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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평구선생소천 20주년 기념강연회 발표문 (2023년 9월 16일)
일시: 2023. 9. 16(토). 14:00-17:00
장소: 한국교회 100주년기념관 4층 소망실(서울 종로구 연지동 135)
흔들리던 청춘
태어나 한 번도 교회 문턱을 밟아본 적이 없었다. 『논어』를 사랑한 것 말고는 종교에 관심도 없었다. 그러던 20살 늦가을에 기독교의 문을 두드리게 되었다. ‘기독교의 때’가 안 묻은 상태에서 낯선 세계에 들어가니 혼란 그 자체였다. 그때나 지금이나 의심 많은 ‘도마’에 공감한다. ‘문화 충격’이었다. 종교적 고민에 빠졌다. 절박했지만 의논할 사람이 없으니 책을 찾았다. 이때부터 ‘세상 친구 다 버리고’ 종로와 청계천 일대 서점들을 순례하는 일상이 꽤 길게 이어졌다.
그러던 어느 날 종로2가 ‘종로서적’ 2층에서 우치무라 간조를 만났다. 『기독교문답』, 『나는 어떻게 크리스천이 되었는가』, 『구안록』 등이었다.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 듯했다. 긴 터널 끝에 빛이 보였다. 우치무라의 무교회주의에서 길을 찾았다. 그러다 문득 연전에 선배의 하숙집에서 본 무교회 잡지 『성서연구』가 떠올랐다.
잡지를 여러 서점에서 찾았지만 없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서울 시청 옆 국회의사당(현 서울시의회)에 갔다. 2층에 국회도서관이 있었다. 검정 옻칠한 계단 난간을 짚고 오르던 촉감이 지금도 느껴진다. 『성서연구』를 찾는다고 경비원에게 말했더니 여기는 외부 대출 불가란다. 대출이 안 되면 표지라도 보여달라고 사정했다. 젊은 애가 딱해 보였던지 기다리라 하고 책을 찾으러 서고에 갔다. 그때 거절당했으면 노 선생과의 만남이 어긋날 수도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책과 도서관은 내 인생의 핵심 요인이다.
『성서연구』 뒤표지에 적힌 ‘서울시 서대문구 불광동 353-34’ 주소를 옮겨적고, 길 건너 광화문우체국에 가서 구독료와 구독신청서를 봉투에 넣어 부쳤다. 2월 말이었다. 며칠 후 잡지가 배송되었다. 잡지 뒷면의 집회 광고를 보고 3월 9일 일요일 오후 2시 YMCA 2층 성서집회에 처음 참석했다. 노 선생님을 처음 뵌 날이다. 그날은 마침 나의 22살 생일날이었다.
김교신 선생의 1937년 5월 27일 자 ‘일기’에 노평구 선생(1912.1.16~2003.9.8.)이 나온다.
도쿄 소식. “일전에 쓰카모토 선생을 찾으니 조선인 노 아무개라는 청년이 자기 집회에 오는데 도무지 진실하기 짝이 없다고 보증하며 칭찬하기에 일단 만나기를 원했는데, 마침 지난 23일 집회 후에 만나보니 바로 노평구 형이었습니다. 예수 믿는다고 면직당하며, 예수 믿는 일을 배우면 학비를 안 주시겠다는 엄친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믿지 않으면 죽고 망하니 믿어야 하겠다고, 오직 믿는 일에만 힘과 마음과 정성을 다하는 몇몇 영혼을 지닌 조선도 아직 멸망하지는 않는 줄 알고 감사와 환희에 좁은 가슴이 터질 듯합니다.”
김 선생의 지인이 도쿄에서 보낸 편지다. 짧은 글에 노 선생에 대한 다각적인 평가가 나온다. 고향의 한의사 부친이 의대에 진학하면 학비를 지원해주겠다고 약속했지만, ‘영혼을 살리는 의사’가 되겠다며 도움을 뿌리치고 고학(苦學)을 택한 선생에 대한 주변의 평가는 ‘진실하기 짝이 없는 인물’이라는 것이다. 동의한다. 내가 아는 사람 중 가장 진실한 분이다. “마음이 깨끗한 자는 복이 있으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마태 5.8)이라는 말씀은 선생을 두고 하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젊은 사람 앞에서도 “내 생각이 틀렸어”라고 말할 줄 아는 분이다. 스펀지 같은 유연성을 가진 분이다. ‘내게는’ 그런 분이었다.
노 선생과의 만남은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지금 돌아보니 내 인생은 노 선생을 만나기 전과 후로 갈라진다. 이 만남으로 중세를 빠져나와 르네상스에 진입했다. 에커만에게 괴테가 있었다면, 내겐 노평구 선생이 있었다. 나중에 정신분석학자 에릭 에릭슨의 글을 읽으면서 그의 ‘발달이론’ 5단계인 ‘정체성 위기’를 내가 이 무렵 통과했음을 확인했다.
‘신학’보다 ‘고전’ 1976년 설악산 여름 집회 때였다. 휘영청 보름달이 밝게 비추는 설악초등학교 운동장에 둥글게 앉아 각자 소개하는 시간이었다. 이 자리에서 선생은 학문의 중요성을 강조하셨다. 젊은 대학생들을 의식한 말씀이었다. “흔히 젊은이들이 신앙에 몰두하다 보면 전공은 집어치우고 성경만 파고드는데 이래선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라고 경계하셨다. 40살까지는 인생을 경험하고 그 후에 종교를 시작하라고 하셨다. 전공 분야에서 최소 박사학위를 따고 학문에 끝장을 낸 다음에 성경 공부를 시작해야 볼만한 것이 나온다고 했다. 집회 마지막 날 감화회에서 참석자들은 많은 말을 쏟아냈다. 그런데 감화회를 마감하면서 선생이 던진 한마디가 인상적이었다. “이 자리에서 말로 표현하지 않은 사람이야말로 더 큰 느낌을 받은 것 아니겠는가.” 보이지 않는 것의 가치에 주목하는 분이었다. 마음의 중심을 보는 분이었다. 선생은 기독교 신앙을 배우는데 ‘신학’보다 ‘고전’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무교회 진영의 중요한 특징이다. 고전에서는 ‘삶으로 체현된 인격’을 배울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고전독서회를 열어주셨다. 1950년대 잠깐 하다 중단된 것을 임세영·장문강 등 대학생 3명이 들어오면서 다시 시작하셨다. 우리는 선생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 매주 일요일 성서 집회 파한 후 청계천 7가의 석진우 선생 사무실로 자리를 옮겨 단테 『신곡』, 밀턴 『실낙원』 등을 읽었다. 영문학자 고병려 교수 댁에서 히브리어를 익히게 하셨다. 임세영 교수와 나는 한동안 오류동 장문강 선생 집에서 희랍어를 배우기도 했다. 이 무렵 나는 우치무라의 『종교와 문학』, 『시인 휘트먼』 등에 흠뻑 빠져있었다. 영문학의 세계에 매료되었다. 『종교와 문학』은 19세기 영미 문인들을 주로 다뤘지만, 방점은 칼라일에게 찍혀 있었다. 책은 책으로 이어지고, 다시 사람으로 이어진다. 우치무라를 통해 무교회 선구자 칼라일을 알았고, 『영웅숭배론』과 『의상철학』을 흥미진진하게 읽었다. 두 책은 2003년과 2008년에 한국연구재단 지원으로 내 손으로 직접 번역까지 했으니 인연이 꽤 깊다. 우치무라는 무교회 진영의 고전 목록을 수립했다. 김교신·노평구 선생도 무교회 고전의 열렬한 독자였다. 노 선생은 평소 영미문학이 신앙적으로 위대하다고 높이 평가했다. 그 영향으로 선생께 대학원 전공을 영문학으로 바꾸면 어떻겠는가 여쭤본 적도 있다. 그러나 선생의 답변은 단호한 “노!”였다. “역사학이 얼마나 좋은 학문인데 그걸 바꾸려 하느냐”라고 꾸중하셨다. 선생의 충고를 따랐지만, 전공 울타리 안에 머물고 싶지는 않았다. ‘무교회 학문’을 해야겠다고 작심했다. 밀턴을 공부 주제로 잡았다. 역사학자들은 밀턴에 관심이 없기에 논문 발표는 전부 영문학회에서 했다. 그런데 영문학자들은 역사에 관심이 없었다. 역사학·영문학 양쪽에서 도토리 신세였다. 하지만 울타리에 갇히지 않은 아웃사이더의 삶도 나쁘지 않았다. 단기필마(單騎匹馬)의 자유로움 덕분에 종교·문학·역사를 아우르는 학제적 학문(Interdisciplinary Studies)을 할 수 있었고, 그 열매로 『아레오파기티카』(1999, 2016)와 『밀턴평전』(2008)을 출간했다. 『아레오파기티카』는 루터·칼뱅의 종교개혁이 완성형이 아니며, 제2·제3의 종교개혁이 필요하다고 주창한 종교개혁 문서다. 밀턴 산문의 최고봉인 이 책은 밀턴이 무교회주의의 선구자임을 잘 보여준다. 밀턴을 공부할수록 그를 흠모하게 되었다. 그의 신앙과 조국애가 놀라웠다. 밀턴에게서 김교신이 보였다. 밀턴이 무교회의 고전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각국의 밀턴 연구 동향도 알게 됐는데, 일본에서는 우치무라와 야나이하라가 밀턴을 일본에 처음 소개한 선구자로 평가받고 있었다. 나 역시 한국 사회에 밀턴을 알리고 싶었다. 밀턴 탄생 400주년을 목표로 10년을 준비해 2008년 『밀턴평전』을 출간했다. 무교회 선구자 밀턴을 추모하는 대한민국 유일의 나 홀로 400주년 헌정 행사였다. 단독자만이 누릴 수 있는 자유로움과 보람이다. 『밀턴평전』을 쓰면서 『김교신평전』에 대한 열망을 키웠다. 아니 『밀턴평전』은 『김교신평전』을 쓰기 위한 준비운동이었다. 밀턴·우치무라·김교신·노평구 선생에겐 흥미로운 공통점이 보인다. 단독자의 신앙, 정체성에 대한 고민, 동포에 대한 연민, 조국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긍지와 책임이다. 무교회주의의 핵심 가치라고 본다. |
무교회주의적 문제의식
내가 무교회의 고전 몇 권을 번역하고 몇 권의 저서를 낸 건 전적으로 우치무라·노평구·김교신 선생 덕분이다. 이분들 영향으로 무교회주의적 문제의식으로 나 자신과 세상을 바라보려고 노력했다. 공부의 방향성이 분명해졌고, 학부 시절부터 무교회 학문을 하기로 결심했다. 종교·문학·역사를 아우르면서 저술에 인생을 걸기로 했다.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없다. 평생 교수는 부업이고 저술과 번역이 나의 본업이라고 생각했다. 지금도 나의 직업 정체성은 ‘저술가(writer)’다.
저술에 전념하기로 한 이유는 간단하다. 내가 책으로 팔자를 고쳤기 때문이다. 책을 통해 우치무라·노평구·김교신 선생을 만났기 때문이다. 책을 통해 밀턴과 칼라일을 만났기 때문이다. ‘책 속에 길이 있다’라는 말은 내게 미사여구(美辭麗句)가 아니라 ‘인생의 사실’이다. 남이야 뭐라건 책은 내게 ‘영혼의 별’이다. 김교신 선생은 칼라일을 인용해 ‘서책의 집합이 현대의 진정한 대학’이라고 했다. 칼라일은 『의상철학』에서 교회는 ‘옷’이고 신앙은 ‘몸’이라고 비유했다. 칼라일과 김교신 선생에게 제도로서의 대학은 ‘옷’이고, 책은 대학의 ‘몸’이었다. 옷보다 몸이 귀하고 교회보다 신앙이 귀하듯이, 대학보다 책이 귀하다. 따라서 독서하지 않는 대졸자는 고졸 독서가보다 못하다.
밀턴의 책 사랑도 대단하다. 서양의 대학 도서관 담벼락에서 그의 글을 종종 볼 수 있다.
“사람을 죽이는 자는 신의 형상인 이성적 창조물을 죽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좋은 책을 파괴하는 자는 이성 그 자체를 죽이는 것이며, 말하자면 눈앞에 있는 신의 형상을 죽이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땅에 짐이 되어 삽니다. 그러나 좋은 책은 위대한 영혼의 고귀한 생혈입니다. 책은 한 생명이 죽은 뒤에도 그 영혼을 불멸의 보물로 고이 간직합니다.” --『아레오파기티카』
책에는 저자의 영혼이 간직되어 있다는 말이다. 학생 시절 서울역 뒤 인쇄 골목에서 선생의 잡지와 책을 교정하다가 출판에 눈을 떴다. 임세영, 장문강 선생과 함께 다방 구석에 앉아 하루 종일 몇 잔씩 차를 마시며 교정을 봤다. 요즘 유행하는 ‘카공족’의 선구였다. 조판·인쇄·교정 등 출판 실무의 전 과정을 선생 곁에서 익혔다. 선생은 한국 사회에 계몽이 필요하다며 기회 닿는 대로 신문·잡지에 적극 글을 쓰라고 내게 권하셨다. 그리고 “자네는 사상성이 있어”라고 격려하시며, “글을 쓴다면 『사상계』나 『신동아』에 기고할 정도가 되어야 한다”라고 하셨다. 무교회 울타리를 벗어나 ‘보편의 세계’에서 글을 쓸 수 있는 수준이어야 한다는 뜻이다. ‘동네 축구’ 말고 ‘프로 축구’를 뛰라는 뜻이다. 선생 자신도 『사상계』에 기고하시곤 했다. 영어 ‘education(교육)’은 학생의 개성과 가능성을 끌어낸다는 뜻이다. 선생은 방황하던 청춘을 잡아주고 내면의 가능성을 끌어내 준 위대한 교사였다. 적어도 내겐 그런 분이었다.
부키 판 『김교신전집』(2001) 복간도 선생 곁에서 출판에 눈을 뜬 덕분에 가능했다. 내 책 『구약성서읽기』(개정판 『성서를 읽다』)를 출간한 부키출판사 박윤우 사장이 대전까지 찾아와 출판기획 아이디어를 구하기에 『김교신전집』 복간을 추천했다. 주문 제작한 1970년대의 『김교신전집』은 절판되어 돈 주고도 사볼 수 없었다. 주문 제작방식은 밀턴이 말한 ‘사상의 자유시장’ 정신에도 맞지 않는다. 누구나 서점에서 돈 주고 살 수 있어야 ‘진정한 책’이다. 부키 판 『김교신전집』의 의미는 여기에 있다.
그런데 복간을 기획할 땐 전혀 생각조차 못 했는데, 2001년 출간하고 보니 ‘김교신 탄생 100주년’이었다. ‘이게 뭐지?’하고 무척 신기했었다. 어떤 보이지 않는 손길이 작용하는 것만 같았다. 『전집』 출간 이후에는 부키 박 사장에게 홍순명 선생 글을 많이 받아내 책으로 출간하라고 강력하게 권고했다. 그 결과 몇 권의 책이 나왔다. 홍 선생은 무교회 진영에서 드물게 ‘프로 축구’ 수준의 콘텐츠를 생산할 수 있는 분이다. 노 선생은 홍 선생을 두고 ‘보석이 진흙 속에 처박혀있다’라며 늘 안타까워하셨다.
무교회의 보편주의
노 선생은 1990년대에 가끔 대전에 와서 하루씩 주무시고 가시곤 했다. 집에 개인 장서가 구비돼있는 걸 아시고 한 달에도 몇 차례씩 아침 일찍 시외전화를 주셨다. 잡지 원고 교정을 하시면서 인명, 지명, 연대 등 역사적 사실관계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90년대 말 『노평구전집』 출간을 준비하실 무렵에도 아침 전화를 주셨다. 전집 제목을 『노평구 신앙문집』으로 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내 의견을 물으셨다. 외람되게도 나는 이때 단호히 반대했다. “선생님은 평생 기독교라는 울타리가 아니라 한국 사회와 민족 전체를 상대로 일하셨습니다. 『신앙문집』 아닌 『노평구전집』으로 해야 책의 의미를 온전히 살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묵묵히 들으시더니 “알았소” 하고 전화를 끊으셨는데, 나중에 보니 『노평구전집』으로 출간하셨다. 다행이었다. 내가 선생께 배운 무교회주의는 보편주의다. 전공이든 기독교든 울타리 안에 갇힌다면 무교회주의가 아니다. 심지어 무교회의 울타리도 벗어나야 한다. 노 선생의 삶은 보편주의를 지향했다. 김교신 선생도 『성서조선』 창간사에서 “기성 신자에게는 가지 말라”고 했다. 무교회의 희망은 울타리 밖에 있다고 본다.
책으로 인생이 바뀐 사람인지라 책에 대한 애정이 컸다. 『번역은 반역인가』(푸른역사, 2007)와 『번역청을 설립하라』(유유, 2018), 그리고 2018년 초의 ‘번역청 국민청원’은 책에 대한 내 진심의 표출이다. 한국 사회의 지식 인프라가 심각하게 부족하다고 판단했다. 독서를 해본 사람만이 공감할 수 있는 문제의식이다. 노 선생은 김교신 선생을 지극히 존경하고 흠모해서, 보스웰의 『새뮤얼 존슨 전기』에 필적하는 『김교신평전』이 우리에게 있어야겠다고 누차 강조하셨다. 『새뮤얼 존슨 전기』는 선생이 젊은 날 일본에서 탐독한 책이다. 전기문학의 금자탑이라 할 수 있는 책이다. 그런데 아직도 한국어 번역본이 없다. 이런 사례는 무수히 많다. 디지털 강국 대한민국의 지식 인프라가 100년 전 일본보다 못하다는 게 믿어지는가? 전공 울타리 안에 갇혀 논문 자료 읽는 게 독서의 전부인 사람들 눈에는 전혀 보이지 않는 한국 사회의 어두운 그늘이다.
민족주의자를 자처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민족’은 혈연 공동체가 아니라 언어와 문화를 공유하는 ‘한국어 공동체’다. 노 선생은 평소 ‘사회를 향상하지 못하는 신앙은 죽은 신앙’이라고 역설했다. 번역은 ‘한국어 공동체’의 콘텐츠를 업그레이드한다는 점에서 무교회 정신과 부합한다고 판단했다. 『번역은 반역인가』에서도 이 책이 무교회적 문제의식에서 집필되었음을 분명히 밝혔다.
사실 무교회 학문은 새삼스러운 이야기도 아니다. 선생이 1960년대에 출간했던 잡지 『진리와 독립』은 당대의 쟁쟁한 학자들이 키르케고르, 파스칼, 아우구스티누스 등 기독교 고전에 관한 수준 높은 연구를 대중적으로 풀어 소개했다. 홍순명 선생도 필진 중 한 분이었다. 하지만 이 전통은 지금 완전히 단절되었다. 제대로 계승 발전된다면 무교회주의적 문제의식은 큰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다. 무교회 학문, 무교회 사상, 무교회 자연과학, 무교회 인문학 등으로 얼마든지 확장할 수 있다. 문제는 사람이다. 김교신 선생이 「조선지리소고」에서 강조했듯이 ‘백성의 소질과 담력이 중요할 뿐’이다
무교회와 『선데이서울』
노평구 선생은 공부를 왜 해야 하는지, 학문의 가치가 무엇인지, 진리가 왜 소중한지를 일깨워주셨다. 선생의 최종 학력은 고교 중퇴다. 1929년 광주학생사건이 전국으로 번졌고, 배재고보 3학년 재학 중 학생 시위를 주동한 혐의로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1년간 옥고를 치렀다. 감옥에서 풀려난 후 학업을 이어갈 수 없었다. 복학의 기회가 차단되었기 때문이다. 해방 후 군사정권이 출소한 운동권 대학생들에게 복학·재입학 기회를 준 것과 비교된다. 출옥 후 학업의 길이 막힌 선생은 1932년부터 두어 명 친구들과 함께 마포 도화동 산동네에서 빈민 어린이들을 가르쳤다. 교육활동을 하면서 1주일에 한두 번 시내에 들어갈 때마다 종로의 서점에 들렀다. 그러던 중 1933년경 종로2가 박문서관(博文書館)에서 파란색 표지의 『성서조선』을 만났다.
박문서관에서 『성서조선』을 접한 지 한두 해가 흘렀다. 1935년 어느 늦은 봄날 밤 23살 청년 노평구는 ‘니고데모와도 같이’ 양정고보(養正高普) 숙직실을 찾았다. 『성서조선』을 매개로 사제관계가 맺어졌다. 책은 사람과 사람을 이어준다. 칼라일식으로 표현하자면 ‘영혼의 불꽃’이 전파되는 아름다운 방식이다. 이런 의미에서 기독교는 ‘책의 종교’다. 무교회 기독교는 더더욱 ‘책의 종교’다. 노 선생은 김교신 선생 소개로 일본에 건너가 10년간 일본 무교회 성서집회를 대학 삼아 공부했다.
이 시기 선생의 독서 편력은 매우 풍성하고 다양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우치무라의 무교회 독서목록이 중심에 있었다. 나는 제도권 학교에서보다 노 선생께 배운 것이 많다. 학교에서는 지식을 배웠지만, 공부하는 목적과 진리의 가치를 배운 건 선생으로부터였다. 선생과 함께 거닐던 종로와 무교동 거리는 추억의 캠퍼스다. 내게는 선생이 최고의 대학이었다. 고교 중퇴의 선생께 ‘대학의 정신’을 배웠으니 아이러니하다. 요즘 세상에 선생보다 학벌 낮은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하지만 선생만큼 폭넓게 독서한 사람은 드물 것이다. 선생의 유연한 사고도 독서와 긴밀한 관련이 있다고 본다. 노 선생을 보면서 한국 사회의 최대 문제는 ‘책 안 읽는 고학력자’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껍데기 과잉 시대다. 우리 교육의 실패를 방증한다.
독서란 영혼의 자유비행이다. 영어 브라우징(browsing)이란 말 그대로다. 사슴이 연한 나뭇잎을 뜯어 먹듯, 독서가는 내면의 허기와 갈증을 채우기 위해 책의 세계를 주유(周遊)한다. 울타리를 뛰어넘는 진지하고도 즐거운 방랑이다. 이 꽃 저 꽃 찾는 나비와도 같다. 우치무라도 그런 독서가에 속한다. 밀턴을 공부하다가 우치무라의 이름을 발견하고 감탄한 적이 있다. 그는 삿포로 농학교에서 수산학을 전공한 자연과학도였다. 그런데 영미권 밀턴 학자들이 편찬한 『밀턴 백과사전』(Milton Encyclopedia, 9 vols.)에는 일본 사회에 밀턴의 신앙과 문학을 처음 소개한 선구자로 기록되어 있다. 내가 수십 년 공부해 겨우 흐릿하게 알아챈 밀턴 사상의 정수를 자연과학 전공자가 취미 수준의 독서로 꿰뚫어 봤다. 정말 놀랍다. 취미가 세계 수준이다. 울타리를 뛰어넘은 우치무라의 행보야말로 무교회주의의 진수라고 본다.
각설하고, 사람은 다 제각각이어서 노 선생과 우치무라의 뜻을 모두가 나처럼 이해한 것 같지는 않다. 학생 시절 어느 해 여름 성서집회에서였다. 점심 후 여럿이 둘러앉아 잡담을 나누다가 군대 이야기가 나왔다. 장교로 예편한 한 선배가 말했다. “군대에서 내무반에 앉아 『타임』 지 읽고 있는 녀석들 보면 참 아니꼽더라.” 그러자 당시 학생이던 임세영 교수가 대뜸 반박하고 나섰다. “그럼 『선데이서울』은 읽어도 되고 『타임』 지는 읽으면 안 됩니까?” 머쓱해진 그 선배의 표정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김교신 선생은 도쿄고등사범학교 학생 시절부터 영국의 『더 타임스(The Times)』를 받아보고 국제정세를 자세히 파악했다. 1936년엔 미국 군사전문가 하우스 대령의 논설을 인용해 연합국과 추축국이 충돌할 때 연합국이 승리하리라는 분석을 ‘일기’에 소개하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 발발 3년 전이다. 해방되던 그날까지 일제가 패망할 줄 꿈에도 몰랐다던 허접한 지식인들과 격이 달라도 너무 달랐다. 당대 일급 지식인이다. 쓰레기통 같은 식민지 지식사회에 핀 장미꽃이다. 하지만 『선데이서울』을 사랑한 그분에겐 김교신도 ‘아니꼬운 청년’이었을 것이다.
하긴 천지창조가 6천 년 전에 이루어졌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 중세적 망상이다. 과학과 신앙의 양립을 확신한 김교신 선생이 들으면 놀라자빠질 일이다. 한국 교회가 전반적으로 반지성·무지성으로 욕먹고 있지만, ‘무교회 너마저도!’라면 참담하다. 무교회도 또 하나의 교회로 후퇴한 걸까. 밀턴은 ‘the Reformation’ 대신 ‘reformation’이라고 썼다. 종교개혁은 한 번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는 뜻이다. 노 선생은 ‘인간을 모르고 어떻게 신을 말할 수 있나?’라고 했다. 인간의 ‘상식’과 ‘학문’을 모르면서 하나님의 ‘계시’를 말할 수 없다는 말씀이다. 구구단도 모르면서 미적분을 풀겠다고 나서는 꼴을 지적한 것이다. 고학력 시대엔 더욱 그러하다. 무교회가 『선데이서울』 수준에 머물러야 하는가?
진리의 확장
노 선생은 기독교 신앙이 학문과 사상, 나아가 궁극적으로 문학을 바꾸는 데까지 이르러야 한다고 말했다. 단테, 밀턴, 파스칼, 키르케고르, 도스토옙스키 같은 인물이 한국기독교에도 나와야 한다는 당위성을 강조한 말씀이다. 선생의 무교회에 대한 기대 수준은 정말 높았다. “한국 교회는 숫자는 많으나 내용(콘텐츠)이 빈약하니 무교회가 내용을 생산해 읽을거리를 공급해줘야 한다”라고 누누이 강조하셨다. 하지만 『선데이서울』과 ‘동네 축구’ 수준으로 무슨 콘텐츠를 생산할 수 있을까. 한국 무교회의 부끄러운 현실을 돌아본다.
무교회 선구자 밀턴도 기독교 신앙의 확장성을 강조했다. 종교개혁의 출발은 ‘종교’지만, 가정·교육·사회·정치·학문 등으로 진리가 구석구석 확대되고 스며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자신 『실낙원』으로 ‘진리의 확장’을 실천했다. 그리고 ‘진리의 확장’을 위해 언론·출판·표현의 자유가 필요하다고 믿었다. 『아레오파기티카』의 핵심이다. 무교회에도 진리의 확장을 위한 뜨거운 토론의 장이 형성되었으면 한다. 임세영 교수가 말한 무교회학파의 성립을 기대해본다.
노 선생은 기독교 신앙과 가치관이 세상에 스며들어 보편적 상식으로 통용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칼라일 말처럼 “땅이 하늘을 많이 닮아 해로울 일은 없다.” 그 목표를 이루는 수단은 ‘진리’였다. 이념은 다르지만, 안토니오 그람시의 ‘헤게모니 이론’, 유진 제노비즈의 ‘진리에 의한 사회 변혁’을 떠올린다. 미국 신좌파 역사가 유진 제노비즈는 인문학 진리의 탐구야말로 ‘최고의 정치투쟁’이라고 역설하면서 아스팔트 운동권을 경멸했다. ‘진리의 힘’에 대한 이런 놀라운 신념은 이념을 초월해 배울 필요가 있다.
김교신 선생도 ‘진리의 힘’을 믿었다.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 역사」를 연재할 무렵 함석헌 선생의 글을 대하는 김 선생의 태도에는 흥분과 긴장과 설렘이 보인다. 행간에 자부심과 기쁨이 넘친다. 『성서조선』에 「조선역사」와 「조선지리소고」가 실린 1934년은 마침 개신교 전교 50주년이 되던 해였다. 그 해 33살 두 청년이 나란히 세기의 명문장을 남겼다. 김 선생은 「조선 역사」야말로 기독교 병원, 기독교 학교를 뛰어넘는, 전교 50년의 최고 업적이라고 극찬했다. 김 선생은 겸양의 뜻으로 함 선생에 대해서만 칭송했지만, 나는 「조선지리소고」야말로 「조선 역사」에 못지않은 개신교 50년의 금자탑이라고 평가한다. 함 선생의 「조선 역사」가 현묘 유장한 고담준론이라면, 김 선생의 「조선지리소고」는 논리적이고 설득력 있는 학자의 글이다. 맑고 투명한 보석 같은 문장이다. 영문학자 이현원 선생은 김 선생의 문체를 퓨어 스타일(pure style)이라고 했다. 김 선생의 성품을 보라. ‘문체가 곧 사람(The style is the man)’이란 영어 속담 그대로 아닌가.
김 선생이 평화로운 시대를 살았더라면 전공인 지리·생물·지질학에서 무교회주의적 통찰과 문제의식을 담은 위대한 문장을 많이 남길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우리는 함 선생과 다른 스타일의 명문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모름지기 학문에 종사하는 사람이라면 「조선지리소고」를 기독교 진리의 확장성을 보여준 롤모델로 간주해도 좋을 것이다.
한국 현대사의 예언자 김교신·노평구 선생의 중요한 공통점은 ‘역사 앞에서’ 살았다는 점이다. 김교신 선생이 식민지 시대 조선인의 정체성을 지니고 지사적 그리스도인으로 살았듯이, 노 선생도 광복 후 20세기 후반 현대사를 ‘역사 앞에서’ 살았다. 선생은 복음 신앙에 투철한 독립전도자였을 뿐 아니라 한국 현대사의 예언자이기도 했다. 복음과 예언을 겸비했다. 나도 선생의 권유로 소예언서를 공부했고, 그 열매로 『성서를 읽다』(유유, 2016)를 출간했다. 선생은 평소 ‘무교회의 야당성’을 강조했다. 『성서연구』 ‘권두문’을 보면 제주 4·3사건, 여순사건, 베트남전쟁, 박정희 유신독재, 전두환 5공 정권 등 한국 현대사의 주요 고비마다 일관된 입장을 견지했음을 볼 수 있다. 『성서연구』 1948년 11월호 「재화(災禍)의 원인」에서 선생은 예언자 아모스를 인용하면서 ‘여수·순천 사건’에서 자행된 이승만 정부의 학살 만행을 질타했다. 공의와 정의의 예언자 아모스의 말에 “여호와의 시키심이 아니고야 재앙이 어찌 성읍에 임하겠느냐”(3:6)라는 말이 있습니다. … 그들의 죽음은 우리를 대신함이며, 그들의 부르짖음은 우리의 회개를 촉구함이며, 여수·순천의 넘어짐은 민족의 패망을 경고함이라. 왜 국회는 국회대로 통회함이 없는가! 국회는 책임이 없던가! 왜 정부는 정부대로 눈물로써 사과함이 없는가! ‘여수·순천의 넘어짐’이란 ‘여수·순천 10·19사건’을 말한다. 1948년 10월 전남 여수시에 주둔 중이던 군인들이 제주 4·3 사건 진압 출동 명령을 동족상잔이라 간주하고 거부했다. 이승만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한 뒤 여순 지역 탈환에 성공했으나 진압 과정 중 무고한 민간인에 대한 무차별적 학살이 자행됐다. 이 사건을 계기로 극우 반공 국가가 구축되었고, 이 맹목적 반공주의의 핵심에는 서북청년단으로 대표되는 극우 기독교 세력이 있었다. 『성서연구』 1949년 1월호 「잡감록」에는 여순사건의 주역인 극우 반공 기독교에 대한 질타가 등장한다. 조선의 기독교는 그 경망한 태도를 돌이켜 세례 요한의 설교부터 다시 듣지 않으면 안 된다. 먼저 진실한 인간수업이다. 복음의 진주는 개, 돼지에게는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이번 ‘여수 사건’의 주동적인 인물들이 대개가 기독교인인 것이 이를 증명한다. 이렇게 보면 이 사건도 과거 복음의 싸구려를 부른 기독교에 책임이 있다고 볼 수 있다. 무서운 일이다. 즉 조선 기독교에는 구약의 뿌리가 없다. 도덕적 심판에 절체절명 두려워 떠는 자에게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문은 열리는 것이다. ‘복음의 싸구려’라고 했다. 영화 『밀양』의 ‘싸구려 복음’, ‘싸구려 은혜’다. 하나님 앞에 사는 체하면서 인간에 대한 예의를 망각한 ‘개독교’의 현주소다. 선생은 인간을 경시하면서 하나님을 믿는 체하는 그들을 ‘개, 돼지’로 경멸했다. 선생은 한국기독교에 ‘구약의 뿌리’와 ‘예언 정신’이 없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1949년부터 『성서연구』에 구약의 예언서들을 본격적으로 다루기 시작했다. 그 첫 번째가 1949년 8월호부터 연재한 「예언자 아모스」다. 우치무라 간조가 1898년 창간한 『도쿄독립잡지(東京獨立雜誌)』 ‘창간사’에서 아모스 3장 8절(“사자가 부르짖은즉 누가 두려워하지 아니하겠느냐. 주 여호와께서 말씀하신즉 누가 예언하지 아니하겠느냐”)을 인용한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우치무라는 37살에, 노 선생은 36살에 각각 조국을 위한 예언자가 되었다. 선생은 아모스를 시작으로, 구약의 예언자 호세아, 이사야, 예레미야 등을 다룬 글을 잇달아 기고했다. 그러나 집필은 벽에 부닥쳤다. 선생께 직접 들은 말이다. 해방 정국에서 한국 사회를 위해 구약 예언서를 본격적으로 다루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으나 화재 때문에 어려웠다고 했다. 1948년 4월 20일 선생 가족은 간장 공장 2층에 세 들어 살고 있었는데, ‘아래층 간장 공장에서 작업 중 기름을 끓이다가 일꾼의 부주의로 발화’한 것이다. 선생은 한밤중에 발생한 화재를 피해 2층에서 뛰어내리다 다리가 골절되었고, 일본에서 10년 동안 공부하면서 모았던 성경 참고서와 강의 노트 등은 모두 불타버렸다. 나중에 이 소식을 들은 일본의 신앙 동지들이 자료를 모아 전달했으나 완전 복구는 어림없었다. 그러나 선생은 그 뒤에도 일관해서 한국 사회의 모순과 비리에 대해 격렬한 비판을 서슴지 않았다. 5·16쿠데타 이후 등장한 군사정권, 박정희 정권에서 이루어진 월남파병 등에 대해 신랄하기 그지없는 독설을 퍼부었다. 한국사학자 이기백 교수는 노 선생의 예언 정신을 이렇게 말한다. 과문한 탓인지 모르지만, 월남파병을 이렇게 격렬하게 비판한 글이 당시에 있었는지 어떤지를 알지 못하겠다. 독자가 겨우 4, 5백 정도의 개인잡지에 게재된 것이니 망정이지, 일반교양 잡지에 이 같은 글이 실렸더라면 그대로 넘어갔을 성싶지 않다. 외국에 파병하는 것을 반대한 주장은 레바논 파병의 경우에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이기백, 「종교와 도덕과 국가」 『창작과비평』 1997년 가을(97호), 342쪽. 발행 부수가 적어 박해를 피할 수 있었다는 지적이다. 평소 노 선생은 ‘정치적 목적으로 사람의 생명을 빼앗는 게 가장 사악한 짓’이라며 독재 권력에 분노했다. ‘핍박받는 백성에 대한 동정심이 있어야 사람’이라고 했다. 1990년대 민주 정부 수립 이후 이북 출신 기독교 지식인들은 이해할 수 없는 행보를 보였다. 유신독재 시절 그 많은 고초를 당했으면서도, 갑자기 변절했다. 여순 학살자 이승만의 극우 반공 기독교로 퇴행했다. 평생 예언자 정신으로 초지일관했던 노평구 선생과 대조적이다. 일생 ‘하나님과 역사 앞에서’ 부끄럽지 않은 모범을 보여준 선생의 일관된 모습에 감사한 마음이다. 글을 쓰다 보니 선생께 입은 은혜가 크다. 선생과의 만남 없는 내 인생은 상상할 수 없다. 하늘에서 허락하신다면 『밀턴평전』, 『김교신평전』에 이어 선생께도 책 한 권을 지어 바치고 싶다. 그날이 온다면 이 글은 그 책의 서문이 될 듯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