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모
본존 어깨폭 40cm, 무릎폭 45cm 좌우협시불 높이 69cm 광배 123cm×100cm
유래
석불의 정확한 유래는 알 수 없는데, 태봉사를 창건한 심묘련이 아들의 수명장수를 위해 산신기도를 올리던중 꿈에서 나타난 산 신의 현몽으로 삼존석불을 발견하고 불사를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전설 : 기준(箕準)이 태를 묻었다는 태봉산(胎峰山)
지금의 삼기면 연동리에는 태봉사가 있는데, 이 절 안에는 결가부좌한 여래좌상(如來坐像)의 좌우로 관세음보살과 문수보살이 있는 삼존석불을 모시고 있다. 현재의 이 삼존석불은 태봉사를 창건한 심묘련씨가 약 70여 년전 3대 독자인 아들의 수명장수를 기원하는 사신기도를 드리다가 산신(山神)의 현몽으로 이 석불을 발견하고 그 자리에 지금의 절을 지었다 한다.
그런데 절이 있는 산 이름이 태봉산이라 한 데는 한 전설이 있다. 그것은 일찍이 기준(箕準)이 이 산에다 아들의 태(胎)를 묻었다는 것이었다. 전설로는 바로 기준이 세 아들의 태를 묻었던 자리에 삼존불상이 있어 그가 이 석불에 기원하여 세 아들을 얻었다고 한다. 이런 전설 때문에 지금껏 아들을 원하는 아녀자들이 이 곳을 찾아 치성을 드리는 풍속이 있다.
이는 조선왕 기준이 위만(衛滿)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좌우 궁인들을 데리고 바닷길로 남하하여 한(韓)땅에 이르러 나라를 세워 마한이라 했다는 것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러나 그가 도래한 곳이 확실히 금마저(金馬渚)였는지 또한 그가 마한을 세웠는지 아니면 마한을 쳤는지에 대해서는 이설이 있다. 어쨌든 기준이란 역사적 인물과 연관시켜 기자(祈子)의 풍속을 설화로 만들었다는 것이 특이하다. |
소개
미륵사지에서 함열 쪽으로 3㎞ 정도 가다 보면 삼기 농공단지에 이르게 된다. 이 곳 연동리 사거리에서 망성 가는 718번지 지방도로를 따라 0.7㎞ 정도 가면 길 왼쪽에 태봉사 입구 표지판이 보인다. 이 삼존석불은 아미타삼존으로 보여지고 백제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심묘련씨가 3대 독자인 아들의 수명 장수를 기원하는 산신 기도를 드리다가 산신의 현몽으로 이 석불을 발견하게 되었다 한다. 원래는 태봉산 동쪽 기슭에 방치되었던 것으로서 어린아이들이 귀와 손 등을 파손시켜 형상을 잃어 가는 것을 승 박상래가 옮겨 전각을 짖고 석불의 파손 부분을 보수하고 이곳에 태봉사를 건립하여 보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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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절을 태봉사라고 한 것은 절이 있는 산 이름이 태봉산이라고 한데서 유래한다고 한다. 태봉산은 전설에 의하면 마한의 기준왕(箕準王)이 아들 셋을 얻었는데 그 아들의 태를 묻었기에 태봉산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 전설에 의하면 기준왕이 세 아들을 얻기 위하여 이 석불에 기원을 하였다고 하여 지금도 아들을 얻고자 하는 사람은 이곳을 찾아 불공을 드리고 있다.
그러나 이 석불은 백제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될 뿐 아니라 마한시대에는 불상이 제작되지 않았기 때문에 기준왕이 석불에 기원을 드려 아들을 얻었다는 이야기는 사람들이 석불의 영험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만들어낸 이야기이다.
이 석불은 결가부좌한 석가여래좌상을 중심으로 오른쪽에 손에 감로수 병을 들고 있는 관세음보살과 왼쪽에 손에 연꽃가지를 들고 있는 지장보살이 있는 광배를 갖춘 삼존석불상이다. 본존불과 두 좌우보처불 그리고 광배가 함께 모두 한 장의 판석에 새겨져 있다.
본존불의 높이가 68㎝, 두 보처보살의 높이가 77㎝, 그리고 광배의 높이는 211㎝이다. 본존불은 몸에 비해 머리 부분이 커서 얼핏 어린아이의 몸 같은 느낌을 주며 왼손은 가슴에 대고 오른손은 내려 배 앞에 댄 특이한 손 모양을 하고 있다. 목에는 삼도가 둘러 있고, 양 귀는 짧고 통견법의는 양팔을 걸쳐 옆으로 펼쳐있고, 나발두정에는 육계가 있으며, 광배는 보주형으로 두광은 원좌주변에 연화문이 조각되었고, 머리 윗부분 광배에 화불 1구가 앙련화 좌대에 결가부좌하여 부각되어있다.
원래 화강암으로 만들어졌지만 근래에 호분을 덧발라 석고처럼 보이며 그 위에다 검은 색으로 눈, 입 등을 그려 놓아 원래의 얼굴은 알아보기 힘들다.
<출처 : 문화관광과, 익산문화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