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마을은 함평이씨(咸平李氏) 함풍군(咸豊郡) 10대손 전라좌수사 이조판서 이춘수(李春秀)가 정착한 곳으로, 춘수는 두 아들을 두었는데 큰 아들 긍(兢)는 기성군(箕城郡)에 봉하여 사산사에 제향하고, 둘째아들 접( )은 김종직(金宗直),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鄭汝昌)에게 강마하였으며, "효우선생"이라 불렀다. 효우공 이접(李 )의 자손이 이 마을에 40여 호 거주하고 있으며 군내에는 860여 호가 살고 있다. 1789년 호구총수 지명에는 상중치(上中峙) 하중치(下中峙) 두 마을이 나와 있는데 마을의 지형이 산에 오르는 소와 같다 하여 우치(牛峙 1914년 행정구역개편전)라고 했으며 훈만 따서 "소재"라 부르기도 한다. 우치동은 불갑산맥이 내려와 매봉(鷹峰)을 기봉으로 하여 남쪽으로 10리 밖 제당산 아래 와우형국으로 서출동류수하여 옛부터 부자는 없으나 인물이 그치지 않았다고 한다.
우치리 신촌(新村)
원우치(元牛峙)에서 살던 함평이씨 갑인(咸平李氏 甲寅)이 이곳에 있는 농토를 경작하여 편하게 살기 위해 이거하여 정착했다 하며 지금은 함평이씨(咸平李氏), 나주정씨(羅州鄭氏), 김해김씨(金海金氏), 상산김씨(商山金氏), 수원백씨(水原白氏)가 이주하여 가구를 이루어 거주하고 있다. 불갑산맥이 남하하여 매봉을 기봉으로 10리 밖 제당산 아래 뭉쳐져 있는 제일 늦게 생긴 마을이라 하여 "신촌(新村)"이라 불렀다 한다.
우치리 화정(花亭)
함평이씨(咸平李氏)가 400여 년 전에 마을을 형성하였다고 하며 강천제에서 흐르는 맑은 시냇물이 마을 앞을 통과하고 초포리(草浦里)와는 농로(農路)를 사이에 두고 이계(里界)를 이루고 있다. 이 마을에 梅花落地라는 명당이 있어 마을 이름을 화정(花亭 1789년 지명)이라 하였다 한다. 마을 이름 화정이 200여 년 전부터 물리어온 이름이나 화정보다는 평장동(平章洞)으로 널리 알려왔고 평장동이란 마을이름은 고려 때 평장사가 이 마을에서 나왔으며 그 평장사가 함평모씨가 배출한 평장사라는 전설이 현재도 전해오고 있다. 1960년대에 이르러 폐촌이 되다시피 하여 현재 8호가 살고 있다.
우치리 계동(桂洞)
진주정씨(晋州鄭氏)가 360여 년 전에 마을을 이루기 시작하였다고 하나 확실히는 알 수 없으며 현재는 나주정씨(羅州鄭氏), 진주정씨(晋州鄭氏), 인동장씨(仁洞 張氏) 등이 살고 있다. 1914년 행정구역개편때 해보면에서 나산면으로 편입된 마을이다. 150여 년 전에 정권일(鄭權一)이 자양서원을 창건하여 주자를 모셨다고 하나 지금은 터만 남아있다. 지명의 유래에 대해서 정확하게는 알 수 없으나 예전에 계수나무가 많았었다는 사실로 미루어 볼 때 "계동(桂洞)"이라 하였으리라 추측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