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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구여, 산천이여 > 이원택
(1) 첫째날
제 21차 졸업 40주년 기념행사가 지난 10월24일부터 11월1일까지 모국의 방방곡곡을 누비면서 감개무량하게 진행되었다. 첫날 하나둘씩 모교 본관에 있는 강당으로 모여들어 민정기 학장, 박용현 동창회장들로부터 애틋한 환영과 정성어린 선물을 받았고 우리는 정명희 동기회장의 기념사에 이어 김성환 미주동기회장의 답사 및 학교에 2천5백만원, 동창회에 천만원을 전하는 등 공식행사를 가졌는데, 아울러 “자랑스런 서울의대인”으로 국내에서 정명희 동문, 미국에서 배성호 동문이 지명되어 자리를 더욱 빛내주었다.
40여년 전에 비해 격세지감을 느끼면서 암센터 등을 돌아본 후 남산을 한바퀴 돌아 장충체육관 앞에 있는 “앰베서더” 호텔에서 만찬이 있었다. 한국과 미국의 산지사방에서 몰려온 약 80명의 ‘71년도 졸업생들과 어부인들이 깔끔한 중식요리에 곁들여 술잔을 기울이며 회포를 푼 후, 안효섭 총무의 사회로 진행된 총회에서 재무보고가 있었고 차기회장은 만장일치로 윤용수 동문이, 미국 지부장은 김창구 동문이 맡게 되었다.
40년이면 강산이 네번 변한 연륜인데, 우리가 항상 시험을 보던 “공포의 전당” 대강당은 현대식으로 말끔히 단장돼 있었고 암 병원의 옥상에 만들어진 정원에서 훤히 보이는 “창경원”은 그 옛날의 “창덕궁”으로 복고되어 우아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남산 위의 저 소나무들도 씩씩하고 품위있게 자라나서 서울시민들의 긍지를 되찾아 주었고 아담한 “앰베서더” 호텔의 연회장은 우리같이 조촐한 만찬장으로 안성맞춤이었다.
우리 동기들은 겉은 모두 중후한 노신사로 변해 있었으나 마음만은 40년전 그대로, 금방 “야, 쟈” 해 가면서 어린애들같이 농치며 장난치는 개구쟁이들로 되돌아 갔다. 친구가 왜 좋은가 했더니 서로 흉허물 없이 허심탄회하게 대할 수 있고 또한 의기투합해서 서로서로 도와주려고 애쓰는 것을 이심전심으로 느낄 수 있었다. 친할수록 편하고 편할수록 친하다.
(2) 둘째날
졸업 40주년 기념여행은 원래 일본일주를 하기로 했으나 작년의 대지진으로 인해서 조국일주로 바뀌었는데 여정은 하나 투어에서 주관했다. 일정은 10월25일부터 28일까지는 남한의 서반부를 도는 “서편제”와 28일부터 11월1일까지는 경상, 강원도를 돌러보는 “동편제”로 나누어 져서, 고고한 “서반”에는 한국에서 김용식, 김인구, 정명희 동문부부와 안효섭 동문(부여에서 회군)이, 미국에서 김광식, 김창구, 배성호, 오동환, 장문석, 하준영 동문 부부와 이원택 동문이 참석했고, 용감한 “동반”은 한국에서 김영태, 민양기, 유세화, 장기현, 정규병 부부와 조세현과 이승희 여사는 홀로 합류했으며 문무를 겸전한 “동서양반”은 미국에서 온 강태수, 김성환, 김영철, 김일영, 오상현, 조병선, 최영철, 황동하 부부가 끝까지 버텼다.(김유식 동문은 사정상 불참)
첫 행선지는 백제의 고도 부여로, 부소산성, 낙화암, 고란사, 백마강 유람선 관광이 있었는데 금강의 일부인 백마강은 4대강 개발의 일환인지는 모르겠으나 물이 제법 불어 있었고 삼천궁녀나 의자왕에 대한 역사는 많이 왜곡되었다고 한다. 점심으로는 커다란 연잎에 싸서 잡곡을 넣고 찐 연잎밥을 맛보았는데 부여의 특산물인 연근은 건성 먹으면 무미무취하지만 천천히 음미해보면 은은한 “연향”이 돌기 때문에 자극성을 피하는 스님들이 즐겨 드셨다고 한다.
오후에는 설악산과 더불어 한국단풍관광의 명소인 정읍 내장산 국립공원으로
고국의 산하는 정말로 아름답다. 전 국토가 국립공원이고 모든 자원이 관광지라고 말할 수 있다. 참 잘 다듬어져 있다. 특히 가을의 날씨는 약간 쌉싸르르 해 가지고 상쾌한 맛을 더해주며 천고마비라 모든 것이 높고 맑고 풍요하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은행나무 잎새들은 샛노란 색깔로 물들었고 군데군데 자라난 감나무 가지에는 잎새는 다 떨어지고 주황색의 땡감들이 올망졸망 붙어 있었으며 아직도 추수가 안되어 반쯤 남아있는 벼들로 들어찬 황금벌판이야말로 금수강산이란 말에 일말의 손색이 없었다.
어느새 우리도 인생의 가을에 도달했음을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으나 지금이야말로 인생의 황금시기가 아닌가. 삼삼오오 짝을 지어 관광지를 돌아보며 다른 친구들 얘기, 자식손자 얘기, 노후대책 얘기, 음담패설들을 늘어 놓느라 시간가는 줄도 모르고 다리 아픈 줄도 몰랐다. 우리를 인솔한 가이드는 각자가 다 알아서 챙기고 지들끼리 재미나게 노는 것을 보고 자기는 그냥 허수아비로 따라 다녔으니 가이드 팁을 따로 줄 필요가 없단다.
저녁식사는 산채정식이라고 해서 나는 심신산골에서 나온 산채들로 밥을 비벼 먹기를 기대했으나 산나물은 별로 없고 잡다한 밑반찬만 늘어놓아 실망이 컸다. 이 나이에 이제는 양보다 질이라고, 그리고 그동안 “정식”은 많이 먹었으니 가끔 “별식”을 맛보고 싶어하는 것은 인지상정일진대, 공개적으로 불평을 했다가는 아직도 팔팔한 싸모님들한테 “별식 좋아하다가 체하면 약도 없다.”고 지청구를 들을 것 같아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할 수 밖에 없었다.
저녁식사후 내장산 국립공원내에서는 제일 낫다는 무궁화 세개짜리 백양관광호텔에 투숙했는데 이곳에는 침대방과 온돌방의 객실이 반반씩이라 숫자가 적은 한국동기들이 양보해서 온돌방을 쓰기로 하고 미국동기 중에 온돌방을 쓸 지원자를 모집했으나 처음에는 아무도 없다가 결국은 마음 약한 강태수, 김성환, 배성호, 장문석, 오동환 부부와 짝이 없는 이원택이 완전히 타의에 의해 온돌방 신세를 지게 되었다. 아마도 온돌 방바닥을 빙빙 돌다보면 무릎팍이 까지는 불상사가 일어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온돌방의 객실은 삭막했으나 장판이 따뜻한데다가 산뜻한 명주 비단 이부자리는 아주 감촉이 좋아서 썰렁한 침대에서 껄렁한(실례!) 마누라를 끼고 자는 것 보다 한결 “붙임성”이 좋았다.
일행 중에 끼가 있는 분들은 가라오께까지 다녀왔다는데, 김영철의 두자리 숫자 “백마강”, 김광식의 세자리 숫자 “서울의 찬가” 그리고 김용식 부인의 “네자리 숫자” 최신가요가 인기였었다고 한다.
(3) 셋째날
일정을 30분 당겨서 백양사도 관광했는데 도때기 시장같은 내장사에 비해 호젓하고 기품이 있어서 좋았다. 특히 천연기념물인 비자나무와 갈참나무 산책로는 네티즌이 추천한 한국에서 가장 걷고 싶은 아름다운 길 1위로 선정되었다고 한다. 곧 담양으로
오후에는 대처승 천태종의 본산 조계산 선암사를 가 봤는데 이곳은 가족들까지 부양해야 되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시주한 분들의 이름을 적은 수천 개의 연등을 길 따라가며 입구에서부터 대웅전 앞마당까지 치렁치렁 걸어 놓아 마치 미국의 중고차 판매장 같아서 영 "눈엣가시” 였다. 하긴, 스님들도 장삼을 걸치고 운전을 하고 손에는 염주대신에 스마트 폰을 쥐고 다니는 세상이긴 하지만서두 말이다.
선암사의 상단에는 500년 묵은 매화나무가 있었는데 근처에는 2-3백년 짜리도 몇그루 같이 있었다. 사람의 수명이 나무의 십분지 일이라면 각각 50대와 2-30대의 여인에 비견할 만 한데, 사진을 찍는 것을 보니 젊은 층들은 500년 짜리를 붙들고 있었지만 우리 동기들은 하나같이 2-30대 짜리 영계 매화를 껴안고 있었다.
이날 관광은 소설 “태백산맥”의 답사여행 같았다. 작가 조정래씨는 선암사에서 태어났고 지리산 자락, 조계산, 벌교, 섬진강 유역, 순천만 등이 모두 그 소설의 주요 무대인 것이다. 그 중에서도 해질 무렵에 본 '풍요했던 낙안고을'을 보존한 낙안읍성 민속마을은 이날 여행의 백미로서, 특히 서민들이 아직도 살고있는 초가집들이 우리 모두의 향수를 달래주었다. 세계 어디를 가더라도 한국의 초가지붕같이 소박하고 정취가 우러나는 건물을 본 적이 없다. 지붕 위로 올라간 박덩굴에 두어개 매어달린 조랑박을 볼 때는 저절로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저녁은 남도 한정식이라고 해서 나는 주로 곰삭은 젖갈류가 나올 줄 알고 군침을 삼켰으나 순천에서 제법 삐까 번쩍한 식당에서 나온 “한정식”은 무슨 퓨전음식을 닮아서 감칠맛이 별로였었다. 정명희 동문의 생일을 축하하는 의미에서 포도주 한잔씩 걸치고 전남에서 세개 밖에 없다는, 그래서 이름도 요상한 무궁화 다섯개짜리 “에코그라드” 호텔에 투숙했다. 내가 다닌 호텔중에서 제일 샤워시설이 잘 되어있었으나 bath tub이 없어서 나같이 치질기가 있는 사람들한테는 영 젬병이었다. 한국에 나와보니 새로 지은 호텔이나 오피스 텔 등에는 거의 샤워만 있고 욕조가 없는데 나는 아직도 목간 통에 들어가서 바가지로 물을 온몸에 끼얹어야지 개운한 걸 어쩌란 말인가.
(4) 넷째 날
아주 산뜻하게 차려진 뷔페식당에서 양식으로 푸짐하게 아침을 먹고나서, 원래는 구례 화엄사도 일정에 있었지만 절 보기가 지겨워서 삼신산 쌍계사만 둘러 보았다. 이곳은 절 가는 통로를 따라 자라난 자작나무과의 서어나무들이 일품이었고 AD 887년에 신라의 3대 문장가 최치원이 쓴 국보 47호 “진감선사 대공탑비”가 그런대로 잘 보존되어 있었다.
선암사에서는 변소를 “ㅅ뒷깐”이라고 썼으나 여기서는 “해우소”( 解憂所: 기생들한테 몸을 풀고 건네는 돈도 “해웃채”라 했음) 라고 했는데 고고한 스님들도 인간의 배설물은 될수록 멀리 했으며 생리적인 욕구를 푼다는 것이 큰 근심거리였던 모양이다.
오후에는 경남 통영(충무)으로 내려가서 우선 갑각류만 넣어서 비린내가 안나는 해물탕으로 배를 채우고 한국에서 제일 길다는 2km짜리 케이블 카로 한려수도를 한눈에 내다볼 수 있는 미륵산 정상에 올라 크고작은 섬들을 바라 보았는데 그 경관이 이태리의 나폴리를 뺨칠 정도로 빼어났다. 다시 통영 시내로 내려와서 문화 공원에 떠 있는 모조 거북선을 내부까지 샅샅이 보고나서, 동쪽 벼랑의 사투리 “동피랑” 그림 골목을 올라가 보았는데, 브에노스 아이레스에 있는 “La Boca”에 비하면 어린애 장난같은 감이 들었지만 그런대로 조촐하고 천진난만한 멋이 있었다.
저녁은 굴요리 전문집에 가서 날굴, 설은 굴, 익은 굴, 썩은 굴 그리고 우리 동기회의 마당발 이승희 여사가 직접 중앙시장에 가서 떠온 각종 사시미에다 쐬주를 열병쯤 시켰는데, 나이 탓인지 술들을 많이 못해서 정이 많은 최영철과 이원택이 재고처리 하느라고 고생깨나 했다.
오밤중에 거제 대교를 건너 섬의 동남쪽에 있는 외현에 도착해서 “Sea” palace가 아닌 “C” palace에 여장을 풀었는데, 호텔이름이 “씨팔리스(~less)"라니 이곳에서는 그 짓을 하지 말라는 것인지 어쩐지 모르겠다. 좌우간 한국에 오면 신식건물이나 지명은 외래어 투성인데 심지어 제주도에는 “더 마 파크(the 馬park: 말공원)”라는 곳도 있다. 그런데 그놈의 “씨팔리스” 호텔은 무드를 잡느라고 그랬겠지만 전등불이 너무 흐려서 책을 볼 수가 없었다. 나는 자기전에 책을 안 보면 잠이 안 오기 때문에 전등갓을 빼보려고 갖은 애를 써 봤지만 이년의 것이 붙박이로 붙어있어서 영 빠지지가 않는 것이다. 이곳에 오면 떡이나 치고 가라고 “씹할래所”라고 명명한 것도 모르고 말이다.
(5) 다섯째 날
호텔에서사골우거지탕의 구수한 맛으로 지난밤 쏘주의 쓴맛을 중화시키고 나서 유람선을 타고 해금강을 돌아 외도로 들어갔다. 해금강은 홍도나 울릉도의 벼랑에 비해 별로 빼어난 것도 없었지만 어떤 집념의 부부가 40년간 피땀 흘려 가꿔놓은 외도 “Botanica”는 흑산도 울릉도 제주도의 비슷비슷한 그것들보다 열배는 더 나았다.
어떤 박사가 설계를 했다는 외도 식물원은 마치 “mini” 허스트 캐슬을 연상시켰는데, 이곳에는 50명의 정원사를 비롯해서 약 70명의 인부들이 매일같이 주고(물) 갈고(밭) 닦고(길) 뽑고(풀) 짜르고(나무) 한단다. 섬에는 물이 귀하기 때문에 관상수를 기르기 위해 배로 육지에서 물을 날라야 하므로 입장료를 8000원씩이나 받고 있는데 한창 때는 하루에 2만5천명이 찾아온다니 그리 밑지는 장사는 아닌가 보다.
역시 돈이 좋긴 좋은 모양으로 이곳에는 편백나무, 사철나무, 대나무, 향나무, 야자수, 종려나무, 선인장, “들어오지 마세용” 나무 등등 온대와 아열대의 식물들이 아주 정교하고 운치있게 다듬어져 있었다. 그리고 조각 공원이라는 것도 있어서 한군데는 “올망졸망”한 어린이들을 주제로 하고 있고 한쪽은 “둥글둥글”한 여인들을 주제로 한 나체공원이 있었는데 여인들의 젖가슴은 하두 만져서 모두 “맨질맨질” 하게 윤이 나 있었다.
유람선을 탈 때 배 이름을 쓴 명찰을 하나씩 주길래 왜 그러나 했더니 관광객이 많을 때를 대비해서 “밤이나 낮이나 남의 배를 타지 말라.”는 뜻이란다. 우리 동기 중에 자기 배와 남의 배를 구별 못하는 친구는 이원택이 하나밖에 없는데도 말이다.
그리고 배를 탈 때 가만히 보니까 여자들은 모두 앞쪽으로 가고 남자들은 거의 뒷쪽으로 가는데, 이는 배가 갈때 전단은 위아래로 움직이고 후미는 양옆으로 흔들리기 때문에, 배멀미를 피하려면, 잠자리에서 상하운동에 익숙해진 싸모님들은 앞자리에, 좌우운동을 좋아하는 싸부님들은 뒷자리로 가는 일종의 “조건반사적 현상”인 모양이다.
서편제의 마무리 일정으로 작년 연말에 개통된, 거제도와 가덕도를 잇는다는 뜻을 가진 “거가” 대교를 이용해서 부산으로
점심이 자갈치 시장의 한식뷔페라고 해서 나는 각종 생선구이가 있을 줄 알고 기대가 컸으나 해산물은 주꾸미 정도로 만족해야 했다. 다만 예기치 않게 생선시장 바닥에서 아주 꼬소한 “깨죽”을 맛볼 수 있어서 큰 불평은 하지 않았다.
원래는 동편제를 안가는 동기들은 모두 관광뻐스로 서울로 올라 오기로 되었지만, 이원택이를 뺀 미국촌놈들이 KTX를 타고 싶어서 안달을 하는 통에 거금 2만5천원씩 더 들여서 초 고속철도를 이용하기로 했다. 나는 두번째라 별 감동이 없었으나, 고속열차가 신나게 달릴 때 전광판에 나타나는 시속을 보고 “야! 300km가 넘었다.” 고 신나하는 오동환이랑 김창구를 보니 60이 넘어도 철딱서니가 없기는 어제나 이제나 매일반인 것이다.
좌우간 지난 40년동안 형설의 공을 쌓아 의료의 각 분야에서 금자탑을 이루어 온 우리동기들도 대견하지만 갖은 각고 끝에 모든 면에서 세계 10위권에 육박한 우리 대한민국은 정말로 “대단한 나라”가 아닐수 없다. 아무쪼록 우리 모두에게 중단없는 전진이 있기를 바라마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