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홈페이지는 준호를 생각하며 만든 홈페이지 입니다.
많은 가족들이 준호에 대해 관심을 가져 주십니다. 그러나 준호가 앞으로 넘어야 할 산은 보통사람들이 넘어야 할 산보다도 훨씬 어렵고 힘이 드는 일입니다.
우리 가족의 일원으로서 준호를 더욱 격려해 주시길 바라면서 이글을 올립니다.
준호는 우리집의 세아들 중 막네아들입니다.
준호는 태어날 때 준호 엄마가 임신 중독증이 있어서 몸이 많이 부어 오르고 혈압이 180까지 올라 애기엄마와 태아 모두 위험할 수 있다는 의사의 진단에 따라 임신 8개월째 급하게 수술을 하고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어렵게 태어난 준호는 1.5Kg으로 너무 작게 태어났습니다. 태어 난지 이틀 뒤 의사가 만나자고 해서 찾아 갔더니 입천장이 없는 속 언청이라고 하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성형외과 선생님의 진단을 받아 보아야 알 수 있다며 선생님을 만나 보라는 것이었습니다. 성형외과 선생님은 속 언청이는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면서 첫돌이 지난 뒤 수술하면 된다고 하기에 걱정은 됐지만 쉽게 생각했습니다.
준호는 태어나자마자 인큐베이터에 들어가 2개월을 인큐베이터에서 지내야 했습니다.
인큐베이터에서 나온 뒤 잘 먹고 자라야 할 준호는 우유 먹는 것이 불편했습니다. 80mm의 우유를 무려 4시간씩 먹여야 했고, 하루 3 ~ 4회씩 먹이는 일은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준호는 입으로 빠는 것이 힘들어서 쉬어가며 먹곤하였습니다.
그렇지만 먹으면 바로 토해 버려 정성스럽게 먹여도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7개월쯤 지날 무렵부터 준호는 변이 잘 나오질 않았습니다.
변을 볼려고 몸부림을 쳤지만 볼 수 가 없어 몇 번을 입원하고 관장을 해야만 했습니다.
준호는 6개월이 지날 무렵부터 이상한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머리를 방 바닦에 크게 부딛치거나 사람을 무섭게 노려보는 등 걱정스런 증상이 나타나 걱정을 해야만 했습니다.
몇 번 병원을 찾아갔지만 병원에서는 간단한 진료만하고는 특별히 문제가 없다고 했습니다. 9개월 무렵 장염으로 병원엘 찾아 갔더니 서울 강남 삼성의료원 진동규박사를 찾아 가보라는 것이었습니다.
1999년2월21일 태어난 우리 준호는 이듬해 1월 5일 서울 강남에 있는 삼성의료원에서 Cornelia de Lange Syndrome 라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처음에는 코넬리아 디란지 증후군이 무엇인지도 몰랐습니다.
진박사님께 물어 봤더니 자세한 이야기는 해 주지 않고 이형고 선생님이 운영하는 진영이의 홈페이지(코넬리아디란지증후군 딸을 둔 가족 홈페이지)를 가르쳐 주어서 찾아보니 정말 무섭고 두려운 증상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진영이의 홈페이지를 혼자서 열어보고 아내에게 이야기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며칠을 혼자서 고민을 하다가 아내가 내 얼굴이 좋지 않아 보인다며 걱정하며 묻기에 준호 이야기를 했더니 아내가 많이 울더군요.
살아오며 지은 죄가 많아서 그런 것 아닌가 싶어 준호 얼굴을 보기가 어려웠어요.
건강히 살아도 살기 어려운 세상을 원인도 모르는 코넬리아 디란지 증후군으로 준호가 평생 고생하며 살아야 하고 또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생각을 할 때는 밀려오는 서글픔을 참을 수가 없더군요.
1년 6개월이 되었을 무렵에 준호는 강남 삼성병원에서 속 언청이 수술을 2차에 걸쳐 하였습니다. 다행히 수술결과가 좋아서 먹는 일이 예전보다 많이 나아졌습니다.
그리고 귀에서 고름이 나고 해서 계속 치료를 해야 했죠. 치료를 하면서 안 것이지만 준호는 귀가 제대로 들리지 않았습니다. 약간의 큰소리는 듣는 것 같았지만 분명 제대로 듣질 못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죠. 이후 준호는 귀수술을 받아야 했고 수술 후 고름이 나오는 것은 멎었지만 여전히 소리가 들리지 않아 300만원을 드려 보청기를 했지만 준호가 싫어해서 보청기를 하고 지낼 수 가 없었죠.
준호의 나타나는 증상들이 더욱 늘어만 갔지만 그때까지 할머니나 주변 가족들에게는 말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준호의 미래에 대한 생각을 마음 속에 떠 올리면 말 할 수 없는 괴로움이 밀려왔습니다.
수많은 생각들이 교차하면서도 누구에게도 말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말없이 저희 부부만이 눈물을 흘릴 수 밖에 없었죠.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다른 아이들처럼 커야할 준호가 잘 크지 않고 항상 방에 누워만 있으니 주변 분들도 다 이상히 여기는 것 같았습니다.
준호가 태어나서 24개월이 지났을 무렵 저희 부부는 "하나님께서 준호를 우리가정에 보내신 것은 분명히 뜻이 있어서 보내셨을 것이다. 그리고 준호를 누구보다 잘 기를 수 있어서 보낸 것이니 잘 기르자"고 서로 다짐을 했습니다.
그리고 할머니와 형제들 그리고 주변분 들에게도 준호에 대해 당당하게 이야기하고 준호를 집에만 두지 않고 가급적이면 집밖을 데리고 다니며 자칫 사람들을 두려워 할 수도 있을 것 같아 사람들과 함께 지낼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사람에 대한 두려움으로 2차 장애가 생길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준호는 큰형(염유신, 중학교 2학년) 작은형(염유승, 초등학교 6학년)과 할머니, 부모의 지극한 사랑을 받으며 자라 성격적으로는 밝게 잘 자라고 있습니다.
예전에 머리를 방바닦이나 벽에 부딪치는 일도 거의 하지 않게 되구요. 사람을 노려보는 것도 거의 사라졌습니다.
지금 준호는 벌써 다섯 살 때 2003년 3월부터는 종로구 효자동에 있는 청각장애인 학교인 선희학교 유아부에 다녔습니다.
현재는 2004년10월부터 양천구 신정동에 있는 베다니유치원(특수학교)에 다니고 있습니다.
후암동 집에서 학교까지 다니는 것이 너무 어려워 2005년1월12일 유치원 통학버스가 다니는 염창동으로 이사해서 지금은 열심히 다니고 있습니다.
준호는 다섯 살이 되던 해 초까지도 걷지 못하다 제법 걸음걸이도 좋아지고 있습니다.
음력 1월6일생이라 2005학년도 7살 때 취학 통지서가 날라 와 학교를 보내야 하는데 준호는 대소변을 가리지 못해 학교에 보낼 수가 없어 장애 진단서와 함께 취학불능사유서를 보내는데 참 마음이 아팠습니다.
정상이었다면 준호가 학교에 가서 친구들도 사귀고 마음껏 즐거워 할 텐데 하는 마음이 들었지만 아쉬움을 접을 땐 마음이 아파왔습니다.
올해도 준호 취학통지서가 왔지만 아직도 대소변을 가리지 못하는 입장에서 학교에 보내는 것은 무리인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준호는 지금 많은 변화를 보이고 있습니다. 사람을 보면 그렇게 반가워하며 친근함을 보인다든가. 사람의 마음을 읽고 분위기를 살피는 등 예전보다는 많이 나아졌습니다. 대소변도 이제는 스스로 할려고 노력을 하고 있고, 신발을 스스로 벗고 신는 등 많은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기분이 좋으면 노래를 흥얼거리고, 자기의 요구를 어느 정도 표현하고 있습니다.
온 집안을 놀이터 삼아 큰 차를 몰고 다니며 운전하고, 오토바이를 타는 등 어느 아이와 다를 바 없이 자라는 모습을 보며 온 가족들이 즐거워합니다.
물을 좋아 해 하루에도 수차례 씩 목욕을 하며 목욕통에서 살고 있는 준호, 온 몸을 물에 담그고 나면 행복해 하는 준호를 볼 때 하루의 모든 피로를 풀 수 있습니다.
준호는 우리 가족들을 너무 사랑합니다. 우리 가족들이 준호를 아끼는 이상으로 준호가 우리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느낍니다.
이글을 빌어 준호에게 사랑한다는 이야길 하고 싶습니다.
첫댓글 나도 준호가 좋아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