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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전남 목포시 죽교동 300
노령산맥의 큰 줄기가 무안반도 남단에 이르러 마지막 용솟음을 한 곳, 유달산은 면적140ha,
높이 228.3m로 그리 높지는 않지만 노령산맥의 맨 마지막 봉우리이자 다도해로 이어지는 서
남단의 땅끝인 산이다. 유달산은 옛부터 영혼이 거쳐가는 곳이라 하여 영달산이라 불리웠으
며 도심 속에 우뚝 솟아 목포시와 다도해를 한눈에 굽어보며 이곳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예혼
을
일깨우고 있다.
'호남의 개골' 이라고도 하는 유달산에는 대학루, 달성각, 유선각 등등의 5개의 정자가 자리하
고 있으며, 산 아래에는 가수 이난영이 부른 '목포의 눈물' 기념비 등이 있다. 1982년 발족된
추진위원회의 범시민적인 유달산 공원화 사업으로 조각작품 100점이 전시된 조각공원과 난공
원 등이 조성되어 볼거리가 많으며 산 주변에 개통된 2.7km의 유달산 일주도로를 타고 달리며
목포시가와 다도해 전경을 감상할 수 있다.
영혼이 심판을 받는다 하여 이름 붙여진 해발 228m의 일등바위(율동바위)와 심판 받은 영혼이
이동한다 하여 이름 지어진 이등바위(이동바위) 로 나뉘어진 유달산은 갖가지 기암괴석과 병풍
처럼 솟아오른 기암절벽이 첩첩하며 그 옛날 소식을 전하기 위해 봉수를 올렸던 봉수대와 달성
사, 반야사 등의 전통사찰을 볼 수 있다.
이 외에도 임진왜란 때 이엉으로 바위를 덮어 아군의 군량미처럼 가장해 왜군의 전의를 상실케
하였다는 이순신 장군의 설화가 전해오는 노적봉을 비롯하여 유선각, 오포대 등 역사상 의미
있는곳이 많으며, 특히 유달산에는 이곳에서 멸종되면 지구상에서 영원히 소멸되는 왕자귀나무
가 서식하고 있다.
정상에 올라서면 다도해의 경관이 시원스레 펼쳐져 있고 그 사이를 오가는 크고 작은 선박들의
모습이 충분히 아름다운 한폭의 동양화를 연상시키는 목포의 뒷산 유달산. 그 위에서 바라보는
다도해의 일몰이나 목포항의 야경은 이곳을 찾는 이들의 가슴 속에 오래도록 남을 것이다.
등산안내
노적봉(유달산 입구)에서 일등바위까지의 길은 목포시민들이 가장 많이 오르내리는 등산로이자
산책로이다. 올라가는 초입에 계단이 많고 가파르지만, 잠깐 숨을 고를 수 있는 평탄한 길과 계단이 반복되면서 등산과 운동을 하기에 적당한 곳이다.
유달산에 오르면 목포시의 전경과 아름다운 다도해 풍광이 한꺼번에 몰려와 환상적인 장관을 연출한다. 운 좋게 해넘이라도 만나게 되면 가슴까지 설레게 된다. 유달산 정상에서 만나는 다도해의 일몰이나 목포항의 석양은 한마디로 그림 같다. 절경을 이루는 기암괴석과 가슴이 탁 트이는 전망 좋은 누각, 역사의 숨결이 느껴지는 문화유산 등 숨겨진 보물을 찾아 유달산을 오른다.
보리마당·소요정·이등바위 주변으로 작은 길이 여러 개 있어 이곳저곳에서 올라오는 등산객들과
운동하는 시민들을 만나게 된다. 이등바위 입구에서 해양대 방향으로 돌아가는 왼편 길과 조각공원 윗편으로 돌아가는 오른쪽 길이 있는데 모두 이등바위의 중턱을 빙 감고 도는 일주로이다.
보통 어른들의 걸음으로 30분내지 40분 정도면 한바퀴를 돌아 다시 이등바위 입구에 도착하게 된다. 사뿐사뿐 걷는 오솔길을 내딛는 발과 보는 눈을 즐겁게 해준다. 길가에는 크고 우람하지 않지만 곧게 자란 소나무들이 즐비하며, 간혹 유달산의 옆가지 능선의 아름다움을 새롭게 감상할 수도 있어 재미를 더 한다.
한편 조각공원을 지나 혜인여고 뒤편에서 올라오는 등산로에는 새벽이나 늦은 오후 시간에 운동과 등산을 하는 시민들이 많다. 두 개의 길다란 구릉이 이등바위로 모아지는데 그 위로 산책로가 보기 좋게 만들어져 있다. 또한 서쪽으로 해양대학교 뒤편과 북항쪽에서 올라오는 구릉에도 산책로가 있어 결국 이등바위를 향해 오르는 등산·산책로는 모두 네 개인 셈이다. 이 길들은 모두 입장료를 내지 않기 때문에 부근의 시민들이 새벽부터 저녁시간까지 즐겨 찾는 길이기도 한다.
혜인여고 뒤편으로 뻗은 구릉 사면에는 ‘유달산공원’이라는 커다란 입간판이 세워져 있다 . 짙은 청록색 바탕 위에 하얀 페인트로 쓴 것인데 쑥쑥 커버린 나무들에 가라기도 하고 우거진 나무숲의 푸르름에 묻혀 버린 듯 하다. 구릉의 사면에는 알맞게 자란 소나무들과 벚꽃나무들이 빼곡히 들어서 개나리곡이 만개할 무렵부터는 온통 가지각색의 꽃나무들로 향기가 진동한다.
두 구릉의 산책로가 합쳐진 이후부터 이등바위를 오르는 길은 경사가 급해진다. 옆에 있는 조각공원 담을 따라 오르다 보면 이등바위의 바위능선이 끝나는 가파른 암벽을 만난다. 커다란 암반이 서북쪽으로 길게 이어지다가 가파른 바위절벽으로 끝난 곳으로 능선의 바위들이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부서져 내린 흔적이다. 쓸려 내려온 바위들이 산비탈에 널리게 되어 각력사면(角礫斜面)을 만드는데 우리들이 흔히 ‘너덜겅’이라 부르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그리고 아래로 경사가 완만한 두 개의 구릉으로 내리 뻗어 목포 시가지에 닿는다.
일등바위가 있는 유달산 공원의 등산길은 대개 바위를 깎아 내거나 인공석재를 이용해 만든 계단 길을 올라야 한다. 그러나 이등바위 뒤편은 나무부리와 나무둥치를 잇대어 만든 계단과 자연상태의 자잘한 돌들을 딛고 오르기 때문에 지루함이 없고, 고불꼬불한 길들이 정감스럽게 다가온다.
이등바위의 모퉁이를 감싸고 돌아가는 일주 산책로는 외지 사람들이 가끔씩 유달산을 찾는 시민들도 잘 모르는 길이지만 알맞은 운동과 서해의 붉은 낙조를 바라보며 음미할 수 있는 길이다. 적당한 경사와 긴장감을 주며 이리저리 비뚤어져 돌아가는 길은 가벼운 산책이상의 즐거움을 주기 때문에 꼭 한번 걸어보기를 권한다.
유달산(儒達山)은 온 몸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이는 바위산이다. 날카로운 암봉들이 많은 유달산은 악하고 모난 기운을 없애려고 많은 나무를 식재하였다는 이야기도 전하는데, 바위와 수목이 함께 어우러져 아름다운 풍광을 연출하고 있으며 산마루마다 칼날 같은 암봉들이 하늘 높이 치솟아 있어 목포 사람들의 단단한 기개를 보여주는 듯하다. 자연의 기묘한 조화로 만들어진 유달산의 수많은 기암괴석들은 오랜 세월동안 전설과 사연을 간직하면서 오늘도 목포 땅을 굽어보고 있다. 이제 유달산의 등산로를 따라 그 바위들의 이야기와 형상을 찾아가 보자.
유달산 바위 | 북바위, 노적봉, 누운얼굴바위, 투구바위, 고래바위, 종바위, 조대바위, 애기바위, 마당바위, 손가락바위, 흔들바위, 일등바위, 얼굴바위, 장미바위, 이등바위, 거북바위, 장수바위, 남근석, 여근석, 장사바위, 신이붙든바위, 거북바위, 떡바위, 나막신바위, 입석바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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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달산 누정 | 대학루, 달선각, 유선각, 관운각, 소요정 |
유달산 입구에서 왼쪽으로 보면 기괴한 바위 덩어리가 눈에 들어온다. 이것이 바로 해발 60미터의 바위산인 노적봉이다. 원래 유달산의 한 봉우리였다고 하는데 일정감정시기에 일본인 거주지와 구 시가지를 연결하기 위한 길을 만드는 과정에서 노적봉은 일등바위의 능선에서 떨어져 나와 섬처럼 외로이 남게 되었다. 전해오는 말로는 일본인들이 유달산에서 내리 뻗은 노적봉의 맥을 끊기 위해 길을 만들었다고 한다.
노적봉은 이순신 장군의 이야기가 전하는 호국 사적지이다.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은 이 봉우리에 이엉을 덮어 군량미로 가장한 후 석회가루를 바다에 뿌려 뿌연 쌀뜨물이 흘러내리는 것처럼 적을 속이고, 군사가 많은 것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 주위에 허수아비를 곳곳에 세워놓아 전의를 상실한 왜군이 도망을 갔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이후로 노적을 쌓았다고 하여 노적봉이라 불렸다고 한다.
유달산 정문 앞에 이르면 왼편으로 유달산이라는 표석이 세워져 있다. 계단을 올라서면 아담한 공원이 나오는데 마치 쥐 한 마리가 바위를 타고 있는 듯한 모습이 아주 사실적으로 펼쳐진다. 이 바위를 목포 사람들은 쥐바위 라고 부르는데 노적거리 앞에는 쥐가 살아야 한다고 하는 풍수설의 설명과 맞아떨어지는 바위이름인 것이다. 반면 옆에서 볼 때는 노적봉을 향해 두 손을 내려놓고 기도하는 복을 비는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어 ‘복바위’라 부르기도 하고, 옛날 어른들의 탕건과 같다하여 ‘탕건바위’로도 불린다.
공원 중앙에는 긴 칼 옆에 차고 큰 눈 부릅뜬 채 목포를 수호하듯 서 있는 충무공 동상이 맨 먼저 방문객을 맞이한다. 그 옆으로 만들어진 꽃동산과 벤치에는 평온하게 한때를 즐기는 가족들과 연인들의 발걸음이 끊이질 않는다. 유달산에 오르는 초입인 이 곳에서 유달산의 아름다운 모습을 한눈에 만끽할 수 있다.
달선각을 지나 유달산 제3휴게소 앞에 있다. 여러개의 조그만 바위들이 뒤엉켜있어 쉽게 그 모양을 짐작하기 어렵다. 다만 옆쪽에서 보면 누워서 하늘을 바라보는 노인의 얼굴모양을 볼 수 있고, 머리는 남쪽을 향해 있다. 조그만 채소밭이 옆에있고 그 앞이 잡목으로 우거져있어 쉽게 눈에 띄지 않는다.
유선각으로 가는 계단을 오르다보면 왼편 여기저기에 바위들이 있는데 그 중 눈에 띄는 날렵한 바위가 투구바위이다. 투구모양 같기도 하며 코뿔소의 뿔 모양 같기도 하다. 위로 솟아 있는 장식이 없어 밋밋한 투구처럼 보이지만, 비스듬히 서 바라볼 때 투구의 뒷모습을 볼 수 있다.
투구바위는 이순신 장군과 관련된 설화를 지니고 있다. 이순신 장군은 고하도에서 108일 간 머무르면서 목포 앞바다를 무대로 고금도 쪽으로 싸움터를 옮기기 위해 군량미를 확보해야 했다. 오가는 배를 통한 통행세를 곡물로 받아 군량미를 확보하고 목포 사람들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계획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전략상 목포를 떠나야했던 마지막 날 이순신 장군은 유달산에 올라 내려오면서 일본이 목포를 넘보지 못하게 하기 위해 자신의 투구를 벗어 놓았는데, 그것이 지금의 투구바위가 되었다고 한다.
유선각을 지나 계단을 올라서면 오른쪽으로 달성사가는 길이있고, 일등봉으로 올라가는 가파른 계단길이나타난다. 계단으로 오르기 전 위를 쳐다보면 거대한 고래가 입을 벌리고있다. 고래처럼 생겼다하여 고래바위라 하며 일명 '두꺼비 바위'라고도 부른다.
고래의 입 모양처럼 생긴 부분이 등산로 계단 부위에 돌출되어있어 이곳을 오르는 사람들은 의례 고래 입주둥이 부분을 한번씩 만져보면서 오른다.
고래바위의 입을 쓰다듬으며 돌아가면 관운각으로 올라가는 계단이있다. 하늘로 치솟아있는 입석바위 바로 위편에 종 모양의 바위가있다. 절에서 흔히 볼수있는 범종과 다른 서양식 종으로 아래쪽에서 볼때 확연히 종 모양임을 알수있다. 종바위를 지나면 관운각과 일등봉이 두둥실 나타난다.
관운각 맞은편에 있는 바위로 ‘애기바위’, ‘큰 엄씨 · 작은 엄씨 바위“라고도 한다. 높이 솟아 있는 두 개의 바위 주변에는 여러 개의 바위들이 널려 있으며 조금 아래의 남쪽에는 몇 개의 벤치가 있다. 큰 엄씨가 애기를 업고 작은 엄씨에게 등을 돌리고, 작은 엄씨도 애기를 업었는데 큰 엄씨를 보려고 하는 형상이다. 이곳은 마당바위로 오르는 능선이 남동쪽으로 삐죽 튀어나와 있어 두 엄씨는 거센 바다 바람을 등지고 애처롭게 서 있는 모습을 하고 있는데 멀리서 내려다보면 제 모습을 볼 수 있다.
조대바위는 애처롭게 서 있는 애기바위 뒤편 아래쪽에 있다. 고하도 앞 바다에 낚싯대를 드리워 놓고 팔짱을 끼고 앉아 조용히 생각에 잠겨 있는 낚시꾼을 보는 듯하다. 등뒤의 큰 바위에 비스듬히 기대어 책상다리로 앉아 있는 모양인데 네 개의 바위가 합쳐져 이러한 모양을 만들어 냈다. 이곳에서는 다도해의 잔잔한 바다와 길게 늘어진 고하도, 옹기종기 모여있는 온금동 마을의 정취를 한껏 느낄 수 있으며 안개자욱한 날에 바라보면 더 이채롭다.
관운각 바로 아래에 있는 바위로 모양이 고개를 내밀고 엎드려 있는 거북이와 닮았다. 관운각을 지나 바다로 다시 돌아가려는 거북이의 모습인데 여기 이외에도 유달산에는 거북형상을 한 바위들이많다. 거북이가 바라보는 곳에 떡바위가 있다.
관운각 아래편에 있는데 남사면은 바위 낭떠러지이다.거북바위 부근에서 보면 세개의 바위가 켜켜이 쌓여있고 그 바위들을 감싼 칡넝쿨과 낙엽들은 곱게 빻아서 바른 시루떡의 고물과 같다.
이 바위는 가을·겨울에는 시루떡으로 보이나 봄·여름에는 영락없는 쑥떡바위로 변한다. 나무 넝쿨의 푸른 잎사귀들이 바위를 덮어버리기 때문이다. 바로 우측에는 거북모양의 바위가 있는데 이 떡바위는 바다를 향해 먼길을 떠나는 유달산 거북이의 먹거리가 아닌가 싶다.
관운각 아래에는 마당바위로 가는 길과 곧장 일등봉으로 가는 갈림길이있다. 나막신바위는 아래 길 쪽으로 기울어져있으며, 갈림길에서 보이는 부분이 나막신의 앞부분이다. 둔탁한 직사각형의 바위인데도 앞끝이 살짝 위로 올라가 나막신을 연상시킨다.
관운각에서 바당바위로 오르는 길에 있는 바위로 크고 작은 장방형의 네모 반듯한 두 개의 바위다. 일등봉의 능선에 걸쳐있는 이 바위는 바위능선의 지질변화 과정 중 수직으로 절리되어 기둥처럼 우뚝 서 있게 된것이다. 정면에서는 사각기둥 모양의 평범한 입석으로 보이지만 옆면이 길에 뻗어있어 상당한 규모임을 자랑하고있으며, 이곳이 유달산 상봉으로 가는 길목임을 상징하는듯하다.
어른 10명이 앉아서 쉴 정도의 마당같이 넓은 바위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마당바위로 오르는 길은 계단을 만들기 힘들어 바위의 능선을 계단모양으로 깎아 내고 시멘트를 발라 만들었다. 마당바위 맞은편에는 일등봉 전면이 보이고 중앙에 손가락바위가 있다.
그러나 이곳에서 바로 일등봉을 오를수없어 다시 관운각까지 돌아가야한다. 이 바위 근처에서 봉화불을 피웠을 가능성이 많다고 전한다.
목포의 어느지역에서나 보이는 것으로 유달산의 상징적인 바위라 할수있는 보는 각도에 따라 그 모양새가 차이가난다. 뭔가 약속하자는듯 새끼손가락을 내세우는것 같기도하고,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워 유달산 바위중 내가 최고라고 과시하는것처럼 보이기도한다
마당바위에 올라서면 기괴한 손가락바위를 가장 가까이서 볼 수 있다. 하늘을 향해 치켜세운 손가락이 하나 보이는데, 이 손가락 바위가 워낙 반듯하여 아무리 암벽을 잘 타는 전문가라도 장비 없이는 오를 수가 없다. 그러나 손가락바위를 아무런 기구 없이, 마치 서커스 하는 것처럼 자유자재로 오르고 내린 기인이 있었으니 사람들은 그를 ‘유달산 타잔’이라 불렀는데 그가 바로 해방직후에 살았다는 정인조이다. 그가 손가락바위를 타는 일요일이 되면 바위 타는 걸 구경하기 위해 사람들이 운집했다고 한다. 바위를 타는 신기를 타고 난 그도 결국 산에서 떨어져 죽고 말았다고 하니 참으로 아이러니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유달산에서 제일 높은 봉우리로 하늘을 향해 솟아있는 울뚝불뚝한 바위들이 뒤엉켜 웅장한 모습을 만들어 낸다. 마당바위에서 다시 내려와 관운각 아래에 있는 길을 가다보면 일등바위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다. 계단을 오르기 전에 일등바위를 바라보면 살아 움직일 듯한 바위들의 웅장함을 더욱 느낄 수 있다.
오랜 옛날 사람이 죽으면 이 일등바위(율동바위)에서 심판을 받은 뒤, 이등바위(이동바위)로 옮겨져 대기하고 있다가, 극락세계로 가는 영혼은 3마리의 학(삼학도)이나 고하도 옹머리의 용을 타고가고, 용궁으로 가는 영혼은 영달산(유달산)에서 조금 떨어진 거북섬(목포와 압해도 사이에 있는 섬)에 있는 거북이 등에 실려 용궁으로 간다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일등바위를 지나 이등바위를 향해 가다보면 흔들바위가 보인다. 급하게 경사진 암반 끝에 있어 실바람만 닿아도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아 보이지만 실제로는 전혀 움직이지 않는다. 흔들바위는 장정 대여섯명이 올라갈 수 있는 평평한 면을 이루고 있는데, 이곳에 올라 주변 경치를 바라보는 재미도 뛰어나다. 또한 이곳에서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은 커다란 바위면을 직접 깎아 만들었는데 주변 바위들과 어울림이 한 폭의 그림 같다.
일등바위에서 흔들바위를 지나면 소나무가 드문드문 서 있는 큰 바위더미를 돌아가야 한다. 바위의 아래로 돌아서 지나야 하는데 돌아가기 전이나 돌아간 후에 바위를 올려다보면 사람의 얼굴을 볼 수 있다. 바위의 끄트머리가 갑자기 튀어나와 아래로 지나가는 사람을 바라보고 있는데 포효하는 남자의 얼굴로 보인다.
이등바위는 유달산에서 두 번째로 높은 봉우리다. 일등바위에서 심판받은 영혼이 이 바위로 이동하여 잠시 대기한다 하여 ‘이동바위’라고도 부른다. 이등봉은 동그란 탑처럼 보이는데 시내쪽에서 바라보면 마부가 말을 끄는 모습이다. 아마도 영혼을 실어 나르는 마부가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어 어떤 사람들은 ‘독승바위’라고도 부른다.
세속의 번뇌를 씻는 마음으로 이등바위를 만난다. 이등바위는 일등바위의 강렬한 인상이나 웅장함과 다른 분위기를 연출하는데 멀리서 보면 둥그스름한 젖무덤처럼 솟아있는 봉우리를 중턱 곳곳에 자란 작은 소나무들이 포근히 감싸고 있는 듯 하다.
이등바위를 오르기 위해서는 왼편으로 나 있는 길을 따라 올라야 한다. 온통 단단한 화강암 덩어리다. 이등바위 정상부에 오르면 오른쪽으로 목포시가지 전경이 보이고, 뒤쪽으로 양을산과 압해도의 평화로운 섬들도 보인다. 눈을 돌리면 다도해의 잔잔한 물결 위를 흐늘거리듯 헤엄치는 거대한 용머리 섬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등바위에서 다도해의 색다른 매력을 확인할 수 있다.
이등바위에는 예쁜 바위꽃 한송이가 있다. 소요정에서 이등바위쪽을 바라보면 마치 장미꽃이 피어있는 듯한 여섯 쪽의 바위가 꽃송이를 만들고 있다. 사람들 역시 ‘장미꽃바위’라고 부른다. 금방 아래로 떨어질 듯한 바위 조각들이 어떻게 아름다운 바위꽃을 만들었는지 자연이 빚어낸 절묘한 조화에 그저 탄복할 뿐이다.
이등바위의 정상부는 제법 널따랗고 평평하다. 사람들은 신선들이 쉬어가는 곳이라고 말한다. 그곳에는 동그란 바위가 얹혀 있는데 수도정진 하는 수도자의 머리 모습을 닮았다 하여 ‘수도바위’라고 부르며, 애칭으로 ‘똥바위’라고도 한다. 둘다 걸맞는 이름이다. 수행정진하고 있는 수도자의 모습을 제대로 보려면 마당바위에서 뫄야 윤곽이 그대로 드러나고, 가까이에서 바라보면 꼭 똥 덩어리철 보인다.
이곳에서 신들이 연회를 벌이면, 금반 위에 온갖 산해진미와 주지육림을 쌓아놓고 옥로주와 먹구슬나무주를 금복개로 떠 마시면서 즐기고 자시고 하지 않았을까. 그러다가 어느 신이 갑자기 대변이 마렵자 다급히 앉아서 힘주어 노란 황금빛 똥 한 덩어리를 싸 놓은게 아닐까. 온갖 진미란 진미는 다 맛보고 사는 신이 싸놓은 똥이기에 누런 황금 빛깔의 찰진 똥 덩어리가 아니었겠는가..
높이 480cm, 폭 250cm, 둘레 14m정도이다. 두 사람이 앉아있는 것 같은데 왼편의 사람은 뚜렷하게 양각되어 왼편이 여자, 오른편이 남자인듯하다. 무엇에 걸터 앉아있으며 서로 어깨를 기대고 두 손을 맞잡고있다. 길게 뻗은 왼편 사람의 발가락이 세개로 나뉘어진 것이 눈에 확 들어온다. 서해를 등지고앉아 멀리 북동쪽 하늘을 바라보며 무엇을 기다리고있는지 아니면 두손을 맞잡고 속삭이고 있는지..
장수바위 위편에는 등산객들이 ‘삼등바위’라 부르는 봉우리가 있다. 여기에 올라서면 멀리 일등바위 정상이 보이고, 다음 이등바위 정상에 있는 수도바위가 보인다. 그리고 세 번째 봉우리인 삼등바위. 이곳에서는 압해도와 북항일대, 양을산 부근, 그리고 멀리 무안 도대 부근이 눈에 선하게 들어온다. 고하도와 달리도 사이를 통과하여 목포항에 들어오는 여객선들과 바다에 점점이 박혀 있는 작은배들, 옹기종기 모여 있는 섬들이 어우러져 다도해의 정취를 물씸 풍긴다. 이등바위와 함께 이어져 있기 때문에 삼등바위의 중턱을 돌아가는 일주로를 따라 가면 다시 이등바위의 입구에 이른다.
유달산의 남쪽 아랫자락에 있는 온금동은 우리말로 ‘다순구미’라 한다. 북서풍이 직접 닿지 않아 겨울에도 따뜻하기 때무넹 붙여진 이름이다. 예로부터 이곳에는 ‘등산진(登山津)’이라 불리는 나루가 있었는데, 해남이나 인근 섬에서 목포에 들어오면 제일 먼저 이곳에 상륙하여 유달산을 넘는 나루라는 뜻이 담겨져 있다고 한다.
아담한 산자락이 있고 따뜻한 동네라 일찍부터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집을 짓고 살아왔고, 작은 선창과 내화공장을 터전으로 살아가고 있다. 온금동 일대의 바위들은 유달산의 바위들과 비슷하기도 하지만 성석(性石)들이 여기 저기에 있어 이채롭다.
힘센 장사가 가지고 놀았다는 둥글고 큰 바위로 온금동 마을 뒤에 있다. 온금동 마을 뒷산은 구 제일여고를 지나 온금동 마루터기에서 올라가는 길이 있고, 관욱각에서 온금동쪽으로 내려오는 길이 있다. 장사바위는 옆으로 길게 뻗은 온금동 뒷산의 가운데쯤에 있는 바위 주변에 바위와 흙으로 된 널찍한 공터가 있다. 그리고 한쪽 단면이 수직으로 세워진 큰 바위가 있는데 수직한 면에는 ‘慶尙道友會紀念會場’이라 새겨져 있고 , 옆에 여러 사람들의 이름도 새겨져 있다. 1921년 6월에 음각한 것으로, 일제시기에 이 지역에서 활동하던 경상도 사람들이 친목과 우의를 다졌던 흔적으로 생각된다.
온금동 마을 뒤에있는 동그란 바위의 이름이다. 굴러버릴 듯하면서도 안 굴러가고 심하게 경사진바위에 달려있기 때문에 신이 잡고 있는 바위라고 마을사람들은 믿고있다. 지금은 바위아래에 콘크리트 받침대를 놓았다.
전국적으로 모양이 그럴싸한 성기바위들이 많은데 유달산 온금동 자락에도 그런 성기바위가 있다. 선경횟집 사이로 난 길고 좁은 골목길을 따라 들어가다 시멘트 계단을 올라 김원도씨 댁 뒤 안으로 올라가면 우람하고 힘 있는 남근에 모양을 한 바위가 눈에 들어온다. 남근바위 아래에 풍어와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당집이 있었는데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남근 바위를 보고 난 후 동네 길로 나가면 길고 긴 계단 위쪽으로 한눈에 보이는 여근바위는 산 중턱 10여 미터 높이로 우뚝 돌출되어 거대한 바위덩어리가 두 쪽으로 쪼개진 모양으로 정말 그럴싸하게 생겼다. 얼핏 보아서는 여근바위 같지 않지만, 꼼꼼히 보면 분명 여근 바위임을 알 수 있다. 남근바위는 숲으로 막아져 있어 여근바위를 볼 수는 없다. 아마 남근바위와 여근바위가 서로 마주보면 동네 총각과 처녀들이 몽땅 바람 든다고 하여 일부러 숲으로 막아놓은 것이 아닐는지...실제로 ‘동네 처녀총각들이 바람이 나서 바람 잘날 없었던 시절이 있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남근바위와 여근바위가 있는 위치를 대충 맞춰보니 서로 마주 보이는 각도에 서 있음을 알 수 있다.
원시시대부터 인간에게는 성기숭배사상이 있었다. 성기가 숭배의 대상이 되는 성기신앙의 근본사상은 인도의 Limga숭배(남근숭배)와 같이 남근숭배의 대상으로 하는 돌 또는 석봉에서 비롯하였다.
돌 속에 영혼이 들어 있어 그것이 성장, 증식, 분열하므로 암석에 기원하면 자식을 얻는다는 신앙이 있으며, 모든 경제적 풍요력도 구비하고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또한 성기가 악령과 악기(惡氣)를 쫓는다고 믿기도 했다. 여자의 성기가 사시(斜視)를 막는다고 믿는 경우를 자주 볼 수 있는데 아라비아나 터키에서는 여자 성기모양의 자패(紫貝)가 사시를 막아준다고 믿었다. 신라시대의 토우(土偶)나 뱃사공 토기 등에서도 똑같은 경향을 볼 수 있는데 민간신앙의 하나로서 남녀 성기의 모형을 나무․돌․토기 등으로 만들어 봉안하고 신체로 모시고 받드는 성기숭배는 기자, 풍어, 해상안전, 풍농, 마을 평안, 행운의 기원 등으로 신앙되었다.
성기모양의 바위들은 우리 조상들의 성신앙의 흔적이며, 그들의 정신세계를 반영하기도 한다. 수많은 기도의 대상물 중에서도 인간과 비슷한 신체의 일부분 같이 생긴 자연이 바로 경배의 대상이 된다는 사실은 인간성과 신성(神性)을 동일하게 보는 의식의 발현이라 할 것이다.
이같은 의식의 표현 즉 숭배의식은 생산과 풍요의 소원과 각종 재난의 방어, 행운을 달라는 개운(開運)의 바람이 된다. 예부터 사람들은 수컷의 성기모양을 한 돌이나 바위를 양석(陽석)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암컷의 성기모양을 한 돌이나 바위를 음석(陰石)이라 했다.
양석을 남근석(男根石)이라고도 하고 입석(立石), 선돌, 장군석, 촛대바위, 총각바위, 갓바우, 낭군석, 신랑바위, 사랑바위라 했다. 음석은 여근석(女根石), 여궁(女宮)이나 밑바위 , 여자바위, 요강바위, 치마바위, 각시바위, 천녀암(天女岩)이라 했다.
이외에도 남근과 여근이 같이 있으면 부부암(夫婦岩), 부부와 자식바위가 함께 있는 미륵바위 등 이 모두가 성석(性石)이라는 포괄적인 뜻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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