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발자취를 찾아서.>
이 글은 필자가 동국대 경주한방병원과 자매 결연한 상하이 중의과대학〔中國上海中醫學院〕서광병원〔曙光醫院〕의 초청으로 간 연수기간중 이루어진 중국 내 대한민국임시정부(이하, 임정혼용)의 발자취를 찾아 나선 과정을 정리한 글이다.
중국체류기간은 1999년 11월 29일부터 1999년 12월 24일까지 약 4주 가량이었다. 중국에는 항일투쟁과 관련된 유적이 많이 산재되어 있다. 특히, 임정과 관련된 지역은 상하이(上海), 항저우(抗州), 전쟝(鎭江), 치쟝, 충칭(重慶)등이 대표적이다.
임정시기는 또 크게, 臨政 整立期(상하이기), 臨政 守勢期(1932∼1939), 抗日全面鬪爭期(치쟝, 충칭기) 등으로 이해할 수 있다. 위 지역들을 모두 답사하여 당시의 숨결을 느끼고 싶었지만 연수 목적으로 간 여행이라 시간이 허락하는 대로 잠시 잠시 짬을 내어 다녀올 수밖에 없었다. 다녀온 지역은 상하이를 비롯하여 항저우(12, 4. 12, 14), 전쟝(12, 12), 난징(12, 17)→창사(12, 18)→꽝조우(12, 19)→충칭(12, 19-12, 20) 이렇게 7개 도시를 다녀왔다. 여행 선후에 따라 기술하는 것도 의미가 있겠으나 대한민국임시정부사의 전체 흐름을 이해하는 데는 임정 이동 도시순으로 써내려 가는 것이 좋을 듯 하여 그렇게 썼으며 생동감을 높이기 위해 과거형과 현재형을 혼용 기술한다.
11월 29일. 만감이 교차하는 하루였다. 많은 생각들이 춤추듯이 일어나고 가라앉았다. 처음 떠나는 해외여행이라 다소 흥분된 마음으로 공항버스에 올랐다. 편안히 몸을 기대고 앉아 바라다 뵈는 경주의 기린내 내남들판이 여느 때보다 아름답게 보였다. 걱정반, 기대반. 공항에 도착하여 출국소속을 밟고 무려하게 탑승시간을 기다려 자리를 찾아 앉았다. 생각보다 기내는 좁았고, 좌석이 창문과 떨어져 있어 답답하게 느껴졌다. 어젯밤, 뒤척인 탓으로 이내 잠이 들었는데 옆에서 깨워 일어나 보니 입국카드를 기록하라고 하였다. 기입란을 다 메우고 나서 옆사람에게 말을 건넸다. 그는 중국인이었고, 관광차 서울, 부산을 다녀간다고 했다. 경주는 잘 모른다고 해서 메모지에 우리나라 역사와 경주의 관계를 간단하게 써주었더니, '고맙다'고 했고, '자기가 사는 꽝조우(廣州)에 오면 연락하라'고 이름과 전화번호를 적어 주었다. 이런저런 필담(筆談)을 나누는 사이 비행기는 벌써 상하이 홍교(虹橋)공항에 착륙하고 있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중국 입국수속을 밟았다. 긴장감이 감돌았다. 공항관계자의 제복은 촌스러웠지만 조금은 위압감을 주었다. 화물 나오는 곳에서 가방 나오기를 기다리는데 내 가방은 아무리 살펴보아도 나오지 않았다. 이쪽 칸 저쪽 칸으로 찾아다니자니 열이 확 바쳐 올라오고 별별 생각이 다 났다. 결국, 중국공항 관계자에게 도움을 청하고서야 가방을 찾았을 수 있었다. 세관은 가볍게 통과했는데 이번엔 마중 나오기로 한 분이 없었다. 정말 첩첩 산중이었다.
이리 저리 전화하고 난 뒤 다시 한참을 기다리다 하는 수 없이 목적지인 서광병원〔曙光醫院〕으로 가야겠다고 출입문을 나서는 순간 여러 사람들이 내게 우르러 몰려와 '어디 가느냐'고 야단들이었다. 택시를 타려해도 여의치 않아 "화이하이루(淮海路) 수강이위엔(曙光醫院)"이라고 했더니 승용차로 안내하며 '100위엔(元)'이라고 해서 '비싸다'고 했더니 그렇지 않다는 말투였다. 몰려왔던 사람은 암달러상인 듯 했다. 얼얼한 기분도 잠깐, 그 승용차는 지루했던 공항을 빠져나가 자꾸만 허름한 골목길을 지나고 있고 이내 약간의 두려움이 엄습해 왔다. '어찌 되겠지' 하는 체념을 넘어 어렵게 말을 꺼냈다. '여기에서 병원이 얼마나 먼지?', '시간은 얼마나 걸리는 지?' 등등. 이렇게 말을 주고받는 사이 두려움은 어느새 자취를 감추고 안도감과 턱도 아닌(?) 고마움에 팁을 얼마나 주어야 할 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결국, 목적지에 도착해 100위엔에 5위엔을 더 보태 주었다. 나중에, 요금이 60-70위엔(元)정도면 충분하다는 것을 알았으나, 아이러니하게도 별로 아까운 생각이 들지 않았다.
<상하이>
상하이는 변혁하는 도시였다. 19세기부터 물밀듯이 동양으로 몰려들던 서양세력이 멈춘 듯이 자리잡은 곳. 현재의 상하이는 대륙 중국이 서양으로 나아가는 관문이다. 도시의 건물들은 날씬한 자태를 뽐내듯이 하늘을 향해 쭉 뻗어 오르고 있었는데, 한국의 성냥갑처럼 생긴 빌딩보다는 예술적이고 미래지향적인 인상이었다.
일단,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상하이 청사를 찾아 나섰다. 임정 상하이청사는 11월 30일과 12월 10일 두 차례 다녀왔다. 상하이청사가 있는 곳은 마땅루(馬當路) 306번지, 푸징리(普慶里) 4호(이하, 보경리청사). 이곳은 1926년 12월 김구선생이 임시정부 국무령에 당선될 당시, 그의 거처로 프랑스 조계 빠이라이니멍 마랑루[白來尼蒙馬浪路, 지금의 馬當路]였다. 당시로서는 일본 경찰의 정탐과 파괴가 심해서 영사관이나 공사관처럼 드러내어 놓고 활동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어서 번듯한 독립건물을 사용하지 못하고 요인이 거처하는 거주지를 임정청사로 사용했다. 그때부터 1932년 4월 29일 윤봉길의사 의거후 항저우로 이동하기까지 이곳을 중심으로 임정의 주요활동이 이루어진 유서 깊은 곳으로, 1990년대초 중국과의 수교 후 새롭게 정비되어 관광객을 맞고 있었다.
필자가 있었던 서광병원은 마침, 마당로와 가까운 곳에 있어 쉽사리 그곳을 찾을 수 있었다. 상하이시 시정부가 위치한 인민광장에 인접한 화이하이중루(淮海中路)에 있는 지하철역, 황피남루잔(地鐵 ; 黃陂南路驛)에서 남북으로 난 마땅루를 따라 남쪽으로 50m정도만 들어가면, 중심가와는 다르게 60-70년대처럼 그야말로 남루한 거리가 연결되고, 2-3개 정도의 사거리(興安路, 太倉路, 興業路)를 지나니, 거리 사이로 황색차양이 인도(人道)쪽으로 쑥 나온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떨리는 가슴을 안고 가까이 다가서니, 선명하게 「大韓民國臨時政府舊地」라고 쓰여진 간판이 보였다. 살며시 현관문을 밀고 들어갔다. 사무실은 그리 크지 않았으며, 좌측으로 접수대가 있고, 중앙 벽면쪽에 태극기와 김구선생 흉상이 모셔져 있었다. 벽면에는 「良心建國」, 「獨立精神」라고 쓰여진 액자가 걸려 있었으며, 그 우측으로 VTR이 설치되어 있었다. 먼저 온 관광객과 잠시 기다린 후 임정의 상하이시기와 관련된 영상을 시청했다. 안내자의 인솔하에 그곳을 나와 普慶里라고 쓰여진 골목 안쪽으로 들어가니 「大韓民國臨時政府舊地」라고 쓰여진 안내판이 있었다. 대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섰다. 그곳에서는 사진을 찍지 못하게 하여 안타까웠다. 1층으로 들어서자 정면에 태극기가 대나무에 게양되어 대각선으로 교차되게 설치되어 있었고 앞쪽에는 회의탁자가 있었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밑에 화장실이라고 씌여 있어 커튼을 들쳤더니 양동이만 하나 덩그라니 놓여 있었다. 안내원은 그냥 '상하이식'이라고 했다. 가파른 계단을 오르니깐 김구선생의 집무실이라는 곳이 나오는데 김구선생의 가족사진과 침대, 책상, 그리고 몇 개의 가구들이 있고 약간 바깥쪽 가구에는 독립신문이 가득 쌓여 있었다. 또, 다시 가파른 계단을 올라 북편 방으로 들어갔다. 그 방에는 임정이 상해 있을 때 벌였던 항일투쟁을 중심으로 갖가지 자료와 사진이 전시되어 있고 윤봉길의사와 이봉창열사의 사진이 걸려 있어 일순, 숙연함을 느끼게 했다. 다시 맞은편 방을 거쳐 옆방으로 들어섰는데 그곳은 수교 후 우리 나라 역대대통령 및 주요인사의 기념품과 방명록이 전시되어 있는 곳이었다. 무엇보다 먼저 눈길을 끄는 것은 방문객 통계표였다. 연간 만 5천명에서 6만명 정도의 관람객이 다녀간 것으로 되어 있었고 1998년에는 특히 적은 수의 관광객이 다녀가 이곳에서도 IMF를 실감할 수 있었다. 층계를 내려와 1층 기념품 가게에서 윤봉길의사 일대기 한 권을 사서 나왔다.
상하이에 임정관련 유적으로 찾아가 볼 수 있는 곳이 전술한 보경리청사(1926-1932), 홍구공원(노신공원), 부흥공원과 만민공묘 등이 있다. 1919년부터 1926년까지의 임정청사는 제대로 남아 있지도 않고 일개 민간인신분으로는 주소지도 제대로 찾을 수 없는 형편이었다. 주요 활동처가 화이하이루(淮海路)를 따라 마땅루(馬當路), 루이진얼루(瑞金二路)등에 걸쳐 있었던 것은 분명한 것 같았다. 사실 이기간 임정은 외교적 노력으로 대한의 독립을 쟁취하고자 했고 지하 비밀조직의 형태를 띠었기 때문에 정확한 청사의 위치를 알 수 없다. 그래서 우리 같은 일반인은 상하이에는 현재 관람이 가능한 보경리 청사만을 상하이 임정청사라고 생각하기 쉽다.
여기에서 잠깐 임정의 청사의 소재지를 살펴보면 1919년 3월 17일 여운형, 현순, 선우혁등이 상하이에 임시사무실을 두고 임시정부 설립 책임을 지고 있었는데 이강훈의 ≪대한민국임시정부사≫에 따르면 그곳이 빠오창루(寶昌路, 나중에 寶昌路→霞飛路→淮海東, 中路) 329호라는 것이다. 1919년 4월 11일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은 제1차 회의에서 대한민국의 임시정부 수립하고 4월 13일 내외에 정부수립을 정식으로 선포한다. 그 회의 장소가 당시 프랑스 조계 진선푸루(金神父路, 지금의 瑞金二路)이다. 이곳이 구체적으로 몇 번지인지는 알 수 없으나 현재까지의 연구로써는 진선푸루 22번지라고 한다. 그후 임시정부청사를 둔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으나 1919년 9월 <申報>에 따르면 샤페이루(霞飛路) 321호에 임시정부가 있었다고 한다. 여기에 문제가 되는 것은 ≪대한민국 독립운동지혈사≫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정청'이라는 건물인데 ≪피어린 27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따르면 이 번지에 이런 건물은 없고 진선푸루부근에 이런 양식의 건물이 다소 남아 있다고 한다. 같은 해 10월 상순 상하이 주재 일본 영사관은 수차에 걸쳐 프랑스 조계 공동국에 압력을 가하여 10월 17일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하여금 샤페이루(霞飛路) 321호를 비우게 하였다. 임정은 여기에서 쫓겨난 뒤 지하로 잠입하게 되는데, 먼저 프랑스 조계 빠이얼루(白爾路, 지금의 重慶中路) 18호로 옮겼으며 거기에서 기관지 <독립신문>을 계속 발행하다가, 1922년 3월 28일 김익상과 오성륜이 新關부두에서 다나카(田中)을 암살하려다 실패하여 그곳이 노출되었다.
그 후 영미공동 조계 등을 전전하다가 1923년 8월 당시 재무총장이었던 이시영의 집으로 이사하였다. 이때부터 임시정부 주요 요인의 거처를 청사아닌 청사로 사용하게 되었다. 1926년에서 1932년까지 김구의 숙소인 빠이라이니멍 마랑루 (白來尼蒙馬浪路) 푸징리(普慶里) 4호를 중심거점으로 하고 이유필의 거처인 샤페이루(霞飛路) 빠오캉리(寶康里) 27호를 또 다른 거점으로 사용하였다.
부흥공원은 보경리 청사로부터 그리 멀지 않는 곳에 있다. 마땅루(馬當路)에서 서쪽으로 걸어나오다 보면 충칭중루(重慶中路)가 보이는 데 이 도로가 상하이를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고가도로이다. 이 도로를 건너 조금만 들어가면 부흥공원이 나온다. 이 부흥공원은 프랑스가 1909년 그네들 조계지에 만든 공원으로 이동휘선생과 김구선생이 사상논쟁을 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지금도 시원스런 수목(樹木)이 깔끔하게 조성되어 있고 앞쪽 너른 잔디밭에는 누구나 한가로이 즐길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이곳 저곳 김구선생의 체취라도 느낄까하여, 둘러보다가 「保護綠化 保護니的自己(자연을 보호하는 것은 곧 자기 스스로를 보호하는 것)」라는 팻말이 있었다. 듣기로 프랑스인들이 이 공원을 만들고 '개와 중국인은 들어 올 수 없다'라고 했다는 데 隔世之感이다. 불행히도 김구선생의 발자취는 긴세월에 잊혀지고 지워진 탓인지 전혀 느낄 수 없었다. 천천히 산보하며 서문(西門)쪽 가오란루(皐蘭路)로 나와 조금 더 걸어가니 루이진얼루였다. 임시의정원 문서에 있는 임정초기 청사 사진과 그곳의 건물을 대조해보며 천천히 걷다가 서금빈관(瑞金賓館)이라는 곳이 있어 들어 가보았는데 건물이 꽤 고풍스럽게 보였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들고 간 책과 대조해 보는데 건물 양식은 비슷했으나 임시정부 초기 청사라는 사진과는 거리가 있어 약간 실망했다.
진선푸루 22호가 루이진얼루 22호, 50호중 어디인지 의견이 분분하여 양쪽을 다 가 보았는데 22호 자리에는 큰 빌딩이 하나 서 있고 50호에는 「상해영업방옥초초유한공사」라는 상점이 있었으나 책에서의 그림과 같은 건물은 아니었다. 샤페이루(霞飛路) 즉 지금의 화이하이중루(淮海中路)의 460호와도 임정이 약간의 관계가 있었다고 하여 찾아갔더니, 458, 464, 468호는 있는데 460호 번지에 해당하는 곳에는 꽤 큰 건물이 있었으나 다음 기회로 미루다가 결국 정확히 확인하지 못했다. 현재의 상하이 지도상에 노신공원(魯迅公園) 서편에 빠오창루(寶昌路)라는 도로가 있는데 처음에는 '그곳이 옛날의 빠오창루인가'하여 헤매기도 하였다.
노신공원을 찾은 날은 해가 거의 기운 오후였다. 바람도 몹시 불고 약간 쌀쌀하게 느껴지는 날이었다. 으스름이 내린 노신공원에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다. 노신공원은 홍구공원(虹口公園)으로 윤봉길의사의 의거장이다. 정문을 들어서서 안내판을 보았지만 이것에 대한 정보가 하나도 없어 적이 실망하고 이리저리 헤매다가 노신동상 뒷쪽 동편에서 겨우 비석하나를 발견했다. 비석은 그리 크지 않았고 윤의사에 대한 일대기와 의거에 관한 내용이 씌여져 있었다. 정말 반가웠다. 사진을 찍으러 왔다갔다하는데 중국학생으로 보이는 몇몇이 자꾸 말을 걸어와 약간 귀찮았다. 다시 자세히 살펴보니 이곳 전체가 매원(梅園)이라는 작은 정원형식으로 꾸며져 있었고 비석 뒷 둔덕에는 현판에 「梅軒」이라고 씌여진 이층 한옥양식의 건물이 있어 들어가 보았으나 시설물이 전혀 없어 설렁했다. '이곳에도 윤봉길의사 관련 자료를 전시하고 안내원을 두어 관람하게 하였으면... ' 하는 생각을 했다.
상하이에는 임정관련 유적이외에도 구경할 곳이 많은데 청나라가 서구에 조계지로 할양했던 와이탄(外灘)은 아직도 서구풍의 건물들이 즐비해 있고 맞은 편 푸동지구의 빌딩은 중국의 미래를 상징하듯이 하늘높이 솟아 있다. 또 위위엔(豫園)이라는 공원이 있는데 과거의 상하이 상류층 분위기를 잘 느낄 수 있다. 무엇보다 특이했던 것은 이층버스인데 홍콩에 관한 TV에서나 보던 그 이층버스를 타니 기분도 상쾌했고, '관광도시인 우리 경주에도 이런 이층버스가 있어 안압지, 박물관, 보문, 불국사 등을 오가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항저우>
항저우에는 12월 4일 관광차 다녀온 후, 다시 12월 14일 임정관련 지역을 답사했다. 허둥지둥 오전 업무를 정리하니 11시 30분. 겨우 병원을 빠져 나와 택시에 올라타고 시간을 보니 11시 42분. 12시 기차인데…. 운전수에게 기차시간을 이야기하고서도 왠지 불안했다. 역 도착시간 11시 55분. 그제야 약간 안심이 되었고 급히 좌석을 찾아 앉고서야 턱까지 올라온 숨을 몰아 쉴 수 있었다. 그렇게 앉아있는데 여승무원이 과일을 권하길래 긴장된 목소리로 "뿌야오(不要)"라고 내뱉었는데 그것이 마음에 내내 걸렸다. 한참을 기다려 그 여 승무원이 다시 왔길래 정식으로 사과하고 작은 과일접시 하나를 골랐다.
시내를 벗어나 교외로 나가자 말자 끝을 볼 수는 광활한 평야가 계속 되었다. 촌스런 2층 건물들이 간혹 눈에 띄었고 고풍스럽게 생긴 아치형 다리는 저 멀리 사라지도록 눈길을 끌었다. 끝없는 평원, 개방후 20년. 창밖으로 내비치는 교외의 풍경은 그런 내색을 전혀 하지 않았다. 가을걷이를 끝낸 펀펀한 들판, 파릇한 채소밭, 비닐하우스…. 불현듯 무작정 걷고 싶다는 충동에 휩싸였다. 이렇게 1시간 가량 가다보니 늪도 많이 보이고 건물도 제법 큰 곳이 나타났다. 쟈싱(嘉興)이었다. 상하이에서 한발짝도 벗어나지 않았던 김구선생이 윤봉길의사 의거 직후 몸을 의탁한 곳이다. 기차에 곧장 뛰어 내려 그분의 발자취를 찾고 싶었다. 또 다시 1시간 가량을 달리자 이제는 제법 큰 고층건물이 나타났고 도시도 상당히 커 보였는데 이곳이 바로 항저우(杭州)였다.
항저우는 중국 20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6대 고도의 하나라고 하며 시호(西湖)로 유명한데 백낙천, 소동파등이 이곳에서 즐겨 시를 읊었다고 한다. 이 시호를 중심으로 높이가 59.9m의 육화탑, 영은사등도 유명하다. 임정요인들도 간혹 이 시호에 들러 소일했다고 한다. 필자가 갔을 때는 항저우역 공사로 항저우동역에 내렸는데, 시호는 항저우역 서편에 있고 임정요인과 관련된 지역은 시호 동편 도로인 湖濱路부근의 仁和路, 學士路, 長生路등에 산재되어 있다. 먼저 임정요인들이 항저우에서 처음으로 자리를 잡은 군영반점(群英飯店)을 찾아 나섰다. 飯店은 우리나라의 여관에 해당한다. 인화로에 있다기에 그 길을 찾아 살피다가 仁和路 22號에서 큰 어려움없이 군영반점을 찾을 수 있었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길을 따라 쭉 호빈로까지 가서 저녁놀에 비친 시호를 구경하고 다시 되돌아오는데 사거리에서 구두딱기가 측은하기도 하고 구두도 너무 더러워 얼마냐고 했더니 2元이라고 해서 앉았더니 이런저런 말을 시키면서 다 닦고 나서는 17元이나 받았다. 정말 불쾌했다.
군영반점에 들러 혹시 옛이름이 淸泰第二旅舍가 맞느냐고 했더니 그렇다고 해서 양해를 구하여 안으로 들어갔다. 건물은 두 그루의 야자수가 있는 정원을 중심으로 중간을 비워 삥 두른 이층 건물이었다. 이곳이 정말 상하이에서 빠져 나온 임정요인의 숙소인가 의심이 되어 관계자에게 물었더니 그렇다고 했다. 그러나 내게 그런 숨결은 느껴지지 않았다.
다시 임정요인들이 일정의 눈을 피하여 숙소로 정한 學士路에 있다는 思흠方 41호을 찾아 나섰다. 지도를 몇 번 확인하고서야 思흠方을 찾았는데 지금 思흠方 41호에 아무 사람도 살지 않는 듯 했다. 다른 샛길을 나오니 菩提路였고 思흠方이라고 쓰여진 중국식 동네입구가 보였다. 그 다음으로 임정요인이 숙소로 삼은 湖邊村 23호를 찾아 나섰는데 長生路부근에서 이리저리 헤매다가 겨우 뒷문을 통해 그곳에 들어갈 수 있었다. 思흠方 41호, 湖邊村 23호는 도로에서 깊숙이 자리하고 있었으며 아주 남루해 보였다. 板橋路 오복리는 주변 사람들과 택시 운전수에게 물어보아도 한결같이 모른다고 하여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사실 임정이 상하이를 떠난 후 제대로 된 정부 활동을 하지 못하고 피난하기에 급급했다. 치쟝과 충칭에 이르러 어느 정도 구색을 갖추기까지 인적, 물적 어려움으로 임정의 명맥을 유지하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했다. 내부적으로도 크게 민족진영과 공산진영으로 나누어져 있었고 임정내에서도 각 파벌간에 사분오열하는 양상을 띄었다. 그래서 임정이 거쳐간 항저우, 난징, 꽝저우에 임정관련 유적이 그리 많이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이 기간중에도 김구 선생을 중심으로 중국 국민당정부의 장개석과의 협상을 통하여 낙양군관학교에 한인훈련반을 설치하여 한인 청년들에게 군사훈련을 시키고 각 단체간의 통합 노력을 부단히 하여 차후 충칭에서의 전면적인 항일투쟁을 위한 준비작업을 계속하게 된다.
기차시간이 약간 남아 항조우의 명물이라는 육화탑으로 향했다. 육화탑을 이리저리 구경하고 시호로 다시 돌아와 소동파의 감독하에 만들었다는 소제(蘇堤)로 들어섰다. 시호에는 호수중간에 뚝길을 내어 남북으로 길게 소제가, 동서로 백제(白堤)가 있어 산책하기에 더 할 수없이 좋다. 잔잔한 시호의 소제를 호젓하게 걷노라니 고즈넉한 그 분위기가 마치 그리운 고향에 온 듯하여 흥얼흥얼 소리내어 오랜만에 고향노래를 불렀다. 정말 잊지 못할 시호(西湖)였다.
<전쟝>
12월 12일. 아침에 눈을 번쩍 뜨니 5시 30분. 급히 준비해서 어두운 계단을 도둑고양이모양 살금살금 내려와 택시를 잡아탔다. 상하이역에 도착하여 전날에 기차시간표를 보고 미리 써두었던 메모지를 꺼내었다. '07:49 出發 →11:08 到鎭江'. 조마조마하며 기다리다 표를 받아들고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혼잡한 역 앞에서 한참 기다리다 플래포옴으로 나갔으나 기차표에 기차 號數가 적혀있지 않아 여승무원에게 물었더니 그냥 타라는 시늉을 했다. 왠지 굉장히 불친절하다는 느낌이 들었고 갑자기 우리나라 새마을호의 친절했던 여승무원이 떠올랐다.
상하이 출발 07:49. 곤산, 수저우, 무석, 상주, 단양을 거치는 동안 이유는 명확히 알 수 없지만 어쩌면 우리에게 상하이나 충칭의 임정청사가 베이징의 자금성(紫金城)보다 더 귀중할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스쳐 지나가는 풍경들을 구경하노라니 시간은 벌써 11시 반을 넘었고 곧 전쟝에 도착했다. 일단 오늘 돌아갈 기차표부터 예매했다. 아침에 서두른 통에 배는 고파오고 어디로 어떻게 가야할 지 길은 막막했다. 일단 박물관부터 가야겠다싶어 택시에 올랐다. 이곳의 택시는 대체로 상하이나 항저우보다 허름했고 요금도 싼 편이었다. 겨우 박물관에 내렸는데 점심시간이라고 1시에 다시 오라고 했다. 허탈한 마음에 되돌아 천천히 내려오는데 길이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주린 배부터 채우고 시작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 鎭江市 西郊賓館이라는 꽤 그럴싸한 곳이 보여 무작정 들어갔다. 건물 2층에 식당이 있었는데 무슨 행사가 있었는지 약간 소란했다. 중국식으로 이것저것 시켰는데 혼자 먹기에 민망할 정도로 많이 나왔다. 상하이보다는 인심이 후한 것일까? 혹시나 하여 목원소학교를 물어봤는데, '잘 모른다'고 했다. 다시 '수륙사항(水陸士巷)로를 아느냐'고 했더니, 지도에서 찾아주었다. 유아원이름도 '아는 대로 다 써보라'고 했더니, '李家大山幼兒園', '機關幼兒園'이라고 쓰기에 궤관유치원으로 들었던 이름이 '機關'이겠구나하는 생각이 번쩍 들어 위치를 확인하니 수륙사항로와 비슷하게 일치했다.
사실 필자는 한국사를 전공한 사람도 아니고 대한민국임시정부를 깊이 연구하지도 않은 입장이라 임정이 전쟝에 있었을 때 어디에 기거했는지 어떤 일을 했는지 잘 모른다. 단지 한국인이고 중국을 여행할 기회가 있었기에 임정관련 지역을 둘러보고 싶어 몇 가지 책을 찾고 임정관련 다큐멘타리를 구해 보고 자료를 수집했다. 다큐멘타리 내용이 비교적 상세하고 좋았으나 그곳을 직접 방문하고자하는 사람에게는 약간 부족한 면이 있었다. 관련지역의 위치가 지도상에 정확하게 기재되어 있지 않고 한국식 발음으로만 방송된 부분이 많았다.
임정요인들이 항저우로부터 이곳, 전쟝에 온 시기는 1935년 10월경이었고 수륙사항 58호 기관유아원자리에 여장을 푼 것으로 되어 있다. 목원소학교와 임정요인과도 관계가 있었는데 이곳에서 1925년 박병강이 항일에 관한 연설을 한 것으로 되어 있고 1935년 임정요인들이 다시 이곳을 방문하였다고 한다. 또 전쟝박물관에는 박병강의 글씨가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일단 택시를 잡아타고 수륙사항으로 갔다. 「大市口」라는 곳에서 내려 수륙사항로(水陸士巷路)에 도착하여 차례로 번지를 확인하며 가다가 결국 58번지를 찾았는데 아파트형 건물이었다. 약간 실망하여 뒤를 돌아가 보니 유치원이나 관공서 비슷한 건물이 보여 서편으로 돌아가니 정말 반갑고도 반가운 이름. '市及機關幼兒園'이라고 적혀진 명패가 나타났다. 얼키설키 꼬인 실타래가 풀리는 기분이었다. 잠겨진 대문 틈새로 한 컷 찍고 돌아 나오면서 혹시나 목원소학교가 이곳 어디에 있는가하여 이곳 저곳 두리번거리며 나오다가 건강로(健康路)라는 곳에서 배드민턴 치는 사람들이 있어,'木園小學'이라고 쓰며 아느냐고 했더니 '木園'이 아니라 '穆園小學'은 있다고 해서 '정확히 어디냐'고 했더니 지도에는 표시하지 못했다. 일단, 유아원 위치라도 다시 확인해 보기로 하고 되돌아가던 중에 군부대가 하나 있었는데 부대명이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으나, 해방군 342423부대였던 것 같다. 여하튼 이 길이 산문구가(山門口街)였고 이 길과 수륙사항(水陸士巷)길이 만나는 지점에 상가가 있고 이곳에서 20-30m만 들어가면 바로 '市及機關幼兒園'이다.
목원소학(穆園小學)으로 가기 위해 택시를 잡고 메모장을 보였는데 '모른다'고 했다. 또 다른 택시가 왔길래 물었더니 역시 '모른다'고 하여 난감하였다. 일단, 택시라도 타고 찾아보자는 생각에 무작정 올라탔다. 아무래도 목원소학이 오래되었을 것 같아 제일 오래된 小學으로 가자고 했더니 팔차항소학(八叉巷小學)으로 데려다 주었다. 들어가 살펴보니 아무래도 아닌 것 같아 그곳 관리인에게 목원소학을 물었더니 보탑로(寶塔路)에 있다며 아까 그 택시 운전자에게 설명해 주었다. 택시 운전수는 그래도 잘 몰랐는지 복잡한 시장길을 헤치며 물어 물어 어느 골목까지 와서는 그냥 '들어 가보라'고 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골목길을 들어섰고 작은 학교를 지나 보탑횡로(寶塔橫路)가 끝나고 양가문(楊家門) 17호라고 적힌 집 옆에 목원소학(穆園小學)이라고 명패가 걸려 있었다. 반가워하는 것도 잠깐, 대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옆 문방구, 관리인으로 보이는 사람에게 '잠깐 볼 수 없느냐'고 통사정을 했으나 일요일이라 절대 안 된다고 했다. 야속한 마음이 치밀었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밖에서 몇 컷 찍고 돌아 나와 박물관으로 향했다. 지도상으로 보면 박물관 옆 백선공원(伯先公園)에서 맞은편 길, 대용왕항로(大龍王巷路)로 들어섰더라면 목원소학을 훨씬 쉽게 찾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전쟝박물관은 벽돌건물로 우아하게 꾸며져 있었다. 공사중이라서 그런지 전시 유물수는 그리 많지 않았다. 전쟝은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중국 삼국시대 오나라 초기(AD205-220) 수도였다. 박병강의 글씨를 찾으려고 살폈으나 도저히 찾을 수 없었고 전시 유물을 구경하다가 뜻밖에 '靑瓷博山香薰'이라는 자기(瓷器)를 보았는데 특이하게 우리나라 '百濟大香爐'〔금동용봉봉래산대향로〕에 조각된 산 모양과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사실 백제대향로는 찬탄을 자아내기에 손색이 없다. 어떻게 그런 상상을 할 수 있었는지…. 가만히 생각해보면 백제의 어느 瑞氣가 비치는 새벽, 교묘하게 또아리를 튼 영험한 향나무 꼭대기에 신령스런 새가 앉은 모습이라고 할까? 여하튼, 전쟝이 백제와 가까웠던 오나라지역이였기에 교류가 있었을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을 것이다. 차후에 심도있는 연구가 필요할 것으로 사료된다.
시간이 약간 남을 것 같아 박물관을 빠져 나오자마자 전쟝의 명물 금산사(金山寺)로 향했다. 날이 어둑해 오는 것 같아 먼저 자수탑(慈壽塔)에 올랐다. 맨 위층에 올라 바라보니 북(北)으로 장강(長江)이 유유히 흐르고 서(西)로는 탑영호(塔影湖)의 물결이 잔잔했다. 다시 천천히 경내로 내려왔는데 맨 뒤쪽부터 자수탑, 장경루(藏經樓), 대웅보전(大雄寶殿), 정문순으로 사원이 배치되어 있었다. 특이하게 정문건물 중앙에는 팅팅하게 살이 오른 노승상(老僧像)을 모셔놓고 좌우주변에 사천왕상을 비치시켜 놓았는데 그 크기가 장대했다. 금산사 서편 하천을 건너 탑영호로 가서 천천히 거닐며 바라다 보이는 자수탑은 더없이 아름답게 느껴졌다. 택시를 타고 나오는 길에 그윽한 그 모습이 아쉬워 몇 번이고 고개를 돌렸고 아스라히 언덕을 넘어서고야 마음을 잡을 수 있었다. 전쟝은 우리로서는 여간하여 가보기 힘든 곳이지만 꼭 다시 한번 방문하고픈 도시이다.
<난징>
12월 17일 금요일.
난징, 창사, 꽝저우, 충칭은 12월 17일부터 12월 20일까지 연휴라서 작정하고 떠나게 되었다. 주머니에는 꽝조우에서 충칭가는 비행기표와 12월 20일 충칭에서 상하이로 오는 비행기표 2장. 상하이역을 출발했나 싶더니 11시 30분 난징역 도착. 먼저 매표소로 가서 창사로 가는 기차표를 예매하려 하였으나 여의치 않아 정주(鄭州)가는 기차표를 산 후 일단 점심부터 먹어야겠기에 자리를 잡고 기차시간표와 앞뒤를 맞춰보니 직접 가는 것이 아니라 상하이를 돌아가는 기차였다. 할 수 없이 다시 기차역으로 가서 환불했다. 이제 믿을 것은 비행기밖에 없었다. 우여곡절 끝에 시내 비행기표 예매처로 갔으나 12월 18일 아침 비행기표는 없다는 것이다.
하는 수 없이 창사로 가는 저녁 비행기표라도 사서 불안한 마음으로 어떻게 할까 생각하다가 난징중의과대학〔南京中醫學院〕금행루(金杏樓)라는 초대소로 갔다. 초대소에서 하루를 유숙하는데 125위엔(元). 아침식사도 가능하다고 해서 수속을 밟았다. 여장을 푼 후 임정관련지역 몇 곳이라도 찾아 볼까하여 천천히 길을 나섰다. 일단 중화문(中華門)근처에 있다는 회청교(淮淸橋), 동관두(東關頭)를 찾아야 했다. 중화문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짧은 겨울해가 넘어가고 있었다. 중화문에서 기웃기웃해봐도 감이 잡히지 않아 지나가는 몇 사람에게 회청교, 동관두를 물어도 정확히 아는 사람이 없는 것 같았다. 날은 점점 어두워오고 피로가 몰려오는 것 같아 내일을 기약하고 숙소로 돌아왔다.
12월 18일 토요일.
아침에 눈을 뜨니, 7시. 서둘러 몸을 추스리고 간단히 아침식사를 마친 뒤 길을 나섰다. 막막했다. 어디로 어떻게 가야할까? 광화문(光華門) 근처 남기가(藍기街)를 찾아보기로 하고 택시에 올랐다. 광화문(光華門)사거리에서 아침햇살을 받으며 헤매다가 사거리 동북쪽에 남기가신촌(藍기街新村)라는 표지판이 보여 그곳으로 갔는데 온통 아파트 단지였다. 잠시 허탈한 마음이 일었다. '역사는 우리를 마냥 기다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도 혹시 허물어진 담장이라도 남아 있을까하여 안쪽 마을로 들어갔더니 남기가 30호-44호까지는 미개발지역으로 허름하게 방치되어 있었다.
한참을 돌아다니다가 겨우 남기가(藍기街) 8호라는 명패를 찾았고 그곳에 지금은 전신공정공사(電信工程公司)라는 신식 건물이 들어서 있었다. 그 옆은 남경시광화동가소학(南京市光華東街小學) 후문이었다. 난징(南京)에서 임정요인들은 1936년 2월부터 1937년 11월까지 약 2년간 머물렀다. 이기간 중에 일제는 대 중국공세를 나날이 강화시키고 있었고 임정측에서는 사분오열된 단체들을 하나로 묶고자하는 노력이 힘을 얻기 시작하여 마침내 1937년 8월 한국국민당,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등 여러 단체들에 의해 한국광복운동단체 연합회가 결성되기에 이르렀다.
당시, 김구선생은 회청교부근에서 살았으며 광화문부근 남기가(藍기街) 8호에는 다수의 임정요인이 거주했고 중화문부근 동관두 32호에는 한국국민당 청년들이 살았다. 또, 마로가(馬路街)에는 김구선생 어머니가 교부관(敎敷館)에는 조선혁명당원이 살았다고 한다. 남기가에서 광화문쪽으로 빠져 나오는 길은 인산인해를 이룬 듯 했다. 다시 중화문을 찾았다. 중화문은 명 태조 주원장이 수십년간의 공사로 이루어 낸 엄청난 건축물이었다. 문 하나가 그야말로 난공불락의 성곽을 연상하게 했다. 성곽의 두께도 엄청나고 성문 위는 축구장을 방불케 할만큼 넓었다. 중화문을 벗어나 발길 가는 대로 허름한 시장를 지나 사람들에게 동관두, 회청교를 물었다. 마로가(馬路街)는 지도상에 마도가(馬道街)라고 했다. 길을 뒤져 찾아 나갔으나 상하이만큼 표지판이 잘 배치되어 있지 않아서 찾는 것이 여간 어렵지 않았다. 부자묘(夫子廟)근처의 고급스런 관광요식업소를 지나 남경 부자묘 대시장을 빠져나가자 드디어 동관두 표지판이 나타났다.
반가운 마음에 급히 번지수를 확인해 나갔는데 32호는 그냥 시멘트벽에 쓰여있어 스쳐 지나쳤는데 골목 끝까지 나가도 32번지가 없어 되돌아와 그 집에 들어섰는데 초로의 여인 둘이 무엇인가 일을 하고 있었다. '이곳이 대한민국임시정부와 관련 있는 곳이냐'고 했더니 '그렇다'고 했으며 잘 알아듣지 못하는 중국어로 열심히 설명하고 집을 소개해 주었다. 고맙고, 반가워서 별 것 아니지만 먹을 것을 조금 사주고 나와서 김구선생이 살았다던 회청교를 찾아 나섰다. 부근에 있을 것 같아 물어 가보니 장백로(長白路)와 건강로(建康路) 교차로를 조금 지나쳐 작은 다리가 하나 있었다. 다리아래 시냇물은 너무 지저분하여 구역질이 날 정도였다. 다리주위에는 작은 시장이 이루어져 북새통이었다. 아마 이 하천이 과거에는 內 해자 역할을 했던 것 같았다. 다리근처에는 퇴락한 집들이 몇 채 있었지만 김구선생이 정확히 어디에 거주했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돌려 가까이에 있는 공자묘에 들렀다. 그곳은 걸어서 그리 멀지 않는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렇게 답사를 마친 후 비행기 이륙시간이 많이 남아 중산릉(中山陵)으로 향했다. 중산이 누구인가? 중국 근대화의 국부이며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던 우리 대한민국임시정부를 1921년 11월 세계 최초로 인정한 호법정부의 수장, 손문선생이 아니던가! 중산릉에 입장하면서 흐트러졌던 옷깃을 여미었다. 중산릉은 산비탈에 조성되어 있었는데 정문, 비각, 능의 순으로 품위있게 배치되어 있었고 능에는 손문선생의 민족(民族), 민생(民生), 민권(民權)으로 대변되는 삼민주의의 글귀가 처마 바로 밑에 새겨져 있었다. 능각 안으로 들어서자 손문선생의 동상이 중앙에 있었고 그 뒤로 돌아 들어가니 중앙에 손문선생의 석곽이 모셔져 있었다. 경건한 마음으로 한바퀴 돌아 감사의 마음을 표한 후 천천히 걸어 나와 전망을 보니 천하 명당답게 탁 트인 풍광이 너무나 시원하여 자리를 뜨기가 아쉬웠다.
그 인근에 있는 명효릉(明孝陵)도 구경했다. 명효릉은 명나라 주원장의 무덤으로 진입하는 곳부터 무참히 파괴된 것을 억지로 끼워 복원한 느낌을 주었다. 천천히 걸어 올라가 능에 이르렀는데 산 하나 전부가 무덤인 듯 했다. 거대하기에 숙연해지기보다는 무엇인가 울컥하고 분노가 치밀었다. 당시의 백성들은 땅 한 평 없는 자가 태반이었을 텐데 자기는 죽어서도 산 하나를 차지하니 말이다.
그럭저럭 비행기 이륙시간이 다 되어 가는 것 같아 다시 시내로 향했다. 오는 도중에 명고궁(明古宮)이란 곳에 들렀는데 시내 한가운데 담으로 둘러처진 옛 고궁터에는 폐허로 남겨진 땅에 쓰레기만 가득하여 역사의 허망함을 느끼게 하였다. 잘 정비하여 시민들이 쉴 수 있는 공간으로 활용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지리를 잘 몰라 택시를 타고 공항으로 향했는데 시내에서 상당히 먼 곳에 공항이 위치해 있었다. 공항은 신식 건물로 깨끗하게 잘 정비되어 있었다. 비행기 좌석에 앉아서도 창사에서 꽝저우까지의 기차표를 구할 수 있을까하는 걱정에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비행기에서 내려 또 택시를 탔는데 역시 불친절한 느낌을 많이 받았다. 공항에서 도심까지는 왜 또 그리 먼지. 도착하여 요금계산 때문에 결국 실갱이를 하고야 말았다. '우리 나라 택시운전사도 혹시 외국인에게 이렇게 무례하지 않을까'하는 걱정이 들었다.
창사역에 가서 이튿날 아침 꽝저우에 도착하는 기차표를 손에 들고, 김구선생이 남목청(南木廳) 9호에서 피격(被擊)되어 몇 달간 입원한 상아병원(湘雅醫院)으로 향했다. 밤인데다 시간도 없고 하여 제대로 살펴보지도 못하고 앞 건물만 들렀다가 다시 나왔다. 시간이 너무 아쉬웠다. 며칠이고 머물면서 임정요인 살았던 서원북리(西園北里)나 남목청(南木廳)등을 둘러보고 싶었지만 다음을 기약할 수밖에 없었다.
<꽝저우>
12월 18일
꽝저우로 달려가는 기차에 몸을 싣고서야 '이제야, 예정대로 되는가'하여 조금 안심이 되었다. 기차 안은 상당히 깨끗했다. 중국의 기차는 좌석형태에 따라 경좌(硬座), 연좌(軟座), 경와(硬臥), 연와(軟臥) 등으로 구분되는데 연와라서 그런지 별로 불편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어두워 아무 것도 볼 수 없는 창 밖을 흘깃흘깃 보다가 이내 잠이 들었다.
12월 19일
아침에 뒤척이는 기운에 일어나 창 밖을 보니, 그렇게 특별나게 보이지 않는 어슴프레한 산과 들이 지나칠 뿐이었다. 꽝저우역에는 6시 48분에 도착했다. 지도부터 사야겠다는 생각에 가격을 물었더니 5위엔(元)이라고 했어, '비싸다'고 했더니 2위엔(元)에 해주었다. '나도 이제 슬슬 중국사람이 다 되어 가는구나'하는 생각에 쓴 웃음이 나왔다. 지도대로 확인하며 가도 목적지인 중조인민혈의정(中朝人民血義亭)이 보이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버스에 올랐는데 정말 구식이었다. 좌석은 목조의자였고 요금은 1위엔(元)밖에 하지 않았다. 길을 또 어긋나게 가는 것 같아 내려서 잠시 걸었는데 꽝저우라면 상당히 위도가 낮은 데도 쌀쌀한 날씨였다. 조금 걷다보니 중산기념당(中山紀念堂)이 보였다. 이내 난징의 중산릉이 떠올랐고 손문선생에 대해 깊은 친밀감을 느끼게 했다.
일단은 목적지부터 가야겠다는 생각에 다시 버스를 타고 광주봉기기념공원(廣州奉起記念公園)으로 향했다. 얼핏보기에 숲이 깔끔하게 조성되어 있어 들어갔는데 다양한 나이의 여인들이 음악에 맞춰 체조도 하고 춤도 추고 시끌시끌했다. 이렇게 목적지인 중조인민혈의정을 찾을 수 있었다. 이 정은 1927년 12월 11일 꽝조우에서 공산당의 사회주의 혁명 봉기가 있었을 때 우리 한국인 150여명이 여기에 참가하여 함께 싸웠고 대부분 희생되었기에, 이것에 대한 추모의 뜻으로 광주봉기기념공원에 세워진 정자이다. 내용들을 차근차근 메모하고 능으로 크게 조성된 곳에 가서 참배한 후 동산구 건설국을 찾아나섰다. 동산공원옆에 그곳이 있다고 들었는데 지도상에는 동산호공원은 있어도 동산공원은 없었다. 일단 동산호공원으로 가서 공안요원에게 동산구 건설국을 물으니 친절하게 동천로(東川路)옆이라고 지도에 표시해 주었다.
다시 택시를 타고 그 부근인 듯한 곳에 내려 그곳을 물어봐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일단, 부딛쳐 보기로 하고 조금 걷다가 슬쩍 문패를 보니 동산구 건설국이라고 쓰여 있었다. 직접 들어갈 수 없어 밖에서 이쪽, 저쪽 사진을 찍었다. 임정요인들이 꽝저우까지 밀려온 후 처음 여장을 푼 곳이 바로 이곳 동산구 건설국자리이었다. 인근 동산호공원자리에 있었다는 아시아 여관에는 임정요인 가족들이 잠시 머물기도 했다. 지금 동산호공원에는 그런 흔적을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고 그때의 일들을 아는 지 모르는 지 한가로운 사람들만 가득했다. 임정요인들은 여기에서도 얼마 있지 못하고 1938년 10월 일본군의 공세를 피하여 푸산을 거쳐 충칭으로 향하게 된다.
동산호공원을 가벼운 마음으로 산책한 후, 중산기념당으로 향했다. 꽝저우를 떠나며 중산에게 감사의 참배를 드리고자 하였으나 마카오(奧門)회귀 기념 행사관계로 일반인에게는 출입이 허용되지 않았다. 문밖에서나마 가볍게 묵념한 후 공항으로 향했다. 비행기에 올라 내려다 뵈는 구름들이 마치 양탄자를 깔아 놓은 듯 했다. 지금은 이렇게 쉽게 충칭으로 갈 수 있지만 당시 임정요인과 그 가족들은 험난한 산길, 물길을 통해 류조우(柳州), 꾸이양(貴陽)을 거쳐 충칭인근의 치쟝(기江)에 이르게 된다. 임정은 치쟝의 임강로, 상승가라는 곳에서 1939년 3월부터 1940년 9월까지 머물면서, 좌우합작, 7당회의 등을 이끌어내게 된다. 필자는 당초 이곳까지는 답사하고 싶었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아 갈 수 없었는데 기회가 주어지면 우한, 창사, 치쟝등은 꼭 가보고 싶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비행기는 부딛칠 것 같은 산사이를 뚫고 충칭공항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충칭>
12월 19일
충칭, 드디어 충칭이었다. 가릉강(嘉陵江)과 양자강을 끼고 있는 산악도시 충칭은 양자강 상류의 경제중심지로 중일전쟁당시 국민당정권이 일본군에 밀려 이곳을 임시 수도로 정한 후 인구가 엄청나게 늘어났으며 1997년이래 베이징, 상하이, 천진과 더불어 중국 4대 직할도시중의 하나이다.
충칭에 도착하자마자 중구(中區) 연화지(蓮花池) 38호에 있는 임정청사부터 찾았다. 중산일로(中山一路)와 화평로(和平路)가 만나는 지점에서 비탈길을 약간 내려가면 큰 빌딩사이로 임정청사(이하, 연화지 청사)를 알리는 청색표지판이 보인다. 이 표지판이 있는 골목길에서 바라보면 새롭게 들어선 아파트 사이로 약간 퇴락해 보이는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가까이 다가가면 입구 벽면에 "부정시림국민한대"라고 쓰여있다. 산비탈을 깎아 계단식으로 만든 대지에 건물이 서너 동 세워져 있는데 맨 앞쪽 건물에 들어서면 정면에 상하이 임정청사처럼 김구선생 흉상과 태극기가 모셔져 있다. 좌우 벽면으로 임정활동의 기본자료들이 깨끗하게 전시되어 있고 좌우로 통하는 각각의 방에는 외교활동과 군사활동에 관한 자료들이 잘 전시되어 있다. 계단을 따라 각 건물과 방에는 내무부, 재무부, 주석실 등이 상당히 규모있게 꾸며져 있었으나 어떤 방은 창고처럼 전혀 정리가 되지 않은 채 방치되어 있었고 창문틀사이로 깨어진 유리조각도 치워지지 않은 상태였다. 관계자에 따르면 '가까운 시일 내에 독립기념관측과 협조하여 새로 개조한다'고 하니 기대가 크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임정은 이곳에서 해방을 맞이하게 된다. 임정이 충칭에 자리를 잡은 후 그 어느 때보다 활발한 항일투쟁을 굳건하게 전개하게 되는데 1940년 9월 17일 가릉강가의 가릉빈관(嘉陵賓館)에서 숙원사업이던 한국광복군을 창설하고 총사령부를 시안에 두게 된다. 이로써 임정은 비록 규모는 작았지만 항일전쟁의 기반인 군대를 보유하게 된다. 아울러, 한국의 독립과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제적 승인을 획득하기 위해 적극적인 외교활동을 전개하게 된다. 또 내부적으로 당시 최대 좌파조직인 조선민족혁명당이 임정에 참가함으로써 한국의 독립을 위해 양대 진영은 같은 길을 걷게 된다. 해방될 때까지 한국광복군은 일본군과 본토에 대한 선전 공작으로 일본군의 사기를 저하시키고 중국군과 협조하여 전쟁포로를 관리하는 동시에 한국인 포로를 계도시켜 광복군에 편입시켰다. 그러나 1945년 초, 광복군과 미군의 합동작전이 계획되었으나 일본이 너무 일찍 항복하는 바람에 실질적인 전과를 올리지 못하게 된다. 김구선생은 이 일을 두고 두고 아쉬워했다고 한다.
12월 20일. AM 7:00
밖은 아직 어두웠다. 창문밖에는 비가 살포시 내리고 안개는 짙게 깔려 충칭은 역시 안개의 도시인가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간단하게 빵과 커피로 아침식사를 해결하고 천천히 걸어 나와 버스를 타려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버스는 오지 않고 그냥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 하는 수 없이 함께 시내쪽으로 걸어가는데 장강대교에 이르러서야 뭔가 행사가 진행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알고 보니 마카오(奧門)회귀 기념행사였다. 다리를 거의 다 건너자 건너편 강변도로에서 차량들이 번쩍번쩍 헤드라이트을 켜대며 행진하고 있었다. 약간 부럽기도 하고 또 얄미웠다. 우리도 남북통일이 되어 서로가 서로를 찾을 때 얼마나 기쁠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중국인은 마카오 찾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면서 왜 그네들은 달라이라마를 비롯한 티벳인에게 티벳을 돌려주지 않는 지 모르겠다. 나는 우리나라가 티벳인을 민간차원에서라도 많이 도와야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도 그네들처럼 똑같은 어려움을 겪지 않았던가?
자동차을 통제시켜 걷기에는 오히려 좋았다. 중흥로(中興路) 비탈길을 한참만에 올라가니 교구장이 나타났다. 교구장로타리 안쪽에는 꽤 넓은 공간이 있어 노친네들이 삼삼오오 쉬고 있었다. 이곳 어느 부근이 충칭으로 온 임정이 처음 집무를 본 곳이다. 임정은 여기에서 화평로 2항(오사야항)쪽으로 옮긴 후 다시 연화지로 옮겨 번듯한 정부청사를 갖게 되었던 것이다. 필자는 교구장에서 연화지 청사까지 다시 언덕길을 천천히 걸어간 후 광복군 사령부가 있었던 추용로(鄒容路) 37호에 '味元'이라고 쓰여있는 건물로 향했다. 그곳은 시내 중심가의 꽤 유명한 해방비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으로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그곳에 도착하여 한참 시내구경를 한 후 쾌이찬(快餐, 길거리에서 서서 먹는 중국식 간이식사)을 걸인처럼 쩝쩝 먹고 난 후 토교(土橋)로 향했다.
토교는 임정이 치쟝으로부터 충칭으로 옮겼을 때 국민당정부가 충칭교외에 서너 채의 집을 짓고 임정요인과 항일지사의 가족들을 거주하도록 배려해 준 곳으로 교육기간까지 두고 공동체 생활을 한 유서깊은 곳이다. 지도에 표시된 곳을 찾을 수 없어 역 근처로 가서 택시에 올랐다. 운전수에게 '토교를 아는냐'고 했더니 무조건 '안다'고 했다. 미심쩍었다. 하지만 별 뽀쪽한 수도 없고 해서 일단 믿어보기로 했다. 역시 잘 알지 못하는 지 계속 무선 연락한 후 계속 달려 양자강을 건너려하기에 도저히 참을 수 없어 운전수에게 버럭 화를 내며 '어디로 가는지 지도상에 가르켜 보라'고 했다. 전혀 생각지도 않은 곳에 '土橋'라고 분명히 쓰여져 있었다. '어차피 이렇게 된 것….' 고개를 갸웃거리며 '가보자'고 했다. 쓱 지나쳐 가는데, 폭포가 하나 보였다. '혹시나'하는 생각에 내려달라고 하였다. 정말 이곳일까? 몇 군데 사진을 찍고 있는데 마침 지나가는 사람이 있어 '토교가 어디냐'고 물으니 '이곳에서 더 가야한다'고 하였다. 한참 더 나아가 살펴보았지만 다큐멘터리에서 보았던 폭포같은 것은 어디에도 없었다. 다시 되돌아 걸어나오는데 아까 그 사람들이 오고 있어서 '폭포가 또 있는지'물으니 '없다'고 하였다. 멀리 보이는 폭포를 아쉬움에 다시 한번 바라보다가 돌아 나왔다. 벌써 오후 3시. 비행기 이륙시간은 7시 35분.
마지막으로 연화지 청사에 하직이라도 하고 싶어 급히 버스에 올랐다. 버스를 타고 장강대교까지 나오는데, 왜 그리 먼지. 덜커덕 덜커덕, 꼬불꼬불 언덕길을 내려오는데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상하이, 난징, 꽝저우, 그리고 충칭. 이 넓은 대륙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가족에게, 아니 그때 모든 대한민국인에게 허용된 땅이라곤 웅벽한 중경의 먼 골짜기, 손바닥만한 땅밖에 없었던 것이다. 온갖 상념들이 오고 갔다. 내가 왜 여기까지 와야하는지 그 이유를 어렴풋이 알 것 같기도 하였다. 약간의 진정된 마음과 숙연한 자세로 연화지 임정청사를 찾았다. 청사에 모셔져 있는 태극기가 한없이 자랑스러웠다. 태극기 앞에 서자 저절로 오른손이 가슴에 올라갔다. 김구선생을 비롯한 모든 독립투사에 대한 감사의 묵념을 하고 다시 찬찬히 살펴보았는데 어제하고는 사뭇 다르게 그곳이 고향만큼이나 소중하게 느껴졌다. 조선족 안내원의 설명에 따르면 이곳에 연간 5,000명 정도의 한국인이 관람한다고 하니 상하이와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주변의 신식 건물들 사이로 서 있는 불안한 이 곳이 제대로 자리매김하기 위해서는 좀 더 많은 한국인이 방문하고 관심을 가져야 할 것 같았다.
맨 위층을 관람하는데 한 중국 관리인이 뜰을 쓰는 것이 보였다.
문득, 우리 독립 정부의 문지기가 되기를 소원했던 김구 선생이 떠올랐다. //
<상해 대한미국 임시정부청사의 발자취>,
<피어린 27년 대한민국 임시정부>등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