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茶山)이 죽란시사(竹欄詩社)를 결으면서 ‘살구꽃이 처음 피면 한 번 모이고, 복숭아꽃이 처음 피면 한 번 모이고, 한여름 참외가 익으면 한 번 모이’자고 하였다.
우리는 못고개마을에 벚꽃이 흐드러지면 모이자고 했다. 다산의 모임은 시를 짓는 모임이지만, 우리는 시를 읊는 모임이다. 그들의 모임은 비로소 이루어지는 모임이지만, 우리는 세 해째를 모이는 모임이다.
세 해 전 우리는 시를 외고 읊어 아름다운 삶을 가꿔보자며 모였다. 두 달마다 한 번씩, 한 차례의 거름도 없이 모여 시를 외고, 왼 시를 서로 읊어 보며, 외고 읊는 마음새와 품새를 다듬어 오고 있다.
그리움을 담은 시를 낭송하고, 꽃을 기리는 시를 낭송하고, 삶을 돌아보는 시들을 낭송했다. 시를 좋아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일까. 모인 사람들은 한결같이 정겹고도 고운 멋쟁이들이다.
기왕 멋을 부리는 김에 호를 하나씩 갖자고 했다. 한내, 청산, 후전, 심운, 홍경, 청돈, 가향, 유원, 소연, 청윤……. 칭호는 사람들의 마음을 더욱 정겹고 가깝게 했다.
그 가까운 마음들이 두 달에 한 번씩 얼굴을 마주하여 시를 외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 있으랴. 해 바뀔 무렵이면 해 잘 가고 잘 오라고 모이고, 좋은 날이면 날 좋다고 모였다.
봄이 무르익어 꽃이 산천을 수놓을 무렵의 날을 잡아 청산이 살고 있는 문경의 못고개마을에 모이기로 했다. 그 마을 꽃 경치가 유다르기 때문이다.
받은 날은 다가오는데 꽃샘바람은 쉽게 떠나지 않고 산꽃 소식은 감감하기만 했다. 날을 물려야 할까, 조바심으로 꽃 흐드러질 날만 기다리고 있는데-.
이 게 웬일! 저를 기다리는 꽃다운 마음들을 훤히 알고 있었는가, 모이려는 하루 전 날 강둑에 활짝 핀 벚꽃은 꽃비를 포롱포롱 뿌려대고, 산등에는 산꽃들이 천지를 뒤집을 듯 찬란히 피어났다. 하늘이 우리의 모임을 어여삐 여긴 탓이 아니랴.
조령천 강둑에 줄지어 흐드러진 벚꽃이 아리따운 꽃잎으로 강의 물빛을 바꾸고, 주지봉 산자락은 붉고 흰 산꽃들이 푸른빛과 어울려 현란한 꽃 잔치를 벌이고 있었다. 마을이 온통 꽃의 바다에 흠뻑 잠겼다.
아무 날 아무 시 그 꽃의 시간 속으로 한내, 후전, 홍경이며 심운, 가향, 유원이 달려 왔다. 축복처럼 휘날리는 꽃비를 맞으며 마을 정자에 앉았다. 이 곱고 아름다운 날, 술 한 잔이 없을 손가, 술 한 모금 먹고 꽃 한 번 보고. 술잔에 꽃이 뜨고 눈동자에 꽃이 잠겼다.
이 마을이 전국 100대 ‘살고 싶고 가보고 싶은 마을’ 중에 하나라더니, 그럴만한 까닭이 있었네. 꽃 사연이 있었네. 마을 사람 마음들도 다 꽃 같을까. 술에 젖고 꽃에 취해 갔다.
강둑을 걸으며 꽃비를 맞아도 보고, 주지봉 등성이를 화려하게 무늬 짓고 있는 꽃들을 다시 바라보는 사이에 모두들 떨기떨기 꽃송이가 되어 가고 있었다.
강을 건너가 주지봉 자락을 바라보니 무덕무덕 울긋불긋 환희와 신비를 한껏 머금은 꽃의 축제 판이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산 풍경은 역시 근경보다는 원경이 제격이야. 이 풍경 오래오래 간직하리라, 풍경을 등에 지기도 안고 가슴에 안기도 하며 열심히 셔터를 눌러댔다.
이 마을에서 멀지 않은 경북의 제일경 진남교반의 꽃소식은 어떠할까. 주지봉의 찬란한 꽃소식은 카메라 렌즈 속 깊이 갈무리한 것으로 위안 삼으며 진남교반을 향하여 달렸다.
진남교며 고모산성 주위도 아니나 다를까. 벚꽃이며 개나리가 눈부신 꽃 천지를 이루고 있었다. 봄이 이토록 찬란한 것인 줄은 예전에 미처 몰랐다는 듯, 모두들 터져 나오는 탄성을 숨기려하지 않았다.
산성을 향하여 오르는 길섶에도 진달래, 개나리며 붉은빛, 하얀빛, 자줏빛 조그만 풀꽃들이 자석처럼 눈길을 잡아당기고 있었다.
유원이 더 이상은 참지 못하겠다는 듯, 황동규의 ‘즐거운 편지’를 읊어나갔다.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한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 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 버린 데 있었다.……”
진남문을 거쳐 다양한 빛깔의 벽돌로 짜인 우람한 성벽을 바라보며 고모산성에 올랐다. 높다란 산성을 발아래 두고 내려다보는 진남교반은 산 태극 물 태극을 이루며 굽이져 흐르는 강물이며 그 물에 뜬 푸른 하늘과 함께 세상의 빛이란 빛은 다 모인 듯한 빛깔의 이바지가 벌어지고 있었다.
다산의 죽란시사 사람들은 살구꽃 필 때 만나 무슨 시를 노래했을까, “……그대를 생각할 때면 언제나 싱싱한 강물이 보이는/ 시원하고 고운 사람을 친하고 싶다.”며 심운이 마종기의 ‘우화의 강’을 읊고 났을 때, 청산은 조병화의 “늘 혹은 때때로/ 그리워지는 사람이 있다는 건/ 얼마나 인생다운 일인가……”를 나직이 읊조려 나갔고, 홍경이 류시화의 “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를 이어나가더니, 드디어 우리들의 낭송 교과서 한내가 진남교를 흐르는 푸른 강물 같은 목소리로 정호승의 ‘연어’를 낭랑히 풀어나갔다.
“……누구나 먼 곳에 있는 사람을 사랑하기는 쉽지 않다/ 누구나 가난한 사람을 사랑하기는 쉽지 않다/ 그동안 바다는 너의 기다림 때문에 항상 깊었다/ 이제 나는 너에게 가장 가까이 다가가 산란을 하고……”
누구나 먼 곳에 있는 사람, 가난한 사람을 사랑하기는 쉽지 않지만, 우리는 먼 곳에 있던 시를 사랑해냈고. 가난한 마음들을 유족하게 가꾸어냈다. 오늘 우리가 못고개마을의 봄꽃을 사랑하고, 진남교반의 봄빛에 젖어 시를 외고 있는 마음은 ‘너’를 기다리며 깊어가는 바다의 마음과 무엇이 다르랴.
한내의 살가운 목소리를 타고 나온 시어들은 성벽을 타고 진남문을 지나 꽃 그림자 아롱진 진남교반으로 아득히 아련히 번져 나갔다.
그 성벽을 내려올 때 우리는 모두 시가 되고 꽃이 되어갔다. 그리고 청산의 강둑에 다시 벚꽃 흐드러질 날을 기다리는 마음들을 그리움의 바다 속으로 깊숙이 밀어 넣었다.
그리워지는 시간들이 있다는 건 얼마나 인생다운 일인가. ♣(2013.4.19.) |
첫댓글 두고두고 잊지못할 아름다운 봄날을 만들어 주신
선생님 고맙습니다. 술잔에 떨어진 꽃잎, 따뜻한
우리 마음의 향기가 술보다 그윽한 향기로 설레는
날이었습니다. 그리워진다는 것은 시간만이 아니겠지요.
그 아름다운 시간과 풍경, 사람 속에 한껏 묻히고 갑니다.
늘 좋은 글로 감동을 주셔서 고맙습니다-.
달려와 주셔서 더 고맙습니다.
아름다운 시를 들려주셔서 더욱 고맙습니다.
꽃과 시가 어울려 참 그리운 기억으로 남았습니다.
아름다운 기억을 만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참 행복했던 봄날이었습니다. 님의 건승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