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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메 박성기 유고집
아버님 전상서
차례
추모 유고집을 내며………………………………………………………5
<시>
덤불속에서 까치는………………………………………………………7
사고(事故)…………………………………………………………………9
꿈…………………………………………………………………………10
나의 방 없다……………………………………………………………11
낙지선생…………………………………………………………………12
내 가슴에 서서…………………………………………………………13
취객………………………………………………………………………14
동백리 해수욕장……………………………………………………… 15
그 날…………………………………………………………………… 17
귀가………………………………………………………………………18
어쩜………………………………………………………………………19
술잔에 배를 띄워라……………………………………………………20
長林 밑에서…………………………………………………………… 21
少女………………………………………………………………………22
무안의 冬春夏秋……………………………………………………… 23
ㅅ ㅆ 숙…………………………………………………………………24
我…………………………………………………………………………25
딸들아 운전은 이렇게 해라………………………………………… 26
자빠진 나무…………………………………………………………… 27
我가(3)……………………………………………………………………28
傷 處…………………………………………………………………… 29
공자 유적지에서……………………………………………………… 31
차례
<시>
茶道史………………………………………………………………… 32
비로다(榧露茶)…………………………………………………………35
아버님 전상서…………………………………………………………36
<수필>
중국을 바로 알고 한류를………………………………………………38
내 친구 학메 박성기……………………………………………………42
학메 박성기 박사학위 논문집 표지………………………………… 46
<들꽃학교 개소식날- 아래쪽 왼쪽이 학메 박성기>
추모 유고집을 내며
학메 박성기는 보성에서 출생하여 광주서중을 나온 수재였다.
초등 교직에 들어와 나주 노안 남 교장을 끝으로 40여년의 교직생활을 마무리했다.
두 곳 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았고, 조선대학교에서 특수교육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전남문학에서 2009년 시로 신인상을 받았다.
부인과의 사이에 두 딸이 있다.
이게 가장 친하다고 하는 친구들이 알고 있는 학메 박성기의 이력이고 내력이다.
물론 여기에 다 적지 못할 만큼 많은 실적과 업적이 없는 게 아니다. 하지만 이제 와서 그런 게 다 무슨 소용이랴?
뜬구름처럼 지나간 생이고 이슬 같은 삶이다.
토삼이란 모임이 있다.
해강 김성백, 자연 안창순, 평뫼 한순철, 야산 황장권, 그리고 이 글을 쓰는 운당 김목이 학메 박성기와 20년 넘게 토요일이면 만나 우정을 나누는 모임이다.
그런데 그만 무엇이 그리 바빴는지, 학메 박성기가 먼저 소풍 길을 떠났다.
너무도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누군들 보낼 생각을 했을까? 더욱 학메는 한 줌의 재가 되어 딸들을 따라 멀리 가버리고 말았다.
이승과 저승이 다르기에 다시는 만날 수 없다는 걸 알지만, 그는 구만리보다 더 멀리 가버리고 말았다.
우리도 잘 안다. 그를 편하게 보내주어야 한다는 것을….
그러기에 그가 남기고 간 몇 편의 글을 모아 그를 추모하고 그를 기념하고 추억하며 보내려 한다.
학메 박성기!
우리들의 친구!
잘 가시게.
2014년 슬픈 가을의 시작에….
토삼 친구 모두.
덤불속에서 까치는
덤불 속에서
까치는
새벽 없이도 아침을
어둠 속에서도 하늘을
새긴다.
꺾인 마른 가지로 틈새로
이는 바람을 먹고
긴 긴 빛의 터널을 뚫으며
돌아누운 빈자리를 그린다.
덤불 속에서
까치는
까치놀 없이도
평온의 저녁 바다를
듣는다.
벌거벗은 탐진 물에
마지막 목리다리 휘감으며
수평선 너머너머
춤추는 백록을 찾는다.
덤불 속에서
까치는
플라타너스 방울 흔들며
비상의 날에
슬슬
이삿짐을 챙긴다
비구름 안고
<가마미 해수욕장을 찾아서-즐거운 한 때>
사고(事故)
아직도
붉은 씻기움으로
헤진 옷이
욕을 퍼부으며 저주하는 건
과거를 씻는 고통이다.
벗어던진 헬멧이
역겨운 살갗 내팽개치며
간 곳은 다만
어둠 깔린 북일벌
포근한 볏짚 밑이다.
차가운 동정의 품이 아니었으면
난
평화였다.
팽개친 싸이카
폐업 신고한 주막집 문턱에서
구걸한 술잔이
품바 춤추며
헤아리는 이 있어
‘가장 소중한 관계 잃은 쓰레기’
훔쳐주다.
꿈
초립동 신랑의 10년 호강이
산골 농부 100년만 하랴
한달 미친 동안이라니
어느 게 진실의 너울인가
그 삶은 나의 삶
이 삶도 나의 삶
꿈속에서 정든 사람
왜 현실에서 그리워할까
우리의 삶들이
나의 방 없다
野 삶 싫어
높은 벽 쌓다.
구더기 일어
새끼 멧새 한 마리 놓다.
담 안개 짙어
벽돌 한 장 빼다.
바람 일어
날아가다.
허 무너져
나의 방 없다.
낙지선생
시장터에서
만난 자모
억지 손 끌어
손수 잡은 낙지라며
띨한 자식 부탁한다고.
비린내 난 손 고마워
사랑의 맷손 들었더니
“낙지 내 놔.
내 낙지.
고개 숙인
낙지선생
내 가슴에 서서
내 가슴의 선창에 서서
바다 내음 껴안은 당신의 날개를 읽습니다.
통통배, 밤의 파도 가르면
별들이 모래밭을 펼치겠지요
내 가슴의 터미널에 서서
흙 내음 부풀은 당신의 옷자락을 흔듭니다.
별 아래 붕어잠으로 첫 차 타고 가면
새참이 논둑을 기다리겠지요
내 가슴의 철로에 서서
汽笛 달리는 당신의 손수건을 줍습니다.
산산 물물 돌아 고향 찾아가면
묏봉이 할미꽃을 모시겠지요
취객
바람을 가르며
노란 싸이클이
수면 위로 날고
긴 파문을
따르는
프라이드 한 대
해변로
낙지 두어 마리
꿈틀거리는 방파제
안개에 묻힌 섬 섬들 사이로
낚싯배 자취 감출 때
대낮의
취객은 시골길을
기웃거린다.
동백리 해수욕장
마량에서 금일까지
한 시간 남짓 철선 타고
낡은 버스 창 사이로
불어 애는 바람따라
동백도 없는
동백리 해수욕장 찾아
붉은 입술 빈 초소에
난자 당한 먼 모래밭
푸른 가슴 파도에
모양새 존 바위들
초록 박 엎어놓은
우도의 반딧불 쇼
흰 숨결 김발로
민박집 쌕새기 떠난
쥔 아짐
또 오라고
안주 요리 설거지
쥔 행세해도
설움에 차디찬 손
솔 숲 내내 잡고서
쪼그려 앉아 기약 없는
선창에
사연 두고
또 거닐고파
동백씨 들고
그 날이 오면
3박 4일 아닌
긴 겨울 얘기를
<문우들과 함께>
그 날
힐에 살양말
제격인 눈
녹지 않은
바람재 너머
억새눈꽃
헤던 날
무등산장 소주로
언 발 녹이고
원효사 풍경소리에
말바우 전설
듣던 날
눈 좋아 가신
부친 뫼
이수원지 이철규
헤맨 길
뵈주던 날
작고개에 선
고을 빛
너의 빛은
눈처럼
빛났다
그 날
귀가
바람이 귀를 속이던 날,
어둠이 눈을 속이던 밤.
쐬주가 입술을 속이던 때,
발만은 속지 않고
돌아왔어라.
<지나고 나면 다 허망한 것-아름다운 추억만 남았구나>
어쩜
어쩜
붉은 가슴을 의심하고픈 모양이지?
어쩜
개살구의 빛을 동경하고 싶어설까?
어쩜
한 개의 깊은 속눈썹을 원해서겠지.
술잔에 배를 띄워라
진한 술잔에
배를 띄우고
별과 함께
노닐어라.
불어라 바람아,
돛을 달리라
닻을 올리리라.
고요의 바다에
풍랑이 일어도
버릴 수는 없잖은가
우리의 잔을.
세차게 저어라.
어제도 오늘도
변함이 없이
또 다시 떠야 한다.
망각의 바다로
저어라 노를.
長林 밑에서
새들 지저귐에
눈뜨다.
가지 사이로
햇살이 부시다.
새끼 친 산새
둥우리에 없다.
노젓는 사투리
억양이 설다.
나뭇잎이
음률을 타다.
쏟아지는 이슬
방울 색깔을 더 하기 전에
재 너머 흐르는 구름을 본다.
少女
사람 내음 싫어
걷노라든
少女.
산에서 얘기했지.
자신이 누구냐?
삶의 주체가 누구냐?
진실이 뭐냐고.
단 한번의 소식은
‘계곡 따라 오르노라면
보고픈 얼굴,
폭포에 부서지는
무지개 빛 얼굴.
빛나던 태양이
구름 속으로 은거할 때,
너와 난
영원을 얘기할 수 있겠지….
박정한 少女의 사연은
이따금 오르는
산길에도,
世俗의 어디메도
있었다.
흰 블라우스에
까만 치마의 少女.
무안의 冬春夏秋
인의산 댓숲 바람에 함박눈 내려
품바의 고향 찾은 양파아가씨,
고구마 세발 낙지 풍성하라고
도리포 새해맞이 소박한 기도.
무․배추, 유채꽃이 봄노래하면
청룡산 찾아드는 백로․ 왜가리.
해제길 거리거리 왕벚나무 띄워
서해로 흘러가는 연분홍 꽃잎.
톱머리, 조금나무, 홀통 해변은
소나무 숲을 이뤄 하늘을 덮고,
회산의 연꽃 방죽 꽃잎사귀는
하이얀 미소지며 물 위에 뜨네.
억새풀 들국화가 바람을 타고
승달의 산 단풍이 곱게 물들면
황금벼 출렁이는 영산강가에
갈대와 어울러진 낚싯배 한 척.
미래의 꿈을 심고 가꾸어 온 땅
冬春夏秋 아름다운 우리의 무안.
ㅅ ㅆ 숙
아지랭이 숙.
걷힌 안개
기차바위 무등
밑.
흐르는 물, 숙아!
바다 ㅅ숙.
박힌 개펄에
흰 sandal,
두고두고 던진 삶.
갈매기
헤매는 너머너머 수평선, ㅅ숙이오.
갈 ㅅ쑥.
겹겹 산 색 잔치
수레상 걸어도
탓에 세상.
먼발치 걸친 분홍 가운, ㅅ쑥이어라.
하얀 ㅆ쑥.
다리 위
남긴 자국 오토바이.
속 눈꽃 바람 숲, ㅆ쑥이었어라.
我
박성기
잊어버린
잃어버린
껍데기
마저
주어올린
주머니 속,
감추어진 터널
선반 위에도
이제
없어라.
골파진
냇길로
요리조리
부대낀
돌멩이고파라.
개똥과 난시로?
뻥 뚫린 구름 가운데거라.
아 我!
딸들아 운전은 이렇게 해라
初心 잊지마라
시동 전 거울보기, 안전벨트.
속도 제한
신호등과 횡단보도 정지선,
이정표와 톨게이트
의미를 찾아라.
아끼고 보살펴라
교차로, 차선 변경
손가락은 깜박이
발은 브레이크.
눈은 백밀러
한숨은 운전석.
차는 내 몸이니라.
악천울수록 배려해라
비 눈 안개
한치 앞 몰라도.
전조등 비상등 등 등 와이퍼,
체인 있어
수막 언 땅 문제더냐.
역경은 맛이오 멋이니라,
딸들아!
자빠진 나무
帝岩 山등성이
억새 눈꽃 바람
형제바위
어우러져
자빠진 나무
가지 사이로
집 올망졸망
맴도는 내
하늘
땅의
緣인가
憐憫이런가?
자빠져 누워
사는 나무
我가(3)
망상 씻고
멍에는
지새움으로
받아라.
凍土의 끝이라도
싹으로 날아라
我가.
<선운산의 늦가을>
傷 處
육동에서
깨진 병으로
이겨진 면상
베갯동서
쓰린 동정으로
아물려던 상처가
도깨비불
놀림 당해
째진 핏자국으로
예송리 어둠의 재에
내걸려진
빵모자, 밥통
찾아 나서
가시 찔린
가시나이
팽나무 밑에서
울고
오토바이
발동 걸려
傷處 겹친 몸둥이
내음 싫어
물에 헹구어도
아물지 않는
傷
傷處
<늘빛 문화교육연구소 개소식날>
공자 유적지에서
儒敎의 宗主가
文化라는
革命의 깃대로
망가진
學이여 儒여
孔이여!
仁은
개고기 뜯는
깊어가는
곡부의 밤
客의 주정이거라.
茶道史
史1. 名
조선말
다소, 도천의 합
하여 다도
’14
남평군이 나주
’95 시
史는 명하다.
史2. 길
벚, 내, 단풍 그리고 눈꽃
길 따라
계절 심고
떠나는 길들
茶聖 운흥사 길
마라난타 불회사 길
돌장승
史는 머물다.
史3. 湖
뽀얀 젖빛 안개
젖히며
여는 아침
그림자 뫼, 구름
엷은 미소
가르는 수면
별들의 품에
포근히 잠긴
적막한 호수
신은
또
수위 2m 흥정
위령의 史는 흐른다.
비로다(榧露茶)
천년고찰 불회사
길 가상자리
측백 춘백 솔
푸름 더하고
덕룡 비탈 묏기슭
은행 단풍 이파리
앙상 가지 똘감
때깔 잔치해도
도팍 위
600년 사랑
느티도 마다하고
삼백 해 비자
이슬
묵은
비로다여!
아버님 전상서
아버님 가시는 날
눈도 많이 오더이다.
고샅길 돌아 발산교
장의만 걸친 채.
돌아누운 어머님
통곡하는 누나들
막내 목멘 소린 들리지도 않더이까.
막둥이 하늘 눈 쳐다보고요
불초 가슴 눈 숲에 버렸나이다.
무등 뫼
작고개 넘지 못해
경련사 돌아 찾아
묏봉 뗴 올리고도
멈추지 않는 눈
속으로 그렇게
떠나더이다.
뇌수술 환각 속
난 보았나이다.
돌 지난 증손녀
고운 손 잡으시고
손녀 꿈들 용기 불어
안으시는
님의 떠나심은
없음이
아니더이다.
<박사학위 논문집에 쓴 서명 - 하나 남은 자필 글씨>
<수필>
중국을 바로 알고 한류를
한류(韓流)란 1990년대 후반부터 배용준, 이영애, 최지우, 장서희, 김희선, 강타, 이정현, 비, 동방신기 등 연예인들이 출연한 영화와 TV 연속극, 음반을 앞세운 한국 대중문화가 중국과 일본을 넘어 세계에 전파되는 현상을 일컫는 말이다. 그러나 우리가 한류 열풍에 휩싸일지라도 알아야할 역사가 있고, 딛고 넘어야할 선이 있기에 도약하는 내 조국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 과거를 되돌아보면서 한류의 계승 발전을 기약해 보기로 하자.
한국은 유사 이래로 줄곧 중국의 역대 漢族의 왕조나 北方民族들의 왕조와 밀접한 관계를 맺어 왔다. 그것은 우리 역사에 영향을 미치는 거의 유일한 대외관계였으며 동시에 영향의 정도도 매우 깊었다. 대체적으로 나라가 통일되어 강력한 힘을 유지할 경우에는 우리에게 불리하게 작용했다. 漢, 唐, 元, 明, 凊代가 그러했다. 반대로 나라가 분열되고 힘이 약할 경우에는 우리는 비교적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었다. 魏晉南北朝時代와 唐末에서 宋代에 이르는 기간이 그러하였다. 중국의 역대 왕조는 ‘宗主國’ 이었으며 우리는 그것의 屬國 또는 藩屬이었다는 사실을 공식적으로 서로 인정한 관계였다.
중국이 여타 주변국과도 이런 공식적인 ‘지배-굴복’ 의 관계를 유지했다고 해서 우리의 수치스러움이 감소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중국의 역대 왕조가 우리에 대 한 직접지배를 실현하지 못한 것이 우리의 단결된 힘과 저항 때문이었다는 사실은 백번 강조해도 무방할 것이다.
우리는 중국에 대해 고조선과 고구려 이후에는 유감스럽게도 대규모의 저항을 시도하지 못했다. 우리를 굴복시키기가 어려울 경우에는 전쟁을 일으켰다. 漢族王朝의 경우 漢武帝 때의 四郡 설치와 隋煬帝와 唐太宗, 唐高宗의 백제와 고구려 침공이 그것이다. 북방민족의 경우에는 고려 초기 遼의 거란족, 金의 女眞族, 元의 몽골족, 凊의 滿洲族 역시 침공을 감행했다. 과거 중국은 우리에 대해 大國主義적인 태도를 포기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정치적인 측면에서는 우리가 중국으로부터 막대한 피해를 입었지만 문화면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중국은 과거에 세계 최고의 문명수준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많은 것을 도입할 수 있었다. 환언하면 제도, 사상, 종교, 예술, 자연과학 등 많은 분야에서 우리는 그 영향을 크게 받았다. 영향을 받은 정도가 너무 심하여 우리의 전통적인 문화 중에서 어느 것이 순수한 우리 것이고, 어느 것이 중국의 영향에 의한 것인지를 구분하기가 힘들 정도다.
건국 이후부터 현재까지 중국은 국제문제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한 적은 거의 없다. 그러나 중국의 경제가 계속 발전하고 있는 현시점에서 볼 때, 중국은 국제무대에서, 그리고 한중관계에서 반드시 지금보다 훨씬 더 적극적인 역할을 하려고 시도할 것이며 그러한 능력을 갖추게 될 것이다. 이리하여 세계의 국제정치판도는 크게 변화될 것이 확실하다. 미국 위주의 판도에도 미국이 중국의 지위를 인정하는 구조로 변화 할 것이며 변화하고 있다. 아울러 우리 한국의 대외관계는 건국 이후 가장 크게 변화하고 있는 중이고, 건국이후부터 현재까지 對美와 對日 관계가 중심이었으나 점차적으로 中관계의 중요성이 부각되고 있으며, 나아가 對美와 對日관계의 중요성 보다 갈수록 더 커지고 있다. 중국의 부활로 인해 우리 대외관계의 기본적인 틀이 변하고 있는 것이다.
중국을 바로 알고 한류를 계승해 나가자
90년대 중후반부터 '한류'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중국 본토는 '사랑이 뭐길래'라는 드라마가 중국인의 시선을 사로잡았고, 대만에서는 댄스그룹 '클론'이 선풍적인 인기를 모으기 시작했다.
사실 '한류'라는 말은 우리가 아닌 중국 언론이 2000년 2월에 지은 단어다. 당시 중국인과 대만인들도 많이 놀랐겠지만, 그들보다 크게 놀란 것은 바로 우리들 자신이었다고 한다. 왜냐하면 우리 문화가 수출된다는 것은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내가 칭따오(청도)대학교에서 어학연수 받을 때, 들렸던 백화점에서 우리의 음반과 영화․연속극 DVD가 많이 진열되어 있는 것을 보고, 너무 반갑고 흥분되어 필요 이상으로 많이 사가지고 오지 않았던가!
그러나 한류가 지나치게 일방적으로 부각되면서 일부 현지인들의 반감을 사기도 했다는 것이다. 중국은 물론이고, 일본에서도 반감이 제법 있다고 한다. 이런 반감은 일시적이고 단편적인 것도 사실이다. 한류 전체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한류의 특정한 이미지에 거부감을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류가 보다 폭넓고 다양하게 소개되도록 노력함으로써 그런 부정적인 이미지가 희석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사실 한류가 일시적인 붐으로 끝나는 게 아닐까 하는 의문은 '90년대 말부터 지속적으로 제기돼 왔으나 한류가 시작된 지 10년이 지나도록 한류는 건재하고, 또 내용적으로나 지리적으로 더욱 확대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한류는 누가 의도적으로 기획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문화 현장에서 열심히 일하시는 분들이 노력하다보니 어느 날 세계에서 우리 문화를 알아보고 사랑해주기 시작한 것이다. 따라서 한류가 계속해서 사랑받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우리들 스스로 우리가 만든 문화를 많이 사랑해주고 아껴주면, 그것을 바탕으로 해외에서도 경쟁력을 갖고 진출할 수 있는 것이다. 또 다른 한편으로 한류가 붐으로 끝나지 않고 지속하기 위해서는 단순한 비즈니스에서 한 차원 더 올라가 한류가 당당하게 '세계 문화의 하나'로 자리 잡아야 한다. 아직까지는 한류가 중국의 음식처럼 세계문화의 하나로 대접받는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한류의 성공사례를 잘 살려 나간다면 머지않아 우리나라 문화가 세계 문화의 하나로 대접받고, 그만큼 대한민국의 브랜드 가치도 높아질 것으로 기대된다. 요즘에는 대중문화뿐만 아니라 김치, 고추장, 라면 등의 음식문화와 가전제품까지도 이상적인 선호현상까지 나타나고 있으며, 한국어를 배우는 외국인이 많아지고, e스포츠 한류 열풍도 일고 있다 하니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한류의 스타들이여! 더욱 분발하라. 그대는 자랑스러운 한국인이다.
한류를 계승해 나가기 위해서는 우리 문화를 아끼고 사랑하는 한국인이 되어야 하겠다. 우리는 한류의 스타들이니까 우리 모두, 우리 모두…
참고문헌
한광수․한창수(2004). 현대중국의 이해.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출판부.
내 친구 학메 박성기
학메! 고 박성기, 그렇게 친구 이름 앞에 고 자를 붙일 줄을 어찌 알았겠는가?
어느 날 새벽 갑자기 우리 곁을 훌훌 떠나 이제 고인이 되어버린 내 친구 학메 박성기!
친구는 참으로 소년처럼 여리고 착하게 살다가, 잘 맞지 않은 세상과 눈 맞춤하려 애를 쓰다가 한 마리 새가 되어 그렇게 자유로운 세상으로 훌쩍 날아 가버렸다네.
어떤 이는 친구를 기인이라고 말하데.
그럴지도 모르네. 보성에서 태어나 어려운 환경에 굴하지 않고 광주 서중, 광주상고, 그리고 초등교직에 나와 교장으로 퇴임하고, 특수교육학 박사학위까지 받았으니 입지전 적인 인물이고 기인이라 해도 걸맞은 삶을 살았으니 말이네.
특히 전교조 초기에 장성 지회장을 하고 여러 번의 불이익을 받으며 좌천을 당했지. 허나 아이들을 사랑하고, 누구보다도 열정적인 교육활동의 성과를 통해 그 드러난 공로를 누구도 어쩌지 못해 전교조 조합원이었던 친구가 당당하게 교장까지 승진할 수 있었으니 말이네.
내 친구 학메.
하지만 섭섭하다 생각할지 모르지만 사실을 나도 친구를 잘 모르네.
착하고 성실하고 그리고 어쩌지 못하는 외로움과 한에 갇히고 머물러 술을 좋아했다는 것만 뚜렷이 남을 뿐이네.
한 인간을 조명하며 어찌 이리 무심할 수 있을까? 내 자신의 무관심과 소홀을 탓하여 보지만 나는 내 친구 학메, 자네를 그렇게 잘 모른다고 말할 수밖에 없네.
친구를 속절없이 보내버린 방관자로서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하루만 먼저 친구를 강제로라도 병원에 모시고 갔으면…. 그런 회한과 아쉬움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무심했던 그 시간과 나의 안이하고 게으른 판단에 발등을 찍고 싶지만 다 지나간 일이 되어버렸네.
다시는 돌이키거나 되돌릴 수 없는 과거가 되어버렸네.
2014년 8월 27일.
친구가 뜻밖에 진월동 새 사무실에 와서 함께 푸른숲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던 게 우리의 마지막 만남이 되고 말았네.
그 날 친구 모습이 위태로워 보일 정도였네. 식은땀을 흘리며 점심을 먹고 ‘어서 들어가 쉬게’ 하며 헤어질 때 친구가 갑자기 휘청하며 넘어지려 했네. 그 때보니 친구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얗었네. 그래도 집에 잘 들어갔다기에 안심했는데, 그렇게 그날이 우리의 이별의 날이 되고 말았네.
“어야! 어찌 이러는가? 이러다 죽네.”
“모든 걸 훌훌 털어버리고 건강만 생각하게.”
“우리 나이엔 모든 게 다 허상이네. 자식도 소용없네. 이제 나만 생각하며 즐겁게 살세.”
말이 되건 안 되건 그런 유치하고 원초적인 말로 위로하고 희망을 찾자고 했던 나를 비롯한 친구들이었네. 다 친구를 걱정하고 위로하고, 아니지, 그게 우리들 현실 아니었나?
박사학위, 조선대 강의, 딸 아이들과의 여행, 글 써서 책도 한 번 내보겠다고….
그렇게 좋은 일, 희망이 함께 할 때면, 친구는 어린아이처럼 즐거워했지. 특유의 그 천진한 미소를 짓거나, 주먹을 불끈 쥐며 아자! 아자! 하던 그런 표정, 그리고 노래방에서 절규하듯 노래 부르던 이제 기억도 희미한 그 모습들.
그런 장면들이 끊어진 필름처럼 지나갈 뿐이네. 가슴이 찢어질 듯 아프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하네.
에끼 이 사람! 무엇이 그리 친구를 아프고 방황하게 했단 말인가? 이 바보같은 사람아! 훌훌 털어버리지 못했단 말인가?
옆에 있으면 한 바탕 붙들고 맘껏 실컷 원망이라도 하고 싶네.
학메 친구는 그렇게 우리에게, 그리고 나에게 불쑥 몇 장면의 추억만 남기고 떠나가 버렸네.
2014년 9월 3일 수요일, 그날은 친구가 나와 병원에 가기로 약속한 날이네.
‘늦게 병원에 가면 사람들이 많아서 기다려야 하니 힘들다’해서 ‘그럼 9시 안에 가세’ 그렇게 우린 약속을 했고, 난 아침밥을 먹고 바로 집에서 나왔네.
가다가 전화를 했지. 그런데 뜻밖에 자네 딸이 받더군.
“아버지 돌아가셨어요.”
그렇게 친구는 훌쩍 우리 곁을 떠나버렸네.
65년의 친구의 삶은 그 말 한마디로 그만 정지되어버리고 말았네.
‘태풍이어도 도서관을 택했네. 우선은 조선의 역사부터 엿보기로 했네. 다신 방황하거나 술에 의존하지 않으려네. 자네들께 걱정끼치는 일들은 삼갈라네, 낼도 도서관 신세지고 싶네. 모임 때는 나갈 거네. 고마우이, 2014년 8월 2일’
‘따로 함께 가얄 길. 오날을 언제 만나노? 2014년 8월 14일’
학메 친구가 보낸 몇 안 되는 문자 중에서 두 개를 골라 적네.
이제 한 줌 재가 되어 딸아이들 따라 서울로 갔으니, 친구의 전화를 받겠는가? 문자를 받겠는가?
그러니 전화기를 버릴 때까지 그 몇 안 되는 문자 간직하며 이따금 꺼내보면서 친구를 추억하려네.
하지만 학메!
말대로 잘 되려는 지 모르겠지만, 우린 이제 친구를 미련 없이 보내드리려 하네.
가슴에 담은 슬픔과 한까지 모두 훌훌 날려버리려네.
잘 보내드리려 하니 잘 가시게.
친구도 험난하고 굴곡 많았던 이 세상 모두 다 잊고, 평화로운 소풍 길 되시게.
오늘은 이만 쓰려네.
2014년 9월 7일
운당 김 목
<자기조절, 도식기반, 직접교수전략이 수학 학습부진아의 수학 문장제 해결력과 학습태도에 미치는 효과 비교- 학메 박성기 박사학위논문 표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