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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지(機智)로 급제(及第)를 지킨 유자한(柳自漢) 세조 6년(1460)은 조선의 문과를 이해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 해이다. 조선 최초의 외방별시문과(外方別試文科)가 바로 그 해 10월에 치러졌기 때문이다. 경진평양별시문과(庚辰平壤別試文科)가 바로 그 시험이다.(앞으로 편의 상 문과라는 단어는 생략하기로 하겠다.) 외방별시란 수도(首都)인 한양(漢陽) 외의 지역에서 실시하는 시험을 말한다. 문과와 함께 무과도 같이 개설되었는데, 외방에서 보는 시험만으로 급제자를 선발하였다는 점에서 다른 문과와는 차이가 있었다. 예를 들어 식년시 문과나 증광시 문과 혹은 별시 문과에서도 외방에서의 시험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초시였다. 따라서 서로 차원이 달랐다. 식년시나 증광시 혹은 별시의 초시 합격자가 급제를 받으려면 반드시 서울에서 실시하는 2차 혹은 2차와 3차 시험을 통과해야 했지만, 외방별시문과는 그렇지 않았다. 외방에서 치르는 시험만으로 최종 급제자를 결정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 외방별시는 시험을 치르는 목적이 조금은 특이하였다. 물론 문과였으므로 능력 있는 인재를 선발한다는 본래의 취지도 당연히 있었다. 하지만 그 외, 다른 목적이 있었는데,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그 외방별시가 개설된 지역에 사는 양반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달래주자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일종의 위무책(慰撫策)이었던 셈이다. 어떤 지역의 양반들이 어떤 일을 계기로 우울해 하고 있을 때, 그들의 마음을 어루만저 주기 위해 외방별시를 마련하였던 것이다. 왕이 왜 그들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어야 했느냐 하는 점이 궁금하겠지만,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다. 왕과 양반은 서로 남남이 아니라 함께 이 나라의 주인이라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서로가 같은 편이었던 것이다. 문과가 어떻게 해서 위무의 성격을 지닐 수 있었느냐고 반문하는 사람도 있을 법하다. 하지만 역시 이 역시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다. 조선 양반들이 가장 바라는 것이 바로 문과에 급제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가장 원하는 바를 성취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는 것, 그것은 곧 왕이 은총을 베풀어 주는 일이요, 그래서 그로 말미암아 우울했던 저들의 마음이 풀어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 500여 년 동안 실시된 외방별시는 모두 60회였는데 이 시험들 모두 다 그러하였다고 보면 틀림이 없다 조선시대 치러진 60회의 외방별시의 상당 수는 오늘날 이북 삼도 지역에 해당되는 함경도, 황해도, 평안도 그리고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제주에서 치러졌는데, 거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당연히 있었다. 그것은 위 지역이 왕이 거주하는 서울과 멀리 떨어져 있으므로 왕의 교화(敎化)를 받기 어렵다는 점을 그 지역 양반들이 서운해 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런 점을 감안하여, 외방별시에는 반드시 그 외방별시가 개설되는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들만이 응시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전주별시(全州別試)에는 전라도 양반만이, 온양별시(溫陽別試)에는 충청도 양반만이, 함경별시(咸鏡別試)에는 함경도 양반에게만 문호를 개방하는 식이었는데, 그것은 외방별시를 마련한 본래의 취지, 그러니까 그 외방별시를 통해 해당 지역 양반들의 마음을 달래주겠다는 목적을 최대한 살리기 위해서였다. 만약 다른 지역에 사는 양반이 급제한다면, 그것은 외방별시가 마련된 지역에 사는 양반들의 몫을 다른 지역의 양반들이 빼앗아 가는 결과를 낳기 때문이었다. 이상에서 언급한 외방별시의 운영 원칙은 조선 초기나 조선 후기나 전혀 다름이 없었다. 당연히 지금 소개하고자 하는 조선 최초의 외방별시, 즉 세조 6년의 경진평양별시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 경진별시는 세조가 즉위한 후 양서(兩西), 즉 황해도와 평안도 지방을 순행(巡幸)하게 된 것을 계기로, 그 지역 양반들을 위무해 주겠다는 명분으로 개설하였는데, 도성(都城)을 떠나기에 앞서 세조는 엄명을 내린다. 자신의 이번 평양 방문을 계기로 치르게 되는 평양별시에는 오직 황해도와 평안도에 살고 있는 양반에게만 응시 기회를 줄 것이며, 만약 다른 도에 거주하는 사람이 이 방침을 어기고 응시한다면 당장 그의 목을 베겠다고 말이다. 세조가 중전과 세자를 데리고 도성을 떠난 날은 10월 4일이요, 그로부터 10일 후인 14일에 평양에 도착한다. 그리고 그 다음 다음 날인 16일 아침, 시험장이 마련된 대동강변의 부벽루에 나아가 친히 시험 문제를 지어주면서 좌의정(左議政) 신숙주(申叔舟)로 하여금 시험을 진행토록 하였다. 당시 세조는 책문(策文)을 출제하였는데, 그 요지는 이러하였다. 왕은 다음과 같이 말하노라. 황해도와 평안도는 이미 고려 때부터 부강(富强)하기로 이름이 난 지역이다. 그러나 최근에 이르러서는 훌륭하고 유능한 인물(人物)이 흩어지고 논과 들판도 황폐해졌다. 어디 그 뿐이냐. 배정된 군인의 수가 줄어들다 보니 이곳에 근무하는 군사(軍師)만 피곤하고 또 그들에게 힘이 되어 주는 군마(軍馬) 또한 허약해 지고 말았다. 그렇다면 과연 어떻게 해야 떠돌아다니는 사람이 다시 돌아오고 논과 밭이 다시 개간(開墾)되고 군인의 수가 증가하여 군인과 군마가 진정으로 강(强)해질 수 있겠는가. 오늘 이 자리에 모인 너희들 유생들이 그 해결 방법을 한 번 제시해 보거라. 너희들은 모두들 황해도와 평안도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니 이곳 사정을 눈으로도 보고 또 귀로도 들어 그 사정을 익히 잘 알고 있을 것이요, 그러니 해결책도 잘 생각해 낼 것이라고 믿는다.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있는 바를 하나도 숨기지 말고 거리낌 없이 적어 보거라. 요컨대 세조가 출제한 책문의 주제는 한마디로 황해도와 평안도 지역을 어떻게 하면 사람이 모여들고 그래서 활기찬 지역으로 변모시킬 수 있는지 그 대안을 제시하라는 문제였던 것이다.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황해·평안지역 활성화 대책”을 주제로 한 글을 지으라는 셈이었데, 세조가 부벽루 앞에 모인 유생들에게 이러한 문제를 출제한 이유는 앞서 언급한 바대로, 그들도 자신과 함께 이 지역을 책임지고 다스려야 하는 책임이 있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사실 이번에 세조가 친히 참석하여 진행한 시험은 최종 단계인 제 2차 시험이었다. 조선후기에는 그렇지 않았지만 조선초기의 경우 왕이 직접 현장에 가서 진행하는 외방별시는 반드시 1차 시험과 2차 시험으로 운영되었기 때문이었다. 그 중 1차 시험인 초시는 왕이 현지에 도착하기 전에 이미 마치도록 되어 있었다. 그리고 당연한 이야기가 되겠지만, 2차 시험에는 오직 그 1차 시험의 합격자만이 참석할 수 있었다. 이번에 세조가 와서 실시한 부벽루 시험도 예외가 아니었다. 당시 부벽루 앞뜰에 마련된 시험장에 몇 사람이나 참여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수 백명을 넘지는 않았으리라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그 중 최종 선발인원은 22명. 그런데 이 22이라는 숫자는 조선시대에 치러진 외방별시 가운데 가장 많은 인원을 선발한 경우가 된다. 이후 치러진 외방별시를 보면 많아도 10명을 넘지 않았다. 대부분은 5명 이하였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세조가 양서 지방의 양반들을 위하여 파격적인 조처를 취하였던 것이다. 위 급제자 22명 모두는 당연히 함경도나 평안도 출신이어야 했다. 시험을 치르기에 앞서 세조가 다른 지역 사람이 급제한다면 반드시 그의 목을 치겠다는 엄명을 내린 바가 있었기 때문이다. 세조의 그 지엄하고도 엄중한 지시를 무시하고 함경도나 평안도 외 지역에 사는 그 누가 감히 이번 평안별시에 응시할 사람이 있었을까 싶다. 문과 급제가 아무리 좋다해도 목숨보다 더 좋을리는 없을 것이니까 말이다. 그런데 참으로 황당하고 놀랄만한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장원(壯元)으로 선발된 자가 다른 지방 거주자였던 것이다. 유자한(柳自漢)이라는 자가 바로 그 장원이었는데, 유자한은 조선 건국 이후로 한양(漢陽)에 세거하던 명문가(名門家)의 아들이었다. 당시 유자한의 가세(家勢)를 보면, 유자한의 아버지 유양식(柳陽植)은 호조참의(戶曹參議)를 지냈으며, 외할아버지 기면(奇勉)은 공조전서(工曹典書)를 역임하였다. 그런가하면 처부(妻父) 조원희(趙元禧)와 처조부(妻祖父) 조서노(趙瑞老)는 모두 문과급자였으며, 유자한의 두 형제인 유자빈과 유자분도 역시 문과 급제자였다. 그런가하면 유자한의 종조부(從祖父)와 그 후손들 중에서도 다수의 문과자가 있었다. 한마디로 대단한 집안이었던 것이다. 이런 가계 배경을 가진 유자한이 어떻게 이번 평양별시에 응시하게 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다른 문과와 마찬가지로 외방별시에 응시하려는 사람도 시험을 치르기 전, 녹명(錄名)이라는 절차를 거쳐야 했는데 이 때 응시생은 반드시 자신의 출신지를 밝혀야 했다. 녹명을 하지 않은 자가 시험장에 입장할 수 없음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유자한이라고 해서 결코 예외는 아니었을 것인데, 그렇다면 녹명 때, 유자한이 자신의 거주지를 서울이라고 하지 않고 함경도나 평안도 내의 어느 고을이라고 적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렇게 거짓으로 기재해도 딱히 확인할 방법이 없었던 시절이니, 그럴 가능성이 농후하다. 어쨌든 유자한은 평안별시의 응시 자격을 취득하고 1차 시험에 합격한 후 세조가 친히 주관한 2차 시험까지 통과하였고 그래서 이제는 급제증인 홍패(紅牌)를 받는 일만 남아 있었다. 그러나 참으로 유감스럽게도 유자한의 꼼수는 곧 들어나고 만다. 유자한의 출신 배경을 잘 알고 있던 누군가 방방례(放榜禮)를 거행하기 전에 이 사실을 관아에 알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소식은 곧바로 세조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유자한의 이야기를 듣자마자 세조는 크게 노하였다. 그러고는 조금도 주저함이 없이 유자한을 끌어내어 당장 그의 목을 베도록 하였다. 도성을 떠나기에 앞서 자신이 약속한 내용, 다시 말해서 함경도와 평안도에 거주하지 않는 자가 이번 평안별시에 응시하여 급제한다면 그의 목을 베겠다고 엄명을 내린 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세조가 지금껏 살아온 과정을 보아 세조가 유자한을 살려 줄 가능성은 전혀 없어 보였다. 세조의 엄명에 따라 세조 앞으로 끌려 나와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고 있던 유자한이 어떤 생각을 하였을지는 충분히 상상하고도 남음이 있다. 아마도 유자한은 “아 이제는 모든 것이 끝나는구나. 내 인생을 이렇게 허무하게 끝나야 하는가”하는 생각을 가졌을 법도 하다. 부모님 생각도, 또 자식이 있었다면 당연히 자식 걱정도 했을 것이다. 자신의 뜻을 펴지도 못하고 죽어야만 하는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면서 한 숨을 짓기도 했으리라. 그러나 유자한은 결코 그런 나약(懦弱)한 존재가 아니라, 참으로 대범한 인물이었다. 관원의 손에 의해 세조 앞에 끌려 나온 유자한이 갑자기 두 주먹을 불끈 쥔 채, 죽을 때 죽더라도 할 말은 하자는 식으로 결연한 태도를 보였던 것이다. 고개를 든 그는 세조를 향하여 당당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였다. 전하. 저는 이번 평안별시에 응시할 때부터 저의 행동이 법에 어긋난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모든 것은 제 잘못입니다. 지엄하신 전하의 명을 어겼으니 전하께서 저를 죽이셔도 저로서는 할 말이 없습니다. 저 또한 죽을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후회도 없습니다. 공자(孔子)께서 “아침에 도(道)를 들으면 저녁에 죽더라도 여한(餘恨)이 없다고 하셨듯이 저 또한 제가 그렇게 바라던 문과에 그것도 장원으로 급제를 하였으나 무엇이 부족하겠습니까. 죽음을 달게 받겠습니다. 정말 터무니없는 행동이었다. 급제는 받지 않을 테니 목숨만 살려달라고 애원해도 시원치 않을 판인데, 죽일 테면 죽이라고 객기를 부리고 말았으니, 이제 유자한은 죽는 일만 남은 형국이었다. 하지만 유자한은 이 터무니없는 행동으로 목숨도 구하고 급제도 인정 받게 된다. 유자한의 말을 듣은 세조가 한바탕 큰 소리로 껄껄 웃더니, 당초 생각을 바꾸고 유자한을 용서해 주도록 하였기 때문이다. 유자한의 “사즉생(死則生)” 용기가 세조의 마음을 움직였던 것이다. 세조의 말을 들은 유자한이 어떤 행동을 보였을까 그저 성은(聖恩)이 망극(罔極)할 뿐입니다라는 말만 수 없이 외쳤을 것이 분명하다. 당시 유자한이 만약 목숨만 살려 달라고 빌었다면 유자한의 목숨을 보전하기 힘들었으리라 생각된다. 추잡스럽지 않고 남자다운 모습을 보인 유자한이 멋져보인다. 그리고 그의 배짱이 부럽기만하다. 유자한은 이후 조정으로 들어가 내직으로는 사헌부 지평과 사간원 사간 그리고 외직으로는 강원도 양양부사 등을 지내게 된다. 최진사댁 셋째딸을 차지한 칠복이도 유자한의 이갸기를 알고 있었던 것일까. 부벽루의 사진을 넣을 것인가. 평양별시 은영연 사진 첨가할 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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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직은 초고입니다. 수정 중입니다. 읽으시다가 혹시 마땅치 못한 부분이 있으면 지적해 주시기 바랍니다.
아, 원고지 33장 분량이네요. 너무 길지 않나요?
삭제된 댓글 입니다.
감사합니다. 수정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