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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암면 소재지는 동경 128˚, 북위 35˚에 자리하여 이곳 중심으로 동북의 선남면과 남으로 고령군에 통래되고 북으로 성주읍과 동남으로 고령다산으로 이어지는 도로는 주민생활의 근간이 되고 있으며 앞으로 구미∼현풍간 고속도로 IC가 생기면 교통요충지로서 발전의 여지가 많은 곳이기도 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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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신라 이후 조곡, 초곡, 두의곡, 대동방으로 구분 되여 조곡방은 대봉, 상신, 죽전, 마월, 계상리 지역이고 초곡방은 중거, 장학, 명포, 유서의 지역이고 두의곡방은 덕평, 본리, 상언, 용정, 선송, 용계 지역이고 대동방은 문명, 운산, 기산, 동락, 사곡지역을 맡아 1300여년의 긴 역할을 해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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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년 3월에 조곡과 초곡이 병합 되여 성암면이 되고 두릉과 대동면을 병합하여 용두면이 되었으며 1934년 2월 1일 용두면과 성암면이 합면하여 지금의 용암면이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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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2월 유서리가 선남면으로 이관되고 1989년 1월엔 명포, 장학리가 선남으로 이관되어 법정16개리와 행정26개분리로 되어 있으며 또한 근교농업의 적지이며 교통의 요충지로서 발전지향적인 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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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 용암면 대봉리 소개
- 봉 산(封山, 鳳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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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암면 소재지에서 성주로 이어진 지방도의 3.5km에서 서남방향의 갈림길의 1.5km 지점에 위치하여 두의천변에 자리하여 동쪽으로 조실마을과 이웃하고 있다. 마을 남쪽에는 1400년경 太宗의 胎를 봉안하여 봉산이라 한다. 星山李氏 集姓村인 이곳에는 약30여호가 살고 있다. 義士 李士龍(1612∼1640)의 후손이 월항면 인촌리에 모셨던 옥천서원의 사당을 이마을 충의제에 봉안하여 향사하고 있다. 충의제는 李義士의 후손이며 문명과 덕망이 높았던 四宜 李成根이 선대를 위해 晩年을 보내며 창건했고 많은 문도를 길렀던 곳이다.
- 조 실(租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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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봉산(516m0에서 발원된 두의천이 마천에서 흐르는 계곡과 합류되는 평야지 서편에 남향한 20여호의 마을이다. 자연환경의 산수가 잘 어울려 앞산의 명기와 함께 잘 알려진 명지이고 서남으로 봉산마을과 뒷산 고개너머 안조실과 멀지않다. 宣祖때 永同에서 密陽人 朴碧龍이 入鄕해서 그 후손이 살며 肅宗때 金海人 金文達이 入鄕하여 아들 漁隱 金先生(1677年生)이 世居했고 후손들이 살고 있고 純祖때 한성에서 坡平人 尹勉常이 入鄕해 후손이 살고 있다. |
ㅇ 수륜면 소개
가야산 기슭에 자리 잡은 수륜면의 총면적은 87.92㎢이다. 그 대부분은 산지이고 경지면적은 약 18% 정도이다. 그 연혁의 대강은 다음과 같다. 조선시대 수륜면의 행정구역은 현재의 白雲洞·新坡洞·赤松洞·鳳陽洞이 靑坡坊으로, 新亭洞·水成洞·松溪洞이 大理坊으로, 修倫洞·午川洞·溪亭洞이 志士面으로, 南隱洞·甫月洞·鵲隱洞이 法山面으로 각기 구성되어 있었다. 그 후 1914년 4월 1일 靑坡坊·大理坊을 靑坡面으로, 志士面·法山面을 志士面으로 합하여 2개 면을 두었다가 1934년 修倫面으로 합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1936년 7월 20일 丙子年 大洪水로 면사무소를 수륜동에서 현재의 신파동으로 이전하였다. 1983년 2월 15일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고령군 덕곡면 聖洞이 편입되어 본 면 지역이 다소 확장되어 현재 법정 14개리, 행정 25개리, 1,500여세대의 인구는 3,900여명이다. 1988년 조례제 1076호로 洞을 里로 개정하였다.
ㅇ 수륜면 보월리 소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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甫洞과 月村 마을의 이름을 따서 甫月로 불리워지는 이곳은 까치산에서 흐르는 계곡이 대가천에 합류하는 부위를 중심으로 별뫼(星山;230m)와 달뫼(月山;200) 주변과 그 북쪽에 위치하면서 탑안, 새터, 기만, 월촌, 아래맏찔, 웃맏찔로 구성되어 있다. 省法山坊에 속했던 이곳은 옛날 교통이 근대화되기 전에는 맏찔마을을 거쳐 七嶺고개를 넘어 대구방면으로 통하던 길목이었으나 山間地로서 지금은 잡목으로 뒤덮혀 버렸다.
탑안(塔內)·탑동(塔洞) 이 마을에는 통일신라시대 때 세워진 높이 5.1m의 3층석탑 (지방유형문화재 제119호)이 있다. 조선 영조 때 이광국이라는 사람이 이 마을 이름을 탑이 있는 마을이라 하여 탑안, 혹은 탑동 이라고 하였다. 이곳에는 星州의 土姓인 星州人 李崇仁의 후손들이 世傳하는데, 현재 8 가구가 살면서 농업에 종사 하고 있다.
새뜸·신기(新基) 탑안 주민들의 일부가 새로 잡은 터이다. 그로 인해 마을 이름을 새뜸, 혹은 新基라고 부르게 되었다. 1927년에 첫 이주자가 있었다고 하는데, 현재 10 가구가 살고 있다
월 촌(月村) 국도 33호선에서 동북쪽으로 약 800m 지점에 위치한 마을로서, 1875년 경에 작천의 星州 李氏가 入鄕하였다. 마을 뒷산이 동쪽에 떠오른 달모양으로 생겼다고 하여 月山의 月字를 따서 月村이라고 하였다. 현재 24 가구 68 명이 거주하며, 이중 성주이씨가 13 가구, 그외 여러 성씨들로 분포되어 있다. 마을 남쪽에 월남초등학교가 위치하고 있었으나 폐교되고 학생들은 현재 모두 지사초등학교에 다니고 있다.
귀만·귀암·보리골·보동(甫洞) 원래는 보리골이라고 하였는데, 마을의 형태가 月村의 뒷산인 月山을 바라보고 있다고 하여 甫洞이라고 하기도 하고, 또 마을 뒷산의 모양이 거북과 같이 생겼다고 하여 귀암이라고도 하였다. 지금은 귀만으로 통하고 있다. 현재 2 가구가 살고 있다. 1993년의 경지정리 실시로 인해 옛 모습이 많이 바뀌었다.
웃맏질·상형곡(上兄谷)/아래맏질·하형곡(下兄谷) | |
이 마을은 북쪽으로는 용암면 상신리와 접하고, 남으로는 운수면과 접하며 중국의 春秋時代 施伯의 후손인 明나라의 行營將軍 施文用이 壬辰倭亂 때 援軍으로 왔다가 戰後에 이곳에 정착함으로써 逝江 施氏의 集姓마을을 형성하였다. 이곳에 살던 형제 중 아우가 분가하여 아래 마을로 내려가게 되자 형이 살던 곳을 兄谷이라 하였다. 그후 세대가 늘어남에 따라 위쪽에 있는 마을이라고 하여 上兄谷, 혹은 웃맏질이라고 하고, 동생이 분가해 나간 곳을 下兄谷, 혹은 아래맏질로 구분하여 부르게 되었다. 현재 맏질에는 逝江 施氏 12호 25명, 星州 李氏 7호 15명을 비롯한 29가구, 60명이 거주하고 있다. 대부분 미작중심의 농업을 영위하였으나 근래에 들어와 참외농사 6호, 축산농 5호가 나타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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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 수륜면 적송리 소개
통일신라이래 所件坊에 속하였던 이곳은 수륜면 소재지의 서편으로 가야산의 구릉과 늘붓고개 남쪽에서 33번 국도와 979번 지방도를 접한 완만한 언덕에 자리잡고 있다. 적송리 마을과 오인동, 학동, 분통골 마을이 자리잡고 있다. 수륜면 소재지에서 성주읍 방향 1km거리의 느릅(늘붓:楡)고개의 도로를 '느릅티'라고 부른다
적송리(赤松里) 고려시대에 장대왕이라는 사람이 海印寺의 주락전을 짓고 동쪽으로 가다가 이곳에서 하루를 묵을 때 赤松이 많은 것을 보고 이 마을의 이름을 赤松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적송리마을 뒤쪽의 계곡마을을 '땅개울'이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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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주막(新酒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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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6년경부터 이 동네 앞으로 海印寺로 가는 길이 생겼는데 인가가 없고 깊은 산골이라서 쉬어 갈만한 곳이 없이 불편하였다. 이때 해인사를 자주 드나들던 金氏라는 사람이 주막을 차리면서 하나 둘 인가가 생겨나게 되어 이곳을 새주막이라고 칭하게 되었다고 한다.
학 동(鶴洞)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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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太宗 때 조성된 마을이다. 마을 뒷산의 우거진 송림 속에서 봄이면 학들이 모여 새끼를 치고 번성하였기 때문에 이 마을의 이름을 학동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오인동(五印洞)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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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말에 藝文館提學을 지낸 문충공 陶隱 李崇仁의 다섯 아들 李次若·李次參 등이 이 마을을 이루고 효성과 우의를 다졌다. 이곳 뒷산에 五印齋를 건립하고 다섯 형제가 五印岩에서 놀았다고 한다. 五印岩은 현재 마을의 洞祭터이다. 이 오인암과 오인재의 이름을 따서 마을의 이름을 五印洞이라고 하였다.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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