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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왕기 始祖王紀
■ 시조왕의 성은 박씨요, 휘는 혁거세(赫居世)「혹은 부구내 (弗矩內)라 하니 빛나게 세상을 다스린다는 뜻」시니 왕위에 계신지 61년이요 수(壽)는 73世시다. 능(陵)은 국도의 남쪽 담암사(曇岩寺) 북편 남정 숲안의 묘좌(卯坐 )이고 왕비의 능도 같은곳 같은 좌향이다.
■ 원년갑자(元年甲子 한선제 오봉원년) 4월 병진에 왕위에 오르시니 그때나이 13세이시다. 거서간(居西干 - 혹은 거슬감이라 하니, 진한의 말에 귀인의 존칭)이다. 국호(國號)는 사로(斯盧)라 하다.
■ 신라의 처음에 국호가 정해지지 않아서 혹은 사로(斯盧) 사라(斯羅) 서야벌(徐耶伐) 서벌(徐伐) 서울(徐울) 서나벌(徐那伐)이라고 불렀는데 탈해(脫解)때에 계림(鷄林)으로 고치고 기림(基臨)은 신라(新羅)로 고쳤는데 지증왕(智證王)때 와서 여러 신하들이 말씀 올리기를 『시조왕께서 건국하신이래로 나라이름이 정해지지않아서 혹은 사라(斯羅) 사로(斯盧) 신라(新羅)』라고 일컬으니 신등은 생각건대 新은 날로 새롭다는 뜻이요 羅는 사방을 한곳에 합한다는 뜻이오니 이것으로 국호를 정함이 마땅할줄 압니다. 또 말하기를 『옛부터 나라가 있으면 다 황제 또는 왕이라 일컬었는데 지금 건국한지 22세에 다만 방언으로 호칭하고 존호(尊號)가 없아옵기에 지금 여러 신하들이 뜻을 합하여 삼가 존호를 올리기를 신라국왕(新羅國王)이라 하겠습니다.』라고 하니 왕께서 이말을 따르시다. 또 건국이래로 왕이 돌아가셔도 시호(諡號)가 없어서 모두 왕의 이름으로 호를 삼았으니 이제 왕이 돌아가시매 지증왕이라고 시호하니, 동국의 시호 올리는 법이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 5년 무진(戊辰 - 漢甘露원년 BC 전53년)에 알영(閼英)을 왕비로 삼다. 처음에 용이 알영정(閼英井-오능안에 있음)에 나타나서 오른편 갈비대 밑에서 여아(余兒)를 낳았으니 어느 늙은 할머니가 거두어 길러서 우물 이름으로 알영이라 이름하였더니 장성하여 왕비가 되어 극히 현숙(賢淑)하여 내조를 잘 하시니 사람들이 이성(二聖)이라고 말하였다.
■ 권근(權近) 양촌(陽村)이 말하기를 국가가 흥할때에 내조의 아름다움이 있나니 하(夏)에 도산(塗山 - 夏禹氏 妃塗山氏)이 있으며 상(商)에 유신(有신 - 成湯의 妃 有氏)이 있고 주(周)에 태사(太사 - 文王妃인 太사)가 있으니 처음을 바로잡아 덕화(德化)를 베푼 것이 지극하다. 알영이 시조왕의 비(妃)가 되매 백성들이 칭송하였으니 반드시 덕이 높아서 백성의 마음을 감복(感服)시켰기 때문이다.
■ 삼가 상고하건데 주(周)의 문왕이 태사씨(太사氏)를 왕비로 맞이하매 시인이 군자의 좋은 짝이라고 찬미(讚美)하였고 우리 시조왕께서 알영을 맞이하므로 백성들이 이성(二聖)이라 일컬었으니 이른바 만화(萬化)의 근본이요. 백복이의 근원이 여기에 있지 않은가? 그러므로 시경(詩經)에 갈담(葛覃) 종사(종斯)의 아름다움이 있어서 본손(本孫)과 지손(支孫)이 백세토록 번영한 것이니 우리 시조왕의 후손이 또한 길이 번창하게 된 것이 성비 알영씨께서 처음부터 덕화를 펴서 후손에게 복을 주신 것이 주나라의 태사(太사)와 함께 짝할만 하다.
■ 8년 신미(辛未 - 한감로 4년 B.C50년) 왜인이 침범하려 하다가 왕의 신성(神聖)한 덕(德)을 듣고 물러가다.
■ 17년 경진(庚辰)에 왕께서 육도(六都)를 순시하사 농상(農桑)을 권장하실재 왕비도 따르시다.
■ 권양촌근이 말하기를 「업적을 살피는 것은 임금으로써 할일이다 옛날에는 봄철에 경작을 하는 것을 살펴보고 넉넉지 못 한 것을 도우나니 한번 놀고 한번 즐기것이 모두 백성을 위하지 않음이 없다. 이제 시조왕이 육도를 순시하여 농상을 권장함은 옛 임금이 지방을 순방하여 보조하는 법에 가까우나 부인은 외부일이 없으니 규문(閨門)을 나가지 않은것인데 왕비가 따라서 순행하는 것은 禮 가 아니다.」삼가 상고하건대 백성들이 농사하지 않으면 굶주릴 것이고 양잠(養蠶)하지 않으면 헐벗을 것이니 농상을 장려함은 나라의 제일 요긴한 일이다. 어찌 어진 임금이 위에 있으면서 백성으로 하여금 굶주리고 헐벗게 하겠는가. 그러므로 주공은 농사일의 괴롭고 어려음을 말씀하셨고 주례(周禮)에는 왕비가 친히 양잠하는 일을 실여 있으니 이것은 임금된 사람이 백성의 괴로운 일을 고루 알아서 인도하고 거느리게 하는 바이다. 우리 시조께서 친히 순시하여 농사를 권장하심은 정히 임금의 인정으로서 몸으로 친히 어루만지시고 정성으로 권하고 족려하신것이니 어찌 후세의 임금들이 권장하는 이름뿐이고 백성의 굶주리고 헐벗음을 보살피지 않는것과 견줄수 있겠는가? 왕비께서 수행 했다는 것은 잘알수는 없으나 양잠은 왕비에게 관계되는 일이므로 동네의 부녀자들에게 가르치기 위한 것인지도 알수 없다. 유리왕때에 왕녀로 하여금 부내(府內)의 여자를 이끌고 길삼솜씨를 검사한 일이 있으니 성비의 유풍(遺風)이 미친바라 하겠다.
■ 19년 임오(壬午)에 변한(弁韓 - 경남지방)이 와서 항복하다.
■ 21년 갑신(甲申)에 경성(京城)을 쌓고 금성(金城)이라 이름하다.
■ 26년 기축(己丑) 에 왕궁을 금성에 세우다.
■삼가 상고하건데 옛날의 군주가 덕을 닦고 인정을 베푸는 것으로 먼저를 삼고 성곽과 궁실을 짓는 일은 오히려 그 다음 일이므로 엣날에 흙을 둘러서 성을 쌓으되 그 성이 한길이 넘지 않았으며 요(堯)임금은 초가집에 살면서도 만방이 마음을 합해 화목했으며 우(禹)임금은 궁실을 낮으막하게 하고 천하를 위해 지극한 덕을 베푸시매 백성들이 높은 덕을 형용할수 없었다. 우리시조께서 왕위에 오른지 21년에 경성을 쌓고 26년에 궁실을 지으셨으니 그 어찌 덕정(德政)을 앞세우기 위해서 성곽과 궁실을 지을 겨를이 없었던 것이 아니겠는가? 덕화가 행해지고 풍속이 아름다워지며 은혜가 흡족해지고 백성이 화목해진뒤에 성곽과 궁실을 짓되 성은 반드시 흙으로 쌓고 궁실은 반드시 낮게 지었으니 후세의 임금들이 백성을 괴롭히고 재력을 낭비하여 긴 성과 높은 집을 지어서 사치하고 장려함을 자랑하는 것과는 판이할 것이고 그 성을 쌓고 궁실을 지을때도 반드시 모든 백성들이 자기일처럼 즐겁게 출역하였을것이니 후세의 임들은 이것을 본받을만한 일이다.
■ 30년 계사(癸巳)에 낙랑인(樂浪人)이 침입하여 국경까지 왔다가 백성들이 밤에 문을 잠그지 않고 들판에 노적가리가 있는 것을 보고 「도의(道義)를 지키는 나라이니 가히 침범할수 없다.」하고 곹 철병하여 돌아 가니라.
■ 38년 신축(辛丑)에 왕이 표공을 마한에 보내 빙문(聘問 - 국제간에 사신을 보내는것)하니 마한왕이 「진한과 변한은 우리의 속국인데도 근년에는 곡물을 바치지 않으니 대국을 섬기는 예(禮)에 이럴수가 있느냐」하니 표공이 대답하기를 「우리나라는 이성이 건국한 이래로 사람의 도리를 잘 닦고 하늘의 기후가 조화를이루어 곡식이 창고에 가득하고 백성들이 예절을 지켜 서로 공경하고 사양하므로 변한과 낙랑과 왜인이 모두 두려워하여 따르게 되었으나 우리 임금께서 겸손하시와 신(臣)을 보내서 방문하는 인사를 닦으시니 오히려 禮에 지나쳤다할 것인데 도리어 노하시고 군사로써 위협함은 무슨 까닭이시요」하니 마한왕이 노하여 죽이려했으나 근신들이 말려서 돌아가게 하였다. 안(按) 표공은 왜인(矮人)인데 표주박을 타고 바다를 건너왔으므로 표공이라 함.
■ 39년 壬寅에 마한왕이 죽거늘 혹이 왕에게 말하거늘 "마한왕이 전날에 우리 사신을 모욕하였으니 지금 그들의 국상을 틈타서 정벌하고서 하니 왕께서 남의 불행한 일을 다행으로 여기는 것은 어진사람의 도리가 아니다."하고 사신을 보내어 조문하시다. 사씨(史氏)가 말하기를 옛날의 전쟁에 상을 당했을때는 쳐들어가지 않는 법이니 상중을 틈타서 쳐들어가는 것은 仁이 아니다. 옛적에 등소공(謄昭公)이 죽은지 3월에 송이 등을 포위한 것을 춘추(春秋-공자가 지은 역사)에서 꾸짖었고 진의 사면이 제(齊)을 침범하여 곡(穀)에 들어와서 제후가 죽은 것을 듣고 군대를 거두어 돌아간 것을 춘추에 자세히 기록하여 기렸으니 지금 시조왕께서 전날의 분노를 버리고 이웃나라의 불행을 불상히 여겨서 정벌하지 않을뿐 아니라 사신을 보내어 조문 하시니 이른바 분해도 의(義)를 잊지 않고 노하여도 예를 폐하지 않았으니 너그럽고 어질다 할것이다. 대저 나라를 창업한 임금의 하신일은 자손들이 마땅이 본 받을 바이니 후세의 임금들이 충후(忠厚)함을 서로 전하여 1100년동안 나라를 유지한 것이 어찌모두 착한 규모(規模)를 남기신 까닭이 아니겠는가? 삼가 상고하건대 분은 징계하기 어렵고 노함은 참기 어려운 것이다. 보통사람은 극히 미세한 분노에도 징계(懲戒)하고 참지 못하여 반드시 틈을 타서 보복하려 하는데 하물며 큰 분노에는 말할 나위도 없다. 어진사람은 분노하는 마음이 없지 않으나 억제하여 징계하고 억지로 참아서 분노를 미연에 막게되고 성인은 비록 분노한 일을 당해도 저 사람의 분노를 미연하는 것일 뿐 내가 관계할바가 아니므로 마음이 화평하여 처음부터 분을 징계할 것도 없으며 추호도 마음에 걸릴것이 없을 것이다. 마한이 전번에 사신을 모욕한 것은 실로 괘씸하나 잘못은 저편에 있고 올바름은 나에게 있으니 우리 시조왕의 성덕과 넓은 도량으로 어찌 노(怒)여워함이 있겠느냐. 급기야 마한왕이 죽자 어느 신하가 보통사람이 생각으로 망녕되게 성인의 마음을 추측(推測)해서 감히 국상을 틈타서 정벌할 것을 말씀 드렸으나 시조왕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니 위대하시다. 왕의 말씀이시여 한결같은 왕의 마음이시여 처음부터 노하시는 마음이 없으셨고 도리어 이제와서 관후(寬厚)한 말씀이 계시와 어진마음을 베푸시고 禮를 갖추어 조문하시니 진실로 성덕에서 울어나신 처사로서 어찌 억지로 분노를 억제하고 마지못해 하는 사람의 미칠바 있겠느냐. 후손들이 우리 시조왕의 마음으로 마음가짐을 한다면 분노는 족히 마음에 걸릴 것도 없을것이며 仁 과 義가 쓰고도 남을 것이다.
■ 53년 丙辰에 동옥저(東沃沮)가 사신을 보내 좋은말 2000필을 바치며 말하기를 "과군(寡君)이 남한(南韓)에 성인이 계신다는 말을 듣고 사신을 보내어 드립니다." 하였다.
■ 61년 甲子에 두 마리의 용이 금성의 우물속에 나타났는데 폭우가 쏟아지고 궁성의 남문에 낙뇌하였다. 3월에 왕께서 훙서(薨逝)하시고 7일을 지내 알영왕비께서 이어서 훙(薨)하시니 태자(太子)남해(南解)께서 왕위에 오르니 몸이 장대하고 성품이 침중하고 후턱하며 지혜가 많으시다. 시조왕을 국도 남쪽 7리인 담암사 옆 남정 숲안의 卯坐에 장사하고 왕비도 같은 곳에 장사하다. 7월에 낙랑의 침입군이 금성을 포위하니 왕이 근신에게 말씀하시기를 "이성(二聖)깨서 나라를 버리시고 덕이 없는 내가 잘못 왕위에 오르매 이웃나라가 침입하여 왔으니 어찌하면 좋겠느냐"라고 하시니 근신이 말하기를 "적병이 우리의 국상을 다행삼아 감히 쳐들어 온것이오니 하늘이 반드시 도우지 않으시리다."하였더니 적병이 과연 물러가다. 삼가 상고 하건데 성덕을 지닌 임금님이 왕위에 계시니 사방의 오랑케가 모두 복종하고 신기한 보화가 저절로 이르는 것이므로 옛날의 성왕은 사람을 복종시키려하지 않아도 사람들이 저절로 복종하게 되고 기이한 보화를 구하려하지 않아도 보화가 저절로 오게 되나니 삼묘씨(三苗氏)가 스스로 와서 항복하였고 도산의 모임에 천하의 제후가 옥백(玉帛) 받들어 내조하였고 월상씨(越裳氏)기 힌 꿩을 곡물로 바친 것이 그 증험이다. 옛적에 우리 시조왕께서 덕을 닦아 나라를 다스림에 왜인이 군사를 돌리고 변한이 즐겨 항복하고 낙랑이 군사를 철회시키고 옥저가 말을 바치고 신인(神人)금척을 올렸으니 이것이 어찌 힘으로 구할수 있겠는가? 하우씨와 주공의 덕이 없고서는 이루지 못할것이다. 이러므로 60년의 왕위에 계신동안 무기를 사용함이 없어 백성들은 전쟁을 알지 못하고 태고(太古)때의 즐겁고 평화로운 세월에 삶을 누리게 한 것이 후세에는 볼 수 없는 태평성대를 이루게 된 것이다.
남해왕기 南解王紀
남해왕은 시조왕의 맏아들이시니 처음에 차차웅(次次雄)이라 하셨다.재위는 20년이요 수(壽)는 74세시다. 능(陵)은 시조왕릉과 같은곳 묘좌(卯坐)이다. 왕비는 운제왕후 김씨(雲帝王后 金氏)니 능은 방산(方山) 子坐이다. 다음왕비는 아루왕후(阿婁王后) 昔氏니 능은?
■ 원년 乙丑에 왕비 김씨를 봉하여 운제왕후를 삼으시고 다음왕비 석씨는 아루왕후라 하다.
■ 2년 丙寅 정월에 시조왕의 사당을 세우고 四時로 친히 제사하실세 왕의 누이동생 아로(阿老)로 제사를 주장하게 하다.
■ 4년 무진에 왕께서 석탈해(昔脫解)의 어질다는 말을 듣고 맏딸로 그의 아내를 삼게하시다. 상고하건대 탈해는 파사나국(婆裟那國) 사람이라 그나라 임금 함달파(含達婆)가 여국왕녀(余國王女)를 왕비로 삼았는데 아기를 밴지 7년만에 큰 알을 낳으니 왕이 「왕이 사라믕로 알을 낳은 것은 상서롭지 못하니 버림이 마땅하다」하니 왕비가 명주로 알을싸서 궤속에 넣어 배에 싵고 추수하기를 「마음대로 인연 있는 곳에 무사히 가거라.」하였다. 처음에 금관국 김해(今官國 金海)에가니 해변사람들이 괴이하게 여겨서 건지지 않으므로 전전해서 진한에 오니 늙은 할머니가 세끼로 끌어 당겨서 궤를 열고보니 아기가 있으므로 거두어서 길렀는데 장성하였다. 궤가 처음올때 까치가 따라와서 지저귀므로 까치의 鳥를 떼내고 昔으로 성을 하고 궤를 풀고나왔다해서 탈해(脫解)로 이름하다 탈해가 얼굴이 빼어나고 명랑하여 지식이 뛰어나서 나무하고 고기잡아서 할머니를 잘봉양하니 할머니가「너 모양이 뛰어났으니 공부해서 입신양명(立身揚名)할지어다.」라고 하니 탈해가 학문에 더욱 힘쓰고 겸하여 지리에 정통하여 월성에 거주하였다. 다음해 기사(己巳)에 마한이 망하다.
■ 10년 갑술(甲戌)에 일본병이 국경을 넘어 침범하거늘 육부병을 출동시켜 막아내다. 낙랑이 허점을 틈타서 급히 금성(金城)을 공격하다가 밤에 유성이 적의 진영에 떨어지니 적이 두려워하여 알천(閼川)위에 티진하여 돌무덤 2000을 쌓아놓고 돌아가니 육부병(六部兵)이 알천까지 따라갔다가 동무덤을 보고 적의 수가 많은 것을 알고 추격을 중지하다.
■ 15년 기묘(己卯)에 북명인(北溟人)이 밭을 갈다가 예왕(穢王)의 인(印)을 얻어와서 올리다. 상고하건데 고구려의 대무신왕(大武神王)이 북으로 동부여(東扶餘)를 칠때에 길에서 북명(北溟) 사람 괴유(怪由)를 만났다 하니 북명은 국내성 부근의 땅일 것이다.
■ 20년 갑신(甲申) 9월에 왕께서 훙서(薨逝)하시니 태자(太子) 유리(儒理)가 왕위에 오르다. 왕이 임종에 태자 유리와 탈해에게 말씀하시길 내가 죽은후에 박(朴)씨와 석(昔)씨 두 성씨중에 나이가 많은 사람이 왕위(王位)를 이으라 하시고 돌아가셨는데 유리가 탈해는 덕망이 있다하여 왕위를 사양하니 탈해가 말하기를 "신기대보(神器大寶- 왕위를 말함)는 용렬한 사람의 감당할바 아니다. 내가 등기로는 어진 사람은 이빨이 많다하고 떡을 물어서 시험한즉 유리의 이빨이 더 많은 지라 드디어 왕위에 올라 남해왕을 선릉(先陵-始祖陵을 말함)의 영역안에 장사하다.
유리왕기 儒理王紀
유리왕은 남해왕의 태자이시니 처음으로 유리이사금(儒理尼師今)이라 일컫는다. 왕위에 계신지 30년이요 수(壽)는? 선능(先陵) 국내 묘좌(卯坐)이며 왕비는 명선왕후 김씨(明宣王后 金氏)요 능은 동산자좌(東山子坐)이다.
■ 원년 을유(乙酉)에 김씨를 봉하여 명선왕후(明宣王后)라 하고 처음으로 쟁기와 수레를 만들고 친히 시조왕 사당(始祖廟)에 제사 지내고 죄인을 석방하다.
■ 4년 무자(戊子) 10월에 왕이 나라안을 순시 하실세 늙은 할머니가 헐벗고 굶주려서 죽을 지경인 것을 보고 말하기를 내가 미력한 사람으로 왕위에 있으면서 백성을 잘 기르지 못하여 늙은이와 어린이가 이 지경에 이르게 한 것은 나의 죄라하고 곧 옷과 양식을 주게하고 유사(有司)에게 명령하여 홀아비와 홀어미와 고아와 노병자로서 자활(自活)할수 없는 백성을 위문하여 의복과 식량을 주어서 기르게 하니 이웃나라 백성들이 왕의 어진 정치를 듣고 귀화하는 사람이 많았다. 이해에 처음으로 두솔가(兜率家)를 지어 노래하니 이것이 가악의 시초이다. 어름 저장(貯藏)하는 빙고(氷庫)를 축조하다. 상고하건데 주나라의 문왕과 한나라의 문제가 늙은이를 기르는 것을 첫 정사(政事)로 삼고 홀아비와 홀어미와 고아를 먼저 돌보았으니 왕의 어진 정치가 주문왕(周文王) 한문제(漢文帝)에게 비길만하다.
■ 8년 임진(壬辰) 봄에 왕께서 육부(六部)의 이름을 고치고 성(姓)을 주시니 이씨(李氏) 최씨(崔氏) 손씨(孫氏) 정씨(鄭氏) 배씨(裵氏) 설씨(薛氏)의 육성(六姓)이다. 육부를 반으로 나누어 둘로나누어 왕녀 두 사람으로 각각 그 부내(部內)의 여자(女子)를 인솔하여 7월 기망(旣望 - 십육일)부터 매일 육부의 뜰에 일찍모여서 밤이 늦도록 삼을 삼게하여 팔월 보름날에 이르러 성적을 심사하여 진편은 음식을 마련하고 이긴편에 치하하게 하여 서로 노래하고 즐겨서 온갖 놀이를 하였는데 이것을 가배(嘉俳)라 하였다. 진편의 한여자가 일어나 춤추며 탄식하기를 "회소 회소(會蘇 會蘇)하였는데 二음절이 슬프고 아담하여 뒷사람이 그 소리에 맞춰 노래를 지은 것이 회소곡(會蘇曲)이다. 벼슬에 17등급을 두었는데 첫째는 이벌손(伊伐飡) 둘째는 이척손(伊尺飡) 셋째는 잡손(잡飡)이요 넷째는 파진손(波珍飡)이요. 다섯째는 대아손(大阿飡) 여섯째는 아손(阿飡) 일곱째는 일길손(一吉飡)이요 여덟째는 사손(沙飡) 아홉째는 급대손(級代飡)이요 열째는 대내마손(大奈麻飡)이요 열한번째는 내마(奈麻)요 열줄째는 대사(大舍)요 열셋째는 사지(舍知)요 열넷째는 길사(吉士)요 열다섯째는 대오(大烏)요 열여섯째는 소오(小烏)요 열일곱째는 조사(造士)다.
■ 13년 정유(丁酉) 겨울에 고구려가 낙랑(樂浪)을 멸하니 낙랑인이 오천이 대방인(帶方人)과 함께 도망쳐오니 왕이 육부에 나누어서 살게하다.
■ 19년 임인(壬寅)에 이서국(伊西國)을 쳐서 멸하다「이해에 수로(首露)가 가락(駕洛)에 건국하니 영토가 東은 월당(月當)까지 南은 대마도(對馬島)까지이며 西는 가야(伽倻)까지 이르다. 신라 법흥왕 임자(壬子)에 나라를 받들어 신라에 항복하다.」
■ 34년 정사(丁巳) 왕께서 훙서(薨逝)하시다. 이에 앞서 왕께서 병드시어 신하에게 말씀하시기를 탈해는 나라의 척의(戚誼) 있는 사람이요 大臣으로 여러번 공을 세웠다. 나의 두아들은 그에게 따르지 못하고 또 선왕의 명령에 "아들과 사위를 가릴것이 없이 나이가 많고 어진사람으로써 왕위를 이으게 하라. 하셨으므로 내가 먼저 임금 되었으나 이번에는 마땅이 왕위를 전하여 선왕의 유훈을 잊지 말 것이다" 하셨으므로 탈해가 왕위에 올라 비(妃) 朴氏를 아효왕후(阿孝王后)로 봉하고, 유리왕을 선릉(先陵) 영역내 묘좌(卯坐)에 장사하다.
■ 탈해왕 을축(乙丑)에 金城의 西쪽 시림(始林)에서 어린 아기를 얻다.
삼국사기에 탈해왕 9년 3월에 왕이 밤에 금성쪽 시림의 숲속에서 닭소리가 들리므로 표공(瓢公)을 보내어 보고 오게하니 금빛 작은 궤가 나뭇가지에 걸려 있고 흰닭이 그 밑에서 울거늘 표공이 돌아와서 보고하니 왕이 사람을 보내 그 궤를 갖고와서 보니 그 속에 아기가 있는데 얼굴이 준수하므로 왕이 기뻐하며 하늘이 나에게 아들을 주신것이다하여 드디어 길러서 아들을 삼고 알지(閼智)라 이름하고 금궤속에서 나왔다하여 金氏로 하여 성(姓)을 하고 닭의 아름다운 상서가 있었다해서 시림(始林)을 계림(鷄林)으로 고치고 국호(國號)를 삼았다. 알지(閼智)의 7세손인 미추(味鄒)때에 와서 석씨에게 선위를 받아 왕이 되다.
석탈해왕(昔脫解王)은 23년 庚辰 팔월에 훙(薨)하니 국도 북쪽 표암(瓢岩)에 장사하다.
파사왕기 破娑王紀
파사왕은 유리왕의 둘째 아들이니 처음에는 파사이사금(婆娑尼師今)이라 하다 왕위에 계신지 32년이요 수는? 능은 선능 영역 안 묘좌(卯坐)니 이때와서 오능(五陵)이라 하였다. 妃는 사성왕후(史省王后) 김씨요 계비(繼妃)는 석씨니 능은 동산 子坐에 있다.
■ 원년 신사(辛巳)에 비 김씨를 봉해 사성왕후(史省王后)를 삼고 계비는 석씨다. 왕께서 비용을 절약하고 백성을 사랑하여 왕위에 오르시사 주군(州郡)을 순시하여 창고의 곡식을 내어 가난한 백성에게 나누어 주고 죄수를 불쌍이 여겨 두가지 죄를 지은자가 아니면 모두 놓아 주었다.
■ 2년 임오(壬午)에 명령을 내리시기를 "지금 창고가 텅비었고 무기가 무디어서 쓰지 못하게 되었는데 만약에 수한재(水旱災)나 변방에 대적이 침입한다면 어떻게 방비하겠느냐 마땅이 유사(有司)로 하여금 농상(農桑)을 장려하고 군사와 무기를 단련하여 불시의 근심을 막게하라 하셨다 친히 시조묘(始祖廟)에 제사 하시다."
■ 4년 갑신(甲申)에 크게 풍년이 들었다 이 때에 정치가 간소(簡素)하고 교화(敎化)가 널리 이루어져서 여러 가지 상서(祥瑞)가 나타나서 고타현(古陀縣)에서 푸른소(淸宇)를 헌납(獻納)하였고 남신현(南新縣)에 보리 이삭이 둘씩 달려서 백곡(百穀)이 풍성하여 길가는 사람이 양식을 갖고 다지지 않더라.
■ 7년 정해(丁亥) 7월에 명령을 내리기를 "우리나라가 서쪽에는 백제와 이웃하고 남쪽은 가야와 접했으나 덕(德)으로 이웃나라를 회유(懷柔)하지 못하고 위력(威力)으로 두렵게하지 못하니 마땅히 성벽이나 잘 수축(修築)하라 하시고 가소(加召)~거창(居昌)과 마두(馬頭)~청도(淸道)의 두성을 축조하다."
■ 10년 경인(庚寅)에 사신(使臣) 10인을 각주군(各州郡)에 파견(派遣)하여 직책을 게을리하여 전야(田野)를 황폐하게 한자를 적발하여 벼슬을 삭탈하게 하다.
■ 14년 甲午 2월에 가야병(伽倻兵)이 마두성(馬頭城)을 포위하므로 아손길원(阿飡吉元)을 보내어 기병으로 공격하여 물리치고 8월에 알천(閼川)에서 군사를 열병(閱兵) 하였다.
■ 16년 丙申에 가야가 남쪽 국경을 침범하니 성주 장세(城主 長世)가 항거하여 싸우다가 죽으니 왕이 크게 노하사 친히 용사 5000을 이끌고 싸워서 무찌르고 많은 적을 포로하니 가야왕이 사신을 보내어 사과하므로 진격을 중지하다. 「首露王의 동생 5人이 五伽倻王이 되었는데 곧지금의 함안 고령 합천 성주 함양이다.」
■ 21년 辛丑에 金城의 동남에 새로 정을 쌓고 월성(月城)이라 이름하여 왕께서 이사(移徙)하시다. 실직(悉直)과 압독(押督) 두나가 항복하였고 음즙벌국(音汁伐國)이 실직곡국(悉直谷國)과 국경을 다투다가 왕이 와서 결정하기를 청하니 왕께서 수로(首露)가 나이 많고 지혜가 있다하여 불러서 물으시니 수로가 즉석에서 결정하여 그 땅을 음즙벌곡(音汁伐國)에게 귀속 지키다.
■ 12년 壬寅에 음즙벌곡(音汁伐國)이 와서 항복하다.
■ 14년 甲辰에 실직국(悉直國)이 배반하거늘 쳐서 평정하고 그 백성을 남쪽 변방에 옮긴다.
■ 25년 乙巳에 백제가 사신을 보내 화친을 청하다.
■ 26년 丙午에 왕께서 압독(押督)에 행차하사 가난한 백성을 구휼(救恤)하시다.
■ 28년 戊申 오월에 큰물이 나서 백성이 굶주리므로 사신을 十道에 보내 창고를 열고 곡식을 내어 백성을 구제하고 비지(比只)와 다벌(多伐)과 초팔(草八)등 세나라를 쳐서 합병하다.
■ 29년 己酉에 황충(蝗蟲)이 곡식을 해치거늘 왕이 두루 산천에 기도하고 제사지내니 황충이 없어지고 풍년이 들었다.
■ 31년 辛亥에 백제의 내기군(奈己郡)을 뺏었다.
■ 32년 壬子10월에 왕이 훙(薨)하시니 태자 지마(太子 祗摩)가 왕위에 올라 파사왕을 先陵의 영역 묘좌에 장사하니 이를 오능(五陵)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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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성왕기 逸聖王己
일성왕은 유리왕의 장자이시니 처음에는 일성이사금(逸聖尼師今)이라 하였다. 왕위에 계신지 20년이며 壽는 111세요 陵은 국도 남쪽 해목령(蟹目嶺) 아래 장전동 卯坐이다. 妃는 석씨이니 능은 금서문 밖 子坐이다. 계비(繼妃)는 허씨(許氏)요 능은?
■ 원년 乙亥에 석(昔)씨를 왕비로 봉하다.
■ 2년 丙子에 웅선(雄宣)으로 이손(二飡)을 삼고 겸하여 내외병마사(內外兵馬使)를 맡게하다.
■ 3년 丁丑 봄에 말갈(靺鞨)이 침입하여 장령(長嶺)의 다섯 성책을 불태우거늘 곧 성책을 세워서 침입을 방지하다.
■ 4년 戊寅에 정사당(正事堂)을 금성에 세우고 북방을 순행하여 태백산에 제사하다.
■ 5년 己卯가을에 말갈(靺鞨)이 장령을 습격하여 백성을 약탈하거늘 장령에 성책을 세워서 방지하다.
■ 9년 甲申 2월에 주군에 명령하여 제방을 수축하여 전야(田野)를 개척하며 또 백성들이 금은주옥(今銀珠玉)을 쓰는 것을 금지하다.
■ 11년 乙酉에 한재(旱災)로 흉년이 들어서 곡식을 옮겨서 기민을 구제하다.
■ 12년 丙戌에 압독(押督)이 배반하거늘 쳐서 평정하고 그 무리를 남쪽 땅에 옮기다.
■ 14년 戊子에 박아도(朴阿道)를 봉하여 갈문왕(葛文王)을 삼다.
■ 20년 甲午 2월에 왕께서 훙(薨)하시고 태자 아달라(阿達羅)가 왕위에 오르니 신장이 七尺이요 풍채가 준수하고 모습이 의젓하셨다. 일성왕(逸聖王)을 국도 남쪽 7리인 해목령(蟹目嶺) 아래 장전동 卯坐에 장사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