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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조항 - 남해군 삼동군 미조리 * 평산포 - 남해군 남면 평산리 * 곡포 - 남해군 이동면 화개리 * 상주포 - 남해군 상주면 상주리 * 개의도 - 통영군 산양면 추도 * 소비포 - 고성군 하일면 춘암리 * 옥포 - 거제군 옥포(장승포) * 합포 - 마산시 합포동 * 적진포 - 통영시 광도면 초량리 * 당포 - 통영시 산양읍 삼덕리 * 저도 - 마산시 구산면 구복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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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차 출정도(出征圖)
2. 제 2차 출정(出征) : 1592. 5. 29. - 6.10.
조선 수군은 5월 29일부터 6월 10일까지 제2차 출동을 했다.
5월27일에 경상우수사 원균이 일본군이 사천과 곤양까지 쳐들어 왔다는 소식과 도움 요청이 왔다. 전라좌수군은 전라우수사에게 지원을 요청하고 독자적으로 출동하게 되었다. 2차 출동에서부터 기록은 거북선이 출전을 시작했다고 한다.
제2차 출동 때 치른 전투 : 사천해전, 당포해전, 당항포해전
☞ 사천해전 : 1592년 5월 29일
일본전함 10척이 사천, 곤양까지 진출해 왔다는 원균의 급보를 받은 전라좌수영 함대는 우수영과의 약속보다 앞서, 거북선 1척을 포함 판옥선 23척, 협선 15척으로 함대를 편성하고 좌별장 우후 이몽구와 같이 5월 29일 새벽에 수영을 출발하였다.
남해 노량으로 가는 도중 경상우수영 판옥선 3척을 이끌고 대기하고 있던 원균과 섬진강 하구의 하동 부근에서 합류하였고, 일본 대형왜선 12척이 사천에 정박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함대를 이동시켜 사천을 향해 항해하고 있을 때 일본전함 한 척이 시야에 포착되었다. 전부장 이순신(李純信)과 남해 현령 기효근이 나아가 격파하여 서전에 사기를 북돋았다.
사천만(泗川灣)에 도착하여 보니 일본군은 형세가 험준한 곳에 수백 명씩 진을 치고 대항할 태세였으며, 바다에는 12척의 적선이 정박해 있었다. 만(灣)의 입구(入口)로 진입을 시도하였으나 바다가 얕고 벌써 썰물이라 판옥선 같은 큰 배가 쉽게 돌진할 수 없고, 날도 어두워져 일단 함대를 뒤로 물린 채 공격을 삼가 하였다. 실질적인 연함 함대의 지휘관이었던 이순신장군이 일본군의 허점을 노려 적을 큰 바다로 유인한 다음 적을 궤멸시킬 계획을 세우고 함대를 천천히 후퇴시켰다.
함대가 뱃머리를 돌려 10리도 못나와 이순신 장군의 예상은 적중하였다. 일본군들이 산에서 내려와 배에 타고 조선함대를 추격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때마침 저녁 조수도 밀려들어 큰 배도 활동할 수 있게 되어, 조선함대는 일제히 뱃머리를 돌려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거북선이 처음으로 전투에 참가하여 위력을 드러내었다. 적선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좌충우돌하며, 각종 총통들이 불을 뿜을 때마다 일본전함에서는 불꽃이 피어올랐다. 일본수군은 처음 보는 신병기에 겁을 먹고 속수무책(束手無策)이었다. 이런 와중에 권준, 어여담, 배홍립, 정운, 김완, 이몽구, 김인영, 가안책, 송성, 이웅화등의 다른 판옥선들도 모든 화력을 동원해 적선을 격침시켰다.
이 해전은 앞서 다른 해전보다 치열하여 이순신은 전투 중에 왼쪽어깨에 조총을 맞아 중상을 입고 이후 수년 동안 고생하게 된다. 적함 12척을 격침시켰고, 날이 저물어 사천만 모자랑포로 이동해 그날 밤을 보냈다.
☞ 당포해전 : 1592년 6월 2일
사천해전에서 승리한 조선수군함대는 모자랑포를 출발하여 6월 1일 정오쯤에 고성땅 사량도에 도착하여 하룻밤 휴식을 취하였다. 밤사이 일본수군이 당포선창에 정박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2일 아침 8시경에 사량도를 출발하여 10시경에 당포에 도착하니 적선 21척(대선 9척, 중소선12척)이 포구에 정박해 있고 약 300여 명의 일본군들은 육지에 상륙하여 노략질을 하고 있었다.
공격 신호와 함께 함대는 거북선을 앞세우고 포구 안으로 진격하였는데 적함 중 판옥선 크기에 누각이 있는 대선이 있었는데, 붉은 비단휘장을 들러 친 대장의 배로 누각 안에서는 적장이 꼼짝도 않고 앉아서 지휘하고 있었다. 먼저 거북선이 공격하여 대장군전으로 배에 구멍을 내고, 귀두로 충파를 하니 적함이 흔들리는 사이에 중위장 권준이 적장을 활로 쏘아 맞히고, 적장 가메이 고레노리는 바다에 떨어지자 부장 이몽구와 우척후장 김완, 군관 진무성이 그의 목을 베어 올렸다. 그러자 일본군의 사기가 급격히 떨어져 갈팡질팡 겁을 내어 도망치는데 총에 맞고 화살에 맞은 자들의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려웠다. 적선 21척을 모조리 격침시켰다
이순신은 패퇴(敗退)하는 일본군을 추격하여 육지에 상륙하려 하였으나 마침 이때 대선 20여 척이 많은 소선을 이끌고 거제도에 닿았다는 척후선의 보고를 받고, 추격을 포기하고 일본군을 넓은 바다로 유인해서 섬멸하기 위해 방향을 바꾸어 바다로 나오자 일본함대는 5리쯤 되는 곳에서 조선함대를 발견하고 뱃머리를 돌려 도주해 버렸다.
날이 저물어 진주 창선도로 물러나 숙영을 하고 3일 아침 출항하여 개이도 일대를 수색하였으나 적함을 찾지 못하고 고성 고둔포에서 숙영했다.
4일 당포 앞 바다로 이동하여 적을 찾고 있었는데, 정오쯤에 전라 우수영 이억기가 이끄는 함대(판옥선 25척)가 도착하여 합류하였다. 이로써 조선수군은 전라좌ㆍ우수영, 경상우수영의 연합함대를 편성하게 되어, 판옥선 총 51척(전라좌수영 23척, 우수영 25척, 경상 우수영 3척) 과 거북선 1척의 대 함대가 편성되었다.
☞ 당항포해전 : 1592년 6월 5일
연합함대를 편성한 조선수군은 하루 동안 작전회의를 하며 착량포에서 숙영했다.
5일 조선에 귀화한 일본인 김모 등 백성들이 작은 배를 타고 와 당포에서 달아난 적함들이 거제도를 지나 당항포에 있다고 알려왔다. 이동 중 일본전함 6척(대선 4척, 소선 2척)을 발견하고 선두의 정운 등이 달려가 격침시켜 버렸다. 이 일본전함들은 진주성 근처를 노략질하다 그곳을 지나던 유숭인의 기병대에 발견되어 쫓겨서 배를 타고 도망가던 중 조선수군에게 걸려든 것이었다.(진해 해전)
당항포에 이르러 그 곳 지형을 살펴본 즉 포구가 20여리나 깊숙이 들어가 있으나 그 폭이 넓어서 전선이 들어 갈만 하므로 먼저 척후선을 보냈더니 적이 있다는 신호로 신기전(神機箭)이 하늘로 치솟았다. 이순신은 전선 4척을 포구 어귀에 남겨 두어 후미를 경계토록 하고, 당항포에 이르니 적선 26척(대선 9척, 중선 4척, 소선13척)이 포구 안에 정박해 있었다. 그 중 가장 큰 배는 3층 누각이 있었고 검은 휘장 안에 장수인듯 한 자가 앉아서 지휘를 하고 있었다.
거북선을 앞세워 뚫고 들어가 전선 3척이 교대로 집중공격을 가하였다. 일본군이 조총을 쏘며 필사적으로 반격을 하자, 이순신은 작전을 바꿔 함대를 둘로 나누어 약간의 탈출로를 만들어 주자, 일본군은 기함을 호위하며 탈출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조선연합함대는 다시 적을 포위하고 협격하였다. 거북선과 판옥선에서 각종 총통들과 신기전이 불을 뿜을 때마다 일본전함들이 격침되었다. 곧 적의 대장선이 불길에 휩싸이고 적의 장수가 화살에 맞아 바다로 떨어졌다. 적함 25척을 격침시켰다. 1척이 남아 있었으나 그대로 둔 채 철수했다. 넓은 바다에서 군사들을 휴식케 하고 밤을 보내며 부장 이순신(李純信)으로 하여금 강 입구에 매복하고 있다가 남은 적함 1척이 탈출을 시도할 때 요격하도록 하였다.
6일 새벽 탈출을 시도하던 적함은 조선전함의 포격을 받고 격침되었다. 전투가 끝난 9시 경에 일본전함을 불태우고 있는데, 경상우수사 원균과 남해현령 기효근 등이 뒤쫓아 와 죽은 일본군의 목을 베니 모두 50여구나 되었다.
☞ 율포해전 : 1592년 6월 7일
고성 정을우장으로 이동하여 하룻밤을 지내고 천성, 가덕 근방을 수색하던 중, 적선1척이 율포에서 부산으로 향하다가 조선수군을 보고 달아났으나, 율포 바깥 바다에서 대선 3척은 나포되고, 대선 2척과 중선1척은 격침되었다.
8일 거제도 송진포, 9일에는 가덕도 천성, 가덕까지 수색하였으나 적을 발견하지 못하고, 10일 미조항으로 귀항해 각각의 수영으로 개선하였다.
2차 출동에서 조선군 피해는 전함손실은 없고, 전사 11명, 부상47명의 손상을 입었다. 다섯 차례의 해전에서 일본군의 피해는 전함 67척이 격침되었고, 전상자는 1만 명으로 추정된다. 여기에는 일본 수군 장수 구루시마 미치히사가 포함되어 있다(당항포 해전에서 전사했다.)
전과 : 곤양, 사천해전 : 왜선 13척 격파
당포해전 : 왜선 21척 격파. 왜장 구루시마 미치히사 수급.
당항포해전 : 왜선 26척 격파(대선 9, 중선 4, 소선 13)
율포해전 : 왜선 7척 격파. 총 67척 격파.
* 당항포 - 고성군 화하면 당항리 * 모자랑포 - 사천군 응남면 문주리 * 착량포 - 통영시 장동 * 송진포 - 거제시 장독면 소진포 * 율포 - 거제시 동부면 율포리 * 천성 - 부산시 강서구 가덕도 천성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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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차 출정도(出征圖)
3. 제 3차 출정(出征) : 1592. 7. 8 - 7. 13.
제 3차 출동 때 치른 전투 :
☞ 한산도 해전, 안골포 해전
제 1, 2차 출동에 의해 엄청난 피해를 입은 일본 수군 때문에 히데요시는 이순신을 모든 수군력(水軍力)을 동원하여 격파하라고 명한다. 개전 초기 일본군 점령지를 지키던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부산으로 내려왔고, 그 외 일본 수군의 쿠키 요시다카, 가토 요시아키등 내 놓아라 하는 수군장수들과 합세하여 육지의 고바야가군과 동시에 수륙으로 전라도지역을 일시에 공격하여 점령하라 하였다.
이에 맞선 조선군은 육지에서는 전라도감사 이광을 중심으로 하여 웅치와 이치에서 방어선을 구축하였고, 해상에서는 삼도수군이 일본군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순신은 3차 출전을 위한 준비를 하고 있던 중 일본수군이 남해안 연안과 도서지방에서 활발히 움직이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는 전라우수영과 경상우수영에 연락을 한 후 7월 4일 전라우수영 함대가 도착하자 5일 하루 동안 작전협의와 연합훈련을 실시한 후 6일 연합함대를 구성하여 여수를 출항하여 노량진에서 경상우수영의 원균 함대와 합류하였다.
삼도연합수군의 규모는 전라좌수군 함대 24척, 전라우수군 함대 25척, 그리고 원균이 이끄는 경상우수군 함대 7척으로 합계 56척이었고, 이 때 거북선은 2척이 참전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원균함대는 판옥선 3척에 불과했으나, 2차 출동이후 버려지거나 파손된 판옥선을 수리하여 3차 출동에서는 7척으로 늘었다.
삼도의 함대로 연합함대를 구성한 조선수군은 진주 창선도에서 숙영을 한 후 다음날인 7일 오후 고성 땅 당포로 이동하였는데, 현지 백성 김천손이 찾아와 견내량에 적함 70여 척이 있다고 알려 왔다. 이 적함의 정체는 일본수군의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함대로 그는 요시다카, 요시아키등과 연합함대를 구성하라는 상부의 명령을 무시한 채 단독으로 출전하여 견내량까지 진출해 와 있었던 것이다.
7월 8일 적이 출몰한다는 견내량에 이르러 보니 73척(대선 36척, 중선 24척, 소선 13척)이라는 일본수군의 대함대가 전투준비를 하고 있었다. 견내량은 거제도와 통영반도 사이에 있는 긴 수로로서 길이는 약 3Km에 달하며 넓은 곳이라야 500m를 넘지 않는 좁은 해협이다. 조선수군의 판옥선이 활동하기에는 수로의 지형이 너무 협착하고 또 암초가 많아서 조선함대가 싸우기에는 불리한 지형이었다.
일본군의 척후선 몇 척이 조선연합함대를 정찰하다 발각 되어 도주하였다. 이순신 장군은 어영담을 불러 적함대를 유인해서 나오라는 명령을 내렸다. 판옥선 5척이 척후선을 뒤쫓아 견내량으로 들어갔다. 조선연합함대는 전 함대를 좀 더 전진시켜 통영반도와 거제도 사이의 넓은 바다에 전개시켰다. 잠시 후 견내량 입구 근처에서 적을 유인하는데 성공했다는 신기전이 솟아올랐다.
일본전함들은 미끼에 걸려들어 어영담의 전함을 뒤쫓아 한산도 앞바다까지 나왔다. 적함들이 학인진의 날개 안으로 충분히 들어오자 기함에서 일향포성이 온 바다를 울리고 청룡기가 세 개씩 올라 간 후 나팔과 북이 천지를 진동하자 지금까지 후퇴 하던 조선수군함대는 일제히 뱃머리를 돌리고 학의 날개 형으로 커다란 원을 그리며 전투대형을 짜기 시작하며, 전쟁의 승패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될 대규모 전투가 시작되었다.
이 시간 육지에서는 전주성을 향해 공격해 오던 일본군 제 6번 대를 맞아 웅치와 이치에서 조선관군과 의병군이 결사적인 항전을 벌이고 있었다. 적함들이 고스란히 날개 안으로 들어오자 양쪽 날개가 좁혀지면서 일본수군의 전함들은 퇴로가 차단되어 밀집대형의 상태로 포위망에 갇혔다. 연합수군의 기함에서의 공격을 신호로 전함대의 전함이 공격을 시작하였다.
이날 전투에서 전라좌수영은 일본수군의 충각대선 3척을 격침시키고 3척을 포획하였으며, 대선 3척 격침, 6척 포획, 소선 2척 총 17척의 전과를 올렸으며, 전라좌우 수군에서는 대선 20척, 중선 17척, 소선 5척을 격침시키는 등 총 42척과 일본군 8,980명 등 총 적함 59척이 격파 혹은 나포되었다. 일본군 장수 마나베 사마노조, 와키자카 사요에, 와타나베 시치에몬등이 전사하였으며, 총사령관 와카자카 야스하루만이 살아남아 김해로 도주 하였다.
이 날 육지에서도 비록 웅치의 방어선은 뚫렸으나, 이치에서는 일본군을 격퇴시켰고, 의병군이 금산의 일본군 사령부를 공격하여 일본군의 전라도 진입을 끝내는 좌절시킬 수 있었다. 이로써 일본군은 육지와 해상에서 공동으로 전라도지역을 공격하려는 계획이 모두 수포로 돌아감으로써 조선 최대의 곡창지대인 전라도 점령에 실패하였고, 일본군의 기본전략인 수륙 병진 책도 큰 타격을 받았다.
한산도에서 대승을 거둔 조선연합수군은 그날 밤을 견내량 입구 바다에서 보내고 9일 가덕도로 진출하였는데, 일본수군 40여 척이 안골포에 있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이 일본군은 당초 야스하루와 같이 연합함대를 구성하기로 한 요시다카와 요시아키의 함대였다. 이들은 7일 부산을 출항하여 8일 가덕도에서 하루를 보내면서 한산도에서 야스하루의 함대가 전멸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으나 감히 구원하러 가지 못하고 오히려 안골포로 이동했던 것이었다.
10일 새벽 전라우수영 함대를 가덕도 주변에 배치하여 혹시 부산방면에서 올지도 모를 적의 구원함대를 경계하고 있다가 만약에 전투가 커지면 소수의 복병선만 남겨두고 전투에 가담하도록 지시를 하고 안골포공격은 전라좌수군 만으로 하기로 하고, 경상우수군은 뒤를 따라오도록 하였다. 안골포에 이르러보니 적선 42척(대선 21척, 중선 15척, 소선 6척)이 정박하고 있는데 포구의 지세가 좁고 얕아서 많은 배가 전투하기가 매우 불편하였는데 일본수군은 판옥선과 같은 대형 함들이 들어오기 어려운 곳에 정박시켜 놓고, 모두 육지로 올라가서 대항하고 있었다.
이순신 장군은 일본군을 넓은 바다로 유인하려 애를 썼으나 그들은 이미 한산도에서 그들의 주력이 전멸당한 것을 알고 있는 터라 정면으로 싸우려 들지 않았다. 그래서 작전을 바꾸어 긴 사정거리를 이용하여 유효사거리까지 접근하여 함포를 총동원하여 원거리에서 공격하는 파상공격으로 전환하였다. 전함대가 서로 교대하여 종일토록 공격하여 적선 20척을 격침시켰지만 날이 저물어 철수하였다.
넓은 바다에서 숙영한 다음 11일 새벽에 다시 공격해 들어갔으나 일본군들은 밤을 틈타 모두 도망가고 없었다. 그 뒤 함대를 가덕도로 이동 다시 부산 가까운 몰운대까지 대규모 접전 함대 시위를 벌였다. 모두 합쳐 100여대의 전 함대를 기함을 중심으로 진용을 갖추어 북과 나팔을 불며 항진하며 일제히 함포를 발사하는 등 무력을 과시했다. 이날 오후 늦게 무력시위를 마치고 가덕도로 철수한 뒤 자정이 되어 한산도로 이동하여 12일 하루를 쉬고 13일 각각 수영으로 개선했다.
3차 출동에서 전과는 적함 총 89척 격침, 12척 나포. 아군 손실은 전함 손실 없이 전사자19명, 부상 119명이었다. 그러나 한산도해전은 그 전과보다 일본군의 수륙병진전략을 좌절시킨데 더 의의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전과 : 한산해전 : 왜선 73척 중 47척 격파. 12척 나포.
안골포해전 : 42척 격파(대선 21, 중선 15, 소선 6)
총 89척 격파. 12척 나포.
* 견내량 - 거제시 사동면 덕호리 * 안골포 - 진해시 안골동 |
제 4차 출정도(出征圖)
4. 제 4차 출정(出征) : 1592. 8. 24. - 9. 2.
이순신은 일본군의 보급로를 차단할 필요를 느끼고 이내 출동을 감행하게 된다. 1592년 8월 29일까지 낙동강까지 진격한 이순신 함대는 그곳에서 적선 6척 일본군 30명을 공격하였고 9월 1일에는 부산포로 출격하게 된다.
제 4차 출동 때 치른 전투 : 부산포 해전
☞ 부산해전 : 8월 29일 - 9월 1일
한편 한산도 대첩과 안골포 해전 이후 해전에서는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 수군에게 조선 수군과의 교전 금지 명령을 내린다. 이 명령으로 인하여 일본 수군은 조선 수군과의 전투는 회피하고 해안에 축성하는 방향으로 나가게 된다.
조선 수군은 경상우도 순찰사 김수로부터 일본군이 김해와 양산 등지로 내려와 도주하려는 것 같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8월 24일 출항하여 4차 출전을 시작하였다. 이번 출전은 지금까지의 일본 수군의 서진 방지를 넘어서 부산포로 진격하여 조선 수군의 무위를 과시하게 된다. 25일 원균과 합류한 함대는 출항 후 5일간 일본 군선을 수색하였으나 발견하지는 못한 채 부산을 향하여 동진하였다.
29일 새벽에 이르러서야 조선 수군은 동래 장림포에서 일본 수군 이다케 4척과 고바야 2척을 발견하여 이를 모두 분멸(焚滅)하였다.
9월 1일에는 아침부터 강한 풍랑이 일었지만 조선 수군을 이를 무릎 쓰고 진격하여 화준 ,구미에 이르러 이다케 5척, 다대포에서 이다케 8척, 서평포에서 이다케 9척, 절영도 앞바다에서 이다케 2척을 만나서 이들 모두를 분멸하였다.
그 후 다시 절영도를 수색하였으나 적 군선을 발견 못한 조선군은 부산포를 정탐하여 그 곳에 일본군선 470여척이 정박한 사실을 알아낸다. 그리하여 부산포에 대한 총공격을 감행하니 바로 부산포 해전이다.
조선 수군은 선봉으로 나온 이다케 4척을 맞아 모두 격침시키고 장사진으로 돌진하여 일본군을 공격하였다. 그러자 일본군은 해전은 피하고 모두 산 위로 올라가 6개 처로 나누어서 조선 수군을 행하여 철환과 화살을 쏘면서 반격하였다. 그러나 조선 수군은 화포와 화살로 공격을 계속하여 다수의 군선을 격파하고 많은 사상자를 발생시키는 등 일본 수군 본대에 막대한 피해를 주었다.
부산포 해전은 적은 함대로 4~5배가 넘는 대규모 적을 상대하면서 일본 수군의 근거지를 공격하여 조선군의 무위(武威)를 과시한 전투였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선 100여척을 격침시키는 전과를 올렸지만 조선군 역시 이순신 휘하인 녹도만호 정운을 비롯하여 6명 전사, 25명 부상이라는 피해를 입었다. 게다가 부산은 남해 바깥바다와 연결되기에 파도가 심하여 군선을 운용하기 힘들고 군량도 거의 소모하였기에 조선 수군은 더 이상 작전을 계속할 수가 없어서 9월 2일 연합 함대를 해산하고 각자의 본영으로 귀환하였다.
부산해전의 규모 : 아군참전규모 : 166척.
왜군참전규모 : 470여척.
부산포 해전에서 전사한 녹도만호 정운은 본관은 하동으로 무과에 급제한 이후 거산 찰방과 웅천현감 등을 지냈으며 제주도 판관 재직 시에는 제주목사와 불화를 빚다가 파직당하기도 하였다. 1591년에 녹도 만호로 임명되어 옥포 해전, 한산도 대첩을 비롯한 임진년의 여러 해전에서 큰 전과를 올리다가 전사하였다. 이순신은 장계에서 정운에 대하여 ‘신이 믿는 사람은 오직 정운 등 2, 3명이었는데, 세 번 승첩 시에는 언제나 선봉을 섰고, 이번 부산 대전시에도 몸을 던져 죽음을 잊고 먼저 적의 소굴에 돌입하였으며, 하루 종일 교전하면서도 어찌나 자주 힘을 다하여 쏘았던지 적들이 감히 움직이지를 못하였는바, 이는 정운의 힘이었습니다.’(<임진장초>, 조성도 번역)라고 말하며 임진왜란 이전 경해왜변 때 전사한 이대원의 사당에 정운을 배향할 것을 청하여 받아들여지니 이 사당이 현재 전남 고흥에 있는 쌍충사이다.
전과 : 장림포해전 : 왜선 6척 격파(대선 4, 소선2)
화준, 구미해전 : 왜대선 5척 격파.
다대포해전 : 왜대선 8척 격파.
서평포해전 : 왜대선 9척 격파.
절영도해전 : 왜대선 2척 격파.
부산포해전 : 왜선 128척 격파. 총 158척 격파.
* 장림포 - 부산시 사하라구 장림동 * 다대포 - 부산시 사하구 다대동 * 서생포 - 울산시 서생리 포구 * 절영도 - 부산시 영도구 영도. |
이로써 조선 해군은 이순신의 눈부신 활약에 힘입어 남해안의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임진년 5월 4일, 제 1차 출전 이래 총 4차에 걸쳐 17회의 크고 작은 해전을 전개하여 적선의 격침, 나포가 368척(격침 356척, 나포 12척)이었고, 수리 불가능할 정도로 대파한 적선은 152척이었다. 또 왜병 33,780명을 격살하였다. 이에 비해 조선 해군은 단 한 척의 전선 손실도 없었고, 인명 손실은 전상, 전사자를 모두 합하여 214명(전사 176, 부상 38)에 그쳤다.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세계의 어떤 전쟁에서도 특히 해전에서는 이런 기록이 없었다. 적선 격침 및 대파 520대 0, 사상자 33,780 대 214. 아마도 인류의 역사가 계속되는 한 조선 해군의 대 제독 이순신의 이 불멸의 기록은 세계 해전사(海戰史)에 영원히 신화(神話)로 남을 것이다.
해전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