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와 '아름다움', 이 예쁜 이름 누가 지었을까 |
작은 시골 해미에 상당 규모 읍성 축성된 까닭 |
15.03.02 13:46 | 최종 업데이트 15.03.02 13:46 | 정만진(daeguedu)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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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7일 해미 읍성을 찾았다. 해미 읍성(사적 116호)은 우리나라 읍성 중 가장 유명한 곳으로 여겨진다. 이유는 분명히 밝히기 어렵지만, 아마도 그 이름 덕분이 아닐까 추측된다. 해미(海美)라는 이름 속에는 바다와 아름다움이 들어 있다. 읍성은 아무래도 전쟁이나 행정 따위의 삭막한 느낌을 주는 말인데, 그 앞에 '바다'와 '아름다움'이 수식하고 있으니 저절로 호감이 생겨나는 것이다.
현재의 해미 읍성 둘레는 본래 정해현(貞海縣)과 여미현(餘美縣) 자리였다. 두 현은 1406년(태종 7) 합병된다. 요즘 말로 하면 구조 조정이 된 셈인데, 한쪽이 월등 셌다면 흡수 통합 형태를 취했을 터이므로 이름도 정해현 또는 여미현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각각의 이름에서 한 글자씩 따온 것을 보면 두 현의 세가 대략 엇비슷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해미현이라는 이름이 태어났다.
이름이 정여현으로 정해지지 않은 것을 보면 당시 사람들의 미적 감각은 상당했던 듯하다. 곧을 정(貞)에 남을 여(餘)를 써서 성리학적 가치관을 강요했다면 현대 사회에 들어 해미 읍성이 이름을 날리는 데는 별로 도움이 못 됐으리라. 바닷가에 붙어 있지 않으면서도 '바다가 아름다운 곳'이라는 이미지를 얻었으니, 해미라는 읍성의 명칭은 정말 멋진 이름이다.
현대인은 도성보다 읍성에 정감 느껴
해미 읍성이 도성이나 산성이 아니라는 점도 답사자들을 유인하는 데 도움이 됐을 법하다. 임금이 거주하는, 달리 말해 나라의 서울(都)이었던 곳에 세워진 도성(都城)은 조선에는 한양, 신라 시대에는 경주에 있었다. 백제의 공주와 부여, 금관 가야의 김해, 대가야의 고령 등지도 물론 도성이 존재했던 곳이다. 하지만 궁궐 등의 본래 모습이 그런대로 남아 있는 곳은 가장 근래의 도성이었던 서울 뿐이다. 게다가 도성은 도시화에 찌든 현대인들에게 정감을 주지 못한다.
고려의 도성이었던 개성과 고구려의 도성이었던 평양은 어떤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지 확인하기가 어렵다. 누군가는 직접 현지에 가서 눈으로 생생하게 봤겠지만, 보통의 대한민국 국민에게는 그럴 기회가 없다. 그래서 개성과 평양의 도성 풍경을 글로 써내는 일이 불가능하다. 다만 국내성은 만주를 거쳐 접근하기가 쉬워 보고 온 사람들이 많다.
국내성은 별로 볼 것이 없다. 남은 성곽이라야 저층 아파트의 담장 구실을 하고 있는 200미터 정도가 고작이다. 장수왕이 남진 정책을 펼쳐 수도를 평양으로 옮기기 이전까지만 해도, 즉 당대 세계를 호령했던 광개토대왕 시절만 해도 '대'고구려의 수도였던 곳이 국내성인데 어찌 이토록 볼품없는 모습으로 남게 됐을까, 한탄이 나올 지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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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층 아파트의 담장처럼 되어 있는 국내성의 흔적(2009년 여름 사진) |
ⓒ 정만진 |
관련사진보기 | 우리나라 성의 중심은 도성이 아니라 산성(山城)이다. 산성은 산에 있는 성이라는 뜻이다. 가파른 절벽과 물이 있는 계곡을 잘 활용해 만들어진 우리나라 산성들은 외적의 침입을 막아내는 데 매우 효용이 높았다. 고구려가 중국과 장기간 걸쳐 당당하게 맞싸울 수 있었던 것도 산성을 많이 축성해둔 덕이었다.
산성이 산에 있는 성이라면 읍성(邑城)은 읍에 있는 성이다. 읍은 사람이 많이 사는 곳으로, 서양식으로 말하면 시(市)에 해당된다. 농경 사회에서 읍은 당연히 들판에 있고, 읍성 또한 평지에 세워졌다. 그러나 읍성은 고려 때까지는 없었고, 조선 시대 들어 축성되기 시작했다. 해미 읍성도 1491년(성종 22)에 비로소 완성됐다.
산에 있으면 산성, 읍에 있으면 읍성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읍과 시의 이름에서도 우리나라의 뿌리깊은 사대주의가 발견된다. 본래 우리가 써온 읍은 외국어에서 온 시에 비해 한 단계 낮게 사용되고 있다. 읍은 군의 중심지를 말하는데, 시보다 작다.
해미 읍성은 둘레가 약 1.8km, 넓이가 약 2만여 평 된다. 물론 정문은 진남문(鎭南門)이다. 이는 해미 읍성에 가본 적이 없는 사람도 추측할 수 있다. 우리나라 건축물들은 대체로 남쪽으로 바라보는데, 왜냐하면 해가 동쪽에서 떠서 남쪽을 거쳐 서쪽으로 넘어가기 때문이다. 일조권(日照權)을 생각해보면 알 수 있는 일이다.
읍내의 집들이 남쪽을 바라보고 서 있으니 성문도 당연히 남쪽에 세워지게 된다. 그래야 성문을 지나온 사람이 관청이든, 개인의 집이든 앞에서 들어가게 된다. 그래서 우리나라 사람들은 앞산을 남산(南山)이라 부른다.
진남문으로 해미 읍성에 들어온 사람들은 주로 어디로 갔을까? 해미가 현이었으니 현청(縣廳)으로 갔을 것이다. 물론 틀렸다고 할 수는 없는 대답이다. 하지만 꼭 맞는 답도 아니다. 이는 왜구의 습격 등으로부터 충청도를 지키는 군대의 총사령관인 병마사가 해미에서 근무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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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미읍성의 동문인 잠양루. 물론 복원한 것이다. |
ⓒ 정만진 |
관련사진보기 | 면사무소 격인 현청에 드나드는 사람보다 훨씬 더 많은 인원이 군사령부 격인 병영(兵營)에 출입했을 것이다. 이 말은 작은 시골에 해미 읍성이라는 거대한 성곽이 존재하는 까닭을 말해준다. 현청이 있어서가 아니라 1414년(태종 14)부터 1651년(효종 2)까지 병영이 있었기 때문에 해미에 읍성이 축성됐다는 말이다.
대략 조선시대에는 지금의 도 단위 비슷한 넓이마다 중요 군사 거점인 병영이 있었다. 육군의 경우 병영의 책임자를 대략 병사(兵使)라 했다. 경상우수사로 있던 원균이 1595년 2월에 충청병사로 전임됐다는 것은 그가 지금의 해군인 수군으로 있다가 육군으로 근무지가 바뀌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원균의 사례는 조선 시대의 군 편제가 지금처럼 육군, 공군, 해군으로 확연하게 나뉘어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원균도 충청병사로 옮겨가지만, 이순신도 전체 군대 생활 약 22년 중 그 절반인 약 11년을 육군으로 복무했다. 그런 연유로, 이순신도 1578년 해미 읍성에서 10개월 동안 근무했다. 물론 당시 이순신은 육군이었다.
해미 읍성 주변의 유명 답사지들
해미읍성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는 둘러볼 것이 많다. 남쪽으로는 김좌진 장군과 한용운 선생 생가, 동쪽으로는 수덕사와 윤봉길 의사 사적지, 동남쪽으로는 백제 부흥 운동의 중심지였던 임존성, 서쪽으로는 흥선대원군 관련 유적인 남연군 묘, 북쪽으로는 서산 마애삼존불이 있다. 경부고속도로 방향으로 나아가면 현충사도 있다.
해미읍성에 근무하던 이순신은 틈이 나는 대로 아산을 찾았을 것이다. 그때만 해도 부모님이 모두 생존해 있었으니 이순신은 별로 마음의 부담 없이 고향집으로 종종 말을 달렸으리라. 이순신이 홀로 남은 어머니를 극진히 생각하게 되는 것은 1583년에 아버지를 잃고 난 이후부터의 일이다. 해미 읍성을 둘러보았으니 현충사와 이순신 묘소에도 한번 들러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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