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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사벌국은 가야의 일원이었을까
조원영 | 합천박물관 학예사, 문화재 감정위원
경상남도 창녕지역은 현재까지 보고된 고분의 숫자가 경주 다음으로 많은 곳이다. 이곳에는 삼국 시대 고분군만 해도 교동 고분군과 송현동 고분군, 영산 고분군, 계성 고분군 등이 남아 있다. 이것만 보아도 한국 고대사에서 창녕이 차지하는 위치는 결코 가볍게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최근 창녕의 옛 지명을 두고 지역내에서 논란이 일어났다. 창녕이 원래 신라권이었는가 아니면 가야권이었는가에 대한 문제였다. 이 논의는 한국 고대사에 있어서 창녕의 정체성과 관련된 문제이기 때문에 신중한 검토가 필요하리라고 본다.
우선 문헌에 전하는 창녕 관련 기록을 살펴보자.
火王郡本比自火郡 一云比斯伐 眞興王十六年置州名下州 二十六年州廢 景德王改名今昌寧郡…
→ 화왕군은 본래 비자화군이다(비사벌이라고도 한다). 진흥왕 16년에 주를 설치하여 하주라 하였으며 26년 주를 폐했다. 경덕왕때 이름을 고쳤다. 지금의 창녕군이다.
(『삼국사기』권34 지리1 화왕군조)
十六年春正月 置完山州於比斯伐 二十六年九月 廢完山州 置大耶州…
→ 16년 춘정월 비사벌에 완산주를 설치하였다. 26년 9월 완산주를 폐하고 대야주를 설치하였다.
(『삼국사기』권4 신라본기 진흥왕조)
昌寧郡 本新羅比自火郡 一云比斯伐 眞興王十六年置下州 二十六年州廢 景德王改爲火王郡 太祖二十三年更今名
→ 창녕군은 본래 신라 비자화군이다(비사벌이라고도 한다). 진흥왕 16년에 하주를 두었다가 26년에 주를 폐했다. 경덕왕때에 화왕군으로 이름을 고쳤다. 태조 23년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고려사』권57 지리2)
東至密陽府界二十七里 南至靈山縣界十里 西至草溪郡界四十一里 北至玄風縣界二十九里 距京都七百十四里
→ 동쪽으로는 밀양부 경계에서 27리, 남쪽으로는 영산현 경계에서 십리, 서쪽으로는 초계군 경계에서 41리, 북쪽으로는 현풍현 경계에서 29리이며 경도로부터는 714리 떨어져 있다.
(『동국여지승람』창녕현조)
本新羅比自火郡一云比斯伐 眞興王十六年置下州二十一年罷 景德王改火旺郡 高麗太祖改今名…
→ 본래 신라 비자화군이다(비사벌이라고도 한다). 진흥왕 16년에 하주를 설치하였다가 21년 폐하였다. 경덕왕때 화왕군으로 고쳤으며 고려 태조때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동국여지승람』건치연혁조)
이러한 기록으로 미루어 보아 현재의 창녕이란 지명은 고려 태조 23년(940)에 처음 만들어졌다. 그리고 통일신라시대 경덕왕 16년(757) 이후 940년까지는 화왕군으로, 757년 이전에는 비자화군, 또는 비사벌로 불렸음을 알 수 있다. 군이 설치되기 이전 진흥왕이 이곳에 주를 설치하였다. 주를 설치한 것으로 보아 이 지역이 당시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면 신라에 복속되기 이전에 이 지역은 어떤 명칭으로 불렸을까? 기록에 따르면 ‘비사벌’로 불리어졌을 것이다. 비록 진흥왕이 설치하였던 주의 명칭은 『삼국사기』지리지에는 ‘하주’로, 『삼국사기』신라본기에는 ‘완산주’로 기록되어 있어 서로 다르지만 같은 해에 같은 지역이라는 것을 고려해 볼 때 주를 설치하였다는 사실과 신라에 의해 비자화군으로 편제되기 이전에는 비사벌로 불렸을 것이라는 점은 믿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이 기록들에서 창녕지역이 가야의 일원이었다는 근거는 없다. 그것은 안타깝게도 이 기록들이 모두 창녕이 신라에 편입되어 진흥왕 16년에 하주가 설치된 시점부터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 이전의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보니 창녕지역의 역사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얻기란 참 힘들다. 그렇지만 다음 기록을 주목해보자.
阿羅伽耶(今咸安) 古寧伽耶(今咸寧) 大伽耶(今高靈) 星山伽耶(今京山云碧珍) 小伽耶(今固城) 又本朝史略云 太祖天福五年庚子改五伽耶名 一金官(爲金海府) 二古寧(爲加利縣) 三非火(今昌寧恐高靈之訛) 餘二阿羅 星山(同前 星山或作碧珍伽耶)
→ 아라가야(지금의 함안) 고녕가야(지금의 함녕) 대가야(지금의 고령) 성산가야(지금의 경산 혹은 벽진) 소가야(지금의 고성)다. 또 본조사략에는 태조 천복 5년 경자년(940)에 5가야의 이름을 고쳤으니, 1은 금관(김해부가 되었다) 2는 고녕(가리현이 되었다) 3은 비화(지금의 창녕인데 아마 고령의 그릇된 것인 듯하다) 나머지 둘은 아라와 성산이라 했다(앞과 동일하다. 성산은 혹 벽진가야라고도 한다).
(『삼국유사』5가야조)
찬자인 일연스님의 부정적인 견해가 제시되어 있기는 하지만 『삼국유사』 이전의 기록인 『본조사략』에는 창녕지역을 비화가야라 하고 가야의 일원임을 알려 주고 있다. 이 기록대로라면 삼국시대에 창녕지역은 처음부터 신라권에 포함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신라에 복속되기 이전의 창녕을 나타내는 명칭을 알려주는 자료를 찾아보면 몇 가지가 더 있다. 「진흥왕순수비」에는 ‘비자벌(比子伐)’로, 일본 기록인 『일본서기』에는 ‘비자발(比自火本)’로, 중국의 기록인 『삼국지』위서 동이전 한조에는 ‘불사국(不斯國)’으로 기록되어 있다.
‘비(比)’ ‘불(不)’ ‘비(非)’ 등은 모두 ‘빛(光)’이라는 우리말을 한자화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화(火)’와 ‘벌(伐)’은 삼국시대 성(城), 촌(村), 읍(邑)을 의미하는 신라의 명칭이다. 우리말로는 들판의 의미를 가지는 벌, 들을 한자화한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비사벌’ ‘비자벌’ ‘비화’ 등의 표기는 ‘빛벌’이라는 순수 우리말을 한자화한 것이다. ‘사(斯)’ ‘자(子)’ ‘자(自)’ 등은 특별한 뜻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사이시옷을 뜻하는 글자라고 생각된다.
따라서 여러 기록들에 보이는 표기들 중에서 ‘빛벌’에 가장 가까운 표기가 『삼국사기』에 전하는 ‘비사벌’이라고 생각된다. 신라 말 고려 초에 형성된 개념인 ‘비화가야’보다는 ‘비사벌’이 당대의 명칭이라 할 수 있으며 신라에게 복속되기 전 창녕지역에는 ‘비사벌국’이 있었던 것이다.
앞에서 보았듯이 삼한시대 이 지역에는 변진 24국 가운데 한 나라인 불사국이 있었다. 기존 학계에서는 변진 24국 중 나라 이름 앞에 ‘변진’이 붙어 있는 국가들이 낙동강의 서쪽인 가야지역에 위치하는 점으로 보아 이들이 후에 가야가 되고 그 외의 국들은 진한으로서 뒤에 신라에 통합되었다는 선입관 때문에 불사국을 창녕지역에 존재했던 소국으로 보기를 꺼렸다. 즉 ‘변진’이 붙어 있지 않은 불사국은 가야세력으로 발전한 것으로 보기는 어렵기 때문에 가야제국의 한 나라가 확실히 존재했던 창녕지역을 불사국으로 볼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창녕지역에는 청동기시대 이래 조성된 다수의 지석묘가 분포하고 있으며, 석기, 토기 등의 많은 유물이 발견되었다. 지석묘 사회는 규모가 큰 국가체제의 앞단계로 이러한 지석묘 조성 세력이 없으면 그 지역의 국가 형성은 불가능한 것이다. 자하천 주변의 송현·말흘리 지석묘군, 계성천주변의 계성사리지석묘군, 장마면 유리지석묘군, 청도천 주변의 부곡면 온정리지석묘, 보림천 주변의 도천면 일리 지석묘, 영산면 신제리 지석묘 등이 분포하고 있는데 이러한 고고학적 증거와, 불사국과 비사벌의 음이 서로 유사한 것으로 보아 삼한시대 창녕지역에는 변진소국인 불사국이 존재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변·진한의 경우는 서로 잡거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야연맹이 형성될 때 변·진한을 구성했던 국가들이 서로 섞였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진한의 국가들 가운데는 경주를 중심으로 한 사로국 인근 국가들은 비교적 빠른 시기에 사로국에 통합되어 나갔다. 그러나 낙동강의 동쪽 지역에 있었다 하더라도 사로국 세력으로부터 거리가 비교적 멀 경우에는 사로국 세력에 통합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타소국에 비해 독자성을 지닌 지역이라면 신라에 통합되지 않고 독자적인 국가로 발전해 나갔을 것이다.
불사국은 사로국에 병합되지 않고 독자적으로 발전하여 가야의 한 국가로 성장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지역적으로 낙동강변에 위치하고 강 건너 합천, 고령, 함안쪽으로부터의 교통이 더 손쉬웠던 까닭에 낙동강 동쪽지역과의 교류가 활발하였으며 정치적으로도 밀접한 관계를 맺었을 것이다.
한편 비사벌국은 전략적 요충지로서의 지리적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즉 서쪽으로는 낙동강 건너 고령·합천을 남쪽으로는 영산·밀양·의령·함안 등 주변 가야제국을 쉽게 제압할 수 있는 요소에 위치해 있다. 따라서 자체 방어력이 없는 한 주위 강대국들의 세력 균형 하에서 존립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창녕지역이 당시에 전략적 요충지였음은 그 주변에 있는 삼국시대 이래 성(城)의 분포를 보아도 알 수 있다. 현재 창녕지역에 남아 있는 성터는 창녕읍 교동, 송현동고분 주변에 화왕산성, 목마산성이 있고, 계성면 사리, 계남리고분 주변에 신당산성, 계성토성이 있다.
또 영산면 동리, 죽사리고분 주변에는 영취산성이 있고, 성산면 연당리고분 주변에 왕령산성이 있다. 이러한 성들은 비사벌국이 쌓기도 했겠지만 이 지역에 진출했던 주위세력들에 의해 축조되기도 했을 것이다. 비사벌국이 독자적으로 축성하였다 하더라도 기술적인 측면에서는 주변국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예를 들면 산정식(山頂式) 산성인 화왕산성과 포곡식(包谷式) 산성인 목마산성은 각각 독립된 산성이 아니라 목마산성이 화왕산성 외성의 기능을 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즉 화왕산성은 외성으로서의 목마산성을 가진 복합식 산성인 것이다.
이러한 산성 형태는 백제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서 산성과 왕도(王都), 지배자층 분묘의 위치 등이 인근 가야지역의 다른 산성들의 위치 선정과도 매우 유사하다. 이것은 어느 시기 비사벌국을 포함하여 고령 가라국, 함안 안라국 등 낙동강 서쪽 가야제국들과 백제와의 정치적 관계를 알려주는 자료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창녕지역에 주변세력이 진출하는 최초의 기록은 『삼국사기』권1 파사이사금 29년(108) 5월조의 “군사를 보내어 비지국(比只國), 다벌국(多伐國), 초팔국(草八國)을 아울렀다”라는 것이다. 이 기록에서 비지국은 지금의 창녕, 다벌국은 현재의 합천, 초팔국은 현재의 초계로 비정하는데, 신라군이 이 지역을 공격한 내용이다.
기록의 내용은 차치하고라도 이 사건이 일어난 시기가 문제이다. 신라가 만약 108년에 창녕지역으로 진출했다면 그 경로는 경주-영천-경산-대구-현풍-창녕루트가 아니면 경주-경산-대구-청도-창녕루트, 또는 경주-청도-창녕루트를 생각해 볼 수 있다. 하지만 영천 골벌국은 236년에 신라에 병합되고, 청도 이서국은 297년에 신라의 수도까지 쳐들어가는 존재였다. 따라서 신라가 창녕을 병합한 시기는 아무리 빨라도 4세기대 이전은 아닐 것이다.
비사벌국이 멸망하게 된 것은 당시 한반도 남부를 둘러싼 각국 간의 관계 속에서 신라의 팽창에 따른 것이다. 따라서 비사벌국의 멸망 과정은 6세기 전반 한반도 남부를 중심으로 한 주변 각국의 정세 속에서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지증왕, 법흥왕을 거치면서 신라는 내부 역량을 축적하면서 고구려의 내란을 틈타 가야로 진출하기 시작하였으며, 한강유역에서 백제에 대한 힘의 우위를 확인한 뒤에는 낙동강 서쪽으로의 진출을 감행하였다. 백제는 4세기 중엽 이후 비록 정치적 상하 예속관계는 아닐지라도 비사벌국을 포함한 낙동강 서쪽 가야제국에 대해 기득권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백제와 신라의 각축 속에서 4세기 중엽 이후 친백제적이었던 비사벌국을 포함한 가야제국은 5세기 후반이 되면 고구려의 압력에 의한 신라와 백제의 힘의 공백을 틈타 백제 세력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노력을 보였다. 496년 신라에 흰 꿩을 보냈다든지 중국 남제에 가라국왕 하지가 사신을 보냈던 것은 이러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가야의 노력은 자주화가 아니라 오히려 신라에게 복속당하는 결과로 나타났다.
6세기 초까지 자주권을 유지하던 가야제국은 차츰 백제와 신라의 압력에 시달리게 되었고, 신라에 의한 남가라, 탁순, 탁기탄국의 멸망으로 낙동강 유역의 가야제국은 급격히 약화되기에 이르렀다. 결국 553년 백제의 한강유역을 점령한 신라가 대백제관계에서 우위를 점하면서 가야제국은 신라에 귀속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비사벌국이 언제 신라에 편입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555년(진흥왕 16)에 하주가 설치되었기 때문에 적어도 그 이전에 신라의 영역으로 흡수되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550년 중반 신라의 진출경로에 있어서 마치 부채살의 꼭지와 같은 교통상의 요충지였던 비사벌을 복속한 신라는 이곳을 군사적 전진기지로 삼았으며 561년에는 왕이 직접 이곳을 순수(巡狩)하고 진흥왕순수비를 세웠다. 그리고 그 다음 해에 고령 가라국을 멸망시켜 낙동강 유역을 모두 차지하게 되었다.
기록의 영세함으로 인하여 비사벌국의 발전과정과 멸망의 모습을 당시의 정세와 지리적 조건 등의 외적 조건에 의존하여 추론할 수밖에 없는 점은 안타까운 일이다. 그렇지만 창녕지역의 고고학적 흔적은 그 당시의 다양한 역사적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창녕지역에서는 가야지역에서 흔치 않은 명문(銘文)이 있는 유물이 발견되었다. 창녕 교동11호분에서 출토된 상감대도(象嵌大刀)에는 몇 자의 명문이 새겨져 있었다. 이 칼은 일제시대인 1919년 발굴한 고분에서 출토된 것으로 현재 국립김해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오랫동안 보고가 되지 않고 발굴 당시 넣어 두었던 보관상자에 담긴 채 오랫동안 방치되었다가 1980년대에 박물관에 전시되면서 알려지게 되었다.
이 칼은 오랜시간 동안 흙속에 묻혀 있었고 또 조사 후에도 보존처리가 되지 않은 상태로 보관되었기 때문에 전체의 모양과 길이를 정확하게 알 수 없을 정도로 여러 편으로 부서져 있었다.
문자는 칼끝에서 손잡이쪽으로 향해 칼 등에 금실로 상감되어 있는데, 현재 남아 있는 글자는 모두 7자로 “상부선인귀○도(上部先人貴○刀)”이다. 상태가 좋지 않아 이 7자의 문자가 전부인지 아닌지는 불확실하지만, 다른 지역의 출토예로 보면 문자가 더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남아 있는 명문의 내용은 부의 이름, 관등 명칭, 사람이름(또는 길상구)으로 되어 있다.
‘선인(先人=仙人)’이 고구려의 제13관등으로 해석되므로 칼의 제작지는 고구려일 가능성이 크다. 이 칼과 관련된 인물의 소속부 명칭인 상부는 5세기에 고구려가 이미 사용하고 있었으므로 이 칼은 고구려인으로서 상부 출신인 선인의 관등을 가진 기술자가 만든 칼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5세기 초에 신라가 고구려의 부용세력이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이 칼은 교동11호분의 주인공이 생존시에 신라와의 교류에서 획득한 제품이 아닌가 하는 가능성을 상정할 수 있다.
한편 1976년 창녕 계성고분군에서 ‘대간(大干)’, ‘건(巾)’, ‘말(末)’ 등의 명문을 가진 토기가 다수 출토되었는데, 그 중 특히 ‘대간’이라는 명문은 큰 주목을 받았다. 한꺼번에 이처럼 많은 토기명문이 고분에서 출토되기는 거의 처음 있는 일로서 토기 명문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었다. 그 후 동일한 지역에서 부산대학교 박물관이 추가로 조사하는 과정에서 다시 몇 점 더 발굴되어 ‘대간’명 토기는 모두 15점이 출토되었다.
‘대간’이란 명칭에 대해서는 창녕의 계성지역 재지세력이 신라에 의해 병합되기 이전부터 칭하였던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고, 신라 외위(外位)의 제6등급인 상간(上干)의 다른 명칭으로 보기도 하며, 계성지역 촌주의 칭호로 보기도 한다. 이 명문토기는 대부분 6세기 중엽 이후 7세기 초에 축조되었던 중·소형분에서 출토되며 묘제는 횡구식석실분이 주류를 이루지만 옹관에도 새겨진 예가 있다. 시기적으로 보면 이 지역이 신라에 복속된 이후이다.
일반적으로 ‘간(干)’은 재지 수장을 지칭하는 것이라고 본다면 왜 하필 대형분보다도 중·소형분에 이 토기들이 매납되어 있을까? 또 이 명칭이 신라의 외위 명칭이라면 왜 다른 지역에서는 보이지 않는가? 이와 같이 여전히 의문점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어쨌든 당시 창녕지역의 사정을 알려주는 중요한 유물로써 앞으로의 다각적인 연구 검토가 필요하리라고 본다.
창녕지역의 고분유적을 살펴 보면 대체로 현재의 중부내륙고속도로 좌우의 완만한 구릉에 위치하고 있으며 중심 고분은 창녕읍 교동·송현동고분군과 계성고분군이다. 이외의 고분군은 모두 중·소형묘로 이루어진 중심지 외곽의 주변 고분군으로 파악할 수 있다.
계성고분군은 계성면 소재지 남쪽 계성천을 낀 영가산에서 서북으로 뻗은 지맥의 기슭인 계남리(桂南里)와 사리(舍里)의 구릉위에 분포해 있으며, 이곳 계남리와 사리일대의 고분군을 총칭하여 계성고분군이라 부르고 있다.
이 고분군에 대한 조사는 1967년 문화재관리국 주관으로 시굴한 적이 있으며 1968년, 1969년 2차에 걸쳐 영남대학교 박물관이 조사하였고, 1976년 구마고속도로 건설공사, 1994년과 1998년 구마고속도로 및 국도5호선 확장공사로 인하여 각각 부산대학교 박물관, 경남고고학연구소, 호암미술관 조사팀에 의한 긴급구제발굴이 실시되었다.
영남대학교 박물관에서 조사한 것은 계남리의 횡혈식석실분이었으며 출토된 유물은 고배, 유대장경호 등의 토기류와 철제의 무기류, 농공구류 등과 금·은제의 장신구로 이 지역 고분의 성격을 파악할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1976년 조사된 고분군은 대부분 사리지역 고분이며, 이후의 발굴조사도 이 지역에서 이루어졌다. 조사 결과 유구는 수혈식석곽묘, 횡구식석실분, 옹관묘가 혼재하고 있었으며, 부장품은 토기류, 말갖춤, 장신구류 등이 출토되었다. 특히 구릉정상부와 사면에 축조된 삼국시대 무덤들은 대부분 횡구식석실분인데, 출토된 토기가 대부분 신라토기인 것으로 보아 이 무덤의 축조시기는 삼국시대 말에서 통일신라시대에 걸쳐서 이루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사적 제80호로 지정된 교동고분군은 창녕읍 교리에 위치하고 송현동고분군과는 서로 연결된 대형고분군으로 계성고분군과 함께 창녕지역에서 대형분이 가장 많고 규모가 큰 고분군이다. 90여기의 중대형 봉토분과 소형묘로 이루어졌고, 4개의 구릉에 걸쳐 고분이 군집을 이루고 있다. 1918년 교동과 송현동의 일부 고분들이 발굴되어 많은 양의 유물들이 출토되었다고 하지만 보고서도 나오지 않았고 발굴유물의 대부분은 일본으로 옮겨가고 일부만 국내에 남아 있다. 일본으로 옮겨간 유물의 대부분은 현재 국립동경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당시의 발굴조사에 따르면 대형고분들은 횡구식 또는 횡혈식석실분이었으며, 유물은 금동관을 비롯하여 금제귀걸이 등 각종 장신구와 청동, 철제의 무기류, 토기 등이 다량 출토되었다고 한다.
한편 창녕군 교동 고분군 복원정비 계획에 따라 1993년 동아대학교 박물관에 의해 목마산 기슭의 고분군 중 5기가 발굴조사되었다. 발굴 결과에 따르면 이 무덤들은 모두 횡구식석실로 봉토는 작업구역을 분할하여 유사판축(類似版築)하면서 주변에 호석(護石)을 둘렀고 호석 바깥에는 판축시 사용된 주혈(柱穴)이 있다. 주혈 2~4개가 직선의 형태를 보이는 것은 고분의 평면이 원이 아니고 다각형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고, 이것은 분할되어 나타나는 작업구간과도 일치하고 있어서 주혈이 봉토를 만드는 과정과 관계가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석실의 내부는 모두 횡구식으로 1·2·3호분은 입구에 묘도(墓道)가 달린 것이며 특히 3호분의 묘도는 610㎝나 된다. 석실은 완만한 경사면에 축조되고 반지하식(半地下式)과 지하식으로 나눌 수 있으며 반지하식이 앞서 만들어진 것이다.
3호분은 구덩이내에 목곽의 기둥을 먼저 설치하고 그 사이에 석축을 하는 수법을 사용하였는데, 나머지 고분은 목곽의 흔적 없이 입구쪽 벽면을 제외한 세 벽면을 먼저 쌓고 입구 쪽 벽은 윗부분을 열었다가 마지막에 폐쇄하였다. 상면(床面)의 경우 3호분은 일부 공간을 남기고 전면에 상석(床石)을 깔았으나 1·4·5호분은 중앙에 볼록한 관대(棺臺)를 두고 양측 공간을 부장공간으로 사용하였다. 이것은 양산 부부총을 비롯한 신라지역 횡구식고분에서 많이 보이는 예이다. 그리고 이곳에서는 추가장(追加葬)의 흔적을 1호와 4호에서 확인하였으며, 1호분에서 3명, 3호분에서는 2명의 순장자가 묘도와 석실 내부에서 확인되었다.
출토유물은 토기류와 은제새날개모양꾸미개·목걸이·금제귀걸이·은제과대 등의 장신구, 대도·손칼·쇠창·화살통·화살촉 등의 무기류, 쇠로 만든 보습·낫·도끼 등의 농공구류, 등자·행엽·재갈·말방울 등의 말갖춤이 출토되었다.
이 고분들은 5세기 전반에서 후반에 걸쳐 축조된 것이며 고분의 규모와 출토유물의 특징을 살펴보면 이 무덤의 주인공은 창녕지방 토착세력 중에서 우두머리에 해당되고 신라와는 밀접한 관련을 가진 자였다고 판단된다. 이로 미루어 보면 창녕은 최소한 5세기대에 들어서면서 신라문화권 또는 신라영역권내에 포함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사적 제81호로 지정되어 있는 송현동 고분군은 크게 2개 지역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1군은 창녕의 동북쪽 목마산 기슭에서 서쪽으로 송현동 일대에 위치하며 그 일부는 도야리로 통하는 도로를 넘어 교동지역에까지 넓게 분포되어 있다. 원래는 80여기 정도의 큰 고분군이었으나 현존하는 것은 16기에 불과하다. 2군은 송현동 석불이 있는 부근에 20여기가 있으며 대부분 논으로 개간되어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몇 기 되지 않는다. 이 유적은 교동 고분군과 인접하고 있어 유구나 유물의 성격이 거의 같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1918년 교동 고분군과 함께 발굴된 89·91호분의 보고서가 나오지 않아 이를 확인할 수는 없다.
이 고분군은 교동고분군과 마찬가지로 일제시대에 대부분 도굴되었거나 주변이 경작지로 변해 성격 파악이 어렵다. 1918년 엄청난 양의 유물에 대한 도굴행위를 시작으로 권력과 결탁한 도굴행위가 대낮에도 공공연하게 행하여졌으며 도굴한 유물의 대부분은 상인의 손을 거쳐 일본으로 유출되었다.
한편 2004년 4월부터 2006년 3월에 걸쳐 국립창원문화재연구소에 의해 송현동고분군 가운데 쌍분을 이루고 있는 6·7호분이 발굴조사되었다. 이 무덤은 오래 전에 도굴되어 많은 중요 유물이 사라졌지만 발굴조사 결과 석실에서 국내 최초로 ‘구유형’ 목관이 확인된 것을 비롯해 그 주변으로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구유형 목관은 길이 3.4m 폭 1.2m이며, 높이는 40cm 가량으로 측정되었다. 목관 단면은 초승달과 같은 형태를 띠고 있고 최대 두께는 8cm 정도였다. 형태는 통나무를 절반으로 가른 다음 그 속을 파내고, 두 측면에 별도의 반원형 마구리 목재를 부착한 구유형으로 드러났다.
목관 동쪽에서는 토기류와 칠기류 및 청동방울 등이 나왔으며, 서쪽에서는 안장틀과 칠기류 등이 나뭇잎과 갈대 등의 유기물에 덮인 채 출토되었다. 석실 입구에는 장경호, 단경호, 뚜껑, 굽다리접시를 비롯한 제사용 토기 등과 함께 이곳에 묻힌 사람의 것으로 생각되는 인골 일부가 발견되었으며, 석실 안쪽에도 2명의 남자와 1명의 여자 등 3명의 인골 자료가 확인되었다.
현재까지 조사 결과 출토 유물 중 토기류는 대부분 신라토기 양식을 보이고 있으나, 뚜껑의 경우 기존 창녕식 토기 양식이 남아 있어 이 고분의 축조연대는 5세기 말~6 세기 초반 무렵으로 생각된다. 출토유물이나 무덤 형식 등으로 미루어 보면 신라 문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던 시기의 비사벌국의 수장층 무덤으로 추정할 수 있다.
지금까지의 창녕지역 발굴조사 및 지표조사에서 확인된 유물을 분석한 결과 5세기 1/4분기까지는 토기문화의 경우 다른 지역과 뚜렷하게 구별되지 않았다. 그러나 5세기 2/4분기가 되면 창녕지역의 특징적인 창녕형 토기문화가 성립되었다. 창녕형 토기문화가 성립되었다는 것은 이 시기를 전후해서 창녕지역에 기반을 둔 비사벌국이 국가체의 성격을 분명히 하였음을 의미한다.
5세기 3/4분기가 되면 창녕형 토기의 정형화가 이루어지고 이와 더불어 묘제의 구조도 수혈식석곽묘가 주류를 이루었으며 거대한 원형봉토가 만들어졌다. 그리고 금속제의 장신구류와 마구류가 출토되는데, 이런 유물은 경주에서 제작되어 창녕지역에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 또한 창녕형 토기가 김해, 부산 등 주변지역으로도 확산되었는데, 그것은 가야제국내의 교류로 볼 수 있다. 이 시기는 비사벌국이 가장 발전하는 시기이면서 한편으로는 신라의 영향력이 서서히 미치는 시기라고도 할 수 있다.
5세기 4/4분기가 되면 창녕지역의 중심 고분군이 계성 계남리고분군에서 교동고분군으로 옮겨지면서 계남리고분군 세력은 서서히 약화되어 갔다. 그리고 수혈식석곽의 구조에 고구려 횡혈식석실분의 매장방법이 결합된 횡구식석실분이 등장하였다. 이 시기 창녕형토기가 김해, 부산, 합천, 경주 등지로 확산되는 등 토기문화가 가장 발전하지만 한편으로 고배의 굽다리와 구연부의 형태, 문양 등에서 신라토기의 요소가 많이 나타난다.
6세기 1/4분기가 되면 신라토기의 요소가 현저하게 증가되면서 토기의 신라화 현상이 두드러지고, 각종의 금속제 유물이 다량으로 부장되는 등 창녕형 토기문화가 소멸되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창녕형 토기문화의 소멸은 비사벌국의 해체와도 궤를 같이 한다고 할 수 있다.
6세기 2/4분기가 되면 창녕형 토기문화가 완전히 사라지고 신라토기로 통일된다. 그것을 가장 잘 나타내는 고분군이 계성면 사리고분군이다. 사리고분군은 100여기 이상의 고분이 조사되었으나 창녕형토기는 1점도 출토되지 않았다.
이것은 이 시기를 기점으로 비사벌국이 완전히 해체되고 신라 영토화되었다는 사실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묘제도 대消老¸ 할 것 없이 모두 횡구식석실분으로 바뀌고, 추가장(追加葬)이 이루어지면서 매장관념에도 변화가 나타나게 되었다.
부족한 문헌자료에 비하여 창녕지역의 고고학적 자료는 비교적 풍부하며 삼국시대 창녕지역의 정치 문화적 성격을 어느 정도 밝혀 주고 있다. 비록 전략적 요충지라는 지리적 특징으로 인하여 신라의 영향력이 인근 가야제국에 비하여 빨리 침투하긴 했지만 창녕지역이 5세기 중반 무렵까지는 비사벌국이라는 가야의 한 국가였다는 점은 명확하다.
이제 창녕이 삼국시대에 신라였는가 가야였는가 하는 지역내의 논란은 접어두고 창녕지역의 진면목을 재검토해야 할 시점이 아닌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