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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茶고전 - 시/산문/책' 게시판에 처음으로 올리는 글입니다. 새롭게 신설한 게시판에 어떤 글로 문을 열까 고심하다가, 김시습의 차시茶詩를 선택하였습니다. <여일동승준장노화>는 한국 차사에서도 동아시아 차사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자하는 '시'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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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짤막한 감상도 곁들이면 물론 좋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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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암 최정간의 연구를 바탕으로 하여 매월당의 초암차의 의미를 전개하여 보자면 이러하다.
어떤 역사적 사실이 밝혀지거나 또는 모호한 채로 역사에 은폐된 부분들이 드러나면, 그러한 사실들에 대해 사람은 쉽사리 받아들이지 못한다. 갑작스럽기 때문이다. 여기서 현암 최정간의 연구를 예시로 들어본다면, 벌써 40여 년째 김시습에 대해 연구하였으니 평생을 건 연구 성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듯 한 사람은 거기에 자기 인생을 걸고 그 길을 걸어오고 있었는데, 이러한 연구 성과를 접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소식이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듯한 몽롱한 느낌'으로 들려올지도 모른다.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기존의 정보와 자료에 새로운 정보와 자료가 아직 접합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수도 있다. 어떤 연구 성과가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지려면 한참 후에야 비로소 전파되는 것이라고 생각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여기에는 어떤 연구자와 이러한 연구에 무관하게 살아가는 사람들 간의 시간차가 존재한다.
연구 성과를 미리 접한 사람들은 어떠할까? 하나의 연구 성과에 유의미한 진전이 이루어지려면 그 연구에 또 다른 연구 성과가 겹쳐져야 한다. 바로 자극을 받아 또 다른 연구로 파장이 일어날 수도 있지만, 대체로 그렇지 못하다. 그 이유는 어떤 정보를 그 자신 안에서 내재화하는 시간 때문일지도 모른다. 어떤 연구 성과는 다양한 촉수들이 있다고 보는데 그 촉수들은 대체로 모호한 채로 있다. 이 모호한 부분은 사람 그 자신이 스스로 연결시켜야 하는 부분이다. 역사적 자료는 뚝뚝 끊어져 있기 십상이고, 그 빈 공백은 인간의 부단한 사유 활동을 통하여 상상으로 채워져야 하기 때문이다.
생각의 연결이 이루어지는 '그 시간'이 어쩌면 필요한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람은 대체로 마음이 조급하다. 왜 사람들이 그걸 모르냐고 불만이거나 확산이 안 되는 상황을 답답해한다. 연구와 일반적인 삶은 간극이 있다. 생활이 연구에 초점이 맞추어진 형태와 이것저것 하며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 사이의 간극. 이 간극을 메우거나 연결하려면 매개체가 필요하다. 메우지 못한다면 왕복선이라도 필요하다. 그리고 그 지점을 보완해야 하며 두텁게 만들어야 한다.
아마도 차맛어때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있고, 일반적 형태로 진행되고 있어서 이러한 성과들이나 역사적 자료들이 이 공간에서 확산되기를 바랐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어떤 연구 성과에 대해 그다음을 이어가거나 그 일에 골몰하기는 애초에 가능한 일이 아니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 이러한 글을 쓸 이유도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른 삶의 형태는 간극을 만든다. 그 간극을 넘나드는 사람은 그래서 드물 수밖에 없다. 이쪽의 것을 저쪽으로 연결하고 저쪽의 것을 이쪽으로 날라주는 사람은 그 자체로 경계인의 포지션에 서게 되기 때문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경계인의 포지션에 서려고 하겠는가? 현암 최정간은 ‘이문화’와 ‘이류동행’에 대해서 논문에 쓰고 있다. 매월당과 준 장노 그리고 잇큐선사와 같은 사람들은 이문화의 접변지대에서 활동한 사람들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그 중심에 매월당 김시습이 우뚝 서 있다고 생각한다.
매월당에 대해 머금은 시간은 십여 년이 넘고, 직접으로 관심을 가져 본 시간은 6년여가 되어간다. 이 시간 동안 나는 매월당과 정서적으로 가까워진 시간인지도 모르겠다. 지금보다 더 예전의 나는 매월당을 품기에는 버거웠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내가 매월당을 이해하는 시간은 매월당의 시도 아니고, 매월당의 행적도 아니다. 나는 그저 매월당에 대해 생각했을 뿐이다. 그리고 매월당에 관한 논문을 다시 읽어보고 이 글을 쓰고 있다.
이를테면 예전에는 조금은 비약적인 가설이라고 생각했던 마음의 동요가 가라앉고, 내 안에서 어떤 연결점들이 생겼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내 안에서 이 논문 내용에 대해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경계인이 되는 일이 더는 두렵지 않았다. 해서 이 글을 쓰는 것이다.
일본 스님 준俊 장로와 이야기하며 / 여일동승준장노화(與日東僧俊長老話)
멀리 고향을 떠나오니 마음이 쓸쓸하여 遠籬鄕曲意蕭條원리향곡의소조
옛 부처와 산꽃으로 고적함을 달래네 古佛山花遣寂寥고불산화견적요
무쇠 주전자에 차를 달여 손님에게 대접하고 銕鑵煮茶客飮철관자다객음
질화로에 불을 더해 향을 사르네 瓦爐添火辦香燒와로첨화판향소
봄 깊으니 해월海月이 쑥대 문을 넘어오고 春深海月侵蓬戶춘심해월침봉호
비 멎으니 산 사슴이 약초 싹을 밟네 雨歇山麛踐藥苗우헐산미천약묘
선의 경지와 나그네의 정이 모두 맑고도 맑으니 境旅情俱雅淡선경려정구아담
깊은 밤에 이야기가 막힘없이 잘 통하리라 不妨軟語徹淸宵부방연어철청소
여일동승준장노화(與日東僧俊長老話) 차시에 대한 개인적인 감상은 이러하다. 시의 한글 번역은 기존 번역에다 직접 찾아본 한자의 뜻을 살핀 후 내 느낌대로 가미하여 본 것이다. 매월당이 ‘선의 경지와 나그네의 마음’이라 한 대목은 ‘조동종(묵조선)’을 의미한다고 생각했다. 선으로 서로의 마음이 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시에서는 어떤 공간감이 드러나고 있다. 그리고 움직임이 있다. 해월海月은 바로 또 하나의 세계로 들어가는 장치다. 텅 빈 공간 창조이다. 선이란 무엇인가.
일본의 조동종은 도겐(道元도원/1200~1253)이 중국에서 묵조선을 배워온 후부터 시작되었다. 현재도 일본은 조동종이 가장 크다고 한다. 준 장노는 천태종이었고 잇큐는 임제종이었다. 그 당시 일본의 오산 선승들의 시스템으로 종파가 달라도 서로 교류하는 데는 아무 지장이 없었다고 한다. 당연히 매월당 김시습과 준 장노의 소통에도 아무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신라 말에서 시작하여 고려 초에 형성된 ‘선종구산’ 중에서 가장 늦게 형성된 ‘수미산파’만이 조동종이다. 김시습은 준 장노와 조동종에 대해서도 이야기했을 것이다.
이때 매월당의 연령은 31세 ~34세 정도이고 준 장노는 60세 전후로 추정된다. 준 장노가 한양으로 사행을 온 해는 1463년이므로, 매월당은 31~34세 사이일 것이다. 청년과 노승이 만났다. 그런데도 서로 잘 통했던 모양이다. 매월당 시의 느낌은 차분하고 어른스럽게 다가온다. 공간묘사와 분위기 묘사가 탁월하다.
잇큐의 『광운집』에 실린 ‘문수보살과 유마의 대담(文殊菩薩對談)’이란 시를 살펴보면 이러하다.
둘이 아닌 법문에 힘을 다한 깨끗한 이름 不二法門勞淨名불이법문로정명
한 점의 우레가 대중을 움직였고 一点如雷大衆驚일점여뢰대중경
신라국 속에 보이지 않는 화살을 쏘았다네 新羅國裏暗放箭신라국리암방전
깊은 밤에 일본은 그저 태평하네 夜半扶桑則太平야반부상즉태평
이 시는 유마경을 빗대어 임제종의 선이나 조동종의 선이 둘이 아니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일본이 13세기에 조동종을 도겐이 들여오고, 신라에서는 10세기에 이엄이 들여왔다. 또한 유마힐은 재가불자로서 유마힐경의 저자이기도 하다. 이 유마힐과 유사한 이가 바로 김시습이 아니겠는가. 두타행을 실천하는 수행이 신라로 갔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일본은 그때 태평성대의 때가 아니었는데도 불구하고 태평하다고 한 것은 두타행에 관심 없는 일본 불교를 비판하는 의미일 것이다.
잇큐의 시 중에서 소개된 시는 ‘이류중행異類中行’이라는 시도 있다.
다른 종류의 말과 함께 길을 가는데
異類馬牛行途이류마우행도
동상 양개의 무리는 위산과 양산 두 스님이 올바르게 공부했네
洞曺潙仲正工夫양조위중정공부
우매한 학자는 잘못 영역을 해석하여
愚昧學者頷解우매학자암해
정히 이 사람들을 짐승의 무리라 하네
看來正是畜生徒간래정시축생도
이 시 역시 조동종에 관한 시이다. 두타행에 관한 내용이다. 잘못 해석하여 실천을 제대로 못하였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류중행은 이문화와 서로 통하는 말이다. 아마도 ‘이문화’라는 말은 여기서 기원했는지도 모르겠다. 이류중행은 다른 모습이지만 보살행을 계속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어쩌면 요즘말로 ‘경계인’이라고 표현해도 될듯하다. 그러고 보면 모든 선사들의 행적은 이류중행적인 경계인이었다고 보아도 무방하지 않을까! 매월당 김시습도 그러하고!
<구조론>의 김동렬의 글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인간이 마이너스해야 하는 이유는, 인간은 경계인으로 살고자 하는 본질적인 욕망이 있기 때문이다.
"질은 결합하고 입자는 독립하고 힘은 교섭하고 운동은 변화하고 양은 침투한다."
이렇게 질에서 -> 양까지 이행되기까지 마이너스만 할 수 있다.
인간의 눈에 질/입자/힘은 눈에 안 보이고 운동과 양은 잘 보인다. 어떤 하나의 ‘사건’에서도 그러하다. 나는 보살의 행위들 역시 ‘경계인’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일반적 대중의 눈에는 보살의 행위만 보인다. 그래서 주는 존재라는 생각을 먼저 갖게 되어 중생은 바라는 것을 먼저 원하게 된다. 어쨌든 보살은 가진 게 많다. 이 말은 줄 것이 많아야 줄 수 있다는 의미이다. 보살은 주기 이전에 먼저 뭔가를 많이 쌓아놓았던 사람이다. 그래야만 ‘마이너스’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유마힐은 쌓아놓은 것이 많았다. 이 축적으로 보시를 행할 수 있었다. 그러니 유마힐 관점에서 보자면 보살적 행위를 누구보다 빨리 증득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한량없는 지혜를 축적한 문수보살은 지혜를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솟아나고 그것을 중생에게 퍼준다. 그러니 축적이 먼저다. 축적된 것을 퍼주는 것이다. 있으니까 줄 수 있는 것, 줄 수 있는 것을 축적해야 하고, 축적하는 구조를 만들어야 하며, 줄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그것은 바로 불교적 세계관의 창조였다. 이 말인즉슨, 어떤 것은 그 세계에서 통용되는 방식으로만이 마이너스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또한 그러한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할 것이다. 어쨌든 대승불교는 ‘보살’이란 시스템을 만들었으며, 유마힐은 바로 그 지점을 가장 잘 증득했다고 여긴다.
줄 수 있는 구조를 만들면 상대적으로 잘 받을 수 있는 구조는 배우고 익혀야 한다. 대입하여 보자면 이러한 구조가 차맛어때 게시판 구조이며, 다회의 구조라고 할 수 있다. 잘 주고 잘 받는 구조가 중첩되면 시스템이 되는 것. 주고받는 것은 물질적인 것일 수도 있지만 정신적인 것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그 시스템에 기반하고 있는 것이 ‘예와 에티켓’이고, 이것은 바로 여기에 기초하고 있었던 것. 전달되고 연결되는 구조를 우리가 만들고 구현해야 하는 것.
문득 머리를 식히려고 유튜브에서 박문호 박사의 이야기를 들었다. ‘정서적 준비’라는 말이 나오자 나의 뇌는 환호했다. 정서적 준비라는 말은 차茶에 있어서는 ‘금과옥조’가 되어야 할 말이라고 생각했다. 또 하나의 말을 했다. ‘목적으로 구성되지 않은 텅 빈 공간’이라는 말이다. 이것은 차회가 궁극으로 지향하는 하나의 세계라고 볼 수 있다. 차회는 그때마다 그 세계를 드러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 두 가지의 말은 차에 있어서 시작이자 끝인 셈이다. 알파와 오메가이다. 무엇인가. 차 아닌 다른 분야들 역시 결국 차와 같은 것을 구현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니 인간의 활동이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말할 수는 없다. 다만 차이에 의해서 서로 다름을 드러내어 다채로워지는 것 뿐!(이 글에서는 간략하게 썼다. 따로 정리할 예정)
김시습이 《심현담요해十玄談要解》 또는 《조동오위요해曹洞五位要解》를 저술한 지는, 준 장노와 대화한 후 세월이 한참 흐른 후이었다. 아마도 김시습은 그때 일연의 《중편조동오위》에 관해서 알고 있었거나 또는 준 장노와 대화하면서 조동종에 관심을 더 가졌을 수도 있다. 그래서 훗날 준장노와 함께 사행을 왔었던 앙지범고를 금강산에서 재회하자 《중편조동오위》를 선물한 것일 거다. 어쨌든 김시습과 준장노는 서로의 나라가 달랐던 만큼 광범위한 이야기를 나누었을 것이다.
잇큐 역시 만년에 고규안을 짓고 그곳에서 제자들을 가르쳤던 이유가 어쩌면 우리나라 서원 또는 향교 및 서당의 영향을 받았던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러니까 차와 예술과 철학을 결합하여 제자들을 길러내었던 이유가 태평한 일본을 뒤로하고 훗날의 일본을 도모하려는 생각이 아니었을까? 싶다. 마치 김시습처럼 잇큐 역시 종횡무진으로 이 세계와 저 세계를 넘나들었으니 말이다. “두 스님이 올바르게 공부했네” 이 표현 역시 매월당 김시습과 잇큐 그 자신을 가리키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고도 남을 것 같아서!
잇큐는 그 자신도 김시습과 같은 보살행의 삶을 산 것인지도. 김시습의 삶의 궤적은 그가 이천여 편의 시를 남긴 것, 그리고 다수의 글과 책은 그의 울분이라기보다는 어쩌면 그 시대의 사람들에게 보내는 선물이었던 듯. 바로 그가 그렇게 많은 것을 내보인 것은 그의 축적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바로 그것이 경계인의 삶이 아니었겠는가! 이 세계와 저 세계를 연결하는 통로이자 매개자이며 이류동행을 실천한 삶이 아니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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