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道界 산행기 스크랩 경남도계 02 (악양삼거리~목통마을)
조은산 추천 0 조회 248 15.03.05 11:46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경남도계 1~2구간

 

 

 

경남도계(慶南道界) 2구간

 

 

2015. 2. 24()

산길 : 악양삼거리~목통마을

사람 : 객꾼 학봉 조은산

거리 : 27.7 km / 08:25

 

 

경남도계02(악양~목통).gpx

 

 

 

경남도계 2구간은 악양삼거리에서 출발한다. 1구간과 마찬가지로 화개장터까지는 섬진강이 전라도와 경상도를 가르므로 강변을 따라가는 도계다. 그런데 악양들판을 강둑에서 바라보기만 하는건 너무 싱거울거 같아 양념을 좀 넣어보자. 최참판댁이야 더 이상 새롭지도 않고 더군다나 돈까지 내면서 들여다볼 심사는 없다. 온갖 인테리어를 잔뜩 발라놓은 건축물보다는 아무래도 자연 그대로가 우리 컨셉에 맞다. 악양벌에 있는 소나무 둘. 바로 부부송과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는 문암송이다.

 

맨날 지리산 간다하며 간다는게 산만디만 누볐지 산자락에 뭐가 있는지 눈길 준 적이 있나. 그런거는 둘레길 할 때 볼거라며 아껴놓는다는 말도 한다만 산꾼 따로 있고 둘레꾼 따로있나. 너무 아끼다가는 똥되는 수가 있느니.

 

악양이 자랑하는 소나무 둘을 둘러보고, 평사리 외둔마을에서 다시 19번국도로 나와 고소산성 자락을 따라 돌면 하동군 화개면이다. 거사봉에서 흘러 내린 신기천을 건너 섬진강을 따라 올라가면 덕은리 연동마을을 지나 화개장터에 이른다. 화개장터를 들여다보고 빗점골에서 내려 온 화개천을 건너면 산길이 비로소 시작된다. 황장산으로 오르는 능선을 따라 경상남도 하동군과 전라남도 구례군이 갈라진다.

 

지형도 표기지명인 촛대봉과 황장산을 넘어 당재에서 2구간을 마감하게 되는데  당재에서 왼쪽은 전라도 농평마을, 오른쪽은 경상도 목통마을이다. 이쪽이냐 저쪽이냐, 지역감정 유발할거 없이 이번에는 목통으로 내려가고 다음번 들머리는 농평으로 잡는다. 대승적인 차원을 떠나서 목통마을쪽으로는 가보지 않은 길이고, 농평마을은 산중턱까지 차가 올라갈 수 있으므로 접근이 쉽다.

 

지난번에는 깜짝쇼 한답시고,  화개터미널을 하동터미널로 잘못 알아듣고 어문곳에서 어문짓을 한지라 요번에는 미리 통화를 하고 약조를 넣었다. 화개터미널에 새로 둥지를 튼 뱌그라 행님집인데, 아침밥부터 거기서 먹기로 하고 바로 찾아갔다. 행님더러 악양까지 택배를 부탁했고 악양에서 걷다보니 점심시각에 화개에 들어오니 점심도 행님집이고, 마치고 행님 택배로 돌아오고 보니 저녁까지, 삼시 세 끼 전부 행님집에서 먹게 되는 결과가 되었다. 어찌되었든 행님이 제공하는 택배로 택시비 한푼 안 들었고 우리 수준에 딱 맞는 식사를 제공 받았고 행님은 행님대로 나름의 매상을 올렸으니 누이좋고 매부좋게 된 셈이라. 다음에 한번 더 이용(?) 하기로 했다.

 

05:30 부산출발해서 마산 내서에서 학봉을 싣고, 07시 좀 넘어 진주 한일병원 앞에서 객꾼을 픽업했다. 계속 달려 하동IC 빠져 나가고 지난구간 두 발로 걸었던 강변길과 나란한 19번국도를 달려 화개장터에 이르니 8시가 못되었다.  화개 버스터미널 옆에 삐쭉 솟은 건물에 [터미널분식] 간판이 뱌그라 행님 집이다.  서울에서 공직을 정년마감하고 지리산 자락에 작은 가게를 열었다.

 

 

터미널분식

 

 

 

08:45 문암송

09:00 부부송

09:30 평사리 삼거리

09:50 팽나무쉼터

10:07 검두마을

10:33 두꺼비바위쉼터

11:00 은모래쉼터

11:16 천년녹차쉼터

11:30 화개장터

11:35 화개터미널

(점심)

 

11:53 황장산들머리(화개장터) (30m)

12:44 작은재 (360m)

13:10 583.4m

13:32 삼신마을 갈림

13:42 촛대바위

14:00 촛대봉(×727.9m)

14:24 새껴미재(650m)

14:34 전망대

14:48 중기능선삼거리 (천왕사 갈림)

14:55 ×881.6m

15:12 황장산(△947.7m)

15:41 ×882.7m (평도마을 갈림)

16:30 당재 (630m)

16:55 목통마을(350m)

 

 

 

 

(악양삼거리~화개장터)

 

 

 

악양삼거리에서 화개장터까지

 

 

1구간 마친 악양삼거리에서 목통마을까지, 도상거리 23km를 화개장터까지 평지길 10km에 화개장터부터 목통까지 산길은 13km 정도다. 화개 터미널분식집에서 아침을 먹고 행님더러 악양까지 택배를 부탁했다. 또, 마치고 목통으로 데리러 오기로 했으니 차 회수문제는 간단하게 해결이 된다.

 

차에 탄 김에 문암송까지 올라가는데, 아침부터 네비게이션이  헛바쿠 돌리게 한다. 아이나비가 문암송 위치를 잘못알고 있는 것이다. 네비에 '축지리소나무'가 검색되는데 축지리 소축마을에서 구재봉쪽으로 계속 오르게 하더니 아무것도 없는 산중턱에서 목적지 도착을 알린다. 까딱했으면 구재봉 넘어갈 뻔했네. 돌아 내려와 대축마을 안쪽 길로 들어가니 [하동 축지리 문암송] 안내판이 보인다. [대축마을] 버스정류장에서 900m를 올라가 평사리 들판이 훤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자리한 문암송이다.

 

 

 

문암송

 

하동군에 '소나무 사대천왕'이란게 있는데  매계리 노전마을에 있는 '11천송'으로 소나무 11그루가 서로 잇대어 자라나 멀리서 보면 마치 한 그루로 보이며 멋진 풍채를 자랑한다. 다음으로 섬진강변의 하동송림 (천연기념물 445호), 그리고 여기 문암송과 평사리 들판에 있는 부부송이다. 하동송림은 하동읍이고 나머지 셋이 악양에 있다.

 

 

 

 

바위 틈에서 자란, 마치 바위를 쪼개며 솟아난 듯하다. 수령은 600년으로 추정하지만 맨땅 반반한 흙에 뿌리를 내린 나무와 비교해 상대적으로 더 오랜 세월을 짐작하게 한다.

 

 

 

평사리 들판을 내려다보고 있다.

 

 

 

앞에 받침대를 받쳐놓은 가지는 차라리 잘라 냈으면 더 좋을뻔 했다.

 

 

 

천연기념물 491호

 

 

 

 

?松

凜聲風裡貞色   墨中岩 黃晩顯   査査含長○○   大始岩 張現相  

蒼蒼四時有??   ○○品 係永

 

소나무를 노래함.

늠름한 솔바람소리 곧은 빛깔을 외치고

검은 바위 속에서 누렇게 모습 드러내었네

 

 

바위를 깎아 시멘트를 바르고 새긴 각자가 있다. 뭔 소린지 공개적으로 해석을 부탁했더니 홀山 강사랑님이 나름의 해석을 붙이는데, 식별이 어려운 글자와 게다가 일본글자인지 한자 표현인지도 불분명한 글자가 있어 온전한 해독은 불가하다.

 

 

 

 

평사리 들판 한 가운데 부부송이 보인다.

 

차를 타고 내려와 대축마을에서 걸으려 했으나 악양천을 축지교 다리로 건너가니, 바둑판 같은 들판 가운데로 부부송 바로 앞에까지 차가 들어간다. 부부송 앞에서 차를 보내고 셋이서 두 발로 시작한다.

 

 

 

 

부부송

 

 

평사리들을 '무딤이들'이라고도 한다는데, 무딤이란 섬진강에 홍수가 나면 악양천의 물이 섬진강으로 흘러 들지 못하고 평사리 들판으로 물이 들이친다고 하여 무딤이 들판이라 한단다. 83만여평 넓이에 만석지기 두엇은 낼만하다는 무딤이들을  예전 회남재에서 내려다보면서 저 넓은 논에 대는 물은 어디서 올까를 생각하다가, 구재봉 넘어 묵계댐에서 수로를 뚫어 공급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악양천 하나로만 이 넓은 들에 물을 대기에는 턱없이 모자랐을 터인데, 최참판 나리가 살던 그 시절에는 어땠을까. 박경리 선생은 그기 까지는 신경을 못 썼는가 하다가 '토지'는 다큐멘타리가 아닌 소설인기라. 그럼에도 최참판댁은 그 시절의 권세와 영화를 그대로 누리고 있다. 

 

세상에서 가장 듣기 좋은 소리로 세 가지가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마른 논에 물들어가는 소리라... (무딤이들 팻말에 있는 글귀다)

 

 

부부소나무

 

 

평사리 들판 한가운데 소나무 두 그루가 마치 부부처럼 다정하게 보인다고 부부송이란다. 이 부부송은 천연기념물도 아니고 군에서 공식적으로 지정한거는 아무것도 없다. 그냥 사람들이 그렇게 불러서 부부송이 된 모양이다. 나무 가까이 가봐도 어떤 안내문도 없고 그냥 나무 두 그루만 있을 뿐, 나무 아래 봉긋한거는 묘인지 봉분처럼 보이기도 하나 비석은 없다. 멀리서 보면 그럴듯 하나 나무에 접근할려면 빠꼼한 길도 없이 남의 과수원을 통해 겨우 들어갈 수가 있다. 전체가 사유지라 그런가도 모르겠다.

 

 

 

 

 

박경리 소설 토지에 나오는 서희와 길상을 나타내는 나무라 하지만 이 역시 사람들이 꾸며낸 이야기 일뿐 소설 토지에는 등장하지도 않는다. 고소성쪽 한산사에서 내려다보면 동정호와 어우러져 더 멋진 그림이 나와 진사들의 주요 포인트가 되기도 한다.

 

 

 

한산사에서 본 부부송 (펀 사진)

건너편 왼쪽 대축마을 산 중턱에 문암송이 있다

 

 

 

 

평사리. 신선봉~형제봉

 

 

눈앞에 펼쳐지는 산능선. 맨 우측이 형제봉(성제봉)이고 가운데가 신선봉이다. 신선봉에 걸쳐있는 구름다리가 보일까 눈을 더 크게 떠보지만 형체도 보이지 않는다. 그 산자락에 기대어 이쪽 벌판을 내려다보고 있는 마을이 소설 토지의 무대인 평사리 상평마을이다. 5부작 16권으로 엮어진 소설 토지는 박경리 선생이 25년에 걸쳐 집필한 대역작임은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겠고,

 

정작 아이러니한 일은 작가 박경리 선생은 먼발치에서 평사리를 둘러 보았을 뿐 평사리에 발을 디딘 일도 없다 한다. 지리산이 둘러싸고 섬진강이 앞에 흐르는 넓은 땅을 보고 구상중인 작품에 결합을 했는데, 작가가 현지에서 전해들은 바, 악양벌 깊숙히 자리한 상신마을에 실존한 조부자집을 소재로 삼았는데, 현재의 상신마을 조부자집은 다 허물어진 채 잡초만 무성하고 소설속의 최참판댁은 소설보다 더 융숭한 부귀영화(?)를 누리고 있으니 이 또한 세월이 빚어낸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토지』 1부의 줄거리를 발췌해 보면,
구한말 하동의 만석꾼 최참판댁의 외동 손녀 서희는 어머니 별당아씨가 머슴 구천이와 정을 맺어 도망가는 비극을 당한다. 구천이는 할머니 윤씨 부인과 동학당의 중심 인물 사이에 태어난 혈육이다. 이 비밀을 눈치챈 아버지 최치수는 두 남녀를 응징하는 과정에서 그의 재산을 노리는 김평산과 귀녀에게 살해당한다. 윤씨 부인 역시 돌림병에 걸려죽고 만다.

집안의 기둥인 할머니와 아버지가 죽고 나자 친척 조준구가 최참판댁의 재산을 차지한다. 재산을 빼앗긴 서희는 조준구에게 맞서지만 역부족이다. 조준구의 행패에 불만이 쌓인 마을사람들은 목수 윤보를 앞세워 의병을 일으키고 조준구를 죽이려 했으나 실패하고, 도리어 고향에서는 더 이상 살 수 없는 처지가 되고 만다.

 

 

 

동정호

 

 

악양 지명도 그렇고 동정호 역시 중국산(?)이다. 중국의 동정호를 닮아 이름을 같이 지었다는데, 중국 호남성 동정호(湖 둥팅호)는 여기와 비교가 안되는 넓은 호수다. 중국 두 번째  담수호로 그 넓이가 5,000평방미터라 하면 막연해도, 가로 세로 각각 70km라면 짐작이나 하겠나. 요 쪼꼬만 연못에 동정호란 이름을 붙여 놨으니 중국사람들이 보면 뭐라 할까. 그 둥팅호에 붙어 있는 도시가 악양이다. 중국 악양에 있는 동정호가 아니라 동정호 옆 한켠에 붙은 악양시라 하니, 그 어마어마함이 느껴지나. 국산 동정호는 악양면 평사리 몇번지에 속한...?

 

좌우튼간에 그렇다고 기죽을거 까지 있겠나. 악양 평사리 하면 '토지'이고 최참판댁 하나만으로는 부족한듯 하여 동정호를 만들었고 정자에도 악양루란 현판을 걸고, 섬진강변을 따라 '박경리 토지길' 이란 팻말도 걸어놨다.

 

 

 

 

 

소나무 순례를 마치고 19번국도로 나왔다. 국도에서 평사리로 들어가는 길목에 있는 이정표. 그 맨 꼭대기에 최참판댁이 걸렸듯이 악양하면 최참판이고 최참판 하면 평사리다.  참판(參)은 조선시대 종2품으로 판서() 바로 아래, 요즘으로 치면 차관이다. 물론 소설이지만 참판나리가 이런 시골에 살기나 했을까. '토지'를 읽은지가 언제인지 너무 가물거려 다시 읽어볼까 싶기도 하다.

 

 

 

 

 

 

 

슬로시티 아니냐, 천천히 가자.

 

 

 

 

 

 

"축축히 젖은 모래는 여인네 살갗처럼 부드러웠다. 섬진강의 모래는 순백색이며 가루같이 부드러웠다... "

-박경리의 '토지' 속에서

 

 

 

저 멀리 보이는 봉우리는 왕시루봉이다

 

 

은모래가 쌓여 운동장 보다 넓은 모래땅이 만들어지고 수천년을 흘러 내린 섬진강은 예나 지금이나 그대로다. 악양이 고향인 친구의 말을 빌리자면, 예전 이곳에 나루터가 있어 전라도 다압면 아이들이 배를 타고 건너와 악양 학교에 다녔단다. 겨울에 강물이 얼면 걸어서도 건너왔다는데 온전한 뻥인지는 알 수 없으나 가뭄이 들어 수량이 줄어들면 얼기도 하겠다는 생각은 든다. 지도에는 입석나루가 표기되어 있지만 물가에는 배 한 척 없다.

 

 

 

악양에서 화개장터까지 전구간 걷는 길이 만들어져 있다

 

[섬진강을 따라가는 박경리 토지길], [이순신장군 백의종군길] 팻말과 리본이 걸려있고 바닥에는 푹신푹신한 깔판까지 깔려있다. 마주 걸어오는 사람들이 있어 반갑게 인사를 나눈다. 한 달 혹은 두 달 후 매화와 벚꽃이 활짝 피면 이 길은 아주 붐비는 길이 되지 않을까.

 

 

 

팽나무 쉼터

 

오륙백년은 묵었을 만한 팽나무가 있는 [팽나무쉼터]를 지나면 도로 이정표 [화개면]이 보인다.

 

이제  화개면이다

 

 

화개면 이름은 화개동천에서 유래한다. 「화개동천 이야기」는 ‘화개’라는 지명에 관한 내용이면서 쌍계사 창건 설화와도 연관이 있다. 쌍계사는 723년(성덕왕 22)에 의상의 제자인 삼법이 당에서 귀국하여 육조 혜능의 정상을 모신 뒤 옥천사라는 이름으로 창건했다가 절 양쪽으로 계곡이 흐른다 하여 쌍계사로 불렸다. 삼법화상이 육조 혜능의 정상을 모시기 위해 ‘눈 속에 칡꽃이 핀 곳’ 을 찾아 절을 세우고, 그 지명이 花開로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이거는 녹차밭이고~

 

 

 

 

검두마을

 

화개면으로 접어드니 녹차밭이 펼쳐진다. 산자락에 일군 밭이라 그 넓이는 말할게 못된다만 강변을 따라 계속 이어진다. 검은 빛을 띈 오죽(竹)으로 장식한 대나무쉼터를 지나니 길을 둘로 나누며 강변으로 [은모래길]을 가리킨다. '여인네의 살갗'같다는 은모래를 밟아보고 싶은 욕정(!)도 일지만 갈길이 구만리인 우리는 은모래길을 외면하고 두꺼비 쉼터로 직행한다.

 

밀림처럼 빽빽한 대나무 숲은 음침하기까지 하다. 이 대나무로 만든 화살을 맞으면 얼마나 아플까를 걱정하는 객꾼더러 죽을 걱정 보다는 낫지 않겠나 했다. 대숲을 빠져 나가 검두마을 입구에 노송이 여럿 있다. 부부송 보다 더 우람한 체격들을 가졌는데 자리를 잘 못 잡았음인지 어떤 보호조치도 못 받고 방치된 채다.

 

검두마을 앞에서 19번 국도와 살짝 접한 길은 다시 강변으로 내려가는데 바로 아래로 스쳐 흐르는 강물이 제법 요란한 소리를 낸다. 울돌목인가, 화개 명량인가.

 

 

 

 

 

지도에 금천나루터로 표기된 곳 부터 정면으로 강둑아래로 낸 길은 거의 일직선으로 1km가 넘는다. 물가에 사람이 있어 뭐하나 자세히 보니 측량용 깃발을 들고 있다. 강가에서 혼자 요상한 몸짓을 하는게 이상하게 보이지만 어디 먼데서 망원경으로 측량을 하고 있는게다. 강 한가운데 모래톱에 꺼먼 물체 두 개가 말뚝인가 했더니 언뜻 움직임이 포착된다. 확실치는 않지만 독수리 두 마리가 앉은건데 뭔 담화를 길게 나누는지 날아 오르지도 않고 우리가 다 지나갈 동안 그대로다.

 

 

 

남도대교가 보인다

 

황토를 덮은 제방 길이 끝날 즈음 성제봉 뒷편에서 흘러내려온 신기천을 건너면 덕은리 신기마을이다.  ‘덕은리 지명은 덕(德) 있는 현자가 숨어살던(隱) 곳을 말하며, 덕 있는 현자는 정여창(鄭汝昌)을 말함이다.

 

정여창(鄭汝昌, 1450. 5. 5. 1504)은 조선시대의 문신이며 성리학자로, 점필재 김종직(?畢齋 金宗直)의 문하로 수학했고 성종 때 관직에 나간 후 연산군의 스승이기도 했다.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유배지에서 사망했고 갑자사화 때 부관참시를 당한다. 정여창이 한 때 덕은리에 있는 악양정에서 은거 시절을 보냈다 한다.

 

 

 

두꺼비바위 쉼터

 

쉼터를 만나 "좀 쉬었다 가까" 말 떨어지기 무섭게 둘이는 자리를 깔고 배낭을 푼다. 한 두 시간 걸었더니 나도 목이 마른데 지들은 얼마나 막걸리가 고팠을까. 지난 1구간에서도 두꺼비쉼터가 있었기로 섬진강이니 그런가보다 하고 앉고보니 두꺼비 머리 위로 강가에 두꺼비 처럼 생긴 바위가 보인다. 그래서 두꺼비바위 쉼터라 했나보지.

 

 

 

 

 

하동군의 대표적 브랜드인 지리산 야생차는 그 기원이 삼국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신라 흥덕왕 3(828) 당나라에서 돌아온 사신 대렴공이 차 종자를 가지고 오자, 왕이 지리산에 심게 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쌍계사 입구에 대렴공 추원비가 있는데, 이 비석에 지리산 쌍계사가 우리나라 차의 시배지라고 적혀 있다.

 

 

 

매화 터지는 소리가 들린다

 

 

은모래쉼터가 있는 덕은나루터에는 애절한 사랑 이야기가 있다.

대금들에 핀 애절한 사랑은 대금을 잘 부는 경상도 총각과 소리를 잘하는 전라도 처녀가 사랑하게 되어 하동군 화개면 덕은리 섬진강 변에 있는 들판에서 만나기로 하였으나 갑자기 쏟아진 폭우로 인하여 만나지 못하고 서로 마주 보면서 두 달 동안 대금과 춤으로 연정을 주고받았다는 비극적인 애정담이다. 또한 청년이 대금을 불던 자리를 대금이들, 처녀가 노래한 곳을 연창이라 불렀다는 지명유래담이기도 하다. 대금들은 하동군 화개면 덕은리 상덕마을의 동남쪽 섬진강 변에 있는 들판이다. ‘젓대라고도 불리는 대금은 음역이 넓으며 높고 음량이 풍부하여 독주(獨奏) 악기로도 자주 쓰인다.

 

 

다기(茶器)를 형상화한 천년녹차 쉼터 뒷편 녹차밭에는 창 넓은 모자를 눌러 쓴 아지매가 고랑을 고르고 있다. 차나무는 마치 바리깡으로 민듯이 깨끗이 손질되어 있는데, 요즘엔 차를 전부 기계로 따나보다 했더니, 농삿꾼인 객꾼이 우전(雨前), 세작(細雀)을 손으로 따내고 그 다음 작업은 전부 기계로 한단다.

 

우전(雨前)이란 곡우(穀雨, 4월 20일경) 전에 따는 잎, 세작(細雀)은 가장 어린잎을 새의 혀처럼 생겼다고 세작이라 하며, 중작, 대작은 세작보다 큰 잎을 말한다.

 

 

 

남도대교

 

남도대교 오른쪽이 화개장터다. 반달형 아치 위로 왕시루봉이 보이고, 남도대교 우측으로 올라가는 능선이 우리가 올라 갈 경남도계 황장산 능선이다.

 

남도대교

 

남도대교는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 탑리와 전라남도 구례군 간전면 운천리를 잇는 다리로, 영남과 호남 간의 교류 활성화를 총 사업비 217억 원을 투입하여 2003729일에 개통하였다. 남도대교의 완공으로 배로 섬진강을 건너거나 전라남도 구례군 토지면의 동방천 다리로 약 16를 우회하여 다녔던 두 지역 주민들의 불편이 해소되었다.

 

 

 

 

 

 

화살 과녁이 있는 활터(국궁장)를 지나 남도대교 다리로 올라서면 바로 화개장터 입구다. 정면에 큰 비석은 律刹大本山雙磎寺(율찰대본산쌍계사), 우측 건물은 유명한 녹차회사인 화개제다(花開製茶)건물이다.

 

 

 

화개장터

 

 

 

 

 

 

 

화개장터는 경상도 하동과 전라도 구례를 잇는 전통 장터다. 해방 이전 전국 7대 시장의 하나로서, 섬진강 수로를 따라 지리산 일대의 산나물과 약재, 전라도의 쌀과 보리, 남해 연안의 미역, 고등어 등의 해산물이 교역되었다. 1일과 6일날 장이 서는 5일장이었으나 최근에는 장날이 따로 없이 매일 열려있다. 옛날에는 화개장터까지 돛단배가 들어와 경상도와 전라도 사람들이 이 시장에 모여, 내륙에서 생산된 임산물, 농산물과 남해에서 생산된 해산물들을 서로 교환하였다. 그 후 섬진강 상류에 댐이 생기고 부터는 강물이 줄어들어 배가 들어오지 못했다 한다.

 

섬진강 댐은 옥정호(갈담저수지)를 말하고, 보성강의 주암댐 역시 섬진강 하구의 수량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여기도 사대강 자전거길 처럼 도장을 찍는 인증센타가 있는 모양이다. 부산 갈맷길에도 인증도장이 있더니 요새는 어딜가나 인증, 인증샷이 유행이네. 어떤 매장앞에 예쁜 복장의 로봇 마네킹이 있다. 마네킹 얼굴도 반반한게 늑대들을 유혹한다. 객꾼은 입을 맞추고 학봉이는 지도 모르게 손이 들어간다. 벌건 대낯 아무데서나 껄떡거리는 늑대들이란... 객꾼 사진을 저어매한테 카톡으로 날렸더니 진짜로 착각하고 날아오는 답장이 가관이다.

 

 

 

입맞추고,

 

 

 

손이 어디로 들어가노~?

 

 

 

화개천

 

지리산 삼도봉부터 토끼봉,  연하천, 벽소령, 선비샘,  남부능선 음양수, 삼신봉에서 흘러내린 물이 다 모여 화개천을 이룬다. 빗점골, 대성계곡, 범왕골, 단천골... 수많은 골짜기 물이 여기로 다 내려온다.

 

 

 

터미널분식

 

화개장터에서 화개교를 건너면 화개터미널이다. 쌍계사 입구이고 경남도계 언저리이면서 19번국도 경상남도의 마지막 지점이다. 자연스레 뱌그라행님 가게로 들어가고 김밥에 막걸리 두어병 순식간에 해치운다. 터미널에 딸린 화장실에서 근심을 풀어놓고, 김밥 한 줄 배낭에 담았다.

 

 

 

이거는 아침 사진이다. 아침부터 막걸리 두 병 비우고 시작했으니...

 

 

 

 

 

 

 

(화개장터~목통마을)

 

 

화개장터에서 목통마을까지

 

예전의 원래 화개장터는 다리 건너편 원탑마을이다. 저쪽 건너편의 현재 장터도 원탑이지만 그쪽은 말하자면 신도시이고 원래는 이쪽 터미널 앞쪽에 장이 섰단다. 황장산 들머리의 넓은 공터가 바로 예전 장이 서던 한복판이란다.

 

 

화개면 탑리(塔里)

자연 마을인 원탑(元塔)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원탑은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30호인 탑리 삼층석탑이 있어 탑몰[일명 탑말], 탑촌, 탑동으로 불리어 왔다.

 

19번국도 화개삼거리인 원탑마을에서 쌍계사까지를 '화개10리 벚꽃길'이라 하는데, 아직 벚꽃은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지만 한 달 후 3월말로 예정한 다음구간 때는 벚꽃구경도 충분하겠다.  

 

화개장터 벚꽃 축제는 영남과 호남의 접경 지역에 있는 하동군의 화개장터와 섬진강 일대의 관광지를 널리 알리기 위해 하동군에서 19934월부터 개최하기 시작하였다. 화개장터에서 쌍계사까지 이어지는 화개10리 벚꽃길이 절정을 이루는 4월 초에 섬진강 둔치 일원에서 3일 동안 펼쳐진다. 10리 벚꽃으로 널리 알려진 하동군 화개의 꽃길은 사랑하는 청춘 남녀가 두 손을 꼭 잡고 걸으면 백년해로한다고 전해져 일명 혼례길이라고도 불린다.

 

 

황장산 들머리

 

 

터미널에서 국도로 나가다가 우측에 시장떡방앗간이 있고 방앗간 앞에 너른 공터가 있다. 예전의 장터였다고 하는데 그 안쪽에 산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보인다. 황장산 등산지도와 코스별 시간표가 있다. 현위치는 장터떡집.

 

 

1코스 장터떡집에서 목통마을까지 우리는 5시간 걸렸다.

여기서 삼도봉까지는 21km. 

 

 

 

 

 

계단위로 올라서면 바짝 쳐 올리는 급비탈길이다. 미리 웃도리 벗어담고 시작할 일이다. 분식집에 앉아 김밥에 막걸리 퍼 마신 둘이는 바로 곡소리를 뱉아낸다. 이럴줄 알고 나는 김밥을 먹지않고 배낭에 담은 것이다. 코가 박히는 까꼬막을 5분 올라가면 테라스로 만든 전망대다. 섬진강 남도대교와 탑리마을이 한 눈에 다 들어온다.

 

 

 

전망대

 

 

 

탑리 원탑마을

 

 

 

 

 

첫봉에는 돌담을 두른 석축이 있는데 규모로 봐서 성터라 할 수는 없고 망루나 초소 역할을 했음직 하다. 섬진강이 예전 신라와 백제의 경계였나. 이 돌담은 신라시대 최전방 초소였던가. 낑낑대던 객꾼은 돌담 너머로 가더니 한 근심 풀어놓고 온다. 비로소 능선길이 시작되면서 두 개 도(道)를 가르는 산 마루금이다.

 

 

 

 

지리산둘레길 

 

작은재(360m)

떡방앗간에서 40분. 넓직하고 빤질하게 닦인 고개가 산을 넘어간다. [작은재]라는 팻말이 달려 있는데 지리산 둘레길이다. 우측은 하동중학교가 있는 법하마을, 왼쪽은 연곡사 입구 구례 기촌마을이다.

 

 

583.4m (△경남464)

 

작은재에서 25분 더 올라가니 삼각점이 있는 583.4m봉이다. 경남464 지적삼각점 안내문이 있지만 지형도에는 삼각점 표기가 없다. 기반에도 삼각점 번호가 없는걸 보니 국토지리원 삼각점은 아니다. 어쨌든 삼각점 만난 기념으로 자리깔고 앉아 또 막걸리 들이 붓는다.  

 

 

에, 또...  그리스 구제금융 기간연장은 불가피하다고 보는데, 객꾼쎄이는 우예 생각하요~?

 

 

 

 

좌틀,

 

삼각점봉에서 5분 내려가면 능선은 곧게 내려가고 촛대봉 길은 왼쪽으로 급하게 꺾인다. 이정표가 없으면 십중팔구가 아니라 십중 십 직진할 장면이다. 정면은 삼신리 삼신마을로 내려가는 길이라.

 

능선 우측 사면길로 바짝붙어 좌틀해 올라가면 돌담을 두른 묘가 있다. 자연석을 그대로 둘레로 이용해 기가차게 묫자리를 잡았다. 8분 더 올라가면 아주 튼실하게 벌떡 선 선바위가 나온다.

 

 

촛대바위

 

촛대봉 기슭에 있다고 촛대바위라 하는지, 이 바위가 있어 봉우리 이름이 촛대봉이 된건지 긴가민가. 여지껏 올라오면서 아무생각이 없었는데 이 바위를 보고서야 비로소 예전에 한번 왔던 능선임을 알아 차린다. 계속해서 촛대바위에서 20분 가량 고도 100m를 더 올리면 촛대봉이다.

 

 

 

촛대봉

 

촛대봉(729.7m)

구례군에서 설치한 오석의 정상석 앞에 두어평 공터가 있다. 정작 산봉우리에 올라서는 촛대처럼 생긴 봉우린지 알 수도 없고, 아무래도 촛대바위에서 유래한 이름같다. 둥근 기둥의 이정표는 하동군, 사각의 검은기둥 이정표는 구례군 제품이다. 도계이다보니 양쪽 군 제품이 다 있는데 정상석이 둘이 아니라 다행이다.

 

둘이는 또 막걸리를 마시는데, 황장산 가서 먹자 어쩌자 하다가 결국은 참지를 못하고 마지막 병을 비운다. 사진을 찍어 홀산 카페에 올리니 즉각적인 댓글이 달린다. 산꼭대기에 앉아 실황중계를 하고 있으니 세상 참 좋아졌다.

 

구례 이정표는 농평마을까지 6.6km를 가리키고, 하동 이정표는 동쪽으로 [삼신마을]을 가리키는데,  이정표 뒤로 내려가면 삼신리 침점마을 자혜정사로 내려가게 된다.

 

 

 

에, 또~...  댓글을 달아야 하는데~~

 

 

촛대봉에 앉아 15분 노닥거리다가 8분 내려오니 전후방으로 촛대봉과 황장산을 가리키는 이정표가 있고, 옆에 작은 팻말처럼 세운 스텐표지판에는  [새끼미재]라 했다. 이 표지판은 견두산 전후 산길에 있는것과 같은 모양으로 구례군에서 만든 것이네. 지형도에는 새껴미재가 881.6봉 넘어 황장산 직전에 표기가 되어 있지만 그곳에는 고갯길 같이 생긴것도 없고 여기가 새껴미재가 맞다.

 

새껴미재인지 새끼미재인지 어느게 맞는지, 또 무슨 뜻인지도 모르겠다만, 우측 희미한 길로 내려가면 용강리 만항마을이고, 더 내려가면 쌍계사 앞에 떨어진다.

 

새껴미재에서 올라가다가 문득 머리 위로 쳐다보니 앞에 솟은 봉우리 중턱에 목재 테라스가 보인다.  절벽에 설치한 전망대라 왼쪽으로 휘돌아 올라갔다.

 

 

 

황장산 전망대

 

전망대에 올라서니 방금 지나온 능선을 가운데 두고, 왼편으로는 쌍계사 일대가 훤하고 오른쪽으로는 왕시루봉이 우뚝 솟아있다.

 

 

쌍계사

 

왼쪽에 국사암, 오른쪽 쌍계사이고 불일폭포는 내원골 깊숙히 숨어있어 보이지 않는다. 오른쪽 한 칸 넘어 골짜기는 거사봉에서 흘러내린 호강골이고  뒤에 높은 봉우리는 삼신봉에서 갈라진 삼신지맥 관음봉(1,153m)이다.

 

전망대 뒤로 계속 고도를 올리며 10분 후 이정표는 왼쪽으로 [천황사3.1km]를 가리킨다. 구례군 토지면 외곡리 중기마을에 있는 천황사다. 이정표 기둥에는 [중기능선삼거리]라 했다. 마을이름을 따 중기능선이라 했네.

 

×881.6봉에 올라서면 지리산 주능선이 파노라마로 펼쳐지면서 우측 맨 끝에 천왕봉이 흰 눈을 쓴 채 빼꼼히 드러난다. 우측으로 내려가는 능선은 용강리로 가겠고, 황장산은 왼쪽이다. 약간 내려 앉았다 올라가지만 지형도의 새껴미재는 고개도 아니고 아침에 본 문암송 못지않은 노송 한 그루 독야청청한 봉우리를 지나면 잔잔한 산죽길이다.

 

 

황장산

 

 

황장산 (黃獐山 947.7m 하동21)

문경에 있는 백두대간 황장산 (黃腸山 1,077m)은 조선시대 봉산(封山)으로 정해질 만큼 황장목(黃腸木)이 많아 황장산이나 여기 황장산(黃獐山 943.7m)에는 소나무는 울창하나 황장목이라 할 만한 재목(材木)은 보이지 않는다.

 

 

 

 

노고단에서 천왕봉까지 지리산 주능선은 물론이고, 왼쪽 왕시루봉 능선, 오른쪽 삼신봉까지 막힘없는 조망이 나온다. 촛대봉과 그 너머로 천왕봉에만 눈이 남아 하얀 봉우리로 보인다.

 

 

촛대봉 너머로 상봉이 빼꼼하다.

 

 

 

반야봉, 농평

 

황장산에서 산길은 당재까지 고도를 떨구며 내려 앉는다. 농평마을이 빤히 보이지만  4km는 더 가야되는 거리다. 삼도봉까지 올라가는 능선이 한 눈에 다 드러난다. 무심코 내려가다보니 발 아래가 절벽이다. 좀 전에 우측으로 난 갈림길이 보였는데 아마도 우회한 길로 보인다. 돌아가긴 성가시고 그대로 절벽을 우측으로 살짝 돌아 바위벽을 아슬아슬 미끄려져 내려갔다.

 

 

 

 

평도마을 능선삼거리

882.7봉에서 왼쪽은 연곡사 아래 평도마을이고, 당재는 우측으로 돌아간다. 구례군에서 설치한 이정표는 구례마을만 안내한다. 우측으로 꺾어 가면 다음봉은 920쯤 되는데 [등산로] 팻말이 걸려있고,  왼쪽으로 로프 걸린 넓은 길이 나있다. 이 봉우리 뒤로 우측으로는 판교마을 하산길이 있다.  

 

 

 

 

 

 

 

당재로 떨어지기 직전 봉우리. 여러갈래의 소나무 두 그루가 있고 담배 한대 피우고 가라는 듯 바닥에 재털이 두 개가 있다. 농평마을이 훤하게 내려다보인다.

 

 

 

농평마을

 

 

당재

 

당재 (630m)

커다란 등산로 안내판에 화개삼거리에서 우리가 올라 온 등산로가 표시되어 있다. 왼쪽은 전라도 농평, 오른쪽은 경상도 목통마을이다. 찻길은 왼쪽 농평이 가깝지만 오늘은 목통으로 내려가기로 했다.

 

 

화개목통마을로 하산

 

내리막길 달리다시피 신나게 내려가니 15분 후 독가를 지나 당재에서 20분 걸려 목통마을 도랑가로 떨어진다.

 

 

목통마을

 

 

하동군 화개면 범왕리

범왕은 1632(인조 10) 편찬한 진양지(晉陽誌)에 화개의 열 개 마을 중 하나로 범왕촌이 기록되어 있어 유서 깊은 마을로 범왕이라는 명칭은 지난 날 마을에 있던 범왕사(梵王寺)에서 유래한 이름으로 여겨진다. 범왕동(凡旺洞), 신흥동(新興洞), 호동(虎洞), 화천동(花川洞), 목통동(木桶洞), 사시동(獅嘶洞)이 범왕리로 통합되었다.

 

신흥은 신흥사(新興寺)가 있었던데서 붙인 이름으로 삼신동(三神洞) 골짜기의 중심 마을이었다. 현재 신흥사(新興寺)는 터만 남아있지만, 최치원(崔致遠)이 속세를 떠나며 썼다는 세이암 각자와 김일손이 썼다는 탁영대 각자는 바위에 그대로 남아 있다.

 

목통마을을 마주보는 도랑으로 떨어졌다. 지도에 범왕천으로 표시된 계곡은 예전에는 연동마을이 있어 연동계곡으로 불리다가 연동마을이 빨치산 토벌 후 폐촌되어 없어지면서 목통계곡, 목통골로 불린다. 칠불사로 올라가는 범왕교에서 600m 윗쪽이다. 七佛寺는 가야 김수로왕의 일곱 왕자가 수도한 후 모두 성불하였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고, 칠불사에는 亞字房址가 남아있다. (경상남도 유형 문화재 제144호)

 

 

칠불사 아자방의 길이는 약 8m이고, 방 안 네 귀퉁이에 70높이로 좌선대를 마련하였다. 좌선대에서는 승려들이 좌선을 행하였으며, 중앙의 낮은 곳은 불경을 읽는 공간으로 꾸며졌다. 이러한 구조가 ()’자와 같다고 하여 아자방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난방을 위해 온돌을 이중으로 구축하였는데, 그로 인해 한 번 불을 넣으면 상하 온돌과 벽면까지 100일 동안이나 따뜻하다고 한다.

 

고로쇠 시음

 

 

바야흐로 고로쇠 물이 나오는 시즌이라, 마을 가까이 나무마다 빨대를 꼽고 비닐봉지를 달어놨다. 목도 마르던 차에 주위 한번 휘익 둘러보고 봉지를 열어 내 나팔을 갖다댔다. 이걸 수집해서 통에 담아 공급을 하면서 또 뭘 타는지 알 수가 있나. 이 봉지에 담긴물은 오리지날 백프로 원액인기라. 객꾼도 덩달아 빨고, 학봉이 차례가 되니 저만치 할매 한 분 올라온다. 퍼뜩 봉다리 도로 걸어놓고 입수구리 싹 닦았다. 

 

 

목통마을

 

택배담당 뱌그라 행님한테 전화를 넣으니 범왕교에서 기다린단다. 가랭이 털고 행장 수습하니 차를 몰고 올라오고, 신흥교로 내려와 아직은 썰렁한 화개 10리벚꽃길을 따라 화개터미널로 내려왔다.

 

 

터미널분식

 

 

 

 

터미널분식집에서 가장 비싼 요리(!)인 삼계탕을 시켰다. 다음에 한판 더 이용해야 하니 아직은 잘 보여야 할 필요가 있는기라. 저그 둘이 조은데이 두 병 빠는 동안 나는 칠성소주 한 통 비우고, 언제나 그랬고 너무나 당연한듯 핸들은 내 담당이다.

 

다음구간은 3월 말경으로 잡았는데, 지리산 통제기간 중이라 연하천 통과가 난제다. 그대로 진행을 하느냐 아니면 그 다음구간을 먼저 하느냐... 머리 좀 더 굴려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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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5.03.05 14:38

    첫댓글 참 재미 읽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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