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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김철교, 프로추어의 세계 원문보기 글쓴이: 태양과달
아름다운 정원, 하와이
하와이(Hawaii)라는 단어는 하와이어로는 ‘작은 고향’이라는 뜻이지만 폴리네시아어로는 ‘신이 있는 장소’라는 뜻이다. 동남아시아의 여러 민족들이 점차 남쪽과 동쪽으로 이주하여 솔로몬과 피지, 뉴질랜드를 기점으로 동쪽으로는 이스터 섬, 북쪽으로는 하와이 제도를 연결하는 3각형의 폴리네시아 문화권을 형성하였다. 이 문화권 안에는 사모아, 통가, 타히티, 마르케사스 등의 제도들이 포함되며, 오래 전부터 서로 교류가 있었던 것으로 보아 조상이 같은 것으로 추정된다.
1778년 1월 영국의 탐험가인 제임스 쿡(James Cook)은 두 척의 탐험선을 지휘하고 호주, 뉴질랜드, 남극대륙 탐험을 마친 후 태평양에서 대서양으로 넘어가는 바닷길을 탐색하기 위해 타히티 섬에서 북미 쪽으로 항해하다가 하와이를 발견한 것이 세계에 알려진 시초였다. 하와이가 널리 알려진 것은 1941년 12월 7일, 일본의 진주만 기습으로 태평양 전쟁이 시작되면서였다.
일년내내 서늘한 무역풍이 에메랄드 빛 바다 위를 미끄러져와 습도가 적은 쾌청한 날씨, 우주의 깊은 속까지 보일 듯 투명한 하늘아래 하이비스커스(hibiscus) 꽃을 머리에 꽂고 해변을 거니는 여인들, 오염되지 않는 아름다운 자연과 신비로운 폴리네시안 문화가 어우러져 지상의 천국이라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을 듯하다. 여인들이 꽃을 오른 쪽에 꽂으면 결혼했음을, 왼쪽에 꽂으면 임자가 없음을, 정수리에 꽂으면 오늘은 그대를 원한다는 메시지를 남자들에게 알려 주는 폴리네시안 여인들의 마음 씀씀이는 더욱 하와이를 아름답게 만들어 주고 있다.
하와이 제도는 총 137개 섬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주요 섬은 니이하우, 오아후, 하와이(빅 아일랜드), 마우이, 몰로카이, 라나이, 카우아이 등 7개이다. 이러한 섬들이 북서쪽에서 남동쪽으로 총연장 600킬로미터에 걸쳐 이어져 있다. 하와이 주 전체 면적은 16,729제곱 킬로미터로, 제주도 면적의 9배에 이른다. 하와이의 총 인구는 대략 140만명으로 인구의 약 80퍼센트가 오아후 섬에 살고 있으며 아시아계가 42%, 백인 24%, 하와이 원주민 18%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 하와이의 공식 언어는 영어와 하와이어이다. 하와이어는 말레이폴리네시아 어족에 속하여 음절이 모두 모음으로 끝나며 자음의 연속이 없다는 특징이 있다.
하와이는 1788년 영국의 탐험가 '제임스 쿡(James Cook)' 선장이 상륙했던 당시만 해도 여러 왕들의 지배 아래 있었다. 1795년에 하와이 섬의 한 추장이었던 카메하메하(Kamehameha)가 여러 섬을 평정하고 약 100년간 8대에 걸친 왕조의 틀을 세웠다. 하와이 왕조는 1894년에 공화국이 되었다가 1898년에 미국과의 합병 조약을 체결하고 1959년 미국의 50번째 주로 흡수되었다.
하와이 주의 깃발에는 영국과 미국이 공존하고 있다. 좌상부에 영국기(Union Jack)이 들어 있고 기타 부분에는 위로부터 백색, 적색, 청색의 3색이 여덟 줄을 이루고 있다. 하와이 주기에 유니온 잭이 포함되어 있는 것은 카메하메하 대왕이 영국의 보호를 청한 당시 하와이를 방문 중이었던 영국인 선장의 배려였다고 한다. 처음에는 영국기를 그대로 게양하면 미국인들로부터 항의가 들어오고 미국기를 게양하면 영국인이 항의를 하여 결국 양국 국기를 섞어 만들게 되었다는 것이다. 최초 게양은 하와이 초대 왕 카메하메하 대왕 시절인 1816년 하와이 섬 코나(Kona)에서 였는데 왕조국기로 사용되기 시작하여 그 이후 하와이공화국 국기 및 하와이주 주기로 지금에 이르고 있다.
2. 오하우
카메하메하 3세가 통치하던 30년간은 하와이 왕조 역사상 가장 번영을 누린 시대였다. 그는 1840년에 헌법을 공포하여 하와이를 전제군주국에서 입헌군주국으로 바꾸면서 각종 국가 및 사회제도의 정비도 이루어졌다. 경제의 중심도 고래잡이에서 사탕수수 재배로 옮겨졌다. 1850년에는 수도를 마우이의 라하이나에서 오아후의 호놀룰루로 옮겼다.
<와이키키 해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해변 중에 하나인 와이키키 해변은 넓은 모래사장과 깨끗한 바닷물, 여러 가지 피부색갈이 조화롭게 누비고 있는 자유롭고 여유로운 거리, 해변을 따라 즐비한 현대식 호텔과 상가 등으로 지구상 몇 안되는 유토피아 중의 하나라고 일컬어지고 있다. 화산섬이라 부족한 모래를 외국에서 수입하여 조성한 해수욕장, 여행객들이 불편없이 마음놓고 즐길 수 있도록 애쓰고 있는 각종 치안제도, 해가 지면 옛날 고래 기름으로 불을 밝혔던 가로등의 향수를 느낄 수 있도록 배려한 해변가 가스등, 이러한 여러가지 주정부의 세심한 배려가 세계의 휴양지로서 명성을 이어가게 하고 있다.
<와이키키 해변> <한국지도마을>
<다이아몬드헤드> 와이키키 어느 지역에서나 쉽게 보이는 다이아몬드 헤드 산은 1825년 하와이를 찾은 탐험가들이 이곳 사화산에 있던 크리스탈의 반짝임을 보고 다이아몬드라 착각하고 붙여진 이름이다. 용암동굴과 계단을 통과해 한시간도 채 못되어 정상에 올라 넓고 푸른 바다를 조망할 수있는 오하우의 대표적인 관광지 중의 하나라고 하겠다.
미국은 황금을 찾아 몰려다니는 사람들이 많은 그림자를 남겨놓은 땅이다. 주식투자의 귀재라고 불리우는 워렌버펫도 황금을 찾아 헤메던 미국선조들의 후예답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돈에 목숨을 걸고 또한 평생을 돈을 쫓으며 살고 있는 자본주의의 구더기들이 우글거리는 땅이 미국이라고 하면 지나친 말일까? 물론 아름답게 돈을 쓰는 유럽신사의 후예들도 적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어느 나라든 돈이 있는 곳에는 미국 서부의 깽의 후예와 유럽 신사의 후예들이 공존하기는 마찬가지다. 우리나라도 법보다는 도덕과 양심의 가치를 높게 보는 부끄럽지 않게 돈을 버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합법을 가장한 탐욕스러운 재벌도 있다.
<한국지도마을> 하나우마베이로 가는 길에 마련된 주차장에서 차를 세우고 모두들 특히 한국인들이 사진 찍기에 여념이 없는 곳이 있다. 해변을 바라보고 있는 산위에 마리나릿지라는 마을의 형상이 꼭 우리나라 지도 흡사해서 한국지도마을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마치 남북한 합동 응원단이 흔들고 있는 깃발이 하와이에 나부끼고 있는 형상이다. 사탕수수 농장에 일하러 왔다가 죽은 우리 선조들의 영혼이 여기에 깃발을 만들었는가.
<카할라 고급주택가> 바닷가에는 수백만불짜리 별장들이 즐비하다. 과거에 제법 이름깨나 날렸던 우리나라 가수의 별장도 있다고 한다. 주택가 깊숙이 바닷물이 들어와 이루고 있는 호수에는 요트들이 많이 정박해 있다. 부의 수준이 어느 정도 되어야 부자라 할 수 있을까. 부자는 상대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외적인 부자의 기준은 그 나라에서 5%정도 되어야 부자축에 들수 있을까? 그러나 내적인 부자의 기준은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돈에 대한 만족수준이 다르기 때문이다.
<하나우마베이> <폴리네시안 민속촌 원주민 춤>
<하나우마베이> 아름다운 산호초와 천연색의 열대어들이 살고 있어 '해양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다. 앞바다의 산호초가 파도와 거친 해류를 막아주기 때문에 수영하기에도 안전하며 푸른 물과 깨끗한 백사장이 있어 초보자도 무리없이 즐길 수 있는 스노클링 명소로 손꼽힌다. 환경보호를 위해 매주 화요일은 개방하지 않는다. 우리나라 물고기들은 검은 색 계통이 대부분인데 열대어들은 총천연색이어서 참으로 아름답기도 하다.
자연만큼 아름다운 것은 없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는 현장이다. 사람들이 행복을 위해 가장 중요시하는 것이 돈과 아름다움일 것이다. 경제와 예술이 인간사회를 지탱하는 두 기둥이라는 이야기이다. 자연은 하나님이 만드신 예술작품이다. 그것을 모방하는 것이 인간예술작품이다. 음악도 미술도 문학도 교과서는 자연 속에 있다. 자연은 인생의 교과서요 천국의 모형도라고 한다면 지나친 말일까?
<폴리네시안 민속촌(Polynesian Culture Center)> 하와이는 폴리네시아 문화권에 속해 있다. 폴리네시안 민속촌은 폴리네시아 문화를 17만제곱미터에 압축해 놓은 곳이다. 유명한 오아후 관광 명소의 하나로 관광객들이 항상 붐빈다고 한다. 옛 하와이인들의 생활 풍습을 한눈에 볼 수 있게 꾸며 놓았고, 특히, 7개의 폴리네시안 마을(하와이, 사모아, 아퀘사스, 피지, 뉴질랜드, 통가, 타히티)에는 직접 그 나라로부터 원주민들이 이주하여 살고 있어 살아있는 그 나라의 고유 문화와 풍습을 만날 수 있다. 정해진 시간에 관광객들을 위해 각 부족의 춤과 노래가 펼쳐지고 있는 물길이 있고, 주위에는 각종 열대식물이 만발한 테마파크가 마련되어 있다. 단순히 눈으로 보는 것 뿐아니라 춤과 노래를 배우고 토속음식을 맛 볼 기회도 주어진다. 몰몬교에서 운영하고 있으며 민속촌 인근에는 몰몬교 성전과 마을이 있다. 일요일은 휴장한다.
침략자들의 후손인 백인들이 활개치고 있는 원주민의 설움. 그 땅의 주인이면서도 외지인에게 밀려 원주민 보호대책이라는 미명아래 일정 지역에 모여 광대노릇을 하고 있는 원주민. 항상 외부를 바라보지 않고 자기들끼리 치고 박고 싸우다가 자초한 설움이라는 것이 역사의 기록이다. 항상 밖을 보고 내부를 환경변화에 적응하고 극복할 수 있도록 개혁하는 것만이 생존과 성장의 기본이라는 것을 가장 잘 대변해 주고 있는 현장이다.
오하우 섬에는 카메하메하 왕의 동상, 이올라니 궁전, 주정부 청사 등 역사의 흔적이 많이 있다. 하와이어로 외로운 사람이라는 뜻을 가진 카메하메하(재위 1795~1819년) 왕은 하늘이 크게 갈라지면서 천둥 번개와 함께 비바람이 몰아치다가 멎자, 서쪽 하늘에서 꼬리를 길게 단 유성이 떨어졌는데 그때 태어났다고 한다.
<바람산을 뒤로 하고> <카메하메하 동상과 궁전>
쿡 선장이 발견할 당시, 하와이 제도는 각지에 사는 부족이 서로 패권을 다투는 군웅할거의 시대였다. 그 중에서도 가장 세력이 컸던 것은 하와이 섬의 왕 칼라니오푸우(Kalaniopuu)였다. 카메하메하는 이 왕의 조카로, 어린 시절부터 그의 궁전에서 자랐다. 젊었을 때 카메하메하는 쿡 선장의 배를 견학하였는데 거기에서 서양 문명을 접하고, 현대적인 총포의 위력을 보았으며 과학적인 지식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배웠다. 1782년 칼라니오푸우 왕이 죽자, 카메하메하는 하와이 섬의 경쟁 부족들을 상대로 전쟁을 벌였다. 현대적인 무기와 두 명의 전 영국 선원의 도움으로 마우이와 몰로카이 섬을 정복하고 오아후 섬을 정복하기 위한 준비를 하던 중, 케오우아 족의 침략 소식을 듣고 다시 하와이 섬으로 돌아왔다. 신의 도움이 필요했던 카메하메하는 전쟁의 신을 위해 카와이하에(Kawaihae)에 거대한 돌사원을 세웠다. 케오우아는 카메하메하로부터 카와이하에 대사원의 봉헌식에 초청을 받아 왔다가 한 추장에게 살해되었다. 1795년 오아후를 정복하여 카우아이를 제외한 하와이 왕국을 이루게 되었으며 마우이 섬의 라하이나를 수도로 정하고, 스스로를 카메하메하 대왕이라고 칭하며 왕국을 수립하였다. 1810년에는 그 세력이 대단해져, 카우아이의 추장, 카우무알리가 싸우지 않고도 충성을 맹세해 왔다. 이렇게 해서 하와이 제도 전체를 제패한 카메하메하는 외국과의 교역을 시작으로 서구 문명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물밀듯이 밀려 들어오는 서구 문명의 영향 속에서도 그는 조상들이 섬겨 왔던 하와이 신을 숭배하고 풍습을 중요시하여, 섬 원주민들을 당혹하게 하지 않음으로써 현명하게 식민지를 통솔하였다. 그리하여 1819년 5월 8일, 그가 죽을 때까지 하와이는 그의 탁월한 통치력 덕분으로 태평양의 많은 섬들 중 유일하게 독립된, 평화로운 왕국으로 남아 있었다.
<바람산> 팔리 전망대(일명 바람산)은 안경, 동전이 날아갈 정도로 거센 바람이 많이 부는 지역이기 때문에 바람산으로 불리운다. 하와이를 통일시킨 카메하메하 대왕의 오하우지역 마지막 전투 장소였던 역사적 유적지로서도 유명하다.
1819년 카메하메하 1세가 죽자 그의 장남인 카메하메하 2세가 왕위에 올랐으나 하와이는 위대한 지도자를 잃음으로써 혼란의 시기를 맞게 되었다. 그러나 카메하메하 1세의 애첩이자 거구에 명석한 두뇌를 소유한, 하와이 역사상 가장 위대했던 여걸 카아후마누(Kaahumanu)가 어려운 시기를 잘 극복해 나갔다. 1820년 4월 보스턴으로부터 도착한 선교사들로부터 왕실이 앞장서 적극적으로 기독교를 받아들였다. 그 결과 불과 20여 년 만에 기독교국가로 인정될 정도의 교세 확장을 이루었다. 카메하메하 2세가 런던 외유 중 병사함으로써 1824년 동생이 왕위를 계승하여 카메하메하 3세가 되었으며 그의 치하 30여 년이 왕조 역사상 가장 번영을 누린 시기이다. 산업 근대화를 이루고 문화 예술도 발전시켰으며 1840년에는 신헌법 발표에 따라 입헌군주국으로 승인받게 되었다. 그리고 수도를 마우이섬의 라하이나(Lahaina)에서 호놀룰루로 옮기고 사회제도도 점차로 정비해 나갔다.
카메하메하 3세 때까지 하와이의 최대 수입원은 포경업이었다. 고래잡이 시기인 봄과 가을이 오면 연간 500여 척의 포경선이 호놀룰루, 라하이나, 힐로, 코나항에 출입하였고 이 도시들은 선박의 수리와 공급품, 술, 도박, 숙박 등의 중심지가 되었다. 포경업은 고래의 부족과 석유의 등장으로 쇠퇴기에 들어갔으나 다행히 본토는 골드러시 시대로 접어들어 미국서부의 해안에 인구가 급증하면서 하와이가 사탕 공급의 원천지로 주목받게 되었다. 미국의 남북전쟁을 전후하여 하와이의 사탕수수 산업은 그 중요성을 더해가고, 하와이의 사탕수수와 파인애플 농장주들은 부족한 노동력을 처음에 유럽에서 수입하려 했으나 여의치 않자 아시아에서 수입하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중국인 노동자들이 들어왔고 1880년대부터는 일본인 노동자들이 하와이로 이주했다. 1902년도에는 한국인 노동자들도 들어오기 시작했다.
제7대 칼라카우아(Kalakaua) 왕은 하와이인에 의한 왕권회복을 부르짖으며 이올라니 궁전을 세우고 문화예술 진흥에 힘쓰며 미국과 호혜조약을 맺어 하와이 농산물을 무관세로 미 본토에 수출하는 등 제 2의 하와이 왕조 전성기를 구가하는 듯 했으나 기득권 유지에 불안을 느낀 백인세력의 압력으로 왕권을 크게 제약하는 신헌법을 공포해야 했고 이런 와중에 건강이 나빠져 샌프란시스코에서 요양하던 중 사망했다.
<이올라니궁전> 이올라니 궁전은 1879년 칼라카우아 왕에 의해 궁전의 초석이 세워지고 1882년에 완공된 건물로서 하와이 왕조의 역사를 대변하는 유적지로 알려져 있다. 1970년하와이 공원 관리국에 의해 이올라니 궁전은 다시 복원되어 오늘날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위치는 호놀룰루 중심가인 리처드거리와 킹거리 교차로에있다. 하와이 최초의 수세식 화장실이 보존되어 있다.
기독교 신자이며 온건한 성격의 여자로 제7대왕의 여동생인 릴리우오칼라니(Liliuokalani)가 백인들의 지원아래 제8대 여왕에 오르자 예상과 달리 도리어 왕권회복을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미국과의 합병을 주장했던 백인 기득권층은 이에 놀라 1893년 미 해병대의 도움을 받아 왕궁을 포위하고 압력을 가하여 여왕으로부터 왕권포기 서명을 받아냄으로써 하와이왕조는 막을 내리고 샌포드 돌(Sanford Ballard Dole)을 수반으로 하는 백인 중심의 하와이 공화국(1894-1898)이 탄생하였다. 친미 백인세력의 지배하에 있던 하와이는 1898년 스페인 미국전쟁의 발발로 그 군사적 중요성이 인정되어 같은 해 8월 21일 합병안이 미의회를 통과했으며 1900년에 정식 영토가 되었다.
<주정부청사> 1969년에 완공되었고 주지사와 부지사집무실, 회의실, 의원사무실 등이 있다. 화랑식의 현대적 건축물로서 이 청사는 화산 모티브로 하였기 때문에 중앙을 투명하게 해 하늘을 바라볼 수 있게 만들어 화산 내부에 있는 듯한 느낌이 들도록 했다. 또한, 8개의 기둥은 하와이 제도의 8개 섬을 상징한다. 1층 로비에서 하늘을 볼 수 있으며 건물 전면과 후면이 똑같이 생겼다. 전면에 하와이 사람들이 높이 추앙하고 있는 데미안 신부의 동상이 서있다. 데미안 신부는 벨기에 농가에서 태어나 신부가 된 후 1827년부터 하와이 선교에 헌신했는데 특히 몰로카이 섬에서 나병환자들을 돌보며 농사짓고 집수리하는 법은 물론 악기 다루는 법 등을 가르치다가 나병에 걸려 1889년 49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다.
3. 마우이
신혼여행지로 각광을 받고 있는 마우이(Maui)섬은 미국내 10대 아름다운 지역의 하나로 선정된 곳으로 "계곡의 섬" 이라고도 한다. 하와이에서 2번째로 큰 섬으로 제주도보다 약간 크다. 3055M의 할레야칼라 국립공원, 꽃을 피우는데 20년이 걸린다는 은검초, 절묘한 산세와 푸른 계곡의 이아오 계곡, 하와이 수도였으며 고래잡이 기지로써 역사의 현장이 잘 보존되어있는 아름다운 항구도시 라하이나, 현대적인 호텔과 골프장을 갖춘 카아나팔리 등이 신혼부부를 유혹하고 있다.
마우이는 하와이 제도의 모든 섬들 중 수영할 수 있는 해변이 가장 많다. 신혼여행지로 인기가 좋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마우이는 하와이 제도 중에서도 가장 낭만적인 섬이라 할 수 있다. 사람뿐만 아니라 고래들도 많이 찾아오기 때문에 12월부터 4월까지는 여러 종류의 고래들을 구경할 수도 있다.
<라하이나 (Lahaina)> 라하이나는 바다가 해안선을 따라 2km 가량 이어지는 아기자기하고 유서깊은 항구도시로 옛 왕조의 수도였고, 고래잡이 전진 기지로 매우 번창했던 곳이었으나 수도를 호놀룰루로 옮긴 후 침체되었었다. 지금은 나무그늘이 미치는 범위가 1000평이나 되는 100년 넘은 반얀트리(BanYan Tree)를 중심으로 오래된 역사의 흔적들이 많이 보존되어 있어 관광객들이 붐비는 지역이 되었다.
<라이히나 항구 대포> <라이히나 번얀트리>
마우이의 마지막 추장이었던 카헤킬리는 카메하메하 대왕의 평생 숙적으로 한 때 오아후와 몰로카이를 자기 지배하에 두기도 하였다. 카헤킬리가 오아후에 있었던 1790년 카메하메하는 영국 배에서 얻은 대포와 영국 선원의 도움을 얻어 카헤킬리의 군대를 이아오 계곡에서 몰살시켰다. 1793년 카헤킬리는 오아후에서 죽고 카메하메하는 전함을 이끌고 라하이나에 상륙하여 1795년 마우이를 정복하였다. 1800년에는 마침내 라하이나에 수도를 옮겼다. 1800년대 중반까지 라하이나는 태평양 포경업의 중심지였으며 1846년 한해 동안 라하이나를 찾은 포경선은 400척이나 될 정도였으나 1860년대에 이르러 고래 기름이 석유에 의해서 대체되기 시작하면서 그 수가 점차로 줄어들었다. 1870년 하이쿠(Haiku)에 처음 심어졌던 사탕수수는 1960년대 카아나팔리 지역의 관광 산업 붐이 일기 전까지 마우이의 주요 산업이 되었다.
<카아나팔리(Kaanapali)> 황금의 6마일이라 불리는 아름다운 해변을 따라 쉐라톤, 웨스턴, 하얏트 등 호화로운 호텔이 늘어서 있는 마우이를 대표하는 최고의 종합 리조트이다. 각종 해양 스포츠를 위한 시설과 골프장이 잘 갖추어져 있다. 신혼부부들이 몇 일간씩 머물며 서로를 이해해 가는 장소로는 안성맞춤의 무대라고 하겠다.
<이아오 계곡 (Iao Valley)> 일명 ‘바늘산’ 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이곳은 바늘모양의 뾰족한 봉우리가 인상적이다. 비가 많이 오는 이곳은 열대식물들이 무성한 아름다운 계곡이다. 계곡에는 각 국의 이민사를 알 수 있는 공원으로 조성해 놓았다. 한국공원도 크게 자리 잡고 있다.
<이아오 계곡> <카아나팔리>
하와이에서 사탕수수 산업이 본격적으로 궤도에 오르자 노동력이 부족하여 외국에서 수입하기 시작하였다. 하와이 농장주들은 조선 정부와 계속 접촉을 갖고 1902년 11월 고종이 노동 이민을 허락함으로써 한인 노동자들의 이민이 시작되었다. 하와이 농장주들은 조선의 항구 도시 거리마다 하와이의 풍물, 작업내용, 미국 달러로 임금을 지급한다는 광고 포스터를 붙이고 노동자를 모집했다.
1개월에 16달러를 지급한다는 광고는 당시 대기근으로 가난과 굶주림에 시달리던 조선 노동자들에게는 일확천금의 기회로 여겨졌다. 최초 모집된 한인 이민단은 통역관 2명을 포함하여 총 121명이었다. 대부분 인천 내리교회 신도들이었던 이들은 1902년 12월 22일 인천항을 떠났다. 경유지 일본 고베 항에서 신체검사로 20명이 탈락하고 101명만이 1903년 1월 13일 호놀룰루에 도착했다. 호놀룰루에서 다시 신체검사를 실시, 추가로 15명이 탈락하여 최종적으로 86명만이 상륙 허가를 받았다. 이들 최초 하와이 노동자들은 대부분이 남자들로, 결혼을 하여 가정을 이루기를 원했으나 한인 여성이 거의 없어 결혼을 할 수 없었다. 당시 법으로 동양인과 미국인의 결혼을 금하였기 때문에 현지인과도 결혼할 수 없었고, 결혼하러 한국을 다녀온다는 것은 거리와 비용 탓에 상상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생겨난 것이 사진 결혼이다. 서로가 사진을 중매쟁이를 통해 주고받고, 이 사진을 들고 아가씨가 남자를 만나러 하와이로 건너오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1910년부터 1924년까지 약 950명 정도의 사진신부가 하와이로 건너왔다.
이렇게 해서 건너온 아가씨들에게 기다리고 있는 것은 척박하고 힘든 고생의 나날들이었다. 대부분의 경우 낮에는 사탕수수밭에서 노동을 했고 밤에는 삯바느질을 하며 오로지 자식과 자식교육에 온 힘을 쏟았다. 힘들고 고단하고 모든 일이 순탄치 않았을 사탕수수 노동 이민자들이지만 쌈짓돈을 모아 해방 전까지 고국에 무려 300만 달러가 넘는 거금을 보냈다고 한다.
1914년 하와이에서 군사력을 키우며 일제로부터 무력 독립을 계획하던 박용만은, 미국 유학 후 LA에 머물고 있던 이승만을 하와이로 초청하다. 이들은 잡지 《한국태평양》을 창간, 한국이 독립하려면 미국정부와 국민들의 지지를 얻는 외교방식을 택해야 한다는 자신의 주장을 펴며 교포사회에 독립정신을 고취시키고자 했다. 또한 외교를 통해 일제 식민의 부당함을 알리는 데 노력하였으며 이승만 본인이 설립한 한인 기독학원을 지원했다. 그러나 이후 이승만은 동지회를 결성하여 무장투쟁론을 주장하던 박용만 등과 대립하였다. 동지회는 미주 각 지역에 지부를 설치하고 이를 통해 상해 임시정부를 재정적으로 도왔다. 한편 동지회는 1953년 한인 기독학원을 폐교하고 그 건물을 매각하여 남은 돈 18만 달러를 하와이와 인연이 깊은 인천에 기증, 인천과 하와이의 첫 자를 각각 따서 만든 인하대학교 설립의 초석이 되었다. 이러한 활동을 등에 업고 이승만은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으로 추대되었으나 4.19혁명으로 결국 다시 하와이로 망명하여 1965년 7월 별세했다.
<할레야칼라 천문대> <할레야칼라 분화구>
할레야칼라 국립공원 (Haleakala National Park)> 세계최대의 휴화산인 할레아칼라는 3,055m로 미국이 자랑하는 세계적인 천문대와 분화구가 있다. 태양의 집이라고 불리는 이곳은 정상까지 도로가 정비되어 있어 차를 타고 구름을 뚫고 지나와 발아래 화산의 아름다운 분화구를 볼 수 있다. 산 정상에 이르기까지의 절경은 화성의 한 가운데를 지나가는 듯한 신비로움을 준다. 마우이관광의 하이라이트로 손꼽는다. 분화구가 마치 달표면 같아 나사(NASA) 가 우주 조종사들의 적응 훈련장소로 이용하기도 했으며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가 이곳에서 촬영되었다.
4. 하와이(빅 아일랜드)
오하우섬의 7배에 이르는 하와이 섬은 섬들 중에서 가장 젊고 넓다. 하와이 섬은 눈이 덮인 산기슭에서부터 지금도 바닷가로 흘러내려 바닷물과 만나 수증기를 뿜어내며 땅을 넓히고 있는 검은 용암과 다양한 모래사장이 있다. 하와이 섬은 조용하고 아름다우면서 한편으로는 하와이 제도에서 가장 다이나믹한 힘과 용솟음치는 자연경관을 함께 경험할 수 있는 독특한 관광지이다. 하와이 섬은 크게 산맥을 경계로 동쪽 ‘힐로’ 와 서쪽 ‘코나’ 지역으로 구분된다.
<하와이 화산 국립공원 (Volcano National Park)> 현재도 불을 뿜고 있는 활화산과 시뻘건 용암이 쉴 틈 없이 흘러내리는 곳이다. 마우나로아와 킬라우에아 화산을 포함해서 880km² 에 달하는 광대한 지역이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다.
<분화구> <용암과 바다가 만나는 곳>
<마우나 로아 (Mauna Loa)> 신비한 혹성의 세계와 같다. 너무나 길고 넓어 정상을 정복하는 데는 도전하기 힘든 산이다. 화산 용암의 독특한 세계를 경험할 수 있어 아주 뜻 깊은 곳이다.
<마우나 케야 (Mauna Kea)> 태평양의 최고봉으로 약 4500만 년 전에 마지막으로 분출한 이 산은 4205m의 높이로 아직 완전한 사화산으로 간주할 수 없는 산이다. 마우나 케야는 "흰산" 이라는 뜻이고, 12월에서 5월까지 정상에 흰 눈이 쌓여있다. 하와이에서 유일하게 마우나로아 산과 함께 눈을 구경할 수 있는 산이다. 해발 3000m 지점에 안내센터가 있고 정상에는 NASA가 있다. 세계 최대의 적외선 망원경이 있는 돔과 1978년 일본 천문대에서 설치한 초대형 망원경이 있다.
옛날부터 하와이 원주민들은 하와이 화산 국립공원 내 킬라우에아 화산에 불의 여신 펠레가 산다고 믿고 있다.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이 산은 170년 동안 30여회나 분화를 했다. 펠레는 하와이 수호신이다. 김이 솟아오르는 분화구 곁에는 현지인들이 무사안녕을 빌기 위해 펠레 여신에게 바친 음식물들이 놓여있다.
전설에 따르면 펠레의 여신의 고향은 원래 니이하우였다. 변덕장이에다가 심술이 심한 이 불의 여신은 형부를 사랑하다가 들통나 가족들로부터 쫓겨나 카우이 섬에 살다가 오아후, 마우이 섬 등을 배회하다 지금은 하와이 섬 킬라우에아 화산에 산다고 하는데 이는 해저 화산의 폭발로 인해 하와이 제도가 생성된 순서를 말해주고 있다는 것을 지질학자들이 밝혀냈다.
분화구 주변에는 오휘아 레후아('Ohi'a lehua)라는 하와이에 만 산다는 꽃이 있다. 옛날옛적에 하와이 마우나로아 화산에 어떤 목수가 아름다운 연인과 사랑을 노래하며 다정히 살았다. 어느날 불의 여신인 펠레가 목수의 마음을 사로잡고자 했지만 실패하자 나무로 만들어 버렸다. 나무가 된 목수를 애타게 그리던 여인은 펠레에게 찾아가 연인을 살려달라고 간청을 했지만 안된다며 정히 같이 있고 싶으면 그 나무의 꽃으로 만들어 주겠다고 했다. 그렇게 해서 피어난 꽃이 20년이 되어야 꽃을 피운다는 은검초 즉, "오휘아(나무를 의미) 레후아(꽃을 의미)"라고 한다. 이 꽃을 보면 그리운 연인을 만난다고 한다.
하와이의 상징인 훌라춤의 유래도 펠레여신과 연결이 되어 있다. 고대 하와이 음악에 따라 발생한 하와이의 독특한 무용으로 ‘훌라’란 춤춘다는 뜻이다. 불의 여신 펠레를 위해서 언니 피아카 여신이 춤을 춘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사모아와 타히티섬의 춤과 비슷하며 잔걸음질을 하면서 허리 부분을 떠는 것이 특징이다. 손과 팔을 유연하게 움직인다.
국립공원 안에 있는 화산박물관에 가면 펠레의 초상화, 펠레의 눈물과 펠레의 머리카락을 볼 수 있다. 펠레의 눈물은 동전보다 작으며 유리처럼 윤이 난다. 화산 폭발로 용암이 표출될 때 고온 용암이 좁은 분화구를 통해 빠른 속도로 뿜어져 나오면서 갑자기 식어 물방울 모양과 머리카락 모양의 유리질 물질로 변한 것이다.
<은검초> <분화구 앞 펠레를 위해 진설한 음식>
<하와이 화산의 여신 펠레> <아카카 폭포>
전쟁때 실수로 화산분화구에 폭탄을 투하했던 조종사가 펠레여신의 저주로 귀국하여 몹쓸 병에 걸려 죽었다고하는 이야기도 있고, 어느 관광객이 하와이에서 화산암을 가지고 고국으로 돌아가 불행한 일이 생겼다고 하는데 그 이유가 화산신 펠레가 화가 나서 저주를 내린거라고 한다. 전해져 내려온 이야기가 아니라 국립공원 관리자가 화산암을 가지고 가지 말라는 뜻에서 지어낸 이야기일 것이라고도 한다.
<힐로(Hilo)> 호놀룰루에 이어 하와이 제2의 도시이며 연간 강수량이 3400mm로 비가 많은 힐로는 열대 식물이 번성하고, 서양난등 열대 꽃과 마카데미아 넛 등의 재배가 활발하다. 관광보다 정치, 교육, 수산업 및 농업이 중심이다.
<아카카 폭포> 높이 126m 로 하와이에서 가장 아름다운 폭포이다. 수직폭포로 일직선으로 낙하하는 생명력이 있는 물줄기가 일품이다. 신비로운 사실은 이지역의 암반이 약해 폭포에 의해 웅덩이가 파이면서, 폭포가 조금씩 이동해 간다는 사실이다. 폭포에 이르는 길은 초록의 열대식물이 무성해 마치 열대정글에 온 듯한 느낌을 준다. 주립공원으로 조성되어 있다. 날씨가 좋은 것에 비하면 하와이에는 울창한 수림이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땅이 화산석이기 때문일 것이다.
<코나(Kona)> 코나커피의 산지로 유명한 이곳은 힐로와는 대조적으로 비가 적고 건조하며, 일 년 내내 밝은 태양을 볼 수 있는 세계 최고의 열대 휴양지이다. 호텔과 부티크, 쇼핑센터 등이 밀집해 하와이 섬의 고급 휴양지역으로 부상되고 있다. 날씨도 시원한 기후로 휴양지로써의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로얄 코나 커피(Royal Kona Coffee)> 로얄커피와 라이온커피를 제조 판매하고 있는 제조업체의 공장과 방문자 쎈타 실내에는 커피생산을 위해 사용되던 옛날 기구가 전시되어 있다. 화산섬 빅아일랜드 지역의 독특한 지질과 기후가 이상적으로 결합되어 그 만의 독특한 커피를 만들어낸다. 원두를 최소한 10% 이상 함유해야만 코나(KONA)라는 브랜드를 사용할 수 있다.
<힐튼 와이콜로아 호텔> 1988년 약 3억 6천만 달러를 투자해 오픈한 1238개의 객실을 소유한 호텔로 순수 호텔 부지만도 25만 제곱미터이고, 모래사장, 구름다리, 폭포동굴, 그리고 약 1마일이나 되는 수로를 만들어 한번에 20여명이 탈 수 있는 디즈니 풍의 배를 띄워 누구나 즐길 수 있게 해 놓았다. 게다가 100명이 탈 수 있는 스위스제 전기차등을 설치해 놓고 있어 코나지역의 필수 관광 코스가 되고 있다. 특히 1층 로비에 1300품목에 3백만 달러어치의 동서양 미술품 컬렉션이 있으며 라군, 팰리스, 오션의 3개 타워로 구성되어있다. 돌고래 쇼장은 물론 챔피언식 골프코스도 유명하다.
코나는 현재의 부를 상징한다면 힐로에서는 미래의 부를 기대해도 좋을 것 같다. 옛날에는 농토를 많이 가진 사람이 부자였다. 그러나 지금은 현대식 건물들을 많이 가진 도시 사람이 부자다. 미래는 아마도 다시 농촌이 가치있는 시대가 될 것이다.
첫댓글 정말 인생을 멋지게 사시는 것 같습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