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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문성공(文成公) 회헌(晦軒) 안향(安珦) 선조(先祖)
문성공 회헌 선조는 시조 호군공 휘(諱) 자미(子美)의 증손(曾孫)이며 정의대부(正議大夫) 밀직부사(密直副使) 판도판서(判圖判書)를 역임하신 태사공 부(孚)의 아드님으로서 처음 이름은 유(裕)였으나 후에 향(珦)으로 고치셨다.
그러나 조선시대 문종(文宗)의 어휘(御諱)를 피하여 처음 이름 유(裕)로 행용(行用)한 바 있었다. 시호(諡號)는 문성(文成)이며 호는 회헌(晦軒)이시다.
회헌(晦軒) 선조께서는 고려 고종(高宗) 30년 출생 즉 계묘년 (서기 1243년 출생 ~ 1306년 丙午年 9월 12일 作故를 하심 ※ 만으로는 63세이며, 우리나라의 나이로는 64세에 作故. 묘소는 경기도 장단부(지금은 장단군) 松林縣 大德山 口井里 子坐에 안장)에 흥주성(興州城) 남쪽 평리촌(坪里村) 학교(鶴橋) (학교 · 학다리) 옆의 사제(私第)에서 태어나셨다. 어려서부터 풍체와 기골이 남달리 뛰어났고 학문하기를 좋아했으며 성품이 어질고 지조가 바르고 청렴 강직하여 시와 성리학(性理學)을 좋아 하셨다.
원종(元宗) 원년(서기1260년)에 18세로 문과에 장원급제를 하시어 교서랑(校書郞)에 취임하셨다가 바로 한림원(翰林院)으로 옮겼으며 얼마후 감찰어사(監察御史)로 보직되어 청렴정직으로 칭송을 받았다.
당시 고관(考官 ㆍ 시험관)인 동지추밀(同知樞密) 유경(柳璥)이 말하기를 선생의 외모만 보아도 그가 품은 재주와 인격까지 알아 볼 수 있었다고 하며 특히 선생의 문장을 보고 감탄하여 말하기를 반드시 장차 대유(大儒)가 되시겠다고 예견했다.
원종 11년(서기1270년) 6월, 나이 28세 때 삼별초(三別抄)의 난을 당하여 한때 적에게 연금되었다가 얼마 안되어 돌아 오셨다. 삼별초란 원래 최우(崔瑀)가 고종(高宗)을 협박, 도읍을 강화로 옮기게 하고 국경을 마음대로 행할 때 나라에서는 도적이 들끓게 되자 이를 막기 위해 편성한 부대로서 좌우(左右) 장군으로 하여금 별초(別抄)를 편성케 하고 또 몽고에서 도망해 온 병사들을 모아 별도의 부대인 신의군(神義軍)을 조직하여 삼별초라 하였다.
그런데 삼별초의 난이란 원종이 강화에서 개성으로 환도(還都) 하면서 삼별초의 해산을 명하자 병사들이 갈 곳을 몰라 불안해 할 때 역적 배중손(裵仲孫)이 삼별초를 이끌고 반란을 일으키게 된 것을 말한다. 이들은 승화후(承化候) 온(溫)을 추대하여 많은 신하들을 포로로 연금시켰다.
이때 문성공게서도 연금되어 있었으나 적들은 평소 선생의 명망을 높이 평가해 왔던 바 온갖 회유와 협박으로 선생을 이용하려 하였지만 선생은 오히려 충신의 의(義)로 적을 설득하여 깨우치게 함으로써 적진에서 벗어나 조정으로 들어오셨기에 왕도 선생을 의롭다 하시며 가상히 여기셨다 한다.
충렬왕(忠烈王) 원년(서기 1275년 33세의 나이로 상주판관(尙州判官)에 부임하셨을 때 고을에서 신(神)을 빙자해서 백성을 현혹하게 하고 혹세무민(惑世誣民)하는 무당을 잡아 엄하게 다스리셨다. 그 이후부터는 요사한 무당이 근절되어 그 고을이 평온하게 되었다고 칭송이 자자했다 한다.
그 일화 한 토막을 소개하면 당시 합주(陜州)에서 온 세명의 무녀(巫女)들이 신(神)을 빙자하여 백성들을 현혹하면서 고을을 두루 다녔는데 그들이 이르는 곳마다 공중에서 사람의 소리가 들리는 듯하여 듣는 사람들은 앞을 다투어 제사를 올렸으며 나중에는 고을 수령까지도 제사를 올리게 되었다.
그러던 차에 무녀들이 상주(尙州)에 당도하자 선생은 그들을 매질한 후에 옥에 가두었다, 이에 무녀들이 신의 말을 가탁(假託)하여 화복설(禍福說)로 위험했을 때 고을 사람들은 모두 두려워했지만 선생은 조금도 위축됨이 없이 엄격히 다스렸다. 그 후 며칠이 지나자 무녀들이 스스로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빌기에 그때서야 훈계방면(訓戒放免) 하니 이로써 백성을 혼란케 하던 무당들을 근절시키게 되었다.
충렬왕(忠烈王) 3년 (서기 1277년)선생의 나이 35세 때 당시 원나라에서 일본을 정벌하기 위해 합포(合浦, 지금의 마산)에 병마지휘영(兵馬指揮營)을 설치하여 함정을 건조하고 군량을 거두어들이며 장정(壯丁)들을 징발(徵發)하였다.
이에 고을마다 백성들의 생활은 날로 궁핍해져서 그 원성이 높아지니 선생께서 상주(尙州)에서 봉직한 3년 동안 이에 대한 대책을 세워 잘 다스리니 민생이 회복되었고 내신들 또한 욕심을 내지 못하게 하였다. 그래서 정사를 밝게 하고 백성들을 평온하게 한 공적에 대해 표창하도록 안렴사(按廉使)가 왕에게 상소하여 마침네 판도사좌랑(版圖司佐郞)에 임명되시었다.
선생의 나이 36세 때인 충렬왕 4년 서기 1278년 국자사업(國子司業)으로 승진되셨다. 감찰어사로 있으면서 많은 해묵은 폐단을 바로 잡아 법의 기강을 바로 잡아 법의 기강을 굳혔다.
일찍이 문안공(文安公) 김양감(金良鑑)이 송나라에서 성묘도(聖廟圖)를 가지고 돌아왔는데 조정에서는 국자감(國子監)을 서부 태평관(太平館)에 세우고 봉안하였으며 이에 따라 국자사업(國子司業)을 두어 선생으로 하여금 이를 맡게 하였다.
그런데 왕이 불교를 숭상하여 만승회(萬僧會)를 도성안에 설치함으로써 학교가 더욱 퇴폐하게 되자 선생은 이를 통탄하여 그 유명한 제학관(題學宮) 시를 지어 슬퍼하시었다. 충렬왕 14년(서기 1288년) 선생의 나이 46세 때 정 3품의 좌부승지(左部承旨)로 옮겼는데 이때부터 선생은
내외의 시험을 관장함에 덕망이 높았으며 이단을 배척하고 정학(正學)의 올바른 학문을 높임으로써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어 윤선좌(尹宣佐) 등 33명을 뽑으셨다.
충렬왕 15년(서기 1289년) 선생의 나이 47세 때 원외랑(員外郞)에 계시다가 얼마 안 되어 좌우랑중(左右郞中)으로 승진되었으며 다시 고려 유학제거사(儒學提擧司)를 겸하시었다. 그 해 음 10월에는 왕과 공주, 세자의 원나라 행차에 선생이 수행하셨는데 만리장성을 지나면서 제만리성(題萬里城) 시를 짓기도 했다.
다음 해인 충렬왕 16년(서기 1290년)에 연경(燕京)에 계실 때 처음으로 주자서(朱子書)書)를 얻어 깊이 읽어보고 나서 이것이 바로 공맹(孔孟)의 정맥(正脈)임을 간파하고 드디어 손수 주자전서를 초(草)하는 동시에 공자와 주자의 진상(眞像)을 모사(摹寫)하여 주자전서와 더불어 같이 가지고 귀국함으로써 우리나라에 주자학이 처음으로 도입 전래되었으며 나중에 성리학(性理學)으로 발전하게 되는 기초가 마련되었던 것이다.
원나라에서 귀국해서는 부지밀직사사(副知密直司使)가 되었고 문의공 박항(朴恒)과 밀직공 김도(金(王+爪+臼)와 함께 연구시(聯鳩詩)를 지었는데 이 또한 유명한 시다. 충렬왕 20년(서기 1294년) 4월에 종(從) 2품인 동지밀직사사(同志密直司事)로서 동남도병마사(東南道兵馬使)에 제수되어 합포(合浦 : 지금의 마산)에 출진했다. 이때 선생의 나이 52세였다. 선생은 합포에 있으면서 군대를 온정으로 다스리며 백성들의 고통을 덜어 줌으로써 민생을 평안하게 만들었다.
그때 조정에서는 관리 선발을 중하게 여겨 선생을 과거시험관인 지공거(知貢擧)로 소환하였다. 이때 남긴 유명한 유시(遺詩)가 두 편이 있다. 하나는 선생이 합포에 계시면서 김해 감로사(甘露寺) 시이고, 또 하나는 지공거로 소환되어 오던 도중 경산(京山 : 지금의 성주)을 지나다가 지주(知州) 이진(李瑱)과 진사 이조년(李兆年)을 방문하여 지어준 부소과경산시(赴召過京山詩)가 그것이다.
그 해 10월(지공거)로서 윤안비(尹安庇) 등 33명을 뽑은 사실은 유명한 일이다. 그래서 그 다음해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에서 밀직사사(密直司事)로 승진되었다. 충렬왕 23년(서기 1297년)에는 선생이 기거하던 집 후원에 정사(精舍)를 지어 공자와 주자의상(7년 전에 원정에서 선생이 모사한 것임)을 봉안하고는 주의 공이 공자의 그것에 비길만 하니 공자를 배우고자 한다면 먼저 주자를 배워야 한다)고 하시며 아침 저녁으로 참배하고, 경모의 뜻을 붙였다. 그래서 결국에는 주자의 호인 회암(晦庵)을 따라 회헌(晦軒)이라 자호(自號)하신 것이다.
신재(愼齋) 주세붕(周世鵬)은 (선생의 지극한 이 마음은 성인의 도를 잇는 데 족하고 앞으로 배움의 길을 열어 주는 데도 족하고 백성들이 살아가는 길을 정하는 데도 족하고 만대의 태평성세를 이루는 데도 족하다) 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충렬왕 24년(서기 1298년) 선생은 집현전(集賢殿) 태학사(太學士)에 임명되었으며 그해 5월에 원나라에서 충렬왕으로 하여금 세자에게 왕위(王位)를 넘겨주게 함으로써 충선왕(忠宣王)이 즉위하였으나 공주의 참소(讒訴)로 인하여 그해 8월에 충렬왕이 다시 복위하게 되었고 충선왕은 원나라로 불려 갔었다.
이때 또 선생이 수행 하였는데 연경(燕京)에 계시면서 원나라 황제를 개탄하는 유명한 시 한편을 남기셨다. 그리고 또 원나라 조정에 입조(入朝) 했을 때 유명한 일화(逸話) 한 토막이 있다.
원의 황제가 충선왕을 급하게 불러 충선왕이 심히 두려워하고 있던 차에 원의 승상(丞相)이 나와서 말하기를 (신하로 수행한 사람 중에서 대표자가 나와 대답하라)고 하니 선생께서 들어가셨다. 승상이 왕을 대신하여 선생에게 (왕이 어찌하여 공주를 가까이 하지 않느냐?)고 묻자 선생의 대답이 규방(閨房)에서의 일은 본래 바깥사람이 알 바가 아닙니다.
이것을 가지고 물으니 어찌 대답할 수가 있겠습니까?)라고 했다. 이에 승상이 이 사실을 황제에게 아뢰니 황제는 (이 사람은 대체(大體)를 아는 사람이다. 어찌 먼 변방에 사는 사람으로 대할 수 있겠는가?) 하고 다시는 더 이상 언급하지 않았다 한다.
또 선생이 문묘(文廟)를 배알(拜謁)했을 때 학관(學官)이 있다가 (동국에도 성묘(聖廟)가 있느냐?) 고 묻자 선생은 (우리나라의 문물과 사전(祀典)이 한결같이 중국의 제도를 따랐으니 어찌 성조(聖朝)가 없으리오) 하고 대답했으며 또 성리학을 변론하는데 있어 주자의 학설과 합치되기에 학관들이 크게 칭찬하여 (동방의 주자로다)라고 하며 선생의 화상을 그려 가지고 갔다고 한다.
충렬왕 26년(서기 1300년) 선생께서 58세가 되던 해에 정 2품인 광정대부 찬성사(匡靖大夫 贊成事)에 승진하고 이어서 정1품의 공신인 벽상삼한 삼중대광(壁上三韓 三重大匡)과 지금의 국무총리격인 도첨의 중찬(都僉議 中贊) 수문전(修文殿) 태학사(太學士)의 벼슬을 받으셨다.
충렬왕 27년 2월에는 선생의 저택(邸宅)을 조정에 헌납하고 서부 양온동으로 이사했다. 그 이유는 원나라 학관 야율희일(耶律希逸)이 사신으로 우리나라에 와서 문묘를 배알(拜謁 : 높은 어른을 찾아뵘)하고자 했는데 그 당시 국자감(國子監)은 여러 차례 병화(兵火 : 전쟁으로 인한 화재)로 인해 겨우 두어칸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이에 예관(禮官)이 선생의 저택(邸宅 : 규모큰가 집) 후원에 있는 정사(精舍)를 문묘(文廟)라고 이야기하니 원의 사신은 반궁(泮宮)의 규모가 협소하고 그 제도 또한 잃어 버렸다고 지적하여 왕에게 반궁(泮宮 : 성균관과 문묘의 통칭)을 신축하기를 권하였다.
이로 인해 선생은 저택(邸宅)을 헌납하였고 이때 신축한 것이 바로 국자감이 신관으로서 개성의 성균관(成均館)이 되었다. 그리하여 학교를 부흥시키고 인재 양성을 위해 금전과 토지, 그리고 노비 백성을 국학에 바쳐 학도의 편의를 제공하였다.
충렬왕 29년(서기 1303년) 선생의 나이 61세 때에 모든 관리들로 하여금 6품 이상은 각각 은(銀) 한 근씩을 내게하고 7품이하는 베(布)를 내도록 하여 그것을 양현고(養賢庫) 기금으로 하였으며 또 박사 김문정(金文鼎)을 중국 강남(江南)으로 보내 공자 및 성인 72자의 초상을 봉안해 오게 하고 제기(祭器) 악기(樂器), 육경(六經, 역(易), 시(詩), 서(書), 춘추(春秋), 예(禮), 악(樂), 제자(諸子)의 사서(史書)와 주자신서(朱子新書)를 구입해 오게 하였다.
충렬왕 30년(서기 1304년) 5월에는 섬학전(贍學田)을 설치하였다. 이 섬학전은 여러 관리들에게 갹출(醵出)한 은과 포(布)로 마련한 양현고 기금을 박사관(博士官)으로 하여금 그 출납을 관장하게 한 것이다. 그해 5월에 대성전을 낙성하고 성상(聖像ㆍ孔子像)을 봉안하니 왕이 학관(學館)에 나아가 알성(謁聖 : 임금이 성균관 문묘의 공자 신위에 참배함)하게 되었다.
이에 선생께서는 경사교수도감사(經史敎授都監事) 및 교수들을 천거(薦擧)해 줌으로써 금내학관(禁內學官) 및 내시삼도감(內侍三到監), 오고(五庫), 칠관(七官) 십이도(十二徒)의 모든 유생들이 경서를 옆에 끼고 수백 명이 수업을 들으려고 모여 들었다.
이때 선생께서는 유국자제생문(諭國子諸生文)을 내려 유풍을 크게 진작시켰다. 선생은 젊었을 때부터 성리학을 좋아하여 의를 연구하고 자신을 수양하기에 의연함이 표리가 일치하고 장중안상(莊重安詳)하여 성(誠)과 경(敬)을 임무로 삼고 예법을 존중하니 모든 사람들이 존경하였다.
또 세속에서 불교만 숭상하고 선비들이 학문을 저버리는 것을 통탄하여 날마다 선생의 문하인 국재 권부(菊齋 權府), 역동 우탁(易東 禹倬), 동암 이진(東庵 李瑱), 매운당(梅雲堂) 이조년(李兆年), 이재 백이정(彝齋 白頤正), 덕재 신천(德齋 辛蕆) 등 여러 현안들과 정학(正學)을 창명(倡明 : 광대하게 밝히고)하고 의리를 강론하였다. 이들을 가리켜 육군자(六君子)라 하였다.
충렬왕 32년(서기 1306년) 병오(丙午) 9월 12일에 선생께서 돌아가시니 그 때의 춘추가 64세였다. 시호(諡號)가 문성(文成)이니 도덕박문(道德博聞)이 문(文)이요 안면입정(安民入正)이 성(成)이라 하였다. 왕이 특별히 장지(葬地)를 내리시고 묘산(墓山)을 환봉(環封 : 딴 곳으로 옮기려고 파해쳤던 무덤을 도로 묻음)했으며 묘전(墓田)을 내리셨다.
바로 그 곳이 장단부(長湍府) 송림현(松林縣) 대덕산(大德山) 구정리(口井里) 자좌(子坐)이다. 장사를 지내는 데도 7官 12從의 여러 유생들이 모두 소복을 입고 그 뒤를 따랐다 한다.
충숙왕 5년(서기1318년) 2월에는 왕명으로 선생의 영정을 그려 문묘(文廟)에 봉안하고 고향에서 제사를 드리게 하였다. 그리고 다음 해 충숙왕 6년 6월에는 위로는 조정백관에서부터 아래로는 유생들에 이르기까지 도를 일으키고, 학교를 설립하고, 인재를 양성한 선생의 공로를 기리어 공자 사당에 같이 모실 것을 청함에 따라 문묘에 종사(從祀)하였다.
선생의 위패(위패)는 성균관(成均館) 대성전(大聖殿)에 봉안하여 공부자석전제(孔夫子釋典祭)시에 같이 재향을 드린다. 성균관 대성전에는 정전(正殿)에 공자부(孔子夫)가 좌우에는 72자상이 봉안되어 있고 다음에 안자(顔子), 증자(曾子), 자사(子思), 맹자(孟子), 등 공문십철(公門十哲)과 송조(宋朝), 육현(六賢), 동국십팔현(東國十八賢)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 소수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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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또한 선생의 위패는 전술한 성균관 외에도 소수서원을 비롯한 전국의 여러 서원에 봉안되어 있다. 즉 송도(松都) 한천서원(寒泉書院), 재령(載寧) 문천서원(文泉書院), 진주(晋州)도통사(道統祠), 또 장단(長湍), 임강(臨江), 연기(燕岐), 합강(合江), 등의 각 서원과 철원(鐵原) 모성사 (慕聖祠), 곡성(谷城) 도동사(道東祠), 나주(羅州) 집성사(集成祠), 충주(忠州) 도통사(道統祠), 시흥(始興) 녹동서원(鹿洞書院), 장흥(長 興) 만수사(萬壽祠), 순흥 대룡산 백천 송성영당(白川 松城影堂) 등 14개 서원에 되어 왔으며 전국의 361개 향교(鄕校)에도 배향되었다.
이들이 서원과 향교에서는 매년 춘추(春秋)로 두 번씩 제향을 봉행하고 있다. 홍익인간의 국가 창업 정신에 바탕을 두고 유구한 역사를 이끌어온 우리 한민족의 맥박속에 살아있는 사상은 우리의 뿌리, 조상을 찾고 섬기는 윤리적 도덕적 질서이다.
이를 생각할 때 선생께서는 우리 동방에 일찍이 주자학을 도입하고 또한 제기, 악기, 경서 등을 도입하여 공자와 주자의 사상을 심어 줌으로써 새로운 윤리적 도덕적 질서를 확립하여 민족적 자각을 촉구하였다.
선생은 고려말과 조선조 500년에 걸친 국학 교육의 학풍이 있게 한 동방 성리학의 조종(祖宗)으로 추앙받아 마땅하다. 선생으로 인해 고려말의 삼은(三隱)이신 포은 정몽주, 목은 이색, 야은 길재 등을 비롯하여 조선시대에는 정암 조광조, 이퇴계, 이율곡 등의 학자로 학풍이 이어졌으며, 특히 불교문화에서 유교문화로 전환하게 되었다.
그리고 국민 도덕의 근간인 효제충신(孝悌忠臣)의 도를 확립하여 민족중흥을 위한 대의 철학으로 정신무장을 하게 하였다. 따라서 (육국자제생문)에 의해서 우리 덕목이 세속 五계의 忠, 孝, 信, 勇, 寬에서 孝, 忠, 禮, 信, 誠, 敬의 성리학적 덕목으로 바뀌었다. 이로써 한국에 신유학 철학을 최초로 확립하게 된 것이다.
이리하여 선생이 도입하신 주자학은 나라와 백성을 다스리는 통치 철학으로서 고려 중엽부터 조선시대에 걸쳐 장장 700년이 넘는 긴 세월 동안 국정의 대본을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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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단의 여백에는 第4世 文成公 安珦 선조와 관련된 유적, 서적, 등 관련된 수많은 자료 등을 조사되는 대로 또는 유익한 자료가 수집되는 대로 사진으로 올려 볼 생각입니다. 아직은 확보된 자료가 없어서 올려드리지 못함을 죄송스럽게 생각하오며 앞으로 종회원님들의 많은 협조에 힘입어 보다 알찬 내용이 되도록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안광용 올림>-
▶ 위의 본 내용을 바탕으로 하여 송곡종회원님 교양경시 대회 예상 시험문제가 이곳에서 많이 출제되오니 숙독(熟讀 : 익숙하도록 (자세히) 읽어 주시길 바랍니다.)하여 주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안광용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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