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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예수가좋다오 원문보기 글쓴이: (一麥.)
말씀에 몰입하는 설교? 권호 목사(로뎀교회. 국제신대 설교학 교수) 설교를 위한 고민을 멈추는 순간 설교의 발전도 멈춘다. 20년 이상 설교를 해온 소위 설교베테랑도 설교에 대해 고민을 할까? 얼마 전 한국에서 최고의 설교자로 꼽히는 분을 만났다. 설교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자신의 두 가지 고민을 털어놓았다. 첫째 고민은 한 교회에서 15년 이상을 설교하다보니 더 이상 설교할 것이 없다는 것이었다. 무엇을 해도 신선감이 없다고 했다. 두 번째 고민은 더 본질적이었다. 종종 설교를 마치고 나면 마음 깊은 곳에서 의문이 든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자신의 설교를 듣고 눈물도 흘리고, 은혜도 받았다고 말하는데 정작 자신은 설교를 마치고 돌아오면 ‘오늘 정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것일까? 혹시 내 생각이나 감정을 전한 것은 아닐까?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이 아닌 사람들을 이끌기 원하는 방향으로 메시지를 전한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어 힘들 때가 많다는 것이다. 이 분의 이야기를 들은 필자는 ‘설교자들이 고민 없이 설교할 때가 많은데 이런 고민을 아직 하는 것을 보니 이 분은 설교자로서 건강함을 유지하고 있는 분이구나. 계속 발전하겠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기억해야 한다. 고민을 멈춘 순간 설교의 발전도 멈춘다는 것을. 설교의 다양성, 진정성 텍스트가 답이다. 필자가 만난 설교자의 첫 고민은 ‘설교 다양성과 신선함(homiletical variety and vividness)’에 관한 문제다. 설교학의 역사 초기부터 메시지의 다양성과 신선함을 유지하기 위해 고전 수사학, 커뮤니케이션 이론이 꾸준히 접목되어 왔다. 그러나 이런 방법론에만 치우치는 것에 대한 우려가 생겨났다. 최근 미국복음주의 설교자들 중심으로 진정한 설교의 다양성을 위해서는 설교본문, 즉 텍스트 자체로 돌아가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진정한 설교의 다양성과 신선함을 발견하기 원한다면 텍스트 안에 내재된 힘을 설교자들이 주목해야 한다. 텍스트의 여러 내용이 어떻게 각각 다른 형식(성경장르)으로 전해지면서 메시지의 다양성이 강화되는지를 연구하고 활용할 때 설교자는 강단의 새로움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필자가 만난 설교자의 두 번째 고민은 ‘설교의 진정성(homiletical authenticity)’에 관한 문제다. 설교는 정의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설교의 진정성이란 설교본문, 텍스트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충실하게 전하는 것을 말한다. 슬프게도 빈번하게 한국교회 강단에 ‘본문 이탈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그렇다. 현재 한국교회 설교의 위기는 하나님의 말씀, 그 불변의 텍스트를 떠난 것에서 시작되었다. 다시 텍스트로 돌아가야 한다. 한국교회 강단을 살리기 위해 설교자들이 ‘텍스트가 왕이다(Textus Rex)’라는 것을 믿고, 고백하고, 이것을 영혼에 새기며 설교를 준비해야한다. 그럴 때 설교의 진정성이 살아나고, 하나님의 말씀이 혼잡함 없이 선포될 것이다. 성경 본문이 이끄는 설교란 무엇인가? 설교자가 설교의 다양성과 진정성을 살리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돌아가야 한다면 이를 위한 적합한 설교학적 방법론이 필요하다. 필자가 확신하는 가장 적합한 방법론은 바로 ‘본문이 이끄는 설교(Text-Driven Preaching)’다. 본문이 이끄는 설교는 2011년부터 미국 설교학회에서 활발히 논의 및 적용되고 있는 설교 방법론이다. 본문이 이끄는 설교는 ‘본문이 왕이다’라는 전통적 강해설교의 철학을 확고히 하면서 설교의 내용과 형태, 적용을 성경본문 자체에서 도출하는 노력이다. 특별히 본문이 이끄는 설교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설교의 형태와 적용부분이다. 본문이 이끄는 설교는 전통적 강해설교와 같은 맥락을 추구하면서도 기존 강해설교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설교의 형태와 적용 또한 성경본문에서 효과적으로 끌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한국교회 강단이 살아나고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 텍스트로 돌아가야 한다. 우리에게 주신 텍스트, 성경 본문은 깊고 마르지 않아 온 땅을 적시는 영적인 강과 같다. 설교자가 자신의 생각과 경험에서 퍼 올리는 우물과는 비교할 수 없다. 개인적인 자질과 노력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다. 그 모든 것들이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 텍스트 앞에 겸손히 내려놓아지고, 뿌리내려지고, 그 속에서 자라나가,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성경이 말하는 진짜 설교는 무엇인지 살펴보자. 설교, 왕의 메시지를 선포하는 것 우리의 왕이 누구인가? 아는 것부터 설교 할 수 있는 기본이 된다. 케루쏘는 신약 전반에서 설교의 행위를 나타내는 동사로 쓰였다. 케루쏘의 뜻은 한국성경에서 주로 ‘전하다’ 혹은 ‘전파하다’로 번역되고, 대부분의 영어성경에서는 ‘설교하다(to preach)’로 번역된다. 세례 요한이 광야에서 회개의 세례에 대해 설교했을 때(막 1:4), 예수님께서 회개와 천국에 대해 설교하셨을 때(마 4:17),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를 설교했을 때(고전 1:23) 모두 이 동사가 쓰였다. 또한 바울이 디모데에게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너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라”(딤후 4:2)고 명령했을 때도 동일한 단어가 쓰였고, 대부분의 영어성경은 이 구절을 ‘설교하라’로 번역하고 있다. 그리스로마 시대 때 케루쏘는 왕 혹은 다스리는 자의 메시지를 전령이 선포하는 행동을 나타내는 동사였다. 전령은 임명받은 자이기에 그 메시지가 어떤 것이든 그것을 있는 그대로 전하는 것이 그의 임무였다. 사람들이 그 메시지를 좋아하든 싫어하든 사람들의 반응과 관련 없이 자신이 받은 메시지를 가감 없이 전해야 했다. 이런 배경에서 볼 때 바울의 말이 이해가 된다. 바울에 따르자면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는 유대인에게 거리끼는 것이고, 이방인에게 미련한 것이었다(고전 1:23). 그렇기 때문에 그가 유대인과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매우 어려웠다. 그러나 바울은 왕 되신 하나님과 그리스도께 보냄 받은 전령으로서 메시지를 듣는 사람들의 반응에 좌우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을 보낸 하나님을 생각하며 그분의 뜻과 메시지를 충실하게 전했다. 또 이 단어의 배경을 알면 바울이 왜 디모데에게 어떤 환경에서든지 말씀을 전해야 한다고 강조했는지 이해가 된다. 살펴본 것처럼 전령은 왕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온갖 어려운 환경들을 극복해야 했다. 바울은 디모데가 하나님의 전령으로서 어떤 상황 가운데에서도 충실하게 왕이신 그분의 말씀을 전해야 한다고 권면했던 것이다. 설교, 왕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 유앙겔리조는 신약성경에서 케루쏘와 더불어 ‘설교하다’ 라는 의미로 쓰인 또 다른 대표적 단어다. 케루쏘가 설교의 행위를 강조한다면, 유앙겔리조는 특별히 설교의 내용을 강조하는 단어다. 유앙겔리조는 주로 ‘복음을 전파하다(to preach the Gospel) 의미로 쓰였다. 누가복음 8장1절을 보면 예수께서 각 성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며 듣는 자에게 기쁜 소식(good news), 복음을 전하셨다. 이때 좋은 소식을 설교하는 행위를 나타내는 동사 유앙겔리조가 사용되었다. 사도행전 8장 4절에 따르면 핍박 때문에 흩어진 성도들이 위축되지 않고 오히려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했다. 대부분의 영어성경은 유앙겔리조와 케루쏘를 같은 의미로 보았기 때문에 이 구절을 ‘말씀을 설교했다’로 번역했다. 그러나 헬라어 본문에는 유앙겔리조가 쓰였기 때문에 한국어 개역개정은 ‘복음의 말씀을 전했다’로 잘 번역해 뜻을 분명하게 나타냈다. 이 구절은 핍박 받는 상황 속에서도 성도들이 세상에 기쁜 소식, 복음을 전했던 것을 강조한 것이다. 설교자가 기억해야 할 함의 정리해보자. 케루쏘와 유앙겔리조는 성경에서 둘 다 설교하는 것을 나타내는 대표적 동사다. 전자는 설교자가 하나님의 전령으로서 메시지를 있는 그대로 외쳐야 할 임무를 가졌다는 것을 강조하는 동사이다. 반면 후자는 설교의 내용을 강조하는 단어로, 설교로 전달해야할 것이 기쁜 소식, 복음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동사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을 통해 설교자들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마음에 깊이 새겨야 한다. 첫째, 설교자는 하나님의 전령으로 부름 받은 자다. 둘째, 그렇다면 메시지의 권위는 자신에게 있지 않고 그를 보낸 자에게 있음으로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셋째, 설교자는 자신의 임무가 자신을 보낸 하나님과 예수님의 메시지를 정확하게 전하는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넷째, 설교자가 전해야 할 소식은 우리를 향한 좋은 소식, 복음임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께 부름 받은 사명자이며, 구원의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임무를 가졌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우리의 설교는 달라지기 시작한다. 본문이 이끄는 설교(Text-Driven Preaching)는 ‘본문이 왕이다’는 전통적 강해설교의 철학을 확고히 하면서 설교의 내용, 형태, 적용을 성경본문 자체에서 도출하는 노력이다. 본격적으로 본문이 이끄는 설교의 구체적인 방법론을 배우기 전에 그것을 구성하고 있는 중요한 세 요소를 살펴보아야 한다. 기억해야 할 세 요소-‘본·연·적’ 본문이 이끄는 설교의 첫 요소는 ‘본문’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본문의 의미(meaning of a text)’다. 이것이 본문이 이끄는 설교의 첫 출발점이요, 씨앗이다. 본문이 이끄는 설교는 이름처럼 본문이 모든 것의 핵심이다. 본문이 이끄는 설교는 무엇보다 성경본문의 의미를 분명하게 드러내고 전달하고자 최선을 다한다. 본문과 전혀 관계없는 것들, 설교자 개인의 생각, 경험, 사회적 이슈 등이 설교를 이끌어 나갈 때 그것은 더 이상 설교가 아니다. 설교에서 영원히 빠질 수 없는 첫 요소이자 불변의 토대는 바로 성경 본문이다. 성경본문이 이끄는 설교의 두 번째 요소는 ‘연관성(relevance)’이다. 이 두 번째 요소가 현대 설교학에서 중요한 주제로 집중적으로 토의되고 있다. 연관성은 성경이라는 오랜 시간을 거쳐 온 텍스트를 오늘날의 상황과 연결시키는 단계를 말한다. 좋은 설교는 현대를 사는 우리가 왜 몇 천 년 전에 써진 본문을 들어야 하고, 그것이 우리의 삶과 어떻게 연관되는지를 보여주어야 한다. 이 연관의 작업을 존 스토트(John Stott)는 성경시대와 현대시대의 ‘두 세계를 다리로 연결하는 작업’이라는 탁월한 비유를 통해 설명했다. 윌하이트(Keith Willhite)는 연관성을 설교자가 선택한 본문의 내용과 청중의 삶 사이를 이어주는 커뮤니케이션 연결고리로 정의했다. 그에 따르면 설교를 듣는 사람들에게 성경의 진리가 현시대에도 어떻게 ‘시의적절함’과 ‘적용가능성’을 갖는지 보여주기 위해 연관성은 꼭 필요하다. 설교자는 성경의 세계와 오늘날의 세계 중간에서 연관성이라는 다리를 놓음으로써 의미와 진리가 소통되도록 해야 한다. 본문이 이끄는 설교의 세 번째 요소는 ‘적용(application)’이다. “적용이 시작되는 부분이 설교가 시작되는 부분이다”라는 스펄전의 말처럼 적용은 매우 중요하다. 아쉽게도 지금까지의 전통적 강해설교는 적용부분이 약한 면이 있었다. 설교자는 본문의 의미가 어떻게 현 시대와 연결되는지를 보여줄 뿐 아니라, 본문에 나타난 진리를 어떻게 구체적으로 실천할 수 있는지를 청중에게 분명하게 제시해주어야 한다. 설교자가 설교를 통해 청중에게 깨달음과 감동을 주었지만, 그것을 현실의 삶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지 제시하지 않으면 그들의 삶에 변화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적용이란 관문을 통과하지 않으면 변화라는 땅에 이를 수 없는 것이다. 그럼으로 설교자는 반드시 메시지가 어떻게 청중의 삶에 실천될 수 있는지 적절한 적용을 제시해야 한다. 지적 성실과 영적 깊이의 조화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성경 본문이 이끄는 설교는 반드시 본문의 의미에서 시작해, 연관을 통해 의미의 소통이 이루어지게 하고, 적용을 통해 구체적 삶의 변화가 일어나는 단계까지 나가야 한다. 이 세 요소를 바탕으로 성경 본문이 이끄는 설교를 다음과 같이 정의해 본다. “성경본문이 이끄는 설교란 본문 말씀에 담겨있는 의미를 경건한 묵상과 연구를 통해 발견하고, 그것을 다양한 방법을 통해 오늘날의 삶과 연관시켜 전달하며, 청중들의 삶에 구체적인 실천이 일어나도록 적용해서, 깨달음과 변화가 일어나게 하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행하는 설교자의 영적 행동과 결과다.” 성경 본문이 이끄는 설교에 대한 이 정의는 앞에서 언급한 설교의 세 가지 요소를 포함해서 만든 것이다. 이 정의를 자세히 살펴보면 본문이 이끄는 설교의 세 가지 요소 외에 추가로 강조된 것이 있다. 첫째, 경건한 묵상이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했다. 설교는 머리만 사용하는 지적 행위가 아니다. 설교자는 분명 지성을 사용해야 하지만, 반드시 경건한 묵상을 통해 설교를 준비해야 한다. 둘째, 성령의 도우심을 강조했다. 설교는 단순히 설교자 혼자의 사역이 아니요, 성령께서 함께 해주셔야만 가능한 것이다. 저자가 이런 두 가지 추가적 강조점을 둔 것은 영혼을 변화시키는 설교가 우리의 지적 성실뿐만 아니라 성령의 도우심을 간절히 구하는 기도가 더해질 때 탄생된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본문이 이끄는 설교를 하기 위해 본문, 연관성, 적용의 조화와 설교자의 깊은 묵상 및 성령님의 도우심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이제 본문이 이끄는 설교를 위한 ‘본문몰입법’에 대해서 살펴볼 것이다. 성경 본문이 이끄는 설교를 하기 위해서는 설교자가 본문에 완전히 몰입해야 한다. 설교자가 본문에 몰입하지 않으면 절대 청중을 몰입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본문몰입을 설교학에서는 보통 ‘깊은 본문연구’라고 한다. 깊은 본문연구를 위해 설교자는 1)본문의 근접 및 전체문맥 확인 2)단어연구 3)문법연구 4)배경연구 5)본문해석 6)본문의 신학파악을 해야 한다. 이제 깊은 본문연구를 위한 단계를 하나씩 살펴보자. 성경 본문 말씀의 근접 및 전체문맥을 확인 흔히 숲과 나무의 비유로, 전체 속에서 성경부분을 파악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이제 자신이 선택한 성경본문이라는 나무가 문맥이라는 숲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지 확인해 보라. 본문의 근접문맥(immediate context)은 본문이 속해 있는 바로 앞뒤의 성경문맥을 말한다. 전체문맥(broad context)은 본문이 그 책에 속해있는 위치나, 성경 전체에서의 위치를 말한다. 본문 말씀 선택의 원칙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근접문맥을 가장 확실하게 확인하는 방법은 영어-히브리어, 영어-헬라어 성경의 표제어를 확인해 보는 것이다. 근접문맥과 더불어 전체문맥을 동시에 확인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주석서 앞에 나와 있는 내용분석을 확인해 보는 것이다. 다음 구절을 통해 실례를 살펴보자.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 10:25). 브루스(F. F. Bruce)에 따르면 이 구절은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감’(히 10:19~25)이라는 주제에 속해 있다. 근접문맥을 살펴보자. 이 주제는 앞에는 ‘지극히 높으신 대제사장’(10:11~18)의 내용이 위치해 있다. 뒤에는 ‘배교의 죄’(10:26~31)란 내용이 있다. 전체 문맥을 알아보자. 히브리서의 내용은 크게 여덟 부분으로 나누어지는데 10장25절은 여섯 번째 구분인 ‘더욱 요구되는 예배, 믿음, 인내’(10:19~25)에 속해있다. 근접문맥과 전체문맥을 통해서 10장 25절이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를 생각하며, 핍박으로 배교가 벌어지는 상황 속에서도 성도는 끝까지 믿음과 인내로 함께 모여야 함을 말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음호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