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이야기는>는 어린 시절 가슴에 묻어둔 사연이나
성장하여 껶은 일 중에서 함께 공유하고 싶은 이야기를
스스럼없이 내보이는 코너입니다.
(*)
앞으로 나는
'우습고도 슬픈 이야기'(이하 '우슬이')를 시리즈로 올려볼 예정임
풀죽은 낮도깨비들
우리 학급은 `낮도깨비들`이라고 불리고 있었다. 조훈구 선생님 학급이 되면서부터 자동으로 그렇게 된 것이다. 학급이래야 고작 두 반 밖에 없었으니 그 선생님 반이 될 확률은 오십 빠센트였던 셈이다. 우리들은 그저 그 선생님 학급으로 편성된 된 것에 대하여 별 감흥 없이 첫 종례시간을 맞이하고 있었다.
"인자 오늘부터 느그들은 뺀드부가 되는 것이여. 징이나 꽹과리하고는 다른 신식 악기를 가지고 멋들어진 뺀드부가 된다 그말이여. 알것냐?"
우리들은 죄없는 눈망울만 요리조리 굴릴 뿐 선생님의 말이 귀에 하나도 안 들어 오고 그저 심드렁할 뿐이었다. 우리들은 "그리 된 것이먼 그리 해야제 으짜것소" 하는 식으로 종례시간이나 얼른 끝났으면 하였다. 그만큼 우리들은 그때까지만 해도 무엇에 별로 감동할 줄 몰랐던 시절이었다.
그 다음 날 선생님은 도통 공부는 안 가르치고 책상을 모조리 교실 뒤쪽으로 밀어 놓게 하더니, 75명이나 되는 학동들을 앞으로 죄다 모아 놓고 악대를 편성하기 시작했다. 악기라고 해보았자 큰 북 하나 작은북 하나, 그리고 누런 솥뚜껑처럼 생긴 심벌즈 한 쌍이 고작이었다.
"양진이 너는 지휘봉을 잡어라. 순정이와 영동이는 큰북을 치고, 애 또... 경남이하고 용심이는 작은북이다. 그라고, 심벌즈는 창식이하고 병남이가 번갈아 맡어라. 나머지는 모두 피리다."
아직도 아이들은 그저 별 느낌도 없이 선생님이 호명한대로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느닷없이 우리는 '낮도깨비들'로 변신하게 되었다. 레파토리는 <애국가> 와 <도레미 행진곡> 딱 두 곡이었다. 우리 반 아이들은 애국조회 때면 구령대 옆에 도열하여 그래도 제법 폼을 잡고 긴장된 모습으로 애국가 제창에 반주를 넣었다.
송우택 교장 선생님은 애국조회 때면 신바람이 나시는지 한 시간도 넘는 장황한 연설을 하곤 했다. - “애국애족 경천애인하자! 재건하자! 상기하자 6. 25! 꺼진 불도 다시 보자! 길가는 뻐스에 돌멩이 던지지 말고 손 흔들기! 몽당연필 아껴 쓰기!”(몽당연필을 또 아껴 쓰라니, 참) 한도 끝도 없는 훈시를 듣다가 드디어 각기 교실로 향하는 씨그널로서 우리 반 악대는 그 유명한 <도레미 행진곡>을 연주하기 시작한다.
"도도도도시라 쏠미쏠미 레레미파미레도미쏠 도도도시라쏠미쏠미 도레미파쏠라시도 도도도"
손이 닳도록 입이 부르트도록 그 놈의 변함없는 곡을 하루에도 수도 없이, 공부 시작 전에도 ‘도도도 도시라’, 학교 파하기 전에도 ‘도도도 도시라’ , 어린이날 어머니날 운동회날 소풍날 할 것 없이 무슨 날만 되면‘도도도 도시라’... 이제는 귀가 멍멍할 정도를 지나 우리 반 아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환청에 시달렸다. 시도 때도 들려오는 그 소리에 다른 반 학동들도 신기한 듯 쳐다보다가 우리를 ‘낮도깨비들’이라고 놀렸다.
근처 삼거리 어른들도 생전 처음 들어보는 서양 음정 때문인지 별로 좋아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기실 우리들 행색이라야 요즈음 TV에서나 볼 수 있는 뱅글라데쉬 아이들 모습 그대로였으니 오죽 했겠는가. 그래도 고슴도치 사랑이라고 우리 아버지는 아들 자랑을 했단다.
"우리 아그가 치는 거 말이여, 머시냐, 신발인가 심발즌가 말이여. 고것이 없으먼 굿이 안 된다 하등만!"
"아 그랑께 거 머시냐, 솟뚜껑맨키로 생긴 것 말이여? 고것을 멋(뭣)으로 만들어쓰까잉?"
"고것이사 쇳덩이로 만들었겄제. 모질이 같이 고런 것을 다 물어보고 있능가아!"
숫제 아버지는 아들놈 덕에 동네 사람들한테 꽤나 의기양양해 하셨다. 우리들은 그래도 변함없는 레파토리일망정 그 곡들을 연주할 때면 다른 학급 학생들 앞에서 무언지 모를 뿌듯한 우월감 같은 것이 슬며시 고개를 쳐들곤 하였다. 쉬는 시간이나 연주가 없을 때는 피리로 <고향 땅>이나 <섬집 아이> 같은 동요를 곧잘 연주하는 녀석도 생기고 <황성옛터> 같은 제법 어려운 노래도 곧잘 불러대는 놈도 있었으니, 그 녀석 피리연주하는 폼을 보고 있노라면, 자유자재로 돌아가는 손놀림하며 곡이 최고조에 달하면 눈을 간잔지롬하게 뜨면서 감정에 폭 빠지는 모습이라니!
그렇게 한 학기가 지나가고 소슬한 가을 바람들이 가난한 들녘을 휘돌아 하나둘씩 우리들 가슴팍을 파고들 무렵 희한한 소식이 하나 전해졌다.
"느그들 말이여. 안 가르쳐 줄라다가 안쓰러워서 미리 가르쳐 주기로 했제. 다름이 아니고 쩌그 목포에서 큰 운동회가 있는디, 느그들을 초청한다고 안그러냐. 오늘 교장 선생하고 거그 담당자하고 우체국 앞에서 만났다고 하드라. 그러니까 머시야 다음 달 7 일잉께 앞으로 딱 보름 남았지야."
담임선생님의 느닷없는 전언에 우리들은 귀를 의심하면서 한동안 말없이 동무들 얼굴만 쳐다보고 있다가, 다음 순간 그것이 무슨 꿈에라도 생각 못할 환희에 찬 일이라는 것을 알고는 너나 할 것 없이 환호 작약하였다. 구백정기화물 아들 춘일이는 양철 필통을 책상에 마구 두드려댔고, 왼손뱅이 중호는 기분이 극에 달해 예의 그 강력한 왼 주먹으로 옆 짝궁 춘식이 등짝을 후려갈기고 있었다. 여자 까불이 춘심이도, 가시내가 치마를 들썩이며 좋아라 난리를 쳤다.
우리는 그 날 이후로 얼굴에 생기가 돌면서 별의별 상상을 다 해보았다. -
"목포 갈라먼 배로 건너가야 쓰것인디, 배 타먼 안 무서우까?"
"이 모질아, 배로 건너제 발로 건너냐. 그라고 재밌제 머시 무섭겄냐. 너는 가지 말어라."
"나도 어지께 잠도 안자고 피리 연습했는디, 니가 머시라고 가지 말라고 그러냐 새꺄!"
잘못하면, 좋은 일에 송사(訟事)나게 생기게끔 우리들은 모두 흥분 상태에 빠졌던 것이다. 그날이 가까워질수록 우리들은 자진해서 방과후에 예의 그 <도레미 행진곡>을 죽어라 연습했다. 배고픈 줄도 모르고 북을 치고 심벌즈를 때리고 피리들을 불어댔다.
아! 그런데, 그토록 가슴 아픈, 야속한 일이 벌어지다니, 우리들은 망연자실하였다. 그 초청껀(件)이 깨지고 말았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명색이 뺀드부인데, 아이들 제복(유니폼)이라도 한 벌씩 입혀서 보내야 한다는 의견이 선생님들한테서 나오게 되었고, 그것을 주최측과 협의하는 과정에서 돈 문제가 불거져 없었던 일로 되어버렸다니!
아 불쌍하다! 우리는 더 이상 말이 없어졌다. ‘도도도 도시라’도 시들해졌고, 장닭 흉내를 잘 내던 녀석도 풀이 죽기는 마찬가지였다. 나도 공연히 안 아프던 배가 아픈 것 같기도 하고 잘되던 덧셈 뺄셈도 잘 되지 않았다. 나는 "무엇을 더하고 뺄 게 있다고" 속으로 공연히 트집을 잡으며 애꿎은 돌뿌리만 걷어차곤 했다.
(*)後記
벌써 40년도 더 된 국민학교 5학년 때 일이다.
'뺀드부'에서는 결코 빼놓아서는 안 될 '누런 솥뚜껑(심벌즈)'(^^)이
필자의 차지가 된 것은 지금 돌아보아도 불가사의한 일이다.
그해 2학기가 시작되고 얼마 되지 않아 심벌즈의
꽤 딱딱한 플라스틱 손잡이가 끊어질 듯 말 듯 헤지기 시작했다.
그 안타까운 끈을 쪼끔한 손으로 움켜쥐고 반주라고 넣었던 그날이
눈물겹도록 그립다.
첫댓글 40년도 훨씬 지난 일들을 잊지 않고 리얼하게 기억을 되살렸는지 용하다 타향살이에서 고향으로 되돌아 가고픈 나이에 접어든 친구들에게 동심의 세계로 나래를 펼수 있는 장을 마련한 창식이에게 감사하고 모두들 만날수는 없지만
카페에 들어와 소식을 전하고 웬만하면 만나다 만나고 싶다 친구들아
그 때만 생각하면 우리들 연주 소리가 환청이 되어 또렷이 되살아나곤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