대해 똑같은 태도를 취해야 된다고 믿었지만, 그것은 전혀 진실이 아니다. 어떤 운동들은 권력층들이 그들을, 내가 “두려움 경기(the Fear Game)”라고 부르는 것을 하도록 유도한다는 것을 알아 차린다. 권력당국은 활동가들이 두려움속에서 반응하도록 처벌하고 협박한다. 이 게임을 꿰뚫어 보는 운동은 다른 전략을 선택한다.
예를 들자면, 몽고메리 버스 보이코트 기간중에 권력층은 그들이 체포될 예정인 흑인 지도자들 명단을 가지고 있다는 말을 흘림으로써 ‘두려움 경기’를 작동하기로 결정했다. 지도자들은 강력하고도, 사전적인 태도를 취하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집단을 이루어 시청으로 몰려갔고 즉시 체포하라고 요구했다. 그들은 조심스럽게 그들의 수를 확대시켰는데, 이는 아마도 몇몇 개인들이 그 명단에 들지 않아서 지도자로 여겨지지 않는 것으로 인해 모역당하느니 체포되기를 분연히 요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좀더 최근에는 일리노이주 디카투르에 있는 노동조합이 비슷한 운동을 감행했다. 수백명의 노동자들이 시청을 점거하고는 고의적인 체포가 실제로 일어나기까지는 떠나기를 거부하였다.
이러한 행동이 권력층을 궁지에 몰아 넣었음을 생각해 보라. 사람들이 그들을 두려워하기를 거절하면, 권력층들은 자신들의 가장 강력한 무기의 하나를 잃어버리게 된다. 간디는 영국이 인도를 통치한 것은 영국이 더 강해서라기 보다는 인도인들이 그들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라고 말하곤 했다. 인도인들이 두려움을 포기하기로 하자마자. 그는 영국의 통치는 무너질 것이라고 말했으며,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4단계: 대중들의 정치적, 경제적 비협력
내가 이 글을 쓰고 있을 때(2002년 봄), 아르헨티나는 파업, 보이코트, 시민 불복종 등 다양한 종류의 대중 비협력의 진통가운데 있다. 12월에는 그 사회적 격동은 2주도 않되는 동안에 5명의 의장들이 바뀌는 사태로 이어졌다. 대중시위는 빈 취사도구를 난타하는 라틴계의 전통을 포함하며 특별히 금요일에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역사적인 드 마요 광장과 기타 다른 곳에서도 계속된다.
거주지에서의 지역 평의회(Popular assemblies)를 통해서 시위가 조직될 뿐만 아니라 지역적 문제와 관심사들이 제기된다. 예를 들면 당국이 임대료를 지불 할 여유가 없는 제과점을 폐쇄하지 못하게 하기도 한다. 지역 평의회에서는 집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재산세를 내지 말고 대신에 소득을 의약품들을 필요로 하는 자신들의 지역의 병원들에게 기부하라고 주장한다. 저임금 노동자들은 몇 달씩 파업을 하면서, 종종 다리와 고속도로까지도 봉쇄했다. 2월에는 일시적으로 지역에 있는 정유소의 출입을 막음으로서 도시의 석유공급을 차단했다.
아르헨티나 경제의 급격한 쇠퇴- 이는 신자유주의와 IMF의 또다른 “승리”다- 로 인해, 이러한 반정부시위는 가속화되었고, 이로 인해 다른 예들과 같이 아르헨티나는 우리에게 모델로서는 한계를 갖게 되었다. 우리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난에 직면해서야 대중적인 비협력이 조직화될 수 있기를 기다리고 싶지 않다. 무엇보다도 처음 3단계 과정이 할 수 있는 한 강력하게 추구돠어야 할 이유가 여기 있다.
의미있는 문화적 준비를 할 때 유리한 점은 우리가 만드는 조직이 더 강하고, 더 협력적이고, 인류평등적이며, 더욱 창조적일 수 있다는 점이다. 우리의 조직이 강해지면 질수록, 대결을 감행할 수 있는 더 나은 모습을 갖게 된다.
이란의 학생들과 다른 이들이 70년 후반에 왕의 통치에 대항하여 항거했을 때, 그들은 극심한 탄압을 경험했다. 비밀경찰은 고문을 했고, 군대는 비폭력 시위대들을 진압했다. 경찰국가라는 조건에 부딪치자, 그 운동은 장례식을 항의의 수단으로 활용했다. 그러자 군대는 장례식 참가자들을 죽였고, 탄압에 격분한 사람들이 장례식에 더 많이 참석했으며, 각각의 장례식이 또 다른 대량학살이 되었다. 한 경우는 헬리콥터가 군중을 향해 천천히 돌면서 발포한 결과, 비폭력 시위대들이 가득한 공공 광장이 피로 물들여지기도 했다. 그 후 즉각적으로 우리의 인권대통력인 지미 대통령은 공개적으로 이란 왕에게 미국의 지원을 약속하는 전 통을 보냈다.
이란인들은 활동을 잘 수행하면서, 운동과 탄압이 증대될 때, 지속적으로 연대를 주창했다.
마침내 왕은 군대 수뇌부들이 그에게 상황은 끝났다라고 말하는 처지에 직면했다. 그들은 전 나라가 파업중이며, 군대가 경제나 정치제도를 다시 가동시킬 수 없다고 말했다. 군대가 그 지점에서 할 수 있는 전부는 계속해서 살인하는 것이었고, 군대 내에서조차 비협력운동이 치솟고 있었다. 다음날 왕은 이란을 떠났다.
사람들은 이길 수 있다고 믿게 되면서, 충분히 분노할 수 있고, 서로의 지지를 느낄 수 있게 되면서, 엄청난 수준의 탄압에 비폭력적으로 맞설 수 있다. 이것이 내가 3단계 전에 1,2단계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이유이다. 문화적 준비와 조직은 대결국면이 대중적 비협력운동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회들을 증대시킨다.
분명히, 대중적인 비협력(지지의 기둥들을 해체시키는)의 목적은 체제를 붕괴시키는 것이다. 소송에 걸린 아르헨티나 중산층들이 은행의 창을 깨트렸던 사례들처럼, 연관된 재산을 파괴하는 행위가 있을 수 있다. 물론 어떤 맥락에서는 그러한 행위가 전략적으로 현명하지 못한 행위일 때도 있다. 오트푸르는 낙서를 하고 밀로세비치의 광고판을 바꿈으로서 재산을 손상시켰지만, 그러한 타격행위가 밀로세배치에 손 안에서 “테러리스트”라는 이미지로 오용될 수 있다고 결정했다.
대중적 비협력이 권력공백을 초래할 수 있는데, 어째서 5단계를 계획해야 하는가? 최근의 버마학생들의 애끓은 이야기에서 그 답을 구할 수 있다.
내가 1990년에 국경을 넘어 밀림에 있는 버마 민주주의를 위한 군대의 야영지에 잠입했을 때, 나는 1988년 항쟁에 참여했던 학생들로부터 깊게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그들에게는 말해 줄 수 있는 놀랄만한 이야기가 있었는데, 이것은 버마 독재자 네윈의 극단적 고립정책 때문에 전 세계 활동가들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학생들은 1987년에 일련의 소규모 비폭력 저항들을 감행했고, 이 과정에서 구타당하고 체포되고, 몇 사람은 살해되었다. 운동은 커졌고 비밀경로를 통해 “88년 8월 8일에 봉기하라”가 전달되었다. 그 날은 왔고 사회적 폭발이 일어났다. 수십만 나아가 수백만명이 거리로 뛰져나왔다. 학생들은 관공서를 점거했고 농부들이 노동자들과 함께 파업과 보이콧트, 건물과 공장들을 점거하는데 참여했다. 네윈을 지지하는 기둥들은 비틀거렸고 탄압은 그 운동을 막는데 실패했다. 독재자의 군대조차도 총격으로도 그 운동을 막는데 실패한 후에는 학생들쪽으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학생들이 사용한 한 가지 전술은, 총을 겨누는 병사들과 대면했을 때, 가장 용감한 친구가 병사들 앞으로 나가서, 웃셔츠를 벗어버리고 “총을 쏘려거든, 나부터 쏴라!”고 요구한다. 병사들은 단지 그와같은 엄청난 용기때문에만 저항할 수 있었다.
자신의 군대가 학생편으로 넘어가기 시작하면서, 독재자 네윈은 매우 영리한 선택을 한다. 그는 숨어 버렸고 군대와 내각들을 수도 밖으로 끌어냈다. 학생들이 엄청난 충격을 받을 정도로, 랑군과(만달레이 그리고 다른 도시들은) 갑자기 그들의 것이 되어버렸다! 환호는 혼란
으로 이어졌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 혼란에 더해서, 네윈은 군사 첩보대를 무질서를 조장하라는 명령과 함께 평상복 차림으로 시내에 투입시켰고, 또한 형무소들을 열어 모든 사람들을 석방시켜 버렸다.
만다라이에서는 불교 승려들이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 교통경찰을 포함한 모든 것을 대신했음에서 불구하고, 랑군에서는 무질서가 커져 갔다. 그러자 다음과 같은 선포가 이어졌다. 정부는“ 시민들의 입장을 받아들여” 자유선거를 하기로 동의하였고, 그 기간동안 개혁된 마음과 새로운 이름, 그리고 법과 질서를 회복해야하는 새로운 임무를 가지고 도시로 돌아갈 것이다.
독재권력은 돌와왔고, 그 과정에서 수천명의 학생들을 학살했다. 그리고는 권력 공백을 재탈환했다.
내가 가르치던 버마 학생 병사들은 이 글에 있는 5단계 모델을 배웠을 때, 즉각적으로 무엇이 일어났었는지를 알았다. 즉 그들은 일 단계를 거치지 않았거나(민주적인 버마에 대한 비젼이 없었고) 이 단계( 권력 공백을 눈부신 4단계로 나아가게 할 수 있는 대안적 단체들과 협동적인 조직) 가 없었기 때문에, 구 체제에 의해 밀려나게 되었던 것이다. 그들은 가능한 가장 혹독한 방식으로 봉기만으로 충분치 않다는 것을 배웠다.
5단계: 상응하는 제도들(PARALLEL INSTITUTIONS)
문화적 준비, 조직하기, 대결, 그리고 비협력이라는 부분적으로 겹치는 단계들을 통과한 후에, 비전을 공유한 사람들은 새로운 사회라는 토양에 새로운 제도들과 가치들을 확고하게 뿌리내릴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다. 그 제도들은 조직하는 단계의 씨앗들인 대안적 단체들, 네트워크들, 급진적 정파들(caucuses) 그리고 동질 그룹들(affinity groups)로부터 자라날 것이다.
대결 단계동안에도 이러한 단체들은 성장할 필요가 있는데, 권력층들이 운동 캠페인을 폭력적으로 대응해서 그들 자신들을 깍아내리기 바쁜 동안에는 그것을 하기가 더욱 쉬워진다.
그렇다 하더라도, 아마도 가장 빠르게 조직들이 성장하는 기간은 대중적 비협력 시기가운데 있을 것이다. 격동하는 분위기속에서는 급진적인 사람들 뿐 아니라 주류에 속한 이들도 일들이 이루어지는 대안적 방식들을 추구하게 된다. 예를 들면 내가 지적한 아르헨티나에서 노동자들이 공장들을 점거해서는 그것들을 운영했다. 어떤 도자기 공장 노동자는 “우리는 모든 것을 팔고, 그 이익을 여기서 일하는 모든 사람들이 동등하게 나눈다”고 말했다.
아르헨티나에서 인접 평의회들은 전형적으로 주마다 만나 변화를 위한 요구와 제안 목록에 대한 의견을 조율한다. 그리고 협약을 맺기 위해 그 제안들을 인근 연합 평의회들에 가져간다. 물물교환 시장들이 생겨났고, 사람들은 그곳에서 옛날 비디오 게임부터 음식과 숙련된 서비스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거래하였다. 정부 돈은 전혀 통용되지 못했다. 신용전표들(Credit slips)이 소규모 통화로 사용되었다. 물론 신뢰할만한 정보에 대한 필요를 채우기 위해 독립언론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5단계에서는 이러한 조직들이 온전히 그들 자신의 것이 되는데, 이는 그것들이 새로운 사회의 하부구조의 부분이 되기 때문이다. 당이 국가를 장악하고는 위에서 아래로 사회를 재조직하는 낡은 레닌주의 모형과는 대조적으로, 이 전략적 모형은 바닥에서 위를 향하는 재구조화를 제안한다. 그리고 처음부터 급진적으로 민주적 비전을 반영하는 조직적 형태들을 혁신해온 급진주의자들이 이 과정을 지탱해 왔다.
이것을 묘사하면 다음과 같다. 권력층들은 생태계의 위기, 가난, 불의, 그리고 전쟁을 다루는데 무기력하고, 내켜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의 합법성은 이미 침식되고 있으며, 이제는 그들의 지지 기반들이 흔들리고 있음을 알게 되는 중이다. 그들은 보궐선거(co‐optation)와 폭력의 결합을 통해 그들의 권력을 회복하려고 애써 보지만, 그러나 이제 그렇게 되기에는 너무 늦었다. 거대한 비협력운동으로 인해 마르코스, 밀로세비치, 그리고 그들보다 앞선 사흐 같은 이들은 타격을 받는다.
이 순간이야말로 노련한 조직가들과 촉진자들이라는 하부구조를 가진 꿈꾸는 운동이 그 공백속으로 들어가서는 점차적으로 새로운 사회, 권력보다는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사회를 창조할 수 있는 때다.
새로운 사회는 낡은 방식은 더 이상 버틸 수 없음을 깨달은 주류사회의 사람들과 함께 공동으로 창조된다. 급진주의자들은 주류사회에 낯 선 사람들이 아니다. 왜냐하면 주류사회는 그들을 조합과 직업내에서 정파들, 인근에 있는 대안 단체들, 그리고 항의할 뿐 아니라 봉사하기를 좋아하는 동질 그룹들의 형태로 계속해서 보아왔기 때문이다. 그런 역사적 계기들을 동반하는 이 행복한 희망은 또한 급진주의자들이 아직 펼쳐 보이지 못한 가장 역동적인 결합 에너지를 발휘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이 단계에서 많은 개입전술들은 대안적 기관들을 원 기관들에 대응시키는 방식으로 실행될 수 있다. 점유(occupation)는 때때로 기관 자체를 질서있게 제거하도록 이끄는 일시적인 수단이 될 수도 있다. 미국 출신의 종족간의 혁명적 연대는 아마도 미국의 인도국(U.S. Bureau of Indian Affairs)을 해체하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다른 경우에서는 점유자들이 국가가 무너졌을 때를 위해 계획했던 새로운 방식으로 즉각적으로 활동하곤 했다.
동질 그룹들은(The affinity groups) 숫자면에서 경이적으로 성장하게 될 것이다. 그들은 비협력단계에서 주요한 역할을 감당하게 될 것이고 5단계에서 조건이 변할 때 신속하게 결정할 수 있는 능력을 제공하는 귀중한 “전쟁터”의 경험을 얻게 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마지막 국면이 진행되면서 자발적으로 동질 그룹을 만드는 동안, 가능한 한 신속하게 그 단체들을 재생시켜서, 소중한 지식과 경험을 혁명에 늦게 결합한 사람들에게 전하기 위한 의식적인 노력이 있을 수 있다. (오트푸르는 모든 신입회원들이 훈련을 받기 위해 첫 번째로 필요한 규범을 만들었다. 목표를 향하여 그 단체는 무럭무럭 자라나서 8만명의 회원에 이르렀다).
동질 그룹들은 그들의 훈련과 연대 때문에 이 마지막 단계의 더욱 어려운 과제들의 많은 부문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반동적 단체들에 관한 피뢰침 역할을 감당하며, 우익 민병대와 다른 단체들에 규율과 용기를 가지고 맞설 수 있다. 그들은 급진적인 정파들이 험난한 지역을 점거하는 것을 도울 수 있고 그들 자신이 FBI나 군대같은 억압적 본성이 있는 정부 기구들을 점령할 수 있다.
줄곧 자신들의 기술을 발전시켜온 변혁적 네트워크들은 이 마지막 단계에서 자기 자신들이 될 것이다. 이 전략적 모형이 레닌주의자들의 마음에는 대단히 친숙한 수직적인 통제 기능을 회피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일치를 위한 필요를 버리지는 않는다. 필수적인 서비스는 제공되어야만 하고, 통신은 유지되어야만 하며, 격동하는 상황속에서 한정된 자원을 최적으로 사용하는 것에 대한 판단이 있어야만 한다. 일치를 위해서는 정보의 공유가 필요하고, 변화를 지향하는 세력들간에 협의된 동의가 요청된다.
진전된 투쟁의 단계에서는, 일치를 지향하는 평의회들이 지방과 지역, 국가, 그리고 초국가 차원에서 필요하게 될 것이다. 변혁적 네트워크들이 자신들의 사명을 창조적으로 해 낸다면, 많은 동질 모임들(affinity groups)이 함께 참여한 반세계화 대결속에서 대변인평의회(spokescouncils)를 가진 것처럼 이러한 평의회들은 투쟁으로부터 유기적으로 자라게 될 것이다. 적어도 70년대의 반핵운동때부터 활동가들은 평의회를 통해서 비권위적인 형태의 조정을 실험해 왔다. 변혁적 네트워크들을 유지하는 이들의 임무는 이러한 실험들로부터 배운 교훈을 보유하고 소통방식에서의 문화적 차이에 주의를 기울이며, 새로운 형태의 평의회들이 그들 임무의 모든 차원에서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평의회들은 마지막 단계에서 대조되는 “정부들”(the parallel "governments.)"을 구성하는 몸체들이다. 나는 “정부”를 인용부호안에 두었는데 이는 이러한 몸체들이 우리가 알고있는 정부들과는 전혀 다르게 보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이 5번째 단계에서는 사람들은 세금을 억압적 질서를 지닌 정부 대신에 평의회에 낸다. 평의회는 교통 단속, 쓰레기 수집 등과 같은 필수적인 서비스를 조직한다. 내 개인적 비전에서는 국가평의회가 정부의 합법적인 기능들을 지방, 지역, 초국가 차원의 평의회들에 분배함으로서 국가 정부를 서서히 폐지시키기 위해 다른 평의회들과 함께 노력한다. 평의회들은 또한 노동자 정파들(caucuses), 협동조합들, 그리고 동질 모임들과 함께 분권화할 가치가 있는 단체들을 질서있는 방식으로 해체시키기 위해 일할 수 있다.
변화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가장 로맨틱한 시절에도, 나는 근본적 변화에는 시간이 걸린다는 것을 알고 있다. 탐욕으로 지구를 파괴시킬 수도 있는 이들에게서 인류애로 지구를 치유하는 사람들에게로 권력을 이동시킴으로서, 우리는 새롭게 창조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권력이동은 우연히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권력이동으로 인해 적어도 인류와 지구 모두의 안녕과 성장을 지원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될 것이다. 여기에서 제안된 전략적 틀을 사용하는 운동은 추가적인 유익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즉 이 운동을 통해 과업을 수행하는데 필요한 숙련된 수 많은 사람들과 공공의 안녕을 위한 좀 더 나은 공급방식속에서 이루어진 수년간의 실제적인 경험을 제공받게 될 것이다. 이 전략은 운동이 방관자들에게 한 뭉치의 희망과 설익은 생각들에 모험을 걸도록 요구하지 않을 것임을 의미한다. 운동은 자신의 용기와 창조성,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는 능력을 통해서 받을만한 가치가 있는 신뢰성을 얻게 될 것이다.
무엇보다도. 이러한 접근방식의 전략을 사용하는 운동은 오트푸르와 비슷한 지점에 있게 될 것이다. 자신들의 전략을 발전시키던 때에, 젊은 활동가들은 세르비아의 선택을 아주 간결하게 나타내는데 일치했다. 그들이 말하기를 독재권력은 죽음에 관한 것이며, 오트푸르는 생명에 관한 것이다.
변화를 위한 훈련(Training for Ch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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