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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 자료방 스크랩 토양 속의 생물(生物)
꿈시 추천 0 조회 81 09.01.05 00:2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토양 속의 생물(生物)


 산(山)을 오르는 늙은 스님의 발걸음이 너무도 조심스러워 그 이유를 물어보았더니 "지하(地下)의 미물(微物)도 생물인데, 무고(無故)한 살생(殺生)을 피하기 위해서"라고 대답(對答)하였다고 한다. 신발 밑에 깔려 혹시나 토양 속에 살고 있을 생물이 다칠까 염려(念慮)하는 불심(佛心)때문이다.
늙은 스님의 말처럼 땅 밑에도 생물(生物)이 있는가? 이 질문에 우리는 상식적으로 '지렁이'나 '지네'를 생각하면서 "있지"라고 자신(自信) 있게 대답할 것이다. 과연 그렇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하는 것 보다는 훨씬 더 많고 다양한 생물들이 토양 속에서 그들의 세계(世界)를 즐기며 살아가고 있다.
토양은 그 부피의 절반 정도가 딱딱한 고체(固體) 덩어리로 되어 있으나, 나머지 절반은 비어 있는 공간(空間)이라고 수 차례에 걸쳐 설명하였다. 이 공간이 바로 지하(地下)의 생물들이 살아가고 있는 삶의 터전이다. 공간의 벽면(壁面)을 장식(裝飾)하는 고체 덩어리인 '젤리' 상태(狀態)의 유기물(有機物)은 토양 생물이 먹고 사는 식량(食糧)이 된다.
이와 같이 사방(四方)으로 둘러 쌓인 충분한 양식(糧食)이 있고, 축축한 공기와 온화(溫和)한 기온이 두루 갖추어져 있는 토양 속에는 지상(地上)에서 처럼 위태롭거나 해로운 공해(公害)마저 없으니, 토양 생물이 살아가기에 안성맞춤의 환경(環境)이라 아니 할 수 없다.
그런 까닭인지 지하의 생물은 지상(地上)의 생물 보다 그 종(種)과 숫자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다양하고 풍부하다. 다만 인간의 기준(基準)으로 한가지 아쉬운 것은 태양 광선(太陽光線)이 없다는 점이다.
그러나 생명(生命)의 유지(維持)가 가능한 곳이면 어디든지 생명(生命)이 발생(發生)할 수 있다는 것도 '머피의 법칙'에 해당하는지, 토양 중에 생존(生存)하고 있는 생물(生物)은 햇빛이 없어도 그들이 살아가기 위한 활동(活動)에는 아무런 방해(妨害)를 받지 않는 종류(種類)들이다. 그 보다 이들의 대부분은 오히려 햇빛에 노출(露出)되면 사멸(死滅)하는 존재(存在)들이라고 할수 있다.
땅 속이라고 하면 우리는 곧 죽음을 생각한다. 깜깜한 어둠만이 도사리고 있는 땅 속! 그러나 그 땅 속에 아니 토양 속에는 수많은 종류(種類)의 생물들이 소리없이 움직이며 생(生)의 열락(悅樂)을 가꾸고 있다는 것을 생각할 때, 토양은 바로 이러한 생물들의 배양기(培養器)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토양 생물의 대부분은 식물(植物)이다. 그러나 움직이며 살아가는 무리들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토양에 들어오는 유기물을 분해하는 데에는 이러한 움직이는 생물의 작용을 또한 무시할 수 없다.
현미경(顯微鏡)을 이용하지 않고 그냥 맨눈으로도 볼 수 있는 것 중에서 두더지, 개미, 지렁이 같은 것은 비교적 큰 동물에 해당하며, 이들 크기의 백만분의 일 정도 밖에 되지 않는 응애 같은 종류는 아주 작은 동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응애는 육안(肉眼)으로 볼 수 있는 가장 작은 토양 동물이지만, 이것은 토양 동물 중에서 가장 작은 원생동물(原生動物)에 비교하면 백배 이상이나 크다. 그러나 이 원생동물도 현미경학적(顯微鏡學的)인 크기의 '박테리아'나 '바이러스'와 비교해 본다면 엄청나게 큰 존재(存在)이다.
토양 생물은 크기와 종류 뿐만 아니라 숫자상으로도 놀랄 만큼 대단한 양(量)이라는 점을 밝혀두지 않을 수 없다. 흙 한줌에 토양 생물이 수억(數億) 마리가 들어 있다고 한다면 모두가 잘 믿으려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김없는 사실이다.
한 숫가락 정도의 온대(溫帶) 지방의 흙 속에는 1억 마리의 '박테리아', 2천만 마리의 방선균(放線菌), 1백만의 원생동물(原生動物), 20만의 조류(藻類)나 균류(菌類)들이 맹렬히 활동하고 있다.
약 백만(百萬) 종(種)에 달하는 곤충(昆蟲) 중에서 95% 정도는 그들의 생애(生涯) 중에 일정 기간을 토양 속에서 생활한다. 그러므로 1천평(坪)의 토지(土地)에는 곤충의 알, 유충(幼蟲), 성충(成蟲)이 적어도 5억개 정도가 들어 있다. 응애 한 부류(部類)만 하여도 10억 마리 이상이 들어 있는 것이 보통이다.
이와 같이 토양 중에는 이상한 모양을 하거나 섬세한 형태(形態)를 가진 생물들이 살아가면서 지상(地上)에서 처럼 「먹고」「먹히는」작은 고리를 이루어「먹이 사슬」에 연결(連結)된다. 이 작은 고리가「먹이 사슬」의 어느 위치(位置)에 해당하는 가는 토양 생물 간의 경쟁(競爭)에 의해 결정되겠지만, 이러한 경쟁(競爭)은 지상에서 처럼 격렬(激烈)하지는 않은 것 같다.
그러나 격렬한 투쟁(鬪爭)이 없어도 토양은 자신의 품속에 찾아든 토양 생물의 수(數)와 종류(種類)를 자연의 섭리(攝理)에 따라 조용하게 조절(調節)한다. 그러므로 토양은 어떤 특정(特定) 종류의 생물만이 급격하게 번성(繁盛)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억제(抑制)한다. 그런 의미에서 토양은 지극히 보수적(保守的)이다.
토양 속에서 생물이 산다는 것은 그 자체(自體)의 수(數)를 일정한 범위(範圍)로 유지하는 것을 의미하며, 이것은 지상 생물과도 크게 다르지 않은 현상(現象)이다. 어떤 종(種)이 좋은 환경(環境)을 맞으면 빨리 증식(增殖)한다. 그러나 그 증식(增殖)으로 숫자가 너무 불어나면 오히려 그들의 생활 환경(生活環境)이 나쁘게 변질(變質)됨으로 저절로 그들의 수가 감소(減少)하게 된다. 그래서 다시금 살아가기 좋은 환경(環境)이 되돌아 오게된다. 그러므로 토양 생물들은 생활 환경이 나빠지더라도 금방 더 좋은 환경을 찾아 떠나는 것이 아니고 다시 활동(活動)을 시작할 때를 기다리며 인고(忍苦)할 줄 알고 있다. 
이처럼 토양의 적절한 통제(統制)하에 그들 나름대로의 질서(秩序)를 지키며 살아가는 토양 생물들. 옛날의 어진 우리 어머니(慈堂)들은 비록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지하에 살고 있는 미물(微物)들 마저 해치지 않으려고 국수 삶은 뜨거운 물을 함부로 토양에다 버리지 않았다. 우리는 이와 같이 작은 행동(行動)에서도 큰 진리(眞理)를 배울 수 있다.
시골 아낙의 어진 행동을 거울 삼는다면 오늘날 우리가 토양을 대하는 태도(態度)는 마땅히 고쳐지고, 토양을 괴롭히는 행동을 자중(自重)하여 결코 토양을 오염까지는 시키지 않을 것이다.

개간(開墾)의 역군(役軍)-지렁이
 토양 속에는 수많은 동물들이 살고 있지만 그중 대표라 할만큼 우리 주위에서 흔히 볼수 있었던 것이 지렁이다.
비가 갠 뒤면 흰 띠를 총총 두른 빨간 지렁이가 마당을 이리저리 기어다닌다.이럴때면 부엌에 있는 소금을 들고 나와 지렁이의 몸에 뿌리고 노란 피를 흘리며 결사적으로 꿈틀 꿈틀 몸부림치던 지렁이를 지켜보던 악동(惡童) 시절의 추억을 50대의 초노(初老)라면 누구나가 가지고 있을 것이다. 지렁이를 보기만 하면 비명(悲鳴)을 질러대던 여자 애들의 짜릿하던 소리하며….
그러면 그렇게 징그러운 지렁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과연 어디 있는가? 지렁이는 우리와 가장 가까이 살고 있으나 그들에 대해 너무 모르고 지낸다.
우리가 징그럽게 여기는 것과는 달리 지렁이는 토양을 비옥(肥沃)하게 하는 일등공신(一等功臣)이며, 토양을 개간(開墾)하는 훌륭한 역군(役軍)이다. 또한 토양은 물론 환경의 오염(汚染)을 알려주는 전령(傳令)이라 할 만큼 지상(地上)의 어느 생물보다 오염에 민감(敏感)한 동물이다.
산성비(酸性雨)를 비롯한 각종 독물(毒物)로 오염된 토양에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던지 지렁이가 우리 주위에서 차츰 자취를 감추어 가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토양이 병들어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렁이는 산성비에 오염된 산성(酸性) 토양만을 싫어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침엽수림(針葉樹林)의 산성 토양에서도 살기를 거부(拒否)한다. 여기에 얽힌 재미나는 얘기가 있다.
영국의 어느 잔디 '테니스'장(場)에 비가 내린 다음 지워진 경계(境界)를 구획(區劃)지우려고 석회(石灰)로 백색선(白色線)을 그렸다. 그러나 그 이튿날 아침 백색선(白色線)은 또 대부분 사라지고 선(線)이 그려져 있었던 자리의 토양이 부풀어 올라 있었다. 찬찬히 조사(調査)해 보았더니 그곳 '테니스 코트'의 토양은 산성(酸性)을 띠고 있어 지렁이가 살기에는 적당하지 못한 환경이었다.
그러나 석회(石灰)로 선(線)을 그은 그 자리의 토양은 산성이 중화(中和)되어 지렁이에겐 살기 좋은 환경(環境)으로 바뀌어졌기 때문에 주변(周邊)에 있던 지렁이가 모두 백색선 밑으로 모여들었다. 이번에는 선(線) 아래에 모여 있는 지렁이를 잡아먹기 위해 두더지가 땅굴을 파고 들어갔기 ?문에 석회로 그린 선을 따라 토양이 부풀어 올랐었던 것이다.
이처럼 지렁이는 온대(溫帶)의 낙엽수림(落葉樹林)이나 초원(草原)등 살아 있는 토양에는 어디든지 생존(生存)하며, 자신(自身)이 살고 있는 토양을 갈아 엎어 비옥(肥沃)하게 한다. 그보다 지상(地上)의 모든 경작토(耕作土)는 한 번이상 지렁이의 몸을 통과(通過)해서 새로 생겨났다고 해도 과언(過言)이 아니다.
지렁이는 '라틴어'로 '바퀴(輪)'를 의미하는 '아네리다'(환형동물문(環形動物門))에 속한다. 지금까지 약 1천 8백종(種)이 알려져 있으며, 가장 작은 것은 2.5cm 정도이나 '오스트랠리아'에는 길이 3m 몸둘레 7.5cm의 약 1Kg이나 되는 거대한 지렁이도 있다. 우리에게 친숙한 빨간색 지렁이는 백개 이상의 마디를 갖고 있으며 각 마디에 짧은 털이 나 있어 이것들이 발의 역할을 하여 움직인다.
지렁이의 몸뚱이를 반으로 잘라버리면 두마리가 되는 것처럼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몸의 일부가 떨어져 나가면 머리 쪽보다 꼬리 쪽이 쉽게 재생(再生)하지만 두 마리가 되는 것은 아니다.
번식(繁殖)을 하기 위하여 난자(卵子)와 정자(精子)를 모두 만드는 암수 동체(同體)이지만 혼자서는 수정(受精)할 수 없고, 두 마리가 정자(精子)를 서로 교환(交換)하여 두 마리가 따로따로 자손(子孫)을 갖는다. 그들은 보라색 쌀알같은 알집을 만들고 여기서 부화(孵化)된 새끼는 노란색을 띠지만, 흙을 먹으면 흙 속의 산화철(酸化鐵)을 흡수(吸收)하여 곧 빨간색으로 변한다.
먹이로는 주로 썩어가는 식물체(植物體)를 먹는데 하루에 자신의 체중(體重)만큼 먹어치우는 대식가(大食家)이다. 특히 좋아하는 먹이는 우마(牛馬)의 분뇨(糞尿)이며, 때로는 육류(肉類)나 지방(脂肪)까지 먹기도 하며, 죽은 동료의 시체(屍體)마저도 먹어 치운다. 지렁이는 식물체를 먹기 전에 석회(石灰)가 섞인 알칼리성 침을 발라 '예비소화(豫備消化)'를 시켜서 먹는 독특한 식사를 한다.
 자신의 체중(體重)보다 50배나 무거운 흙덩이나 돌을 밀치고, 일부(一部)는 먹어가며 전진(前進)하여 굴을 만든다. 이때 삼킨 토양은 지렁이의 소화관(消化管)에서 더 잘게 부서지고 소화액(消化液)이 섞여서 일부는 소화되나 대부분은 굴 밖에 똥으로 내다버리거나 토양 틈사이에 배설(排泄)한다. 이런 배설물에는 식물 영양분이 풍부하게 들어 있기 때문에 이것이 쌓이면 기름진 표토(表土)가 된다.
지렁이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는 땅은 초지(草地)이다. 초원(草原)에 살고 있는 지렁이의 총무게는 그곳 지상(地上)에서 풀을 먹고 자라는 가축(家畜)의 총무게와 비슷할 정도로 '에이커'당 1백만마리 이상이 살고 있는 곳도 드물지 않다. 또한 지렁이가 다니는 통로(通路)는 초지(草地)의 배수로(排水路)나 공기가 통하는 통기구(通氣口)가 되며 식물뿌리가 뻗어나가는 길이 된다.
지구상에 살고 있는 조류(鳥類)의 대부분이 지렁이를 먹고 살아간다로 할만큼 지렁이는 조류(鳥類)와 포유동물(哺乳動物)의 주된 먹이가 되기도 하지만 그보다 식물에는 더욱 큰 은혜(恩惠)를 베푼다.
지렁이가 많이 사는 토양은 채질한 것처럼 보드라운 표토(表土)로 되어 있는데, 이것은 지렁이의 배설물(排泄物) 덕이다. 이런 배설물은 유기물이 풍부하고 입단화(粒團化)되어 있기에 주위(周圍)의 토양보다 훨씬 비옥(肥沃)하다.
이처럼 자연(自然)의 딱딱한 토양을 부드럽게 개간(開墾)하는 연약한 지렁이의 역할(役割)은 상상(想像)하기 어려울 만큼 크다. 게다가 우리는 지렁이가 일구어 놓은 토양의 덕분으로 지금까지 살아왔다는 것을 생각할 때 지렁이가 사라져가고 있는 현실(現實)을 예사롭게 보아 넘겨서는 안될 것이다.
지렁이가 살아 움직이는 한 그 토양은 살아 있고, 우리는 환경의 오염으로부터 아직은 안전하다고 할수 있을 것이다.

완벽한 청소 - 부패(腐敗)
 입춘(立春)이 지나고 부터는 하루 하루가 다르게 햇살이 두터워진 듯한 느낌이 들며 입고 있는 외투가 무겁고 거추장스럽다.
지난 해에 담근 김장 김치의 맛이 시어지며 군내가 나기 시작한다. 곧 곰팡이가 피어나고 배추가 물렁물렁하게 연해져서 먹을 수 없게 될 것이다. 김장을 담그고, 메주를 쑤어 간장 된장을 만들며, 술과 식초를 얻어내는 미생물의 작용을 발효(醱酵)라고 한다. 반면에 똑같은 미생물의 작용일지라도 식품(食品)을 망가뜨리거나 고기가 썩어 못 먹도록 변하는 작용(作用)을 부패(腐敗)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발효(醱酵)는 유용(有用)한 것으로 여기나, 부패(腐敗)는 아주 몹쓸 작용인 것으로 오해(誤解)하고 있다.
발효(醱酵) 이든 부패(腐敗)든 이러한 작용을 하는 미생물(微生物)은 모두 토양에서 유래(由來)했다. 토양 속에 미생물이 살고 있기에 토양을 살아 있는 생명체(生命體)라고 할만큼 토양 속에는 많은 미생물이 서로 가깝게 이웃하여 상부상조(相扶相助)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토양 속에서 살아가는 미생물들의 생활도 인간의 사회성(社會性)과 비슷한 점이 많다. 자신의 생활을 스스로 영위(營爲)하며 다른 종(種)의 삶에는 전연 관여(關與)하지 않는 중립파(中立派)가 있나하면, 다른 종(種)과 더불어 살려는 공생(共生)이나 원시협동(原始協同)을 하는 무리가 적지 않은 반면에 상대를 죽이거나 약탈하여 살아가는 침략파(侵略派)도 있다.
그럼으로 한정(限定)된 생활 조건(條件)에서 살아 남기 위해서는 경쟁(競爭)을 하기도 한다. 자기(自己)에겐 무해무독(無害無毒)이나 다른 종(種)을 해칠 수 있는 항생제(抗生劑)를 만들어서 자신의 영역(領域)을 넓히기도 한다. 한편 어떤 부류(部類)는 다른 종(種)에 기생(寄生)하거나 포식(飽食)하며 일방적으로 상대를 공격(攻擊)하기도 한다.
이와 같은 상호(相互) 관계가 성립(成立)되어 있기에 외부(外部)로 부터 새로운 미생물이 들어와도 그 토양에 제대로 정착(定着)하기가 극히 어렵다. 토양에 토착성(土着性)이 아닌 세균(細菌)이나 균류(菌類)를 첨가(添加)하면 단기간(短期間) 내에 죽어 없어진다. 그리고 외부(外部)로 부터 미생물이 들어왔을 때 일어나는 토양 속의 변화(變化)는 예외(例外) 없이 일시적(一時的)이다.
코흘리개 어린 시절엔 장난도 심했다. 하루에도 몇번씩 손등이 터지고 무릎이 깨지고 하여 상처(傷處)가 아물 날이 거의 없었다. 무릎을 갈고 손등이 터지면 부모님 몰래 보드라운 흙을 상처(傷處) 부위(部位)에 뿌려서 지혈(止血)도 시키고 상처(傷處)를 치료(治療)하기도 하였다. 요즈음 같아서는 상상도 할수 없는 일이나, 그 당시는 흙만 발라도 상처가 깨끗하게 잘도 아물었다.
항생제(抗生劑)를 만드는 미생물들이 살고 있는 토양이기에 상처를 낫게해 주었을 것이라고 믿고 싶다. 이러한 미생물은 열대(熱帶)와 온대(溫帶)지방에는 물론 '알래스카'와 같은 북극(北極)의 한대(寒帶) 토양 속에도 번식(繁殖)하고 있다.
'에스키모'인들은 북극(北極)의 토양 속에 미생물이 살아 있는 현상(現象)을 잘도 이용하였다. 물개나 백곰의 껍질을 벗겨 토양 속에 묻어두면 살점과 기름기는 썩어 없어지고 부드러운 가죽만 얻게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살과 피는 쉽게 썩어 없어 지는데 털과 가죽은 왜 썩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을까? 쉽게 썩는 것과 썩지 않는 것의 차이는 무엇일까? 그것은 재료(材料)를 분해(分解)하는 미생물들의 능력(能力)에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미생물에는 인간과 같이 공기(空氣) 중의 산소(酸素)를 호흡(呼吸)하는 호기성(好氣性) 미생물과 화합물(化合物) 중에 들어 있는 산소(酸素)를 얻어 살아가는 혐기성(嫌氣性) 미생물이 있으며, 부패(腐敗)는 주로 호기성 미생물의 작용으로 일어난다.
호기성이던 혐기성미생물이던지 이들이 번식(繁殖)할려면 충분한 양분, 적당한 온도와 습도(濕度)는 물론 미생물의 생육(生育)을 저해(沮害)하는 독물(毒物)에 오염되지 않은 환경이어야 한다.
미생물은 주로 유기물을 먹고 살아가며 또한 번식(繁殖)한다. 그런데 유기물은 탄소, 산소, 수소 및 질소가 엉켜 있는 물질이다. 미생물이 그들의 음식물인 유기물(有機物)을 먹으면 그속의 탄소(炭素) 성분은 에너지원(源)으로 사용되고, 질소(窒素)는 미생물의 몸체를 만드는 요소(要素)로 쓰이게 된다.
그럼으로 탄소(C)가 많고 질소(N)가 적은 유기물이면 먹을 것은 많은데 먹어 치울 미생물 숫자가 적기 때문에 먹을 것이 많이 남게 된다. 즉 그러한 유기물은 잘 썩지 않고 남아 있게 되며, 반면에 탄소가 적고 질소가 많은 유기물이라면 먹을 것은 적은데 먹을려는 미생물 수는 많기 때문에 그런 유기물은 빨리 썩어버리게 된다.
이와 같이 영양분 속의 탄소와 질소의 비율(탄질비)이 발효(醱酵)나 부패(腐敗)의 속도(速度)를 조절(調節)하는데 가장 중요한 요인(要因)인 것이다. 그런데 탄질비(炭窒比)가 큰 것으로는 톱밥, 침엽수잎, 보리짚, 밀짚 등이 있으며, 탄질비가 작은 것에는 고기류와 사료작물(飼料作物)등이 있다.
탄질비가 큰 밀짚과 보리짚은 쉽게 썩지 않음으로 퇴비(堆肥)로 만들어 쓰기 보다 땔감으로 많이 쓰고 있으며, 소나무잎도 탄질비가 커서 잘 분해되지 않기 때문에 산에 가면 많이 쌓여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반면에 탄질비가 작은 동물의 시체(屍體)나 생선은 쉽게 썩는다. 이때 탄소를 소화(消化)하고도 남는 여분(餘分)의 질소는 '암모니아'나 '매르?탄' 처럼 냄새나는 물질(物質)이 되어 공중으로 날라가기 때문에 고약한 냄새를 풍기게 된다.
우리나라에서는 잘 변하는 것을 빗대어 '숙주나물과 같다'고 말한다. 단종(端宗)에서 세조(世祖)에게로 쉽게 돌아선 '신숙주'의 변절(變節)이 미워, 여름철에 잘 변하는 녹두(綠豆)의 어린 새싹을 삶은 녹두나물을 '숙주나물'이라고 했단다. '숙주나물'은 그 탄질비가 작기 때문에 쉽게 변질(變質)될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지만 음식이 변하는 안타까움과 '신숙주'의 변절을 한꺼번에 섞어서 만든 멋진 조상(祖上)님네의 언어유희(言語遊戱)의 산물(産物)일 것이다.
이른봄이나 늦가을에 마당에 딩굴고 있는 낙엽(落葉)들을 한곳에 쓸어 모아 퇴비(堆肥)를 만들 때에는, 요소(尿素)나 계분(鷄糞)등 질소질이 많은 재료(材料)를 첨가(添加)하여 섞어 주면, 탄질비가 작아져서 잎들이 빨리 썩어 좋은 퇴비가 된다. 옛날 우리의 부지런한 조상(祖上)들은 새벽 일찍이 일어나 동네의 개똥을 모두 주워서 퇴비덤에다 넣어주고, 밤새 요강에 모아둔 오줌을 퇴비 위에 뿌려서 '탄질비'를 낮추었다.
부패(腐敗)는 토양이 우리 인류(人類)에게 선사하는 가장 훌륭한 소제도구(掃除道具)이며 거름장치이다. 우리가 보기 싫어하는 모든 것을 썩게하여 없에주고, 다시금 식물(植物)의 영양분으로 만들어 주니 부패(腐敗)는 발효(醱酵) 못지 않게 유용한 작용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부패(腐敗)가 없는 환경(環境)은 상상(想像)하기 조차 끔직하다. 모든 공간(空間)에는 썩지 않은 시체(屍體)가 산처럼 쌓여 있고, 우리 모두는 주검 위에서 살수 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니까.
 
칠년 지옥(地獄), 보름 천국(天國)
 7월로 접어들면서 벌써 무더위가 시작되었다. 금년은 "엘리뇨"라는 이상기후(異常氣候) 탓으로 예년(例年)보다 더위가 일찍 찾아와서 오래토록 머물 것이라는 기상청(氣象廳)의 장기예보(長期豫報)다. 금년 여름의 더위를 어떻게 이겨내야할지 벌써 부터 걱정이 앞선다.
여름 더위를 극복(克服)하는 방법은 사람마다 다르겠으나, 시원한 삼베 옷을 입고 그늘진 살평상에 누워 한가하게 매미 소리를 듣는 것도 IMF 시대를 살아가는 멋진 피서(避暑) 방법에 들어갈 것이다.
여름철에 들리는 매미 소리는 정녕 자연(自然)이 살아 있음을 알리는 신호(信號)이다. 그런데 요즈음 도심지(都心地)에선 매미 소리를 들을 수가 없으니, 좋은 피서법(避暑法) 하나는 일단 접어 두어야 할 형편이다.
매미야 어디든지 푸른 잎을 달고 있는 나무만 있으면 날아 드는 것으로 알아 왔다. 그러나 모든 것이 편리하다는 도심(都心)에서는 좀처럼 매미소리를 들을 수가 없다. 하늘을 찌를 듯한 고층(高層) 빌딩 사이사이로 차량(車輛)들이 품어 내는 배기(排氣) 가스와 오염된 분진(粉塵)에 찌들린 가로수(街路樹) 몇그루뿐인 도시 한복판까지 매미가 날아올 리가 없기 때문이다. 어쩌다 집안 뜰에 있는 대추나무에 매미가 와서 울기라도 하면 무슨 경사(慶事)라도 난 듯이 온 식구의 얼굴에 웃음이 깃들고 마음이 들뜨게 된다.
매미는 옛 사람들의 풍류(風流)에 의하면 이슬 만을 먹고 고고하게 자라서 탐욕(貪慾)스럽지 않기 때문에, 비록 미물(微物)이라도 인간(人間)의 선비에 비유(比喩)할 만큼 깨끗한 곤충으로 여겼다. 그래서 임금이 정무(政務)를 볼 때 쓰고 있는 익선관(翼蟬冠)은 매미의 날개 깃 모양을 넣어 만들었다고 한다.
이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비유(比喩)인가?
매미는 나무의 수액(樹液)을 빨아 먹고 사는 해충(害蟲)이다. 매미가 많이 붙어 있는 나무는 '거스름병'이라는 병이 생겨나도록 나무를 못살게 괴롭히는 존재이다. 그 뿐인가? 매미는 교목(喬木)의 새로 나온 가지에 4∼5㎜ 깊이로 칼자욱 같은 흠집을 계단식(階段式)으로 총총히 만들어, 거기에 50∼600개 정도의 알을 낳는다.
매미가 알을 낳은 사과 대추 감나무의 가지는 그해에 생겨난 새 가지이다. 그 가지의 양쪽에 칼집을 낸 것처럼 계단식으로 촘촘히 상처(傷處)가 나 있고, 껍질은 들떠서 터실터실하게 보인다. 어쨌든 매미가 알을 낳은 가지는 결국 말라서 죽게 된다.
이러한 가지에 있던 알이 부화(孵化)하면 애벌레가 되는데, 이것을 보통 '굼벙이'라고 부른다. 이 굼벙이는 땅 속으로 들어가 7년이나 8년이라는 긴 세월(歲月) 동안을 그 속에서 살아가면서 끈질기게 햇빛 볼 날을 기다려야 한다. 언제나 축축하게 젖어 있는 좁은 공간(空間)과 햇볕이 들지 않는 암흑(暗黑) 속을 7년 이상 인고(忍苦)하면서 땅 속에 들어 있는 썩은 나무나 풀의 뿌리와 나무 뿌리의 수액(樹液)으로 연명(延命)해야 한다. 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삶의 연속이겠는가?
그러나 굼벙이는 토양 속에서 오래 동안 살아 왔었기에 그 토양의 정기(精氣)에 온통 절어 있음에 틀림 없다. 그런 탓인지 한방약(韓方藥)에서는 간염(肝炎)의 특효약(特效藥)으로 등록(登錄)되어 있다.
그래서 요즈음에 와서는 굼벙이를 약(藥)으로 사용하겠다는 인간(人間)의 욕심(慾心)과 토양 생물의 생명에는 관심(關心)을 두지 않고 쉴 틈 없이 뿌려대는 농약(農藥) 때문에 지긋지긋한 굼벙이의 지하생활(地下生活)마저도 순탄치 못하게 되었다. 7년 이상이나 견뎌 온 암흑(暗黑)의 지옥생활(地獄生活)을 청산(淸算)할 때는 캄캄한 밤을 택한다. 한밤 중에 아무도 모르게 지상(地上)으로 땅을 헤집고 올라와서, 가까운 나뭇가지에 달라 붙어 굼벙이의 껍질을 벗고 멋진 매미로 탈바꿈한다.
굼벙이가 밤새 탈바꿈하여 매미가 되면, 땅 속에서 느릿느릿 기어만 다니던 시절(時節)과는 너무나 다른 세상(世上)을 만난다. 이제는 나를 수도 있다. 맘껏 하늘을 비상(飛翔)할 수 있다. 밝은 태양 아래서 상쾌한 대기(大氣)를 마시며, 맛 있는 수액(樹液) 파티에 자신(自身)의 짝을 초대(招待)할 수 있다. 비록 보름 동안이라는 짧은 생애(生涯)이지만 의미 있게 살아갈려고 한다.
매미는 해가 뜨는 시각(時刻)부터 해가 지는 시각까지 햇빛이 있는 동안이면 수컷이 암컷을 찾아 요란하게 불러댄다. 듣는 사람에 따라 매미 소리가 다르게 들리는지 모르겠지만 "매미가 운다"고도 하고 "매미가 노래한다"고도 한다.
그러나 나에게는 매미들이 절규(絶叫)하듯 질러대는 소리가 "이런 세상도 있었구나", "오! 밝은 태양(O! Sole mio)"이라는 탄성(歎聲)으로 들리기도 하고, 7년의 지옥생활(地獄生活) 끝에 얻은 단지 보름 동안의 자유생활(自由生活)이 너무나 짧은 것이 아쉽고 억울하여 목이 터지도록 "하나님! 너무 억울합니다. 단지 보름 뿐입니까?"하고 악을 쓰는 소리로도 들린다.
땅거미가 짙어 가는 여름날 초저녁에 여기저기 가로등(街路燈)이 한두 등(燈) 켜지고 나니, 때 잊은 매미가 짧게 울음인지 노래인지를 부르다가 싱겁게 멈춘다. 매미 눈에는 가로등 불빛이 햇빛으로 여겨졌던 모양이다.
어쨌든 IMF 사태(事態)로 모든게 뜻대로 되는게 없어 짜증이 나는 세태(世態)이니, 오늘의 매미 소리는 그냥 기분 좋게 "오 솔래 미오(O Sole Mio)"라고 부르는 노래 소리로 듣고만 싶은 심정이다.

유기농업의 희망(希望)
 대구시 상수도(上水道)에서 발생했던 '페놀' 오염 사건(汚染事件)이 낙동강(洛東江) 수계(水界)의 주민(住民)은 물론 우리 국민 전부에게 던져준 충격(衝擊)은 매우 컸다. 이 사건을 계기로 성급한 일부 부유층(富裕層)들은 산간벽지(山間僻地)를 찾아와서 농작물의 계약재배(契約栽培)를 서두르고 있다고 한다. 벽촌(僻村)은 아무래도 환경이 깨끗하여 오염되지 않은 농작물이 생산되리라는 기대감(期待感) 때문일 것이다.
북극(北極)과 남극(南極) 마저도 오염되어 가고 있는데 우리의 벽촌(僻村)이라고 깨끗할 수만은 없다. 오염이 심한 대도시 근교(近郊)를 벗어났으니 그 정도가 덜할 것으로 여겨질 뿐이지 어디인들 오염이 미치지 않은 곳은 없다고 하겠다. 그런 까닭에 지구상에서는 이제 무공해(無公害)라기 보다 저공해(低公害)란 용어(用語)가 옳바른 표현(表現)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저공해(低公害) 먹거리를 생산하기 위하여 유기농업(有機農業)이란 영농 방식(營農方式)을 도입(導入)하여 그 보급(普及)과 장점(長點)을 역설(力說)하는 단체(團體)가 점점 늘어가고 있다.
유기농업이란 쉽게 말하면 원시농업(原始農業)이다. 공업적으로 제조(製造)된 농약이나 비료 등은 전연 사용치 않고, 농업 부산물(副産物)과 가축분뇨(家畜糞尿)와 천연(天然)의 광석 분말(鑛石粉末)을 최대한 활용(活用)하는 영농방법(營農方法)이다. 그러므로 토양이 가진 잠재능력(潛在能力)에 따라 잡초(雜草)와 병충해(病蟲害)를 이겨 나가면서 우리가 요구하는 작물을 제때에 생산하도록 하는 재배방법이다.
미국인(美國人) '로데일'이 1945년에  '유기농업'이란 책을 저술(著述)하여 처음으로 유기농업을 소개했다. 그후 이 방법(方法)은 일본(日本)을 거쳐 우리나라에 도입(導入)되어 이제 십여년이 흘렀다.
일본(日本)의 토양학자 '요코이(橫井)' 교수에 의하면 유기농업은 자연순환(自然循環)의 법칙(法則)이 엄격히 지켜지는 농업 방식으로 무화학비료(無化學肥料)의 농업방식만은 아니라는 주장(主張)이다. 화학비료(化學肥料)를 사용하면 생산량은 늘어날지 모르지만 그 만큼 품질(品質)이 나빠질 수도 있다. 따라서 화학비료 대신에 유기물(有機物)을 사용하여 자연(自然)의 섭리(攝理)에 따라 지력(地力)을 생산력(生産力)으로 바꾸도록 노력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수확(收穫)을 거듭할려면 토양에서 빼앗은 유기물(有機物)을 작물(作物)과 더불어 사는 토양생물(土壤生物)에게 되돌려 주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토양생물은 이 유기물을 먹고 자라면서 그들의 배설물(排泄物)로 땅심(地力)을 높여 주기 때문에, 이 방법으로 재배한 작물(作物)은 건강하고 안전하며 맛이 좋고 영양가(營養價)가 높다고 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방법으로 인간과 가축(家畜)의 건강을 증진(增進)시킬 먹거리를 생산하는 것이 유기농업의 진정한 취지(趣旨)이다.
이런 뜻을 살리기 위해 일본의 '후쿠오카(福岡)'씨는 이 방법을 온몸으로 실천했다. 자신의 논에 유기 비료도 화학비료는 물론 농약도 전연 사용치 않으며, 더구나 경운(耕耘)이나 잡초(雜草) 제거(除去)도 하지 않으면서 쌀과 보리의 이모작(二毛作)을 거뜬히 해내었다. 진짜 자연농법(自然農法)의 진면목(眞面目)을 보여주었다고 하겠다.
그는 자신의 경험(經驗)을 그대로 옮긴 '자연농법(自然農法), 짚 한올의 혁명(革命)'이란 책을 썼다.
짚 한 올로 세계(世界)의 농업(農業) 상식(常識)을 완전히 둘러 엎은 영농 방법이다. 이론(理論)은 아주 간단하다. 벼를 수확한 논에 그 볏짚을 다시 뿌려 주는 것 뿐이다. 그러면 잡초(雜草)며 곤충(昆蟲)이며 토양 속의 균(菌)들이 생물의 '먹이 사슬' 순환(循環)을 반복(反覆)하여 곡식을 자라고 여물게 한다는 것이다. 그런 생산방식(生産方式)에 도달하기까지 그는 40여년간 수많은 시행착오(試行錯誤)를 거듭했으며, 반평생을 바쳐서 새로운 생산 방식을 발견(發見)하였다.
이처럼 유기농법이나 자연농법(自然農法)에서는 퇴비의 사용을 강조(强調)한다. 퇴비에만 의존하면 첫해에는 수확량(收穫量)의 절반이, 그 이듬해는 3할 이상(以上)이 감소(減少)하는 등 4∼5년까지 생산량이 절대적(絶對的)으로 감소(減少)한다. 그러나 5년이 넘어서면 지력(地力)이 증진(增進)되어 수확(收穫)은 평년작(平年作)을 회복(恢復)하게 된다고 한다.
유기농업을 계속하면 화학비료에 찌들어 척박해진 토양에 유기물 함량(含量)이 증가한다. 따라서 토양 속에 수분(水分)의 저장(貯藏)이 많아지고 입단(粒團)이 증가(增加)하여 그 틈사이로 공기 유통(流通)이 원활해진다. 유기물이 분해하면 필수(必須) 미량요소(微量要素)를 포함한 비료 성분이 공급(供給)되는 등 땅심(地力)이 증진(增進)되어 식물이 건전(健全)하게 자라기 때문에 병충해(病蟲害)가 줄어든다.
유기농법과 근대농업(近代農業)으로 벼 재배를 하여 그 결과를 비교(比較)해 보았다. 유기농법으로는 비록 생산량이 적었으나, 쌀의 품질(品質)이 우수(優秀)하고 저공해(低公害) 식품(食品)이기에 순이익금(純利益金)은 오히려 높았다. 뿐만 아니라 수확후 토양의 모든 성질이 현저하게 개선(改善)되었다.
단지 퇴비(堆肥) 원료(原料)가 오염되지 않아야만 유기농법으로 생산된 농작물도 오염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유기농법을 고집하기에는 굶주림으로 죽어 가는 인류(人類) 앞에 생산량(生産量)의 감소(減少)라는 양심적(良心的) 부담(負擔)을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유기농업의 허(虛)와 실(實)
 유기농업은 화학비료나 합성농약(合成農藥) 등을 사용하지 않고, 퇴비만을 사용하여 인력(人力)과 기계력(機械力)으로 농작물을 가꾸는 재배법(栽培法)을 말한다. 이 방법은 매스컴이 잘 보도(報道)한 덕분에 아주 훌륭한 영농법인 양 알려져 있으나 그 문제점 또한 소홀히 간과(看過)할 수 없다.
지난 수천년(數千年) 동안 무수한 사람들이 효율적(效率的)인 농법(農法) 하나를 완성(完成)하기 위하여 얼마나 노력해 왔던가? 그 결실(結實)로 얻은 근대농법(近代農法)은 우리의 식량창고를 채워주고, 인류(人類)의 생존을 지켜 주는 귀중한 재산이며 비법(秘法) 즉 Know-how인 것이다.
농업의 가장 큰 목적은 무엇보다 양질(良質)의 먹거리를 많이 생산하는데 있다. 부분적으로는 지구를 푸르게 하고, 광합성(光合成)을 통하여 대기(大氣) 중의 탄산가스 농도를 조절하여 온실효과(溫室效果)에 의한 기온(氣溫) 상승(上昇)을 억제(抑制)하는 환경 보호의 기능(機能) 등 공익효과(公益效果) 또한 무시할 수 없다.
지금부터 약 2백년 전까지만 하여도 농사는 유기농법에만 의존하였고, 그 방법으로는 단지 5억의 인구(人口) 밖에 부양(扶養)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근대 농법으로는 어쨌든 50억 이상을 부양해 나가고 있지 않은가. 세계인구(世界人口)는 매년 1억명씩이나 증가하고 있기에, 발달된 근대 농법으로도 매년(每年) 수십만 명이 굶주림으로 죽어가고 있는 형편이다. 그런데 원시농법(原始農法)인 유기농법으로 다시금 되돌린다면, 인류의 9할(割)은 굶어 죽어야 될 터인데 그래도 괜찮다는 뜻인지……
현재 지구상의 육지(陸地) 면적 중에 약 1할 가량이 농경지(農耕地)로 이용되고 있다. 이 면적(面積)만으로 전 인류(全人類)를 부양할 식량을 생산한다는 것은 근대농법으로도 정말 어려운 형편이다. 그런데 유기농법으로 전인류(全人類)를 먹여 살리려면 농경지를 지금의 10배 이상 넓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산을 깎고 바다를 메우는 등 자연을 파괴(破壞)하지 않으면 안된다. 따라서 유기농법은 자연환경을 보호(保護)하는 재배법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지구를 파괴하는 농법(農法)이 되고 말 것이다.
미국에서는 1920년대 까지가 유기농법의 시대(時代)였다. 그때엔 손수 만든 기계(機械)나 우마(牛馬)를 농업에 이용하였으며, 농민 한사람이 여덟 명을 부양할 수 있었다. 그후 화학비료(化學肥料)와 농약을 사용함으로써 80년대에는 농민(農民) 1인이 38명을 부양하게 되었고, 이제는 60명 이상을 먹여 살리고 있다. 불과 70년 사이에 7.5배나 되는 생산량(生産量)의 증가(增加)를 가져왔다.
우리나라도 5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호미로 김을 매어 잡초(雜草)를 뽑아냈고, 머리나 지게로 이고지고하면서 운반(運搬)하였다. 이제는 TV 속의 얘기거리가 되고 말았지만 추수(秋收) 후에 떨어진 낟알을 줍는 것은 부지런하고 알뜰한 사람의 본보기였다. 이처럼 먹고 사는데 급급한 생존(生存)을 위한 농법이었던 유기농법은 괴로움 그 자체라는 인식(認識)도 없지 않았다.
곡식 한알 한알에는 괴롭고 힘든 노동력이 피땀과 범벅이 되어 응어리져 뭉쳐 있다. 이제 호미 잡고 엎드려 기다시피 하던 논밭에는 경운기(耕耘機)가 움직이며, 이고 지던 농업은 자동차로 운반하는 농업이 되었다.
이것을 다시 육체 노동(肉體勞動)에만 의존(依存)하는 유기농법으로 되돌린다면 밤낮 없이 뼈 빠지게 땅을 갈고, 뜨거운 햇볕 아래에서 쉬지 않고 김을 매어도 그날이 그날일 터인데 누가 농촌(農村)을 지키겠는가?
유기농법으로 생산한 농산물(農産物)은 무공해(無公害) 식품(食品)이므로 안전하다고들 여기고 있다. 그러나 근대(近代) 농법(農法)의 농산물이 오히려 더 안전할 수 있다는 반론(反論) 역시 만만치 않다.
현재 우리가 재배하는 농작물은 인간이 필요로 하는 부분만을 기형적(畸形的)으로 발달시키고, 좁은 면적에 화학비료를 듬뿍 사용하여 빽빽하게 밀식(密植)하기 때문에 병충해에 대항(對抗)하는 힘이 아주 약하다. 따라서 병충해(病蟲害)가 많이 발생하기 때문에, 그 피해(被害)를 줄이기 위해 매년 농약의 사용량(使用量)과 종류(種類)가 증가(增加)하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병해충(病害蟲)은 오히려 웬만한 농약에는 잘 견딜 만큼 농약에 대한 내성(耐性)이 강해졌다. 그러므로 이런 상태에서 유기농법으로 작물을 재배하면 병충해와 잡초의 피해(被害)를 극복(克服)하기가 무척 어려울 것이다.
또 농작물도 퇴비만으로는 영양분이 부족(不足)하여 품질(品質)이 떨어지고 수확량이 감소할 것이다. 수확량이 감소한 만큼 농산물의 가격(價格)을 올려야만 영농(營農)을 계속할 수 있으니, 유기(有機) 농산물이 일반 농작물보다 더 비싼 것은 당연하다.
이와 같이 유기농법으로 재배한 채소는 오히려 품질(品質)이 떨어질 수도 있고 가격(價格)이 비싼데도 불구하고, 단지 농약을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만큼 건강에는 좋을 것이라고 여기기도 한다.
그러나 유기농법의 채소에는 해충(害蟲)과 병균(病菌)이 많이 살아서 붙어 있다. 그런데 식물은 병해충의 피해를 줄일려고 자체의 방어(防禦)물질을 생성한다. 또 이러한 곤충들은 자신의 천적(天敵)을 퇴치(退治)할려고 유독물질(有毒物質)을 분비(分泌)하며, 한편 병균(病菌)은 독성물질(毒性物質)을 생성(生成)하여 식물을 괴롭힌다.
이러한 분비물(分泌物)들은 아직까지 독성(毒性)의 유무(有無)와 그 정체(正體)가 확실히 밝혀지지 않은 것이 너무나 많이 있다. 그 독성을 충분히 알고 있는 농약의 피해(被害)는 피할 수가 있지만, 독(毒)의 종류(種類)도 모르는 것은 대처(對處)할 수 없기 때문에 더 위험(危險)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럼으로 무농약(無農藥)으로 재배한 채소이면 무조건 안전하다고 믿을 수만도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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