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소는 기전차문화연구소.
시각은 6월 1일 정오.
사람수는 기사아저씨를 포함해 15명.
한일 월드컵 개막식 다음날, 우리는 녹색의 사명을 띠고 중앙로에 모였다. 우려마실줄만 알았지, 녹차 생잎이 어떻게 잎차로 만들어지는지 그 과정이 궁금해 모인 사람들은 화개행 버스에 올랐다.
어둠이 깔릴 무렵, 6시간만에 도착한 첫번째 코스는 하동군 악양면 정서리에 있는 매암차박물관. 말라버린 섬진강 줄기를 따라와보니 지나가도 모를만큼 아담한 간판을 내건 다원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고보니 저 유명한 전라도와 경상도를 가로지르는 섬진강이었던가. 화개장터 자리를 알리는 플랭카드가 보였던 것도 같다.
매암차박물관은 1926년에 지어져 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1실은 토기, 청자, 화로류, 2실은 백자, 절구, 찻자리, 3실은 다양한 차관련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4실은 사랑방 구실을 하고 있다한다. 찻집과 제다원도 운영한다.
다원에는 전정가위로 잘 다듬어놓은 사철나무같은 차나무들이 군락을 이루어 허리 높이 정도로 정돈되어 있었다. 군데군데 손바닥만한 잎을 자랑하는 감나무들이 의아해서 물어보는 일행의 질문에 박물관장 강동오씨는 이렇게 말했다.
"보성 등의 지방과는 달리 마주보는 저 지리산 자락이 워낙 넓어서 일사량 조절이 어려운데, 감나무잎들은 일사량 조절을 합니다. 차재배시기인 5-6월에 잎이 피었다가 지니까 시기가 잘 맞죠. 그리고 이 자리는 일제시대때 임업시험장이서 수로시설이 잘 되어있어 차재배에 유리하지요."
아담한 찻집 뜰에서 차 한 잔씩을 우려마신 우리는 아치형의 나무다리에서 기념촬영을 한 후 근처 섬진강 식당에서 산채정식으로 저녁식사를 하였다.
산속으로 밀려드는 어둠 속을 걸어 올라가 옥천다원 손영도씨 댁에 다다랐다. 반갑게 맞아주시는 손영도씨와 그의 어머니. 여장을 풀고 피로함을 달래려 뜨거운 녹차를 마신 후 가벼운 산책..칠흑같은 어둠이란게 이런 거였구나 싶을 정도로 산속에 갇혀있다는 느낌.
언젠가 낮술을 마시고 해질 무렵 12년만에 중학교를 찾은 적이 있었다. 다음날이 운동회였는지 운동장가엔 하얀 천막이 줄을 지었다.스탠드에 걸터앉으니 낮은 건물들 사이로 흐르는 불빛이 보였고 운동장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미루나무들, 거기에 달린 잎들의 부석거림도 들렸다. 그 순간 내 눈을 의심하게 한 건 산과 어두운 하늘 과의 선명한 경계였다. 누워있는 여인의 곡선같기도 하고 40대 남자의 옆얼굴 같기도 하고 취중이라 그리 보였을까. 어릴 때 밤늦도록 운동장에서 미친 듯이 뛰어는 다녔어도 산의 존재를 몰랐었다.
이것이 세계가 넒어진다는 것이구나. 그 시기엔 난 한 번도 산에 가본적이 없었으니까.
그 산 너머로 나는, 여행을 온 것이다. 흐르는 불빛은 없지만 귀뚜라미, 개구리.....그리고 볼을 스쳐가는 가벼운 바람...
이른 아침, 아(亞)자 방이 유명하다는 칠불사를 둘러보고 나서 이쌍용씨의 차도구 작업실을 구경하였다. 인상적인 것은 수북한 먹감나무로 만든 차도구들 사이로 좌식 작업공간 뒤편에 놓인 작은 진검 두 개 였다.
"아무런 생각없이 작업하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늘 작업량을 계산하여 자신에게 조금의 게으름도 허용하고 싶지않거든요. 그래서 이렇게 검을 가져다 놓았죠."
일본에서는 1억원을 호가하는 문화재로 지정받은 차시도 있다면서 도록을 펼쳐든 그의 씩씩한 말투에는 가치있는 차도구를 만드는 장인 대접에 그토록 극진한 일본에 대한 부러움과 특유의 자신감이 섞여 있었다.
아침을 먹고 10시가 되어서야 우리는 근처 녹차밭으로 향하는 트럭에 실렸다(?). 한차례의 시원한 소나기를 맞고서야 차잎따기에 들어갔다. 1창2기. 하나의 깃봉에 두 개의 깃발이 붙어있는 모양의 차잎을 따라. 새순이 올라오라고 가지치기가 된 녹차나무 가지를 훑으며 가자니 허리가 이만저만 아픈게 아니다. 바로 눈앞에 지리산자락, 그 위로 구름낀 하늘....개중 몇몇 부지런한 사람들은 숲속(?)을 헤쳐 고사리나물을 뜯어오기도 하였다.
2시간 뒤 우리는 차를 덖기 시작했다. 각자 모아온 갖가지 크기의 차잎을 모두 모아 300도의 대형 솥에 털어넣고 살짝 볶는 작업이다. 타들어가기전에 잘 섞어주는 것이 기술인데 손영도씨와 이쌍용씨가 우리를 도왔다. 덖어서 비벼 말리는 사이, 마당에서는 바비큐 파티가 벌어졌다. 상추와 녹차잎에 지글지글 목삼겹살, 죽순을 넣은 된장찌게.....수박 한 쪽에 시원한 냉녹차까지 금상첨화였다.
다시 돌아가면서 1시간 30분에 걸쳐 녹차잎을 덖었다. 구슬땀을 흘리며 팔뚝을 데어가며 부지런히....대부분 대규모로 차덖음 작업이 이루어지기 때문에기계로 말리는 형편인데 옥천다원은 수제차로 손작업이 이루어진다. 수분없이 바싹 말리니까 솥안에서 설겅설겅 소리가 난다. 백호라하여 녹차잎에 붙어있는 하얀 솜털이 날리기도 한다.
녹차 생잎이 거듭나는 순간이다. 수많은 사람들의 땀방울이 모여 이렇게 잎차가 하나 탄생한 것이다.
돌아오는 차안에서는 다들 피곤하여 곯아떨어졌지만 난 또다시 밤이 주는 아름다운 우리 산하의 그림자를 보고 있었다. 저 산그림자를 넘어 난 다시 여행을 할 것이다. 수묵화가 문봉선의 '대지'가 어른거리고 있다.
첫댓글 역쉬....^^ 초인목 지기가 달라 ㅋㅋㅋ 언제 이런 글을 써 놨는지 예쁘기도 하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