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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 無 遠 慮 難 成 大 業
인 무 원 려 난 성 대 업
- 사람이 멀리 생각지 못하면
큰일을 이루기 어렵다.
* 멀리 장래를 내다보지 않고, 눈앞에 닥친 일에만 몰두
하면 우환을 겪게 된다는 말과 같다.[논어]영공(靈公)
편에 "사람은 멀리 생각지않으면(人無遠盧)반드시 가까
운 근심이 있느니라(必有近優)"고한 공자의 글귀를 인
용하고 있다. 주자(朱子)는 이를 "생각이 천리 밖에 있지
않으면(盧不在千里之外) 걱정이 책상아래에 있게 된다.
(則患在凡席之下矣)"고 해석하고 있다. 안의사는 부친
별세후 1906년 봄 가족을 이끌고 진남포로 이주, 조국
독립을 위한 장기적인 계획에 착수한다. 선비와 국민이
응하여, 나라를 일으킨다는 뜻의 사흥,민흥,국흥 (士興,
民興,國興)을 따서, 삼흥(三興)학교를설립하게된다.
교육사업을 통한 구국운동에 뛰어든것이다. 안의사는 또
천주교계 학교로 해체될 형편에 있던 돈의학교를 인수,
교육사업을 확장해 박차를 가한다. 1907년 가을 평안남
북도와 황해도 등 3도의 60여개교 5천여명이 참가한 학
과 및 술과 연합운동대회에서 돈의학교가 1등한 사실은
특기할 만하다. 교육을 통한 구국 -계몽 운동에 뛰어든
안의사는 훗날 이들이 조국독립의 전사가 되기를 꿈꾸었
던 것이다. 안의사는 사리사욕에 급급하지 않고,사재까
지 털어 교육사업을 벌였지만 조국의 목숨이 경각에 달
리자, 결국 의병투쟁과 하얼빈역의 거사로 치닫게 된다.
현재 숭실대학교에 소장되어 있다. 보물 제569-8호
丈夫雖死心如鐵 義士臨危氣似雲
장 부 수 사 심 여 철 의 사 임 위 기 사 운
- 장부가 비록 죽을지라도 마음은 무쇠와 같고
의사는 위태로움에 이를지라도 기운이 구름같도다.
*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당당한 자세와 굳센 기개가
드러난 글이다. 오른쪽 윗부분에 '증 맹경시(贈猛警視)'
라고 쓰여 있는 점으로 보아 "여순(旅順)" 감옥을 찾아
온 일본인 경찰관에게 써 준 것으로 보인다.사형이 확정
된 후에도 안중근 의사는 일본인들에게 늠름한 자세를
끝까지 지겼다. 사형 집행 직전에도'동양평화론'을 완성
하지 못한것만 안타까워했을 뿐, 더 살고 싶어 하는 모습
은 보이지 않았다. 안중근 의사의 이런 굳건한 모습에
감동한 때문인지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는 붓글씨는 대
부분 당시 안중근 의사를 지켜보았거나 주위를 감시하던
일본인들이 보관해 오고 있다. 지금까지 국내에 들어온
붓글씨 중 많은 수가 일본인들이 기증한 것들이란 점만
보아도, 일본인들이 일제의 감시와 통제속에서도 안중근
의사의 붓글씨를 가보로 보관하여 대를 이어 물려 오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숭실대학교에 간직되어 있다.
보물 제569-12호.
志 士 仁 人 殺 身 成 仁
지 사 인 인 살 신 성 인
- 지사와 어진 사람은 몸을 죽여 인 (仁)을 이룩한다.
* 안의사는 유가사상의 4가지 덕목중 의(義)를 가장 중
시했지만, 인(仁),예(禮),지((智)에 관한 글도 남겼다.
이는 바로 인(仁)의 성취에 대한 안의사의 심회가 담긴
글이다. [논어] 영공(靈公)편에서 인용된 이 글귀는 "지
사와 인자(志士仁人)는 살기 위해 인을 해치는 일이없고
(無求生以害仁) 몸을 죽여 인을 이룩한다(有殺身成仁)"
는의미다. 여기서의 인(仁)은 넓은 의미로 의(義)와 상
통한다. 맹자도 "목숨을 버리더라도 의를 취하라"(捨生
取義)했고, 고자(告子)는 "삶도 또한 내가 바라는 것이
며, 의도 역시 내가 바라는 바이지만, 두 가지를 겸할 수
없다면 삶을 버리고 의를 취해야 한다" 고 했다. 안의사
에게 인(仁)은 곧 의 (義)와 같은 의미였다고 할수 있다.
현재 안의사 기념관에 사진이 전시되고 있고, 광장 옥석
에 조각하여 살신성인[殺身成仁]의 애국정신을 추모 하
고있다.
見 利 思 義 見 危 授 命
견 리 사 의 견 위 수 명
- 이익을 보거든 정의를 생각하고
위태로움을 보거든 목숨을 바쳐라.
* 안중근 의사가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며 뤼순 감옥에서
쓴 이 글귀는 '논어'제14편 헌문(憲問)편에 나온다. 자로
(子路)가 인간완성에 대해 묻자 공자가" 지혜,청렴,무욕,
용감, 예능을 두루 갖추고 예약으로 교양을 높여야 한다.
그러나 오늘에는 이익을 보면 정의를 생각하고 (見利思
義), 위태로움을 보면 목숨을 바칠 줄 알고(見危授命),
오랜 약속일지라도 전날의 자기 말을 잊지 않고 실천한
다면(久要不忘平生之言) 역시 인간 완성이라고 할 수 있
다."고 답한 구절이다. 바꾸어 말하면 이 글귀는 '정당하
게 얻은 부귀가 아니면 취하지 않는다',' 의를 보고 행하
지 않는 것은 용감함이 아니다'는 뜻을담고 있다.
현재 동아 대학교간직되어 있다. 보물 제 569-6호.
國 家 安 危 勞 心 焦 思
국 가 안 위 노 심 초 사
- 국가의 안위를 걱정하고 애태운다.
* 1993년 1월 16일 보물 제1150호로 지정된 '나라 위
해 몸 바침을 군인의 본분이다(爲國獻身軍人本分)' 와
이 붓글씨는 안중근 의사를 존경한 당시의 일본인의 후
손들이 자진해서 기증한 것들이다. 당시 여순 법원의 검
찰관이었던 야스오카 세이시로가 친절하게 대해 준데 대
한 보답으로 안중근 의사가 손수 써 준 이 붓글씨는, 그
뒤에 야스오카의 맏딸 우에노 도시코가 감추어 보관해
오던 것을 국제 한국 연구원 최서면 원장이 헌납받아 19
76년 2월 11일 안중근 의사 기념관에 기증했다. 이 붓글
씨의 오른쪽 윗부분에는 '야스오카 검찰관에게 드림' 그
리고 아래쪽에는 '안중근 삼가 절함'이라고 쓰여있다.
보물 1150-1호.
五老峯爲筆 靑天一丈紙
三湘作硯池 寫我腹中詩
오 로 봉 위 필 청 천 일 장 지
삼 상 작 연 지 사 아 복 중 시
오로봉(五老峯)으로 붓을 삼고
푸른 하늘 한 장 종이 삼아
삼상(三湘)의 물로 먹을 갈아
뱃속에 담긴 시를쓰련다.
* 장부의 기개가 흘러넘치는 구절이다. 중국시인 이백의
오언절구로 전해져온다. '산을 뽑아서 하늘을 종이로 삼
아 가슴에 담긴 말을 쓰고 싶다'는 표현은 문체상의 기교
보다 안의사의 호연지기를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조국
을 등지고, 이역만리에서 풍찬노숙(風餐露宿)하며,초근
목피로 연명하다가 구사일생의 고비를 넘기기도 한 안의
사가 숱한 시련에도 굴하지 않고, 구국거사를 꾀할 수 있
었던 것도 바로 이런 웅혼(雄渾)한 기상이 밑바탕이 됐
다고 할 수 있다. 안의사의 호방한 기질은 아버지 안태훈
진사로부터 물려받은 것으로 짐작된다. 태훈진사는 정의
(正義)를 가훈으로 삼고, 매사에 의리를 존중했다. 또 도
량이 넓어 많은 사람들을 표용했는데 동학 농민 전쟁 때
19세의 나이로 해주공락작전에 선봉으로 뛰어든 백범
김구선생에게 전쟁후 거처를 마련해준 사실은 유명한 일
화이다. 안의사는 청소년시절 가장 즐기던 것으로 첫째
친구와 의를 맺는 것이요 (親友結義), 둘째 술마시고 노
래하고 춤추는 것이요(飮酒歌舞), 셋째 총으로 사냥하는
것이요(銃砲狩獵), 넷째 날랜 말을 타고 달리는 것이다.
(騎馳駿馬)라고 했듯이 의리와 호방함을 갖춘 무사적 기
질의 소유자였다. 현재 이도영씨가 소장하고 있다.
보물 제569-9호.
思君千理 望眼欲穿
以表寸誠 幸勿負情
사군천리 암안욕천 이표촌성 행물부정
나라를 걱정하며 천 리 밖에 나와
당신을 향해 바라보니 눈이 뚫어질것 같으오
나의 이 작은 정성을 바치오니
행여나 이 정을 버리지 마소서
*나라를 걱정하는 안중근 의사의 마음을 나타낸 글이다.
쓰러져 가는 조국과 황제의 슬픈운명을 생각하면서 조국
과민족을 위해 이 한 몸 바칠 각오가 되어 있음을 보여주
는 비장한 글로, 송강(松江) 정철(鄭澈)의 가사 '사미인
곡(思美人曲)'에서 임금에 대한 간절한 충절을 한 여인
이 지아비를 사모하는 마음에 비유하여 표현한 것과 같
다. 현재 오만기 씨가 간직하고 있으며, 사본이 안중근
의사 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 보물 제569-11호.
爲 國 獻 身 軍 人 本 分
위 국 헌 신 군 인 본 분
- 나라위해 몸 바침은 군인의 본분이다.
* 이 글은 안의사가 여순감옥에서 공판정을 오갈때마다
경호를 맡으면서 안의사의 사상과 인격에 감복,안의사를
스승으로 받들었던 간수 일본군 헌병 지바도시치(千葉
十七)에게 써준 것으로 전한다. 지바는 안의사가 순국한
뒤 제대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센다이시에서 철도원으로
근무하면서 안의사의 반명함판 사진과 유묵을 모셔놓고
하루도 빠짐없이 향배를 드렸다. 그가 죽고 난 후에도 부
인이 이 일을 대신하다 부인마저 사망한 뒤에는 양녀 구
니꼬(三浦)인 조카딸이 그 뒤를 있다. 이를 알게된 동경
국제 한국 연구원 최서면 원장이 10년에 걸친 교섭으로
이를 헌납받아 80년 8월 23일 안의사 기념관에 기증했
다. 보물 제1150-2호.
庸 工 難 用 連 抱 奇 材
용 공 난 용 연 포 기 재
- 서투른 목수는 아름드리 큰 재목을 쓰기 어렵다.
* 큰 인물이 아니면 뛰어난 인재를 기용하지 못 한다는
말의 다른 표현이다. 자사(子思)가 위왕에게 "열아름의
가래나무는 썩은 부분이 있더라도 훌륭한 목수라면 버리
지 않는다"고 한 내용과 일치한다. [통감]에 나온다.
안의사는 인재양성의 필요성 뿐 아니라 지도자의 중요성
을 강조했다. 안의사는 나라를 이끌 지도자를 육성하기
위해 대학 설립을 구상한 바 있다.대학 설립을 추진하던
안의사는 홍석구 신부와 상의하고 서울 천주 교구의 민
(본명 뮈텔) 주교를 비롯한 천주교 관계자들을 만난다.
그러나 이들이 안의사의 제의를 "한국인이 학문을 하게
되면 믿음이 좋지 않게된다"는 이유로 일언지하에 거절
함으로써 안의사의 대학설립계획은 실현되지 못하고 말
았다. 이 과정에서 안의사는 자신의 민족양심과 외국인
신부들의종교관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음을 확인한다.
이후 안의사는 천주교의 진리를 믿지만 외국인 신부들의
한국인에 대한 양심은 믿을 것이 못된다고 판단, 수개월
간 배우던 프랑스어 학습도 중단하게 된다. 처음에는 견
문을 넓히기 위해 외국어를 배웠지만 이런 일이 있고 난
후 안의사는 외국어를 배우는일이 외국의 앞잡이를 만든
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이 유묵은 불의를 보면 참지 못
하고 구국운동에 앞장선 안의사의 지도자관이 잘 나타
난 구절이라 할 수 있다. 현재 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
다. 보물 제569-7호.
貧 與 賤 人 之 所 惡 者 也
빈 여 천 인 지 소 악 자 야
-빈한과 천대는 그 누구도 싫어하는 것이니라.
* 안의사께서 기거하시던 여순감옥 두 평 정도의 비좁은
감방 출입문 좌측 문기둥에 걸려있던 길이 70cm 가로
14cm가량의 현판에 쓰여진 글로서 안의사의 나라와 백
성을 다스리는 철학과 사상을 간결하게 표시한 글이다.
이 평범한 진리를 우리 지도층사회의 생활신조로 정착되
어야만 이땅에 참다운 복지사회가 실현되어 건강한 선진
국가로서 민족의 비원인 조국의 평화통일도 이룩될 수
있음을 계시하시었다.
第 一 江 山
제 일 강 산
* 가로 96.6cm, 세로 38.6cm 크기로 삼천리 금수강산,
한반도에 대한 사랑, 조국애를 나타낸 글이다. 원본은
고 김양선 목사가 숭실대 기독박물관에 기증했다.
보물 569-14호
안중근의사 유묵(보물 제569의 16호) -
◈ 지정년월일: 1972년 8월 16일
◈ 소 재 지: 부산광역시 중구 대청동1가 22번지
◈ 시 대: 한말(1910년)
안중근의사가 남긴 200여점의 글씨 가운데 20점이 보물 제569호로 일괄지정되어 있는데 그 중의 한점이다. 글
씨는 명주 바탕에 해서로 [孤幕 孤於 自恃]의 6자를 2자씩 3줄로 쓴 것인데, [외로움이란 자신을 과신하는 것
보다 더 외로운것이 없다]는 뜻이다. 바꿔 말한다면 자시(自恃, 자신을 믿는 것)가 지나치면 다른사람의 좋은
말을 듣지 못하여 외롭게 된다는 경구인데, 중국 진나라 말기의 황석공 이란 사람이 쓴 소서(素書)라는 병법
책에 보이는 말이다. 여기에서도 안중근의사의 정신수양과 한학에 대한 깊은 소양을 엿볼 수 있다.
이 글씨는 큰일을 성취하고 최후를 앞에 둔 애국지사의 충혼과 강인한 정신을 활달한 필치로 나타낸 것이라
하겠다. 그는 글씨에 뛰어난 많은 유필을 남겼으며, 수감 중에 당시의 역사적 현실을 정확히 분석한 동양평화
론을 옥중에서 집필하였다.
참고문헌
1.국내 석박사 학위 논문(국회도서관 자료 참고)
논문명/저자명 대학 학위년도
청구기호
학위구분
1 신앙인 안중근과 그의 의거에 대한 교회의 이해 / 이중기 부산가톨릭대 대학원 1999 282.51 ㅇ878ㅅ 학위논문(석사)
2 安重根에 관한 一硏究 : 國權回復運動과의 關聯에서 / 김갑득 1975 320.92 ㄱ498ㅇ 학위논문(석사)
3 安重根연구 / 백기인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학대학원 1994 951.61 ㅂ393ㅇ 학위논문(석사)
4 安重根의 교육사상 연구 / 오태효 중앙대 교육대학원 1995 370.1 ㅇ338ㅇ 학위논문(석사)
5 安重根의 生涯와 思想에 대한 一考 : 그의 君主觀과 東洋平和論을 중심으로 / 신운용 한국외국어대 대학원 1993 320.01 ㅅ577ㅇ 학위논문(석사)
2. 국내 안중근 관련 단행본
서명/저자명 발행자 발행년도 청구기호 소장위치
1 (亞洲第一義俠)安重根 / 國家報勳處 국가보훈처 1995 951.61ㄱ427ㅎ 1층대출대
2 (愛國衷情)安重根義士 : 義士의 傳記, 裁判速記錄, 無罪論 / 崔利權 編譯 법경출판사 1990 320.92ㅇ174ㅊ 1층대출대
3 (愛國衷情)安重根義士 : 義士의 傳記, 裁判速記錄, 無罪論 / 崔利權 編譯 법경출판사 1990 DS 320.92ㅇ174ㅊ 1층대출대
4 21세기와 동양평화론 / 國家報勳處, 光復會 국가보훈처 1996 951.61092ㄱ383ㅇ 1층대출대
5 わが心の安重根 : 千葉十七․合掌の生涯 / 齋藤泰彦 著 五月書房 1994 320.92ㅇ174ㅅ 1층대출대
6 광야의 열사, 안중근 / 佐木隆三 저; 양억관 역 고려원 1993 951.6ㅅ145ㅇ 1층대출대
7 근대한국과 한국인 / 신용하 한길사 1985 951.59ㅅ575ㄱ 1층대출대
8 내 마음의 안중근(安重根): 일본헌병의 존경(尊敬)과 참회(懺悔)의 생애(生涯) / 齋藤泰彦 著; 張永順 譯 인지당 1994 320.92ㅇ174ㅅ 1층대출대
9 동양평화의 사도 안중근 / 中野泰雄 저; 梁億寬 역 하소 1995 320.92ㅇ174ㄴ 1층대출대
10 민족사의 불기둥, Ⅰ / 이은상 저 횃불사 1971 920.051ㅇ824ㅁ 1층대출대
11 민족의 얼 : 안중근의사 사진첩 / 안중근의사 숭모회 편 안중근의사 숭모회 1979 320.92ㅇ174ㅁ 1층대출대
12 민족의 얼 : 안중근의사 사진첩 안중근 의사 숭모회 1989 DS 320.92ㅇ174ㅁ 1층대출대
13 민족의 얼 : 안중근의사 유묵사진첩 / 안중근 의사 숭모회 안중근 의사 숭모회 1972 DS 320.92ㅇ174ㅁ 1층대출대
14 불멸의 민족혼 安重根 / 朴殷植 著; 李東源 譯 한국일보사 1994 320.92ㅇ174ㅂ 1층대출대
15 선구자 / 李敬南 저 지문사 1986 920.051ㅇ569ㅅ 1층대출대
16 신흥무관학교 : 정통 독립군․원초적 사관학교 / 안 천 저 교육과학사 1996 951.61ㅇ177ㅅ 1층대출대
17 안중근 의사 자서전 / 안중근 저 ; 범우사 편집부 편 범우사 2000 320.92ㅇ174 1층대출대
18 안중근 전쟁, 끝나지 않았다 :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뤼순 감옥까지의 안중근 투쟁기록 / 李起雄 編 열화당 2000 320.92ㅇ618ㅇ 1층대출대
19 안중근의사 연구의 어제와 오늘 / 안중근의사기념관 안중근의사기념관 1993 320.92ㅇ174ㅇ 1층대출대
20 안중근의사와 동양평화사상 / 안중근의사기념관 안중근의사기념관 1992 320.92ㅇ174ㅇ 1층대출대
21 안중근의사자서전 안중근 의사 숭모회 1990 DS 320.92ㅇ174 1층대출대
22 안중근의사자서전 / 안중근 [저]; 이은상 역 안중근 의사 숭모회 1979 320.92ㅇ174 1층대출대
23 안중근의사자서전 / 이은상 역 안중근 의사 숭모회 1986 DS 320.92ㅇ174A4 1층대출대
24 안중근의사자서전 안중근 의사 숭모회 1979 DS 320.92ㅇ174 1층대출대
25 안중근의사자서전 안중근 의사 숭모회 1970 DS 320.92ㅇ174 1층대출대
26 의사와 열사들 / 민족사바로찾기국민회의 민문고 1995 951.61ㅁ433ㄷ 1층대출대
27 일본의 지성이 본 安重根 / 中野泰雄 著; 金榮光 譯 경운출판사 1984 320.92ㅇ174ㄴ 1층대출대
28 일본의 지성이 본 安重根 / 中野泰雄 저; 金永光 역 경운출판사 1984 DS 320.92ㅇ174ㄴ 1층대출대
29 조선의 명인 / 김일성종합대학 력사연구소 편 과학원 출판사 1962 禁1(특수자료) 920ㄱ835ㅈ 106호
30 한국근대사의 기독교사적 이해 / 尹慶老 著 역민사 1992 275.1ㅇ442ㅎ 1층대출대
31 한국독립운동사연구 /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0 951.61ㄷ327ㅎ 1층대출대
32 한국인의 재발견 / 문화체육부 편저 대한교과서 1994 920.051ㅁ327ㅎ 1층대출대
33 民族의氣魂 / 李鍾浩 編著 단군숭령회 1971 951.7ㅇ869ㅁ 1층대출대
34 不穩刊行物記事輯錄 / 朝鮮總督府警務局 朝鮮總督府 警務局 1934 016.07ㅈ538ㅎ 1층대출대
35 山河, 第1-4部 / 李炳柱 著 동아일보사 1979 DS 811.32ㅇ698ㅅ 1층대출대
36 世界偉人略傳 / 鄭聖杰 編 장학출판사 1957 92ㅈ248ㅅ 1층대출대
37 阿片戰爭과 帝國主義 侵略 / 太倫基 著 진명문화사 1986 DS 950ㅌ363ㅇ 1층대출대
38 安義士의 生涯와 思想 / 안중근의사기념관 법경출판사 1991 320.92ㅇ174ㅇ 1층대출대
39 安重根 : 日韓關係の原像 / 中野泰雄 亞紀書房 1988 320.92ㅇ174ㄴ 1층대출대
40 安重根 : 日韓關係の原像 / 中野泰雄 著 亞紀書房 1988 DS 320.92ㅇ174ㄴ 1층대출대
41 安重根と伊藤博文 / 中野泰雄 著 恒文社 1996 951.6ㄴ116ㅇ 1층대출대
42 安重根과 東洋平和 / 여순순국선열기념재단 여순순국선열기념재단 1997 320.92ㅇ174ㅇ 1층대출대
43 安重根과 平和 / 朴魯連 著 을지출판공사 2000 320.92ㅇ174ㅂ 1층대출대
44 安重根傳記全集 / 尹炳奭 譯編 국가보훈처 1999 320.92ㅇ174ㅇ 1층대출대
45 愛國의 별들 / 劉錫仁 著 교문사 1965 320.92ㅇ421ㅇ 1층대출대
46 義士 안중근(도마) / 안중근 저 ; 신성국 역 지평 1999 320.92ㅇ174 1층대출대
47 義士安重根 / 普賢山人 著 한성출판사 1947 320.92ㅇ174 1층대출대
48 義士安重根傳記 / 安鶴植 編 만수사 보존회 1964 92ㅇ174ㅇ 1층대출대
49 伊藤博文と安重根 / 佐木隆三 著 文藝春秋 1993 951.6ㅅ145ㅇ 1층대출대
50 伊藤博文はなぜ殺されたか / 鹿嶋海馬 著 三一書房 1995 951.61ㄱ213ㅇ 1층대출대
51 伊藤博文を擊った男 : 革命義士安重根の原像 / 齋藤充功 著 時事通信社 1994 951.61ㅅ187ㅇ 1층대출대
52 朝鮮半島の眞實 : 日本人の魂 朝鮮人の魂 / 馬野周二 著 フォレスト 2000 951ㅇ373ㅈ 1층대출대
53 朝鮮人の 日本人觀․總解說 : 誰でも 知りたい 自由國民社 1986 041.3ㅈ433 1층대출대
54 朝鮮學論文集, 第1輯 / 北京大學亞太硏究中心 朝鮮學叢書編輯委員會 編 北京大學出版社 1992 951.04ㅂ433ㅈ 1층대출대
55 駐韓日本公使館記錄, 39,40 / 國史編纂委員會 국사편찬위원회 1994 951.59ㄱ428ㅈ 1층대출대
56 韓國がわかる11人の視点 : 嫌韓․反日を超えて / 多田則明 編 世界日報社 1994 951ㄷ184ㄱ 1층대출대
57 韓國近代人物百人選 / 新東亞編輯室 編 동아일보사 1979 920ㅅ569ㅎ 1층대출대
58 韓國民族獨立運動史硏究 / 愼鏞廈 著 을유문화사 1985 DS 951.61ㅅ575ㅎ 1층대출대
59 韓國民族獨立運動史硏究 / 愼鏞廈 著 을유문화사 1986 951.61ㅅ575ㅎ 1층대출대
60 韓國人物五千年 / 韓國人物五千年編纂委員會 編 일신각 1978 92ㅎ155ㅎ 1층대출대
61 韓亡鑑 / 馬鶴天 著 察蒙特署 1940 951.6ㅁ217ㅎ 1층대출대
62 哈爾賓 驛頭의 銃聲 / 李泰浩 삼중당 1991 811.2ㅇ925ㅎ 1층대출대
63 抗日殉國義烈士傳 / 吳在植 編 행정신문사 1958 920ㅇ334ㅎ 1층대출대
64 玄界灘に 架けた 歷史 : 日朝關係の 光と 影 / 姜在彦 大阪書籍 1988 951ㄱ266ㄱ 1층대출대
65 玄界灘に 架けた 歷史 : 日朝關係の光と影 / 姜在彦 著 大阪書籍 1988 951ㄱ266ㄱ 1층대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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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연구소 경기도 이천시 신둔면 남정리 150 번지
Tel : 031-632-7598 , Fax : 031-632-0598
안중근의 노래
(할아버지 안인수옹)
19세기 중엽 온 세계는 휘황찬란하게 밝아젔는데
우리 나라는 대문 꼭 잠그고 잠만 자고 있었어요
그 당시 황해도 해주땅에 사셨던 안인수 할아버지
진해현감 지내신 지체높은 선비에 이름난 부자요
아들만 6형제 세상에 부러움없는 복많은 노인였지요
(아버지 안태훈 진사)
안 씨네 셋째 아들 태훈은 18세에 과거 급제한 천재
진사가 되어서도 벼슬길 사양 하고, 일본유학을 준비하던중
갑신정변 실패하자 해주에서 신천으로 떠나 살았지만
문과 무를 겸비해야 나라가 살아난다는 굳은 신념으로
구월산기슭 청계동에 큰 마을 세우고 문무를 닦았네
(나라의 사표 안중근)
1879년에 태어난 안태훈의 장남 중근은 총명이 과인 하여
나이 여섯부텨 9년간 쌓아올린 학문과 무술이 뛰어나고
꿈 많고 피끓던 나이 16세에 동학토벌 선발대로 출전하여
30여 명 대원으로 2만 군사를 추풍 낙엽처럼 괴멸시켰으나
부패한 고관은 나라에 세운 공은 제처두고 체포령을 내렸네
(천주교 영세 입교)
이 때 아버지 태훈은 화가 미칠까 두려워 성당에 은신 하던 중
천주교 교리 깨치고 서양문물 배워서 눈을 크게 떳지요
그 후 청게동에 우뚝이 성당 세우고 온 가족은 영세를 받아
양반과 상민이 함께 살며 사랑을 실천하는 천주학에 몸을 담고
스스로 봉건의 벽을 깨고 인권존중 평등주의 실천에 앞장 섰네
(복음전교 활동)
세례명 토마스 안중근은 프랑스 신부 동행 전교에 나서서
세계의 지리 역사 불어 까지 배워가며 황해도 방방곡곡을 누벼
만민 사랑 그리스도 정신과 사회 정의 실천에 과감하게 도전하여
서민들의 고뇌와 고통을 내 형제 자매처럼 나누어 가지니
불의와 부패 맞서 싸워가며 천주님의 복음을 세상에 전했네
(의협의 민권 활동)
그가 한일 몇가지 추려본다면 서민들의 은행 만인계의
사장되어 누구도 엄두 못낸 정부고관 김중환 참판 부정대출
5천량의 거금을 회수시켜 부실에서 회생,경제의 구조조정
해주 병영 장교 한원교, 서민 이경주의 아내와 재산을 강탈
의분에 못견뎌 대항 하다가 적반하장 부정 부패 권력에 좌절
(정의 불의 분명한 청년)
한번은 아버지 심부름으로 서울에 와 번화가를 지나고 있던 중
일본군 헌병 말굽에 쫓기는 백성들의 애련한 모숩 보았다네
보다못해 안중근은 말위로 뛰어 올라 그 헌병을 끌어내렸고
갑오경장 단발령 때는 유생들은 반대하던 상투를 솔선해 자르고
양복에 구두 신고 고향에 돌아간 불의와 정의가 분명한 청년이다
(교육 사업 착수)
러일전쟁으로 국내정세 뒤숭숭해진 1900년대초 암담한 시절 부친과
상의하여 산동,상해에서의 망명 독립운동을 구상 하였으나
나라 밖에 나가서도 썩은 고관들의 행태로 항일운동 어지럽히니
마침내 나라 구하는 길은 오직 교육 뿐이라 깊히 깨달아 귀국
전재산 처분하여 삼흥, 돈의 두학교 우뚝 세워 학동들을 가르쳤다
(무력투쟁 결심)
학교의 운영도 경영이라 힘에겨워 팔 걷어부치고 무역도 하고
평양의 부호들과 규합해 3인동업 3합의란 석탄 광산도 개발했다
이 때 을사조약이 강제되니 국권은 무기력, 일본은 통감부 설치해
최익현 신돌석 전국각지 의병이 일어나고 만국평화회의 에 간
이상설 이준 열사 실패 분사하니, 울화가 터져 무력투쟁 결심했내
(망명 의병 참모 중장)
이 때 나이 28세 새파란 청년, 북간도로 망명하여 의군을 세우고
대한의군 참모중장으로 3백여 의군 이끌고 두만강 건너 입국하여
일본군과 처절한 전투를 벌였으나 패전으로 구사일생 돌아와서
12명의 동지들과 손가락을 끊어 단지동맹 맺고서 재기를 노려
마침내 하얼빈 역두에서 동양평화 걸림돌 이또오를 제거했다
(성인이시며 영웅이시다)
꼬레아 우라아 꼬레아 우라아 통쾌한 만세소리는 하늘을 뚤코
뤼슌 감옥 5개월동안 의연한 자태로 놈들의 사형에 순국 하셨다
공판기록에도 명명백백 보이듯 거룩한 성인이요 당당한 우리영웅
법정에서 굴하지 않고 이또오의 15개 죄목 낫낫이 밝히니
임은 호쾌 당당한 태산이요, 법관들은 산속을 헤매는 토끼떼로다
(이땅에 오신 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재세 33년 동안 하신일 사람이 아니라 신의 아들
안중근의 재세 30년 초인간적 업적 그대는 이땅에 오신 신의아들
을지문덕 강감찬 이순신 장군님도 이나라 역사의 영웅 이시지만
나라를 구하고 100년후를 꿰뚫어 예견하신 위대한 선지자 안중근
그 높은 뜻 받드는 것은 오늘의 우리 7천만이 할 일이라네
(새 한국인 상)
그 생애 일거수 일투족은 당당하고 자랑스런 민족의 영웅 모습
뤼순의 유장한 유묵 살펴보면 심오한 철학과 드높은 사상
저서와 자서전 동양평화론을 읽으면 전인류를 사랑한 큰정치구상
옥중 일화는 신앙의 바탕위에 세워진 성인의 모습일세, 아아,
이 민족의 어른 따라 배워 나라와 겨레, 새 한국인 상을 세우자
2001년 1월 1일
부설 대한국인 안중근 연구소
(원작) 구봉 베드로
(수정) 시인 조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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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연구소 경기도 이천시 신둔면 남정리 150 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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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철호 제2집 신작판소리 안중근 傳
신작 판소리인 "안중근 전"이 명창 안숙선의 노래로 출시 되었다. 작년말 "김대중 옥중 서신가"를 제1집으로 출시한 국악계의 거성, 정철호(중요 무형문화재 제5호 인간문화재)선생의 작품 2집으로 출시된 이번 음반은 최종민(현 국립창극단장)단장의 해설이 담겨져 있어 한층 완성도를 높혔다. 판소리란 전통예술중에서도 최고의 명인적 기질이 요구되는 성악 장르로 현재는 5바탕(춘향가, 심청가, 수궁가, 적벽가, 흥보가)만이 전래되고 있다. 이번에 출시된 안중근 전은 정철호 명인이 작곡한 신작판소리 열사가(국가와 민족을 위해 몸바친 애국 선열들을 기리기 위하여 새로 작곡된 판소리)의 한 장르로 첫 번째 작품에 해당된다.
정철호 명인이 작곡한 신작판소리 열사가는 『안중근 전』『이준 열사』『이순신 장군』『녹두장군 전봉준』등이 있으며 이들의 일생을 후세에 남기고자 정철호 선생이 작곡하여 현재에 이른다. 정철호 명인은 국악계의 거목으로 일제시대의 전설적 명창인 임방울의 문하에서 공부하여 유일하게 생존에 남은 제자이며 아쟁산조를 민속음악으로 최초로 창시한 인물로 평가 받고 있다. 전남도립국악단 상임지휘자를 엮임한 국악계의 원로이며 신민요, 신작판소리를 2만여곡 작곡하여 국악 대중화에 기여한 인물이다. 또한, 창.무.악(노래.무용.음악이 합일된 서양의 오페라 같은 형식의 전통창극)에 기여한 공로로 세종문화상 대통령상을 받은 인물이며 중요무형문화재 5호 판소리 고법 인간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서울음반은 이러한 정철호 명인의 평생 작업을 집대성하는 의미로 제작된 시리즈를 계속 발매할 예정으로 향후에 10여장의 음반이 더 나올 예정이다. 다음 출시 앨범으로는 일제시대 전설적인 명창 임방울제 "적벽가/3CDs"를 정철호 명인의 소리로 직접 출시될 예정으로 벌써부터 많은 관심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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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곡>
CD 1
1. 해설
2. 수양산 정기받아 한 남아 태어나는데
3. 안중근이 천주교에 입문하는데
4. 일본의 한국 침략 야욕 날로 심해지는데
5. 각처에서 의병들이 일어나는데
6. 안중근이 투쟁길에 나서는데
7. 꿈에 성모마리아의 계시를 받는데
8. 이등박문을 쳐 없앨 방법을 궁리하는데
9. 동지들과 성공을 다짐하는데
CD 2
1. 준비를 끝내고 하얼빈 역으로 가는데
2. 이등박문에게 총 쏘고 감옥에 갇히는데
3. 사형 선고가 내려지는데
4. 최후의 유언을 남기는데
5. 안중근의 모친과 면회하는데
6. 안중근 집행장으로 들어가는데
7. 안중근 의사 순국하는데
8. 안중근 의사를 기리며
--------------------------------------------------------------------------------연대기로 보는 안중근, 그리고 그의 시대
안중근 연보
주변 정세
1869(-10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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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친 안태훈(安泰勳, 8~9세), 재주와 지혜가 뛰어나 사서삼경을 통달하다.조부 안인수(安仁壽), 일찍이 진해 현감을 지내며, 자선가로 도내에 명성이 자자하다 보불전쟁발발.
미국 군함의 강화도 침공으로 신미양요 시작.
일본, 청일수호통상조약(淸日修好通商條約, 청과의 대등 조약)체결.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구미사절단으로 미국에 파견.
민비 정권등장.
일본 사이고 다카모리, 정한론 제출
1874(-5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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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태훈(13-14세), 과거공부를 하고 사륙병려체(四六騈儷體)를 익혀 선동(仙童)이라 불리며, 이후 원근에 명성이 널리 퍼지다. 베트남, 프랑스의 보호국이 됨.
일본, 강화도에서 운요호사건을 계획적으로 도발하여, 이후 무력으로 개항을 강요함.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조인. 이후 부산, 원산, 인천 등 3개항을 차례로 개항함.
일본에 김기수등 제1차 수신사(修信使)파견. 귀국 후 『만국공법』 거론됨.
발칸전쟁 발발.
1879(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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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태훈(18세), 과거에 올라 진사가 되고 조(趙)씨와
혼인하다.안중근, 9월2일 황해도 해주부 수양산 아래서 부친안태훈과 모친 조마리아 사이에서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나다. 아프가니스탄, 영국의 보호국이 됨.
김홍집 등 제 2차 수신사 파견.
『조선책략』유포를 계기로 유림들의 신사척사상소시작됨.
일본에 신사유람단 파견.
프랑스, 튀니지의 보호권 획득.
독일.오스트리아.러시아 삼제동맹 성림.
청에 영선사 김윤식과 유학생 수십 명 파견.
이토 히로부미, 헌법 연구 위해 유럽으로 감.
프랑스군, 베트남 하노이 점령.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
독일.오스트리아.이탈리아 삼국동맹 성립.
임오군인봉기
박영효 등 일본특사수신사 파견.
1884(6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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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효 등의 개화파가 정변을 일으킨 후 선진 문명을
받아들이고자 추진한 해외 유학생에 부친 안태훈이선발됐으나, 개화파 정권이 삼 일 만에 무너짐으로써박영호 등은 일본으로 망명하고, 안태훈도 숨어 살다가 가족들과 함께 신천군 청계동 산중으로 이사하다.한문학교에 들어가 팔구 년간 보통학문을 익히다. 베트남 문제를 둘러싸고 청불전쟁 발발.
베트남.캄보디아 전 영토가 프랑스의 보호령이 됨.
갑신정변. 새 내각을 조직하고 14개조 혁신정강 발표. 영국 함대, 거문도 점령.
독일, 마셜군도 점령.
일본에 제1차 이토 히로부미 내각 성립.
영국, 버마 전 지역을 식민지로 삼음.
1888(10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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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서부터 줄곧 사냥을 즐기며, 학문으로 보다는 장부로서 세상에 이름을 떨칠 뜻을 품다. 영국군, 티베트 침략.
이토 히로부미, 추밀원.귀족원 의장에 취임.
파리에서 국제노동자대회 열림. 국제사회당(제2인터내셔널) 결성.
1892(1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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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부 안인수가 사망하자, 생전의 정을 잊을 수 없어
애통해 한 나머지 육 개월간 병을 얻어 심하게 앓다.어느 날 산에서 발을 헛디뎌 절벽으로 굴렀으나, 나뭇가지를 잡고 살아나 첫 번째 죽을 고비를 넘기다.
미국에서 민중당 결성.
이탈리아에서 노동당 결성.
정부에서 김옥균을 암살하기 위해 이일직 등을 일본에 파견.
러시아.프랑스 간 군사협약 성립.
1894(16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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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아려(金亞儷)와 혼인하여, 이후 아들 둘, 딸 하나를
낳다.사이비 동학당(東學黨, 훗날 일제의 앞잡이인 一進會의 前身)에 맞서 부친 안태훈이 의병을 일으킬 때,부친을 따라 출전하여 선봉 겸 정탐독립대가 되어 승리하는데 공을 세우다. 그 후 큰 병에 걸렸으나, 두서너 달 만에 소생하여 두 번째 죽을 고비를 넘기다.안태훈, 어윤중과 민영준의 모함으로, 수개월간 프랑스인의 천주교당으로 피하다. 이후 성서를 접하고 천주교에 입교한 후, 선교활동을 위해 고향으로 돌아오다. 고부민란 발생(동학전쟁 시발).
동학농민군 저지를 위한 원병 요청에 의해 아산에 청군 도착.
일본,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인을 보호한다는 명목하에 혼성일개여단 파병.
영일통상항해조약 조인.
간디, 남아프리카에서 인도국민회의 조인.
청일전쟁 발발.
일본, 대원군을 앞세워 친일정권인 김홍집 내각 수립.
갑오개혁 시작
드레퓌스 사건 발발.
1895(17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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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른말 을 잘한다 하여 번개입(電口)이라는 별호를
얻다.노루사냥을 하던 중 총기 오발로 총알이 오른손을 관통하는 사고를 겪다.프랑스 선교사 홍요셉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다.
청일강화조약 조인.
일본, 삼국간섭에 의해 요동반도를 포기함.
을미사변(乙未事變, 명성황후 시해사건).
아관파천(俄館播遷).
베베르-고무라 각서 조인(러.일, 조선에서의 동등한 권리를 상호 승인).
독립협회 창립.
고종, 경운궁으로 환궁.
대한제국 성립.
러시아, 뤼순. 다롄 조차.
1899(2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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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 신부와 함께 여러 마을을 돌아다니며 선교활동을 하고, 수개월간 프랑스어를 배우며 서구문명에 눈을 뜨다.
서울의 민 주교에게 대학 설립에 대한 의견을 말했으나, 묵살당하다. 이 일로 인해 천주교는 믿되 외국인은 믿지 않기로 하고, 프랑스어 공부도 그만두다.
옹진 군민이 경성(京城)의 전(前) 참판(參判) 김중환에게 돈 오천 냥을 빼앗기는 억울한 일을 당해, 안중근이 대표로 그를 찾아가 담판을 짓고 해결해주다.
해주부 지방 대병영(隊兵營) 위관(尉官)인 한원교에게 아내와 재산을 빼앗기는 억울한 일을 당한 친구 이경주를 도와주려 했으나, 도리어 이경주가 옥살이를 하게 되다. 이에 부패한 정부에 환멸을 느껴 개혁과 문명, 그리고 민권자유의 필요성을 절감하다.
황해도에 교인을 사칭한 폭도들이 들끓어 천주교가 박해를 받게 되자, 부친 안태훈은 몸을 피했느데, 그때 심화병을 얻어 수개월 후에 고향으로 돌아오다.
대한국국제(大韓國國制) 반포.
한청통상조약 체결(청과 대등한 관계가 됨).
런던에서 영일동맹 체결.
일본 제일은행권의 국내 통용을 허가함.
러시아, 용암포 불법 점령.
일본군, 한국정부에 중립 선언을 무시하고 한성에 진주.
한일의정서 조인(고문정치 시작).
러일전쟁 발발.
제1차 한일협약 조인.
1905(27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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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일전쟁이 가속화하면서 날마다 신문, 잡지, 각국의 역사를 상고하며 국내외 정세를 파악하다.
부친과 국내 상황에 대해 상의한 후, 산둥으로 건너가 두루 살펴보고, 상하이의 민영익을 찾아가 자문을 구하려 했으나 만나지 못하다.
상하이에서 만나 프랑스인 관 신부의 이천만 동포와 함께 본국에서 활동하라는 권고로 진남포로 돌아오다.
12월, 부친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뒤늦게 듣고, 청계동으로 돌아가 수일간 상례를 치르다.
한국이 독립할 때까지 술을 끊기로 맹세하다.
진남포에서 안창호의 연설을 듣고 문명개화와 국권회복에 대한 필요성을 절감하다.
일본군, 뤼순.평톈점령.
러시아, 피의 일요일 사건(제1차 러시아혁명 시발).
일본 함대, 쓰시마섬 해협에서 러시아 함대 격파.
가쓰라-태프트 밀약 성립.
제2차 영일동맹 체결.
러.일 간에 포츠머스 강화조약 조인. 이후 일본은 관동주 조차지와 동청철도 남만주지선 및 사할린섬 일부 획득함.
러시아, 모스크바 9월 투쟁.
이토 히로부미, 일본정부의 특파대사로 한성에 도착.
일본의 강압하에 제2차 한일협약 조인.
초대 통감에 이토 히로부미 임명됨
1906(28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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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청계동에서 진남포로 이사한 후, 재산을 털어 삼흥학교와 돈의학교를 세우고 직접 교무를 맡아 보며 교육사업을 하다.
전북의 최익현, 경북의 신돌석 등 국내 각 지역에서 의병봉기.
일본 관동도독부 설립.
일본, 남만주철도회사 설립.
1907(29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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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정마련을 위해 평양에서 석탄상을 했으나, 일본인의 방해로 큰 손해를 보다.
국채보상회에 가담하여 활동하다.
이토 히로부미가 강제로 정미칠조약을 맺어 황제를 폐하고 군대를 해산시키자, 무장투쟁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북간도로 건너가 서너달 동안 인근 지방을 시찰한 후, 블라디보스토크에 정착하여 청년회의 임시사찰로 활동하며 의거를 준비하다.
엄인섭, 김기룡과 의형제를 맺고 의거를 도모하면서,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며 일본의 침략에 의한 조선의 참상과 무장투쟁의 필요성에 대해 연설하다.
한국 최초의 해외 독립군 부대인 대한의군이 창설되어 김두성, 이범윤이 각각 총독과 대장으로 임명되고, 안중근이 참모중장으로 선출되어, 두만강지역에서 전쟁을 준비하다.
제1차 러일협약 성립.
이토 히로부미의 압력으로 이완용 내각 설립.
고종의 밀사로 특파된 이상설.이준.이위종,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참석 거부당함.
헤이그 밀사단, 각국 기자단 앞에서 일본의 한국침략 상황을 폭로함.
이토 히로부미, 헤이그 사건의 책임을 추궁하며, 고종 황제를 폐함.
이완용 내각, 이토 히로부미 등과 한일신협약(韓日新協約, 정미칠조약)조인.
군대해산조칙 발표.
뉴질랜드, 영국의 자치령이 됨.
허위. 이강년. 이인영, 양주에서 13도창의군을 결성하고 한성 진공을 계획.
1908(30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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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두만강을 건너가 함경북도 회령, 종성 등지에서 일본군과 수차례의병 전쟁을 하다.
전쟁 중 생포한 일본군 포로를 설득하고, 만국공법의 정신에 의해 풀어 주다.
일본군의 습격으로 의병군이 흩어지면서, 산 속에서 동지 서너 명과 함께 약 십이일동안 추위와 굶주림으로 죽을 고비를 수차례 넘기고 가까스로 살아나다. 이후 엔치야 지역에 머물다가, 하바로프스크 방명으로 나아가 기선을 타고 흑룡강 상류 수천여 리를 시찰하다.
수찬 등지에서 교육.조직활동을 하며 각 지역을 두루 돌아다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해조신문』과 『대동공보』등에 동포들을 대상으로 독립심을 고취하느 글을 투고하다.
청 광둥에서 일본 상품 불매운동이 일어나 화남일대로 확산됨.
장인환.전명운, 샌프란시스코 오클랜드역에서 일본의 앞잡이 역할을 한 스티븐스를 저격.
일본, 러시아와 사할린 경계확정서 조인.
오스트리아, 보스니아와 헤르체코비나를 병합.
재러 의병 백여 명, 회령 진공.
청, 서태후 사망.
한성에 동약척식주식회사 설립됨.
1909(3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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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치야에서 열두 명과 이후 나라를 위해 온 힘을 다할 것을 단지동맹으로써 결의하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대동공보서를 거점으로 활동을 모색하던 중, 이토 히로부미의 만주시찰소식을 듣고, 이토 살해를 자원하고 우덕순과 함께 하얼빈으로 향하다.
10월26일 아침 하얼빈역 플랫폼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고, 이후 뤼순감옥에 수감되다.
국내, 러시아령(연해주 일대), 하와이 등지에서 수많은 동포들이 안중근의 변호 비용을 마련하다.
12월, 옥중 자서전 『안응칠 역사』를 집필하기 시작하다.(이듬해 3월 탈고)
미주 한국인 단체, 국민회로 통합 발족.
상하이에서 아편 금지 제2회 국제회의 열림.
독불협정 조인.
의병군, 국내 각 지역에서 일본에 크고 작은 타격을 입힘.
부토감 소네 아레스케, 통감에 임명됨.
기유각서 조인. 이후 한국의 사법 및 감옥 사무를 일본정부에 위탁함.
국내 의병을 진압하기 위한 일본군의 남한 대토벌 작전시작됨.
청일협약조인. 이후 간도가 청에 귀속됨.
이완용, 명동성당 앞에서 이재명의 습격으로 중상을 입음.
1910(3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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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7일부터 12일까지 관동도독부 뤼순 법원에서 열린 여섯 차례의 공판에서 이토의 죄악과 거사의 정당성을 당당하게 진술하다.
2월 12일, 사형 선고가 내려졌으나, 항소를 포기하고 『동양평화론』을 집필하기 시작하다.
홍 신부의 면회로 옥중 고해성사를 하고, 성제대례 및 성체성사를 거행하다.
3월26일, 뤼순 감옥에서 서른두 해외 치열했던 생을 마감하다.
5월, 만주일일신문사에서 『안중근사건 공판속기로』을 발행하다.
순국 삼 개월 만에 국내외에서 안중근 전기가 비밀리에 발해되어 읽히다.
남아프리카연방, 영국 자치령으로 발족함.
이범윤.홍범도 등 연해주 연합의병, 국내로 진공하여 일본군과 교전.
유인석.이상설 등, 블라디보스토크에서 13도의군 편성.
제2차 러일조약 조인.
유인석.이범윤 등, 성명회를 결성하여 합방 반대투쟁 전개.
총리대신 이완용과 통감 데라우치 마사다케 사이에 한일병합조약 조인. 이후 조서총독부 설치됨.
멕시코혁명 발발.
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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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미국 하와이의 신한국보사에서 『대동위인 안중근전』발행되다.
안명근 체포를 시작으로 안악사건 발생.
제3차 영일동맹협약 조인.
청, 신해혁명 시작됨.
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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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곡 「안중근, 이등박문을 쏘다」, 무송에서 항일 유격대에 의해 상연되다. 신간회 창립.
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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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대표 정론지 『중앙공론』에 희곡 「안중근건」발표되다.
이동녕. 김구 등, 한국독립당 창림.
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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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6일 서울에서 우덕순의 주도하에 안중근 선생 순국 36주기 추도회(안의사 순국 후 최초의 추도회)가 열리다. 이승만. 김구, 대한독립촉성국민회 결성.
※『안중근 전쟁, 끝나지 않았다』 2000년 열화당.이기웅저 인용.
인심 결합론
의군참모중장 안 응 칠
☞이것은 안 중근의사가 1908년 3월 21일 노령 브라디보스톡 해조신문
(그뒤의 대동공보)에 「인심을 결합하여 국권을 회복하자 」는 제목으로
기고했던 글이다.
->대저 사람이 만물보다 귀하다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삼감오륜을 알기 때문
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세상에 처하되 첫째는 몸을 닦고 둘째는 집을 정돈하고
세째는 나라를 보호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은 몸과 마을을 서로 합하여 생명
을 보호하고 집은 부모와 처자에 의해서 유지되고 나라는 국민 상하의 단결에
의해서 보존되는 것이어늘 슬프다 우리나라는 오늘날 이같이 참담한 경지에
빠졌으니 그 까닭은 다른 것이 아니라 서로 화합하자 못한 것이 제일 큰 원인
인 것이다.
->이 불화하는 병의 원인은 교만병이다. 하많은 해독이 교만으로부터
생겨나나니 소위 교만한 무리들은 저보다 나은자를 시기하고 저보다 약한자를
업신여기며 동등한 자는 서로 다투어 아랫사람이 안되려하니 어찌 서로 결합
함을 얻을 수가 있을 것인가? 그러나 교만을 바로잡는 것은 겸손이 바로 그것
이다. 사람이 만일 각각 겸손함을 주장삼아 자기를 낮추고 남을 공경하여 남이
자기를 꾸짖는 것을 달게 받으며 자기가 남을 꾸짖는 것은 너그러히 하고 자기
공을 남에게 양보한다면 사람이 짐승이 아니어늘 어찌 서로 불화할 리가 있겠
느냐?
->옛날에 어느 나라 임금이 죽을 적에 자식들을 불로 경계해 말하되 「너
희들이 만일 내가 죽은 뒤에 형제끼리 마음을 합하지 못하면 쉽게 남의 꺾임이
되려니와 마음을 합하기만 하면 어찌 남들이 꺾을 수 있으리오 」하였었다. 이
제 고국산천을 바라보니 동포들이 원통하게 죽고 죄없는 조상의 백골마저 깨
뜨리는 소리를 참아 듣지 못하겠다. 깨어라 연해주 (노령)에 계신 동포들아!
본국의 이 소식을 듣지 못했는가 당신들의 일가친척은 모두 대한 땅에 있고 당
신들의 조상의 분묘도 모국산하에 있지 않단 말이가? 뿌리가 마르면 가지 잎새
도 마르는 것이니 조상의 같은 피의 족속이 이미 굴욕을 당했으니 내 몸은 장
차 어떻게 하리오 우리 동포들아! 각각 「불화 」두 자를 깨뜨리고 「결합」두
자를 굳게 지켜 자녀들을 교육하며 청년 자제들은 죽기를 결심하고 속히 우리
국권을 회복한 뒤에 태극기를 높이 들고 처자권속과 독립관에 서로 모여 일심
단체로 육대주가 진동하도록 대한독립만세를 부를 것을 기약하자.
안중근의 최후진술
(순국5분전 어머니가 지어준 옷을 입고)
재판장
변호인으로부터 이미 상세한 변론이 있었지만, 피고들이 마지막으로 할말 이 있으면 진술하라
안중근
->나는 검찰관의 논고를 듣고 나서 검찰관이 나를 오해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예컨대 하얼빈에서 검찰관이 올해로 다섯 살 난 나의 아이에게 내 사진을 보여주며 이 사람이 네 아버지냐고 물었더니 그렇다고 대답했다고 말했는데, 그 아이는 내가 고국을 따날 때 두 살이었는데 그후 만난 적도 없는 나의 얼굴을 알고 있을 까닭이 없다. 이 일로만 미루어 봐도 검찰관의 심문이 얼마나 엉성한지, 또 얼마나 사실과 다른지를 알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의 이번거사는 개인적으로 한 것이 아니고 한일 관계와 관련해서 결행한 것이다. 그런데 사건 심리에 있어서 재판장을 비롯하여 변호인과 통역까지 일본인만으로 구성하고 있다. 나는 한국에서 변호인이 와 있으니 이 사람에게 변호를 허가 하는 것이 지당하다고 생각한다. 또 변론 등도 그 요지만을 통역해서 들려 주기 때문에 나는 불공평하다고 생각한다. 또 다른 사람이 봐도 이 재판을 편파적이라는 비방을 면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검찰관이나 변호인의 변론을 들어 보면, 모두 이토가 통감으로서 시행한 시정 방침은 완전무결한 것이며 내가 오해하고 있다고 하지만, 이는 부당하다. 나는 오해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너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토가 통감으로서 시행한 시정방침의 대요를 말하겠다.
->1905년의 5개조 보호 조약에 대한 것이다. 이 조약은 황제를 비롯하여 한국국민 모두가 보호를 희망했던 것은 아니다. 그런데 이토는 한국 상하의 신민과 황제의 희망으로 조약을 체결한다고 말하며 일진회(一進會)를 사주하여 그들을 운동원으로 만들고, 황제의 옥새와 총리대신의 부서가 없는데도 각 대신을 돈으로 속여 조약을 체결했기 때문에, 이토의 정책에 대해 당시 뜻있는 사람들은 크게 분개하여 유생 등은 황제에게 상주(上奏)하고 이토에게 건의했다. 러일전쟁에 대한 일본 천황의 선전조칙에는 동양의 평화를 유지하고 한국의 독립을 공고히 한다는 말이 있었기 때문에 한국의 인민들은 신뢰하며 일본과 더불어 동양에 설 것을 희망하고 있었지만, 이토의 정책은 이와 반대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각처에서 의병이 일어났던 것이다. 그래서 가장 먼저 최익현이 그 방책을 냈다가 송병준에 의해 잡혀서 쓰시마에서 구금돼 있던 중 사망했다. 그래서 제2의 의병이 일어났다. 그 후에도 방책을 냈지만 이토의 시정방침이 변경되지 않았다. 그래서 당시 황제의 밀사로 이상설이 헤이그의 평화회의에 가서 호소하기를, 5개조의 조약은 이토가 병력으로 체결한 것이니 만국공법에 따라 처분해 달라고 했다. 그러나 당시 그 회의에 물의가 있었기 때문에 그 일은 성사되지 않았다. 그래서 이토는 한밤중에 칼을 뽑아 들고 황제를 협박해서 7개조의 조약을 체결시켜 황제를 폐위시켰고, 일본으로 사죄사를 보내게 되었다. 이런 상태였기 때문에 경성 부근의 상하 인민들은 분개하여 그 중에 활복한 사람도 있었지만, 인민과 군인들은 손에 닿는 대로 무기를 들고 일본 군대와 싸워 경성의 변이 일어났던 것이다. 그 후 십수만의 의병이 일어났기 때문에 태황제께서 조칙을 내리셨는데, 나라의 위급존망에 즈음하여 수수방관하는 것은 국민된 자로서의 도리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국민들은 점점 격분하여 오늘날까지 일본군과 싸우고 있으며 아직도 수습되지 않았다. 이로인해 십만 이상의 한국민이 학살됐다. 그들 모두 국사에 힘쓰다가 죽었다면 본래 생각대로 된 것이지만, 모두 이토 때문에 학살된 것으로, 심한 사람은 머리를 노끈으로 꿰뚫는 등 사회를 위협하며 잔학무도하게 죽였다. 이 때문에 장교도 적지 않게 전사했다. 이토의 정책이 이와 같이 한 명을 죽이면 열명, 열 명을 죽이면 백 명의 의병이 일어나는 상황이 되어, 시정방침을 개선하지 않으면 한국의 보호는 안 되는 동시에 한일간의 전쟁은 영원히 끊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토 그는 영웅이 아니다. 간웅(奸雄)으로 간사한 꾀가 뛰어나기 때문에 그 간사로 꾀한 한국의 개명은 날로 달로 나아가고 있다고 신문에 싣게 했다. 또 일본 천황과 일본정부에 한국은 원만히 다스려 날로 달로 진보하고 있다고 속이고 있었기 때문에 한국동포는 모두 그의 죄악을 미워하고 그를 죽이고 싶은 마음을 갖고 있었다.
->사람은 누구나 삶을 즐기고 싶어하지 않는 자가 없으며 죽음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뿐 아니라 한국민은 십수 년 동안 도탄의 괴로움에 울고 있기 때문에 평화를 희망함은 일본국민보다도 한층 깊은 것이다. 게다가 나는 지금까지 일본의 군인, 상인, 도덕가, 기타 여러 계급의 사람과 만난 이야기는, 내가 한국에 수비대로 와 있는 군인에게 이같이 해외에 와 있는데 본국에 부모처자가 있을 것이 아니가. 그러니 분명히 꿈속에서도 그들의 일은 잊혀지지 않아 괴로울 것이다. 라고 위로 했더니, 그 군인은 본군일이 견디기 어렵지만 어쩔 수는 없다라며 울며 말했다. 그래서 나는 그러면 동양이 평화롭고 한일간에 아무 이 없기만 하면 수비대로 올 필요가 없을 것이 아니냐? 라고 물으니, 그렇다. 개인적으로는 싸움을 좋아하지 않지만 필요가 있으면 싸우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수비대로 온 이상 쉽사리 귀국할 수 없겠다라고 했더니, 그 군인은 일본에는 간신이 있어서 평화를 어지럽게 하기 때문에 우리들도 마음에 없는 이런 곳에 와 있다는 것이다. 이토 따위를 혼자서는 죽일 수 없지만 죽이고 싶은 생각이다.라고 울면서 이야기 했다. 그리고 농부와의 이야기는, 그 농부가 한국에 왔다는 당시에 만나서 한 이야기이다. 그가 말하기를 한국은 농업에 적합하고 수확도 많다고 해서 왔는데, 도처에서 의병이 일어나 안심하고 일을 할 수가 없다. 또 본국으로 돌아가려고 해도 이전에는 일본도 좋았지만 지금은 전쟁 때문에 그 재원을 얻는 데 급급하여 농민들에게 세금을 많이 부과하기 때문에 농업은 하기 힘들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렇다고 해서 한국에 있자니 이와 같아 우리들은 몸둘 곳이 없다라고 한탄하며 호소했다. 다음으로 상인과의 이야기를 말하겠다. 한국은 일본 제작품의 수요가 많다고 듣고 왔는데 앞의 농부의 이야기와 같이 도처에 의병이 있고 교통이 두절되어 살 수가 없다며, 이토를 없애지 않으면 상업도 할 수 없으니 자기 한 사람의 힘으로 되는 일이라면 죽이고는 싶지만, 어떻든 평화로워 지기만을 기다릴수 밖에 없다고 말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도덕가의 이야기라는 것은 예수교 전도사의 이야기이다. 나는 먼저 그 자에게 말을 걸어 이렇게 무고한 사람을 학살하는 일본인이 전도가 되겠는가?라고 물으니, 그가 도덕에는 나와 남의 구별이 없다. 학살하는 사람은 참으로 불쌍한 자이다. 천제의 힘으로 개선시키는 수밖에 없으니, 그들을 불쌍히 여겨 달라고 말했다. 이 사람들의 이야기에 의해서도 일본인이 동양의 평화를 희망하고 있는 동시에 얼마나 간신 이토를 미워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일본인에게도 이런데 하물며 한국인에게는 친척이나 친구를 죽인 이토를 미워하지 않을 까닭이 없다.
->내가 이토를 죽인 이유는 이토가 있으면 동양의 평화를 어지럽게 하고 한일간이 멀어지기 때문에 한국의 의병 중장의 자격으로 죄인을 처단한 것이다. 그리고 나는 한일 양국이 더 친밀해지고, 또 평화롭게 다스려지면 나아가서 오대주에도 모범이 돼 줄 것을 희망하고 있었다. 결코 나는 오해하고 죽인 것은 아니다. 나의 목적을 달성할 기회를 얻기 위해 한 것이다. 따라서 이제라도 이토가 그 시정방침을 그르치고 있었다는 것을 일본 천황이 들었다면 반드시 나를 가상히 여길 것이라고 생각한다.
->오늘 이후 일본 천황의 뜻에 따라 한국에 대한 시정방침을 개선한다면 한일간의 평화는 만세에 유지될 것이다. 나는 그것을 희망하고 있다. 변호인의 말에 의하면, 광무3년에 체결된 조약에 의해 한국민은 청국 내에서 치외법권을 가지니 본건은 한국의 형법대전에 의해 다스려져야 할 것이며, 한국형법에 의하면 처벌할 규정이 없다고 했는데, 이는 부당하며 어리석은 논리라고 생각한다. 오늘날 인간은 모두 법에 따라 생활하고 있는데, 현실적으로 사람을 죽인 자가 벌을 받지 않고 살아 남을 도리는 없느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법에 의해 처벌돼야 하는가의 문제가 남아 있는데, 이에 대해 나는 한국의 의병이며 지금은 적군의 포로가 돼 있으니 당연히 만국공법에 의해 처리돼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재판장은 이것으로써 심리를 모두 마칠 것을 알리고, 판결은 오는 14일 오전 열시에 언도하니 출정하라는 뜻을 명하고 폐정했다. 메이지 43년 2월 12일 관동도독부 지방법원. 서기 와타나베 요이치. 재판장 마나베 주조.
안중근 외 3명 제6회 공판시말서, 피고 안응칠이라 하는 안중근 외3명, 위 살인피고사건에 대해 메이지 43년 2월14일 오전 열시 관동도독부 지방법원 형사법정에서 재판장 마나베 주조출석, 검찰관 미조부치 타카오 서기 와타나베 요이치 입회하에 통역 촉탁 소노키 스에요시 통역으로 심판을 공개하다. 피고인은 모두 신체의 구속을 받지 않고 출정하며, 변호인으로 미즈노 기치다로와 세이지가 출두했다. 재판장은 계속해서 재판할 뜻을 알리고 재판장은 이 판결에 대해 오 일 내에 항소할 수 있음과, 판결의 정본.등본.초본을 청구 할 수 있다는 뜻을 알리고 폐정했다. 메이지 43년 2월 14일 관동도독부 지방법원. 서기 와타나베 요이치. 재판장 마나베 주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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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安重根 안중근의 애국정신
重根이 奮起曰, "老賊이來此也아! 天假機會也로다."하고
直走哈爾賓驛하여 立露軍之背後라가 相距直十步에 擧銃
一發하여 中李藤胸하니라. 各軍이 來集하여 奪重根銃하고付憲兵하니라.
重根이 倒其銃而予之하고 以拉丁語로 三呼大韓獨立萬歲하니라. 被縛에 重根이 拍掌大笑曰
"我豈逃者哉아? 我欲逃면 我不入死地라." 하니라. 於是에 全球震動하고 人皆吐舌曰 "韓國有人이라" 하니라.<韓國獨立運動之血史>
* 그리하여 만주 여순 감옥에 投獄되어 다음해(1910년) 3월 26일 死刑을 당하니, "나는 大韓의 獨立을 위하여 죽노라, 더 나아가 東洋의 平和를 위하여 죽노라. 죽는 것이 뭐가 한스럽겠는가?"하고 죽으니 이 때의 나이가 32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