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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말씀>>
문득 잠이 안 오는 날이면 지나온 시간들을 되새겨 봅니다.
나이가 들면 추억을 먹고 산다는 말이 있지요.
그 당시는 죽을 것처럼 힘이 들었지만
지나고 보니 아이들 키우느라 아둥바둥했던 일,
어머니와의 소소한 갈등도 모두 소중한 시간들이었습니다.
제가 걸어온 인생길을 마음 속에만 묻어두기 아까워
틈틈이 적어 두었던 글이 있습니다.
이번에 정리할 기회가 생겨 그동안 써 놓았던 글 중에
몇 편을 골라 작은 책을 하나 만들어 보았습니다.
가족들에게 저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어졌기 때문입니다.
이글 쓰는 동안 남편과 저도 무탈했고 1남 2녀가
지금은 시집 장가를 가서 자식들도 낳고 행복하게 잘 살고 있습니다.
글을 뽑으려고 다시 읽어보니 글 내용도 부족하고
표현도 서툴러서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글 초년생의 작품이라 생각하시고 흉보지 마시고 읽어 주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내 소원이 있다면 앞으로 먼길을 떠날 때
자던 잠에 조용히 가고 싶다는 것입니다.
자식들 걱정 안시키고 얼마나 좋을까?
이 소원을 매일 밤 기도합니다.
그리고 이 책을 읽어 주신 모든 분들이
소원성취 하시고 늘 기쁘고 즐거운 날 되길,
늘 자신의 상황에 감사하며 살아가게 되길 빕니다.
제 1 부
그립고 그리운 어머니와 어른들
어머니 첫 발걸음
아버지는 청주 본토박이고 어머니는 목포 본토박이였습니다.
청주 곽씨 아버지는 3남 1녀 중 종가집 장남이었습니다.
목포 김해김씨 어머니는 1남 3녀 중 둘째 딸이었지요.
아버지는 종가집 장손으로 첫 결혼에 자손을 못 낳았답니다.
종가집 장손이 후손이 없으니 손자를 기다리는 부모님들에게 죄송스럽기도 했겠지요.
그러다보니 자연 부부 사이가 멀어지게 되었나 봅니다.
아버지는 사촌들이 있는 목포에 내려 와서 직장 생활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중 저의 어머니를 만났고 어머니께 부모님도 모두 안 계신 고아에다가
총각이라고 속여 목포에서 결혼식을 했답니다.
결혼식을 하고 한참을 살다가 아버지가 청주에 아버님이 편찮으시다며
같이 가지고 하더랍니다. 어머니는 깜짝 놀라셨겠지요.
"아니, 고아라고 하지 않으셨어요?"
아버지는 부모님 모두 살아계신데 내가 왜 고아냐며 웃으시더래요.
어머니는 무척 어이가 없으셨겠지만 뭐 어쩔 수 있나요?
청주로 가서 처음으로 시부모님께 인사를 드리고 청주에서 살았대요.
얼마 살다보니 아버지가 처음 장가가서 자식을 못 낳았던 큰어머니가
갑자기 찾아 왔더랍니다.
우리 어머니는 그 당시 뱃속에 나를 임신해 있던 중이었구요.
청주에 큰어머니는 아이를 못 낳으니 그 당시 집을 나가서
서울 동대문 시장에서 과일 장사를 해 돈을 많이 벌었대요.
그러다가 아버지가 다시 결혼을 해서 산다는 소식을 듣고 청주로 찾아 온 것이지요.
우리 어머니는 큰어머니가 가끔씩 찾아오는 모습이 불편하고 큰어머니한테
미안해서 이 딸을 데리고 어머니 고향인 목포로 와 버리셨대요.
목포에서 혼자 저를 키우며 살고 있는데 청주에서 아버지가 다시 들어오라고
몇 번이나 찾아왔답니다.
결혼하기 전에 총각이라고 속인 것을 사과도 하고 빌기도 했지만 우리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가 용서가 안 되었나 봅니다.
결국 아버지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혼자서 청주로 돌아가기를 몇 차례나 하셨대요.
어느 날, 딸 하나를 데리고 혼자 살고 있는 우리 어머니에게 중매가 들어왔답니다.
딸을 데리고 총각한테 시집을 가라고 하더라네요.
총각 집안을 알아보니 전주 이씨 집안에 3남 1녀 중 둘째 아들이었는데,그집안의
3형제가 하나도 자손이 없었답니다.
한 마디로 자손이 문을 닫은 집이었지요.
어머니는 그때 전주 이씨 집안으로 시집을 가면 내 딸 하나 잘 키우는데는
걱정이 없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고 해요.
또 처음에 청주 아버지가 총각이라고 속였던 것을 생각하면서 거짓말이 아니고
진짜 총각이라고 하니 그것도 좋아서 그 사람과 결혼을 했지요.
이씨 집안으로 시집을 간 어머니 덕분에 정말 이 딸은 호강 받으며 잘 살아 왔습니다.
친아버지는 아니었지만 얼마나 저를 예뻐해 주셨는지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친구들은 모두들 제가 부러웠다고 해요.
식구들이 모두 저를 공주처럼 떠받들고 사는 것이 얼마나 부러웠는지
하루만이라도 저렇게 살아보고 싶다고 생각한 친구도 있다네요.
지금 생각해도 저는 참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랐던 것 같습니다.
그러던 중 청주에 할아버지가 몸이 많이 안 좋으셔서 돌아가시게 되었습니다.
의식이 왔다갔다 하시는 중에도 자꾸 우리 어머니를 데리고 오라고 하셨답니다.
아버지가 목포로 내려왔지만 그때는 어머니가 벌써 결혼을 하신 후이니
어쩔 수가 없었지요.
그래서 급하게 한 사람을 데리고 가서 할아버지 앞에 앉히고
우리 어머니라고 하니까 그제서야 그 분의 손을 꼭 쥐고 눈을 감으시더랍니다.
청주 아버지는 그 사람과 결혼해 2남 1녀를 낳았지요.
그런데 청주 아버지는 저를 큰 딸로 호적에 올려 놓으셨지요.
그리고 청주 큰어머니는 평생 혼자 사시면서 내가 결혼해서까지도
얼마나 잘 해주셨는지 지금도 잊을 수가 없어요.
제가 결혼할 당시 저의 사정을 들으신 시아버지께서 전주 이씨보다
청주 곽씨가 더 양반이라고 하시며 청주 곽씨 성을 따르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어쩔 수 없이 저는 청주 곽씨로 혼인신고를 하고 말았답니다.
그때부터 저는 곽씨 성을 썼습니다.
전주 이씨 아버지한테는 정말 죄송한 일이지요.
저에게 누가 두 아버지 중 누구를 택하겠냐고 묻는다면
저는 잠시도 망설이지 않고 호강시키며 키워주신 전주 이씨 아버지를 택할 겁니다.
낳은 정보다 길러주신 정이 얼마나 큰지 한없이 고맙기때문이지요.
영락 공원에 아버지를 모셔 놓고 아버지 공원 문패를 보면
딸의 성하고 아버지의 성이 다르지요. 그게 아버지께 무척 죄송합니다.
그렇지만 사랑으로 키워주신 아버지를 자랑스러워하는 마음은 변함이 없습니다.
아버지는 언제나 저의 아버지이십니다.
아버지~ 영원히 잊을 수 없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립고 그리운 어머니
참으로 많은 날 헤아릴 수 없이 불러보았던 어머니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네요.
어머니라는 이름은 늘 허공 속에서만 그리움이 사무칠 때나 그리움으로 설움이
복받칠 때나 언제나 내게 눈물이었습니다.
어머니 그리움에 지친 이름을 애타게 부르며 당신께 못다한 자식의 도리가 얼마나
후회되는지 어떠한 말로도 대신할 수 없는 딸의 마음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이 못난 딸자식 하나 평생 눈물을 흘린다한들 그 간의 불효를 어찌 다 씻을 수
있을런지요.
어머니 살아 생전엔 이렇게까지 마음이 아프지 않았는데 지나온 길을
돌아보니 남는 건 후회뿐입니다.
참으로 오랜 시간이 흘렀습니다.
철없는 마음에 어머니께 상처만 안겨드리고. 어머니 언젠가는 꿈에서라도
효도할 날이 올 줄 믿습니다.
뒤늦게 후회해봤자 어떤 변명도 할 수가 없습니다.
어머니 살아생전에 하신 말씀 너와나 단둘이 뿐이다, 그러지마라 하셨는데
모녀의 한맺힌 세월이 흘러 견디고 견디며 꿈에라도 볼까, 잠결에도
어느 날 밤에 어머니~엄마~하고 큰소리로 불러 보았습니다.
보고 싶어도 참아야 하는 어머니 얼굴 다시 한번 어머니-, 어머니- 불러 봅니다.
딸가슴에 남은 그리운 세월이 또 한번 한이 되어 너무도 많은 날을 저도
하염없이 울기만 했답니다.
그립고 그리운 어머니
꿈에서 따스한 손길로 보고 싶어도 참아내야만 하는 얼굴 .
우리 영원히 함께하는 그날까지 당신의 이름를 부르면서
살아생전 못다한 자식의 도리를 죽는 날까지 어머니 영전에
5월8일 하얀 카네이션을 바치렵니다.......
그리운 어머니 /엄마/ 정말정말 사랑합니다........
어머니 영락공원 집에서 인상이 가족사진 잘 보셨지요?
불효자 외동딸 올림.
2008년3월28일추도식날 글
어매 어매 나 어매 딸 안 할래
벌써 삼십 년 전이네요.
갑자기 시골에서 어머니 쓰러졌다는 소식을 듣고 열차를 타고
병원 응급실에 가 보니 홀로 응급실에 계셨지요.
남편 직장이며 세 아이들도 돌봐야 해서 할 수 없이 부산으로 모셔왔습니다.
요즘 세상에는 중풍에 쓰러지면 바로 수술을 하지요.
그때 우리네 세상은 영천에 있는 한의원에서 약을 짓고 또 침이나 맞고
이것저것 약을 써보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도 좋다는 약은 다 해보았지요. 그리고 3년이 지나 많이 좋아졌습니다.
아이고 내 팔자야. 친정 어머니 모신 분들은 다 알 겁니다.
이 딸은 가족들 눈치 보기가 너무 힘이 들어서 연산동 아는 이모집에
물건을 보관하듯 어머니를 맡겼습니다.
요즘에는 실버타운도 있고 노인 전문 병원도 있지만 그때야 어디 그랬나요.
그러나 딸도 힘들었던 일을 아는 이모가 감당하기란 쉽지 않았을 겁니다.
그 집에서도 못견뎌서 다시 어머니는 가실 곳이 없어졌습니다.
저 혼자서는 어머니 목욕을 시킬 수가 없으니 우리 남편이 같이 목욕도
시켜드리고 어머니 모시고 한의원도 다니고 참 잘해드렸지만
어머니께 한번씩 소리 지르는 것이 그렇게 듣기가 싫었습니다.
그래서 가족 눈치 보기가 힘들고 여러 가지로 불편해서
그만 동네 옆집에다 살림을 냈습니다.
그해 여름 복날이어서 삼계탕을 끓여 초등학교 1학년이 된
큰 딸보고 할머니 갖다 드리라고 했습니다.
큰 딸은 할머니 집에 가서 할머니~ 할머니~ 하고 불러도 대답이 없어
방문을 열어보니 갑자기 똥냄새가 나더랍니다.
할머니가 주무시는 줄 알고 몸을 흔들며 할머니~ 할머니~
삼계탕 잡수세요. 하고 보니 할머니는 하루 전에 혼자
또 다시 중풍으로 쓰러져 전신이 마비가 되었던 겁니다.
제가 달려 가보니 온 몸에는 똥과 오줌이 범벅칠이 되어있고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였지요.
이때부터 또 다시 중풍에다 치매까지 정말정말 힘든 세월이었지요.
어머니는 말도 없이 똥에 오줌을 범벅칠하며 어머니 몸은 천근만근이지요.
이 딸은 혼자 감당을 못해 눈치보며 할 수 없이 남편을 부르지요.
힘든 일은 다 맡아서 해주면서도 어머니께 섭섭한 소리를 하는
남편이 얼마나 야속했던지요.
제가 어머니께 싫은 소리를 하는 건 괜찮아도 다른 사람이
한 마디라도 하는 것이 정말 싫었습니다.
또 이렇게 눈치보는 세월이 3년이 지나니 집앞에 경로당 가실 정도가 되었지요.
중풍 환자는 제일 먼저 신발이 바뀌어야 합니다.
땅에 발을 끌고 다녀야하기 때문에 아이들 학교에서 신는 흰 실내화를 신습니다.
일단은 가벼워야 하니까요.
도시락 가방을 손에 들에 절뚝절뚝 거리며 발을 질질 땅바닥에 끌며 경로당
가시는 모습을 보면 이 딸은 이 딸은 우리 어머니 불쌍해서 한없이 울지요.
오후가 되면 경로당에서 힘없이 절뚝거리며 딸 집이라고 찾아오신
모습을 보면 나는 가슴이 철렁거리고 심장이 멈추는 것 같았지요.
그렇게 곱고 예쁜 우리 엄마였는데 건강한 어머니가 아니었기 때문에
사위 눈치 봐야하고 내 자식들 눈치도 봐야 했지요.
우리 어머니는 유난히 과일과 군것질을 좋아 하셨지요.
냉장고에 과일을 넣어두면 사위 앞에서 눈치 없이 다 갖다 잡수시지요.
손자들 줄 생각은 해보지도 않고 혼자 다 드시지요.
어머니 제발 윤서방 앞에 조심 좀 해달라고 애원을 했습니다.
왜 그때 어머니가 그렇게나 미웠는지.....
어느 날 어머니와 저는 오랜만에 모녀끼리 앉아 이야기를 했습니다.
어머니는 이런 말씀을 하셨지요. "야, 내가 딸네 집에서 큰 눈치 밥인가 보다"
"왜요?"하고 물었지요.
"아무리 먹어도 먹어도 항상 내 배가 고프니 말이야."
'아..........' 저는 어머니께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날 이후로 나는 식구가 아무도 없는 사이에 밥이며, 과일을
항상 몰래 드리며 엄마 윤서방이 들어오면 조심 좀 해 달라고 애원을 했지요.
우리 어머니 하신 말씀이 "병신 아들이라도 하나 있어 봤으면 아들 밥이라도
한 번 먹어보고 죽고싶다" 하시길래 나는 이렇게 말대답을 했지요.
"엄마, 이 몸에 아들 밥은 더 못 먹지. 딸도 힘든 일을 어느 며느리가 해요?
엄마 아들 없기 다행이예요." 하며 가슴 아픈 소리도 하고 말았습니다.
또 얼마 후 치매가 심해졌습니다. 치매 환자는 밤잠을 잘 안 잔답니다.
밤이면 자다가 어머니 방에 가 보면 안 계시지요.
그 밤중에 이 딸은 동네를 헤매며 찾아다닙니다.
그러면 교회에 혼자 누워계시기도 하고 또 어느 날 밤에는 남의 집
담장 밑에서 누워 계시기도 하지요.
그 밤에 어머니를 붙잡고 울며 울며 "엄마 나 좀 살자, 제발 나 좀 살자"
엉엉 울기도 했습니다.
그럼 우리 남편도 자다가 제가 없으면 어머니를 찾아 다니는 줄 알고
동네를 돌아다니다가 어머니를 업고 집으로 들어오곤 했지요.
밤에 길에서 엉엉 울고 난 그 다음 날, 6살 난 우리 딸을 새벽에
깨워 데리고 나가서 하루 종일 연락이 없어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습니다.
그땐 핸드폰도 없고 어떻게 방법이 없었지요.
친구와 동네 사람을 동원해 찾았지만 도저히 안되어서 경찰에 신고를 했지요.
신고 끝에 저녁 늦게 산 속에서 찾았지요.
온 식구들이 함께 가 보니 할머니는 어린 손녀를 데리고 산 속에서
똥과 오줌을 싸서 범벅칠을 해 놓고 하루 종일 할머니를 따라다닌
우리 딸은 울어서 울어서 얼굴이 퉁퉁 부어 있었습니다.
하루 종일 울면서 "할머니 집에 가, 할머니 우리 집에 가"
하다가 기진맥진해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우리 엄마가 얼마나 미웠는지, 제가 그랬는데
애들 아빠는 오죽 했을까요. 어린 내 딸 고생시켰다고 장모가 미워 죽지요.
그 때 나는 어머니보다 어린 내 딸을 끌어 안고 얼마나 놀랐냐하고 울었지요.
그때 나는 정신 없는 어머니를 왜 그렇게나 미워했는지.....
집으로 돌아와서 어머니를 목욕시켜놓고 "아이고~ 아이고~ 어매~ 어매~"
엉엉 울면서 "뭐 할라고 나를 낳았는가? 이 고생 시킬려고 낳았는가?
어매~ 어매~ 딸이라도 하나 더 있으면 이럴 때 하소연이라도 하지"
엉~엉 울며 콧물 눈물 범벅이 되어 모녀는 끌어안고 통곡을 했지요.
식사를 양푼으로 드시고 주무신 사이에 시장을 다녀 왔지요.
어느 새 아무도 없는 줄 알고 냉장고에 음식을 다 꺼내서
쓰레기통에 부어 놓고 전기밥통에 부어서 다 섞어 놓으셨습니다.
어머니 딴에는 윤서방 밥해주고 반찬해준다고 하셨다는데.....
그럼 다 못먹게 되어버려서 다시 장을 봐서 반찬을 하기가
몇 번인지 셀 수도 없습니다.
이런 고통이 십년이 넘게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더 큰 어려움이 찾아왔습니다.
친정 어머니는 치매에 계시지요. 사위는 회사 부도에 집에서 쉬고 있지요.
아들은 군 제대하고 대학 복학 준비하고 있지요. 딸 둘은 대학생이지요.
6식구가 정말 힘들었던 세월 속에서 갑자기 시누이가
"너는 친정 부모만 모실래?" 하면서 편찮으신 시어머니를 모시고 왔지요.
친정어머니 치매에다 시어머니 편찮으시지요.
남편 하루 종일 집에 있지요. 아들, 딸.....
정신적으로 감당하기 너무도 힘들었지요.
치매 환자 빨래며 아침 먹고나면 점심, 점심 먹고나면 저녁.
제일 고통은 치매든 친정 어머니가 눈치였지요.
이 고통을 나는 못 이겨 친구한테 하소연을 했더니
며칠 여행이라도 해보라고 합니다.
나는 찰랑찰랑한 긴 머리를 숏카트로 치고 산 속으로 가서 연락을 끊었지요.
아는 사람들 사이에 행방불명이 되고 싶었습니다.
산 속에서 나는 그만 "하나님~ 하나님~ 엉엉 울면서 하나님이 계시면
내 소원 좀 들어주세요,내가 너무~ 너무~ 힘들어서 이곳까지 왔습니다.
신이 계시다면 불쌍한 우리 친정 어머니 좀 데려가 주세요"라고 울며불며
하소연을 했지요. 그 당시는 친정어머니가 눈앞에 보이면 짜증스럽고
눈앞에 안 계시면 잘해드려야지 하며 맹세를 하며 반성도 무척 했지요.
나는 산속에서 큰딸한테 전화를 했지요.
엄마 며칠 있다갈게 하고 전화를 끊었지요.
그후 내 딸이 큰아버지에게 엄마가 외할머니 때문에 힘드신데다
큰집 할머니까지 편찮아서 와계시다며 큰아버지 해결 좀 해 달라는
편지를 띄웠다고 하네요. 곧바로 큰 아버지는 어머니를 모셔가셨지요.
그 후 친정 어머니는 또다시 쓰러져 할 수 없이 병원에 입원을 시켰지요.
병원 벽에 똥칠, 화장실 벽에 모두 똥 범벅칠을 해서 병원에서는 퇴원시켜
모셔가라고 통사정을 했습니다.
십 년이 넘는 세월이라 이제는 집 식구도 모두 마다하지요.
이럴 때는 정말 갈 곳이 없었지요.
또 목욕을 시켜 드리고 "어매~ 어매~" 엉엉 울며 "내가 먼저 죽을게.
어매~ 어매~ 왜 이렇게나 목숨도 길어"하고 울어댔지요.
어머니가 주는 고통을 참지 못해 이딸은 그만 용서 받을 수 없는
불효를 하고 말았지요.
더는 참다 못해 양로원으로 모셔다 드리고 나오려는데 발바닥이
지남철에 붙은 것처럼 떨어지지가 않았습니다.
다시 어머니를 끌어안고 통곡을 했지요.
통곡 소리에 모두들 놀라 같이 울었지요.
모셔다 드리고 혼자 산속으로 가 소나무를 붙잡고
"어매~ 어매~ 이 딸을 용서해.. 용서해..
엄마 이제부터는 딸 하나도 없다고 생각하고 살아봐.
어매~ 어매~ 이제부터 어매딸 안할래.
어매 버려놓고 어떻게 어매 딸이라고 할 수가 있겠는가." 하며 울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혼자 중얼중얼 거리면서
"나는 이제부터는 윤서방 눈치 보지 않고 살거야, 살거야,
누구한테나 큰소리치며 살거야" 통곡을 했지요.
옛말에 부모는 열 자식을 거느려도 자식은 한 부모를 못 모신다는 말이 있지요.
그 말이 저를 두고 하는 말인 것 같습니다.
어머니는 그만 양로원 가신 지 4개월만에 운명하셨습니다.
운명의 숨소리가 너무나 벅차 그때 어머니를 끌어안고
어머니~ 어머니~ 이딸 용서해 달라고 목을 매며
"어머니~ 어머니~ 용서해 주고가 용서해 주고가...
윤서방도 용서해줘 윤서방도 용서해줘....".
이런 통곡 소리에 어머니는 갑자기 눈을 번쩍 뜨시더니
큰 손자를 부르기 시작하셨습니다.
"상아~ 상아~ 상아~" 그러더니 그만 숨을 꿀꺽 하며 돌아가셨지요.
이렇게 끝이날것을 왜 내가 4개월을 못 참았을까 울어대며
어머니를 깨끗이 목욕시켜 드렸지요.
그리고 준비해 둔 분홍 옷을 갈아 입혔지요.
그 때는 시어머니도 오늘 내일 하는 때라서 시댁 식구들에게
연락을 할 수 도 없었지요.
우리 어머니는 원래 6남매셨는데 형제분들이 다 돌아가셔서
친정쪽에도 연락할 곳이 없었지요.
어머니 자식이라고는 저하나 뿐이니 아무데도 연락 없이
우리 다섯 식구가 초라한 장례식을 했습니다.
얼마나 눈물이 나던지요. 그리고 영락공원으로 모셨지요.
할머니가 돌아가신지 3년 후 상이라는 외손자가 장사 경험도 없이
식당을 시작해 무척 어려움을 겪고 있을 무렵.
어느 날 밤 저의 꿈에서 어머니가 양쪽 물지게에다 똥을 매고
식당으로 들어오시길래 냄새나는데 웬 똥이야 하고 물었지요.
어머니는 100평이 넘는 식당 홀을 가리키며 저 밭에다 거름을
해야 잘 큰다면서 똥을 뿌리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꿈을 깨고 이상해서 어머니 사진을 갖다가 식당 허가증에 붙였지요.
그후부터 손님이 줄을 이어 식당은 지금까지 성공하고 있답니다.
저는 어머니한테 말로 불효도 많이 저질렀는데
부모님은 돌아가신 영혼도 이 불효딸을 끝까지 도우시네요.
어머니~ 어머니~ 감사합니다.
어머니 사진을 태우던 일
우리가 늙어 가면서 사진 정리를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느 날부터 사진 찍는 걸 싫어하지요.
늙어가는 모습이 왜 거울을 봐도 쭈글~쭈글~ 보기가 좀 이상하지요.
여행을 가도 사진 찍는 걸 싫어하지요.
손자하고 사진찍으라고 하면 손으로 얼굴을 가리면서 싫다고 거절하지요.
어느 날 폰에다 내 모습을 한 번 찍어서 보았더니
내 모습에 혼자 기가 막혀 웃었지요.
이제 나이가 드니 모든 걸 하나~ 하나 정리할 때가 된 것 같아요.
우리 어머니가 살아 생전에 사진 찍는 걸 너무 너무 좋아하셨지요.
우리 어머니는 얼굴도 참 예쁘고 고우셨지요.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사진 정리를 해보니 액자와 앨범을 모두 담으니
라면 박스로 4개가 넘더라고요.
가지고 있자니 어머니 생각이 너무 많이 나고
그렇다고 어디다 버리지도 못하고 날마다 걱정만 하고 있다가
한날 밤에 대학교 쓰레기장 옆에 들고 가서 태우기 시작했지요.
사진을 태우면서 어머니를 불러가면서 얼마나 울었는지......
한 3박스쯤 태우고 있는데 어디에서 호루라기 소리가 마구 들리면서
큰 소리로 "불이야~, 불이야~" 하는 말이 들렸지요.
깜짝 놀라 뒤 돌아보니 경찰이 4명이 와서 이게 뭐하는 거냐고 물어봅니다.
"아, 예. 우리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 사진 정리를 하다보니
쓰레기장에도 못 버리고 또 손자들이 자기 사진도 안 봐 지는데
누가 이 사진을 정리 하겠나해서 이 딸이 살아서 정리한다는 게...
내가 잘못했습니다." 했더니 그래도 밤에 이렇게
태우면 사람들이 놀라지 않냐고 다그칩니다.
제가 기왕 시작한 것이니 다 태우게 해달라며 어머니를 부르며
울던 얼굴로 이야기를 했더니 그러면 동네에서 신고가 들어왔기
때문에 이 사진 다 태우고 나서 경찰서로 가야한다고 합니다.
저는 울어서 퉁퉁 부은 얼굴로 같이 태워 달라고 했지요.
경찰 아저씨하고 같이 사진을 태우고 경찰서에 갔어요.
경찰서에 가서 진술서를 쓰면서 또 그만 울기 시작했지요.
제가 하도 우니까 경찰 아저씨가 "야 우리도 사진을 잘 생각해야 겠다"
고 하대요.
사진을 찍을 때는 좋지만 그 후 정리가 큰 문제더라고요.
자식들 사진도 다 정리해서 각자 나누어 줬지요.
그 이후로 나는 내 사진을 정리 다 했지요.
자신의 사진은 정말 본인이 정리해야 할 것 같네요.
이제는 나이가 들수록 모두 하나하나 정리 정돈이 되어야겠다는 생각.
우리가 언젠가는 길고도 먼 길을 갈 준비가 되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사위도 아들도 못한 일을 딸이 해냈지요.
아버지는 딸 출가 시켜놓고 처음 딸네집에 다니러 오셨지요.
옛 우리네 세상에는 찬정 아버지가 딸네집에는 잘 안 오셨지요.
딸이 결혼한 지 3년 뒤에 딸이 어떻게 사는가 보신다고 오셨다가
그만 심장 마비로 돌아가셨습니다.
산에다 묘지를 해 모셨는데 처음에는 벌초도 하러 다니고
관리가 잘 되었지만 집에서도 멀고 시간이 점점 흐르니 그 후 아들도
없는 산소 관리며 벌초며 외동딸로서는 너무~너무 힘든 일이었지요.
나중에 어머니는 돌아가시고 영락공원에 모셔놓고 두 분을 따로 모신 것이
이 딸로서는 항상 숙제로 남아있었습니다. 이럴 때는 꼭 아들이 필요하지요.
아버지를 영락 공원에 어머니 곁으로 모셔야 하는데
묘 이장이라는 것은 남자들이 서둘러서 하는 것인데 사위는 생각도
못하고 있어서 이 딸은 걱정이지요.
내가 더 늙기 전에 힘 있고 정신이 있을 때 빨리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을 무렵. 어느 해 5월 윤달이 되었지요.
묘 이장은 산사람 이사하는 것보다 더 어렵고 힘들어요.
아무리 힘들어도 나는 혼자 해내야 한다고 결정을 하고 말았습니다.
아버지 형제분들이 모두 후손을 남기지 못하고 돌아가셨고
어머니 형제분들도 살아계신 분이 없으니 결국은 제가 해야 할 일이지요.
가족에게 타협도 없이 윤달 5월 30일로 날을 받고 모든 준비를
다 해놓았습니다.
그런데 아버지 어머니 생전에 입양을 해서 키우던 남동생이 있었습니다.
지극 정성으로 키워주셨는데 14살 때 가출을 해서 아무리 수소문을 해도
찾을 수가 없었지요.
그 아이와 소식이 끊어진지 벌써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
동사무소에서는 호적상 아들이 있는데 딸 혼자서 이장을 할 수 없다면서
아들의 도장을 받아오라고 합니다.
저는 앞이 캄캄했지요.
이 딸은 아버지 묘도 맘대로 이장할 수 없다는 사실에 너무 가슴이 아팠습니다.
다시 예전에 살던 사람들과 알음알음으로 수소문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겨우 인천에 있다는 것을 알고 찾은 그 아이는 우리 집을 나가서
그 동안 어떻게 살았는지 얼굴에 다 나타나 있었어요.
노숙자나 다름없는 차림에 얼굴은 험상궂게 변하고......
하지만 첫눈에 서로를 알아보았지요.
제가 자초지종을 설명했더니 첫마디가 돈을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참, 어이가 없었지만 윤달에 이 일을 끝내야 하니 섭섭한 마음을 뒤로 하고
알았다며 일단 도장을 찍어달라고 했습니다.
이장하기로 예약한 날은 다가오는데 연락이 없어서 제 속은 바짝바짝 타 들어갔습니다.
전화를 수십 통을 해서 겨우 부산으로 내려왔지요.
술에 만취해서 도장을 찍기 직전까지 돈을 요구하던 그 아이를 보며
이런아들도 자식이라고 그 도장을 꼭 받아내야하는지
너무나 속이 상했습니다. 그렇게 겨우 한 고비를 넘겼습니다.
이장을 하루 앞 둔 날. 아무래도 누군가한테 알려야겠다는 생각에
큰 딸한테 전화를 해서
"이봐라 엄마가 내일 새벽 5시에 할아버지 산소를 이장해
영락 공원에 할머니 곁으로 모신다"라고 했더니
딸 말이 "아버지하고 오빠가 알고 있습니까?" "아니! 아무도 모른다"
했더니 딸은 "엄마는 그런 큰 일을 왜 혼자 결정했어요?엄마,
가족이라는 것이 큰 일할 때는 서로 꼭 필요하잖아요." 라며 저를 탓했지요.
"이봐라 내 친정 일에는 말하기가 싫어.
아빠나 오빠가 묘 이장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니다고 너무도 반대하기
때문에 의논을 못하고 혼자 결정했다"고 했지요.
큰딸이 "엄마 지금이라도 아빠, 오빠를 불러놓고 이야기하세요" 합니다.
"그래 알았다" 전화를 끊고 생각 끝에 두 사람을 불러놓고 설명을 했지요.
역시나 두 사람은 똑같이 결사 반대였습니다.
또 혼자 얼마나 울면서 이리 저리 찾아다녀 결정한 일인데
이제는 취소도 못한다며 내일 아침 5시에 차가 집 앞으로
오기로 했으니 산소에 갈 사람은 5시까지 나오라고 했지요.
사위는 바빠서 못오고 아들만 보내 5시에 나왔지요.
산소에 도착해서보니 벌써 그쪽에서 다 준비해 놓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시작해서보니 아들하고 둘이 정말 정말 너무나 마음이 착찹해 속으로
아들 앞에 내색은 안했지만 혼자 외롭고 기가 막힌 일이지요.
"아저씨 잠깐만요" 해놓고 아들보고 "우리 기도하자" 하고
나는 이때 "아버지~ 아버지 이딸이 얼마나 산소 때문에 걱정한지 알지요?"
하며 그 통곡 소리가 외롭게 외롭게 ~ 산이 울리도록
땅이 꺼져라고 울며 "아버지 이제는 어머니 곁으로 이사갑시다.
그 동안 산소 관리 잘 못해 죄송합니다." 하며 빌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한테 부탁을 하나 했습니다.
아버지 산소 이장해 놓고 어려운 일이 없도록 도와 달라고
그리고 엄마한테 용서해 달라고 꼭 이야기해 달라고 애원의 기도를 했지요.
가게를 시작하고 얼마 안됐을 때라
"아버지 이 딸이 얼마나 어렵게 시작한 일인지 잘 알고 계시지요."
하면서 간절히 빌었습니다.
"아저씨, 시작하세요." 아저씨가"이제 시작 됐습니다."
하며 땅을 파기 시작했습니다.
관이 보이기 시작했고 아버지의 유골이 보였습니다.
그 때부터 이 딸은 그만 미친듯이 통곡이 시작되어 겉잡을 수가 없었지요.
외동딸은 이럴 때 사촌이라도 옆에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지요.
아저씨들이 유골을 손대려고 하자 "아저씨, 잠시만요."
아들보고 또 "기도 하자" 해 놓고 나는 그만
"아버지~ 아버지~ 어머니한테 가시면 전해주세요.
어머니한테 불효한 것 용서해 달라고 전해주세요"
하고 부탁하고 "아버지 이제부터 전생에 못다한 두 분 사랑 이루세요."
아저씨가 유골을 거두기 시작할 무렵
내 아들이 "아저씨 제가 우리 할아버지 모시겠습니다" 하네요.
아저씨는 흰 장갑을 주면서 할아버지를 조심스럽게 하라면서 설명을 했지요.
그때부터 외손자는 외할아버지 유골을 만지기 시작했습니다.
머리부터 시작해서 그 다음 목, 몸, 팔, 다리, 이렇게 조심스럽게 다 했지요.
아들이 얼마나 대견한지 정말 흐뭇하데요.
이럴 때 아들두어 큰 덕을 봤지요.
영락 공원에 화장을 해 어머니도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야했지요.
아버지하고 두 분이 나란히 모셔야 했지요.
우리가 아파트 분양 받듯이 영락 공원도 차례에 순서대로 분양 받아
5층으로 두 분을 나란히 모셨지요.
이장을 해 주신 아저씨들 이야기가 가슴 아픈 이장이지만
할아버지가 외손자 잘 두셨다면서 칭찬을 하시기에
나는 '아! 사위보다 외손자의 피가 훨씬 더 강하구나'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이제는 이 딸은 죽어도 한이 없습니다.
영락 공원에 모셔 놓고 내가 한 일이지만 얼마나 흐뭇한지 혼자 중얼중얼
거리며 "정말 너는 대단해" 하고 칭찬했지요.
세월이 지나고 나니 사위고 아들이고 딸이고
우리 어머니 그때 정말 잘했다 칭찬하시네요.
부모님이 생각나면 아무 때도 부담없이 다닐 수 있네요.
이 큰 일을 사위도 아들도 못하는 일을 이 딸은 해내고 말았습니다.
"장하다~ 장하다~"저 혼자 스스로에게 칭찬 정말 많이 했습니다.
어버이 날이면 카네이션 두 송이를 들고 찾아가
영락 공원에 꽂아놓고 돌아올 때 이 딸 마음이 어찌 그렇게 흐뭇한지요.
해마다 어버이날이면 나의 발걸음은 날아갈 것만 같습니다.
어머니에게
어머니, 그립고 보고 싶습니다.
어머니, 하늘나라에서 잘 계실 줄 믿습니다.
어머니, 항상 하나밖에 없는 딸 건강 때문에 염려하셨잖아요.
어머니가 돌봐 주시는 덕분에 잘 있습니다.
어머니 항상 하시던 말씀 중에
"이 세상에 너와 나 단 둘밖에 없다." 하시며
따뜻하게 살자던 당신을 떠올릴 때면
지난 날 그렇게 해 드리지 못한 점 후회스럽습니다.
어머니가 저에게는 어느 날부터 큰 짐으로 느껴졌습니다.
1996년 11월 5일부터 1997년 3월 28일까지
너무나 불효한 것 같습니다.
어머니 '왜' 5개월을 못 참았던가 그것이 한없이 후회스럽습니다.
어머니 저의 불효를 용서하세요.
섭섭한 마음 가슴에 묻어 두지 말고 모두 용서하세요.
하늘 나라에서 어머니 편히 계십시오.
1998년 3월 28일 어머니께 사랑하는 딸 올림
할머니께
사랑하는 할머니, 그립고 보고 싶습니다.
하나님 품 안에서 편안히 잘 계실 줄 믿습니다.
늘 염려하시던 엄마 건강은 헐머니께서 지켜주시는
덕분에 많이 좋아지셨습니다.
저는 왜 이렇게 할머니 생각만 하면 눈물부터 나오는지 모르겠어요.
모든 게 이렇게 눈에 선하고, 아른거리는데,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니......
마음이 너무 아픕니다.
할머니께서 주시던 박하사탕도, 경로당 다니실 때 들고 다니시던
도시락 가방도, 교회당 안의 할머니 자리도 모두 다 그립습니다.
예전엔 우리 할머니는 다른 할머니처럼 자상하지도,
너그럽지도 않다면서 불만을 갖고 있었을 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잘 해드려야겠다고 마음을 고쳐 먹고있었는데
때는 너무 늦어버렸습니다.
제가 잘하려고 했을 때 이미 할머니는 너무도 멀리로 떠나 버리셨습니다.
이렇게 후회하고 마음이 아프게 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었는데
지금도, 앞으로도 이렇게 후회만 하고 있어야 한다는 게 안타깝고
죄송스럽기만 할 뿐입니다.
할머니, 살아계실 때는 아무리 화내고 계셨어도
제가 "할머니 식사하세요." 라고 얘기하면 눈녹듯이 금방 풀리셨잖아요.
할머니, 지금도 그때처럼 편안히 마음풀고 웃으면서 계실 줄 믿습니다.
내리 사랑이라고 이렇게 할머니가 저희를 위하는 마음이 큰지를
이제야 깨닫습니다.
할머니, 저희 불효를 용서해주시고, 주님 품안에서 항상 편안하세요.
손녀 딸 인경올림.
작은 아버지 정말정말 보고 싶습니다.
언제나 당신의 딸처럼 잘 해주셨잖아요.
작은 아버지는 제가 조카인데도 당신의 딸처럼 나만 보면
인자스런 얼굴에 밝은 미소를 지었지요.
조카 딸인 나를 왜 그렇게나 좋아하셨는지......
이 글을 쓰자 하니, 작은 아버지 생각에 눈물이 납니다.
흘러가는 세월 속에서 나를 만들어 주신 아버지보다
더 작은 아버지와 정이 들어 이렇게도 보고 싶습니다.
자랄 때 한 번 씩 작은 아버지를 뵈러 갔다 올 때면
손에 차비를 꼭 쥐어 주시며 "잘 가라" 따뜻한 말로 인사해주시던
그 목소리가 아직도 생각이 납니다.
연세가 들어 몸이 편찮다는 소식을 듣고 매일 전화로만 안부를 묻다가
이러다가 돌아가시면 얼마나 후회스럽겠는가 하는 생각에
식구들도 몰래 청주 열차를 타고 작은 아버지를 만나러 갔습니다.
"작은 아버지~"하고 부르니 눈을 크게 뜨시며 반가워하십니다.
편찮으신 중에도 그 인자한 얼굴의 미소는 그대로네요.
작은 아버지를 안고 한참을 울었습니다.
그러다가 돌아가실 때 깨끗이 입고 가시라고 준비해 간
내복, 속옷, 양말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은행에서 찾아간 백만 원을 드리니 왜 그렇게도
좋아하시는지 그 돈을 손에 꼭 쥐어 드렸더니
만지작~ 만지작 하시며 속옷 안에다 넣으시는 모습이
참 애기 같아서 같이 웃었습니다.
또 천원 짜리와 만원 짜리를 신권으로 10만원 준비해서
저승 가는 노자로 쓰시라고 이불 밑에 넣어 드렸습니다.
또 호박죽도 가져 갔는데 그 호박죽은 드시지도 못하시길래
작은 아버지하고 이불 속에 누워서 손도 만져보고
발도 만져보고 머리도 손질 해 드리며 두 시간 정도 머물다가
식구들 몰래 또 부산으로 왔지요.
다녀 온 지 3일 만에 돌아가셨다는 연락 받고 아들 내외를 보냈지요.
그 때 다녀오길 정말 잘 했지요.
작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는 예전만큼 작은 어머니를
자주 뵙지는 않지만 지금도 설 명절이며 수시로 생각나면 전화를 드립니다.
작은 아버지 아들은 누나 고맙다고 전화도 오네요.
이제는 남은 이들에게서 작은 아버지와의 추억을 떠올릴 수밖에 없으니까요.
이런 시댁 있을까요?
오늘은 제가 우리 시숙님, 형님 자랑을 좀 해야겠습니다.
45년이 넘는 결혼 생활을 뒤돌아 생각해 보면 남자나 여자나
첫 발걸음을 잘 걸어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내 남편은 전라북도 순창 남원 윤씨 집안에 2남 2녀 중 막내지요.
내 남편을 잘 만났다는 것보다 남원 윤씨 가문에 시집을 잘 갔다는
것이 제 자랑입니다.
시집가서 보니 저보다 10살이 많은 시숙님과, 시숙님과 동갑인
형님 내외분이 너무 사람이 좋아 보여서 안심이 되었습니다.
제가 외동딸로 커서 아무 것도 모르고 시집을 갔지요.
밥을 하는 법도 모르고 시집을 갔는데 밥을 안치라고 하시니
친정 엄마가 하시는 것을 어깨너머로 본 것은 있어서
쌀을 일렁일렁 일어서 솥에 탁! 쏟아 부었습니다.
옛날 쌀은 얼마나 돌이 많았는지 다들 아시지요?
시아버지가 밥을 드실 때마다 돌이 하도 많이 나오니 형님보고
"얘야 작은 애 밥하는 거 한 번 봐라" 하셨습니다.
형님이 제가 밥하는 것을 보고 기가 막히셨겠지요.
실컷 돌을 일어서 왜 솥에 다 털어 넣냐고 하시면서 자세히 가르쳐 주셨지요.
그 때부터 돌 없는 밥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밥도 할 줄 모르던 새댁이 이렇게 식당을 하고 있으니
참 세상 일은 모르는 것이지요.
사람 좋은 시댁식구들 덕분에 시집와서 시부모님,또 시숙님,
형님 모든 분들에게 언짢은 시집살이 한 번 안 해보고 살아 왔지요.
우리 시숙님 형님 너무도 마음씨가 고우십니다.
이제까지 결혼 생활에 된장, 간장,고추장, 깨소금, 참기름, 콩,
쌀까지도 부쳐주시곤하니까요.
뭐든지 남들에게 베풀고 나눠주기를 좋아하시는 형님의
마음은 배울 점이 참 많지요.
한 번은 제가 사는 부산에 놀러오신 형님이 부산사람들이
콩잎을 먹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셨습니다.
전라도에서는 콩잎을 반찬으로 안 먹으니까 이상하셨겠지요.
그것도 노랗게 떨어진 콩잎을 양념을 발라 먹는 것을 보고
부산 사람들은 콩잎도 먹는구나... 하시며 집으로 가셨습니다.
하루는 화물로 큰~ 가마니 3개가 왔다고 해서 찾으러 갔지요.
찾아와서 보니 3가마니 모두 콩잎으로 가득 합니다.
부산 사람들 콩잎 좋아하던데 이웃 사람들하고 나눠 먹으라고
하시면서 밭에 떨어진 콩잎을 모두 쓸어 담아서 부쳤다고 하시네요.
이런 형님이니 제가 다른 것을 말 안 해도 아시겠지요.
서로가 상부상조지만 언젠가 부모님 두 분이 다 가신 다음부터는
형님을 부모님으로 생각하고 모시고 있답니다.
그리고 이 형제는 연세가 들수록 더 잘 지내고 있답니다.
여름만 되면 개소주를 두 마리씩 해 보내고 가을 농사가 끝나시면
쌀을 트럭으로 하나 싣고 오시지요. 제가 식당을 하니 말이지요.
지금도 식당에 일 년 고춧가루 3000근을 순창에서 손질해서 부쳐 주시지요.
시골 김장이 맛있다고 김장 때는 김장을 200포기 정도 해서
우리 아이들과 식당 종업원들하고 같이 먹으라고 부쳐주시고....
옛날에는 구백화물로 부쳐 주셨지요.
요새는 택배가 있어 좀 편하답니다.
이런 인정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애들은 큰어머니 고맙습니다. 우리 큰어머니 같은 분이 없다고 자랑하지요.
우리 형님도 자녀 5녀 1남매를 두셨고 연세도 있으니 이제는
그만 하라고 하지요.
그만 하신다 이제 마지막이다 하시면서 가을만 끝나면
쌀부터 시작해서 발발이 택배가 오기 시작하지요.
어제도 햅쌀 70가마에 찹쌀 4가마를 싣고 시골에서 오셨습니다.
찹쌀은 우리 애들과 나눠 먹으라고 하시네요.
쌀 70가마를 식당 안에 부려 놓으니 세상 어떤 부자도
부럽지 않을만큼 기분이 좋네요.
이 쌀도 내년 1월이면 다 떨어져 시중에서 사 먹어야 하지만
형님 내외분이 가져다 주신 쌀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우리 형님이 걱정이 없는 분인데 한 가지 걱정이 있습니다.
딸 다섯은 다 결혼해서 잘 살고 있지만 아들 하나가 결혼을
못하고 있어서 걱정입니다.
항상 제 친정 부모님 같이 잘해주시는 우리 형님.
우리 60대 방님들 이렇게 좋은 시댁 있습니까?
시부모님 생각이 나서 써 보는 글
어머님, 지난 날을 생각하면서 죄송하다는 말 먼저 드립니다.
어머님이 이 며느리를 선택한 이유는 아마도 신앙 생활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어머님은 선보는 첫 날 저의 친정 어머니가 마음에 드셔서 바로 약혼식을 하고
그 자리에서 약혼 사진을 찍으라고 하셨지요.
그리고 결혼식 날을 받아 시작된 결혼 생활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시간이 흘러 어머님의 손자들 혼사까지 끝나고 이제는 저도 손자들까지
다 봤습니다.
어머님은 며느리 둘 다 잘 보신 것 같습니다.
큰며느리는 심성이 곱고 착해서 농촌에서 일 잘 하시니 좋고,
또 작은 며느리는 도시 살림에 똑 소리 나니 어머님은 인생에 성공 하신 것 같네요.
생전에 아버님 성격이 급하셨기에 어머님의 일생도 얼마나 힘든 세월이었겠나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아버님이 서당을 하셔서 참 똑똑하시고 글도 잘하셨는데
단 한 가지, 성격이 급하셨지요.
하루는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시집가서 얼마 안 되었을 때, 장작을 아끼는 줄 모르고
불 때는 것이 재미가 있어서 나무를 자꾸 넣어서 불을 활활 피우고 있었지요.
그때 시아버지가 오시더니 소죽 끓이는 솥을 제가 있는 쪽으로 차시면서
나무가 얼마나 귀한 건데 이렇게 많이 넣었냐고 호통을 치셨지요.
새댁이던 저는 얼마나 겁이 나던지 아버님께 잘못했다고 빌면서
눈물 콧물 범벅이 되었지요.
그때 형님이 저를 위로해 주시며 아버님이 성격이 급해서
종종 있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그런 아버님과 사셨으니 어머니도 고생이 많으셨겠지요.
나이 60이 넘어서 이제야 생각해보니 어머니 아들이 아버지를
쏙 빼 닮은 것 같습니다.
애들 아버지도 성격이 급해서 한 번씩 저를 놀래키는데
그것이 어찌도 그리 닮았는지요.
어머님의 힘든 세월을 이해하지만 이제 와서 실토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제가 어머니께 불만이 꼭 하나 있었습니다.
왜 그렇게 큰며느리 흉을 보셨어요? 저희집에 오시면 일주일이면
일주일, 한 달이면 한 달, 집에 도착하는 순간부터 가시는 그 순간까지
큰며느리 흉을 보셨지요. 그때 저는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우리집에 계시면서 내 흉을 얼마나 가지고 내려가실까?
시골에 가시면 또 내 흉을 얼마나 보실까? 그
생각을 하니 어머님이 조금 밉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어머님, 고마운 일도 많습니다.
그 중에 제일 고마운 일이 있습니다.
신앙의 힘으로 그 많은 제사를 거두셨으니 정말 대단하신 겁니다.
또 어머님은 자식들이라면 끔찍이 잘 해 주셨고,
또 어느 손자 할 것 없이 정말 잘해주셨는데
그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정말 최선을 다해 희생하셨지요.
나이가 드니 아버님 어머님 생각이 날 때는 지난 날에 좀 더 잘하지
못한 것이 죄송해서 마음이 아픕니다.
마지막에 어머님 편찮으셨을 때 친정어머니와 아픈 시기가 같아서
옆에서 지켜드리지 못하고 불효한 것이 참 마음에 걸립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아버님 어머님 하늘나라에서 잘 계실 줄 믿습니다.
제 2 부
60대에 돌아본 나
내 제일 고생했던 시절
내가 태어나서 제일 고생했던 시절이 언제였을까 생각해봅니다.
남편과는 우리 교회 목사님이 중매를 해서 만나게 되었지요.
총각은 손위누나하고 서울에서 둘이 살고 있다가 결혼을 했는데
이 시누이가 홀시어머니는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시집살이를 시켰답니다.
결혼 초에 알콩달콩 신혼 생활이 없었으니 말도 못할 정도였지요.
우리 시댁 형제들 간의 우애는 참으로 대단합니다.
저는 형제 없이 혼자 자라서 그런 시댁의 모습이 참 좋아 보였지요.
거기다가 남편과 손위시누와의 사이는 더 간절하달까 그런게 있었습니다.
얘기를 들어보니 그럴 만한 이유가 있더라구요.
누나랑 둘이서 서울에서 살 때 홍수가 나서 누나가 둥둥 떠내려 갔답니다.
그걸 본 남편이 물에 뛰어 들어가 누나를 끌고 강가까지 와서 배 위에
얹어 놓았답니다.
두 사람 다 목숨을 잃을 뻔한 위험한 상황이었지요.
그런데 겨우 목숨은 구했지만 시누는 그 충격으로 젊은 나이에
와사풍도 오고 몸을 잘 못 썼다고 해요.
그 누나를 6개월을 업고 다니며 치료를 해서 다시 정상으로
돌려놓았다고 합니다.
그러니 그 누나에게 얼마나 소중하고 고마운 동생이겠습니까?
그런 동생이 결혼을 하고 누나에게 관심이 줄어드는 것 같으니
저를 그렇게나 미워했나 봅니다.
결혼하고 처음 3개월 동안은 시댁에서 어른들과 살았지요.
어른들과 살아봐야 그집안의 법도를 배운다고 해서...
그 때 참 많이 배웠습니다. 그 때 신랑은 군대에 있었지요.
3개월이 지나고 처음 서울에서 살 때 시누랑 같은 집에서 살게 되었지요.
이 시누이는 홀시어머니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시집살이가 심했습니다.
그런데 저녁만 되면 신랑이 어디로 가서 시누랑 저랑 둘이 집에서 잤지요.
나중에 물어보니 신랑은 공장 숙소에서 잤다고 해요.
그렇게 몇 주일을 지내더니 이젠 저보고 공장 숙소에서 자라고 하네요.
그 추운 겨울에 다다미방에서 혼자 자는데 어찌나 춥던지요.
새색시를 공장 숙소에 넣고 동생하고 둘이 아파트에서 남매가 정겹게 살아갔지요.
이 세월이 1년이 넘도록 지냈습니다.
요즘 애들 같으면 한 달도 못가서 도장 찍는다고 했겠지요.
이 시누이는 신앙 생활로 아직까지 혼자 지내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시집 살이는 신앙 하고는 상관도 없데요.
시누이의 그토록 심한 질투는 누구도 없앨 수가 없다는 것을 느꼈었습니다.
어느 날 60이 넘어서 저에게 조용히 앉아 사과를 하더군요.
지난 날은 다 잊어 버리라고.
고모님이 사과하기 전에 진작 나는 다 잊어 버렸다고 했더니
고맙다고 고개를 끄덕이십니다.
왜 불쌍하잖아요.
재산이 있나, 남편이 있나, 자식이 있나...
있는 것이라고는 자기 몸 하나 뿐인 분인데...
왜 나이가 드니 어느 누구도 미워하는 사람이 없어지대요.
이거 참 이상한 일이지요.
지금은 일주일에 두세 번씩 식당에 오셔서 나물도 다듬고,
놀다가 가시지요. 어디서 맛있는 것 보면 자네 먼저 먹으라고 챙기지요.
어느날부터 내 며느리와 딸들을 앉혀놓고 멀리 있는 남들이야
생각 말고 내 주변에 계신 고모님 먼저 챙기라고
교육을 시켰더니 애들이 명절 때면 꼭 성의로 봉투를 드립니다.
우리 막내딸은 고모님 옷가지도 잘 사드리지요.
저도 틈틈이 용돈이며 의복이며 챙겨드리고
또 어느 날부터 나라에서 극빈자 보상금을 받아서 생활하고 계시지요.
젊어서는 기세가 당당했던 손윗 시누이님.
앞으로는 제가 끝까지 책임져야 할 시누이님.
혼자 외롭다고 밤이면 울지도 말고 몸이 아프다고 괴로워하지도 말고
사는 날까지 건강하게 살다가 자는 잠에 가소서...
귀머거리 20년 세월
어느 날 밤에 갑자기 귀에서 천둥 소리가 쳤습니다.
그리고 집이 뱅~뱅~돌며 어지러웠어요.
그냥 청심환 하나 먹고 잤지요.
그 다음 날 병원에 갔더니 큰 병원으로 가라고 합니다.
큰 병원에서 양쪽 귀를 3번이나 수술을 했지요.
처음 수술이 잘못되어 바로 3일 후에 재수술을 받았답니다.
이때부터 운명적으로 찾아온 아픔들이 시작되네요.
외동 딸로 타고난 체질이 약해 모두 받아 들여야 했지요.
수술 후 세상이 캄캄해 울고만 살아오다가 용기를 내 여기 저기
용하다는 병원을 물었고 치료도 열심히 받았습니다.
그 때 마음을 다잡으려 서예를 시작해서 지금 내 글을 보는
이는 다 부러워할 정도지요.
같이 서예글 쓰는 친구가 서울에 잘 한다는 병원을 데리고 가서
네 번째 귀수술을 했습니다.
수술을 하고 난 뒤 갑자기 얼굴에 와사풍이 왔어요.
기가 막힌 일이지요.
우선 겉으로 드러나는게 얼굴이라 사람보기가 두려워
혼자 한의원으로, 병원으로, 맛사지, 목욕... 미친 듯이 치료 했지요.
그런 세월 끝에 지금은 정상이랍니다.
디스크. 무릎.........이런 저런 수술이 10번이 넘네요.
옛말에 긴병에 효자 없다는 말이 있지요.
그래서 자식들에게도 아프다는 말을 안 합니다.
수술 할때마다 어머니 여행간다하고 몰래 병원 찾아가 수술을 했지요.
여러 번 수술 할 때 마다 수술하고 난 뒤의 아픔에 대한 고통보다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더 크지요.
이럴 때는 수건으로 이를 악물고 소리없이 흘리는 눈물이 베개를
다 적시고 말지요.
간호사들이 "왜 그렇게 우느냐"고 물으면 또 누가 울으라고 한 것도 아닌데
그만 큰 눈에서 눈물을 줄줄 흘리며 콧물에 눈물에 범벅이 되고 말지요.
이 글을 쓰자 하니 또 옛생각에 눈물 콧물이 나서 휴지가 범벅이 되네요.
용기도 대단했지요. 서울로 허리수술을 보호자도 없이 하고 왔지요.
힘든 식당일에 디스크는 재발하고 할수 없이 꼬부랑 할머니가 되고 마네요.
어떤 친구는 나를 보고 "오뚜기"라고 합니다.
귀머거리는 텔레비전 말소리를 못알아 들어서 궁금하기 짝이 없습니다.
가족한테 물었을 때 대답이 없으면 그 자존심 상하는 것은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모르지요.
아무도 아무도 아무도.......
서예가 준 행복
어느 누구보다 취미 생활을 많이 한 것 같다.
피아노, 무용, 노래, 미용, 장구 등등 본 내 천성은 사람 좋아하고
웃고 이야기 하는 걸 좋아했지만 귀가 안 들리니 사람 만나는 것을
좀 꺼려하게 되었다.
친구들을 만나면 신경써서 귀를 기울여야 되고 이런 신경을 쓰기가 싫다.
아는 사람을 만나 이야기하다 말을 잘못 알아들어 사오정 같은 대답을 하면
옆 사람들이 나를 쳐다보고 웃어댄다. 그때 내 자존심이 무너지고 만다.
건강할 때는 내 성격이 활동적이었는데 지금은 절대 아니다.
혼자 조용히 여행도 좋아하고 영화 보는 것도 좋고
취미 생활도 모두가 혼자가 더 좋아진다.
귀 때문에 서예를 시작한 것이 25년 전.
귀가 안들려 우울증이 왔고 뭐라도 해야겠다 싶어 시작한 서예.
처음 서예를 배울 때 세상이 적막해서 먹을 갈면서 화선지가
다 젖도록 그렇게 울었다.
그때 울며 울며 배운 서예가 친구가 되었다.
그렇게 열심히 한 결과 지금의 이런 글이 나오게 되었다.
내 아이들한테 가훈과 병풍 등 글을 써 액자를 해 나눠주고
꼭 죽을 날을 받아 놓은 사람같이 아들에게도 어머니가 당부하는
글을 써서 주고 손자들에게까지 글을 남겼다.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이런 글을 남길 때 괜히 허전하다.
나이가 나를 외롭게 만든 것 같다.
자매같은 친구
왜 젊어서는 그렇게 친구가 좋았는지....
아들 초등학고 1학년 때 학부형으로 만난 친구들이 있습니다.
여러 학부형을 만났지만 이렇게 맘에 맞는 친구가 잘 없더라구요.
세 친구는 다 외동딸이지요.
우리는 어느 날부터 하루라도 안보면 안 될 정도가 되었지요.
어느 날부터 세 명이서 계를 시작했답니다.
우리는 세 사람이 모두 만나서 눈이 6개가 되면 돈 1000원씩을 걷기로 했지요.
그 때부터 시장에서 우연하게 만나면 1000원씩을 걷으니
한 번에 3000원씩이 되지요.
모두들 같은 동네에 살고 있으니까 비슷한 시간에 저녁 장을 보러
시장을 가면 세 사람 중 두 명은 만나기가 쉽지요.
그러면 한 친구 집 앞에 가서 친구를 부르든지 아니면 그 친구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는 거지요. 그럼 또 눈이 6개가 되지요.
이런 계가 얼마나 재미있었는지 하루에 세 번씩 세 명이
모두 모일 때도 있었답니다. 이런 재미로 젊음을 살아갔지요.
어느 날은 우리 카바레에 한 번 가보자 했지요.
그 중 한 친구의 신랑이 친구가 외출을 하고 돌아오면
항상 그 날 어디 갔었는지 뭘 했는지 꼭 물어보는 사람이 있었어요.
그 때만 해도 여자들이 맘 놓고 저녁에 외출을 하기는 어려웠던 시기라
뭐라고 둘러댈까 생각을 하다가 친구 어머니가 아파서 병문안을
가는 걸로 말을 맞추고 모두들 집에서 나왔습니다.
오랜만에 나와보는 바깥의 밤세상이 얼마나 좋던지요.
우리 친구들 셋은 모두 밖에 나가면 멋쟁이 소리를 들을 정도라서 집에서
입던 옷으로 갈 수는 없다고 시내에 가서 새 옷을 한 벌씩 사 입고
설레는 마음으로 카바레를 갔지요.
들어가는 입구부터 아이고 어찌나 캄캄~한지 앞이 하나도 안보이더라고요.
우리가 입구에서 어리둥절 해 있으니 누군가가 후레쉬로 불을 비춰서
좌석에 앉혀 주었답니다.
춤도 출 줄을 모르고 시끄러운 음악소리에 정신이 하나도 없는 중에
귀동냥으로 들어본 말이 있어서 친구들을 따라 나가서 춤을 추었지요.
친구들이랑 서로서로 춤을 보면서 얼마나 깔깔 거리고 웃었던지
우리는 입이 다 아플 정도였습니다.
그렇게 춤을 추고 들어오다가 내가 올라가는 계단을 못보고
넘어져서 큰 대자로 뻗었습니다.
그래도 아픈지도 모르고 세 명은 이런 세상도 있구나 싶어서 많이도 웃었지요.
웃다가 웃다가 이제 집에 가야겠다 생각을 하고 일어섰습니다.
집으로 가려고 육교를 건너고 있는데 갑자기 한 친구가 보이지 않았지요.
아니 이 친구가 어디로 갔나 걱정이 되어 주위를 두리번거렸더니
까만 봉지를 하나 들고 뛰어 옵니다.
어디 갔다 오냐고 묻는 우리에게 다짜고짜 뭘 뿌려대는데 우리는 깜짝 놀랐지요.
도대체 그게 뭐냐고 물으니 약국에서 크레졸을 사 왔다며
계속 우리에게 뿌려댑니다. 병원에 갔다 오는데 소독약 냄새가 나야하지
않겠냐면서 자기 머리에도 옷에도 우리 옷에도 마구 뿌려서 그 한 통을 다 써버렸지요.
그 크레졸을 맞으면서도 우리는 얼마나 우스운지 육교에서 배를 잡고 쓰러졌지요.
세 친구가 모두 소독약 냄새를 풍기면서 육교에 엎어져서 웃던 모습을 생각하면
지금도 웃음이 납니다. 그땐 왜 그렇게 모든 게 재밌고 우습던지....
지금은 그때의 친구들에 좋은 친구 두 명이 더해져서 다섯 명이 멋진 우정 이어나가고
있습니다. 언제나 우리 다섯 명을 생각하면 미소부터 주어지지요.
지금은 영민이,태현이를 포함해서 다섯이된 계입니다.
저는 네친구들에게 이 말을 꼭 하고 싶습니다.
'선정아,새리야,영민아,태현아, 나의 자매같은 친구들아,
남은 인생 가는 길에 어렵고 힘든 일이 있더라도 우리의
이 우정을 먼 훗날 끝까지 가지고 가자. 우리는 죽어서도 다시 또 만나야 한다'
즐거운 인생 속에서 살고 싶었지요.
언제부턴가 삐죽빼죽 잘 울지요.
누가 울으라고 했나요. 혼자 많이 울고 다녀요.
내가 하는 일이 너무나 가여워서 울지요.
어느 날부터 자식들한테 섭섭해서 울고 또 혼자 병들어 내 몸을 이겨내지 못해서 울고
저녁이면 허리, 다리, 어지럽고 아파서 울고 왕년에 멋쟁이라고 소문난 내가
늙어가는 모습이 안타까워 울고..........
늙으면서 울보가 되고 말았지요.
그러나 남편 앞에는 절대 아파서 우는소리는 안하지요.
또 자식들 앞에서는 더욱더 어머니 아파서 병원 간다 소리 못 하지요.
친구 앞에는 언제나 단정한 모습의 웃는 얼굴로 만나지요. 언제든지 혼자만 괴롭고 쓸쓸하지요.
그렇다고 술이라도 마실 줄 아나, 화투를 칠줄아나 앞으로는 자이브 춤이라도 해볼까합니다.
어제밤 또 어지럽고, 허리, 다리가 아파서 밤새 날새기를 기다렸지요.
날만 새면 병원 가야지 병원을 갔더니 환자가 너무 많아서 접수를 해놓고 허리가 아파서 차에서
운전자석을 뒤로 젖혀놓고 눈을 감고 누워 있었지요.
예감이 이상해서 눈을 떠보니'깜짝이야! 저게뭐야?'
눈앞에 11시25분31초라고 적힌 파란색 딱지 한 장이!!
내가 발견시간 11시30분21초. 혼자 두리번대고 단속반을 찾아 보았지요.
흔적도 없네요. 너무나 황당해서 혼자 차안에 들어가서 생각해봤지요.
문득 생각이 난 큰딸한테 전화를 했지요.
"이봐라 엄마가 병원에 왔다가 이런 딱지를 끊었는데 어떻게 하며 되노?"
했더니 "엄마, 이미 끊긴이상 속상해도 돈내는 수 밖에 없어요."
"그래,알았다."하고는 전화를 끊고 병원 치료받고 돌아오는길에 부산은행에 벌금을 내버렸지요.
그 딱지를 보면 나 스스로가 비참해지기 때문이지요.
밤새 신경이 살아나 잠이 안와 생각해보니 이상하게 딸이 섭섭하네요.
엄마가 아파서 병원에 왔다고했고 또 차에 그놈에 딱지 때문에 열받았다고 했는데
밤에라도 "엄마 어떻게 되었어요?" 하고 전화 한통이라도 해주지...
혼자 밤새 이런 저런 생각에 구시렁거리며 또 울었지요.
에라,모르겠다. 그래, 영락공원 우리 어머니 한테나 가자.
어머니 보고싶어 왔어요. 우리어머니가 살아 생전에 하신말씀
"나는 널 하나 낳아서 키웠지만 너는 앞으로 셋이나 되니 살아봐라"
하시길래 그때 나는 이렇게 말대답 했지요.
엄마 우리 자식들은 절대 안 그렇다고 큰소리쳤지요.
지금 현재는 누구에게 앞앞이 자식들에게 섭섭한 마음 말 못하고 혼자 중얼거리지요.
"자식들아 부모가 죽고 나면 그때 통곡 하고 후회 하드라. 있을 때 잘해라 "
우리 어머니가 가신 길이 너무나 멀어서 어머니 먼 훗 날에 다시 만나 무릎꿇고 용서를 빌겠습니다.
울지 말고 앞으로는 건강하고 강하게 웃고 살고 싶어요......
아들이 맺어준 친구, 선정
아들들이 맺어준 친구가 된 지 벌써 30년이 넘었구나.
이렇게 소중한 인연을 만들어 준 것을 사랑하는 아들에게 고맙다고 전하고 싶다.
우리는 피를 나눈 혈육은 아니지만 다른 그 어떤 형제보다 더 변함없는 30년 세월을 보냈다고 생각한단다.
우리의 웃음 속에 보낸 세월들. 얼마나 좋은 추억도 많았니?
돌이켜보면 나쁜 일보다는 좋은 일이 더 많았던 것 같다.
그 좋은 세월. 하루도 안 보면 안 될 정도로 매일 보고, 볼 때마다 터지던
그 많은 웃음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많은 학부형과 친구들을 보았지만 이렇게 맺어진 인연이 잘 없지?
우리가 웃고 지낼 때는 그저 친한 친구로만 생각했고 있던 어느 날
선정아!
너의 포항 친정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새리하고 문상 갔을 때,
너는 그만 내 손을 꼭 잡고, "엄마, 인상이 왔다 "하면서 통곡을 했지.
나는 그때 내가 느껴보지 못 했던 '혈육의 정이 이런 것이구나!'하고 생각했단다.
내 마음이 먹먹해지면서 내 몸에서 널 진짜 내 형제로 느끼는 정이 묻어나더라.
우리가 노 부모님을 모시다 보니 마음 아픈 일이 종종 있었지.
또 언젠가 공주에 어머님이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았다.
친구 다섯 명이 함께 문상을 갔는데 너는 또 내 손을 꼭 잡고 "어머니,인상이 엄마 왔습니다"
하면서 통곡을 했지.
그때 나는 또 내 마음 속에서 이미 너를 혈육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 이후로 너는 내 어머니한테 더 잘 해왔지.
사랑하는 내 어머니한테 친 딸처럼 용돈드리며...... 형제라도 그렇게 하기 힘들다는 것을 잘 안다.
친구야. 내가 어떻게 그 은혜를 잊을수가 있겠니?
친구야, 우리가 자식으로인해 맺어진 인연이지만 나이가 더 들어도 영원히 변함없는 인연으로 살아가자.
우리가 살면서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사연들도 많이 있잖아.
나는 그 때의 일들을 문득문득 생각할 때가 많단다.
이렇게 부모님 일들 다 끝나고 나니 또 걱정거리가 있더라.
이런 것들이 인생사는 재미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어느 날부터는 또 자식들 결혼 문제 때문에 걱정 거리가 많았지.
나도 나름대로 내 새끼들 세 명 여의면서 어려운 일들이 많았지만 다 시집 장가 보내고 나니
또 어느 날부터 왜 선정, 선장이가 내 눈에서 아른거리는지. 밤잠을 설칠 때면 이 아이들을
누구에게 인연을 맺어주어야 할까. 어디에 소개를 해야 잘 했다는 소리를 듣겠는가? 고민했단다.
나는 돌아다니면서 예쁜 아가씨들만 보면 애인이 있느냐고 묻고 또 우리 또래 괜찮은 어머니들을
보면 딸 있느냐고 물어보며 정말 신경 써 보았지만 그게 참 어려운 일이더라.
선장이 보낼 때도 일 년 넘게 친정 어머니를 살펴왔지. 아, 이 정도면 됐다 생각했을 때
너에게 말을 했고 마침 서로 잘 연결이 되어 무사히 선장이가 장가를 갔을 때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선장이 보내고 나서 선정이가 또 걱정이어서 여기 저기 수소문을 했는데 지금까지도
아쉬운 것은 선정이까지 맺어 주었더라면 얼마나 좋았겠는가 하는 점이란다.
친구야 너는 두 아들이 누구보다 결혼식을 잘 했지 않니?
모든 친구들이 부러워할 정도면 너는 최고로 성공한 인생이다.
친구야 이제는 큰 일들은 다 끝난 것 같다. 새리, 선정, 인상, 옛날로 돌아가고 싶다.
1000원짜리 계할 때 말이야. 얼마나 웃고 살아왔니? 그 좋은 세월 어디다 버리면 안 되겠지.
다시 그 좋은 세월로 돌아가고 싶다.
앞으로 살면서 좋은 일은 좋다고 자랑도 하고, 이제는 나이들이 있으니 남은 인생 손자 보면서
즐겁고 재미있게 살자.
친구보면 하소연도 하고 농담도 하면서 살자.
우리가 나이가 있잖아. 섭섭한 일들은 다 묻어버리고 살자.
친구야, 저 먼 곳에 가서도 우리의 인연이 끝나지 않기를 바란다.
재첩국 사이소, 소금 사이소
요새 젊은이들은 자녀 학교 보내기도 편하지만 25년 전 우리네 세상은 고3, 고2 중 2학년.
1남2녀를 학교 보내느라 새벽에 일찍 일어나 도시락 6개 준비하느라 저는 부엌에서 바빴지요
더운 한여름 날씨에 먼 어디세선가 "재첩국 사이오~재첩국" 조금있으면 또 어디서 "소금사이소~ 소금"
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더운 날씨에 발걸음을 종종거리며 다니시는 아주머니들이
너무나 안타까워서 늘 생각을 해봤지요. 생각끝에 시장에 가서 미숫가루를 사와서 준비했지요.
또 얼음물을 준비했습니다.
다음날 어김없이 "재첩국 사이오~ 재첩국" "소금사이소~ 소금" 소리가 드리길래 얼른 양푼에다
얼음물을 넣고 미숫가루를 타서 아주머니를 불렀습니다. 이거 드세요 하니 아주머니는
"아이고~ 시원해~ 고맙습니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재첩국 사이오~ 재첩국" 소리가 들리면 또 양푼 미숫가루를 드렸지요.
꿀꺽 꿀꺽 마시며 고맙습니다 하시는 아주머니 또 소금장수 아주머니는 고맙다는 말 끝에
'꼭' 소금을 한주먹씩 쥐어서 대문 양쪽에 놓아주고 가셨습니다.
그로부터 5년쯤 지나서 재첩국 사이소 아주머니는 양말 두컬레를 사가지고 우리집을 찾아오셨습니다.
"새벽장사 세월에 영원히 잊을 수가 없어 인사드리러 찾아 왔습니다"
아주머니께 물었지요.
"요새 왜 새벽에 안오세요?"
했더니 아주머니는 그만 눈물을 흘리며 훌쩍훌쩍 우십니다.
"병원에서 유방암 말기라 합니더"
"아이고 아주머니 어떻게 해..." 하면서 같이 울고 말았지요.
아주머니는 이렇게 말씀하시네요.
"내가 새벽장사 12년 동안 얼음물에 타준 미숫가루를 잊을 수가 없어서 내가 죽어서도
이 은혜 '꼭' 보답하겟습니다"
결국 얼마 안있어 그 아주머니는 밥숟갈을 놓고 말았습니다.
남의 도움을 받고도 고마움을 모르는 사람도 많습니다.
많은 사람들 만난 중에 이렇게 고맙게 보답을 하신분이 잘 안 계시지요.
정말 고마운 분들을 제가 만났습니다.
남에게 베풀 때는 내 마음을 열어 작은 것 하나라도 진실을 주어야 합니다.
베푼다는 것이 '꼭' 거창하고 큰일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더운 날씨에 내미는 시원한 물 한잔도 큰 축복이 되어 세상을 따뜻하게 할 수 있는 것이랍니다.
비오는 날 할아버지
비가 장대같이 쏟아졌지요.
버스를 타려고 있을 무렵. 지난 어느 핸가 연세 많은 분들께 무료로 버스를 태워주던 때가 있었지요.
연세 많은 어르신들이 버스에 오르면 불평불만도 많은 때가 있었지요.
그 당시 연세 많은 분들이 버스를 타려면 기사님들이 잘 안 태우려 했지요.
그 무렵 비 오는 날 어떤 할아버지가 우산도 없이 옷은 젖은 채 버스마다
"어디가요?" 물으시고 또 다른 버스를 기다리시고......
비가 많이 와서 어떤 대답을 들으셨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버스는 몇 대가 그냥 지나가고 말았습니다.
제가 그런 장면을 보고 집으로 돌아올 수가 없었지요.
그 때 생각을 떠올려 보면 할아버지가 추워서 떠는 모습이 가을 날씨였던 것 같습니다.
왜 내가 이렇게 보고만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어 빨리 택시를 잡았지요.
할아버지 손을 붙잡고 "택시 타세요"했더니 할아버지께서 깜짝 놀라셨지요.
택시아저씨께 돈 2만원을 드리며 "이 할아버지 목적지까지 모셔드리고 남은 잔돈은 할아버지 드리세요."
했더니 할아버지가 하시는 말씀이 "이보게 어디 사는가? 우리 아들보고 이 돈 갚으라고 하겠네."
저는 "아닙니다,할아버지. 괜찮습니다." 하고 차문을 닫았지요.
어디에선가 빵빵~ 소리가 나 돌아보니 기사 아저씨 하시는 말씀이
이 일을 라디오 방성에 내겠다며 저의 이름을 물으시네요.
저는 아니오 하고 뒤도 돌아보지 않았지요.
이런 작은 일들이지만 누군가가 시켜서 하는 일들이 아니랍니다.
젊어서 베풀면 늙어서 다 축복받지요.
젊어서 습관을 쌓아놓아야 늙어서도 자연스럽게 할 수 있어요.
큰 덕이 아니라도 우리네가 길가다 보면 도로가에 땀흘리며 청소하시는 분들을 볼 수 있지요.
가까운 구멍가게에 가서 천원짜리 음료수 하나 사서 "아저씨 시원한 음료수 드세요" 해 보세요.
우리네 주변에는 이런 저런 작은 일들이 많습니다.
나이가 드니 생각이 빨리 안 돌아서도 못하고 몸이 빨리 안 쫓아가서 못하고,
보고도 기회를 놓칠 때가 있지요. 이럴 때는 늙은 내가 안쓰럽지요.
늙어서 생각해보니 뭐든지 젊어서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 글을 읽은 젊은이들이여,
젊어서 쌓아 두게나.....
우리 아이들은 제가 하는 모습을 보고 자발적으로 자원봉사도 하며 살지요.
이런 일들이 타고난 천성인 것 같습니다.
나는 이런 일로 큰 축복을 받고 살지요.
혼자 늙어 글을 써놓고 박수도 치고 웃지요.
누군가에게 이런 글을 써놓고 자랑도 하고 싶지요.^^
병원에서 만난 할머니
어느 날 종합 병원에 치료 받으러 갔다가 옆자리에 할머니가 눈에 들어 왔습니다.
배낭을 메고 앉아 계신 모습이.....얼굴을 보니 쳐다 볼 수가 없이 험한 얼굴이었습니다.
글로 표현하기 좀 민망하지만 눈은 토끼눈, 코는 원숭이코, 눈에는 콩알만한 눈꼽...
제가 기가 막혀 "할머니 어디가 편찮으세요?"
여쭤봤더니 할머니 대답이 "수술을 잘 못해 내 얼굴이 이렇게 됐지" 하십니다.
"할머니 연세는요?"하고 물으니 "86세"라고 하십니다.
제가 "할머니 수술하시지 말고 그냥 사시지 그 나이에 웬 수술이예요?" 했더니
그 할머니 말씀이 "꼭 우리 딸하고 똑같은 말하네.." 하시네요.
이런 할머니를 두고 집에 올 수가 없어서 "할머니 맛있는 것 사 잡수세요" 하고 돈 3만원을 드렸지요.
그 할머니는 극구 사양하시며 뿌리 치십니다.
"할머니 그냥 맛있는 것 사 드시라고 한 겁니다" 하였습니다.
그 할머니 말씀이 "젊은이가 어디 살길래 이 늙은이 한테 이렇게까지..."
저는 "예 할머니..안녕히 가세요" 하고 돌아섰습니다.
할머니가 "젊은이~ 젊은이~ "하고 불러서 할머니께 갔더니
내 손을 꼭 잡고 하신 말씀이 "나는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야. 젊은이한테 해 줄 것이 한 가지 있소"
"뭔데요?", "하나님 앞에 당신을 위해 축복 기도를 하겠소",
"아이고 할머니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안녕히 가세요."
<두번째 만남>
얼마 후 그 할머니를 또다시 병원에서 만났습니다.
의자가 모자라서 서 있는 사람이 많았지만 웬일인지 빈자리가 보여 가 봤더니 그 할머니가 계셨습니다.
할머니 주변엔 아무도 앉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아이고 할머니 또 뵙네요" 했더니 할머니도 저를 알아보시고 손을 잡으십니다.
제가 할머니께 "할머니 오늘은 점심 좀 사주세요" 했더니 할머니께서 웃으시며
"우리딸은 안사줘도 젊은이는 사줘야지. 그런데 내가 돈이 15,000원 밖에 없는데...."하십니다.
"그럼 국수 먹으면 되잖아요."하며 할머니와 국수집으로 가는 동안 할머니와 많은 얘기를 나누다 보니
2시 40분 예약인데 아침 11시에 병원에 도착하셨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왜 그렇게 일찍 나오셨어요?" 물으니 집은 너무 추워서 병원이 더 따뜻해서 좋다고 하십니다.
저는 국수집에서 할머니께 손 씻고 오시라고 말씀드리고 그사이에 저의 지갑에 있는 돈을
모두 할머니 가방에 넣어드렸습니다.
국수를 맛있게 먹고 할머니가 돈을 내실 때 살짝 말씀드렸어요.
가방에 있는 돈으로 맛있는 것 사드시라고 했지요.
할머니가 깜짝 놀라 저를 부르셨지만 저는 빨리 인사하고 도망치듯이 돌아서 나왔습니다.
그 때 할머니가 큰 소리로 말씀하셨습니다.
"젊은이~ 내가 젊은이를 위해 하느님께 축복 기도를 할게 정말 고맙소"
- 그것으로 그 할머니와 인연은 끝이었지요.
허허벌판에 전기 장판 하나로 겨울을 나시는 할머니지만 할머니가 저에게 축복의 기도라는
값진 선물을 주셔서 저는 정말 행복하게 잘 살고 있습니다.
할머니를 생각할 때마다 할머니의 그 기도가 부적의 힘보다 더 크다고 생각들 때가 많습니다.
날씨가 쌀쌀해지니 또 그 할머니가 생각납니다.
이토록 추운 올 겨울을 전기 장판 하나로 또 어떻게 나실지...
내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배드민턴
내 인생에서 취미 생활에 빼놓을 수 없는 배드민턴을 시작한 지 20년이 넘었다.
이 귀중한 젊은 시절을 배드민턴에 바쳤으니, 나는 이 운동을 한 것을 후회하지 않지만
뒤돌아보고 생각해보면 아쉬운 것도 많다.
나 자신은 운동이 체력적으로 따라주지 않은 몸이다.
배드민턴은 이기고 지는 승부가 나는 운동이라 승부욕이 강하게 작용한다.
내 성격은 무얼 배워도 적성에 맞으면 끝을 보는 성격이다.
배드민턴 운동은 한마디로 마약같이 중독이 되는 경향이 있다. 내겐 그만큼 좋은 운동이었다.
처음에 배드민턴을 쳐 보려고 모임에 들어갔을 때 사람들이 모두 내가 일주일을 못 버틸 거라고
받지 말자고 다들 수군거렸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때는 내가 한창 멋을 부리고 다닐 때라 (지금에야 흔하지만)
그당시에 발찌를 하고 모델 저리가라 할 정도로 꾸며서 운동을 하겠다고 갔으니
어찌보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한번 빠지고 나니 제일 열심히 하는 회원이 되어 버렸다.
매일매일 집에 고무줄로 네트를 만들어 놓고 라켓으로 서브 넣는 연습을 했고,
날이 새기를 기다리다가 새벽 4시가 제일 먼저 나가서 열쇠로 문 다 열고 네트 걸어 놓고 연습을
하기 시작했다. 몸이 아파서 병원에 입원을 했을 때도 하도 무의식적으로 배드민턴 연습을 해서 링거
꽂은 팔이 퉁퉁 부어서 입원을 못 하고 있을 정도였다.
옛말에 사람의 성격을 알려면 화투를 쳐 보라했는데 내가 해 보니 화투보다 배드민턴을 쳐 보는 것이
상대를 더 정확하게 알 수 있었다.
승부가 걸린 경기라서 한 게임 쳐 보면 사람 성격이 바로 나오는 것이 참 신기했다.
뭐든 배우기 시작하면 끝까지 가야만 직성이 풀리는 나는 처음 운동을 시작하면서
제일 잘 하는 사람들이 들어간다는 A조까지 올라가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집념을 불태웠다.
그런데 나와 같은 조가 된 사람은 "봉수형님"이라는 세상에 급한 일이 없는 사람이었다.
게임 약속을 잡아 놓으면 게임 끝나고 2시간이 있다가 나타나기 일쑤고,
욕심이 없어서 이기면 이기나보다, 지면 지나보다 하니 욕심 많은 내가 애가 닳아서 죽을 지경이었다.
오죽하면 내가 잘 가르친다는 개인 선생님을 찾아서 같이 수업을 받기로 했는데 아침마다 전화를 해서
깨우고 꼭 나오라고 몇 번을 다짐을 받아야 수업에 나오곤 했다.
세상에 욕심 없고 한없이 좋은 사람이 나와 같은 조가 되어서 그때"봉수 형님"도 고생 많이 했을 것이다.
지금도 "봉수형님" 생각만 하면 웃음이 나온다.
보통 기본 체력이 있고 운동을 잘 하는 사람도 복식에서는 짝을 잘 만나야
A조가 되기까지 3년 정도 걸린다는데 나는 원래 운동 체질도 아닌데다가
파트너는 천하 태평이니 여자 복식으로는 A조를 꿈도 못꾸고 혼합복식으로 A조를 노렸다.
그렇게 열심히 한 결과 8년만에 드디어 A조까지 따내고 말았다.
A조가 되었을 때 얼마나 기분이 좋던지 그 동안에 내가 열심히 한 것이 다 보상받는 것 같아
하늘을 날아갈 것 같았다.
배드민턴의 매력에 빠져 잠도 안자고 연습한 결과이니 좋을 수 밖에...
그리고 얼마 후 갑자기 식당을 하게 되어 운동을 서서히 끝내고 말았다.
식당한 지 벌써 10년 세월이 다 되어 간다.
내가 얼마나 좋아하던 배드민턴이었는가?
이 운동에 미련이 많아서 회원들에게 선뜻 그만 두겠다는 말을 못 하고 이제까지 회비를
꼬박꼬박 내고 있다.
내 인생에서 가장 좋은 시절을 잠도 줄여가며 노력했던 배드민턴과의 인연을 끊기 싫었다.
그런 내 마음을 남이 알아줄까 모르겠지만 그 전에 내 자신이 잘 참아내고 있는 것이 정말 자랑스럽다.
공 하나에 울고 웃던 그 시절을 보내고 미련이 남아 이렇게 참고
또 나이 65세부터는 회비를 면제해 준다니 이것도 배드민턴 회원들에게 고마운 일이 아닌가?
컴퓨터.......반성문
요즘은 컴퓨터 세상으로 바뀌고 있지요.
제가 귀가 안 좋아서 밤에 텔레비전을 볼 때면 옆에서는 소리를 줄이고 저는 자꾸 소리를 키우고...
잘 안 들려서 물어보면 대답도 잘 안 해주고 속이 상할 때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컴퓨터를 배워야겠다는 생각에 혼자 현대백화점에 가서 노트북을 샀지요.
노트북 기사님이 설치할 때부터 나는 컴퓨터에상식도 전혀 아무 것도 모른 채,
스위치를 끌 줄도 모르고 켤 줄도 모르니 정말 난감했지요.
하루 생활이 바빠서 언제 컴퓨터 배우러갈 새도 없었어요.
딸보고전화해 컴퓨터를 좀 가르쳐달라고 했지요.
처음에는 전화로 좀 자세히 잘 가르쳐주더니 나중에는 딸도 지 새끼들하고
정신이 없는지 엄마가 물어보면 짜증스런 눈치였지요.
하루는 노트북을 들고 삼성 서비스 서비스 센터를 찾아가서 자세한
내 사정 이야기를 했더니 서비스 기사님이 최선을 다해 가르쳐 주시면서
"언제고 모르면 컴퓨터를 들고 오세요"하며 정말 친절하게 잘 가르쳐 주셨습니다.
시간이 나는 대로 배웠지요.
노력 끝에 컴퓨터 앞에서 글도 올리기 시작했습니다.
식당을 하기에 하루 일과가 너무~ 너무 바빠서 컴퓨터를 열고 남의 글들을
볼 새도 없이 내 글 올리는 게 재미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 더듬 더듬 거리면서 5시간을 끌어 글을 써내려가고 있는데
갑자기 컴퓨터에서 "죄송합니다" 하면서 글이 없어져 버리대요.
아무리 찾아도 없고 속이 상해 죽을 뻔 했네요.
이제 컴퓨터 구입한 지가 6개월 째입니다.
없는 시간에 혼자 배워보겠다는 노력도 많이 했지만 후회도 했지요.
우리 60대 님들 너무 ~너무 존경스럽습니다.
아직까지 내 주변에는 컴퓨터를 배우러 다니는 친구는 있어도 글을 올린다는 친구가 잘 없어요.
컴퓨터가 나를 감동시킨 적도 많았지요.
지난 번 어머니와의 일을 글로 올려 놓고 정말 다정스런 댓글들-
같이 울어주고 위로해 주신 글들 정말 감사했답니다.
내 글은 올리기가 쉽지만 남의 글에 댓글을 올리기가 쉽지가 않더라고요.
뭐라고 말을 해야 내 마음을 다 전달할 수 있을지 고민도 많이 된답니다.
제가 힘을 받은만큼 돌려드리고 싶은 마음에 열심히 고민하고 있습니다.
바빠서 며칠만에 컴퓨터를 열어보면 하루 피곤이 풀릴 정도로 재미있는 글을 보고
혼자 박수도 치고 때로는 같이 눈물도 흘리며 위로도 해주고 싶지요.
작품 사진들을 보면 "와~!"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로 "와~ 와~ "하며 감상도 하고
좋은 글들을 보면 60대 님들을 만나보고 싶은 충동을 일으킬 때도 있답니다.
아직도 컴퓨터 상식은 아무 것도 모른답니다.
카페 '룰'을 잘 몰라 실수도 하는 것 같습니다.
나름대로 예의를 지키려고 노력하는 사람인데,
얼마 전에 실린 글 속에서 정말 '룰'을 잘 지켜야 하는 것을 알았답니다.
몰라서 실수를 한 부분이 있다면 너그러이 봐 주세요.
아직까지도 모르는 것이 많지만 계속 노력하고 있답니다.
말보다 글은 정말 진실이 우러나지요.
60대 님들과 더불어 진실 속에 글을 올리고 싶습니다.
앞으로 뜨거운 여름 날씨에 건강 조심하세요.
거울 앞에 서 보니
어느 날부터 거울 속에 옛 내 모습이 없어지고 말았네.
이제는 누가 봐도 첫눈에 할머니
예쁜 옷을 입어도 얼굴은 쭈글쭈글
어느 새 이렇게 변해버렸는지
아무리 아름다운 60대라 해도 가는 세월, 나이에는 어쩔 수 없네.
한 평생 후회없이 살았다고 생각했네.
서예도 배우고, 배트민턴도 배우고,친구들도 많이 사귀고
하지만 돌아보니 아쉬움도 많다네.
아무리 좋은 화장품을 발라도,제일 좋다는 옷을 입어도,
흰머리를 염색도하고, 드라이로 힘을 줘봐도,손관리를 해봐도
어쩔 수 없다네.
젊은 시절로 돌아가고 싶었던 어느 날.
흰머리 염색하고,
맛사지 하고,손관리 하고,좋은 옷 입고,
거울 앞에 섰다네.
그런데...... 갈 곳이 없다네.
누구 나를 불러 줄 사람이 없을까?
혼자 차를 타고 나도 모르는 곳으로 갔다네.
내 차가 친구 10명보다 낫구나.
가자 하는대로 잘도 가네.
다시 돌아와 컴퓨터 앞에 앉았다네.
컴퓨터가 친구 50명보다 낫구나.
마우스를 잡고 가자하니
이제부터는 컴퓨터와 아름다운 60대님들과
삶의 이야기 나누면서 지내겠네.
제 3 부
자식들은 나의 힘
딸보다 아들먼저
1남 2녀 중 아들을 우선해서 키웠지요.
처음 결혼해서 임신이 되었는데 그게 자궁 외 임신이 되어버려서 수술을 했지요.
다들 병원에서 다시 아이를 갖기가 힘들거라고 했답니다.
그러다가 결혼한 지 5년만에 힘들게 가진 아이이고 거기다가 아들이니 얼마나 좋던지요.
바로 밑에 연년생 딸이 있었는데 분유를 탈 때도 아들은 7숟가락을 타서 먹이고
딸은 5숟가락만 타서 먹이고 그랬지요.
마지막에 낳은 딸까지 딸 둘은 왜 항상 오빠만 챙기느냐고 섭섭해하지요.
그러면 나는 이제는 그만 똑같이 해줄려고 해도 그 생각은 잠시이고
과일도 제일 좋은 것은 아버지도 안 드리고 아들을 먹였지요.
우리 귀한 아들 힘들까봐 유치원에 다닐 때도 유치원 바로 앞으로 이사를 갔고,
초등학교도 정문 문방구 바로 앞에다 집을 사서 이사를 다녔지요.
그래서 아들은 초등학교 다닐 때까지 학교 화장실을 써 본적이 거의 없답니다.
화장실 갈 일이 있으면 집에까지 쫓아와서 화장실을 쓰고 갔지요.
그것뿐인가요? 양말도 사면 아들이 항상 먼지 새 것만 신고 런닝, 내복도 항상 아들이
새 것을 먼저 입고 아버지는 낡은 양말 낡은 런닝 내복 대충 입고 살아왔지요.
도시락도 온갖 반찬에 색색깔 밥에 과일까지 새벽에 일어나 정성들여 싸 주었지요.
우리 네 식구는 찬밥을 먹고 아들은 따뜻한 새 밥 먹여 키워 왔지요.
좋은 옷, 좋은 신발 항상 최고로 해주었답니다.
이런 일들이 나는 사랑하는 아들을 잘 키우는거라고 생각하며 살아왔지요.
어느 날부터 뒤 돌아 생각해보니 내가 미쳤지요.
왜 그렇게 살아왔는지 후회스럽기 짝이 없지요.
그때는 왜 그렇게 아들이 좋고 아들만 보면 흐뭇했던지요.
다 커서도 아직까지 아들이 너무~ 너무 좋아 장가 보내는 날
왜 그리 섭섭하던지 예식장에서 그 좋은 날 그만 눈물이 줄~줄 쏟아지고 말았지요.
지금은 아들한테는 하고 싶은 말- 좋은 말이나~ 나쁜 말이나 -묵묵히 참아야 하지요.
아들과 아버지는 식당을 운영하기에 본의 아니게 말다툼을 할 때가 있지요.
말다툼 내용을 들어보면 아버지는 옛 우리 세상 살아 오듯이 뭐든지 절약절약 아끼라고
하기 때문에 항상 싸울 소재거리는 아버지가 주지요.
꼼꼼하고 야무진 아버지가 보기에 아들은 아직 세상 무서운 줄을 모르는 철부지 같아
보이는가 봅니다.
아들은 자기도 나이를 먹을만큼 먹었는데 그런 아버지가 불편할 때가 있겠지요.
그래도 아들 앞에서는 아버지 편을 들어주고 있지요.
아들한테 이야기합니다.
"너도 아들이 있으니 한 번 생각해봐라.
니가 나중에 너의 아들한테 아버지처럼 이렇게 최선을 다해서 희생할 수 있겠는지를".
곰곰이 생각하던 아들은 그렇게는 못하겠다고 하네요.
아버지의 고마움을 알면서도 그 마음을 따뜻한 말 한 마디로 표현하지 않는 아들이
야속할 때도 있습니다. 종업원들에게는 "수고했습니다". 하며 웃는 얼굴로 인사하면서
네 아버지에게 그렇게 해 본 적이 있냐고 조근조근 이야기했지요.
그제야 아들은 아버지께 사과드리겠다고 합니다.
이렇게 구구절절이 이야기를 해야 부모 생각을 하는 아들이 얼마나 섭섭한지요.
지나고 생각하니 자식은 그렇게 키우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너무 오냐오냐 키워서 자신만 알게 했다는 것이 후회가 되네요.
그렇게 정성들여 키운 자식이기에 알게 모르게 기대도 컸는지 작은 일에도 실망할 때가 있지요.
이제야 자식은 그렇게 키우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드네요.
뭐든지 자기에게 맞춰주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한테는 잘 해도 부모는 언제나 자기에게
맞춰줄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아들이 결혼한 후 지도 아들을 낳았지요.
아들 마음에도 자식 낳고 나더니 아버지한테 말대답한 게 맘에 걸렸는지
편지를 다섯 장 써 "아버지 아들을 용서해 줄 수 있겠습니까.
먹고 살다보니 아버지한테 말대답도 많이 했고 불효도 많이 했습니다."라고 적어 보냈지요.
아들이 지도 자식 낳고 나니 아버지에게 말대답을 하는 것이 조심스러웠나 봅니다.
요즘도 종종 편지로 "우리 장사하면서 서로 스트레스 안 받게 조심스럽게 마음 맞춰 살아보십시다"
이런 편지를 보냅니다.
그럴 때 '그래 너도 자식 한 번 키워봐라 얼마나 자식이 소중하면서도 힘든게 많은지'하고 생각하지요.
아버지는 나이가 드니 이제는 크게 말할 기력도 없어진다 하네요.
아들아, 아버지의 젊어서 당당했던 모습이 다 어디로 갔는지 생각해봐라.
젊어서는 말도 많더니만 지금은 늙어서 그런지 말 수도 없어지네요.
자식들은 결혼해서 보내고 나니 멀리 사는 사촌같이 느껴져요.
아들이나 딸이 다 똑같지만 딸은 같은 여자로서 친구 같기도 하고,
동생 같은 생각이 들 때도 있고 그래서 딸하고 할 이야기가 많지요.
키울 때는 자식들이 그렇게나 좋으련만 다 키워 각자 다 보내고 나니
부모 마음은 허공 속에서 헤매는 것 같지요.
자식 농사 다 끝나고 나니 이제부터는 즐겁게 살아야 하는데 그게 마음대로 잘 안되네요.
타고나는 복은 따로 있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자기 복에 맞는 그릇이 있는 것 같다.
우리 막내 딸 임신 했을 무렵, 동네 할머니들이 태몽을 꾸었냐고 자꾸 물었다.
태몽! 너무 신기해서 함부로 얘기하기 아까운 태몽 이야기를 해 볼까.
꿈 속에서 겨울인지 내가 누비 치마를 입고 넓은 들을 걸어 가고 있었다.
들판에 벼는 누렇게 익어 있고 코스모스도 한들한들 피어있는 곳이었다.
그 들판 가에는 해바라기 꽃들이 한 가득 피어 있었는데
내가 그 중 제일 큰 해바라기 한 송이를 꺾어 누비 치마에 담아 가지고 집에 가져 갔다.
집에 가서 씨를 까 먹으려고 시골집 마루에 앉아 치마를 열어 보니 이 해바라기가
동쪽에서 떠 오른 해와 마주쳐 세상이 너무나 환하게 빛이 나더니 햇님으로 변하고 마는게 아닌가?
꿈을 깨고도 그 빛이 눈에 아른거려 한참을 멍 하니 앉아 있었다.
동네 할머니들이 꿈 얘기를 듣고 아들 같으면 큰 놈이라고 다들 입을 모으셨다.
나도 은근히 기대를 했다. 그런데 막상 낳아보니 딸이라 태몽은 잊어버리고 키웠다.
대학졸업을 하고 27살부터 선자리가 나기 시작했는데 들어오는 자리는
선보기가 부담스러운 자리들이 많이 들어왔다.
딸은 예쁘다고 하지만 우리 집안이 크게 내세울 것이 없었다.
애들 아버지는 회사 생활에 정년 퇴직을 하셨으니 아주 평범한 집안이고
현재는 식당을 경영하고 있는데 선 자리는 판검사, 의사 이런 자리가 들어오니 참 걱정이 많고 부담스러웠다.
우리 식당은 토요일 일요일이 제일 바빠서 딸도 식당에 나와서 일을 도우고 있었는데
갑자기 일요일에 친구한테서 전화가 왔다.
오늘 2시에 선 한 번 봐라. 총각이 인상이 괜찮단다.
잘 아는 친구의 전화라 아무 것도 묻지 않고 식당에서 일 하다가 부랴부랴 준비를 해서 호텔 커피숖으로 갔다.
잠깐 나가 만나보니 정말 인상이 좋아 보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내 사윗감이다 싶은 것이었다.
총각을 보고 엄마가 따라 나와 미안하다며 찻값을 내가 내고 가겠다고 하고 집에 왔다.
그리고 그날 밤에 어떤 꿈을 꾸었다.
친정 어머니가 돼지 밥을 주라고 말씀하셨다.
소슬 대문이 으리으리한 집이었는데 내가 그 큰 대문을 열고 들어가니
큰 돼지가 두 마리 있어 뜨끈뜨끈하게 돼지 밥을 주고 뒤 돌아보니
돼지 옆에 대추, 밤이 큰 소쿠리로 하나씩 가득 쌓여 있었다.
이 꿈이 이상해 그 다음 날, 딸을 안아 주면서 이 혼사가 되겠는데
총각이 어떻더냐고 자세한 것을 물으니 그냥 웃으며 이야기만 재미있게 하다 왔다고 한다.
다시 몇 번을 만나도 총각이 변함이 없어 결혼날을 받기로 마음을 먹었다.
상견례 하던 날
저는 1남 2녀를 전부 종매 결혼으로 여의었습니다.
큰 딸을 시집보내려고 선을 보러 갔지요.
선 보는 날 커피숖에 앉아 있는데 큰 사위감이 들어왔습니다.
겨울이라 반코트를 입었는데 소매가 길어서 손이 보이지도 않고,
선본다고 바지를 새로 사입었는지,길이를 너무 많이 줄였는지 의자에 앉으니 종아리가 다 보였습니다.
그런데 차 한 잔을 하면서 이야기를 들어보니 처음 보는 것과는 달리 이야기 속에서 음식으로
말할 것 같으면 진국이라고 할까요.
그런 사람의 진실성이 느껴졌습니다. 총각이 겉보다 속이 꽉 차 보였지요.
그렇게 생각하니 옷차림새에 신경을 쓰지 않은 것도 스스로 당당하기 때문이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제가 총각에게 술 주량이 어느 정도냐고 물었지요.
저희집은 술 마시는 사람이 없어서 중요한 일이지요.
소주 한 두 잔 정도는 모임에서 마신다네요.
그러면 됐다 생각하고 이 총각이 내 사윗감이다는 생각이 들어서 딸보고 계속 만나 보라고 했지요.
얼마 후 딸에게 몇 번 만났냐고 물어보니 세 번 만났다고 합니다.
총각을 집으로 데리고 오라고 해서 그 자리에서 날을 받자고 했더니 총각이 깜짝 놀라더라고요.
한 달만에 상견례 날을 받아 양가 부모님과 처녀 총각이 커피숖에서 만났습니다.
저는 약속 장소에 나가기 전에 처녀 아버지는 이래야 한다고 미리 교육을 좀 시켰지요.
총각 아버지는 아들 장가보내는 것이 기분이 좋은지 아니면 모두 서먹한 분위기가 어색해서
그러셨는지 자꾸 혼자서만 말씀을 하십니다.
총각 어머니는 '아...저 영감이 도대체!!' 하는 표정으로 앉아있더니 내 발을 꾹~ 밟는 겁니다.
아마도 총각 아버지 발인줄 알았겠지요.
저는 총각 어머니가 내 발을 밟은 줄 알면 무안할까봐 말도 못하고 발을 살며시 안으로 당겼지요.
그 동안에도 바깥 사돈의 말을 계속되고 테이블 밑으로 더듬더듬 바깥 사돈의 발을 찾던
안사돈이 또 제 발을 꾹~~ 이번에는 아까보다 더 세게 밟는 겁니다.
아프지만 티도 못내고 발을 꽁꽁 숨겨 놓았지요.
바깥 사돈의 말이 계속 되는 동안 저와 애들 아버지가 발을 얼마나 밟혔는지 모릅니다.
제 발을 밟았는지도 모르는 안사돈은 그렇게나 발을 밟았는데도
계속 혼자서 이야기하는 바깥 사돈이 얼마나 미웠겠습니까.
총각 아버지의 말이 끊임없이 이어지자 도저히 못참겠다 싶었는지 있는 힘껏 제 다리를 뻥!! 찼습니다.
헉!! 어찌나 아픈지 눈물이 핑-, 웃음을 참느라고 눈물이 핑-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우습지요.
그렇게 웃음을 참으며 상견례를 하고 선보고 한달만에 결혼했는데도
우리 큰 딸, 지금은 아들 딸 낳고 잘 살고 있습니다.
참, 우리 사돈들은 아직도 그때 밟은 발이 제 발인 줄 모르고 있답니다. ^^
며느리 보기까지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선만 보다가 나이가 서른 셋이 되었다.
당시 아들에게는 선자리가 많이 들어왔고 여기저기서 사위 삼겠다고 욕심내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100명도 넘게 선을 보니 어느 아가씨가 좋은지도 모르겠고 아들은 그저 예쁘게 꾸민 아가씨들과 만나
차 한 잔 하는 것이 일상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내 아들은 다른 것은 다 좋은데 성격이 급해서 성질이 나면 미꾸라지 소금 뿌려놓은 것처럼 파닥파닥 뛴다.
만약 며느리가 들어와 성격이 급해서 못살겠다고 하면 어떡할까 걱정하느라 하루가 다 갈 때도 있었다.
아들 장가보낼 생각에 걱정이 태산이던 어느 날,
큰딸의 초등학교 동창회를 우리 식당에서 하게 됐다. 갑자기 큰 딸이 내 귀에다 대고 말을 했다.
"엄마, 저기 괜찮은 아가씨가 있는데 엄마가 며느리 감으로 보세요."
가만히 보니 첫인상이 온순해 보여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아들에게 너 성격 급한 것은 치료도 안된다하면서
이 아가씨는 차분해서 너를 받쳐줄 수 있을 것 같다며 동생 친구니 한번만 만나보라고 설득했다.
두 사람은 약속을 해 만났다.
처음 만나고 집에 온 아들은 고개를 흔들며 아니라고 했다.
그런데 나는 아가씨를 포기하기 어려웠다.
아가씨한테 연락해서 직접 만나보자고 했다.
며칠 뒤 아가씨를 불러 내 차에 태우고 같이 시장을 보러 다니면서
아가씨 가정이며 자라온 환경을 하나하나 자세히 물었다.
아가씨는 거짓하나 없이 솔직하게 다 이야기를 했고
나는 무엇보다 아가씨 성품이 온순하고 착한 것이 마음에 들었다.
친정 형편이 어려워서 조금 걱정이 되기는 했지만 나도 친정이 잘 사는 것은 아니었으니
친정이 못사는 것은 죄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 다시 아들 몰래 네 다섯 번을 만나 보니 더욱 며느리감으로 손색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조심스레 물었다.
"숙아 우리 집안에 시집오면 종교를 바꿔야 되는데, 숙이는 불교고 우리는 기독교다. 종교를 바꿀 수 있겠니?"
아가씨는 "우리 엄마까지 바꿔야 합니까?" 하고 되묻는다.
나는 숙이 너만 따라주면 된다 했더니 아가씨는 따르겠다고 한다. 그럼 됐다 생각하고 큰딸과 이야기를 했다.
딸에게 오빠는 니 친구가 맘에 안찬다는데 어떻게 하면 좋으냐고 물어보았다.
딸이 오빠 성격을 맞출 며느리감은 친구밖에 없으니 오빠를 달래보라고 한다.
나는 내 큰 딸을 믿었다.
언제나 반듯하고 사리가 분명한 내 딸의 판단이 정확할 것이라 생각했다.
확신이 생긴 나는 이때부터 아들에게 이 아가씨 아니면 안 된다고 했다.
그 후로 내 아들은 아가씨를 1년이 넘게 만났다.
1년이 지난 어느 날 아들이 도저히 안 되겠다고 했다.
그러더니 아들은 다른 데 선을 계속 보러 다니는 것이다.
나는 끝까지 이 아가씨 아니면 안 된다고 타이르며 아들을 이기고 있었다.
끝끝내 나는 아들을 이겨 억지로 상견례를 하자고 했다.
우리 식당에서 상견례를 하기로 하고 날을 받았다.
아가씨가 아픈 친정어머니를 부축해서 상견례장으로 들어오는 순간부터 걱정이 태산이었다.
식사를 하고 결혼 날짜를 그 자리에서 받았으나, 밥을 어떻게 먹었는지도 모르겠고......
아들도 근심이 가득한 얼굴이고......
나는 그때부터 걱정이어서 상견례가 끝나고 많은 생각을 하느라 집까지 세 시간을 걸었다.
그 후 일주일 만에 아들 입에서 청천벽력 같은 소리가 떨어졌다.
도저히 이 결혼 못하겠단다.
아무리 달래봐도 안 되길래 차후에 자식 원망이 무서워 그러면 할 수 없다 마음대로 하라며 일어섰다.
아.....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며칠 후 아가씨를 불러서 아들이 저러니 어쩌겠냐며 우리 둘이 서로 끌어안고 울었다.
울면서 아가씨에게 말했다.
"나는 남의 가슴 아프게 하는 사람이 아닌데 내가 네 마음을 아프게 했구나.
우리가 기다려 보자. 숙이 너한테 우리 아들보다 더 좋은 사람이 생기면 시집가고
그렇지 않으면 기다려 봐라. 내가 최선을 다하겠다."
그렇게 아가씨를 보내놓고 마음이 아파서 또 얼마나 울었는지......
그 후 아들은 또 선을 보기 시작했다.
1년 정도의 시간을 아들은 이 아가씨 어때요, 저 아가씨 어때요하며 보내고
나는 절대 아니다 안된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보냈다.
물론 저 정도면 괜찮지 않을까 싶은 아가씨도 있었지만
우리 큰딸과 통화를 하면 문숙이 아니면 오빠를 감당할 사람이 없다며
조금만 더 기다려 보라고 한다.
나는 또 아들의 마음이 돌아서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 아가씨 아니면 절대로 안 된다고 끝까지 밀고 나갔다.
나는 아가씨하고 수시로 전화통화를 하면서 기다려 달라고
내 아들은 저러다가도 내 말은 잘 듣는다며 우리가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러던 중 큰딸을 중매한 친구가 한 동네 아가씨를 소개해 주었다.
소개 받은 아가씨는 첫째, 가정이 내세울 만큼 좋았고
둘째는 아가씨가 아주 예쁘고 어디 하나 흠 잡을 데가 없었다.
아들도 아가씨가 마음에 드는 눈치였다.
아가씨 집에서는 우리 쪽을 너무나 잘 알았기에 자꾸 상견례를 하자고 했다.
아들이 한 번만 더 만나보고 결정하겠다고 하길래 나는 아들한테 요번에 둘 중 하나 결정해라
나는 지금도 숙이 아니면 안 된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만난 날 아가씨가 결정적으로 말실수를 했나보다.
아들 말이 여러 가지를 물어보니 똑똑하기는 한데 모든 면에서 숙이려 들지 않는다면서
그 아가씨 포기했단다. 그러더니 이제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란다.
문숙이한테 연락해서 집으로 오라고 해놓고 이제까지 너 마음 고생 많이 했다며 안아주었다.
그리고 한 달 안으로 다시 날을 받았다.
깨진 혼사를 다시 이을 때까지....
얼마나 서로가 마음 고생이 많았겠는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터, 그래서 며느리한테
"며늘아 우리가 살아가면서 고부간에 갈등이 있더라도 우리는 절대로 서로 미워하지 말자.
서로 이해하고 살자. 우리가 어떻게 만난 인연이냐. 누구의 결혼과도 다르지 않니?"
하며 서로 손을 잡고 약속을 했다.
결혼 준비를 하느라 한복 맞추고 예식장 예약을 하는 동안에도
아들은 아직 마음에서 허락이 안 떨어지는지 밝은 얼굴이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결혼하는 날까지 걱정이 태산이었다.
걱정이 될 때마다 내가 잘하는 건지 모르겠다하고 딸한테 물었다.
"엄마 오빠는 그래도 문숙이야 걱정하지 마세요. 결혼식만 끝나고 나면 잘 살 거예요. 엄마 마음 놓으세요."
딸의 말에 또 한시름을 놓았다. 그래, 결혼하고 나면 잘 살겠지...
아들은 내일 모레가 결혼식 날인데 열이 펄펄 끓고 아팠다.
결혼식 날 새 신랑이 너무 많이 아파 열이 40도가 되었다.
결혼식이나 제대로 할 수 있을까 걱정을 했지만 어떻게 식을 무사히 끝내고 신혼여행을 갔다.
신혼여행지에 도착하면 당연히 며느리에게 전화가 올 줄 알았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전화는 삼일 동안이나 오지 않았다.
아들은 아파서 떠났지, 또 아들이 만족하지 않은 결혼식을 올렸지,
이래저래 걱정이 정말 많았던 나는 3일만에 걸려온 며느리의 전화에 어떻게 이럴 수가 있냐며 야단을쳤다.
며느리는 내 말에 우느라 말도 할 수 없었다.
나중에 들으니 아들이 외국 신혼여행지에서 병원에 입원을 했단다.
말도 안 통하는 곳에서 입원한 신랑을 뒷바라지하느라 경황이 없었단다.
그래도 도착하는 즉시 전화 한 통만 했으면 그런 야단을 안 들었을 것을...
아들이 아파서 떠났기 때문에 걱정이 되어 오해 아닌 오해를 한 것 같다.
지금도 그때 내가 좀 더 참지 못한 점이 후회스럽다.
아가, 그때 일은 정말 미안하다.
그렇게도 급한 아들 성격이 결혼해서 아들 낳고 나니 다 죽고 없어졌다.
참으로 신기한 일이다.
며느리와 아이들과 함께 잘 사는 모습을 보며 그 때의 그 마음 고생을 다 잊는다.
아들도 며느리도 모두 고맙고 예쁘다.
지금 생각해 보면 결혼하고 나면 잘 살 거란 우리 큰 딸의 말이 모두 맞아떨어졌다.
내딸 인경이는 그 사실을 어떻게 알았을까.
그리고 사랑하는 내 아들아, 엄마를 믿고 따라 준 것이 정말 고맙다.
너도 두 아들의 아버지가 되었으니 한 번 돌아 보거라.
요즘엔 엄마의 눈이 정확했다며 행복해하는 아들의 모습을 자주 본다.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끝으로 며느리에게 한 마디 해 본다.
며늘아 내 아들하고 결혼 안했더라면 사랑하는 우리 시원이를 어디 가서 낳았겠니?
승원이도 말이야.
며느리 너도 아들이 둘이나 되니 앞으로 며느리 볼 때 이 시어머니 한번쯤 생각해봐라.
그때의 내 심정을 알 수 있을 거다.
그리고 끝으로 이 시어머니가 부탁이 있다.
너희 결혼은 모두 인경이 뒷받침이었다.
누구보다도 큰 시누이 은혜는 잊어서는 안 된다.
처음에 혼사가 깨져서 삼년동안이나 서로 겉돌 때 내 마음이 얼마나 괴로웠는지
너희들이 알 수 있을까 나중에 나이가 들어 너희 아이들을 여울 때
어떤 사람을 짝지어줘야 할지 고민하면서 나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을 것이다.
그때 쯤엔 너희들에 대한 내 사랑을 다 알 수 있을까.
행복하게 살아줘서 고맙다, 얘들아.
아들과의 행복한 여행
큰 딸 결혼 날 받아놓고 외국 여행도 다녀왔고 작은 딸도 결혼 날 받아 놓고 제주도 여행도 다녀왔지요.
하지만 마음 속에 꼭 담아 둔 소원이 있었지요.
그것은 언젠가는 아들하고 여행을 한번쯤 하고 싶다는 것이었지요.
항상 내 마음 속으로 더 늙기 전에 사랑하는 아들하고 단 둘이 여행을 하고 싶다
맘속으로 생각만하고 있던 차에 아들에게 전화가 왔어요.
"어머니 우리 일본 여행 갈래요?"
저는 그 말을 듣는 순간 너무 좋아서 심장이 쿵! 했지요.
하지만 "아니, 갑자기 웬 여행이야?" 물었습니다. 속으로는 정말 반가웠지요.
아들이 하는 말이 가입한 컴퓨터 까페에서 일본 여행을 가는데 "우리 갑시다."하네요.
아들아 시원이 에미 데리고 갔다 와라 했더니 시원이 에미는 배속에 또 애가 있잖아요.
여행이 무리랍니다. 아들아 혹시라도 너희 가족끼리 간다면 나를 데리고 갈 생각은 하지마라.
며느리 손자 같이 가면 좋기야 하지만 손자가 예뻐서 놀다보면 여행보다는
그만 내 몸이 귀찮아질 것 같다. 했더니 아들은 어머니랑 둘이 갈 거예요.
그런데 어머니 허리, 다리가 아파서 가시겠어요? 걱정이네요. 합니다.
아들이 어머니 날짜하고 시간 결정나면 전화드릴게요. 하고 전화를 끊었습니다.
나는 일본 여행을 4번이나 다녀왔지만 아들하고 여행을 하는 것은 목적지가 문제가 아니었어요.
나는 떠나기 전 며칠 동안 생각을 해 봤지요.
요번 사랑하는 아들과 여행이 영원히 기억에 남도록 여행 준비를 했지요.
아들 앞에서 허리야 다리야 아이고~ 소리를 안해야겠다고 맹세했지요.
진통제부터 여러 가지 약 먼저 준비하고 기다렸지요.
언젠가 우리 어머니가 살아 생전에 딸하고 제주도 여행이라도 한 번 가자 하셨는데
그만 그 소원을 못들어 드린 것이 맘에 또 걸렸습니다.
아들하고 출발하는 날.
까페 사람 20명이 출발했지요.
혼자 온 사람이 대부분이고 젊은 사람들이 많았지요.
그리고 사람들끼리 서로 잘 모르고 있기 때문에 출발할 때
까페 회장님이 같이 여행할 사람들 소개를 하는데 저와 아들을 보며
여기는 아들과 어머님이 오셨는데 아마 효도 관광인 것 같습니다.라고 말을 하네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얼마나 기분이 좋고 마음이 뿌듯한지.....
밥을 먹으러 식당에 들어갔는데 우리를 보고 같이 간 사람들이 모두 한 마디 씩을 하네요.
어떤 사람은 나도 우리 어머니랑 여행을 한 번 해야겠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어머니 살아 생전에 여행 못한 것을 후회하기도 하고,
또 보기 좋다, 부럽다 어쩜 아들과 어머니가 이렇게 다정하냐... 갖가지 말들이 쏟아졌지요.
그 모든 말들이 저의 마음을 뿌듯하게 했습니다.
3박 4일 동안 아들 손을 꼭 잡을 때마다 뭔가 모르게 흐뭇하고 믿음이 갔지요.
백화점에서 쇼핑을 할 때 어머니 이 옷 사줄까요? 아니 싫다.
그럼 저 옷은 어때요? 물어보는 아들. 나는 모두 거절했지요.
나는 마음 속으로 이 순간에 필요한 것은 옷도 맛있는 것도 아니란다.
지금 필요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단다
단지 아들 너하고 단둘이서 손잡고 여행 한번 해 보고 싶어서 왔단다하고 혼자 중얼중얼 거렸지요.
같이 간 젊은 여인네들이 보따리 보따리 싸들고 다니는 것을 보고
저 사람들은 무엇을 저렇게 사고 다니나 궁금한 생각이 들어
"아들아 너는 남자들하고 다녀 봐라 나는 저 젊은 여인들 따라 가볼게" 하고 아들의 손을 놓고 말았지요.
돌아서서 여인네들을 따라 다녀보니 곧 후회가 됩니다.
식탁보며 도마며 이런 것들을 사는 것을 따라 다니려고 여기 온 것이 아닌데 하는 마음이 들었지요.
그 생각이 드는 순간 쇼핑이 아무 것도 눈에 보이지 않고 이건 아니다 싶어
아들 손을 빨리 찾아야지 이게 무슨 짓이야하며 두리번거렸지요.
그때 전자제품을 보러 다니는 남자들 틈에서 아들도 이건 아니다 생각을 했는지
저쪽에서 헐레벌떡 뛰어 와서는 제 손을 덥석 잡는 겁니다.
아들도 어머니 내가 전자제품 보러 온 건 아니잖아요. 하네요.
그 때부터 3박 4일 여행을 아들 손 꼭잡고 효도 여행 마쳤지요.
그렇게 허리 다리가 아파도 아들과 모든 회원들 앞에서 아야 소리 한 번 안하고 잘 다녀 왔답니다.
20명 회원들이 다 부러워서 한 마디씩 해 주셨지요.
아들이 먼 훗날 나만큼 이 여행을 아름답게 기억할 수 있을까요?
우연히 발견한 서랍 속의 아들의 편지
아들아
너희 결혼할 때 내가 선택한 며느리기 때문에 지금까지 내가 할 수 있는데 까지 최선을 다한 것 같다.
이봐라~ 이 어머니가 길에 서계신 할머니한테 음료수는 쉽게 사드리지만
느 누구를 마음먹고 도울 때는 며칠 동안 신경을 써서 도움을 주는 것이다.
어머니는 너희들 결혼할 때도 헌신적이었지만 시원이 돌때도 계에서 백만원 받아
시원이 외할머니 병원에 떡하고 찰밥, 미역국 나물 과일 이런 것들을 다 해가서 다른 환자들이랑 나눠 먹었잖니.
이런 것들이 쉽게 하는 것 같지만 내가 식당일 하면서 식당음식 외에
이 음식을 다 만들어 병실에 환자들 다 드시게 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돌날 양로원에 떡이며 수박이며 해서 시원이 데리고 갔을 때
어느 양로원 할머니가 이런 말씀하셨지.
"양로원 땅만 밟아도 축복을 받는다는데 애기 돌을 여기까지 찾아 왔소. 참 고맙고 감사합니다."
말씀하시며 좋아하시던 할머니를 정말 잊을 수가 없구나.
이런 일들도 다른 사람은 쉽게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너희 내외와 시원이한테 좋을까 오래오래 생각하다가 내린 결정이었다.
어머니는 내 아들 일이라 하면 다해주고 싶다.
어려서부터 나는 아들이 참 좋았다. 그것은 너도 알고 있을 것이다.
아들아 너 여행 간다는 말에 내가 카운터에 서랍 정리를 하다가
아들이 어머니한테 글로 써보는 이야기를 보게 되었다.
여러 번 나에게 보내려 했지만 보내지 못했던 글을 아버지하고 같이 보면서
이 어머니 마음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어느 날 아들이 자세한 이야기도 없이 "시원이 애미한테 2천만 원 좀 주세요.
나 차 안 바꿀게요. 차는 있는 차 그대로 타고 다닐게요." 이렇게 이야기할 때 깜짝 놀랐다.
"이봐라 20만원도 아니고 200만원도 아니고 2천만원이 다 뭐야" 내가 물었지.
"시원이 외할머니 병원비로 좀 주세요." 아들이 대답했다.
아들 이야기를 아버지한테 했더니 아들이 아버지 생각 한번이라도 해보고 2천만원 이야기가 나온 건가?
무척 당황한 눈치였다.
아버지는 한 달 용돈으로 단돈 1000원도 못 쓰는 분이다.
2천만원이 쉽게 승낙이 안 되더라.
시원이 외할머니가 젊어서 건강할 때 같으면 아니다고 하겠는데
아들이 쓴 글을 보고 생각하다가 "아버지 며느리 2천만 원 부쳐주세요."
했더니 아버지는 아무 말씀도 없이 밖으로 나가버리셨다.
아들아 시원이 외할머니가 돌아가신 다음 아들이나 며느리가 후회 없도록 하는 게 낫겠다하고
많은 생각 끝에 결정을 하고 말았다.
아들아 다음에는 꼭 생각을 더 깊이 해봐라.
아들에게 돈을 주기로 결정을 내리고 나서 아침에 식당에서 일을 하면서 생각하니 마음이 한결 가볍고 좋더라.
내 아들이 장모님한테 효도 하는 모습은 정말 보기가 좋다.
정말 어려운 관계가 사돈이라지만 빨리 쾌차해서 건강한 모습으로 보기를 바란다.
어른 노릇하기 힘드네요
나이가 드니 하루 일에 용량이 있는 것 같네요.
젊어서는 아무리 힘들어도 하루 저녁 푹~ 잠자고 나면 괜찮았는데
지금은 조금만 무리하면 그 다음 날 병원 신세를 져야 하네요.
정말 어른 노릇하기 힘드네요.
며느리는 시어머니 생일을 매년 한 번도 안 빼고 챙겨주는데
시어머니라고 받을 수만은 없는 것 같아 며느리 생일 날 옷 선물 사고 미역국, 찰밥, 나물,
소고기, 해 놓고 막내 딸 보고 올케 생일이라고 같이 와서 밥 먹자고 했지요.
큰 딸은 멀리 살아서 오지는 못하니 언니한테 전화라도 하라고 했지요.
손자 4명이 온 집을 휘젓고 다니네요.
세탁기 안에 들어가고, 싱크대 물을 틀고, 치마를 붙잡고 이리저리 잡아 끄는데 아이고 정신 없어 @.@
그래도 혈육의 정은 이상하지요.
남의 애들이 이렇게 정신없이 떠들면 얼마나 미울까.
내 손자는 잘 생긴 놈은 잘생긴 대로 예쁘고 생긴 놈은 못생긴 대로 예쁘고
개구쟁이 손자 놈은 짓궂은 대로 예쁘고 외손녀는 조잘~ 거리는 대로 예쁘네요.
귀찮을 때도 있지만 이렇게 모여서 보면 좋기도 합니다.
또 손위나 손아래나 베푸는 것은 다 좋고 흐뭇하네.
그렇지만 이제는 그만 각자 자기 생일 했으면 싶네.
참 이상하지요. 새벽에 식당일 하고 집에 와서 좀 쉬고 내 취미 생활에 바쁜 것은
별로 안 피곤한데 왜 손자 보고 나면 그렇게 피곤한지.
그래도 이렇게 찾아 올 때가 좋은 건지......
손자가 다 커서 말썽 안 부리고 공부할 때쯤은 이 할머니는 필요 없는 꼬부랑 할머니가 되겠지요. ^^
어머니가 아들에게 바라는 글
아들아
언제나 어디서나 최선을 다하되
그 결과가 최선이 아니더라도 만족하고
정당한 노력으로 살기를 바란다.
아들아
한참을 가던 길도 이 길이 아니다 싶을 땐
주저없이 되돌아 서는 용기를 가져라.
아들아
항상 나의 주위를 배려하고
어려움에 처한 형제와 친구를 외면하지 말되
댓가를 바라지 말거라.
아들아
가끔씩은 나의 생활을 돌아보고
내가 과연 바른 길을 가는지 자신을 뒤돌아보고
생각하는 여유를 자주 가져라.
아들아
가까운 사람은 물론이고 남에게
이자를 받고 돈을 빌려 주지 말거라.
결국 돈 잃고 사람마저 잃는다.
보증서는 일 또한 이와 같다.
정말 거절하기 어려우면
나의 능력범위 안에서 그냥 도와주거라.
아들아
윤시원, 윤승원 두 아들을
항상 사랑하면서도 엄하게 키워라.
부모의 지나친 사랑은 자식의 장래를 망친다.
건강하고 바르게 자라서 자신의 능력과 소질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도와주면 된다.
아들아
형제간에 항상 오빠가 먼저 양보하고
손 위에 사람이 먼저 베풀되
그 다음은 다 잊고 지내라.
인생을 살면서 형제보다 더 가까운 동행은 없다.
우애를 아름답게 가꾸어가는 일을 게을리 마라.
아들아
돈을 모으는 것이 인생의 목표가 되는 것은 좋지만
내가 돈을 따라 다니는 것이 아니고
돈이 나를 따라 다녀야 내 길이 열리게 된단다.
아들아
내가 좋아하는 윤가네 신토불이에
한평생을 바치는 것이 아들의 행복이고 성공의 길이다.
아들아
내가 남에게 주는 것은 언젠가 내게 다시 돌아온다.
그러나 내가 남에게 던지는 것은
무서운 것이 되어서 내게 돌아오는 것을 알아라.
아들아
내 자신이 잘 살기를 바란다면
남에게 베풀 때는
내 옆에 가까이 있는데서부터 찾아라.
아들아
뚜렷한 주관과 올바른 가치관을 가지면
어떠한 인생의 위기에서도
이것이 너를 지켜주는 등불이 될 것이다.
아들아
어머니 아버지도 여태 너희들을 위해서
노력하지 않았니?
늙은 어미 애비 이제는
좀 쉬면서 삶을 마감하게 해다오.
엄마가 큰 딸에게 바라는 글
인경아
엊그제 결혼한 것 같은데 눈 깜짝할 사이에
건이가 1학년, 진이가 어린이집에 다니게 되었구나.
벌써 박서방도 40에 내 딸은 눈가에 잔주름이 보이는 것 같구나.
인경아
박서방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착한 박서방 만난 것을 항상 고맙게 생각하고 살아라.
인경아
시부모님께 친부모 못지않게 잘 하기를 바란다.
시댁이나 어느 누구 집에 방문 할 때는
절대 빈손으로 가지 말 것이며, 그것을 아까워하지 마라.
내 집에 온 손님을 빈 입으로 보내지 말고 누구든 잘 대접해라
인경아
공은 시냇물같이 흘러 내려가지 않는다.
네가 주변에 쌓은 덕은 다 건이 진이한테 돌아갈 것이다.
인경아
사람은 순리대로 살아야 하느니라.
억지로 잘살려 하면 안 된다.
사람의 욕심은 한이 없고
욕심 뒤에는 꼭 재앙이 따른다.
인경아
외할머니의 가신 길을 엄마가 따라 걷고
또 엄마가 가는 길이 머잖아 인경이 니가 걷는 길이 된단다.
그렇다면 살아가는 동안에
가장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 사람은 부모님이다.
인경아
한가지 앞으로 부탁하고 싶은것은 엄마로서
부족하고 서투른 점이 많아도 또 나이들면서
실수가 있더래도 어머니라는 존재로
이해하고 다독여 주길 부탁한다.
인경아
먼 훗날에 엄마가 없는 날에도
너희 형제 자매를 잊지 말고
인정과 은혜로서 서로서로 베풀고
어디서든 변함없이 잘하기를 바란다.
착한 박서방
결심으로 담배도 끊어서 정말 고맙네.
박서방이 술을 안 좋아하는 것 잘 알고 있지만
술은 적당이 없는 것이라네.
술자리에서는 항상 조심조심하게.
박서방 남에게 돈을 빌려 주지 말게.
결국은 돈 잃고 사람마저 잃는다네.
남에게 보증서는 일도 하지 말게.
정말 거절하기 어렵거든 박서방 자네 능력 범위 안에서
그냥 도와주게나. 꼭 부탁하네.
인경아
인생의 모든 길이 책속에 있다는 것을 알고
온 가족이 함께 책을 가까이 하도록 하여라.
건아 진아 책을 더 가까이 하기를 바란다.
인경아
너의 가정에 모든 일에 웃음만 듬뿍 있기를
어머니 아버지는 어디서든 자식들을 위해서라면
최선을 다해 하나님께 축복의 기도할게.
너의 가정 모든 일에 웃음만 담뿍 있기를....
엄마가 막내 딸에게 바라는 글
평화야
엊그제 결혼 한 것 같은데
벌써 한나, 한빈이가 이렇게 컸구나.
정서방 만나서 한 가정을 이루고 사는 것 모두가
신의 축복인 것 같구나.
평화야
정서방보다 한나 할머니 만난 것이
더 큰 축복이라고 생각하고 살아라.
한나 할머니가 평소 보다 몸이 편찮아 하실 때
내 딸의 마음에서 정성을 다해 잘 하거라.
평화야
한나 한빈이 키우면서 네가 쌓은 덕은
다 네 자식들한테 돌아가니라.
평화야
배우면서 살아가는 동안에 스승도 많지만
부모님을 존경하면서 사는 사람이 가장 큰 스승을 둔 사람이다.
외할머니에 가신 길을 엄마가 따라 걷고
또 엄마가 가는 길을 머잖아서 또 내 딸이 걷게 되겠지?
평화야
한 가지 앞으로 부탁하고 싶은 것은
부족하고 서투른 점이 많아도
실수가 있더래도 어머니라는 존재로
이해하고 다독여 주길 부탁한다.
한나 한빈이가 똑똑한 것이 뭔가 앞이 보이는 것 같구나.
앞으로 더욱더 힘을 다해 잘 키워주길 바란다.
평화야
먼 훗날에 엄마가 없는 날에도
너희 형제 오빠, 언니 자매를 잊지 말고
인정과 은혜로서 서로서로 베풀고
어디서든 변함없이 형제간에 잘하기를 바란다.
평화야
억지로 잘살라 하지 말거라.
사람은 순리대로 살아야 하느니라.
사람에 욕심은 한이 없드라
욕심 뒤에는 꼭 재앙이 따르니라.
정서방
이 장모가 부탁이 있다면 남에게 돈을 빌려 주지 말게.
결국은 돈 잃고 사람마저 잃는다네.
남에게 보증서는 일도 하지 말게.
정말 자네가 거절하기 어렵거든
정서방 자네 능력 범위 안에서 그냥 도와주게나.
이런 일들은 절대 하면 안되네, 꼭.
평화야
어머니 아버지가 너희 가정에
건강과 축복이 이루어지기를 항상 기도하마.
작은 어머니가 조카에게 바라는 글
현진아
작은 어머니는 너를 이서방과 짝을 맺어주고
잘 사는 모습을 볼 때마다 얼마나 흐뭇한지.
네가 이서방 만나 사는 것도
너의 아버지 어머니가 깔아 놓은 덕이 아닌가 싶다.
착한 이서방 만나 종현이 다연이 네 식구가
웃음 속에 옹기종기 사는 것도 하늘에 축복이 아닌가 싶다.
현진아
종현이 큰아빠 다연이 큰엄마를 너의 친부모 못잖게 잘 해라.
시부모님으로 생각하고 모시기를 바란다.
종현이 큰 집은 작은 것부터 큰 것 까지도 절대 아까워하지 말라. 조카 애들까지도 찾아서 챙겨주길 바란다.
현진아
공은 시내물같이 흘러 내려가지 않는다.
내 주변에 쌓은 덕은 다 종현 다연이한테 돌아갈 것이다.
현진아.
억지로 잘 살려고 하지마라.
사람은 순리대로 살아야 하느니라.
사람에 욕심은 한이 없더라.
욕심 뒤에는 꼭 재앙이 따르더라.
현진아
종현이 다연이는 햇님과 달님 같이
세상에서 제일 착하고 올바른 아이로 키워주길 바란다.
이서방.
아내를 팔아서 친구 산다는 말이 있는데
자네는 친구를 잘 둬서 현진이 아내를 만났으니
자네 인생을 잘 살았다고 생각되네.
이서방
이 작은 어머니가 부탁이 꼭 있네
남에게 돈을 빌려주지 말게나.
결국은 돈 잃고 사람마저 잃는다네.
남에게 보증서는 일도 하지 말게.
정말 거절하기 어렵거든 이서방 자네 능력 범위 안에서
그냥 도와주게나.
이서방 이런 일들은 절대 하면 안 되네.
꼭 부탁이네.
현진아
이서방 작은 아버지 작은 어머니는
너희들 잘 사는 것을 바라보며 기뻐하고 있단다.
너의 가정에 평화를 위해 기도할게.
제 4 부
인생의 동반자와 함께
부부의 마음
부부의 마음
이세상에서 가장 아름 다운
단어는 아버지와 어머니입니다.
언제나 최선을 다한
우리부부가 살아가는 모습이 정말 자랑스럽습니다.
언제나 부부는 무얼해도
이 세상에 아름답게 남아있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이 소중한 순간들을 부부는 항상 마음을 비워두고 싶습니다.
그러나 부부가 늘어가는 모습은 정말 안타깝기만 합니다.
부부는 이세상이 허무할 때
때로는 눈물 흘리며 사는 삶을 건강하게 해달라고
두 손 모아 기도합니다.
윤영식 곽옥순 부부글2007년3월14일
신토불이 주방을 지켜준 사람들
어느 덧 식당 생활 10년이 넘었다.
매일 아침, 주인은 항상 순수하고 장사에 때가 묻지 않아야 한다고 결심한다.
언제나 베푸는 마음으로 손님에게 최고의 접대를 해야 한다.
첫째, 주인은 청결함은 물론이고 음식 맛에도 진실을 놓치면 안 된다.
주인은 종업원에게도 진실을 주어야 한다.
진실이 없는 곳에는 그 누구도 있을 수가 없다.
이제는 일도 힘에 부쳐 누구에게 넘기려고 해도 식당 10년이 넘어도 주방을 인수할 이모가 없다.
음식을 해 놓으면 손맛이 나는 이모가 잘 없다.
그 많은 이모들이 거쳐 갔지만 기억에 남는 이모를 손꼽으라고 하면 몇 명이나 될까?
혜인이. 정말 일을 잘 했다. 잊을 수가 없다.
관광철에 그 많은 손님을 다 받아쳤으니 말이다. 정말 고맙게 일을 잘 했다.
혜인이가 3년이 넘게 일을 잘 해냈다.
그런데 술이 과해서 결국은 신토불이를 떠나고 말았다.
그 후 얼마 지나고 새벽에 신토불이를 왔을 때
아버지는 혜인이를 보자 반가워서 어쩔 줄 몰라 하시며 지갑에 돈이 5만원 있다
하시며 집에 과일 사가라 했더니 혜인이는 그만 한없는 눈물을 쏟아냈다.
혜인이 다음에 또 누가 기억에 남겠는가?
민규이모. 나이는 어리지만 일하는 머리가 잘 돌아가고 청소를 구석구석 정말 잘한다.
주인 못지않게 진실하게 일을 잘 한다. 물론 일도 잘 하겠지만 그 마음 진실이 정말 부럽다.
매사에 그 진실을 누구에게도 비할 수가 없다.
남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다는 것은 물질적 재산보다 더 크다.
민규 다음에 우진이다. 우진이는 중국 남자 학생이다.
중국 학생들이 아르바이트를 많이 했지만 우진이를 가장 먼저 꼽는다.
이 아이는 일도 잘 하지만 마음 씀씀이가 착하고 누구에게나 인정받는 아이다.
민규, 우진이는 성격이 비슷하다.
그 다음에 우리 가족 같은 이모 진우다.
지금 5년째에 접어들었다.
진우는 성격이 온순하고 정말 착하다.
우리 식구가 진우만은 우리 가족으로 생각하고 있다.
이제는 진우가 쉬는 날에는 주방이 텅 빈 것 같다.
누가 봐도 진우는 다 착하다고 인정 할 정도이다.
식당이 문을 연지 10년이 넘었지만 기억에 남는 주방이모라하면 4명 정도 손꼽는다.
"진우야, 앞으로 언제까지일지는 모르지만 가는 날까지 함께가자."
이 4명은 길가다가 부딪혀도 빈손으로 보내면 안 된다.
내 가족같이 잊을 수 없는 이모들.
노부부는 주방 불 속에서
사람도 진실이 있어야 하듯이 음식은 더욱~ 더 진실과 정성이 담겨야 제 맛이 나지요.
저는 어머니 음식 솜씨를 좀 물려 받아 음식하는 걸 좀 좋아하지요.
예전에는 계도 항상 집에서 친구들이 날 보고만 하라했지요.
된장 보글보글 끓이고 쌈에다 겉저리에다 소불고기에다 맛나게 차려놓지요.
계를 끝내고 친구들을 보낼 때는 떡이라도 한 되 해서 빈손으로 안 보내고 봉지 봉지 싸주지요.
친구들 불러 먹이고 싸주고 보내면 내 마음이 참 흐뭇했지요.
요새는 나이도 들고 식당일에 바빠서 게을러 지내요.
나이 60 중반이 되니 다른 친구들은 두 식구 밥도 해 먹기 싫어서 과일로 한 때 떼운다는데
이 나이에 새벽에 일어나기 싫어도 4시면 눈 떠 식당에 5시 30분에 도착해서
노부부는 부지런히 일을 시작하지요.
음식 다 해놓고 나면 정말 보기 좋고 내가 한 음식이지만 흐뭇해요.
9시 30분까지 어느 정도 일이 마무리가 되면 이모들이 세 명이 들어와 자기 할 일들을 찾아 합니다.
또 어느 정도 끝나면 아르바이트 애들이 오기 시작하지요.
점심시간엔 눈코 뜰새없이 바빠지기 시작합니다.
식당일중에 제일 어려운 것이 종업원 관리지요.
알바까지 15명이 되니 사람 성격에 치어 제일 힘들지요.
노부부는 오후 6시면 집에 들어오고 6시부터는 아들이 새벽 1시까지 마무리 하지요.
나이에 비하면 정말 힘든 일이지만 그래도 이 나이에 할 일이 있다는 것에 감사합니다.
제일 보람있는 것은 손님이 줄~줄 줄을 이어 있을 때가 흐뭇하지요.
어느 장사고 자기의 운이 따라 줘야 잘 된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음식이 맛이 있어도 손님이 안 따라주면 어쩔 수 없지요. 항상 고맙고 감사하지요.
어떤 음식을 하면 맛있겠다 생각을 하면서도 늙은 내가 몸이 안 따라줘서 못하고 포기할 때가 많지요.
이럴 때는 내가 좀 더 젊었으면 하고 안타깝지요.
식당은 제일 기본이 주인이 주방음식을 다할 줄 알아야 종업원을 다스리게 되지요.
주인이 정갈스런 성격이며 종업원도 따라서 정갈스럽지요.
우리는 여름 장사 한 대목을 보지요.
아들 아버지는 새벽 3시 30분에 시장을 봐와서 노부부는 이 더운 여름 날에
제일 큰 주방 가스 불 4개를 켜서 일하는데 종종 내 자신의 모습을 볼 때 꼭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아들이 식당을 하는 일이기 때문에 부모가 안 도와 줄 수가 없네요.
그래도 자식들은 당연하게 부모가 해 줄줄 알고 있으니 아버지는 아들한테 칭찬 한 번 못 들어보지요.
첫째는 종업원이 부모같이 일해주는 사람이 없으니 어쩔수가 없어 이제는
그만 노부부가 여행도 다니면서 남은 인생 편하게 살고 싶어요.
자식이 뭐길래 이렇게까지 해야 되는가?
이 나이에는 남은 재산 쓰다가 저 먼 곳에서 나를 부를 때는 아프지도 말고
서러워하지도 말고 자는 잠에 조용히 가고 싶어요.
뭐라고 부르시나요?
일요일 날 결혼 손님 140명이 예약이 되어 있었습니다.
11시 예식이라서 11시까지 준비를 끝내려하니 정말 바빴지요.
그런데다가 손님들이 예식도 안보고 식당에 들이닥쳐서 정신이 하나도 없었지요.
애들 아버지가 홀에서 저를 부릅니다.
"엄마~~~~"
"예, 아버지~~~"
또, 저도 급하게 애들 아버지를 부릅니다.
"아버지~~~"
"왜, 엄마~~~"
지켜보던 손님들이 깔깔 웃고 난리가 났습니다.
도대체 두 분이 무슨 사이냐고 농담도 합니다.
젊어서는 서로가 여보 당신으로 대화를 했지만 요새는 종업원들이
우리를 아버지, 엄마하고 부르니 자연스럽게 우리도 서로를 그렇게 부르게 되었지요.
요새는 아들이 나이 40이 되니 아들 이름 부르기도 그렇게 자연스럽지가 않네요.
시원이 애비야, 며느리도 시원이 에미야, 이렇게 부릅니다.
또 딸도 마찬가지로 자연스럽게 애들 이름이 불러집니다.
호칭이라는 것이 참 쉬운 것 같으면서도 어려운 것 같습니다.
이제까지는 부르기 쉬운대로 불렀지만 앞으로는 바로 잡아야겠지요.
호칭이란 것이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지만 작은 것에 속이 상하기도 하고 기분이 좋아지기도 하지요.
어제 텔레비전에서도 거기에 대해 이야기를 하더라구요.
전에 끝말잇기 방에 이 이야기를 한 번 올렸는데 집집마다 호칭이 다 달라서 너무 많이 웃었습니다.
우리 60대 님들은 다들 어떻게 부르시나요?
저도 금메달 땄습니다.
지금 살아온 인생에서 한 치의 후회도 없이 살아왔다고 할까요?
자식들 혼사 문제까지도 제가 바라는 대로 다 이루었으니까요.
그런데 단!! 내 남편의 고집을 이제까지 이겨내지를 못하고 살아왔지요.
이 고집이 나오면 꼭 말다툼을 하고 말지요.
이런 지독한 고집이 나오면 대화가 안 되서 숨이 막힐 정도지요.
다른 데는 고칠 데가 한 가지도 없습니다. 이 고집이 문제지요.
싸우고 난 뒤는 내 자신이 더 괴롭습니다.
우리 늙어 가면서 이제까지 살아온 세월보다 앞으로 살아갈 세월이 더 작게 남았는데
싶어서 어느 날 음식을 맛있게 해 둘이 식사를 한 다음에 "여보 오늘 내가 법회를 한 번 할게요."
남편이 배가 부르니 기분이 좋아서 하라고 합니다.
남편은 아직까지도 나를 얼마나 아끼고 사랑하는지 모릅니다.
죽어서 다섯 번을 다시 태어나도 다섯 번을 모두 저랑 결혼을 하겠다고 합니다.
그리고 여섯 번째는 그냥 놓아주겠다고 하네요.
왜 그러냐고 하니까 여섯 번째 만나면 자기는 결혼을 안 하고 다른 사람이랑 어떻게 사는지
지켜보다가 그 신랑이 나한테 잘못하면 그때는 다시 또 나를 데리고 와서 같이 살겠다고 하지요.
그 얘기를 하면서 당신이 나를 얼마나 좋아하느냐 그런데 그 고집이 나오면 꼭 싸워야 되느냐고 물었지요.
정말 사랑하면 앞으로 남은 인생 안 싸우고 살 수 없을까요?
더운 올 여름에 안 싸우고 살 수 없을까요?
했더니 그래 올 여름에 안 싸우고 당신 말에 순응할게 다짐을 받았습니다.
그 말을 하고 나서는 올여름에 이 고집이 순간순간 나올 때 본인이 노력하는 게 보였습니다.
나는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칭찬을 하고 더 잘해 주었지요.
왜 남자는 나이가 드니 7살 먹은 내 손자하고 똑같아요.
올 여름내 칭찬을 아끼지 않고 해 주었더니 싸움 한번 안 하고 잘 지냈습니다.
내 남편도 올여름에 더운지도 모르고 났답니다.
저도 역시 마찬가지지요.
늙어서 이제는 싸울 기력도 없답니다.^^
60대 님들도 한번 써먹어 보세요.
칭찬을 아끼지 말고 그리하면 절대로 안 변할 것 같은 사람도 변할 겁니다.
서로 이해하고 아끼면서 다정하게 살아가는 모습!
이게 바로 금메달 아닐까요?
제 5 부
귀여운 손자 손녀들
지구별의 아가, 윤시원
밝은 세상 등불을 켜려고 새생명 하나 왔어요.
어디서 왔는지 눈도 두 개 귀도 두 개
코도 하나 입도 하나 세상에서 젤 잘 생긴
꼬추도 하나 못난 것 하나 없이 둥글
둥글 말랑 말랑 신기한 것 만으로 어디를
딛고 왔는지 뽀오얗게 밝은 세상에서
젤로 앙증스런 두 개의 손 !
두 손 두 발로 바쁘게 지구별을 온통 환하게 빛내기를...
윤시원 탄생을 축하 하면서
할머니가~~``2007년2월15일오전10시20분생일
서로서로 마주보고
종현이 다연이의 웃음 속에
엄마 아빠 웃는 얼굴이 잠겨있다.
엄마 아빠의 웃음 속에
종현이 다연이의 웃는 얼굴이 잠겨있다.
서로 서로 마주보고
사랑으로 웃고 있다.
서로 서로 마주보고
엄마 닮았다
아빠 닮았다.
떨어져서 못사는,
서로 서로 마주보는,
종현이 다연이 엄마 아빠
이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종현이 다연이 모습이
엄마 아빠 닮았네.
이종현 2004년 2월 11일 오후 4시
이다연 2008년 8월 6일 오전 11시
작은 집 할머니가 종현이 다연이한테
손자, 손녀가 예뻐서
둥근 얼굴 탐스런 손녀,손자가 아름다운가?
꽃이 아름다운가?
내 손자는 향기를 뿜는가?
두 손자가 꼭 누구를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구나!
결혼식 하던 날 예쁜 드레스, 예쁜 한복입고
눈부신 웃음웃던 아빠, 엄마를 꼭 닮았구나
아빠 엄마 같은 마음씨 따뜻한 사랑까지 닮았구나.
2008년 4월3일 외할머니가
쑥쑥 튼튼하게
엄마 사랑
아빠 의지 닮았네......
손자. 시원이 승원이 보면
초롱초롱 두 눈이 빛나는
시원이 승원이
눈, 코, 입이 쏘옥
엄마 아빠 닮았네......
엄마 아빠
시원이 승원이 눈길 모아
토닥토닥 잠재우네......
시원이 승원이
보고 또 봐도
자꾸만 보고 싶네......
할머니는 시원이 승원이 보고
예쁘게 예쁘게
쑥쑥 자라라고 당부하네......
할아버지는 시원이 승원이 보고
토실토실
무럭무럭 자라라고
예수님께 기도하네......
윤시원 2007년 2월 15일 오전 10시 20분
윤승원 2008년 9월 3일 오전 9시 5분
건이랑 진이랑
건아! 진아! 이 세상 수많은 말 중에서
아빠~엄마처럼 정겨운 말이 또 있을까?
아빠~엄마하고 불러보면 정겨움이 솜사탕처럼
묻어난다.
건아! 진아!
세상의 수많은 말 중에서 손자라는
말처럼 깨끗한 말이 또 있을까?
손자야! 아가야! 불러보면
옹달샘처럼 마음속까지 보인다.
건아! 진아!
아빠, 엄마처럼 산다면
세상은 솜사탕처럼 달콤해지고
손자처럼 산다면 세상은 옹달샘처럼 맑아질 테고~``~``````````
빙그레 웃으며 살자~~~~~~~~~~~~```````
``~~~`~할머니가~```~~~~
<< 후기>>
내가 살아온 생활을 누가 자세히 알겠는가?
겉으로 보면 화려하게 살면서 자기 모양만 부리고 살아 온 줄 알겠지만
컴퓨터를 배워 카페에 가입해서 글을 하나하나 올리다가 어느 날엔가
'아, 내 책을 만들면 되겠다' 싶어 만들어 보았다.
이 글은 내 인생을 하나하나 정리 하고, 내 삶을 뒤돌아보며
스스로 느낀 것을 감추지 않고 있는 그대로 내가 생각하고 느낀대로 쓴 글이기
때문에 모자라는 점이 많더라도 양해를 해 주기 바란다.
글을 쓰면서 얼마나 많은 눈물을 쏟아냈는지 나의 마음을 누가 알수 있겠는가?
눈이 침침하여 한자 한자 꿰어 쓰는 동안 글을 쓰는일에 전문가가 아니니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른다.
그 동안 내가 일일이 쓴 글들을 한권의 책으로 엮어내고 나니
나 스스로가 참으로 대견스롭고 자랑스럽다.
그동안의 노고에 홀가분하기도 하고, 허탈하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