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이 땅에 태어났는가?”라는 질문에 당신은 답변하실 수 있습니까? 우리 모두는 이 세상에 태어나는 문제에 대해 아무런 기여도 하지 않았습니다.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사람도 없고 그렇다고 죽고 싶어서 죽는 사람도 없습니다. 출생도 죽음도 모두가 내 뜻과 상관없이 이루어진다면 그럼 “나”라는 존재는 무엇입니까? 목적 없이 태어난 우연의 산물입니까?
인간을 우연의 산물로 돌리는 것은 진화론(進化論)의 주장일 뿐입니다. 우연히 만들어진 단세포(單細胞) 생물이 장구한 세월 동안 저절로 진화하여 마침내 만물의 영장인 인간으로 출현했다는 진화의 논리는 이미 퇴화된 가설(假說)에 불과할 뿐입니다.
만약 인간이 우연히, 그리고 목적 없이 태어난 생명이라면 거기에 무슨 의미가 있고, 무슨 가치가 있고, 무슨 희망이 있겠습니까? 이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인 결과, 인간에게는 불안과 공허가 찾아오고 그로인해 방황하다가 좌절합니다.
“존귀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 시편 49편 20절 )
사람과 짐승은 분명한 차이점이 있습니다. 짐승은 절대 양심이나 신(神)을 섬기는 신앙심이 없습니다. 그리고 영원을 사모하는 영생(永生)의 소망이 없습니다. 혹시 노후나 내세(來世)를 걱정하는 짐승을 보셨습니까?' 혹시 기도하는 원숭이를 보셨습니까?
이 같은 현상들은 결코 짐승에게서는 발견되지 않고 오직 사람에게만 나타나는 고유한 특징 중에 하나입니다.
왜 인간이 만물의 영장(靈長)입니까?
그것은 바로 인간의 존엄성을 말하는 것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을 위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는 영혼(靈魂)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 히브리서 11장 15~16절 )
사람이란 말은 헬라어로 “안쓰로포스”로 “위를 바라보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짐승은 땅만 보며 살지만 사람은 하늘을 바라보며 영원을 헤아립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전 3:11)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존귀함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은 영혼의 중요성을 알지 못한 채 눈에 보이는 육신적인 것만을 추구하며 살아갑니다. 마치 이 세상이 전부인 양 스스로 미물(微物)이 되어 짐승처럼 살아갑니다.
이 모두는 바로 창조주를 부인한 결과이기도 합니다. 짐승이 진화된 것이 사람이라고 생각하니 타인에게 짐승처럼 행동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시편 14편 1절, 전 반절)
이 세상에는 부모 없는 육신적인 고아들도 많지만 실상 영적인 고아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 천지만물을 지으시고 모든 피조물들에게 생명과 호흡을 친히 주시는 창조주 하나님을 알지 못한 채 살아간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가장 불쌍하고 가련한 영적 고아임이 틀림없습니다. 설사 그 사람이 아무리 많은 지식과 부와 명예를 지닌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잠시 잠깐의 영화에 불과할 뿐, 하나님 앞에는 무서운 죄인일 따름입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온갖 것을 누리고 살아가면서도 경배와 찬양은커녕 도리어 감사함도 모른 채 “하나님이 없다”고 말을 한다면 그 얼마나 패역한 행위가 되겠습니까?
애국가에도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라는 구절도 있듯이 하나님을 아는 것이 곧 선(善)이요, 모르는 것이 바로 악(惡)입니다. 혹자는 애국가 가사는 '하나님'이 아니고 '하느님'이라고 우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애국가가 처음 만들어질 때는 '하나님'으로 돼 있습니다. 다만, 하나님을 부르기 싫어하는 사람들이 '하느님'으로 우길 뿐입니다.
“하늘을 펴고 땅의 기초를 정하고 너를 지은 자 여호와를 어찌하여 잊어버렸느냐 ”
( 이사야 51장 13절 전 반절 )
이 땅에서 살아가는 우리 모두는 나그네(시119:54, 히11:13~14)와 같은 존재들입니다. 이 죄 많은 나그네의 입장에서 벗어나려면 반드시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그리스도를 영접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죄악의 옷을 벗고 새롭게 거듭나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 비로소 우리는 나그네의 입장에서 여행자의 신분으로, 영적 고아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게 되는 놀라운 축복과 영광을 약속받게 되는 것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 요한복은 1장 12절 )
사람은 정해진 시간만큼만 살도록 허락되어진 존재입니다. 우리는 지금 시간을 뒤로 하면서 남겨진 분량만큼만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한 번뿐인 인생을 어떻게, 무엇을 위해 사는가 하는 문제는 너무도 중요합니다. 이 땅에서 살아가는 우리네 삶은 영원한 세계로 나가기 위한 일련의 준비과정일 뿐입니다. 실제 공연을 위한 최종 연습에 불과하지요.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고 오늘이 지나면 내일이 있듯이 금세 후에는 반드시 내세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서둘러 하나님 앞에 서야할 준비를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행위와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기 때문입니다.(전 12:14)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 히브리서 9장 27절 )
한때 “성공시대”라는TV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그 프로그램에 출현했던 사람들의 공통된 점이 있다면 그들은 한결같이 모두가 알아보려고 했고, 배워보려고 했고, 기회가 주어졌을 때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붙잡았다는 점입니다. 기회란 마치 달리던 열차가 잠시 간이역에 머무르는 것과 같습니다. 값없이 거저 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영생의 축복은 이미 당신 곁에 가까이 다가와 있습니다. 당신을 향하신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을 더 이상 외면하는 자가 되시지 않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
( 이사야 58장 9절 전 반절 )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
( 이사야 1장 18절 )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