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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을 찾아서
- 천진, 북경, 진황도 여행기-
煥松 김순희
출발
이슬문학여행의 시작은 계획 되었다 하기 보다는 갑자기 찾아 왔다. 지난 12월 모임에서 도춘원 회장님의 자매학교 방문에 따른 중국기행에 우리 이슬문학이 같이 가면 어떻겠느냐는 제의가 들어왔고, 그 자리에서 흔쾌히 대답하신 조용휘, 조순옥님의 찬성과 백인숙, 공선희님의 동의로 백민 고문님까지 같이 하는 게 좋겠다는 의견이었다. 난 학교일이나 가정적인 일들이 널브러져있기에 선뜻 동의하지 못하고 반은 동의한 가운데 집에 왔었는데, 대학교 다니는 둘째이자 막내인 아들이 중국이라면 가고 싶다는 의사를 표시했기에 여행길을 흔쾌히 나서게 되었다.
1월 8일 오후 4시가 넘어서 아들 동희와 그의 친구 현복이를 데리고 인천 제 1여객터미널에 도착했다. 도춘원 용답 교장선생님과 천진에 있는 자매학교를 방문하고 중국 기행을 하기 위한 용답초 어린이들, 인솔하기 위한 그 학교의 선생님들, 그리고 우리와 같이 여행하기로 한 몇 분의 선생님들이 와 계셨다. 언제나 호탕하신 회장님의 인사가 있으셨고, 두 아들을 소개해 드렸다.
“ 아, 반가워요. 즐거운 여행이 됩시다.”
젊은 아이들에게도 밝고 정답게 맞이해 주셨다. 백인숙 선생의 둘째 아들 민철이도 같이 따라 나선 길이라서 서로 인사를 나누게 했다. 고 2학년인데 대학생 형들보다도 더 큼직했다. 백선생과 인사 후에 회장님의 사모님을 만나게 되었다. 백인숙선생과는 같은 학교에서도 근무한 사이여서 또 정다운 일행이 되어가고 있었다. 공선희 총무는 초등학교에 다니는 둘째와 아직 초등 입학 전인 셋째 딸 막내를 대동하고 왔다. 고생길이 될 것 같았는데 그 걱정은 여행 내내 실제로 이어졌다. 그런데도 얼굴 한 번 일그러지지 않고 웃으면서 아이들과 우리 일행을 대하는 공선희 선생의 저력에 이글을 쓰는 순간에도 숙연함이 젖어 온다.
정자영 중국세계여행사 가이드팀장이 들어서자 우리는 바빠졌다. 출국 수속을 하고 배표를 구하고 여객터미널 3층 출국장으로 올라갔다. 조금 지루한 시간이었지만, 조용휘 교감선생님과 백인숙, 공선희 선생과 이야기를 하다보니 시간이 흘러갔다. 조순옥 선생님도 식구들 준비를 끝내시느라 서둘러 오셨다고 했다. 예쁘게 생겼을 따님이 가방을 들고 배웅을 하고 갔다는데 보지는 못했다.
크루즈 여행 -‘육금향 호텔’
중국의 여객선이었다. 잠을 자면서 가기에 호텔로 이름 불러도 맞는 것 같았다. 나는 2등실 4인 1실 방을 배정 받았고 운 좋은 백인숙 선생은 아들과 정답게 1등실 방을 배정받았다.
‘아이고, 배 아파라!’ 아이들이 많아서 1등 실과 2등 실을 무작위로 배정한 터였다. 공선희 선생과 조순옥 선생님은 같은 방이었고 난 전혀 몰랐던 용답초 아동을 인솔하기 위한 두 분선생님과 ‘이솔 체험학교’ 팀장과 같은 방으로 배정받았다. 방 안은 건조하고 답답하기는 했지만 할 일이 없어서 잠을 자기엔 안성맞춤이었다.
‘아, 지루한 이 밤을 어찌 보낼 것인가? 또 내일은? ’
“ 선생님, 갈 만해요. 저녁에는 자면 되고요, 아침 먹고 또 좀 있으면 점심 먹고 놀다보면 내릴 준비를 하면 되거든요?” 며칠 전 정자영 가이드가 전화로 들려준 말이 생각났다.
정말 크르즈 여행도 할 만 했다. 키미테 덕분에 배멀미는 없었지만 예민한 위장이 뒤틀고 앉아 있어서 밥이 밑으로 내려가지 않아서 많이 먹지는 못했지만 배여행도 할만했다.
여객선 호텔 안에는 카지노형 게임 기계들, 아이들이 부담 없이 즐기는 오락게임기들, 만화방으로 불릴만한 만화책으로 가득찬 도서관 등 휴식 공간들이 많이 있어 시간을 보낼 곳이 많았다. 문제는 기계나 책들이 중국말이 아닌 거의 한국말, 한국어라는 것이다. 배의 소유는 중국인데 타고 다니는 사람은 한국사람이 태반이라는 말이 되는 것이다. 우리의 외화가 중국으로 마구 흘러들어가는 느낌은 배에서부터 출발하여 여행 내내 머리 속에 남은 여음이었다. 중국여행을 접는 것이 상책인가. 중국인을 잘 살게 해서 거꾸로 우리나라로 오게 하는 것이 나은 방법인가를 되뇌어 보지만 재주나 기량으로 보나 중국과 대조해서 이길 것이 하나도 없는 것 같은 불안감이 드는 것은 어인 일인지 모르겠다.
배안에서 우리 일행은 서로 갑판에도 나가 바다를 보며 한반도를 동쪽으로 남기며 서쪽을 향하여 뱃노래와 우리의 삶을 논하며 시간을 달래어 갔다. 모든 배의 동력은 컴퓨터로 조작을 하고 있었다. 기술의 발달과 문명의 이기가 하나의 아파트나 작은 산을 움직이고 있는 것이었다.
진황도 선착장으로 입국하여 천진에 도착하다.
저녁 7시가 되어 진황도에 도착하였고, 저녁을 어찌 식당에서 들고 9시부터 4시간 정도 달리면 숙소가 나온다고 했는데 가이드도 새로운 길을 잘 모르는지 서너 번 도로를 맴돌다 숙소에 찾아들어간 시각은 어느새 2시를 넘고 있었다.
‘여행이란’
집을 잊어보자고 멀리 몸을 피신시키는 것
새로운 시간을 만나 추억을 새겨보는 것
일상을 억지로 멈추게 하여 두뇌를 쉬게 하는 것
새 기분 , 새 공기 속에 스트레스가 녹아들게 하는 것
마음을 다잡고 정신적인 휴식이 마음의 평화를 안겨주는 것.
늦게 도착하였지만 깊은 잠을 잘 수 있었다. 머리 속에는 아무런 일거리가 없어서 좋았다. 음식의 향이 맞지 않아 저녁을 많이 먹지 못해서 아침에 일어나니 얼굴이 반쪽이다. 잘하면 다이어트까지 하게 생겼다고 좋아했다. 물론 나중엔 너무 잘 먹어 수포로 돌아갔지만...
하화미래 소학교 방문하다.
“짝짝짝! 열열환영!”
중국어로 말하니까 알아듣기는 어려워도 1, 2학년정도 되는 아동들이 손뼉을 치면서 차에서 내리는 우리를 교문 앞에 열 지어 함박 큰 미소 속에 맞이하고 있었다. 이보다 더 순박한 얼굴이 순수한 마음을 볼 수 있을까 싶었다. 티 없이 자라는 어린이의 얼굴에선 이념이고 사상이고 경제도 없었다. 그냥 열심히 위를 향한 순조로운 교육의 현장만이 있었다. 그런 기분은 그 학교에서 방문하는 동안 내내 이루어졌다. 학교에 장학사님이 오시면 담임의 일그러진 마음과는 달리 “안녕하세요?” 하며 웃는 우리네 2학년 아이들과 똑 같았다.
예능을 키우는 학교였다. 6세 정도 어린아이들도 수묵화, 수묵담채화나 채색화를 작가들 못지않게 착착 그려내고 기악 연주를 하는 어린이들은 각자 자기의 악기 연주실에서 혼자서 연습을 하고 있었다.
환영을 위한 그들의 학예회, 그들 말로 공연을 준비하여 보여주었다. 음악과 무용으로 세계의 공연에도 다니는 아동들이어서 참으로 동작이 일목요연하게 잘 연출되고 있었다. 붉은 별의 찬양 행진에선 조금 만감이 교차되었다. 이념이 어린이들의 마음속에서 자리를 키워가고 있었다. 우리민족끼리라는 말이나 자유민주주의를 세계화라는 이름 하에 공산 사회국가에 모두 열어젖히고 풀어헤쳐버리는 우리들의 맹신이나 어리석음을 돌아보게 했다. 두 개의 서로 다른 문화가 자매결연이라는 틀을 통해 우위를 다지고 있었지만, 만에 하나 이런 행사가 또 하나의 그 들이 추구하는 동북공정의 일환으로 중화사상의 매개체가 아니기를 바라면서 순진하고 열성으로 손님을 맞는 그들의 친절에 마음의 빗장은 모두 풀어졌고 행복 그 자체로 받아들였다. 또 귀여운 아이들의 미소와 이별의 박수 속에 우리는 차에 올랐고 우리 때문에 추위에 떠는 아동들이 안쓰러워 얼른 차에 올랐지만. 올망졸망한 어린이들의 눈빛과 미소는 천사의 그 무엇에 버금갔다.
오후에 고문화거리와 남시 거리를 통해 중국의 시장을 구경했다. 중국에서 제일 높고 아시아에서 두 번째로 높다는 천진 TV타워 야경은 자매학교의 만찬 초대와 추위로 건너뛰었다. 빛 좋은 개살구라던가? 호로병 속에 담긴 여우의 만찬인가? 푸짐한 식탁 앞에 우리는 눈알만을 굴려가면서 어느 음식을 제대로 먹을 것인가를 궁리했다. 천진 쪽이 향이 진했던 것 같다. 차라리 음식이 나오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손님 접대하는 것이 어려운 것인지 모른다. 오후에 쇼핑한 재미가 있어서 즐거운 맘으로 또 하루의 밤을 잠 속으로 던져버렸다.
북경의 추운 날들의 관광
천진에서의 이틀이 갔고 아침 일찍 북경을 출발하여 또 차를 타고 달렸다 . 2시간을 달리니 북경에 도착하였다. 먼저 찾은 곳이 천안문 광장을 지나 자금성이었다. 사진에도 찍었지만 한껏 웃을 수 있는 피난민의 복장, 탈북자의 모습인 우리 일행들, 배꼽을 자아낼 정도다. 날씨가 추웠던 관계로 모든 것이 얼얼했다. 공선희 선생의 두 공주님도 따라 나섰는데 그 쪽에 신경을 쓸 새도 없었다. 우선 내가 추위를 너무 느꼈기 때문이다. 영하 10도 정도는 되었을까? 그래도 그 쪽 사람들은 태연스레 모자니 장갑이니 엄청 팔고 있었다. 그들의 직업이라는 것이다. “한국 돈 천원, 한국 돈 이천 원” 우리가 한국 사람임을 어찌 아는지 잡스런 물건들을 가지고 와서 흔든다. 가이드가 물건을 조심하라고 당부한다. 불량품에 유의하라고도 한다. 모택동 주석 기념관에는 참배하겠다는 인민들이 평일인데도 줄을 이중 3중으로 늘어서 있었다.·열심히 우리말을 가지고 통역하고 있는 가이드가 귀여웠다 천안문 앞에서는 데모인원 수에 대한 말을 하는데. “여기에서는 1만 명만 용납할 수 있습니다.” 즉 천안문 앞에서의 시위는 1만 명까지만 허용한다는 내용인 것 같았다. 그러니까 천안문 사태이후에 대중들이 너무 많이 모이는 것을 경계하여 최대 인원을 1만 명이 넘지 않게 한다는 것인 것 같았다.
자금성을 들어가는데 외국의 총리가 온다고 벌써 두 개의 관문을 지났는데도 마구 나가란다. 인민 알기를... 세계의 관광객이 몰려드는 곳에서 말 그대로 무식한 그들 나름의 길들이기 인 것 같았다. 할 수없이 쫓겨 나와 망설이다 추위를 녹이러 찻집을 들렀는데 커피나 차 값이 비쌌다. 개개인이 먹으면 큰 비용이 들게 생겼는데 가이드의 재치로 중국 녹차를 테이블 당 1주전자로 계산하여 저렴하게 차를 마시며 몸을 녹일 수 있었다. 어찌 보면 추위를 가시게 해준 시간이 되기도 하였다. 점심 먹으러 갈려는데 다행히 방문이 허락되어 관광객이 자금성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우리도 따라 들어가며 웅대한 대국의 궁궐을 볼 수 있었다. 문무백관의 통로나 배열 자리가 어찌 그리도 크고 넓은지, 중국여행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大 ’라는 글자 말고는 없었다. 오죽했으면 우리 조상들이 대국이라고 불러주었겠는가? 땅덩이만 큰 게 아니었다. 어느 문화재 하나 오밀조밀한 게 없었다. 웅장하고 무겁고 큼직했다. 우리네 조그만 새가슴으로는 감히 생각지도 못할 그들만의 저력이 아닌가 싶다. 아니 그들이 국민들을 길들이고 권위를 자랑하기 위한 수완으로 고래로부터 이어온 전통인지도 모르겠다.
외화가 넘쳐 흘러들어갈 대국의 성 자금성, 그리고 이화원
만수산과 곤명호로 구성되었고 부지 면적이 290 헥타아르 라고 하는데 산이며 호수가 어느 한 고을만큼 컸다. 묘사를 하기에는 너무나 감개가 무량하고 시간이 많이 걸릴 것 같아 그 곳의 방문 기록은 시로 남긴다. 세계 관광객의 찬사 뒤로는 얼마나 많은 시대를 살아낸 당시 백성들의 피와 눈물이 어른거렸고, 오래된 정원의 수목의 거대함과 궁궐의 웅장하고 큰 것은 설명으로 하기엔 부족할 것 간다. 우리 일행들이 공통으로 나눈 말은 “ 경복궁을 자금성과 놓고 볼 때 궁궐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였다. 게임이 안 된다는 것이다.
왕궁의 역사를 간직하기 위한 피비린내
철권을 휘둘러갔던 영웅보단 권력자들
환관 내시의 권력 탐욕이 여기 저기 베이고.
자리를 보전하기 위한 얼마나 많은 권모술수가 지나갔던가?
명을 세우면 자금성을 만들고 경산 아래 몽골의 기를 파묻고
기나긴 한족의 영광 300여 영욕의 세월들!
무지한 인민들의 피가 보이고 슬픔이 보인다.
신하도 믿을 수 없고
내시도 믿을 수 없어
오직 믿을 건 자신의 권력이라.
자신의 궁궐을 무릉도원으로 가꾼 여걸
살아선 폭군이요, 죽어선 관광지라.
사람을 미워할 줄 모름 일가?
상술 앞에 다가선 상품일까?
이화원의 700m장량
여름에 배 띄우던 인공 호수의 얼음이
핏빛 울음을 중국의 빛으로 태양에 반사되고 있다.
만리장성의 값은 얼마인가?
북경에서의 이튿날도 역시 추웠다. 만리장성을 가기로 했는데 엄청 추워서 역시 몸을 단단히 동여맸다. 국경을 넘던 피난민이 따로 없었다. 케이블카로 오르고 장벽에 올라 능선을 길길이 이어놓은 만리장성을 보니 내 선조가 그 속에 갇혀 신음이라도 하는 양 슬픔이 또 베인다. 고대 기계도 없어 그 많은 돌들을 등짐으로 날라 쌓았을 부역, 애비가 쌓다 죽고 그 자리 자식이 또 끌려가 쌓다 죽어갔을 땅, 삼국지의 무릇 영웅들의 목숨이 동강이 쳐지던 그 곳, 추위에 맘속의 상념도 달아나지만, 어제까지 머리에 떠오르던 ‘大’라는 글자는 ‘血淚(혈루)’로 바뀌었다. 산새가 푸석푸석한 게 한 많은 피의 원한들이 아닐까하는 생각도 든다. 고대로부터 대륙을 통일하고 자리 잡기 위한 그들의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던 곳이던가?
하산 길에 조용휘 교감님이 질문을 던졌다. “만리장성의 값이 얼마인지 아세요?” 동행했던 우리는 모두 “글쎄요, 얼마나 될까요?” 반문하는 사이에 방긋이 웃으면서 하시는 말씀이 “ 한국 돈 천원, 아니 두 개가 천원이에요.” 우리는 까르르 웃을 수밖에. 만리장성 조각품을 팔고 있는데 한국돈 천원에 두 개를 준다는 말이었다. 그들은 지나칠 정도로 한국 돈을 요구하며 상업을 하고 있었다. 큰 ‘大’와 피와 눈물(血淚), 그리고 하나 더 중국인에게서 받은 영감은 장사 ‘商’이었다. 어딜 가나 상업이 판을 친다. 그것도 고달픈 기층민들에게 최저 보장된 직업의 하나라고 하니 안쓰러움도 베어 나왔다.
밤에 본 써커스 극장에선 인간의 신기한 재주를 공연하는데도 인권이라는 말이 무색함으로 먼저 왔고, 서커스단원들이 공연을 마치고 사진을 들고 팔려고 관객 속으로 나오는 장면에서는 말할 수 없는 비애가 느껴졌다.
산을 끼고 들어앉은 명제 13궁, 자연을 인공으로 만들 수 있는 용경협
명시대 13능 유적지 방문도 추위와 함께 했다. 천수산 기슭에 위치하고 있으며 삼면이 산으로 둘러쌓인 명당이라고 봐야할 곳에 있었다. 아늑하고 평안 곳인 것 같았다. 40㎢의 분지에 명나라 시대(1368-1644)의 13명의 황제와 황후가 안장되었다는 곳인데, 우리가 들어간 곳은 지하에 궁전처럼 만든 궁궐형 능 내부였다. 자신의 시신을 보관하게 한 왕의 권력도 대단하거니와 하나씩 도굴해서 관광자원으로 쓰기 위해 아직도 도굴을 하지 않은 게 더 많다는 명나라 때의 13개 능의 자리 역시 두고두고 중국인의 생업의 하나로 큰 역할을 할 것 같았다. 역시 막강한 권력이 죽어서도 후예들에게 먹을 거리도 제공하는 것이 아닌가? 악명이 높았던 진시황제도 그렇고, 서태후도 그렇고, 참으로 아이러니한 삶의 질과 관광 상품과의 관계인 것 같다.
한국식당은 한국 관광객으로 꽉 찼다. 어제의 북한식당에서의 만찬에 이은 만찬인 셈이다. 식당이 백화점의 눈을 유혹하게 안으로 펼쳐져 있다. 점심을 먹고 또 관광객은 사고 싶은 물건을 맘껏 살 수 있게 하고 있다. 카드를 안 가지고 갔다. 적중했다. 사고 싶은 물건이 어찌 많은지 돌아오면 그리 큰 도움도 되지 않을 수도 있지만 견물생심이 솟아오를 것은 당연지사인 것을 ,눈으로 실컷 구경을 하면서 정말 물건을 사고 싶지가 않았다. 우리나라의 돈이 중국을 먹여 살리는 것 같아 속이 상해서다. 관광지마다 상업이나 공업이 같이 있는 공장마다 조선족이나 한국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모두 한국인을 상대하는 상인이었다. 그들의 재원을 관리하는 능력에 또 한번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한국인 관광객 덕에 우리 조선족이 할 일이 조금 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너무나 많은 관광객이 중국의 상권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니 옹졸한 가슴에 약이 오르기도 하였다.
용경협은 계곡의 거대한 댐을 배경으로 하고 있었다. 여름에는 댐 물을 가두어 뱃놀이로 관광객을 유인하는데 겨울에는 그 계곡 아래의 물을 다 빼 버리고 얼음집의 동화나라를 만들어 환상의 세계를 연출하고 있었다. 인공 눈을 만들고, 인공 폭포 빙을 만들고, 환상의 얼음 궁전을 만드는 그들의 기예는 무엇으로 대신할 칭찬이 없었다. 대단한 중국의 힘이라고 할 수 밖에....,
아듀 북경! 만리장성의 동녘의 시작 진황도
귀국을 위한 북경 출발 4시간의 차량이동으로 진황도로 돌아왔다.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너른 평원의 산과 밭에는 흐릿한 하북 먼지가 일어 맑은 공기는 아니었고, 산 자체도 푸른 숲이 아니었다. 진황도에 들어섰을 때의 대기는 역시 깨끗하지 않았다. 공업 도시여서 매연이 많아서일 것이다. 관광하는 동안 유달리 차의 기름 냄새가 코에 베이고 자동차의 매연이 많이 나오는 것을 보게 되었는데, 개발에 치중하여 환경을 생각하지 못하고 있는 중국의 생활수준은 중진국이나 된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삶의 애착, 불로초를 향한 진시황의 염원이 서린 곳의 하나가 바로 진황도란다. 진시황이 다녀간 것에서 지명도 비롯되었다고 한다. 진황도는 역시 동쪽의항구도시오, 공업 도시이며, 만리장성의 동쪽에 자리하고 있어 그 덕에 몇 개의 관광 명소를 가지고 있었다. 늙은 용의 머리라는 뜻의 ‘노용두’에서 바라본 발해만 쪽의 동쪽 드넓은 바다가 한반도를 사이에 두고 아름다운 전경을 이루고 있었다. 당시엔 병영이었을 텐데, 여름엔 아주 많은 사람이 찾는 관광지라고 했다. 노용두에서 이어지는 ‘산해 제1관성’의 정교하고 치밀한 방어체계의 높은 성곽과 그 안에 펼쳐지는 양민의 고을의 평화로움, 맹강녀의 열녀 이야기가 만리장성의 애환을 담고 있는 관광지를 끝으로 진황도의 오후가 저물어 갔다.
대륙에서의 마지막 밤인 진황도 갸윤호텔에서는 비교적 시간이 여유로웠다. 도춘원 교장선생님, 공선희, 백인숙, 조순옥선생님과 이슬문학의 우의를 다지면서 간단한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다들 바쁘지만 이렇게 시간을 낼 수 있었음에 좋은 시간이 되었다는 내용과 공총무의 열의에 대한 칭찬을 공선희 백인숙 선생은 모든 선배들의 공으로 돌려주는 겸손함으로 서로를 위한 미덕의 자리가 되었다. 문학적인 작업들도 열심히 하기로 하였고, 같이 못 온 회원들에 대한 안타까움은 또 다음 모임에서 만회하기로 하였다.
육금향 호텔에서의 마지막 여정
아침 느긋하게 잠을 자고 짐을 꾸려 오전에는 배를 타러 가게 되어 있었다. 마지막 충분한 휴식으로 비교적 부담 없이 배에 오를 수 있었다. 또다시 세관을 통한 출국과정을 거쳐 우리를 기다린 듯 반갑게 맞이하는 ‘육금향’ 호텔 사람들의 안내를 받으며 인천에서 떠나던 날처럼 그 객실로 들어갔다. 다행히 가이드가 공선희 선생은 방을 바꾸어 주어서 아이들과 쾌청한 1등 실로 옮기게 되었다.
어느새 일행들은 정이 들어서 모두 시간 가는 것이 아까운 듯 이 방 저 방으로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의 꽃을 피우기 시작하였다. 말하기 대회가 무색할 정도로 말로 먹고 사는 우리 교사들이니 입담이야 어디 가겠는가? 떠나던 날의 서먹함은 어느새 동행인의 정으로 남아 서로를 이해하며 말문을 서로 먼저 열기 바빴다. 점심부터 선실에서 해결하는데, 일요일인지라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은 배 안에서 예배도 드리는 시간을 갖는 것이 참 좋았다. 어른이나 어린이나 믿음이 같은 사람은 영화관에 모여서 한 시간 정도 예배를 드리는 것 같았다.
이슬문학 회장을 맡으신 도춘원 교장 선생님이 저녁시간에 당신이 머무시는 특등실로 우리 모든 일행, 용답 팀, 이슬모임 팀, 또 같은 일행이 되어 나들이에 동참하신 곽 교장님, 신본부장님, 이솔 현장체험팀장님을 초대하셨다. 그 동안의 여행과 여담으로 서로 웃고 웃으며 청도 맥주와 하이트 맥주의 주연을 열었는데, 거기에서도 우리 하이트 맥주보다 청도 맥주의 선호도가 높았다. 중국 맥주도 먹을만하다고들 하셨다. 정담이 오고 가는 시간 속에 잔잔한 배 위의 호텔은 잘 흘러 흘러 동쪽으로 떠나왔다. 오전 시간이 되자 핸드폰이 터지기 시작했다. 못 나눈 안부 전화, 또 잘 가시라는 인사를 나누는 사이에 오전 시간도 그렇게 잘 갈 수가 없었다. 우리를 반기는 듯 잔잔한 바다 덕에 시간 보다 먼저 도착했고, 살아있음에 돌아올 수 있고 길 게 호흡할 수 있는 우리네 일상으로 흘러들고 있었다.
같이 동행한 대 선배님들과 또 후배님들 그리고 젊은 우리네 아들들, 또 제자들 모두 일상으로 돌아가 바쁜 시간들 엮어 가리라 생각하면서 참 좋았던 여행기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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