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 코스모스나 산국을 제치고 억새가 가을꽃으로 자리매김을 했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가을이 끝나갈 무렵이면 한 번쯤 하얀 억새의 군무를 보아야 겨울을 맞을 수 있는 것 같은 정서가 마음 한 켠에 자리를 잡고 있다. 마음 같아서야 창녕 화왕산이나 정선 민둥산으로 훌쩍 떠나고 싶지만 도시의 삶이 그렇게 녹록치만은 않아 가까운 곳으로 발길을 돌렸다.
산은 산이되 슬픈 이름을 가진 울음산. 과거의 역사야 어찌됐든 호수와 거대한 암봉, 수려한 계곡을 두루 갖춘 명성산을 빼놓을 수 없어 어스름 새벽녘에 출발을 했다. 입동이 지나 겨울이라지만 올해는 유난히 가을이 길다. 시월 초순에 시작한 단풍소식이 아직도 서울을 맴돌고 추적추적 내리던 가을비도 잠시 한숨을 돌리려는 듯 산허리를 감고 도는 운무가 가을의 정취를 더해준다.
산정호수는 산에 있지 않다. 계곡을 막아 생긴 인공호수지만 산정이라는 이름이 풍기는 이미지 때문에 더욱 정감이 가는 곳이다. 호수에 비친 명성산을 보기 위해 제방에 올라서니 물은 탁하나 고요하다. 아침 빛을 받은 명성산이 호수에 비친다.
옛날에는 자기 모습을 보려면 물에 비추어 보았다고 한다. 고요하고 맑은 물에 자기의 모습을 비추어 보고 얼굴을 다듬던 조상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런데 거울이란 물건이 만들어진 후부터는 물에 자기의 모습을 비추어 볼 일이 없게 되었고 세월이 흐르면서 사람들은 물이 탁해지는 것을 모르고 지금껏 살아오고 있다 한다.
호수를 지나 안덕계곡 오르는 들머리에는 상가와 민박집들이 늘어서 있다. 조그만 다리를 건너면 바로 계곡이다. 이곳부터 산행의 시작이다. 여느 곳과는 달리 개인집이나 암자가 없어 전봇대도 없다. 상가에서 300여 미터 오르면 비선폭포다. 주변에는 군데군데 낙엽송과 잣나무가 조림되어 있고 계곡 쪽에는 물푸레, 층층나무가 간간이 나타난다.
왼쪽 사면에는 굴참나무, 박달나무, 그리고 졸참과 갈참나무의 중간 잡종인 듯한 갈졸참나무의 낙엽이 길가를 메우고 있다. 참나무는 기본종이 여섯 가지가 있으나 상수리와 굴참을 뺀, 신갈, 떡갈, 갈참, 졸참끼리는 자연교배가 잘 이루어져 나무 공부를 하려는 사람들을 혼돈스럽게 한다. 이들을 분류하려면 어린 가지를 포함한 잎과 열매 그리고 열매깍지까지 관찰해야만 구분이 가능하다. 지금도 교배가 이루어져 새로운 형태가 생기고 있으니 그들 분류에 너무 마음을 두지 않는 게 좋을 듯 싶다.
다리를 건너기 전에는 야생화 화단이 있고 그 위에는 한해살이를 끝낸 갈잎만 뒹굴고 있다. 다리를 건너면 생강나무가 곧 꽃을 피우려는 자세로 통통한 꽃눈을 키우고 그 우측 안쪽에는 커다란 개살구나무가 자리하고 이어 쉼터가 나온다. 쉼터 주변에는 쓰레기가 수북하게 쌓여 있다.
‘산은 쓰레기를 싫어한답니다’ 라는 팻말 앞에 쌓여진 쓰레기들. 그렇게 버려져 쌓여 있는 쓰레기 또한 억울할 것이다. 조금 전까지 애지중지 배낭에 넣어져 소중하게 다루어진 물건들 아닌가. 이제 저 쓰레기는 모두에게 구박받는 공해의 주범이다.
‘기회자장삼십(棄灰者丈三十), 기분자장오십(棄糞者丈五十)’이라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있는지. 재를 버리는 자는 곤장이 서른 대요 똥을 버리는 자는 곤장이 쉰 대라는 뜻이다.
버릴 것 없이 재활용하고 재생산하려 했던 조상들의 생태적인 삶에 새삼 고개 숙여진다. 지금 저 앞에 ‘이곳에 쓰레기를 버리는 자는 곤장 오십 대에 처한다’는 글귀가 붙어 있다면 쓰레기들을 버릴까?
쉼터를 지나면 물박달과 신갈나무가 한자리에서 자라고 박달나무가 그 옆에서 모여 자라는 것을 보니 사이 좋은 오누이 같다. 두 번째 다리를 건너면 우뚝 우뚝 소나무가 서 있고 동쪽으로 향한 사면은 간벌이 돼어 밑이 뻥 뚫려 있다. 이곳 안덕재 계곡은 억새밭까지 완만한 경사로 이루어져 있어 어린이나 초심자에게 너무 좋은 코스다.
등룡폭포에 이르면 큰바위 슬랩이 발달해 있어 웅장한 느낌을 주고 폭포 역시 떨어지는 물소리 시원하다. 이어 길다란 철다리를 지나면 숲이 예사롭지 않다. 계곡 쪽으로는 서어나무가 대여섯 그루 모여 있고 가슴 높이 크기에 지름이 30센티미터 가까이 되는 다릅나무가 등산로 주변에 있다.
이쯤 오면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폭포 소리에 섞여 들린다. 쌍용폭포다. 설명문에는 등룡폭포라 되어 있으나 밑에 있는 폭포에 ‘등룡폭포’라 팻말이 붙어 있으니 이곳은 ‘쌍룡폭포’라 해야 맞을 것 같다.
폭포 앞에는 쉼터 겸 사진 촬영을 할 수 있는 목조데크가 설치되 있어 한 번씩들 폼을 잡는 곳이 되어 있다. 아쉽다. 맑은 물이 흘러 내렸다면 금상첨화일텐데. 어서 통일이 되어 맑은 물이 흘러 내리길 기원해 본다.
쌍용폭포를 지나면 군데군데 억새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곧 억새밭이 시작되려나 보다. 왼쪽으로 꺾어 오르는 길 앞에는 군사격장이니 들어오지 말라는 경고 문구와 함께 철조망이 처져 있다. 흙탕물의 원인은 사격장 때문이다.
그저 현실을 받아들이며 능선을 바라보니 억새밭이 점점 커진다. 오르는 길 왼편에는 커다란 물박달나무가 정자나무처럼 커지고 주변에는 피나무, 가래나무, 개살구 같은 큰 나무들이 같이 자라고 있다. 이곳 오름길 우측에는 전석지대가 있다.
“야! 이리들 와봐 여기 맑은 물이 흘러!” 누군가 일행을 부른다. 과연 돌 틈에는 맑은 물이 졸졸 흐르고 바위에는 이끼가 파랗다. 능선을 넘으니 넓은 억새밭이 펼쳐진다. 시기적으로는 한 달이나 늦게 왔다. 이곳 억새 축제는 10월 10일경이니 이미 씨앗은 바람에 날아가고 대궁만 남아 서걱거린다. 그래도 사람들은 ‘야! 억새밭이다’며 즐거워 한다.
탁 트인 곳에 대한 감탄이리라. 억새 능선에 오르면 방금 올라온 계곡이 보이고 여우봉에서 흘러내린 커다란 바위 슬랩이 발아래 보인다. 동으로는 한북정맥의 광덕산과 백운산 국망봉이 한눈에 들어온다. 광덕한 정상에는 최근 기상대의 관측돔이 생겨 금세 알아 볼 수 있다. 그 왼쪽에 엄지손가락 같은 상해봉을 바라보니 산은 멀리 있으나 마음은 가깝게 느껴진다.
억새 능선에서는 대부분 길을 묻는다. 왜냐하면 삼각봉에서 710봉에 이르는 주능선을 이곳으로 착각하기 때문다. 억새 능선에는 억새꽃밭이라는 팻말이 있고, 이곳에서 여우봉 쪽으로 내려가면 쌍용폭포가 나온다. 하지만 이곳은 경사가 가파르고 안전시설이 없기 때문에 대부분은 우회하는 코스다.
이곳에서 삼각봉을 향해 오르면 ‘천년수’라는 궁예샘터가 나온다. 한 모금 물을 먹고 아래를 내려다 보니 억새사이로 오르는 등산객들이 한가로워 보인다. 이 넓은 곳도 화전민이 떠난 흔적이다. 고봉준령들을 내려다보며 농사를 지은 터인 것이다.
년수’를 지나 정자에 오르면 철원평야가 한눈에 들어온다. 조그만 용화저수지도 보이고 동쪽으로는 다락논 같은 골프장이 모형처럼 보인다. 정자에서 북쪽으로 800여 미터 오르면 삼각봉이다. 이 지점에서는 일행들과 산행결정을 해야한다. 삼각봉을 다녀와서 어디로 내려갈 것인지를 상의해야 한다. 걸음에 자신이 없으면 다시 안덕계곡으로 내려가야 하고 아니면 710봉을 거쳐 능선을 따라 내려가야 한다. 710봉을 오르면 한북정맥의 마루금이 더욱 선연히 보이고 명성산의 주능선이 한눈에 보인다.
주능선 내려가는 길 곳곳에는 조망이 좋은 곳이 나타나고 산정호수가 보이기 시작하면 경사는 가팔라진다. 능선 곳곳의 바위 위에는 개박달나무가 얹혀져 자라고 남사면에는 굴참, 팥배나무들이 자라고 있다. 내리막길에는 군데군데 로프가 설치되어 있고, 이어 나무계단이 나온다. 일직선으로 내리 뻗은 계단을 내려서면 삼거리 안부다. 곧바로 가면 책바위 능선을 지나 비선 폭포로 내려가는 길이다. 길이 험하기는 하나 안전시설이 되어 있고 조망이 좋은 곳이다.
그러나 우리 일행은 자인사 계곡으로 내려가기로 했다. 왜냐하면 바로 밑에 호수가 보여 그리로 마음이 끌리기 때문이다. 이 계곡은 명성산 안내지도에는 ‘석력로’라고 표시가 되어 있다. ‘잔돌로 이루어진 길’이란 뜻이다. 다듬어지지 않은 돌이 불규칙하게 계단으로 놓여 있어 주의해야 한다. 이런 길은 천천히 느긋한 마음으로 한발 한발 내딛어야 한다.
느릅나무 층층나무가 계곡에서 자라고 사면에는 굴참과 쪽동백이 있다. 삼십여 분 내려가면 길은 다시 편해지고 자인사란 절이 나온다. 절은 다른 곳에서 본 절과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입구에 있는 불상은 중생에게 웃음을 선사하려는 것인지, 뚱뚱한 배를 쑤욱 내놓고 있다.
이곳에서 찻길로 내려서지 말로 왼쪽 계곡으로 내려서면 부드러운 상수리나무 숲길이다. 사람들이 별로 다니지 않은 듯 상수리 낙엽이 수북하게 쌓여 있다. 짧은 코스지만 해는 어느덧 석양이 기울어 그림자를 길에 드리운다.
이번 산행으로 나무를 찾아 떠나는 여행을 연재한 지 2년 째다. 욕심 같아서는 한라산, 지리산 같은 남쪽 산도 가보고 싶었지만 현실이 맞질 않아 중부지방 산만 돌아 다녔다. 그 동안 연재를 도와준 『사람과 산』 여러분께 감사한다. 다시 또 지면으로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하며 끝으로 나무와 친구가 될 수 있는 몇 가지 방법을 소개하고자 한다.
우리가 서양 사람들을 볼 때나 서양사람들이 우리를 볼 때 한 번 본 사람은 잘 기억하지 못한다고 한다. 왜 그럴까. 그것은 오랜 기간 서로 떨어져 살았기 때문이다. 우리 조상들은 하루도 나무와 뗄래야 뗄 수 없는 삶을 살아 왔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나무에 대해서 많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생활환경이 도시화되면서 산과 나무들은 어쩌다 휴식을 취하러 가는 곳일 뿐 우리네 사람과는 서로 관계없는 남이 되었기 때문에 한 번 보고 기억하려고 해도 자꾸 잊혀지기 마련이다.
우리들 만남에서도 서로 친구가 되려면 다음 번 만났을 때 상대방 이름은 물론 고향이 어디인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식성이 어떤지 알면 쉽게 친구가 될 수 있다. 나무도 마찬가지. 관심을 갖고 대하면 언젠가는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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