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 류 정
벽류정에 게시된 (남간) 할아버지의 현액
남간 나해봉(1584~1638)의 벽류정 영시 감상
글/나천수
1. 들어가는 말 - 벽류정소개
벽류정은 전남 나주시 세지면 벽산리 475번지 소재한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84호인 정자이다. 이 정자는 1429년 세종11년 친시문과에서 장원 급제하고 성종 때에 호조참판을 지낸 조주(趙注)가 낙향해서 지었던 것으로, 이곳에서 80 평생을 즐기다가 그 외손 김운해(金運海 :1577~1646)에게 넘겨준 정자이다.
김운해는 호가 벽류정이고, 32세에 무과에 급제하였으며, 1624년(인조2) 이괄의 난 때 어가를 모시고 공주에 내려갔고 병자호란 때에는 남한산성에서 호전(戶典)에 관한 일을 맡은 공으로 전마와 갑옷 등을 하사받았던 인물로 벼슬은 김해부사에 이르렀다. 김운해는 외조부로부터 물려받은 이 정자를 1640(인조8) 자기의 호를 따 벽류정을 건립하였는데, 그 후 1678년(숙종4)과 1862년(철종13)에 중수를 거듭하였다.
장인으로부터 물려받은 구 건물에 벽류정이란 이름을 붙인 것인지, 구 건물을 헐고 새로 지은 것인지에 대한 기록은 없다. 다만 중수를 거듭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오늘날의 멋스런 목조 기와집 정자가 지어진 듯하다.
벽류정은 멀리 금성산을 뒤로하고 펼쳐진 평야 속에 자리한 3개의 언덕 중에서 가장 큰 언덕의 숲속에 자리하고 있는 앞면 3칸·옆면 3칸 규모의 지붕이 여덟팔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다. 내부에는 글씨를 잘 썼던 민규호, 신헌 등이 쓴 현판을 비롯해 11개의 벽류정 영시 현액(顯額)이 보존돼 있는 전체적으로 균형이 잡힌 아름다운 정자이다.
예로부터 영산강 12정이라는 말이 있고 나주는 나주 8정의 말이 전해지고 있다. 나주 8정의 정확한 내용은 알려져 있지 않으나, 쌍계정(雙溪亭), 벽류정(碧流亭), 영모정(永慕亭), 장춘정(藏春亭), 만호정(挽湖亭), 석관정(石串亭), 기오정(寄傲亭), 창랑정(滄浪亭)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벽류정 정자 대들보에는 문곡 김수항(金守恒:1629~1689)을 비롯한 승지 ,東野(林堜 1589~1648)시서 김선(金璇:1568~1642) 등 11분의 벽류정 예찬 영시 현액이 걸려 있는데, 필자는 이 가운데 남간 나해봉의 시를 소개하고자 한다.
2. 남간 나해봉의 생애
남간은 나주 읍성 안에서 태어나 46살까지는 읍성 안 금계리 생가 터에서 살다가 47세 되던 해에 읍성 서수구 밖의 한계천이 흐르는 천변에 남간정사를 짓고 정자를 계정(溪亭)이라 명명하여 거기에서 기거하면서 글을 읽고 글을 지었다.
남간은 형 석호 해구와 더불어 수은 강항 선생 문하에서 수학을 하였고 문과 과거에 3번 도전하여 3번 모두 1차 시험을 합격하였으며, 34세 때인 1617년 광해군 때에는 2차 시험까지 합격하였으나, 정론(正論)을 썼다는 이유로 시관(試官) 권진(權縉)이 합격자에서 제외 시켜버린 억울함도 당하였다. 아마 광해군 별시 2차 시제(試題)가 오늘날 같으면 “국가발전의 방안을 논하라”의 주제였던 것을 남간은 광해군의 폐정을 논하면서 그에 대한 방안을 답안으로 작성하여 채점관의 눈으로는 합격으로 처리하였으나 최종 판정에서 시관은 불합격 시킨 듯하다.
남간의 나이 49세 때인 1632년 음사직(蔭仕職)으로 6품 수성금화사 별제로 관직에 들어가 이듬해에 5품 별좌로 승진한 행운을 얻었다.
그러나 형 석호공의 권유로 벼슬을 버리고 함께 낙향하였다.
한편, 그가 음직으로 출사한 데에는 사마시 합격 동기생 계곡(谿谷) 장유(張維)의 힘이 있었을 것으로 보여 진다. 남간은 23세 젊은 나이에 사마시 2차 시험 회시(會試)까지 당당히 합격하여 동년 합격한 張維와 친한 벗이 된 것이다. 장유는 그 후 중앙 요직에 있다가 인조7년 9월15일 나주목사로 좌천되어 부임해 와, 남간과의 새로운 교류를 하다가 1년 만에 다시 형조판서의 중책으로 중앙에 입성해 갔다. 남간공이 남간정사를 지을 때인 바로 그해이다. 계곡 장유가 형조판서로 입성한 이듬해인 1632년 봄에 승의랑 수성금화사 별제가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님을 보여 준다.
남간이 지은 벽류정이란 시는 그가 형과 함께 낙향한 후에 지은 듯하다. 벽류정 정자에 현액으로 시를 음각하여 걸어놓은 것은 정자의 주인이거나 당시 유림들의 요청에 의했을 것이다. 한편, 벽류정 정자에 문곡 김수항의 글이 있다는 것은 문곡이 영암으로 유배 갈 때에 나주에서 3일간 南磵의 정자 溪亭에서 머물렀던 일과 관련이 깊다.
김수항은 18세 때 사마시에 장원하였으며, 23세에 알성 문과에 급제하고 이어 문과중시에도 급제하여 통정대부·자헌대부 등을 거쳐 우의정에 올랐다. 그는 서인으로서 1660년에 자의 대비 복상 문제가 일어나자, 송시열과 함께 기년설(만1년)을 주장한 남인파에 눌려 귀양 가게 되었다. 이때 김수항은 유배지인 영암으로 가는 길에 나주의 남간 계정을 방문하게 되었다.
김수항은 정치적으로는 거물급이요 학문적으로는 석학으로 알려져 그 당시 나주의 선비들이 나주에 잠시 머물도록 간청한 것이다.
당시의 상황을 기록한 나주나씨 世稿集에 의하면 김수항이 영암 유배길에 나주에 왔을 때 남간의 손자인 羅相器, 羅世器가 대화중에 남간과 계곡 장유간의 상여수창의 이야기 꽃피우게 되면서 실제로 수창의 詩札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이에 김수항은 계정으로 와 머물면서 남간과 계곡간의 교류의 옛이야기를 듣게 되는데, 계곡은 문곡의 선배이면서 친척(계곡의 장인이 우의정 김상용인데 문곡에게는 종조부가 되니 고모부벌인 것이다. 문곡의 조부는 좌의정 김상헌이다)이기 때문에 계곡의 문학 도반 남간에 대해서 인간됨을 자세히 들을 수 있었던 것이다.
문곡도 계곡문집에서 남간과의 상여수창의 시문을 접했으며 그의 문학 도반인 남간 나해봉에 대해 궁금해 하던 차에 참으로 우연하게 남간의 후손들을 만나 남간의 정사인 계정에서 3일간이나 머물게 된 것이다.
김수항은 영암 유배생활 2년여의 기간 동안 특히 나주 나씨와의 교류가 돈독 했었는데, 1678년 그 즈음에 벽류정에도 한번쯤 다녀간 듯하고, 시문을 남긴 것 같다.
특히 영암에 적거하면서 녹암공 羅儆(나주나씨)과의 상여수창의 세월을 보내면서 남긴 시문이 알려져 양측 가문 모두 더욱 연민의 정을 가지고 있다
본란은 다만 벽류정 영시 소개란이므로 상여수창의 좋은 시문일지라도 본란에서는 군더더기가 되어 생략코자 한다. 이 부분은 필자가 이미 “나주나씨와 안동 김씨 간의 기막힌 인연”이라 제목으로 발표한바 있어 그것을 참고하기 바란다.
3. 벽류정 詠詩감상
한시를 가장 맛있게 감상하려면 작가의 인생과 작가가 살았던 역사 배경과 작가의 생활 배경을 먼저 알아야 한다.
얼마나 많은 답답함 즉 울(鬱)의 한(恨)을 마음 안에 쌓았는가에 따라 그 恨을 승화하는 방편으로 작품을 만들어 낸다.
도연명의 귀거래사(歸去來辭)도, 사마천의 사기(史記)도, 자신의 울(鬱)을 승화하는 차원에서 만들어진 작품이다.
벽류정의 위치는 나주시 세지면 동창(東倉) 천변에 위치한 정자인데 나주 8정 중의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오늘날 영산강은 본류 자체도 샛강처럼 작아졌는데, 과거에는 세지면 소재지인 동창까지 배를 댄 흔적이 있어 아마 벽류정 아래 냇가에로 배를 띄웠던 것 같다.
나주는 소위 나주 평야의 큰 들녘에 영산강 본류와 지류가 마치 거미줄처럼 강줄기가 뻗어 있어, 비록 샛강이지만 돛단배를 띄웠으며, 이를 먼 풍경으로 바라본다면 강은 보이지 않고 들판을 건너는 배만 보일 것이다.
또한 밀물 때면 과거에는 나주 동문 앞 광탄(廣灘)까지 밀물이 거슬러 올라와 갈매기 등 바다 새들이 강물을 따라 육지 깊숙한 곳까지 노닐었으니, 시인 묵객들의 눈에는 이를 바다 새와 같이 논다는 표현을 한 것 같다.
이러한 벽류정의 역사적 위치와 지리적 위치를 갈파하는 것이 벽류정이란 한시를 감상하는 첫 단계라 하겠다. 위와 같은 상황을 알지 못할 때는 깊은 의미가 담겨진 한시를 도무지 이해하기 힘들 것으로 본다.
이제 남간의 시를 살펴보자.
碧 流 亭 - 南磵 羅海鳳 지음
忘機幾共海鳩遊(망기기공해구유)
機心을 버려야 바다 새와 함께 놀 수 있고
盡日常橫野渡舟(진일상횡야도주)
일상이 다하도록 배를 타고 들판을 건넌다.
銅斗何時飮江酒(동두하시음강주)
언제라도 청동 되로 강가에서 술을 마시니
與君同滌亂離愁(여군동척난리수)
그대와 더불어 이별의 시름과 어지러움을 씻구나.
傳道故人三畒宅(전도고인삼무댁)
옛사람들은 3이랑 정도의 집터를 권하는데
偏憐江弚近山庭(편연강퇴근산정)
활처럼 휜 강이나 산 콧마루면 좋지 않으리.
漁笛數聲林雨細(어적수성임우세)
가랑비 내리는 가운데 어부들이 피리 소리 들리고
擬將孤棹訪沙汀(의장고도방사정)
모래톱에 댄 외로운 배는 장차 어찌 할 건가.
이 시를 통해 낙향한 선비들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데, 마음을 비운 유유자적의 모습과 자신의 마음을 어디에 놓아야할지 시문을 통해 반어적으로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다.
<제1수>
1연의 忘機는 곧 機心을 버리라는 의미이다.
기심이란 바닷가에 사는 사람이 매일 아침 수백 마리의 물새와 벗하며 어울려 노닐었는데, 그의 부친이 자기가 데리고 놀 수 있도록 잡아 달라고 부탁하자, 그다음 날 아침에는 한 마리도 내려와 앉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열자(列子)》 황제(黃帝)에 나온다. 기심(機心)은 자기의 사적인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교묘하게 꾀하는 마음을 말한다.
벽류정은 세지 금천(錦川)변에 지어진 건물로 벽류정이란 정자를 배로 비유하면 정자 위에 오르는 순간 배는 나주 들판을 가로 지르며 유유히 떠나 갈 것이다.
물 위로 떠가는 배 주위에는 바다 새들이 날기도 하고 모래밭을 뛰어 다니기도 하니 배를 탄 사람은 그러한 새를 통해 유희를 즐기고 있는 것이다.
2연의 盡日常橫野渡舟의 표현을 타 시문에서 찾아보자.
盡日虛橫野渡舟 / 鶴巖集冊一,
老子虛橫野渡舟 / 陶菴先生集卷四,
虛橫野渡舟은 “부질없이 배를 타고 들을 건넌다.”는 뜻이니, 어찌 배가
들로 항해할 수 있는가. 이것은 들녘에 높다랗게 지어진 정자 누각 위에 올라가 앉으면 마치 멀리서 보면 정자라는 배가 들녘을 건너는 배와 같다는 의미인 것이다.
정자에 앉은 시인묵객들은 마치 자신들이 들녘(野)이란 바다 위에서 배를 타고 들녘을 건넌다는 문학적 표현을 한 것이다.
얼마나 멋진 표현인가.
정자라는 배를 타고 노는 시인묵객들에게 어찌 술이 없었겠는가.
동두(銅斗)라 하였으니 표주박 바가지가 아니라 주물로 주조한 청동 큰 잔으로 마신다는 것은 술을 많이 마시어 술에 취한다는 의미이며 詞客들의 도량이 작은 술잔이 아니라 큰 잔 즉 큰 그릇이라는 비유적 표현도 함축되어 있는 것이다.
3연의 銅斗의 표현을 타 시문에서 찾아보자.
手拍銅斗歌 / 退溪先生文集攷證卷之三
歌拍銅斗慰精魄 / 瑞石先生集卷二
銅斗踏舷歌 / 沙磯集冊一
청동으로 만든 잔은 왕실에서나 볼 수 있는 酒器인데, 이러한 청동 큰잔으로 마시는 연회장을 상상만 해도 마음속에 뭉친 스트레스가 확 씻겨 내려가는 것 같다.
4연의 離愁는 禮記 檀弓 上에 나오는 말로 이군삭거(離群索居)의 시름 즉 친지나 벗들과 헤어져서 혼자 외로이 사는 생활의 시름을 가리키는 말이다.
친구와 더불어 함께 있으니 離群索居의 어지러움을 벗어난다는 표현도 참으로 멋지다.
<제2수>
1연에서 三畒宅라는 단어를 썼다.
사람들은 자신이 살터 집을 희망한다.
그것도 한사람아 살만한 작은 땅이면 족하다. 그러한 표현이 三畒宅인 것이다.
삼묘는 《회남자(淮南子)》 원도훈(原道訓)에 “한 사람의 능력만 믿으면 삼묘의 택지도 다스릴 수 없다.” 한 데서 온 말로, 한 사람이 살 만한 작은 땅을 뜻한다. 한(漢)나라 때 사람인 장중울(張仲蔚)은 벼슬하지 않고 은거하였는데 그가 거처하는 곳에 쑥대가 우거져 사람이 파묻힐 정도였다 한다. 《趙岐 三輔決錄 卷1》
은거하는 선비들이 자신을 표현할 때에 “작은 집에 만족 한다”, “나물 캐기로 소일 한다” 의 표현을 즐겨 쓴다.
이것은 자연과 자신을 일체화 시키는 표현이며, 마음을 빈운 상태를 말한다.
2연의 偏憐이란 표현을 보자
偏憐은 감칠맛 난다, 허용한다, 어여삐한다 는 뜻으로 쓴 것인데,
漬蜜偏憐色味淸/꿀에 담근 그 색과 맛 어찌나 감치는지 /간이집(簡易集) > 간이집 제7권 >
上客偏憐枚馬才/枚乘과 司馬相如의 재질 갖춘 귀빈만 허용되네 /계곡집(谿谷集) > 계곡선생집 제30권 > 칠언율(七言律) >
我老偏憐蔬適口/늙어가는 내 입에 맞는 소채 즐기거니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文集) > 동국이상국후집 제7권 > 고율시(古律詩) >
벽류정처럼 배산임수(背山臨水)인 구부러진 영산강에 금성산 산 콧마루 가까운 쪽이면 족하다는 표현이다.
남간의 정사인 계정도 바로 이러한 위치에 있으니 족하다는 의미도 내포되어 있다.
3연의 漁笛數聲를 타 시문에서 찾아보자.
漁笛數聲橫/어선에서 피리소리 들려오누나 /면암선생문집 제1권
月明漁笛數聲聞/東州先生詩集卷之九>牙城錄 二>次東嶽枕海堂韻
漁笛數聲秋/柏谷先祖集附錄>終南叢志
또 林雨細 운을 보자.
落花林雨細/遲川先生集卷之二
林雨細霑沙/睡谷先生集卷之一>詩>溪上小雨
이 시의 풍광을 보면 벽류정으로 오가는 배의 어부들이 부는 피리소리와 가랑비 빗줄기를 읊은 것 같다.
가랑비 내리는 모습이 작은 나무줄기처럼 보이는데 여기에 어선에서 들여오는 피리소리가 처량하게 들린다는 표현인 것 같다.
4연의 孤棹를 타 시문에서 보자.
孤棹搖搖出沒忙/외로운 배 하나 흔들흔들 파도 속에 정신이 없네 /동계집(桐溪集) > 동계집 제1권 > 칠언절구(七言絶句) >
故吹孤棹泊津頭/일부러 배를 불어서 나루에 정박게 했네 /동계집(桐溪集) > 동계집 속집 제1권 > 시(詩)○칠언절구(七言絶句) >
朅從麻浦理孤棹/마포에 나가서 편주를 타니 /동문선(東文選) > 속동문선 제5권 > 칠언고시(七言古詩) >
棹는 노 棹이지만 孤棹는 바로 배를 의미하였다.
모래톱에 정박한 외로운 배는 장차 언제 출항할 것인가 로 끝을 맺었다.
이것은 곧 남간 자신이 장차 다시 세상 밖으로 언제 나아갈지 스스로에게 묻는 것과 같다.
옛 선비들은 즐겨 고사 인용을 통해 시문을 지었고, 시문을 통해 자신의 속내를 은근히 표출하였다. 남간도 벽류정을 통해, 벽류정의 분위기를 가탁하여, 자신의 심정을 글로 써 표현한 것 같다.
현액으로 음각된 시문이 南磵公의 친필인지는 알 수 없으나, 먹물 찍어 힘차게 써 내린 글
자 하나하나 남간공의 모습을 뵌듯하여 후손으로 참으로 기쁘기 한량없다.
첫댓글 傳道故人三畒宅 (전도고인삼무댁)
오랜 친구들이 3무(畒)의 택지를 전해 말하지만
偏憐江芾近山庭 (편연강비근산정)
작은 강 가까운 산 마당을 유독 좋아했네.
수정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