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예술의 철학적 이해 중간고사 감상문
2021320030 박찬우
1. 사울의 아들
사울의 아들은 2015년 작품으로, 라즐로 네메스 감독의 데뷔작이다. 홀로코스트를 다룬 영화로, 그간의 홀로코스트 영화들과는 다른 방향으로 이것의 잔혹함을 담았다. 본 영화를 연출의도와 작품에 담긴 정신적 가치로 나누어서 분석해보고자 한다.
영화는 관객으로부터 정보를 제한한다. 카메라는 줄곧 사울의 뒷모습을 쫓는다. 대부분의 장면에서 포커스를 그의 뒷모습에 맞추고 그 외의 배경은 모두 흐릿하게 처리한다. 이는 관객들이 상황에 대한 정보를 받아들이는 것을 제한한다. 때문에, 관객들은 시각 정보가 아닌 다른 정보를 통해 상황을 판단해야 한다. 이를 의도한 감독은 주로 청각적 정보를 제공한다. 일례로, 영화 초반에 사울과 그 집단은 사람들을 어떠한 공간으로 들어가게 한다. 배경에 대한 제한된 정보로 명확하게 해당 공간이 어떤 곳인지 알 수 없지만, 이후에 들리는 사람들의 고통스러운 소리를 통해 사람들이 들어간 곳이 가스실이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이를 통해 관객은 영화의 작은 정보도 놓치지 않기 위해 영화에 집중하게 만든다.
흐릿한 배경이 때때로 굉장히 뚜렷하게 나타나는데, 이는 사울의 시선과도 닮아 있다. 그는 영화에서 시종일간 흐리멍덩한 눈을 하고 있는데, 가끔 어떠한 것에 집중을 할 때가 있다. 이때에는 그 사물이나 장면을 선명하게 연출하여 사울이 인식하는 것을 표현한다. 이러한 연출은 관객과 사울의 인식을 동일하게 만든다. 즉, 관객이 자신과 사울을 동일시된 존재로 느끼게끔 만든다.
나는 영화를 보는 내내 끊임없이 일을 하는 사울의 모습과 그가 일하는 열악한 환경, 그리고 유대인들이 계속해서 죽어 나가는 상황에 참담했다. 영화의 제한된 정보에도 나는 사람들이 죽어 피로 물든 가스실에서 나는 피비린내를 맡은 것과 같고, 사람들을 화장하고 나온 재를 강으로 퍼 나를 때 내가 그 잿가루를 들이마신 것 마냥 목이 칼칼했다. 자신이 언제 죽을 지 모르는 처지로 이러한 일을 몇 개월동안 한다면 나도 사울과 같이 눈에 생기를 잃을 것이다.
그곳은 마치 인간의 존엄성이 절멸된 느낌이었다. 칸트가 역설한 인간의 존엄성은 그곳 어디에도 없었다. 이성적인 존재로서 인간은 목적 그 자체여야 한다. 그러나, 나치는 유대인들의 인간 존엄성을 짓밟았다. 그곳에서는 생명이 아닌 생존이고, 죽음이 아닌 생명 박탈만이 존재했다. 생존자들은 생명을 유지는 하고 있으나, 그것을 영위하지 못한다. 생명과 죽음 그 사이의 경계면에 있는 존재로서, 나는 그들을 ‘반(半)존재’로 부르겠다.
반존재로서 존재하던 사울이 진정한 인간으로 존재하게 된 계기가 있다. 가스실에서 생존한 소년을 자신의 아들로 받아들이기로 하면서 그는 비로소 존재했다. 그는 적어도 그 소년의 마지막 존엄성을 지켜주고 싶기에 어떻게든 장례를 치르려고 노력한다. 그의 노력은 존엄성이 존재하지 않는 그곳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마치 콘크리트에서 자라는 꽃 한 송이와 같이 메마른 인간성 속 오직 그 만이 유일한 인간성의 손을 잡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가 반란 이후에도 끝까지 놓지 않았던 소년의 존엄성은 본인이 생명의 위협을 느끼자 놓치게 된다. 나는 이것이 전쟁의 특수성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전쟁이란, 인간의 생명에 큰 위협이 된다. 자신의 생명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타인의 존엄성은 과감히 포기하게 된다. 때문에, 우리는 인간 존엄성이 사라지는 전쟁에 대해서 경계할 수 밖에 없다. 그 환경 속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보존하려고 한 사울의 행동이 대단하고 그가 거의 광적으로 집착한 이유이기도 하다.
영화 결말에서 사울은 한 아이를 보고 비로소 활짝 웃는다. 그리고 그 아이는 군대에게 발각이 되지만, 군인이 풀어준다. 그리고 아이가 사라진 숲 속을 계속 비추며 영화는 끝이 난다. 해당 장면이 굉장히 많은 뜻을 내포하고 있다고 느껴졌다. 사울이 지키려고 했던 존엄성이 이 아이를 통해 대표된다고 해석해보았다. 그렇기에 소년이 살아있음, 즉 존엄성이 존재함을 두 눈으로 목격한 사울은 비로소 활짝 웃은 것이다. 그리고 그 존엄성을 지키려는 사람은 비단 사울만이 아니라는 것을, 소년을 발견하지만 바로 풀어준 군인을 통해 보여준다.
마지막으로 아이가 숲 속으로 사라지고 해당 장면을 길게 찍어서 보여주는 장면에서 나는 숲 속에 소년과 같은 아이들이 수 없이 많이 숨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존엄성이 모여 있는 숲, 즉 인간의 존엄성이 모이면 하나의 자연이 된다. 인간의 존엄성은 자연과 같이 고귀하기에 이를 보존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이것이 본 영화의 주제이자 전달하고 픈 바가 아니었을 까 생각해본다.
2.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영화로 2023년 개봉했다. 본 영화는 감독의 자전적인 내용과 반전(反戰)의 내용을 담고 있다. 이번에는 반전의 주제를 바탕으로 해당 영화를 분석하고 사울의 아들과 비교해보겠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은 어릴 적 태평양 전쟁을 겪었던 인물이기에 평소 전쟁을 비판하고 자신의 과거를 반성해왔다. 그의 아버지는 군수 물자 공장을 했었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전쟁이 있었던 시기에 부유하게 생활을 했었다. 그는 그러한 환경에 부끄러움을 느꼈기 때문에 그의 작품 속에 이러한 반전(反戰)의 내용을 담아왔었다. 이러한 배경을 통해서 본 영화에서도 반전 정신을 엿볼 수 있는 요소들이 숨어 있다.
영화의 시간적 배경은 1943~1944년으로 위의 영화 ‘사울의 아들’과 시대적 배경이 비슷하다. 영화는 현실 세계와 돌 탑 안의 세계, 두 가지의 공간적 배경을 가진다. 현실 세계는 태평양 전쟁이 한참인 세계이고, 돌 탑 안의 세계는 신비로운 일들이 가득한 세계이다. 돌 탑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에 대한 가설은 2 가지로 나뉘는데, 큰할아버지가 지었다는 설과 하늘에서 갑자기 떨어진 돌을 30년 뒤 큰 할아버지가 그 주변으로 건물을 지어서 만들었다는 설이다. 나는 이 돌 탑을 근대화된 일본으로 해석이 됐다. 큰할아버지로 대표되는 근대화가 시대적 흐름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볼 수도, 미국에 의해 강제로 개방됨(하늘에서 갑자기 떨어짐)으로 이루어졌다고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근대화가 된 일본은 제국주의를 나타내기도 하기 때문에, 돌 탑 안의 세계는 근대화가 된 제국주의의 일본을 나타낸다고 생각했다. 이를 뒷받침하듯이 돌 탑 안의 세계에서 앵무새 군단의 대장은 마치 나치의 히틀러를 연상시킨다.
탑 안의 세계는 큰할아버지가 권력을 갖고 있는데, 이를 돌 탑의 세계에 빗대어 보자면 큰할아버지는 제국주의 시절 일본의 권력자로 볼 수 있다. 큰할아버지는 마히토에게 돌 탑을 물려주려고 한다. 마히토는 이것을 거부하고 현실 세계로 돌아가 친구를 만들겠다고 한다. 즉, 감독이 자신을 투영하는 인물인 마히토는 제국주의의 일본을 거부하고 제국주의(전쟁)에 반대하는 사람들과 함께 연대하겠다는 뜻을 내비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본 영화의 주제와 영화 ‘사울의 아들’에서의 주제를 비교해보겠다. 본 영화는 제국주의(전쟁)의 거부와 연대의 의미를 지닌다. 이와 달리 사울의 아들은 전쟁이 앗아간 인간 존엄성을 지키려는 정신에 대해 얘기한다. 두 영화는 공통적으로 전쟁의 아픔을 강조하고 각 등장인물이 자신만의 방법으로 전쟁에 거부하는 태도를 보여준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위의 두 영화를 통해 전쟁의 잔혹함과 전쟁을 경계하는 태도의 중요성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21세기 현재에도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이 진행 중이다. 비이성적인 힘 겨루기를 통해 고통받는 것은 힘 없는 민간인들, 특히 노약자가 그 대상이다.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논의가 그 어느 때보다 발전했다고 생각하는 현대 사회에서 존귀한 정신적인 가치가 전쟁의 발발을 미처 막지는 못했다. 역설적이게도,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전쟁은 그것이 발발한 이유가 다양하지만, 중요하게 자리하고 있는 것이 정신적인 가치인 종교적인 가치이다. 인간은 왜 자신의 존재 자체의 가치인 인간 존엄성을 존중하는 행동 보다 더욱 관념에 가까운 종교적인 가치에 중점을 두는 행동을 할까. 어쩌면 종교를 전쟁을 위한 명분 정도로 생각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나는 위의 두 영화를 감상하고 현재의 사회를 바라보며 다음과 같은 소망을 갖게 됐다. 종교를 그저 전쟁을 위한 명분이 아닌 정신적인 가치로서 진정성을 갖고 있음을 진실되게 외치자. 이를 통해 궁극적으로 인간 존엄성이 진실되게 추구되기를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