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동네에 유일하게 ‘사모님’이라 불리는 분이 한 분 계신다.
함자는 박유심. 올해 팔순을 넘기신 노인이지만 어디 아픈 곳 한데 없으며 근력도 크게 줄지 않은 분이다. 사천리 마을에서 평생 서당을 열어 글을 가르치셨던 송계(솔시내) 김영춘선생의 부인이시다. 송계선생은 30여년 전에 돌아가시고 동네 버스정류장 바로 옆에 그를 기리는 공덕비가 세워져 있다. 본디 ‘한 마음이 있는 분’이라 하여 유심씨라 지어줬을까?
사모님치고는 그 옷거지가 남루하고 행색이 말이 아니지만 엄연하니 ‘사모님’의 지위를 흔들려본 적이 없다. 이 지상에서 끝까지 지켜내야 할 당당한 신분이며 호칭인 이 ‘사모님’은 비록 문자만지는 남편 덕을 입었다 하지만 남편이 서당 훈장을 하던 시절 밖으로 함부로 벗어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에게는 두 명의 자식이 있다. 송계 선생 사이에 큰아들 혁준과 작은아들 선준이를 두었다. 송계선생 환갑나이에 첫 아들을 낳아 감격해 ‘갑생’이라 초명을 지어 불렀다. 그리고 다섯 해 뒤에 또 다시 노익장의 정력을 과시해 아들 하나를 더 낳았다. 본시 첫째 부인이 있었으나 계속해 딸들만 낳자 부인이 진도 고군면 향동리 친정집에서 데려 키우던 여자를 직접 후처로 앉혔다. 아무래도 자신이 잘 아는 여인을 두어야 투기와 의심을 키우지 않으리라는 판단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는 어려서 초등학교 5학년 무렵 새마을운동이 한 꺼풀 꺾인 탓으로 한자부활이 되어 우리동네에도 다시 서당이 열렸다. 물론 이때 아버지의 역할이 컸던 것으로 기억된다.
어린시절 살았던 아랫마을 삼춘네집 웃방에 서재를 열었다. 고구마 저장통이 시누대로 엮어져 있어 늘 눈길은 그곳을 향했다. 당연히 송계 김영춘선생이 훈장을 맡아 글을 가르쳤다. 우리에겐 천자문을 가르쳤다. 처음으로 먹을 갈고 신문지에 붓글씨를 썼다.
하루에 한 장에서 두장 학생 능력에 따라 외우고 써서 바쳤다. 이른 새벽부터 시누대 회초리를 맞아가며 깨어나 고개를 앞뒤로 흔들며 “하늘천 따지, 검을현 누루황”을 꿈결처럼 외우고 또 외웠다. 점심때 쯤이면 송계선생은 동네 잔칫집을 다녀와 알큰하니 홍조를 띄운 채 목침을 베고 낮잠을 주무시곤 했다. 70대 중반의 나이로 아무래도 체력이 달리는 입장이었다. 막걸리를 아주 좋아하셔 언제나 코끝이 빨갛게 달아오른 채 비스듬히 누워 아이들의 글읽는 소리 곡조를 따라 잠이 들곤 하셨다.
여기에 머리색이 누렇고 속 이빨도 더더욱 누런 우리 사모님이 또 휘척휘척 서당방을 찾아 자기 아이들(혁준이 선준이도 함께 배웠다) 글공부하는 모습을 대견스레 바라보다 술익는 집을 찾아 나서곤 했다. 본시 배운 것은 없지만 하도 많이 글공부소리를 들어 천자문 몇 구절을 아슴푸레 잡아두기도 해 오히려 더 놀림감이 되기도 했다.
황갈색의 뻐드렁니를 드러내놓고 하늘을 향해 마음껏 웃는 모습은 천진한 어린아이와 다를 바가 없었다. 남편과는 20년이 넘는 나이 차 이지만 이 사모님의 나이를 짐작하기는 너무 어려운 몸단장 차림을 하고 다녔다.
애시당초 땅이라곤 단 한 평도 갖지 못한 채 돈짐재 가는 산길목 언덕받이에 오막살이 서너평되는 두칸집에서 온 식구가 한 이불을 쓰고 살았다. 서당이라는 게 일년 내내 여는 것이 아니라 한겨울철에만 여는 탓으로 소위 수업료가 넉넉하니 들어올 리가 없는 처지다. 그 지독한 궁핍이 오히려 이분들의 성정을 낙천스럽게 만들었다. 하루 끼니를 아무데서나 떼우고 일이 있으면 어느 집이나 부르지 않아도 가 거들어주고 술밥을 얻어먹었다. 두분은 어찌되었든 동네에서 호칭에 대해서만은 깍듯한 예우를 받는 편이었다.
나는 세살 터울인 선준이와 어렸을 적부터 친하게 지냈다. 우리 집이 과자장사에다 술까지 파는 집이라 더더욱 동네 동생들이 따랐을 것이다. 알사탕 하나의 위력이 얼마나 큰지를 아는 사람은 안다. 혀 안에 조심스레 물고 ‘십리’를 가는 사탕은 너무도 매력적인 선물이었다.
큰아들 혁준이는 가난 탓으로 일찍 고향을 떠나 서울 객지생활을 했다. 초등학교만 겨우 나온 처지라 더군다나 그리 영특한 머리도 아니어서 고생도 꽤 많이 하다 어찌하여 청와대에서 근무를 하게 되어 큰 소문이 나기도 했다. 사실인즉 그게 잡부일이나 다름없는 직이었지만 그 당시에는 신분 호적에 한 치의 의심도 있어서는 안되는 ‘준엄한 독재’의 시절이었다. 하여 고향 면사무소 호적계에 확인이 오고 하여 자연스레 입소문이 났던 것이다. 그 뒤 그는 독학으로 어떻게 시험을 보았던지 소방직에 들어갔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러나 그는 나중에 결혼도 하고 가정을 꾸렸지만 서당선생을 하던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만 고향에 홀로 계셨어도 서울에 모실 생각이 전혀 없었던 모양이다. 명절에도 잘 다녀오지 않고 오래 전 환갑잔치에 잠시 들렸던 기억도 흐릿하기만 하다. 송계선생은 내가 광주에서 고등학교를 다닐 무렵 돌아가셨다. 그분이야 평생을 서당선생으로 일관한 분이었지만 학문적 깊이를 갖진 못하여 그저 두루 애경사에 관한 글씨나 써주고 술대접을 받으면 그만이었다. 주로 만사라든가 새로 집을 지을 때 천정에 매다는 현판 상량문을 써주고 또 비문글씨를 독점해 썼다. 석수쟁이 일을 하셨던 할아버지(박남조 옹)는 생시에 “김선생 글씨 파기가 가장 수월하다”고 송계선생의 글씨솜씨를 칭찬하셨다.
둘째 아들인 선준이도 진도초등학교를 어렵게 나와 ‘먹고 살기 위해’ 곧바로 제주도로 떠났다. 제주에는 이미 사천리를 떠나 정착한 작은집이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김양훈이라고 조카뻘되는 동네 친척이 그곳에서 미장 건축일을 하고 있어 자연스레 그 밑에서 일을 배우게 되었다. 그는 형과 달리 눈썰미도 있고 성정이 워낙 착하여 말 수도 적어 묵묵히 일만 하여 웃사람들의 귀여움을 받았다.
그도 나중에 술을 배우면서 점점 혼자 피식거리며 어머니의 품새를 닮아가기도 했다.
두 자식을 다 객지로 보낸 우리 사모님은 꼭 그만한 크기의 다른 집으로 이사를 가 홀로 사셨다. 비록 서당선생이 돌아가셨지만 동네어른들은 누구라도 그를 ‘사모님’이라 부르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어쩐지 “선준네 엄매”는 어울리지 않은 호칭이었다. 우리 동네에도 ‘스승’이 한 분 있었다는 자부심의 발로가 ‘사모님’을 만들었을 것이다.
사모님은 예전과 다름없이 이 집 저 집을 다니며 일품을 팔아 하루 끼니를 충당하고 즐겁게 술참을 들어 혼자만의 태평성대를 만들었다. 다리 관절통으로 고생하시는 어머니는 자주 사모님을 불러 함께 두어시간 혹은 한나절 뒤안 밭의 김을 맸다. 그리곤 술과 밥을 대접하고 품삯으로 밀린 외상을 지웠다.
일년 내내 고정 패션인 월남치마는 동네 배우지 못한 건달 개들한테 가끔 수난을 당하기도 했다. 아랫 입술이 유난히 튀어나왔지만 한쪽으로 길게 흐르는 침을 다 받아내기엔 역부족이었다. 꽉 다물지 못하는 입매처럼 어느 한구석도 모질게 하는 성정이 없었다. 침이 자주 나오는 것은 그만큼 신진대사가 원활하다는 증거가 된다고 본다.
우리 사모님은 90년대 들어서면서 생활보호대상자(이하 생보자)로 지정되어 국가로부터 매달 일정액의 보조를 받았다. 그야말로 사모님에겐 날벼락같은 축복이었다. 삼십여만원(요새는 30만 오천원)이 채 못되는 돈이었지만 하루 막걸리 다섯병을 건너뛰지 않고 마셔도 부족함이 없는 액수다.
사실인즉 이 사모님은 본 이름이 따로 있지만 애초부터 본부인의 이름으로 살아왔다. 동네 유지들이 본부인의 사망신고를 나중에 낼 때 현재 ‘사모님’의 이름으로 대신했던 것이다. 호적상으로 우리 사모님은 진작에 이 세상을 떠난 분이다. 박유심이란 이름자가 첫 부인의 것이지만 그 호적을 이어받아 주민등록증엔 100세에 가까운 나이로 표기되었다. 나는 작년에 우연한 기회로 우리 사모님을 읍내 병원에 입원시켜주면서 신분증을 자세히 보게 되어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
환자기록을 입력하던 간호사아가씨도 몇 번이나 들여다보고 확인하며 놀라와 했다. 저렇게 정정한 백살노인이라니 불가사의하다고 느꼈을 것이다.
다시 선준이 이야기를 좀 해보자. 이 착하고 순한 동생이 풍파를 견디며 서울로 간 것은 20대 중반이었다. 이미 그 친구들은 모두가 이런저런 연으로 서울에 가 정착해 살고 있기도 했다. 단추만드는 공장. 가방만드는 공장. 과자만드는 공장. 명절때 와서는 동네 부인회운영 점방에 진열된 과자를 가리키며 "저거 내가 만들던 것이야"하고 뽐내기도 했다.
진도에서 태어나 그것도 이 궁벽진 산골 사천리에서 무슨 재주로 견뎌내며 살 수가 있단 말인가? 전답이래야 좀 산다는 집이 논 스무마지기에 밭이 그럭저럭 되는 소농에 불과한 동네가 우리 사천리다. 그런데다가 논도 자갈논이라 물을 넣고 소로 쟁기를 갈면 금새 뒤고랑엔 맑은 물이 찬다는 소문이 자자한 마을이다. 물이 차기에 벼포기가 잘 퍼질 수가 없어 당연하니 쌀 수확량이 다른 동네에 비해 떨어지기 마련이다.
그래서 사천리사람들은 오래 전부터 숯을 굽거나 나무를 해 읍내 나뭇거리에 내다 팔았다. 나무장사 안해본 집이 없을 정도다. 또 여인네들은 깊은 산골에 들어가 약초를 캐 장에 내다팔며 자식들을 키웠다.
선준이는 미장기술을 일찍 배워 서울 건축판에서 당당한 대우를 받고 일하고 있었다. 소위 기술자인 것이다. 키는 작았지만 알통이 꽉 배인 근육의 팔뚝에 달라붙어 왼종일 일을해도 끄덕이 없었다.
내가 그를 만난 것은 87년 봄이었다. 그래 꼭 이맘때 쯤이었을 것이다. 그토록 견고하던 입매의 전두환은 어딘가 이글어지는 내부심사를 애써 감추고 후계자 지정에 골몰하던 중이었다. 민주화는 양김씨의 명찰이나 다름없었다. 선거라는 제도가 미심쩍기는 했으나 이런 분위기라면 굳이 무리한 ‘혁명’을 유발할 필요는 없을 것이란 관측도 해 보았다. 세상은 많은 분노와 그 분노를 용해할 가능성이 넘쳐나는 시절이었다. 매일 막노동을 다니던 어느 날 나의 제안에 몇몇이서 동조 서울 시내로 향했다. 그리고 우리는 곧바로 시위대와 합류, 이화여대 병원을 안시성처럼 보루삼아 돌과 화염병을 던졌다. 또 어느 곳엔가 우리처럼 결사항전을 하고 있으리라. 그리하여 다음 날 아침이면 세상은 바뀔 것이다. 그러나 그 믿음이 새벽으로 가는 길목에서 우리는 정예백골기사들의 습격을 받아 아수라장을 연출하며 매캐한 최루탄 연기속에서 굴비처럼 엮어져 체포 수감되었다. 선준이도 서대문구치소에 함께 들어갔다. 그는 경험이 있는 경력자로서 “방을 들어갈 때 문턱 절대 밟지 말아라”고 단단히 주문을 했다. 혼쭐을 난다면서.
나는 한 3년은 살아야겠구나 마음가짐을 하고 미결수방에 배치되었다. 이도 운명이라면 기꺼이 받아 새로운 이력을 쌓다보면 이 불온한 청춘의 핏기도 좀 식어지지 않겠는가?
그런데 나의 은밀한 계획도 채 열흘을 넘지 못했다. 온전한 후계자를 자처한 사단장출신 집권당 대통령후보가 느닷없는 ‘선언’이라는 것을 하는 바람에 쫒겨나다시피 감옥문을 나서야했다.
얼떨떨하니 밖으로 나와 그 이튿날 선준이와 나는 관악산을 찾았다. 특별한 경계선도 없지만 영 들어가기가 쑥스러워지는 서울대를 마주한 관악산은 싱그런 물소리, 짙은 녹음을 풀어놓고 있었다. 나는 서울에서는 모든 것이 ‘처음’이었다. 천원에 다섯개 묶음 양말. 승차권을 낚아채는 지하철 출입구에서는 늘 긴장해야 했다.
등산로 주변에는 돗자리를 펼쳐놓고 고객을 찾는 소위 점장이들이 군데군데 진을 치고 있었다. 여자점쟁이들이 수두룩했다. 솔직히 이들이 점을 쳐서 벌이를 하는 것 보다는 차라리 몸을 팔아 버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내심 고민까지 해보았다. 서울은 어차피 그런 곳 아닌가?
우리는 “오전이라 50% 디스카운트해준다”는 적절한 미끼에 걸려 점을 보았다.
나는 거기서 정말 믿고싶지 않은 엉터리 "예언"을 들었다. "자네는 서른 전에는 절대 결혼 못할 팔자"라는 저주성 발언에 이어 선준이에게는 "내년에 곧 가정을 꾸릴 것"이라는 전혀 상반된 소감을 밝혔다. "빌어먹을" "그냥 몸이나 팔라니까" 어차피 복채를 내는 자에게 입담이나 후덕한 대접을 하는 것이겠지. 나는 가볍게 흘려버리기로햇다.
그러나 이 요상한 주문은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섬뜩할 정도로 정확하게 실현되고 있었다. 나는 무조건 결혼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선을 보면 매번 미역국을 먹었고 또 내가 겁없이 퇴자를 놓기도 했다.
-누가 선준이를
그러는 사이 선준이는 정체불명의 관악산예언가의 말처럼 홀연히 한 여자를 얻어 고향을 찾았다. 그야말로 동네청년들에겐 난리법석의 경천동지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우리 사모님의 기쁨은 더 말할 나위가 없었다. "오메 우리 선준이이-" "오메 우리 아가야" 벌구멍이 숭숭 뚫린 채 둥글고 가는 기둥이 힘겹게 버티고 선 집 마루를 훔치고 닦고 통통한 몸매에 베시시 웃는 며느리가 귀여워 어찌할 바를 몰라했다.
나는 갈수록 일만 꼬이는데 선준이의 영예는 우리 부모님에겐 날 벼른 비수와도 같앗다. 돈들여 가르쳐놓았더니 서른 다되도록 자기 한 몸 건사도 못하는 이런 물건달을 어디에다 쓸고. 아버지는 홧김에 더욱 술을 드시고 어머니도 말수가 줄었다.
광주에서 찾아오는 벗들도 다 무슨 범죄자처럼 취급하기 일쑤엿다.
좀 더 좀더 기다려보자. 나의 인연은 필시 따로 있을 것이다. 그러나 속맘은 갈칡뿌리처럼 헝클어 갈라지고 있었다. 어디 과부나 아니면 술집작부면 또 어떻다냐. 결혼안한 여자는 이유가 있지만 결혼 못한 남자는 원죄에 갇힐 뿐이다.
사모님은 며느리에게서 밥상을 받게되는 영광 영광을 차마 믿기지 못하여 막걸리를 몇 잔 더 마셔도 게슴츠레 바라보는 눈 앞에 우렁각시같은 며느리가 분명하니 보엿다.
그것이 팔십 팔년 후반. 사모님의 걸음새는 이제 완연한 춤사위를 내보인다. 얼럴러 상사뒤야. 여보시오 농부님네 절로 옷소매가 들려지고 취하지도 않았는데 마당극 탈춤 취발이 품새로 발이 내딛어졌다.
영감님. 우리 영감님. 선상님 여그 우리 선준이좀 보쇼. 예 감사합니다.
나무에게도 바람에게도 빈터에 갈무리된 볏단에게도 담쟁이넝쿨에게도 새소리 물소리에게도 감사드렸다. 머리를 조아리고 또 손을 합장하며.
봄이 오고 여름되어 가을 찬바람 부는 이치는 되바꿀 수가 없는 것일까? 한 보름 정도 고향에 머물며 신바람을 일으키다 선준네 부부는 다시 서울로 갔다.
우리의 사모님은 더 의젓해지셨다. 이제 곧 둘째아들의 손주를 보게 될 것이다. 정말로 사모님 어른이 되제 암. 걷다가 땅에 앉아 제그림자를 다독거렸다.
일년 그리고 일년이 지나 선준이는 이상한 세계로 빠져들었다. 순천과 광양 사이에서 건축일을 하던 그는 간조대금을 많이 떼여먹어 당장 입에 풀칠하기가 힘들어졌다. 이제 낳은 지 얼마 안되는 아이 젖먹이기에도 버거운 상황에서 에라 술을 퍼 붓다가 어느날 광주로 날 찾아왔다.
인쇄소에서 어리숙하니 기름밥 얻어먹으며 힘들게 살던 나에게도 뾰족한 수가 없었다. 차비 몇푼을 쥐어주며 "정 살기 힘들면 내 사는 방으로 와라. 같이 살면 되지 나는 사무실방 쓰면 되니까" 그는 고개를 숙인 채 연거푸 소줏잔을 비우다 말없이 돌아갔다.
그는 지금 10년 째 해남 희망원에서 희망의 햇살을 그리워하며 닫혀살고 있다.
작년 봄이던가 사모님이 찾아가자 "어머니 나 이렇게 십년 넘게 여기다 놔둘라요" 하며 소눈같은 눈을 껌벅이는 아들을 보고 먹장이 터지는 아픔을 안고 돌아온 사연을 어머니에게 전하기도했다.
그의 부인은 견디다 못해 결국 아이를 어느 가정집 문앞에 놓아두고 사라져버렸다.
선준이는 그 부인이 몇년 후 12월 31일 서울 어느 공원 앞에서 재회하기로 했다는 믿음을 쉬이 버리지 못했다.
그러다 진도로 다시 내려와 되는대로 살았다. 우리 어머니 가게에도 몇만원 막걸리 외상을 놓아두고도 천연스레 일할 생각을 안했다. 아내도 나를 보는 눈치가 사나워졌다. 밥때만 되면 나타나 내 반주를 꿀걱꿀걱 가로채 마셔버리곤 했다. 참말 애물단지였다.
봄이 되자 한 밤중에 동네 냇가를 홀로 걸어다니며 허공에 돌팔매질을 해대곤 해서 마을사람들이 불안해 했다. 그러다 남의집 장독을 깨고 경운기를 부수고 하다 결국 그는 주민들의 요청에 따라 면사무소 직원과 나에 의해 읍내 경찰서로 보내졌다.
그런데 몇시간 되지 않아 경찰서에서 전화가 오고 난리가 낫다. 그가 살졌다는 것이다. 시건방떠는 경찰들이 헛눈파는 사이 자연스레 뒷담을 넘어 다시 사천리로 와 버린 것이다. 면사무소총무게장은 "내 책임은 없다"고 발뺌하며 돌아가버렸다.
그는 멀리 숨을 곳도 없었다. 이 지상이 다 그의 쓰잘데없는 마당에 불과했다.
그리고 다음날 경찰들에 의해 포승이 묶여 해남 희망원으로 넘겨졌다. 그리고 비끼내 물살처럼 세월은 마구 흘러 10년이 다 되었다.
작년 겨울 사모님은 그의 대단한 큰아들에 의해 '강제적'으로 동네를 떠 또 해남 무슨 요양원으로 옮겨졌다. 월급타면 꼭 몇천원어치 막걸리를 사주던 사이라 많이 아쉬웠다. 매달 월급타는 다음날 해남희망원에 가 둘째 아들 면회를 하고 속옷과 용돈을 넣어주고 와선 또 간절한 기도와 함께 해가 빠질때까지 막걸리를 마셨다. 자신의 힘으로 둘째아들을 데려오지 못하는 아픈 가슴을 달래기 위해서였다.
부모님에게 찾아뵐 겸 모처럼 사천리를 찾았더니 누군가 사모님이 돌아가셨다 한다. 처음엔 잘 믿기지 않았다. 우리 셋째 형수가 20여년 전 시집와 시댁에 오면 전혀 변하지 않은 사람이 유일하게 그 사모님이라며 그 비법을 궁금해 했던 분이 아닌가?
90년대에 사모님을 챙겨 일요일이면 꼭 교회로 데리고 다니던 고양금이란 전도사도 재작년에 먼저 세상을 뜨셨다. 나이 육십을 조금 넘은 나이에 하늘에서도 성실한 일꾼이 필요했던지 불시에 스카웃해 가 버렸다.
평소에 동네에 자리한 쌍계사절과 친숙해 있던 분이라 예수하느님에 대한 기도가 몹시 혼란스러운 주문이 새어나오곤 했다. 예수님에게 거의 반말에 가까운 대화조로 기도를 하며 "예수 너가 나 목마르니 엤다 술 먹어라 했다"며 억지로 어머니에게서 막걸리를 받아내 마시곤 했다. 남의 것을 절대 탐하지 않고 오직 둘째 자식만을 위해 마음의 기도를 놓치지 않았던 우리 사모님.누군가 뒤에서 큰자식 흉을 보면 금새 알아채고 "네가 뭔데 내 자식보고 말을 해!"하며 엄하게 두둔하던 우리 사모님.
자식들은 이 천애절벽같이 외로운 노인의 가슴에 차례로 못을 박았지만 막걸리 한사발로 쓰윽 지워버리고 오히려 기도를 놓지 않았던 우리 사모님. 그토록 고향을 떠나기 싫어했어도 오직 아들의 권에는 한마디 저항도 하지 않으셨다. 제 어미 제대로 살피지 못하는 작자가 "왜 여기서 노인네를 데려갈라고 할까" 동네사람들은 혀를 차며 비난을 했다.
이 노인네가 이제 어디서 누구와 정을 쌓고 살아간단말인가? 불과 6개월이 채 못되어 마침내 우리는 당연하고도 슬픈 소문과 만나야 했던 것이다.
지금도 우리 사모님은 별자리를 딛어가며 휘청휘청 하늘길을 걷고 계실 것이다. 부처님도 예수님도 늘 편한 벗으로 사귀었기에 하늘세상은 궁핍하진 않을 것이다.
해남 장례실엔 혁준이 선준이가 검은 양복을 입고 조문객을 맞이하고 있었다.
첫부인에게서 난 셋째따님이 함께 앉아계셨다. 나이가 팔십이라고 하신다. 내 아버님과 친구사이라며 안부를 물었다. 밤 늦게 승합차에 실려 돌아오다 문득 하늘을 보니 별들이 휘청거리며 돈다. 아따 하늘에도 막걸리판이 좀 벌어진 모양이다. 나는 이제 또 누구에게서 막걸리를 얻어마시며 살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