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남정맥-1구간(모래재-피암목재)
(멧돼지
가족을 만나다)
01시에 집을 나서고 모래재휴게소에 04시에 도착한다. 그믐을 향한 작아진 달 아래 몇 개의 별들만이 반짝이고, 가을을
부르는 이름 모를 풀벌레 소리만이 어둠을 희석시킨다. 왠지 전과 다르게 어둠이 두렵고 멧돼지가 두렵다. 그리고 졸리고 피곤하다. 한 시간 동안 눈을 붙인 후 05시에 출발한다. 모래재터널 좌측으로 올라야 하는데 우측으로 올라 20여분 헤맨다. 시작부터 힘들다.
원위치하여 길을 제대로 찾았으나 등산 중에 이번엔 삼정맥분기점으로 향하는 갈림길을 놓치고 호남정맥을 타게 된다. 어둠 때문 이리라. 왠지 느낌이 이상하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20여분 진행하고서야 확실히 길을 잘못 들었음을 알게 된다. 이미
날은 밝았고, 길은 뚜렷하게 보인다. 삼정맥분기점에 도착하고
나서야 마음이 놓인다. 지난번 금남호남정맥을 마치고 만났던 이정표가 반가이 맞아준다. 지난번엔 임도로 하산을 했고, 오늘은 다른 길로 입산을 한 덕분에
무려 1시간을 낭비한 셈이다. 그보다 시작부터 힘이 빠진다. 그래도 즐거운 마음으로 삼 개월 만에 정맥길을 들어서니 선선한 날씨에 기분이 새롭다. 더위와 잡초/잡목을 피해 오랜 세월 많이도 참았다. 여유로운 기분으로 멀리 있는 금남의 막내인 부소산을 만나러 출발한다. 그런데
10분도 못 가서 노루도 아닌 것들이 고라니도 아닌 것들이 10여m 앞에서 좌로 우로 무서운 속도로 달아난다. 깜짝 놀라 온 몸이 얼어붙는다. 또 다시 우측으로 튄 놈이 좌측으로 튄다. 속도가 너무 빨라 실체를
알아보기가 어려울 정도다. 가던 발길을 멈출 수가 없는 상황에서 이번엔 정지 상태의 멧돼지와 정면으로
마주친다. 불과 6-7m의 거리에서 멧돼지는 나를 쳐다보고, 순간적으로 나는 어느 나무가 기어오르기가 쉬운지를 곁눈질로 살핀다. 무섭고
자시고 할 겨를이 없다. 말 그대로 일촉즉발의 상황이다. 그런데
멧돼지는 나의 순간적인 피신 보다 더 빨리 산기슭 아래로 용수철이 튀듯 달아난다. 아마도 어미 멧돼지가
새끼들이 안전하게 피신한 것을 확인하고 따라간 모양이다. 봄이었다면 아마 새끼를 두고 도망칠 수가 없어
내게 덤볐을 것이다. 갑작스레 순식간에 진행된 사태에 머리가 멍해진다.
혹시나 하고 계속 뒤돌아보며 가던 길을 재촉한다. 뛸 수도 없고 뛰어봐야 멧돼지에 비하면
제자리 걸음이다. 조마조마한 마음에 몸은 더욱 지친다. 가파른
오르막과 내리막을 반복하며 겨우 입봉에 올랐지만 쉴 틈도 없이 다음 구간을 향해 진행한다. 또 다시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멧돼지 서너 마리가 튀어 간다. 배낭에서 호루라기를 꺼내고 잡목 제거용으로
가져온 긴 칼을 꺼낸다. 만약의 사태에 대비를 해야 한다. 진퇴양난은
아니고 그냥 가야만 한다. 멧돼지에 놀란 가슴이 진정되질 않는지 몸이 빠르게 지쳐간다. 15도 안팎의 날씨가 산행하기에는 좋지만 앉아 쉴 때는 추위를 느끼게 된다.
쉬엄쉬엄 빨리 가고 싶지만, 초반에 길을 잃은 것과 멧돼지의 출현으로 충격을 받았는지 몹시
힘에 부친다. 가을인 듯 하지만, 아직은 여름의 흔적들이
너무 많다. 뚜렷한 것은 내가 칼춤을 출 일이 없다는 것이다. 잡초도
잡목도 혈기 왕성하던 시절은 완전히 갔는지 아무런 힘이 없어 보인다. 대충 몸으로 밀고 나가면 뚫린다. 황새목재까지는 길이 편하고 부드럽다. 그렇다고 속도를 낼 수도 없다. 가끔 만나는 햇볕은 뜨겁기가 그지 없다. 모든 방어를 하지만 한계가
있고 수시로 땀을 닦고 머릿수건을 짜야만 한다. 멀리 연석산이 보인다.
어렵게 어렵게 줄 잡고 바위도 오르고 쉬어가며 겨우 연석산에 오른다. 건너편에 보이는 운장산은
겁이 날 정도로 아주 위세가 등등하다. 엄청나게 크게 높게 무섭게 보이는 운장산을 오르려니 너무도 지쳐있다. 잠시 연동마을로의 탈출도 생각했지만 다음 번에 이어질 산행을 생각하니 올바른 방법은 아닌듯하다. 연석산 정상에서 마주 보이는 운장산까지 한 시간 반의 목표를 정해놓고 출발을 한다. 마주 오는 단체 산행객을 만나고 지나친다. 그들은 모두가 팔팔해
보인다. 나도 그런 적이 있었지! 하며 자위를 해본다. 운장산 오르막은 지칠대로 지친 내겐 보통 힘든게 아니다. 몹시 가파른
길을 줄 잡고 오르고 또 쉬고 오르고를 반복해 운장산 서봉에 오른다. 사방이 확 트이며 지쳤던 몸과
마음이 풀리는 듯하다. 여유롭게 앉아 쉬며 감상을 하고 싶지만 예상보다 많은 시간이 지나 짧은 휴식만을
취하고 피암목재로 향한다. 하산길도 지친 상태에서는 쉽지가 않다. 당초 4:00에 모래재를 출발하여 14:40에 피암목재에 도착, 내처사에서 버스를 타고, 주천에서 갈아타고, 진안에서 모래재행 버스를 타려고 했는데, 17:00시가 되어서야
도착을 한다. 어쨌든 사고 없이 12시간의 산행을 마쳐 다행이지만, 다음 산행부터는 적정한 시간만 산행할 수 있도록 구간 조정을 해야겠다. 진안의
택시기사에 전화를 하니 오 만원 이란다. 남는 게 시간이라 18:30
진안행 막차(\4,000)를 타기 위해 결코 가깝지 않은 내처사로 향한다. 내처사가 절 이름인줄 알았는데 마을 이름이다. 버스기사는 내가 진안에서
19:20 모래재행 막차(\1,650)를 타야 하는 것을
알고 엄청난 속도로 달린다. 모래재행 버스가 지나가는 정류소에 내려준다. 1분이 채 안되어 버스가 오고, 20분만에 모래재에 도착한다. 곧 바로 휴게소 주인이 나타나 종일 주차로 영업을 방해했다고 시비다. 귀찮아서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집으로 향한다. 오늘 산행은 시작과 끝이 별로 좋지 않다. 그러나 다음에 이어질 금남-2가 그리워진다.
2013.08.31
i-San












이런 길이 자주 나타난다.







운장산을 향하는 능선이 한 눈에 보인다.



첫댓글 아하!
오랜만에 산행을 하게 되셨군.
그러다 보니 고라니, 멧돼지가 다 환영을 나오기도 하고...
그동안 참았던 갈증을 단 한 번에 해소할 수는 없는 거겠고,
앞으로 천천히 나아가시길 바랍니다.
멧돼지 사파리 한 번 가셔야지?
그 정력이 대단하오...
그래도 항상 조심하세요....체력과 급 상황에 잘 대처하시길....
댓글은 회장 총무가 대표로^?^
아무튼 古媽遇怡(고마우이)(옛 어머니를 만나니 기쁘다)
홀로 산행은 무서버. 조심하시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