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팔음지맥(八音枝脈)
백두대간 봉황산에서 남서방으로 분기하여 천택산(683.9m), 팔음산(771m), 천금산(464.9m), 천관산(445.4m), 철봉산(449.5m)을 만들고 북으로는 보청천, 남으로는 송천(초강천)의 분수령이 되어 금강2교에서 맥을 다하는 산줄기.
(주요 봉우리)
태봉산343(-1.7km) 천택산683.9 팔음산771 천금산464.9 천관산445.4 철봉산449.5
(구간거리)
백두대간 봉황산~2.6~25국도~5.6~천택산~2.5~개티재~4.6~어민각~2.9~큰곡재~0.6~팔음산~5.8~별재~2.1~천금산~4.1~샘터재~2.6~천관산~2.0~밤재~7.2~부상골고개~7.0~당재~5.8~철봉산~2.3~금강2교 / 57.7km
봉황산740.8m : 형제봉에서 7.7km, 신의터재에서 15.5km
(1/25000 지형도)
상주시에 면(읍)이 열여덟이다.
백두대간이 남북을 가로지르고, 작약지맥, 숭덕지맥이 동쪽 낙동강으로 뻗는다.
서쪽은 충청북도와 접하는데 팔음지맥은 화남 화서 화동 모서면을 지나면서 경북도계 구간과 일부 겹친다.
팔음지맥 1구간
2011.06.18 (토)
산길 : 봉황산~어만각
거리 : 15.3km
구간거리
봉황산~2.6~25국도~5.6~천택산~2.5~개티재~4.6~평산재 / 15.3km
(접근 죽전~봉황산 1.6km / 00:45)
Cartographic Length 18.8km Total Time: 06:55
숭덕에 이어, 조진고문님과 같이 발을 맞춘다.
고문님도 언급하셨지만 같은 지역에서 조를 맞춰 함께 산행하는거야 일반적이지만 서울과 부산에서 이렇게 중간에서 만나서 함께 산행을 하게 되는게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도 어쩌다 우연히가 아니라 계속적이고 조직적(!)으로 이루어 지는게 흔한 일은 아닌 것이다. 나야 고문님이 불러주시기만 하면야 부담없이 쪼르르 달려가지만, 고문님은 또 나를 어떻게 여기시는지 알 수 없는 일이나 계속적으로 연통을 주시니 그리 밉보이지는 아니한 모양이라. 부산에서 나 같은 者 하나 더 달고 가면 금상첨화이겠다만...
57km를 네 구간으로 나눠놓으니 아주 널널하다. 계산기 안 두드려도 15km가 안되는 거리다. 낮 시간으로 치자면야 년중 가장 산행을 길게 할 수 있는 시기지만 본격적인 무더위에 뭐 먹고 살일 있다고 온종일 쎄빠지게 쪼차 댕기겠나. 둘쨋날은 귀가가 있으니 빨리 시작하는게 좋고, 첫날은 마치고도 빈둥거렸으니 더 늦게 시작했어도 좋았겠다. 다음번에 조정을 해보자.
오늘 구간은 백두대간 봉황산 접근이 문제였는데 선두대장(사모님)이 택배를 맡아 대간 능선길에서 가장 근접한데까지 차로 올려 주셨고, 또 화령 국도에서 기다렸다가 지맥 마루금과 도로가 거의 엇비슷하게 가는 부분은 황산마을까지 차로 날랐으니 1시간 이상 시간을 줄였고 다리씸도 남아 돌았다.
06:50 어만각
07:30 상현리 죽전마을
08:12 봉황산
08:38 通德郞李公
09:21 무동저수지
09:24 25번국도
09:50 황산마을
10:43 천택산
11:06 사래실고개
11:50 개티재
13:11 △584.3m
14:03 다락골 안부
14:16 평산재
14:22 어만각
어만각
화동면 평산리 평산소류지 옆에 있는 ‘御輓閣’은 뒷부분에서 정리하기로 하고, 오늘 구간 날머리로 잡고 07시에 만나기로 했다. 저번에 너무 시간을 정확하게 맞추어 일어나다 보니 예기치 않은 일에 시간이 지체되는 수가 있고 그러다보면 과속을 하게 되는지라 더 일찍 일어났다. 집에서 03:30 출발을 하니 시속 100km를 넘지 않고도 20분가량 빨리 도착했다. 점심은 도시락을 쌌고, 아침은 휴게소에서 빵 하나 먹고나니 더 이상 생각도 없다.
화서면 상현리 죽전마을
내차를 두고 고문님 차로 이동을 한다. 25번국도 태봉산 우측 상현리로 들어가 차가 갈 수 있는 끝까지 올라가니 팬션이라도 지으려는지 바닥을 반반하게 시멘트로 덮어놓았다. 지도상 죽전마을 임도 끝부분이다. 이른 시각임에도 뭔가 뚝딱거리며 일하는 사람 하나 있다.
어만각
죽전마을 상단
백두대간 능선
비교적 뚜렷한 길을 따라 20여분 걸려 고도 170을 올리니 리본이 주렁주렁 걸린 백두대간 능선이다. 봉황산에서 동쪽으로 700m 지점, 고도는 540이다. 지체할 일도 없이 서쪽으로 간다. 5분 가면 화서면계인 570봉이다. 숲이 우거져 조망도 안되고 비온 후 구름이 걷히기 전이라 바로 건너편의 대궐터산도 안개속이고, 능선길 20분 후에 봉황산 정상이다.
봉황산
봉황산 (740.8m △관기303)
예전에 없던 백두대간 안내판과 원형 의자가 설치되었다. 정상석은 그대로이고 삼각점은 뿌리까지 드러나 큰 비라도 오면 떠내려가지 않을까 싶다. 2003.9월에 여길 지났으니 8년만인가. 지맥하러 여기에 다시 오를 줄 짐작이나 했나.
봉황산(鳳皇山)은 1300여년전 봉황새가 날아들어 30여년간 살았다는 전설이 있으며 정상이 머리를 빼어 올리고 양 날개를 펼친 봉황과 같다 하여 봉황산이라 전해져 내려온다고... 적혀있는 안내판 뒤로 내려간다.
형제봉 - 천황봉
通德郞李公묘
급한 비탈을 미끄러듯 내려가면 5분 간격으로 헬기장이 두 개 나오는데, 첫 헬기장은 반반한 시멘바닥이고 두 번째 헬기장은 블록을 걷어내고 한쪽에 쌓아 놨다. 더 내려가다가 백운사 뒷봉에는 통덕랑 (通德郞) 비석이 있는 묘가 풀숲에 덮혀 있다. 통덕랑은 조선시대 정5품 벼슬이라는데, 조선시대나 현재나 공무원의 품계는 9등급이니 현재로 치면 5급 사무관쯤 될래나.
통덕랑묘에서 좌우로 갈리는데 왼쪽은 백운사로 가게되고 지맥은 우측이다. 바위절벽이 앞을 막아 우로 휘돌았다. 산불 흔적이 넓게 남은 비탈에는 굵직한 소나무들 밑둥이 씨커먼 숯이다. 우측으로 열린 바위가 있다만 안개가 짙어 발아래 놋점마을만 겨우 보인다.
화령으로 곧게 뻗어 내려가는 능선에는 키 작은 소나무가 우거져 허리를 펴지 못하겠다. 10분이 넘도록 고개 숙이고 인사하는 자세로 내려가니 허리가 아프다. 비로소 허리 펼만한 묘터에서 우측이 맞겠다만 숲이 너무 우거져 직진해 내려오니 창녕성공 묘를 지나 시멘트길에 내려섰다. 봉황산에서 1시간 걸렸다.
무동저수지 옆길이고 태봉산이 바로 앞이다. 지맥에서는 왼쪽으로 벗어났다만 마루금보다는 사모님 차가 급하다. 큰 도로(25번국도)로 나가니 우측으로 화남면으로 넘어가는 도로가 평지 같으면서도 조금 솟아 겨우 고개모습을 갖춘 마루금이 확인된다.
무동저수지, 태봉산
태봉산(胎峯山 ×343m)
주양 남쪽에 있는 산. 정상에 연산군의 왕자 태를 봉안했던 태실이 1930년 일본인에게 도굴된 채로 있다. 태실에서 남쪽으로 21m 거리인 상현리 377-1번지에 금표비가 있다.
상현리(上縣里) 태실(胎室)
태봉산에 있는 연산군 왕자의 태실로 전주 이씨 대동종약원 이형렬(李亨烈) 전례이사는 연산군의 둘째 왕자로 주장한다. 1930년대 일본인이 태를 담았던 도자기는 꺼내 가고 태실은 나뒹굴고 있던 것을 상주의 전주 이씨 대동종약원에서 1994년 다시 제자리에 세워 놓았다. 정남향의 9부 능선에 금표비가 있다. 금표비 뒷면에는 ‘왕자태실’이라고 새겨져 있다. 태실의 재질은 화강암으로 상부 둘레 300cm. 총 직경 95cm, 반원형 내부의 내부 직경 51cm×두께 22cm×높이 55cm, 하부의 둘레 345cm. 총 직경 104cm, 내부 직경 54cm×두께 25cm×높이 70cm로 총 높이는 125cm다. 하부의 밑부분에 직경 4cm의 구멍이 뚫려 있다.
25번 국도. 벼육묘공장으로
화령
화령은 화서면 소재지이고 화서의 중심이다. 동으로는 백두대간 화령재, 서로는 팔음지맥 고개(덕고개)가 울타리를 치고 있지만 여느 산골처럼 높은 고개가 아닌 것이 화령평지의 해발고도가 200m가 넘는다. 자연적으로 일교차가 크고, 여기서 재배되는 고랭지포도는 단맛이 강해 ‘팔음산포도’는 전국적으로 유명하다. 삼팔장인 화령장은 예전부터 번성했지만 최근 귀농인들의 증가로 시들해지던 장터가 다시 살아난다 한다.
25번국도 (300m)
봉황산에서 내려온 지맥 마루금은 25번 국도를 건너 화서농공단지로 들어간다. 25번국도상의 고개에 ‘덕고개’라는 유래를 찾을 수 있으나 그런 고개이름에 관심을 두는 이도 없어 어디 물어볼 데도 없다.
달천리(達川里) 떡고개 말래이
봉천 북쪽에 있는 고개. 덕(德)+고개(峴)+마루=덕고개 마루→떡고개 말래이. ‘덕’은 ‘언덕, 고원’ 등의 뜻이 있다.
25번국도에서 천택산 아래 황산마을까지는 선두대장님의 차로 이동을 한다. 달천리 삼거리에서 남쪽으로 [벼육묘공장] 달천리, 터골, [효자정재수기념관] 등 여러 간판과 玉淵, 봉산서원 표석이 있고 그 뒤 공단쪽으로는 세안PC 건물도 보인다.
효자 정재수가 누군가 알아보니, 어느 한 겨울날 어린아이 정재수가 아버지와 함께 눈길 고개를 넘어가다가 술에 취한 아버지가 쓰러지자 옷을 벗어 아버지를 덮어주고, 결국 아버지를 살렸고 지는 죽었다는 내용이다. 예전 유교사상이 투철하던 시절에야 높이 살 효행이었겠지만 지금 시절에서 생각해 보면 정재수의 효행을 기리는 일 보다도 그 정신 나간 애비를 꾸짖는 일이 우선되어야 안되겠나 싶다. 요즘 시절에 어느 애비가 자식의 희생을 담보로 자신의 안전을 바라겠는가.
지맥은 달천정미소 앞에서 우측 능선으로 붙어 도로와 나란히 가다가, 산수동을 지나고 시멘트길 왼쪽으로 건넜다가, 다시 우측으로 건너오고 도로가 마루금이 되기도 하다가 황토집 뒤 산으로 오르면 되겠다.
차를 타고 청원~상주 고속도로 아래를 통과하고, 달천정미소를 지나 [도림사] 방향으로 우회전, 황산마을로 들어간다. 시멘트길을 따라 올라가면 정면에 천택산이 보이고, 황토집 위 물탱크 위에서 포장길은 끝나는데, 25번국도에서 황산마을까지 4.7km를 13분만에 날랐다.
황산마을 꼭대기
천택산 등산로
황토집 뒷능선이 마루금이나 그 앞에 차를 세울만한 데가 없어 끝까지 올라갔고, 우측 능선으로 올라붙을 형편이 안되어 천택산 등산로를 따르기로 한다. 초장에는 [면민등산대회] 리본도 걸린 확실한 길이다가 계곡 끝까지 들어가서는 길 흔적이 없어졌다. 이리저리 길을 골라가며 대충 밀고 올라가니 천택산에서 200m 정도 남쪽으로 지난 지점이다. 황산마을에서 45분.
천택산 등산로
천택산
천택산 (川澤山 683.9m △관기22)
시멘트 포장의 넓은 헬기장에 2등삼각점이 있다. 속리산부터 팔음산까지 다 보일 위치이지만 짙은 박무가 먼데 조망을 다 가린다. 햇볕이 뜨거워 잠시 머무르기도 힘들어 올라왔던 길로 발길을 돌린다. 지형도에는 내川이고 상주시에서는 하늘天을 쓰는데 산봉우리에 내川자는 어울리지 않는다. 여기서 서쪽으로 한줄기 분기하면서 봉우재 넘어 시루봉으로 이어진다.
천택산(天澤山) (천탁산)
사산리와 화남면 입곡리 사이에 있는데, 높이가 683m다. 산꼭대기에 연못이 있었다고 하지만 현재는 없고, 국사당 봉수대(國師堂烽燧臺)가 있었지만 그마저 헬리콥터 착륙장을 만들면서 흔적이 없어졌다. 봉수대 서쪽 임곡리에서 중눌리로 넘어 가는 고개를 봉우재라고 부른다.
사래실고개
사래실고개 (560m)
황산마을에서 올라섰던 곳으로 원위치해 다시 살펴봐도 길도 없는데를 치고 올라섰다. 황산마을에 멀쩡히 나있던 일반등산로는 어디로 해서 정상으로 올랐는지 궁금한 것이다. 남쪽으로 내려가다가 20분 후 두루뭉실한 안부 고개에 내려선다. 마을로 내려간 길 흔적은 없는 고개다.
사산리(沙山里) 사래실 고개 : 사래실에서 화남면 중눌리로 넘어 가는 고개.
화남, 화서면계를 따라 580쯤 되는 봉에 오르고 왼쪽으로 꺾어 한참을 떨어지면 좁은 통로가 파진 안부인데 사래실에서 중눌리 송정으로 넘는 더 짧은 고개인거 같다만 역시 흔적은 없다. 다시 올라선 490봉에서 화서면계 능선을 왼쪽으로 보내고 우틀하면 온전히 화남땅이다. 개티재로 내려서면서 쳐다보이는 건너편에 뾰족솟은 495봉이 은근히 겁을 준다.
개티재 (347m)
숲에서 빠져나와 고갯길에 내려서면 시멘트 바닥에서 반사하는 밝은 빛에 눈이 부시다. 중눌리와 소곡리를 잇는 시멘포장길로 전신주가 넘어가고 바로 옆에 논이다. 고개 이름에서 언뜻 개(dog)가 연상되나 유래를 보면 다른 뜻이다.
소곡리(所谷里) 개티재
머내골에서 중눌리 눌하로 넘어 가는 고개. 재말랑에 서낭당이 있었으나 도로를 만들면서 옮겨졌다.
개티재의 ‘개’는 ‘길(街)’의 뜻으로 쓰였다. · 거리 개(街)
『삼국사기』 지리지나 『동국여지승람』에서는 ‘치(峙)’가 나타나지 않다가, 『신증유합(新增類合)』에 비로소 ‘치(峙)’가 나타나고 있어 ‘치(峙)’는 ‘현(峴)’이나 ‘령(嶺)’보다 사용이 늦은 것으로 보인다. ‘개 티’는 ‘우뚝 솟은 산에 있는 길’ 이란 뜻이다.
개티재
길을 건너 왼편 수레길로 들자말자 우측 비탈로 붙었다. 오름이 다하는 495봉에 올라 점심을 먹으려 했으나 다리씸이 딸려 도중에 퍼질러 앉고 판을 벌린다. 450쯤 되는 첫 봉우리다. 여름철 반찬으로 물김치를 얼려오니 그저그만이라 다른 반찬은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12:05~12:35 점심)
점심먹고 묵직한 배를 안고 오름길에 붙으니 죽을 맛이다만 산딸기가 지천이라 그거 따먹느라 힘듦도 잊는다. 점심 먹은 직후라 디저트로 딱맞다. 495봉에 올라서 왼쪽으로 꺾이면 잠시 조망이 열리면서 584.3봉 능선이 보인다.
내려서면 밀양박씨묘인데 묘비 앞에 묘비 같은 자연석이 있다. 그 돌에다 그대로 문패를 새겼으면 더 좋았겠다 싶다. 이어지는 길에는 딸기가 더 잘 익었고 더 넓어 연신 허리를 숙이고 따먹기 바쁘다.
화동면계를 만나는 550봉은 왼쪽으로 휘돌아 오르고, 우측으로 틀어 잠시 더 오르면 정상부를 묘가 차지한 삼각점이 있는 봉우리다.
산중 만찬
디저트
△584.3 (걸기산)
584.3m봉 (△관기 308)
문패없는 묘는 잡풀에 덮혔고 뒤편에 삼각점이 있다. 25000지형도에는 아무 표기가 없으나 5만 지형도에는 삼각점 표기가 있다. 풀이 웃자라 앉을 자리도 없어 바로 내려가는데 [서범정님] 리본이 나풀거린다. 오랫만에 보는 리본이라 본인을 만난듯 반갑다.
중눌리(中訥里) 걸거지봉 (걸기산)
중눌리와 화동면 양지리, 보미리 사이에 있는 높이 584m의 산. 봉화대터가 있다.
걸+거지+봉(峰)=걸거지 봉. ‘걸’은 ‘걸다, 걷다, 매우, 밥(食), 엇비슷하게’의 뜻이 있다. 경상도에서는 ‘개울’을 평안도에서는 ‘내(川)’를 뜻하기도 했다. ‘거지’는 ‘걷이’를 뜻하기도 하고, ‘기둥에 얹히는 보목의 어깨를 기둥에 맞게 하는 형식’을 뜻하기도 한다. 또 ‘갈+가지’가 변한 것으로도 추정한다. ‘갈’은 ‘작은 내의 줄기나, 내의 줄기가 갈라진 곳’을 뜻하는 옛말에서 온 말이다. 산줄기가 갈라지는 곳에서도 땅이름으로 보이고 있다. ‘가지’는 ‘갈라 진, 갈라진 곳’을 뜻한다.
걸거지봉에서 잠깐 내려오니 봉분이 벗겨진 묘 옆에 앉을만한 자리가 있다. 비로소 배낭에 실린 참외 4개를 들어내니 어깨가 가쁜하다.
530봉에서는 핸들을 우측으로 바짝 꺾어야 되겠다. 봉우리 직전부터 우측을 유심히 살폈으나 길이 보이지 않고 봉우리 살짝 넘고 우측으로 유턴하다시피 틀어진다. 직진길도 뚜렷이 있어 멍하니 가다보면 다락골로 수월케(?) 떨어지겠다.
오랫만에...
성묘객 ?
다락골 안부 (400m)
면계를 따라 남서쪽으로 20분 후 짤록한 안부다. 고갯길 흔적은 남았으나 낙엽이 수북하게 통로를 다 채웠다. 올라선 봉에는 송전철탑이 있고 전선이 동서로 넘어간다. 철탑 이음쇠 철강자재가 땅에 남아있어 고물상에 가져가면 돈이 되겠다만 지고 갈 힘이 없다.
평산재 (375m)
철탑봉에서 10분 내려가면 비포장 고갯길. 4륜구동이나 겨우 다닐만 하다. 거름무더기 뒤쪽 들머리를 한번 쳐다보고 어만각으로 내려간다. 시간상으로는 3km 가량 더 진행해 큰곡재에서 끊어도 충분하겠다만 내일 구간도 그리 길지않으므로 여기서 마치기로 한다.
지형도에는 고개에 바짝 붙어 어만각이 표기되어 있으나, 실제는 평산소류지 둑방 옆에 있다.
평산재
어만각
평산리(平山里) 어만각(御輓閣) : 어만각은 세종대왕이 하사하신 어만을 보관한 곳.
어만은 죽은 사람의 영혼을 조상하고 명복을 비는 글이다. 세종 때 조선 개국공신 무절공(武節公) 신유정(辛有定, 1349~1426) 선생이 죽자 세종임금이 직접 만사를 지어서 하사하신 것을 판각(板刻)하여 귀중하게 보관해 둔 누각이다. 어만각은 정면 1칸. 측면 칸 반의 다포맞배집이다. 평면은 전면 개방된 퇴칸에 뒤쪽으로는 두 짝 판자문을 달고, 안은 마루방이다. 앞쪽 툇기둥은 높이를 낮추어 주상에 창. 평방을 걸었고, 공포는 공간포 2조에 출목은 외 2. 내 2 출목이다. 건물은 작지만 공간 포수나 출목이 과도한 느낌을 준다. 기문각은 두리기둥에 살대를 세운 단칸팔작이다.
신유정 선생은 고려 공민왕 기축년 1월 16일에 탄생하였다. 조선 개국공신으로 벼슬이 형조. 예조. 공조판서를 역임하였고, 태종조에 여진을 소탕하여 대공을 세웠다. 세종대왕께서는 그가 죽자 시호를 무절(武節)이라 하사하시고, 만사를 지어서 영혼을 조상하시며 그의 충절을 가상하셨다 한다.
보청천
황산마을로 가서 고문님 차를 회수하여 청산면으로 갔다. 청산면은 내일 들머리와 날머리의 중간쯤 되는 위치다. 먹거리 얼마 보충하여 청산면 하예곡교 다리 밑에 자리를 잡았다. 지난번 숭덕지맥 할 때도 찾아봤지만 상주 일대는 깊은 계곡이 없다. 보청천 물이 탁하긴 하지만 아쉬운대로 멱을 감고 각자 잠자리에 들었다.
보청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