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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표지 앞면
제11회 과천향토사료전 도록
사진으로 보는 과천 사람
-가족․이웃․친구-
6번사진
과천문화원
제11회 과천향토사료전 도록
사진으로 보는 과천 사람
-가족․이웃․친구-
기간 2009.10.6(월)~11(일)
장소 과천시민회관 2층 전시실
주최 과천시
주관 과천문화원․과천향토사연구회
초대의 말씀
2009.10
과천향토사연구회장 이정찬
격려의 말씀
제11회 과천향토사료전 「사진으로보는 과천사람 -가족․이웃․친구-」 전시회 개최를 축하드립니다. 과천향토사연구회는 1998부터 매년 우리 고장의 향토 자료를 수집, 정리, 연구하여 그 결과를 매년 시민들에게 발표하여 왔습니다. 올해로 11회를 맞는 과천향토사료전은 과천의 1960~80년대 사진자료를 중심으로 근현대 과천을 일구어온 사람들의 생활모습을 담아 전시회를 마련하였습니다.
많은 분들이 기증하여 주신 빛바랜 옛 사진 속에는 그 시대의 숨결이 되살아나 숨 쉬고 있습니다. 소박한 이런 사진 한 장도 과천의 역사와 삶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소중한 자료입니다. 또한 이번 전시회는 우리들의 아련한 추억들을 회상할 수 있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과천향토사료전을 위해 협조해 주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우선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는 과천시장님과 시의회 의장님께 감사드립니다. 옛 사진을 기증하신 시민분들께도 거듭 감사드립니다. 전시를 담당한 과천향토사연구회 이정찬 회장을 비롯하여 과천향토사연구회 회원들의 노고를 치하 드립니다.
2009년 10월 일
과천문화원장 최종수
축하의 말씀
2009.10
과천시장
축하의 말씀
2009.10
과천시의회의장 백남철
[백지]
사진 여러개 조합에서
배경사진으로..
목차
인사말
초대의 말씀 이정찬(과천향토사연구회장) ……
격려의 말씀 최종수(과천문화원장) ……
축하의 말씀 과천시장 ……
축하의 말씀 백남철(과천시의회 의장) ……
제1부 세월 속의 그 인물
제2부 가족
제3부 어린 시절
제4부 일상생활
제5부 생업, 새마을운동
제6부 광창마을 부녀회
제7부 나들이
과천면 시절의 생활상
[백지]
[도비라]
제1부
세월 속의 그 인물
(배경사진) 14번 사진
1. 문원동 새터말의 큰 어른 1930년대
새터말의 강의영이 정자관에 두루마기를 입고 정좌하고 있다. 사진은 마치 전통사회의 초상화가 연상되는데, 이런 류의 사진을 한국 사진사에서는 초상용 사진이라 한다.
1-1. 최병훈 1930년대
1-2 1940년대
일제 말기 일본군으로 강제 징병된 과천 청년들이 연주대를 배경으로 찍은 단체사진. 머리에 일장기를 그린 머리띠를 두르거나 다리엔 각반을 착용하고 있다.
3. 과천면 노인회 단체사진 1948.음력 12. 15.
4. 광창마을 어른 김귀성 1940년대
5. 광창마을 김귀성 어른 부인 최아지 1940년대
아지(阿只)는 아기라는 우리말을 한자로 표현한 것으로, 어린아이를 뜻한다. ‘아기’라는 여자 이름은 전통사회에서 많이 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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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소와 노인 1973년
문원1리에 거주하던 김필선 노인(당시 78세)이 추심경(秋深耕 가을 깊이갈이) 대회 중 쇠죽을 먹이고 있다. 사진 중앙에는 ‘새마을 건설’이란 알림판이 보인다. 추경은 본래 봄에 하는 것이지만, 가을 추수 후 즉시 하게 되면 토양의 풍화작용으로 수확이 늘어나기 때문에 가을깊이갈이를 많이 하였다.
7. 온온사 앞에서 담소를 나누며 1970년대 중반
온온사 앞에서 담소를 나누는 장면. 왼쪽에서 두 번째 인물은 이승태, 그 오른쪽이 홍광표(1970년대 초 부면장 역임), 맨오른쪽은 강신배이다. 정황으로 보아 이장회의가 끝난 후 담소를 즐기는 것으로 보인다.
8. 농민회관 앞의 여성 1973년 가을
관문리 농민회관의 모습. 농민회관 앞의 벽보판에는 1973년 6월 23일, 박정희 대통령의 UN남북 동시가입과 평화통일에 관한 특별선언이 붙어있다.
당시 농민회관은 정부보조로 블록조에 슬레이트 지붕을 얹어 만든 것이 보통이었다. 관문리 농민회관은 현재 10단지 과천은파교회(중앙동 72번지 소재) 쯤에 있었다. 이 농민회관은 정부 보조금이 삭감되면서 문을 닫았다고 한다.
9. 귀향 1974년
월남전에 참전하고 고향으로 돌아온 삼부골(삼포마을)의 강호석(당시 28세). 자신의 집 앞(오른쪽 기와집)에서 양복을 입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10. 대문 앞에서
광창마을 최고의 부자였던 김복동(金福童). 전대에는 재산이 거의 없었으나, 당대에 땔나무 장사로 두섬지기(약 만평) 농토를 마련하여 부를 일구었다. 광창마을에서 자수성가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11. 광창마을 대표 선수단 1956년경
시흥군 과천면 시절, 마을대항 축구대회에 참석한 광창마을 대표선수단의 모습이다. 사진 앞줄 맨 오른쪽은 송인창, 두 번째는 송점석, 맨 왼쪽은 홍순백이며, 뒷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는 송창호, 세 번째는 송인관, 맨 왼쪽은 송효식(송성민 선친)이라 한다.
당시 광창마을 축구선수로 활동한 송인관 씨의 회고에 의하면, 과천면내에서는 광창마을과 문원3리가 늘 1, 2등을 다투었다고 한다. 그에 따르면, 5·16 후 과천면에서 광창마을이 우승하여 시흥군축구대회에 출전하였다고 한다. 당시는 제18대 김정규(金正圭) 면장(1961.6.30∼1967.3.14 재임)도 면대항 시흥군체육대회에 참석하여 응원하였다 한다. 그런데 안양면 대표와 맞붙은 광창마을축구선수단은 전반전을 0:0으로 비겼으나, 후반전에 5:0으로 완패를 당했다한다. 그도 그럴 것이 안양면 선수는 모두 축구화를 신고 국가대표도 2명이었던데 반해, 과천면 대표였던 광창마을 선수들은 운동화를 신고 경기에 임하였다고 한다.
12. 경찰 인사 방문 1970년대 중반
문원1리 새마을회관 앞에서 경찰 고위 인사 방문기념 단체사진.
중앙에 새마을 모자를 쓴 이가 오화선 면장이다.
13. 면장과 면서기 1970년대 중반
오화선 면장(1973.6~1975.12 재임)은 갈현리 가일 출신의 공직자로, 본관은 해주(海州)로 봉묵(奉黙)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과천초교를 30회로 졸업하였다. 1950년 경성전기회사에 다니다 1952년 김혜숙(金惠淑)과 결혼하였다. 그 후 공직생활을 시작하여 과천을 중심으로 안양, 광명 등 인근 지역에서 공직 생활을 계속하다 1961년부터 1960년대 말까지 과천면 부면장을 두 차례 역임하였다. 1973년 6월 10일부터 1975년 12월 22일까지 2년 6개월간 과천면장을 지냈다. 과천면장으로 재임시 새마을 운동 등 지역사회의 개발에 기여하였다.
가족 사진첩은 면장 재임 기간 중 퇴비증산, 호맥 재배, 농로보수, 제방보수, 연료채취 시범, 추곡수매 등 1970년대 초중반 과천지역의 새마을운동의 실상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된다. 그 후 지역사회에서의 봉사를 위해 과천라이온스클럽 제4대 회장을 역임하였고, 과천향교 사무장으로 재직하기도 하였는데, 1989년 작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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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위문품을 받고 기뻐하는 구세군 양로원의 어르신들
구세군과천양로원은 1968년 서울에서 이전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양로원으로 쓰였던 기와집은 고종의 측근으로 형조판서, 궁내부특진관, 귀족원경 등을 역임한 김규홍(金奎弘 1845~?, 본관 청풍) 대감의 99간 집으로 전해진다.
15. 보건사회부장관의 양로원 방문 1980년대 초반
1980년대 초반 김정례 보건사회부장관(1982∼1985 재임)이 구세군과천양로원에 위문품을 전달하고 있다.
16. 문원3리 대표 선수들 1970년대 후반
문원3리 새마을회관을 배경으로 과천면 체육대회에서 종합우승을 기념하여 찍은 기념사진. 앞줄 맨 왼쪽부터 석용식, 정복용, 김한기, 심재원, 문광배, 이명국이며, 뒷줄은 맨 왼쪽부터 이태준, 김강섭, 정재성, 이희준, 유태근, 심명섭 이장(모자 쓴 이), 유귀종, 노영호 등이며, 맨 오른쪽에 우승 깃발을 들고 있는 이는 소능석이다.
17. 과천의 교직원 1977년 6월
문원동 사태말 자택 앞(현재 문원초등학교 근방)에서 조상준 교사(과천초등학교)의 모친 회갑연을 축하하기 위하여 교직원들이 모여 찍은 기념사진. 왼쪽부터 조상준(현 부림동 거주), 강신웅, 왼쪽에서 4번째가 장흥렬(장흥수 과천면장의 사촌형)이다.
18. 오토바이에 걸터 앉아 1980년 겨울
서울대공원이 건설되기 전 막계리의 비포장도로에서 담소를 나누는 모습으로, 왼쪽부터 유용철(현 과천시 위민봉사회 회장), 최명용, 김성문.
김성문 씨 소장 사진첩을 참고하면, 이날 막계리의 개울가에서 재미삼아 개구리를 잡았음을 알 수 있다.
19. 학부모 달리기대회 1984년 10월 6일
과천초등학교 가을운동회 학무모 달리기대회에 출전하여 전력질주를 하고 있는 김성문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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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어르신의 윳놀이 2008년 2월 7일
정월 대보름에 갈현동 척사대회 중 윷을 날리시는 이용진
[도비라]
제2부 가족
23번 사진
21. 오화선 일가 1950년대 중반
오화선(전 과천면장)의 부모님, 누이, 동생들과 함께 찍은 가족사진 왼쪽에서 2번째가 오화선, 아이를 안고 있는 부친은 오봉묵, 모친 이효순.
22. 매제와 찍은 기념사진 1960년대 초반
오른쪽 중절모의 신사가 오화선이며 여동생과 군복을 입은 그녀의 남편이 함께 들판을 바라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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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갈현동 모템말 이태종 가족 1960년대 초반
갈현동 모템말(현 우정병원 부근 모퉁이) 자택에서 어머니와 동생, 자녀들과 함께 찍은 가족사진. 가운데 아이를 안고 있는 이가 이태종, 그 오른쪽으로 어머니 최순희, 아내 남궁소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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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자매 1960년대 중반
삼부골 강호석의 누이들. 왼쪽부터 강옥진, 큰 누이 강옥림, 강옥민.
25. 금메달리스트의 유아기 1970년
1994년 아시아경기대회 레스링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고 송성일(1969.8.8~1995)의 1살 유아시절 사진. 가운데 김성문씨 부부가 어린 송성일을 안고 있다. 그는 일본 히로시마에서 개최한 제12회 아시아경기대회에 위암 말기의 몸으로 그레코로만형 100kg급에서 금메달을 획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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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회갑잔치 1974년
막계동(현 서울대공원 썰매장 부근) 오광만의 회갑기념 사진. 이 사진의 등장인물은 총 37명으로, 회갑잔치의 주인공 부부를 비롯한 일가친척이다.
가운데 큰상차림을 고배상(高排床)이라 한다. 이 회갑잔치에는 한 자 반 높이로 잔치음식을 차렸는데, 가운데에는 회갑(回甲), 만수무강이라고 새김무늬를 넣은 음식을 늘어놓았다. 고배상의 좌우에는 손님상이 보이며, 왼쪽에는 여흥을 위한 장고(長鼓)가, 고배상 앞 좌우에는 큰 떡이 놓여있다.
27. 송성민 가족 1981년
광창마을은 회덕 송씨의 집성촌으로, 사진은 종손 송성민(宋聖民)의 가족 사진이다. 오른쪽 신사복을 입은 이가 송성민이며, 그 왼쪽이 어머니 김인자씨, 그리고 동생들(성용, 성배, 미자, 미라)이다.
28. 송인섭 가족 1981년 10월
가운데 의자 앉아 있는 어머니 김채란(당시 71세)을 중심으로 찍은 광창마을 송인섭 가족 사진. 어머니 김채란은 1970년대에 새마을지도자를 역임하였다. 맨 왼쪽부터 송인섭, 처 이명숙, 딸 현주와 순영, 아들 범식과 문식.
29. 송인영 가족 1981년
광창마을 송현근의 아들인 송인영의 가족사진. 처 도남길과 당시 3살과 1살인 은향과 운식.
30. 송금수 가족 1981년
어머니 김노말(金老末), 여동생 송원숙과 함께 자택에서 찍은 기념사진. 인물 앞뒤로 선인장 등의 화분과 화초가 있고, 오른쪽의 송금수(宋今洙)씨는 꽃을 쥐고 있어 가족의 정감을 더하고 있다.
31. 설날 가족 풍경 1988년 2월
손자의 출산을 기뻐하며 온가족이 찍은 조상준씨 가족사진. 맨왼쪽이 조치환, 가운데는 어머니 김영례, 손자를 안고 있는 아내 정명숙와 그 뒤로 조상준. 아이가 색동옷을 입고 있어서 설날의 분위기를 더하고 있다.
[도비라]
제3부 어린시절
(배경사진)
33번 사진
32. 육남매 1950년대 후반
왼쪽부터 강두석, 강한석, 강호석(1946년생)과 누이들이 주암2동 삼부골 마당에서 집을 배경으로 찍은 이동사진관 사진. 이 소년들이 성장해서 강두석(1948년생)은 기업체 사장, 강한석(육사 34기, 1953년생)은 사단장이 되었다. 큰누이 강옥림은 함께 사진을 찍지 못했다.
이동사진관은 1950~60년대에 많이 사용되었는데, 명승고적 그림을 150호 정도의 극장간판 처럼 그려 리어카 위에 설치하여 그 앞에서 사진을 찍게 한 것으로, ‘이동사진관’ ‘움직이는 명승고적’이라 하였다. 이 사진에서는 명승고적이 아니라, 표범 박제가 사용되어 사실감을 더하고 있다.
33. 삼부골 아이들 1950년대 후반
주암2동 삼부골 강신배씨의 자료제들인 강평석, 강은주와 사촌들.
34. 두 소녀 1970년대 초반
한일중학교 가을 소풍. 조상준의 딸 조미향(왼쪽)이 친구와 함께 연주암을 배경으로 찍은 기념사진. 소풍가방과 플라스틱 물병을 어깨에 메고, 한 곳을 응시하는 두 소녀의 단정한 옷차림의 흑백사진이 명암을 더하고 있다.
35. 계곡에서의 물놀이 1970년대
여름 관악산 입구 계곡에서 물놀이를 즐기고 있는 아이들. 오른쪽부터 조상준의 막내아들 조치만, 둘째딸 조신형, 이종사촌 고상도, 셋째딸 조원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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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광창마을 김복동씨 손자들 1970년대 중반
한옥 안채의 부엌 앞에서 왼쪽부터 김병건, 김인건, 김남웅.
[도비라]
제4부 일상생활
(배경사진)
38번 사진
37. 채소 다듬는 풍경 1970년대 초반
문원동 사태말 집 마당(현재 문원초등학교 부근)에서 채소를 다듬는 조상준의 어머니(김영례)와 아내(정명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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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막걸리 한잔의 여유 1980년대 초
광창마을, 집마당에서의 조촐한 술자리. 왼쪽부터 송억산, 송억천 쌍둥이 형제, 김복동의 막내아우, 차자춘.
39. 휴식 1960년대 초반
과천면사무소 앞 잔디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직원들. 가운데가 1970년대 초반 과천면 부면장을 역임한 홍광표이다. 면사무소 우측으로 과천면의회 건물이 보인다.
40. 중학생 1970년대
한일중학교(과천여고, 과천외고의 전신) 학생들이 식목일 행사를 마치고 절제된 걸음으로 나무심기 행사장으로 향하는 장면. 교문 에는 “유실수 조림으로 새마을 가꾸자”라는 식목일 현수막이 걸려 있다.
41. 바둑 1970년대
구세군양로원에서 여가로 바둑을 즐기고 계시는 어르신들.
42. 천렵 1978년 7월
농사일 중간 여름 복날에 휴식을 취하면서 천렵을 하고 가마솥에 탕을 끓이는 모습. 왼쪽이 송억산, 오른쪽이 김성문이며, 뒤에 있는 이는 이원갑이다. 런닝서츠와 웃통을 벗은 모습, 냇가의 돌을 바친 큰 가마솥의 끓는 김은 한여름 천렵의 분위기를 더하고 있다.
43. 상여놀이 1990년대 초반
갈현동 가루개에서 마을 상여를 마련한 후 최연장자인 이용진 어르신을 태우고 마을을 한 바퀴 도는 상여놀이 모습.
상여놀이는 마을에서 공동으로 상여를 새로 마련한 후 마을을 돌면서 집집마다 액막이를 하는 것을 말한다. 이에 집집마다 성금을 모아 상여를 산 자금에 충당하기도 하였다.
44. 상석 운반 1997년
김성문씨 선친 김복동의 묘역 조성을 위해 우면산에 상석을 나르고 있는 모습.
[도비라]
제5부
생업과 새마을운동
(배경사진)
53번 사진
45. 퇴비운반 1960년대 중반
갈현동 집 인근에서 퇴비와 집수리를 위한 흙을 나르고 있는 이태종, 박주영.
46. 하루의 농사를 마치고 1960년대 후반
문원동 구리안에서 농사일을 마치고 귀가하는 윤재로(문원동에서 음식점 운영)의 어머니와 고모. 당시 농사일 품앗이를 한 후 감자나 고구마 등 먹을거리를 얻어 바구니에 이고 가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한다.
47. 창고 담 수리 1970년대 초반
막계동 박순만씨가 집 창고 담장을 수리하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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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뒷골 마을 길 확장 1972년 3월
하2리 주민들이 마을 안길 넓히기 공사에 참여하고 있다. 주민들은 선바위와 뒷골주민이며, 오른쪽 위 봉우리는 우면산이다. 사진 중앙의 길가엔 ‘협동정신 발휘하여 새마을 건설하자’라는 새마을운동 표어 현수막이 걸려있다.
49. 여성들의 새마을 작업 1973년 4월
양재천 개울의 제방 보수를 위해 여성들이 냇가에서 돌을 주워 이고 가는 모습.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송성민의 어머니 김인자씨이다. 커다란 빗자루와 쇠스랑을 오른손에 든 모습도 보인다.
50. 농로보수 1973년 9월
농로보수에 출역한 막계리 주민들. 사진 왼편으로는 코스모스가 피어있는데, 가운데 길은 막계1리로 가는 길이다.
51. 하계퇴비증산대회 1973년
관문천변에서의 하계퇴비증산대회. 퇴비 증산은 1970년대 새마을운동의 핵심 추진과제 중의 하나로 효과적인 미곡 식량 증산과 농가소득의 증대를 위해 전국적 차원에서 추진되었다. 퇴비증산, 통일벼의 재배 권장, 절미저축, 마을환경 개선 등은 1970년대에 추진된 농촌새마을 운동의 주된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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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보리밟기 1973년
문원리에서 방학을 이용하여 보리밟기를 하고 있는 초등학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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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첫 추곡 수매광경 1973년 11월 14일
구 과천파출소 옆 수리조합 사무실 마당에서 있었던 1973년 첫 추곡 수매 장면이다. 왼쪽에 보이는 건물이 과천수리조합(조합장 : 이용태) 사무실이며, 사진 중앙에 보이는 국기가 게양된 건물이 과천지서이다.
54. 경운기 보급 1973년
막계3리, 경운기를 이용하여 벼 수확 후 녹비용 호맥 재배를 위한 밭갈이 모습. 오화선 과천면장이 트랙터로 밭갈이 시범을 보이고 있다.
55. 새마을지도자대회 강연 1973년
과천 새마을지도자대회에서 강연을 하고 있는 모습. 태극기 좌우에는 ‘근면, 자조, 협동’이라는 새마을운동 3대 정신이, 좌우측 현수막에는 “서로 돕고 앞장서서 알찬 마을 가지자”, “소득증대에 앞장서서 새마을 기수가 되자”라는 표어가 보인다.
56. 마을 대청소 1970년대
갈현1동 부녀회의 마을 대청소 기념 사진.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마경영의 어머니이며, 좌측에서 세 번째가 이영구의 어머니이다.
57. 과천의 새마을지도자들 1985년 10월
왼쪽부터 이태종, 김성문, 김병수, 강신태.
[도비라]
제6부
광창마을 부녀회
(배경사진)
60번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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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양로원 방문 1970년대 후반
광창마을 부녀회원들이 구세군과천양로원에서 봉사활동 후 찍은 기념사진.
59. 생활용품 교환 1981년 8월
광창마을 부녀회에서 안 쓰는 생활용품을 서로 교환하는 모습.
60. 좀도리 저축 1981년 8월
쌀을 매일 조금씩 모아 저축하고 있는 모습.
사진에는 ‘절미저축 실시하여 저축습관 생활하자’라는 구호가 적혀있다.
61. 대청소 1981년 8월
마을 대청소를 하고 있는 광창마을 부녀회
‘새마을 청소하여 전염병을 예방하자’ 라는 구호가 사진에 적혀있다.
62. 마을입구 꾸미기 1981년
하3리 광창마을 입구 꽃밭을 가꾸고 있다.
63. 모내기 1981년
모내기 협동작업.
사진에는 ‘밭의 고기 증산하여 영양관리 철저하자’라는 구호가 적혀있다.
64. 광창유아원 1981년 9월
부녀회에서 마을회관에 세운 광창유아원. 특히 일손이 모자라는 농번기에 광창유아원은 유아들로 북적거렸다.
65. 공부방 풍경 1981년
부녀회에서 운영한 마을회관의 공부방.
[도비라]
제7부
나들이
(배경사진
67번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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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연주암 소풍 1952년 10월 25일
연주암에 소풍온 과천초등학교 학생들.
67. 평화 1953년 봄
휴전협정이 조인되기 전 마을 사람들과 인천 송도에서 봄나들이를 즐기고 있는 조상준의 어머니 김영례.
68. 교사들의 나들이 1960년대
과천 관악중학교 교사였던 송오복, 차태운씨가 동료들과 함께 나들이를 즐기는 모습.
69. 문원동 부녀회 나들이 1968년
문원동 배랭이에 거주하는 젊은 부인들로 구성된 부녀회원들이 잠시 여가를 틈타 친목나들이를 하는 모습. 오른쪽에 2번째가 조상준의 부인 정명숙씨.
70. 부산 영도에서의 2박3일 1972년
모범 교사로 뽑혀 부산 영도에 위로 출장온 조상준(왼쪽)이 안양 교직원들과 기념 촬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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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 광창마을 부녀회 나들이 1974년 5월 8일
광창마을 부녀회의 부여 나들이를 와서 백마강 송월대에서 단체기념 사진을 찍고 있다.
72. 소풍 1970년대 중반
소풍온 한일중학교 학생들.
73. 소풍 1970년
과천초등학교 2학년 어린이들이 관악산으로 봄 소풍을 가서 선생님(조상준)과 같이 도시락을 먹는 모습.
74. 과천을 이끌었던 인사 1970년대 중반
과천의 기관장들이 모여 나들이 후 찍은 기념사진. 왼쪽부터 권광환 우체국장, 오화선 면장, 박순만 통일국체국민회의, 유택희 한일중고 교장, 강명희 과천농협 조합장.
75. 경기도 새마을지도자대회 1980년대 초반
화성 융릉에서 거행된 경기도 새마을지도자행진대회에 참가한 과천 새마을지도자와 과천출장소 임원들.
76. 장기자랑 1981년대
4H클럽 회원들이 봄소풍 나들이 중 장기자랑을 즐기는 모습.
과천면 시절의 생활상
1. 1950~1960년대 보릿고개와 한적한 농촌, 과천
전쟁이 끝날 무렵 우리 농가의 다수는 하루 세 끼의 식량조차 제대로 해결할 수 없었다. 일제시대는 말할 것도 없고 1950녀대 까지 연례행사처럼 찾아들던 ‘보릿고개’는 농촌의 빈곤상을 나타내는 말이다. ‘보릿고개’란 가을에 추수한 식량이 다 떨어지고, 보리는 미처 여물지 않은 5~6월(음력 4~5월)로 굶주려야 하는 춘궁기를 의미했다. 1960년대의 농촌 역시 1950년대의 극단적인 빈곤에 비하면 다소 나아졌다고 하나 여전히 절대적 빈곤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1960년대부터 추진된 ‘조국근대화’ 정책으로 농촌을 떠나 도시로 몰려드는 인구는 급속히 늘어나기 시작했다.
1950~1960년대 서울의 남쪽에 위치한 과천 지역은 아직 산업화와 도시화의 영향을 받기 이전인지라, 전형적인 한적한 농촌과 산촌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나마 수도 서울과 인접한 지리적인 이점이 있었기 때문에 관내 지역에서 생산한 야채와 과일, 그리고 청계산과 관악산 등지에서 채취한 땔나무 등을 서울로 내다 팔 수 있었고, 이것이 주요한 수입원이 되었다.
논농사의 경우 1950년대 후반 막계저수지가 조성되기 이전까지는 ‘빗물에 의하여서만 벼를 심어 재배할 수 있는’ 천수답(天水畓)이라는 한계가 있었다. 따라서 저수지를 조성하는 작업은 과천 농업환경에 있어서 그만큼 중요한 것이었다.
과천에서 오랫동안 농사를 지었거나 현재 농업에 종사하는 인사들의 대부분은 과천의 농업환경을 언급할 때 1960년대 초반 막계저수지 조성 이전과 이후를 구분한다. 그만큼 막계저수지의 역할로 주암동 일대뿐만 아니라 광창마을, 막계동 등 인근 마을의 농업환경은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저수지가 축조되어 밭이 논이 되어서야 과천 주민들은 쌀밥을 먹을 수 있었다. 당시 비료가 없어 흑석동, 노량진, 용산 심지어 서울역 근교까지 인분을 구하러 다니던 모습을 과천 토박이라면 누구나 기억하고 있다.
1950년대 중반부터 1960년대 후반까지 과천 주민들의 생업에는 농업 이외의 다른 산업을 찾아볼 수 없었다. 50~60년대 과천을 대표하는 큰 마을 중 하나인 광창마을은 은진 송씨의 오랜 집성촌으로 다음의 회고담에 당시의 생활상이 생생히 담겨 있다.
광창마을은 맑은 개울(청계산 천)과 한내개울 2개의 젖줄이 토지를 비옥하게 만들어 벼농사와 채소류 및 과일이 풍성(참외, 수박, 오이, 토마토, 채소, 고추 등)하였다. 겨울이 채 가기도 전에 우수(雨水)의 절기가 지나면 특산물 재배준비로 어느 집을 막론하고 집집마다 온상(溫床 : 창틀에 기름먹인 노루지 바른 보온하우스)을 시작하면서부터 부지런히 농사가 시작되니 보통 부지런을 떨지 않으면 이러한 영농에 종사할 수가 없다. 수확기는 오이부터 시작하여 토마토, 참외, 수박으로 계속 이어져 김장으로 귀결된다. 자신도 중고 시절 방학 때 참외, 수박 한 트럭을 싣고 인천 배다리시장(위탁상)에 간 일이 있다. 당시 인천시장, 남대문 북창시장, 동대문 배오게시장의 채소와 과일류의 트럭 행렬이 광창마을로 들어오는 차가 줄잡아 20여대가 들어왔던 때이다. 위탁상회에서 뽑아준 계산서를 뿌듯하게 뽑아오면 힘들게 농사를 진 가족들의 만면 미소를 대할 때에는 영농의 보람이 바로 재산증식(財産增殖)의 길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논과 밭에서 이루어지는 농사는 봄에서 가을까지의 일이었다. 늦가을로 접어들 무렵에는 또 다른 생업을 필요로 했다. 관악산과 청계산으로 둘러싸인 과천의 늦가을 생업은 다름 아닌 땔나무 채취였다. 땔나무 채취와 판매는 특히 막계동 일대 주민들이 많이 나섰다고 한다. 주민들은 지게 혹은 소달구지 등에 땔나무를 싣고 남태령을 넘어 흑석동 일대의 땔나무장으로 가서 팔았다고 한다.
한편 주암동 주민들도 초겨울이 되면 상당수가 땔나무를 채취하였는데, 삼부골은 흑석동(연못시장)과 영등포 등지의 땔나무시장으로 가서, 죽바위와 돌무께마을은 양재와 말죽거리로 가서 팔았다고 한다. 과천 전체가 산으로 둘러싸인 지형으로 땔나무 채취에 유리했다고 하지만 초겨울의 땔나무 채취량이 항상 풍족했던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땔나무 채취에 나서서인지, ‘찰떡을 굴려도 붙는게 없었다’고 회고하는 사람도 있었다. 여성들은 부업으로 청포묵과 도토리묵을 만들어 내다 팔기도 하였다.
1960년을 전후로 낙후된 농촌 지역이던 과천에 유의미한 변화가 시작되었다. 1959년 11월 25일 과천우체국의 전신전화 업무가 시작되었고, 1960년 11월 15일에는 과천우체국에서 50회선 규모의 전화교환 업무가 이루어졌다. 1961년 11월 30일에는 기존 막계저수지 조성에 이어 과천수리조합이 설치되었다. 같은 해 9월 14일에는 건설부고시 제547호로 과천면이 서울시 도시계획구역으로 편입되었으며, 1965년 4월 26일에는 과천단위농협이 설치되었고, 1968년 2월에는 과천 4-H연합회가 창립되었다.
2. 1970년대 과천 새마을운동
우리나라는 제1, 2차 경제개발계획이 완료된 1971년까지 유례없는 경제성장을 달성했으나 공업 위주의 경제정책으로 인하여 공업과 농업, 도시와 농촌 사이의 격차는 더욱 커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낙후된 농촌의 발전을 위해서 기존의 농업정책을 보완하여 새마을운동을 추진하였다.
1970년대 과천의 새마을운동은 환경정비로 시작되었다. 초가집이었던 지붕을 개량하고, 부엌을 개량하는 일이 여기저기서 이뤄졌고, 마을 내에 안길과 농로를 넓히고, 하천을 정비하고 교량을 설치하는 일이 진행되었다. 청계산과 관악산, 우면산의 나무를 채취하여 연료로 때다가 연탄으로 바뀐 것도 이때였다. 다음은 소득증대로 나아갔다. 통일벼를 심어 식량을 확보하는 일과 농업용수를 원활히 공급할 수 있는 관개사업이 급속도로 추진되었다. 다행히 과천은 1963년에 막계저수지가 완성되어 물 걱정은 없었다.
1970년대 과천의 새마을운동은 주민들의 자발적인 참여도가 높아 성공할 수 있었다. 마을안길과 농로를 확장하는 데 많은 주민들이 땅을 희사하고 노동력을 제공했다. 과천의 관문인 갈현2리는 1973년 대대적으로 마을안길 1㎞를 노폭 5m로 확장했을 뿐만 아니라 소하천 30m와 리사무소(1동 13평)를 보수하기도 하였다.
1980년대 과천이 신도시로 개발되면서 새마을운동의 전개양상도 변하게 되었다. 농촌새마을운동이 점차 도시새마을운동으로 변화되었고 내용에 있어서도 지역 활성화와 문화운동이 중요시 되었다.
3. 1970~1980년대 새마을부녀회 활동
과천의 새마을운동에서 부녀회 활동이 차지하는 비중은 높다. 부녀회 활동을 통해 새마을운동이 가정 깊숙한 곳까지 영향력을 미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가 결정되었기 때문이다. 새마을운동에서 부녀회 활동을 중시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 초반부터이다.
막계리에 오래 세거한 전주 최씨 가문의 종부였던 조용기(1941년생)는 1975년 막계리 부녀회장으로 활동하면서 수원연수원에서 1주일간 새마을교육을 받고, 경기도지방공무원교육원에서 4박 5일 새마을지도자 교육과정을 수료하였다. 열심히 활동한 결과 1976년 새마을공로 표창도 받았다. 당시 그녀는 한 달에 한두 번씩 면사무소에서 여는 부녀회 회의에 나갔다. 마을별로 배당된 물건을 주민들에게 판매하여 보급하고, 절미운동을 홍보하고 산아제한을 위한 약을 마을에 돌리는 일 등을 주로 했다.
그때 한 8년 했는데, 재밌었어요. 일단은 집에 있다가 맨날 친구들두 자주 만나게 되고 그런 게 재밌더라구. 나름대로 보람두 되고. 농사짓는 사람들 일손이 딸리니까 가서 이젠 고구마두 캐고 그랬어요. 돈 받구 가는 게 아니구 봉사죠 뭐 봉사. 노인들 청소두 하고. 먼저는 그렇게 못하구 먼저 맡겨질 때는 시키는 일만 했지. 한 달에 한 번씩 모여 갖구 도로변 청소시키구 면 단위에서.
그녀는 문원동으로 이주한 뒤, 1987년 문원4통 새마을부녀회장을, 1990년에는 새마을운동 활성화추진위원회, 문원동 아름다운 국토가꾸기 추진위원회 위원장에 위촉되었으며, 1993년에는 문원동 부녀회장을 맡아 분주한 활동을 하였다.
향토사료전에 함께 하신분
전시 총괄 이정찬(과천향토사 연구회장)
전시 기획 이영구(과천문화원 부원장)
자료 제공 김성문(광창마을), 김혜숙(갈현동), 강호상(삼포마을)
이태종(모템말), 조상준(문원동),
은진송씨 광창문중 종친회(광창마을)
전시 진행 허홍범(과천문화원 학예사)
허정욱(과천문화원 연구원)
전시 안내 신종인 외 1인
제11회 과천향토사료전 도록
과천을 일구어낸 과천 사람 사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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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09년 10월 1일
발행인 이정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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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과천시 별양동 45 과천문화원 내
tel (02) 504-6514 fax 507-1422
디자인 이미현(태양C&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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