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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기드온용사 훈련 전 / (제사거부, 큰오빠에게 저주, 나의 자라온 환경)
기드온 용사 훈련
이 글은 내가 2011년 8월29일 하나님아버지께서 '기드온용사'라고 부르시면서
방언기도를 허락하시고 철저한 회개를 시키셨으며 성령하나님께서 임재하시고
2012년 2월 말까지 나의 집에서, 나의 가족들과 함께 치루게 하신 훈련 과정을
거쳐 영적 세계로 들어갈 수 있는 테스트를 겪고 잊지 않기 위해서 기록을 했다.
그러다 보니 내가 살아온 과정까지 터치하시는 성령하나님의 도우심을 받고
감사 드리며 영광 돌리기 위해서 기록하라고 하심에 순종하기 위해서 쓴 글이다.
이 글을 쓸 때만 해도 기독교에서 교육되어지기를 사람들이 힘들게 살게 되고,
일이 방해가 되고, 이유없이 매를 맞고, 죽을 수도 있는 상황이 올 때 마귀나
귀신이 그러는 것이라고 배웠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도 처음에는 내가 알고 있었던
수준에서 쓰도록 하셨다. 그래야 내가 반감을 사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철썩 같이 마귀가 방해를 하고 마귀가 사고도 내게 하고 죽이기도 하고,
귀신이 함부로 사람 몸에 들어간다고 하고 미치게도 한다고 알고 있었는데
하나님께서 쓰시는 막대기라고 하시고, 전부 하나님께서 축복하시고 징계하시는데
쓰임 받는 존재라고 처음부터 바로 말씀하시면 원래 생각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이상한 영이 나를 끌고 가나? 하는 반감을 사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귀가 그랬다" 하는 것은 마귀가 그렇게 징계도구로, 시험도구로 쓰임
받은 것이라는 것과, 귀신이 들어왔다 하는 것은 죄값으로 들어오게 하셨다는 것을
나중에야 다 알게 하시고 이해하게 하시고 깨닫게 하셨다.
사람마다 각자 인생의 포인트가 있는데 하나님과 신앙생활과 관계있는
사건들이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인생의 포인트'라고 하신다.
나는 8살 때부터 스스로 제사를 거부하고 그 후 제사를 지금까지 드리지 않았으며,
다른 우상에게 절하지 않았으며, 진화론을 거부했으며, 제사상을 차려 놓고
예배드리는 것을 철저하게 거부하고, 추도예배를 철저하게 거부한 것이
인생의 포인트라고 하셨다.
훈련을 받을 때는 'X파일' 같이 받아서 무엇인지 몰랐고 별로 중요한 의미가
있는 훈련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시간이 갈수록 중요한 훈련이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아버지께서 깨닫게 하시는 대로 글로 남기고 있다.
나의 자녀들과 그 자녀들, 나의 후손들의 신앙교육에 도움이
됐으면 하는 바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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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사 거부
어려서 받은 상처 마음의 문 닫아
내가 20대 후반까지 신앙생활 할 때는 장로교회에 다녔다.
결혼을 일찍해서 25살에 첫 딸을 낳고, 28살에 아들을 낳고부터
가정같은 생활을 했다. 첫 딸을 낳았을 때만해도 소꿉장난 하는 것
같았는데 아들을 낳고 나니 진짜 엄마 아빠가 된 기분이었다.
큰오빠랑 같이 집에서 살게 된 것이 결혼을 일찍하게 된 동기가 되었다.
나는 큰오빠랑 얼마나 사이가 안 좋은지 둘이 집에 있게 됐을 때
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은적도 있다. 목석 같은 여동생이었다.
원래 그러진 않았을 것 같다. 큰오빠가 싫다보니 그렇게 된거지.
어려서 받은 상처가 상처인줄 몰랐지만 내 마음의 문을 닫게 했고
오빠하고 대화하고 싶지 않을 만큼 내 입을 닫게 했다.
정말 말을 안하고 지냈다.
그래서 그런가 다른 남자들한테 오빠라고 부른적이 없다.
친척오빠한테도 오빠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특히 2~3살 위의 오빠는 더더욱. 나이가 한참 많으면
오빠라고 하긴 했지만 오빠라는 단어를 즐겨하지 않았다.
죽을 만큼 싫어 찾은 돌파구 '결혼'
죽을만큼 싫어 돌파구를 찾아보았는데 '자취' 아니면 '결혼'이었다.
자취는 오빠가 허락하지 않을 것 같았고 그래서 결혼을 선택했는데
정말 아무 것도 내세울 것 없고 가진 것도 없는 남자, 같은 교회 다니는
신앙 좋은 것 하나 밖에 없는 남자를 만나 결혼해버렸다.
그렇다고 내가 믿음이 좋은 상태도 아니었는데 그냥 그런 삶이 주어졌다.
가난하게 컸지만 나에게는 그렇게 큰 가난이라는 느낌이 오지 않았다.
그래서 이 남자와 결혼하면 가난하게 살 것이라는 생각을 조금도 못했다.
가난하면 어떻게 사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렇지만 정말 가난하게 살았다. 하지만 하나님아버지께서 다 견디게
하셨고 그것을 가난이라고 느끼지 않게 해주셨다. 조금은 느꼈지만.
아무리 먹을 것이 없어도 시댁에나 친정에 전화를 해서 하소연을
하거나 돈을 달라고 하거나 없는 티를 내지 않았다.
우리가 어떻게 살았는지 아무도 모른다.
친정 형제들도 모르고 시댁 친척들도 모른다.
오직 하나님아버지만 아신다. 무조건 그분께 기도 드렸다.
그래서 빠른 속도로 하나님아버지께서 우리의 삶을 인도 하셨다.
가난했던 그 때 그래도 하루를 완전하게 굶은 적은 없었던 것 같다.
하나님아버지께 기도 드리면서 살아서 그랬나보다.
다니는 것은 교회였고, 들은 것은 기도하라는 것.
가난하고 할 게 없으니 기도라도 할 수밖에.
목사님께서 성미도 갖다 주셨었다. 아들이 7개월쯤 됐을때
모유가 잘 안나와서 이유식을 먹여야 했는데 신 집사님이
아기밀 제일 큰 것 두 통을 사와서 잘 먹였다.
그리고 쌀이 다 떨어졌을 때 최 집사님이 기도 드리는데
우리집 쌀통이 흔들리는 환상을 보았다고 하면서 이 집에
쌀이 없나보다 하며 쌀 한포를 사 갖고 오셨었다.
고난 중이었어도 기도를 드리니 이 모양 저 모양으로 도와주셨다.
우리 신혼땐 훨씬 가난했으면서도 우리가 신혼을 시작했을 때보다
괜찮은 집에서 신혼을 시작하는 부부를 보면 마음이 아팠다.
물질적으로 더 괜찮은 결혼생활을 했으면 하고.
특히 내가 아끼는 성가대원은 더 그랬다.
"신성교회" 하나님아버지의 멋있는 음성 응답
우리는 아들을 낳기 몇달 전 신성성결교회로 옮겼다.
먼저 다니던 교회에서 나는 은혜 받고 있었지만 남편이 시험 들었고
몇몇 집사들이 시험 들어 있었다. 목사님을 대상으로.
그 교회에서 남편이 성가대 지휘를 잠깐 했는데 지휘까지
겸했던 전도사님이 갑자기 그만두는 바람에 어찌하다가
남편이 지휘하게 됐다. 그것은 할 수 있어서가 아니라
남자라서 시켰다. 나는 뒤에서 음악적인 것을 서포트해줬다.
우리는 남편이 허리디스크였고, 나는 아들을 임심한지 4개월이
넘어 있었기 때문에 회사도 못 다니고 둘이 머리 디밀고
하나님아버지께 기도 드리는 일 밖에 할 것이 없을 때였다.
우리 둘의 기도 제목은 '허리디스크가 낫는 것'과 '교회를 옮기는 것'이었다.
둘이 같은 날 응답 받았는데 나는 "신성교회"라는 바리톤 음성의
멋있는 하나님아버지의 음성과, "허리가 하나도 안 아파" 라는 남편의
음성을 꿈에서 들었다.
그래서 꿈을 깨자마자 "자기 나한테 허리가 하나도 안 아프다고 그랬어?"
라고 물어봤다. 그랬더니 남편은 "아니! 그렇게 말한 적 없고, 아직 아파"
그랬다. 그래서 나는 그냥 꿈인가? 하고 넘겼다.
남편은 꿈에 우리집에서 신성교회쪽으로 큰 길이 나있었으며
자기가 목사님 집의 전기선들이 엉망으로 되어 있는 것을
정리해주는 꿈을 꾸었다고 했다.
그래서 단호하게 신성성결교회로 옮길 수가 있었다.
나중에 소식을 들으니 먼저 교회 목사님이 교회와 교인들을 팔았다고 했다.
남편의 허리디스크는 그날 당장 나은 것이 아니라 신성교회로 옮기고
나서 철야기도 시간에, 목사님께서 누가 운전면허를 따서 목사님을
도와달라는 말씀을 듣는데 "내가 그 일을 해야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그때 당시는 운전으로 봉사하는 사람이 없어서 목사님께서
예배 전에 성도들을 태우고 와서 부랴부랴 예배를 드리고
태워다주고 했던 때였다. 개척교회였기 때문에.
성도들은 그런대로 많았는데 운전봉사할 사람은 없었다.
벼랑끝 남편에게 바가지는 '폭탄'
남편은 허리디스크가 덜 나은 상태에서 삼성출판사에 들어가
외판을 했다. 다리가 땅겨서 걷기 힘든 상태에서 일을 했다.
나의 남편은 정말로 눈물이 없는 사람이다. 울지를 않는다.
그런 사람이 어느 날은 다리가 너무 아파서 울었다고 했다.
조금씩 수입이 있다가 어느달엔 3만원을 가져왔다.
그땐 원래 보증금 다 까먹고 노 집사님이 20만원 빌려주셔서
교회 가까이 이사를 왔다. 월세가 5만원이었다.
이 20만원도 한참을 못 갚자 그 집사님이 건축헌금으로 드렸다고
생각하면서 상계시키는 기도를 드렸다고 했다.
그땐 하나님아버지께서 나의 입을 잠그셨는지 나는 아무 말도
안하고 잔소리도 안하고 바가지도 안 긁고 살았다.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살았다. 힘든 것인지도 몰랐다.
3만원 받아온 그날 철야기도회를 가서 남들은 산기도 간다고
다들 나갔는데 나는 가지 않고 혼자 남아서 대성통곡을 하고 울었다.
슬픈 것도 아니고 무슨 원망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울어야지 했던 것도 아닌데 그냥 눈물이 펑펑 쏟아지면서
한참을 소리내서 울었다. 나중에 보니 그 것이 기도였다.
그 후로 남편이 교인 친척이 사업하는 어떤 회사를 들어가게
됐는데 그 사장님이 10만원을 주시면서 면허를 따라고 했다.
하나님아버지께서 주신 것으로 볼 수 밖에 없는 것이 그 사장님이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구두쇠에다 성격이 괴팍하다고
소문난 사람인데 우리 가정에는 은혜를 베풀었다.
남편은 운전의 달인같이 몇 달 안돼서 대형면허까지 따버렸다.
그 후로 교회차를 운행하는 봉사를 했다.
허리디스크는 새벽예배 차 운행을 하게 하시고
다른 아픈 사람들의 심정을 깨닫게 하시면서 고쳐주셨다.
가난한 상태였기 때문에 병원엔 가보지도 못했다.
약도 못 써봤다. 하나님아버지 감사드립니다.아멘.
이때부터 남편에게 신유의 은사가 임했다.
남편이 힘든 일을 당했을 때 그 때는 잔소리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바가지도 형편이 좋을 때 해야지
벼랑끝에 서있는 남편에게 바가지는 폭탄을 안겨주는 것과 같다.
성가대 지휘자의 길 입문
신성교회에서는 마침 주일학교 성가대 지휘선생이 필요했었는데
우리 부부가 가면서 소문에 둘 중 누군가 지휘를 했다는
말을 들은 주일학교 부장선생이 주일학교 성가대 지휘를 맡아달라고
했는데 남편을 시킬 수가 없었다. 음악성은 없는데 그냥
한 것이라서 내가 한다고 했다.
몇개월 하다가 아들을 낳느라고 다른 교사한테 넘겼는데
몇달 안되서 성가대가 없어졌다. 마땅한 지휘선생이 없었나...
아들이 5살 됐을 때 내가 다시 주일학교 성가대원을 모집하고
토요일이면 8살인 딸에게 동생을 잘 돌보라고 하고 성가대
연습을 갔다.
가고 오고 연습하고 3시간 정도 소요됐다.
그동안 딸이 아들을 돌봤다.
나는 "하나님아버지께서 돌봐주시려니"가 100%였나보다.
애들 걱정은 조금도 안하고 하나님의 일을 하니까 하나님께서
나의 아이들을 돌봐주시려니 했다.
나중에 아이들 실종사고 뉴스들을 보면서 그 때를 기억하며
하나님아버지께서 지켜주셨구나 하고 감사를 드렸다.
하나님아버지께서 내게 소프라노를 하게 하시고, 음악성도 주시고,
주일학교 성가대 지휘를 하게 하셨고, 나중에 광명시의 광천교회,
광은교회 시온성전을 거쳐 다시 신성성결교회 대예배 지휘자로
오게 하셨다.
주일학교 성가대 지도를 할 때는 내가 지휘를 하지 않고 6학년
남자아이 중에 지휘자를 세웠다. 우리교회 솔리스트로 있다가
지휘자로 나간 원동찬도 주일학교 때 지휘를 1년 동안 했었다.
이 때 지휘자세미나를 몇 번 다녔었다. 교회에서 보내주었다.
한달에 한번 정도는 우리집에 데리고 와서 떡볶이를 한들통씩
해먹였다. 그리고 간식도 틈틈이 사가지고 가서 게임도 하고
약수터에 놀러가기도 했다. 그래서 성가대가 풍성했다.
하나님아버지께서 지혜를 주셨다.
4학년부터 6학년 위주로 성가대원을 뽑았는데
나의 딸은 음악성이 좋아 3학년부터 성가대를 시키고
아들도 3학년부터 성가대를 시켰다. 음성이 크고 좋았었다.
여자 음역을 육성으로 한 옥타브 위 'g'나 'a'까지
거침없이 냈었다. 딸은 음성은 좋은데 소리가 약했지만.
어머니합창단이라도 다닐까?
어느날 부터인가 어머니합창단이라도 다니고 싶어졌다.
그렇지만 기도는 드리지 않고 생각만 하고 있었다.
그런데 노회에서 경창대회가 있다고 공고가 오면서
내가 음악부장이었기 때문에 강서교회 장 권사님이라는
분과 필연적으로 연결이 됐다.
전화 목소리만 들었던 그 분이 내가 너무 찬양을 좋아하는 것
같다고 하시면서 성결교단 합창단에 들어오지 않겠냐고 했다.
어떻게 어떻게 하다가 오디션까지 보고 소프라노로 활동하게
됐다. 나의 말하는 목소리는 천상 알토 목소리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지휘자 선생님이 내가 존경하는
정신여고 합창단을 지휘하셨던 최훈차 교수님의 부인이셨다.
최훈차 교수님이 지도하셨던 정신여고 합창단을 보고 홀딱 반했었다.
얼마나 훈련이 잘되어 있었는지 정말 하나 같이 움직였다.
공부도 잘하고 노래도 잘해야만 했던 팀이었다.
하나님아버지께서 내가 합창단 다니고 싶다고 생각한 것까지
아시고 교단합창단에서 활동하게 하셨다.
주일학교 성가대 지도부터 시작하게 하신 하나님아버지께서
대예배 성가대 지휘자로 세워주셨는데 어느날 갑자기 예배시간에
찬양을 부르면서 손이 지휘를 했다. 밑에서 작게.
이 후에 교회를 옮기게 되었다.
나는 성가대원이었을 때도 악보 책자를 받으면 처음부터 끝까지
뒤지면서 이 곡은 누가 솔로를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나 나름대로 정해 놓는다. 그리고 끝까지 살펴본다.
그런 모습을 예쁘게 보셨나보다.
눈으로 악보를 고를수 있도록 지혜를 주세요
대예배 지휘를 하게 되면서 피아노를 못치니까 악보 고르기가
쉽지가 않았다. 그때는 nwc라는 프로그램도 몰랐었다.
그래서 기도를 드렸다.
"하나님아버지 제가 악보를 골라야 하는데요 피아노를 못쳐요.
이상하게 피아노 연습하는 것은 싫어요 하나님아버지,
그러니까요 눈으로 곡을 고를 수 있도록 지혜를 주세요"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드렸습니다. 아멘.
기도를 드리고 나서부터 리듬 읽기부터 하고 나면 음정이 떠올랐다.
그러면서 깨달은 것은 무슨 악보든 리듬 읽기부터 하고 나면 50% 이상
연습이 끝난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리고 음정을 눈으로 읽었다.
서점에 가서 음악이론 책을 여러 권 사와서 혼자 이론공부도 했다.
부활절칸타타도 2년치를 미리 준비했었다. 악보를 한번 고르기 시작하면
그해 1년치는 한꺼번에 골랐었고, 회사를 다녔어도 하나님아버지께서
때가 되면 시간을 주시고 감동이 와서 악보 고르기에 열중시키셨다.
부활절칸타타에 신경쓰느라고 성탄칸타타는 못했다.
칸타타를 해도 그 많지 않은 주일 성가연습 시간에 쪼개서 했다.
따로 모여서 하거나 몰아서 하지 않았다.
그리고 마지막 토요일쯤 한번 모여서 총 연습을 했다.
내가 생각해도 쉽게 하는 것 같다. 그렇다고 곡이 쉬운 것도 아니었다.
항상 보면 마지막 곡은 리듬이며 어려운 곡을 골랐던 것 같다.
어떨 때는 중간에 성극도 있었다. 멋있었다. 한권의 책에서 고르는 것이
아니라 여러권에서 고르면서 편집을 했다.
하나님아버지께서 나에게 신문편집을 하도록 인도하신 것이
이렇게 악보를 편집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던 것 같고
포토샵을 할수 있도록 하셔서 악보 합성이며 수정이며 하게 하셔서
악보를 관리할 수 있도록 인도하셨다고 깨달았다.
3번의 이사 가지 말라는 꿈
잠깐 신체적인 문제로 교회에 시험이 들어서 신성교회를 떠나서
6년 동안 다른 교회를 다녔다. 처음에는 몰랐지만 나중에는
신성교회 김성현 목사님을 잊지 못하고 생각하고 지냈다.
이 때도 기도로 이기고 교회 음향시스템을 바꿔서라도
시험을 이겼어야 했는데 감기를 한달 이상 앓고 나서는
귀 신경이 얼마나 예민해졌는지 큰소리를 못듣게 됐다.
소리 울림이 귀를 통과해서 손가락까지 오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굉장히 힘든 것이었다.
이런저런 이유로 시험이 들고 광명으로 이사를 계획적으로
갔는데 가기 전에 세번이나 꿈에서 이사를 가면 다가구에
단칸방에서 사는 꿈을 꿨다.
마지막 꿈엔 방한칸짜리 집에 시어머니가 가운데 앉아 있었다.
정말 광명으로 이사간 후 시어머니를 모시고 1년반을 살았는데
뇌출혈에 치매까지 와서 우리집에서 돌아가셨다.
이때도 나는 시어머니께 죄를 지었다. 치매로 똥을 싸서 벽에
칠할 정도가 됐다. 성격좋다고 생각했던 내 안에 어떤 다른 영이
있었나보다. 처음에 시어머니를 불쌍히 여겼던 마음이 사라지고
악하게 대하게 됐다. 그리고 돌아가시도록 방치했다.
'시어머니 모시기' 피덩이 키워주신 대가였나
나의 남편은 현재는 김씨이지만 원래는 송씨이다.
아버지가 외도를 해서 낳은 아들이다.
출생이 좀 복잡하다. 시어머니도 친엄마가 아니고 지금의 형제와도
피가 섞이지를 않았다. 그래도 우리는 본래 형제처럼 잘 지내고 있다.
시어머니가 뇌출혈로 쓰러지셨을 때 나는 기운도 없고 말랐고
직장생활을 하고 있었을 때라 잘 모시지를 못했다.
시숙이 오셔서 내가 잘 못 모신다고 다음날로 모시고 갈 것처럼
큰소리 치시더니 다음날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럴줄 알았지만 말이다. 자기가 모시나 와이프가 모시는거지.
그리고 우리가 하루라도 피서를 갔다오려고 해도 시어머니를 봐줄
사람이 없어서 남편 누나에게 하루만 봐달라고 부탁했는데 하루도
봐줄수가 없다고 딱 잘라 거절했다. 그래도 자기 친엄마인데 서운했다.
시어머니가 계시는 동안 나의 아들은 1년 반 동안 거실 쇼파에서 잤다.
거실에서 숙제하고 거실에서 지냈다. 군소리도 없었다.
시어머니가 쓰러지시고부터 목에서 가래가 얼마나 끌던지 그때
가만있었으면 돌아가시는건데 소부날을 사다가 물에 타서 입에
넣어드리고 했더니 가래가 없어지면서 회복되셨다.
그 이후가 문제였다. 치매까지 오셔서.
병원에선 처방이 없다고 그냥 퇴원하라고 했었다.
교회갔다 오면 싱크대 쓰레기를 찌게나 국냄비에 부어놓고,
냉동실 냉장실에 생선이며 떡이며 등을 아들 책상 서랍에 숨겨놓고,
냉장고를 열어 놓고 해서 끈으로 묶어 놓고 지내고, 5분 간격으로
화장실을 가는 거며, 기저귀를 차고 있었는데 자고 일어나면
귀저귀랑 바지랑 바뀌어 있었다. 옷이며 이불이며 똥이 묻고.
처음부터 침대메트에 비닐을 깔 생각을 못해 하루는 오줌을
얼마나 흥건하게 쌌는지 침대매트를 버렸다.
게다가 아예 누워계시면 모시기가 편하겠는데
돌아다니시니까 힘들었다. 5분 정도 간격으로 화장실을
간다고 하는 것은 정말 환장할 노릇이었다.
혼자 기저귀를 내리고 올리고 하면 좋겠지만 그걸 못해서
걸치고 다니기 때문에 그 때마다 일일이 쫓아 다녀서
추스려드려야 했다.
속담뿐인줄 알았는데 정말로 벽에 똥칠을 하셨다.
나중에는 대변치우는 것이 너무 힘들어서 식사량을 줄였다.
기저귀 갈아드리는 것이며 목욕이며 나의 일이었기 때문인데
내 체력으로는 힘들었던 시기였다.
자고 일어나면 대변이 이곳 저곳에 묻어있고, 그럼 목욕시켜야 하고...
내 평생에 나는 그런일 못하는 여자, 안하는 여자인줄 알았는데
그런일이 내게 왔다.
남편은 막내인데도 자기가 엄마를 모셔야 한다고
난리를 치는 바람에 그랬다. 그래봤자 할일은 내게 있었다.
남자들은 절대로 자기 엄마 자기가 모신다고 하지 마라.
남자가 모시는 것이 아니라 아내가 모시는 것이다.
엄마를 모셔야 한다고 외친 나의 남편도 한게 없었다.
친아들 딸들은 하루도 못 모신다고 하고, 버리지도 못하고
그냥 내가 안고 갔다.
피덩이 키워주신 대가를 치루는 것인지는 몰라도 얼마나
화를 돋구는지 난 내가 몹쓸 인간이 되는 줄 알았다.
이사 가고 다음해 IMF 터져
그래도 이기지 못하고 꿈이려니 하고 융자를 얻어 광명으로
이사를 갔다. 그 다음해 IMF가 터졌다.
집 이자는 올라가고 나의 월급이 밀리고 신문사가 망하고
하면서 집에 어려움이 왔다.
하나님아버지께서 못가게 막으신거 같았는데 그냥 이사를 가고
교회도 옮겼다. 광천교회로...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틈틈이 신학교도 다니고 음악학교도
다녔는데 거기서 추계대를 나온 어떤 언니를 만나 나의 딸도
8개월 레슨을 받고 성악을 전공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이 부분도 하나님아버지께서 갑자기 턴 시키셨다.
딸이 어렸을 때 그렇게 새벽예배 때나 기도 때마다 아름다운
소프라노의 음성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딸 되게 해달라고
기도를 드려놓고 전공시킬 준비를 생각도 못하고 있다가
고3 2월달에 대학 진로를 놓고 의논하고 생각하고 있는데
갑자기 언니를 만나게 되고 레슨을 받게 돼 성악을 전공하게
됐다.
이 때도 나의 욕심은 무조건 성가대에서 아름답게 찬양하는 것이지
어디 세상적으로 나가서 크게 성공하는 것이 아니었다.
물론 가난해서 그렇게 생각했었는지는 몰라도.
신학교에서는 유웅장 교수님도 만나 안양제일교회에서 8개월간
솔리스트로 봉사를 했으며 그 교수님께 영향을 받아 지금도
성가대를 쉽게 이끌 수가 있다.
안양제일교회 대예배 성가대 소프라노는 정말 막강하다.
서울시립, 성남시립, 안양시립, 수원시립 단원 등 전공자가
10명 정도였다. 나 같은 사람은 명함도 못 내민다.
그래서 그 교회는 솔리스트 사례비가 없었다.
유 교수님의 성가대 지도법을 따라
이 글을 쓰면서 교수님이 생각나서 안부를 물었다.
아직도 그 신학교에서 교수님으로 근무하고 계신다고
하신다. 교수님은 테너를 전공하시고 유학도 갔다 오시고
제주대학을 거쳐 여러 신학교에서 교수님으로 활동하고 계신다.
유학 갔다 오시면서 외국곡을 5000곡 정도 사오셨다고 하셨다.
그리고 저녁이면 번역도 하시고 편곡도 하셨다.
교수님은 성가대에 대해서 참 많이 신경쓰시고 준비도
철저히 하시는 것 같다. 성가대 세미나도 많이 하신다.
대곡을 외우시기 위해서는 몇 시간도 투자하신다.
교수님의 악보를 나도 많이 받아서 하나님아버지께 드렸다.
지금은 전라도 광주의 큰 교회에서 지휘를 하시고
주유소도 운영하시면서 아직도 청년 같이 사시고 계신다.
발 넓으신 것이 전국구이다.
내가 별명을 지어 놓은 것이 있는데 '발발이 교수님' 이시다.
얼마나 부지런하신지 성가대 연습 시간보다 1시간 일찍 가셔서
준비하신다.
연세가 70대 중반이신데도 아직도 손이 여자손 보다 예쁘시다.
얼마 전에 지휘자 세미나에서 만났었다.
예쁜 손을 유지하시기 위해서 장갑끼고 운전하고 다니신다.
지휘하려면 손이 예뻐야 한다고 얼굴보다 더 신경쓰고 계신다.
안양제일교회에서 솔리스트로 봉사하면서 교수님의 지도법을
눈으로 배웠다. 나는 교수님의 음악성을 좋아한다.
곡을 고르시는 수준이 너무 높으시긴 하지만
나도 그런 스타일을 좋아한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유 교수님과 같은 주일날 성가대를 그만 두게
됐는데 교수님은 선릉의 청운교회로 옮기시고 나는 신성성결교회로
지휘하러 왔다. 신성교회에서 딱 연락이 왔다. 신기한게.
그래서 나는 하나님아버지께서 나를 신성교회로 다시
인도하셨다고 생각한다. 타이밍이 기가 막히다.
나는 헌금송을 맡은 것이 있어 한 주 더 있다가 왔다.
8개월 배운 것이 얼마나 효과를 발휘하고 있는지 모른다.
물론 기도 드리고 하는 것은 필수이지만 말이다.
1년치 택시비 투자했더니 집을 사주셨다
광명에서 교인간에 집담보로 대출 보증을 서주고 그 일이 잘못돼서
집을 팔고 빚청산하고 고척동으로 전세로 이사를 왔다.
이사 와서 먼저 한 일이 새벽예배를 어느교회로 갈까 고르는 일이었다.
신성교회로 다시 왔지만 거리가 있어서 새벽에 간다는 것은 생각도 못했다.
그렇지만 마땅한 교회도 못찾고 남의 교회라는 생각에 잘 가지질 않았다.
그러던 어느날 학생이었던 딸이 갑자기 철야기도회에 대해서 물어봤다.
우리 목사님은 새벽예배나 철야기도회 설교가 더 좋고 은혜스럽다고
설명해줬다.
그랬더니 아들하고 둘이 밤을 새우더니 택시를 타고 신성교회로
새벽예배를 갔다 왔다. 목사님이 놀래서 어떻게 왔냐고 하시면서
반가워하셨다고 했다.
그렇게 둘이 석달 정도를 새벽예배를 갔다. 철야도 갔다.
나도 염치가 있지 애들이 그렇게라도 새벽예배를 가는데
안갈 수가 없어서 셋이 택시를 타고 새벽예배를 가고
철야기도회도 가고 수요예배도 가고 했다.
그렇게 1년을 갔는데 교회에서 차 운행을 해주지 않았다.
보통 다른데 같으면 셋 정도면 차 운행표를 넣어주는데 말이다.
그래도 그런거 요구하지 않고 동전까지 탈탈털어 택시를
타고 갔다. 이때도 거의 가난했다.
그런데 하나님아버지께서 교회 가까이에 집을 사게 해주셨다.
물론 융자를 얻었지만 전세로 가는 것보다 좋은 조건에서
좋은 집으로 가게 하셨다.
우리 이사하고 다음날 택시 기본요금이 올랐다.
2005년 6월 1일부로...
제가 무슨 전도사를...영혼 사랑도 없는데요
하나님아버지께서 우리의 인생을 인도하시는 것이 꼭 네비게이션
같다는 생각을 했다. 네비게이션을 보고 길을 가다가 잘못 가더라도
다시 다른 길을 찾아주고, 가려고 했던 길을 재탐색해서 알려주는
것처럼 하나님아버지께서 그러시는 것 같다.
돌아서라도 하나님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길로 인도하시는 것 같다.
나의 아들이 두살 정도 됐을 때 그때도 아직 가난했다.
우리 앞 집으로 어떤 아줌마 가족이 이사를 왔다.
이삿짐을 세 식구가 나르고 친척이나 다른 사람은 없었다.
나중에 이야기 하면서 알게된 것은 아저씨가 사업을 하다가 망했다.
그날 나는 이삿짐은 못날라주고 김치가 맛있게 담가졌길래
라면을 끓여서 대접해 드렸다. 너무 고마워했다.
나는 당연한 일을 한 것 같은데 나이도 어린 애기엄마가
그런 신경을 써줬다고 계속 칭찬해 주셨다.
그 분도 예수님을 믿는 분이셨다. 좀 살다가 친해진 후에
무슨 얘기를 하다가 "성인이 엄마는 전도사를 했으면 좋겠다"는
말을 했다. 생각도 안했던 부분이라 정색을 했다.
"제가 무슨 전도사를 해요~ 전도도 못하는데요.
영혼 사랑하는 마음도 없구요" 라고 했다.
그 때는 영혼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는 것이 부담이었다.
누구든지 은혜의 강물에 풍덩 빠지게 해주세요
그 교수님 지도법은 다음주 것만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두어달 정도 후 것도 계속 부르게 해서 그 곡과 친해지게 하는
방법이었는데 나도 그렇게 하니까 쉽게 따라오는데 처음에는
잠깐 힘들어 하지만 나중에는 훨씬 쉬워지는 것을 알게 됐다.
그래서 누구든지 성가대를 들어오면 처음에는 정신이 없을 수 있는데
3개월만 참으면 그 때는 쉬워질테니까 꾹 참으라고 말해준다.
왜냐하면 처음 들어왔는데 다음주 곡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이곡 저곡 하니까 정신 없어한다.
초보자는 지금 무슨 곡을 연습하는 것인지, 다음주 곡은 무엇인지
몰라하다가 맨 끝에 다음주 곡을 한번 정도 부르고 나서 연습을 끝내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라서 쩔쩔맨다.
그러면 옆 사람에게 잘 가르쳐 주라고 한다. 선배로서.
그리고 나는 기도를 드린다.
"하나님아버지, 누구든지 성가대원으로 들어온 이상 성가대실에
들어오기만하면 은혜의 강물에 풍덩 빠지도록 도와주세요.
저는 부족하여 기도 드릴 수 밖에 없어요.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드렸습니다. 아멘"
그렇게 기도를 드리고 나니 새신자든, 상처를 받아 부서를 옮긴 성도든,
봉사를 안하고 맴도는 성도든, 누구나 오면 성가대원으로 정착하는
것을 경험하고 있다.
내가 장로교에서 성가대를 했을 때 배운 것은 성가대원은
세례교인이어야 하고 어느 정도 음악 수준도 있어야 하는 것으로
배웠지만 나는 지금 그렇게 하고 있지 않다.
목회하는 마음으로 친교를 위해서도 누구든지 들어오라고 한다.
립싱크해도 괜찮다. 새신자라도 상관 없고 우울증이 있어도 상관 없다.
하나님아버지께 치료해 달라고 기도를 드려준다. 내 눈에 띄어야 기도
드려주는 단점은 있다. 그러나 거의 잘 정착하고 일군으로도 키워진다.
나중에는 누군가를 통해서 nwc 프로그램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뛸듯이 기뻤다. 사용방법도 얼렁배워서 좋은 악보는 직접 그렸다.
성가대원 중 몇 사람은 신성교회 카페에 올려 놓은 몇달치 곡을
연습해온다. 죽어라고 연습해 온다.
NWC프로그램이 큰 역할을 해주고 있다. 이 프로그램을 무료로
쓰도록 허락해 주신 프로그래머께 감사 드린다. 나중엔 구입했다.
엄마의 성가대 지도법을 따라
나의 딸도 다른 교회에서 지휘를 하는데 그 방법대로 해서
성가대를 쉽게 이끌어 가고 있다고 칭찬이 자자하다.
먼저 지휘자들은 다음주 곡에 그 다음주 곡 연습하는 것도
쩔쩔맸는데, 그것은 프로그램을 사용할줄 몰라서 그랬을 수도
있겠지만, 김성혜 지휘자님은 너무 쉽게 가르치고 편하게
인도해 준다고 좋아한다고 한다.
신성교회에서 사례비는 지불하지 않았지만 테너 솔리스트를
몇년 동안 수고한 청년이 있었는데 2011년에 지휘자로 나갔다.
우리 교회 장로님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무보수로 있었다.
이 청년은 부전공이지만 테너였다. 테너에서도 연습하고 베이스가
못하면 베이스에서도 음을 잡아주곤 해서 내가 편했었다.
나는 성대가 약해서 4파트 음잡아 주기는 목이 힘들었다.
가르치느라고 말도 해야 하고.
나의 딸도 소프라노를 전공하고 우리 교회에서 8년 동안 무보수로
솔리스트로 봉사하다가 지휘자로 나갔다.
하나님아버지께서 축복해 주신 것이라고 생각한다.
무보수로 봉사하는 것을 보시고 하나님아버지께서 유 교수님을 통해
선릉의 청운교회 7시 예배 성가대 솔리스트로 보내주셨다.
그 교회 성가대를 섬기고 신성교회로 와서 또 성가대를
하는 것을 몇년을 했다.
독학으로 배운 세상의 일들 '너는 내 밥이다'
30대 중반에 신문사를 들어가게 되었는데 총무과로 들어갔다가
매킨토시 컴퓨터도 독학으로 배워서 편집기자로 일을 하다가
지금은 편집부국장으로 일하고 있다. 프리렌서로도 일하고 있다.
이 부분도 내가 교회일을 한 것에 대한 하나님아버지의 축복이라고
생각한다. 타자기가 있었을 시대에 현대워드프로세서 라는 전동타자기가
나왔는데 약간의 컴퓨터 기능이 있었던 타자기였다.
목사님께서 나랑 두 여집사에게 배우라고 했는데 나는 책자로 배웠다.
그 기계를 팔면서 교육해주는 사람이 있었는데 부르지도 않고 혼자
배웠다. 다른 집사들은 못한다고 해서 나 혼자 배웠는데 나중에
그 담당자가 왔을 때 더 배울 것이 없었다. 혼자 터득했다.
나는 예배 때 쓸 교재나 교육책자 등을 만드는 봉사도 했다.
그러면서 회사를 들어가게 됐는데 일반 PC가 쉽게 배워졌다.
그렇게 일반 PC도 독학으로 배웠다. 머리가 좋은 것인지
하나님아버지께서 지혜를 주신 것인지는 몰라도 무조건
하나님아버지께서 인도해 주셨다고 영광돌렸다.
워낙 한 길을 파는 성격이라 "너는 내 밥이다"라고 찍으면
올인하는 성격이다. 그래서 금새 배운다.
내가 처음 신문사를 들어갔을 때는 기독교 계통의 주간지였다.
이 부분도 하나님아버지께서 감동을 주셨다.
합창단을 열심히 즐거워하면서 다니고 있는데 집안에
돈이 필요해져서 알바나 직장을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노래하면서 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데 환경은
그렇게 되질 않는다. 돈이 필요해진다.
그런 어느날 머리 속에서 생각이 들려오는 것처럼
"신문사에 총무과로 들어가서 편집을 배우면 되지 않겠니?"
정말 또렸했다.
그 때 당시로는 신문사를 생각한적이 없었는데 말이다.
그리고 꿈도 꾸었다. 이력서 낸 회사를 들어가는.
처음 총무과로 들어갔을 때는 이력서를 내고 갔지만
그 후로 지금까지 다른 곳으로 갈 때 이력서를 먼저 내고
나좀 뽑아 달라고 기다려 본적이 없다.
전화로도 부탁하지 않는다. 그냥 기다린다.
그대신 하나님아버지께 그 회사로 들어갈 수 있도록 해달라고
기도 드린다. 그러면 그 회사에서 전화가 온다.
다른 사람을 연결해서라도.
나는 사회에서는 사자 같이 행동하고 교회에서는 강한 양 같이
행동하려고 한다.
일을 할 때 열심히 책임감 있게 일하는 것을
보고 소개로 소개로 연락이 왔다. 지금까지.
지금와서 생각하니 하나님아버지께서 나의 소극적인 마음과
온실 소녀 같은 연약한 심성을 단련하시기 위해서 얼마나
장돌뱅이 같이 돌리셨는지 모르겠다.
돌아다니면서 일 배우느라고.
그래서 참 많이 강해졌다. 남자 같이 터프해지기도 하고.
화를 낼 때도 있지만 털어버릴 때는 한번에 뒤끝까지 다
털어버린다. 내가 생각해도 좋은 성격으로 바꿔주셨다.
처음에는 수편집이었는데, 바로 매킨토시 컴퓨터로 화상편집이
시작됐던 때라 누구한테 배울 수가 없어 혼자 배우느라 실수하고,
돌아다니면서 밤을 새우면서 인쇄소에서 배우고 했다.
이 곳 계통은 서로 안 알려 준다. 자기 노하우라서.
주일을 꼭 지키고 싶은 강한 마음
나는 성가대에서 청년들에게 이야기 해준다. 주일을 섬기는
회사를 선택하는데 그렇지 않고 주일날 일하는 회사에 들어갔을
경우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는데 주일에 일하지 않게 해달라고 하던지
일하지 않는 회사로 옮겨 달라고 기도 드리라고 말해준다.
요즘은 많이 나아졌지만 주일날 일하는 회사가 많았었다.
우리 성가대 청년들도 시험 보느라고 빠지고, 회사 가서 일하느라고
빠지고 하는 것을 보면 안타까웠다.
정말 주일을 섬기고 싶고 하나님께 예배로 영광 돌리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그런 회사로 옮겨 주실 것이라고 말해준다.
신문사도 원래는 주일에 일을 한다. 그렇지만 나는 주일을 섬기려는
강한 마음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성가대를 해야 한다는 마음 때문에
주일날 일하는 곳은 들어갈 생각을 안했다.
실력을 쌓고 나서는 주일날 일하는 곳에서 오라고 하면 성가대 연습 끝나고
간다고 하고 3시쯤 출근하는 배짱을 부리게 됐는데 무조건 통과됐다.
그쪽에서 상근해 달라고 불러서 어쩔 수 없이 갔다.
일단 들어가고 나서는 나 때문에 주일날 쉬는 체재로 바뀌는 곳도 있었다.
그래서 청년들에게 주일을 온전히 섬기고 싶어하는 마음이 강하면
하나님께서 일을 하시는데 당장 이루어지지 않는다 해도 몇년 지나보면
일이 추진 돼 있어서 주일날 쉬고 있는 곳으로 보내 질 수 있다고
꼭 기도 드리라고 한다. 전심으로.
나의 아들이 다니는 학교 행정실에서 알바를 하다가 조교로 일하게 됐다.
이 부분도 하나님아버지께서 축복하신 일이다.
아들이 고교생 때 알바를 한다고 했을 때도 나는 무조건 주일예배를
드릴 수 있는 조건이어야만 했다. 알바를 못할지라도.
아들은 그래서 알바를 구할 때 영역이 좁았다. 알바비도 비싼 것이 주말에
일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니 좋은 알바를 주셨다.
남편에겐 각종 재능을...원리를 생각
나는 청소년 때는 세상과 양다리 걸치고 살았고 청소년으로써
안해본 것이 없을 정도로 해봤으며 놀러도 많이 다녔다.
그래서 지금은 어디 단풍놀이 가자, 여행 가자 조르지도 않고 갈 생각도 없다.
다른 아내들은 남편에게 어디가자, 영화 보여달라 그런다는데
우리는 반대다. 남편이 가달라고 조르는데 100번 정도 졸라야 1번 정도 가준다.
남편은 취미생활이 영화를 보는 것인데 그것도 극장에서 보는게 아니라
집에다 아예 극장식 시스템을 설치해 놓고 영화도 보고 음악도 들으면서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성격이다. 그런 고급 취미를 갖고 있어서
그 비용을 대주느라고 나는 빚더미에 올라 앉고 나는 가난하다.
나의 남편은 하나님아버지께서 얼마나 재능을 많이 주셨는지 못하는
것이 거의 없을 정도다. 전기며 인테리어며, 최강이 스크린인거 같다.
어디서 배우지도 않았는데 이곳 저곳 발품 팔면서 다니더니 배워가지고
혼자 설치를 다한다.
앰프쪽으로 가보면 정신이 하나도 없다. 얼마나 전기선이 복잡하게
엮어져 있는지, 교회에서도 사택에서도 교인집에서도 고칠 것들이 있으면
나의 남편에게 부탁한다. 머리가 좋은건지 원리를 생각하면 다 고쳐지고
방법이 나온다는데 나는 그런 쪽은 모른다.
2012년 4월 30일 드디어 3D 영화를 볼 수 있는 시스템을 설치했다..
이런 시스템도 우리 가정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독려모임을 가졌을 때
영화도 보여주고 음악도 틀어주면서 분위기를 만들어 주는데 사용한다.
남편이 이런 고급 취미를 갖게 됨으로 나는 생활이 힘들었지만
그래도 위안이 되는 것은 술 담배를 전혀 안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피부도 깨끗하고 냄새도 안난다.
성탄절 이브에 왜 나는 나이트 가지?
고교 시절부터 주일날이면, 그 때는 일요일이었다.
친구들하고 강이며 바다며 산이며 놀러 다녔으며
심지어는 나이트까지 안방 드나들 듯이 하며 살았다.
오죽하면 성탄 이브날 나이트를 가면서
"왜 예수님이 오신 날 우리는 나이트를 가서 노는 거지?"
"왜 예수님이 오셨는데 나이트 같은데서 츄리를 해놓는거지?"
라고 생각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도 모르면서 말이다.
나이트가 끝나면 교회 가서 학생들하고 청년들하고 밤을 새며 놀았다.
이렇게 지냈다고 해서 나의 성격이 외향적이냐하면 안그렇다.
굉장히 내성적이었는데 고 2때 내가 스스로 성격을 밝게 바꿨다.
그러다가 잘못된 길로 갈뻔했지만 이금주라는 친구가 울면서 말렸다.
"너하고 그런 삶은 안어울린다"고. 그래서 그 친구 말을 들었다.
하지만 놀러 간다고 했을 때는 학생부 예배는 빼먹더라도 어른 1부
예배인 오전 7시 예배를 드리고 갔다. 그리고 웬지 모르지만 수요예배도
갔었구, 토요일 학생부 모임도 갔었구, 주일이면 7시 저녁예배도 갔다.
학생예배 때 아니고 어른 예배 때는 학생들이 하나도 없었던 것 같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었다.
친구랑 '유행가~찬양까지' 섭렵
학생부 때는 성가대를 봉사했다. 큰오빠랑 부흥회도 한번 갔었고,
중학교 때는 시골 이모네 집에서 새벽예배도 한번 갔었다.
학생 때는 성경이 무엇인지 하나님이 누구신지 예수님이 누구신지
모를 때이다. 교회는 갔었지만. 그래서 창조론이 무엇이지도 모를 때이다.
그러나 고교 생물시간에 진화론을 배울 때는 그 학설이 안 맞는 것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저절로 생겨서 진화됐다는 것은 믿어지지 않았다.
선생님께도 우리 조상 원숭이가 왜 창경원에 있냐고 질문도 했었다.
시험을 보기 위해서 외우고 공부했을 뿐이었다.
하나님아버지께서 알려주셨나? 안들렸지만.
고 2때부터 어떤 힘에 이끌려 친구랑 둘이서 노래를 하고 하교를 했는데
유행가(아~ 으악새 슬피우니) 부터 시작해서 복음성가에서 성가대 찬양곡까지
몇 시간을 부르고 집에 왔다.
찬양이 무엇인지 몰랐지만 노래가 좋아졌다 친구 덕에.
하나님아버지께서 노래를 좋아하는 친구를 만나게 해주셨다.
아버지 몸매 40-40-40 '완전 통짜야'
나는 초등학교 1학년 때 친엄마가 암으로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나를 40대 중반에 낳으셔서 엄청 예뻐하셨다.
아무리 귀찮게 해드려도 화를 안내셨다.
손톱 깍아주고, 발톱 깍아주고, 귀 파주고, 머리 쓰다듬어주고,
얼굴도 만져주고, 가슴둘래 허리둘래 히프둘래 재주고
"40-40-40인치야 아버지 몸매는 무통! 완전통이야!"
해가면서 친구처럼 지냈다.
세상말로 고무신에 껌 붙어 있듯이 지냈다.
나는 엄마가 일찍 돌아가셔서 엄마의 사랑은 못 받았지만
아버지한테 듬뿍 받았다. 머리 묶어주시고 땋아주시고,
가방 챙겨주시고, 도시락 싸서 넣어주시고, 실내화 챙겨주시고,
교복 다려주시고, 삐져서 도시락 안 가져가면 학교까지 갖고
오셨다.
아버지는 키 177센티에 건장하시고 피부도 하얗고 잘생기셨다.
귀공자 타입으로. 어려서 가난했는데,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어머니가 다른데 시집을 가버리셨다고 하셨다.
자녀 셋 그냥 거지 같이 살도록 내버려두고.
하지만 그 때는 여자들이 돈을 버는 시대가 아니라 먹고 살려면
재혼했어야 했는데 초등학교 나이의 아이들 셋을 그냥 버려둔채
시집을 가셔서 아버지는 초등학교도 못 나오시고 고생을 많이 하셨다.
나는 아버지의 어렸을 때 이야기를 듣고 마음이 많이 아팠다.
내가 만약 이담에 커서 결혼을 해서 사별을 하든 이혼을 하든
내 자녀는 죽어도 버리지 않고 같이 죽고 살리라 다짐했다.
애정결핍에 정서불안 남편 '화상통화로 해결'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나도 남편이나 아이들이 귀찮게 해도
화를 잘 안낸다. 가족이 나를 보면 귀찮게 하고 싶게 생겼다고
할 정도이다. 장난을 받아 주니까 그렇지 생긴 모습이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가장 귀찮게 하는 사람이 남편인데 지금도 화상통화를 해야한다고
핸드폰을 바꿔야 한다고 조른다. 나도 웬만하면 핸드폰을 이것저것으로
바꾸는 사람이 아닌데 이번에는 안되겠다 싶은 것이 나는 기도 드리고
싶고, 성경공부 하고 싶고, 성경 읽고 싶고, 악보도 봐야 하고,
인터넷 카페도 운영해야 하고 글도 써야 하고 신문편집 알바 일도
해야 되는데 남편은 옆에서 계속 놀아달라고 보채니 살 수가 없다.
"무슨 애정결핍에 정서불안한 애도 아니고 어른이 되가지고 혼자 놀지
놀아달라고 그러냐" 하지만 성령하나님께서 "남편하고 잘 놀아줘라"고
명하셔서 할 수 없이 놀아주는 방법을 생각했는데 그것이 '화상통화'이다.
얼굴을 한번씩 보여줘야 안심을 하니 원.
남편은 내가 옆에 있어야 안심을 하는데 자기가 회사에서 일하고
있을 때 외에는 거의 내 옆에서 지내려고 한다. 혼자 자라고 그러면
조금 자고 일어나는데 안절부절한다. 옆에 내가 없다고.
2012년 5월 19일 나의 딸이 결혼해서 방을 뺏다.
보통 애들 방을 그대로 두어서 친정에 놀러와서도 자기방에
들어가서 쉬기도 하고 그런다는데 우리는 내방으로 바꿨다.
남편이 큰책상을 사고 의자도 사고 내 악보도 갖다 놓고 해서
내 서재겸 편집작업실로 만들어 주었다.
제일 중요한 것은 기도방으로 쓰고 있다는 것이다.
딸은 이런 아빠의 모습을 보고
"아빠는 질리지도 않냐? 엄마랑 30년 살았는데?
혼자 놀지 무슨 엄마만 찾냐, 우리도 안 찾고 엄마 밖에 몰라" 그런다.
나는 이것이 어떨 때는 좋고 어떨 때는 귀찮은 것이
신앙생활을 단독으로 할 때는 귀찮고,
그냥 있을 때는 남편하고 있는 것을 좋아한다.
2012년 3월 7일 오늘 핸드폰 화상통화되는 것으로
바꾸러 갈 것이다. 오후에 바꿨다. 좋다.
모든 부부들에게 전하고 싶다. 다른 이성하고 화상통화하고 살지 말고
부부가 화상통화 하면서 정을 쌓고, 사랑도 다시 회복 하기를 바란다.
나는 부부가 정으로 산다고 하는 것을 싫어하는데
사랑이 어디서부터 떨어졌는지를 부부끼리도 대화로 점검하고
사랑을 다시 회복하면서 사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면서
나는 그렇게 사랑으로 살고 있다.
밖에선 완벽을 추구… 집에선 나사 두개 빼놔
나의 실물이 그렇게 귀찮게 하고 싶게 생겼는지
나를 본 사람들은 절대 이해 못할 것이다.
나는 밖에 나가서 일을 할 때는 완벽을 추구하는 스타일이라
세밀하게 생각하고 시나리오를 짜고 추진을 한다.
누가 일을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알아서 하는 스타일이라
잔소리 듣는 것도 싫어한다.
어려서부터 집에서도 싫은 소리를 안 듣고
사회생활 하면서도 훈계를 안들었다. 시말서도 안써봤지만
시말서 쓰라고 그러면 사표를 쓴다고 할 정도이다.
그렇게 일하고 집에 오면 나사 두 개 빼놓은 사람처럼 지낸다.
안그러면 가족들이 피곤할 것 같아서 일부러 그렇게 살고 있다.
그래서 식구들이 나를 귀찮게 한다. '귀여븐어무이' 해가면서.
모든 사람과 사건이 연계된 세상일
나는 즉석에서는 거짓말을 못한다. 그렇지만 이 부분을 속여야겠다고
생각하고 계획하에 하는 거짓은 거의 완벽에 가깝다. 그렇지만 그런
거짓상황을 나쁜 쪽에 사용하지 않고 누구를 돕는데 사용했다.
하나의 거짓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사람과 사람과 연계된 모든
사람까지 신경을 쓰고 그 사람이 무슨 말을 할 때 대처해야 할
말까지 생각해서 입에 넣어주었다. 시나리오를 짠다.
(사무엘하 14:3) "왕께 들어가서 그에게 이러이러하게 말하라고
요압이 그의 입에 할 말을 넣어 주니라" 아멘.
그 부분도 성령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서 거짓이라도
좋게 사용해서 다행이라고 하셨다.
하나님께서 욥에게 천지창조를 자랑하셨는데 나에게는 모든 사건과
사람들과의 관계가 아주 세밀하게 연계되어 있는데 이런 모든
일들을 주관하고 가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자랑하셨다.
세계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데 작은 사건부터 큰 사건까지
이 나라 저 나라, 이 사람과 저 사람, 부자와 가난한 자 등
모든 상황들이 톱니바퀴처럼 연결되어 있는데 복을 받게 되는
징계를 당하게 되든 전부 자동으로 움직인다고 하셨다.
아브라함에게 너는 복의 근원이 된다고 하셨는데 복을 받게
살면 아브라함을 중심으로 해서 톱니바퀴가 움직이고
복을 받지 못할시에는 그 주변으로부터 시작해서 톱니바퀴가
움직이는데 어려움이 번지는 것이라고 하셨다.
그냥 사는 것이 아니라 이런 세밀한 조화속에서 살고 있다.
아버지에게 나는 '합법적인 도둑'
나는 아버지 보는 앞에서 지갑에서 돈을 빼가도 아버지가
아무 말씀도 안하실 정도였으며 귀여움을 독차지 하면서 컸다.
사촌동생이 "언니는 참 공주처럼 컸다. 나는 식모처럼 일했는데"
라고 서글픈 투로 말했지만 다 커서 결혼한 후라 시기는 아니었다.
부러워 했다고 한다. 그 사촌동생은 참 착했다.
나도 그래서 우리 아이들을 그렇게 키웠다.
먼저 엄마 지갑에서 돈을 빼가고 나중에 보고해도 되는 식으로.
돈이 없어도 학용품비 한다고 3천원만 달라고 하면 5천원을 주고
6천원 정도를 달라고 하면 1만원을 주고 그렇게 넉넉하게 주었다.
영수증이나 무엇을 샀느냐고 다시 물어보고 확인도 안했다.
그렇게 하니까 돈을 더 타내기 위해서 거짓말도 안하고
자기들이 쓸 만큼만 달라고 했다. 정직하게 컸다.
그렇다고 사치스럽게 돈 귀한줄 모르게 키우진 않았다.
나는 집안 생활의 어려움을 아이들에게도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래서 돈을 함부로 막 쓰지 않도록...
하지만 내가 더 썼다고 생각하는 부분이, 다른 것은 몰라도
먹을 것을 사달라고 하면 거절을 안했다. 일단 먹고보자였다.
그래서 그런지 키는 컸다. 건강도 하고.
자녀를 혼낼 땐 위 아래 동일하게
나의 아버지는 매를 드신 적이 거의 없었다. 늘 자상하셨다.
다른 형제들은 맞았는지 모르지만 나는 안 맞고 컸다.
그래서 나도 아이들에게 손지검을 잘 안한다.
정말 잘못하면 3번 정도 경고를 주고난 후 둘다 똑같이 혼낸다.
이 방법도 아버지께 배웠다. 바로 위의 오빠랑 나랑 남동생이랑
놀다가 남동생이 울기라도 하면 셋이 똑 같이 혼나서 그 후론
남동생도 잘 안 울고 사이좋게 놀게 되는 것을 배우고 나도
그렇게 키웠다.
바로 위의 오빠한테는 내가 대들고 싸웠는데 이상하게 남동생하고는
한 번도 싸워본적도 없고, 때려본적도 없고, 욕을 해본적도 없고,
큰 소리를 질러본적도 없다. 고등학교 다니는 그 큰덩치를
팔베게해서 재우고 자고 그랬다. 둘이 연인도 아닌데.
위 자녀에겐 '권위'를 아래 자녀에겐 '사랑'을
어느날 애들 어렸을때, 누나 둘이 있는 남자애가 자기 둘째 누나를
발로 차고 때리는 것을 우연히 본 후 내가 없을 때 나의 아들이
누나를 때리면 어떻게 하나 하고 딸한테 엄마로서의 권한을 많이
주었다.
그렇다고 동생을 함부로 때리고 혼내고 하지 않게 잘 교육시켰다.
그렇지만 아들은 따로 많이 사랑해 주었다.
얼마나 넉넉히 사랑을 주었던지 혼내면서도 웃음이 나오고
귀엽고 예뻐서 나중엔 혼내지 못하고 안아주고 만적도 있다.
이렇게 말하면 지금도 귀엽게 생겼는 줄 아는데 지금은 다르다.
어떤 아이는 어린 얼굴 뻥튀기 해놓은 것처럼 어렸을 때 그대로
큰 애들이 있는데 우리 아들은 어렸을 땐 방글라데시에서 델구온
아이 같이 생겼더니 지금은 한덩치 한다.
어려선 안 크게 생겼더니 훤칠하게 큰 것 까지는 좋은데
어려서 귀엽던 얼굴이 어디 갔다.
우리 아들은 어려서 왜소하게 커서 키가 안 클줄 알고 염려했다.
그래서 나는 아들을 볼 때마다 잔소리가 아닌 넋두리같이
"아들~ 무조건 적어도 180센티는 커야 한다"
"요즘은 얼굴 보다 키 큰 것이 대세란다. 꼭 커야 한다"
하면서 아들에게 주입시켰다.
그런다고 키가 크겠냐만 그래도 아들은 "알았어 엄마" 하고 대답했다.
요즘은 잘 생긴 것보다 키 큰 것이 대세이기 때문에 나도 아들이
키가 크길 바랬다. 하나님아버지께서 내 기도를 들어주셨다.
그렇게 예뻐하니까 누나한테 엄마가 권한을 많이 주어서 자기는
심부름이나 하고 머슴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노여워 하지도 않고
심부름에 대해서 불평은 있었지만 그것도 누나가 잘 설명해주고
따로 예뻐해주고 용돈도 주고 대화도 나누고 잘 대해줘서
다른 말썽을 피우는 아이로 성장하지 않았다.
심부름으로 단련됐다고 할 정도로 심부름을 시켰다. 누나나 나나.
"이 밤중에 여자인 누나가 가야되겠니? 남자인 니가 가야지?"
이것은 정말 아들한테 미안한 부분이지만 어느날 알바를 하고
와서 몸살이 났는데 딸하고 내가 걱정해 주면서 달라붙어서
찬수건으로 씻겨주고 포도나 바나나를 먹여가면서 힘을 돋구어 주었다.
그랬더니 아들이 생기를 되찾았다. 그리고 나서 좀있다가 심부름 시켰다.
이 때는 많이 서운했다고 했다. 어쩜 살려놓고 심부름 시키냐고
우리집은 남자들은 머슴이고 여자는 공주였는데 이제는 아니다.
서로 같이 섬긴다.
이 엄마가 그렇게 쉬워?
아들은 누나는 무서워 해도 엄마는 안무서워 했는데 그런 엄마를 딸이
알아서 해준다. 대신 동생을 타이르고 가르치고 버릇을 고치고 말이다.
새벽예배 갈 때도 누나 발자국 소리만 들어도 몸이 깨서 가슴이 두근두근
한다는데 엄마가 깨우면 "조금만 더 자고~" 하면서 어떨 땐 안가기도 한다.
그렇다고 내가 만만한 엄마는 아니지만 나는 눈빛으로 말을 한다.
딸 뒤로 물러나서 딸이 하도록 하면 알아서 다 한다. 말썽없도록.
이 눈빛은 큰오빠한테 배운건가? 오빠 눈빛 앞에는 꼼짝못한다.
나는 아이들 키울 때 몸이 너무 약해서 혼내지도 못했다.
소리 한번 지르고 나면 기운이 다 빠져 나가서 침대에 누워야 했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기가 다 빠졌던 것 같다.
그래서 많이 보살펴 주지도 못하고 저희들끼리 컸다.
실내화도 스스로 빨고 준비물 챙기고, 숙제도 도와주지도 못하고
도시락도 싸 갖고 갈 때도 있고 엄마는 모양만 있었던 때가 있었다.
할게 기도밖에 없어
우리는 결혼할 때도 가난했지만 계속 가난을 벗어나진 못했다.
남편이 허리디스크였고, 나는 임신중이었고 해서 극도로 가난했을 때는
남편하고 정말로 기도 밖에 할게 없었다.
딸이 2살 반쯤이었을 때 교회를 데리고 가기도 했지만 철야기도나
새벽예배는 두고 갔는데 불안해 하지도 않고 하나님아버지를
의지했었다. 남들이 알면 부모가 미쳤다고 소리들을만 했다.
이때는 먼저 다니던 교회에서 시험들어 교회를 옮기려고 기도 중에
있을 때라 본교회에서 철야기도회 끝나고 나면 신성교회로 가서
새벽예배를 드릴 때였다.
전심으로 기도 드리기 위해서였다. 그 길밖에 없었다.
그대신 어린 딸을 교육시켰다. 계속해서 몇 번을 주입시켰다.
"성혜~" "응?" "자고 일어났는데 엄마 아빠가 없어 그러면 어디 간거지?"
"교회" "응 그렇지. 그럼 교회 가서 모하지?" "기도" "그럼 성혜가 일어나서
울어야 될까~ 안 울어야 될까~" "안 울어야돼" "어우 착해라. 정말로
안울거야?" "응" 이랬다.
정말 안 울었다. 기가 막히다. 지금 생각해도.
하나님아버지께서 전적으로 아이를 키워주셨다.
가출하면 안 찾는다~
나는 아무리 약했어도 정신력이 얼마나 강했는지 모른다.
내가 생각해도 강했다. 나는 자아도 강하다.
누가 나를 싫다고 하면 단번에 끊어버릴 정도로 강하다.
우리 아이들 초등학교 다닐 때만해도 가출이라는 것을 재미삼아
했었나보다.
하루는 아들이 "엄마 우리 친구들이 나더러 같이 가출하재" 그러길래
"너도 집을 나가고 싶어?" 그랬더니 "아니~친구들이 그렇게 말하길래"
"나는 안하고 싶은데. 다들 가출하나봐" 라고 했다.
그래서 "엄마는 너희들을 너무 사랑해, 그렇지만 엄마 싫다고
집 나가는 자식들은 안 찾을거야" 라고 일부러 겁을 줬는데
그 이야기를 누나한테 하고는 같이 가출 안하기로 했다고
나중에 말을 했다. 다른 친구들은 돌아가면서 가출했나 보다.
나는 가끔 아이들을 혼내고 나서 그냥 마는 것이 아니라
엄마한테 요구사항이나 불만이 있으면 얘기하라고 하는데
절대적으로 그 말을 듣고 화를 안낸다.
변명이 필요한 부분에서는 엄마가 이래서 그랬단다 라고
잘 설명해준다. 이해하도록. 그래서 엄마 아빠에 대해
마음이 묶여 있지 않도록 풀어준다.
심하게 혼냈을 때는 안고 기도해 준다.
반대로 하고 싶은 청소년 '아무 생각 없어'
사람들을 보면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은 욕망이 있음을 안다.
중·고생도 보면 머리를 기르라고 하면 자르고 싶고, 짧게 자르라고
하면 길게 기르고 싶고, 짧은 교복치마를 입으라고 하면 긴 치마를
입고 싶고, 긴 치마를 입으라고 하면 짧은 치마를 입고 싶어하는
반대적인 현상을 보이고 있다.
학생들을 교육시킬 때 이 심리적인 현상을 역으로 사용하면 되는데
나는 딸에게 이 방법을 사용했다. 배꼽티도 입으라고 했다.
여름에는 어깨끈티만 입고 나가도록도 유도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남편은 그런 개방적인 모습을 아주 싫어했다. 통바지를 제일 싫어했는데
-딸이 통바지를 좋아했다-가위로 다 짤라 버린다고 할 정도다.
그러면 나는 "시장 나가봐도 이런 바지밖에 없어서 나도 그런 바지 사왔어"
그러면서 나도 입고 다닌다. 남편도 어쩔 수 없어 한다.
딸이 아빠 눈치를 보면 "집에서 나갈 때는 가디건 걸치고 나가서
밖에 나가면 벗고 다니다가 집에 올 땐 다시 입고 들어오면 되지"
그런다. 그러면 딸은 "모하러 그렇게까지 해 귀찮게시리"
그리고서 단정하게 입고 나간다.
그러다가 마지막으로 엄마로서 이것만은 하지 말라고 부탁한 것이 있는데
힙합바지였다. 길게 늘여뜨려서 발 뒷꿈치로 밟고 다니는 것이었다.
그것은 아무리 예쁘고 똑똑하고 멋있는 청소년일지라도 어울리는
아이들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너는 예쁘고 모델 같은데 그런 바지를 입으면 전혀 바보같으니까
그 바지만은 입지 말라고 하고 다른건 웬만하면 다 하도록 허용했다.
그랬더니 본인 스스로가 절제하며 단정하게 입고 다니려고 했다.
오히려 나와 반대였다. 나는 다른 아이들처럼 하고 다니라고 부추기고
딸은 어른처럼 입고 다니려고 해서 더 성숙해졌다.
나의 딸은 중·고생 때 키도 크고 얼굴도 예쁘고 몸매가 모델 같았었다.
169센티에 49키로 정도 나갔었다.
모델하라고 청은 들어왔었지만 하체가 튼실해서 모델하기를 거절했는데
본인 스스로가 알아서 거절했다. 엄마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말이다.
본인이 그렇게 하고 다니는 것이 나쁘다는 것을 알고 알아서 절제했다.
하지 말라고 강요하면 할수록 더 하고 싶은 것이 사람들 심리이다.
아들하고 호프집에서 대화 트기
나의 아들이 고등학교 때 술을 먹고 들어 온적이 가끔 있는데
나는 아빠한테 들키지 않도록 도와 준다.
냄새가 나도 모른척 해주는데 화장실부터 가서 양치하고 세수하고
껌도 씹고 나름대로 노력은 하지만 냄새는 난다.
그리고 놀지도 못하고 자기 방에 들어가서 잠을 잔다.
보통 때는 집에 들어오면 엄마 앞에서 춤을 추고 재롱을 부리는데 말이다.
그런 아들에게 나는 아예 내가 호프집에 데리고 가서 500cc 두 잔 시켜 놓고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눈다. 그러면 좋아서 속에 있는 얘기 다 털어 놓는다.
그리고 학교에 가서 친구들에게 자랑한다. 엄마랑 맥주 먹었다고.
친구들이 다들 부러워했다고 한다. 어짜피 애들이 다 먹는 것을 아는데
몰래 숨어서 먹느니 엄마랑 먹자다. 우리 아들만큼은.
그리고 아들 생일이면 항상 그랬던건 아니지만 몇 번 그랬다.
친구들 데리고 호프집에 가서 맥주나 통닭이나 잔뜩 시켜주고
돈도 지불하고 따로 용돈 주고 해서 실컷 먹고 오라고 하고
나는 집으로 온다.
그래서 항상 나는 가난했다. 빚도 지고. 애들은 좋았지만.
그러면 호프집 주인도 좋아라 한다. 학생들은 손님으로 받을 수가
없는데 잔뜩 데리고 와서 엄마가 직접 돈도 주고 가니까 말이다.
친구들에게 완전 왕자였다고 한다. 리더까지 하게 됐다.
원래는 어려서 아이들에게 왕따였었는데 치유가 됐다.
아가들아 2개 필거 1개만 피어라
집을 오가다 보면 골목이나 으슥한 곳에서 담배를 피는
청소년들을 볼 수 있다. 우리집도 주차장이 막혀 있어서
가끔 여학생이든 남학생이든 주차장 구석에서 담배 피는
아이들을 볼수 있다.
그러면 나는 웃으면서 "아가들아~ 담배 피면 몸에 안 좋은데
2개 필거 1개 피고, 5개 필거 2개만 피어라 건강에 안좋아~.
그런 것도 호기심 때문에 그러는건데 조금 있으면 끊게 된단다.
맛도 모르고 피는 거지?"라고 말해준다.
그러면 아이들이 연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그런다.
"괜찮아. 가서 공부 열심히 해라~" 하고 웃으면서 집으로 들어간다.
나는 지금도 우리 아이들이 서른이 다되가는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아가~" "아그들아~" 이렇게 부른다.
이제 와서 성령하나님께서 말씀해 주신다.
그때 그 학생들이 "저 아줌마는 참 좋은거 같아. 누구든지 저렇게
말해주는 어른이 없는데 말야" 그러면서 계속 피던지 가던지
하지만 아이들이 상처를 받지 않기 때문에 어른한테 적대심을
갖지 않는다고 하신다.
죄송합니다 새엄마 '보고싶어요'
나는 초등학교 시절에도 가난했다.
아버지는 나이 많아 나를 낳았고 40세 중후반쯤 남동생도 낳았다.
형제도 언니, 오빠, 오빠, 오빠, 나, 남동생 이렇게 6남매였다.
그 위로도 있었는데 죽었다고 했다.
남자가 많은 중에 커서 그런지 천상
여자 같은데 남자 같은 면이 더 많다.
내가 초등학교 1학년 때 엄마가 돌아가시고 새엄마가 3번이나 바뀌었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새엄마가 들어오시기 전에 오빠들이 고생했다.
밥하고 살림하느라고, 나한테는 그런 고생이 오지 않았다.
성령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오빠들이나 동생까지도 살림이 피지 않는
우리집 생활 때문에 학교를 다 중단했는데 나만 고등학교를 졸업했다고.
그것은 나를 위한 희생이었는데 권혁미를 하나님아버지께서 쓰시기
위해서 세상의 학문 중 최고는 아니더라도 보통으로 배울만큼 자격을
갖춰야 했기 때문이라고 하신다.
고등학교만 나온 것이 하나님아버지의 뜻이었는지 모르지만 나는
그때 당시 여자들이 대학을 나오는 것이 시집 잘 가기 위함이라는 것을
알고는 대학에 대한 생각을 접었다.
성가대 지휘를 할줄 알았으면 이때 신학교라도 다녔을 것이다.
아무 이유 없이 사회적으로 어떤 사명 없이 시집 잘 가기 위해서라면
대학을 안가겠다는 주장이었다.
만약 그 때 대학을 꼭 가야겠다고 했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가지
않았을까 싶다. 큰오빠가 살아있었을 때니까 졸라서라도 말이다.
보통 다른 집 같으면 남자를 가르치기 위해서 여자 학업을 중단시키는데
우리 집은 반대로 됐다. 나를 가르치기 위해서 남자들이 희생했다.
작은오빠는 새엄마가 들어오시기 전에 영양실조까지 걸려서
헛소리까지 했었다. 그만큼 가난했다.
마지막에 들어오신 새엄마는 아버지와 20살이나 차이나는 아기를
못 낳는 엄마였다. 그래도 그 엄마가 우리를 다 잘 키워주셨다.
이상하게 마지막 새엄마가 들어오시면서 살림도 조금 나아지고
맛있는 반찬도 먹을 수 있게 되었다. 그래도 가난했다.
6남매 뒷바라지 하시느라 고생만 하셨는데 감사 드리지도 못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새언니들이 친시어머니가 아니라고
모실 생각을 안하고 시골로 어떤 할아버지에게 시집을 보내버려서
그 뒤로 못 만났다.
전화번호라도 알았으면 좋겠는데 언니가 잊어버렸다고
하면서 안가르쳐줘서 연락도 못했다. 만나고 싶었었는데.
나도 결혼해서 멀리 떨어져서 사느라고 찾아볼 생각도 못했다.
너무 죄송합니다 엄마.
제사 거부 제사음식 거부
성령하나님께서 내가 8살 때 제사를 지내던 날 모습을
생각나게 하셨다. 오빠들이 순서에 따라 다들 절하고 나서 아버지가
나에게도 절하라고 하셨는데 내가 제사상에 절하기 싫어서 큰오빠
뒤에 숨었던 모습을 보여주셨다. 그러면서 누구의 시킴도 아닌
나의 생각으로 제사를 거부했다고 알려주셨다.
이스라엘도 아니고 기독교가 많은 유럽쪽도 아니고
유교문화에 불교에 제사로 가득찬 대한민국에서 그것도
제사지내는 가정에서 8살짜리가 스스로 제사를 거부하고
그 뒤로도 계속 제사를 거부했다.
가난했던 시절 먹을 것이 귀했던 시절에, 어린아이가 제사음식도
먹을 것인데 다른 때보다 훨씬 풍성한 제사음식을 거부 했다.
제사음식 중 아무 것도 안먹었는데 생밤은 먹었다. 내가 생각해도
조그마한 손으로 한움큼 쥐고 나간 기억이 있다. 워낙 생밤을 좋아한다.
깎아서 제사상에 올라간 것인지 아닌지는 모르겠다.
제사 음식도 안 먹었다. 과일 위 아래 짤라 놓은 것은 질색을 한다.
고사 지낸 떡도 안 먹는다.
작은오빠는 큰오빠가 살아있을 때는 교회를 다녔는데 큰오빠가 죽고서는
안다녔다. 오빠네는 제사를 지냈는데 나는 가지 않았다.
명절날 한번은 오빠가 음식을 이것 저것 싸줬는데
과일 위아래 자른 것 3개가 같이 왔다.
집에 와서 보고 기분 나빠서 3개를 밖으로 던졌는데 2개는 날라가고
1개가 집안으로 떨어지면서 남았다. 다시 버릴까 하다가 그냥 뒀다.
그날 꿈을 꿨는데 귀신 둘이 나가고 하나는 남았다.
나의 딸도 그런 비슷한 꿈을 꿨다고 했다.
그래서 꿈을 깨고 나서 그 과일마저 버렸다. 짐승들이나 먹으라고.
아부하고 굽신거리는 것 싫어
중학교 때 친구 오빠따라 절에 간적이 있었는데
다들 합장하는데 나는 그런 것이 기분 나빠서 허리를 곧게 펴고 있었다.
어린 나이에 다른 아이들 눈치를 보긴 했는데 그냥 안했다.
그 때는 내가 교회를 다니기 전이었다.
교회를 몰랐는데, 하나님을 몰랐는데
우상에게 절을 안했다.
나는 왜그런지 모르지만 누구한테든 굽신거리는 것을 싫어한다.
회사에서도 내가 할일 제대로 해가면서 높은 사람을 대우는 해주는데
아부를 떨고 굽신거리는 것을 못한다.
나보다 직급이 높이 왔는데 일을 나보다 못하면 못봐준다.
그러면 겸손하게 얼만큼 일을 할수 있으니까 서로 도우면서 지내자고
하면 돕는 자세로 나가는데 만약 나를 무시하려고 한다든지
나의 아래 직원을 스트레스 받게 한다든지 하면 그땐 내가
가만 안 있는다. 회장이던 사장이던 상무이던 상관없이.
내가 없어도 할 수 있다는 입장이면 나도 안도와준다.
하지만 내가 잘났다는 것은 아니다.
나는 어디를 가든 내가 얼만큼 일을 할수 있다는 것을 정확하게 밝힌다.
거짓말로 능력있는 것처럼 하지 않는다. 그대신 최선을 다하고
성실했고 책임을 다했다.
나이 들어서 조금 헤이해졌다.
시어머니될 나이쯤 되면 설거지 하기 싫어지는 것처럼.
아플 땐 목사님과 남편에게 기도 받아
어디가서 안수 받는 것도 싫어한다.
내가 안수 받기 좋아하는 분은 우리 담임 목사님이시다.
어디가 아프기라도 하면 기도 받으러 무조건 목사님께 달려간다.
남편도 신유의 은사가 있다. 허리디스크가 나으면서
하나님아버지께서 주신 은사이다.
최종적으로 너무 아플 땐 남편이 기도해 주면 낫는다.
교회 야유예배를 갔다와서 장이 아파 꼼짝을 못하고 있을 때
남편이 기도를 해줬다. 씻은듯이 나아서 집안 일을 했다.
나는 몸이 피곤하면 아랫배에 돌맹이가 가득찬 것 같이
뻑뻑하게 굳는다. 그러면 숨쉬기도 힘들고 말하기도 힘들다.
한참을 쉬어야 풀린다. 김치라도 담근다든지 힘들다 싶으면
등뼈가 굳는 것 같아서 한참을 두들겨 주어야 풀린다.
어떨 땐 후두염이 너무 심해서 1주일 이상을 고생하고
병원도 가고 해도 안나아서 기도해 달라고 하면 해주는데
그것도 감동이 와야 해준다. 그러면 정말 깨끗이 낫는다.
그것은 나랑 같이 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지
목사님보다 기도의 능력이 있다는 것은 아니다.
평일엔 아파서 누워있다가도 주일이면 멀쩡해
첫 아이를 갖고 입덧이 얼마나 심한지 물도 못먹을 정도였다.
9개월 정도까지. 그렇지만 이상하게 평일은 입덧이 심해서 아무 것도
먹지 못했는데 하나님아버지께서 주일날은 김밥이라도 먹게 하셨다.
그래서 학생부 교사도 했었고 성가대도 봉사를 할 수가 있었다.
이 부분은 기도를 안드렸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성가대 하는 것을
좋아하셨는지 하나님아버지께서 은혜를 베푸셨다.
그리고 몸에 기가 빠져서 항상 아팠을 때가 몇년 동안 있었는데
어디가 아파서 병원갈 정도는 아니고 그냥 기운이 없었다.
잘 먹지도 못하고 잠도 제대로 못잤었고.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는 누워있을 때가 많았었다.
그러면 목사님께서 전화하셔서 기도를 해주셨다.
그래서 그런지 주일이면 아주 멀쩡한 몸 상태로 교회를 갔다.
그리고 열심히 성가대를 봉사했다. 예배를 드렸다.
다시 월요일부터 누워서 지내고 주일이면 멀쩡하고 그랬다.
감기도 걸리면 콧물, 눈물 흘리기서부터 시작해서 기침감기에
몸살까지 걸치고 나서 회복되곤 했다. 그렇지만 아무리
컹컹대는 기침을 해서 목이 다 쉬었어도 주일은 멀쩡하게
소리가 나와서 소프라노를 충분히 감당했다.
하나님아버지의 은혜라고 밖에 할 수가 없다.
성가대 지휘를 할 때도 몸이 약한 상태였었는데
성가대 찬양까지 끝내고 3층으로 내려와서 설교시간에
쉬었다가 올라가곤 했다. 몸이 힘들어서였다.
그렇지만 아무리 몸 상태가 나빴을지라도 대예배를
빼먹지 않았다. 오후예배는 못드리고 집에 가서 잠을 잤다.
그러면서 점차적으로 회복되어지면서 오후예배도 드렸다.
제사상 차려 놓고 예배드리기 '안돼'
결혼해서 3년째 되던 해에 시댁에서 제사를 지내는 날이
되었는데 내가 결혼하면서 바로 시댁까지 예수님을 믿는
가정이 되었기 때문에 두 해는 제사를 지내지 않고 예배를 드렸다.
이제보니 추도예배도 드리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 때는 그나마 예배라고 해서 참석을 했다.
그날 따라 시어머니께서 제사상을 차려 놓고
따로 앉아서 예배를 드리자고 했다. 딱 이번 한번만
그렇게 해달라고 부탁했다고 했다.
남편하고 싸우면서 알게 됐는데, 이 때 알게 된 것이 낫지
만약 미리 알았으면 타협했을 수도 있었겠다.
내가 마음은 좀 약하긴 하다.
그렇지만 나는 첫 딸 낳고 얼마 안되었기 때문에 새댁이나
마찬가지였는데 겁도 없는 일을 저질렀다.
예배를 드리기 싫었지만 간신히 구석에 앉아서
찬송도 안 부르고 기도도 동참도 안하고
화가 잔뜩 나가지고 앉아 있다가 예배가 다 끝나고
밥을 먹어야 하는데 내가 밥 안먹는다고 해서
집안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내가 안 먹는다고 하면 자기네들끼리 먹지
왜 나까지 먹으라고 하는건지 이해가 안되었다.
그렇지만 새댁이 밥을 안 먹는다고 하니
가족이 총 비상이 걸렸다. 무엇이 문제인지 몰랐었다.
내가 믿음이 충만했던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제사를 생각하면 속에서 무엇인가 화가 치밀어 오르는데
그것은 내가 내는 화가 아닌 것이었다.
심장이 뛰면서 올라오는 화는 가라앉질 않는다.
아마도 하나님아버지께서 화를 내시나 했다.
"제사상 차리고 예배 드려서 기분 나빠서 밥 안 먹겠다" 해가면서
끝까지 밥을 안먹고 집에 왔다. 남편하고는 시댁에서 싸웠다.
그 다음해부터 제사상을 안차리고 예배만 드렸다.
만약 그 때 그냥 밥 먹고 넘어갔더라면 계속 제사상을 차리고
예배를 드렸을 것이다.
나를 3번이나 때렸어!
내가 어렸을 때 큰오빠가 나를 3번이나 때렸는데
정말 아무 잘못도 없이 그냥 큰오빠의 화풀이로 때렸다.
큰오빠가 그런 성격으로 형성될 수 밖에 없었던 부분을
성령하나님께서 알려주셨다.
오빠도 공부하고 싶은 열정이 심했었는데 나보다 더 했다고 하신다.
중학교에 들어가서 공부는 하고 싶은데 아버지는 나이가 많으시고
배운 것이 없으셔서 돈은 못 벌고 엄마는 돌아가시고, 집은 가난하고...
오빠는 고철을 주어서 팔면서라도 공부를 하려고 했는데 가정형편이
너무 안따라 줘서 공부를 할 수 없게 되었다. 생활을 책임져야 해서.
성령하나님께서 가난의 되물림의 비참함이라고 하신다.
큰오빠는 그림도 잘 그렸는데 인물화를 잘 그렸다. 극장 간판용 그림.
삽화도 잘 그리고, 글씨도 잘썼다. 아이큐도 높았다. 공부 못하게
된 형편이 너무 안타까울만큼 불쌍하다고 하셨다.
그런 속상함과 채벌의 되물림으로 인해 그런 성격이 형성됐나보다.
그래도 다른 사람들에게는 잘했고 친척 여동생들에게도 아주 잘했다.
왜 나하고 내 바로 위의 오빠에게만 유독 그랬을까...
어려도 내가 몇대 맞을 잘못을 했는지 알아
어린 나이에 아버지한테 일러서 집안을 시끄럽게 하지 않고
큰오빠를 혼내키지 않게 하고 싶었지만, 내가 일르지 않았어도
어떻게 아셨는지 아버지가 큰오빠를 두번인가 때린 것이
어렴풋이 기억난다. 각목으로 맞았다 오빠는.
아무리 어려도 내가 몇 대 맞을 짓을 했는지 스스로 판단한다.
거기서 지나치게 맞으면 상처로 남는데
그 때는 사랑으로 풀어줘야 한다.
그리고 나서도 큰오빠는 자기의 삶의 화풀이가 안됐는지
나의 바로 위의 오빠도 많이 때렸는데 나중에 큰오빠가
전도를 할 때 먹히지가 않았다.
"니가 다니는 교회는 절대 안나간다고" 하면서.
큰오빠 한테서 받은 상처 때문에
내가 아무리 전도하려고 애를 썼어도 먹히질 않았다.
그 셋째 오빠도 결핵환자였고 큰오빠도 결핵환자였는데
큰오빠는 그래도 건강한 편이었고 셋째 오빠는 내가 좋아하는
오빠였는데 건강이 많이 안좋았다.
그런 오빠를 큰오빠가 같이 일하다가 때리는 것을
보게 되었는데 무슨 연장 같은 것을 들고 때리려고 하는 것을 보고
내가 소리를 질렀다. "악!"하고 고함을 질렀다.
그때 큰오빠가 그 연장을 내쪽으로 던졌는데
내가 그냥 맞고 죽을려다가
본능으로 살짝 피했는데 옆에 나무기둥에 맞고 떨어졌다.
나는 그날 처음으로 아버지도 아닌 목사님께 일렀다.
내가 좋아하는 세째오빠를 그렇게까지 심하게 때리는 것을 보고
너무 마음이 아파 나중엔 큰오빠가 일찍 죽었으면 좋겠다고
저주까지 했다. 몰라서 그런 것이지만.
안수집사면 다야?
교회에서는 참 잘했다. 때가 되면 목사님께나 안수집사님
두 분에게 고기도 사다 드리고 용돈도 드리고 그랬던 것 같다.
성가대장이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그렇게 교회에서 잘하는 오빠가 집에서는 이렇게
못합니다" 라는 심정으로 그 한밤중에 목사님 집에 달려가서 일렀다.
그리고 목사님이 오빠가 일하는 곳으로 가셨는데 그 뒤 기억이 없다.
성령하나님께서 알려주시기를 그때 내가 살짝 피하지 않았으면
얼굴 오른쪽에 맞을 뻔 했는데 그때 잘못 맞았으면 죽던지
얼굴이 뭉개지던지 했을 것이라고 하셨다.
어떻게 된일인지 어렸을 때의 일도 아니고 이때는 청년이었는데
왜 기억이 없을까... 머리가 나빠졌나?
사건은 생각나는데 그 뒤가 생각이 안난다.
생각하고 싶지가 않아서 잊었나보다 나 스스로.
성령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런 슬픈 인생이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아버지의 뜻을 따라 가는 것이 문제이기 때문에
다른 슬픈 기억이나 나쁜 기억들은 지워주셨다고 하셨다.
이런 사실도 나는 안 쓰고 싶은데 자꾸 성령하나님께서
쓰라고 하신다. 이유가 있으시다고 하시면서...
그 뒤부터 하나님아버지께 일르는 기도를 드리게 되었나보다.
좋은 말로는 보고식의 기도다.
이래뵈도 원래 공부는 잘했어
초등학교 1학년 3학년 6학년 때 일인데도 기억이 잘 안난다.
맞은 기억만 나지 그 뒤 어떻게 됐다는 기억이 없다.
그렇지만 공부는 잘했다.
내가 생각해도 어렸을 때 머리는 좋았던 것 같다.
숙제를 하거나 공부를 한 노트가 기억나는데 별 다섯개에
동그라미 다섯개에 참잘했어요 도장에...
짝궁하고 비교도 해보고....
시험을 봐도 3등 안에 들었었는데
누가 공부를 시켜주지 않았지만, 이 때는 엄마가 아파했던 때라
나를 돌봐줄 가족이 없었다. 다들 바쁘고 학교 다니고 그랬다.
그래서 나는 내 동생을 그렇게 돌보았나보다.
그렇게 혼자 공부도 하고 숙제도 잘해갔는데...
엄마가 병치레를 3년 넘게 하는 바람에 가산을 다 탕진했다.
작은오빠에게 들은 얘기로는 엄마가 생활력이 강하셨다고 했다.
그래서 땅도 있었고 집도 있었다고 한다.
나도 생활력은 강한데 엄마 닮았나보다.
내 기억엔 엄마가 무서웠던 것 같은데 어떻게 그렇게 기억이 없는지.
한 컷이 기억 나는데 엄마가 나를 불러서 옆에서 숙제하라고 하셨다.
내가 보고 싶으셨던 것인데 나는 엄마가 무서워서
윗목에서 숙제를 간신히 하다가 엄마가 언제 주무시나
눈치 보다가 잠드신 것 같아 얼른 나간 기억이 난다.
성령하나님께서 알려주시기를 엄마가 너무 무서워도
아이들이 심적으로 도망가는데 엄마가 돌아가셔도
울지도 않고 아무 감정도 없게 된다고 나더러도
많이 안아주고 스킨십도 해주라고 하셨다.
안그래도 그 큰 덩치의 딸이 내 무릎에 철푸덕 앉는다.
덩치가 산만한 아들은 계속 얼굴에 뽀뽀해 달라고 보챈다.
밖에 나갈 때마다 나한테 와서 뽀뽀 받고 나간다.
나는 아들 두 볼 잡고 입술에 뽀뽀도 해준다. 이쁘면.
작은오빠 얘기를 들어보면 엄마는 굉장히 무서우셨던 것 같다.
달리기도 잘하셨는데 그 동네에서 제일 잘하셨단다.
나도 달리기 잘하는데 단거리를 잘한다.
큰오빠랑 작은오빠랑 무엇인가를 잘못하고,
엄마한테 들키기 전에 도망치면 어떻게 아시고 쫓아오시는데
도망가다 어디선가 잡히는데 먼저와 계셔서 잡는다고 했다.
그래서 나중에는 도망칠 생각도 못하고 맞는다고 했다.
내가 생각해도 채벌이 심했던 것 같다.
큰오빠가 엄마한테 그렇게 맞고 커서 우리를 때렸나보다.
많이 맞고 자란 자녀 때리기 '되물림'
오빠들은 엄마한테 많이 맞았다고 한다.
부지깽이로도 맞았다고 했다.
이렇게 맞고 자라면 자기 자식도 때리는 법이라서
나는 오빠를 닮아서 내 아이들을 때릴까봐 조심했는데
혼낼수록 화가 올라오는 것을 깨닫고 깜짝 놀랐다.
이러다간 애 잡겠다 싶어서 회초리로 방바닥을 실컷 두들기고
겁주고 나서 한 두대 때리고 말았는데 이 것 조차도 딸이 보고
배워서 동생한테 써먹는 것을 보았다.
방바닥에다 화풀이를 다하고 나면 마음이 가라앉는다.
그래도 몸을 때리지 않는 것이 다행스러워 말리지 않았다.
아들도 처음에는 겁먹었다가 엄마가 자기를 때리지 않으려고
그렇게 한다는 것을 깨닫고 나중에는 안 무서워 했다고 한다.
그리고 청년이 되서는 나중에 자기 자녀에게 엄마가 교육시켰던
방법대로 교육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불장난 금지 교육은 '불장난으로 해결'
나의 아들이 7살 때 외출하고 돌아오면 성냥이 태워져 있는 것을 보고
"불장난 하지 말아라. 불이 나면 우리만 죽는 것이 아니라 남의 집도
다 태우고 죽이는 것이다"라고 2번을 경고를 주었다.
어느날 나갔다 왔는데 보일러 옆에 성냥개비가 태워진 채로
수북히 쌓여 있는 것을 보고 놀라서 이번에는 안되겠다 싶었다.
화장실로 데리고 가서 양동이에 물 받아 놓고 바가지 준비하고
여차하면 불을 끌 준비는 다 해놓은 상태에서 아들은 문으로
도망가지 못하게 안쪽으로 세워놓고 신문지를 조금 쌓아
놓고 불을 질렀다.
나는 충분히 끌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아들은 어렸기 때문에 놀라서 울었다.
또 불장난하면 이렇게 불이 타는 것인데
다 죽는 것이라고 말했다.
엄마 아빠 없을 때 그럴 경우에는 누가 도와주지도 못하고
너랑 누나랑 죽는데 그럼 엄마 아빠가 슬퍼서 어떻게 할 것이냐고,
우리만 죽는 것이 아니라 여기 같이 살고 있는 빌라 4가정이
다 불타고 죽을 수도 있다고 훈계를 했다.
아들이 울면서 다신 불장난 안한다고
싹싹 비는 것을 보고 물을 끼얹었다.
그 뒤 다신 불장난 생각도 못하고 살았다고 커서 얘기하는 것을
듣고 그때 그렇게 충격요법 쓴 것을 잘했다고 생각한 것은,
아들도 당사자가 자기라서 놀라긴 했지만 자기도 그런 교육을
자녀에게 시켜야겠다고 말하면서 잔소리 보다 한번의 시청각
교육이 좋았다는 것을 인정하겠다고 했다.
나는 잔소리를 잘 안한다. 툭툭치는 손지검도 안한다.
순둥이 괴롭힌 친구들 다 어디 갔냐 '나와라'
엄마가 아파서 돌아가신 후로 재산은 다 없어지고
휘경동 단칸방으로 리어카를 끌고 밀고 이사를 왔다.
초등학교 근처였다.
오빠들과 학교를 같이 다녔다.
하지만 내가 3학년으로 올라갈 때 쯤에는 오빠들은 다 졸업을 했다.
나는 참 얼마나 순둥이였는지 친구들한테 괴롭힘을 많이 당했다.
대항할줄도 모르고 그냥 다 당했다.
지금 같으면 쥐어박겠구만 그땐 그러질 못했다.
그렇게 엄마의 보호를 못 받고 자라서 그런지 나도 엄마 노릇을 못했다.
엄마가 자녀에게 어떻게 해줘야 하는지를 몰라서 그랬는지 나도 나의
딸을 보호해 주지 못했다. 학교에서 나와 똑같이 괴롭힘을 당했다고 했다.
나중에는 여러명의 아이들에게 둘러 쌓여 집단폭행을 당했다고 했다.
그것이 얼마나 큰 상처였는지 그 대장 여자아이 이름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그땐 내가 무서웠었나보다 말하지 않은 것을 보면.
내가 지금 귀여븐어무이 소리 들어가면서 귀찮게 하고 싶게 생겼다고
하지만 애들 어려서는 좀 엄하게 키운 편이다. 버릇없이 하는 것을
못봐준다. 마구 때리지는 않지만 눈빛이며 말이 무서웠나보다.
나는 전혀 몰랐다. 나중에 성령하나님께서 기드온용사 훈련 중에
나랑 내 자녀들과 쌓인 상처를 치료하는 과정이 있었는데 그때 알았다.
얼마나 울면서 미안하다고 했는지 모른다. 엄마가 몰라서 그랬다고
바보라서 그랬다고. 이런 것들도 저주의 되물림이라고 하신다.
선생님, 저는 3학년 몇 반이예요? ㅠㅠ
내가 초등학교 3학년으로 올라갈 때 담임 선생님이
내가 육성회비가 짜꾸 밀리니까 미웠나보다.
반 편성 할 때 나의 반을 안 알려 주셨다.
나는 어린 마음에 어떻게 하지 못하다가 간신히 용기를 내어
교무실까지 가서 담임 선생님께 여쭈었다. 3학년 몇 반이냐고.
안 알려 주시고 바쁘다고 나가셨다.
이 부분도 나는 기억에 거의 없는데 성령하나님께서
알려주시고 계신다.
누구한테 더 이상 물어 볼 수가 없었다.
학교는 가야하고 반은 모르겠고 아버지는 나이가 많고
형제들은 졸업을 했고, 혼자 운동장에서 그네를 타면서
수업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
아이들이 나오면 그때서야 나도 집에 왔다.
2학년 때 같으면 집에 오면 으레히 책을 읽고
숙제도 하고 공부를 하고 있을 권혁미가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한달 후에
언니가 발견하고 무슨 일이냐고 캐물었다.
자초지종을 얘기하고 많이 혼나고
다음날 육성회비를 갖고 학교에 같이 갔다.
그랬더니 선생님이 하시는 말씀이 3학년 1반이라고 가르쳐 주시면서
"너는 내가 3학년 1반이라고 했는데도 안가고 모했니~"
하시길래 "제가 언제 안갔나요. 선생님께서 안가르쳐 주셨잖아요"
하질 않고 "네~" 그러고 말았다.
2등이라고 쓰여 있던 상장에 3등이라고 고쳐진 것을 보고
어린나이에도 이 선생님은 촌지를 좋아하는 선생님으로 느꼈었다.
지금 교사들에게 촌지가 없어진 것은 잘된 것이라고 본다.
그때는 따지고 하는 것보다 나의 반을 알았다는 기쁨이 더 컸다.
그리고 나서 성적이 중간으로 떨어졌다.
공부에 대한 흥미를 잃었다. 숙제도 간신히 했다.
나? 나열해 보니 별 것 없는것 같은데
지금 생각하면 나를 그냥 공부하도록 내버려 두던지
그 선생님께서 도와주셨으면 지금쯤 카이스트에는
가 있을 것이라고 나의 자녀들에게 장난삼아 얘기하곤 했다.
배움에 대해 속상할 때 그랬다.
교회 식구들도 내가 똑똑한줄 안다. 많이 배웠는줄 안다.
워낙 할줄 아는 것이 많다고 난리다.
나는 배우는 것을 좋아하는데 그것도 '내 밥이다' 라고
찍은 공부를 좋아하지 다 좋아하고 다 덤비는 것은 아니다.
내가 지금까지 해온 일 중에 잘하는 것은 성가대 찬양이고,
둘째는 편집부국장이고, 셋째는 강대상 글씨(챠트) 쓰는 것이다.
글씨 쓰는 것도 하나님아버지께서 지혜를 주신 것을 너무 잘 안다.
고교 미술시간에 견명체 견고체 배운 것 가지고 청년부헌신예배
글씨를 정성껏 쓰고 코팅이라는 것이 없는 때라 비닐 씌우고 테이프
부치고 해서 강대에 걸었는데 그 뒤부터 아무리 어려운 글씨라도
견본 글씨만 봐도 쓸줄 안다.
다른 성도가 강대에 글씨 쓰는 봉사를 하고 있다가도
내가 가면 나한테 뺏긴다.
잘하는 거 없다더니 자기자랑 했네
아! 그림도 잘그린다. 미술도 잘했고. 삽화도 잘그렸다.
야구하는 소년, 말, 등등 내가 봐도 기가막히게 그린 그림모음집이
있었는데 소중하게 생각 안하고 이사 다니면서 귀찮아서 버렸다.
이제 생각하니 좀 아깝다. 내가 다 그린 것들인데.
결혼 후 살다가 다시 봤어도 정말 인쇄 그림처럼 잘 그렸는데...
딸도 아깝다고 그런다 왜 버렸냐고...
나열해보니 별 것도 없는데 교회 성도들은
내가 달란트가 많다고 부럽다고 한다.
편집을 하다보니 매킨토시도 배웠고 일반 PC도 배웠다.
성가대를 효율적으로 운영하려다 보니 인터넷 카페만들기도
얼렁 배워서 운영하게 됐고, 포토샵도 몰랐고 일러스트도 몰랐는데
주간지 신문사에 들어가서 보니 내가 다 해야 되서 얼렁 배웠다.
내가 생각해도 기가 막히다.
무슨 마술을 하나 그렇게 금새 배우게,
한번 해보지도 않고 아래 직원들만 시키고
어깨너머로 슬쩍 본 신문제호를 일러스트로 따는 것을
해본 사람처럼 해치우는 것을 보고 나도 내가 놀랐다.
그렇게 못 배우도록 훼방하고 때리고, 가난한 남자랑
결혼하고 그랬는데도 불구하고 혼자서 일을 척척
해내고 살았다.
"이 놈의 양말 스타킹은 어디가나 있어"
정말 못한다고 하는 것은 정말 못하는데 '글짓기'였다.
글짓기 쓸 때 한 줄도 못썼다.
지금 이렇게 글을 쓸 수 있는 것은 모두 하나님아버지의 은혜이다.
줄줄 쓰게 하신다.
집안 살림도 못한다. 청결에 자신 없다.
남편이 그런다. "이 놈의 양말 스타킹은 어디가나 있어!"
그러면 나는 "가만 나둬~ 내일 신을거야" 하고 진짜로 내일 신는다.
옷이나 양말 스타킹을 아무데나 벗어 놓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런 나를 남편이 많이 도와 준다. 나를 엄청 사랑한다.
가스렌지 닦아주고 세탁기 돌려주고 널어주고 개주고, 손님 오면
서빙해주고 주일날 가방 챙겨주고, 악보도 들어주고, 커피 타주고,
신발 꺼내 주고. 거실 닦아주고 재활용쓰레기나 음식물 쓰레기도
버려준다.
딸이 더 힘이 세기 때문에 뺏긴다.
고척동 살 때의 일이다. 나랑 딸이 안방에서 복숭아 먹으면서
티비를 보고 있는데 남편이 없었다. 내가 딸한테 물었다.
"아빠 어디가셨니? 딸이 "몰라 어디가셨지~" 그 소리를 들었는지
좀있다 남편이 거실을 닦다 말고 머라고 하면서 안방으로 왔다.
내가 복숭아를 얼렁 집어서 손에 쥐어줬다. 입 막음이다.
들고 나가서 먹더니 다시 거실을 닦기 시작했다.
떠비~ 썽~ 떵~ 우리 가족 애칭이다
그래서 내가 남편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애칭을 지어줬는데
그 애칭이 '떠비'이다. 남편 이름은 '김병섭'인데 나는 '병'자
들어가는 이름을 싫어한다. 아버지 이름이 '권병락'이다.
그때도 '병'자가 들어가서 싫었었는데 남편도다.
애칭을 만들 때 '섭'자를 변형시켜서 '서비'라고 했는데
다른 사람 별명이 서비라고 하길래, 된소리를 사용해서
'떠비'라고 해줬다. 그랬더니 정말 사랑이 더 가는 것을 느꼈다.
내가 '떠비~'라고 부르는 것은 사랑을 듬뿍 담아서 부르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이라고 하는데 사랑은 별로 없다.
딸의 애칭은 '썽'이고 아들의 애칭은 '떵'이다. 나는 없다.
나는 지금까지 남편을 부를 때 '누구 아빠' 라고 불러본적이 없다.
남편도 나를 '누구 엄마'라고 불러본적이 없다.
남편은 당신이라고 하거나 이름을 부른다.
'누구 아빠~'라고 부르면 이웃집 아저씨 부르는 느낌이라 싫다.
정말 못하는 것들은 몸이 싫어 한다
다리미도 못한다. 다리미를 하라고 하면 몸이 극도로 싫어한다.
남편이 바지좀 다려줘 봤으면 소원하길래 하루는 큰 맘 먹고 다렸다.
줄 세개 나왔다.
남편이 "이제부터는 다리지 말아줄래~ 내가 다릴께" 한다.
남편은 다림질 하면서 "내가 결혼을 한건지 원. 내팔자야"
하면서 다린다. 그러면 나는 내 바지도 갖다 준다. 다려 달라고.
와이셔츠는 정 급하면 나는 안시켜도 딸은 시킨다.
다리미도 못한다고 웃으면서 말하면 웃으면서 넘기는데
정말로 화를 내면서 다림질도 못한다고 덤벼들면
이혼하면 했지 다리미는 정말 못하겠다고 한다.
나는 두번 하는 것을 싫어 한다. 초등학교 때 만화를 잘 그렸다.
친구들도 만화가가 되라고 했다. 그런데 나는 한번은 잘그리는데
두번 그리는 것을 못해서 만화가를 할 생각을 못했다.
`
피아노도 못친다. 영어도 못한다. 반복 연습해야 하는 기능이나
학습을 싫어하는데 그렇다고 다 그러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
이해하고 넘어가야 외우기도 한다. 무조건 외우는 것을 못한다.
음악시간에 노래도 한번 부르면 익혀버려서 두번 부르는 것을
안한다. 남들 노래할 때 입 다물고 있다. 딴 생각하면서.
나는 정말루 '길치 중의 길치'
나는 몸이 최고로 못하는 것이 있는데 '길치 중의 길치'이다.
자동 길치이다. 그래서 운전면허도 없다.
후진을 못한다. 방향이 전혀 반대다.
동네 어느 집에 들어갔다 나와도 집으로 가는 방향을 못 찾는데
한참 헤매고 기껏 찾았다는 것이 반대로 간다.
오류시장이나 광명시장이나 복잡한 곳에 들어가면 못 나온다.
그래서 나는 물건을 사도 가던 집만 간다.
최악이 큰 사거리 지하차도이다. 그래서 횡단보도가 좋다.
기껏 나왔다고 하면 정 반대로 나가 있다.
지하철을 타도 10분 정도 지나야 제 방향으로 온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누구랑 같이 다니는 것을 좋아한다.
우리는 어디를 가도 가족이 거의 다 동원된다.
심지어 나는 동네마트를 가도 남편하고 같이 간다.
성령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어려서 매일 아팠기 때문에
어디를 다니지를 않았고, 커서도 멀미가 너무 심해서 가족이
어디를 데리고 다니지를 않아서 그렇다고 하신다.
어려선 버스에 올라타자마자 멀미했다.
점점 크면서 멀미가 사라졌다.
지금은 멀미를 전혀 안한다.
나의 아들이 어려선 엄마를 닮아 멀미가 심했었다.
그렇지만 약도를 그려주면 잘 찾아가고 안그러면 그 건물에
들어갈 때 왼쪽 오른쪽을 신경쓰고 들어가야 한다.
너의 삶 바꾸려면 네가 노력해 '불법은 안돼'
내가 드라마를 본 것 중에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는 것은
'생이손' 이라는 드라마다.
그 내용은 주인집 딸과 여자하인의 딸과 아기 때 바뀐다.
여자하인이 자기의 인생의 비참함을 생각하고 자기 아기는
잘 살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가진 것까지는 좋았는데
주인집 딸과 바꿔치기 한다.
공교롭게도 둘이 같이 임신해서 둘이 같은 날 아기를 낳았다.
주인은 몸조리 하면서 섬김을 받고,
자기는 섬겨야 하는 입장을 생각하고
비참함을 느껴서 아기를 바꾸면서
부디 주인집에서 잘 살기를 바란다.
하지만 인생이라는 것이 그렇지가 않은가보다.
어려선 하인집 딸로 바뀐 그 딸은 고생은 했지만
나라가 개혁을 하는 때가 되었는데
아마도 일제시대에서 해방되어서 서양문화가
들어오던 시대였던 것 같다.
공부를 좋아하고 공부하는 것에 인생을 걸었다.
그렇게 힘들게 살았지만 하인집 딸은 학교 교장 선생님이 되었고,
주인집 딸은 그 학교의 청소부가 되었는데 서로 헤어져서 살다가
나이 들어 삶의 위치가 정해진 후에 교장실에서 서로 만난다.
자기의 원래 삶을 모르고 주인집 딸로 탈바꿈한 딸이 많이 교만했었다.
자기 친엄마인줄도 모르고 여자하인한테 건방지게 굴었었다.
인륜을 거르스고 자기 삶을 바꾸려고 했지만 운명이 허용하지 않았다.
인생은 두 갈래 길이야
시도 좋아하지 않지만 한가지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는 시가 있다.
'두갈래 길'(프로이드)이라는 시인데 이 시도 인생을 말하는 것이다.
한 사람이 서 있는데 그 앞에는 두 길이 있었다.
그 사람은 고민한 끝에 한 길을 남겨두고 다른 길을 선택해서 간다.
그 길은 길로 형성이 아직 안된 '풀밭길'이었고,
다른 길은 '도로'처럼 나 있는 길이었다.
이 사람이 걸어간 길은 풀밭길이었다.
수십년이 지나 어느 지점에 갔는데
그 큰 도로길이랑 만나는 지점이었다.
그 곳에 앉아서 그 사람이 자기 인생의 뒤를 돌아본다.
내가 만약 저 큰길로 왔더라면 내 인생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그것을 생각하는 시였다.
모든 사람들의 인생이 딱 이 시 같다는 생각을
고 3때 배우면서 느꼈는데 얼마나 몸으로 느꼈는지
이 시 밖에 모르고 이 시만 좋아한다.
나는 무엇인가를 좋아하도록 느끼는 것은
'인생이 걸린 것'이고
그것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몸으로 느끼고 하는 것 같다.
나? 인기를 다스리고 사는 여자야
지금의 나의 삶을 보면 성가대 지휘를 하고 있고
지방일간지 신문사이긴 하지만 편집부국장을 하고 있고
외모도 이만하면 괜찮고 여자로서,
인기가 너무 많아 인기를 다스리고 살았다.
어디가나 그 모임과 단체에 포커스가 나한테 맞춰졌다.
나는 1등 아니면 꼴찌를 원하고 2등도 싫어하는 성격인데
그렇다고 공부를 꼭 1등 했다는 것이 아니라 어디 나설 때의
상황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안되지만 구역장을 하느니 구역강사가 낫고
구역강사를 안할바엔 구역원으로 들어가 있는데
혼자 성경공부를 완벽하다시피 해가지고 가서
구역예배를 누린다고나 할까.
그러면 구역강사가 내 앞에서 쩔쩔매는데
내가 교만해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해야
그 구역강사도 공부를 하지 않겠는가 해서다.
나중에는 그 구역강사가 성경전체를 꿰뚤어야 하는 부분에서는
나한테 전하라고 부탁을 하는데 내가 그런 맛을 좀 느낀다.
세상말로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냐'는 식의 말을 하면서 부탁을 한다.
히스기야의 적군 편지기도를 본 받아
나는 기도 드릴 때 성경말씀으로 드리는 경우가 많다.
그 중에서 특별히 기억나는 것이 있는데 내가 30대 초 때
구역강사였을 때다. 구역 식구 중에 결혼은 일찍 했는데
8년이 넘도록 아기를 못 낳은 성도가 있었다.
나는 철야기도회나 새벽예배때나 구역예배 때 기도를 전적으로
드려줬는데 항상 히스기야 왕이 적군에게 침략에 관한 편지를
받고 하나님 전에 나아가 편지를 펼쳐 놓고 기도 드렸다는
말씀을 생각하면서 기도 드렸다.
(열왕기하 19:14) "히스기야가 사자의 손에서 편지를 받아 보고
여호와의 성전에 올라 가서 그 편지를 여호와 앞에 펼쳐 놓고
기도하여 이르되" 아멘.
(열왕기하 19:20)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히스기야에게 보내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앗수르 왕 산헤립
때문에 내게 기도하는 것을 내가 들었노라 하셨나이다. 아멘.
그래서 그 성도한테 병원에서 불임 판정 소견서나 처방전을 갖고
오라고 했다. 하지만 갖고 오진 않았다. 그렇지만 나는 그 처방전
느낌을 가지고 기도 드렸다.
그리고 그 구역이 바뀌고 나서쯤 시험 들어서 교회를 떠났다.
1년 후 소식을 들었는데 임신했다고 했다. 그리고 딸을 낳았다고 했다.
나는 그 때 시험든 상태였기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드리지 못했지만
지금 이 글을 쓰면서 감사 드리면서 영광 돌려드렸다.
그 후 아들도 낳고 그 집이 얼마나 좋아했는지 모른다고 한다.
(이사야 66:9)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아이를 갖도록 하였은즉
해산하게 하지 아니하겠느냐 네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해산하게
하는 이인즉 어찌 태를 닫겠느냐 하시니라" 아멘.
가난의 저주가 흘렀나
어려서 나의 성품은 강직하고 순했다고 한다.
가정적으로는 질병의 저주와 가난의 저주와 불행의 저주가
흘렀었나 보다.
나는 여러번 죽을 고비도 넘겼었는데 어려서 많이 약했다.
그 때 미신적인 의식을 치룬 것이 기억난다.
친엄마가 내가 아프다고 무엇인가를 했던 것을.
하나님을 안 믿던 시절이니까 나름대로 했을 것이다.
나에게는 언니가 하나 있었는데 12살 차이가 난다.
나이 차이가 많아서 많은 대화를 나누지 못했지만 정말 좋은 언니였다.
내가 속을 썩였다. 언니를 이해하지 못했다.
언니의 결혼생활은 남편의 바람으로 인해 마음이 힘들었었는데
나는 나이 보다 생각이 어려서 언니의 대화 상대가 되주질 못했고
의논상대가 되어주질 못했다.
지금처럼 강해진 것은 결혼해서 살면서 가난을 이기면서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려고 하다보니까 다져진 성격이다.
도도한 여자? 차도녀라고 하면 맞을 만큼 차가운 모습에
도도한 모습에 품위를 갖추려고 했던 그런 미시족 같은
여자였다.
6살짜리 꼬마가 된 '순종테스트'
나>가족>측근>나머지.
이런 표는 누구나 정하고 살던지 아님 정해진줄 모르고 살던지 하겠지만
나는 몸에서 이런 선을 그어 놓고 있어서 아무나 나의 인생에 들어오질
못하게 한다. 그만큼 사람 대하는 것도 철저하다.
어떻게 보면 나쁠지 모르지만 나는 그것이 이상하게 몸이 알아서 했다.
어떻게 말하는 것이 촌스럽고 품위 있는지,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촌스러운지 품위 있는지를 몸이 알아서 저절로 하고 안하도록 했다.
생각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자존심도 강해서 누가 그 것을 꺾지를 못했는데
남편도 못 꺾고 자녀도 못 꺾었다.
오직 하나님아버지께서만 꺾으셨는데 그것이 '순종'이었다.
오죽하면 남편이 만일 자기가 이혼하자고 하면 매달릴 것이냐고 물었을때
나는 죽어도 안 매달린다고 했다.
남편이 무엇을 믿고 왜 그럴 수 있느냐고 물었다.
진심으로 내가 육교에 앉아서 구걸을 하더라도 매달리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남편의 속은 알수 없었지만 아무말도 안하고 그 뒤 그렇게 묻지도 않았다.
나는 무슨 배짱인진 모르지만 자아가 그만큼 강했다.
나 싫다고 하는 남자 안 붙잡는다.
그렇지만 하나님아버지 앞에서는 완전 6살짜리 꼬마가 됐고
꼬마이고 싶었다. 그렇게 인도하셨다 성령하나님께서.
기드온용사 훈련은 귀여운 6살짜리 꼬마 여자아이로 있다가
나중에 갑자기 용사가 되는 설정이었다. 영화로 찍자면.
지금도 자고 일어나면 6살짜리 꼬마가 하는 기도처럼 하게 하시는데
내가 생각해도 우습다. 귀엽다. 보여줄 수도 없고.
아침에 자고 일어나면 침대에 걸터 앉아
"하나님아버지 잘 자고 일어났듭니다. 음..오늘도 잘 지내고..엄"
그렇게 버벅거리고 기도 드리고 화장실로 간다.
하나님 앞에서는 애기 같이 하게 하신다.
왜 그렇게 기도를 하도록 하셨나 생각하는데
성령하나님께서 권혁미는 원래 이 훈련 받기 전에도
기도를 아이처럼 할 때가 있었다고 하셨다.
한 여름에 교회에서 집에까지 걸어서-2분거리이지만-
급하게 와서 그런지 땀이 났는데 남보다 유난히 땀이 많이
나는 체질이었다.
갑자기 나도 모르게 얼굴에 흐르는 땀을 닦으면서
"하나님아버지, 지금 너무 더워요. 얼마나 더운지 아세요?
한번 내려와 보세요 얼마나 더운지요"
그렇게 기도를 드렸다고 하셨다.
왜그렇게 날씨를 덥게 만드셨냐는 뜻이었다.
그렇게 기도 드린 사람이 권혁미 밖에 없었는데 정말
하나님아버지께서 내려오셔서 "그래 정말 덥구나"
하셨는데 나는 못알아 듣고
"그런데요 이렇게 만든 것은 우리들이 잘못해서 그런 것이예요.
산업을 발달시킨다고 해서요 오존층을 거의 다 파괴시켰데요.
저희들 잘못이예요" 하고
하나님아버지의 응답을 듣기 전에 그냥 집으로 들어가 버려서
하나님아버지께서도 그냥 하늘로 올라가셨다고 하셨다.
나는 성가대 연습시간에 내가 얼마나 엽기적으로
기도를 드리는줄 아느냐고 설명해준다.
그러면 다들 웃는다. 나처럼 기도 드려보라고 하는데 하는지는 모르겠다.
그래도 하나님아버지께서 귀여워 하실 것 같다고들 말했다.
우리는 착각하고 있는 것이 하나님 앞에
어린아이여야 하는데 어른처럼 산다.
언니는 나를 업고 노느라고 힘들었을텐데
나는 정말 철딱서니 없는 그런 참 모자란 아이 같았었다.
순하기만 하고 세상물정 아무 것도 모르고.
윗사람들하고 대화를 못하고 사니까 세상적으로 아는 것이 없었다.
부모하고도 인생에 대한 대화가 없었고 형제들하고도 그랬고
친구도 수다스런 친구는 사절이었다.
정말 하나도 없다고 해도 맞을 만큼 세상을, 사회를 몰랐다.
언니가 일찍 죽는 사건이 벌어졌는데 눈물도 많이 안났다.
그럴만큼 안친했던건 아닌데 말이다.
언니의 어렸을 때 기억이 있는데 내가 대여섯살 정도였던 것 같다.
나는 어디가 그렇게 아팠는지 모르지만 밖에 나가서 놀지를 못했던 것 같다.
어떻게 된 것이 아팠던 기억 밖에 없나.
이 글을 쓰면서 새삼 느낀다.
아팠던 기억 밖에 거의 없었다는 것을.
잠깐 기억이 나는데 나는 항상 윗목에 누워 있었던 같았다.
성령하나님께서 알려주시기를 내가 열병에 걸렸었는데 그때
죽을뻔 했었다고 하신다.
나가서 놀고 싶은데 못 놀게 해서 문지방에 양 손을 옆에 대고 서서
나가고 싶다고, 놀고 싶다고 "언니~" 그러면 언니가 마당에서 친구들하고
무엇인가 하고 놀다가 나를 업고 놀았다.
나를 업고 노느라고 언니는 제대로 놀지도 못했을 것이다.
나는 그때 나이에 친구들하고 논 기억이 없다.
성령하나님께서 알려주신다. 그 때 양다리가 소아마비 같은
병에 걸릴 뻔했었다고...
이제 생각하니 아픈 기억 밖에 없구나
어려서 아프다고 윗목에서 누워있었고, 다리에 힘이 없어
서있지를 못했고, 조금 커서는 다리에 종기가 크게 낫다고
어떤 아줌마가 와서 대꼬챙이로 찌르고 고름을 짜내고,
자라피도 먹고, 엄마가 부엌에서 아궁이에 다리 벌리고
올려 놓고 소금 뿌리고 무엇인가를 하셨고,
초등학교 다니면서는 계속 피부병 주사 맞으러 다녔고,
갑자기 찬바람 분다고 양 팔에 두드러기 나고,
딸꾹질이 멈추질 않아서 곧 죽을 것 같아 울다가 멈췄고.
친구랑 놀다가 소리 한번 지르고 나면 목이 쉬어서 말도 못하고,
싸움도 못하고, 힘도 없고, 성장속도도 늦었구.
이제 생각하니 아픈 기억 밖에 없구나...
몸이 죽을만큼 약했었는데 하나님아버지께서 살려주셨다고 하셨다.
일찍 죽는 것은 저주인가?
어느 정도 자라니까 건강이 좀 나아졌나보다.
오빠 둘이서 나를 들로 산으로 데리고 다니면서 개구리 잡아서
뒷다리 볶아 먹이고, 메뚜기 잡아서 볶아 먹이고 그랬다.
참새도 먹었다. 그래서 더 건강해졌나보다.
그 중 둘째 오빠는 지금 현재 살아있고
셋째 오빠는 결핵이 심해져서 죽었다.
큰오빠는 셋째 오빠보다 건강했는데도 훨씬 먼저 죽었다.
언니도 죽었다. 아버지도 돌아가시고 친엄마도 돌아가시고
새엄마도 돌아가셨다고 알려주셨다.
거의 일찍 죽었다. 그럼 일찍 죽는 것이 저주인가?
큰오빠는 형제를 너무 때려서 죄를 많이 짓게 됐고
언니는 삶을 너무 비관해서 자살했고
셋째오빠는 결핵으로 죽었는데 내가 공주병원에 업어서 입원시키고
나도 바빠서 가보지도 못하고 올케는 오빠가 죽기 전에 다른데로
시집 가버리고 딸 얼굴 보고 싶다고 하는데도 안보여주고 해서
오빠가 한이 맺혔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셋째 오빠 혼자 죽게 한 것이 마음 아프지만
공주까지 그렇게 자주 왔다 갔다 할 수가 없었고,
아팠다가 회복 됐다가를 몇 번이고 반복해서
둘째 오빠나 새언니도 손 들었던 것 같다. 치료비를 대다가.
셋째 오빠가 죽고 나서 얼마 안 있어서
둘째 오빠네 소식이 남동생으로부터 왔는데
둘째 오빠가 귀신이 들렸는데 셋째 오빠 귀신이 들어갔다고 했다.
둘째 오빠가 칼을 들고 새언니를 죽이려고 쫓아다녔는데
자기 치료비를 안 대주고 자기를 죽게 만든 장본인이
새언니였다고 생각하고 죽인다고 쫓아다녔는데
실질적으로는 둘째 오빠의 눈이 시퍼래졌다고 했다.
교회 다니는 형제들이 아니었고,
그 때는 나도 귀신 그런 존재 신경도 안쓰고
살았기 때문에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넘어갔는데
결국엔 절에 가서 돈을 많이 주고 쫓아냈다고 했다.
권 집사님은 속에서 방언하시는데요!
나는 항상 방언만 받으면 기도를 많이 드릴 것 같은 생각으로 살았다.
하지만 방언의 길은 열리지를 않았다.
아무리 기도를 많이 드리는 집사님에게 부탁을 드려도 안됐다.
항상 기도생활로 살았던 조 집사님하고 김 집사님하고
철야하면서 방언기도 드릴 때 보면 하나님과 두분 집사님이
3자 대면해서 방언으로 기도 드린다고 했었다.
얼마나 방언기도를 깊이 드렸으면 하나님과 3자 대면해서
기도 인도함을 받을까 생각하면서 부러웠었다.
그래서 나도 방언기도를 하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리 나를 위해
기도를 드려줘도 방언은 안터지고 나더러 속에서 방언을 한다고
하셨고 어떤 청년도 지나가는 길에 듣고선 나더러
"집사님 지금 방언하고 계시는데요" 라고 말했다.
나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기도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내가 방언기도를 못했더라도
'나의 입술의 모든 말과 나의 마음의 묵상이 주께 열납되기를 원하네'
라는 복음성가처럼 내가 생각했던 것들과 말들이 그대로
기도로 응답 됐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나의 입술의 모든 말과' '주님 뜻대로 살기로 했네'
그 때 많이 불렀던 복음성가이다.
부르짖어 기도를 많이 못 드려도 생각하는 것들이
거의 다 응답되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고,
입으로 계속 나오는 모든 말들이 어느 때가 되면
기도였던 것처럼 응답 되었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
회사에서도 보면 다른 사람들이 농담하거나 누구를 헐뜯거나
남의 이야기를 하거나 해도 크게 문제가 생기지 않고 넘어가거나
하는 거 같다.
내가 원래 말도 없지만 회사 이야기나 누구 이야기나 안좋게
얘기 한마디만 해도 크게 이슈화 되어서 회사가 시끄러워지는 것을
나중에 깨닫고 "나는 말을 많이 하면 안되는가보다"
"내가 한마디만 해도 문제가 되네, 다른 사람이 이런 말을 하면
아무 것도 아니게 지나갔을텐데 이상하다, 그 말이 무슨 문제가 되는거지?"
하고 의아해 했다.
별말도 아닌데, 그야말로 농담처럼 지나갈 수 있는 말들이었는데 말이다.
그래서 안그래도 말이 없는 사람인데 점점 더 말 수가 줄어 들었다.
이때 나는 내게 말의 권세가 있나보다 생각했다.
안그러면 그렇게 내가 한 말의 사건이 커질리가 없었다.
누가 이기나 한번 해보자
사표도 입버릇처럼 내는 남자들이 있는데 나는 그런 말들조차
한마디도 내뱉지 않고, 사표 쓰고 싶을 만큼 입장이 안 좋아도
"너 죽고 나 죽자, 누가 이기나 한번 해보자" 라고 끝까지 버티다가
결국엔 아랫사람이기 때문에 회사를 그만두어야 하는
환경이 되었을 때는 사표를 내고 그걸로 끝이다.
많이 생각을 하고 내는 사표라 누가 아무리 붙잡아도 소용이 없었는데
회사 사장이 일을 다시 해달라고 데리러 왔을 때는 다시 갔다.
그 정도로 무엇을 해도 생각을 깊이 하고 최종적으로 결단을 내리는
성격이다.
그 후로도 아무리 방언 받고 싶다고 기도 드려도, 부흥회를 통해 안수만
받아도 방언이 터진다는 유명한 목사님께 안수를 받아도 방언이 터지질
않았다.
그리고 방언 받게 해달라고 기도를 드리면 오히려 마음이 가라앉고
시험드는 것 같이 되버려서 그만두곤 했다.
부흥회 때도 방언 받고 싶은 사람 나오라고 하면 주눅들어서 나가지 못하고
그게 몸에 배서 두려운 생각에 아예 앞으로 나갈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이렇게 말하면 이해되는 사람이 있을려나 모르겠지만 '방언 받을까봐
두려운 마음'을 어떻게 설명할까. 이런 것을 누구한테 얘기하면 육성기도에
능력이 있어서 안주시는가보다 한다. 그렇지만 당사자인 나는 답답했다.
어느 부흥회 때는 부흥강사 목사님이 귀에다 머라고 소리를 지르면서
할렐루야든 무슨 말이든 자꾸만 하라고 했다. 이렇게 말하면 뭐라고 할지
모르지만 나는 아무리 방언을 받고 싶어도 그렇게 가짜로 받고 싶지는 않았다.
내가 인위적으로 어떻게 하는 것 말고 나는 가만히 기도만 드리는데
정상적으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그런 방언을 받고 싶은 것이다.
얼마나 정신상태가 이성적인지 그런 몽롱한 상태로 가지도 못한다.
육성기도를 조금 드리고 나면 기도거리가 생각이 나질 않고 힘이 나질
않아서 일찍 기도가 끝나 집에 오곤 했다. 기도회를 회피하게 되고.
다른 사람이 나의 기도 내용을 듣는 것도 싫었다.
그래서 중얼중얼 기도 드리게 됐고, 성가대를 해야 하기 때문에라도
크게 부르짖는 기도를 드리지 못했다. 목이 아프기도 했지만 목소리를
아끼기도 해야 해서다.
너무 성대가 약해서 조금만 말을 해도 쉬는 목소리라 이렇게
성가대에서 소프라노를 할수 있고 지휘를 할수 있는 것 자체가
기적이라 할 정도로 성대가 약하고 몸도 약했었다.
나의 딸은 내가 40대 초 때 죽는 줄 알았다고 했다.
그런 엄마가 살아서 밥도 잘 먹는다고 놀린다.
그렇게 50대의 삶까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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