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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신건 지음 <성광문화사. 1989, p.301> / 요약 : 이종국
목 차
1. 바르트의 교회론의 의의
본서는 칼 바르트의 교회론을 그 결정적인 변천 속에서 기술하고 해석하는 데 주안점을 두고 있다. 그의 신학은 조직적 체계라기 보다는 오히려 그가 처한 시대적 정황 속에서 사색하는 예언자로서 분출해 놓은 외침이라고 해야 더 알맞다. 그의 교회론은 그의 신학의 기본적 통찰의 변화 속에서 해석되어야 하며, 또 그의 신학은 그가 처했던 시대적 정황과의 상관성 속에서 고찰되어야 한다. 실로 바르트의 신학은 그가 자신과 세계 및 삶의 문제와 더불어 씨름한 투쟁의 소산임을 알아야 하며 그렇기 때문에 그의 신학을 올바르게 이해하려면 단지 이론적 관시에서만이 아니라 그를 움직이고 감격시켰던 실제적인 물음에 참여하려는 관심에서 출발해야 한다.
2. 바르트의 신학의 교회성-교회의 신학성
"교의학은 자유로운 학문이 아니라 교회에 매여 있으므로써 의미있고 가능한 학문이다." 라고 했다. 그에 의하면 교회야말로 신학의 실존근거이며 그 주체이다. 그는 개혁교회의 일원으로 태어났으며, 이러한 근본적 소여성은 가족, 학교 및 교회 속의 교육을 통하여 강화되었다. 개혁교회에서 형성된 젊은 시절의 경험이 바르트의 생애와 신학을 계속 규정지었다는 사실이다. 개혁교회의 첫 번 째 특징은 '말씀'에 대한 강조, 즉 경험적으로는 '설교의 교회'가 되고 신학적으로는'말씀의 교회'가 되려는 꾸준한 관심에 있다. 개혁교회의 두 번째 특징은 '항상 개혁되어야 할 교회에 있다. 개혁이란 성서로부터 단순히 선험적으로 도출되는 것이 아니라, 현존하는 교회의 상태와 성서본문을 서로 비교함으로써 성찰의 결과로 얻어진다. "교회가 더 이상 개혁 중에 있지 않다면, 그것은 곧 교회가 시련 속에 빠지고 비교회(非敎會) 속으로 추락하되 정말 구제 받을 가망 없이 빠져버린 것을 의미한다. " 바르트의 신학에서 일관되게 나타나는 꾸준한 특징은 그가 시종일관 교회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의 신학적 실존은 '교회 안'의 신학적 실존일 뿐만 아니라, 때로는 교회를 신랄히 비판하고 교회 파괴적인 발언을 토로한 경우에라도 항상 '교회를 위한' 신학적 실존이었다. 그의 교회론은 '위로부터' 획득되는 그러한 '신학성'에, 엄밀히 말하자면 '그리스도론'에 종속되어 있다.
3. 본서의 개괄적 맥락(바르트의 신학과 교회론의 변천
젊은 시절의 바르트의 신학에서는 다분히 인간중심적 사고가 지배했다. 그는 '교회'를 기독교적 경건을 도야하려는 관심에 의해 세워진, 본질적으로 교육적인 기관으로 이해했다.제 I부에서 교회를 유기적으로 성장하는 그리스도의 공동체, 하나님의 나라의 공동체라고 정의했다.
제 II부에서는 소위 '변증법적 신학' 시기에 나타난 바르트의 교회관이 다루어진다. 하나님의 불가시성, 피안성, 상이성. 소원성 및 은폐성, 인간과 교회에 대면해 있는 질문과 부정으로서의 하나님의 의미를 강조하기 시작했다. 교회는 불가시적·초월적인 실체로 이해되었고, 신개신교주의의 가시적 교회는 위기 속에 있다고 선언되었다. '성도들의 교제'마저도 가시적 친교가 아니라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 안에서 인간이 초월적·불가시적으로 통일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로마서 주석 제 2판이 출판된 지 얼마되지 않아 바르트에게 또 하나의 결정적인 전환이 일어났다. 그의 신학의 척도와 동기였던 '하나님과 세계 간의 변증법적 원리' 대신에 이제 소위 '말씀의 신학'이 등장한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강조하게 됨으로써 이제 그는 교회를 하나님의 말씀 아래에 두게 되고, 이 '하나님의 말씀 아래에 있는 교회'는 동시에 '십자가 아래에 있는 교회', '죄인들의 교회'로 정의된다. 바르트는 1926년부터 교회의 본질을 이전보다 더 긍정적으로 정의하여, 이를' 하나님이 설립하신 것'으로 정당화하기 시작한다. 그는 점차로 변증법적 교회관으로부터 결별하고 교회의 긍정적인 측면을 계약개념을 통하여 해명한다.
제 III부는 그리스도론적으로 규정되는 바르트의 교회관을 다룬다(1932-1968년). 제 1장은 교회관과 관련지어서 '기독교 교의학 개요'와 '교회 교의학'사이에 일어난 기본통찰을 고찰한다. 제 2장은 바르트가 독일의 제 3제국의 시절에 교회를 위해 투쟁하던 기간(1933년-1945년)에 나타난 교회관을 다룬다. 제3장에서는 '교회와 성서'의 관계에 관한 바르트의 견해가 다루어진다. 제 4장은 바르트의 '선택론' 내에서 다루어진 그의 교회관을 고찰한다. 제 5장에서 본인은 바르트의 화해론 속에서 다루어진 그의 교회관을 해명하려고 시도했다. 여기서 그는 교회가 화해하시는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행동 속에 정초되어 있음을 보았다.
제 IV부는 바르트의 교회론을 로마 카톨릭 교회론과 비교하고자 한다.
(1913-1920년)
1. '거짓된 교회들'에 대한 항거
1) 로마 카톨릭 교회에 대한 비판
그의 지배적이고 특징적인 관심은 무엇보다도 매우 진지하게 로마 카톨릭 교회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한 사실에 있었다. 바르트는 베드로 수위권을 공박했다. 바르트는 교황계승에 관한 로마 카톨릭 교회의 주장도 반박했다. 1913년 11월 2일데 행한 설교에서 바르트는 로마 카톨릭 교회를 문자의 기독교, 과거의 기독교라고 표현하고, 그것은 영의 기독교의 진정한 계승자인 종교개혁 신앙과 지금까지 대립하고 있다고 말했다.
로마 카톨릭 교회에 대한 바르트의 비판은 다음과 같이 첨예화된다 : 그리스도가 카톨릭교인들에게 있어서는 기껏해야 제 2인자이지만, 우리 개신교인들에게 있어서는 제 1인자라고 하는 사실이다.
2) 신개신교주의에 대한 비판
세계 제 1차 대전의 발발은 바르트로 하여금 그를 심취시켰던 모든 종류의 자유주의의 경향으로부터 결별하게 만들었다. 그를 경악하게 만든 것은 무엇보다도 그가 존경했던 스승들이 모두 시대정신에 굴복하여 전쟁신학에 동조한 사실이었다. 로마서 주석 제1판에는 낭만주의, 이상주의, 경건주의 및 종교사회주의와도 투쟁한 그의 내면적 고심이 드러나 있고, 그 시대와 교회에로 향한 날카로운 비판이 번득거린다. 왜 교회가 궁지에 빠졌는가? 바르트에 의하면 한때 교회를 세우신 하나님이 이젠 교회를 버리셨기 때문이다. 교회의 궁지는 그의 숙명이 아니라 잘못 때문이다. 그 잘못은 교회가 하나님께 주목하지 않음으로써, 하나님만이 그의 사역 속에서 유일한 통치자가 되길 원하신다는 사실을 간과하였고, 그 결과로 자신의 의지와 노력으로 하나님의 사역을 방해했다는 사실에 놓여있다. 바르트는 괴테의 유명한 말 - "교회는 참 좋은 위(胃)를 가리고 있다." -을 인용하여 현실교회를 비판했다. 바르트는 하나님의 뜻과 일을 인간의 목적에 유익하게 변형시키고, 자신의 위치를 공고히 하고 안전한 길을 가려고 복음의 모든 거리끼는 요소를 제거하려는 당대의 교회, 하나님을 하나님되게 하지 않고 인간적 복리에 맞게 그의 일을 뜯어고치려는 당대의 교회, 하나님의 일보다 자신의 일에 몰두하려는 당대의 교회에 맞서서 맹렬히 항거했다.
3) 경건주의에 대한 비판
겔처에게 쓴 1917년 5월 26일의 편지에서 그는 경건주의자들을 '사탄의 교회'라고 혹평하고, 이 사탄은 이미 신약성서 안에서 결국 비틀거리고 있음을 본다고 말했다. 그의 비판은 대체로 두 가지 이유, 즉 개인주의와 기계주의에 근거를 둔 것이다.
⑴ 개인주의 : 바르트는 경건주의를 세상에 주어진 하나님의 대답으로부터 살지 않고 개인의 성취, 개인의 회심, 개인의 성화, 개인의 구원, 개인의 축복을 추구하는 개인주의라고 보았다. 바르트는 교회를 철두철미 유기적인 관계, 살아있는 친교와 공존으로 이해했다. 그러므로 경건주의의 개인주의는 철저한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⑵ 기계주의 : 여기서 '기계적'이란 말은 구원을 자신의 행동으로 스스로 이루려는 태도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유기적'인 것에 대한 반대의미로서 사용된 용어이다. 바르트는 로마서 주석 제 1판에서 하나님과 인간 및 세계 사이의 유기적 일치관계를 특히 강조했다. 그래서 그는 자력적인 구원의 노력을 기계주의라는 표현아래서 공격했다.
2. 그리스도의 공동체로서의 교회
바르트의 관심은 무엇보다도 교회를 '공동체'로 이해하고 방어하려는 데 있었다. 교권계급적인 로마 카톨릭 교회, 인본주의적인 신개신교주의 교회 그리고 개인주의적인 경건주의 교회에 대항하여 그는 공동체로서의 교회상을 부각시켰고, 이것을 '그리스도의 몸' 사상과 '하나님의 나라'사상에 접맥시켰다.
1) 그리스도의 몸
바르트의 의하면 교회란 더 높은 뜻에 의해 형성되고 보존되는, 내적으로 필연적인 공동체이다. 이는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몸 안으로 받아들여짐으로서 이 세상에서 개인의 불행한 처지로부터 건짐 받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몸'은 십자가를 통하여 그리스도인들의 실존 안으로 들어 왔다.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된 자들은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로서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2) 하나님의 나라의 공동체
참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인 공동체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의 공동체'이기도 하다. 바르트가 말하려는 하나님의 나라는 어떤 것인가? 그리스도 안에서 창조되는 새로운 삶의 가능성이요 그 안에 있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 세상 및 인간 간의 상실된 유기적 일치관계를 다시 회복하는 것이요, 지상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재건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리스도의 출현 속에서 빛나고 하나님의 나라의 관점에서 교회는 어떻게 정의되는가? 교회는 집, 제도 혹은 사업체가 아니고 하나님의 나라의 유기체요 그 공동체이다. 참된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의 씨앗을 세상의 밭에 뿌리는 사명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모든 우월성을 부숴버린다.
(1921-1931년)
1. 교회관과의 관련 속에서 본 1919년과 1921년 사이의 기본관점의 변화
1) 유기적-불가시적
로마서 주석 제 2판에서는 가장 분명한 차이점은 '유기적'이라는 개념이 사라지고 그대신 '불가시적'이라는 개념이 등장한 점에 있다.
2) 역사의 종말-원역사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의 공동체로서 종말을 향하여 진행하고 있고, 새 세계는 이미 교회 안에서 시작하고 있다. 즉 종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능력으로 인하여 교회 안에서 이미 터전을 잡고 있다. 역사의 종말로서의 하나님의 나라의 사상, 차안적인 세계의 종국으로서의 종말론 이해 대신에 초시간적인 '원역사'의 개념이 바르트에게도 등장했다. 원역사는 생명 그 자체 안에 출발점을 가지고 있고, 그러기에 그것은 '생성사'이다. '계시'의 개념을 더 자세히 정의할 수 있기 위하여 원역사의 개념을 사용했다.
3) 보편주의-개인
바르트는 하나님-세계-인간의 관계를 실존적인 관계로 해석함으로써 이를 실존화하였다. 그에게 있어서 개인의 개체성은 개인이 하나님과 맺는 관계의 결과이다. 교회는 공동체일 뿐만 아니라 한 몸이며,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한 개체이다. 교회를 공동체로 구성하는 그리스도도 역시 한 개체이다. 그는 교회의 일치의 근거이다.
2. 로마서 주석(제 2판)교회관
1) 교회의 위기
바르트의 두 번째 '로마서 주석'은 "엄청난 폭발과 같이" 그 당시 우세하던 종교주의적·인간중심적·인본주의적 신학을 강타했다. 바르트는 교회의 상황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위기를 선언한다. 교회는 불가피한 재앙 속에 빠져 있다. 교회와 하나님의 나라의 대립은 무한하다. 복음과 교회의 대립은 근본적으로 어디서나 무한하다. 복음과 교회의 대립은 근본적으로 어디서나 무한하다. 교회가 복음의 폐기이듯이 복음도 교회의 폐기이다. 교회가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 교회가 위기와 재앙 속에 처해 있는 이유를 바르트는 다음과 같이 세 가지 입장에서 해명하였다.
⑴ 하나님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우리의 본질, 소유 및 행위의 순수한 한계이시자 순수한 시초이시다. 하나님은 우리의 부정 속에 계신 긍정이시며, 우리의 긍정속에 계신 부정이시고, 처음과 나중이시며, 그러한 분으로서 미지의 분이시고, 결코 우리가 아는 많은 실체들 중의 한 실체가 아니다.
⑵ 교회에는 하나님이 안 계신다.
복음과 교회의 무한한 대립이 교회를 위기로 몰아 넣는다. 교회의 버림받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말하려는 교회 안의 인간의 시도가 심판 받고 불가능하다는 사실에 있다.
⑶ 하나님의 의(義)는 하나님의 의이고 결코 원하거나 달리는 인간의 의가 아니다. 하나님의 의는 어떠한 인간의 신실에 의해 제약되지 않고 오직 하나님 자신의 신실로부터 나온다. 그것은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이다. 교회의 위기는 교회가 하나님의 의, 신앙, 기적을 추구하고 그것을 획득하고 입증하며 그것에 도달할 수 있다고 잘못 생각하는 데에 있다. 교회가 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의를 없애 버리고 자신의 의를 세우려는 것이고, 경건한 인간을 영화롭게 함으로써 인간을 의롭게 하고 구원하려는 것이다. 교회의 위기와 재앙은 "교회가 진정 하나님을 거역하는 인간의 적대감이 드러나는 곳이고 인간의 무관심, 오해, 저항이 가장 고상하고도 가장 유치한 형태를 취하는 곳이라는 사실 속에서 밝혀진다."
2) 인간의 가능성으로서의 교회
그는 교회를 하나님의 불가능한 가능성 앞에서 최종적인 인간의 가능성을 형체화한 것으로 파악했다. 바르트는 교회와 문화를 , 교회와 종교를 혼합하여 교회를 문화와 실체로 파악하려던 신개신교주의의 교회관에 대해 불가피한 수정을 가했다.
3) 불가능한 가능성으로서의 교회
그의 비판은 종교, 문화, 경건주의, 관념주의와 같은 인간의 가능성의 껍데기를 뒤집어 쓴 잘못된 교회에 대해 하나님의 위기와 심판을 선언하려는 데 목적이 있었지, 교회 그 자체에 대한 부정과 파괴의 행위가 아니었다. 참된 교회는 무엇이고, 어디에 어떻게 존재하는가? 기적의 교회다. 두려움과 떨림 속에서 회개한 교회, 하나님을 경외하는 교회다. 죄인들의 교회다. 은총과 하나님의 자비를 받는 교회다. 그런데 여기서 바르트가 참된 교회라고 이해하는 야곱의 교회는 역사적 실체가 아니라 변증법적 실체임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4) 성도들의 교제
매우 주목할 만한 점은 바르트가 장소나 역사, 회원이나 모임도 없는 비역사적. 변증법적
실체인 교회, 오직 하나님의 기적과 은혜가 주어질 때에만 존재하는, 보이지 않는 사건인
교회를 또 한편으로는 "성도들의 교제"라고 칭했다는 사실이다. 바르트는 인격적인 사귐을 나타내는 의미로 Communio Sanctorum을 표현한다. "교회는 사귐" 이다
3. 로마서 주석(제 2판)과 "교회 교의학" 사이의 교회관.
1)1921년과 1923년 사이의 신학적 전환
"말씀의 신학"의 특징을 이루는 것은 "성서에서 하나님,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계시라고 불리는 것으로서, 모든 인간적인 자기이해를 제한하고 규정하는, 탁월하고 새로운 것에 관한 질문"이다. 그리하여 바르트의 신학의 척도와 동기였던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에 놓는 원리가 등장하게 되었다.
2) 하나님의 말씀 아래에 있는 교회
"바르트가 1923년에 뤼벡에서 행한 강연 '교회와 계시'는 그가 교회의 문제를 새로이 다루고 있음을 보여 준다. "참된 그리스도의 교회의 근거는 근본적으로 그리스도인의 주관주의의 종말이며 실제적인 그리스도인의 예언의 전제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바르트의 강조는 그가 1925년에 행한 강연 '개혁교회의 성서원리'에서도 드러난다. 여기서 그는 교회가 계시로부터, 오직 하나님의 결단 안에서만 정초된 하나님의 자기인식에의 참여로부터 살고 있다고 고백했다. 그런데 바르트에 의하여 성서도 계시의 직접적 현재화가 될 수 없다. 계시가 다음 시대로 전달되는 것은 유출, 발전 혹은 조립의 경로 위에서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계시의 전달은 결코 연속이 아니라 새롭고 놀라운 기적이며, 계시 그 자체와 같이 동일하고 절대적인 의미로 말씀하시고 명령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여기서 바르트가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성령의 역사이다. 성령은 스스로 자신의 일을 수행하시는 하나님을 의미하며, 역사적 자료, 마음과 양심의 암흑 속에 있는 우리에게 오는 계시 속에서 무시간적·동시대적활동을 행동하시는 하나님을 의미한다.
⑴ 교회의 권위는 시간적. 역사적. 간접적 권위이다.
⑵ 교회의 권위는 상대적 권위이다.
⑶ 교회의 권위는 형식적 권위이다.
교회에서 주어진 이러한 전권위임은 오순절의 성령의 은사를 통하여 이루어졌다. '교회의 개념'이라는 강연에서는 바르트는 교회의 권위가 하나님의 계시의 이해와 선포의 준거가 되는 사도들의 증언 위에 정초되어 있고 또 항상 거듭 정초되어야 함을 강조했다.
⑷ 죄인들의 교회
교회에 관한 본래적·본질적·내적인 진술의 하나는 '죄인'이라는 개념 속에 있다. 그는 이미 1926년에 교회를 죄인들의 공동체라고 불렀고, 1927년에도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와 용서받은 죄인들의 중간에 존재한다고 말했다. 교회는 오직 용서 속에서만 존속할 수 있고 오직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 안에서만 구원을 발견할 수 있는 십자가 아래의 교회, 죄인들의 교회이다.
⑸ 십자가 아래에 있는 교회
"죄인들의 교회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심판 받게 됨과 더불어 계시의 은폐성 안으로 놓여진다." 십자가 아래에 있는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며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계시와 화해의 연속, 현재화, 구체화 및 명시화가 아니다.… 그것은 결코 그리스도를 등장시킬 수 없고 묘사할 수 없으며 활동시킬 수도 없다. 그것은 구원을 나누거나 번식 혹은 확장할 수도 없다. " 십자가 아래에 있는 교회는 구원케 하는 말씀, 계속적인 신적 권위, 절대적 지식, 분명한 지시, 직접적으로 확신시키는 영광이 없는 궁지와 실존의 궁지에 빠진다. '새로운 교회의 현실주의'로 나아가려 한다.
그런데 교회의 궁지는 '보이지 않는 영적인 교회라 하는 이상주의'로 도피한다고 극복되는 것이 아니며, 그렇다고 '보이는 인간적인 교회라고 하는 현실주의'로 도피한다고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보이는 교회와 보이지 않는 교회간의 이러한 긴장은 교회의 본질에 관한 물음을 항상 상기시킨다. 교회는 하나님의 약속으로부터,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고 완전히 궁극적으로 발언된 하나님의 확약으로부터 살아야한다.
⑹ 하나님이 제정하신 교회
1926년부터 바르트는 교회가 하나님의 화해의 결의안에서 제정되었음을 보게 됨으로써, 교회는 하나님에 의해 제정된 죄인의 공동체, 신앙하고 순종하는 인간들의 공동체라고 정의되었다. 1927년에는 바르트는 교회를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체결된 계약에 근거하여 창조되고 성령을 통하여 각성된 신앙의 백성의 소집으로 정의했다.
(1932년-1968년)
1. 교회관과의 관련 속에서 본 1927년과 1932년 사이의 기본통찰의 변화
1) 변증법에서 유비론(類比論)으로
바르트는 그가 1920년에 행한 강연 '성서적 질문, 통찰 및 전망'에서 성서적인 사고와 발언의 특성을 변증법적인 것이라고 기술했다. 로마서 주석 제 2판(1921년)에서는 바르트는 '바울의 로마서의 내용의 내적인 변증법'을 기술하는 것을 자신의 신학과제로 삼았다. 바르트는 그가 행한 강연 '신학의 과제로서의 하나님의 말씀' (1922년)에서 형식적 변증법의 신학적 배경에 관해 숙고했다.
1925년에 행한 강연 '교회와 신학'에서 바르트는 신학의 변증법적인 특징을 단절, 역설, 철저한 보충의 필요성, 모든 신학문장의 원칙적 개방이라고 표현했다. 바르트는 변증법적 원리는 어디에서부터 유래하는가? 그 자신은 이것을 '바울과 종교개혁자들의 변증법'이라고 말했다. 바르트는 "우리가 어떻게 신학의 대상에 관하여 신학적으로 적합하게 말할 수 있는가?" 라고 하는 질문 앞에서 점점 더 고심하게 되었다. 이 질문은 그에게 점점 더 회피할 수 없는 것으로 다가왔다. 그 동기는 설교의 상황, 선포의 문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물음과 들려진 계시와 과제에 대한 신학적 사고와 발언의 책임성 문제였다. 이 물음을 놓고 씨름한 것을 보여주는 문서는 '신학에 있어서의 운명과 이념'(1929년)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미 바르트가 신학을 '그 대상에 일치하여 오직 교회 안에서만 가능한 학문' 이라고 파악한 것을 볼 수 있다. 신학은 단지 입문, 교정, 지시, 방주(傍註) 혹은 식탁의 양념일 수만은 없다. 변증법은 신학적 진술을 대체할 수 없다. 신학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말씀 가운데서 자신을 계시하셨고 또 계시할 것이라는 전제로부터 출발한다. 그리하여 바르트에게서 변증법적 발언 속에 나타난 움추리는 몸짓은 점점 사라지고, 계시의 사건에 더욱 접근하려는 노력이 나타났다. 즉 하나님에 관한 인간의 발언의 변증법적 구조에 관한 분명한 관심 대신에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유비(Analogia:類比)에 관한 관심이 서서히 등장하기 시작했다. 바르트는 아날로기아를 정의하기를 "동일성 및 비동일성과 마찬가지로 동일성도 제한하는, 두 가지 혹은 더 이상의 다른 실체들 간의 부분적인 상응과 합치, 즉 유사성이라고 했다.
2) 그리스도론적 집중
변증법에서 유비론으로 신학적 인식원리를 전환시킨 바르트는 이제 그의 신학의 새로운 기초를 찾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의 새로운 과제는 "이전에 말했던 것을 다시 한번 완전히 다르게, 즉 이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의 신학으로서 끝까지 숙고하고 표명하는 것이었다. 계시의 본질과 내용을 가장 포괄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되었다. 변증법적 실체였던 교회 대신에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등장한다. 이 새로운 교회관은 그리스도론적 집중에 의하여 강하게 각인 되었으며, 신약성서의 그리스도의 몸 이해를 통해 규정되었다.
3) 역사의 종국으로서의 종말론의 재발견
바르트에게서 세계사적, 목적론적 종말론은 그리스도론적인 방식으로 그 의를 재획득하게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모든 시간의 신비요 영원이라고 주장되던 변증법적 시대와는 달리 이제 종말론은 역사적 사건의 의미에서 긍정적으로 재평가 되었다.
2. '고백교회'의 투쟁기(1933년-1945년)에 나타난 바르트의 교회관
1) 정치와 교회의 상황
⑴ '독일 그리스도인들'의 등장과 '고백교회'의 탄생 : 모든 신학적 성찰에서 벗어난 광신주의와 다름없는 '독일 그리스도인들'(DC) 조직의 가장 중요한 교회정치의 목표는 루터적 특징과 아리안 종족의 통일제국교회를 설립하려는 것이었다. '아리안 조항을 통하여 많은 자들이 독일 그리스도인들의 운동에서 탈퇴했고. 이 운동은 여러 갈래로 찢겨졌다. 이 즈음에 '고백교회(Bekennende Kirche)운동이 태동하기 시작했다.
⑵ 바르트는 무엇을 하였는가? : 바르트는 '오늘의 신학적 실존'(1933)에서 교회가 신학적 실존을 상실했으며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소리를 들으려고 하다가 교회됨을 망각했다는 것, 그러나 성서가 주인이 될 때 비로소 신학적 실존이 있고 교회개혁이 가능하다는 주장을 했다. 바르트는 1934년 5월 31일에 채택된 '바르멘 신학선언'을 기초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다2) 교회의 본질
⑴ 교회의 자리 :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말씀하셨으므로 인간이 그 말씀을 듣는 바로 그곳에 교회가 존재한다. 하나님께서 성서를 통하여 위대한 행위의 언어로써 말씀하시고 인간이 이를 듣는 바로 그곳에 교회가 생기고 존재한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성서의 원천, 핵심 및 그 대상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이다.
⑵ 형제들의 공동체로서의 교회 : '바르멘 선언' 제 3항에서 바르트는 교회를 "예수 그리스도가 말씀과 성례전 속에서 성령을 통하여 주로서 현존하시면서 행동하시는 형제들의 공동체"라고 정의했다. 이 개념은 '그리스도의 몸'이해와 매우 밀접히 결합되어 있다.
⑶ 교회의 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 :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 안에서 주로서 현존하시면서 행동하시고, 이 행동을 통하여 항상 새롭고 교회를 창조하시며 교회를 보존하신다. 그런 의미에서 그분은 교회의 첫째가는 본질적인 주체이시다. 바르멘 선언은 처음으로 교회의 본질을 그리스도론적으로 정립할 수 있었다.
3) 교회의 사명
⑴ 증언봉사의 주체로서의 교회 : 우리는 우리의 선포와 가르침을 통하여 교회와 세상 속에서 하나님 말씀에 봉사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 교회의 사명이라는 것이다. 교회의 증언봉사는 하나님의 능력 속에 나타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 속에 반복하는 데에 있다.
⑵ 시대사(時代事) 속에서의 교회의 증언책임 :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게 되고 선포할 때 시대를 떠난 어떤 추상적인 영역 속에 있지 않고 바로 시대 속에 있기 때문에, 교회는 시대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과 연루되어 있고 그것의 도전과 요구를 받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교회는 모든 시대에서 시대사에 참여해야 한다.
4) 교회의 형태
"교회는 이 세상 속에서 어떠한 형태를 취하는가?" 이러한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먼저 "교회를 이룩하는 데 있어서 결정권을 가진 자, 즉 교회의 형성자가 누구인가?"하는 물음에 답변이 주어져야 한다. 모든 교회형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적인 직분의 행위로서, 오직 그분만이 교회를 형성하는 자이다. 바르트는 지배가 아니라 오직 봉사만이 교회 위에 세워지는 표지가 되어야 함을 역설했다.
5) 참된 교회와 거짓 교회 사이에서 투쟁하는 교회
교회는 자신이 참된 교회인지, 거짓 교회인지,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인지 적그리스도의 교회인지 항상 필수적으로 자신을 검증해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교회는 항상 거짓 교회가 될 가능성의 위험을 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오류를 진리로써 극복하려는 자세가 없는 교회는 그 자체상 거짓 교회일 것이다.
3. 교회와 성서(교회교의학I/2, 1938년)
1) 교회에게, 교회를 위하여 주어진 성서
바르트는 성서를 교회의 선포와 대면해 있는 �의 법정을 지시하는 표지로서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성서란 무엇인가? 바르트에 의하면 성서가 하나님의 말씀과 동일한 것이 아니며, 그것만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세 가지의 형태를 가진다. 계시된 말씀, 기록된 말씀 및 선포된 말씀.
2) 교회 안에서, 교회와 함께 형성된 성서
성서는 카논의 형태로 교회에 의해 성서로 발견되고 인정된 문서의 형태로 우리에게 주어졌다. 카논 형성은 하나님의 증인선택과 증인소명에 대한 교회의 고백이다.
3) 성서 아래에 있는 교회의 권위
성서를 떠나서는 교회가 아무런 독립적인 권위를 가지지 못한다. 왜냐하면 교회의 권위는 자신 속에 세워진 성서의 권위를 통해서 정초되고 제한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자신의 존재, 근거 및 본질을 이루는 성서에 대하여 순종의 관계에 있다.
4) 성서 아래에 잇는 교회의 자유
교회의 권위가 순종의 객관적 규정이라면, 교회의 자유는 순종의 주관적 규정이다. 교회의 자유는 말씀의 자유로 말미암아 정초되고, 또 간접적ㆍ상대적ㆍ형식적 자유로서 제한된다. 교회 안의 인간의 자유는 하나님의 말씀의 자유에 상응하는 자유로서 다름아닌 성서주석과 그 적용에 대한 책임을 떠맡는 행위로 나타난다. 성서의 해석과정은 하나님의 말씀 아래에 있는 교회의 자유로서 관찰, 숙고 및 적용이라는 삼중적인 성서주석의 행위로 이루어진다.4. 공동체의 선택(교회 교의학 II/2, 1942년)
1)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선택의 중개자로서의 공동체
⑴ 복음의 요약으로서의 하나님의 선택 : 바르트의 선택론은 그의 전체의 신학의 열쇠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선택론은 창조, 화해 및 구원에 나타난 하나님의 모든 계시? 이해하는 데 있어서 열쇠의 역할을 하기 때문에 그의 신학의 중심적 주제이다.
하나님의 선택의 인식근거와 존재근거는 무엇인가? 교회의 전통, 선택론의 교육적ㆍ목회적 가치와 유용성, 경험적 자료 혹은 전능자로서의 신개념에 있지 않고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다. 바르트에게 있어서 선택은 곧 하나님의 '은총'의 선택을 의미한다.
⑵ 예수 그리스도의 선택은 공동체의 선택을 포함한다. 은총의 선택은 예수 그리스도의 선택이면서도 동시에 하나의 하나님의 공동체의 영원한 선택이다. 이 공동체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는 온 세상에 증언 되고, 온 세상은 그에 대한 신앙으로 부름 받는다. 바르트는 이러한 공동체의 선택을 중보적ㆍ중개적 선택이라고 정의한다.
2) 이스라엘과 교회
⑴ 바르트의 신학에서의 이스라엘의 의미
로마서 주석 제1판에서 '이스라엘'을 신학적 주제로 받아들여 이스라엘과 교회 간의 연대적 관계를 강조했으며, 그리하여 자신의 사명에 부응하지 못하는 이스라엘을 당대의 교회와 동일시함으로써 교회비판의 해석학적 모델을 찾았다. 교회로서 공동체는 이스라엘이고, 바로 이스라엘로서 공동체는 교회이다.
⑵ 이중적 형태와 기능을 갖는 하나의 공동체
바르트의 선택론에 드러난 그의 이스라엘 이해는 양면적이다. 한편으로 그는 이스라엘을 낡은 인간의 사라지는 형태로서 부정적으로 파악했다. 그에 반해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의 오고 있는 형태로서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5. 하나님의 화해의 역사로서의 교회(교회교의학 IV/1-3, 1953년-1968년)
1) 하나님의 삼위적 행동 안에 있는 교회
⑴ 하나님에 의해 성취된 화해의 선행적 묘사
교회 안에서는 하나님에 의해 성취된 객관적 화해가 개개인에게 주관적으로 적용되는 일이 일어난다. 화해는 하나님의 전 존재요 그분의 전 삶이다. 화해는 모든 하나님의 행위의 목표요 하나님의 원래적 의지와 근본의지이며, 창조자로서의 그분의 의지와 의미와 근거이다. 화해는 또 다른 한편으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맺어진 '계약'의 성취이기도 하다. 계약이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처음부터 존재하다가 교란되고 위협받데 된 사귐인데 그 의도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즉 화해의 역사 안에서 성취되었다.
⑵ 예수 그리스도의 피조물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객관적으로 일어난 하나님과 인간 간의 화해의 주관적 묘사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부름받은 자들의 공동체'(Communio vocatorum)로 일으켜 세워졌다.
⑶ 성령의 역사(役事)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의 교회를 창조하고 계속적으로 갱신시키는 능력은 바르트에 의하면 성령이다. 교회가 설립되고 바로 그렇기에 항상 거듭 설립되는 것은 성령을 통해서이다. 성령이 활동함으로서 교회가 생겨났고 지금도 존속하고 있다. 그런데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행동하시는 하나님의 영이다.
2) 교회의 삼중적 본질
⑴ 그리스도의 몸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적ㆍ역사적 실존형태', 즉 그의 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못박히신 분과 부활하신 분으로서 천상적ㆍ역사적 실존형태로, 그리고 교회라는 지상적ㆍ역사적 형태라는 두 종류의 실존형태를 가지신다. 예수 그리스도는 주, 교회의 머리이실 뿐만 아니라 몸, 교회이시기도 하다.
⑵ 성도들의 교제
교회는 '성도들의 교제'(Communio Sanctorum)이다. 성도들의 교제는 성령의 능력 안에서, 그리고 성령의 역사에 의해 회집되고 생동된 인간들의 활동 안에서 일어난다. 바르트는 성도들의 교제를 전통에 따라 두 가지 의미로 이해했다. 하나는 '성도들', 다시 말하면 성령에 의해 거룩하게된 인간들의 친교이고, 또 다른 하나는 '거룩한 것들', 거룩한 관계들, 거룩한 은사들, 거룩한 임무들, 거룩한 직분들, 거룩한 역할들 안의 교제이다.
⑶ 하나님의 백성
교회는 하나님의 '소명'의 역사와 '조명하는' 성령의 역사인 것으로 나타난다. 이 교회는 다름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교회의 실존양식을 가리킨다. 즉 교회는 세상 뒤에 숨어 있거나 세상 위에 떠 있는 것이 아니라 공간과 시간 속에서, 지금 여기에, 다른 사람들 한 가운데에 있다.
3) 교회의 질서(교회법)
바르트는 교회의 법을 일차적 행동의 주체인 예수 그리스도와 이차적 행동의 주체인 성도들의 공동체 간의 관계의 척도에서 볼 때 올바른 것이라고 파악했다. 교회 안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 명령 및 지시가, 또 다른 한편으로는 성도들의 공동체의 순종적ㆍ복종적 행위가 중시된다. 이 관계야말로 곧 교회의 질서원리, 기본법이다. 교회의 법의 특징은 예수 그리스도가 여기 머리와 주 그리고 일차적 행동의 주체가 되신다는 사실에 있다.
교회법은 어떤 내용을 갖는가? ⑴ 봉사의 법의 특성과 의미를 갖는다. ⑵ 예배의 법이다. 교회의 모든 법은 예배의 사건에 그 본래적 자리와 고유한 목적을 갖는다. ⑶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 계신 인격으로서 그의 교회를 통치, 보존, 조직하심으로써, 교회 법은 필연적으로 역동적으로 움직여지는 살아있는 법의 특성을 갖게 된다. ⑷ 교회 법은 인간의 일반적인 법의 제정과 실행에 대해 모범적인 것이어야 한다.
4) 교회의 임무
교회의 임무는 그리스도 대신에 그리고 말씀과 성례 전을 통해 그의 말씀과 사역에 봉사하면서 값없는 은총의 복음을 모든 백성에게 전하는 것에 있다. 바르트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은 교회의 모든 봉사의 총괄적 요약이다.
5) 교회와 세상
⑴ 세계사의 변혁요인으로서의 교회
세계사는 하나님의 영역 안에서, 하나님의 통치 아래서 진행된다. 교회는 세계사 한복판 속의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세계사를 달리 보고 달리 그것에 참여해야 한다. 교회는 세계사의 한복판에서 아직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인간들이 행하지 않고 또 행할 수도 없는 바로 그것을 항상 어디서나 구체적 순종과 고백 속에서 행해야 한다. 교회는 세계사의 한복판에서 그러한 결딴을 실천함으로써 세계사를 분명히 변혁시킬 것이다.
⑵ 세상을 위한 교회
교회는 자신에게 부여된 전권에 힘입어 세상으로 보냄 받음으로써 그 자체선 세상을 위해 존재한다. 교회는 세상을 위해 자신의 임무를 실행하기 위하여 세상으로 보냄 받았다. 교회가 세상에 관해 앎으로써, 교회가 세상과 연대적으로 결합되어 있음으로써, 교회는 세상에 대해 함께 책임적이게 된다.
(비교와 평가)
1. 바르트의 '그리스도의 몸'-피오(Pius) 12세의 '신비한 그리스도의 몸'(1943년)
⑶ⓛ바르트에게서는 교회의 설립이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인류의 대리자로서 자신의 몸 안에서 죄의 몸을 지고 죽으심으로써 이를 제거하신 행위에 근거한 것으로 설명되고 있는 반면에, 피오 12세의 교서에서는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 그의 몸으로 설립되었거나 사들여졌다고 설명된다.
②피오12세의 교서에서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인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그의 유일독특한 신분 때문에 교회의 머리라고 불린다는 사실에서도 분명히 드러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곧장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적 대리권, 즉 교황의 수위권도 도출된다. 예수 그리스도는 땅에서 자신을 대리하는 자를 통하여 자신의 신비한 몸을 조직형태로 다스리신다. 즉 그는 사도의 우두머리에게 보이는 통치권을 넘겨주신다. 그와 달리 바르트에 의하면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자신의 교회의 머리와 통치자이시다. 그리고 교회는 오로지 그에 의해서만 통치되는 자매들과 형제들의 공동체이다. 그러기에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 이외의 다른 머리, 주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③ 바르트의 교회론에서는 그리스도와 교회 간에 관계가 뒤바뀔 수 없는 한에서, 그리스도의 몸에 관한 바울적 어법을 똑같이 강조한 사실과 아울러 피오12세의 교서로부터 근본적으로 구별된다. 바르트� 말한다. 교회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그렇지만 피오12세의 교서에서는 "그리스도가 교회이시다"는 문장이 뒤바뀔 수도 있다. 즉 "교회는 그리스도이다"고 말할 수 있다. 2. 바르트의 '하나님의 백성'-제 2 바티칸 공의회의 '세상의 빛'(1966년)
⑴ 제2 바티칸 공의회의 교회헌장 'Lumen Gentium(세상의 빛)은 교회의 구원사적 차원에 역점을 두어 '하나님의 백성'의 개념을 구원사의 관점과 결합시켰다. 바르트는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동일하시다"라는 신약성서의 특별한 문장으로부터 특별한 역사, 구원사를 이해한다. 바르트는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계시로부터 역사를 향해 사고한다. 오직 이 길에서만 하나님의 특별한 역사가 인식된다. 이러한 기초 위에서 '구원사'의 개념은 점차로 퇴색하고 '계약사'의 개념이 점차로 나온다. 계약사란 계약 안에서 진행되는 역사를 말한다. 바르트의 '하나님의 백성' 이해는 '계약사'와 어떤 관련을 갖는가? 그는 하나님의 뜻에 의해 일어나는 모든 역사는 계약사의 의미를 지닌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런데 바르트에게서는 구원사의 개념이 계약사의 개념에 의한 해명, 요약 혹은 전화되긴 했어도, 그의 교회이해는 근본적으로는 제 2 바티칸 공의회의 구원사적 교회이해와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⑵ 바르트는 참된 보편적 교회에 대한 질문을 교회의 어떤 시간적 초기형태들과의 동일성에 대한 질문에만 국한시키려는 로마 카톨릭 교회의 시도에 이의를 제기한다.
⑶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는가? 교회에 속하는 것은 구원에 필수적인가? 바르트는 교회의 중개를 통하지 않고도 그리스도의 화해의 사건에 포함되는 은밀한 방식에 열린 태도를 보였다. 이런 점에서 그는 카톨릭 교회와 근본적으로 분리되어 있지 않다.
⑷ '하나님의 백성'의 개념은 구원사의 연속성을 보여주기 때문에 그것의 역사적 의의를 보여준다. 교회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이해하는 제 2 바티칸 공의회의 교회이해는 주요 강조점이 교회의 종말론적 역동성에 놓여 있다. 바르트에게서도 교회의 종말론적 역동성은 자신의 '교회 교의학' 안에서 점차로 큰 비중을 획득한다. 바르트는 "교회가 성도들의 공동체로서 하나님의 바라로부터 왔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를 향해 나가고 있고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한다. IV/3에서도 바르트는 도상에 있는 지나가는 교회의 실존을 강조한다. 교회는 이미 왔으나 아직 오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의 비유요 그 반사이다. 자신을 '완전한 사회'나 '지상의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의 실존 형태'로 보는 것을 과감히 포기하고 자기 갱신과 종말론적 희망 및 고통 당하는 자들과의 연대성을 선포한 제 2 바티칸 공의회의 교회헌장 '세상의 빛'은 바르트의 '세계사 한복판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과 매우 가까운 위치에, 아니 같은 선상에 있다고 할 수 있다.
⑴ 교회란 무엇인가? : 바르트에게 압도적으로 빈번한 교회개념은 '그리스도의 몸'이다. 로마서 주석 제 1판(1919년)에서 그는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정의하고, 그것을 유기적으로 성장하는 하나님의 나라의 공동체로 매우 유기적으로 이해했다. 로마서 주석 제 2판(1921년)에서 그는 교회의 일치를 구성하는 초월적 원리로서 '그리스도의 몸'을 제시했다.
⑵ 교회는 어떤 형태를 갖는가? : 바르트는 점차로 '직무'(Amt)'의 개념 대신에 '봉사'(Dienst)의 개념을 교회질서의 본질적 개념과 내용으로서 부각시키려고 했다. 화해론 IV/3에서는 교회의 질서가 명백하게 그리스도론적ㆍ교회론적 개념에 따라 '형제애적 그리스도통치'의 형태로, 즉 봉사의 형태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교회에서 적용될 법은 오직 봉사의 법으로서 명백하고 전체적이며 보편적이어야 한다.
⑶ 교회는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 교회의 중심적 임무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에 귀착된다. 바르트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의 증언의 원천이요 그 근거 및 내용이기도 하다. 그런데 바르트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은 세계의 제반 관계로부터 분리된 고백이 아니라 당대의 시대사를 위해 결정되는 명확한 고백이다.
⑷ 교회의 미래는 무엇인가? : 바르트에 의하면 교회는 겨자씨 형태처럼 세워진 하나님 나라로부터 와서 나무형태처럼 완성되는 하나님의 나라를 향해 나아간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교회의 기원이면서도 그 목표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에 세워진 지배, 그분 안에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통치이다. 그분 자신이 곧 하나님의 나라이시다. 하나님의 나라는 교회의 미래일 뿐만 아니라 전 인류의 미래이기도 하다.
출처 :행복충전소♥대명 원문보기 글쓴이 : 익명회원 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