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1년 위기 극복의 기반을 마련한 할리데이비슨은 이후 ‘품질 경영'을 강조하는 한편 고객을 할리데이비슨 ‘마니아'로 만들어 버렸다. 이들은 할리데이비슨의 브랜드 강화는 물론 열정적인 활동으로 회사를 살리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결국 고객이 회사를 다시 살렸고, 회사는 다시 고객 한 사람 한 사람을 중시하는 기업 문화를 가꿔 가고 있다.
최근 영화배우 독고영재 씨를 인터뷰한 적이 있다.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 그는 여전히 열혈청년이었다. 독고영재 씨를 더욱 열정적으로 보이게 만든 건 바로 남성미가 넘치는 오토바이, 할리데이비슨(Harley-Davidson)이었다. 청재킷, 청바지에 부츠를 신고 할리데이비슨에 올라선 독고영재 씨는 성공한 인생을 상징하는 것 같았다.
현재 60여 개국에서 거리를 누비고 있는 할리데이비슨은 저렴한 통근용 오토바이가 아니다. 그 자체가 하나의 글로벌 문화 코드로 자리잡았고 성공한 인생의 상징이 되었다. 손꼽히는 명품 브랜드가 된 것은 물론이다.
 105년 전통의 할리데이비슨은 창업자의 이름을 딴 브랜드다. 1903년 미국 위스콘신주 밀워키에서 한 동네 사는 21살 윌리엄 할리(William Harley)와 20살 아더 데이비슨(Arthur Davidson)이 ‘할리데이비슨 모터컴퍼니'를 창립했다. 일반적으로 1939년에 휴렛과 팩커드가 캘리포니아의 한 허름한 창고에서 시작한 HP를 벤처의 효시로 보곤 하지만, 할리데이비슨은 이보다도 36년 앞서 창업을 시도한 진정한 벤처기업이었던 셈이다.

너무 일찍 오토바이 시장을 개척한 탓일까? 시장은 크게 형성되지 않았고 초창기에는 그저 조그만 무명 기업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던 할리데이비슨에게도 기회가 찾아왔다. 1차 대전과 2차 대전에 전쟁용으로 할리데이비슨 모터사이클이 동원돼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1969년 만들어진 영화 ‘이지 라이더'는 할리데이비슨을 일약 스타로 만들었다. 이때 이후로 할리데이비슨의 ‘이단아'적 이미지가 미국 문화를 상징하는 대표 코드로 자리잡았다.
‘성공가도에 들어선 것 같다'고 안주하는 순간, 위기가 닥쳐왔다. 1970년대부터 시작된 유럽과 일본 모터사이클 기업의 도전이 시작된 것이다. 특히 혼다, 가와사키, 야마하 등 일본 오토바이의 공세는 무서웠다. 이들은 가격, 디자인, 연비를 앞세워 미국 시장을 공략해 나갔다.
반면 할리데이비슨은 엔진에서 가솔린이 새는 등 품질에 문제가 발생했다. 소비자들은 점차 할리데이비슨을 외면하기 시작했다. 미국 내에서 한때 90%까지 이르던 시장 점유율은 25%로 감소했고, 레저용품 회사인 AMF에 인수되는 굴욕도 겪었다.

그러나 1981년, 13명의 임원이 회사를 다시 매입하면서 위기 극복의 기반을 마련했다. 그 첫 번째 위기 극복책은 품질 경영이었다. ‘할리데이비슨은 품질 관리에 목숨을 건다'는 말까지 나올 만큼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품질을 강조한다. 최고 경영자(CEO)였던 리처드 티어링크는 ‘기본에 충실하자'에서 한발 더 나아가 ‘품질 중심'으로 회사를 바꿨다. ‘자유'의 상징인 할리데이비슨이지만 미주리 캔자스시티 공장 분위기는 엄격한 규정이 적용된다고 한다. 페인트칠 하나에도 소홀하지 않음은 물론 로봇 공정을 거친 뒤에도 전문 엔지니어가 일일이 품질을 확인한다. 조립이 끝난 오토바이는 100대당 1대꼴로 전문 엔지니어가 40km를 타거나 분해해 이상 유무를 점검한다.

두 번째 비결은 고객을 할리데이비슨 마니아(Mania)로 만들어 버렸다는 점이다. 한국에서도 가끔 볼 수 있지만 미국에서는 수십 명이 할리데이비슨을 타고 열을 지어 점잖게 오토바이를 즐기는 모습을 자주 목격할 수 있다.

할리데이비슨을 설명할 때면 ‘호그(H.O.G. : Harley Owners Group)'라는 단어가 빠지지 않고 함께 언급되곤 한다. ‘할리 소유자들의 모임'으로 번역하는 데, 1983년부터 형성된 순수 동호회다. 이들은 할리데이비슨의 철학과 열정을 공유하면서 브랜드 강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호그들은 자신들이 아끼는 할리데이비슨이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을 때 모터사이클 투어링 행사인 ‘호그(H.O.G) 랠리'를 개최하는 등 열정적인 활동으로 회사를 살렸다. 남부 캘리포니아에서 뉴욕, 새크라멘토, 밴쿠버까지 랠리를 진행했고 이후 인기가 높아졌다. 전 세계에 호그 회원은 무려 130만 명에 달한다.
회사는 이들 고객들의 자발적인 동호회 활동을 적극 지원하면서 마케팅으로 활용했다. 할리데이비슨 경영진도 고객과의 문화 코드를 공유하기 위해 모터사이클을 즐긴다. 또 몸에 문신을 새기는 등 도전적이고 모험을 즐기는 ‘할리데이비슨스러움'의 문화를 향유한다.
경영진은 할리데이비슨 모터사이클 랠리에도 함께 참여한다. 상당수의 직원들이 ‘호그' 멤버인 것은 말할 필요가 없을 듯 싶다. 경영진은 호그 멤버들의 의견을 반영해 제품 개발에 나서고, 신제품을 출시하기 전에 호그 멤버를 초대해 시승 행사를 갖는다.
‘호그'라는 충성 고객을 확보하면서 할리데이비슨의 수익은 꾸준히 늘어났다. 고객 유지율이 5%로 높아지면 수익률이 최소 90%까지 올라간다는 게 학계의 정설이다. 할리데이비슨은 ‘호그'를 중심으로 고객유지율을 높여 가면서 매출과 이익을 함께 끌어올렸다.
1981년 13명의 임원이 회사를 인수한 뒤 할리데이비슨은 연 매출 60억 달러(6조 원)에 달하는 기업으로 성장을 거듭했다. 2005년에는 세계 최대 자동차업체인 제너럴 모터스(GM)의 시가총액을 앞질러 버렸다.

할리데이비슨 소유자들은 개성이 뚜렷한 특징을 보인다. 때문에 공장에서 생산한 똑같은 모델을 타는 것에 만족하지 않는다. 이들은 자신만의 개성을 표출하기 위해 스스로 부품을 바꾸고 디자인을 교체하는 ‘튜닝'을 단행한다.
할리데이비슨은 그 욕구를 바로 간파했다. 고객 욕구에 부응하기 위해 기본 모델에 이들이 선호하는 액세서리를 호환하도록 설계했고, 이러한 액세서리를 마니아를 위해 따로 생산하여 싸고 쉽게 구할 수 있도록 했다.
또 자신만의 오토바이를 원하는 고객들을 위해서는 최고로 숙련된 직원 한 사람이 오토바이의 모든 조립 과정을 책임지는 오토바이를 별도로 제작한다.
결국 고객들이 회사를 다시 살렸고, 회사는 다시 고객 한 사람 한 사람을 중시하는 기업 문화를 가꿔 서로 윈윈(win-win)하고 있는 것이다.
할리데이비슨은 인간의 본성과 감성에 충실을 다한다. 변하지 않는 할리데이비슨의 거친 사운드는 인간의 본성에 가까운 ‘환호의 음성'이며 승차감 역시 안락함보다는 꾸밈없는 ‘자연의 본성'을 추구한다.
실제로 할리데이비슨의 믿음은 ‘유행은 100년이 지나도록 지속되지 않는다'는 것. 유행을 쫓지 말고 인간 문화의 전통을 따르는 가장 자연적인 제품을 만들 때 고객들 스스로 다가온다는 생각이다. 빠르게 흘러가는 세월 속에 몸을 맡긴 채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현대인들에게 할리데이비슨은 한번쯤 쉬어 가라는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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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 나도 타 보고 싶은 데 가격대는 어느정도인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