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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한국사의 바른 이해
1. 역사의 학습 목적
역사의 의미
역사라는 말은 사람에 따라 다양한 뜻으로 사용되고 있지만, 일반적으로 '과거에 있었던 사실'과 '조사되어 기록된 과거'라는 두 가지 뜻을 지니고 있다. 즉, 역사는 '사실로서의 역사(history as past)'와 '기록으로서의 역사(history as historiography)'라는 두 측면이 있다. 전자가 객관적 의미의 역사라면, 후자는 주관적 의미의 역사라 할 수 있다.
사실로서의 역사는 객관적 사실, 즉 시간적으로 현재에 이르기까지 일어났던 모든 사건을 의미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역사는 바닷가의 모래알 같이 수많은 과거 사건들의 집합체가 된다.
기록의로서의 역사는 과거의 사실을 토대로 역사가가 이를 조사하고 연구하여 주관적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는 필연적으로 역사가의 가치관과 같은 주관적 요소가 개입하게 되며, 이 경우 역사라는 말은 기록된 자료 또는 역사서와 같은 의미가 된다.
우리가 역사를 배운다고 할 때, 이것은 역사가들이 선정하여 연구한 기록으로서의 역사를 배우는 것이다.
역사 학습의 목적
역사를 배운다는 것은 역사 그 자체를 배운다는 의미와 역사를 통하여 배운다는 의미가 동시에 담겨 있다. 전자가 과거 사실에 대한 지식을 늘리는 것을 의미한다면, 후자는 역사적 인물이나 사실들을 통하여 현재의 내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능력과 교훈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역사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 등 여러 방면에 걸친 지식이 포함되어 있는, 과거 인간 생활에 대한 지식의 총체를 의미한다. 역사를 배움으로써 우리는 인간 생활에 관한 지식의 보고에 다가갈 수 있다.
아울러 우리는 역사 속의 인물과 사건을 통해서도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첫째, 우리는 역사를 배움으로써 과거의 사실을 토대로 현재를 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 지나온 과거를 제대로 알지 못하면 지금 서 있는 자신의 참모습을 찾지 못하게 된다.
둘째, 우리는 역사를 통하여 삶의 지혜를 습득할 수 있다. 현재는 과거의 연속이며 과거 없는 현재란 있을 수 없듯이, 역사를 배움으로써 현재 우리가 당면한 여러 문제를 올바르게 파악하고 대처할 수 있다.
셋째, 우리는 역사를 배움으로써 역사적 사고력과 비판력을 기를 수 있다. 역사 학습은 역사적 사실의 외면에 대한 파악에서 시작하여 역사적 사실의 내면의 이해로 발전해 가게 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역사적 사건의 보이지 않는 원인과 의도, 목적을 추론하는 역사적 사고력이 길러지게 된다.
2. 한국사와 세계사
한국사의 보편성과 특수성
인간은 동물이나 식물과 다른 인간 고유의 생활 모습을 지니고 있으며, 자유, 평등, 박애, 평화, 행복 등 공통적인 이상을 추구하고 있다. 이러한 인간 고유의 생활 모습과 이상은 국가와 민족을 초월한 전세계 인류의 공통점으로서, 이를 세계사적 보편성이라고 한다.
한편, 인간은 자신이 터를 잡고 살아가는 지역의 자연 환경에 따라 고유한 언어, 풍속, 종교, 예술, 그리고 사회 제도 등을 다양하게 창출하게 되는데, 이를 그 민족의 특수성이라 한다. 교통과 통신이 아직 발달하지 못하였던 근대 이전 시대에는 민족적, 지역적 특수성이 매우 두드러졌다. 이에 세계를 몇 개의 문화권으로 나누어 그 특수성을 이해하기도 하고, 하나의 문화권 안에서도 다시 민족 문화나 지방 문화의 특수성을 추출하기도 한다.
모든 민족의 역사에는 이러한 보편성과 특수성이 함께 존재한다. 따라서 역사를 바르게 이해한다는 것은 세계사적 보편성과 지역적 특수성을 균형 있게 파악함을 의미한다.
우리 민족은 외부 세계와 접촉이 빈번하였던 만주와 한반도에 자리잡고 역사적 삶을 영위해 왔다. 그 후, 활동 무대가 한반도로 좁아지기는 하였지만, 국토의 자연 환경을 효과적으로 활용하여 다양한 민족과 국가들과 문물을 교류하면서 내재적인 변화와 발전을 이룩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우리 민족은 세계의 모든 민족이 그랬던 것처럼 자유와 평등, 민주와 평화 등 전 인류의 공통된 가치를 추구해 왔다. 여기서 자연스럽게 우리 역사의 보편성을 찾을 수 있다.
한편, 우리 민족은 반만 년 이상의 유구한 역사를 이어 오고 있다. 이 과정에서 국가에 대한 충성, 부모에 대한 효도가 중시되고 두레, 계, 향도와 같은 공동체 조직이 발달하는 등 우리 민족의 특수성이 나타났다.
한국사의 이해는 우리 민족의 역사적 삶의 특수성을 이해하고 그 가치를 깨우치는 것이어야 한다. 우리 역사와 문화의 특수성에 대한 이해는 한국사를 바르게 인식하는 데 기초가 될 뿐만 아니라, 우리가 민족적 자존심을 잃지 않고 세계에 공헌하는 데에도 필요하다.
민족 문화의 이해
우리 조상들은 유구한 역사를 거치면서 슬기를 발휘하고 노력을 기울여 문화를 발전시켜 왔다. 우리 문화는 다른 어느 민족의 그것과도 구별되는 특수성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보편적 가치를 추구해 온 문화이다.
선사 시대에는 아시아의 북방 문화와 연계되는 문화를 이룩하였고, 그 후 중국 문화와 깊은 연관을 맺으면서 독자적인 고대 문화를 발전시켰다. 고려 시대에는 불교를 정신적 이념으로 채택하였으며, 조선 시대에는 유교적 가치를 중요시하는 문화 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불교와 유교는 외래 사상을 그대로 들여온 것이 아니라, 이를 한국화하고 토착화시킴으로써 한국 사상으로서의 개성을 확립하였다. 즉, 우리 조상들은 불교와 유교를 소화하여 우리 것으로 만들었다. 튼튼한 전통 문화의 기반 위에서 선진적 외래 문화를 주체적으로 수용하는 것이 민족 문화 발전의 열쇠라는 관점에서 볼 때, 우리의 민족 문화는 무한한 발전 가능성을 안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민족 문화에 대한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고 민족 문화를 보존함과 아울러 이를 더욱 발전시켜 나가려는 자세를 가져야 하겠다.
흔히 현대를 세계화 시대라고 한다. 이는 정보 통신 기술과 교통의 발달로 점점 세계는 긴밀해지고 교류가 활발해지고 있다는 의미이다. 세계화 시대의 역사 의식은 안으로 민족 주체성을 견지하되, 밖으로는 외부 세계의 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개방적 민족주의에 기초해야 한다. 내 것만이 최고라는 배타적 민족주의도, 내 것을 버리고 무조건 외래의 문화만 추종하는 것도 모두 세계화 시대에는 버려야 할 닫힌 사고이다.
아울러 세계화 시대의 시대적 요청은 인류 사회의 평화와 복리 증진 등 인류 공동의 가치를 추구하려는 진취적 역사 정신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II. 선사 시대의 문화와 국가의 형성
1. 선사 시대의 전개
1. 선사 시대의 세계
인류의 기원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상에 인류가 처음으로 출현한 것은 지금부터 약 300만~350만 년 전으로 알려져 있다. 최초의 인류는 아프리카에서 화석이 발견된 오스트랄로피테쿠스였다. 이들은 두뇌 용량이 현생 인류의 3분의 1 정도였으나, 직립 보행을 하여 두 손으로 간단하고 조잡한 도구를 만들어 사용할 수 있었다. 인류는 처음에 나무로 된 도구를 사용하다가 곧이어 돌로 도구를 만들어 사용하였다.
이후 인류는 지혜가 발달하면서 불을 사용하는 법을 알게 되어 음식을 익혀 먹었고, 빙하기에도 추위를 견딜 수 있었다. 인류는 사냥과 채집을 통하여 식량을 조달하였고, 시체를 매장하는 풍습을 지냈다.
구석기 시대 후기인 약 4만 년 전부터 진정한 의미의 현생 인류인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가 출현하였다. 이들은 두뇌 용량을 비롯한 체질상의 특징이 오늘날의 인류와 거의 같으며, 현생 인류에 속하는 여러 인종의 직계 조상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렇게 인류가 진화할 수 있었던 것은 생각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고, 주변의 자연 환경에 적응하면서 문화를 창조해 나갔기 때문이다.
신석기 문화와 청동기 문명의 탄생
기원전 1만 년경에 빙하기가 끝나고 후빙기가 시작되면서 인류의 생활은 환경의 변화에 적응하여 또다시 바뀌었다. 이에 구석기 시대가 지나고, 과도기인 중석기 시대를 거쳐 신석기 시대가 전개되었다.
신석기 시대의 문화는 농경과 목축의 시작, 간석기와 토기의 사용, 정착 생활과 촌락 공동체의 형성 등을 특징으로 한다. 구석기 시대 사람들이 식량 채집 생활을 한 것과는 달리, 신석기 시대 사람들은 농경과 목축을 시작하여 식량을 생산하는 경제 활동을 전개함으로써 인류의 생활 양식은 크게 변하였다. 이를 신석기 혁명이라고도 한다.
이러한 획기적인 변화는 중동 지방을 비롯하여 아시아 여러 지역에서 기원전 8000년경에 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이후 세계 각 지역으로 퍼져 나갔다.
기원전 3000년경을 전후하여 메소포타미아의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 이집트의 나일 강, 인도의 인더스 강, 중국의 황허 강 유역에서 문명이 형성되었다. 이들 큰 강 유역에서는 관개 농업의 발달, 청동기의 사용, 도시의 출현, 문자의 사용, 국가의 형성 등이 이루어져 문화가 크게 발달하였다. 이러한 변화들은 모두 청동기 시대에 일어났다. 이로써 인류는 선사 시대를 지나 역사 시대로 접어들었다.
2. 우리 나라의 선사 시대
우리 민족의 기원
우리 조상들은 대체로 중국 요령(랴오닝)성, 길림(지린)성을 포함하는 만주 지역과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동북 아시아에 넓게 분포하여 살고 있었다. 우리 나라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구석기 시대부터이며, 신석기 시대에서 청동기 시대를 거치면서 민족의 기틀이 이루어졌다.
어느 나라 역사에 있어서나 모든 종족은 인근에 사는 종족과 교류하면서 문화를 발전시키고 민족을 형성해 왔다. 동아시아에서는 선사 시대에 여러 민족이 문화를 일으켰는데, 그 중에서도 우리 민족은 독특한 문화를 이루고 있었다.
우리 민족은 인종상으로는 황인종에 속하고, 언어학상으로는 알타이 어족과 가까운 관계에 있다고 본다. 우리 민족은 오래 전부터 하나의 민족 단위를 형성하고, 농경 생활을 바탕으로 독자적인 문화를 이룩하였다.
구석기 시대의 유물과 유적
우리 나라와 그 주변 지역에 구석기 시대 사람들이 살기 시작한 것은 약 70만 년 전부터이다. 구석기 시대는 석기를 다듬는 수법에 따라 전기, 중기, 후기의 세 시기로 나누어진다.
전기에는 큰 석기 한 개를 가지고 여러 가지 용도로 썼으나, 중기에는 큰 몸돌에서 떼어 낸 돌조각인 격지들을 가지고 잔손질을 하여 석기를 만들었다. 따라서, 크기는 작아지고 점차 한 개의 석기가 하나의 쓰임새를 가지게 되었다. 후기에는 쐐기 같은 것을 대고 형태가 같은 여러 개의 돌날격지를 만드는 데까지 발달하였다.
우리 나라 구석기 시대의 대표적인 유적으로는 평남 상원 검은모루 동굴, 경기도 연천 전곡리, 충남 공주 석장리 등이 있다. 이들 유적에서는 석기와 함께 사람과 동물의 뼈 화석, 동물 뼈로 만든 도구 등이 출토되어 구석기 시대의 생활상이 밝혀지게 되었다.
구석기 시대의 생활
구석기 시대 사람들은 동물의 뼈나 뿔로 만든 뼈 도구와 뗀석기를 가지고 사냥과 채집을 하면서 생활하였다. 처음에는 찍개 같은 도구를 가지고 여러 가지 용도로 썼으나, 점차 뗀석기를 제작하는 기술이 발달함에 따라 용도가 뚜렷한 작은 석기들을 만들게 되었다. 이 중에서 주먹도끼, 찍개, 팔매돌 등은 사냥 도구이고, 긁개, 밀개 등은 대표적인 조리 도구이다.
구석기 시대 사람들은 동굴이나 바위 그늘에서 살거나 강가에 막집을 짓고 살았다. 이를 보여 주는 구석기 시대 유적으로는 상원의 검은모루, 제천 창내, 공주 석장리 등이 있다. 구석기 시대 후기의 막집 자리에는 기둥 자리, 담 자리 및 불땐 자리가 남아 있다. 집터의 규모는 작은 것은 3, 4명, 큰 것은 10명이 살 수 있을 정도의 크기였다.
구석기 시대에는 무리를 이루어 큰 사냥감을 찾아다니며 생활하였다. 무리 중에서 경험이 많고 지혜로운 사람이 지도자가 되었으나, 권력을 가지지는 못했으며, 모든 사람이 평등한 공동체적 생활을 하였다.
구석기 시대 사람들은 구석기 시대 후기에 이르러 대표적인 석기로 슴베찌르개를 사용하였으며, 석회암이나 동물의 뼈 또는 뿔 등을 이용하여 조각품을 만들었다. 공주 석장리와 단양 수양개에서 고래와 물고기 등을 새긴 조각이 발견되었는데, 이를 통하여 당시 사람들의 소박한 솜씨를 엿볼 수 있다. 이러한 유물에는 구석기 시대 사람들이 사냥감의 번성을 비는 주술적 의미가 깃든 것으로 보인다.
구석기 시대에서 신석기 시대로 넘어가는 전환기에 빙하기가 지나고 다시 기후가 따뜻해졌다. 이런 새로운 자연 환경에 대응하고자 이 시기의 사람들은 적합한 생활 방법을 찾으려고 노력하였다. 그리하여 큰 짐승 대신에 토끼, 여우, 새 등 작고 빠른 짐승을 잡기 위하여 활을 사용하였다.
이 시기의 석기들은 더욱 작게 만들어진 잔석기로서, 한 개 내지 여러 개의 석기를 나무나 뼈에 꽂아 쓰는 이음 도구를 만들었다. 이음 도구에는 톱, 활, 창, 작살 등이 있었다.
한편, 기후가 따뜻해지면서 동식물이 번성하여 사람들은 식물을 채취하거나 고기잡이를 많이 하였다.
신석기 시대의 유물과 유적
우리 나라의 신석기 시대는 기원전 8000년경부터 시작되었다. 이 때부터 사람들은 돌을 갈아서 여러 가지 형태와 용도를 가진 간석기를 만들어 사용하였다. 신석기 시대 사람들은 부러지거나 무디어진 도구를 다시 갈아 손쉽게 쓸 수 있게 되었으며, 단단한 돌뿐만 아니라 무른 석질의 돌도 모두 이용하게 되었다. 또, 진흙으로 그릇을 빚어 불에 구워서 만든 토기를 사용하여 음식물을 조리하거나 저장할 수 있게 되었고, 이에 따라 생활이 더욱 나아졌다.
우리 나라 신석기 시대의 대표적인 토기는 빗살무늬 토기이지만 이보다 앞선 시기의 토기도 발견되고 있다. 이것들은 무늬가 없는 것, 토기 몸체에 덧띠를 붙인 것, 눌러 찍은 무늬가 있는 것으로, 각각 이른 민무늬 토기, 덧무늬 토기, 눌러찍기무늬 토기(압인문 토기)라고 부른다. 이런 토기는 제주도 한경 고산리, 강원 고성 문암리, 강원 양양 오산리, 부산 동삼동 조개더미 등에서 발견되었다.
빗살무늬 토기가 나온 유적은 전국 각지에 널리 분포되어 있다. 대표적인 유적은 서울 암사동, 평양 남경, 김해 수가리 등으로, 대부분 바닷가나 강가에 자리잡고 있다. 빗살무늬 토기는 도토리나 달걀 모양의 뾰족한 밑 또는 둥근 밑 모양을 하고 있으며, 크기도 다양하다.
신석기 시대의 생활
신석기 시대부터 농경 생활이 시작되었다. 황해도 봉산 지탑리와 평양 남경의 유적에서는 탄화된 좁쌀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신석기 시대에 잡곡류를 경작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시기에 쓴 주요 농기구로는 돌괭이, 돌삽, 돌보습, 돌낫 등이 있다. 그리고 현재 남아 있지는 않지만, 중국이나 일본의 경우처럼 나무로 만든 농기구를 사용하였을 가능성도 있다. 농경은 집 근처의 조그만 텃밭을 이용하거나 강가의 퇴적지를 소규모로 경작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농경 기술이 발달하면서 사냥과 고기잡이가 경제 생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점차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식량을 얻는 중요한 수단이었다. 주로 활이나 창으로 사슴류와 멧돼지 등을 사냥하였고, 여러 가지 크기의 그물과 작살, 돌이나 뼈로 만든 낚시 등으로 고기잡이를 하였다. 또, 굴, 홍합 등 많은 조개류를 먹었는데, 때로는 깊은 곳에 사는 조개류를 잡아서 장식으로 이용하기도 하였다.
농경 도구나 토기의 제작 이외에도 원시적인 수공업 생산이 이루어졌다. 가락바퀴나 뼈바늘이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옷이나 그물을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도구가 발달하고 농경이 시작되자 주거 생활도 개선되어 갔다. 집터는 대개 움집 자리로, 바닥은 원형이나 모서리가 둥근 사각형이다. 움집의 중앙에는 불씨를 보관하거나 취사와 난방을 위한 화덕이 위치하였다. 햇빛을 많이 받는 남쪽으로 출입문을 내었으며, 화덕이나 출입문 옆에는 저장 구덩을 만들어 식량이나 도구를 저장하였다. 집터의 규모는 4, 5명 정도의 한 가족이 살기에 알맞은 크기였다.
신석기 시대에는 부족 사회를 이루고 있었다. 부족은 혈연을 바탕으로 한 씨족을 기본 구성 단위로 하였다. 이들 씨족은 점차 다른 씨족과의 혼인을 통하여 부족을 이루었다. 그러나, 부족 사회도 구석기 시대의 무리 사회와 같이 아직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가 발생하지 않았고, 연장자나 경험이 많은 자가 자기 부족을 이끌어 나가는 평등 사회였다.
농경과 정착 생활을 하게 되면서 인간은 자연의 섭리를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농사에 큰 영향을 끼치는 자연 현상이나 자연물에도 정령이 있다고 믿는 애니미즘이 생겨났는데, 여기에는 풍요로운 생산을 기원하는 의미가 담겨 있다. 그 중에서도 태양과 물에 대한 숭배가 으뜸이었다.
또, 사람이 죽어도 영혼은 없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하여 영혼 숭배와 조상 숭배가 나타났고, 영혼이나 하늘을 인간과 연결시켜 주는 존재인 무당과 그 주술을 믿는 샤머니즘도 있었다. 그리고 자기 부족의 기원을 특정한 동식물과 연결시켜 그것을 숭배하는 토테미즘도 있었다.
이 시대의 예술품으로는 주로 흙을 빚어 구운 얼굴 모습이나 동물의 모양을 새긴 조각품, 조개 껍데기 가면, 조가비 또는 짐승의 뼈나 이빨로 만든 치레걸이 등이 있었다.
2. 국가의 형성
1. 고조선과 청동기 문화
청동기의 보급
신석기 시대 말인 기원전 2000년경에 중국의 요령(랴오닝), 러시아의 아무르 강과 연해주 지역에서 들어온 덧띠새김무늬 토기 문화가 앞선 빗살무늬 토기 문화와 약 500년간 공존하다가 점차 청동기 시대로 넘어간다. 이 때가 기원전 2000년경에서 기원전 1500년경으로, 한반도 청동기 시대가 본격화된다. 고인돌도 이 무렵 나타나 한반도의 토착 사회를 이루게 된다. 청동기 시대에는 생산 경제가 그전보다 발달하고, 청동기 제작과 관련된 전문 장인이 출현하였으며, 사유 재산 제도와 계급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사회 전반에 걸쳐 큰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다.
청동기 시대의 유적은 중국의 요령성, 길림성 지방을 포함하는 만주 지역과 한반도에 걸쳐 널리 분포되어 있다. 이 시기의 전형적인 유물로는 반달 돌칼, 바퀴날 도끼, 홈자귀 등의 석기와 비파형 동검, 거친무늬 거울 등의 청동기, 그리고 미송리식 토기, 민무늬 토기, 붉은 간토기 등의 토기가 있다. 이들 유물은 청동기 시대의 집터를 비롯하여 고인돌, 돌널무덤, 돌무지무덤 등 당시의 무덤에서 나오고 있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동검인 비파형 동검은 만주로부터 한반도 전역에 이르는 넓은 지역에서 출토되고 있다. 이와 같은 비파형 동검의 분포는 미송리식 토기 등과 함께 이 지역이 청동기 시대에 같은 문화권에 속하였음을 보여 준다.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인 토기인 민무늬 토기는 지역에 따라 모양이 약간씩 다르다. 밑바닥이 편평한 원통 모양의 화분형과 밑바닥이 좁은 팽이형이 기본적인 모양이며, 빛깔은 적갈색이다.
철기의 사용
우리 나라에서는 기원전 5세기경부터 철기 시대로 접어들었다. 철제 농기구의 사용으로 농업이 발달하여 경제 기반이 확대되었다. 철제 무기와 철제 연모를 씀에 따라 그 때까지 사용해 오던 청동기는 의식용 도구로 변하였다.
한편, 철기와 함께 출토되는 명도전, 반량전, 오수전은 중국과 활발하게 교류했음을 보여 준다. 또, 경남 창원 다호리 유적에서 나온 붓은 당시에 이미 한자를 쓰고 있었음을 말해 준다.
이 시기에 이르러 청동기 문화도 더욱 발달하여 한반도 안에서 독자적 발전을 이룩하였다. 청동기 시대 후반 이후, 비파형 동검은 한국식 동검인 세형 동검으로, 거친무늬 거울은 잔무늬 거울로 그 형태가 변하여 갔다. 그리고 청동 제품을 제작하던 틀인 거푸집도 전국의 여러 유적에서 발견되고 있다.
토기는 민무늬 토기 이외에 입술 단면에 원형, 타원형, 삼각형의 덧띠를 붙인 덧띠 토기, 검은 간토기 등도 사용되었다.
청동기·철기 시대의 생활
청동기·철기 시대에는 이전부터 주요한 생산 도구로 사용되던 간석기가 매우 다양해지고 기능도 개선되어 생산 경제도 좀더 발달하였다.
이 시기의 사람들은 돌도끼나 홈자귀, 괭이, 그리고 나무로 만든 농기구로 땅을 개간하여 곡식을 심고, 가을에는 반달 돌칼로 이삭을 잘라 추수하는 등 농경을 더욱 발전시켰다. 농업은 조, 보리, 콩, 수수 등 밭농사가 중심이었지만, 일부 저습지에서는 벼농사를 지었다. 사냥이나 고기잡이도 여전히 하고 있었지만 농경의 발달로 점차 그 비중이 줄어들었고, 돼지, 소, 말 등 가축의 사육은 이전보다 늘어났다.
집터 유적은 한반도 전역에서 발견된다. 대체로 앞쪽에는 시냇물이 흐르고, 뒤쪽에는 북서풍을 막아 주는 나지막한 야산이 있는 곳에 우물을 중심으로 자리잡고 있다. 이것은 우리 나라의 전통적인 취락 여건으로, 오늘날 농촌의 자연 취락과 비슷한 모습이다. 집터의 형태는 대체로 직사각형이며, 움집은 점차 지상 가옥으로 바뀌어 갔다. 움집 중앙에 있던 화덕은 한쪽 벽으로 옮겨지고, 저장 구덩도 따로 설치하거나 한쪽 벽면을 밖으로 돌출시켜 만들었다. 창고와 같은 독립된 저장 시설을 집 밖에 따로 만들기도 하였고, 움집을 세우는 데에 주춧돌을 이용하기도 하였다.
집터는 넓은 지역에 많은 수가 밀집되어 취락 형태를 이루고 있다. 한편, 제주시 삼양동의 경우, 철기 시대 전기의 계급 사회의 발생을 알려 주는 대규모의 집터(마을)들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이것은 농경의 발달과 인구의 증가로 정착 생활의 규모가 점차 확대되었음을 보여 준다. 같은 지역의 집터라 하더라도 그 넓이가 다양한 것으로 보아 주거용 외에 창고, 공동 작업장, 집회소, 공공 의식 장소 등도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이를 통하여 사회 조직이 점차 발달하였고 복잡해졌다는 것을 추정할 수 있다. 보통의 집터는 부부를 중심으로 하는 4~8명 정도의 가족이 살 수 있는 크기로, 이는 한 가족용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이러한 환경에서 여성은 주로 집 안에서 집안일을 담당하고 남성은 농경, 전쟁과 같은 바깥일에 종사하였다. 한편, 생산력의 증가에 따라 잉여 생산물이 생기자, 힘이 강한 자가 이것을 개인적으로 소유하였다. 생산물의 분배와 사유화 때문에 사람들 사이에 갈등이 생기고, 빈부의 격차와 계급의 분화를 촉진하였다. 계급의 분화는 죽은 뒤에까지도 영향을 끼쳐 무덤의 크기와 껴묻거리의 내용에 반영되었다.
청동기 시대에는 고인돌과 돌널무덤 등이 만들어졌고, 철기 시대에는 널무덤과 독무덤 등이 만들어졌다. 그 중에서 계급 사회의 발생을 보여 주는 대표적인 무덤이 고인돌이다. 고인돌의 전형적인 형태는 보통 탁자식에서 볼 수 있듯이, 4개의 판석 형태의 굄돌을 세워 돌방을 만들고 그 위에 거대하고 편평한 덮개돌을 얹은 것이다.
고인돌은 우리 나라 전역에 걸쳐 분포해 있다. 무게가 수십 톤 이상인 덮개돌을 채석하여 운반하고 무덤에 설치하기까지에는 많은 인력이 필요하였다. 따라서, 고인돌은 당시 지배층이 가진 정치 권력과 경제력을 잘 반영해주고 있다.
정치 권력이나 경제력에서 우세한 부족은 스스로 하늘의 자손이라고 믿는 선민 사상을 가지고, 주변의 약한 부족을 통합하거나 정복하고 공납을 요구하였다. 청동이나 철로 된 금속제 무기의 사용으로 정복 활동이 활발해졌고, 이를 계기로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분화가 촉진되었다. 그리하여 평등 사회는 계급 사회로 바뀌어 가고 권력과 경제력을 가진 지배자가 나타났는데, 이런 지배자를 족장(군장)이라고 한다. 족장은 청동기 문화가 일찍부터 발달한 북부 지역에서 먼저 등장하였다.
청동기·철기 시대의 예술
사회와 경제의 발달에 따라 예술 활동도 활발해졌다. 이 시기의 예술은 종교나 정치적 요구와 밀착되어 있었다. 그것은 당시 제사장이나 족장들이 사용했던 칼, 거울, 방패 등의 청동 제품이나 토제품, 바위그림 등에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청동으로 만든 도구의 모양이나 장식에는 당시 사람들의 미의식과 생활 모습이 표현되어 있다. 또, 지배층의 무덤에서 출토된 청동으로 만든 의식용 도구에는 말이나 호랑이, 사슴, 사람 손 모양 등을 사실적으로 조각하거나 기하학무늬를 정교하게 새겨 놓았다. 이들은 주술적 의미를 가진 것으로, 어떤 의식을 행하는 데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흙으로 빚은 짐승이나 사람 모양의 토우 역시 장식으로서의 용도 외에도 풍요로운 생산을 기원하는 주술적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바위 면에 새긴 바위그림은 당시 사람들의 활기찬 생활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울주 반구대의 바위그림에는 거북, 사슴, 호랑이, 새 등의 동물과 작살이 꽂힌 고래를 비롯한 여러 종류의 고래, 그물에 걸린 동물, 우리 안의 동물 등이 새겨져 있다. 이것은 사냥과 고기잡이의 성공과 풍성한 수확을 비는 것으로 보인다.
고령 양전동 알터의 바위그림에는 동심원, 십자형, 삼각형 등의 기하학무늬가 새겨져 있다. 동심원은 태양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 바위그림 유적은 다른 지역의 청동기 시대 농업 사회에서 보이는 태양 숭배와 같이 풍요로운 생산을 비는 제사 터와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단군과 고조선
청동기 문화의 발전과 함께 족장이 지배하는 사회가 출현하였다. 이들 중에서 강한 족장은 주변의 여러 족장 사회를 통합하면서 점차 권력을 강화해갔다.
족장 사회에서 가장 먼저 국가로 발전한 것은 고조선이다. 삼국유사와 동국통감의 기록에 따르면 단군왕검이 고조선을 건국하였다(기원전 2333). 단군왕검은 당시 지배자의 칭호였다.
고조선은 요령 지방을 중심으로 성장하여 점차 인접한 족장 사회를 통합하면서 한반도까지 발전하였는데, 이와 같은 사실은 비파형 동검과 고인돌의 출토 분포로써 알 수 있다. 고조선의 세력 범위는 청동기 시대를 특징짓는 유물의 하나인 비파형 동검과 고인돌이 나오는 지역과 깊은 관계가 있다.
고조선의 건국 사실을 전하는 단군 이야기는 우리 민족의 시조 신화로 널리 알려져 있다. 단군 이야기는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전승되어 기록으로 남겨진 것이다. 그러는 동안, 어떤 요소는 후대로 가면서 새로 첨가되기도 하고 때로는 없어지기도 하였다.
신화는 그 시대 사람들의 관심이 반영된 것으로, 역사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 이것은 모든 신화에 공통되는 속성이기도 하다. 단군의 기록도 마찬가지로 청동기 시대의 문화를 배경으로 한 고조선의 성립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반영하고 있다.
이 때, 환웅 부족은 태백산의 신시를 중심으로 세력을 이루었고, 이들은 하늘의 자손임을 내세워 자기 부족의 우월성을 과시하였다. 또, 풍백, 우사, 운사를 두어 바람, 비, 구름 등 농경에 관계되는 것을 주관하게 하였다.
이 시기의 사람들은 주로 구릉 지대에 거주하면서 농경 생활을 하였다. 사유 재산의 성립과 계급의 분화에 따라 지배 계급은 농사와 형벌 등 사회 생활을 주도하였다. 이는 신석기 시대 말기에서 청동기 시대로 발전하는 시기에 계급의 분화와 함께 지배자가 등장하면서,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사회 질서가 성립되는 과정을 잘 보여 준다. 이 시기에 등장한 새로운 지배층은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한다는 통치 이념을 내세워 자신의 권위를 내세우고자 하였다.
환웅 부족은 주위의 다른 부족을 통합하고 지배해 갔다. 곰을 숭배하는 부족은 환웅 부족과 연합하여 고조선을 형성하였으나, 호랑이를 숭배하는 부족은 연합에서 배제되었다.
단군은 제정 일치(祭政一致)의 지배자로, 고조선의 성장과 더불어 주변의 부족을 통합하고 지배하기 위하여 자신들의 조상을 하늘에 연결시켰다.
고조선은 요령 지방과 대동강 유역을 중심으로 독자적인 문화를 이룩하면서 발전하였다. 기원전 3세기경에는 부왕, 준왕 같은 강력한 왕이 등장하여 왕위를 세습하였으며, 그 밑에 상, 대부, 장군 등의 관직도 두었다. 또, 요서 지방을 경계로 하여 연나라와 대립할 만큼 강성하였다.
위만의 집권
중국이 전국 시대 이후로 혼란에 휩싸이면서 유이민이 대거 고조선으로 넘어왔다. 고조선은 그들을 받아들여 서쪽 지역에 살게 하였다. 그 뒤, 진·한 교체기에 또 한 차례의 유이민 집단이 이주해 왔다. 그 중에서 위만은 1000여 명의 무리를 이끌고 고조선으로 들어왔다.
위만은 준왕의 신임을 받아 서쪽 변경을 수비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는 그 곳에 거주하는 이주민 세력을 통솔하면서 자신의 세력을 점차 확대하여 나갔다. 그 후, 위만은 수도인 왕검성에 쳐들어가 준왕을 몰아 내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기원전 194).
위만 왕조의 고조선은 철기 문화를 본격적으로 수용하였다. 철기의 사용은 농업과 무기 생산을 중심으로 한 수공업을 더욱 융성하게 하였고, 그에 따라 상업과 무역도 발달하였다.
이 무렵, 고조선은 사회와 경제의 발전을 기반으로 중앙 정치 조직을 갖춰 강력한 국가로 성장하였다. 그리고 우세한 무력을 바탕으로 활발한 정복 사업을 전개하여 광대한 영토를 차지하였다. 또, 지리적인 이점을 이용하여 동방의 예나 남방의 진이 직접 중국의 한과 교역하는 것을 막고, 중계 무역의 이득을 독점하려 하였다. 이러한 경제적, 군사적 발전을 기반으로 고조선은 중국의 한과 대립하였다.
이에 불만을 느낀 한의 무제는 수륙 양면으로 대규모 침략을 강행하였다. 고조선은 1차의 접전(패수)에서 대승을 거두었고, 이후 약 1년에 걸쳐 한의 군대에 맞서 완강하게 대항하였다. 그러나 장기간의 전쟁으로 지배층의 내분이 일어나 왕검성이 함락되어 멸망하였다(기원전 108).
고조선이 멸망하자 한은 고조선의 일부 지역에 군현을 설치하여 지배하고자 하였으나, 토착민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혔다. 그리하여 그 세력은 점차 약화되었고, 결국 고구려의 공격을 받아 소멸되었다.
고조선의 사회
고조선의 사회상을 알려 주는 것으로 8조의 법이 있었다. 그 중에서 3개 조목의 내용만 전해진다. 이를 통하여 당시 사회에 권력과 경제력의 차이가 생겨나고 재산의 사유가 이루어지면서 형벌과 노비도 발생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당시 사회에서는 노동력과 사유 재산을 중요하게 여기고 보호하였다는 것도 알 수 있다.
한의 군현이 설치된 후 억압과 수탈을 당하던 토착민은 이를 피하여 이주하거나 단결하여 한의 군현에 대항하였다. 이에 한의 군현은 엄한 율령을 시행하여 자신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려 하였다. 그에 따라 법 조항도 60여 조로 증가하였고, 풍속도 각박해져 갔다.
2. 여러 나라의 성장
부여
부여는 만주 길림시 일대를 중심으로 송화(쑹화)강 유역의 평야 지대를 중심으로 성장하였다. 농경과 목축을 주로 하였고, 특산물로는 말, 주옥, 모피 등이 유명하였다.
부여는 이미 1세기 초에 왕호를 사용하였고, 중국과 외교 관계를 맺는 등 발전된 국가의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북쪽으로는 선비족, 남쪽으로는 고구려와 접하고 있다가 3세기 말에 선비족의 침략을 받아 크게 쇠퇴하였고, 결국은 고구려에 편입되었다.
부여에는 왕 아래에 가축의 이름을 딴, 마가, 우가, 저가, 구가와 대사자, 사자 등의 관리가 있었다. 이들 가(加)는 저마다 따로 행정 구획인 사출도를 다스리고 있어서, 왕이 직접 통치하는 중앙과 합쳐 5부를 이루었다. 가들은 왕을 추대하기도 하였고, 수해나 한해를 입어 오곡이 잘 익지 않으면 그 책임을 왕에게 묻기도 하였다. 그러나 왕이 나온 대표 부족의 세력은 매우 강해서 궁궐, 성책, 감옥, 창고 등의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왕이 죽으면 많은 사람을 껴묻거리와 함께 묻는 순장의 풍습이 있었다.
부여의 법으로는, 살인자는 사형에 처하고 그 가족은 노비로 삼으며, 남의 물건을 훔쳤을 때에는 물건값의 12배를 배상하게 하고, 간음한 자와 투기가 심한 부인은 사형에 처한다는 것 등이 전해지고 있다. 이는 고조선의 8조의 법과 비슷한 종류임을 알 수 있다.
부여의 풍속에는 영고라는 제천 행사가 있었다. 이것은 수렵 사회의 전통을 보여 주는 것으로 12월에 열렸다. 이 때에는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노래와 춤을 즐겼으며, 죄수를 풀어 주기도 하였다. 전쟁이 일어났을 때에는 제천 의식을 행하고, 소를 죽여 그 굽으로 길흉을 점치기도 하였다.
부여는 연맹 왕국의 단계에서 멸망하였지만, 역사적 의미는 매우 크다. 그 이유는, 고구려나 백제의 건국 세력이 부여의 한 계통임을 자처하였고, 또 이들의 건국 신화도 같은 원형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구려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고구려는 부여에서 남쪽으로 내려온 주몽이 건국하였다(기원전 37). 주몽은 부여의 지배 계급 내의 분열, 대립 과정에서 박해를 피해 남하하여 독자적으로 고구려를 건국하였다. 고구려는 압록강의 지류인 동가강 유역의 졸본(환인) 지방에 자리잡았다. 이 지역은 대부분 큰 산과 깊은 계곡으로 된 산악 지대였기 때문에 농토가 부족하여 힘써 일을 하여도 양식이 부족하였다.
고구려는 건국 초기부터 주변의 소국들을 정복하고 평야 지대로 진출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압록강 가의 국내성(집안)으로 옮겨 5부족 연맹을 토대로 발전하였다. 그 후, 활발한 정복 전쟁으로 한의 군현을 공략하여 요동 지방으로 진출하였을 뿐만 아니라, 동쪽으로는 부전 고원을 넘어 옥저를 정복하여 공물을 받았다.
고구려도 부여와 마찬가지로 왕 아래에 상가, 고추가 등의 대가들이 있었으며, 각기 사자, 조의, 선인 등 관리를 거느렸다. 그리고 중대한 범죄자가 있으면 제가 회의를 통하여 사형에 처하고, 그 가족을 노비로 삼았다. 또, 고구려에는 서옥제라는 풍속이 있었다. 그리고 건국 시조인 주몽과 그 어머니 유화 부인을 조상신으로 섬겨 제사를 지냈고, 10월에는 추수 감사제인 동맹이라는 제천 행사를 성대하게 치르고, 아울러 왕과 신하들이 국동대혈에 모여 함께 제사를 지냈다.
옥저와 동예
함경도 및 강원도 북부의 동해안에 위치한 옥저와 동예는 변방에 치우쳐 있어 선진 문화의 수용이 늦었으며, 일찍부터 고구려의 압력을 받아 크게 성장하지 못하였다. 각 읍락에는 읍군이나 삼로라는 군장이 있어서 자기 부족을 다스렸으나, 이들은 큰 정치 세력을 형성하지 못하였다.
옥저는 어물과 소금 등 해산물이 풍부하였고, 토지가 비옥하여 농사가 잘 되었다. 옥저는 고구려에 소금, 어물 등을 공납으로 바쳤다. 옥저는 고구려와 같이 부여족의 한 갈래였으나, 풍속이 달랐고 민며느리제가 있었다. 그리고 가족이 죽으면 시체를 가매장하였다가 나중에 그 뼈를 추려서 가족 공동 무덤인 커다란 목곽에 안치하였다. 또, 목곽 입구에는 죽은 자의 양식으로 쌀을 담은 항아리를 매달아 놓기도 하였다.
동예 역시 토지가 비옥하고 해산물이 풍부하여 농경, 어로 등 경제 생활이 윤택하였다. 특히, 명주와 삼베를 짜는 등 방직 기술이 발달하였다. 특산물로는 단궁이라는 활과 과하마, 반어피 등이 유명하였다. 동예에서는 매넌 10월에 무천이라는 제천 행사를 열었다. 그리고 족외혼(族外婚)을 엄격하게 지켰으며, 각 부족의 영역을 함부로 침범하지 못하게 하였다. 다른 부족의 생활권을 침범하면 책화라 하여 노비와 소, 말로 변상하게 하였다.
삼한(한)
고조선 남쪽 지역에는 일찍부터 진이 성장하고 있었다. 진은 기원전 2세기경에 고조선의 방해로 중국과의 교통이 저지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진에는 고조선 사회의 변동에 따라 대거 남하해 오는 유이민에 의하여 새로운 문화가 보급되어 토착 문화와 융합되면서 사회가 더욱 발전하였다. 그리하여 마한, 변한, 진한의 연맹체들이 나타났다.
마한은 천안·익산·나주 지역을 중심으로 하여 경기·충청·전라도 지방에서 발전하였다. 마한은 54개의 소국으로 이루어졌고, 모두 10여만 호였다. 그 중에서 큰 나라는 1만여 호, 작은 나라는 수천 호였다.
변한은 김해·마산 지역을 중심으로, 진한은 대구·경주 지역을 중심으로 발전하였다. 변한과 진한은 각기 12개국으로 이루어졌고, 모두 4만~5만 호였다. 그 중에서 큰 나라는 4000~5000호, 작은 나라는 600~700호였다.
삼한 중에서 마한의 세력이 가장 컸으며, 마한을 이루고 있는 소국의 하나인 목지국의 지배자가 마한왕 또는 진왕으로 추대되어 삼한 전체의 주도 세력이 되었다. 삼한의 지배자 중에서 세력이 큰 것은 신지, 작은 것은 읍차 등으로 불렸다.
한편, 삼한에는 정치적 지배자 외에 제사장인 천군이 있었다. 그리고 신성 지역으로 소도가 있었는데, 이 곳에서 천군은 농경과 종교에 대한 의례를 주관하였다. 천군이 주관하는 소도는 군장의 세력이 미치지 못하는 곳으로, 죄인이라도 도망을 하여 이 곳에 숨으면 잡아가지 못하였다. 이러한 제사장의 존재에서 고대 신앙의 변화와 제정의 분리를 엿볼 수 있다.
소국의 일반 사람들은 읍락에 살면서 농업과 수공업의 생산을 담당하였으며, 초가지붕의 반움집이나 귀틀집에서 살았다. 또, 공동체적인 전통을 보여 주는 두레 조직을 통하여 여러 가지 공동 작업을 하였다.
삼한에서는 해마다 씨를 뿌리고 난 뒤인 5월과 가을 곡식을 거두어들이는 10월에 계절제를 열어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이러한 제천 행사 때에는 온 나라 사람이 모여서 날마다 음식과 술을 마련하여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즐겼다.
삼한 사회는 철기 문화를 바탕으로 하는 농경 사회였다. 철제 농기구의 사용으로 농경이 발달하였고, 벼농사를 지었다. 특히, 변한에서는 철이 많이 생산되어 낙랑, 왜 등에 수출하였다. 철은 교역에서 화폐처럼 사용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철기 시대 후기의 문화 발전은 삼한 사회의 변동을 가져왔다. 지금의 한강 유역에서는 백제국이 성장하면서 마한 지역을 통합해 갔다. 또, 낙동강 유역에서는 구야국이, 그 동쪽에서는 사로국이 성장하여 중앙 집권 국가의 기반을 마련하면서 각각 가야 연맹체와 신라의 기틀을 다져 나갔다.
III. 통치 구조와 정치 활동
1. 고대의 정치
1. 고대의 세계
동아시아 문화권의 중심을 이룬 중국은 동아시아 사회의 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중국에서는 주나라가 쇠퇴하면서 춘추 전국 시대의 혼란기를 겪었다. 진은 이러한 혼란을 극복하고 통일 국가를 수립하였다.
진은 중앙 집권적 통치 체제를 확립하였고, 뒤를 이은 한은 영토를 크게 확장하고 서역과 교역을 확대하였다. 특히, 한은 유학을 국가의 이념으로 채택하여 유교주의적 중국 문화의 기틀을 확립하였다.
3세기 초 후한이 멸망한 뒤 중국은 다시 분열되어 삼국 시대와 5호 16국 시대, 남북조 시대로 이어졌다. 이 때, 양쯔 강 이남 지방의 개발이 본격화되었고, 문벌 귀족이 사회의 지배 세력이 되었으며, 불교가 융성하는 등 귀족 문화가 발달하였다.
6세기 말에 수가 중국을 통일하였으나 무리한 고구려 원정 끝에 멸망하고, 7세기에 당이 건국되었다. 당에서 발달한 한자, 유교, 불교, 율령 체제 등은 우리 나라, 일본, 베트남 등에 전파되면서 동아시아 문화권을 이루었다.
한편, 인도에는 아리아 인이 남하하여 철기 문화를 보급하고, 브라만 교와 카스트 제도를 확립하였다. 이어 브라만 교에 반대하고 평등을 강조한 불교가 성립하였다. 마우리아 왕조 때 정리된 소승 불교는 동남 아시아로 전파되었고, 쿠샨 왕조 대에 성립한 대승 불교는 간다라 미술과 함께 중국, 우리 나라, 일본으로 전파되어 이들 지역에 불교 문화를 꽃피웠다. 굽타 왕조 시대에는 인도의 민족 종교인 힌두 교가 성립되고, 인도의 고전 문화가 완성되어 인도 문화의 원형이 형성되었다.
오리엔트 지방에서는 강력한 전제 국가가 발전하였다. 사산 왕조 페르시아가 번성하여 비잔티움 제국과 대립하였다. 7세기에는 아라비아 반도에서 무함마드가 이슬람 교를 창시하여 이슬람 문화권이 형성되어 갔다.
서양에서는 지중해 연안을 중심으로 그리스 문화와 로마 문화가 발전하여 서양 문화의 원천을 이루었다.
그리스는 아테네와 스파르타를 중심으로 발전하였다. 페르시아 전쟁에서 승리한 아테네에서는 시민 중심의 민주 정치가 발전했고, 인간 중심의 문화를 꽃피웠다. 기원전 4세기 말에 그리스가 몰락하고,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동방 원정으로 그리스 문화와 오리엔트 문화가 융합되면서 헬레니즘 문화가 발전하였다.
로마는 기원전 3세기 말에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하고, 이어 지중해 전역을 차지하는 대제국으로 발전하였다. 로마 공화정은 혼란을 거듭하다가 기원전 1세기 말에 제정이 성립되어 약 200년 동안 평화와 번영을 누려 '로마의 평화(Pax Romana)'를 이루었다. 그러나 로마 제국은 2세기 말경부터 군인 황제 시대의 혼란을 겪고, 사회·경제 기반도 흔들려 쇠퇴하기 시작했다. 4세기 초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4세기 말에 로마 제국은 비잔티움 제국(동로마 제국)과 서로마 제국으로 분열되었다(395). 서로마 제국은 게르만족의 대이동으로 멸망하고(476), 비잔티움 제국은 이후 1000년 동안 계속되었다.
로마는 그리스 문화와 헬레니즘 문화 등을 종합하여 서양 고대 문화를 완성하였으며, 실용적이고 현실적인 특성의 문화를 발전시켰다. 또, 넓은 영역을 효과적으로 지배하기 위하여 법률이 발전하여 로마법이 성립하였다. 로마 제국 시대에 세계 종교로 성장한 크리스트 교는 로마 문화에 계승된 그리스의 인간 중심 사상과 함께 서양 문화의 2대 조류가 되었다.
2. 고대 국가의 성립
고대 국가의 성격
철기 문화의 보급과 이에 따른 생산력의 증대를 토대로 성장한 여러 소국은 그 중에서 우세한 집단의 족장을 왕으로 하는 연맹 왕국을 이루었다. 왕은 자기 집단 내부의 지배력을 강화하는 동시에, 다른 집단에 대한 지배력을 키워 나갔다.
이 과정에서 주변 지역을 활발하게 정복하여 영역을 확대하였고, 정복 과정에서 성장한 경제력과 군사력을 바탕으로 왕권을 더욱 강화할 수 있었다. 왕권이 강화되면서 율령을 반포하여 통치 체제를 정비하였고, 집단의 통합을 강화하기 위하여 불교를 받아들여 중앙 집권적인 고대 국가가 형성되었다.
삼국의 성립
삼국 중에서 가장 먼저 국가 체제를 정비한 것은 고구려였다. 졸본성에서 국내성으로 도읍을 옮긴 고구려는 1세기 후반 태조왕 때에 이르러 정복 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이러한 정복 활동 과정에서 커진 군사력과 경제력을 토대로 왕권이 안정되어 왕위가 독점적으로 세습되었고, 통합된 여러 집단은 5부 체제로 발전하였다.
이후 2세기 후반 고국천왕 때에는 부족적인 전통을 지녀 온 5부가 행정적 성격의 5부로 개편되었고, 왕위 계승도 형제 상속에서 부자 상속으로 바뀌었으며, 족장들이 중앙 귀족으로 편입되는 등 왕권 강화와 중앙 집권화가 더욱 진전되었다.
백제는 한강 유역의 토착 세력과 고구려 계통의 유이민 세력의 결합으로 성립되었는데(기원전 18), 우수한 철기 문화를 보유한 유이민 집단이 지배층을 형성하였다. 백제는 한강 유역으로 세력을 확장하려던 한의 군현을 막아 내면서 성공하였다. 고이왕 때 한강 유역을 완전히 장악하고, 중국의 선진 문물을 받아들여 정치 체제를 정비하였다. 이 무렵, 백제는 관등제를 정비하고 관복제를 도입하는 등 지배 체제를 정비하여 중앙 집권 국가의 토대를 형성하였다.
신라는 진한 소국의 하나인 사로국에서 출발하였는데, 경주 지역의 토착민 집단과 유이민 집단이 결합해 건국되었다(기원전 57). 이후 동해안으로 들어온 석탈해 집단이 등장하면서 박, 석, 김의 3성이 교대로 왕위를 차지하였다. 유력 집단의 우두머리는 이사금(왕)으로 추대되었고, 주요 집단은 독자적인 세력 기반을 유지하고 있었다.
4세기 내물왕 때, 신라는 활발한 정복 활동으로 낙동강 동쪽의 진한 지역을 거의 차지하고 중앙 집권 국가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이 때부터 김씨에 의한 왕위 계승권이 확립되었다. 또, 왕의 칭호도 대군장을 뜻하는 마립간으로 바뀌었다. 한편, 신라 해안에 나타나던 왜의 세력을 물리치는 과정에서 고구려 광개토 대왕의 군대가 신라 영토 내에 머무르기도 하였다. 그 후로 신라는 고구려를 통하여 간접적으로 중국의 문물을 받아들이면서 성장해 나갔다.
낙동강 하류의 변한 지역에서는 철기 문화를 토대로 농업 생산력이 증대되었고 점진적인 사회 통합을 거쳐 2세기 이후 여러 정치 집단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3세기경에는 이들 사이의 통합이 한 단계 더 발전하여 김해의 금관가야가 중심이 되어 연맹 왕국으로 발전하였다. 이를 전기 가야 연맹이라고 부른다. 연맹의 맹주인 금관가야는 김수로에 의하여 건국되었는데(42), 그 세력 범위는 낙동강 유역 일대에 걸쳤다.
가야의 소국들은 일찍부터 벼농사를 짓는 등 농경 문화가 발달하였다. 또, 풍부한 철의 생산과 해상 교통을 이용하여 낙랑과 왜의 규슈 지방을 연결하는 중계 무역이 발달하였다.
4세기 초부터 백제와 신라의 팽창에 밀려 전기 가야 연맹은 약화되기 시작하였다. 4세기 말~5세기 초에는 신라를 후원하는 고구려군의 공격을 받고 거의 몰락하여 가야의 중심 세력이 해체되고, 가야 지역은 낙동강 서쪽 연안으로 축소되었다.
3. 삼국의 발전과 통치 체제
삼국의 정치적 발전
고구려는 3세기 중반 위나라의 침입을 받아 한때 위축되기도 하였으나, 4세기에 이르러 5호 16국 시대의 혼란을 틈타 활발하게 대외 팽창을 꾀하였다. 미천왕 때에 낙랑군을 완전히 몰아 낸 고구려는 압록강 중류 지역을 벗어나 남쪽으로 진출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소수림왕 때에는 율령의 반포, 불교의 공인, 태학의 설립 등을 통해 지방에 산재한 부족 세력을 효율적으로 통제하면서 중앙 집권 국가로 체제를 강화하려 하였다.
백제는 4세기 중반 근초고왕 때에 크게 발전하였다. 이 때의 백제는 마한 세력을 정복하여 전라도 남해안에 이르렀으며, 북으로는 황해도 지역을 놓고 고구려와 대결하였다. 또, 낙동강 유역의 가야에 대해서도 지배권을 행사하였다.
정복 활동을 통하여 축적한 군사력과 경제력을 바탕으로 백제는 수군을 정비하여 중국의 요서 지방으로 진출하였고, 이어서 산둥 지방과 일본의 규슈 지방에까지 진출하는 등 활발한 대외 활동을 벌였다.
이로써 백제의 왕권은 점차 전제화되고 부자 상속에 의한 왕위 계승이 시작되었다. 침류왕 때에는 불교를 공인하여 중앙 집권 체제를 사상적으로 뒷받침하였다.
한편, 신라는 5세기 초에 백제와 동맹을 맺어 고구려의 간섭에서 벗어나려 하였고, 5세기 말에는 6촌을 6부의 행정 구역으로 개편하였다.
지증왕 때에 이르러서는 정치 제도가 더욱 정비되어 국호를 신라로 바꾸고, 왕의 칭호도 마립간에서 왕으로 고쳤다. 그리고 수도와 지방의 행정 구역을 정리하였고, 대외적으로는 우산국(울릉도)을 복속시켰다.
이어 법흥왕은 병부의 설치, 율령의 반포, 공복의 제정 등을 통하여 통치 질서를 확립하였다. 또, 골품 제도를 정비하고 불교를 공인하여 새롭게 성장하는 세력들을 포섭하고자 하였다. 더 나아가, 건원이라는 연호를 사용함으로써 자주 국가로서의 위상을 높이고, 김해 지역의 금관가야를 정복하여 영토를 확장하였다. 이로써 신라는 중앙 집권 국가 체제를 완비하였다.
삼국 간의 항쟁
중앙 집권 체제를 정비한 삼국은 5세기에 접어들면서 대외 팽창을 꾀하였다. 고구려는 소수림왕 때의 내정 개혁을 바탕으로 광개토 대왕 때에 만주 지방에 대한 대규모의 정복 사업을 단행하였고, 이어 신라와 왜·가야 사이의 세력 경쟁에 개입하여 신라에 침입한 왜를 격퇴함으로써 한반도 남부에까지 영향력을 끼쳤다. 그 후 장수왕 때에는 흥안령 일대의 초원 지대를 장악하는 한편, 중국 남북조와 각각 교류하면서, 대립하고 있던 두 세력을 조종하는 외교 정책을 써서 중국을 견제하였다. 또, 평양으로 도읍을 옮기고(427), 뒤이어 백제의 수도 한성을 함락하고 한강 전 지역을 포함하여 죽령 일대에서 남양만을 연결하는 선까지 그 판도를 넓혔다. 이러한 고구려의 한강 유역 진출은 광개토 대왕릉비와 중원 고구려비에 잘 나타나 있다.
이와 같이 계속된 대외 팽창으로 고구려는 동북 아시아의 패자로 군림하였다. 고구려는 만주와 한반도에 걸친 광대한 영토를 차지하고 정치 제도를 완비한 대제국을 형성하여 중국과 대등한 지위에서 힘을 겨루게 되었다.
백제는 5세기 이후 고구려의 적극적인 남하 정책에 밀려 웅진(공주)으로 도읍을 옮기면서(475) 대외 팽창이 위축되었다. 더구나 중국과 일본 지역의 정세 변화에 따라 무역 활동도 침체되어 경제적으로도 어려움을 겪었다. 이 과정에서 왕권이 약화되고 귀족 세력이 국정을 주도하였다.
5세기 후반 동성왕 때부터 백제는 다시 사회가 안정되고 국력을 회복하기 시작하였다. 동성왕은 신라와 동맹을 강화하여 고구려에 대항하였고, 무령왕은 지방의 22담로에 왕족을 파견함으로써 지방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였다. 이로써 백제 중흥의 발판이 마련되었다.
성왕은 대외 진출이 쉬운 사비(부여)로 도읍을 옮기고(538), 국호를 남부여로 고치면서 중흥을 꾀하였다. 성왕은 중앙 관청과 지방 제도를 정비하고, 불교를 진흥하였으며, 중국의 남조와 활발하게 교류함과 아울러 일본에 불교를 전하기도 하였다. 한편, 성왕은 고구려의 내정이 불안한 틈을 타서 신라와 연합하여 일시적으로 한강 유역을 부분적으로 수복하였지만 곧 신라에 빼앗기고, 자신도 신라를 공격하다가 관산성에서 전사하고 말았다.
신라는 6세기 진흥왕 때에 이르러 내부의 결속을 더욱 강화하고 활발한 정복 활동을 전개하면서 삼국 간의 항쟁을 주도하기 시작하였다. 진흥왕은 국가 발전을 위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하여 화랑도를 국가적인 조직으로 재편하고, 불교 교단을 정비하여 사상적 통합을 도모하였다.
이를 토대로 진흥왕은 고구려의 지배 아래에 있던 한강 유역을 빼앗고 함경도 지역으로까지 진출하였으며, 남쪽으로는 고령의 대가야를 정복하여 낙동강 서쪽을 장악하였다. 특히, 한강 유역을 장악함으로써 경제 기반을 강화하고, 전략 거점을 확보할 수 있었으며, 황해를 통하여 중국과 직접 교역할 수 있는 유리한 발판을 마련하였다. 이는 이후 삼국 경쟁의 주도권을 신라가 장악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진흥왕의 정복 활동에 관한 사실은 단양 적성비와 4개의 순수비를 통하여 잘 알 수 있다.
가야 연맹도 5세기 초에 크게 변하였다. 전기 가야 연맹이 해체되면서 김해, 창원을 중심으로 하는 남동부 지역의 세력이 약화되었다. 반면, 그 동안 낙후 지역이었던 북부 지역의 고령, 합천, 거창, 함양 등지의 세력은 자신의 영역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들은 5세기 후반에 고령 지방의 대가야를 새로운 맹주로 하여 후기 가야 연맹을 이룩하였다. 6세기 초에 대가야는 백제, 신라와 대등하게 세력을 다투게 되었고, 신라와 결혼 동맹을 맺어 국제적 고립에서 벗어나려 하였다.
이후, 신라와 백제의 다툼 속에서 후기 가야 연맹은 분열하여 김해의 금관가야가 신라에 정복당하였고, 가야의 남부 지역은 신라와 백제에 의하여 분할 점령되었다. 결국, 대가야가 신라에 멸망하면서(562) 가야 연맹은 완전히 해체되었다.
삼국의 통치 체제
삼국 초기에는 고구려와 백제의 5부나 신라의 6부가 중앙의 지배 집단이 되었다. 각 부는 중앙 왕실에 예속되었으나, 각 부의 귀족은 가가 관리를 거느리고 자신의 영역을 지배하였다. 왕은 여러 귀족 중에서 가장 힘 있는 존재였다. 따라서, 국가의 중요한 일이나 여러 부의 힘을 통합하여 국가의 동원력을 강화하는 일은 각 부의 귀족으로 구성된 회의체에서 결정하였다.
그 후, 사회가 발전함에 따라 관등제가 정비되어 각 부의 귀족과 그 아래에 있던 관리들은 왕의 신하가 되었다. 이로써, 왕의 권한이 강화되고, 각 부의 부족적 성격이 행정적 성격으로 바뀌어 중앙 집권 체제가 형성되었다.
삼국의 관등제와 관직 체제의 운영은 신분제에 의하여 제약을 받았다. 신라는 관등제를 골품 제도와 결합하여 운영하였다. 즉, 개인이 승진할 수 있는 관등의 상한을 골품에 따라 정하고, 일정한 관직을 맡을 수 있는 관등의 범위를 한정하였다. 고구려나 백제에서도 신라와 비슷하게 운영하였다.
삼국에는 왕 아래에 여러 관청을 두었는데, 고구려의 대대로(또는 막리지), 백제의 좌평은 국정을 총괄하는 관직이었다. 백제는 일찍부터 6좌평 제도를 두어 고구려나 신라에 비하여 훨씬 정비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신라는 국가가 발전해 감에 따라 병부와 집사부 등 여러 관서를 차례로 두었다. 또, 귀족 세력을 대표하는 상대등은 귀족 회의를 주관하면서 왕권을 견제하였다.
삼국의 중앙 지배층은 정복 지역을 세력의 크기에 따라 왕이나 촌 단위로 개편하여 지방 통치의 중심으로 삼고, 지방관을 파견하여 지방민을 직접 지배하였다. 그러나 지방에 대한 중앙 정부의 지배력은 강력하지 못하였고, 원래 성이나 촌을 지배하던 지방 세력가의 자치가 오랫동안 유지되었다.
삼국은 뒤에 최상급 지방 행정 단위로 부와 방 또는 주를 두고 지방 장관을 파견하였다. 그 아래의 성이나 군에도 지방관을 파견하였으나, 말단 행정 단위인 촌에는 지방관을 파견하지 않고 토착 세력을 촌주로 삼았다. 삼국의 지방 행정 조직은 그대로 군사 조직이기도 하였으므로 각 지방의 지방관은 곧 군대의 지휘관이었다. 따라서, 삼국 시대 국가의 주민 통치는 본질적으로 군사적 지배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백제의 방령은 각각 700~1200명의 군사를 거느렸고, 신라의 군주는 주 단위로 설치한 부대인 정을 거느렸다. 신라에는 정 외에도 서당이라 불리는 군대가 있었다.
4. 대외 항쟁과 신라의 삼국 통일
고구려와 수·당의 전쟁
중국을 다시 통일한 수가 동북쪽으로 세력 확대를 꾀하자, 고구려에는 위기감이 점차 높아졌다. 이에, 고구려는 북쪽의 돌궐과 남쪽의 백제, 왜와 연결하는 연합 세력을 구축하면서 상황을 타개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수를 건국한 문제와 뒤를 이은 양제는 거듭하여 고구려를 침략하였다.
고구려는 요하를 굳게 지켜 문제의 침략을 막아 냈고, 백만이 넘는 대군을 이끌고 침략해 온 양제의 군대를 크게 격파하는 결정적 승리를 거두기도 하였다(살수 대첩, 612).
수의 뒤를 이은 당도 고구려를 침략할 기회를 엿보았다. 이에, 고구려는 국경에 천리장성을 쌓고, 방어 체제를 강화하는 등 당의 침략에 대비하였다.
당 태종은 직접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략하였다. 고구려는 국경의 여러 성이 함락되는 등 큰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으나, 안시성을 중심으로 한 민·군이 협력하여 마침내 당군을 물리쳤다(645). 이후에도 고구려는 당의 빈번한 침략을 물리쳤다. 고구려가 수·당의 침략을 막아 낸 것은 고구려를 지켰을 뿐만 아니라 중국의 한반도 침략을 저지했다는 점에서도 의의가 크다.
백제와 고구려의 멸망
고구려가 수·당의 침략을 막아 내는 동안 신라는 백제와 대결하고 있었다. 신라는 고구려와 동맹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고, 그 후 당과 연합군을 결성하여 백제를 공격하였다.
김유신이 지휘한 신라군은 황산벌에서 계백이 이끈 백제의 결사대를 격파한 후에 사비성으로 진출하였고, 당군은 금강 하구로 침입하였다. 이미 내부적으로 정치 질서의 문란과 지배층의 향락으로 국가적 일체감을 상실한 백제는, 결국 사비성이 함락되면서 멸망하고 말았다(660).
백제 멸망 이후 각 지방의 저항 세력은 백제 부흥 운동을 일으켰다. 복신과 흑치상지, 도침 등은 왕자 풍을 왕으로 추대하고 주류성과 임존성을 거점으로 군사를 일으켰다. 이들은 200여 성을 회복하고 사비성과 웅진성의 당군을 공격하면서 4년간 저항하였으나, 나·당 연합군에 의하여 부흥 운동은 좌절되었다. 이 때, 왜의 수군이 백제 부흥군을 지원하기 위하여 백강 입구까지 왔으나 패하여 쫓겨갔다.
백제를 멸망시킨 신라는 다시 당과 연합하여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고구려는 거듭된 전쟁으로 국력의 소모가 심하였고, 연개소문이 죽은 후에 지배층의 권력 쟁탈전으로 국론이 분열되어 있었다. 결국, 동북 아시아의 패권자로 군림하던 고구려도 나·당 연합군의 공격으로 멸망하였다(668).
고구려 멸망 이후 보장왕의 서자 안승을 받든 검모잠과 고연무 등은 고구려의 유민을 모아 한성(황해도 재령)과 오골성을 근거지로 부흥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들은 한때 평양성을 탈환하기도 하고, 후에는 신라의 도움을 받으면서 기세를 떨치기도 했지만, 결국 실패하였다.
신라의 삼국 통일
당이 신라와 연합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것은, 결국 신라를 이용하여 한반도 전체를 장악하려는 야심 때문이었다. 당은 백제의 옛 땅에 웅진 도독부를 두고, 고구려의 옛 땅에는 안동 도호부를 두어 지배하려 하였다. 또, 경주에도 계림 도독부를 두고 신라 귀족의 분열을 획책하여 한반도 전체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하고자 하였다. 이에,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의 유민과 연합하여 당과 정면으로 대결하였다.
신라는 고구려 부흥 운동 세력을 후원하는 한편, 백제 땅에 지배권을 장악하였다. 이어 남침해 오던 당의 20만 대군을 매소성에서 격파하여 나·당 전쟁의 주도권을 장악하였고, 금강 하구의 기벌포에서 당의 수군을 섬멸하였으며, 평양에 있던 안동 도호부도 요동성으로 밀어 내는 데 성공함으로써 삼국 통일을 이룩하였다(676).
신라의 삼국 통일은 외세의 이용과 대동강에서 원산만까지를 경계로 한 이남의 땅을 차지하는 데 그쳤다는 한계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당의 세력을 무력으로 몰아 낸 사실에서 자주적 성격을 인정할 수 있다. 또, 고구려·백제 문화의 전통을 수용하고 경제력을 확충함으로써 민족 문화 발전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5. 남북국 시대의 정치 변화
통일 신라의 발전
통일 이후 신라는 강화된 경제력과 군사력을 토대로 왕권을 전제화하였다. 태종 무열왕은 최초의 진골 출신 왕으로, 통일 전쟁을 치르는 과정에서 왕권을 강화하였다. 아울러 이 때부터 태종 무열왕의 직계 자손이 왕위를 세습하였다. 나아가, 왕명을 받들고 기밀 사무를 관장하는 집사부의 장관인 시중의 기능을 강화하고, 귀족 세력의 이익을 대변하던 상대등의 세력을 억제하였다. 이로써 통일 이후 진골 귀족 세력이 약화되고 왕권이 전제화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하였다.
신문왕은 김흠돌의 모역 사건을 계기로 귀족 세력을 숙청하고 정치 세력을 다시 편성하였다. 중앙 정치 기구와 군사 조직을 정비하고, 9주 5소경 체제의 지방 행정 조직을 완비하였다. 또, 문무 관리에게 관료전을 지급하고, 귀족의 경제 기반이었던 녹읍을 폐지하기도 하였다. 나아가, 유교 정치 이념의 확립을 위하여 유학 사상을 강조하고, 유학 교육을 위하여 국학을 설립하였다.
왕권이 전제화되면서 상대적으로 진골 귀족 세력은 약화되었다. 반면에, 진골 귀족 세력에 눌려 정치적으로 성장할 수 없었던 6두품 세력이 왕권과 결탁하여 상대적으로 부각되었다. 이들은 학문적 식견을 바탕으로 왕의 정치적 조언자로 활동하거나 행정 실무를 맡아 보았다.
이렇게 확립된 전제 왕권은 진골 귀족 세력의 반발로 경덕왕 때부터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녹읍이 부활되었고, 사원의 면세전이 늘어나면서 국가 재정도 압박을 받았다. 오랫동안 평화가 지속되자, 중앙의 귀족은 자신들의 특권적 지위만을 유지하려 하였다. 더욱이 그들의 지나친 향락과 사치 생활로 인하여 농민의 부담이 늘어나게 되었다.
발해의 건국과 발전
고구려 멸망 이후 대동강 이북과 요동 지방의 고구려 땅은 당의 안동 도호부가 지배하고 있었다. 고구려 유민은 요동 지방을 중심으로 하여 당에 계속 저항하였다.
7세기 말에 이르러 당의 지방에 대한 통제력이 약화되자, 고구려 장군 출신인 대조영을 중심으로 한 고구려 유민과 말갈 집단들은 전쟁의 피해를 거의 받지 않았던 만주 동부 지역으로 이동하여 길림성의 돈화시 동모산 기슭에 발해를 세웠다(698). 발해의 건국으로 이제 남쪽의 신라와 북쪽의 발해가 공존하는 남북국의 형세를 이루었다. 발해는 영역을 확대하여 옛 고구려의 영토를 대부분 차지하였다. 비록 그 영역에 말갈족이 다수 거주하고 있었지만, 발해는 일본에 보낸 국서에 고려 또는 고려국왕이라는 명칭을 사용한 사실이라든지, 문화의 유사성으로 보아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였다.
대조영의 뒤를 이은 무왕 때에는 영토 확장에 힘을 기울여 동북방의 여러 세력을 복속하고 북만주 일대를 장악하였다. 발해의 세력 확대에 따라 신라는 북방 경계를 강화하였고, 흑수부 말갈도 당과 연결하고자 하였다. 이에, 발해는 먼저 장문휴의 수군으로 당의 산둥 지방을 공격하는 한편, 요서 지역에서 당군과 격돌하였다. 또, 돌궐, 일본 등과 연결하면서 당과 신라를 견제하여 동북 아시아에서 세력 균형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어 문왕 때에는 당과 친선 관계를 맺으면서 당의 문물을 받아들여 체제를 정비하고, 신라와도 상설 교통로를 개설하여 대립 관계를 해소하려 하였다. 발해가 수도를 중경에서 상경으로 옮긴 것은 이러한 지배 체제의 정비를 반영한 것이다. 이 무렵, 발해는 이러한 발전을 토대로 중국과 대등한 지위에 있음을 대외적으로 과시하기 위하여 인안, 대흥 등의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다. 발해는 9세기 전반의 선왕 때 대부분의 말갈족을 복속시키고 요동 지역으로 진출하였다. 남쪽으로는 신라와 국경을 접할 정도로 넓은 영토를 차지하였고, 지방 제도도 정비하였다. 이후 전성기를 맞은 발해를 중국인들은 해동성국이라 불렀다.
그러나 10세기 초에 이르러 부족을 통일한 거란이 동쪽으로 세력을 확대해 오고, 발해 내부에서도 귀족들의 권력 투쟁이 격화되어 발해의 국력이 크게 쇠퇴하였고, 결국 거란의 침략을 받아 멸망하였다(926).
남북국의 통치 체제
통일 신라는 중앙 집권 체제로 제도를 재정비하였다. 중앙의 정치 체제는 집사부를 중심으로 하여 관료 기구의 기능을 강화하였다. 그리하여 집사부 시중의 지위를 높였고, 그 아래에는 위화부를 비롯한 13부를 두고 행정 업무를 분담하게 하였다. 그리고 관리의 비리와 부정을 방지하기 위하여 감찰 기구인 사정부를 두었고, 국립 대학인 국학도 설치하였다.
지방 행정 조직은 9주 5소경 체제로 정비하여 중앙 집권을 더욱 강화하였다. 군사·행정상의 요지에는 5소경을 설치하여, 수도인 금성(경주)이 지역적으로 치우쳐 있는 것을 보완하고, 각 지방의 균형 있는 발전을 꾀하였다. 군사적 기능보다 행정적 기능을 강화하여 전국을 9주로 나누고, 주 아래에는 군이나 현을 두어 지방관을 파견하였고, 그 아래의 촌은 토착 세력인 촌주가 지방관의 통제를 받으면서 다스렸다. 또, 향·부곡이라 불리는 특수 행정 구역도 있었다.
한편, 지방관을 감찰하기 위하여 외사정을 파견하였고, 지방 세력을 견제하기 위하여 상수리 제도를 실시하기도 하였다.
군사 조직도 체계적으로 정비하였다. 중앙군의 핵심은 9서당이었다. 서당에는 고구려와 백제 사람은 물론 말갈족까지 포함하여 민족 융합을 꾀하기도 하였다. 지방군으로는 10정을 두었는데, 9주에 1정씩 배치하고, 북쪽 국경 지대인 한주(한산주)에는 2정을 두었다.
통일 신라의 통치 체제 변화는 중국식 정치 제도를 받아들이면서 강력한 중앙 집권적 전제 국가로 발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중앙 관부의 장관과 주의 도독, 군대의 장군 등 권력의 핵심은 모두 중앙 진골 귀족이 독점하는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발해는 왕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 집권적 지배 체제를 갖추었다. 중앙의 정치 조직은 3성과 6부를 근간으로 편성하였다. 정당성의 장관인 대내상이 국정을 총괄하였고, 그 아래에 있는 좌사정이 충·인·의 3부를, 우사정이 지·예·신 3부를 각각 나누어 관할하는 이원적인 통치 체제를 구성하였다. 당의 제도를 수용하였지만, 그 명칭과 운영은 발해의 독자성을 유지하였다.
발해의 지방 행정 조직은 5경 15부 62주로 조직되었다. 전략적 요충지에는 5경을 두었고, 지방 행정의 중심에는 15부를 두었으며, 그 아래에 주와 현을 두고 지방관을 파견하였다.
발해의 군사 조직은 중앙군으로 10위를 두어 왕궁과 수도의 경비를 맡겼고, 지방 행정 조직에 따라 지방군을 편성하여 지방관이 지휘하게 하였다. 국경의 요충지에는 따로 독립된 부대를 두어 방어하기도 하였다.
신라 말기 호족 세력과 후삼국의 성립
8세기 후반 이후, 진골 귀족들은 경제 기반을 확대하여 사병을 거느리고 권력 싸움을 벌였다. 중앙 귀족들 사이에 왕위 쟁탈전이 치열해지면서 왕권이 약화되고 귀족 연합적인 정치가 운영되었다. 지방 세력들도 왕위 쟁탈전에 가담하여 중앙 정부의 지방에 대한 통제력이 약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자연 재해가 잇따르고, 왕실과 귀족들의 사치와 향락으로 국가 재정이 바닥나면서 농민에 대한 강압적인 수취가 뒤따랐다. 살기가 어려웠던 농민은 토지를 잃고 노비가 되거나 초적이 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중앙 정부에 대한 불평과 불만이 높아지고, 지방에서 반란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사회가 혼란해지면서 지방에서는 호족이라 불리는 새로운 세력이 성장하였다. 호족들은 중앙 정부의 통제에서 벗어나면서 반독립적인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이들은 자기 근거지에 성을 쌓고 군대를 보유하여 스스로 성주 또는 장군이라고 칭하면서 그 지방의 행정권과 군사권을 장악하였다.
한편, 당에 유학하였다가 돌아온 6두품 출신의 일부 유학생과 선종 승려 등은 신라 골품제 사회를 비판하면서 새로운 정치 이념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들도 진골 귀족에 의하여 자신들의 뜻을 펼 수 엇게 되자, 은거하거나 지방의 호족 세력과 연계하여 사회 개혁을 추구하였다.
10세기로 들어오면서 지방에서 성장하던 견훤과 궁예는 신라 말의 혼란을 틈타 독자적인 정권을 수립함으로써 후삼국 시대가 전개되었다.
견훤은 전라도 지방의 군사력과 호족 세력을 토대로 완산주(전주)에 도읍을 정하고 후백제를 세웠다(900). 후백제는 차령 산맥 이남의 충청도와 전라도 지역을 차지하여, 그 지역의 우세한 경제력을 토대로 군사적 우위를 확보할 수 있었다. 또, 중국과 외교 관계를 맺는 등 국제적 감각도 갖추었다.
그러나 견훤은 신라에 적대적이었고, 농민에게 지나치게 조세를 수취하였으며, 호족을 포섭하는 데 실패하는 등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궁예는 신라 왕족의 후예로서, 처음에는 북원(원주) 지방의 도적 집단을 토대로 강원도, 경기도 일대의 중부 지방을 점령하였다. 이어서 예성강 유역의 황해도 지역까지 세력을 넓혔다. 그는 세력이 커지자, 송악(개성)에 도읍을 정하고 독립하여 후고구려를 세웠다(901).
그 후 궁예는 영토를 확장하고 국가 기반을 다져, 도읍을 철원으로 옮기면서 국호를 마진으로 바꾸었다가 다시 태봉으로 바꾸고, 새로운 정치를 추구하였다.
궁예는 새로운 관제를 마련하고 골품 제도를 대신할 새로운 신분 제도를 모색하였다. 그러나 궁예는 계속되는 전쟁을 치르려고 지나치게 조세를 거두어들였고, 죄 없는 관료와 장군을 살해하였을 뿐 아니라, 미륵 신앙을 이용하여 전제 정치를 도모하였다. 이에 따라 백성과 신하들의 신앙을 잃어 신하들에 의하여 축출되었다.
2. 중세의 정치
1. 중세의 세계
10세기 초, 중국에서는 당이 멸망하고 5대 10국이 흥망하는 가운데 사대부라는 새로운 지배층이 성장하였다. 5대의 혼란을 수습한 송은 중앙 집권적인 황제 독재 체제를 구축하고, 과거 제도를 강화하여 문반 관료 중심의 문치주의 체제를 확립하였다. 그러나 송은 국방력의 약화로 북방 민족의 침입을 받았고, 국가 재정도 궁핍해졌다. 이를 극복하고자 한 왕안석의 변법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12세기 초에 여진족의 침입을 받아 북중국을 빼앗기고 강남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양쯔 강 이남 지역의 개발이 촉진되어 강남이 경제와 문화의 새로운 중심지로 발달하였다. 이 시기에 주희가 체계화한 성리학은 중국은 물론, 우리 나라를 비롯한 주변의 여러 나라에 큰 영향을 끼쳤다.
13세기에는 몽골족이 크게 일어나 중국 대륙을 차지하고, 아시아의 대부분과 러시아 남부 지역까지 장악하는 세계 제국을 이룩하였다. 이로써 동서 문화 교류가 크게 촉진되었다.
일본은 9세기 중엽에 국왕권이 약화되고, 지방 호족이 장원을 소유하고 무사를 고용함으로써 특유의 봉건 제도를 갖추기 시작하였다.
인도에서는 굽타 왕조가 무너진 후 정치적 분열이 거듭되는 가운데 이슬람 세력이 침투하였다.
한편, 서양은 게르만족의 이동으로 고대 사회에서 중세 사회로 전환하였다. 서양의 중세 사회는 로마 가톨릭 중심의 서유럽 문화권, 그리스 정교 중심의 비잔티움 문화권, 이베리아 반도와 북아프리카에 걸친 이슬람 문화권으로 형성되었다.
게르만족의 이동 이후 서유럽 세계 형성의 중심이 된 프랑크 왕국은 로마 교회와 제휴하여 성장하면서 로마 교회를 후원하는 세력이 되었다. 프랑크 왕국은 9세기에 분열하여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3국의 토대가 되었다. 그 결과, 유럽 세계에는 고전 문화와 크리스트 교에 게르만적 요소가 결합된 새로운 사회와 문화가 성장하였다.
서유럽에서는 봉건 제도가 성립되어, 왕권이 약화되고 지방 분권 체제가 이루어졌다. 봉건 제도의 경제적 단위는 귀족과 기사들이 소유한 장원이었다. 장원의 토지를 경작하는 농민은 대체로 부자유 신분인 농노로서, 이들은 장원의 주인인 영주와 토지에 예속되어 있었다. 한편, 로마 교회가 크게 성장하면서 그 주교는 교황이라 불리고, 교단 조직이 형성되었다. 이에, 크리스트 교 중심의 서유럽 문화권이 성립되어 로마 가톨릭이 서유럽 사람들의 정신을 지배하였다.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뒤에도 비잔티움 제국은 약 1000년 동안 계속되었다. 비잔티움 제국에서는 그리스 문화와 헬레니즘 문화의 전통이 강하였으며, 황제 교황주의의 그리스 정교가 발달하였다. 비잔티움 문화는 초기 서유럽 문화의 성장에 큰 영향을 끼쳤을 뿐 아니라, 북동부의 슬라브 사회에 널리 전파되어 동유럽 문화의 바탕이 되었다.
한편, 이슬람 제국은 아프리카 북부를 지배한 뒤, 8세기에 이르러서는 이베리아 반도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이슬람 문화를 보급하였다. 그러나 북부의 크리스트 교 세력이 점차 강성해지자 이슬람 세력은 유럽 지역에서 밀려나게 되었다.
2. 중세 사회의 성립
고려의 성립과 민족의 재통일
궁예를 몰아 낸 뒤 신하들의 추대 형식을 빌려 왕위에 오른 왕건은 고구려 계승을 내세워 국호를 고려라 하고(918), 자신의 세력 근거지였던 송악으로 도읍을 옮겼다.
고려를 세운 왕건은 통일 역량을 기르기 위하여 안으로는 지방 세력을 흡수, 통합하고, 밖으로는 중국의 5대 여러 나라와 외교 관계를 맺어 대외 관계의 안정을 꾀하였다. 태조는 궁예와 달리 신라에 대하여 적극적인 우호 정책을 내세웠다. 태조는 후백제가 신라를 공격하자 신라를 도와 이들을 막아 냄으로써 신라인의 신망을 얻었다. 그 결과 신라 경순왕의 항복을 받아 전쟁 없이 신라를 통합할 수 있었다. 그리고 후백제에 내분이 일어나 견훤이 귀순하자, 후백제를 정벌하여 후삼국을 통일하였다(936).
한편, 발해가 거란에 멸망당했을 때(926) 고구려계 유민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이 고려로 망명해 왔다. 이에, 태조는 이들을 우대하여 민족의 완전한 통합을 꾀하였다. 이로써 고려는 후삼국뿐만 아니라, 발해의 고구려계 유민까지 포함한 민족의 재통일을 이룩하였다.
태조의 정책과 광종의 개혁 정치
왕위에 오른 뒤 태조는 호족이 지나치게 세금을 거두지 못하도록 하고, 조세 제도를 합리적으로 조정하여 세율을 10분의 1로 낮추어 농민의 생활을 안정시키려 하였다.
태조는 이어 태봉의 관제를 중심으로 신라와 중국의 제도를 참고하여 정치 제도를 마련하고, 개국 공신과 지방의 호족을 관리로 등용하였다. 유력한 호족과는 혼인을 통하여 관계를 깊게 다져 갔다. 또, 지방 호족을 견제하고 지방 통치를 보완하기 위하여 사심관과 기인 제도를 활용하였다. 그리고 정계와 계백료서를 지어 관리가 지켜야 할 규범을 제시하였다. 아울러 후대 왕들이 지켜야 할 정책 방향을 제시한 훈요 10조를 남기기도 하였다.
한편, 태조는 고구려의 옛 땅을 되찾고자 하는 의욕으로 강력한 북진 정책을 추진하여 평양을 서경으로 삼고, 북진 정책의 전진 기지로 적극 개발하였다. 그 결과, 청천강에서 영흥에 이르는 국경선을 확보할 수 있었다.
태조의 뒤를 이은 혜종과 정종 때에는 왕권이 불안정하여 왕자들과 외척들 사이에 왕위 계승 다툼이 일어났다.
이런 상황에서 즉위한 광종은 노비안검법을 실시하여 호족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국가의 수입 기반을 확대하였다. 이어 과거 제도를 시행하여, 유학을 익힌 신진 인사를 등용하고 신구 세력의 교체를 도모하였으며, 지배층의 위계 질서를 확립하기 위하여 백관의 공복을 제정하였다.
일련의 개혁을 통하여 자신감을 가지게 된 광종은 본격적으로 공신과 호족 세력을 제거하여 왕권을 강화하였다. 그리고 국왕의 권위를 높이기 위하여 황제를 칭하고, 광덕, 준풍 등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기도 하였다. 이로써 왕조 성립 초기의 공신과 호족 세력이 크게 약화되고 왕권이 강화될 수 있었다.
유교적 정치 질서의 강화
성종 때에는 신라 6두품 출신의 유학자들이 국정을 주도하면서 유교 정치를 실현하고자 하였다. 성종은 즉위 후 국가의 오랜 폐단을 없애고 국정을 쇄신하기 위하여 중앙의 5품 이상의 관리들로 하여금 그 동안의 정치에 대한 비판과 정책을 건의하는 글을 올리게 하였다.
이에 최승로는 시무 28조를 올려 유교의 진흥과 과도한 재정 낭비를 가져오는 불교 행사의 억제를 요구하고, 태조로부터 경종에 이르는 5대 왕의 치적에 대한 잘잘못을 평가하여 교훈으로 삼도록 하였다. 성종은 최승로의 건의를 수용하여 통치 체제를 정비하였다.
성종은 지방관을 파견하고 향리 제도를 마련하여 지방 세력을 견제하였다. 또, 국자감을 정비하고, 지방에 경학 박사와 역학 박사를 파견하여 유학 교육의 진흥에 노력하였다. 아울러 과거 제도를 정비하고 과거 출신자들을 우대하여 유학에 조예가 깊은 인재들의 적극적인 정치 참여를 유도하였으며, 2성 6부제를 중심으로 하는 중앙 관제도 새로 마련하였다.
3. 통치 체제의 정비
중앙 정치 조직
고려의 통치 체제는 성종 때에 마련한 2성 6부제를 토대로 하였다. 고려는 당의 제도를 받아들이면서도 고려의 실정에 맞게 이를 조정하였다. 그리하여 최고 관서로서 중서문하성을 두었고, 그 장관인 문하시중이 국정을 총괄하였다. 그리고 상서성은 실제 정무를 나누어 담당하는 6부를 두고 정책의 집행을 담당하였다. 중추원은 군사 기밀과 왕명의 출납을 담당하였고, 삼사는 송과는 달리, 단순히 화폐와 곡식의 출납에 대한 회계만 맡았다.
고려의 독자성을 보여 주는 관청인 도병마사와 식목도감은 재신과 추밀이 함께 모여 회의로 국가의 중요한 일을 결정하는 곳이다. 이러한 회의 기구의 존재는 고려 귀족 정치의 특징을 잘 나타내 준다.
한편, 재신과 추밀은 6부를 비롯한 주요 관부의 최고직을 겸하여 중앙의 정치 운영에서 가장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어사대는 정치의 잘잘못을 논하고 관리의 비리를 감찰하는 임무를 맡았다. 어사대의 관원은 중서문화성의 낭사와 함께 대간으로 불렸다. 대간은 비록 직위는 낮았지만, 왕이나 고위 관리의 활동을 지원하거나 제약하여 정치 운영에 견제와 균형을 이루었다.
지방 행정 조직의 정비
지방의 행정 조직도 성종 초부터 정비되기 시작하였다. 전국을 5도와 양계, 경기로 크게 나누고, 그 안에 3경, 4도호부, 8목을 비롯하여 군·현·진 등을 설치하였다. 5도는 상설 행정 기관이 없는 일반 행정 단위로서, 안찰사가 파견되어 도내의 지방을 순찰하였다. 도에는 주와 군·현이 설치되고 지방관이 파견되었다. 북방의 국경 지대에는 동계·북계의 양계를 설치하여 병마사를 파견하고, 국방상의 요충지에는 진을 설치하였는데, 이것은 군사적인 특수 지역이었다.
중앙에서 지방관이 직접 파견되는 것은 군·현과 진까지였다. 그러나 지방관이 파견되는 주현보다 파견되지 않는 속현이 더 많았다. 속현과 향·부곡·소 등 특수 행정 구역은 주현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중앙 정부의 통제를 받고 있었다. 조세나 공물의 징수와 노역 징발 등 실제적인 행정 사무는 향리가 담당하였다.
군역 제도와 군사 조직
고려의 군사 제도는 중앙군과 지방군의 이원 조직으로 구성되었다. 중앙군은 국왕의 친위 부대인 2군과 수도 경비와 국경 방어를 담당하는 6위로 구성되었다. 중앙군은 직업 군인으로 편성되었는데, 이들은 군적에 올라 군인전을 지급받고 그 역은 자손에게 세습되었다.
군적에 오르지 못한 일반 농민으로 16세 이상의 장정들은 지방군으로 조직되었다. 지방군은 국경 지방인 양계에 주둔하는 주진군과 5도의 일반 군현에 주둔하는 주현군으로 이루어졌다.
관리 등용 제도
고려의 관리는 과거와 음서를 통하여 등용되었다. 과거는 제술업, 명경업, 잡업으로 나뉜다. 제술업은 문학적 재능과 정책 등을 시험하고, 명경업은 유교 경전에 대한 이해 능력을 시험하여 문신을 뽑았다. 잡업은 법률, 회계, 지리 등 실용 기술학을 시험하여 기술관을 뽑았다.
법제적으로 양인 이상은 과거에 응시할 수 있었으나, 실제로 제술과나 명경과에는 주로 귀족과 향리의 자제가 응시하였다. 백정 농민은 주로 잡과에 응시하였다.
한편, 공신과 종실의 자손, 5품 이상의 고위 관료의 자손 등은 과거를 거치지 않고도 관료가 될 수 있는 음서의 혜택을 받아 관료로서의 지위를 세습하기도 하였다. 이는 고려의 관료 체제가 귀족적 특성을 지녔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4. 문벌 귀족 사회의 성립과 동요
문벌 귀족 사회의 성립
성종 이후 중앙 집권적인 국가 체제가 확립됨에 따라 중앙에서 새로운 지배층이 형성되어 갔다. 이들은 지방 호족 출신으로 중앙 관료가 된 계열과 신라 6두품 계통의 유학자이었다.
이들 중에서 여러 세대에 걸쳐 중앙에서 고위 관직자를 배출한 가문을 문벌 귀족이라 부른다. 문벌 귀족은 과거와 음서를 통하여 관직을 독점하고, 중서문하성과 중추원의 재상이 되어 정국을 주도해 나갔다. 이들은 관직에 따라 과전을 받고, 또 자손에게 세습이 허용되는 공음전의 혜택을 받았을 뿐 아니라, 권력을 이용하여 불법적으로 개인이나 국가의 토지를 차지하여 정치 권력과 함께 경제력까지 거의 독점하였다.
한편, 이들은 비슷한 부류끼리 혼인 관계를 맺어 권력을 더욱 단단하게 장악하였다. 특히, 왕실과 혼인 관계를 맺어 외척으로서의 지위를 이용하여 정권을 장악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문벌 귀족의 성장에 따라 사회적 모순과 갈등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과거를 통하여 진출한 지방 출신의 관리 중에서 일부는 왕에게 밀착하여 왕권을 강화하고 보좌하는 측근 세력이 되어 문벌 귀족과 대립하였다.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난은 이들 정치 세력 간의 대립과 갈등이 표면으로 드러난 사건이었다.
이자겸의 난과 서경 천도 운동
11세기 이래 대표적인 문벌 귀족인 경원 이씨 가문은 왕실의 외척이 되어 80여 년 간 정권을 잡았다. 경원 이씨는 이자연의 딸이 문종의 왕비가 되면서 정치 권력을 장악하기 시작하였고, 이자연의 손자인 이자겸도 예종과 인종의 외척이 되어 집권하였다. 특히, 이자겸은 예종의 측근 세력을 몰아 내고 인종이 왕위에 오를 수 있게 하면서 그 세력이 막강해졌다.
이러한 이자겸의 권력 독점에 반대한 왕의 측근 세력은 왕을 중심으로 결집하였다. 이에 이자겸은 반대파를 제거하고 척준경과 함께 난을 일으켜 권력을 장악하였다(1126). 그러나 이자겸이 척준경에 의하여 물러나고 척준경도 탄핵을 받고 축출됨으로써 이자겸 세력은 몰락하였다. 이자겸의 난은 중앙 지배층 사이의 분열을 드러냄으로써 문벌 귀족 사회의 붕괴를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자겸의 난 이후, 인종은 실추된 왕권을 회복하고 민생을 안정시키며 국방력을 강화하기 위한 정치 개혁을 추진하였다. 이 과정에서 김부식을 중심으로 한 보수적 관리들과 묘청, 정지상을 중심으로 한 지방 출신의 개혁적 관리들 사이에 대립이 벌어졌다.
묘청 세력은 풍수지리설을 내세워 서경(평양)으로 도읍을 옮겨, 보수적인 개경의 문벌 귀족 세력을 누르고 왕권을 강화하면서 자주적인 혁신 정치를 시행하려 하였다. 이들은 서경에 대화궁이라는 궁궐을 짓고, 황제를 칭할 것과 금을 정벌하자고 주장하였다.
반면, 김부식이 중심이 된 개경 귀족 세력은 유교 이념에 충실함으로써 사회 질서를 확립하자고 하였다. 묘청 세력은 서경 천도를 통한 정권 장악이 어렵게 되자 서경에서 난을 일으켰으나(1135), 김부식이 이끈 관군의 공격으로 약 1년 만에 진압되고 말았다.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은 문벌 귀족 사회 내부의 분열과 지역 세력 간의 대립, 풍수지리설이 결부된 자주적 전통 사상과 사대적 유교 정치 사상의 충돌, 고구려 계승 이념에 대한 이견과 갈등 등이 얽혀 일어난 것으로, 귀족 사회 내부의 모순을 드러낸 것이었다.
무신 정권의 성립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 이후 문벌 귀족 지배 체제의 모순은 더욱 깊어졌다. 지배층은 이와 같은 상황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한 채 정치적 분열을 거듭하였다. 의종 역시 측근 세력을 키우면서 이들에 의존하고 향락에 빠지는 등 실정을 거듭하였고, 문신 우대와 무신 차별에 따른 무신들의 불만이 커졌다. 여기에 군인전을 제대로 지급받지 못한 하급 군인들의 불만도 높아졌다. 이러한 지배 체제의 모순이 폭발한 것이 무신정변이었다(1170).
정중부, 이의방 등 무신들은 정변을 일으켜 다수의 문신을 죽이고 의종을 폐하여 거제도로 귀양 보낸 후, 명종을 세워 정권을 장악하였다. 무신들은 중방을 중심으로 권력을 행사하면서 주요 관직을 독차지하고 토지와 노비를 늘려 나갔으며, 저마다 사병을 길러 권력 쟁탈전을 벌였다.
최충헌은 정권을 잡자, 무신 정권 초기의 혼란을 극복하기 위하여 봉사 10조와 같은 사회 개혁책을 제시하는 한편, 농민 항쟁의 진압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러나 사회 개혁책은 흐지부지되고, 그는 오히려 많은 토지와 노비를 차지하고 사병을 양성하여 권력 유지에 치중하였다.
최충헌은 최고 집정부의 구실을 하는 교정도감을 설치하여 권력을 행사하였다. 또, 사병 기관인 도방을 설치하여 신변을 경호하였다. 도방은 삼별초와 함께 최씨 정권을 유지하는 군사적 기반이 되었다.
최충헌의 뒤를 이은 최우도 교정도감을 통하여 정치 권력을 행사하였고, 더 나아가 자기 집에 정방을 설치하여 모든 관직에 대한 인사권을 장악하였다. 정국이 안정되면서 최우는 문학적인 소양과 함께 행정 실무 능력을 갖춘 문신들을 등용하여 고문 역할을 담당하게 하였다.
최씨의 집권으로 무신 정권이 정치적으로는 안정되었지만, 국가 통치 질서는 오히려 약화되었다. 최씨 정권은 권력의 유지와 이를 위한 체제의 정비에 집착했을 뿐, 국가의 발전이나 백성의 안정을 위한 노력에는 소홀하였다.
5. 대외 관계의 전개
거란의 침입과 격퇴
10세기 초에 통일 국가를 세운 거란(요)은 송과 대결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 여러 차례 고려를 침략하였다.
처음에는 80만 대군을 이끌고 침략하여, 고려가 차지하고 있는 옛 고구려 땅을 내놓고 송과 교류를 끊을 것을 요구하였다(993). 그러나 외교 담판에 나선 서희가 거란과 교류할 것을 약속하는 대신, 고려가 고구려의 후계자임을 인정받고 압록강 동쪽의 강동 6주를 확보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후에도 거란은 고려와 송의 관계를 구실로 두 차례 더 침략해 왔으나, 고려는 이를 잘 막아 냈다. 특히, 강감찬은 거란이 세 번째 침략해 왔을 때, 살아 돌아간 거란의 군사가 겨우 수천에 이를 정도로 대승을 거두기도 하였다(귀주 대첩, 1019). 고려가 거란의 침략을 계속 막아 내자 거란은 더 이상 고려를 침략할 수 없었고, 송을 침략할 수도 없었다. 그리하여 고려와 송, 거란 사이에는 세력의 균형이 유지될 수 있었다.
전쟁이 끝난 후에 고려는 개경에 나성을 쌓아 도성 수비를 강화하였으며, 북쪽 국경 일대에 천리장성을 쌓아 거란과 여진의 침략에 대비하였다.
여진 정벌과 동북 9성 개척
고려의 동북방에는 한때 말갈이라 불리던 여진족이 부족 단위로 흩어져 반독립적인 생활을 하고 있었다. 고려는 이들을 경제적으로 도와 주면서 회유 정책을 써서 포섭하고 있었다.
그런데 12세기 초 부족의 통일을 이룬 여진족이 고려의 국경까지 남하하면서 고려군과 자주 충돌하였다. 고려는 윤관의 건의를 받아들여 별무반이라는 특수 부대를 편성한 다음, 여진족을 북방으로 밀어 내고 동북 지방 일대에 9개의 성을 쌓았다(1107).
그러나 여진족은 그 후에 더욱 세력을 키워 만주 일대를 장악하고 금을 건국하였으며, 거란을 멸망시킨 뒤 고려에 군신 관계를 요구해 왔다. 조정에서는 논란이 치열하게 일어났으나, 당시 집권자였던 이자겸이 금과 무력 충돌을 피하기 위해 이들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몽골과의 전쟁
13세기 초, 오랫동안 부족 단위로 유목 생활을 하던 몽골족이 통일된 국가를 형성하면서 동북아 정세가 급격히 변하였다. 몽골이 금을 공격하고 북중국을 점령하자, 고려와 몽골의 접촉도 시작되었다. 고려에 대해 무리한 요구를 일삼던 몽골은, 고려를 방문했던 몽골 사신이 귀국길에 피살된 사건을 구실로 대군을 이끌고 침략하였다(1231). 이로부터 고려는 40여 년 동안 몽골과 전쟁을 벌였다.
무신 정권은 수도를 강화도로 옮기고, 주민을 산성과 섬으로 피난시킨 뒤 항전과 외교를 병행하면서 저항하였다. 이 기간에 김윤후가 이끈 민병과 승군이 처인성(경기 용인)에서 몽골 장수 살리타(撒禮塔)의 군대를 물리치는 등 일반 민중의 항쟁이 이어졌다. 특히, 사회적으로 천대받던 노비와 부곡 지역의 주민까지도 몽골에 대항하여 싸웠다.
고려 조정에서 몽골과 강화를 맺자는 주화파가 득세하고, 최씨 정권이 무너지면서 전쟁은 끝났다. 몽골은 고려를 완전 정복하겠다는 처음의 계획을 포기하고, 고려의 주권과 고유한 풍속을 인정하였다. 이것은 고려의 끈질긴 저항이 안겨 준 결과였다.
고려 정부가 개경으로 환도하자, 대몽 항쟁에 앞장섰던 삼별초는 배중손의 지휘 아래 반기를 들었다. 이들은 장기 항전을 계획하고 진도와 제주도로 근거지를 옮기면서 대몽 항쟁을 계속하였다. 장기간에 걸친 이들의 항쟁은 몽골에 굴복하는 것에 반발하는 민중의 지지가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6. 고려 후기의 정치 변동
원의 내정 간섭
몽골과 강화한 이후, 고려는 두 차례 실시된 원의 일본 원정에 군대와 물자의 제공을 강요받았다. 또, 철령 이북에 쌍성총관부, 자비령 이북에 동녕부, 제주도에 탐라총관부라는 원의 통치 기구가 설립되어 넓은 영토를 빼앗기기도 하였다.
고려의 국왕은 원의 공주와 결혼하여 원 황제의 부마가 되었고, 왕실의 호칭과 격이 부마국에 걸맞은 것으로 바뀌었다. 아울러 관제도 개편되고 격도 낮아졌다. 원은 일본 원정을 준비하기 위하여 설치했던 정동행성을 계속 유지하여 내정 간섭 기구로 삼았고, 군사적으로는 만호부를 설치하여 고려의 군사 조직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다루가치라는 감찰관을 파견하여 내정을 간섭하였다.
한편, 원은 공녀라 하여 고려의 처녀들을 뽑아 갔으며, 금, 은, 베를 비롯하여 인삼, 약재 등 특산물을 징발하여 농민의 고통을 가중시켰다. 또, 매를 징발하기 위해서 응방이라는 특수 기관을 설치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원의 내정 간섭으로 고려는 자주성에 심각한 손상을 입었고, 원의 압력과 친원파의 책동으로 인해 정치는 비정상적으로 운영되었다.
공민왕의 개혁 정치와 신진 사대부의 성장
원 간섭기 동안 권문세족이라는 새로운 지배층이 형성되었다. 그들은 왕의 측근 세력과 함께 권력을 잡아, 농장을 확대하고 양민을 억압하여 노비를 삼는 등 사회 모순을 격화시켰다. 이에 대하여 신진 관리들을 중심으로 개혁을 추진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관료의 인사와 농장 문제와 같은 여러 가지 폐단을 시정하기 위한 개혁의 노력은 충선왕 때부터 시도되었으나, 원의 간섭으로 제대로 추진되지 못하였다. 이어 공민왕은 원·명 교체기를 이용하여 개혁을 추진하였다. 공민왕 때의 개혁은 대외적으로 반원 자주를 실현하고, 대내적으로 왕권을 강화하려는 것이었다.
공민왕의 반원 자주 정책은 기철로 대표되던 친원 세력을 숙청하는 데서부터 시작하였다. 이어, 고려의 내정을 간섭하던 정동행성 이문소를 폐지하고, 원의 간섭으로 바뀌었던 관제를 복구하였으며, 몽골 풍속을 금지하였다. 또, 무력으로 쌍성총관부를 공격하여 철령 이북의 땅을 수복하였으며, 더 나아가 고구려의 옛 땅을 되찾기 위하여 요동 지방을 공략하였다.
이러한 공민왕의 반원 자주 정책은 친원파 권세가들의 반발로 중단될 위기에 놓였다. 그러나 공민왕은 대내적으로 왕권을 강화하고 권문세족을 억누르면서 꾸준히 개혁을 추진해 나갔다.
공민왕은 왕권을 제약하고 신진 사대부의 등장을 억제하고 있던 정방을 폐지하였다. 아울러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하고, 승려 신돈을 등용하여 권문세족이 부당하게 빼앗은 토지와 노비를 본래의 소유주에게 돌려주거나 양민으로 해방시켰다. 이를 통하여 권문세족의 경제 기반을 약화시키고 국가 재정 수입의 기반을 확대하였다.
공민왕 때의 개혁은 권문세족의 강력한 반발로 신돈이 제거되고, 개혁 추진의 핵심인 공민왕까지 시해되면서 중단되고 말았다.
한편, 공민왕이 개혁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신진 사대부의 정계 진출이 확대되었다. 이들은 대부분 지방의 향리 자제들로, 무신 집권기 이래 과거를 통하여 중앙 관리로 진출하였다. 이들 중 일부가 측근 세력으로 성장하여 권문세족이 되기도 하였으나, 대부분은 공민왕 때의 개혁 정치에 힘입어 지배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이들은 성리학을 수용하여 학문적 기반으로 삼고, 불교의 폐단을 시정하려 하였다.
신진 사대부는, 자신들의 기반을 침해하면서 농장을 확대하는 권문세족과 충돌하게 되자, 국가의 공적인 힘을 강화하여 그들의 비리와 불법을 견제하고 자신들의 기반을 유지하려 하였다. 그러나 권문세족이 인사권을 쥐고 있어서 관직으로의 진출이 제한되었고, 과전과 녹봉도 제대로 받지 못하였다. 이러한 처지를 해결하기 위해 왕권과 연결하여 고려 후기의 각종 개혁 정치에 적극 참여하였으나, 아직 역부족이었다.
고려의 멸망
공민왕 때의 개혁 노력이 실패하자, 고려 사회의 모순은 더욱 심화되었다. 권문세족은 정치 권력을 독점하고 대토지 소유를 확대해 나가면서, 정치 기강이 문란해지고 백성의 생활이 극도로 어려워졌다.
한편, 북쪽에서 홍건적이 침입해 와 공민왕이 복주(안동)까지 피난하기도 하였고, 남쪽에서는 왜구의 노략질이 계속되어 해안 지방을 황폐하게 하였다. 이에 고려는 적극적으로 남과 북의 외적에 대한 토벌 작전을 수행하였다. 이 과정에서 최영과 이성계는 큰 전과를 올려 국민의 신망을 얻었다.
우왕 때에 이르러 권문세족이 토지 겸병을 확대하자, 최영이 이성계를 위시한 사대부 세력의 뒷받침을 받아 이인임 일파를 축출하였다. 그러나 개혁의 방향을 둘러싸고 갈등을 빚었다. 마침 명이 철령 이북의 땅을 차지하려 하자, 최영은 이성계를 시켜 요동 정벌을 단행하였다. 이성계는 위화도에서 회군하여(1388) 최영을 제거한 뒤, 군사적 실권을 장악하여 본격적인 개혁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이성계를 중심으로 모인 급진 개혁파(혁명파) 사대부 세력은 우왕과 창왕을 잇따라 폐하고 공양왕을 세운 후, 전제 개혁을 단행하여 과전법을 마련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이성계의 급진 개혁파 사대부 세력은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건국하였다(1392).
3. 근세의 정치
1. 근세의 세계
14세기 후반, 중국에서는 명이 건국되어 전통적인 한문화가 회복되었다. 명대에는 강력한 전제 황권이 확립되고 서민 문화가 발전하였다. 명은 15세기 초 대외적으로 팽창하여 인도양과 아프리카 동해안까지 국위를 떨쳤다. 이 때부터 중국인이 동남 아시아 지역에 본격적으로 진출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후 명은 북쪽으로는 몽골족의 침입과 남쪽으로는 왜구의 약탈에 시달리게 되었다. 더구나 16세기 말에는 명의 국력이 더욱 쇠약해졌고, 결국 17세기 중엽에 만주에서 일어난 청에게 중국의 지배권을 넘겨주었다.
서아시아와 남아시아에서는 이슬람 국가들이 여전히 번성하였다. 오스만 제국은 서아시아, 아프리카, 유럽의 3대륙에 걸친 제국으로 발전하였고, 중앙 아시아에서 건국된 티무르 제국과 이란 지방의 사파비 왕조도 한때 번성하였다. 인도에서는 무굴 제국이 세워져 인도 문화와 이슬람 문화가 융합하며 발전하였다. 이슬람 세력은 동남 아시아에도 진출하여 오늘날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 일대에 이슬람 교가 성행하게 되었다.
일본에서는 14세기에 무로마치 막부가 수립되었다가 15세기 중엽에는 전국 시대가 되었다. 16세기 후반에 전국 시대의 혼란을 수습하였으나, 조선 침략에 실패하고 에도에 새 막부가 설치됨으로써 집권적 봉건 제도가 마련되었다. 이 시대에 일본은 평화와 안정을 이루고 크게 발전하였으며, 특히 네덜란드와 교류하면서 서양 문물을 수용하였다.
이 시기에는 서양 세력이 동양으로 진출하여 침략의 거점을 마련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인도와 동남 아시아가 점차 서양 세력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한편, 14세기부터 16세기에 이르는 동안 서양에서는 중세 봉건 사회가 무너지고 새로운 근대 사회와 근대 문화가 싹트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에 일어난 르네상스, 새로운 항로의 개척과 유럽 세계의 확대, 종교 개혁 등은 바로 근대의 시작을 알리는 큰 움직임이었다.
르네상스는 14, 15세기에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전개되어 16세기에는 유럽 각지에 널리 퍼졌다. 이것은 그리스·로마의 고전 문화의 부흥을 통하여 지성과 감성이 조화된 인간성을 추구하려는 인문주의 운동으로부터 시작하였다. 특히, 문학과 예술 분야가 두드러지게 발전하였고, 근데 과학이 태동하였다. 이것은 인간 중심적이며 현세적인 근대 문화의 창조 운동이기도 하였다.
포르투갈과 에스파냐를 중심으로 시작된 새로운 항로의 개척은 유럽 세계를 확대시켰다. 그 결과, 유럽 무역의 중심이 지중해에서 대서양으로 이동하였다. 유럽 각국은 무역과 함께 식민지 개척에 나섰다. 포르투갈은 주로 동양 무역을 독점하였고, 에스파냐는 주로 아메리카 대륙으로 진출하여 광대한 식민지를 개척하였다. 뒤이어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 등도 앞다투어 해외로 진출하여 유럽 세력은 전세계로 팽창하였다.
무역과 식민 활동의 결과, 유럽의 경제가 비약적으로 발전하여 상업 혁명이 일어나고, 자본주의가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따라 각국의 절대 왕정들은 중상주의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16세기에 독일에서 시작된 종교 개혁은 루터파, 칼뱅파, 영국 국교회 등의 프로테스탄트 교회를 성립시켰다. 이에, 중세 크리스트 교 세계의 통일이 무너졌다. 종교 개혁 운동은 사회 개혁 운동이나 민족 운동 등과 연결되어 전개되었으므로 그 영향이 매우 컸다.
한편, 신교의 성립에 자극을 받은 가톨릭 교회의 개혁 운동으로 예수회가 창설되었다. 예수회 선교사들은 동양과 아메리카 대륙에서 활동하며 로마 가톨릭을 널리 전파하였다.
2. 근세 사회의 성립
조선의 건국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으로 군사적 실권을 장악하고 본격적인 개혁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그러나 신진 사대부 사이에는 개혁의 방향을 둘러싸고 다른 의견이 존재하였다. 이색, 정몽주 등 대다수의 온건 개혁파는 고려 왕조의 틀 안에서 점진적인 개혁을 추진하려 하였다. 반면, 정도전 등 급진 개혁파는 고려 왕조를 부정하는 역성 혁명을 주장하였다.
급진 개혁파는 창왕을 몰아 내고 공양왕을 세우면서 정치적 실권을 잡았다. 이들은 역성 혁명을 반대하던 정몽주를 비롯한 온건 개혁파를 제거하였다. 이로써 이성계는 공양왕의 왕위를 물려받아 조선을 건국하였다(1392).
태조는 교통과 국방의 중심지인 한양으로 도읍을 옮긴 후, 도성을 쌓고 경복궁을 비롯한 궁궐, 종묘, 사직, 관아, 학교, 시장, 도로 등을 건설하여 도읍의 기틀을 다졌다.
초창기의 문물 제도를 갖추는 데 크게 공헌한 사람은 정도전이었다. 그는 민본적 통치 규범을 마련하고, 재상 중심의 정치를 주장하였다. 또, 불씨잡변을 통하여 불교를 비판하였으며, 성리학을 통치 이념으로 확립시켰다.
두 차례에 걸친 왕자의 난을 통하여 개국 공신 세력을 몰아 내고 왕위에 오른 태종은 왕권을 강화하고 국왕 중심의 통치 체제를 정비하고자 하였다. 태종은 6조 직계제를 채택하였으며, 언론 기관인 사간원을 독립시켜 대신들을 견제하였다. 또, 양전 사업과 호구 파악에 노력을 기울였으며, 호패법을 실시하였고, 사원의 토지를 몰수하고, 억울한 노비를 조사하여 해방시켰다. 아울러 사병을 없애 왕이 군사 지휘권을 장악하면서 친위 군사를 늘렸다.
유교 정치의 실현과 문물 제도의 정비
세종은 안정된 왕권과 경제력을 바탕으로 유교 정치를 실현하였다. 먼저, 궁중 안에 정책 연구 기관으로 집현전을 두고 집현전 학사를 일반 관리보다 우대하였다. 뒤이어 의정부에서 정책을 심의하는 의정부 서사제로 정치 체제를 바꿔 왕의 권한을 의정부에 많이 넘겨주고, 훌륭한 재상들을 등용하여 정치를 맡기고자 하였다. 그러면서도 인사와 군사에 관한 일은 세종이 직접 처리함으로써 왕권과 신권의 조화를 이루었다. 아울러 국가의 행사를 오례에 따라 유교식으로 거행하였으며, 사대부에게도 주자가례의 시행을 장려하여 유교 윤리가 사회 윤리로 자리잡게 하였다.
세종은 왕도 정치를 내세워 유교적 민본 사상을 실현하려 하였다. 유능한 인재를 널리 발굴하였으며, 청백리 재상을 등용하여 깨끗한 정치를 실현하려 하였다.
세종 이후 문종이 일찍 죽고 어린 단종이 즉위하면서 왕권이 크게 약화되었다. 곧, 김종서, 황보인 등 재상에게 정치의 실권이 넘어가자, 수양 대군은 정변을 일으켜 왕위에 올랐다. 세조는 강력한 왕권을 행사하기 위하여 통치 체제를 다시 6조 직계제로 고쳤으며, 자신의 활동을 견제하는 집현전을 없앴다. 그리고 경연도 열지 않았으며, 태종 이후 정치 참여를 제한하였던 종친들을 등용하기도 하였다.
성종은 건국 이후의 문물 제도의 정비를 완비하였으며, 경국대전의 편찬을 마무리하여 반포함으로써 이후 조선 사회의 기본 통치 방향과 이념을 제시하였다. 이로써 조선 왕조의 통치 체제가 확립되었다. 이어 홍문관을 두어 관원 모두에게 경연관을 겸하게 함으로써 집현전을 계승하였으며, 정승을 비롯한 주요 관리도 다수 경연에 참여할 수 있게 하였다. 이로써 경연이 단순한 왕의 학문 연마를 위한 자리가 아니라, 왕과 신하가 함께 모여 정책을 토론하고 심의하는 중요한 자리가 되었다.
3. 통치 체제의 정비
중앙 정치 체제와 지방 행정 조직
조선의 중앙 정치 체제는 경국대전으로 법제화되었다. 관리는 문반과 무반의 양반으로 구성되었고, 30등급(18품 30계)으로 나뉘었다. 조선 시대의 관직은 중앙 관직인 경관직과 지방 관직인 외관직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경관직은 국정을 총괄하는 의정부와 그 아래에 왕의 명령을 집행하는 행정 기관인 6조를 중심으로 편성되었다.
6조 아래에는 여러 관청이 소속되어 업무를 나누어 맡음으로써 행정의 전문성과 효율성을 높일 수 있었다. 한편, 의정부와 6조의 고관이 중요 정책 회의에 참여하거나 경연에서 정책을 협의함으로써 각 관서 사이의 업무를 조정하고 통일적인 정책을 추진할 수 있었다.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의 3사는 관리의 비리를 감찰하고, 정사를 비판하며, 문필 활동을 하면서 언론 기능을 담당하였다. 3사의 언론은 고관은 물론이고 왕이라도 함부로 막을 수 없었고, 이를 위한 여러 규정이 관행으로 받아들여졌다. 이와 같은 3사의 기능 강화는 권력의 독점과 부정을 방지하기 위한 것으로, 조선 시대 정치의 특징적인 모습이다.
이 밖에, 국가의 큰 죄인을 다스리는 의금부, 왕명을 출납하는 승정원, 서울의 행정과 치안을 담당하는 한성부, 역사서 편찬과 보관을 담당하는 춘추관, 최고 교육 기관인 성균관 등이 있었다.
조선은 전국을 8도로 나누고, 고을의 크기에 따라 지방관의 등급을 조정하고, 작은 군현을 통합하여 전국에 약 330여 개의 군현을 두었다. 고려 시대까지 특수 행정 구역이었던 향, 부곡, 소도 일반 군현으로 승격시키거나 포함시켰다.
나아가, 전국의 주민을 국가가 직접 지배하기 위하여 모든 군현에 수령을 파견하였다. 수령은 왕의 대리인으로, 지방의 행정·사법·군사권을 가지고 있었다. 이렇게 수령의 권한을 강화한 반면, 향리는 수령의 행정 실무를 보좌하는 세습적인 아전으로 격하시켰다.
한편, 수령을 지휘, 감독하고 백성의 생활을 살피기 위하여 전국 8도에 관찰사를 파견하였고, 수시로 암행어사를 지방에 보내기도 하였다.
군역 제도와 군사 조직
조선은 건국 초부터 군역 제도를 정비하고 군사 조직을 강화하였다. 태종 이후 사병을 모두 폐지하고, 16세 이상 60세 이하의 모든 양인 남자는 군역을 지게 하였다. 이로써 모든 양인은 현역 군인인 정군과 정군의 비용을 부담하는 보인(봉족)으로 편성되었다. 다만, 현직 관료와 학생, 향리 등은 군역을 면제받았으나, 종친과 외척, 공신이나 고급 관료의 자제는 고급 특수군에 편입되어 군역을 대신하였다.
정군은 서울에서 근무하거나 국경 요충지에 배속되었다. 이들은 일정 기간 교대로 복무하였으며, 복무 기간에 따라 품계를 받기도 하였다.
군사 조직은 중앙군과 지방군으로 나뉘었다. 중앙군은 궁궐과 서울을 수비하는 5위로 구성되고, 그 지휘 책임은 문반 관료가 맡았다. 중앙군은 정군을 중심으로 갑사나 특수병으로 구성되었다.
지방군은 육군과 수군으로 나뉘는데, 건국 초기에는 국방상의 요지인 영이나 진에 소속되어 복무하였다. 그러나 세조 이후에는 진관 체제를 실시하여 요충지의 고을에 성을 쌓아 방어 체제를 강화하였다. 연해 각 도에는 수군을 설치하였다. 수군은 육군에 비하여 힘들고 위험하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수군에 들어가는 것을 매우 꺼렸다. 조선 초기에는 정규군 외에 일종의 예비군인 잡색군이 있었다.
한편, 군사 조직과 아울러 교통과 통신 체계도 정비되었다. 군사적인 위급 사태를 알리기 위한 봉수제가 정비되고, 물자 수송과 통신을 위한 역참이 설치되어 국방과 중앙 집권적 행정 운영이 한층 쉬워졌다.
관리 등용 제도
조선 시대의 관리는 주로 과거와 음서, 천거를 통하여 선발되었다. 과거에는 문관을 뽑는 문과와 무관을 뽑는 무과, 기술관을 뽑는 잡과가 있었다. 문과는, 3년마다 실시하는 정기 시험인 식년시와 부정기 시험인 증광시, 알성시 등이 있었다. 문과는 식년시의 경우에는 초시에서 각 도의 인구 비례로 뽑고, 2차 시험인 복시에서 33명을 선발한 다음, 왕 앞에서 실시하는 전시에서 순위를 결정하였다.
문과에 응시하기 위해서는 소과에 합격하여 생원이나 진사가 되어야 했으나, 후에는 큰 제한이 없었다. 소과 합격자는 성균관에 입학하거나 문과에 응시할 수 있었으며, 하급 관리가 되기도 하였다.
무과도 문과와 같은 절차를 거쳐 치러지는데, 최종 선발 인원은 28명이었다. 기술관을 뽑는 잡과도 3년마다 치러지는데, 분야별로 정원이 있었다.
또, 과거를 거치지 않더라도 고관의 추천을 받아 간단한 시험을 치른 후 관직에 등용되거나 음서를 통하여 벼슬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천거는 대개 기존의 관리를 대상으로 하였고, 벼슬하지 않은 사람이 천거되는 경우는 드물었다. 음서의 혜택을 받는 대상도 고려 시대에 비하여 크게 줄어들었고, 음서 출신은 문과에 합격하지 않으면 고관으로 승진하기도 어려웠다.
인사 관리 제도도 관직 제도의 정비와 지배층의 증가에 따라 새롭게 정비되었다. 권력의 집중과 부정을 막기 위하여 상피제를 마련하였고, 인사의 공정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5품 이하 관리의 등용에는 서경을 거치도록 하였다. 아울러 고관이 하급 관리의 근무 성적을 평가하여 승진 또는 좌천의 자료로 삼았다. 이로써 조선은 합리적인 인사 행정을 위한 제도가 갖추어져 관료적 성격이 더욱 강해졌다.
4. 사림의 대두와 붕당 정치
사림의 정치적 성장
15세기 중반 이후, 중소 지주적인 배경을 가지고 성리학에 투철한 지방 사족이 영남과 기호 지방을 중심으로 성장하였다. 이들을 사림이라 부른다. 이들은 훈구 세력이 중앙 집권 체제를 강조한 데 비해, 향촌 자치를 내세우며 도덕과 의리를 바탕으로 하는 왕도 정치를 강조하였다.
향촌 사회에서 사회적, 경제적 지위를 굳히던 사림은 중앙 정계에 진출하여 권력에 참여함으로써 훈구 세력을 견제하였다. 김종직과 그 문인이 성종 때에 중앙에 진출하면서 사림은 정치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하였다.
과거를 통하여 중앙에 진출한 사림 세력은 주로 전랑과 3사의 언관직을 차지하고 훈구 세력의 비리를 비판함으로써 그들의 일방적인 독주를 견제하였다. 성종이 훈구 세력을 견제하기 위하여 사림 세력을 중용하였기 때문에, 훈구 세력과 사림 세력이 균형을 이룰 수 있었다.
성종을 이어 즉위한 연산군은 훈구 대신과 사림을 모두 누르고 왕권을 강화하였다. 특히, 사림 세력의 분방한 언론 활동을 억제하였다. 이에 따라, 두 차례에 걸친 사화(무오사화, 갑자사화)를 겪으면서 영남 사림의 대부분이 몰락하였다.
연산군은 이후 언론을 극도로 탄압하고 재정을 낭비하는 등 폭압적인 정치를 단행하다가 결국 중종반정으로 쫓겨났다(1506).
중종은 사림을 다시 등용하여 유교 정치를 일으키려 하였다. 당시 명망이 높았던 조광조가 중용되면서 천거제의 일종인 현량과를 통하여 사림이 대거 등용되었다. 이들은 3사의 언관직을 차지하고 자신들의 의견을 공론이라 표방하면서 급진적 개혁을 추진해 나가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에 대한 공신들의 반발로 말미암아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 세력은 대부분 제거되었다(기묘사화).
그 뒤 중종이 훈구 대신들을 견제하기 위하여 다시 사림을 등용하기도 하였으나, 명종이 즉위하면서 외척끼리의 권력다툼에 휩쓸려 사림 세력은 또다시 정계에서 밀려났다(을사사화). 그러나 사림 세력은 서원과 향약을 통하여 향촌 사회에서 꾸준히 세력을 확대해 나갔다.
붕당의 출현
선조가 즉위하면서 그 동안 향촌에서 세력 기반을 다져 오던 사림 세력이 대거 중앙 정계로 진출하여 정국을 주도하게 되었다.
그러나 사림 세력은 척신 정치의 잔재를 어떻게 청산할 것인가를 둘러싸고 갈등을 겪게 되었다. 명종 때 이후 정권에 참여해 온 기성 사림은 척신 정치의 과감한 개혁에 소극적이었다. 반면에, 명종 때의 정권에 참여하지 않았다가 새롭게 정계에 등장한 신진 사림은 원칙에 더욱 철저하여 사림 정치의 실현을 강력하게 내세웠다.
두 세력의 갈등이 심해지면서 기성 사림을 중심으로 서인이 형성되고, 신진 사림을 중심으로 동인이 형성되었다. 동인은 이황과 조식, 서경덕의 학문을 계승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다수의 신진 세력이 참여하여 먼저 붕당의 형세를 이루었다. 반면에, 서인은 이이와 성혼의 문인이 가담함으로써 비로소 붕당의 모습을 갖추었다.
이후 붕당은 정치적 이념과 학문적 경향에 따라 결집되어 정파적 성격과 학파적 성격을 동시에 가지게 되었다.
5. 조선 초기의 대외 관계
명과 관계
조선은 사대 교린의 외교 정책을 일관되게 추진하였다. 명과는 태조 때 정도전이 중심이 되어 추진한 요동 정벌의 준비와 여진과의 관계를 둘러싸고 불편한 관계가 유지된 적도 있었지만, 태종 이후 양국 간의 관계가 좋아지면서 교류가 활발하였다.
조선은 명에 대해서 기본적으로 사대 정책을 유지하였으나, 명의 구체적인 내정 간섭은 없었다. 매년 정기적, 부정기적으로 사절을 교환하였고, 그 때 문화적, 경제적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명에 대한 이와 같은 사대 외교는 왕권의 안정과 국제적 지위를 확보하려는 자주적인 실리 외교였고, 선진 문물을 흡수하려는 문화 외교인 동시에 일종의 공무역이었다.
여진과 관계
조선은 영토의 확보와 국경 지방의 안정을 위하여 여진에 대하여 적극적인 외교 정책을 펴 나갔다. 우선 태조에 의하여 일찍부터 두만강 지역이 개척되었다. 이어 세종 때에는 4군과 6진을 설치하여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하는, 오늘날과 같은 국경선을 확정하였다.
이후 여진에 대하여 조선은 회유와 토벌의 양면 정책을 취하였다. 조선은 여진족의 귀순을 장려하기 위하여 관직을 주거나 정착을 위한 토지와 주택을 주어 우리 주민으로 동화시켰다. 또, 사절의 왕래를 통한 무역을 허용하였고, 국경 지방인 경성과 경원에 무역소를 두고 국경 무역을 허락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교린 정책에도 불구하고 여진족은 자주 국경을 침입하여 약탈을 자행하였고, 이 때마다 조선에서는 군대를 동원하여 이들을 정벌하였다.
이와 함께 조선은 삼남 지방의 일부 주민을 대거 북방으로 이주시켜 압록강과 두만강 이남 지역을 개발하는 사민 정책을 실시하였고, 토착민을 토관으로 임명하여 민심을 수습하려 하였다.
일본 및 동남 아시아와 관계
조선은 일본이나 동남 아시아 여러 나라와의 교류에는 교린 정책을 원칙으로 하였다. 고려 말부터 조선 초기까지 계속된 왜구의 침략으로 폐해가 심해지자 조선은 수군을 강화하고, 성능이 뛰어난 전함을 대량으로 건조하였다. 특히, 화약 무기를 개발하여 선박에 장착하는 등 왜구의 격퇴에 노력하였다.
이에 따라 침략과 약탈이 어려워진 왜구들이 평화적인 무역 관계를 요구해 오자, 조선은 일부 항구를 개방하여 제한된 무역을 허용하였다. 그러나 이후에도 왜구의 약탈이 계속되자, 이를 강력히 응징하기 위하여 왜구의 소굴인 쓰시마 섬을 토벌하였다. 아울러 왜구의 요구를 받아들여 남해안의 부산포, 제포(진해), 염포(울산) 등 3포를 개방하여 무역을 허용하고, 제한된 범위 내에서 교역을 허락하였다.
또, 조선 초에는 류큐, 시암, 자와(자바) 등 동남 아시아의 여러 나라와도 교류하였다. 이들 나라는 조공 또는 진상의 형식으로 기호품을 중심으로 한 각종 토산품을 가져와서 옷, 옷감, 문방구 등을 회사품으로 가져갔다. 특히, 류큐와의 교역이 활발하였는데, 불경, 유교 경전, 범종, 부채 등을 전해 주어 류큐의 문화 발전에 기여하기도 하였다.
6. 양 난의 극복
왜군의 침략
15세기에 비교적 안정되었던 일본과의 관계는 16세기에 이르러 대립이 격화되었다. 일본인의 무역 요구가 늘어난 데 대해 조선 정부의 통제가 강화되자, 중종 때의 3포 왜란(1510)이나 명종 때의 을묘왜변(1555) 같은 소란이 자주 일어났다. 이에, 조선은 비변사를 설치하여 군사 문제를 전담하게 하는 등 대책을 강구하였고, 일본에 사신을 보내 정세를 살펴보기도 하였다.
일본은 전국 시대의 혼란을 수습한 뒤 철저한 준비 끝에 20만 대군으로 조선을 침략해 왔다(1592). 이를 임진왜란이라 한다. 전쟁에 미처 대비하지 못한 조선은 전쟁 초기에 왜군을 효과적으로 막아 낼 수 없게 되자, 선조는 의주로 피난하여 명에 원군을 요청하였다.
수군과 의병의 승리
왜군은 육군이 북상함에 따라 수군이 남해와 황해를 돌아 물자를 조달하면서 육군과 합세하려 하였다. 그러나 전라도 지역에서 이순신이 이끈 수군은 옥포에서 첫 승리를 거둔 이후 남해안 여러 곳에서 연승을 거두어 남해의 제해권을 장악하였다. 이로써 곡창 지대인 전라도 지방을 지키고, 왜군의 침략 작전을 좌절시킬 수 있었다.
한편, 육지에서는 자발적으로 조직된 의병이 향토 지리에 밝은 이점을 활용하면서 그에 알맞은 전술을 구사하여 적은 병력으로도 왜군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전란이 장기화되면서 산발적으로 일어난 의병 부대는 관군에 편입되어 조직화되었고, 관군의 전투 능력도 한층 강화되었다.
전란의 극복과 영향
수군과 의병의 승전으로 조선은 전쟁 초기의 수세에서 벗어나 반격을 시작하였다. 아울러 명의 원군이 전쟁에 참여하면서 전쟁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조·명 연합군은 평양성을 탈환하였으며, 관군과 백성이 합심하여 행주산성 등에서 적의 대규모 공격을 물리쳤다.
이후 명과 경상도 해안으로 밀려난 왜군 사이에 휴전 협상이 이루어졌으며, 조선도 전열을 정비하여 해군의 완전 축출을 준비하였다. 훈련도감을 설치하여 군대의 편제와 훈련 방법을 바꾸었고, 속오법을 실시하여 지방군 편제도 개편하였으며, 화포를 개량하고 조총도 제작하여 무기의 약점을 보완하였다.
3년여에 걸친 명과 일본 사이의 휴전 회담이 결렬되자, 왜군이 다시 침입해 왔다(1597). 이를 정유재란이라 한다. 그러나 조·명 연합군이 왜군을 직산에서 격퇴하고 이순신이 적선을 명량에서 대파하자, 왜군은 남해안 일대로 다시 후퇴하였다. 전세가 불리해진 왜군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본국으로 철수하였다.
임진왜란은 국내외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국내적으로는 왜군에 의해 수많은 인명이 살상되었을 뿐만 아니라, 기근과 질병으로 인구가 크게 줄어들었다. 토지 대장과 호적의 대부분이 없어져 국가 재정이 궁핍해지고, 식량도 부족해졌다. 또, 왜군의 약탈과 방화로 불국사, 서적, 실록 등 수많은 문화재가 손실되었고, 수만 명이 일본에 포로로 잡혀갔다.
일본은 조선에서 활자, 그림, 서적 등을 약탈해 갔고, 성리학자와 우수한 인쇄공 및 도자기 기술자 등을 포로로 잡아가 일본의 성리학과 도자기 문화가 발달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였다. 한편, 조선과 명이 일본과 싸우는 동안 북방의 여진족이 급속히 성장하여 동아시아의 정세가 크게 변화하였다.
광해군의 중립 외교
임진왜란을 겪는 동안에 조선과 명의 힘이 약화된 틈을 타서 압록강 북쪽에 살던 여진족이 후금을 건국하였다(1616). 계속하여 서쪽으로 세력을 확장하던 후금은 명에 대하여 전쟁을 포고하였다. 이에 명은 후금을 공격하는 한편, 조선에 원군을 요청하였다.
광해군은 대내적으로 전쟁의 뒷수습을 위한 정책을 실시하면서 대외적으로는 명과 후금 사이에서 신중한 중립 외교 정책으로 대처하였다. 임진왜란 때 명의 도움을 받은 조선은 명의 후금 공격 요구를 거절할 수 없었고, 새롭게 성장하는 후금과 적대 관계를 맺을 수도 없었다.
이에 광해군은 강홍립을 도원수로 삼아 1만 3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명을 지원하게 하되, 적극적으로 나서지 말고 상황에 따라 대처하도록 명령하였다. 결국 조·명 연합군은 후금군에게 패하였고, 강홍립 등은 후금에 항복하였다. 이후에도 명의 원군 요청은 계속되었지만, 광해군은 이를 적절히 거절하면서 후금과 친선을 꾀하는 중립적인 정책을 취하였다.
호란과 북벌 운동
인조반정을 주도한 서인은 광해군의 중립 외교 정책을 비판하고, 친명 배금 정책을 추진하여 후금을 자극하였다.
후금은 광해군을 위하여 보복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쳐들어왔다(1627). 이를 정묘호란이라 한다. 정봉수와 이립 등은 의병을 일으켜 관군과 합세하여 적을 맞아 싸웠다. 특히, 정봉수는 철산의 용골산성에서 큰 전과를 거두었다. 후금의 군대는 보급로가 끊어지자 강화를 제의하여 화의가 이루어졌다.
그 후, 후금은 세력을 더욱 확장하여 국호를 청이라 고치고, 군신 관계를 맺자며 다시 대군을 이끌고 침입해 왔다(1636). 이를 병자호란이라 한다.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난하여 청군에 대항했으나, 결국 청에 굴복하고 말았다.
그 동안 조선에 조공을 바쳐 왔고, 조선에서도 오랑캐로 여겨 왔던 여진족이 세운 나라에 거꾸로 군신 관계를 맺게 되고, 임금이 굴욕적인 항복을 했다는 사실은 조선인에게 커다란 충격이었다. 이후 오랑캐에 당한 수치를 씻고, 임진왜란 때 도와 준 명에 대한 의리를 지켜 청에 복수하자는 북벌 운동이 전개되었다.
4. 근대 태동기의 정치
1. 근대의 세계
16세기 이후 유럽에서는 근대적인 발전이 이루어졌다. 즉, 절대 왕정, 시민 혁명, 산업 혁명을 거치면서 근대 유럽 세계가 확립되었다.
지방 분권적인 봉건 체제가 무너지면서 국왕 중심의 중앙 집권 체제를 추구하는 절대 왕정 국가가 성립하였다. 절대 왕정은 관료제와 상비군을 정비하였고, 이를 위하여 중상주의 정책을 추진하고 식민지 획득에 힘썼다.
절대 왕정에 뒤이은 시민 혁명과 산업 혁명은 근대 사회의 형성에 크게 기여하였다. 시민 혁명은 17세기 영국의 청교도 혁명과 명예 혁명에서 시작하여 미국 독립 혁명, 프랑스 혁명으로 이어졌다. 이 운동은 경제적으로 성장한 근대 시민 계급이 중심이 되어 절대 왕정을 무너뜨리고 국가 권력을 봉건 세력으로부터 시민에게 넘긴 일련의 정치 변혁으로서, 자유주의 및 민주주의를 발전시키려는 것이었다.
산업 혁명은 18세기에 자본, 노동력, 자원, 해외 시장을 갖춘 영국에서 시작하여 19세기에는 유럽 전역으로 확대되어 자본주의 사회를 확립시켰다.
한편,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자연 과학이 발달하였다. 계속적인 발명과 기술의 혁신으로 생산력이 비약적으로 증대하였고, 지속적인 경제 성장이 가능해졌다. 또, 개인주의와 합리주의를 바탕으로 세속적인 인간 중심의 문화가 다양하게 발전하였다.
서양의 근대화는 상대적으로 동양 사회에 위협을 주었다. 산업 혁명이 확산되면서 자본주의가 발달하자, 국력을 증강시킨 서양의 열강은 후진 지역으로의 진출을 꾀하였다. 이에 비하여, 그 동안 번영을 자랑하던 청을 비롯한 아시아의 전통 왕조들은 내부적인 취약성으로 인하여 점차 쇠약해져 새로운 상황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하였다.
서양 열강의 아시아 침략은 전에 볼 수 없었던 위협으로서, 아시아 대부분의 지역을 식민지 또는 반식민지로 만들어 원료의 공급지와 상품 시장을 확보하려는 것이었다. 이러한 열강의 도전에 직면하여 아시아 여러 나라는 각기 나라를 지키기 위한 민족 운동과 함께 개혁을 통하여 자강을 달성하려는 개화 운동을 추진하였다. 중국에서 일어난 태평천국 운동과 양무 운동, 일본의 메이지 유신, 인도의 세포이 항쟁과 스와라지 운동 등은 그러한 움직임이었다.
아시아 여러 나라는 각기 나라를 지키기 위한 민족 운동을 줄기차게 전개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강력한 무력을 앞세운 서양 열강에 마침내 복속되어 대부분 식민지로 전락하였다. 다만, 일본만은 서양 열강과 타협하여 적극적인 근대화 정책을 추진한 결과, 제국주의 열강의 대열에 끼이게 되었다.
아시아 여러 나라는 식민지로 전락하면서도 근대적 제도의 도입과 산업화를 추진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진정한 근대화의 길이 아니라 식민지 체제로의 편입 과정이었기 때문에, 동양의 근대화는 여러 면에서 문제점을 지니고 있었다.
2. 통치 체제의 변화
정치 구조의 변화
붕당 정치가 전개되면서 정치 구조면에서 비변사의 기능이 강화되고, 3사의 기능이 바뀌는 등 여러 변화가 나타났다. 비변사는 16세기 중종 초에 여진족과 왜구에 대비하기 위해 임시 회의 기구로 설치되었다.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구성원이 3정승을 비롯한 고위 관원으로 확대되었고, 그 기능도 군사 문제뿐 아니라 외교, 재정, 사회, 인사 문제 등 거의 모든 정무를 총괄하였다. 이와 같이 비변사의 기능이 강화되자, 의정부와 6조 중심의 행정 체제는 유명무실해졌다.
한편, 3사의 언론 기능도 변질되어 3사는 각 붕당의 이해 관계를 대변하기도 하였다. 3사는 공론을 반영하기보다는 상대 세력에 대한 비판을 통하여 자기 세력의 유지와 상대 세력의 견제에 앞장서고 있었다. 아울러 이조와 영조의 전랑들도 중하급 관원들에 대한 인사권과 자기 후임자를 스스로 추천할 수 있는 권한을 행사하면서 자기 세력을 확대하고 상대 세력을 몰아 내는 데 앞장섰다.
군사 제도의 변화
5위를 중심으로 운영되던 조선 초기의 중앙군은 16세기 이후 군역의 대립제가 일반화되면서 제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였다. 임진왜란 초기에 어이없는 패전을 경험한 조정에서는 새로운 군대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왜군을 물리치는 데 효과적인 편제와 군사 훈련 방식을 모색하였다. 그 결과, 훈련도감이 설치되었다. 훈련도감의 군병은 삼수병으로 편성되었는데, 이들은 장기간 근무를 하고 일정한 급료를 받는 상비군으로서, 의무병이 아닌 직업 군인의 성격을 가진 군인이었다.
훈련도감에 이어 대외 관계와 국내 정세의 변화에 따라 군영이 더 설치되었다. 후금과의 항쟁 과정에서 국방력 강화를 명분으로 어영청, 총융청, 수어청 등이 설치되었고, 숙종 때에 금위영이 추가로 설치되어 17세기 말에는 5군영 체제가 갖추어졌다.
지방군의 방어 체제도 변화하였다. 조선 초기에 실시되던 진관 체제는 많은 외적의 침입에는 효과가 없었다. 이에 16세기 후반에 이르러 제승방략 체제가 수립되었다. 그러나 이것도 임진왜란 중에 큰 효과를 거두지 못하자, 다시 진관을 복구하고 속오법에 따라 군대를 편제하는 속오군 체제로 정비하였다.
속오군은 위로는 양반에서부터 아래로는 노비에 이르기까지 편제되어, 평상시에는 생업에 종사하면서 향촌 사회를 지키다가 적이 침입해 오면 전투에 동원되었다. 그러나 양반이 노비와 함께 속오군에 편제되는 것을 회피함에 따라 상민과 노비들만 남게 되었다.
3. 붕당 정치의 전개와 탕평 정치
붕당 정치의 전개
사림이 동인과 서인으로 나뉜 후, 처음에는 동인이 우세한 가운데 정국이 운영되었다. 동인은 정여립 모반 사건 등을 계기로 온건파인 남인과 급진파인 북인으로 나뉘었다. 처음에는 남인이 정국을 주도하였으나, 임진왜란이 끝난 뒤 북인이 집권하여 광해군 때까지 정국을 주도하였다.
북인은 서인과 남인 등을 배제한 채 정권을 독점하려 하였고, 결국 서인이 주도한 인조반정에 의해 몰락하였다(1623). 서인은 남인 일부와 연합하여 정국을 운영해 나갔다. 서인과 남인은 모두 학파적 결속을 확고히 한 정파들이었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서로의 학문적 입장을 인정하는 토대 위에서 상호 비판적인 공존 체제를 이루어 나갔다.
이후 현종 때까지는 서인이 우세한 가운데 남인과 연합하여 공존하는 구도가 유지된 채 붕당 정치가 전개되었다. 그러나 현종 때에 효종의 왕위 계승에 대한 정통성과 관련하여 두 차례의 예송이 발생하면서 서인과 남인 사이에 대립이 격화되었다.
붕당 정치의 변질과 탕평론의 대두
숙종 때에 이르러 정국을 주도하는 붕당과 견제하는 붕당이 서로 교체됨으로써 정국이 급격하게 전환하는 환국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로써 특정 붕당이 정권을 독점하는 일당 전제화의 추세가 대두되었다. 처음에는 서인과 남인이 격렬하게 대립하였으며, 나중에는 서인에서 갈라져 나온 노론과 소론이 치열하게 경쟁하였다.
이러한 환국을 왕이 직접 나서서 주도함에 따라, 외척이나 종실 등 왕과 직결된 집단의 정치적 비중이 커졌다. 정치 권력은 점차 고위 관원에게 집중되었으며, 언론 기관이나 재야 사족의 정치 참여가 점차 어려워짐에 따라 붕당 정치의 기반도 무너졌다.
붕당 정치가 변질되면서 정치 집단 간의 세력 균형이 무너지고, 왕권 자체도 불안해졌다. 이에 강력한 왕권을 토대로 국왕이 정치의 중심에 서서 세력의 균형을 유지하려는 탕평론이 제기되었다.
숙종은 인사 관리를 통하여 세력 균형을 유지하려는 탕평론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상황에 따라 한 당파를 일거에 내몰고 상대 당파에게 정권을 모두 위임하는 편당적인 인사 관리로 일관하여 환국이 일어나는 빌미를 제공하기도 하였다.
영조와 정조의 탕평 정치
탕평 정치는 영조 때 자리잡았다. 영조는 왕과 신하 사이의 의를 바로 세워야 한다며, 붕당을 없애자는 논리에 동의하는 탕평파를 중심으로 정국을 운영하였다. 그리고 붕당의 뿌리를 제거하기 위하여 공론의 주재자로서 인식되던 산림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고, 그들의 본거지인 서원을 대폭 정리하였다. 아울러 이조 전랑의 권한을 약화시키기 위하여 그들이 자신의 후임자를 천거하고, 3사의 관리를 선발할 수 있게 해 주던 관행을 없앴다. 그러나 이조 전랑의 후임자 천거권은 이후 정조대에 가서야 완전히 폐지되었다.
영조가 탕평 정치를 실시하면서 왕은 정국의 운영이나 이념적 지도력을 비롯하여 거의 모든 부문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고, 붕당의 정치적 의미는 차츰 엷어졌다.
정국이 안정되자, 영조는 민생 안정과 산업 진흥을 위한 개혁을 추진하였다. 군역의 부담을 줄여주기 위하여 균역법을 시행하였고(1750), 가혹한 형벌을 폐지하고 사형수에 대한 삼심제를 엄격하게 시행하였다. 속대전을 편찬하여 법전 체제도 정리하였다.
그러나 영조의 탕평책은 붕당 정치의 폐단을 근본적으로 해결한 것은 아니었다. 강력한 왕권으로 붕당 사이의 치열한 다툼을 일시적으로 억누른 것에 불과하였다.
정조는 각 붕당의 주장이 옳은지 그른지를 명백히 가리는 적극적인 탕평책을 추진하여 영조 때에 세력을 키워 온 척신과 환관 등을 제거하였다. 그리고 그 동안 권력에서 배제되었던 소론과 남인 계열도 중용하였다. 붕당의 비대화를 막고 자신의 권력과 정책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신진 인물이나 중·하급 관리 중에서 유능한 인사를 재교육하는 초계문신 제도를 실시하고, 규장각을 강력한 정치 기구로 육성하였다.
한편, 친위 부대인 장용영을 설치하여 왕권을 뒷받침하는 군사적 기반을 갖추었다. 더 나아가 수원으로 사도 세자의 묘를 옮기고 화성을 세워 정치적·군사적 기능을 부여함과 동시에, 상공인을 유치하여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실현하는 상징적 도시로 육성하고자 하였다. 또, 수령이 군현 단위의 향약을 직접 주관하게 하여 지방 사림의 영향력을 줄이고 수령의 권한을 강화하였다.
4. 정치 질서의 변화
세도 정치의 전개
정조의 탕평 정치로 말미암아 왕에게 집중되었던 권력은 결과적으로 세도 정치의 빌미가 되었다. 정조가 죽은 후 3대 60여 년 동안 안동 김씨나 풍양 조씨 같은 왕의 외척 세력이 권력을 행사한 것이다.
세도 정치기에는 붕당은 물론, 탕평파와 반탕평파 같은 정치 집단 사이의 대립적인 구도도 없어지고, 중앙 정치를 주도하던 정치 집단은 소수의 가문 출신으로 좁아지면서 그 기반이 축소되었다.
권력 구조에서도 고위직만 정치적 기능을 발휘하고, 그 아래의 관리는 언론 활동 같은 정치적 기능을 거의 잃은 채 행정 실무만 맡게 되었다. 비변사가 핵심적인 정치 기구로 자리잡았으며, 유력한 가문 출신의 몇몇이 실제 권력을 행사하였다.
세도 정치의 폐단
19세기의 세도 정권은 사회 전반의 변화를 인식하지 못하고, 새로운 정치 질서를 만들어 가려는 능력도 지니지 못하였다. 세도 정권은 정조가 등용하였던 재야 세력인 남인, 소론, 지방 선비들을 권력에서 배제하여 사회 통합에 실패하였다. 향촌에서는 지방 사족을 배제한 채 수령이 절대권을 가지고 조세를 거두도록 하였다.
세도 정치기에는 관직이 매매되는 등 비리가 만연하였으며, 탐관오리들의 부당한 조세 수탈이 심각한 문제로 대두하였다. 더구나 자연 재해가 잇따라 기근과 질병이 널리 퍼지고 인구가 급속히 감소하였으나, 농민의 조세 부담은 더욱 무거워져 농촌 사회의 불만은 극에 달하였다. 부당한 수탈에 대한 농민들의 저항도 급격하게 늘어났다.
5. 대외 관계의 변화
청과 관계
병자호란 이후 조선은 청에 대하여 표면상 사대 관계를 맺고 사신이 왕래하면서 교역을 활발하게 하였다. 그러나 내심으로는 청에 대한 적개심이 오랫동안 남아 있어서 북벌 정책을 추진하기도 하였다. 효종은 청에 반대하는 입장을 강하게 내세웠던 송시열, 송준길, 이완 등을 높이 등용하여 군대를 양성하고 성곽을 수리하는 등 북벌을 준비하였다. 그 후, 숙종 때에도 청의 정세 변화를 이용하여 윤휴를 중심으로 북벌 움직임이 제기되었으나, 현실적으로 북벌을 실천에 옮기지는 못하였다.
이 시기에 청은 중국 대륙을 장악한 뒤 국력이 크게 신장되고, 중국의 전통 문화를 보호, 장려하고 서양의 문물까지 받아들여 문화 국가로서의 면모를 갖추어 나갔다. 조선 사신은 귀국 후에 기행문이나 보고서를 통하여 변화하는 청의 사정을 전하였고, 새로운 문물을 소개하였다. 이후 학자들 중에도 청을 무조건 배척하지만 말고 우리에게 이로운 것은 적극적으로 배우자는 북학론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나왔다.
한편, 청은 중국 대륙을 차지한 후에도 그들의 본거지였던 만주 지방에 관심을 기울여 이 지역을 성역화하였다. 그런데 우리 나라 사람들의 일부가 두만강을 건너 인삼을 캐거나 사냥을 하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에 청과 국경 분쟁이 일어났다. 이에, 조선과 청의 두 나라 대표가 백두산 일대를 답사하고 국경을 확정하여 정계비를 세웠다(1712).
이 정계비에서 양국 간의 국경은 서쪽으로는 압록강, 동쪽으로는 두만강을 경계로 한다고 하였다.
일본과 관계
임진왜란으로 침략을 받은 조선은 일본과의 외교 관계를 단절하였다. 그러나 일본의 에도 막부는, 경제적인 어려움을 해결하고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기 위하여 쓰시마 섬 도주를 통하여 조선에 국교를 재개하자고 요청해 왔다. 조선은 막부의 사정을 알아보고 전쟁 때 잡혀간 사람들을 데려오기 위하여 유정(사명대사)을 파견하여 일본과 강화하고 조선인 포로 7000여 명을 데려왔다(1607). 곧이어 일본과 기유약조를 맺어 동래부의 부산포에 다시 왜관을 설치하고, 제한된 범위 내에서 교섭을 허용하였다(1609).
한편, 일본은 조선의 선진 문화를 받아들이고, 에도 막부의 쇼군(將軍)이 바뀔 때마다 그 권위를 국제적으로 인정받기 위하여 조선에 사절의 파견을 요청해 왔다. 이에 조선에서는 1607년부터 1811년까지 12회에 걸쳐 통신사라는 이름으로 사절을 파견하였다. 통신사 일행은 적을 때에는 300여 명, 많을 때에는 400~500명이나 되었고, 일본에서는 국빈으로 예우하였다. 일본은 이들을 통하여 조선의 선진 학문과 기술을 배우고자 하였다. 따라서, 통신사는 외교 사절로서뿐만 아니라, 조선의 선진 문화를 일본에 전파하는 역할도 하였다.
한편, 울릉도와 독도는 삼국 시대 이래 우리의 영토였으나, 일본 어민이 자주 이 곳을 침범하여 충돌이 빚어지기도 하였다. 숙종 때, 안용복은 울릉도에 출몰하는 일본 어민들을 쫓아 내고, 일본에 건너가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확인받고 돌아왔다. 그 후에도 일본 어민의 침범이 계속되자, 19세기 말에 조선 정부에서는 적극적으로 울릉도 경영에 나서 주민의 이주를 장려하였고, 울릉도에 군을 설치하여 관리를 파견하고 독도까지 관할하게 하였다.
5. 근·현대의 정치
1. 근·현대의 세계
제국주의 국가 간에 식민지 확보 경쟁이 격렬하게 전개되면서 뒤늦게 쟁탈전에 뛰어든 독일, 오스트리아 등은 영국, 프랑스 등을 상대로 제1차 세계 대전을 일으켰다(1914). 제1차 세계 대전은 중립을 지키던 미국이 연합국측에 가담하고, 독일의 대공세가 실패하면서 막을 내렸다. 또, 러시아에서는 차르의 전제 정치에 항거한 노동자와 농민이 제정을 무너뜨리고 사회주의 정부를 수립하였다(1917).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미국에서 경제 공황이 일어났는데(1929), 이는 유럽과 아시아 등 전세계에 영향을 끼쳤다. 그 결과로 사회 불안이 심화되자, 독일에서는 나치즘, 이탈리아에서는 파시즘, 일본에서는 군국주의와 같은 전체주의가 대두하였다. 전체주의 국가들은 군비 확장과 대외 침략 정책을 통해 경제 공황을 극복하려 하였고, 그 결과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났다.
제2차 세계 대전이 연합국의 승리로 끝나면서 미국 중심의 자본주의 진영과 소련 중심의 사회주의 진영이 대립하는 냉전 체제가 시작되었다. 한편, 제2차 세계 대전 후에 독립한 많은 나라들은 제3세계를 형성하여 미국과 소련 어느 편에도 가담하지 않는 비동맹 노선을 채택하였다. 1990년대 이후에는 냉전 체제가 해체되면서 많은 사회주의 국가들이 몰락하였고, 체제나 이념보다는 자국의 국익을 위주로 한 세계 질서로 재편되고 있다.
2. 개화와 주권 수호 운동
흥선 대원군의 정책
19세기 중엽 조선 사회는, 안으로는 세도 정치에 저항하는 민중 세력이 성장하고 있었고, 밖으로는 일본과 서양 열강이 침략해 오고 있었다.
고종의 즉위(1863)로 정치적 실권을 잡은 흥선 대원군은 왕조의 위기를 극복하고 실추된 왕권을 회복하고자 하였다. 즉, 능력 위주의 인재 등용, 경복궁 중건, 비변사 폐지, 의정부와 삼군부의 기능 회복, 대전회통 편찬 등으로 왕권을 강화하였다. 또, 붕당의 근거지로 인식되어 온 서원을 47개소만 남기고 철폐하는 동시에, 농민 봉기의 원인으로 지목된 삼정을 개혁하여 국가 재정을 확충하고 민생을 안정시키려 노력하였다.
흥선 대원군은 병인양요(1866)와 신미양요(1871)를 거치면서 전국에 척화비를 세우고,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을 확고하게 유지하였다. 이러한 대외 정책은 외세의 침략을 일시적으로 저지하는 데에는 성공하였으나, 조선의 문호 개방을 늦추는 결과를 가져왔다.
개항과 개화 정책
1873년에 고종의 친정으로 흥선 대원군이 물러나고 민씨 세력이 집권하면서 개항과 통상 무역을 주장하는 집단이 정치적으로 성장하였다. 이런 움직임 속에서 일본은 한반도 침략을 노리며 운요호 사건을 일으켰다. 이를 계기로 조선은 일본과 강화도 조약을 맺어 나라의 문을 열었다(1876). 강화도 조약은 우리 나라 최초의 근대적 조약이었지만, 부산 및 다른 두 곳을 개항해야 했으며, 일본에 치외법권과 해안 측량권 등을 내준 점에서 불평등 조약이었다.
이어서 조선 정부는 미국과 조약(1882)을 맺은 뒤, 영국, 독일, 러시아, 프랑스 등 서양 열강과도 외교 관계를 맺었다. 이들 조약 역시 치외법권과 최혜국 대우를 규정한 불평등 조약이었다.
개항 이후, 청과 일본이 조선을 두고 침략 경쟁을 벌이는 가운데 조선 정부는 부국강병을 목표로 개화 정책을 추진하였다. 정부에서는 이 정책을 전담할 기구로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하였고, 신식 군대인 별기군을 창설하였으며, 일본과 청, 미국에 사절단을 보내 신식 문물을 배우게 하였다.
한편, 정부의 개화 정책 추진에 대해 전통적인 유생층은 성리학적 전통 질서를 지키고 외세를 배척하자는 위정척사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들은 개항과 개화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려 정부의 정책에 반발하였다.
개화 정책의 추진 과정에서 소외되고 피해를 입은 구식 군인, 하층민 등에 의해 임오군란이 일어났다(1882). 이에, 민씨 세력은 청에 원병을 요청하였고, 서울에 들어온 청의 군대는 일시 집권한 흥선 대원군을 청으로 잡아갔다.
갑신정변
임오군란 이후, 청나라는 조선 내정에 대한 간섭과 경제 침략을 강화하였다. 이에 반발한 김옥균, 박영효 등 급진적 개화 세력은 일본의 군사적 지원을 받아 갑신정변을 일으켰다(1884).
이들은 청과의 의례적 사대 관계를 폐지하고, 입헌 군주제적 정치 구조를 지향하면서, 인민 평등권과 능력에 따른 인재 등용을 주장하였다. 또, 지조법을 실시하고, 호조로 재정을 일원화하였으며, 혜상공국을 폐지하여 자유로운 상업의 발전을 꾀하였다.
하지만, 개화파 정권은 청군의 개입으로 3일 만에 무너지고 말았다. 이는 갑신정변 추진 세력의 정치·군사적 기반이 약했고, 민중의 지지 속에 정변을 성공시키기보다는 외세에 의존하는 방법을 택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갑신정변은 근대 국민 국가 건설을 목표로 한 최초의 정치 개혁 운동이라는 점에 의의가 있다.
갑신정변 이후, 조선 정부는 청의 지나친 내정 간섭에서 벗어나려고 러시아와 외교 관계를 강화하고자 하였다. 이 과정에서 조선에 대한 러시아의 세력 확장에 불안을 느낀 영국은 거문도를 불법으로 점령하였다(1885). 이렇듯 열강의 조선 침략이 격화되자, 조선 주재 독일 외교관인 부들러나 개화파 지식인 유길준 등은 조선을 중립국으로 하자는 논의를 구상하기도 하였다.
동학 농민 운동
개화 정책의 추진에도 불구하고 삼정의 문란, 근대 문물의 수용, 각종 배상금 지불, 일본의 경제적 침투 등으로 농민층의 불안과 불만은 팽배하였다. 정치·사회적 의식이 급성장한 농촌 지식인과 농민의 사회 변혁 욕구도 높아졌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인간 평등과 사회 개혁을 주장한 동학이 삼남 지방을 중심으로 확산되었다.
동학 농민 운동은 1894년 전라도 고부에서 시작되었다. 전봉준을 중심으로 한 농민층은 고부 군수 조병갑의 탐욕스럽고 포악함에 봉기한 이후, 보국안민과 제폭구민을 내세우며 전라도 일대를 장악하였다. 정부와 농민군은 전주에서 폐단이 많은 정치를 개혁하기로 합의하였다. 특히 농민군은 각지에 집강소를 설치하여 이를 실천해 나갔다. 그러나 일본군이 청·일 전쟁을 일으키면서 내정을 간섭하자, 농민군은 다시 봉기하여 외세를 몰아 내기 위하여 서울로 진격하였다. 하지만, 톈진 조약을 빙자하여 우리 나라에 파견된 우세한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에게 농민군은 공주 우금치에서 패하고, 지도부가 체포되면서 이 운동은 실패로 끝났다.
동학 농민 운동은 농민층이 전통적 지배 체제에 반대하는 개혁 정치를 요구하고, 외세의 침략을 자주적으로 물리치려 했다는 점에서 아래로부터의 반봉건적, 반침략적 민족 운동이었다. 비록 당시의 집권 세력과 일본 침략 세력의 탄압으로 실패하였지만, 이들의 요구는 갑오개혁에 부분적으로 반영되었다.
갑오개혁과 을미개혁
농민의 불만과 개혁 요구로 정부는 이를 반영한 개혁을 추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때, 일본은 조선에 대한 간섭을 유지하기 위해 경복궁을 점령하고 청·일 전쟁을 일으켰다(1894). 김홍집 내각은 농민의 불만과 개혁 요구를 반영하고자 군국기무처를 설치하고 정치, 경제, 사회 등 국가의 주요 정책에 대한 개혁을 추진하였다(갑오개혁, 1894).
갑오개혁에서는 내각의 권한을 강화하고 왕권을 제한하였으며, 신분제를 철폐하고, 각종 폐습을 타파하였다. 또, 은본위 화폐 제도와 조세 금납화를 실시하고, 탁지아문이 국가 재정을 관할하도록 하였다. 고종은 개혁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자 홍범 14조를 반포하였다.
그러나 러시아 등의 삼국 간섭으로 일본의 세력은 위축되었다. 이 틈을 타서 명성 황후가 러시아와 연결하여 일본을 견제하려 하자, 일본은 을미사변을 일으켰다(명성 황후 시해 사건, 1895). 이 사건 후 개화파 정부는 개혁 사업을 다시 추진하면서 단발령 등을 실시하였다(을미개혁).
갑오개혁과 을미개혁은 전통적 사회 질서를 타파하고 농민층의 개혁 요구도 일부 반영한 개혁이었다. 그렇지만 당시 가장 절실한 과제였던 군사적 개혁이나 농민이 요구한 토지 제도의 개혁 등이 이루어지지 않았고, 일본의 간섭을 배제할 수 없었다는 점에서 한계를 지녔다.
전국의 유생과 농민은 명성 황후 시해와 단발령 실시에 항거하여 대대적으로 의병을 일으켰다. 이 때의 의병은 유인석, 이소응, 허위 등 위정척사 사상을 가진 유생이 주도하였고, 농민층이 가담하여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독립 협회와 대한 제국
일본의 침략과 급진적인 갑오·을미개혁의 실시로 대부분의 국민 사이에 반일 정서가 확산되었다. 또, 고종은 왕권을 제약하려는 개화 세력의 개혁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고, 을미사변 후에는 신변의 위협까지 느끼게 되었다. 이에,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였고(아관 파천, 1896), 개화파 정부는 무너졌다. 이후 고종은 단발령 철회, 의병 해산 권고 조치 등을 단행하였다.
아관 파천으로 국가의 자주성은 손상되었고, 광산, 산림 등에 대한 열강의 이권 침탈도 심해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서재필 등은 독립 신문을 창간하여 서구의 자유 민권 사상을 소개하였으며, 독립 협회를 창립하였다(1896).
독립 협회는 강연회와 토론회 등을 통하여 민중에게 근대적 지식과 국권·민권 사상을 고취시켜, 광범한 사회 계층의 지지를 받는 단체로 발전하였다. 또, 독립 협회는 자주 국권, 자유 민권 등을 달성하려는 정치 운동을 전개하였으며, 만민 공동회와 관민 공동회를 개최하여 헌의 6조를 결의하였다.
그런데 독립 협회의 활동은 의회의 설립과 서구식 입헌 군주제 실현을 목표로 하였기 때문에 보수 세력과 대립하였다. 독립 협회는 보수 세력이 동원한 황국 협회의 방해를 받았고, 결국 3년 만에 해산되고 말았다.
한편,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에서 약 1년 만에 환궁한 후, 자주 독립의 근대 국가를 세우려는 국민적 열망과 러시아를 견제하려는 국제 여론에 힘입어 대한 제국을 수립하였다(1897). 고종은 황제로 즉위하면서 연호를 광무(光武)로 하고, 자주 국가임을 국내외에 선포하였다.
대한 제국은 “옛 제도를 근본으로 하고 새로운 제도를 참작한다.”라는 구본신참(舊本新參)의 개혁 방향을 제시하고, 대한국 국제를 제정하여 황권을 강화하였다. 또, 양전 사업을 실시하여 지계를 발급하고, 상공업 진흥책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 정책은 집권층의 보수적 성향과 열강의 간섭으로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일제의 국권 침탈
일제는 제1차 영·일 동맹(1902)을 체결하여 국제적 입지를 강화한 후, 한반도 지배권을 둘러싸고 러시아를 선제 공격하여 전쟁을 일으켰다(러·일 전쟁, 1904). 대한 제국은 국외 중립을 선언하였으나, 일제는 이를 무시하고 한·일 의정서를 강제적으로 체결하여 정치적 간섭과 군사적 점령을 꾀하였다. 그리고 이에 의거하여 제1차 한·일 협약을 체결하여 외교, 재정 등 각 분야에 일본이 추천하는 고문을 두어 한국 내정을 간섭하였다.
일제는 미국과는 가쓰라·태프트 밀약, 영국과는 제2차 영·일 동맹을 맺은 후, 러·일 전쟁에서 승리하자 러시아와 포츠머스 조약을 체결하여 국제 사회로부터 한반도에 대한 독점적 지배권을 승인받았다. 그리고 일방적으로 을사조약을 발표하여 대한 제국의 외교권을 빼앗고, 통감부를 설치하여 보호국으로 하였다(1905).
일제는 을사조약의 무효를 주장하는 고종이 헤이그에 특사를 파견하자, 이를 빌미로 강제 퇴위시키고 순종을 즉위시켰다. 이어 한·일 신협약(정미 7조약)을 체결하여 한국 정부의 각 부에 일본인 차관을 두어 내정을 장악하였으며, 군대마저 해산하고 실질적으로 한국을 지배하였다(1907). 그리고 전국적인 의병의 저항을 무력으로 진압하고 사법권과 경찰권을 빼앗은 다음, 대한 제국을 식민지로 만들었다(1910).
한편, 일제는 러·일 전쟁 중에 울릉도에 딸린 섬이었던 독도를 시마네 현에 편입시킨다고 발표하였다. 그러나 이는 당시 대한 제국의 국권을 강탈한 일제의 일방적인 주장에 지나지 않는다. 독도는 역사적 사실으로나 국제법상으로 대한 제국을 계승한 우리의 영토이다.
또, 일제는 청에서 안봉선 철도 부설권을 얻어 내는 대가로 간도 지방에 대한 관리 권한을 청에 넘겨주었다. 19세기에 이르러 토문강 위치에 대한 해석의 차이로 조선과 청 사이에 문제가 있었다. 결국, 간도는 우리의 외교권이 불법적으로 상실된 상태에서 청과 일본 사이에 체결된 간도 협약(1909)에 따라 청의 영토로 귀속되고 말았다.
항일 의병 전쟁과 애국 계몽 운동
일제의 주권 침탈에 대해 각계각층에서는 일제와 을사 5적을 규탄하고, 조약 폐기를 위해 다양한 형태로 항일 운동을 전개하였다. 안중근은 초대 통감을 지낸 이토 히로부미를 하얼빈에서 사살하였고, 장인환과 전명운은 외교 고문이었던 스티븐스를 샌프란시스코에서 사살하는 등 격렬히 저항하였다.
의병 전쟁도 을사조약을 계기로 확산되었다. 이 때, 민종식, 최익현 등 양반 출신 의병장을 비롯하여, 평민 출신 의병장인 신돌석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고종의 강제 퇴위와 군대 해산을 계기로 의병 항쟁은 한층 고양되었다. 해산 군인이 합류하면서 의병의 전투력이 강화되고, 활동 영역도 간도와 연해주 등 국외로까지 확대되었다. 그러나 일본 정규군의 화력에 비해 열세였고, 의병을 주도한 양반 유생층과 평민 의병장과의 갈등을 빚기도 하였다.
의병은 연합 전선을 형성하여 13도 창의군을 결성하고 서울 진공 작전을 펼쳤으나, 실패하고 말았다(1908). 이를 계기로 의병은 소규모 유격전을 전개하였고, 일부는 만주와 연해주로 건너가 독립군이 되었다.
의병 전쟁은 외세의 침략에 대항한 대표적인 구국 운동이었다. 민족의 강인한 저항 정신을 표출하였다는 점과 국권 회복을 위한 무장 투쟁을 전개하여 일제와 항일 무장 독립 투쟁의 기반을 마련하였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
한편, 여러 종류의 사회도 설립되어 구국 운동을 전개하였다. 초기에는 일본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를 좌절시킨 보안회와 입헌 정치 체제의 수립을 목적으로 설립된 헌정 연구회의 활동이 두드러졌다. 을사조약 이후에는 대한 자강회와 대한 협회, 신민회 등의 단체들이 국권 회복을 위한 계몽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중에서 신민회는 국권 회복과 공화 정치 체제의 국민 국가 건설을 목표로 삼은 비밀 조직이었다. 신민회는 국내에서 문화적, 경제적 실력 양성 운동을 전개하면서 점차 국외에서 독립군 기지의 건설 등 군사적 실력 양성을 꾀하였으나, 105인 사건으로 해체되었다.
애국 계몽 운동은 일제에 대하여 정치적, 군사적으로 예속된 상태에서 전개되어 항일 투쟁의 성과면에서는 일정한 한계가 있었지만, 민족 독립 운동의 이념과 전략을 제시하고 장기적인 민족 독립 운동의 기반을 닦았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3. 민족의 수난과 항일 민족 운동
일제의 식민 정책
국권을 빼앗은 일제는 조선 총독부를 설치하여 식민 통치를 강행하면서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말살하여 일본에 완전하게 ‘동화’시키려 하였다.
1910년대에 일제는 무단 통치를 행하여 언론, 집회, 출판, 결사의 자유 같은 기본권을 빼앗고, 독립 운동을 탄압하였다. 또, 일제는 헌병 경찰과 헌병 보조원을 전국에 배치하여 즉결 처분권을 부여하여 우리 민족을 태형에 처하기도 하였다.
3·1 운동 이후 일제는 이른바 문화 통치를 표방하였다. 하지만, 이는 가혹한 식민 통치를 은폐하려는 것에 불과하였다. 헌병 경찰제를 보통 경찰제로 바꾸었지만, 경찰 수와 장비 등 경찰력은 오히려 강화하였다. 또, 일제는 소수의 친일 분자를 키워 우리 민족을 분열시키고, 민족 운동가들도 회유하는 한편으로, 일제에 저항하는 독립 운동가들은 철저히 탄압하였다.
1930년대에 일제는 대륙 침략을 본격화하면서 한반도를 대륙 침략의 병참 기지로 삼았다. 1940년대에는 태평양 전쟁을 도발하면서 인적·물적 자원의 수탈을 더욱 강화하였다. 이 시기 일제는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완전히 말살하려는 황국 신민화 정책을 추진하였다. 일제는 내선 일체의 구호를 내세워 우리 말과 글을 쓰지 못하게 하였다. 또, 성과 이름까지 일본식으로 고쳐 쓰도록 하고, 황국 신민 서사 암송, 궁성 요배, 신사 참배 등을 강요하였다.
특히, 일제는 강제 징용으로 한국인 노동력을 착취하였고, 학도 지원병 제도, 징병 제도 등을 실시하여 수많은 우리 젊은이를 전쟁에 동원하였다. 또, 젊은 여성을 정신대라는 이름으로 강제 동원하여 군수 공장 등에서 혹사시켰으며, 그 중 일부는 전선으로 끌고 가 일본군 위안부로 삼는 만행을 저질렀다.
3·1 운동
우리 민족은 비록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으로 식민 지배를 받았으나, 광복을 위한 노력을 계속하였다. 1910년대 국내에서는 많은 항일 비밀 결사를 조직하여 일제에 대항하였으며, 국외에서는 만주와 연해주 등지에 독립 운동 기지를 건설하였다.
강점 이후 일제의 무단 통치로 세력이 크게 위축되었던 민족 지도자들은 제1차 세계 대전 종전과 함께 제창된 민족 자결주의와, 도쿄에서 일어난 2·8 독립 선언에 고무되어 독립 운동을 준비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민족 대표 33인의 이름으로 독립 선언서를 발표하고, 국내외에 독립을 선언하였다(1919. 3. 1.).
서울에서 시작된 만세 시위 운동은 학생, 종교인, 상인, 노동자가 참가하면서 점차 지방 도시로 확산되었고, 뒤이어 전국 각지의 농촌으로 파급되었다. 비폭력 운동으로 시작된 만세 시위는 차츰 면사무소, 헌병 주재소, 동양 척식 주식 회사 등 식민 통치 기관, 친일 지주 등을 습격하는 무력적인 저항 운동으로 바뀌어 갔다. 또, 3·1 운동은 국외로도 확산되어 만주와 연해주, 미국, 일본 등지에서도 국외 동포에 의해 시위가 전개되었다. 그러나 일제는 온갖 무력을 동원하여 만세 시위를 탄압하였다.
3·1 운동은 전 민족이 참여한 대규모의 독립 운동으로서, 우리 민족의 독립 운동을 한 차원 높이는 중요한 분기점이 되었다. 또, 우리 민족에게 독립의 희망과 자신감을 가지게 하고, 국내외에 민족의 주체성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을 뿐 아니라, 세계 약소 민족의 독립 운동에 큰 자극이 되었다.
대한 민국 임시 정부
3·1 운동을 계기로 우리 민족은 조직적으로 독립 운동을 추진하고, 국민 국가 건설을 효과적으로 준비할 정부를 수립하고자 하였다. 이에, 서울과 연해주, 상하이에 각각 정부가 조직되었고, 마침내 이를 통합하여 상하이에 대한 민국 임시 정부를 수립하였다(1919. 9.).
대한 민국 임시 정부는 민주주의에 입각한 근대적 헌법을 갖추고, 민주 공화제와 대통령제를 채택하였다. 임시 정부는 입법 기관인 임시 의정원, 사법 기관인 법원, 행정 기관인 국무원을 두어 3권 분립 헌정 체제를 갖추었다.
초기의 임시 정부는 온갖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국내외의 민족 독립 운동을 조직적이고 효과적으로 추진하는 중추 기관의 역할과 임무를 담당하였다. 또, 연통제와 교통국 등을 통하여 독립 운동 자금 모금과 정보 수집에 기여하였다.
임시 정부는 파리 강화 회의에 김규식을 대표로 파견하여 독립을 주장하였고, 미국에 구미 위원부를 두어 이승만을 중심으로 외교 활동을 전개하여 한국 독립 문제를 국제 여론화하는 데 노력하였다.
또, 임시 정부는 애국 공채를 발행하고, 기관지로 독립 신문을 간행하여 배포하였으며, 사료 편찬소를 두어 한·일 관계 사료집을 간행하였다.
자유주의와 공화주의를 기본 이념으로 표방한 대한 민국 임시 정부는 우리 민족의 주권을 대표하는 정부로 기능하였다. 이와 아울러 일제 강점기에 독립 운동을 통합하는 중심 기구로서의 역할도 수행하였다.
국내외 항일 민족 운동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민족주의 진영에서는 경제 발전과 교육 진흥을 통하여 실력을 양성하자는 문화 운동을 전개하였다.
민족주의 운동이 활발해지자 일제는 친일파는 육성하는 한편, 민족주의 세력을 회유하여 민족 운동을 약화시켰다. 이에, 민족주의 진영은 자치 운동 문제를 둘러싸고 타협적인 세력과 비타협적인 세력으로 대립하였다.
한편, 1920년대에는 사회주의 운동도 활발해지면서 민족주의 세력과 사회주의 세력이 연합한 신간회가 조직되었다(1927). 신간회는 자치론의 확산을 우려한 비타협적 민족주의 인사들과 사회주의자들이 민족 협동 전선으로 조직한 것이었다. 이들은 각 지방을 순회하면서 강연회를 열어 조선인에 대한 착취 기관 철폐, 기회주의 배격, 조선인 본위의 교육 제도 실시와 생활 개선 등을 주장하고, 노동 쟁의나 소작 쟁의, 동맹 휴학 등을 지원하였다.
이 시기 학생들은 일제의 감시와 탄압 속에서도 민중 계몽 활동과 일제의 차별 교육에 반대하는 활동을 벌였다. 이들은 주로 비밀 결사를 조직하여 개별적인 활동을 전개하면서 민족 운동 세력과 연결되어 6·10 만세 운동을 주도하였다(1926).
또, 한·일 학생 간의 충돌 사건을 계기로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이 일어났다(1929).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3·1 운동 이후 최대의 민족 운동으로 발전하였다.
한편, 국권을 빼앗긴 후에 애국 지사들은 간도와 연해주 지방에 집단 거주지를 개척하여 독립 운동 기지를 건설하고, 항일 독립 전쟁을 준비하였다. 이들은 먼저 각 지역을 중심으로 산업을 일으켜 경제적 토대를 마련하고, 청소년에게 민족 교육과 군사 훈련을 실시하여 무장 독립 전쟁을 수행하고자 하였다.
3·1 운동 이후 만주와 연해주 일대에서 많은 독립군 부대가 조직되었다. 이들은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 국내의 일제 식민 통치 기관을 습격, 파괴하고 일본 군경과 치열한 전투를 전개하였다. 1920년에는 홍범도의 대한 독립군과 김좌진의 북로 군정서군 등이 봉오동과 청산리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여 큰 승리를 거두었다.
일본군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간도 참변을 일으켜 우리 동포를 학살하고, 독립군을 토벌하려 하였다. 이에, 독립군 부대들은 연해주의 자유시로 옮겨 갔으나, 적색군에 의해 무장 해제를 당하였다(자유시 참변). 이후 독립군은 다시 만주로 이동하여 각 단체의 통합 운동을 추진하여, 참의부, 정의부, 신민부의 3부를 조직하였다. 이 가운데 참의부는 임시 정부가 직할하였다.
1930년대 만주에서 활동하던 다수의 독립군은 한국 독립군과 조선 혁명군으로 재편되었다. 이들 부대는 일제의 만주 침략 이후에는 중국군과 연합하여 많은 전투에서 승리하였다.
또, 항일 무장 투쟁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의거를 일으켜 민족의 독립 의지를 고취하고 일제의 침략을 저지하려 한 사람들도 있었다. 이들은 개별적으로 활동하거나, 김원봉의 의열단, 김구의 한인 애국단에서 활동하면서 식민 통치 기관을 파괴하거나 일본인 고관, 친일 인사들을 처단하였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은 이봉창과 윤봉길이었다.
한편, 1937년에는 일제가 중·일 전쟁을 일으켜 중국 본토를 위협하자, 대한 민국 임시 정부에서는 각처에 흩어져 있던 무장 투쟁 세력을 모아 충칭에서 한국 광복군을 창설하였다(1940). 임시 정부가 일본에 선전 포고를 한 후 한국 광복군은 연합군과 공동으로 인도와 미얀마 전선에 참전하였다. 또, 미국과 협조하여 국내 진공 작전을 준비하였으나, 일제의 패망으로 실현하지 못하였다.
그 밖에, 만주의 일부 조선인들은 1930년대에 항일 유격대를 결성하고 중국 공산당군과 함께 동북 항일 연군으로 활동하였다. 그리고 김원봉을 중심으로 한 의열단 계통 인사들은 중국 국민당 정부의 협조를 얻어 조선 의용대를 조직, 활동하였으며, 조선 의용대에서 분화된 화북 지방의 조선 독립 동맹 계열은 조선 의용군을 결성하고 중국 공산당군과 연합하여 항일 투쟁을 전개하였다.
4. 대한 민국의 성립과 발전
광복 직후의 국내 정세
1945년 8월 15일, 우리 민족은 일제의 억압에서 벗어나 광복을 맞이하였다. 이는 일본이 연합군에게 항복하고, 동시에 우리 민족이 국내외에서 줄기차게 독립 투쟁을 전개한 결과였다.
일본의 패망을 확신하고 새로운 국가의 건설을 준비해 왔던 대한 민국 임시 정부는 보통 선거를 통한 민주 공화국의 수립을 규정한 대한 민국 건국 강령을 제정, 공포하였다.
한편, 사회주의 계열인 중국 화북 지방의 조선 독립 동맹이나 만주 지역에서 항일 운동을 전개하던 단체, 그리고 국내의 여운형이 주도한 조선 건국 동맹도 각각 민주 공화국 건설을 위한 원칙을 발표하였다.
하지만, 광복의 감격과 각계각층의 건국 운동이 곧바로 자주 독립 국가의 건설로 연결되지는 못하였다. 일본군의 무장 해제를 이유로 미군과 소련군이 38도선 이남과 이북에 진주하여 군정을 실시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미·소 냉전의 국제 질서 속에서 우리 민족은 우익과 좌익 세력으로 대립하였다.
좌우의 대립은 신탁 통치 문제를 둘러싸고 격화되었다. 1945년 12월, 모스크바의 3국 외상 회의에서는 임시 민주 정부의 수립, 미·소 공동 위원회의 설치, 공동 위원회와 임시 정부는 최고 5년간의 신탁 통치 협정을 만들 것 등을 결정하였다. 이에, 신탁 통치에 반대한 우익과 모스크라 3국 외상 회의 결정안에 찬성한 좌익이 대립하게 되어, 결국 자주 독립의 통일 국가를 수립하지 못한 채 민족 분단의 길로 가게 되었다.
대한 민국의 수립
임시 정부 수립을 위한 미·소 공동 위원회가 열렸으나, 협의 대상이 될 정당과 사회 단체 선정 문제 등으로 결렬되었다. 이런 가운데 이승만 등 우익 세력은 자신들의 노선을 중심으로 한 정부 수립을 추진하였고, 중도 세력은 좌우의 대립을 극복하기 위한 좌우 합작 운동을 추진하였다.
미·소 공동 위원회가 결렬된 후, 한반도 문제는 유엔에 이관되었다. 1947년 11월 유엔 총회에서는 유엔 감시 아래 인구 비례에 의한 남북한 총선거를 통한 한국 통일안을 가결하였다. 소련이 이에 반대하자, 유엔 소총회는 유엔 한국 임시 위원단의 활동이 가능한 지역에서 선거를 치르기로 하였다. 분단을 우려한 김구, 김규식 등은 북한의 김일성, 김두봉 등과 평양에서 남북 지도자 회의를 개최하였지만 실패하였다(1948. 4.).
우리 나라 역사상 처음으로 보통·비밀 선거인 5·10 총선거가 남한에서 실시되어 제헌 국회가 구성되었다. 제헌 국회에서는 국호를 대한 민국으로 정하고, 대한 민국 임시 정부의 법통을 계승한 민주 공화국 체제의 헌법을 제정하였다. 대통령으로 선출된 이승만은 대한 민국 정부 수립을 국내외에 선포하였다(1948. 8. 15.). 이로써 국민이 나라의 주인이 되는 민주 국가를 이룩했을 뿐만 아니라, 외세의 간섭에서 벗어나 독립 국가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자유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기본 이념으로 한 새로운 대한 민국의 국가 건설은 많은 시련을 겪어야만 했다. 특히, 정부 수립을 전후한 시기에 좌·우익의 대립이 격화되어 제주도 4·3 사건과 여수·순천 10·19 사건 등이 일어났다. 이승만 정부는 이러한 국면을 극복하고 사회 질서를 확립하기 위하여 반공 정책을 강화하는 한편, 농지 개혁을 단행하였다.
제헌 국회에서는 민족적 과제인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고 민족 정기를 바로잡기 위해 반민족 행위 처벌법을 제정하였다(1948. 9.). 그러나 이승만 정부의 소극적 태도로 친일파 처벌은 좌절되었다.
한편, 북한에서는 소련의 지원하에 김일성을 위원장으로 하는 북조선 임시 인민 위원회가 조직되어 토지 개혁, 주요 산업의 국유화 등을 단행하였다. 이후, 남한에서 대한 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북한에서도 조선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이 세워졌다(1948. 9. 9.).
6·25 전쟁
이승만 정부는 출범 초기에 좌익 게릴라 활동, 실업과 물가 폭등 등으로 어려움에 처하였다. 더욱이 미군이 철수하고 태평양 방위선에서 한국을 제외한 애치슨 선언이 나오는 등 국제 정세도 불리하게 작용하였다.
북한은 소련의 지원하에 1950년 6월 25일 새벽에 남침을 강행하였다. 유엔은 전쟁이 나자 안전 보장 이사회를 소집하여 북한의 남침을 침략 행위로 규정하였고, 이에 미국을 중심으로 한 16개국이 유엔군을 파견하였다. 유엔군과 국군은 인천 상륙 작전에 성공하여, 서울을 수복한 후 38선을 넘어 압록강까지 북진하였다. 그러나 중국군의 개입으로 전세는 다시 바뀌어 휴전선 일대에서 교착 상태에 들어갔다. 이후, 유엔군과 북한군 및 중국군 사이에 휴전 회담이 진행되어 1953년 7월 27일에 휴전 협상이 체결되었다.
3년간 계속된 6·25 전쟁으로 우리 민족은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수백만 명의 사상자가 생기고, 전쟁 고아, 이산 가족이 발생하였으며, 전 국토가 초토화되어 대부분의 산업 시설이 파괴되었다. 그리고 남북 사이에는 불신과 적대 감정이 높아져 분단이 더욱 고착화되었다.
민주주의의 시련과 발전
6·25 전쟁의 와중에 이승만 정부는 발췌 개헌을 강행하였고, 이후 사사오입 개헌을 통해 장기 집권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1960년 정·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의 자유당 정권은 집권 연장을 위하여 노골적인 부정 선거를 자행하였고, 이에 항의하는 학생과 시민의 시위를 폭력으로 진압하였다. 마침내 국민의 분노가 전국적으로 터지면서 4·19 혁명이 일어났다. 결국, 이승만은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고 허정을 수반으로 하는 과도 정부가 수립되어, 내각 책임제와 양원제 국회를 골자로 하는 헌법으로 개정하였다. 이 헌법에 따라 총선거가 실시되어 민주당의 장면 내각이 들어섰다. 장면 내각은 민주당 내의 정치적 갈등과 계속되는 시위에 시달렸다. 그러나 경제 개발 계획을 세우는 등 개혁 정책을 추진했지만, 박정희 등 군부 세력의 정변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1961. 5. 16.).
군부 세력은 비상 계엄하에서 헌정을 중단시키고, 국가 재건 최고 회의를 구성하여, 반공 강화와 민생 안정 등을 표방한 혁명 공약을 발표하고 군정을 실시하였다. 그들은 민정 복귀의 약속을 외면한 채 헌법을 개정하여 정권을 다시 장악하였다(1963).
박정희 정부는 조국 근대화 실현을 국정의 주요 목표로 삼고, 경제 개발 정책을 추진하면서, 일본의 사과와 정당한 보상을 요구하는 시민, 학생들의 격렬한 반대를 억누르고 한·일 국교를 정상화하였다(1965). 또, 공산주의 세력과 맞서 싸우기 위해 베트남전에 군대를 파병하였다.
1967년 선거에서 재선된 박정희는 3선 개헌을 강행하였고(1969), 1972년에 비상 계엄을 선포하여 국회를 해산하였으며, 10월 유신을 단행하였다. 10월 유신은 ‘한국적 민주주의’라는 명분을 내세웠으나, 민주적 헌정 체제를 부정하고 국민의 기본권을 억압하면서 장기적인 독재 체제를 구축한 것이었다.
정부에서는 유신 체제를 부정하고 헌법을 비방하거나 개정을 요구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지하는 긴급 조치를 잇따라 발표하였다. 그러나 양심적 지식인, 학생, 종교인 등은 이에 저항하여 민주화를 요구하였다. 마침내 박정희 대통령은 10·26 사태로 피살되었고, 유신 체제는 종말을 고하였다(1979).
이후, 국민은 민주화를 요구하였으나, 12·12 사태로 군사권을 장악한 전두환 등 신군부 세력은 이를 억압하였다. 신군부 세력은 계엄령 철폐와 김대중 석방을 요구하며 시작된 5·18 민주화 운동도 무장 군인을 동원하여 무자비하게 탄압하였다. 5·18 민주화 운동은 비록 실패하였지만, 1980년대 이후 한국 민주화 운동의 밑거름이 되었다.
신군부 세력은 7년 단임의 대통령을 간접 선거로 선출하는 헌법을 개정하였고, 전두환이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전두환 정부는 민주화 운동을 탄압하면서 언론 통폐합, 삼청 교육대 등으로 인권을 유린하기도 하였다.
6월 민주 항쟁과 민주주의의 발전
전두환 정부의 강압적인 통치하에서도 계속된 민주화 요구는, 1987년 박종철 고문 사망 사건과 4·13 호헌 조치를 계기로 6월 민주 항쟁으로 발전하였다.
직선제 개헌과 민주 헌법 제정을 요구하는 시위는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결국, 정부는 국민의 민주화 요구를 수용하여 6·29 민주화 선언을 발표하였고, 여야 합의에 의해 5년 단임의 대통령 직선제를 골자로 하는 새 헌법이 마련되었다.
이에 따라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는 야권의 후보 단일화 실패로 신군부 출신의 노태우가 당선되었다. 노태우 정부는 동유럽 공산주의 국가 및 소련, 중국과 외교 관계를 수립하는 북방 정책을 추진하였고, 유엔에 남북한이 합께 가입하는 등 성과를 올렸다. 그러나 노태우 정부는 적극적인 개혁을 추진하지 못한 채 통치 기간 중에 발생한 부정과 비리로 국민적 지지를 제대로 얻지 못하였다.
1993년에 성립된 김영삼 정부는 공직자의 재산 등록과 금융 실명제 등을 법제화하여 부정부패 척결에 노력하였다. 또, ‘역사 바로세우기’의 일환으로 신군부 세력을 법정에 세우고, 5·16 군사 정변 후 중단되었던 지방 자치제를 전면적으로 실시하였다. 그러나 집권 말기에 국제 경제 여건의 악화와 외환 부족으로 인하여 경제적 위기를 겪었다.
1998년에 성립된 김대중 정부는 외환 위기 극복 및 민주주의와 시장 경제의 병행 발전을 천명하였고, 남북 평화 정책을 위한 적극적인 대북 정책을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2000년 6·15 남북 정상 회담을 실현하였고, 남북 경제 협력의 활성화와 금강산 관광, 이산 가족의 상봉을 통해 평화 통일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2003년에 출범한 노무현 정부는 국민과 함께 하는 민주주의, 더불어 사는 균형 발전 사회, 평화와 번영의 동북아 시대 등을 국정 목표로 제시하였다.
북한의 정치
북한에서는 6·25 전쟁을 거치면서 김일성이 박헌영의 남로당 계열 등을 숙청하면서 권력 기반을 한층 강화하였다. 이 시기에 북한은 전후 복구와 자립적 민족 경제 확립을 목표로 소련과 중국의 원조를 받아 중공업과 경공업을 모두 발전시키는 정책을 추진하였다. 농업 분야에서는 협동화를 통해 생산력을 증대시키기도 하였다.
1960년대에 한·미·일 안보 체제 구축과 중·소 분쟁 등 국제 정세의 악화로 위기에 놓인 북한은 군수 산업 발전에 박차를 가하였다. 아울러 김일성과 노동당의 독재를 강화하기 위해 주체 노선을 강조하였다. 대남 정책에서는 남북 연방제 통일 방안을 제시하였지만, 한편으로 무장 군인을 남파하는 등 무력 도발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1970년대에는 7·4 남북 공동 성명 직후 헌법을 개정하여 국가 주석이 행정 및 군사 분야의 최고 지도자로서 절대 권력을 행사하는 국가 주석제를 도입하였다(1972. 12.).
1980년대에 들어서는 김정일이 당을 실질적으로 장악하고 후계 체제를 공고히 하였다. 1993년에는 김정일이 국방 위원회 위원장에 취임하였고, 1994년에 김일성이 사망한 후 권력을 승계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80년대 북한 경제는 전반적으로 침체되어 갔다. 특히, 1990년 이후에 심각한 식량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어, 외국에서 식량 원조를 받아야만 했다. 이는 홍수 등 자연 재해의 발생, 외부 원조의 감소, 에너지 자원의 부족, 사회 간접 자본 낙후, 자립 경제 고수, 주체 사상과 수령 유일 체제의 비합리성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그리하여 북한은 외국 기업과의 합작과 자본 도입을 추진하고 있다.
통일을 위한 노력
광복 이후 통일 국가의 수립이 좌절되면서 민족 분단을 극복하고 통일 국가를 수립하는 일은 우리 민족 최대의 과제가 되었다. 그러나 6·25 전쟁 이후 남한의 반공 정책과 북한의 적화 통일 정책으로 남북한 사이에는 통일 논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4·19 혁명 직후 중립화 통일론이나 남북 협상론, 남북 교류론 등이 제기되었다. 이러한 통일 논의는 그 후의 남북한 대립 등으로 더 이상 진전되지 못하였다.
1970년대에 들어와 냉전 체제의 완화, 남한의 경제 발전 등 국내외 여건의 변화에 따라 박정희 정부는 남북 교류를 제의하고, 남북 간에 이산 가족 찾기 운동을 위한 적십자 대표의 예비 회담을 열었다. 또, 서울과 평양에서 7·4 남북 공동 성명이 동시에 발표되었다(1972). 이 성명은 자주, 평화, 민족 대단결의 통일 원칙을 내세운 것으로, 이후 통일 논의의 기본 원칙이 되었다.
1980년대에 이르러 남한의 민족 화합 민주 통일 방안과 북한의 고려 민주주의 연방 공화국 방안이 제시되었으며, 남북한의 이산 가족이 각각 서울과 평양을 처음으로 방문하였다(1985. 9.).
1990년대에 들어와 급격한 국제 정세의 변화 속에서 남한의 적극적인 북방 외교 정책이 추진되었다. 남북한은 동시에 유엔에 가입하였으며, 남북 고위급 회담이 열리고, 문화, 체육의 교류도 이루어졌다. 곧이어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 협력에 관한 합의서가 채택되고(1991. 12.), 한반도의 비핵화에 관한 공동 선언이 채택되기도 하였다. 한편, 민간 차원에서도 적극적인 통일 노력이 전개되어 평화 통일을 위한 논의가 활성화되었다.
1998년에 김대중 정부가 들어선 이후 정부와 민간 차원의 교류가 크게 확대되었다. 마침내 평양에서 정상 회담이 이루어져 6·15 남북 공동 선언이 발표되었다(2000). 또, 금강산 관광과 경의선 연결, 남북 이산 가족 상봉 등이 실현되어 남북 간의 긴장 완화와 화해 협력이 진전되고 있다.
IV. 경제 구조와 경제 생활
1. 고대의 경제
1. 삼국의 경제 생활
삼국의 경제 정책
삼국은 고대 국가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주변의 소국과 전쟁을 벌여 정복한 지역에는 그 지역의 지배자를 내세워 토산물을 공물로 수취하였다. 또, 삼국은 전쟁 포로를 귀족이나 병사에게 노비로 나누어 주기도 하고, 군공을 세운 사람에게 일정 지역의 토지와 농민을 식읍으로 주었다.
삼국은 중앙 집권 체제를 정비하면서 조세 제도를 마련하였다. 조세는 대체로 재산의 정도에 따라 호를 나누어 곡물과 포를 거두었으며, 그 지역의 특산물도 거두었다. 왕궁, 성, 저수지 등을 만드는 데에 노동력이 필요하면 국가에서 15세 이상의 남자를 동원하였다.
아울러 농민 경제를 안정시키기 위하여 농업 생산력을 늘릴 수 있는 시책과 구휼 정책을 시행하였다. 철제 농기구를 일반 농민에게 보급하여 소를 이용한 우경을 장려하고, 황무지 개간을 권장하여 경작지를 확대하였으며, 저수지를 만들거나 수리하여 가뭄에 대비하였다.
또, 삼국은 노비 중에서 기술이 뛰어난 자에게 국가가 필요로 하는 무기, 장신구 등을 생산하게 하였다. 그러나 점차 국가 체제가 정비되면서 무기, 비단 등 수공업 제품을 생산하는 관청을 두고 여기에 수공업자를 배정하여 필요한 물품을 생산하였다.
삼국 시대에는 농업 생산력의 수준이 낮아 수도 같은 도시에서만 시장이 형성되었다. 신라는 5세기 말 경주에 시장을 열어 물품을 매매하게 하였고, 6세기 초 시장을 감독하는 관청인 동시전을 설치하였다.
삼국의 국제 무역은 4세기 이후에 크게 발달하였다. 고구려는 남북조 및 유목민인 북방 민족과 무역을 하였다. 백제는 남중국 및 왜와 무역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신라는 한강 유역을 획득하기 이전에는 고구려와 백제를 통하여 중국과 무역을 하였으나, 한강 유역으로 진출한 이후에는 당항성을 통하여 직접 교역하였다.
귀족의 경제 생활
삼국 시대의 귀족은 본래 스스로 소유하였던 토지와 노비 외에도 국가에서 준 녹읍, 식읍, 노비를 가지고 있었다. 귀족은 전쟁에 참여하였던 토지와 노비 등은 더 많이 가질 수 있었다.
귀족은 노비와 그들의 지배하에 있는 농민을 동원하여 자기 소유의 토지를 경작시키고, 그 수확물의 대부분을 가져갔다. 그리고 고리대를 이용하여 농민의 토지를 빼앗거나 농민을 노비로 만들어 재산을 늘려 갔다.
귀족은 기와집, 창고, 마구간, 우물, 주방 등을 갖추고 높은 담을 쌓은 집에서 살면서 풍족하고 화려한 생활을 하였다. 이들은 중국에서 수입된 비단으로 옷을 만들어 입고 보석과 금, 은으로 치장하였다.
농민의 경제 생활
농민은 자기 소유의 토지를 경작하거나 부유한 자의 토지를 빌려 경작하였다. 퇴비를 만드는 기술이 발달하지 못한 당시에는 대부분의 토지에서 계속 농사짓지 못하고 1년 또는 수년을 묵혀 두어야 하였다.
농기구는 돌이나 나무로 만든 것과 일부분을 철로 보완한 것을 사용하다가 4, 5세기를 지나면서 철제 농기구가 점차 보급되었다. 쟁기, 호미, 괭이 등 철제 농기구가 6세기에 이르러 널리 사용되었으며, 우경도 점차 확대되었다.
농민은 국가와 귀족에게 곡물, 삼베, 과실 등을 내야 했고, 성이나 저수지를 쌓는 일, 삼밭을 경작하고 뽕나무를 기르는 일 등에 동원되었다. 지방 농민은 전쟁 물자를 조달하거나 잡역부로 동원되었으며, 전쟁에 군사로 참여하기도 하였다.
농민은 스스로 농사 기술을 개발하고, 계곡 옆이나 산비탈 등을 경작지로 바꾸어 농업 생산력을 향상시켰다. 하지만, 자연 재해를 당하거나 고리대를 갚지 못하는 경우에는 몰락하여 노비, 유랑민, 도적이 되기도 하였다.
2. 남북국 시대의 경제적 변화
통일 신라의 경제 정책
삼국을 통일하면서 이전보다 넓은 토지와 많은 농민을 지배할 수 있게 된 신라는 삼국의 경쟁 시기와는 다른 경제적 조치를 취하였다.
조세는 생산량의 10분의 1 정도를 수취하여 통일 이전보다 완화하였다. 공물은 촌락 단위로 그 지역의 특산물을 거두었다. 역은 군역과 요역으로 이루어졌으며, 16세에서 60세까지의 남자를 대상으로 하였다.
신라는 촌락의 토지 크기, 인구 수, 소와 말의 수, 토산물 등을 파악하는 문서를 만들고, 조세, 공물, 부역 등을 거두었으며, 매년 변동 사항을 조사하여 3년마다 문서를 다시 작성하였다.
신라는 토지 제도를 바꾸어 식읍을 제한하고 녹읍도 폐지하였으며, 백성에게 정전을 지급하였다. 아울러 이전부터 시행해 오던 구휼 정책을 더욱 강화하였다. 이런 조치는 귀족에 대한 국왕의 권한을 강화하고 농민 경제를 안정시키려는 것이었다.
통일 신라의 경제 활동
통일 후 신라의 경제력은 비약적으로 성장하였다. 농업 생산력의 성장을 토대로 경주의 인구가 증가하고, 상품 생산이 늘어나 이전에 설치된 동시만으로는 상품 수요를 감당할 수 없어 서시와 남시를 설치하였다. 국가는 왕실과 귀족이 사용할 금은 세공품, 비단류, 그릇, 가구, 철물 등을 만들기 위한 관청을 정비하여 이에 속한 장인과 노비에게 물품을 만들어 공급하게 하였다.
통일 후 당과의 관계가 긴밀해지면서 무역이 번성하였고, 공무역뿐 아니라 사무역도 발달하였다.
처음에는 일본과 교류를 제한하여 무역이 성행하지 못하였으나, 8세기에 이르러 활발해졌다.
한편, 국제 무역이 발달하면서 이슬람 상인이 울산에까지 와서 무역하였다.
8세기 이후 동아시아의 무역 활동이 활발해져, 장보고는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하고 해적을 소탕하여 남해와 황해의 해상 무역권을 장악하였다.
무역 확대로 산둥 반도와 양쯔 강 하류에 신라인의 거주지인 신라방과 신라촌, 신라인을 다스리는 신라소, 여관인 신라관, 절인 신라원이 만들어졌다.
귀족의 경제 생활
통일이 되면서 왕실과 귀족은 이전보다 풍족한 경제 기반을 가졌다. 왕실은 삼국의 경쟁 과정에서 새로 획득한 땅을 자신의 소유로 만들고, 국가의 수입 중 일부를 왕실의 수입으로 삼았다.
귀족은 식읍과 녹읍을 통하여 그 지역의 농민을 지배하여 조세와 공물을 거두었고, 노동력을 동원하였다. 귀족은 국가에서 준 토지와 곡물 이외에 물려받은 토지, 노비, 목장, 섬도 가지고 있었다. 서민을 상대로 한 고리대업도 수입원의 하나였다. 귀족은 당이나 아라비아에서 수입한 비단, 양탄자, 유리 그릇, 귀금속 등 사치품을 사용하였다. 당시 귀족은 당의 유행을 따라 옷을 입을 정도였으며, 경주 근처에 호화스러운 별장을 짓고 살았다.
농민의 경제 생활
통일 이후 사회 안정으로 농업 생산력이 늘어났으나 한계가 많았다. 당시는 시비법이 발달하지 못하여 계속해서 경작할 수 없었고, 1년 또는 몇 년을 묵혀 두었다가 경작해야 하였다. 대체로, 비옥한 토지는 왕실, 귀족, 사원 등 세력가가 가졌고, 농민의 토지는 대부분이 척박하여 생산량이 귀족의 것보다 적었다. 뿐만 아니라, 그마저도 세금을 내고 나면 남는 것이 많지 않았다. 따라서, 농민은 생계를 유지하려면 남의 토지를 빌려 경작할 수밖에 없었고, 그 대신 수확량의 반 이상을 토지 소유자에게 주어야 하였다.
전세는 생산량의 10분의 1 정도였지만, 그 밖에 삼베, 명주실, 과실류 등 여러 가지 물품을 공물로 내고 부역도 많아 농사에 지장을 초래할 정도였다. 군역에 나가면 농사지을 노동력이 없어 생활에 어려움을 겪는 농민도 많았다.
향이나 부곡에 사는 사람은 일반 농민보다 어려운 형편이었다. 농민과 대체로 비슷한 생활을 하였으나, 농민보다 더 많은 공물 부담을 져야 했기 때문이다. 노비는 왕실, 관청, 귀족, 절 등에 속하여 있었다. 그들은 주인을 위하여 음식, 옷 등 각종 필수품을 만들고 일용 잡무를 하였으며, 주인을 대신하여 농장을 관리하거나 주인의 땅을 경작하였다.
발해의 경제 발달
발해의 수취 제도는 신라와 마찬가지로 조, 콩, 보리 등 곡물을 거두는 조세, 베, 명주, 가죽 등의 특산물을 거두는 공물, 궁궐, 관청 등의 건축에 농민들을 동원하는 부역이 있었다. 발해의 귀족은 대토지를 소유하고 무역을 통하여 당의 비단, 서적 등을 수입하여 화려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발해는 9세기에 이르러 사회가 안정되면서 농업, 수공업, 상업이 발달하였다. 농업에서는 밭농사가 중심이었으며, 일부 지역에서는 벼농사도 지었다. 특히, 목축이 발달하여 돼지, 말, 소, 양 등을 길렀는데, 말은 주요한 수출품이었다. 수렵도 활발해 모피, 녹용, 사향 등도 많이 생산되어 수출되었다. 수공업은 철, 구리, 금은 등 금속 가공업과 삼베, 명주, 비단 등의 직물업, 도자기업 등 다양한 분야에서 발달하였다. 그리고 수도인 상경 용천부 등 도시와 교통 요충지에서는 상업이 발달하였다.
발해는 당, 신라, 거란, 일본 등과 무역하였다. 특히, 당과는 해로와 육로를 이용하여 무역을 하였는데, 당은 산둥 반도의 덩저우에 발해관을 설치하고 발해 사람들이 이용하게 하였다. 일본과의 무역도 규모가 한 번에 수백 명이 오갈 정도로 활발하였다.
발해의 수출품은 주로 모피, 인삼 등 토산물과 불상, 자기 등 수공업품이었다. 수입품은 귀족의 수요품인 비단, 책 등이었다.
2. 중세의 경제
1. 경제 정책
농업 중심의 산업 발전
고려는 건국 초부터 농민의 생활 안정과 국가 재정을 확보하기 위해 농업을 중시하는 정책을 추진하였다. 개간한 땅에 대해서는 일정 기간 면세하여 줌으로써 개간을 장려하고, 농번기에는 잡역 동원을 금지하여 농사에 지장을 주지 않게 하였다. 재해를 당했을 때에는 세금을 감면해 주고, 고리대의 이자를 제한하였으며, 의창제를 실시하는 등 농민 안정책을 더욱 강화하였다.
고려는 개경에 시전을 만들었고, 국영 점포를 열었다. 아울러 화폐처럼 유통되는 곡물이나 삼베를 대신하여 쇠, 구리, 은 등을 금속 화폐로 만들어 유통하는 등 상업 발전에 관심을 기울였다.
수공업은 관청에 기술자를 소속시켜 무기, 비단 등 왕실과 국가에서 필요로 하는 물품을 생산하는 형태였으며, 민간 기술자나 일반 농민을 동원하여 생산을 보조하게 하였다. 소(所)에서도 먹, 종이, 금, 은 등 수공업 제품을 생산하여 공물로 바치게 하였다. 그러나 자급자족적인 농업 경제를 기본으로 하였기 때문에 상업과 수공업의 발달은 부진하였다.
수취 제도와 재정의 운영
고려는 신라 말의 문란한 수취 체제를 다시 정비하고 재정 운영에 필요한 관청도 설치하였다. 고려는 재정을 안정적으로 운영하기 위하여 토지와 호구를 조사하여 토지 대장인 양안과 호구 장부인 호적을 작성하였다. 이것을 근거로 조세, 공물, 부역 등을 부과하였다.
조세는 토지를 논과 밭으로 나누고, 비옥한 정도에 따라 3등급으로 나누어 부과하였다. 거두는 양은 생산량의 10분의 1이었다. 거둔 조세는 각 군현의 농민을 동원하여 조창까지 옮긴 다음, 조운을 통해 개경으로 운반하여 보관하였다.
공물은 집집마다 토산물을 거두는 제도이다. 중앙 관청에서 필요한 공물의 종류와 액수를 나누어 주현에 부과하면, 주현은 향, 부곡, 소에 이를 할당하고, 각 고을에서는 향리들이 집집마다 공물을 거두었다. 공물의 종류로는 매년 내어야 하는 상공과 필요에 따라 수시로 거두는 별공이 있었다.
역은 국가에서 백성의 노동력을 무상으로 동원하는 제도로, 16세에서 60세까지의 남자를 정남이라 하여 의무를 지게 하였다. 역은 군역과 요역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 밖에, 어민에게 어염세를 거두거나 상인에게 상세를 거두어 재정에 사용하였다.
이런 수취 제도를 기반으로 고려는 재정 운영의 원칙을 세우고, 국가와 관청에 종사하는 사람에게 수조권을 나누어 주었다. 재정을 운영하는 관청으로는 호부와 삼사를 두었다. 재정은 관리의 녹봉, 일반 비용, 국방비, 왕실 경비 등에 지출하였다. 각 관청은 관청 운영 경비로 사용할 수 있도록 토지를 지급받았으나, 경비가 부족한 경우에는 그 비용을 각 관청에서 스스로 마련하기도 하였다.
전시과 제도와 토지 소유
고려는 국가에 봉사하는 대가로 관료에게 토지를 나누어 주는 전시과 제도를 운영하였다. 국가는 문무 관리로부터 군인, 한인에 이르기까지 18등급으로 나누어 곡물을 수취할 수 있는 전지와 땔감을 얻을 수 있는 시지를 주었다.
이 때, 지급된 토지는 수조권만 가지는 토지였다. 관직 복무와 직역에 대한 대가로 지급되었으므로 토지를 받은 자가 죽거나 관직에서 물러날 때에는 토지를 국가에 반납하도록 하였다.
관리에게 보수로 주던 과전과 달리, 문벌 귀족의 세습적인 경제적 기반이 되었던 것은 공음전이었다. 공음전은 5품 이상의 관료가 되어야 받을 수 있는데, 자손에게 세습할 수 있었다. 이는 음서제와 함께 귀족의 지위를 유지해 나갈 수 있는 기반이었다.
한인전은 6품 이하 하급 관료의 자제로서 관직에 오르지 못한 사람에게 지급한 토지인데, 이것은 관인 신분의 세습을 위한 것이다. 군인전은 군역의 대가로 주는 토지였다. 군인전은 군역이 세습됨에 따라 자손에게 세습되었다. 하급 관료와 군인의 유가족에게는 구분전을 지급하여 생활 대책을 마련해 주었다. 한편, 왕실의 경비를 충당하기 위하여 내장전을 두었다. 중앙과 지방의 각 관청에는 공해전을 지급하여 경비를 충당하게 하였고, 사원에는 사원전을 지급하였다.
민전은 매매, 상속, 기증, 임대 등이 가능한 사유지로서, 귀족이나 일반 농민의 상속, 매매, 개간을 통하여 형성되었다. 또, 소유권이 보장되어 함부로 빼앗을 수 없는 토지였으며, 민전의 소유자는 국가에 일정한 세금을 내야 했다. 대부분의 경작지는 개인 소유지인 민전이었지만, 왕실이나 관청의 소유지도 있었다.
점차 귀족들이 토지를 독점하여 세습하는 경향이 커지면서 전시과 제도가 원칙대로 운영되지 못하였다. 다시 분배해야 할 토지를 세습하는 것이 용인되면서 조세를 거둘 수 있는 토지가 점차 줄어들었다. 이런 폐단은 무신정변을 거치면서 극도로 악화되었고, 결국 고려 말에는 국가 재정이 파탄 지경에 이르렀다.
2. 경제 활동
귀족의 경제 생활
귀족의 경제 기반은 대대로 상속받은 토지와 노비, 관료가 되어 받은 과전과 녹봉 등이 있었다.
관리가 된 귀족은 과전에서 생산량의 10분의 1을 거두었으며, 녹읍으로 1년에 두 번씩 곡식이나 비단을 받았다.
귀족은 자신의 소유지를 노비에게 경작시키거나 소작을 시켜 생산량의 반을 거두었다. 또, 외거 노비에게 신공으로 매년 베나 곡식을 받았다. 귀족은 권력이나 고리대를 이용하여 농민의 토지를 빼앗기도 하고, 헐값에 사들이거나 개간을 하여 토지를 늘렸다. 이렇게 늘어난 토지를 농장이라 하였고, 대리인을 보내 소작인을 관리하고 소작료를 거두어 갔다.
이러한 수입을 기반으로 귀족은 화려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문벌 귀족이나 권문세족은 큰 누각을 짓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지방에 별장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이 외출할 때에는 남녀 모두가 시종을 거느리고 말을 타고 다녔으며, 중국에서 수입한 차(茶)를 다점에서 즐기기도 하였다.
농민의 경제 생활
농민은 조상이 물려준 토지인 민전을 경작하거나, 국·공유지나 다른 사람의 소유지를 경작하였다. 또, 품팔이를 하거나 부녀자들이 삼베, 모시, 비단 등을 짜는 일을 하여 생계를 유지하였다.
대개 농민은 소득을 늘리려고 황무지를 개간하고 새로운 농업 기술을 배웠다. 농민이 진전이나 황무지를 개간하면 국가에서 일정 기간 소작료나 조세를 감면해 주었다. 경작하던 주인이 방치해서 황폐해진 토지인 진전을 개간할 때, 주인이 있으면 소작료를 감면해 주고, 주인이 없으면 개간한 사람의 토지로 인정해 주었다.
12세기 이후에는 연해안의 저습지와 간척지도 개간되어 경작지가 확대되어 갔다. 특히, 강화도 피난 시기 이후에는 강화도 지방을 중심으로 한 간척 사업이 추진되었다.
수리 시설의 발달도 이루어졌다. 김제의 벽골제와 밀양의 수산제가 개축되었으며, 소규모의 저수지도 확충되었다.
호미와 보습 등 농기구와 종자도 개량되었다. 소를 이용한 깊이갈이가 일반화되고 시비법이 발달하면서 휴경지가 점차 줄어 계속해서 경작할 수 있는 토지가 늘었다. 밭농사는 2년 3작 윤작법이 점차 보급되었고, 논농사도 고려 말에는 직파법 대신에 이앙법(모내기)이 남부 지방 일부에 보급될 정도로 발전하였다. 고려 후기에는 이암이 중국의 농서인 농상집요를 소개하였고, 문익점은 목화씨를 가져와 목화 재배가 이루어졌다.
수공업자의 활동
고려 전기에는 관청 수공업과 소 수공업이 중심이었으나, 후기에는 민간 수공업과 사원 수공업이 발달하였다.
중앙과 지방에 있던 관청에서는 그 곳에서 일할 기술자를 공장안에 올려 물품을 생산하게 하였으며, 농민을 부역으로 동원해 보조하게 하였다. 기술자는 주로 국가에서 필요로 하는 무기류, 가구류, 금은 세공품, 견직물, 마구류 등을 제조하였다. 소에서는 금, 은, 철, 구리, 실, 각종 옷감, 종이, 먹, 차, 생강 등을 생산하여 공물로 납부하였다.
민간 수공업은 농촌의 가내 수공업이 중심이었다. 국가에서 삼베를 짜게 하거나 뽕나무를 심어 비단을 생산하도록 장려하였다. 이런 이유로 농민은 삼베, 모시, 명주 등을 생산해 직접 사용하거나 공물로 바쳤다.
사원에서는 기술이 좋은 승려와 노비가 있어 베, 모시, 기와, 술, 소금 등 품질 좋은 제품을 생산하였다.
상업 활동과 화폐 주조
고려의 상업은 도시를 중심으로 발달하였다. 개경에 시전을 설치하여 관청과 귀족이 주로 이용하게 하였고, 경시서를 두어 상행위를 감독하였다. 개경, 서경(평양), 동경(경주) 등 대도시에는 관청의 수공업장에서 생산된 물품을 판매하는 서적점, 약점과 술, 차 등을 판매하는 주점, 다점 등 관영 상점을 두기도 하였다. 이 밖에도 비정기적인 시장이 있어 도시 거주민이 일용품을 매매할 수 있었다.
지방에서는 농민, 수공업자, 관리 등이 관아 근처에 모여들어 쌀, 베 등 일용품을 서로 바꿀 수 있는 시장을 열었다. 행상들은 이런 지방 시장에서 물품을 팔거나 마을을 돌아다니며 베나 곡식을 받고 소금, 일용품 등을 판매하였다. 또, 사원에서도 소유하고 있는 토지에서 생산한 곡물과 승려나 사원 노비가 만든 수공업품을 민간에 팔았다.
고려 후기에 이르러 도시와 지방의 상업 활동이 전기보다 활발해져 시전 규모도 확대되고 업종별 전문화가 나타났다. 개경의 상업 활동은 점차 도성 밖으로 확대되었으며, 예성강 하구의 벽란도를 비롯한 항구들이 교통로와 산업의 중심지로 발달하였다.
지방 상업에서는 행상의 활동이 두드러졌다. 조운로를 따라 미곡, 생선, 소금, 도자기 등이 교역되었으며, 새로운 육상로가 개척되면서 여관인 원이 발달하여 이 곳이 상업 활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고려 후기에는 국가가 재정 수입을 늘리기 위하여 소금의 전매제를 시행하였다. 또, 관청, 관리, 사원 등은 강제로 농민에게 물건을 판매하거나 구입하도록 하고 조세를 대납하는 등 농민을 강제적으로 유통 경제에 참여시켰다. 이 과정에서 상업 발달에 힘입어 부를 축적하여 관리가 되는 상인이나 수공업자도 생겨났다.
상업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화폐가 발행되었다. 성종 때에는 철전인 건원중보를 만들었으며, 숙종 때에는 삼한통보, 해동통보, 해동중보 등 동전과 활구(은병)라는 은전을 만들었으나, 널리 유통되지 못하였다. 일반적인 거래는 여전히 곡식이나 삼베를 사용하였다.
무역 활동
국내 상업이 안정적으로 발전하면서 송, 요 등 외국과 무역도 활발해졌다. 예성강 어귀의 벽란도는 대외 무역의 발전과 함께 국제 무역항으로 번성하였다.
고려의 대외 무역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것은 송과의 무역이었다. 고려는 서해안의 해로를 통하여 송에서 왕실과 귀족의 수요품을 수입하는 대신에 종이, 인삼 등 수공업품과 토산물을 수출하였다.
거란과 여진은 은을 가지고 와서 농기구, 식량 등과 바꾸어 갔다. 일본은 11세기 후반부터 내왕하면서 수은, 황 등을 가지고 와 식량, 인삼, 서적 등과 바꾸어 갔다.
한편, 서역과의 교류도 활발하여 대식국인이라 불리던 아라비아 상인들도 고려에 들어와서 수은, 향료, 산호 등을 팔았다. 이들을 통하여 고려의 이름이 서방 세계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3. 근세의 경제
1. 경제 정책
농본주의 경제 정책
조선은 재정 확충과 민생 안정을 위한 방안으로 농본주의 경제 정책을 내세웠다. 농경지를 확대하고 농업 생산력을 증가시키며, 농민의 조세 부담을 줄여 농민 생활을 안정시키려 하였다. 그리하여 건국 초부터 토지 개간을 장려하고 양전 사업을 실시한 결과, 고려 말에 50여만 결이었던 경지 면적이 15세기 중엽에는 160여만 결로 증가하였다. 또, 농업 생산력을 향상시키기 위하여 새로운 농업 기술과 농기구를 개발하여 민간에 보급하였다.
반면에, 상공업자가 허가 없이 마음대로 영업하는 것을 규제하였다. 이것은 당시 사대부들이, 물화의 수량과 종류를 국가가 통제하지 않고 자유 활동에 맡겨 두면 사치와 낭비가 조장되며, 농업이 피폐하여 빈부의 격차가 커지게 된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당시 사회에서는 사·농·공·상간의 직업적인 차별이 있어 상공업자들이 제대로 대우받지 못하였다.
검약한 생활을 강조하는 유교적인 경제관으로 소비는 억제되었고, 도로와 교통 수단도 미비하였다. 자급자족적인 농업 중심의 경제로 인하여 화폐 유통, 상공업 활동, 무역 등이 부진하였다. 정부는 화폐를 만들어 보급, 유통시키려 하였으나, 약간의 저화와 동전만 삼베, 무명, 미곡과 함께 사용되었다.
16세기에 이르러 국가의 농민에 대한 통제력이 약화되고 상공업이 발전하면서 상공업에 대한 통제 정책은 해이해졌다. 이후, 상공업에 대한 통제 체제가 무너져 가면서 국내 상공업과 무역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과전법의 시행과 변화
조선은 관리의 경제 기반을 보장하고 국가의 재정을 유지하는 방향으로 토지 제도를 운영하였다.
과전은 경기 지방의 토지로 지급하였는데, 받은 사람이 죽거나 반역을 하면 국가에 반환하도록 정해져 있었다. 그러나 죽은 관료의 가족들이 생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받았던 토지 중 일부를 수신전, 휼양전 등으로 다시 지급하여 세습이 가능하였고, 공신전도 세습할 수 있었다. 이렇게 토지가 세습되자, 새로 관직에 나간 관리에게 줄 토지가 부족하게 되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려고 15세기 후반에는 직전법으로 바꾸어 현직 관리에게만 수조권을 지급하다가 16세기 중엽에는 이마저도 폐지하였다.
수조권을 받은 자는 스스로 그 해의 생산량을 조사하여, 과전법의 경우에는 10분의 1을 농민에게 세금으로 거두었다. 이 과정에서 수조권을 가진 양반 관료가 이를 남용하여 과다하게 수취하는 일이 잦았다. 이를 시정하기 위하여 성종 때 지방 관청에서 그 해의 생산량을 조사하여 거두고, 관리에게 나누어 주는 방식으로 바꾸었다. 이에 양반 관료들이 수조권을 빌미로 토지와 농민을 지배하는 방식은 사라지고, 국가의 토지 지배권이 강화되었다.
수취 체제의 확립
조선의 수취 제도에는 토지에 부과하는 조세, 집집마다 부과하는 공납, 호적에 등재된 정남에게 부과하는 군역과 요역 등이 있었으며, 이것이 국가 재정의 토대를 이루었다.
조선 시대의 토지 소유자는 원칙적으로 국가에 조세를 납부할 의무가 있었다. 그러나 토지 소유자인 지주는 소작 농민에게 그 세금을 대신 내도록 강요하는 경우가 많았다.
조세는 과전법의 경우에 수확량의 10분의 1을 내는데, 1결의 최대 생산량을 300두로 정하고, 매년 풍흉을 조사하여 그 수확량에 따라 납부액을 조정하였다. 세종 때에 조세 제도를 좀더 체계적으로 운영하기 위하여 토지 비옥도와 풍흉의 정도에 따라 전분6등법, 연분9등법으로 바꾸고, 조세 액수를 1결당 최고 20두에서 최하 4두를 내도록 하였다.
조세는 쌀, 콩 등으로 냈다. 군현에서 거둔 조세는 강가나 바닷가의 조창으로 운반하였다가 전라도·충청도·황해도는 바닷길로, 강원도는 한강, 경상도는 낙동강과 남한강을 통하여 경창으로 운송하였다.
공납은 고려처럼 각 지역의 토산물을 조사하여 중앙 관청에서 군현에 물품과 액수를 할당하면, 각 군현은 각 가호에 다시 할당하여 거두었다. 공물에는 각종의 수공업 제품과 광물, 수산물, 모피, 과실, 약재 등이 있었다. 그런데 공물의 생산량이 점차 감소하거나 생산지의 변화로 인하여 납부 기준에 맞는 품질과 수량을 맞추기 어려우면, 그 물품을 다른 곳에서 구입해다가 납부하였다. 이 때문에 공물은 전세보다 납부하는 데 어려움이 많았을 뿐만 아니라, 그 부담도 훨씬 컸다.
한편, 16세 이상의 정남에게는 군역과 요역의 의무가 있었다. 군역에는 일정 기간 군사 복무를 교대로 근무하는 정군과, 정군이 복무하는 데에 드는 비용을 보조하는 보인이 있었다. 양반, 서리, 향리 등은 관청에서 일하기 때문에 군역에 복무하지 않았다.
요역은 가호를 기준으로 정남의 수를 고려하여 뽑아서 성, 왕릉, 저수지 등의 공사에 동원하였다. 성종 때에는 경작하는 토지 8결을 기준으로 한 사람씩 동원하고, 1년 중에 동원할 수 있는 날도 6일 이내로 제한하도록 규정을 바꾸었으나, 임의로 징발하는 경우도 많았다.
국가 재정은 조세, 공물, 역 이외에 염전, 광산, 산림, 어장, 상인, 수공업자 등이 내는 세금으로 마련하였다. 국가는 재정을 군량이나 구휼미로 비축하고, 나머지는 왕실 경비, 공공 행사비, 관리의 녹봉, 군량미, 빈민 구제비, 의료비 등으로 지출하였다.
2. 양반과 평민의 경제 활동
양반 지주의 생활
양반의 경제 기반은 과전, 녹봉, 그리고 자신 소유의 토지와 노비 등이 있었다. 그들은 대부분 지주였으며, 주수입원은 토지와 노비였다. 특히, 양반 소유의 토지는 비옥한 토지가 많았던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지역에 집중되어 있었고, 규모가 커서 농장의 형태를 이루고 있었다.
양반은 자기 소유의 토지를 노비에게 직접 경작시켰다. 그러나 토지의 규모가 커서 노비의 노동력만으로 경작할 수 없으면 그 주변 농민에게 생산량을 절반씩 나누어 가지는 병작반수의 형태로 소작을 시켰다. 양반은 자기 토지가 있는 지역에 집과 창고를 지어 놓고 직접 노비를 감독하고 농장을 살피기도 하였지만, 대개 친족을 그 곳에 거주시키면서 대신 관리하게 하였다. 때로는 노비만 파견하여 농장을 관리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런 농장은 15세기 후반에 이르러 더욱 증가하였다. 농장주들은 유망민을 모아 자신 소유의 노비처럼 만들어 자신의 토지를 경작하게 하였다.
조선 전기에 양반은 10여 명에서 많게는 300여 명이 넘는 노비를 소유하고 있었다. 이들은 노비를 사기도 하였지만, 주로 자신이 소유한 노비가 출산한 자녀는 노비가 되는 법에 따라 노비 수를 늘리기도 하고, 자신이 소유한 노비를 양인 남녀와 혼인을 시켜 늘리기도 하였다.
양반은 노비에게 가사를 돌보게 하거나 농경에 종사시키고, 옷감을 짜게 하였다. 다수의 노비는 주인과 따로 살며 주인의 땅을 경작하거나 관리하는 일을 하였다. 양반은 이들 외거 노비에게 매년 신공으로 포와 돈을 거두었다. 이런 경제 기반을 바탕으로 양반은 풍요로운 생활을 할 수 있었다.
농민 생활의 변화
정부는 세력가들이 농민의 토지를 빼앗는 행위를 엄격히 규제하고 농업을 권장하였다. 농민도 농업 생산력을 향상시키려고 노력한 결과, 농민 생활은 이전보다 나아졌다.
정부는 개간을 장려하고, 각종 수리 시설을 보수, 확충하는 등 안정적으로 농사지을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또, 농업 생산력을 높이기 위하여 농사직설, 금양잡록 등 농서를 간행, 보급하였다. 특히, 농사직설은 우리 나라 풍토에 맞는 씨앗의 저장법, 토질의 개량법, 모내기법 등 농민의 실제 경험을 종합하여 편찬하였다. 양반도 간이 수리 시설을 만들고, 중국의 농업 기술을 도입하는 등 농업에 관심이 높았다.
밭농사는 조, 보리, 콩의 2년 3작이 널리 행해졌으며, 논농사도 남부 지방에서 모내기가 보급되어 벼와 보리의 이모작이 가능해 생산량을 증가시킬 수 있었다. 모내기는 봄가뭄에 따른 수리 문제 때문에 남부 일부 지역으로 제한되었다. 시비법도 발달하여 밑거름과 덧거름을 주게 되면서 경작지를 묵히지 않고 계속해서 농사지을 수 있었다. 쟁기, 낫, 호미 등 농기구도 개량되었다. 목화 재배도 확대되어 의생활이 개선되었으며, 약초와 과수 재배 등이 확대되었다.
이런 농업 기술의 발달에도 불구하고 농민 생활은 쉽게 나아지지 않았다. 지주제가 점차 확대되면서 농민이 자연 재해, 고리대, 세금 부담 등으로 자기 소유의 토지를 팔고 소작농이 되는 경우가 증가하였다. 이들은 지주에게 소작료로 수확의 반 이상을 내야 하는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었다.
토지를 상실한 농민이 고향을 떠나 떠돌아다니게 되자, 정부에서도 대책을 마련하였다. 정부는 잡곡, 도토리, 나무 껍질 등을 가공하여 먹을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는 동시에, 호패법, 오가작통법 등을 강화하여 농민의 유망을 막고 통제를 더욱 강화하였다. 지주인 지방 양반도 향약을 시행하여 농촌 사회를 안정시키려 하였다.
수공업 생산 활동
조선은 고려보다 관영 수공업 체제를 잘 정비하였다. 전문적인 기술자를 공장안에 등록시켜 서울과 지방의 각급 관청에 속하게 하고, 이들에게 관청에서 필요한 물품을 제작, 공급하게 하였다. 관청에 등록된 장인(관장)들은 의류, 활자, 화약, 무기, 문방구, 그릇 등을 제조하여 납품하였다. 이들은 근무하는 동안에 식비 정도만 지급받았기 때문에, 자신의 책임량을 초과한 생산품에 대해서는 세금을 내고 판매하여 가계를 꾸렸다. 이 기술자들은 부역으로 동원되는 기간 이외에는 사적으로 물건을 만들어 팔 수 있었다. 관영 수공업은 16세기에 들어와 부역제가 해이해지고 상업이 발전하면서 점차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관영 수공업자 이외에 민영 수공업자도 있었는데, 이들은 주로 농민을 상대로 농기구 등의 물품을 만들어 공급하였고, 양반의 사치품도 생산하였다. 이 밖에, 농가에서 자급자족의 형태로 생활 필수품을 만드는 가내 수공업이 있었다. 의류로서 무명, 명주, 모시, 삼베 등이 생산되었는데, 특히 목화 재배가 확대 보급되면서 무명 생산이 점차 증가하였다.
상업 활동
조선은 고려보다도 상업 활동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였다. 한양으로 천도하면서 종로 거리에 상점가를 만들었다. 여기에 개경에 있던 시전 상인을 한양으로 이주시켜 장사하게 하는 대신에 점포세와 상세를 거두었다. 시전 상인은 왕실이나 관청에 물품을 공급하는 대신에 특정 상품에 대한 독점 판매권을 부여받았다. 이들 시전 중에서 명주, 종이, 어물, 모시, 삼베, 무명을 파는 점포가 가장 번성하였는데, 후에 이를 육의전이라 하였다. 또, 이들의 불법적인 상행위를 통제하기 위하여 경시서를 두었다.
15세기 후반부터 등장하기 시작한 장시는 서울 근교와 지방에서 농업 생산력의 발달에 힘입어 증가하였다. 농민이 농업을 버리고 상업에 몰릴 것을 염려한 정부에서는 장시의 발전을 억제하였으나, 일부 장시는 정기 시장으로 정착해 갔다. 16세기 중엽에 이르러 장시는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보부상은 장시에서 농산물, 수공업 제품, 수산물, 약재 등을 판매하여 유통시켰다.
한편, 정부는 조선 초기에 저화, 조선통보 등을 만들어 유통시키려 하였으나 부진하였다. 농민은 화폐로 쌀과 무명을 사용하였다.
조선은 기본적으로 주변 국가와의 무역을 통제하였다. 그러나 명과는 사신이 왕래할 때에 하는 공무역과 사무역을 허용하였다. 여진과는 국경 지역에 설치한 무역소를 통하여 교역하였고, 일본과는 동래에 설치한 왜관을 중심으로 무역하였다. 그러나 국경 부근에서 이루어지는 사무역은 엄격하게 감시를 받았는데, 이 때 주로 거래된 물화는 무명과 식량이었다.
수취 제도의 문란
16세기에 이르러 수취 제도의 운영 과정에서 폐단이 심해지면서 몰락하는 농민이 증가하였다. 공납에서는 중앙 관청의 서리가 공물을 대신 내고 그 대가를 많이 챙기는 방납이라는 폐단이 나타났다. 방납이 증가할수록 농민의 부담도 증가하였다. 공물의 부담을 감당하지 못한 농민이 도망을 하면 그 지역의 이웃이나 친척에게 대신 내게 하였다. 이 때문에 유망 농민이 더욱 증가하였다.
농촌 사회를 안정시키기 위하여 공납의 폐단을 개선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어떤 지역에서는 공물을 현물 대신 쌀로 거두는 수령도 나타났고, 이이와 유성룡 등은 공물을 쌀로 거두는 수미법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또, 농민 생활이 어려워지고 요역 동원으로 농사에 지장을 가져오자, 농민은 요역 동원을 기피하였다. 이에, 농민 대신에 군인을 왕릉 축조, 성곽 보수 등 각종 토목 공사에 동원하게 되었다. 그러나 군인도 이런 힘든 군역을 기피하였다. 장기간 평화가 지속되면서 관청이나 군대에서 군역에 복무해야 할 사람에게 포를 받고 군역을 면제해 주는 방군수포와 다른 사람을 사서 군역을 대신하게 하는 대립이 불법적으로 행해졌다. 이에 군포 징수제가 점차 확산되어 갔다.
그러나 군포 부담의 과중과 군역 기피 현상으로 도망하는 자가 늘어나면서 군적도 부실해졌다. 각 군현에서는 정해진 액수를 맞추기 위해서 남아 있는 사람에게 그 부족한 군포를 부담시키자, 남은 농민도 생활이 더욱 어려워졌다.
환곡제는 농민 생활을 안정시키기 위하여 곤궁한 농민에게 곡물을 빌려 주고 10분의 1 정도의 이자를 거두는 제도였다. 그러나 지방 수령과 향리들은 정한 이자보다 많이 거두어 사적으로 사용하는 폐단이 나타났다.
이런 변화 과정에서 농민 생활이 악화되어 각 지방에서 유민이 증가하였다. 유민 중 일부는 도적이 되어 양반과 중앙 정부로 바치는 물품을 빼앗기도 하였으며, 이들이 도성에까지 출현하는 사건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그 중에서 명종 때 황해도와 경기도 일대에서 활동한 임꺽정은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4. 근대 태동기의 경제
1. 수취 체제의 개편
농촌 사회의 동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농촌 사회는 심각하게 파괴되었다. 수많은 농민이 전란 중에 사망하거나 피난을 가고 경작지는 황폐화되었다. 게다가 굶주림과 질병까지 널리 퍼져서 농촌 생활의 어려움은 극에 달하였지만, 농민의 조세 부담은 줄어들지 않았다.
이 같은 상황에서도 양반 지배층은 정치적 다툼에 몰두하여 민생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지배층에 실망한 농민들은 불만을 드러내고 도적이 되기도 하였다. 이에, 국가는 수취 체제를 개편하여 농촌 사회를 안정시키고 재정 기반을 확대하려 하였다. 그것은 전세 제도, 공납 제도, 군역 제도의 개편으로 나타났다.
전세의 정액화
양 난 이후 조선 정부의 가장 큰 어려움은 농경지의 황폐와 전세 제도의 문란이었다. 임진왜란 직전 전국의 토지 결수는 150만 결이었는데, 직후에는 20여만 결로 크게 줄었다. 이에 정부는 개간을 권장하면서 서둘러 경작지를 확충하고자 하였다. 또, 전세를 확보하기 위하여 토지 조사 사업도 서둘렀다. 이것은 토지 대장인 양안에서 빠진 토지를 찾아 내어 전세의 수입원을 증대시키려는 의도에서 시행되었다.
이런 정책으로는 농민의 삶을 향상시킬 수 없었다. 농민은 자신들의 고통을 줄여 주는 정책을 기대하였다. 이에, 정부는 연분9등법을 따르지 않고 풍년이건 흉년이건 관계 없이 전세를 토지 1결당 미곡 4두로 고정시켰다. 이를 영정법이라 한다(1635).
이러한 개편으로 전세의 비율이 이전보다 더욱 낮아졌다. 그러나 대다수의 농민에게 크게 도움이 되지 못하였고, 오히려 부담이 더 늘어났다. 전세를 납부할 때에 여러 명목의 수수료, 운송비, 자연 소모에 대한 보충 비용 등이 함께 부과되었기 때문인데, 그 액수가 전세액보다 훨씬 많아 때로는 전세액의 몇 배가 되기도 하였다.
공납의 전세화
당시 농민에게 가장 큰 부담을 주던 것은 공납이었다. 특히, 방납의 폐해가 나타나면서 농민의 부담은 더욱 커져 갔다. 부담을 견디지 못한 농민은 농토를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농민의 토지 이탈은 농촌 경제의 파탄으로 인한 결과이지만, 일종의 조세 저항이기도 하였다.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정부의 재정 상태가 더욱 악화되어 가자, 부족한 국가 재정을 보완하고 농민의 부담을 경감시키기 위한 개혁이 제기되어 결국 대동법이 실시되었다. 대동법은 경기도에 시험적으로 시행되고, 이어서 점차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대동법은 집집마다 부과하여 토산물을 징수하던 공물 납부 방식을 토지의 결수에 따라 쌀, 삼베나 무명, 동전 등으로 납부하게 하는 제도였다.
농민은 대체로 토지 1결당 미곡 12두만 납부하면 되었다. 이 때문에 토지가 없거나 적은 농민에게 과중하게 부과되던 공물 부담은 없어지거나 어느 정도 경감되었다.
대동법이 실시되면서 공인이라는 어용 상인이 나타났다. 이들은 관청에서 공가를 미리 받아 필요한 물품을 사서 납부하였다. 공인이 시장에서 많은 물품을 구매하였으므로 상품 수요가 증가하였다. 농민도 대동세를 내기 위하여 토산물을 시장에 내다 팔아 쌀, 베, 돈을 마련하였다. 이와 같이 물품의 수요와 공급이 증가하면서 상품 화폐 경제가 한층 발전하였다.
그러나 이후 대동법의 운영 과정에서 폐단이 다시 나타나게 되면서 농민들은 다시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균역법의 시행
양 난 이후 5군영의 성립으로 모병제가 제도화되자, 군영의 경비를 마련하기 위하여 포를 내는 것으로 군역을 대신하는 수포군이 점차 증가하였다. 그러나 5군영은 물론, 지방의 감영이나 병영까지도 독자적으로 군포를 징수하면서 장정 한 명에게 이중 삼중으로 군포를 부담시키는 경우가 많았다. 그들이 바치는 군포의 양도 소속에 따라 2필 또는 3필 등으로 달랐다.
임진왜란 이후 납속이나 공명첩으로 양반이 되어 면역하는 자가 늘어나면서 군역의 재원은 점차 줄어드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전국의 장정 수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여, 재정 상태가 어려워지자 군포의 부과량을 점차 늘릴 수밖에 없었다.
군역의 부담이 과중해지자, 농민은 도망가거나 노비나 양반으로 신분을 바꾸어 군역을 피하는 경향이 더욱 심해졌다. 이에 군역의 폐단을 시정하려는 개혁 방안이 논의되고, 마침내 균역법이 시행되었다. 이로부터 농민은 1년에 군포 1필만 부담하면 되었다.
균역법의 시행으로 감소된 재정은 지주에게 결작이라고 하여 토지 1결당 미곡 2두를 부담시키고, 일부 상류층에게는 선무군관이라는 칭호를 주고 군포 1필을 납부하게 하였으며, 어장세, 선박세 등 잡세 수입으로 보충하게 하였다. 그러나 토지에 부과되는 결작의 부담이 소작 농민에게 돌아가고, 군적 문란이 심해지면서 농민의 부담은 다시 가중되었다.
2. 서민 경제의 발전
양반 지주의 경영 변화
양반은 양 난 이후 토지 개간에 주력하는 한편, 농민의 토지를 사들여 농토를 늘렸다. 그리고 토지를 소작 농민에게 빌려 주고 소작료를 받는 지주 전호제로 경영하였는데, 이러한 현상은 18세기 말에 이르러 일반화되었다.
상품 화폐 경제가 발달하면서 지주 전호제도 변화해 갔다. 양반은 양반과 지주라는 신분적이며 경제적인 지위를 이용하여 소작료와 그 밖의 부담을 마음대로 강요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점차 소작인의 저항이 심해지자, 소작인의 소작권을 인정하고 소작료도 낮추거나 일정액으로 정하는 추세가 나타났다. 지주 전호제가 지주와 전호 사이의 신분적 관계보다 경제적 관계로 바뀌어 갔다.
대체로, 양반은 소작료를 거두어 생활하거나 이 소작료로 받은 미곡을 시장에 팔아 이득을 남겼다. 또, 토지에서 생기는 수입으로 토지 매입에 더욱 열을 올렸다. 그리하여 천석꾼, 만석꾼이라고 불리는 지주도 나타났다.
양반 중에는 물주로서 상인에게 자금을 대거나 고리대를 하여 부를 축적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경제적 변동 과정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여 몰락하는 양반도 나타났다.
농민 경제의 변화
농민은 황폐한 농토를 다시 개간하고 수리 시설을 복구하였으며, 생산력을 높이기 위하여 농기구와 시비법을 개량하고, 새로운 영농 방법을 시도하였다.
모내기법을 확대하여 벼와 보리의 이모작으로 단위 면적당 생산량을 증가시켜 소득을 증대하였다. 이모작이 널리 행해지면서 보리 재배가 확대되었고, 논에서의 보리 농사는 대체로 소작료의 수취 대상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소작농들은 보리 농사를 선호하였다.
농민은 농업을 경영하는 방식도 변화시켰다. 모내기법으로 잡초를 제거하는 일손을 덜 수 있게 되자, 농민은 경작지의 규모를 확대하였다. 지주들도 직접 경작하는 토지를 넓혔지만, 자작농은 물론 일부 소작농도 더 많은 농토를 경작하여 재산을 모을 수가 있었다. 이전보다 넓은 농토를 경작할 수 있게 된 광작 농업으로 농가의 소득이 늘어나 부농이 될 수 있었다.
또, 농민들은 시장에 팔기 위한 작물을 재배하여 가계 수입을 증가시켰다. 장시가 점차 증가하여 상품의 유통이 활발해짐에 따라, 농민은 쌀, 목화, 채소, 담배, 약초 등을 재배하여 팔았다. 특히, 쌀의 상품화가 활발하였다. 쌀은 이 시기에 이르러 그 수요가 크게 늘어나 장시에서 가장 많이 거래되었다. 쌀의 수요가 늘면서 밭을 논으로 바꾸는 현상이 활발하였다.
소작 농민은 좀더 유리한 경작 조건을 얻어 내기 위하여 지주에게 대항하여 소작 쟁의를 벌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소작권을 인정받아 지주가 함부로 소작지를 빼앗지 못하고, 수확량의 반을 내던 소작료도 일정 액수를 곡물이나 화폐로 내도록 하는 변화가 나타났다. 소작농이라도 상품 작물을 재배하거나 소작권을 인정받고 소작료도 일정 액수만 내게 되면서, 근면하고 시장 경제를 잘 이용하는 농민은 점차 소득을 증가시킬 수 있었다. 그리하여 일부 농민은 토지를 개간하거나 매입하여 지주가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일부 농민이 소득을 증대시켜 부자가 되는 경우도 있지만, 토지를 잃고 몰락해 가는 농민도 증가하였다. 부세의 부담, 고리대의 이용, 관혼상제의 비용 부담 등으로 견딜 수 없게 된 가난한 농민은 헐값에 자신의 토지를 내놓았다. 양반 관료, 토호, 상인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토지를 매입하였다.
광작이 가능해지면서 대부분의 농토를 소작시키고 일부 농토만 직접 경영하던 지주도 소작지를 회수하여 노비를 늘리거나 머슴을 고용하여 직접 경영하였다. 이 때문에 소작 농민은 소작지를 잃기는 쉬워지고 얻기는 더욱 어려워졌다.
농촌을 떠난 농민은 도시로 옮겨 가 상공업에 종사하거나 임노동자가 되었으며, 광산이나 포구를 찾아 임노동자가 되었다. 그리하여 이 시기에 광산, 포구 등에는 새로운 도시가 형성되기도 하였다. 황해도의 수안, 충청도의 강경, 함경도의 원산 등이 그러한 곳이었다.
민영 수공업의 발달
조선 후기에는 상품 화폐 경제가 진전되면서 시장 판매를 위한 수공업 제품의 생산이 활발해졌다. 이 시기는 도시의 인구가 급증하여 제품의 수요가 크게 늘어났고, 대동법의 실시로 관수품의 수요도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민간 수공업자들은 장인세만 부담하면 비교적 자유롭게 생산 활동에 종사할 수 있었으며, 그들의 제품은 품질과 가격면에서 관영 수공업장에서 만든 제품에 비해 경쟁력도 높았다.
민간 수공업자의 작업장은 흔히 점(店)으로 불리어 철기 수공업체는 철점, 사기 수공업체는 사기점이라 하였다.
민간 수공업자들은 대체로 작업장과 자본의 규모가 소규모여서 원료의 구입과 제품의 처분에서 상업 자본의 지배를 받았다. 대부분 공인이나 상인에게 주문을 받는 데에 그치지 않고, 자금과 원료를 미리 받아 제품을 생산하는 선대제가 성행하였다.
그러나 18세기 후반에 이르면서 수공업자 가운데서도 독자적으로 제품을 생산하고 이를 직접 판매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농촌의 수공업은 지금까지 자급자족을 위한 부업의 형태로 제조하였으나, 점차 소득을 올리기 위하여 상품으로 생산하는 경우가 늘었고, 더 나아가 전문적으로 생산하는 농가도 나타났다. 농촌에서는 주로 옷감과 그릇 종류가 생산되었다.
민영 광산의 증가
광산은 본래 정부가 독점하여 필요한 광물을 채굴하였다. 정부는 17세기 중엽부터 민간인에게 광산 채굴을 허용하고 세금을 받는 정책을 실시하였다. 이에 따라 민간인에 의한 광업이 활기를 띠게 되었다.
청과의 무역으로 은의 수요가 늘어나면서 은광의 개발이 활기를 띠었다. 그리하여 17세기 말에는 거의 70개소의 은광이 개발되었고, 18세기 말에는 상업 자본이 채굴과 제련이 쉬운 사금 채굴에 몰리면서 금광의 개발도 활발해졌다. 광산의 개발은 이득이 많았기 때문에 합법적인 경우가 있었지만, 몰래 채굴하는 경우도 성행하였다.
조선 후기의 광산 경영은 경영 전문가인 덕대가 대개 상인 물주에게 자본을 조달받아 채굴업자와 채굴 노동자, 제련 노동자 등을 고용하여 광물을 채굴하고 제련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 작업 과정은 분업에 토대를 둔 협업으로 진행되었다.
3. 상품 화폐 경제의 발달
사상의 대두
조선 후기에는 농업 생산력이 증대되고 수공업 생산이 활발해지면서 상품의 유통도 활성화되었다. 부세 및 소작료의 금납화, 인구의 자연 증가와 인구의 도시 유입도 상품 화폐 경제의 전진을 더욱 촉진하였다.
조선 후기 상업 활동의 주역은 공인과 사상이었다. 처음에는 공인이 상업 활동을 주도하였다. 그러나 18세기 이후에는 사상이 서울을 비롯한 각지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사상의 활동은 주로 칠패, 송파 등 도성 주변에서 이루어졌지만, 개성, 평양, 의주, 동래 등 지방 도시에서도 활발하였다. 그들은 각 지방의 장시를 연결하면서 물품을 교역하고, 각지에 지점을 두어 상권을 확장하였다.
개성의 송상은 전국에 지점을 설치하여 활동 기반을 강화하였는데, 주로 인삼을 재배, 판매하고 대외 무역에도 깊이 관여하여 부를 축적하였다. 경강 상인은 운송업에 종사하면서 거상으로 성장하였다. 그들은 선박의 건조 등 생산 분야에까지 진출하여 활동 분야를 넓히기도 하였다.
장시의 발달
조선 후기 사상의 성장은 이 시기에 전국적으로 발달한 장시를 토대로 하였다. 15세기 말 남부 지방에서 개설되기 시작한 장시는 18세기 중엽에 이르러서는 전국에 1000여 개소가 개설되었다.
장시는 지방민의 교역 장소로, 인근의 농민, 수공업자, 상인이 일정한 날짜에 일정한 장소에 모여 물건을 교환하였는데, 보통 5일마다 열렸다. 일부 장시는 상설 시장이 되기도 하였지만, 인근의 장시와 연계하여 하나의 지역적 시장권을 형성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18세기 말의 장시 중에서 광주 송파장, 은진 강경장, 덕원 원산장, 창원 마산포장 등은 전국적인 유통망을 연결하는 상업의 중심지로 발돋움하였다.
농촌의 장시를 하나의 유통망으로 연계시킨 상인은 보부상이었다. 이들은 생산자와 소비자를 이어 주는 데 큰 역할을 한 행상으로서, 장날의 차이를 이용하여 일정 지역 안이나 전국적인 장시를 무대로 활동하였다.
포구에서의 상업 활동
조선 후기에 들어 포구가 새로운 상업 중심지가 되었다. 포구의 상거래는 장시보다 규모가 훨씬 컸다. 종래의 포구는 세곡이나 소작료를 운송하는 기지의 역할을 했으나, 18세기에 이르러 강경포, 원산포 등이 상업의 중심지로 성장하였다. 포구를 거점으로 선상, 객주, 여각 등이 활발한 상행위를 하였다.
선상은 선박을 이용해서 각 지방의 물품을 구입해 와 포구에서 처분하였는데, 운송업에 종사하다가 거상으로 성장한 경강 상인이 대표적인 선상이었다. 그들은 한강을 근거지로 하여 주로 서남 연해안을 오가며 미곡, 소금, 어물 등을 거래하였다.
한편, 객주나 여각은 각 지방의 선상이 물화를 싣고 포구에 들어오면 그 상품의 매매를 중개하고, 부수적으로 운송, 보관, 숙박, 금융 등의 영업도 하였다. 객주와 여각은 지방의 큰 장시에도 있었다.
대외 무역의 발달
국내 상업의 발달과 때를 같이하여 대외 무역도 점차 활기를 띠었다. 17세기 중엽부터 청과의 무역이 활발해지면서, 국경 지대를 중심으로 공적으로 허용된 무역인 개시와 사적인 무역인 후시가 이루어졌다. 청에서 수입하는 물품은 비단, 약재, 문방구 등이었고, 수출하는 물품은 은, 종이, 무명, 인삼 등이었다.
한편, 17세기 이후로 일본과의 관계가 점차 정상화되면서 왜관 개시를 통한 대일 무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조선은 인삼, 쌀, 무명 등을 팔고, 청에서 수입한 물품들을 넘겨주는 중계 무역을 하기도 하였다. 반면에, 일본에서는 은, 구리, 황, 후추 등을 수입하였다.
이러한 국제 무역에서 사적인 무역이 허용되면서 상인이 무역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이들 중에서 두드러진 활동을 보인 상인은 의주의 만상과 동래의 내상이었으며, 개성의 송상은 양자를 중계하여 큰 이득을 남기기도 하였다. 특히, 의주의 만상은 대중국 무역을 주도하면서 재화를 많이 축적하였다.
화폐 유통
상공업이 발달함에 따라 교환의 매개로서 금속 화폐, 즉 동전이 자연스럽게 전국적으로 유통되었다. 정부도 화폐의 유통에 힘써 인조 때 동전을 주조하여 개성을 중심으로 통용시켜 그 쓰임새를 살펴보고, 효종 때에는 이를 널리 유통시켰다. 18세기 후반부터는 세금과 소작료도 동전으로 대납할 수 있게 하였다. 그리하여 누구나 동전인 상평통보만 가지면 물건을 살 수 있었다.
이 시기에 동전은 교환 수단일 뿐 아니라 재산 축적의 수단이기도 하였다. 동전의 발행량이 상당히 늘어났는데도 제대로 유통되지 않아 시중에서 동전 부족 현상이 나타났다. 이는 지주나 대상인들이 화폐를 고리대나 재산 축적에 이용하였기 때문이었다. 상품 화폐 경제가 발달하면서 환, 어음 등의 신용 화폐가 점차 보급되어 갔다. 이는 이 시기 상품 화폐 경제의 진전과 상업 자본의 성장을 보여 주는 것이다.
5. 근·현대의 경제
1. 외세의 경제 침략과 국민 경제의 모색
개항과 불평등 조약
1876년 개항 이후, 조선은 일본을 비롯하여 서양 여러 나라와 국교를 맺고 통상 교역을 시작하였다. 아울러 정부는 일본이나 청에 시찰단을 파견하고, 개혁을 전담할 기구를 설치하여, 기계 및 신기술을 도입하고 근대적 회사와 같은 새로운 경제 제도를 도입하고자 하였다. 이 같은 노력은 재정 부족과 경험 미숙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통상 교역은 외국 상인에게 유리하게 체결된 불평등 조약이어서 조선 상인의 피해가 많았다. 강화도 조약에서는 관세 부과에 관한 규정이 없었으며, 조약이 개정된 후에도 아주 낮은 관세만을 부과할 수 있었다. 1880년대 들어서는 외국 상인이 나라 안을 자유롭게 다니며 영업하였는데, 이들이 저지르는 불법 활동에 대해서 거의 처벌을 할 수 없었다. 또, 거래에 외국 화폐를 사용할 수 있다는 조항도 있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외국의 값싼 공산품이 들어오고, 국내의 곡물이 대량으로 수출되는 무역 구조가 형성되어 갔다.
외국 상인의 침투와 무역의 확대
개항 직후의 무역은 거의 일본 상인이 주도하였으나, 1880년대 이후에는 청에서 온 상인이 가담하여 경쟁하였다. 이 과정에서 해외 소식에 밝지 못하고 근대적 운송 수단이 부족했지만, 조선 상인 중에서도 개항장을 중심으로 무역 활동에 참여하는 상인이 등장하였다.
일본과 청의 상인들은 처음에는 주로 영국산 면제품을 사들여 와 조선에 되팔고 조선의 쇠가죽, 쌀, 콩, 금 등을 가져갔다. 1890년대 후반부터 일본 상인은 일본산 면제품을 비롯한 여러 종류의 공산품을 들여왔다.
교역의 확대는 경제 생활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특히, 교역이 면제품을 들여오고 곡식을 가져가는 구조로 이루어져 폐단이 매우 컸다. 값싼 외국산 면제품은 가내 수공업 위주로 이루어진 국내의 면공업 발전에 결정적 타격을 주었고, 이에 따라 농민의 수입도 줄어들었다. 또, 일본으로 쌀의 유출이 크게 늘어나면서, 쌀 부족과 쌀값 인상에 따른 전반적인 물가 인상이 나타나 도시나 농촌의 가난한 사람은 생계를 위협받을 정도로 타격을 입었다. 수출보다 수입이 많아 귀금속이 대량으로 유출되었으며, 부유층을 중심으로 사치 풍조가 확산되었다.
그러나 일부 지주와 상인은 쌀 수출에 적극 가담하여 많은 이익을 얻었고, 이를 다시 토지 매입에 투자하거나 불법적인 방법을 통해 토지를 획득함으로써 대지주로 성장해 갔다. 또, 외국에서 실을 사 들여와 면직물을 제조하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각국의 내정 간섭과 이권 침탈
청과 일본은 정치·군사적인 위협을 병행하여 자국 상인을 보호하면서 경제적 이권을 빼앗아 갔다. 임오군란 직후 청은 불평등한 조약을 강요하여 외국 상인이 서울에 점포를 열고 국내 곳곳을 다니며 영업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일본은 청·일 전쟁을 도발하면서 철도 부설권 등 이권 탈취에 앞장섰다.
1896년에 고종이 일본의 위협을 피해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겨 가자, 제국주의 국가들의 내정 간섭이 본격화되었다. 이 시기에 외국인에 의한 광산 채굴권과 삼림 벌채권, 교통이나 통신 시설 부설권 등 경제적 이권 탈취가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다.
아관 파천 이후 정치적 영향력이 커진 러시아는 러시아 인을 재정, 군사 고문으로 앉히고 광산 채굴권이나 삼림 벌채권을 차지하였다. 미국은 운산 금광 등 광산 채굴권과 철도, 전기 등의 이권을 차지하였으며, 영국, 프랑스, 독일도 여러 이권을 차지하였다. 특히, 일본은 대륙 침략을 위해 우리 나라의 남북을 연결할 철도 부설에 주력하였는데, 결국 서울과 부산, 서울과 의주, 서울과 인천을 잇는 철도 부설권을 모두 차지하였다.
당시 우리의 손으로 자립적인 국민 경제를 형성할 기회를 가졌지만, 외국의 이권 침탈로 그 기회를 상실하였다.
정부와 민간의 식산 흥업 노력
대한 제국기에 들어 외세의 경제 침탈을 막고 근대적인 국민 경제를 수립하기 위한 노력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서구 자본주의의 영향으로 정치 및 행정을 맡은 경제 관료들을 중심으로 식산 흥업 정책이 추진되었다.
정부는 전환국을 설치하여 화폐 제도 개혁과 중앙 은행 설립을 추진하는 한편, 전·현직 관리와 민간의 자본을 모아 근대적 기업 설립에 나섰다. 또, 산업 기술 인력을 육성하기 위한 교육 기관 설립에도 적극적이었다. 토지나 광산 개발을 외국인에게 넘기지 않도록 한 뒤 독자 개발을 시도하였으며, 쌀의 유출을 막기 위한 방곡령도 시행하였다.
제조업자와 상인도 경제 발전에 적극 노력하였다. 농기구나 일용품을 만들던 철기 및 유기 제조업, 정미업, 직포 공업 등에서 공장을 늘리고 새로운 기계를 외국에서 들여오거나, 자본을 모아 합자 회사를 설립하기도 했다. 외국 상인의 침투에 맞서 상인들이 철시 투쟁을 벌였으며, 상인끼리 또는 상인과 관료가 함께 상회사나 금융 기관, 근대적 공장 설립에 나서는 경우도 있었다.
독립 협회나 황국 중앙 총상회 등과 같은 단체도 국내 산업 진흥과 상권 보호를 위한 다양한 방안을 제시하고, 외국의 이권 탈취 및 경제 침략을 저지하기 위한 활동을 벌이기도 하였다.
정부와 민간의 식산 흥업 노력이 성과를 거두기 위해서는, 독립국의 지위를 유지하면서 자본의 축적과 근대적 금융 제도를 확립해야 했다. 그러나 이 같은 조건이 갖추어지기 전에 일제의 침략으로 식산 흥업 노력은 좌절되었다.
자주적 근대화의 좌절
러·일 전쟁 중에 일제는 일본인을 재정 고문으로 임명하도록 강요하였다. 이후 일제는 국가의 모든 수입과 지출 과정을 장악하였으며, 여러 가지 방식으로 조세를 늘려 나갔다. 나아가, 황실의 수입을 국유화함으로써 황실을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또, 일본의 제일 은행이 중앙 은행 기능을 맡도록 하여 대한 제국의 금융 정책을 지배하였으며, 1905년에는 그 동안 사용하던 화폐를 새 화폐로 교환하게 하였다. 이 같은 과정을 거치면서, 국내의 상공업자나 금융 기관은 크게 위축되었다.
한편, 일제는 러·일 전쟁 중에 철도 부지와 군용지 확보를 구실로 국유지나 황실 소유의 토지를 빼앗았다. 이후 여러 가지 구실로 많은 토지를 국유지로 편입시키고, 동양 척식 주식 회사를 내세워 일본인이 토지를 늘릴 수 있도록 지원하였다.
러·일 전쟁 이후에 일제의 침략이 본격화되면서 대한 제국의 근대화 노력은 좌절되었다. 반면에, 일제는 식민지화를 위한 경제적 토대를 갖추어 갔다.
경제적 구국 운동의 전개
일제의 경제 침략이 본격화되자, 이에 반대하여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자는 경제적 구국 운동이 활발해졌다. 러·일 전쟁 때 일제가 황무지 개간을 구실로 막대한 국유지를 빼앗으려 하자, 보안회를 중심으로 강력한 반대 투쟁이 일어나 이 요구를 좌절시켰다.
1905년 이후에 일제 침략이 강화되고 경제가 어려워지자, 국권 회복의 일환으로 실력을 양성하기 위하여 회사 설립과 인재 육성에 나선 이들이 많았다.
1907년에는 국민 모금으로 정부가 진 빚을 갚아서 경제 자립과 국권 수호를 이룩하자는 국채 보상 운동이 일어났다. 이 운동은 상공인과 지식인들로부터 시작되어 전 국민으로 확산되었다. 이에 따라 많은 사람이 담배를 끊어 절약한 돈이나, 비녀와 가락지 등과 같은 패물을 팔아 마련한 돈을 성금으로 내어 활발한 운동을 전개하였으나, 일제의 방해로 큰 성과를 이루지 못하였다.
2. 일제의 경제 침탈과 민족 경제 운동
식민지 수탈 정책
대한 제국의 국권을 강제로 빼앗은 일제는 자신들의 경제적 기반을 확립하는 데 힘을 쏟았다. 일제의 목표는 경제 구조를 일제의 상품과 자본을 수출하고, 한국의 식량과 원료를 수탈할 수 있도록 바꾸는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토지 조사 사업, 임야 조사 사업을 실시하고, 회사령, 삼림령, 어업령, 광업령을 공포하였다.
1910년에 시작된 토지 조사 사업은 1912년 토지조사령을 공포하면서 본격화되었다. 이 사업은 토지의 소유권, 토지 가격, 지형 및 용도를 조사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총독부는 당사자가 소유권을 증명할 수 있을 때에만 소유권을 인정하고, 대한 제국 정부 소유지와 황실 소유지, 미신고 토지 및 소유 관계가 불분명한 토지 등은 강제로 빼앗았다. 또, 토지에 대한 지주의 권리만 일방적으로 인정하고 농민이 오랫동안 누려 왔던 관습적인 경작권을 부정하였다. 그 결과, 수많은 농민이 토지를 잃었고, 기한부 계약에 따라 지주의 토지를 빌려 경작하는 소작인이 늘어났다. 총독부는 지세 부과 대상을 크게 늘리고 토지 가격을 높이 책정하여 토지세를 더 많이 거두어들였다. 이렇게 거둔 토지세의 대부분은 식민 통치를 위한 비용으로 지출되었다.
이와 아울러 일제는 회사령을 공포하여, 회사를 설립하거나 해산할 때에 총독의 허가를 받도록 하였다. 이는 한국인의 기업 활동과 자본 축적을 억제함으로써 산업 구조를 일제의 의도에 따라 재편하기 위한 것이었다.
농민과 노동자에 대한 수탈
1910년대 말,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면서 빠르게 성장하던 일본 경제는 침체에 빠졌다. 그러자 일제는 식량과 공업 원료를 한국에서 값싸게 공급받고, 일본 기업의 한국 침투를 돕기 위한 조치를 잇따라 시행하였다.
1920년부터 시작된 산미 증식 계획은 더 많은 쌀을 일본으로 가져가기 위해 추진되었다. 이 사업은 수리 시설의 확대와 품종 교체, 화학 비료 사용 증가 등을 통해 이루어졌는데, 대부분의 지주는 다소 이익을 보기도 했지만, 소작농은 수리 조합비나 비료 대금을 비롯한 각종 비용 부담이 늘어나면서 많은 고통을 겪었다. 결국 지주는 빠르게 토지 소유를 확대해 나갈 수 있었으나, 자작농이나 자·소작농은 토지를 잃고 소작농이나 화전민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또, 늘어난 생산량보다 더 많은 양의 쌀이 일본으로 실려 나갔다.
한편, 1920년에 일제가 회사 설립을 신고제로 바꾼 이후, 면방직이나 식료품 공업, 광업 분야에 일본 자본의 침투가 늘어나면서 노동자의 수도 크게 증가하였다. 일제는 일본 자본의 높은 이윤을 보장하기 위해 한국인 노동자의 탄압을 일삼았는데, 한국인 노동자는 장시간 노동과 저임금, 민족 차별까지 받으며 혹사당했다.
일제의 병참 기지화 정책과 군수 공업화
1930년대 이후에 일본 자본의 침투가 크게 늘어났다. 총독부가 일본은 발전된 공업 지역으로 유지하면서, 만주는 농업과 원료 생산 지대로 만들고, 한국은 경공업 중심의 중간 지대로 만들기 위해 조선 공업화 정책을 폈기 때문이었다.
주로 한반도의 북부를 중심으로 추진된 조선 공업화 정책은 대륙 침략을 위한 전쟁 물자 생산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면서 추진되었다. 일제는 전력 자원을 개발하고, 토지와 노동력을 값싸게 공급하였으며, 광산 자원을 약탈하였다. 이 과정에서 일본 대자본이 활발하게 침투하면서, 북부 지방을 중심으로 금속, 화학 등 중화학 공업이 빠르게 성장하였다.
총 생산액에서 공업이 차지하는 비중도 크게 늘어났다. 그러나 회사 자본의 대부분은 일본인이 소유하고 있었으며, 경영진, 상급 기술자도 일본인이 주를 이루었다. 반면에, 한국인 노동자는 최소한의 노동 기본권도 보장받기가 어려웠으며, 임금과 승진에서도 여러 가지 차별을 받았다. 결국, 조선 공업화 정책은 한국인의 노동력과 자원을 수탈하여 일본 자본의 이익을 극대화해 나가는 하나의 과정에 지나지 않았다.
민족 경제 운동
일제 강점기에 농민은 높은 소작료와 불안정한 소작 기간 등으로 어려움을 겪고, 노동자는 저임금과 고용 불안 등으로 큰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총독부는 쌀의 반출을 위해 지주를 지원하고, 일본 자본의 이윤 확대를 위해 노동자를 탄압하였다. 이에, 농민과 노동자는 소작 쟁의나 노동 쟁의를 일으켰는데, 이는 생존권 투쟁이자 경제적 민족 운동이었다.
1920년을 전후하여 많은 한국인이 기업 활동에 참여하였다. 농업 경영과 상업 활동을 통해 부를 축적한 지주나 상인 중에서 일부가 회사 설립에 참여하였다. 그들은 경성 방직 주식 회사나 여러 곳의 고무 공장, 평양의 메리야스 공장 등을 경영하였다.
한국인의 기업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민족 기업을 육성하여 경제 자립을 이루자는 물산 장려 운동이 일어났다. 이 운동은 1920년대 초부터 “내 살림 내 것으로”라는 구호를 내걸고, 평양에서 시작되어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그러나 한국인이 경영한 기업이 총독부의 지원을 받는 일본인 대자본과 경쟁하기는 어려웠다. 그러므로 한국인의 기업 활동은 경쟁이 심하지 않은 분야에서 기업을 운영하거나, 가내 수공업과 연계를 맺으면서 중소 규모의 공장을 운영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전시 총동원 체제와 식민지 경제의 파탄
1941년에 일제는 미국 해군 기지가 있던 하와이의 진주만을 기습하여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면서, 징병과 징용을 통하여 우리 나라 사람들을 강제 동원하였다. 전쟁 말기에는 군수 물자 생산에 집중하기 위해 경제 활동에 대한 통제를 크게 강화하는 등 전시 동원 체제를 실시하였다. 세금을 늘리고 저축을 강요하여 마련된 자금은 군수 기업에 집중적으로 지원되었다. 또, 광산이나 군수 공장으로 한국인 노동자를 강제 동원하기도 하였다.
물자 부족이 심화되자 일제는 군수 산업 이외의 기업 활동을 통제하기도 하였으며, 광물 자원의 약탈은 물론 학교의 철문이나 집안의 숟가락까지 강제로 빼앗아 갔다. 이 과정에서 한국인이 경영하던 기업 중에 문을 닫는 경우도 있었으며, 징병과 징용으로 끌려간 이들의 빈자리를 메워야 했던 사람도 심한 고통을 겪었다.
3. 현대의 경제 성장과 자본주의의 발달
8·15 광복과 새로운 경제 질서 형성
8·15 광복은 우리 손으로 국가를 수립하고 일제 지배의 잔재 청산과 각종 개혁 실시 및 제도 정비 등을 수행할 출발점이었다. 그러나 남북 분단과 정치적 혼란으로 경제적 어려움은 가중되었다.
광복 직후에 주로 일본 자본으로 운영되던 많은 기업이 원료와 기술, 자본 부족의 어려움으로 공장의 문을 닫아야 했다. 더욱이 미군정하에서는 물가가 계속 치솟고, 심각한 생필품 부족 사태가 벌어져 경제가 어려워졌다. 또, 북한의 전기 공급 중단으로 남한의 경공업 중심의 경제는 큰 타격을 받았다.
정부 수립 이후에 농지 개혁과 귀속 재산 불허가 시작되면서 자본주의 경제 체제가 서서히 자리잡기 시작하였다. 농지 개혁은 토지 개혁을 요구하는 사회적 요구에 따라 정부 수립 후 농지개혁법이 제정되면서 실시되었다. 유상 매수, 유상 분배를 원칙으로 이루어진 농지 개혁으로 인해 소작 제도가 폐지되고 농사를 짓는 사람이 토지를 소유하는 원칙이 수립되어 일제 강점기 이래 높은 소작률로 고통을 받던 농민에게 희망을 주어 근대 농업 경제 발전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미군정이 접수했던 귀속 재산을 민간에 불허하는 정책도 추진되었다. 이에 따라 1950년대 중반에 이르면 상당수의 기업이 민간에 넘어가 개인 소유 기업으로 바뀌어 산업 자본 형성에 기여하게 되었다.
6·25 전쟁의 피해와 원조 경제
1950년에 일어난 6·25 전쟁은 한국 경제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도로, 철도 등 물류 교통 시설이 파괴되었고, 제조업도 생산 시설의 절반이 파괴될 정도였다. 전쟁 중에는 물론, 전후 복구 기간에도 미국은 많은 경제 원조를 제공했는데, 원조는 주로 식료품, 농업 용품, 피복, 의료품 등 소비재와 면방직, 제당, 제분 공업의 원료에 집중되었다.
미국의 원조 물자로 식량이나 생활 필수품이 대량 공급되어 물자 부족이 해소되고, 소비재 공업도 성장하였다. 그러나 밀이나 면화 같은 농산물이 값싸게 들어와 당시 농촌 경제는 타격을 입었다.
1950년대 후반에 미국의 경제 원조가 차관으로 전환되면서 원조에 의존했던 한국 경제는 고충을 받았다. 공장의 가동률이 떨어지면서 많은 중소 기업이 파산했으며, 서민의 생활은 어려움을 겪었다.
경제 개발 계획의 추진과 고도 성장
4·19 혁명 이후 정부는 자립 경제 건설을 목표로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을 수립하였다. 그러나 본격적인 경제 성장은 5·16 군사 정변 이후 새로 수립된 제1차(1962~1966), 제2차(1967~1971)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이 추진되면서 이루어졌다. 이 기간에 경제 성장률이 매년 10% 안팎에 이를 정도로 고도 성장이 이루어지고, 광·공업의 비중이 높아지는 등 경제 구조의 변화도 뚜렷해졌다.
이 시기의 경제 성장은 외국에서 도입한 차관과 국내의 풍부한 노동력을 결합시켜 섬유, 신발 등 경공업 제품을 만들어 수출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정부는 수출 산업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한편, 수출품의 가격 경쟁력을 위해 저임금 정책을 펼쳤다.
1970년 무렵에는 갚아야 할 차관의 원금과 이자가 늘어나고 경공업 제품의 수출이 차츰 벽에 부딪히면서, 그 동안 이룩해 온 경제 성장은 위기를 맞아 정책을 재조정할 필요가 있었다. 이에, 정부는 외국인의 직접 투자 유치, 기업에 대한 각종 특혜 제공, 중화학 공업화 정책의 추진 등으로 문제를 해결하였다. 이에 따라 마산, 이리(익산)에 수출 자유 지역이 만들어져 많은 외국인 기업이 들어섰다. 또, 울산, 포항, 창원, 여천(여수), 구미 등에 새로운 공업 단지를 조성하여 철강, 조선, 기계, 전자, 비철금속, 석유 화학 등 중화학 공업 등이 크게 발전하였다. 그 결과, 1970년대 중반부터 중화학 공업 제품의 비중은 전체 제조업 분야와 수출 상품 구성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
한편, 정부는 경부 고속 국도를 비롯한 도로와 항만 등 사회 간접 시설을 확충하여 전국을 일일 생활권으로 만들었다. 이로 인해 물류의 유통이 원활해져 산업의 발전이 가속화되었다. 또, 녹색 혁명의 기치 아래 간척 사업과 작물의 품종 개량도 실시하여 식량 생산이 늘어났다.
경제 위기 극복과 경제력 집중
1970년대 말에 이르러 석유 위기가 발생하여 세계 경제가 침체되면서 외국 자본과 대외 무역에 의존하던 한국 경제는 위기를 맞았다. 특히, 정부의 적극적인 중화학 공업화 정책에 따라 많은 기업이 경쟁적인 과잉 투자를 함으로써 경제 위기는 더욱 심각해졌다.
1980년대 초, 전두환 정부는 경제 안정화 정책을 내세워 구조 조정에 적극 개입하였다. 또, 과잉 투자 조정과 부실 기업 정리, 재정·금융의 긴축 정책 실시 등을 단행하여 경제 활성화에 기여하였다.
그 결과, 1980년대 중반에 한국 경제는 안정되었고, 저금리, 저유가, 저달러의 3저 호황을 맞아 자동차, 가전 제품, 기계, 철강 등 중화학 분야를 주력으로 한 고도 성장을 계속해 나갈 수 있었다.
경제 성장과 함께 경제력의 집중도 심화되었다. 그 결과, 소수의 대기업은 자본력을 토대로 사업 분야를 확대하여 영향력을 키워 간 반면, 중소 기업은 자본의 취약성으로 경쟁에서 뒤처지는 현상을 가져왔다. 특히, 세계 경제 구도가 고도의 기술력을 중심으로 재편되는 과정에서 한국 기업들의 독자 기술 개발 능력이 부족하여 경쟁력의 위기를 겪기도 하였다.
산업화의 진전과 경제적 갈등
‘한강의 기적’이라고 일컬어지는 고도 성장으로 제조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게 늘어났고, 산업별 인구 구성도 크게 바뀌었다. 특히, 전통적인 농업 사회가 해체되면서 대다수의 인구가 도시에서 생활하게 되었고, 노동자의 비중도 크게 늘어났다.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으로 국민 총생산은 연평균 9% 이상 높은 성장률을 이룩하였고, 수출 신장률도 거의 4%에 육박하였다. 이어, 국민 소득도 증대되고, 수출 상품도 다양화되었으며, 수출 대상 지역도 종전과는 달리 널리 확대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산업화 과정에서 농촌의 희생도 있었다. 농촌은 1950년대에는 값싼 외국 농산물의 원조로 인해 큰 타격을 받았고, 1960년대에는 낮은 농산물 가격 정책으로 인해 어려움에 처했다. 이에 따라 많은 농민이 도시로 이주하게 되었는데, 이는 도시 빈민이나 실업자의 증가로 이어졌다.
제조업에 종사했던 많은 노동자는 산업화 과정에서 나쁜 작업 환경 아래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이라는 악조건에 시달려야 했다. 물가 상승으로 인해 명목 임금은 계속 올라갔지만 실질 임금의 증가율은 노동 생산성의 증가율에 미치지 못하는 한계를 보이기도 하였다. 또, 땅값과 집값, 전세 및 월세 상승, 물가 상승 등으로 서민의 생활이 어려워지기도 하였다.
세계 속의 한국 경제
1960년대부터 계속된 고도 성장으로 경제 규모는 비약적으로 커졌다. 무역 규모의 확대로 세계 경제에서 차지하는 한국의 비중은 크게 늘어났다. 기업의 해외 진출도 빠르게 늘어났으며, 우리 나라 제품이 세계 여러 나라에서 팔리고 있다. 한편, 우리 나라는 원조를 받던 나라에서 원조를 제공하는 나라로 바뀌었다. 이러한 한국 경제의 성장은 적극적인 외자 도입과 수출 주도의 성장 정책 추진 등 세계 경제와의 밀접한 관련 속에서 이루어졌다.
한편, 1994년에 타결된 우루과이 라운드 협정과 다음 해에 세계 무역 기구(WTO)가 출범하자, 상품과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을 중시하는 새로운 국제 무역 질서가 수립되었다. 이로써 국제 무역 경쟁은 더욱 치열해지고 있으며, 우리 나라에 대한 세계 각국의 시장 개방 요구도 더욱 거세지고 있다.
이러한 수입 개방 추세로 인하여 농업을 비롯한 1차 산업은 큰 타격을 받았다. 우리 나라는 수입 자유화에 대응하여 1차 산업의 구조 조정을 추진하고 있으며, 다른 나라들과 자유 무역 협정을 체결하여 수출을 증대시키려고 노력하고 있다.
21세기 선진 복지 경제를 위한 노력
1997년에 우리 나라는 국제 통화 기금(IMF)을 비롯한 국제 사회로부터 급하게 돈을 빌려 외환 위기를 극복한 경험이 있다. 외국에 갚아야 할 외환 부족으로 시작된 위기는 많은 기업의 도산과 대량 실업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이러한 위기를 국민의 헌신적인 노력과 정보 통신 기술, 자동차 공업, 선박 제조업, 반도체 생산 등과 같은 새로운 산업의 성장을 통해 벗어나게 되었다.
이러한 경제 성장 속에서 국민 경제가 외국인에게 개방되었으며, 적지 않은 기업이 외국인의 손에 넘어가기도 했다. 기업이 경쟁력을 내세워 구조 조정을 추진함으로써 비정규직 노동자도 많이 늘어났으며, 이러한 구조 조정과 개방 과정에서 빈부 격차가 확대되었다.
한국 경제가 무한 경쟁의 세계 경제 질서 속에서 성장을 지속하고, 경제 성장의 성과를 바탕으로 삶의 질을 꾸준히 개선하기 위해서는 해결할 문제가 많다.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정부와 기업 모두는 경제의 구조와 체질을 개선하는 데 노력하는 한편, 지식 산업을 발전시킬 인재 양성과 연구 개발에 많은 투자를 하고 있다.
아울러 지역 간, 계층 간, 산업 간 불평등성을 극복하고 모든 국민이 고루 혜택을 누릴 수 있는 합리적인 경제 규범과 투명하고 공정한 감시 기구를 마련함으로써, 성장과 분배를 동시에 달성해 나갈 수 있는 길을 찾기 위해 노력 중이다.
V. 사회 구조와 사회 생활
1. 고대의 사회
1. 신분제 사회의 성립
사회 계층과 신분 제도
여러 부족이 통합되는 과정에서 고대 사회에서는 지배층 사이에 위계 서열이 마련되었고, 그 서열은 신분 제도로 발전해 갔다. 부여, 초기 고구려, 삼한의 읍락에는 경제적으로 부유한 호민과 그 아래에 하호가 있었다. 하호는 농업에 종사하는 평민이었다. 읍락의 최하층에는 노비가 있었는데, 이들은 주인에게 예속되어 생활하고 있는 천민층이었다.
한편, 부여와 초기 고구려에는 가, 대가로 불린 권력자들이 있었다. 이들은 호민을 통하여 읍락을 지배하는 한편, 자신의 관리와 군사력을 지니고 정치에 참가하였다. 이들은 중앙 집권 국가가 성립하는 과정에서 차츰 귀족으로 편제되어 갔다. 그리하여 삼국 시대가 되면서 사회는 크게 귀족, 평민, 천민의 신분 구조를 갖추었다.
귀족, 평민, 천민
고조선 시대 이래로 존재하였던 신분적 차별은 삼국 시대에 와서 법적으로 더욱 강한 구속력을 지니게 되었다. 신분 구성은 왕족을 비롯한 귀족, 평민, 천민으로 크게 구분된다. 지배층은 특권을 유지하기 위하여 율령을 만들었고, 개인의 신분은 능력보다는 그가 속한 친족의 사회적 위치에 따라 결정되었다. 고구려 고분 벽화에 신분의 귀천에 따라 인물 크기가 다르게 묘사된 것이 이를 잘 보여 준다.
삼국에서는 왕족을 비롯한 채 옛 부족장 세력이 중앙의 귀족으로 재편성되어 정치 권력과 사회·경제적 특권을 누렸다. 평민층은 대부분 농민으로서 자유민이었으나,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많은 제약을 받았다. 이들은 나라에서 부과하는 조세를 납부하고 노동력을 징발당하였기 때문에 대부분 생활이 어려웠다.
천민의 대부분인 노비는 왕실과 귀족 및 관청에 예속되어 신분이 자유롭지 못하였다. 이들은 주인의 집에서 시중을 들며 생활하거나 주인과 떨어져 살며 주인의 땅을 경작하였다. 대개, 전쟁 포로로 노비가 되거나 죄를 짓거나 귀족에게 진 빚을 갚지 못하여 노비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 전쟁이 빈번하였던 삼국 시대에는 전쟁 노비가 많았으나, 통일 신라 이후로 정복 전쟁이 사라짐에 따라 전쟁 노비는 점차 소멸되어 갔다.
2. 삼국 사회의 모습
고구려의 사회 모습
고구려는 압록강 중류 유역에서 국가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이 곳은 산간 지역으로 식량 생산이 충분하지 못하였다. 따라서, 일찍부터 대외 정복 활동에 눈을 돌렸고, 사회 기풍도 씩씩하였다.
고구려에는 통치 질서와 사회 기강을 유지하기 위하여 시행한 형법은 매우 엄격하였다. 반역을 꾀하거나 반란을 일으킨 자는 화형에 처한 뒤에 다시 목을 베었고, 그 가족을 노비로 삼았다. 적에게 항복한 자나 전쟁에서 패한 자 역시 사형에 처하였고, 도둑질한 자는 12배를 물게 하였다.
정치를 주도하며 사회적으로도 높은 지위를 누린 계층은 왕족인 고씨를 비롯하여 5부 출신의 귀족이었다. 이들은 그 지위를 세습하면서 높은 관직을 맡아 국정 운영에 참여하였으며, 전쟁이 나면 스스로 무장하여 앞장서서 적과 싸웠다. 고분 벽화에는 이들의 생활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백성은 대부분 자영 농민으로써, 국가에 조세를 바치고 병역 의무를 지며 토목 공사에도 동원되었다. 이들의 생활은 불안정하여 흉년이 들거나 빚을 갚지 못하면 노비로 전락하기도 하였다. 이를 막기 위해 고국천왕 때 먹을거리가 모자란 봄에 곡식을 빌려 주었다가 가을에 추수한 것으로 갚게 하는 진대법을 실시하였다. 이는 가난한 농민을 구제하여 국가 재정과 국방력을 유지하고, 귀족 세력이 커지는 것을 막기 위한 정책이었다.
고구려의 천민과 노비는 피정복민이거나 몰락한 평민이었다. 남의 소나 말을 죽인 자를 노비로 삼거나, 빚을 갚지 못한 자가 그 자식들을 노비로 만들어 변상하는 경우도 있었다.
고구려 지배층의 혼인 풍습으로는 형사취수제와 함께 서옥제가 있었다. 평민은 남녀 간의 자유로운 교제를 통하여 혼인했는데, 남자집에서 돼지고기와 술을 보낼 뿐 다른 예물은 주지 않았다. 신부집에서 재물을 받았을 때에는 딸을 팔았다고 여겨 부끄럽게 생각하였다.
백제의 사회 모습
백제의 언어, 풍속, 의복은 고구려와 큰 차이가 없었다. 백제는 일찍부터 중국과 교류하여 선진 문화를 수용하였다. 백제 사람은 키가 크고 의복이 깔끔하다는 중국의 기록은 그 세련된 모습을 알려 준다.
백제 사람은 상무적인 기풍이 있어서 말타기와 활쏘기를 좋아하고, 형법의 적용이 엄격한 점은 고구려와 비슷하였다. 반역한 자나 전쟁터에서 퇴각한 군사 및 살인자는 목을 베었고, 도둑질한 자는 귀양 보냄과 동시에 2배를 물게 하였다. 그리고 관리가 뇌물을 받거나 국가의 재물을 횡령했을 때에는 3배를 배상하고, 죽을 때까지 금고형에 처하였다.
백제의 지배층은 왕족인 부여씨와 8성의 귀족으로 이루어졌다. 이들은 중국의 고전과 역사책을 즐겨 읽고 한문을 능숙하게 구사하였으며, 관청의 실무에도 밝았다. 투호와 바둑 및 장기는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백제 지배층이 즐기던 오락이었다.
신라의 골품 제도와 화랑도
신라는 고구려, 백제에 비하여 중앙 집권 국가로 발전한 시기가 늦은 편이었다. 신라는 여러 부족의 대표가 함께 모여 정치를 운영하고 사회를 이끌어 가던 신라 초기의 전통을 오랫동안 유지하였다.
초기의 전통을 유지한 대표적인 제도가 화백 회의였다. 귀족은 이를 통하여 국왕을 폐위시킨 적도 있었고, 새 국왕을 추대하는 데 영향력을 발휘하면서 왕권을 견제하기도 하였다.
신라에는 혈연에 따라 사회적 제약이 가해지는 골품 제도가 있었다. 골품은 신라 사회에서 개인의 사회 활동과 정치 활동의 범위까지 엄격히 제한하였다. 관등 승진의 상한선이 골품에 따라 정해져 있었으므로 일찍부터 불만을 가진 사람도 있었다. 골품 제도는 가옥의 규모와 장식품은 물론, 복색이나 수레 등 신라인의 일상 생활까지 규제하는 기준으로서 오랫동안 유지되었다.
화랑도는 원시 사회의 청소년 집단에서 기원하였다. 이 조직은 귀족 자제 중에서 선발된 화랑을 지도자로 삼고, 귀족은 물론 평민까지 망라한 많은 낭도가 그를 따랐다. 여러 계층이 같은 조직 속에서 일체감을 가지고 활동함으로써 계층 간의 대립과 갈등을 조정, 완화하는 구실도 하였다.
신라 청소년은 화랑도 활동을 통하여 전통적 사회 규범을 배웠다. 명산대천을 찾아다니며 제천 의식을 행하고, 사냥과 전쟁에 관하여 교육을 받음으로써 협동과 단결 정신을 기르고 심신을 연마하였다.
3. 남북국 시대의 사회
통일 후 신라 사회의 변화
삼국은 상호간에 오랜 전쟁을 치르면서도 동질성을 많이 간직하고 있었다. 언어와 풍습은 비슷하였고, 복장을 비롯하여 절하는 모습에서 약간 차이가 나는 정도였다.
삼국 통일은 삼국이 지니고 있던 혈연적 동질성과 문화적 공통성을 바탕으로 하여 우리 민족 문화가 하나의 국가 아래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신라는 통일 전쟁 과정에서 백제와 고구려의 옛 지배층에게 신라 관등을 주어 포용하였다. 통일 직후에는 백제와 고구려의 유민을 9서당에 편입함으로써 민족 융합에 노력하였다. 이렇게 하여 신라 지배층은 삼한(삼국)이 하나가 되었다는 자부심을 가지게 되었다.
통일 신라는 늘어난 영토와 인구를 다스리게 됨으로써 경제력도 그만큼 증가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100여 년 동안 안정된 사회가 유지되었다. 특히, 삼국 통일 이후 왕권이 매우 강화되었다.
그러나 최고 신분층인 진골 귀족의 정치 사회적 비중은 여전히 컸다. 그들은 중앙 관청의 장관직을 독점하였고, 합의를 통하여 국가의 중대사를 결정하는 전통도 여전히 유지하였다.
한편, 6두품 출신은 학문적 식견과 실무 능력을 바탕으로 국왕을 보좌하면서 정치적 진출을 활발히 하였다. 하지만, 신분의 제약으로 인하여 중앙 관청의 우두머리나 지방의 장관 자리에는 오를 수 없었다.
삼국 통일 이후 골품 제도에 약간의 변화가 나타나고 있었다. 골품의 구분이 하급 신분층에서부터 점차 희미해지면서, 3두품에서 1두품 사이의 구분은 실질적인 의미를 잃고 평민과 동등하게 간주되었다.
발해의 사회 구조
발해의 지배층은 왕족인 대씨와 귀족인 고씨 등 고구려계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들은 중앙과 지방의 중요한 관직을 차지하고 수도를 비롯한 큰 고을에 살면서 노비와 예속민을 거느렸다.
발해의 주민 중 다수는 말갈인이며, 이들은 고구려 전성기 때부터 고구려에 편입된 종족이었다. 발해 건국 후에 이들 중의 일부는 지배층이 되거나 자신이 거주하는 촌락의 우두머리가 되어 국가 행정을 보조하였다.
발해의 지식인은 당에 유학하여 당에서 외국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과거 시험인 빈공과에 응시하고, 때로는 신라인과 수석을 다투기도 하였다. 발해는 당의 제도와 문화를 받아들이고 있었지만, 고구려나 말갈 사회의 전통적인 생활 모습을 오랫동안 유지하고 있었다.
통일 신라 말의 사회 모순
신라 말기가 되면서 귀족들의 정권 다툼과 대토지 소유 확대로 백성의 생활은 더욱 어려워졌고, 지방의 토착 세력과 사원들은 대토지를 소유하면서 유력한 신흥 세력으로 성장해 갔다. 지방의 자영농들은 귀족들의 농장이 확대되면서 몰락해 갔다. 더욱이 중앙 정부의 통치력 약화로 대토지 소유자들은 세금을 부담하지 않는 대신, 농민이 더 많은 조세를 감당하게 되었다.
9세기 이후 자주 발생한 자연 재해는 농민의 처지를 더욱 어렵게 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지방의 유력자를 중심으로 곳곳에서 무장 조직이 결성되었고, 이들을 아우른 큰 세력가가 호족으로 등장하였다.
토지를 상실한 농민은 소작농이 되거나 고향을 버리고 떠돌게 되었다. 걸식을 하거나 산간에서 화전을 일구기도 하였으며, 노비로 전락하기도 하였다.
9세기 말 진성 여왕 때에는 사회 전반에 걸쳐 모순이 증폭되었다. 중앙 정부의 기강이 극도로 문란해졌으며, 지방의 조세 납부 거부로 국가 재정도 바닥이 드러났다. 그리하여 한층 더 강압적으로 조세를 징수하자, 마침내 각지에서 농민들이 봉기하였다. 상주에서 일어난 원종과 애노의 난을 시작으로 농민의 항쟁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중앙 정부는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거의 잃어 갔다.
2. 중세의 사회
1. 고려의 신분 제도
귀족
고려의 신분 구성은 시대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었지만, 대략 귀족과 중류층, 그리고 양인과 천민으로 구성되었다. 고려 지배층의 핵심은 귀족이었다. 귀족 세력은 왕족을 비롯하여 5품 이상의 고위 관료가 주류를 형성하였다. 이들은 음서나 공음전의 혜택을 받는 특권층이었다.
귀족은 대대로 고위 관직을 차지하여 문벌 귀족을 형성하였으며, 고려 사회를 이끌어 갔다. 중앙 집권적 체제인 고려 사회에서 그들은 개경에 거주하였는데, 죄를 지은 자가 있으면 형벌로 귀향을 시키기도 하였다.
중앙 관직에 진출한 집단은 귀족 가문으로 자리잡기 위하여 관직을 바탕으로 토지 소유를 확대하는 등 재산을 모았고, 유력한 가문과 서로 중첩된 혼인 관계를 맺었다. 귀족이 사돈맺기를 가장 원하는 집안은 왕실이었다. 왕실의 외척이 된다는 것은 가문의 영광일 뿐만 아니라, 권력을 장악할 수 있는 지름길로 여겼으므로, 여러 딸을 왕비로 들이는 경우도 있었다.
지방 향리의 자제도 과거를 통하여 벼슬에 나아가 신진 관료가 됨으로써 귀족의 대열에 들 수 있었다. 반대로, 중앙 귀족에서 낙향하여 향리로 전락하는 경우도 있었다.
귀족층의 변화는 무신정변을 계기로 일어났다. 종래의 문벌 귀족이 약화되면서 무신이 권력을 잡았다. 이후 무신 정권이 붕괴되면서 등장한 귀족은 권문세족이었다. 이들은 고려 후기에 정계의 요직을 장악하고 농장을 소유한 최고 권력층이었으며, 가문의 힘을 이용하여 음서로써 신분을 세습시켜 갔다. 이들은 강과 하천을 경계로 삼을 만큼 대규모의 농장을 소유하고도 국가에 세금을 내지 않았으며, 또한 몰락한 농민을 농장으로 끌어들여 노비처럼 부리며 부를 축적하였다.
중류층
고려의 지배층과 피지배층 사이에는 중류층이 자리잡고 있었다. 이들은 지배 기구의 말단 행정직으로 존재하였는데, 중앙 관청의 말단 서리인 잡류, 궁중 실무 관리인 남반, 지방 행정의 실무를 담당한 향리, 직업 군인으로 하급 장교인 군반, 지방의 역(驛)을 관리하는 역리 등이 있었다. 중류층은 후삼국의 혼란을 거쳐 고려의 지배 체제가 정비되는 과정에서 통치 체제의 하부 구조를 맡아 중간 역할을 담당하는 집단으로 자리를 잡아 갔다. 이들은 직역을 세습적으로 물려받았고, 그에 상응하는 토지를 국가에서 받았다.
각 지방의 호족 출신은 향리로 편제되어 갔다. 호족 출신들은 호장, 부호장을 대대로 배출한 지방의 실질적 지배층으로 통혼 관계나 과거 응시 자격에 있어서도 하위의 향리와는 구별되었다.
양민
양민은 일반 주·부·군·현에 거주하면서 농업이나 상공업에 종사하는 사람을 말하는데, 농사에 종사하는 농민층이 주류를 이루었다. 양민의 대다수는 농민으로서 이들을 백정(白丁)이라고도 한다. 이들에게는 조세·공납·역이 부과되었다.
양민이면서 군현민과 구별되는 특수 행정 구역인 향·부곡·소에 거주한 주민은 더 많은 세금 부담을 지고 있었다. 거주하는 곳도 소속 집단 내로 제한되어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는 것이 원칙적으로 금지되었다. 일반 군현민이 반란을 일으킨 경우에는 집단적으로 처벌하여 군현을 부곡 등으로 강등하기도 하였다.
향이나 부곡에 거주하는 사람은 농업을, 소에 거주하는 사람은 수공업이나 광업품의 생산을 주된 생업으로 하였다. 이 밖에, 역과 진의 주민은 각각 육로 교통과 수로 교통에 종사하였다.
천민
천민의 대다수는 노비였다. 노비는 공공 기관에 속하는 공노비와 개인이나 사원에 예속된 사노비가 있었다. 공노비에는 궁중과 중앙 관청이나 지방 관아에서 잡역에 종사하면서 급료를 받고 생활하는 입역 노비와 지방에 거주하면서 농업에 종사하는 외역 노비가 있었다. 외거 노비는 농경을 하여 얻은 수입 중에서 규정된 액수를 관청에 납부하였다.
사노비는 솔거 노비와 외거 노비로 구분되었다. 솔거 노비는 귀족이나 사원에서 직접 부리는 노비로서 주인의 집에 살면서 잡일을 돌보았으며, 외거 노비는 주인과 따로 사는 노비로서 주로 농업 등의 일에 종사하고 일정량의 신공을 바쳤다.
특히, 외거 노비는 주인의 토지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토지도 소작할 수 있어서, 노력에 따라서는 경제적으로 여유를 얻을 수 있었으며, 자신의 토지도 소유할 수 있었다. 이처럼 외거 노비는 비록 신분적으로는 주인에게 예속되어 있었으나, 경제적으로는 양민 백정과 비슷하게 독립된 경제 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외거 노비 중에는 신분의 제약을 딛고 지위를 늘인 사람이나 농업에 종사하면서 재산을 늘린 사람도 있었다.
원래 노비는 재산으로 간주되어 국가에서 엄격히 관리하였다. 매매, 증여, 상속의 방법을 통하여 주인에게 예속되어 인격적 대우를 받지 못하였다. 귀족은 재산으로 간주된 노비를 늘리기 위하여 부모 중의 한쪽이 노비이면 그 자식도 노비가 되게 하였다.
2. 백성의 생활 모습
농민의 공동 조직
농민은 일상 의례와 공동 노동 등을 통하여 공동체 의식을 다졌다. 공동체 조직의 대표적인 것이 불교의 신앙 조직이었던 향도였다.
향도는 매향 활동을 하면서 대규모 인력이 동원되는 불상, 석탑을 만들거나 절을 지을 때에도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후기에 이르러 점차 신앙적인 향도에서 자신들의 이익을 위하여 조직되는 향도로 변모되어 마을 노역, 혼례와 상장례, 민속 신앙과 관련된 마을 제사 등 공동체 생활을 주도하는 농민 조직으로 발전해 갔다.
사회 시책과 제도
고려 시대의 농민은 조세, 잡역 등과 같은 여러 가지 부담을 졌다. 농민 생활을 안정시키는 것은 국가 안정에 필수적이었으므로, 국가에서는 이를 위하여 여러 사회 시책을 펼쳤다.
우선, 농번기에 잡역을 면제하여 농업에 전념할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자연 재해를 입은 농민에게는 그 피해 정도에 따라 조세와 부역을 감면해 주었다. 또, 고리대 때문에 농민이 몰락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법으로 이자율을 정하여 이자가 빌린 곡식과 같은 액수가 되면 그 이상의 이자를 받지 못하도록 하였다.
고려의 사회 제도 중에는 평시에 곡물을 비치하였다가 흉년에 빈민을 구제하는 의창이 있었는데, 이는 고구려의 진대법과 유사한 것이었다. 또, 개경과 서경 및 각 12목에는 상평창을 두어 물가의 안정을 꾀하여 백성이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할 수 있도록 하였다.
가난한 백성이 의료 혜택을 받도록 개경에 동·서 대비원을 설치하여 환자 진료 및 빈민 구휼을 담당하게 하였으며, 혜민국을 두어 의약을 전달하게 하였다. 각종 재해가 발생하였을 때, 구제도감이나 구급도감을 임시 기관으로 설치하여 백성의 구제에 힘썼다. 그리고 기금을 마련한 뒤 이자로 빈민을 구제하는 제위보를 설치하였다.
법률과 풍속
고려는 중국의 당률을 참고하여 만든 법률을 시행하였으나, 대부분의 경우 관습법을 따랐다. 지방관의 사법권이 커서 중요 사건 이외에는 재량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반역죄, 불효죄 등은 중죄로 다스렸다. 반면에, 귀양형을 받은 사람이 부모상을 당하였을 때에는 유형지에 도착하기 전에 7일간의 휴가를 주어 부모상을 치를 수 있도록 하였다. 또, 70세 이상의 노부모를 두고 봉양할 가족이 없을 때에는 형벌의 집행을 보류하기도 하였다. 형벌로는 태, 장, 도, 유, 사 다섯 종류가 있었다.
장례와 제사에 관한 의례는 유교적 규범을 시행하려는 정부의 의도와는 달리, 대개 토착 신앙과 융합된 불교와 도교의 풍속을 따랐다.
명절로는 정월 초하루, 삼짇날, 단오, 유두, 추석 등이 있었으며, 단오 때에는 격구와 그네뛰기 및 씨름을 즐겼다.
혼인과 여성의 지위
고려 시대에는 여자는 18세 전후, 남자는 20세 전후에 혼인을 하였다. 고려 초에 왕실에서는 친족 간의 혼인이 성행하였다. 중기 이후 여러 번의 금령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풍습은 사라지지 않았다. 혼인 형태는 일부일처제가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부모의 유산은 자녀에게 골고루 분배되었으며, 태어난 차례대로 호적에 기재하여 남녀 차별을 하지 않았다. 아들이 없을 때에는 양자들 들이지 않고 딸이 제사를 지냈으며, 상복 제도에서도 친가와 외가의 차이가 크지 않았다. 사위가 처가의 호적에 입적하여 처가에서 생활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으며, 사위와 외손자에게까지 음서의 혜택이 있었다. 공을 세운 사람의 부모는 물론, 장인과 장모도 함께 상을 받았다. 여성의 재가는 비교적 자유롭게 이루어졌고, 그 소생 자식의 사회적 진출에도 차별을 두지 않았다.
3. 고려 후기의 사회 변화
무신 집권기 하층민의 봉기
무신정변으로 고려 전기의 신분 제도가 동요되어 하층민에서 권력층이 된 자가 많았다. 한편, 무신들 간의 대립과 지배 체제의 붕괴로 백성에 대한 통제력이 약화되었으며, 무신들의 농장 확대로 인하여 수탈이 강화되었다.
가혹한 수탈을 견디지 못한 백성은 종래의 소극적 저항에서 벗어나 대규모의 봉기를 일으키기 시작하였다. 서경 유수 조위총이 무신 정권에 반발하여 서경에서 반란을 일으켰을 때에 많은 농민이 가세하였으며, 난이 진압된 뒤에도 농민 항쟁이 여러 해 동안 계속되었다. 이어 남부 지방에서도 농민 항쟁이 발생하였다. 명종 때 공주 명학소에서는 망이·망소이가, 운문, 초전에서는 김사미, 효심이 봉기하였다.
봉기를 일으킨 이들은 지방관의 탐학을 국가에 호소하고 이의 시정을 요구하였으며, 신라 부흥 운동 같이 왕조 질서를 부정하기도 하였다.
최충헌이 정권을 장악한 뒤에는 회유와 탄압으로 약간 수그러들었다가 만적 등 천민의 신분 해방 운동이 다시 발생하였다. 만적은 사람이면 누구나 공경대부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하며 신분 차별에 항거하였다.
몽골의 침입과 백성의 생활
몽골의 침입에 대항하고자 최씨 무신 정권은 개경에서 강도(강화도)로 서울을 옮기고 장기 항전을 꾀하였다. 지방의 주현민에게는 산성이나 섬으로 들어가 오랜 전쟁에 대비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전술은 산성과 섬에서의 생활 대책이 마련되지 않은 상태에서 강행되었으므로 백성은 막대한 희생을 당하였고, 식량을 제대로 구하지 못하여 굶어 죽는 일이 많았다.
일반 백성은 전쟁이 끝난 뒤에도 원의 간섭과 원을 따르는 정치 세력에 의하여 큰 피해를 입었다. 특히, 전쟁의 피해가 복구되지 않은 상태에서 두 차례의 일본 원정에 동원됨으로써 막대한 희생을 강요당하였다.
원 간섭기의 사회 변화
무신 집권기 이후로는 하층 신분에서 신분 상승을 하는 사람이 많았다. 특히, 원 간섭기 이후에는 전공을 세우거나 몽골 귀족과의 혼인을 통해서 또는 몽골어에 능숙하여 출세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에 원 간섭기에는 친원 세력이 권문세족으로 성장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원과 강화를 맺은 이후 두 나라 사이에는 자연히 사람과 물자의 왕래가 많아졌고, 문물 교류가 활발하였다. 이에 따라 고려 사회에는 몽골풍이 유행하여 변발, 몽골식 복장, 몽골 어가 궁중과 지배층을 중심으로 널리 퍼졌다.
이와 반대로 고려 사람이 몽골에 건너간 수도 적지 않았다. 이들은 대부분 전란 중에 포로 또는 유이민으로 들어갔거나 몽골의 강요에 따라 어쩔 수 없이 끌려간 사람이었다. 이들에 의하여 고려의 의복, 그릇, 음식 등의 풍습이 몽골에 전해졌는데, 이를 고려양이라 한다.
원의 공녀 요구는 골에 심각한 사회 문제를 가져왔다. 결혼도감을 통하여 원으로 끌려간 여인 중에는 특별한 지위에 오른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고통스럽게 살았다. 그러므로 공녀의 공출은 고려와 원 사이에 풀어야 할 가장 시급한 문제로 대두되었고, 고려에서는 끊임없이 이 문제 해결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몽골과 마찬가지로 왜구도 고려 백성에게 많은 고통을 주었다. 왜구는 이미 13세기부터 우리를 괴롭혀 왔으나, 14세기 중반부터는 본격적으로 침략해 왔다. 원의 간섭하에서 국방력을 제대로 갖추기 어려웠던 고려는 초기에 효과적으로 왜구의 침입을 격퇴하지 못하였다. 주로 쓰시마 섬 및 규슈 서북부 지역에 근거를 둔 왜구는 부족한 식량을 고려에서 약탈하고자 자주 고려 해안에 침입하였고, 식량뿐 아니라 사람까지도 약탈해 갔다.
일본과 가까운 경상도 해안에 출몰하기 시작한 왜구는 점차 전라도 지역으로 활동 범위를 넓혔고, 심지어 개경 부근에도 나타났다. 많을 때에는 한 해에 수십 번 침략해 왔기 때문에, 해안에서 가까운 수십 리의 땅에는 사람이 살 수 없을 정도였다. 잦은 왜구의 침입에 따른 사회의 불안정은 시급히 해결해야 할 국가적 과제였다. 왜구를 격퇴하고 이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신흥 무인 세력이 성장하였다.
3. 근세의 사회
1. 양반 관료 중심의 사회
양천 제도와 반상 제도
조선은 사회 신분을 양인과 천민으로 구분하는 양천 제도를 법제화하였다. 양인은 과거에 응시하고 벼슬길에 오를 수 있는 자유민으로, 조세, 국역 등의 의무를 지녔다. 천민은 비자유민으로, 개인이나 국가에 소속되어 천역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양천제의 원칙에만 입각하여 운영되지는 않았다.
관직을 가진 사람을 의미하던 양반은 세월이 흐를수록 하나의 신분으로 굳어져 갔고, 양반 관료를 보좌하던 중인도 신분층으로 정착되어 갔다. 그리하여 지배층인 양반과 피지배층인 상민 간의 차별을 두는 반상 제도가 일반화되고, 양반, 중인, 상민, 천민의 신분 제도가 점차 정착되었다.
조선 시대는 엄격한 신분제 사회였으나, 신분 이동이 가능하였다. 법적으로 양인이면 누구나 과거에 응시하여 관직에 진출할 수 있었고, 양반도 죄를 지으면 노비가 되거나 경제적으로 몰락하여 중인이나 상민이 되기도 하였다.
양반과 중인
양반은 본래 문반과 무반을 아울러 부르는 명칭이었다. 그러나 양반 관료 체제가 점차 정비되면서 문·무반직을 가진 사람뿐만 아니라, 그 가족이나 가문까지도 양반으로 부르게 되었다.
일단 지배층이 된 양반 사대부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하여 지배층이 더 이상 늘어나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를 취하였다. 이들은 문무 양반의 관직을 받은 자만 사족으로 인정하였다.
양반은 토지와 노비를 많이 소유하고 과거, 음서, 천거 등을 통하여 국가의 고위 관직을 독점하였다. 양반은 경제적으로는 지주층이며, 정치적으로는 관료층으로서, 생산에는 종사하지 않고 오직 현직 또는 예비 관료로 활동하거나 유학자로서의 소양과 자질을 닦는 데 힘썼다.
조선은 각종 법률과 제도로써 양반의 신분적 특권을 제도화하였다. 무엇보다도 양반은 각종 국역을 면제받을 수 있었다.
중인은, 넓은 의미로는 양반과 상민의 중간 신분 계층을 뜻하고, 좁은 의미로는 기술관만을 의미한다. 중앙과 지방에 있는 관청의 서리와 향리 및 기술관은 직역을 세습하고, 같은 신분 안에서 혼인하였으며, 관청에서 가까운 곳에 거주하였다. 양반 첩에게서 태어난 서얼은 중인과 같은 신분적 처우를 받았으므로 중서라고도 불리었다. 이들은 문과에 응시하는 것이 금지되었고, 간혹 무반직에 등용되기도 하였다.
중인은 양반에게서 멸시와 하대를 받았으나, 대개 전문 기술이나 행정 실무를 담당하였으므로 나름대로 행세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역관은 사신을 수행하면서 무역에 관여하여 이득을 보았으며, 향리는 토착 세력으로서 수령을 보좌하면서 위세를 부리기도 하였다.
상인과 천민
평민, 양인으로도 불리는 상민은 백성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농민, 수공업자, 상인을 말한다. 나라에서는 이들이 과거에 응시하는 것을 법적으로 금지하지 않았지만, 과거 준비에는 많은 시간과 비용이 들었으므로 상인이 과거에 응시하기는 매우 어려웠다. 따라서, 전쟁이나 비상시에 공을 세우는 등의 경우가 아니면 상민의 신분 상승 기회는 그리 많지 않았다.
대부분의 농민은 조세, 공납, 부역 등의 의무를 지고 있었다. 이러한 조세는 때에 따라 농민들의 생계를 위협할 정도로 과중하였다.
수공업자는 공장으로 불리며, 관영이나 민영 수공업에 종사하였다. 상인은 시전 상인과 행상 등이 있었는데, 국가의 통제 아래에서 상거래에 종사하였다. 조선은 농본억상 정책을 취하였기 때문에 상인은 농민보다 아래에 위치하였다. 한편, 양인 중에도 천역을 담당하는 계층이 있었는데, 이들을 신량역천이라 하였다.
천민 중에서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노비였다. 노비는 재산으로 취급되었으므로 매매, 상속, 증여의 대상이었다. 부모 중 한쪽이 노비일 때, 그 소생 자녀도 자연히 노비가 되는 제도가 일반적으로 시행되었다.
조선 시대 노비는 고려와 마찬가지로 국가에 속한 공노비와 개인에게 속한 사노비가 있었다. 사노비는 주인집에서 함께 사는 솔거 노비와 주인과 떨어져 독립된 가옥에서 사는 외거 노비가 있었다. 외거 노비는 주인에게 노동력을 제공하는 대신에 신공을 바쳤으며, 공노비도 국가에 신공을 바치거나 관청에 노동력을 제공하였다.
2. 사회 정책과 사회 시설
사회 정책과 사회 제도
조선은 기본적으로 농본 정책을 실시하여 농민의 안정을 꾀하였다. 국가는 양반 지주들의 토지 겸병을 억제하고, 농민이 토지에서 이탈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농번기에 안정적으로 농사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하였다.
각종 재해를 당한 농민에게는 조세를 덜어 주기도 하였다. 이러한 시책에도 불구하고 농민의 생활이 자주 어려움을 당하자, 국가에서는 의창, 상평창 등을 설치하고 환곡제를 실시하여 이들을 구제하였다. 향촌 사회에서 자치적으로 실시된 사창 제도는 양반 지주들이 향촌의 농민 생활을 안정시켜 양반 중심의 향촌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의료 시설로는 혜민국, 동·서 대비원, 제생원, 동·서 활인서 등이 있었다. 혜민국과 동·서 대비원은 수도권 안에 거주하는 서민 환자의 구제와 약재 판매를 담당하였고, 제생원은 지방민의 구호 및 진료를 담당하였다. 동·서 활인서는 유랑자의 수용과 구휼을 담당하였다.
법률 제도
조선 시대에는 관습법으로 사회 질서를 유지한 고려 시대와 달리, 경국대전과 대명률로 대표되는 법전에 의해 형법과 민사에 관한 사항을 규율하였다. 이 중에서 형벌에 관한 사항은 대부분 대명률의 적용을 받았다.
범죄 중에서 가장 무겁게 취급된 것은 반역죄와 강상죄였다. 이 같은 범죄에는 범인은 물론이고, 부모, 형제, 처자까지도 함께 처벌하는 연좌제가 시행되었다. 심한 경우에는 범죄가 발생한 고을의 호칭이 강등되고, 고을의 수령은 낮은 근무 성적을 받거나 파면되기도 하였다. 형벌은 태, 장, 도, 유, 사의 5종이 기본으로 시행되었다.
민사에 관한 사항은 제반 소송의 재판권을 가지고 있는 관찰사와 수령 등 지방관이 처리하였다. 초기에는 노비와 관련된 소송이 많았으나, 나중에는 남의 묘지에다 자기 조상의 묘를 쓰는 데에서 발생하는 산송이 주류를 이루었다.
조선의 사법 기관은 행정 기관과 명확히 구분되지 않았다. 중앙에는 관리의 잘못이나 중대한 사건을 재판하는 사헌부, 의금부, 형조와 수도의 치안을 담당하는 한성부, 그리고 노비에 관련된 문제를 처리하는 장례원이 있었다. 지방에서는 관찰사와 수령이 각각 관할 구역 내의 사법권을 가졌다.
재판에 불만이 있을 때에는 사건의 내용에 따라 다른 관청이나 상부 관청에 소송을 제기할 수도 있었고, 신문고나 징을 쳐서 임금에게 직접 호소하는 방법도 있었으나, 일반적으로 시행되지는 않았다.
3. 향촌 사회의 조직과 운영
향촌 사회의 모습
향촌은 중앙과 대칭되는 개념으로, 향은 행정 구역상 군현의 단위를 말하며, 촌은 촌락이나 마을을 의미한다.
향촌 자치를 위하여 설치한 기구가 유향소였다. 유향소는 수령을 보좌하고 향리를 감찰하며 향촌 사회의 풍속을 바로잡기 위한 기구였다. 경재소는 중앙 정부가 현직 관료로 하여금 연고지의 유향소를 통재하게 하는 제도로서, 중앙과 지방의 연락 업무를 맡았다.
향촌 사회에서 지주로 농민을 지배하던 계층은 사족(士族)이었다. 사족은 향안을 작성하고, 향규를 제정하였다. 향안은 향촌 사회의 지배층인 지방 사족의 명단으로, 임진왜란 전후의 시기에 각 군현마다 보편적으로 작성되었다. 향안에 이름이 오른 사족은 그들의 총회인 향회를 통하여 자신들의 결속을 다지고 지방민을 통제하였는데, 이들 향회의 운영 규칙이 향규였다.
사림은 도덕과 의례의 기본 서적인 소학을 보급하고, 가묘와 사당을 건립하며, 족보 편찬을 통해 성리학적 사회 질서를 유지하고자 하였다. 족보는 가문의 내력을 기록한 것으로, 안으로 종족 내부의 결속을 가지고 밖으로 다른 집안이나 하급 신분에 대해 우월 의식을 가지게 하였다. 따라서, 족보는 혼인 상대자를 구하거나 붕당을 구별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 활용되었다.
향약과 유교 윤리의 보급
지방 사족은 향촌 사회를 그들 중심으로 운영하기 위해 향약 조직을 만들었다. 향약은 중종 때 조광조가 처음 시행한 이후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본래 향촌에서는 마을 단위로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어려운 일을 당하면 서로 돕는 풍습이 있었다. 향약은 이러한 전통적 공동 조직과 미풍양속을 계승하면서, 삼강오륜을 중심으로 한 유교 윤리를 가미하여 교화 및 질서 유지에 알맞게 구성한 것이다.
향약은 조선 사회의 풍속 교화에 많은 역할을 하였다. 향촌 사회의 질서 유지와 함께 치안까지 담당하는 등 향촌의 자치 기능을 맡았다. 향약의 보급으로 지방 사림의 지위는 강화되었으나, 지방 유력자가 주민을 위협, 수탈하는 배경을 제공하는 등 부작용도 적지 않았다.
16세기 이후 각 지방에서 생겨나기 시작한 서원도 향약과 함께 사림의 지위를 강화시켜 주었다. 서원은 유교 윤리를 보급하고 향촌 사림을 결집, 강화시키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촌락의 구성과 운영
촌락은 농민 생활의 기본 단위일 뿐만 아니라 향촌을 구성하는 기본 단위로, 자연촌으로 존재하면서 동(洞), 이(里)로 편제된 조직이다. 정부는 조선 초기에 자연촌 단위의 몇 개의 이(里)를 면으로 묶은 면리제를 통해, 그리고 17세기 중엽 이후에는 오가작통제를 통하여 촌락 주민에 대한 지배를 원활히 하고자 하였다. 오가작통제는 서로 이웃하고 있는 다섯 집을 하나의 통으로 묶고, 여기에 통수를 두어 통 내를 관장하게 한 것이다.
조선 시대에 신흥 사족이 향촌 지역으로 이주하면서 향촌 사회에는 주로 양반이 거주하는 반촌(班村)과 평민이 거주하는 민촌(民村)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그러나 대개의 향촌에서는 두서너 개의 씨족이 서로 인척 관계를 맺고 있었으며, 양반과 평민, 천민이 섞여 살았다.
촌락의 농민 조직으로 두레와 향도가 있었다. 두레는 공동 노동의 작업 공동체였다. 향도는 불교와 민간 신앙 등의 신앙적 기반과 동계 조직 같은 공동체 조직의 성격을 모두 띠었다. 주로 상을 당하였을 때에나 어려운 일이 생겼을 때에 서로 돕는 역할을 하였다. 상여를 메는 사람인 상두꾼도 향도에서 유래하였다.
4. 근대 태동기의 사회
1. 사회 구조의 변동
신분제의 동요
조선 후기에는 양반 상호간에 일어난 정치적 갈등으로 어느 한 붕당이 권력을 독점하는 일당 전제화가 전개되었다. 권력을 잡은 일부 양반을 제외하고 다수의 양반은 이 과정에서 몰락하였다. 정권에서 밀려난 양반은 관직에 등용될 기회를 얻지 못한 채 향촌 사회에서 겨우 위세를 유지하는 향반이 되거나 더욱 몰락하여 잔반이 되기도 하였다.
향촌 사회에서도 사회 경제적 변화로 신분 변동이 활발했다. 양반의 수는 더욱 늘어나고, 상민과 노비의 수는 갈수록 줄어들었다. 이는 부를 축적한 농민이 지위를 높이거나 역의 부담을 모면하려고 양반 신분을 사거나 족보를 위조하여 양반으로 행세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중간 계층의 신분 상승 운동
조선 후기에 이르러 사회 변동이 심화되는 가운데 서얼과 중인 등 중간 계층의 역할도 커졌다. 서얼에 대한 차별은 임진왜란 이후 완화되기 시작하였다. 더욱이, 전란으로 재정적 타격을 받은 정부가 납속책을 실시하고 공명첩을 발급하자, 서얼은 이를 이용하여 관직에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영·정조 때에 서얼을 어느 정도 등용하자, 이들은 더욱 적극적으로 신분 상승을 시도하였다. 그들은 수 차례에 걸쳐 집단으로 상소하여 관직 진출의 제한을 없애 줄 것을 요구하였다. 그리하여 정조 때에는 유득공, 이덕무, 박제가 등 서얼 출신이 규장각 검서관으로 등용되어 제각기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서얼의 신분 상승 운동은 기술직 중인에게도 자극을 주었다. 그들은 주로 기술직에 종사하며 축적한 재산과 탄탄한 실무 경력을 바탕으로 신분 상승을 추구하였다.
중인 중에서도 역관들은 청과의 외교 업무에 종사하면서 서학을 비롯한 외래 문화 수용에 있어서 선구적 역할을 수행하여, 성리학적 가치 체계에 도전하는 새로운 사회의 수립을 추구하였다.
노비의 해방
조선 후기에 노비는 군공과 납속 등을 통하여 부단히 자신의 신분을 상승시키고 있었다. 게다가 국가에서는 공노비 유지에 비용이 많이 들어 그 효율성이 떨어지자, 공노비를 종래의 입역 노비에서 신공을 바치는 납공 노비로 전환시켰다.
신분의 속박에서 벗어나려는 도망 노비들은 임노동자나 머슴, 행상이 되거나, 화전을 일구며 살아갔다. 도망한 노비의 신공은 남아 있는 노비에게 부과되었기 때문에 남아 있는 노비의 부담은 더욱 무거워질 수밖에 없는 악순환이 되풀이되었다. 노비의 도망이 빈번해지자, 나라에서는 신공을 줄여 달래기도 하고, 이들을 찾아 내려고도 하였으나, 그다지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노비의 신분 상승 추세는 아버지가 노비라 하더라도 어머니가 양민이면 양민으로 삼는 법이 실시되면서 더욱 촉진되었다. 18세기 후반, 공노비의 노비안이 도망과 합법적인 신분 상승으로 이름만 있을 뿐 신공을 받아 낼 수 없게 되자, 순조 때에 중앙 관서의 노비 6만 6000여 명을 해방시키기도 하였다(1801).
사노비는 일반 농민이나 공노비에 비하여 더 가혹한 수탈과 사회적 냉대를 받았다. 그리하여 조선 후기에 이르자 사노비의 도망도 일상적으로 일어났다. 갑오개혁(1894) 때 신분제가 폐지되면서 노비제는 법제상으로 종말을 고하였다.
가족 제도의 변화와 혼인
조선의 가족 제도는 부계와 모계가 함께 영향을 끼치는 형태에서 부계 위주의 형태로 변화하여 갔다.
조선 중기까지도 혼인 후에 남자가 여자집에서 생활하는 경우가 있었으며, 아들과 딸이 부모의 재산을 똑같이 상속받는 경우가 많았다. 집안의 대를 잇는 자식에게 5분의 1의 상속분을 더 준다는 것 외에는 모든 아들과 딸에게 재산을 똑같이 나누어 주는 것이 관행이었다. 재산 상속을 같이 나누어 받는 만큼 그 의무인 제사도 형제가 돌아가면서 지내거나 책임을 분담하기도 하였다.
조선 후기에는 부계 중심의 가족 제도가 더욱 강화되었다. 혼인 후에 곧바로 남자집에서 생활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제사는 반드시 큰아들이 지내야 한다는 의식이 확산되었고, 재산 상속에서도 큰아들이 우대를 받았다. 처음에는 딸이, 그리고 점차 큰아들 외의 아들도 제사나 재산 상속에서 그 권리를 잃어 갔다.
아들이 없는 집안에서는 양자를 들이는 것이 일반화되었으며, 부계 위주의 족보를 적극적으로 편찬하였고, 같은 성을 가진 사람끼리 모여 사는 동성 마을을 이루어 나갔다. 따라서, 이 때에는 개인이 개인으로 인정받기보다는 종중이라고 하는 친족 집단의 일원으로 인식되었다.
조선 시대의 가족 제도는 사회 질서를 지탱하는 버팀목 역할을 하였다. 조선에서는 이러한 가족 제도를 잘 유지하기 위한 윤리 덕목으로 효와 정절을 강조하였다. 과부의 재가를 금지하고 효자나 열녀를 표창한 것 등은 그러한 정책의 일환이었다.
조선 시대의 혼인 형태는 일부일처를 기본으로 하였지만, 남자가 첩을 들일 수 있었기 때문에 엄밀한 의미의 일부일처제라고는 할 수 없었다. 그러나 부인과 첩 사이에는 엄격한 구별이 있어서, 첩의 자식인 서얼은 문과에 응시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제사나 재산 상속 등에서도 차별을 받았다. 혼인은 대개 집안의 가장이 결정하였는데, 법적으로 혼인할 수 있는 나이는 남자 15세, 여자 14세였다.
인구의 변동
조선은 국가 운영에 필요한 인적 자원을 파악하기 위하여 제도를 정비하고 수시로 호구 조사를 하였다. 조선 시대의 인구에 관한 기본 자료는 원칙적으로 3년마다 수정하여 작성하는 호적 대장이었다.
국가에서는 호적 대장에 기록된 각 군현의 인구 수를 근거로 해당 지역에 공물과 군역 등을 부과하였다. 공물과 군역의 담당자가 기본적으로 성인 남성이어서 국가의 인구 통계는 주로 남성만을 기록하고 있어 실제 인구 수와는 많은 차이가 났다.
조선 시대에는 대체로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의 하삼도에 전 인구의 50% 정도가 살았으며, 경기도, 강원도에는 20%, 평안도, 황해도, 함경도에는 30% 정도가 거주하였다.
조선 시대의 인구 수는 건국 무렵에는 550만~750만 명, 임진왜란 이전인 16세기에는 1000만 명을 돌파하였고, 19세기 말엽에는 1700만 명 정도가 되었을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특히, 한성에는 세종 때에 이미 10만 명 이상이 거주하였으며, 18세기에 들어와서는 20만 명이 넘었다.
2. 향촌 질서의 변화
양반의 향촌 지배 약화
경제의 변동과 신분제의 동요 속에서 사족 중심의 향촌 질서도 변화하였다. 평민과 천민 중에 재산을 모아 부농층으로 등장하는 사람도 있었으며, 양반 중에는 토지를 잃고 몰락하여 전호가 되거나 심한 경우에는 임노동자로 전락하는 경우도 있었다. 따라서, 향촌 사회 내부에서 양반이 지녔던 권위도 점차 약해졌다.
양반은 군현을 단위로 농민을 지배하기 어렵게 되자, 촌락 단위의 동약을 실시하거나 족적 결합을 강화함으로써 자기들의 지위를 지켜 나가고자 하였다. 이에 따라 전국에 많은 동족 마을이 만들어지고, 문중을 중심으로 서원, 사우가 많이 세워졌다.
향촌 사회에서 종래까지 영향력을 행사하였던 양반은 새로 성장한 부농층의 도전을 받았다. 경제력을 갖춘 부농층은 수령을 중심으로 한 관권과 결탁하여 향안에 이름을 올리는가 하면, 향회를 장악하여 향촌 사회에서 영향력을 키우려 하였다. 부농층은 종래의 재지 사족이 담당하던 정부의 부세 제도 운영에 적극 참여하였으며, 향임직에 진출하거나 기존 향촌 세력과 타협하면서 상당한 지위를 확보하여 갔다. 그러나 향촌 지배에 참여하지 못한 부농층도 여전히 많았다.
농민층의 분화
조선 후기에도 여전히 지주의 대부분은 양반이었지만, 일반 서민 중에서 농지의 확대, 영농 방법의 개선 등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 부를 축적하여 지주가 되는 사람도 있었다. 이들은 재력을 바탕으로 공명첩을 사거나 족보를 위조하여 신분을 상승시키기도 하였다.
양반이 되면 군역을 면할 수 있는 이익이 있었으며, 양반 지배층의 수탈을 피해 부를 축적하는 데 각종 편의를 얻을 수 있는 이점이 있었다. 양반 신분을 사들인 농민은 더 나아가 향촌 사회에서 자신들의 영향력을 키우고자 하였다.
일부 농민이 부농층으로 성장하는 반면에, 일부 농민은 오히려 토지에서 밀려나 임노동자가 되기도 하였다. 이들은 16세기 이래 부역제가 무너져 가면서 노동력 동원이 어려워진 국가나 관청에서 노임을 받고 성쌓기나 도로 공사 등에 동원되기도 하였고, 가족의 노동력만으로 농사를 지을 수 없는 부농층에 고용되어 어려운 삶을 영위해 나갔다. 부농층의 대두와 임노동자의 출현은 이 시기 농민의 분화를 뜻하는 것이었다.
관권의 강화
경제력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부농층의 성장 욕구는 재정 위기를 타개하고자 하는 정부의 이해와 일치하여 정부도 이들을 적극 활용하고자 하였다. 정부는 납속이나 향직의 매매를 통하여 이들 부농층 성장의 합법적인 길을 열어 주기도 하였다.
종래의 재지 사족의 힘이 약화되고, 부농층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향촌 세력의 힘이 충분히 강해지지 못한 가운데 조선 후기 향촌 사회에서는 수령을 중심으로 한 관권이 강화되고 아울러 관권을 맡아 보고 있던 향리의 역할이 커졌다.
이에 따라, 종래에 재지 사족인 양반의 이익을 대변하여 왔던 향회는 주로 수령이 세금을 부과할 때에 의견을 물어 보는 자문 기구로 구실이 변하였다. 곧, 수령 중심의 국가 권력이 향촌 사회에 깊숙이 침투하여 재지 사족이 지배하고 있던 영역을 장악해 나갔다.
관권의 강화는 세도 정치 시기에 정치 기강이 무너지는 상황 속에서 수령과 향리의 자의적인 농민 수탈을 강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3. 사회 변혁의 움직임
사회 불안의 심화
신분제의 동요는 양반 중심의 지배 체제에 커다란 위기를 가져왔다. 지배층과 농민층의 갈등은 깊어지고, 지배층의 수탈이 심해지면서 농민 경제는 파탄에 빠지게 되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농민의 의식은 점차 높아져 곳곳에서 적극적인 항거 운동이 일어났다.
그런데도 탐관오리의 탐학과 횡포는 날로 심해 갔고, 재난과 질병이 거듭되었다. 특히, 19세기에 들어와 이런 현상이 더욱 심해져 농민의 생활은 그만큼 더 어려워져 갔다. 1820년의 전국적인 수해와 이듬해 콜레라의 만연으로 많은 백성이 목숨을 잃는 비참한 사태가 발생하였다. 이 피해는 그 뒤 수 년 동안 계속되었으며, 이에 따라 굶주려 떠도는 백성이 거리를 메울 지경이었다.
이렇게 어려운 상황에서 백성 사이에는 비기, 도참설이 널리 퍼지고, 서양의 이양선까지 연해에 출몰하자, 민심은 극도로 흉흉해져 갔다. 사회 불안이 점점 더해 감에 따라 각처에서는 도적이 크게 일어났다. 화적은 수십 명씩 무리를 지어 지방의 토호나 부상을 공격하였고, 수적은 배를 타고 강이나 바다를 무대로 조운선이나 상선을 약탈하였다.
예언 사상의 대두
사회가 변화하면서 유교적 명분론이 설득력을 잃어가자, 비기, 도참 등을 이용한 예언 사상이 유행하였다. 말세의 도래, 왕조의 교체, 변란의 예고 등 근거없는 낭설이 횡행하여 민심을 혼란시켰다. 정감록은 이 때에 널리 유행한 비기였다.
여기에 무격 신앙이나 미륵 신앙도 점차 확장되어 갔다. 현세에서 얻지 못하는 행복을 미륵 신앙에서 해결하려는 움직임도 있었으며, 심지어 살아 있는 미륵불을 자처하면서 서민을 현혹시켜 끌어모으는 무리도 나타났다.
천주교의 전파
천주교는 17세기에 중국 베이징의 천주당을 방문한 우리 나라 사신들에 의하여 서학으로 소개되었다. 천주교가 신앙으로 받아들여진 것은 18세기 후반이었다. 당시 정치와 사회의 모순을 해결하고자 고심하던 남인 계열의 일부 실학자들이 천주교 서적을 읽고 신앙 생활을 하게 되었으며, 이승훈이 베이징에서 서양인 신부에게서 영세를 받고 돌아온 이후로 신앙 활동이 더욱 활발해졌다.
정부는 천주교가 유포되는 것에 대하여, 내버려 두면 저절로 사라질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점차 교세가 확장되고 천주교가 조상에 대한 유교의 제사 의식을 거부하자, 양반 중심의 신분 질서 부정과 국왕의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 사교로 규정하기에 이르렀다.
정조 때에는 천주교에 대하여 비교적 관대하였으나, 순조가 즉위한 직후에 대탄압이 가해졌다(1801). 이 사건으로 천주교 전래에 앞장섰던 실학자 및 많은 수의 양반 계층이 교회를 떠나게 되었다. 천주교는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기에 탄압이 완화되면서 백성에게 활발히 전파되었다. 조선 교구가 설정되고, 서양인 신부가 몰래 들어와 포교하면서 교세가 확장되어 갔다.
천주교의 교세가 커진 것은 세도 정치로 말미암은 사회 불안과 어려운 현실에 대한 불만, 그리고 신 앞에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논리, 내세 신앙 등의 교리가 일부 백성에게 공감을 얻었기 때문이었다.
동학의 발생
동학은 1860년에 경주 출신인 최제우가 창도하였다. 동학에는 19세기 후반에 이르기까지 조선 사회가 처한 여러 사회 상황이 반영되었다. 교리는 유·불·선의 주요 내용이 바탕이 되었고, 주문과 부적 등 민간 신앙의 요소들이 결합되었다. 또, 사회 모순을 극복하고, 일본과 서양 국가의 침략을 막아내자는 주장을 폈다.
동학은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시천주(侍天主)와 인내천(人乃天) 사상을 강조하였다. 그래서 양반과 상민을 차별하지 않고, 노비 제도를 없애며, 여성과 어린이의 인격을 존중하는 사회를 추구하였다. 조선의 지배층은 신분 질서를 부정하는 동학을 위협하게 생각하여 세상을 어지럽히고 백성을 현혹한다는 죄로 최제우를 처형하였다.
그 뒤를 이은 최시형은 교세를 확대하면서 동경대전과 용담유사를 펴내어 교리를 정리하는 한편, 의식과 제도를 정착시켜 교단 조직을 정비하였다. 다시 교세가 커진 동학은 경상도, 충청도, 전라도는 물론, 강원도와 경기도 일대로 퍼져 나갔다.
농민의 항거
19세기의 세도 정치하에서 국가 기강이 해이해진 틈을 타 탐관오리의 부정과 탐학은 끝이 없었다. 삼정의 문란으로 극도에 달한 수령의 부정은 중앙 권력과도 연계되어 있어 암행어사의 파견만으로 막을 수 없는 정도가 아니었다. 농촌 사회가 피폐하여 가는 가운데 농민의 사회 의식은 오히려 더욱 강해져 갔다.
농민은 지배층의 압제에 대하여 종래의 소극적인 자세에서 벗어나 보다 적극적으로 그들과 대결하였다. 처음에는 벽서, 괘서 등의 형태로 나타나던 농민의 항거는 점차 농민 봉기로 변화되어 갔다. 농민의 항거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것은 평안도에서 일어난 홍경래의 난(1811)과 단성에서 시작되고 곧이어 진주로 파급되어 전국으로 확산된 농민 항쟁이었다(임술 농민 봉기, 1862).
홍경래의 난은 몰락한 양반인 홍경래의 지휘하에 영세 농민, 중소 상인, 광산 노동자 등이 합세하여 일으킨 봉기였다. 이들은 처음 가산에서 난을 일으켜 선천, 정주 등을 별다른 저항없이 점거하였다. 한때는 청천강 이북 지역을 거의 장악하였으나 5개월 만에 평정되었다. 홍경래의 난 이후에도 사회 불안은 수그러들지 않아 각지에서 농민 봉기가 일어났다. 그렇지만 관리들의 부정과 탐학은 시정되지 않았다.
임술 농민 봉기는 진주를 중심으로 확산되었는데, 농민들은 탐관오리와 토호의 탐학에 저항하여 한때 진주성을 점령하기도 하였다. 이를 계기로 농민의 항거는 북쪽의 함흥으로부터 남쪽의 제주에 이르기까지 전국적으로 퍼졌다. 이러한 저항 속에 농민들의 사회 의식은 성장하였고, 농민들의 항쟁으로 말미암아 양반 중심의 통치 체제도 점차 무너져 갔다.
5. 근·현대의 사회
1. 개항 이후의 사회 변화
사회 제도와 의식의 변화
개항 무렵, 일부 양반과 중인 출신 인사들은 개화 세력을 형성하여 사회 개혁을 추구해 나갔다. 이들은 실학 사상을 계승하고 서구의 사회 사상을 받아들여 평등한 근대 사회를 만들려고 하였다. 급진 개화파 세력은 1884년에 갑신정변을 일으켜 문벌을 없애고 능력에 따라 인재를 고루 등용하려 했으며, 인민 평등의 권리를 선언하는 등 사회의 전반적인 근대화를 추진하고자 하였다.
1860년대에 등장한 동학은 “사람 섬기기를 하늘같이 하라.”라고 하여, 사람은 누구나 평등하다는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평등 사상에 기초한 동학은 민중 속으로 빠르게 퍼져 나갔고, 1894년 동학 농민 운동으로 발전하였다. 동학 농민 운동은 일본군과 조선 관군의 진압으로 좌절되었지만, 양반 중심의 신분 사회가 타파되는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하였다.
갑신정변과 동학 농민 운동에서 추구하던 신분 제도의 폐지는 마침내 갑오·을미개혁을 통해 이루어졌다. 양반과 상민의 신분적 차별이 없어지고, 천민 신분과 공·사노비 제도가 폐지되었다. 또, 조혼이나 과부의 재혼 금지, 인신 매매, 고문, 연좌제 같은 악습도 없앴다. 아울러 과거제를 폐지하고, 신분의 구별 없이 인재를 등용하는 새로운 관리 임용 제도를 만들었으며, 사법권을 행정권에서 분리시켜 새로운 사법 제도의 기틀도 마련하였다.
한편, 독립 협회는 민중 계몽 운동을 전개하여 민중의 민권 의식과 평등 의식이 성장하는 데 이바지하였다. 많은 사람이 독립 신문을 구독하고, 각종 강연회와 토론회에 참여하거나 독립 협회의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이러한 노력은 애국 계몽 운동 단체나 학회, 언론 활동으로 이어져 시간이 지날수록 국가 의식, 민권 의식, 평등 의식이 높아졌다. 갑오개혁으로 비록 신분 제도는 폐지되었지만, 신분 의식은 아직 뿌리 깊게 남아 있었다. 이런 가운데 전국적으로 전개된 국채 보상 운동에 남녀노소, 지역, 신분을 가리지 않고 각계각층의 사람이 동참함으로써, 이 운동은 서로의 차이를 뛰어넘어 하나의 국민이라는 의식을 가지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 전국 각지에서 일어나 의병에는 많은 평민층이 참여하였을 뿐만 아니라, 평민 출신이 의병장으로 활약하면서 신분 의식 극복에 크게 기여하였다.
한편, 개항 이후 여성의 사회적 지위에 대한 의식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그리고 남녀 평등 의식의 확장과 함께 여성 교육의 중요성이 강조됨에 따라 많은 여성 교육 기관이 세워졌다.
의식주 생활의 변화
개항 이후, 서양의 문물과 제도가 들어오면서 서양의 생활 문화도 우리의 생활 문화에 영향을 끼치기 시작하였다. 이에 따라 전통적인 생활 모습도 많이 달라졌는데, 특히 의식주 생활에서 많은 변화가 있었다.
의생활에서 본격적인 변화는 양복이 소개되면서 시작되었다. 일부 상류층과 개화 인사는 상투를 자르고 단발하였으며, 한복 대신 양복을 입고 양말과 구두를 신었다. 그러나 일반 남성의 복장은 예전처럼 바지와 저고리 차림의 한복이었는데, 저고리 위에 마고자와 조끼를 입는 풍습이 새로이 생겨났다.
개화기에 대부분 여성은 전통적인 치마와 저고리를 입었다. 서양 여선교사의 양장을 본떠 만든 개량 한복도 등장하였다. 개량 한복은 여학생의 교복이나 신교육을 받은 여성의 옷차림으로 자리잡아 갔다. 여성의 외출과 사회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두루마기를 외출복으로 입었고, 오랫동안 여성의 얼굴을 가리던 장옷과 쓰개치마 등이 점차 사라지고 양산이 이를 대신하기도 하였다.
미국과의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외국의 여러 가지 음식 문화도 들여왔다. 서양 선교사가 들어오면서 한 자리에 둘러앉아 밥을 나누어 먹는 식사법이 생겨났다. 이전에는 남녀가 또는 양반과 상민이 한 상에서 음식을 먹는다는 것을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수저와 함께 서양의 포크와 나이프를 사용하여 식사를 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궁중과 일부 상류층에는 커피와 홍차, 양과자와 빵 같은 식품과 서양식 요리법, 식사 예절 등이 전해졌다.
임오군란 이후에 들어온 청나라 상인 중에서 일부는 음식점을 차리고, 중국 요리와 만두, 찐빵 등을 만들어 팔기도 하였다. 또, 청·일 전쟁 이후에 들어온 일본인은 초밥, 우동, 어묵, 단팥죽, 단무지, 청주 등 일본 음식을 소개하였다. 하지만, 외래 음식과의 접촉에 따른 식생활의 변화가 일반 서민의 음식에까지는 영향을 주지 않았다.
개항 이후, 그 동안 신분에 의해 규제받던 주택 문화에도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가옥의 규모나 건축 양식에 제한을 받지 않고 자유롭게 집을 지을 수 있었다.
한편, 서울과 부산, 인천, 원산 등 개항장에 각국의 공사관과 영사관이 세워지고, 서양인과 일본인이 살게 되면서 서양식 건물이나 일본식 주택이 나타났다. 또, 관청이나 공공 건물, 학교 건물, 상업용 건물, 종교 건물 등 근대식 건물이 잇따라 세워졌다. 1890년대에 들어와 민간에서도 서양식 건축물의 이점을 살려 한옥과 양옥을 절충한 건물을 짓기 시작하였다.
동포들의 국외 이주
19세기 후반에 조선 사회에는 가난과 수탈, 자연 재해 등으로 생계가 어려운 사람이 많았다. 그들 중에 일부는 새로운 생활 터전을 찾아 만주와 간도, 연해주, 일본, 미주 등지로 떠났다.
우리 동포가 맨 처음 이주한 지역은 만주와 연해주였다. 특히, 만주 지역은 압록강과 두만강만 건너면 되고, 개척할 농경지도 많았으며, 수렵이나 벌목으로도 생계가 가능하기 때문이었다.
만주 지역으로 이주한 동포들은 황무지를 개간하고 농사를 지었다. 1910년 무렵, 간도를 비롯한 만주 지역에는 한인이 20만 명을 넘었다.
일제의 탄압을 피해 이 곳으로 이주해 온 의병과 애국 계몽 운동가들은 독립 운동을 계속하였다. 이들은 학교를 세워 민족 의식을 고취하고, 독립군을 양성하는 등 독립 운동의 기반을 마련하거나, 국내와 연결하여 독립 운동을 펼쳐 나갔다.
러시아는 연해주를 개척할 목적으로 한인의 이주를 허가하였다. 이에 따라 우리 동포는 두만강을 건너가 러시아 정부가 준 토지를 경작하거나 황무지 등을 개간하였다. 이후, 블라디보스토크, 하바롭스크 등 연해주 곳곳으로 한인이 이주해 왔다. 20세기 초, 연해주에는 8만 명이 넘는 한인이 모여 살았다.
연해주의 한인은 집단으로 거주하면서 100여 개에 이르는 신한촌을 세웠다. 이 곳에 자치 기구를 만들고 학교를 세워 민족 의식을 불어넣었다. 을사조약 이후에 연해주 지역은 국권 회복을 위한 무장 투쟁의 중심지가 되었다.
미주 이주는 1902년 하와이 이민으로 시작되었다. 미국 하와이 농장주들이 노동자를 구하기가 어렵게 되자, 대한 제국 정부에 한국 농민의 이민을 요청해 왔다. 그리하여 우리 농민은 정부의 해외 취업 알선을 받아 하와이에 첫발을 내디뎠다. 이주가 시작된 지 3년 만에 하와이에는 7000여 명의 동포가 살게 되었다.
하와이로 이민 간 동포는 사탕수수 농장일뿐만 아니라, 철도 공사, 개간 사업 등 고된 일을 하면서 인종 차별까지 당했다. 이러한 어려운 환경에서도 학교와 교회 등을 세우고, 자치 단체를 만들어 한인 사회를 발전시켰다. 그리고 그들 중의 일부는 미국 본토, 멕시코, 쿠바 등지로 이주해 갔다.
2. 일제 강점기의 사회 변화
독립 운동 세력의 분화
1919년 3·1 운동이 좌절된 후, 독립 운동 진영 사이에 이견이 나타났다. 이는 독립 운동의 방법과 독립 이후의 국가 체제 등에 대한 인식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으로, 독립 운동 진영은 민족주의 운동, 사회주의 운동, 아나키스트 운동 등으로 갈라졌다.
민족주의 세력은 일제의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을 이루고, 독립한 다음에는 자본주의 체제의 국가를 세우고자 하였다. 그러나 사회주의 세력은 노동자, 농민이 중심이 되는 사회주의 국가를 실현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따라 민족주의 세력은 민립 대학 설립 운동이나 물산 장려 운동 같은 실력 양성 운동을 추진하였다. 반면에, 사회주의 세력은 노동자와 농민을 조직하여 노동 조합과 농민 조합을 만들고, 이를 중심으로 한 계급 운동과 독립 운동을 전개하였다.
한편, 3·1 운동 이후 사회주의 사상이 러시아, 일본, 중국에서 들어오면서 청년·지식층을 중심으로 사회주의 운동이 시작되었다. 1920년대 국내에서는 각종 청년회, 사상 단체, 노동 운동 단체, 농민 운동 단체가 생겨났다. 독립 운동 과정에서 사회주의 세력은 이념과 노선을 둘러싸고 민족주의 세력과 대립하기도 하였으나, 노동 운동, 농민 운동, 여성 운동, 청년 운동, 소년 운동 등 사회·경제적 대중 운동의 활성화에 영향을 주었다.
신간회
1920년대 중반에 비타협적인 민족주의 세력은 타협론자들의 자치 운동을 경계하며, 사회주의 세력과 연대하여 이를 저지하려 하였다. 사회주의 세력도 1926년 ‘정우회 선언’을 발표하여 이에 호응하였다.
결국, 비타협적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은 이념과 노선의 차이를 뛰어넘어 민족 협동 전선을 결성하기로 의견을 모아 신간회가 창립되었다(1927. 2.)
신간회는 한국인 본위의 교육 실시, 착취 기관 철폐 등을 주장하였고, 사회 운동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특히, 원산 노동자 총파업의 지원, 갑산 화전민 학살 사건에 대한 진상 규명 운동을 전개하였다. 또, 1929년에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이 일어나자 현지에 조사단을 파견하고, 조사 결과를 발표할 만한 민중 대회를 준비하였으나, 경찰의 탄압으로 좌절되었다.
신간회는 민중 대회 사건 후, 새 집행부의 투쟁 방법을 둘러싸고 내부에서 민족주의 세력과 사회주의 세력 사이에 대립이 생겨 해체되고 말았다. 하지만, 신간회는 국내 민족 운동 세력의 역량을 총결집시켰다.
농민 운동과 노동 운동
러·일 전쟁 후, 일본인은 본격적으로 한국에 건너와 헐값으로 토지를 사들이는 한편, 고리대를 통해 농민의 토지를 빼앗았다. 동양 척식 주식 회사는 일본인 농민을 한국에 이주시켜 이들에게 농사를 짓게 하였다. 한국인 지주도 일본에 쌀을 수출하여 얻은 부를 다시 토지에 투자하여 대지주로 성장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 과정에서 많은 농민은 토지를 잃고 소작농으로 전락하였다. 소작 농민은 수확량의 절반이 넘는 소작료와 지주가 물어야 할 지세 부담까지 떠맡았고, 마름의 횡포에 시달렸다. 더욱이 소작인은 1년을 기한으로 하는 소작 계약을 강요당하여 생존권마저 위협받았다.
농촌에서 살 수 없게 된 농민은 도시로 나가 노동자나 빈민이 되거나, 광부, 화전민 등으로 살아갔다. 여기에 자연 재해를 당한 농민들은 새 삶을 찾아 만주, 연해주, 일본, 미주 등지로 떠나갔다.
이런 가운데 지주에 대한 농민의 저항 의식이 높아져 전국 각지에서 소작 쟁의가 발생하였다. 전라 남도 부안군(현 신안군) 암태도 소작 쟁의(1923)는 대표적인 것이었다. 암태도 농민은 지주와 그를 비호하는 일본 경찰에 맞서 1년 가까이 싸워 소작료를 낮추는 성과를 거두었다.
초기의 소작 쟁의는 소작료 인하 등 생존권을 지키려는 경제적 투쟁이었다. 그러나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농민 운동은 사회주의 운동의 노선 변화와 맞물려 커다란 변화를 겪었다. 사회주의자들은 기존의 합법적 농민 조합 대신 비합법적, 혁명적 농민 조합을 조직하였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대부분 좌절되었다.
한편, 1910년대에는 전체 인구의 80% 이상이 농업에 종사하였고, 노동자의 수는 아주 적었다. 그러나 1920년대에는 일제의 식민지 공업화 정책에 따라 산업 노동자 수가 점차 늘어났다. 1930년대에 북부 지방에 대규모 공장이 들어서면서 노동자 수도 빠르게 늘어나, 1943년에는 100만 명에 달하였다.
한국인 노동자의 절반 이상은 하루 12시간이 넘는 힘겨운 노동에 시달렸다. 그러나 임금은 대부분 같은 직종에서 일하는 일본인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였다. 한국인 노동자의 열악한 노동 조건과 민족 차별 등은 노동자의 계급 의식과 민족 의식을 불러일으켜 노동 운동을 벌이는 배경이 되었다.
이 시기의 가장 대표적인 노동 쟁의는 원산 노동자 총파업(1929)이었다. 이 파업은 전국적으로 지지와 성원을 받았고, 세계 여러 나라의 노동자도 격려 전문을 보내와 국제적 연대를 과시하기도 하였다.
1930년대 이후에는 일제의 병참 기지화 정책, 전시 동원 정책이 진행되면서 노동자의 노동 조건은 더욱 나빠졌고, 노동 쟁의에 대한 통제 또한 크게 강화되었다.
청년 운동, 여성 운동, 형평 운동
3·1 운동 이후 독립 운동에서 청년의 역할이 새롭게 인식되면서 여러 청년 단체가 전국에서 조직되었다. 이들 청년 단체는 각종 강연회, 토론회 등을 개최하여 청년들을 각성시켰으며, 야학을 열어 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아동들을 가르쳤다. 또, 물산 장려 운동, 민립 대학 설립 운동 같은 실력 양성 운동을 적극 지원하였다. 그러나 1923년 이후 청년 단체는 사회주의 사상의 영향을 받으면서 운동의 방향을 전환하여 노동 운동, 농민 운동, 학생 운동 등에 대한 지원에 더 힘을 기울였다.
한편, 한말 이후 신교육을 받은 여성이 늘어나면서 여성의 사회 의식도 높아졌다. 1920년대에는 여자 청년회, 부인회 등 2백여 개의 여성 운동 단체가 조직되었다. 여성 단체들은 주로 남녀 평등, 문맹 퇴치, 구습 타파, 생활 개선 등 여성 계몽과 지위 향상에 노력하였다.
1927년 5월에는 신간회의 자매 단체로서 근우회가 창립되었다. 근우회는 강연회와 토론회 개최, 야학 설치 등을 통한 여성 계몽 활동과 함께 여성 노동자의 권익 옹호에 앞장섰다. 그러나 1931년에 신간회가 해산되면서 근우회도 해산되고 말았다.
한편, 갑오개혁 때 신분 제도가 폐지됨에 따라 그 동안 사회적으로 천대받던 백성도 평등한 지위를 얻었으나 백정 출신에 대한 사회적 차별과 냉대는 일제 강점기에도 여전히 남아 있었다. 총독부는 새 호적을 만들면서 백정 출신을 호적에 ‘도한’으로 써 넣거나 붉은 점을 찍어 차별하였다. 학교 입학 통지서에도 백정 신분을 밝힘으로써 입학이 거부되거나 중도에 학교를 그만두는 일도 많았다.
이에, 백정 출신들은 경상 남도 진주에서 형평사를 창립하고(1923), 평등한 대우를 요구하는 형평 운동을 펼쳐 나갔다. 그러나 아직도 신분 의식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대중은 여전히 백정 출신을 차별하였으며, 형평 운동에 반대하는 반형평 운동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인구의 증가와 도시의 변화
일제 강점기에도 인구는 늘어 갔다. 인구 조사가 어느 정도 이루어진 1910년대 말에 국내 거주 한국인은 1700만 명 정도였다. 1930년에는 2000만 명, 1942년에는 2600만 명 정도로 늘어났다.
서울(경성)의 인구는 1920년에 24만 명 정도였고, 1940년에는 93만 명 정도로 4배 가량 늘었다. 총독부는 서울에 도시 개수 계획을 도입하여 도시의 모습을 크게 바꾸어 놓았다. 또, 경복궁, 창덕궁, 경희궁 같은 전통 건물을 마구 헐어 내고, 총독부, 경성부 청사, 경성 역사 같은 관공서와 공공 시설, 공원, 학교 등을 잇따라 건립함에 따라 서울의 모습은 점차 식민지 도시 풍경으로 변해 갔다.
한편, 1930년 무렵 서울에는 10만여 명의 일본인이 살고 있었다. 이들 일본인은 본정(현 충무로), 명치정(현 명동), 황금정(현 을지로) 일대를 중심으로 일본인 거리를 이루었다. 그리하여 청계천을 경계로 남쪽의 일본인 거리는 남촌, 북쪽의 한국인 거리는 북촌으로 불렸다. 당시 남촌의 거리는 서울의 정치와 상업의 중심지로서 관공서, 은행, 백화점, 상가, 도로 포장, 신호등, 가로등, 네온등 등 근대 도시의 겉모습을 갖추고 있었지만, 북촌의 거리는 그렇지 못하였다. 이와 같은 도시의 이중적인 모습은 서울뿐만 아니라, 일본인이 많이 살던 부산, 인천, 군산, 목포, 마산 등 개항장이던 도시 대부분이 그러했다.
의식주 생활의 변화
근대 문명의 유입은 의식주 생활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먼저, 의생활에서는 직장인을 중심으로 양복을 입는 사람이 늘어났다. 그러나 대부분은 여전히 한복을 입으면서 고무신을 신고 모자를 쓰는 방식으로 한식과 양식을 혼합하였다.
1910년대까지만 해도 대부분 여성은 쪽진 가르마머리를 하였으나, 블라우스와 스커트 차림, 단발머리와 파마머리, 스타킹과 하이힐 등은 도시에서는 그리 낯선 풍경이 아니었다.
1940년대에 전시 체제가 되면서 남녀의 복장이 모두 바뀌었다. 남자는 한복이나 양복 대신 국방색 국민복을 입고, 전투모에 각반을 찼다. 여자는 치마 대신 일본 농촌 여성의 작업복인 몸뻬라는 바지를 입어야 했다.
식생활에도 큰 변화가 나타났다. 1910년 이후, 과자, 빵, 케이크, 카스텔라, 비프스테이크, 수프, 아이스 크림 등 서양 음식이 대중에게도 본격 소개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서양 식품의 소비는 주로 도시의 상류층에 한정되어 있었으며, 일반 서민의 식생활은 형편이 사뭇 달랐을 뿐 아니라, 식량 사정이 매우 나빴다. 산미 증식 계획 이후에 식량이 증산되었는데도 한국인 1인당 쌀 소비량은 갈수록 줄어들었다. 여기에, 중·일 전쟁 후에 쌀 공출제를 실시함에 따라 식량 부족 현상은 더욱 심각해졌다. 서민은 잡곡밥, 조밥, 수수밥을 먹거나, 심지어는 소나무 속껍질로 만든 송기떡, 콩깻묵, 밀기울, 술찌기를 먹으면서 연명하기도 하였다.
도시에 사람이 몰리면서 이전에 볼 수 없었던 주택이 나타났다. 1920년대 이후에 상류층의 문화 주택, 중류층의 개량 한옥, 중·하류층의 영단 주택이 등장하였다.
1920년대에 지어진 개량 한옥은 사랑방과 문간방이 없어지고, 대청마루에 유리문을 달고 니스와 페인트를 칠한 혼합형 가옥이었다. 1930년대에 나타난 문화 주택은 2층 양옥으로, 전에 없던 복도와 응접실, 침실, 아이들 방 등 개인의 독립된 공간이 생겨났다. 영단 주택은 1940년대 들어 도시민, 특히 서민의 주택난을 해결하려고 지은 일종의 국민 연립 주택이었다.
서울 변두리에는 빈민이 토막집을 짓고 살았다. 토막살이를 하는 사람은 1937년 서울(경성부) 총인구 70만여 명 중에서 15,000여 명에 달하였다.
3. 현대 사회의 발전
인구의 변화
광복 직전의 우리 나라 인구는 2600만 명 정도였다. 1953년 휴전 이후에 출산율이 갑자기 높아져 이른바 ‘베이비 붐’이 나타났다. 1955~1960년 사이 평균 출산율은 6.3명에 달한 반면, 사망률은 점차 낮아져 인구는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1955년에 남한의 인구는 2150만 명 정도였는데, 1960년에는 2500만 명을 넘었다.
1960년대에 들어와 정부는 가족 계획 사업을 시작하여 출산율을 낮추려 노력하였다. 여기에 여성의 혼인 연령 상승, 자녀 교육비 증가, 자식에 대한 가치관의 변화, 피임 확산 등으로 출산율은 점점 낮아졌다. 출산율은 1965년부터 1970년까지는 4.6명이었으나, 1980년대에 들어 와서는 2명으로 떨어지다가 2005년에는 1.23명으로 더욱 낮아졌다. 이러한 저출산의 영향으로 핵가족화가 급격히 진전되고 있으며, 남녀 성차별이 점차 둔화되고 있다.
한편, 산업화의 영향으로 가족 제도의 변화와 함께 연령별 인구 구성도 달라졌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출산율과 사망률이 높았으나, 1990년대에는 출산율과 사망률이 낮아지면서 안정적인 인구 구성을 이루었다. 그러나 2000년대에 이르러 낮은 출산율이 계속 이어지고 인구의 고령화가 빠르게 진전되면서 고령 사회와 출산율 감소가 사회 문제가 되고 있다.
산업화와 도시화
1960년대에 들어와 경제 개발 정책이 본격적으로 추진되면서 우리 나라는 전통적인 농업 사회에서 산업 사회로 빠르게 바뀌어 갔다. 1960년대 이후,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던 농촌 사람은 일자리를 찾아 대도시나 신흥 산업 도시로 나갔다. 이에 따라 처음에는 서울과 부산, 나중에는 영남의 신흥 공업 도시의 인구가 급팽창하였다. 반면에, 농업 위주의 다른 지역 인구는 크게 줄어 지역적 불균형을 낳았다. 또, 전체 인구 중에 도시에 거주하는 비율은 2005년에 80%를 넘어서 매우 높은 수치를 보여 주고 있다.
도시로 인구가 집중되면서 주택, 교통, 실업, 교육, 빈민, 공해 등 여러 가지 사회 문제를 낳았다. 이에, 정부는 신도시 건설과 대규모 아파트 단지 조성, 지하철 건설과 도로망 확충, 의무 교육 확대, 사회 복지 제도 도입, 환경부 신설 등 각종 정책을 마련하여 사회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였다.
급격한 산업화와 도시화는 사람들의 의식과 생활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도시로 이주한 가족은 대부분 핵가족의 모습을 띠었다. 그리고 공동체 의식은 크게 약화되고 개인주의적 성향이 강해졌다. 여기에 물질적 가치가 정신적 가치보다 우선시되는 물질 만능주의가 사회를 지배하게 됨에 따라 적지 않은 사회 문제를 낳았다.
농촌 사회의 변화
1950년대에 시행된 농지 개혁으로, 땅이 없던 농민은 비록 적은 농토이긴 하지만 자기 땅을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1950년대 농촌은 과잉 인구와 만성적인 빚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이후, 정부는 4H 운동을 확대하였으며, 1970년대에 들어서는 새마을 운동을 전개하였다. 특히, 새마을 운동은 농촌의 생활 환경을 개선하여 농촌의 모습을 크게 바꾸어 놓았다. 1970년대 중반에 다수확 품종의 개발로 쌀의 자급자족이 가능해졌고, 농민은 원예, 축산 등 영농의 다각화를 시작하였다. 하지만, 농촌과 도시와의 소득 격차는 좁혀지지 않았고, 교육과 일자리 등을 찾아 젊은층이 도시로 나가기 시작하였다.
1980년대에 시작된 대외 경제 개방 정책은 농촌에 큰 영향을 끼쳤다. 곡물에서 가공 식품 원료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농산물 수입이 개방됨으로써 농촌 경제는 커다란 타격을 받게 되었다.
1990년대에는 우리 나라도 다른 나라에 농수산물 시장 개방에 이어 쌀 시장까지 개방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정부의 농촌 지원 대책에도 불구하고 농촌의 상황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고, 농촌 인력은 갈수록 고령화하였다.
1990년대 이후, 농민은 자신들의 권익을 지키고자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들은 각지에서 농민회를 조직하고, 이를 중심으로 농산물 수입 개방 반대, 농가 부채 해결 등을 요구하는 농민 운동을 전개하였다.
노동 계층의 확대와 노동 운동
1960년대 이후 급속한 산업화가 진행됨에 따라 노동자 수가 크게 늘어났다. 하지만, 산업화 초기에 노동자는 낮은 임금과 열악한 노동 환경 등으로 큰 고통을 겪었다.
1970년 11월에 서울 청계천 평화 시장에서 재단사로 일하던 전태일이 “근로기준법을 지켜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등의 구호를 외치며 자기 몸을 불살라 암울한 노동 현실을 사회에 고발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은 노동자뿐만 아니라, 학생, 지식인, 종교계 등에 큰 충격을 주었다.
전태일 분신 사건 이후, 노동자들은 노동자의 생존권 쟁취 운동, 노동 조합 설립 운동 등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박정희 정부는 노동자의 노동 3권을 크게 제한하여 노동 운동을 탄압하였다. 급기야 1979년에 야당(신민당) 당사에서 생존권 보장을 요구하며 농성하던 YH 무역 여성 노동자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여성 노동자가 숨지는 사건이 일어났다.
1980년대 전두환 정권기에도 노동 운동의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1970년대 중반 이후 중화학 공업화의 진전으로 대규모 사업장이 등장하고, 노동자의 수도 크게 늘어났지만, 노동자는 노동 조합조차 제대로 조직할 수 없었다.
그러나 1987년 민주 항쟁 이후 전국적으로 수많은 노동 조합이 새로이 결성되었다. 1991년, 정부는 국제 노동 기구(ILO)에 가입하여 국제 수준의 노동 규칙을 따르고자 하였다.
1997년 외환 위기로 국제 통화 기금(IMF)의 관리를 받게 되면서 노동자의 대량 실직 사태가 발생하였다. 이에, 김대중 정부는 노사정 위원회를 구성하여 구조 조정에 따른 실업이나 노사 문제 등을 해결하고자 하였다.
시민 운동의 성장
1987년 6월 민주 항쟁 이후로 시민 운동 단체(NGO)가 많이 늘어났다. 정치적 민주화의 진전, 냉전 종식에 따른 이데올로기 대립의 퇴조, 중산층의 형성, 사회의 다양화, 자연 상태와 환경의 위기 심화 등이 시민 운동의 활성화를 가져온 것이다.
시민 운동 단체는 사회·경제의 민주화와 ‘삶의 질’ 향상 등 사회 문제 해결에 노력하였다. 또, 국가 권력의 부패와 권력 남용, 불투명한 기업 운영, 정부·자치 단체나 기업의 환경 파괴 등을 감시하는 활동을 폄으로써 정부와 기업에 대한 강력한 견제 세력으로 등장하였다.
1990년대 이후에는 세계화의 본격적인 전개에 따라 국제, 경제, 환경, 노동, 통일 등의 문제도 국제화되었다. 이에, 관련 시민 단체들은 국제적 연대를 통한 문제 해결을 적극적으로 모색하고 있다. 또, 여성, 빈민층, 외국인 노동자 등 소수자, 약자를 보호하려는 활동도 활발히 전개하고 있다.
의식주 생활의 변화
광복이 되자, 사람들은 일제의 강요로 입었던 국민복과 몸뻬를 벗어 버리고 한복을 다시 입었다. 6·25 전쟁 후에 여성은 질기고 오래 가는 나일론으로 만든 블라우스를 입었고, 남성은 옷감이 부족하여 군복을 물들여 입기도 하였다. 1961년에 군사 정권은 ‘신생활 재건 운동’을 추진하면서 남성은 작업복 스타일의 ‘재건복’을, 여성은 ‘신생활복’을 입도록 권장하였다.
한편, 여성의 복장은 유행에 따라 변하였다. 1950년대에는 플레어스커트, 타이트스커트, 맘보바지 등이 유행하였고, 1960년대에는 치마 길이가 짧은 미니스커트와 바지 통이 넓은 판탈롱이 등장하였다. 1970년대에 양장은 미니, 맥시, 판탈롱, 핫팬츠 등 다양한 모델을 선보였다. 이런 가운데 젊은층 사이에서는 통기타와 팝송을 상징으로 하는 청년 문화의 복장으로 청바지와 장발 등이 크게 유행하였다.
1970년대에는 여성복이 먼저 맞춤복 시대에서 기성복 시대로 넘어갔고, 남성복도 1980년대에 이후 기성복 시대로 넘어갔다. 1980년대 들어 캐주얼웨어가 큰 인기를 끌었고, 스포츠, 레저용 의류의 소비도 크게 늘었다. 컬러 텔레비전의 영향으로 의복의 색상이 더 화려하고 다채로워졌다.
광복 이후 인구의 빠른 증가와 6·25 전쟁 후 베이비 붐 등으로 식량난은 계속되었다. 이 때, 미국에서 들여온 잉여 농산물은 밀가루가 주종을 이루었고, 정부는 분식, 보리 혼식 등을 장려하여 식량난을 해결하고자 하였다.
1970년대 중반에 주식인 쌀의 자급은 달성되었으나, 오히려 밀, 옥수수, 콩 등의 수입은 더욱 늘어났다. 1980년대 이후에는 식생활이 서구화되면서 밀가루 음식 소비가 부쩍 늘어남에 따라 쌀 생산은 과잉 상태에 이르렀다. 또, 서구화된 식생활 습관이 일반화되어 가공 식품과 동물성 식품의 섭취량이 빠르게 늘어났다. 그런데 동물성 식품의 증가는 영양의 불균형, 영양 과잉 상태를 초래하여 생활 습관병과 비만 등의 문제를 낳았다.
이와 같은 문제에 대한 인식이 일반화되면서 1990년대에는 이후 안전하고 건강한 식품을 찾는 사람이 늘어났다. 농산물에 남아 있는 농약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무공해 유기 농산물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다.
광복에 이어 6·25 전쟁으로 주택난은 더욱 심각해졌다. 휴전 이후, 파괴된 주택을 복구하고자 ‘재건 주택’이 지어졌다.
1964년 서울 마포에 아파트가 처음 등장한 이후로 아파트는 도시의 새로운 주거 형태로 등장하였다. 1970년대 아파트 단지가 강남과 잠실 등지에 건설되면서 도시의 주거 문화도 빠르게 변화하였다. 반면에, 서울의 높은 지대와 변두리에 ‘달동네’라는 빈민촌이 생겨났다.
1980년대 서울과 수도권 도시, 지방 대도시 곳곳에 아파트 단지가 건설되고, 달동네나 판자촌도 재개발되어 아파트 단지로 탈바꿈하였다. 수도권으로 인구가 몰려들어 주택난이 계속되자, 1990년대에는 정부는 서울 주변에 대규모 아파트 단지를 중심으로 한 신도시를 건설하였다. 이후 지방 중소 도시까지 아파트가 공급되면서 아파트에 사는 사람이 국민의 절반을 넘었다.
VI. 민족 문화의 발달
1. 고대의 문화
1. 학문과 사상, 종교
한자의 보급과 교육
우리 나라는 철기 시대부터 한자를 도입하여 사용해 왔지만, 이두나 향찰을 만들어 한문의 토착화를 위한 독자적 노력도 기울였다.
한자의 보급과 함께 교육 기관이 설립되었다. 고구려는 수도에 태학을 세워 유교 경전과 역사서를 가르치고, 지방에는 경당을 세워 청소년에게 한학과 무술을 가르쳤다. 백제는 5경 박사와 의박사, 역박사 등을 두어 유교 경전과 기술학 등을 가르쳤다. 임신서기석을 보면 신라에서도 청소년이 유교 경전을 공부하였던 사실을 알 수 있다.
중국과의 교류가 활발해지고 여러 교육 기관이 설립됨에 따라 유학이 보급되어 갔다. 삼국 시대의 유학은 학문적으로 깊이 있게 연구된 것이 아니라, 충, 효, 신 등 도덕 규범을 장려하는 정도였다.
통일 신라에서는 신문왕 때 국학이라는 유학 교육 기관을 설립하였다. 그 후, 경덕왕 때에는 국학을 태학으로 고치고 박사와 조교를 두어 논어와 효경 등의 유교 경전을 가르쳤다. 이것은 충효 일치의 윤리를 강조한 것이었다.
원성왕 때에는 유교 경전의 이해 수준을 시험하여 관리를 채용하는 독서삼품과를 마련하였다. 이 제도는 골품 제도 때문에 그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지는 못하였지만, 학문과 유학을 보급시키는 데 이바지하였다.
발해에서도 유학 교육을 목적으로 주자감을 설립하여 귀족 자제에게 유교 경전을 가르쳤다.
역사 편찬과 유학의 보급
삼국 시대에 학문이 점차 발달하고 중앙 집권적 체제가 정비됨에 따라 역사 편찬이 이루어졌다.
고구려에서는 일찍부터 유기가 편찬되었으며, 영양왕 때 이문진이 이를 간추려 신집 5권을 편찬하였다. 백제에서는 근초고왕 때 고흥이 서기를, 신라에서는 진흥왕 때 거칠부가 국사를 편찬하였다. 그러나 이들 역사서는 모두 전하지 않고 있다.
삼국 통일 이후, 신라의 대표적 문장가인 김대문은 화랑의 전기를 모은 화랑세기, 유명한 승려의 전기를 모은 고승전, 한산주 시방의 지리지인 한산기 등을 지었다. 그의 저서는 신라의 문화를 주체적으로 인식하려는 경향을 보여 주고 있다.
신라의 유학자는 6두품 출신이 많았다. 통일 신라 초에 활약한 강수는 외교 문서를 잘 지은 문장가로 유명하였다. 설총은 유교 경전에 조예가 깊었고, 이두를 정리하여 한문 교육의 보급에 공헌하였다.
통일 이후 신라와 당의 문화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당에 건너가 공부한 유학생이 많아졌다. 그 중에서 최치원은 당의 빈공과에 급제하고 문장가로 이름을 떨친 후 귀국하여 개혁안 10여 조를 건의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 후, 그는 은둔 생활을 하면서 뛰어난 문장과 저술을 남겼다.
발해도 당에 유학생을 파견하였는데, 당의 빈공과에 급제한 사람이 여러 명 나왔다.
불교의 수용
삼국은 중앙 집권 체제의 확립과 지방 세력의 통합에 힘쓰던 4세기에 불교를 수용하였다. 이는 새로운 국가 정신의 확립에 기여하고 강화된 왕권을 이념적으로 뒷받침해 주는 사상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신라의 여러 왕이 불교식 이름을 가졌으며, 원광은 젊은이들에게 세속 5계를 가르쳤다. 또, 불교의 전래와 함께 사상을 비롯한 음악, 미술, 건축, 공예, 의학 등 선진 문화도 폭넓게 수용되었다. 불교는 새로운 문화 창조에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삼국은 불교를 신앙으로 널리 수용하였다. 고구려와 백제에서는 사상적으로 불교를 이해하는 데에도 상당히 높은 수준이었다. 특히, 신라에서는 불교가 왕권과 밀착되어 성행하였다. 신라에서는 사람의 행위에 따라 업보를 받는다는 업설과, 미륵불이 나타나 이상적인 불국토를 건설한다는 미륵불 신앙이 널리 받아들여졌다.
삼국에는 도교도 전래되어 산천 숭배나 신선 사상과 결합하여 귀족 사회를 중심으로 환영을 받았다. 백제의 산수무늬 벽돌은 자연과 더불어 살고자 하는 사람들의 생각을 담고 있으며, 백제 금동 대향로는 신선들이 사는 이상 세계를 형상으로 표현하였다. 고구려 고분에 그려진 사신도는 도교의 방위신을 그린 것으로, 죽은 자의 사후 세계를 지켜 주리라는 믿음을 표현하고 있다.
불교 사상의 발달
신라의 불교 사상은 고구려와 백제의 문화를 종합하여 한민족 문화의 토대를 마련한 7세기 후반기에 정립되었다. 삼국 불교의 유산을 토대로 하고 중국과의 교류를 더하여 신라 불교는 다양하고 폭넓은 불교 사상을 본격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기반을 쌓았다.
이 시기를 대표하는 원효는 불교 서적을 폭넓게 이해하고, 모든 것이 한마음에서 나온다는 일심 사상을 바탕으로, 다른 종파들과 사상적 대립을 조화시키고 분파 의식을 극복하려고 노력하였다.
의상은 모든 존재가 상호 의존적인 관계에 있으면서 서로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화엄 사상을 정립하였다. 의상은 화엄 사상을 바탕으로 교단을 형성하여 많은 제자를 양성하고, 부석사를 비롯한 여러 사원을 건립하여 불교 문화의 폭을 확대하였다.
원효는 극락에 가고자 하는 아미타 신앙을 자신이 직접 전도하며 불교 대중화의 길을 열었고, 의상은 아미타 신앙과 함께 현세에서 고난을 구제받고자 하는 관음 신앙을 이끌었다. 이 시기부터 불교는 일반인에게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이 시기에 많은 승려가 중국에 가서 새로운 불교를 전수해 왔다. 중국을 넘어 인도까지 가서 불교를 공부하고 오는 승려도 있었다. 그 중에 혜초는 자신이 돌아본 인도와 중앙 아시아 여러 나라의 풍물을 생생하게 기록한 왕오천축국전을 남겼다.
고구려 불교를 계승한 발해의 불교는 왕실과 귀족을 중심으로 성행하였는데, 문왕은 스스로를 불교적 성왕으로 일컫기도 하였다. 수도였던 상경에서 발굴된 10여 개의 웅장한 절터와 불상은 발해의 불교가 융성했음을 보여 준다.
선종과 풍수지리설
신라 말에는 경전의 이해를 통하여 깨달음을 추구하는 교종과 달리, 실천 수행을 통하여 마음 속에 내재된 깨달음을 얻는다는 선종 불교가 널리 확산되었다.
선종의 확산은 경전 연구와 교단 조직을 중시하는 기존의 교종 중심 체제를 뒤엎는 혁신적인 것이었고, 당시 불교계에서 일어나고 있던 개혁 요구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선종은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고자 하는 지방 호족의 이념적 지주가 되었으며, 선종 승려들은 지방 호족 출신이 많았다. 이들은 지방 호족과 결합하여 각 지방에 근거지를 마련하였는데, 그 중에서 대표적인 9개의 선종 사원이 9산 선문이다.
선종은 지방을 근거로 성장하여 지방 문화 역량의 증대를 가져왔다. 선종 승려는 사회 변혁을 희망하던 6두품 지식인과 함께 새로운 고려 사회 건설에 사상적 바탕을 마련해 주었다.
한편, 신라 말기에 도선과 같은 선종 승려들은 중국에서 유행한 풍수지리설을 들여왔다. 풍수지리설은 산세와 수세를 살펴 도읍, 주택, 묘지 등을 선정하는 인문 지리적 학설로서, 국토의 효율적인 이용과 관련되어 있다. 이에 따라, 경주 중심의 지리 개념에서 벗어나 다른 지방의 중요성을 자각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2. 과학 기술의 발달
천문학과 수학
고대의 천문학은 천체 관측을 중심으로 발달하였다. 고구려에서는 별자리를 그린 천문도가 만들어졌고, 고분 벽화에도 별자리 그림이 남아 있는데, 매우 사실적이고 정확한 관측을 토대로 그려졌음을 알 수 있다. 신라에서도 7세기 선덕 여왕 때에 첨성대를 세워 천체를 관측하였다.
우리 민족은 일찍부터 천문 현상을 관측하여 기록하였다. 삼국사기에는 일·월식, 혜성의 출현, 기상 이변 등에 관한 관측 기록이 많이 수록되어 있는데, 매우 정확한 기록임이 밝혀지고 있다. 고대 사회에서 천체와 천문 현상에 대한 관측을 중시하였던 것은, 천문 현상이 농경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인식하였고, 아울러 왕의 권위를 하늘과 연결시키려고 하였기 때문이었다.
천문학의 발달과 함께 높은 수준의 수학이 발달했음을 여러 가지 조형물을 통하여 알 수 있다. 고구려 고분의 석실이나 천장의 구조, 백제의 정림사지 5층 석탑, 신라의 황룡사 9층탑 등에 수학적 지식이 활용되었다. 통일 신라 시대에 만들어진 석굴암의 석굴 구조나 불국사 3층 석탑(석가탑)과 다보탑 등의 건축에도 정밀한 수학적 지식이 이용되었다.
목판 인쇄술과 제지술의 발달
통일 신라에서는 불교 문화의 발달에 따라 대량으로 불경을 인쇄하기 위해 목판 인쇄술과 질 좋은 종이를 만들 수 있는 제지술이 발달하였다. 불국사 3층 석탑에서 발견된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8세기 초에 만들어진 두루마리 불경으로,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으로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 된 목판 인쇄물이다.
한편,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쓰여진 종이는 닥나무로 만든 것으로, 지금까지 보존될 수 있을 만큼 품질이 뛰어나다. 이러한 목판 인쇄술과 제지술의 발달은 통일 신라의 기록 문화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금속 기술의 발달
고구려에서는 철의 생산이 중요한 국가적 산업이었으며, 철광석 생산이 풍부하여 일찍부터 철을 다루는 기술이 발달하였다. 고구려 지역에서 출토된 철제 무기와 도구 등은 그 품질이 우수하며, 고분 벽화에는 철을 단련하고 수레바퀴를 제작하는 기술자의 모습이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다.
백제에서도 금속 기술이 발달하였다. 4세기 후반에 백제에서 만들어 일본에 보낸 칠지도는 강철로 만들고 금으로 글씨를 상감해 새겨 넣은 우수한 제품이다. 칠지도는 백제 제철 기술의 우수함을 잘 보여 주고 있다. 또, 백제 금동 대향로는 백제의 금속 공예 기술이 매우 뛰어났음을 보여 주는 걸작품이다.
신라에서는 금 세공 기술이 발달하였다. 신라 고분에서 출토된 금관들은 순금으로 만든 것과 금으로 도금한 것이 있는데, 제작 기법이 뛰어나며 독특한 모양이 돋보인다. 통일 신라의 성덕 대왕 신종은 아연이 함유된 청동으로 만들었는데, 신비한 종 소리는 당시 신라의 금속 주조 기술이 매우 뛰어났음을 보여 주고 있다.
3. 고대인의 자취와 멋
고분과 고분 벽화
고구려는 초기에 주로 돌무지무덤을 만들었으나, 점차 굴식 돌방무덤으로 바꾸어 갔다. 돌을 정밀하게 쌓아올린 돌무지무덤은 만주의 집안(지안) 일대에 1만 2000여 기가 무리를 이루고 있다. 다듬은 돌을 계단식으로 7층까지 쌓아올린 장군총이 대표적이다.
굴식 돌방무덤은 돌로 널방을 짜고 그 위에 흙으로 덮어 봉분을 만든 것이다. 널방의 벽과 천장에는 벽화를 그리기도 하였다. 이런 무덤은 만주 집안, 평안도 용강, 황해도 안악 등지에 널려 있다.
고분 벽화는 당시 고구려 사람의 생활, 문화, 종교 등을 파악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초기에는 주로 무덤 주인의 생활을 표현한 그림이 많이 있고, 후기로 갈수록 점차 추상화되어 사신도 같은 상징적 그림으로 변하였다.
백제는 한강 유역에 있던 초기 한성 시기에 계단식 돌무지무덤을 만들었는데, 서울 석촌동에 일부가 남아 있다. 이는 백제 건국의 주도 세력이 고구려와 같은 계통이라는 건국 이야기의 내용을 뒷받침하고 있다.
웅진 시기의 고분은 굴식 돌방무덤 또는 널방을 벽돌로 쌓은 벽돌무덤으로 바뀌었다. 벽돌무덤은 중국 남조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완전한 형태로 발견된 무령왕릉이 유명하다. 사비 시기에는 규모는 작지만 세련된 굴식 돌방무덤을 만들었다.
백제 돌방무덤과 벽돌무덤에도 벽과 천장에 사신도와 같은 그림을 그려 넣기도 하였다.
신라는 거대한 돌무지덧널무덤을 많이 만들었으며, 삼국 통일 직전에는 굴식 돌방무덤도 만들었다.
통일 신라 시대에는 불교의 영향으로 화장이 유행하였고, 고분 양식도 거대한 돌무지덧널무덤에서 점차 규모가 작은 굴식 돌방무덤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봉토 주위를 둘레돌로 두르고, 12지 신상을 조각하는 독특한 양식이 새롭게 나타났다.
발해에도 도읍지를 중심으로 많은 무덤이 남아 있다. 이 중에서 정혜 공주 묘는 굴식 돌방무덤으로 모줄임 천장 구조가 고구려 고분과 닮았다. 이 곳에서 나온 돌사자상은 매우 힘차고 생동감이 있다. 정효 공주 묘에서는 묘지와 벽화가 발굴되었다. 무덤에서 나온 이런 유물은 발해의 높은 문화 수준을 생생하게 보여 준다.
건축과 탑
고대의 건축은 궁궐, 사원, 무덤, 가옥에 그 특색이 잘 나타나 있다. 지금 남아 있는 고분과 건축 터를 통하여 이 시대의 건축을 짐작할 수 있다.
궁궐 건축으로 가장 규모가 큰 것은 장수왕이 평양에 세운 안학궁이다. 이 궁궐 터는 사각형 한 변의 길이가 620m나 된다. 사원 건축으로는 신라의 황룡사와 백제의 미륵사가 가장 웅장하고 규모가 크다. 가옥 건축은 고구려 고분 벽화에 그 구조가 일부 보인다.
삼국 시대에는 불교의 전파와 함께 부처의 사리를 봉인하여 예배의 주대상으로 삼던 탑도 많이 건립되었다. 고구려는 주로 목탑을 건립했는데,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은 없다. 백제의 미륵사지 석탑은 서탑만 일부가 남아 있는데, 목탑의 모습을 많이 지니고 있다. 이를 계승한 부여 정림사지 5층 석탑이 부여에 남아 있다. 신라의 탑으로는 황룡사 9층탑과 분황사탑이 유명하다. 분황사탑은 석재를 벽돌 모양으로 만들어 쌓은 탑으로, 지금은 3층까지만 남아 있다.
삼국 시대에는 방어를 위하여 성곽을 많이 축조하였다. 돌로 쌓은 산성이 대부분이고 지형에 따라 흙으로 쌓기도 했는데, 산의 능선을 자연스럽게 이용하여 쌓은 것이 특징이다.
통일 신라의 궁궐과 가옥은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다. 불교가 융성함에 따라 사원을 많이 축조했는데, 그 중에서 8세기 중엽에 세운 불국사와 석굴암이 통일 신라의 사원 건축을 대표한다.
불국사는 불국토의 이상을 조화와 균형 감각으로 표현한 사원이다. 정문 돌계단인 청운교와 백운교는 직선과 곡선을 조화시켰으며, 축대는 자연의 선에 인공적으로 맞추어 자연과 인공을 연결시키고 있다. 복잡하고 단순한 좌우 누각의 비대칭은 간소하고 날씬한 불국사 3층 석탑(석가탑), 복잡하고 화려한 다보탑과 어울려 세련된 균형감을 살리고 있다.
인공으로 축조된 석굴 사원인 석굴암은 네모난 전실과 둥근 주실을 갖추고 있다. 그리고 이 두 공간을 좁은 통로로 연결하고 있는데, 주실의 천장은 둥근 돔으로 꾸몄다. 전실과 주실, 그리고 천장이 이루는 아름다운 비례와 균형의 조형미로 석굴암은 건축 분야에서 세계적인 걸작으로 손꼽힌다.
한편, 안압지는 통일 신라의 뛰어난 조경술을 잘 나타내고 있다. 안압지의 연못, 인공섬, 구릉과 건물은 매우 자연스럽게 어울리도록 꾸며졌다.
발해의 지상 건물은 궁궐 터나 절터를 통하여 당시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상경은 당시 당의 수도인 장안을 본떠 건설하였다. 외성을 쌓고, 남북으로 넓은 주작 대로를 내고, 그 안에 궁궐과 사원을 세웠다. 궁궐 중에는 온돌 장치를 한 것도 발견되었다. 사찰은 높은 단 위에 금당을 짓고 그 좌우에 건물을 배치하였는데, 이 건물들을 회랑으로 연결하였다.
통일 신라에 들어와 석탑은 이중 기단 위에 3층으로 쌓는 전형적인 통일 신라의 석탑 양식을 완성하였다. 통일 신라 초기의 석탑으로 대표적인 것은 감은사지 3층 석탑이다. 불국사에는 통일 신라 석탑의 전형이라 할 수 있는 3층 석탑과 높은 예술성과 빼어난 건축술을 보여 주는 다보탑이 있다.
신라 말기에는 석탑에서 다양한 변화가 나타났는데, 양양 진전사지 3층 석탑은 기단과 탑신에 부조로 불상을 새긴 것으로 이름이 나 있다. 또, 선종이 널리 퍼지면서 승려의 사리를 봉안하는 승탑과 탑비가 유행하였다. 팔각원당형을 기본형으로 삼고 있는 승탑과 승려의 이대기를 비에 새겨 세운 탑비는 세련되고 균형감이 뛰어나 이 시기의 조형 미술을 대표한다. 이런 승탑과 탑비는 지방 호족이 정치적 역량이 성장하였음을 반영하고 있다.
불상 조각과 공예
불교가 성행함에 따라 불상이 많이 제작되었다. 고구려의 연가 7년명 금동 여래 입상이나 백제의 서산 마애 삼존불, 신라의 경주 배리 석불 입상은 미소를 머금은 듯한 당시 불상 조각의 특징을 잘 보여 준다.
삼국 시대에는 미륵보살 반가상이 많이 만들어졌다. 이 중에서도 탑 모양의 관을 쓰고 있는 금동 미륵보살 반가상과 삼산관(三山冠)을 쓰고 있는 금동 미륵보살 반가상이 널리 알려져 있다.
통일 신라 시대에 들어와 균형미가 뛰어난 불상들이 만들어졌다. 이 시기 조각의 최고 경지를 보여 주고 있는 것은 석굴암의 본존불과 보살상들이다. 석굴암 주실의 중앙에 있는 본존불은 균형잡힌 모습과 사실적인 조각으로 살아 움직이는 느낌을 가지게 한다. 본존불 주위의 보살상을 비롯한 부조들도 매우 사실적이다. 입구 쪽의 소박한 자연스러움이 안쪽으로 들어가면 점점 정제되어, 불교의 이상 세계를 구체적으로 실현하고자 하는 의도가 보인다.
발해에서도 불교가 장려됨에 따라 많은 불상이 제작되었다. 상경과 동경의 절터에서는 고구려 양식을 계승한 것으로 여겨지는 불상도 발굴되었다. 이 불상은 흙을 구워 만든 것으로, 두 분의 부처가 나란히 앉아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이와 아울러 발해에서는 자기 공예도 독특하게 발전하였다. 발해의 자기는 가볍고 광택이 있는데, 그 종류나 크기, 모양, 색깔 등이 매우 다양하였다.
한편, 고대에는 불교와 관련된 석조물을 많이 만들었다. 불국사 석등과 법주사 쌍사자 석등은 단아하면서도 균형잡힌 걸작으로 꼽힌다.
발해의 조각은 궁궐 터에서 발견되는 유물을 통해서 알 수 있다. 발해의 벽돌과 기와 무늬는 고구려의 영향을 받아 소박하고 힘찬 모습을 띠고 있다. 상경에 완전한 모습으로 남아 있는 석등은 발해 석조 미술의 대표로 꼽힌다.
통일 신라의 공예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범종이다. 통일 후에는 상원사 종, 성덕 대왕 신종 등 범종이 많이 주조되었다. 특히, 성덕 대왕 신종은 맑고 장중한 소리와 경쾌하고 아름다운 비천상으로 유명하다.
글씨, 그림과 음악
삼국 시대와 남북국 시대에 한문을 널리 사용함에 따라 서예도 발전하였다. 광개토 대왕릉 비문은 웅건한 서체로 쓰여졌고, 신라의 김생은 질박하면서도 굳센 신라의 독자적인 서체를 열었다.
그림에서는 경주 황남동 천마총에서 나온 천마도가 신라의 힘찬 화풍을 잘 보여 주고 있다. 화가로는 신라의 솔거를 꼽을 수 있다. 그가 황룡사 벽에 그린 소나무 그림에 날아가던 새들이 앉으려 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 오고 있다.
음악과 무용은 종교 및 노동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고구려 고분 벽화에 사람들이 춤추고 있는 장면이 있는 것으로 보아 고구려 사람들은 춤을 즐긴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신라 화랑들도 노래와 춤을 즐겼다고 한다. 삼국의 음악가로는 신라의 백결 선생, 고구려의 왕산악, 가야의 우륵이 유명하다. 백결 선생은 방아타령을 지어 가난한 아내를 위로했고, 왕산악은 진의 칠현금을 개량하여 거문고를 만들고 악곡을 지었다. 우륵은 가야금을 만들고 12악곡을 지었는데, 이것이 신라에 전해져 우리 음악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4. 일본으로 건너간 우리 문화
삼국 문화의 일본 전파
삼국의 문화는 일본에 전파되어 일본 고대 문화 성립과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다. 특히, 삼국 중에서 일본과 가까웠던 백제가 삼국 문화의 일본 전수에 가장 크게 기여하였다.
4세기에 아직기는 일본의 태자에게 한자를 가르쳤고, 뒤이어 일본에 건너간 왕인은 천자문과 논어를 전하고 가르쳤다. 6세기에는 노리사치계가 불경과 불상을 전하였다. 이렇게 전래된 백제 문화를 바탕으로 일본의 세계적 자랑인 고류 사 미륵보살 반가사유상과 호류 사 백제 사 백제 관음상이 만들어졌다. 이밖에도 5경 박사, 의박사, 역박사와 천문 박사, 채약사, 그리고 화가와 공예 기술자들도 건너갔는데, 이들에 의하여 목탑이 세워졌고, 나아가 백제 가람 양식이 생겨나기도 하였다.
고구려도 일본 고대 문화에 큰 영향을 끼쳤다. 7세기 초에 담징은 종이와 먹의 제조 방법을 전하였고, 호류 사의 벽화를 그렸다고 전해지고 있다. 승려 혜자는 쇼토쿠 태자의 스승이 되었으며, 혜관은 불교 전파에 큰 공을 세웠다. 일본 나라 시에서 발견된 다카마쓰 고분 벽화가 고구려 수산리 벽화 고분과 흡사한 점에서 고구려의 영향력을 살펴볼 수 있다.
신라는 일본과 문화 교류는 적었지만, 배 만드는 기술과 제방 쌓는 기술을 전해 주어 한인의 연못이라는 이름까지 생기게 되었다. 삼국의 음악도 전해져 일본 음악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처럼 삼국의 문화는 6세기경의 야마토 조정의 성립과 7세기경의 나라 지방에서 발전한 아스카 문화의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일본에 건너간 통일 신라 문화
삼국 문화에 뒤이어 통일 신라의 문화도 일본에 전해졌다. 통일 신라 문화의 전파는 일본에서 파견해 온 사신을 통해서 이뤄졌다. 원효, 강수, 설총이 발전시킨 불교와 유교 문화는 일본 하쿠호 문화의 성립에 기여하였다.
특히, 심상에 의하여 전해진 화엄 사상은 일본 화엄종을 일으키는 데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8세기 말에 이르러 일본이 수도를 헤이안으로 옮긴 후부터는 외국 문화의 영향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2. 중세의 문화
1. 유학의 발달과 역사서의 편찬
유학의 발달
고려 시대에는 유교와 불교가 함께 발전하였다. 유교는 정치와 관련한 치국의 도로서, 불교는 신앙 생활과 관련한 수신의 도로서 서로 보완하는 기능을 수행하면서 유교 문화와 불교 문화가 함께 발전할 수 있었다.
태조 때 최언위, 최응, 최지몽 등 유학자는 유교주의에 입각한 국가 경영을 건의하였다. 광종 때에는 과거 제도를 실시하여 유학에 능숙한 사람을 관료로 등용하였다. 성종 때에는 유교 정치 사상이 확고하게 정립되고, 유학 교육 기관이 정비되었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유학자는 최승로였다.
최승로는 시무 28조의 개혁안을 올리고, 유교 사상을 치국의 근본으로 삼아 사회 개혁과 새로운 문화의 창조를 추구하였다. 그의 유교 사상은 자주적이고 주체적인 특성을 지녔다.
고려 중기에는 문벌 귀족 사회의 발달과 함께 유교 사상도 점차 보수적인 성격으로 바뀌어 갔다. 이 시기의 대표적 유학자는 최충과 김부식이었다. 문종 때 활약한 최충은 해동공자라는 칭송을 들었으며, 고려의 유학을 한 차원 높였다. 그는 관직에서 물러난 후에 9재 학당을 세워 유학 교육에 힘썼고, 고려의 훈고학적 유학에 철학적 경향을 새로이 불어넣기도 하였다.
인종 때 활약한 김부식은 고려 중기의 보수적이면서도 현실적인 성격의 유학을 대표하였다. 이 시기의 유학은 시문을 중시하는 귀족 취향의 경향이 강하였고, 유교 경전에 대한 천문적 이해가 깊어져 유교 문화는 한층 성숙해졌다. 그러나 무신정변이 일어나 문벌 귀족 세력이 몰락함에 따라 고려의 유학은 한동안 크게 위축되었다.
교육 기관
고려 시대에는 관리 양성과 유학 교육을 위하여 많은 학교를 세우고 교육을 장려하였다. 중앙에는 국립 대학으로 국자감(국학)이 설치되었다. 국자감에는 국자학, 태학, 사문학과 같은 유학부와 율학, 서학, 산학 등의 기술학부가 있었다. 유학부에는 문무관 7품 이상 관리의 자제가 입학하고, 기술학부에는 6품 이하 관리나 서민의 자제가 입학하였다. 그리고 지방에는 향교가 설치되어 지방 관리와 서민 자제의 교육을 담당하였다.
고려 중기에는 최충의 문헌공도를 비롯한 사학 12도가 융성하였다. 사학에서 교육을 받은 학생이 과거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자 국자감의 관학 교육은 위축되었다. 이에 정부는 관학 진흥을 위한 여러 시책을 추진하였다. 예종 때에는 국자감을 재정비하여 전문 강좌를 설치하고, 장학 재단을 두어 관학의 경제 기반을 강화하였다. 무신 정권기에는 교육 활동이 크게 위축되었으나, 충렬왕 때에 국학을 성균관으로 개칭하고, 공자 사당인 문묘를 새로 건립하여 유교 교육의 진흥에 나섰다. 공민왕은 성균관을 순수한 유교 교육 기관으로 개편하고 유교 교육을 강화하였다.
역사서의 편찬
고려 시대에는 유학이 발달하고 유교적인 역사 서술 체계가 확립되어 많은 역사서가 편찬되었다. 건국 초기부터 왕조실록을 편찬하였으나, 거란의 침입으로 불타 버렸다. 이에, 태조부터 목종에 이르는 7대 실록을 현종 때 편찬하기 시작하여 덕종 때 완성하였다. 그러나 고려 왕조의 실록은 오늘날 전하지 않고 있다.
인종 때에는 김부식 등이 왕명을 받아 삼국사기를 편찬하였다. 삼국사기는 현존하는 우리 나라 최고의 역사서로서, 고려 초에 쓰여진 구삼국사를 기본으로 유교적 합리주의 사관에 기초하여 기전체로 서술하였다. 고려는 건국 초부터 고구려 계승 의식을 뚜렷하게 표방하였으나, 중기에 이르러 신라 계승 의식이 강화되었는데, 삼국사기에는 신라 계승 의식이 더 많이 반영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고려 후기에는 민족적 자주 의식을 바탕으로 전통 문화를 올바르게 이해하려는 경향이 대두하였다. 이는 무신정변 이후의 사회적 혼란과 몽골 침략의 위기를 겪은 후에 나타난 변화였다. 이러한 경향을 반영한 역사서로는 해동고승전, 동명왕편, 삼국유사, 제왕운기 등을 꼽을 수 있다. 각훈이 쓴 해동고승전은 삼국 시대의 승려 30여 명의 전기가 수록되어 있는데, 현재 일부만 남아 있다. 이규보의 동명왕편은 고구려 건국의 영웅인 동명왕의 업적을 칭송한 일종의 영웅 서사시로서, 고구려의 계승 의식을 반영하고 고구려의 전통을 노래하였다. 충렬왕 때에 일연이 쓴 삼국유사는 불교사를 중심으로 고대의 민간 설화나 전래 기록을 수록하는 등 우리의 고유 문화와 전통을 중시하였으며, 단군을 우리 민족의 시조로 여겨 단군의 건국 이야기를 수록하였다. 같은 시기에 이승휴가 쓴 제왕운기도 우리 나라의 역사를 단군에서부터 서술하면서 우리 역사를 중국사와 대등하게 파악하려는 자주성을 나타내었다.
고려 후기에는 신진 사대부의 성장 및 성리학의 수용과 더불어 정통 의식과 대의명분을 강조하는 성리학적 유교 사관이 대두하였다. 이를 대표하는 이제현은 사략을 비롯한 여러 권의 사서를 저술하였는데, 지금은 사략에 실렸던 사론만 전한다.
성리학의 전래
고려 후기에는 성리학이 전래되어 사상계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각 부분에 걸쳐 큰 영향을 주었다. 남송의 주희가 집대성한 성리학은 종래 자구의 해석에 힘쓰던 한·당의 훈고학이나 사장 중심의 유학과는 달리, 인간의 심성과 우주의 원리 문제를 철학적으로 탐구하는 신유학이었다.
고려에 성리학을 처음 소개한 사람은 충렬왕 때 안향이었다. 이제현은 원에 설립된 만권당에서 원의 학자들과 교류하면서 성리학에 대한 이해를 심화하였다. 그는 귀국한 후에 이색 등에게 영향을 주어 성리학 전파에 이바지하였다. 공민왕 때, 이색은 정몽주, 권근, 정도전 등을 가르쳐 성리학을 더욱 확산시켰다.
성리학을 수용한 사람은 대부분 신진 사대부였다. 이들은 현실 사회의 모순을 시정하기 위한 개혁 사상으로 성리학을 받아들였으며, 성리학의 형이상학적 측면보다 일상 생활과 관계되는 실천적 기능을 강조하였다. 따라서, 이들은 유교적인 생활 관습을 시행하고자 소학과 주자가례를 중시하고, 권문세족과 불교의 폐단을 비판하였다. 이후 고려의 불교는 쇠퇴하게 되었고, 성리학이 새로운 국가 사회의 지도 이념으로 등장하였다.
2. 불교 사상과 신앙
불교 정책
고려 초기부터 불교는 국가의 지원을 받으며 발전하였다. 태조는 불교를 적극 지원하는 한편, 유교 이념과 전통 문화도 함께 존중하였다. 그는 개경에 여러 사원을 세웠고, 훈요 10조에서 불교를 숭상하고 연등회와 팔관회 등 불교 행사를 성대하게 개최할 것을 당부하여 불교에 대한 국가의 지침을 제시하였다.
귀족도 불교에 큰 관심을 보였는데, 이들은 정치 이념으로 삼았던 유교와 신앙인 불교를 서로 배치되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일반인도 현세적인 기복 신앙으로서 불교를 널리 신봉하였다. 지방의 신앙 공동체였던 향도에는 불교와 함께 토속 신앙의 면모도 보이며, 불교와 풍수지리설이 융합된 모습도 보인다.
광종 때부터 승과 제도를 실시하여 합격한 자에게는 승계(僧階)를 주고 승려의 지위를 보장하였다. 또, 국사와 왕사 제도를 둠으로써 불교의 권위가 상징적으로나마 왕권 위에 존재하게 되어 불교가 국교의 권위를 가지게 되었다.
사원에는 토지를 지급하고, 승려들에게 면역의 혜택을 주었다.
불교 통합 운동과 천태종
고려 초기에는 화엄 사상을 정비하고 보살의 실천행을 폈던 균여의 화엄종이 성행하였고, 선종에 대한 관심도 높았다.
그 후, 개경에 흥왕사나 현화사 같은 왕실과 귀족의 지원을 받는 큰 사원이 세워져 불교가 번창하였다. 그리고 이들의 지원을 받아 화엄종과 법상종이 나란히 융성하였다.
11세기에 이미 종파적 분열상을 보인 고려 불교계에 문종의 왕자로서 승려가 된 의천은 교단 통합 운동을 펼쳤다. 그는 흥왕사를 근거지로 삼아 화엄종을 중심으로 교종을 통합하려 하였으며, 또 선종을 통합하기 위하여 국청사를 창건하여 천태종을 창시하였다. 이를 뒷받침할 사상적 바탕으로 의천은 이론의 연마와 실천을 아울러 강조하는 교관겸수를 제창하였다.
이러한 교단 통합 운동은 천태종에 많은 승려가 모이는 등 새로운 교단 분위기를 형성하는 일정한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사회·경제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던 불교의 폐단을 적극적으로 시정하는 대책이 뒤따르지 않아, 의천이 죽은 후에 교단은 다시 분열되고 귀족 중심의 불교가 지속되었다.
결사 운동과 조계종
무신 집권 이후의 사회 변동기를 지나며 불교계에서도 본연의 자세 확립을 주창하는 새로운 종교 운동인 결사 운동이 일어났다. 지눌은 명리에 집착하는 당시 불교계의 타락상을 비판하였다. 그는 승려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 독경과 선 수행, 노동에 고루 힘쓰자는 개혁 운동인 수선사 결사를 제창하였다. 송광사에 중심을 둔 수선사 결사 운동은 개혁적인 승려들과 지방민의 적극적인 호응을 얻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이처럼 조계종은 지눌이 수선사를 열면서부터 매우 흥성하였다. 그리하여 고려 후기에 이르러서는 불교계의 중심적인 종파가 되어 많은 승려를 배출하였다.
지눌은 선과 교학이 근본에 있어 둘이 아니라는 사상 체계인 정혜쌍수를 사상적 바탕으로 철저한 수행을 선도하였다. 또, 지눌은 내가 곧 부처라는 깨달음을 위한 노력과 함께, 꾸준한 수행으로 깨달음의 확인을 아울러 강조한 돈오점수를 주장하였다. 선종을 중심으로 교종을 포용하여 교와 선의 대립을 극복하고자 한 지눌의 논리는 고려 불교가 지향하던 선교 일치 사상을 완성한 것이었다.
지눌의 결사 운동은 지눌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발전하였다. 혜심은 유불 일치설을 주장하며 심성의 도야를 강조하여 장차 성리학을 수용할 수 있는 사상적 토대를 마련하기도 하였다.
비슷한 시기에 요세는 백성의 신앙적 욕구를 고려하여 강진 만덕사(백련사)에서 백련 결사를 제창하였다. 자신의 행동을 진정으로 참회하는 법화 신앙에 중점을 둔 백련 결사 역시 지방민의 적극적인 호응을 얻었고, 수선사와 양립하며 고려 후기 불교계를 이끌었다.
그런데 원 간섭기에 이르러 개혁 운동의 의지가 퇴색하고 귀족 세력과 연결되어 불교계는 다시 폐단을 드러내었다. 사원은 막대한 토지를 소유하고 상업에도 관여하여 부패가 심하였다. 이에 교단을 정비하려는 보우 등의 노력이 있었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성리학을 사상적 배경으로 대두한 신진 사대부는 이와 같은 불교계의 사회·경제적인 폐단을 크게 비판하였다.
대장경 간행
불교 사상에 대한 이해 체계가 정비되면서 불교에 관련된 서적을 모두 모아 체계화하는 대장경이 편찬되었다. 경·율·논의 삼장으로 구성된 대장경은 불교 경전을 집대성한 것으로서, 교리 체계에 대한 정리가 선행되어야만 이루어질 수 있는 문화적 의의가 높은 유산이다.
현종 때에 거란의 침입을 받았던 고려는 부처의 힘을 빌려 이를 물리치려고 대장경을 간행하였다. 70여 년의 오랜 기간에 걸쳐 목판에 새겨 간행한 이 초조대장경은 몽골 침입 때에 불타 버리고 인쇄본 일부가 남아 고려 인쇄술의 정수를 보여 주고 있다.
초조대장경이 만들어진 얼마 후, 의천은 고려는 물론이고 송과 요의 대장경에 대한 주석서를 모아 교장을 편찬하였다. 이를 위하여 목록인 신편제종교장총록을 만들고, 교장도감을 설치하여 10여 년에 걸쳐 신라인의 저술을 포함한 4700여 권의 전적을 간행하였다.
몽골 침략으로 소실된 초조대장경을 대신하여 고종 때에는 대장경을 다시 만들었다. 대장도감을 설치하여 16년 만에 이룩한 재조대장경은 현재 합천 해인사에 보존되어 있다. 8만 장이 넘는 목판이므로 팔만대장경이라고 부른다. 팔만대장경은 방대한 내용을 담았으면서도 잘못된 글씨나 빠진 글자가 거의 없는 제작의 정밀성과 글씨의 아름다움 등으로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대장경으로 꼽힌다.
도교와 풍수지리설
고려 시대에는 유교, 불교와 함께 도교도 성행하였다. 불로장생과 현세의 구복을 추구하는 것을 특징으로 하는 도교는 여러 가지 신을 모시면서 재앙을 물리치고 복을 빌며 나라의 안녕과 왕실의 번영을 기원하였다. 그리하여 도교 행사가 자주 베풀어졌고, 궁중에서는 하늘에 제사 지내는 초제가 성행하였다. 예종 때 도교 사원이 처음 건립되었고, 이 곳을 비롯한 여러 곳에서 하늘과 별들에 제사를 지내는 도교 행사가 개최되었다.
도교에는 불교적인 요소와 도참 사상도 수용되어 일관된 체계를 보이지 못하였으며, 교단도 성립하지 못한 채 민간 신앙으로 전개되었다. 국가적으로 이름난 명산대천에 제사 지내는 팔관회는 도교와 민간 신앙 및 불교가 어우러진 행사였다.
풍수지리설은 미래의 길흉화복을 예언하는 도참 사상이 더해져 고려 시대에 크게 유행하였다. 고려 초기에는 개경과 서경이 명당이라는 설이 유포되어 서경 천도와 북진 정책 추진의 이론적 근거가 되었다. 한편, 이러한 길지설은 개경 세력과 서경 세력의 정치적 투쟁에 이용되어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의 이론적 근거가 되기도 하였다. 문종을 전후한 시기에는 북진 정책의 퇴조와 함께 새로이 한양 명당설이 대두하여 이 곳을 남경으로 승격시키고 궁궐을 지어 왕이 머무르기도 하였다.
3. 과학 기술의 발달
천문학과 의학
고려 시대에는 고대 사회의 전통적 과학 기술을 계승하고 중국과 이슬람의 과학 기술도 수용하여 이 분야에서 많은 중요한 업적을 이룩하였다. 최고 교육 기관인 국자감에서는 율학, 서학, 산학 등의 잡학을 교육하였다. 그리고 과거 제도에서도 기술관을 등용하기 위한 잡과가 실시되어 과학 기술이 발전할 수 있었다.
고려 과학 기술의 발전을 대표하는 것은 천문학, 의학, 인쇄술, 상감 기술, 화약 무기 제조술 등이었다.
천문학은 천문 관측과 역법 계산을 중심으로 발달하였다. 천문과 역법을 맡은 관청으로서 사천대(서운관)가 설치되었고, 이 곳의 관리는 첨성대에서 관측 업무를 수행하였다. 일식, 혜성, 태양 흑점 등에 관한 관측 기록이 매우 풍부하게 남아 있다. 이러한 기록은 당시 과학 기술 분야에서 앞서 있던 이슬람 문명의 기록과 비교할 수 있을 정도로 훌륭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역법 연구에서도 착실한 발전이 이루어졌다. 고려 초기에는 신라 때부터 쓰기 시작하였던 당의 선명력을 그대로 사용하였으나, 후기의 충선왕 때에는 원의 수시력을 채용하고 그 이론과 계산법을 충분히 소화하였다.
의학도 상당한 수준으로 발달하였다. 의료 업무를 맡은 태의감에서 의학 교육을 실시하고, 의원을 뽑는 의과를 시행하여 고려 의학이 발전할 수 있는 바탕이 마련되었다.
고려 중기의 의학은 당·송 의학의 수준에서 한 걸음 나아가, 우리 나라의 실정에 맞는 자주적인 의학으로 발달함으로써 향약방이라는 고려의 독자적 처방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리하여 향약구급방을 비롯한 많은 의서가 편찬되었다.
13세기에 편찬된 향약구급방은 현재 전해지고 있는 우리 나라 최고의 의학 서적으로, 각종 질병에 대한 처방과 국산 약재 180여 종이 소개되어 있다.
인쇄술의 발달
고려 시대의 기술학에서 가장 뛰어난 것은 인쇄술의 발달이었다. 신라 때부터 발달한 목판 인쇄술은 고려 시대에 이르러 더욱 발달하였다. 고려대장경의 판목은 고려의 목판 인쇄술이 최고의 수준에 이르렀음을 입증해 주고 있다.
그러나 목판 인쇄술은 한 가지 책을 다량으로 인쇄하는 데는 적합하지만, 여러 가지의 책을 소량으로 인쇄하는 데에는 활판 인쇄술보다 못하였다. 따라서, 고려에서는 일찍부터 활판 인쇄술의 개발에 힘을 기울였으며, 후기에 금속 활자 인쇄술을 발명하였다.
고려 시대에 세계에서 최초로 금속 활자 인쇄술이 발명된 것은 목판 인쇄술의 발달, 청동 주조 기술의 발달, 인쇄에 적합한 먹과 종이의 제조 등이 어우러진 결과였다. 12세기 말이나 13세기 초에는 이미 금속 활자 인쇄술이 발명되었으리라고 추측되며, 몽골과 전쟁 중이던 강화도 피난시에는 금속 활자로 상정고금예문을 인쇄하였다(1234). 이는 서양에서 금속 활자 인쇄가 시작된 것보다 200여 년이나 앞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오늘날 전해지지 않고 있으며, 그 대신 청주 흥덕사에서 간행한 직지심체요절(1377)이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금속 활자본으로 공인받고 있다.
인쇄술의 발달과 함께 제지술도 발달하였다. 전국적으로 닥나무의 재배를 장려하고, 종이 제조의 전담 관서를 설치하여 우수한 종이를 만들었다. 이리하여 고려의 제지 기술은 더욱 발전하였으며, 질기고 희면서 앞뒤가 반질반질하여 글을 쓰거나 인쇄하기에 적당한 종이가 생산되었다. 당시 고려에서 만든 종이는 중국에 수출되어 호평을 받았다.
화약 무기 제조와 조선 기술
과학 기술의 발달은 국방력 강화에 기여하였다. 고려 말에 최무선은 왜구의 침입을 격퇴하는 데에는 화약 무기의 사용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화약 제조 기술의 습득에 힘을 기울였다.
당시 중국에서는 화약 제조 기술을 비밀에 붙여서 고려에서는 이를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최무선은 끈질기게 노력하여 화약 제조법을 터득하였다. 이에, 고려는 화통도감을 설치하고 최무선을 중심으로 화약과 화포를 제작하였다. 화포와 같은 화약 무기의 제조는 급속도로 진전되어 얼마 후에는 20종에 가까운 화약 무기가 만들어졌다. 최무선은 이 화포를 이용하여 진포(금강 하구) 싸움에서 왜구를 크게 무찔렀다.
배를 만드는 기술도 발달하였다. 송과 해상 무역이 활발해짐에 따라 길이가 96척이나 되는 대형 범선이 제조되었다. 각 지방에서 징수한 조세미를 개경으로 운송하는 조운 체계가 확립되면서 1000석의 곡물을 실을 수 있는 대형 조운선도 등장하였는데, 이는 주로 해안 지방의 조창에 배치되었다.
고려 말에는 배에 화포를 설치하여 왜구 격퇴에 활용하였다. 이 경우, 배의 구조를 화포의 사용에 알맞도록 흔들림이 적게 개선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4. 귀족 문화의 발달
건축과 조각
고려 시대의 건축은 궁궐과 사원이 중심이었는데,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다. 개성 만월대 터를 보면 당시 궁궐 건축을 짐작할 수 있다. 경사진 면에 축대를 높이 쌓고 건물을 계단식으로 배치하였기 때문에 건물이 층층으로 나타나 웅장하게 보였을 것이다.
고려 전기에는 주로 주심포 양식이 유행하였는데, 13세기 이후에 지은 일부 건물이 지금까지 남아 있다. 안동 봉정사 극락전은 가장 오래 된 건물로 알려져 있고,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과 예산 수덕사 대웅전은 균형잡힌 외관과 잘 짜여진 각 부분의 치밀한 배치로 고려 시대 건축의 단아하면서도 세련된 특성을 잘 드러내고 있다.
고려 후기에는 다포식 건물도 등장하여 조선 시대 건축에 큰 영향을 끼쳤다. 황해도 사리원의 성불사 응진전은 고려 시대 다포식 건물로 유명하다.
고려 시대의 석탑은 신라 양식을 일부 계승하면서도 독자적인 조형 감각을 가미하여 다양한 형태로 제작되었다. 다각 다층탑이 많았고, 안정감은 부족하나 자연스러운 모습을 띠었다. 석탑의 물체를 받치는 받침이 보편화되었다. 개성 불일사 5층 석탑과 오대산 월정사 팔각 9층 석탑이 유명하며, 고려 후기의 경천사 10층 석탑은 원의 석탑을 본뜬 것으로, 조선 시대로 이어졌다. 지역에 따라서 고대 삼국의 전통을 계승한 석탑이 조성되기도 하였다.
승려의 승탑은 고려 시대에도 조형 예술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였다. 고달사지 승탑처럼 신라 후기 승탑의 전형적인 형태인 팔각원당형을 계승하는 것이 많고, 특이한 형태를 띠면서 조형미가 뛰어난 법천사 지광국사 현묘탑 등도 있다.
고려 시대의 불상은 시기와 지역에 따라 독특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 초기에는 광주 춘궁리 철불 같은 대형 철불이 많이 조성되었다. 논산 관촉사 석조 미륵보살 입상이나 안동 이천동 석불처럼 사람이 많이 다니는 길목에 지역 특색이 잘 드러난 거대한 불상도 조성되었다. 또, 부석사 소조 아미타여래 좌상같이 신라 시대 양식을 계승한 걸작도 있다.
청자와 공예
고려 귀족은 자신들의 사치 생활을 충족하기 위하여 다양한 예술 작품을 만들어 즐겼다. 공예는 귀족의 생활 도구와 불교 의식에 사용되는 불구 등을 중심으로 발전하였는데, 특히 자기 공예가 뛰어났다.
고려자기는 신라와 발해의 전통과 기술을 토대로 송의 자기 기술을 받아들여 귀족 사회의 전성기인 11세기에 독자적인 경지를 개척하였다. 자기 중에서 가장 이름난 것은 비취색이 나는 청자인데, 중국인도 천하의 명품으로 손꼽았다. 청자의 그윽한 색과 다양한 형태, 그리고 고상한 무늬는 자연에 뿌리를 두고 있는 우리 민족의 정취를 풍기고 있다.
12세기 중엽에 고려의 독창적 기법인 상감법이 개발되어 자기에 활용되었다. 상감청자는 무늬를 훨씬 다양하고 화려하게 넣을 수 있었기 때문에 청자의 새로운 경지를 열었다. 상감청자는 강화도에 도읍한 13세기 중엽까지 주류를 이루었으나, 원 간섭기 이후에는 퇴조해 갔다.
고려의 청자는 자기를 만들 수 있는 흙이 생산되고 연료가 풍부한 지역에서 구워졌는데, 전라도 강진과 부안이 유명하였다. 특히, 강진에서는 최고급의 청자를 만들어 중앙에 공급하기도 하였다.
고려의 금속 공예 역시 불교 도구를 중심으로 크게 발전하였다. 청동기 표면을 파내고 실처럼 만든 은을 채워 넣어 무늬를 장식하는 은입사 기술이 발달하였다. 은입사로 무늬를 새긴 청동 향로와 버드나무와 동물 무늬를 새긴 청동 정병이 대표작이다.
한편, 옻칠한 바탕에 자개를 붙여 무늬를 나타내는 나전 칠기 공예도 크게 발달하였다. 특히, 불경을 넣는 경함, 화장품갑, 문방구 등이 남아 있다. 나전 칠기 공예는 조선 시대를 거쳐 현재까지 전하고 있다.
글씨, 그림과 음악
고려 문화의 귀족적 특징은 서예, 회화, 음악에서도 나타났다. 서예는 고려 전기에는 구양순체가 주류를 이루었는데, 탄연의 글씨가 특히 뛰어났다. 후기에는 송설체가 유행했는데, 이암이 뛰어났다.
그림은 도화원에 소속된 전문 화원의 그림과 문인이나 승려의 문인화로 나뉘었다. 뛰어난 화가로는 예성강도를 그린 이령과 그의 아들 이광필이 있었으나, 그들의 그림은 전하지 않는다. 고려 후기에는 사군자 중심의 문인화가 유행하였으나, 역시 전하는 것은 없다. 다만, 공민왕이 그렸다는 천산대렵도가 있어 당시의 그림에 원대 북화가 영향을 끼쳤음을 알려 주고 있다.
한편, 고려 후기에는 왕실과 권문세족의 구복적 요구에 따라 불화가 많이 그려졌다. 그 내용은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아미타불도와 지장보살도 및 관음보살도가 많았다. 일본에 전해 오고 있는 혜허가 그린 관음보살도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불교 경전을 필사하거나 인쇄할 때, 맨 앞장에 그 경전의 내용을 알기 쉽게 그림으로 설명한 사경화도 유행하였다. 이 밖에, 사찰과 고분의 벽화가 일부 남아 있는데, 부석사 조사당 벽화의 사천왕상과 보살상이 대표작이다.
고려 시대의 음악은 크게 아악과 향약으로 구분된다. 아악은 송에서 수입된 대성악이 궁중 음악으로 발전된 것으로, 오늘날까지도 격조 높은 전통 음악을 이루고 있다.
속악이라고도 하는 향약은 우리의 고유 음악이 당악의 영향을 받아 발달한 것인데, 당시 유행한 민중의 속요와 어울려 수많은 곡을 낳았다. 동동, 한림별곡, 대동강 등의 곡이 유명하였다. 악기는 전래의 우리 악기에 송의 악기가 수입되어 약 40종이나 되었다고 한다.
3. 근세의 문화
1. 민족 문화의 융성
발달 배경
조선 초기에는 민족적이면서 실용적인 성격의 학문이 발달하여 다른 시기보다 민족 문화가 크게 발달하였다. 당시의 집권층은 민생 안정과 부국강병을 위하여 과학 기술과 실용적 학문을 중시하고 민족 문화의 발달에 노력하였으며, 우리의 문자인 한글을 창제하여 민족 문화의 기반을 넓히고 더욱 발전할 수 있는 터전을 닦았다.
15세기 문화를 주도한 관학파 계열의 관료와 학자는 성리학을 지도 이념으로 내세웠으나, 성리학 이외의 학문과 사상이라도 중앙 집권 체제의 강화나 민생 안정과 부국강병에 도움이 되는 것은 어느 정도 받아들였다. 이로써 민족적이면서 자주적인 성격의 민족 문화가 크게 발전할 수 있었다.
한글 창제
우리 나라는 일찍부터 한자를 써 오면서 이두나 향찰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고유 문자가 없어서 우리말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일상적으로 쓰는 말에 맞으면서도 누구나 배우기 쉽고 쓰기 좋은 우리의 문자가 필요하였다. 더욱이, 조선 한자음의 혼란을 줄이고 피지배층을 도덕적으로 교화시켜 양반 중심 사회를 원활하게 유지하기 위해서도 우리 문자의 창제가 요청되었다.
이에, 세종은 훈민정음을 창제하여 반포하였다(1446). 한글은 누구나 쉽게 배우고 쓸 수 있으며, 자기의 의사를 마음대로 표현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글자를 만드는 원리가 매우 과학적인 뛰어난 문자이다.
조선 정부는 한글을 보급시키기 위하여 왕실 조상의 덕을 찬양하는 용비어천가, 부처님의 덕을 기리는 월인천강지곡 등을 지어 한글로 간행하였다. 또, 불경, 농서, 윤리서, 병서 등을 한글로 번역하거나 편찬하였다. 그리고 서리들이 한글을 배워 행정 실무에 이용할 수 있도록 그들의 채용에 훈민정음을 시험으로 치르게 하기도 하였다.
민족 문화를 보존하고 발전시키는 가장 좋은 도구 중의 하나는 자기 민족의 고유 문자이다. 우리 민족은 고유한 문자인 한글을 가지게 됨으로써 일반 백성도 문자 생활을 누릴 수 있고, 문화 민족으로서의 긍지와 자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민족 문화의 기반을 확고하게 다지고, 더욱 발전할 수 있는 전기를 마련하였다.
교육 기관
조선은 고려의 교육 제도를 이어받아 서울에 국립 교육 기관인 성균관을 두었다. 이는 최고 학부의 구실을 하였고, 중등 교육 기관으로는 중앙의 4학과 지방의 향교가 있었다. 또, 사립 교육 기관으로 서원과 서당 등이 있었다. 이들은 계통적으로 연결되지 않고 각각 독립된 교육 기관이었다.
성균관의 입학 자격은 생원, 진사를 원칙으로 하였고, 4학은 중학, 동학, 남학, 서학이 있었다. 향교는 중등 교육 기관으로, 성현에 대한 제사와 유생의 교육, 지방민의 교화를 위해 부·목·군·현에 각각 하나씩 설립되었다. 향교에는 그 규모와 지역에 따라 중앙에서 교관인 교수 또는 훈도를 파견하였다. 한편, 서당은 초등 교육을 담당하는 사립 교육 기관으로서, 4학이나 향교에 입학하지 못한 선비와 평민의 자제가 교육을 받았다. 교육받는 자의 연령은 대개 8, 9세부터 15, 16세 정도에 이르렀다.
서원은 풍기 군수 주세붕이 세운 백운동 서원이 시초이다. 서원에서는 봄·가을로 향음주례를 지냈고, 인재를 모아 학문도 가르쳤다. 서원은 이름난 선비나 공신을 숭배하고 그 덕행을 추모하였고, 유생이 한 자리에 모여 학문을 닦고 연구함으로써 향촌 사회의 교화에 공헌하였다. 이에 따라 국가에서는 서원의 설립을 장려하여 전국 각처에 많은 사원이 세워졌다.
역사서의 편찬
조선은 건국 초기부터 왕조의 정통성에 대한 명분을 밝히고 성리학적 통치 규범을 정착시키기 위하여 국가적 차원에서 역사서의 편찬에 힘썼다. 조선 시대에는 실록의 편찬을 매우 중요시하고, 이를 국가 차원에서 계속적으로 추진하였다. 한 왕대의 역사를 후대에 남기기 위한 실록의 편찬은 태조실록부터 철종실록까지 계속되었다. 조선왕조실록은 세계에서 자랑할 만한 기록 문화 유산이다.
태조 때, 정도전은 고려국사를 편찬하여 고려 시대의 역사를 정리하고 조선 건국의 정당성을 밝히려 하였다. 이후에도 고려 시대의 역사를 자주적 입장에서 재정리하는 작업은 계속되어 15세기 중엽에 기전체의 고려사와 편년체의 고려사절요가 완성되었다.
우리 나라의 전체 역사를 편찬하려는 노력도 계속되어 성종 때에 동국통감이 간행되었다. 이 책은 고조선부터 고려 말까지의 역사를 정리한 편년체 통사로서, 서거정 등이 편찬하였다. 16세기에는 새로운 역사서로 박상의 동국사략 등이 편찬되었다.
지리서의 편찬
조선 초기에는 중앙 집권과 국방의 강화를 위하여 지리지와 지도의 편찬에 힘썼다. 태종 때에는 세계 지도인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를 만들었다. 이 지도의 필사본이 일본에 현존하고 있는데, 지금 남아 있는 세계 지도 중 동양에서는 가장 오래 된 것이다. 세종 때에는 전국 지도로서 팔도도를 만들었고, 세조 때에는 양성지 등이 동국지도를 완성하였다. 16세기에도 많은 지도가 만들어졌는데, 그 중에서 조선방역지도가 현존하고 있다.
지리지의 편찬도 추진되어 세종 때 신찬팔도지리지, 성종 때 동국여지승람이 편찬되었다. 여기에는 군현의 연혁, 지세, 인물, 풍속, 산물, 교통 등이 자세히 수록되어 있다. 이를 보충한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중종 때 편찬되어 오늘날까지 전하고 있다.
윤리, 의례서와 법전의 편찬
유교적 질서를 확립하기 위하여 윤리와 의례에 관한 서적의 편찬 사업이 이루어졌다. 세종 때에는 모범이 될 만한 충신, 효자, 열녀 등의 행적을 그림으로 그리고 설명을 붙여 윤리서인 삼강행실도를 편찬하였으며, 성종 때에는 국가의 여러 행사에 필요한 의례를 정비하여 의례서인 국조오례의를 편찬하였다.
16세기에는 사림이 소학과 주자가례의 보급과 실천에 힘쓰면서 이륜행실도와 동몽수지 등을 간행하여 보급하였다. 이륜행실도는 연장자와 연소자, 친구 사이에서 지켜야 할 윤리를 강조한 책이며, 동몽수지는 어린이가 지켜야 할 예절을 기록한 윤리서였다.
한편, 조선은 유교적 통치 규범을 성문화하기 위한 법전의 편찬에 힘썼다. 건국 초기에 정도전은 조선경국전과 경제문감을 편찬하였고, 조준은 경제육전을 편찬하였다.
세조 때부터 편찬되기 시작한 경국대전은 성종 때 완성되었다. 경국대전은 이전, 호전, 예전, 병전, 형전, 공전의 6전으로 구성된 조선의 기본 법전으로, 후기까지 법률 체계의 골격을 이루었다. 이 법전의 편찬은 조선 초기에 정비된 유교적 통치 질서와 문물 제도가 완성되었음을 의미한다.
2. 성리학의 발달
성리학의 정착
성리학은 고려 말의 개혁과 조선을 건국하는 데에 사상적 기반을 제공하였으나, 이를 수용하고 이해하는 과정에서 신진 사대부 사이에 입장의 차이가 나타났다.
정도전, 권근 등 관학파로 불리는 이들은 성리학에만 국한하지 않고 한·당 유학, 불교, 도교, 풍수지리 사상, 민간 신앙 등을 포용하여 시대적 과제를 해결하려고 하였으며, 특히 주례를 국가의 통치 이념으로 중요하게 여겼다. 이들은 고려 시대부터 누적되어 온 대내외적인 모순을 극복하고 왕조 교체에 따른 새로운 문물 제도를 정비하고 부국강병을 추진하였다.
고려 말 온건 개혁파로 조선의 건국에 참여하지 않고 재야로 물러난 길재에서 비롯된 사학파의 학문적 전통은 성종 때에 본격적으로 중앙 정계에 진출한 사림이 계승하였다. 이들은 형벌보다는 교화에 의한 통치를 강조하였으며, 공신과 외척의 비리와 횡포를 성리학적 명분론에 입각하여 비판하고, 당시의 사회 모순을 성리학적 이념과 제도의 실천으로 극복해 보려고 하였다.
성리학의 융성
16세기 사림은 도덕성과 수신을 중시하였으며, 그것을 사회적으로 실천하는 가운데 인간 심성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졌다. 서경덕과 이언적은 각각 조선 성리학의 이기론에서 선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서경덕은 이보다는 기를 중심으로 세계를 이해하고 불교와 노장 사상에 대해서 개방적인 태도를 지녔다. 역시 노장 사상에 포용적이었던 조식은 학문의 실천성을 특히 강조하였다. 서경덕과 조식을 중심으로 한 이러한 학문 경향은 16세기 중반 이후 하나의 중요한 사상적 조류를 형성하였다.
이언적은 기보다는 이를 중심으로 자신의 이론을 전개하여 후대에 큰 영향을 끼쳤다.
성리학이 조선 사회에 확고하게 뿌리내리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인물은 이황과 이이였다. 이황은 주자서절요, 성학십도 등을 저술하였으며, 주자의 이론에 조선의 현실을 반영시켜 나름대로의 체계를 세우려고 하였다. 그의 사상은 도덕적 행위의 근거로서 인간의 심성을 중시하고, 근본적이며 이상주의적인 성격이 강하였다. 이황의 사상은 임진왜란 이후 일본에 전해져 일본의 성리학 발전에도 영향을 끼쳤다.
반면, 이이는 이황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기의 역할을 강조하여 현실적이며 개혁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이이는 동호문답, 성학집요 등을 저술하여 16세기 조선 사회의 모순을 극복하는 방안으로 통치 체제의 정비와 수취 제도의 개혁 등 다양한 개혁 방안을 제시하였다.
학파의 형성과 예학의 발달
16세기 중반부터 성리학에 대한 이해가 심화되면서 학설과 지역적 차이에 따라 서원을 중심으로 학파가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선조 때에 서경덕 학파와 이황 학파, 조식 학파가 동인을 형성하였으며, 이이 학파와 성혼 학파가 서인을 형성하였다. 광해군 때, 북인은 중립 외교를 취하는 등 성리학적 의리 명분론에 크게 구애받지 않았다. 이는 서인과 남인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인조반정으로 서인이 정국을 주도하자, 서경덕과 조식의 사상, 양명학, 노장 사상 등은 배척당하고, 이황과 이이의 학문, 즉 주자 중심의 성리학만 조선 사상계에서 확고한 우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후 서인과 남인은 명에 대한 의리 명분론을 강화하고 반청 정책을 추진하여 병자호란을 초래하였다. 이후 격렬한 주화·척화 논의를 거쳐 인조 말엽부터 송시열 등 서인 산림이 정국을 주도하면서 척화론과 의리 명분론이 대세를 이루었다. 이 시기에 각 학파는 대동법과 호포법 등 사회·경제 정책을 둘러싸고 격렬한 논쟁과 대립을 하기도 하였다.
17세기에는 예학의 시대라고 할 정도로 예학이 발달하였다. 이 무렵 예는 양 난으로 인하여 흐트러진 유교적 질서의 회복이 강조되면서 더욱 중시되었다. 예가 사회를 이끌어 가는 하나의 방도로서 부각되어, 학문은 예학보다 절실한 것이 없다는 생각이 널리 퍼지고 예치가 강조되었다. 이처럼 예학 연구가 심화되어 각 학파 간 예학의 차이는 전례 논쟁을 통하여 표출되었으며, 예송은 그 대립의 정점이라고 할 수 있다.
3. 불교와 민간 신앙
불교의 정비
성리학이 주도 이념이었던 조선 시대에 불교계는 크게 위축되었다. 조선 초기에는 사원이 소유한 막대한 토지와 노비를 회수하여 집권 세력의 경제적 기반을 두터이 하고자 하는 정책이 지속적으로 추진되었다. 그리고 도첩제를 실시하여 승려가 되고자 하는 출가를 제한하였다. 세종 때에는 교단을 정리하면서 선종과 교종 두 종파에 모두 36개 절만 인정하였다.
사원에 대한 국가적 통제는 강하였으나 사람들의 신앙에 대한 욕구는 완전히 억제하지 못하여,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고 왕족의 명복을 비는 행사가 자주 시행되어 불교는 명맥을 유지하였다. 세조 때에는 간경도감을 설치하여 불교 경전을 한글로 번역하여 간행하고 보급하는 등 적극적인 불교 진흥책을 펴서 일시적으로 불교가 중흥되기도 하였다.
성종 이후 사림의 적극적인 비판으로 불교는 점차 왕실에서 멀어져 산간 불교로 바뀌었다. 명종 때에는 문정 왕후의 지원 아래 일시적인 불교 회복 정책이 펼쳐진 결과, 보우(普雨)가 중용되고 승과가 부활되기도 하였다. 16세기 후반, 휴정(서산대사)과 같은 고승이 배출되어 교리를 가다듬었고, 임진왜란 때 승병이 크게 활약함으로써 불교계의 위상을 새롭게 정립하였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사원의 경제적 기반 축소와 우수한 인재의 출가 기피는 불교의 사회적 위상을 크게 약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도교와 민간 신앙
도교 역시 크게 위축되어 사원이 정리되고 행사도 줄어들었다. 그러나 제천 행사가 국가의 권위를 높이는 점이 인정되어 소격서를 설치하고, 참성단에서 일월성신에 제사 지내는 초제가 시행되었다.
한편, 풍수지리설과 도참 사상이 조선 초기 이래로 중요시되어 한양 천도에 반영되었으며, 양반 사대부의 묘지 선정에도 작용하였다. 무격 신앙, 산신 신앙, 삼신 숭배, 촌락제 등은 백성 사이에 깊이 자리잡았다.
특히, 계절에 따른 세시 풍속은 유교 이념과 융합되면서 조상 숭배 의식과 촌락의 안정을 기원하는 의식이 되었다. 불교식으로 화장하던 풍습이 묘지를 쓰는 것으로 바뀌면서 명당 선호 경향이 두드러졌다.
4. 과학 기술의 발달
천문, 역법과 의학
조선 초 세종 때를 전후한 이 시기의 과학 기술은 우리 나라 역사상 특기할 정도로 뛰어났다. 당시의 집권층은 부국강병과 민생 안정을 위하여 과학 기술이 중요하다고 인식하였다. 이러한 여건 속에서 과학 기술은 국가적 지원을 받아 크게 발전하였다.
이와 아울러 우리 나라의 전통적 문화를 계승하면서 서역과 중국의 과학 기술을 수용하여 훌륭한 업적을 남겼다. 특히, 천문학, 농업과 관련된 각종 기구를 발명, 제작하였다. 천체 관측 기구로 혼의와 간의를 제작하고, 시간 측정 기구로 물시계인 자격루와 해시계인 앙부일구 등이 만들었다. 자격루는 노비 출신의 과학 기술자인 장영실이 제작한 것으로, 정밀 기계 장치와 자동 시보 장치를 갖춘 뛰어난 물시계였다. 세계 최초로 측우기를 만들어(1441) 전국 각지의 강우량을 측정하였고, 토지 측량 기구인 인지의와 규형을 제작하여 토지 측량과 지도 제작에 활용하였다.
조선은 건국 초기부터 천문도를 만들었다. 태조 때에는 고구려의 천문도를 바탕으로 천상열차분야지도를 돌에 새겼다. 세종 때에도 새로운 천문도를 만들었는데, 이것은 현재 남아 있지 않다.
천문학의 발달과 함께 새로운 역법이 마련되었다. 태종 때에 만든 칠정산은 중국의 수시력과 아라비아의 회회력을 참고로 하여 만든 역법서로, 우리 나라 역사상 최초로 서울을 기준으로 천체 운동을 정확하게 계산한 것이다. 이는 15세기 세계 과학의 첨단 수준에 해당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의학에서도 우리 풍토에 알맞은 약재와 치료 방법을 개발, 정리하여 향약집성방을 편찬하고, 의방유취라는 의학 백과 사전을 간행하였다. 이로써 15세기에는 조선 의약학의 자주적 체계가 마련되어 민족 의학이 더욱 발전할 수 있었다.
활자 인쇄술과 제지술
조선 초기에는 각종 서적의 편찬 사업이 활발하게 추진되면서 활자 인쇄술과 제지술이 발달하였다.
고려 시대에 발명되어 사용된 금속 활자는 조선 초기에 이르러 더욱 개량되었다. 태종 때에는 주자소를 설치하고 구리로 계미자를 주조하였다. 이어서 세종 때에는 역시 구리로 갑인자를 주조하였는데, 이는 글자 모습이 아름답고 인쇄에 편리하게 만들어졌다.
세종 때에는 인쇄 기술이 더욱 발전하였다. 종전에는 밀랍으로 활자를 고정시키는 방법을 사용하였으나, 이제는 밀랍 대신 식자판을 조립하는 방법을 창안하여 종전보다 두 배 정도의 인쇄 능률을 올렸다.
활판 인쇄술과 더불어 제지술이 발달하여 종이의 생산량이 크게 늘어났다. 세종 때에는 종이를 전문적으로 생산하는 관청으로서 조지서를 설치하고 다양한 종이를 대량으로 생산하였다. 그리하여 수많은 서적을 인쇄할 수 있게 되었다.
병서 편찬과 무기 제조
조선 초기에는 국방력을 강화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많은 병서를 편찬하였고, 이와 함께 각종 무기의 제조 기술이 발달하였다.
세종 때에는 화약 무기의 제작과 그 사용법을 정리한 총통등록을 편찬하였고, 문종 때에는 김종서의 주도하에 고조선에서 고려 말까지의 전쟁사를 정리한 동국병감을 간행하였다. 이 시기에는 병장도설도 편찬되어 군사 훈련의 지침서로 사용하였다.
화약 무기의 제조에는 최해산이 큰 활약을 하였다. 그는 최무선의 아들로서, 태종 때에 관리로 특채되어 화약 무기의 제조를 담당하였다. 조선 초기에 만든 화포는 사정 거리가 최대 1000보에 이르렀으며, 바퀴가 달린 화차는 신기전이라는 화살 100개를 잇따라 발사할 수 있었다. 병선 제조 기술도 발달하여 태종 때에는 거북선을 만들었고, 작고 날쌘 비거도선이라는 전투선을 제조하여 수군의 전투력을 크게 향상시켰다.
5. 건축과 예술
왕실과 양반의 건축
조선 초기에는 사원 위주의 고려 건축과는 달리, 궁궐, 관아, 성문, 학교 등이 건축의 중심이 되었다. 이러한 건물은 건물주의 신분에 따라 크기와 장식에 일정한 제한을 두었는데, 그 목적은 국왕의 권위를 높이고 신분 질서를 유지하는 데 있었다.
건국 초기에 도성을 건설하고, 경복궁을 지었으며, 곧이어 창덕궁과 창경궁을 세웠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창경궁 명정전과 도성의 숭례문, 창덕궁 돈화문이 당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특히, 도성의 정문인 숭례문은 고려의 건축 기법과는 다른 방식을 채택하여 발전된 조선 전기의 건축을 대표하고 있다. 반면에, 개성의 남대문과 평양의 보통문은 고려 시대 건축의 단정하고 우아한 모습을 지니면서 조선 시대 건축으로 발전해 나가는 형태를 보이고 있다.
왕실의 비호를 받은 불교와 관련된 건축 중에서도 뛰어난 것이 적지 않다. 무위사 극락전은 검박하고 단정한 특징을 지니고 있으며, 팔만대장경을 보관하고 있는 해인사의 장경판전은 당시의 과학과 기술을 집약하고 있다. 세조 때에 대리석으로 만든 원각사지 10층 석탑은 이 시기 석탑의 대표작이다.
16세기에 들어와 사림의 진출과 함께 서원의 건축이 활발해졌다. 서원은 산과 하천이 가까이 있어 자연의 이치를 탐구할 수 있는, 마을 부근의 한적한 곳에 위치하였는데, 교육 공간인 강당을 중심으로 사당과 기숙 시설인 동재와 서재를 갖추었다. 서원 건축은 가람 배치 양식과 주택 양식이 실용적으로 결합된 독특한 아름다움을 지녔다. 주위의 자연과 빼어난 조화를 이룬 대표적인 서원으로는 경주의 옥산 서원과 안동의 도산 서원이 있다.
분청사기, 백자와 공예
조선 전기 궁중이나 관청에서는 금이나 은으로 만든 그릇 대신에 백자나 분청사기를 널리 사용하였다. 분청사기와 옹기그릇은 전국의 자기소와 도기소에서 만들어져 관수용이나 민간용으로 보급되었다.
고려 말에 나타난 분청사기는 청자에 백토의 분을 칠한 것으로, 안정된 그릇 모양과 소박하고 천진스러운 무늬가 어우러져 정형화되지 않으면서 구김살 없는 우리의 멋을 잘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분청사기는 16세기부터 세련된 백자가 본격적으로 생산되면서 점차 그 생산이 줄어들었다.
조선의 백자는 청자보다 깨끗하고 담백하며 순백의 고상함을 풍겨 선비의 취향과 어울렸기 때문에 널리 이용되었다.
장롱, 문갑 같은 목공예 분야와 돗자리 공예 분야에서도 재료의 자연미를 그대로 살린 기품 있는 작품이 생산되었다. 이 밖에, 쇠뿔을 쪼개어 무늬를 새긴 화각 공예, 그리고 자개 공예도 유명하다. 수와 매듭에서도 부녀자의 섬세하고 부드러운 정취를 살린 뛰어난 작품이 있다.
그림과 글씨
15세기 그림은 도화서에 소속된 화원의 그림과 관료이자 문인인 선비의 그림으로 나눌 수 있다. 이들은 중국 역대 화풍을 선택적으로 수용하고 소화하여 우리의 독자적인 화풍을 개발하였다. 조선의 이런 그림은 일본 무로마치 시대의 미술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이 시기의 가장 유명한 화가로는 안견, 강희안을 꼽을 수 있다.
화원 출신인 안견은 역대 화가들의 기법을 체득하여 독자적인 경지를 개척하였다. 그의 대표작인 몽유도원도는 자연스러운 현실 세계와 환상적인 이상 세계를 능숙하게 처리하고 대각선적인 운동감을 활용하여 구현한 걸작이다.
문인 화가인 강희안은 시적 정서가 흐르는 낭만적인 그림을 많이 그렸다. 그의 대표작인 고사관수도는 간결하고 과감한 필치로 인물의 내면 세계를 느낄 수 있게 표현하였다.
16세기에는 15세기의 전통을 토대로 다양한 화풍이 발달하였다. 강한 필치의 산수화를 이어 가기도 하고, 선비의 정신 세계를 사군자로 표현하기도 하였다.
노비 출신으로 화원에 발탁된 이상좌는 색다른 분위기의 그림으로 명성을 떨쳤다. 그의 대표작인 송하보월도는 바위틈에 뿌리박고 모진 비바람을 이겨 내고 있는 늙은 소나무를 통하여 강인한 정신과 굳센 기개를 표현하였다.
서예는 양반이라면 누구나 터득해야 할 필수 교양이었기 때문에 뛰어난 서예가들이 많이 나타났다. 안평 대군과 양사언, 한호가 명필로 널리 알려졌다.
음악과 무용
조선 시대에는 음악을 백성을 교화하는 수단으로 여겼고, 국가의 각종 의례와 밀접히 관련되었기 때문에 중요시하였다. 세종은 박연에게 악기를 개량하거나 만들게 하였고, 스스로 여민락 등 악곡을 짓고 소리의 장단과 높낮이를 표현할 수 있는 정간보를 창안하였다. 아울러 악곡과 악보를 정리하게 하고 아악을 체계화함으로써 아악이 궁중 음악으로 발전하게 하였다.
성종 때에 성현은 악학궤범을 편찬하였다. 이 책은 음악의 원리와 역사, 악기, 무용, 의상 및 소도구까지 망라하여 정리함으로써 전통 음악을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16세기 중엽 이후에는 민간에서도 당악과 향악을 속악으로 발달시켜 가사, 시조, 가곡 등 우리말로 된 노래를 연주하는 음악이나 민요에 활용하였다.
궁중과 관청의 의례에서는 음악과 함께 춤이 따랐다. 이들 춤은 행사에 따라 매우 다양하였는데, 처용무처럼 전통춤을 우아하게 변용시킨 것도 있었다. 민간에서는 농악무, 무당춤, 승무 등 전통춤을 계승하고 발전시켜 나갔으며, 산대놀이라는 탈춤과 인형극인 꼭두각시놀음도 유행하였다.
4. 근대 태동기의 문화
1. 성리학의 변화
성리학의 절대화 경향
인조반정 이후 송시열을 중심으로 한 서인은 당시 조선 사회가 안고 있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명분론을 강화하고 성리학을 절대화하였다.
반면에, 성리학을 상대화하고 6경과 제자백가 등에서 모순 해결의 사상적 기반을 찾으려는 경향도 17세기 후반부터 나타났다. 그 대표적인 인물은 윤휴와 박세당이다. 이들은 주자의 학문 체계와 다른 모습을 보였기 때문에 당시 서인(노론)의 공격을 받아 사문난적으로 불렸다.
성리학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면서 학자들은 인간 본성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와 철학 논쟁을 벌였다. 16세기 후반에는 이황 학파와 이이 학파 사이에 이기론(理氣論)에 대한 논쟁이 일어났다. 이어, 18세기 이이 학파를 계승한 노론은 인간과 사물의 본성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호락 논쟁을 벌였다.
한편, 소론은 절충적인 성격을 지닌 성혼의 사상을 계승하고 양명학과 노장 사상 등을 수용하는 등 성리학 이해에 탄력성을 보였다.
양명학의 수용
성리학의 절대화와 형식화를 비판하며 실천성을 강조한 양명학은 중종 때에 조선에 전래되었다. 학자들 사이에 관심을 끌어가던 양명학은 이황이 정통 주자학 사상과 어긋난다며 비판하면서 이단으로 간주되었다. 18세기 초반에 정제두는 몇몇 소론 학자가 명맥을 이어가던 양명학을 체계적으로 연구하여 학파로 발전시켰다. 그는 일반민을 도덕 실천의 주체로 인정하였으며, 양반 신분제를 폐지하자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제자들이 정권에서 소외된 소론이었기 때문에, 그의 학문은 집안의 후손과 인척을 중심으로 하여 계승되었다.
강화 학파는 양명학을 바탕으로 역사학, 국어학, 서화, 문학 등에서 새로운 경지를 개척해 갔으며, 실학자들과도 영향을 주고받았다.
2. 실학의 발달
실학의 등장
조선 후기의 학문과 사상에서 나타난 새로운 경향 중에 대표적인 것은 실학의 발달이었다. 실학은 17, 18세기 사회·경제적 변동에 따른 사회 모순의 해결책을 구상하는 과정에서 대두한 학문과 사회 개혁론이었다.
이러한 새로운 문화 운동은 이수광, 한백겸 등에 의하여 제기되었다. 이수광은 지봉유설을 저술하여 문화 인식의 폭을 확대하였고, 한백겸은 동국지리지를 저술하여 우리 나라의 역사 지리를 치밀하게 고증하였다.
그 후, 실학은 농업 중심의 개혁론, 상공업 중심의 개혁론, 국학 연구 등을 중심으로 확산되었으며, 이 때 청에서 전해진 고증학과 서양 과학의 영향을 받기도 하였다. 실학은 18세기에 가장 활발하였으며, 대부분의 실학자는 민생 안정과 부국강병을 목표로 하여 비판적이면서 실증적인 논리로 사회 개혁론을 제시하였다.
농업 중심의 개혁론
18세기 전반에 농업 중심의 개혁론을 제시한 실학자들은 농촌 사회의 안정을 위하여 농민의 입장에서 토지 제도를 비롯한 각종 제도의 개혁을 추구하였다. 이 실학자들을 경세치용 학파라고도 한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농민 생활의 안정을 위한 토지 제도의 개혁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농업 중심 개혁론의 선구자는 17세기 후반에 활약한 유형원으로, 일생 동안 농촌에 묻혀 살면서 학문 연구에 몰두하고 반계수록을 저술하였다. 이 책에서 유형원은 균전론을 내세워 자영농 육성을 위한 토지 제도의 개혁을 주장하였고, 양반 문벌 제도, 과거 제도, 노비 제도의 모순을 비판하였다.
농업 중심 개혁론을 더욱 발전시키고 이를 대표하는 사람은 18세기 전반에 주로 활약한 이익이었다. 그는 유형원의 실학 사상을 계승, 발전시켰으며, 많은 제자를 길러 내 학파를 형성하였다. 그는 자영농 육성을 위한 토지 제도 개혁론으로 균전론을 주장하고, 나라를 좀먹는 여섯 가지의 폐단을 지적하기도 하였다.
이익의 실학 사상을 계승하면서 실학을 집대성한 최대의 학자는 정약용으로, 지방 행정의 개혁에 대하여 쓴 목민심서, 중앙 행정의 개혁에 대하여 쓴 경세유표 등을 비롯하여 500여 권의 저술을 남겼다. 그는 토지 제도의 개혁론으로 여전론을 처음에 내세웠다가 후에 정전제를 현실에 맞게 실시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정약용은 과학 기술과 상공업 발달에도 많은 관심을 보였다.
상공업 중심의 개혁론
18세기 후반에는 농업뿐만 아니라, 상공업의 진흥과 기술의 혁신을 주장하는 실학자가 나타났다. 청나라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부국강병과 이용후생에 힘쓰자고 주장하였으므로 이들을 이용후생 학파 또는 북학파라고도 한다.
상공업 중심 개혁론의 선구자는 18세기 전반의 유수원이었다. 그는 우서를 저술하여 상공업의 진흥과 기술의 혁신을 강조하고, 사농공상의 직업 평등과 전문화를 주장하였다.
북학파의 실학 사상은 18세기 후반에 홍대용, 박지원, 박제가 등에 의하여 크게 발전하였다. 홍대용은 청에 왕래하면서 얻은 경험을 토대로 기술의 혁신과 문벌 제도의 철폐, 그리고 성리학의 극복이 부국강병의 근본이라고 강조하였으며,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생각을 비판하였다.
박지원은 청에 다녀와 열하일기를 저술하고 상공업의 진흥을 강조하면서 수레와 선박의 이용, 화폐 유통의 필요성 등을 주장하고, 양반 문벌 제도의 비생산성을 비판하였다. 농업에서도 영농 방법의 혁신, 상업적 농업의 장려, 수리 시설의 확충 등을 통하여 농업 생산력을 높이는 데 관심을 기울였다.
박지원의 실학 사상은 그의 제자 박제가에 의하여 더욱 확충되었다. 박제가는 청에 다녀온 후 북학의를 저술하여 청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할 것을 제창하였다. 그는 상공업의 발달, 청과의 통상 강화, 수레와 선박의 이용 등을 역설하였다. 또, 생산과 소비와의 관계를 우물물에 비유하면서 생산을 자극하기 위해서는 절약보다 소비를 권장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18세기를 전후하여 크게 융성하였던 실학 사상은 실증적, 민족적, 근대 지향적 특성을 지닌 학문이었다. 특히, 북학파 실학 사상은 19세기 후반에 개화 사상으로 이어졌다.
국학 연구의 확대
실학의 발달과 함께 민족의 전통과 현실에 대한 관심이 깊어지면서 우리의 역사, 지리, 국어 등을 연구하는 국학이 발달하였다.
이익은 실증적이며 비판적인 역사 서술을 제시하고, 중국 중심의 역사관에서 벗어나 우리 역사를 체계화할 것을 주장하였으며, 민족에 대한 주체적 자각을 높이는 데 이바지하였다. 이익의 제자 안정복은 동사강목을 저술하여 이익의 역사 의식을 계승하였다.
이긍익은 조선 시대의 정치와 문화를 정리하여 연려실기술을 저술하였다. 한치윤은 500여 종의 종국 및 일본의 자료를 참고하여 해동역사를 편찬하여 민족사 인식의 폭을 넓히는 데 이바지하였다.
이종휘는 동사에서 고구려 역사 연구를, 유득공은 발해고에서 발해사 연구를 심화하였다. 이들은 고대사 연구의 시야를 만주 지방까지 확대시킴으로써 한반도 중심의 협소한 사관을 극복하는 데 힘썼다.
한편, 김정희는 금석과안록을 지어 북한산비가 진흥왕 순수비임을 밝혔다.
국토에 대한 연구도 활발하여 우수한 지리서가 편찬되고, 정밀한 지도가 제작되었다. 역사 지리서로는 한백겸의 동국지리지, 정약용의 아방강역고 등이 나왔고, 인문 지리서로는 이중환의 택리지가 편찬되었다.
중국에서 서양식 지도가 전해짐에 따라 정밀하고 과학적인 지도가 많이 제작되었다. 정상기의 동국지도는 최초로 100리척을 사용하여 정확하고 과학적인 지도 제작에 공헌하였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는 산맥, 하천, 포구, 도로망의 표시가 정밀하고, 거리를 알 수 있도록 10리마다 눈금이 표시되었으며, 목판으로 인쇄되었다.
언어에 대한 연구도 진전되어 신경준의 훈민정음운해와 유희의 언문지 등이 나왔고, 우리의 방언과 해외 언어를 정리한 이의봉의 고금석림도 편찬되었다.
조선 후기에는 실학이 발달하고 문화 인식의 폭이 넓어짐에 따라 백과 사전류의 저서가 많이 편찬되었다. 이 방면의 효시가 된 책은 이수광의 지봉유설이며, 그 뒤를 이어 18, 19세기에 이익의 성호사설, 이덕무의 청장관전서, 서유구의 임원경제지,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 등이 나왔다.
영·정조 때에는 국가적 사업으로 동국문헌비고가 편찬되었는데, 이 책은 우리 나라의 역대 문물을 정리한 한국학 백과 사전이다.
3. 과학 기술의 발달
서양 문물의 수용
조선 후기에는 전통적 과학 기술을 계승, 발전시키면서 중국을 통하여 전래된 서양의 과학 기술의 수용하여 과학 기술면에서도 큰 진전이 있었다.
서양 문물은 17세기경부터 중국을 왕래하던 사신을 통해서 들어왔다. 선조 때 이광정은 세계 지도를 전하고, 인조 때 정두원은 화포, 천리경, 자명종 등을 전하였다.
당시 명·청의 수도인 베이징에는 서양 선교사가 있었는데, 조선의 사신은 이 곳에서 이들과 접촉하여 서양 문물을 소개받았다. 서양 문물의 수용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은 이익과 그의 제자들 및 북학파 실학자들이었다. 이익의 제자 중에서 일부는 서양의 종교인 천주교까지 수용한 사람도 있었으나, 대부분의 학자는 서양의 과학 기술은 받아들이면서도 천주교는 배척하였다.
17세기에는 벨테브레이와 하멜 일행이 우리 나라에 표류해 왔다. 벨테브레이는 훈련도감에 소속되어 서양식 대포의 제조법과 조종법을 가르쳐 주었고, 하멜 일행은 네덜란드로 돌아가 하멜 표류기를 지어 조선의 사정을 서양에 전하였다.
천문학과 지도 제작 기술의 발달
조선 후기에는 국민의 생활 개선을 중요시하여 과학과 기술 분야에서 관심을 가진 학자가 많았다.
천문학은 서양 과학의 영향을 받아 크게 발전하였다. 이익은 서양 천문학에 큰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였으며, 김석문은 지전설을 우리 나라에서 처음으로 주장하여 우주관을 크게 전환시켰다. 홍대용은 과학 연구에 힘썼으며, 김석문과 함께 지전설을 주장하였다. 지전설은 성리학적 세계관을 비판하는 근거가 되기도 하였다.
또,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는 무한 우주론을 내놓았는데, 당시로서는 대담한 주장이었다. 이리하여 조선 후기의 천문학은 전통적 우주관에서 벗어나 근대적 우주관으로 접근해 갔다.
역법은 김육 등의 노력으로 시헌력이 도입되었다. 이는 서양 선교사인 아담 샬이 중심이 되어 만든 것으로 청에서 사용되고 있었는데, 종전의 역법보다 한 걸음 더 발전한 것이었다. 조선에서는 약 60여 년 간의 노력 끝에 시헌력을 채용하였다.
조선 후기에 서양 선교사가 만든 곤여만국전도 같은 세계 지도가 중국을 통하여 전해짐으로써 지리학에서도 보다 과학적이고 정밀한 지식을 가지게 되었고, 지도 제작에서도 더 정확한 지도가 만들어졌다. 이를 통하여 당시 조선인의 세계관이 확대될 수 있었다.
의학, 농학의 발달과 기술 개발
조선 후기에 의학이 크게 발전하였다. 17세기 초에 허준은 동의보감을 저술하여 의학 발전에 큰 공헌을 하였다. 이 책은 우리의 전통 한의학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것으로, 우리 나라뿐만 아니라 중국과 일본에서도 간행되어 뛰어난 의학서로 인정되었다.
허준과 같은 시기에 허임은 침구경험방을 저술하여 침구술을 집대성하였다. 정약용은 마진(홍역)에 대한 연구를 진전시키고 이 분야의 의서를 종합하여 마과회통을 편찬하였으며, 박제가와 함께 종두법을 연구하여 실험하기도 하였다.
19세기에 이제마는 동의수세보원을 저술하여 사상 의학을 확립하였다. 이는 사람의 체질을 태양인, 태음인, 소양인, 소음인으로 구분하여 치료하는 체질 의학 이론으로, 오늘날까지도 한의학계에서 통용되고 있다.
17세기에 이르러 많은 농서가 편찬되고, 농업 기술도 크게 발달하였다. 17세기 중엽에 신속은 농가집성을 펴내 벼농사 중심의 농법을 소개하고, 이앙법의 보급에 공헌하였다. 그 후, 상업적 농업이 발달하고 농업의 영역이 확대됨에 따라, 곡물 재배법뿐만 아니라, 채소, 과수, 원예, 양잠, 축산 등의 농업 기술을 소개하는 농서가 필요하게 되었다.
이에 박세당은 색경을, 홍만선은 산림경제를, 서호수는 해동농서를 저술하여 농업 기술의 발전에 이바지하였다. 19세기에 서유구는 농업과 농촌 생활에 필요한 것을 종합하여 임원경제지라는 농촌 생활 백과 사전을 편찬하였다.
과학과 기술의 중요성을 확신하고 기술의 개발에 앞장섰던 사람은 정약용이었다. 그는 인간이 다른 동물보다 뛰어난 것은 기술 때문이라고 보고, 기술의 발달이 인간 생활을 풍요롭게 한다고 믿었다. 그리하여 스스로 많은 기계를 제작하거나 설계하였다. 그는 서양 선교사가 중국에서 펴낸 기기도설을 참고하여 거중기를 만들었는데, 이 거중기는 수원 화성을 쌓을 때에 사용되어 공사 기간을 단축하고 공사비를 줄이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정약용은 정조가 수원에 행차할 때 한강을 안전하게 건너도록 배다리도 설계하였다.
4. 문화의 새 경향
서민 문화의 발달
조선 후기에는 상공업의 발달과 농업 생산력의 증대를 배경으로 문화면에서 새 기운이 나타났다. 서당 교육이 보급되고, 서민의 경제적·신분적 지위가 향상됨에 따라 서민 문화가 대두하였다. 양반을 중심으로 유교 테두리 내에서 이루어지던 문예 활동에 중인층과 서민층이 참여하여 큰 변화가 나타났다. 특히, 역관이나 서리 등의 중인층 및 상공업 계층과 부농층의 문예 활동이 활발해졌고, 상민이나 광대의 활동도 활기를 띠었다.
교양이나 심성 수련이 목표였던 조선 전기의 문예가 정적이고 소극적이었다면, 조선 후기의 문예는 감정을 적나라하게 표현하는 경향이 강하였다. 이런 경향은 자연히 양반의 위선적인 모습을 비판하고, 사회의 부정과 비리를 풍자하고 고발하는 경향을 띠었다.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는 한글 소설의 보급은 그 영향력이 대단히 컸다. 한글 소설은 영웅이 아닌 평범한 인물이 주인공인 경우가 많았고, 대부분 현실적인 세계가 배경이 되었다. 춤과 노래 및 사설로 서민의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어 표현한 판소리와 탈춤은 서민 문화를 확대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회화에서는 그 저변이 확대되어 풍속화와 민화가 유행하였다. 음악과 무용에서는 감정을 대담하게 표현하는 경향이 짙었다.
판소리와 탈놀이
조선 후기 문화의 새 기운 중에서 가장 두드러지고 인기 있는 분야는 판소리와 탈춤이었다. 판소리는 구체적인 이야기를 창과 사설로 엮어 가기 때문에 감정 표현이 직접적이고 솔직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분위기에 따라 광대가 즉흥적으로 이야기를 빼거나 더할 수 있었고, 관중이 추임새로써 함께 어울릴 수 있었기 때문에, 서민을 포함한 넓은 계층에서 호응을 받을 수 있었다. 이런 이유로 판소리는 이 시기 서민 문화의 중심이 되었다.
판소리 작품으로는 열두 마당이 있었으나, 지금은 춘향가, 심청가, 홍보가, 적벽가, 수궁가 등 다섯 마당만 전하고 있다. 신재효는 19세기 후반에 이런 판소리 사설을 창작하고 정리하였다.
탈놀이와 산대놀이도 조선 후기의 사회 변화와 함께 성행하였다. 탈놀이는 향촌에서 마을굿의 일부로서 공연되어 인기를 얻었고, 산대놀이는 산대라는 무대에서 공연되던 가면극이 민중 오락으로 정착되어 도시의 상인이나 중간층의 지원으로 성행하였다.
이런 가면극에서는 지배층과 그들에게 의지하여 살아가는 승려의 부패와 위선을 풍자하기도 하였다. 나아가, 하층 서민인 말뚝이와 취발이를 등장시켜 양반의 허구를 폭로하고 욕보이기까지 하였다.
가면극과 판소리는 상품 유통 경제의 활성화와 함께 성장하여 당시 사회적 모순을 예리하게 드러내면서 서민 자신들의 존재를 자각하는 데 기여하였다.
한글 소설과 사설시조
조선 후기의 사회 변동을 구체적으로 반영한 것은 문학이었다. 그 중에서도 한글 소설과 사설시조가 대표적이었는데, 이는 문학의 저변이 서민층에까지 확대되면서 나타난 현상이었다. 한글 소설인 허균의 홍길동전은 서얼에 대한 차별의 철폐, 탐관오리의 응징을 통한 이상 사회의 건설을 묘사하는 등 당시의 현실을 날카롭게 비판하였다.
대표적인 한글 소설로 꼽히는 춘향전은 신분 차별의 비합리성을 나타내었다. 이 밖에도 제 목숨을 구하기 위하여 남의 생명을 빼앗으려는 못된 용왕을 골려 주는 토끼, 부모에 대한 지극한 효성으로 왕비가 된 심청, 불합리한 가족 관계에서 희생된 장화·홍련 등의 이야기를 통하여 서민은 자신과 사회를 뒤돌아볼 수 있었다.
한편, 시조에서도 새로운 움직임이 나타났다. 선비들의 절의와 자연관을 담고 있던 이전의 시조와는 달리, 이 시기의 시조에는 서민의 감정을 솔직하게 나타내는 경향이 나타났다. 격식에 구애됨이 없이 감정을 구체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사설시조 형식을 통하여 남녀 간의 사랑이나 현실에 대한 비판을 거리낌없이 표현하였다.
양반층이 중심이 된 한문학도 실학의 유행과 함께 사회의 부조리한 현실을 예리하게 비판하였다. 정약용은 삼정의 문란을 폭로하는 한시를 남겼고, 박지원은 양반전, 허생전, 호질, 민옹전 등의 한문 소설을 써서 양반 사회의 허구성을 지적하며 실용적 태도를 강조하였다. 특히, 그는 현실을 올바르게 표현할 수 있는 문체로 혁신할 것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중인층과 서민층의 문학 창작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동호인들이 모여 시사를 조직하였다. 김삿갓, 정수동 같은 풍자 시인은 아예 민중 속으로 파고들어 민중과 어우러져 활동하기도 하였다.
진경 산수화와 풍속화
조선 후기 그림에서 나타난 가장 두드러진 새 경향은 진경 산수화와 풍속화의 유행이었고, 서예에서는 우리의 정서를 담은 글씨의 등장이었다. 진경 산수화는 우리의 자연을 사실적으로 그려 회화의 토착화를 이룩하였으며, 풍속화는 당시 사람들의 생활 정경과 일상적인 모습을 생동감 있게 나타내어 회화의 폭을 확대하였다.
17세기부터 우리 문화에 대한 자부심이 높아졌고, 이런 의식은 우리의 고유 정서와 자연을 표현하려는 예술 운동으로 나타났다. 진경 산수화는 중국 남종과 북종 화법을 고루 수용하여 우리의 고유한 자연과 풍속에 맞춘 새로운 화법으로 창안한 것이었다.
진경 산수화를 개척한 화가는 18세기에 활약한 정선이었다. 그는 서울 근교와 강원도의 명승지를 두루 답사하여 그것들을 사실적으로 그려 냈다. 정선은 대표작인 인왕제색도와 금강전도에서 바위산은 선으로 묘사하고, 흙산은 묵으로 묘사하는 기법을 사용하여 산수화의 새로운 경지를 이룩하였다.
정선의 뒤를 이어 산수화와 풍속화에 새 경지를 열어 놓은 화가는 김홍도였다. 그는 산수화, 기록화, 신선도 등을 많이 그렸지만, 정감어린 풍속화를 그린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밭갈이, 추수, 씨름, 서당 등에서 자신의 일에 몰두하는 사람들의 특징을 소탈하고 익살스러운 필치로 묘사하였다. 이런 그림에서 18세기 후반의 생활상과 활기찬 사회의 모습을 살필 수 있다.
김홍도에 버금 가는 풍속화가로는 신윤복이 있었다. 그는 주로 양반과 부녀자의 생활과 유흥, 남녀 사이의 애정 등을 감각적이고 해학적으로 묘사하였다.
이 밖에도 강세황 등의 화가가 개성 있는 그림으로 18세기를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특히, 강세황은 서양화 기법을 반영하여 사물을 실감나게 표현하였다. 19세기에 이르러 장승업은 강렬한 필법과 채색법으로 뛰어난 기량을 발휘하였다. 진경 산수화와 풍속화로는 김정희 등의 문인화의 부활로 침체되었다가 한말에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났다.
이와 함께 민중의 미적 감각을 잘 나타낸 민화도 유행하였다. 해, 달, 나무, 꽃, 동물, 물고기 등을 소재로 삼아 소원을 기원하고 생활 공간을 장식하였다. 이런 민화에는 소박한 우리 정서가 짙게 배어 있다.
서예에서도 우리의 정서와 개성을 추구하는 단아한 글씨의 동국진체가 이광사에 의항 완성되었다. 김정희는 우리 서예 발전의 성과를 바탕으로 고금의 필법을 두루 연구하여 굳센 기운과 다양한 조형성을 가진 추사체를 창안하여 서예의 새로운 경지를 열었다.
건축의 변화
조선 후기에 불교가 신앙의 자리를 어느 정도 차지하고 정치·경제적인 변화가 나타나면서 건축에도 새로운 변화가 나타났다. 양반과 새롭게 부상하고 있던 부농, 상공업 계층의 지원 아래 많은 사원이 세워졌고, 정치적 필요에 의하여 대규모 건축물이 세워지기도 했다.
17세기의 건축으로는 금산사 미륵전, 화엄사 각황전, 법주사 팔상전 등을 대표로 꼽을 수 있다. 이것들은 모두 규모가 큰 다층 건물로, 내부는 하나로 통하는 구조로 되어 있는데, 불교의 사회적 지위 향상과 양반 지주층의 경제적 성장을 반영하고 있다.
18세기에는 사회적으로 크게 부상한 부농과 상인의 지원을 받아 그들의 근거지에 장식성이 강한 사원이 많이 세워졌다. 논산 쌍계사, 부안 개암사, 안성 석남사 같은 사원이 대표적이다.
이 시기에 특기할 만한 건축물은 수원 화성이다. 정조 때의 문화적인 역량을 집약시켜 새롭게 만든 화성은 이전의 성곽과는 달리, 방어뿐만 아니라 공격을 겸한 성곽 시설로, 주위의 경치와 조화를 이루며 평상시의 생활과 경제적 터전까지 조화시킨 종합적인 도시 계획 아래 건설되었다.
19세기의 건축으로는 흥선 대원군이 국왕의 권위를 높일 목적으로 재건한 경복궁의 근정전과 경회루가 화려하고 장중한 건물로 유명하다.
백자와 생활 공예, 음악
조선 후기에는 산업 부흥에 따라 공예가 크게 발전하였다. 자기 공예에서는 백자가 민간에까지 널리 사용되면서 본격적으로 발전하였다. 청화 백자가 유행하는 가운데 형태가 다양해지고, 안료도 청화, 철화, 진사 등으로 다채로웠는데, 제기와 문방구 등 생활 용품이 많았다. 형태와 문양이 어울려 우리의 독특하고 준수한 세련미를 풍겼다. 이와 함께 서민들은 옹기를 많이 사용하였다.
목공예도 생활 수준이 높아짐에 따라 크게 발전하였다. 장롱, 책상, 문갑, 소반, 의자, 필통 등 나무의 재질을 살리면서 기능을 갖춘 작품이 만들어졌다. 화각 공예도 독특한 우리의 맛을 풍기는 작품이 많았다.
음악에 있어서도 새로운 움직임이 나타났다. 음악의 향유층이 확대됨에 따라, 성격이 다른 음악이 다양하게 나타나 발전하였다. 양반층은 종래의 가곡, 시조를 애창하였고, 서민은 민요를 즐겨 불렀다. 이와 함께 상업의 성황으로 직업적인 광대나 기생이 판소리, 산조와 잡가 등을 창작하여 발전시켰다. 이 시기의 음악은 전반적으로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경향이 더욱 강하였다.
5. 근·현대의 문화
1. 근대 문물의 수용과 발전
근대 문물의 수용과 발전
17세기 이후 실학자들은 청나라를 통하여 알게 된 서양 과학 기술을 받아들일 것을 주장하였다.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을 펼쳤던 흥선 대원군도 서양의 무기 제조술에 관해서는 큰 관심을 보였다.
개항 이후 개화파 인사들은 부국강병을 통한 근대화를 이루기 위하여 서양의 과학 기술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자고 주장하였다. 정부도 동도서기론을 내세워 서양의 과학 기술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려 하였다.
근대 제도의 기술을 도입하고자 조사 시찰단과 영선사를 각각 일본과 청나라에 파견하였으며, 외국 기술자도 초빙하였다. 이러한 개화 정책에 따라 박문국에서는 신문을 발간하였고, 기기창에서는 서양 무기를 제조하였으며, 전환국에서는 새로운 화폐를 주조하였다.
개항 이후 통신, 교통, 전기, 의료, 건축 분야에서 근대 시설이 도입되었다. 전신이 설치되면서 국제 전신망이 연결되었으며, 궁궐과 상류 사회에는 전화도 보급되었다. 문명의 불인 전등이 경복궁의 밤을 밝혔으며, 발전소가 건설되면서 전차가 다니게 되었고, 서울 시내 일부에 전기가 들어왔다. 철도는 경인선이 개통된 후 러·일 전쟁 중에 일본의 군사적 필요에 의해 경부선, 경의선이 부설되었다. 서양 의학이 보급되면서 근대 의료 시설인 광혜원을 비롯하여 많은 병원이 들어섰고, 서양식 건축물인 명동 성당과 덕수궁 석조전 등이 세워졌다.
이와 같은 서양 문물의 도입은 국민의 생활을 편리하게 해 주는 이점도 있었지만, 기술과 관리를 외국인에게 의존했으므로 국가 재정에 큰 부담이 되었다. 또, 개화파가 부국강병을 위한 이론으로 받아들인 사회 진화론은 애국 계몽 운동가들에 의해 실력 양성론의 근거가 되었으나, 일본의 제국주의 침략을 합리화시켜 주기도 하였다.
근대 교육과 학문의 보급
개항 이후, 개화파와 정부는 개혁을 추진할 인재를 양성하고자 근대 교육을 보급하려 하였다.
1883년에는 원산에 사립 교육 기관인 원산 학사가 설립되어 최초로 근대 교육을 했으며, 정부도 같은 해에 통역관 양성을 위한 동문학을 설립하였다. 이어, 1886년에는 육영 공원을 세워 상류층 자제에게 근대 학문을 교육하였다.
갑오개혁 이후 반포된 교육 입국 조서의 정신에 따라 근대 교육 제도가 확립되면서 소학교와 사범 학교, 외국어 학교 등 각종 관립 학교가 설립되었다. 근대적 교육 제도에 따라 국민 소학 독본, 초등 본국 역사 등 새로운 교과서도 선보였다.
한편, 개신교 선교사들은 선교를 목적으로 사립 학교를 세워 근대 학문을 교육하였으며, 20세기 초 애국 계몽 운동가들도 교육 구국 운동의 일환으로 학교를 세워 근대 민족 교육을 실시하였다. 따라서, 사립 학교를 중심으로 교육 구국 운동이 벌어졌고, 민족 의식을 고취하는 교육 활동이 활발하였다.
국학 연구
조선 후기 실학의 전통에서 비롯된 국학 연구는 대한 제국 말기인 애국 계몽 운동 시기에 더욱 발전하였다. 특히, 국어와 국사를 연구하여 민족 의식을 높이고, 제국주의 침략에 맞서 민족 문화를 지키려 하였다.
국어 분야에서는 갑오개혁 이후 공문서가 국·한문 혼용으로 제도화되고, 학교 교육에서 국·한문체 교과서가 사용되면서 언문 일치의 문자 생활이 가능해졌다. 유길준의 서유견문도 국·한문 혼용체 보급에 기여하였다. 1907년에는 국문 연구소가 만들어져 주시경, 지석영 등의 주도로 국문의 정리와 국어의 이해 체계가 확립되기 시작하였다.
애국 계몽 운동 시기에 신채호, 박은식 등의 활약에 힘입어 근대 계몽 사학이 성립되었다. 이들은 민족 의식과 애국심을 키우고, 민족의 주체성을 세우고자 역사 연구를 활발히 전개하였다. 특히, 나라를 구한 위인의 전기를 써서 보급하고, 외국의 건국과 흥망의 역사서를 번역하여 민족의 독립 의지와 역사 의식을 높이려 하였다.
신채호는 대한 매일 신보에 ‘독사신론’을 연재하여 일본의 식민 사관에 대항할 수 있는 민족주의 사학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한편, 최남선, 박은식 등은 조선 광문회를 조직하여 실학자의 저서를 비롯한 고전을 다시 간행하여 보급하였다.
언론 기관의 발달
개항 이후 근대 인쇄술로 간행된 각종 신문과 출판물은 개화 사상과 애국 계몽 사상을 전파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우리 나라 최초의 신문은 1883년 박문국에서 간행한 한성 순보였다. 한성순보는 국내 소식과 함께 서양의 신문화를 소개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으나, 갑신정변의 실패로 폐간되었다.
1896년에 서재필이 창간한 독립 신문은 대중을 계몽하여 근대화를 촉진하려는 한글판과, 외국인에게 우리의 처지를 홍보하는 영문판으로 발행되었다.
국·한문 혼용체를 사용한 황성 신문은 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을 실어 을사조약을 비판하고 민족 의식을 고취하였다. 한글 보급에 크게 기여한 대한 매일 신보는 일제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 반대 운동, 국채 보상 운동 등을 주도하였다.
이 밖에, 한글 신문인 제국 신문, 국·한문 일간지인 천도교의 만세보 등도 국권 회복 운동을 지원하고 민족 의식을 높이는 데 앞장섰다.
일제는 반일 보도를 차단하기 위하여 신문에 대한 사전 검열을 시도하였고, 1907년에 신문지법을 만들어 자주 독립을 요구하던 민족 언론을 탄압하였다.
문예와 종교의 새 경향
19세기 후반에서 1910년까지의 문학은 근대화와 국권 수호의 요구가 절실했던 당시의 시대 정신을 반영해 새로운 근대 사상을 소개하거나 사회적 자각을 촉구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1908년을 전후해 최남선의 ‘해에게서 소년에게’라는 신체시와 신소설이 등장하여 근대 의식과 사회 변화를 반영하였다.
성경을 비롯하여 천로역정, 로빈슨 표류기, 걸리버 여행기 등이 번역되어 널리 읽혔다. 번역 문학은 외국 문화에 대한 동경을 초래하는 폐단도 있었지만, 근대 문학 발전에 이바지하였다.
한편, 예술계에도 많은 변화가 나타났다. 음악 부문에서는 서양 음악이 소개되었고, 서양식 악곡에 맞추어 부르는 창가가 유행하였다.
미술 부문에서는 화가들이 전문 직업인으로 성장하였고, 서양식 유화를 그리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전통 회화가 주종을 이루었으며, 서민층에서는 민화가 유행하였다.
연극 부문에서는 신극 운동이 일어나면서 한국 최초의 서양식 극장인 원각사가 세워졌다. 그러나 서민 사이에서는 판소리와 민속 가면극이 성행하였다. 특히, 판소리에서는 여러 명이 배역을 나누어 부르는 분창 형식이 유행하였고, 신재효는 판소리 이론 정립에 이바지하였다.
개항 이후 종교계에 나타난 가장 큰 변화는 서양 종교의 포교가 자유로워진 점이다. 천주교는 1886년 프랑스와 수교한 이후 선교의 자유를 얻어 포교 활동을 전개하였고, 개신교는 1880년대에 서양 선교사의 입국을 계기로 교세를 넓혀 갔다.
동학은 제3대 교주인 손병희 때 친일 세력을 내쫓고 천도교로 개편하면서 새로운 발전을 이룩하였다. 그리고 단군 신앙을 기반으로 대종교가 창시되어 항일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유교에서는 박은식이 유교 구신론을 제창하면서 근대 교육과 애국 계몽 운동을 전개하였고, 불교에서는 한용운이 조선 불교 유신론을 내세우며 불교의 혁신과 자주성 회복을 주장하였다.
2. 일제의 식민지 문화 정책과 국학 운동의 전개
일제의 민족 말살 정책
일제는 식민 통치를 합리화하고 지배를 원활하게 하기 위해 황국 신민화 정책에 따른 우민화 교육을 실시하였다. 일제의 숨은 뜻은 우리의 고유 문화를 말살하여 일본에 동화시키는 데에 있었다.
일제는 국권 강탈 후 조선교육령을 만들어 식민지 국민으로서 지켜야 할 의무를 강조하면서, 낮은 수준의 실업 교육을 통해 식민지 공업화에 필요한 노동력을 확보하려 하였다.
3·1 운동 이후 일제는 한국인의 반일 감정을 무마하기 위하여 교육 제도를 바꾸었다. 조선어를 필수 과목으로 규정하고, 경성 제국 대학도 설립하였다. 표면상 일본인 교육과 대등하게 보이도록 하였지만, 실질적으로 교육 차별은 여전하였다.
1930년대 만주 침략 이후에는 한국인을 침략 전쟁의 협조자로 만들려는 교육이 더욱 강화되었다. 내선 일체와 일선 동조론을 강조하여 조선어 교육을 폐지하였고, 한국사 왜곡을 심화시켰다.
언론 분야에도 식민지 통치 정책이 그대로 반영되었다. 1910년대에는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 신보를 제외한 대부분의 신문을 강제 폐간시켜 민족 언론을 탄압하였다. 3·1 운동 이후에는 문화 통치의 일환으로 1920년에 조선 일보, 동아 일보, 시사 신문의 일간지와 일부 잡지 발행을 허용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총독부는 신문에 보도할 기사의 통제를 계속하다가 1940년에 조선 일보와 동아 일보마저 폐간시켰다.
일제는 침략과 식민 지배를 정당화할 목적으로 우리의 역사를 철저히 왜곡하거나 말살하려고 하였다. 일제는 타율성, 정체성, 당파성을 주장하는 식민주의 사관을 앞세워 한국사의 자율성과 독창성을 부정하였다. 특히, 총독부가 설치한 조선사 편수회는 식민주의 사관을 토대로 조선사를 편찬하여 한국사 왜곡에 앞장섰다.
종교 활동 역시 총독부의 철저한 탄압을 받았다. 독립 운동가들이 민족 정신을 강조하는 종교 단체에 가입하여 독립 운동을 전개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일제는 1930년대 후반 이후 대륙 침략을 본격화하면서 신사 참배를 강요하였으며, 이에 저항하는 종교 교단과 지도자들을 박해하였다.
국어 연구와 한글의 보급
3·1 운동 이후 임경재, 장지영 등의 주도로 조선어 연구회가 창립(1921)되면서 국어 연구가 본격화되었다. 이들은 한글 연구와 더불어 강습회를 열어 한글 보급에 노력하였다. 또, 한글 기념일인 ‘가갸날’을 제정하여 우리말쓰기를 권장하였고, ‘한글’이라는 잡지를 간행하여 한글 대중화에 이바지하였다.
1931년에 조선어 연구회가 조선어 학회로 확대 개편되면서 더욱 활발한 한글 보급 활동이 전개되었다. 조선어 학회의 가장 큰 성과는 한글 맞춤법 통일안과 표준어의 제정이었다. 이를 바탕으로 조선어 학회는 우리말 큰 사전을 편찬하려 하였지만, 일제의 방해로 중단되고 말았다.
일제는 조선어 학회를 독립 운동 단체로 간주하여 관련된 인사들을 체포하고, 학회를 강제로 해산시켰다. 이를 조선어 학회 사건(1942)이라 한다.
한국사 연구의 발전
우리 나라의 사학자들은 일제의 식민주의 사학에 대항하여 민족사를 수호하고 민족의 독립을 달성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 과정에서 다양한 역사 연구 방법론이 체계화되어 민족주의 사학, 사회 경제 사학, 실증주의 사학이 대두하였다.
민족주의 사학자들은 한국사의 발전 주체가 우리 민족임을 강조하면서 식민주의 사학의 허구성을 밝히는 데 힘을 기울였다.
박은식은 대한 민국 임시 정부에 참여하면서 한국 통사와 한국 독립 운동 지혈사를 저술하여 일제의 불법적인 침략을 규탄하였다. 신채호는 조선 상고사와 조선사 연구초를 지어 우리 고대 문화의 우수성과 독자성을 강조하여 식민주의 사관을 비판하였다. 정인보는 신채호의 민족주의 사관을 계승하고, 문일평, 안재홍, 남궁억 등도 민족의 자주성과 독창성을 조명하여 일제의 식민주의 사관을 비판하였다.
1930년대에는 백남운 등에 의해 사회 경제사학이 대두되었다. 이들은 한국사가 세계사의 보편적 발전 법칙에 입각하여 발전하였음을 강조하면서 식민주의 사관의 정체성 이론을 반박하였다.
한국 학자들이 세운 국학 연구 단체인 진단 학회를 중심으로 실증주의 사학도 발달하였다.
이 밖에, 손진태 등에 의한 민속학 연구도 활기를 띠었으며, 전형필은 우리 문화재의 보존과 국외 유출을 막는 데 힘썼다.
민족 교육 진흥 운동
일제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식민지 교육에 맞서 민족 교육 진흥 운동이 일어나면서 ‘조선인 본위의 교육’이 시도되었다.
1920년대에는 조선 여자 교육회와 조선 교육회가 성립되어 교육 계몽 활동을 전개하였다. 사회 지도층 인사들은 국민을 대상으로 한 모금 활동을 통해 최고 교육 기관인 대학을 세우자는 운동도 일어났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성공하지 못하였다.
대한 제국 시기 이래 민족 교육 기관으로 사립 학교, 개량 서당 등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으로 이들의 수가 점차 줄어들면서 1920년대 이후에는 야학이 민족 교육에 이바지하였다. 야학은 일제의 식민지 교육 기관과는 달리, 우리 글과 말, 역사를 교육하여 항일 애국 사상을 불어넣었다. 그러나 만주 사변 이후 민족 말살 정책이 시행되면서 야학과 개량 서당 등 민족 교육 기관은 활동이 위축되었다.
한편, 일제의 교육 정책은 식민지 통치에 필요한 낮은 수준의 실업 인력을 만드는 데 주안점을 두었기 때문에, 우리 민족은 선진 근대 과학 기술을 습득할 수 없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1924년에 발명 학회가 창설되었고, 이후 과학 조선의 간행과 과학의 날 제정 등을 통하여 지속적으로 과학 지식을 보급하였다. 이와 같은 과학 진흥 운동은 우리 민족에게 과학 기술 진흥의 필요성을 일깨우는 데 이바지하였다.
종교 활동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3·1 운동에 참여하였던 종교 단체들은 다양한 민족 운동과 사회 운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하였다.
3·1 운동을 주도하였던 천도교는 잡지를 발간하는 등 문화 운동을 표방한 민족 운동을 꾸준히 전개하였다. 민족주의 성격이 강한 대종교는 일제의 심한 탄압을 피해 근거지를 만주로 이동하여 민족 교육 진흥 운동을 전개하였을 뿐만 아니라, 중광단과 북로 군정서군을 결성하여 항일 무장 투쟁을 벌였다.
기독교는 1930년대에 일제의 신사 참배 강요를 거부하여 많은 신자가 투옥되거나 학교가 폐쇄되기도 하였다. 천주교는 민중 계몽 운동에 주력하였으며, 일부 신자는 만주에서 무장 항일 운동 단체인 의민단을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불교는 총독부의 간섭에 맞서 조선 불교 유신회를 중심으로 불교계 정화 운동과 항일 운동을 전개하였다. 한편, 원불교는 불교의 생활화와 현대화를 주장하면서 민족의 자립 정신 고취와 새 생활 운동을 전개하였다.
문학과 예술 활동
일제 강점기의 문학과 예술은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민족적 자존심을 회복하고 봉건의 굴레에서 벗어나야 하는 시대적 과제를 가지고 있었다.
1910년대 문학계에는 이광수 등의 활동으로 근대 문학의 기틀이 마련되었다. 3·1 운동 이후에는 동인지를 중심으로 예술성만 추구하고 현실 문제에 대해서는 소극적이고 도피적인 경향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반면에, 동인 활동에 영향을 받지 않은 김소월은 민족 정서를 바탕으로 시대 의식을 반영하였다. 한용운 역시 항일 운동의 민족주의 노선을 선명하게 표현하였다.
1920년대 중반 이후 사회주의의 영향 아래 식민지 현실을 고발하고 계급 의식을 고취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는 신경향파 문학이 등장하였다. 이에 반발하여 예술성과 작품성을 강조하는 순수 문학 경향으로 대두하였다.
대륙 침략 이후 일제는 우리 문학 활동을 본격적으로 탄압하면서 군국주의 찬양을 강요하였다. 일부 문인은 일제에 협력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이육사, 윤동주 같은 저항 시인의 활동도 활발하였다.
음악계에서는 홍난파와 현제명 등의 작품이 우리 민족의 정서와 잘 어울려 많은 사랑을 받았다. 한편, 국외에서 활동하던 안익태는 애국가 합창을 넣은 ‘한국 환상곡’을 작곡하여 우리 민족의 독립 의지를 표현하였다.
미술계에서는 전통 회화의 창조적 발전이 이루어졌고, 서양식 유화가 새로운 미술 장르로 자리잡았다. 일제의 수탈을 비판하는 풍자화도 등장하였다.
연극계에서는 3·1 운동 이후 근대 연극이 도입되어 극예술 연구회를 중심으로 민족적 비극을 무대 예술화하였다. 그러나 중·일 전쟁 이후 일제의 탄압과 강요로 일제의 군국주의를 찬양하는 연극 외에는 공연할 수 없었다.
영화계에서는 나운규가 강렬한 민족 의식을 반영한 영화를 만들었다. 그가 만든 아리랑(1926)은 일제 강점기 민족의 아픔을 그린 작품이다.
1930년대 이후 일제는 교묘한 수단과 방법으로 예술 활동을 통제하고 탄압하였다. 이 때, 일부 예술인이 변절하여 친일 활동을 전개한 사실은 광복 후 예술계가 극복해야 할 과제가 되었다.
3. 현대 문화의 성장과 발전
한국학 연구의 발전
광복을 맞으면서 우리 나라의 학술계는 자유로운 연구와 교육 활동을 바탕으로 일제 식민지 잔재를 일소하고 단절된 전통 문화를 복원하여 현대 문화와 조화를 이루는 노력을 기울였다.
1950년대 중반 이후 역사학회, 국어 국문학회, 한국 철학회 등이 창립되어 한국학에 관련된 많은 연구 업적이 축적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한글 학회가 일제에 의해 강제로 중단되었던 우리말 큰 사전을 완간해 국어 발전이 이바지하였다.
1960년대 이후로는 새롭게 창립된 학회와 대학, 연구 기관 등을 중심으로 한국학 분야의 연구 활동이 눈에 띄게 활발해졌다. 한편, 식민 문화의 극복과 남북 통일이 주요 주제로 부각되면서 한국학 연구는 민족주의적 성격이 강화되었다.
서구 문화의 수용과 전통 문화의 계승
일제의 탄압과 왜곡 속에서 파괴되었던 우리의 전통 문화는 서구 문화가 본격적으로 유입되자 더욱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서구 문화의 수용은 국제 사회에 대한 이해와 근대적 사고 형성에 기여하였다. 반면에, 무비판적인 수용으로 전통 문화의 소외와 물질 위주의 향락 문화를 조장하는 폐단도 나타났다.
1970년대 이후에는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였던 서구 문화에 대한 반성이 일어나면서 전통 문화를 되살리는 노력이 펼쳐졌다. 대학가에서는 탈춤과 사물놀이가 유행하였으며, 사회 전반에 걸쳐 전통 문화의 대중화가 확산되었다.
이러한 노력은 전통 문화와 서구 문화를 접목해 자기화하려는 움직임으로 발전하였다.
언론 활동의 발달
광복 이후 언론의 양적인 팽창은 거듭되고 있다. 신문과 잡지뿐만 아니라 라디오와 텔레비전 방송도 급격하게 팽창하였고, 케이블 방송과 인터넷 신문이나 방송도 등장하였다. 언론의 확대는 정보의 독점을 막고 여론의 힘을 강화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
역대 권위주의적 정부들은 언론을 장악해서 통제하려 하였다. 박정희 정부와 전두환 정부는 강제로 언론을 통폐합하고 비판적인 언론인들을 구속하거나 해직시키는 등 직접적인 언론 탄압을 강행하였다. 특히, 전두환 정부는 보도 지침을 통해 언론의 보도 내용까지 강제로 규정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87년 6월 민주 항쟁을 거치면서 언론에 대한 정부의 통제와 간섭은 줄어들고 언론의 자유는 확대되었다.
1990년대 이후에는 언론의 상업주의 경향 및 편향적인 정보의 취사선택으로 인해 언론의 정화와 사회적 책임을 요구하는 여론이 높아지고 있다. 한편, 인터넷 매체가 기존 언론에 대한 대안으로 제시되고 있지만, 여론 형성 과정에서 나타난 익명성에 의한 부정적 문제점도 지적되고 있다.
교육의 확대
광복 이후 미국식 교육 제도의 영향으로 6·3·3 학제가 도입되어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 교육 이념으로는 홍익인간이 채택되었으며, 민주 시민의 양성을 교육 목표로 확립되었다.
또, 광복 이후 대학을 비롯한 고등 교육 기관이 설립되고 중등 교육 기관도 크게 늘어났다. 현재에는 중학교까지 사실상 의무 교육이 실시되어 교육 인구가 급속히 늘어나고 문맹률은 크게 감소하였다.
6·25 전쟁 중에도 피난지의 천막 학교 등에서 수업이 진행될 정도로 높은 교육열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1950년대 후반부터 해외 유학이나 연수를 마치고 돌아온 전문가와 기업인들을 중심으로 고도 성장을 이루었다. 이들은 1960년대 이후 경제와 사회 발전에 중요한 밑바탕이 되었다.
높은 교육열은 경제 성장의 바탕이 되었다는 긍정적인 측면이 많았지만, 사회적 부작용도 적지 않았다. 일류 학교 진학을 위한 과열 경쟁으로 과외 열풍과 학교 교육의 파행이라는 사회적 문제를 일으켰다. 이에 따라, 교육의 평등화를 위한 무시험 진학 제도가 도입되고, 1980년대 이후에는 고등 교육의 대중화를 위하여 대학이 많이 세워졌다.
대중 문화의 성장
미군정기와 6·25 전쟁을 겪으면서 미국의 대중 문화가 급속히 흘러들어와 미국식 춤과 노래가 크게 유행하였다. 한편, 우리 나라의 대중 문화는 경제 발전 및 대중 전달 매체의 보급이 확산되는 196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하였다.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텔레비전으로 방영된 가요, 드라마, 코미디가 대중 문화의 중심이 되었고, 청소년층이 본격적으로 대중 문화 소비의 주인공으로 대두하였다.
1980년대 이후 정치적 민주화와 사회 경제적 평등의 확대를 지향하는 민중 문화 활동이 대중 문화에 영향을 끼치기도 하였다. 1990년대에 들어 영화 산업은 미국 할리우드 대자본의 물량 공세에 맞서 한국적 특성이 담긴 영화를 제작하여 국내는 물론, 세계 영화계에서 각광을 받고 있다.
다양하게 발전한 우리의 대중 문화는 최근 ‘한류’라는 이름으로 일본, 중국, 동남 아시아 등지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대중 가요와 영화에서 시작된 한류는 우리의 대중 문화뿐만 아니라 전통 문화도 다른 나라에 전파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이처럼, 대중 문화는 시장이 확대되면서 상업적 이익만이 아니라, 국가의 이미지를 높이는 데에도 큰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문학과 예술, 종교의 발달
광복 직후 문화계는 좌·우익의 이념 대립과 남북 분단으로 인하여 갈등이 나타났으며, 전통 문화의 계승도 활발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시간의 흐름에 따라 여러 분야에서 다양한 활동이 전개되었다.
문학에서는 6·25 전쟁 이후 서정성을 중시하는 순수 문학이, 1960년대에는 민족 문학이 대두하였다. 1970년대에 접어들어 민족 문학이 확산되면서 문학의 장르가 다양해지고 독자층이 넓어졌다. 특히, 민족 문학 운동은 1980년대 후반 민주화의 진전과 발맞추어 더욱 다양하게 확대되었다.
음악, 미술을 중심으로 활동의 폭도 점차 넓어졌으며, 1980년대에 들어서는 국악 등 전통 문화에 대한 이해도 깊어졌다. 그리고 노동자, 농민 및 통일 문제 등 사회 현실에 대한 문제 인식이 심화되면서 민중 예술 활동이 활발해졌다. 이러한 경향은 다양한 문화 예술 발전의 토대가 되었다.
광복 직후 종교계는 분단과 전쟁으로 불안해진 대중에게 정신적 안식처를 제공하였다. 전쟁 이후 사회가 안정되면서 종교계는 양적 팽창을 하는 과정에서 분열하여 새로운 종파가 생겨났다. 반면, 1970년대에는 일부 종교 지도자가 박정희 정부에 맞서 민주화 운동에 앞장서거나 노동, 농민, 통일 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기도 하였다. 1990년 이후 종교계는 시민 운동 등에 다양하게 참여하면서 포교 활동은 물론 갈등과 투쟁을 지양하고 사랑과 화해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체육 활동의 성장
광복 이후 국민을 단합시키고, 우리 나라를 세계에 알리는 데 큰 기여를 한 것은 체육 활동이었다. 광복 이후인 1947년에는 제51회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서 우리 나라 선수가 우승함으로써 신생 독립 국가의 위상을 국내외에 알렸다.
1960년대에 들어 박정희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체육 활동은 활기를 띠었다. 정부는 태릉 선수촌을 건립하는 등 엘리트 체육에 체계적인 지원을 하였으며, 이에 힘입어 몬트리올 올핌픽(1976) 레슬링 종목에서 광복 이후 최초로 금메달을 획득하였다.
이후 제10회 아시아 경기 대회(1986)와 제24회 서울 올림픽 대회(1988)를 성공적으로 개최하여 우리 나라의 발전상을 전세계에 알렸다. 이러한 노력으로 시드니 올림픽 대회(2000)에서는 태권도가 공식 종목으로 채택되었다.
2002년에는 우리 나라가 일본과 공동으로 월드컵 축구 대회를 개최하여 한국에 대한 세계의 인식을 새롭게 하였다. 한국 축구는 4강 진출의 성과를 올렸고, 거리 응원이라는 세계에 자랑할 만한 응원 문화도 만들어 냈다.
국민 소득이 증가하고 삶의 질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국가 주도의 엘리트 체육 정책에 대한 반성이 나타나고 있다. 현재에는 국민 건강과 삶의 질 향상에 기여하는 사회 체육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이에 대한 지원도 활발해지고 있다.
한편, 체육 활동은 남북한을 연결시키는 교량 역할도 담당하였다. 남과 북을 오가는 통일 축구(1990)가 열린 이후, 일본 지바 세계 탁구 선수권 대회(1991)에서는 단일 팀을 구성하여 우승하였다. 시드니 올림픽 대회에서는 남북한이 한반도기를 들고 함께 입장하여 한 민족임을 세계에 알렸다.
과학 기술의 놀라운 발전
광복 이후 한동안 과학 기술 분야는 답보 상태였으나, 정부의 지속적인 과학 기술 육성책에 힘입어 비약적인 발전을 하였다. 1950년대 후반에 원자력 연구소가 만들어지고, 1966년에 한국 과학 기술 연구소(KIST)가 설립되면서 본격적인 과학 기술 개발이 시작되었다.
정부는 장기적인 과학 기술 발전 계획을 수립하여 시행하였으며, 외국에 유치한 재능 있는 과학자들을 유치하는 등 많은 지원을 하였다. 1960년대 후반에는 과학 기술처가 창설되어 과학 기술 진흥을 선도하였다.
정부와 민간의 꾸준한 과학 기술 투자를 바탕으로 여러 과학 분야에서 큰 발전을 가져왔다. 특히, 통신, 교통, 컴퓨터, 반도체 등의 분야에서는 초고속 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우주 항공 산업에서는 다목적 실용 위성 아리랑호를 비롯하여 무궁화 3호까지 잇따라 발사에 성공하여 현재 상용 서비스를 하고 있다. 군사 기술에 있어서도 외국 의존을 벗어나 독자적인 기술 개발이 이루어지고 있다. 현재는 군사 항공 분야에서 독자 기술로 초음속 전투 연습기를 만들어 낼 정도로 큰 발전을 보이고 있다.
전자 산업에서는 반도체 등 여러 분야에서 세계 최고의 기술력을 가지고 있다. 특히, 플래시 메모리 분야에서는 신제품을 개발할 때마다 항상 세계 최초 발명이라고 할 정도로 기술을 주도하고 있다. 이러한 놀라운 과학 기술 발전에 힘입어 무역 규모가 확대되는 등 빠른 경제 성장을 하였고, 생활 수준도 크게 향상되었다.
이러한 과학 기술의 발전에 있어서 해결해야 할 문제점도 있다. 우선, 경제 성장 과정에서 정부와 민간 기업이 소외시켰던 기초 학문에 대한 적극적인 투자가 이루어져야 하며, 유전 공학 분야에서는 생명에 관한 윤리적 갈등을 풀어야 한다. 과학 기술도 인간 유리 및 자연 환경과 조화를 이루면서 발전해야 하기 때문이다.
북한 문화와 예술의 이해
북한의 문화와 예술은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목적보다는 대중에게 공산주의 혁명 정신을 가르치는 당의 무기로서 발전하였다. 또, 김일성 주체 사상에 바탕을 둔 문예 이론을 철저하게 지켰다.
문학에서는 주체 문예 이론이 대두한 1970년대부터 계급 혁명을 찬양하는 피바다, 꽃 파는 처녀 등의 혁명 투쟁 연극을 고쳐서 소설화하였다. 또, 김일성 부자를 찬양하는 문학 외에, 남녀 애정을 주제로 하는 청춘 송가 같은 소설이 발표되기도 하였다.
음악에 있어서는 민족 음악을 표방하였지만, 당과 김일성 부자를 찬양하는 노래가 대부분이었다. 한편, 남북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우리 예술인의 평양 공연이 이루어지고, 남한의 노래도 알려지고 있다.
북한에서는 다른 어느 예술 장르보다 영화가 중시되고 있다. 영화가 대중을 상대로 선전하는 데에 호소력과 전파력이 가장 강하여 정치 선전에 유리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 밖에, 사회주의 국가의 특징으로 집단 체조, 카드 섹션, 서커스(교예) 등의 집단 문화가 발전하였다.
북한은 우리의 표준어와 구분되는 문화어를 새로 만들고, 1966년부터 말다듬기 운동을 전개하여 조선말 대사전을 편찬하였다. 그러나 분단의 장기화로 인하여 남북한 언어의 이질화가 심화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