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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김시습 평전/심경호/돌베개> 278쪽에 ‘여일동승준장노화(與日東僧俊長老話)’에 대한 시 해석 부분을 보면 이렇게 설명되어 있다.
“ 그런데 이 시에는 고불古佛 앞에 꽃을 꽃아 두고 질화로에 향을 피우고는 무쇠 주전자에 차를 달여 마시는 다도茶道의 광경이 묘사되어 있다. 그 모습은 15세기 이후 일본에서 발달한 초암다草庵茶의 풍경이다. 초암다는 귀족풍인 서원차書院茶와 달리 질박함을 추구하는 다도이다. 즉 인가에서 떨어진 곳에 네 기둥을 세우고 이엉을 덮은 초가에서 차를 즐기는 것을 말한다.
일본의 초암은 고려 • 조선의 초정草亭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김시습의 이 시를 근거로 삼아 김시습이 일본의 초암다에 영향을 주었다고 말한다. 주) 141하지만 시의 내용으로 보면, 김시습은 초암다를 즐기는 준장로에게서 차 대접을 받은 것이지, 김시습이 초암다를 그에게 전해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시는 김시습과 일본의 초암다, 나아가 일본 불교와의 관계를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임에 틀림없다. “
이 부분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을 하였다. 아사가와가 책에 힌트를 남긴 이후에, “유의미한 학술대회는 한·중·일 학계 최초로 1988년 7월 14일 강원도 춘천 문화방송이 주최하고 강원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가 주관한 《매월당 국제 학술 세미나》라고 한다.
이 세미나의 목적과 의의는 매월당의 사상과 문학을 재조명하여 국제적인 인물로 격상시키는 것이었으며, 초암차인으로서의 다양한 면목을 동아시아 삼국의 학자들이 모여 총체적으로 조명하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이날 국제 학술회의에 참석한 이들은 한국학의 원로 석학 민영규 · 유승국 · 김지견 · 김영태 · 이종찬 · 한종만 · 최정간 · 소재영 · 김용구 · 강동엽 · 양은용 등이었다. 일본의 도쿄대 다마끼 고오시로 교수, 중국의 서안 외국어대 리우지엔치앙 교수 등의 학자들이 참석하였다고 한다. 매월당의 서지, 사상, 문학, 차, 비판정신 등을 다각적으로 조명하였다고 한다. <최정간, 논문에서 인용>”
“그런데 이 시에는 고불古佛 앞에 꽃을 꽃아 두고 질화로에 향을 피우고는 무쇠 주전자에 차를 달여 마시는 다도茶道의 광경이 묘사되어 있다. 그 모습은 15세기 이후 일본에서 발달한 초암다草庵茶의 풍경이다.” <책 본문에서 발췌>
위의 내용을 보자면, 아마도 저자는 직접 시를 해석하지 않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저자가 매월당의 시를 해석한 일본다도는 16세기의 다도(와비차) 묘사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김시습 당시에 일본 시대상을 살펴보면, 당물이 유행하였고 서원건축과 서원차가 유행하던 시대였다. ‘서원차’는 다실이 크고 화려한 유흥과 사교가 중심이었기 때문에 잇큐는 그토록 비판했을 것이다. 그때 때마침 준장노가 잇큐에게 조선의 소식과 김시습에 대해 알려주었을 것이다. 이 부분은 차문화 역사에서도 그렇고 문화사 자체에서도 뜻깊은 ‘역사적 사건’이다. 준장노에 대해서도 새로운 시각에서 역사적 의미를 부여해도 좋을 것이다.
준장노가 잇큐에게 전달해준 것은 생생한 조선의 이야기였을 것이다. 잇큐의 만년의 삶을 보면 여실하게 드러나고 있다고 생각된다. 그 당시 잇큐가 살던 무로마치 시대의 일본 외부 세계는 중국 아니면 조선 밖에 없었다. 잇큐 역시 외부 세계를 받아들일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정황으로 보자면 잇큐는 조선의 사상과 문화와 정서를 받아들인 것일 것이다. 해서 <여일동승준장노> 시를 남겨준 매월당 김시습에게 한량없는 고마운 마음이 든다.
《김시습 평전》에 나와 있는 <여일동승준장로> 시 해석은 이러하다.
고향 멀리 떠나 마음 쓸쓸하기에
고불과 산꽃을 보며 적적함을 잊누나.
철관에 차를 달여 손님에게 제공하고
질화로에 불 피워 향을 태우네.
봄 깊으매 바닷달이 쑥대 문 안에 들어오고
비 멎자 산 사슴이 약초 싹을 죄 밟았군.
선 경지와 나그네 정이 모두 아담하기에
밤새도록 담소해도 무방하리라.
“그런데 어떤 사람은 김시습의 이 시를 근거로 삼아 김시습이 일본의 초암다에 영향을 주었다고 말한다. 주) 141하지만 시의 내용으로 보면, 김시습은 초암다를 즐기는 준장로에게서 차 대접을 받은 것이지, 김시습이 초암다를 그에게 전해준 것은 아니다.”<책 본문 인용>
<여일동승준장로>는 매월당 자신이 지은 시이니까 “손님에게 차를 내어 대접했다”라고 표현한 것일 터이다. 매월당 자신의 심경이 드러나 있는 시인데, 매월당이 준 장노에게 차를 대접받았다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어떤 근거로 이렇게 확신을 가지고 쓴 것일까? 저자가 써 놓은 대목을 보면, ‘어떤 사람’이라고 하였는데, 이 사람은 바로 ‘아사가와 노리타가’라고 주석에서 밝히고 있다. 나는 이 부분에서 저자가 이 부분을 쓰기 귀찮아서 그냥 얼버무리고 넘어간 것이 아닐가 싶기도 하였다.
나는 이 부분을 읽으면서 저자의 글에 대해 이렇게 생각했다. 매월당의 초암차에 관심도 없어 보이고, 매월당 초암차 연구자들이 하는 연구는 연구 같아 보이지도 않고, 억지 소설 쓰는 것처럼 보이고, 그냥 자신의 생각대로 매월당이 묘사하고 있는 풍경은 일본다도일 뿐이고, 준 장노가 일본 다도를 매월당에게 시연하고 있을 뿐이고, 단지 김시습과 일본의 초암다와 일본 불교와의 관계가 중요할 뿐이다.라고 역설하는 것처럼 들렸다.
저자의 글대로라면, 차시 <양다養茶>에서 ”그늘에 키우느라 울을 엮어 보호한다“라는 시구는 일본 말차용 찻잎 키우는 방식이라고 썼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또 저자의 표현에서 “ 김시습과 일본의 초암다”라는 표현도 그렇다. 이 표현은 김시습의 초암차와 일본의 초암다실 또는 와비차“ 라고 수정되어야 할 것이다. ‘김시습’은 그냥 덩그라니 놓아두고, 일본 초암다라고 하면 김시습을 허수아비처럼 세워두는 형국이 아닌가 말이다. 저자가 말하는 ‘중요한 자료’라는 기준은 어디를 기준으로 말하는 것일까!
차문화는 그 자체로 하나의 세계이다. 그런데 문고리도 열기 전에 부정부터 하는 시 해석은 다소 뜻밖이었다.
책의 머리말을 살펴보면 이런 대목이 있다.
“김시습의 시문들은 문자만 보고 그 뜻을 이해하려 하는 것 또한 ‘글자만 보고 억측을 하는 望文生意망문생의’ 잘못을 범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근심이 들었다. (...) 김시습 평전은 그의 영혼의 일대기여야 할 것이다.”
‘영혼의 일대기’여야 한다면서 시 해석을 이렇게 해놓으면 도대체 어쩌자는 것일까.
책 『김시습 평전』은 매월당의 인생 여정을 시기별로 나누어서 정리해 놓은 평전이다. 김시습에 대해여 세밀하게 시기별로 알아갈 수 있는 책이라고 여긴다. 저자의 감상이 많이 스며든 책이라고 여기지만,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평전의 문학성이라는 것도 있는 것이니까.
‘<유금오록>의 정리’ 편을 옮겨 보았다.
김시습은 관서 관동 호남지방을 방랑하던 시절에 지은 시들을 각각 『유관서록』 · 『유관동록』 · 『유호남록』으로 엮고, 그 뒤에 ‘후지後志’를 적었다. 마찬가지로 경주 금오산에 은거하면서 서울을 오가거나 경상도와 관동남부를 오가면서 지은 시들은 1473년(성종 4, 계사) 봄, 성동의 폭천정사에 있으면서 『유금오록』으로 엮었다.
김시습은 『유금오록』의 후지에서 금오산 시절의 고통스러웠던 추억과 소요하며 즐거웠던 추억을 동시에 떠올렸다. 특히 병에 관하여 특별히 언급한 것을 보면, 그가 원각사 낙성회에 참여하고 돌아온 후에 마음의 병을 앓아 몸까지 상했던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 금오산에 있은 뒤로 멀리 나가 노니는 것을 사랑하지 않았으며, 그래서 그런지 한기에 몸이 상하여 질병이 잇따랐다. 그러나 바닷가에서 느긋하게 노닐고 도읍의 교외에서 마음껏 서성이면서 매화를 찾고 대를 심방(찾아봄)하여 항상 시를 읊고 취함으로써 스스로 즐겨 하였다. ”
『유관서록』 · 『유관동록』 · 『유호남록』 · 『유금오록』은 김시습이 세상을 떠난 뒤, 선조 ·광해군 때의 문인 기자헌에 의해 거듭 선별되어 『매월당시사유록』으로 엮이고, 17세기 초에는 그것이 경주에서 목판으로 출간되었다. 이 시집을 ‘사유록’이라고 부른다.
이 사유록에는 매월당의 시 작품 가운데 1/4 분량에 해당하는 450여 수의 작품이 들어 있다.
『유관서록』 · 『유관동록』 · 『유호남록』 · 『유금오록』을 보면, 각 권의 마지막에는 다음 지역으로 이동하여 적은 시를 수록하였다. 그의 여행은 지역별로 구획된 것이 아니라, 하나의 지역에서 또 다른 지역으로 연결되었다. 고독한 방랑자의 발걸음은 한 지역에 안주하지 못했던 것이다.
금오산 시절에 그 스스로는 ‘방탕한 유람’이라는 듯에서 ‘탕유’라고 이름 붙였지만, 그의 여행은 고독한 방랑이었으며, 울분의 방랑이었다. 어느 곳에도 안주할 수 없다는 사실을 똑똑히 개달은 방랑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는 가뿐함을 느꼈을 것이다. 생명의 약동에 즐거워했을 것이다.
그가 걸어간 길은 대체로 역로驛路였다. 하지만 그 길은 곧게 뻗은 길이 아니었다. 구불구불하며 자유분방한 곡선과 곡면이 지배하는 길이었다. 그 길의 흐름은 생명의 고동과 보조를 같이했다. 합리적 · 주지적 · 기하학적인 계획의 형태가 아니었다.
김시습은 자리를 박차고 나선 뒤로, 육중한 무게를 떨쳐버리고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었기에 가뿐함과 행복감을 느꼈을 것이다. 서양의 속담에 “자연에는 어디에도 직선이라고는 없다”는 말이 있다. 그렇게 굴곡진 자연의 길 속에서 그는 분방하게 사유하고 때로는 뜨겁게 감정을 분출할 수 있었다.
김시습에 시에 대하여, 이자李耔는, “옛 수도를 유람하면 반드시 서성이면서 복받치는 마음으로 슬프게 노래를 불러, 여러 달이 지나가도 돌아가기를 잊었다. 오늘의 일에 마음 상하고 옛일을 슬퍼한 것을 보면, 수택장(數宅藏/자기 글을 여러 벌 베껴 여러 곳에 보관함)이나 점귀부(點鬼簿/귀신을 점고하는 장부라는 뜻으로, 앞사람의 시구나 표절하는 것을 말함) 따위나 엮는 시인이 해낼 수 있는 바가 아니다.” 라고 하였다. 그의 시가 표절이나 답습을 하지 않았다고 평한 것이다. 김시습의 시는 성률에 구속되지 않으면서도 형식과 구조가 문란하지 않고, 글귀를 아로새기려고 애쓰지 않아 순수한 아름다움이 있다.
이산해도 「매월당집서」에서, 김시습의 시의 세계를 “초연하게 속세를 멀리 벗어나 세상을 흘겨보면서 산수 좋은 곳에서 휘파람 불며 거만 거리고, 형체 밖에서 방랑한데 이르러서는 행동거지가 한가하고 쾌적하여 외로운 구름이나 홀로 나는 새와도 같은 면이 있으며, 마음속이 환하고 맑아서 얼음이 들어 있는 옥으로 만든 병과 가을밤에 뚜렷하게 떠 있는 달에 뒤지지 않으니, 높은 풍모와 아담한 운치는 붓으로 형용하기 어려울 정도다.”라고 하였다. 김시습이 방랑을 통하여 맑고 높은 정신세계를 담아내는 문학을 창작할 수 있었다는 말이다.
김시습의 시는 '성정性情'에 뿌리를 두었으므로 단련과 수식을 일삼지 않아도 자연스레 시구를 이루어 장편이든 단편이든 군색하지 않았다. 그는 극도로 근심하고 분노하는 마음과 굴곡지고 뒤엉킨 가슴을 시원하게 할 수 없으면 반드시 시나 글로 발산하였다.
자유자재로 붓을 놀려, 처음에는 장난하는 듯 희롱하는 듯 조금도 마음에 두지 않았지만, 들었다가 꺾어내리고 열고 닫고 하는 변화를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며, 여러 체제를 드러내고 일만 가지 형상을 다 나타냈다. 또는 높이 올렸다가 급히 꺾어 내리고, 그윽하면서도 갑갑할 정도로 뜻을 깊이 함축해서,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슬프고 허전하게 만들고, 두렵고 엄숙하게 만든다. 또는 호기 부리고 질탕하며, 또는 한가하고 심원하면서, 간혹 농지거리와 활달한 말과 재치 있는 말을 섞기도 한다. 마치 무리 맑고 잔잔하게 굽이굽이 흐르다가, 갑작스런 폭풍을 만나 기슭과 바위에 부딪치면 울부짖고 격동해서 그칠 줄 모르는 것과 같다.
그것은 바로 ‘평평함을 얻지 못해서 울리는 ’불평이오不平二嗚‘ 문학이었다. 이자가 김시습의 의식세계를 ’불편‘으로만 서명한 것은 그의 의식의 깊이를 포괄한 말이라 할 수 없지만, 그의 설명은 적어도 김시습의 시에 대해서는 딱 들어맞는다고 할 수 있다.
율곡 이이도 깁시습이 지닌 시 정신의 넓이와 깊이를 예찬하였다. “김시습의 시는 ‘성률과 격조를 그리 따지지 않았으나, 기이하여 놀랄 만한 부분은 시적 상상력과 높고 멀어서 보통 사람의 생각을 벗어났으니, 글귀나 아로새기는 자들이 발돋움하고 바라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계속해서 다시 <머리말>의 글을 이어가 보면 이러하다.
“김시습은 세상일을 잊고 그저 마음만 고요하게 유지하면 된다는 ‘적정주의寂靜主義’에 빠지지 않았다. 인간으로서 추구해야 할 절대 경지는 결코 현실 공간을 벗어난 다른 곳에서 찾을 수 없음을 잘 알았다. 『논어』에 나오는 은둔자 ‘하소장인荷篠丈人’과는 달리, 세상일을 과감하게 잊어버릴 수가 없었다. 결함 가득한 세상을 응시하였고, 그 끝에 애처로움을 느꼈다. 그러기에 인간 김시습은 크나큰 상흔을 내면에 지니고 있으면서 매우 다채로운 면모를 그러냈다." <인용/ 심경호, 『김시습 평전』 머리말에서, 9쪽>
머리말을 읽는 동안 이 책에 대한 기대감이 컸었다. 어쨌든 김시습의 일대기를 총망라해서 정리를 시도한 책이어서 독자들이 김시습의 일생을 따라가 보기에는 좋은 지침서라고 생각한다.
매월당의 시는 성정에 뿌리를 두었으므로 인간의 정념이 다 들어가 있다는 의미인 듯하다. 감성에 바탕을 둔 시, 정서를 드러낸 시 세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매월당의 순수성은 이 ‘정념의 정화됨’ 그 자체인지도 모르겠다.
*荷멜 하, 연 하 *篠조릿대 소 *丈어른 장/남자 존칭/지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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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 <김시습 평전/>은 차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책은 아니지만, 김시습의 차시가 수록되어 있고, 또한 '차시'에 대하여 다소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는 듯하여, <여일동승준장로화> 차시에 연계되는 세 번째 글로, 올렸습니다. 김시습은 차문화사에 있어서 중요한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차 이외의 것에도 관심을 가져야만, 차가 더 풍부해질테니까요. 차는 통섭의 문화이고, 다양한 감성을 차에 흡수하는 문화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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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3)과 연계되는 글은 '차 - 저널' 게시판에 (1)편이 있고, '차 -고전' 게시판에 (2)편이 있습니다. 게시판 성격에 맞게 글을 분류하여 올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