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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中國)의 예절에 관한 책인 예기(禮記)에는 유명관자(幼名冠字)라는 말이 있다.
직역(直譯)을 한다면 어릴 적에는 이름(名)을 짓고 성인이 되어서는 자(字)를 짓는다는 뜻이다.
중국(中國)에는 아이가 태어나 3개월이 되기 전에 아이 이름을 짓고 성인식을 올리고 나면 자를 짓는 관습이 있었다.
이러한 풍습(風習)을 예절의 한 부분으로 섬기고자 예기(禮記)에 까지 실어 놓고 있다. 성명(姓名)이 중요성은 예기(禮記)나 좌씨전(左氏傳)같은 고서(古書)들에도 실려 있는데 이 성명(姓名)은 언제부터 유래되었을까?
성(姓)은 맨 처음 모계(母系) 사회(社會)로부터 시작되었다.
성(姓)이란 글자가 계집여(女)와 낳는다, 탄생한다의 의미인 생(生)의 합성어로 된 것만 보아도 곧바로 유추할 수 있다.
계집 또는 여자는 일방적으로 어미를 상징했고 어미가 낳는다하여 원래는 어미의 성(姓)을 의미하였다. 처음에는 어미의 성(姓)에서 출발한 것이 모계사회를 거쳐 씨족사회(氏族社會), 부족사회(部族社會)의 부계사회(父系社會)로 바뀌면서 아이가 아비의 성(姓)을 따르게 되었고 이것을 씨(氏)라고 불렀다. 이것이 후에 부계사회(父系社會)가 완벽하게 정착된 후에 성(姓)이나 씨(氏)나 모두 아비의 성(姓)을 상징하게 되었던 것이다.
성씨(姓氏)의 탄생은
직업이 변화된 경우와 지명(地名)에 근거한 경우가 많다. 직업(職業)으로 성씨(姓氏)가 만들어진 경우는 복씨(卜氏) 윤씨(尹氏) 사씨(史氏)와 같은 경우이다.
복씨(卜氏)는 중국(中國)의 축씨(祝氏)와 무씨(巫氏)와 함께 원시시대(原始時代)에 제사(際祀)를 주관(主管)했던 제사장(祭司長)이나 점복관(占卜官)들로 대대로 이어져 내려온 사람들의 성씨(姓氏)로 사용(使用)되었던 것이 현재에까지 내려오고 있다.
사씨(史氏) 윤씨(尹氏)는 역사(歷史)의 기록(記錄)을 담당하던 사관(史官)의 관직을 맡던 사람들이 성씨(姓氏)로 사용하다가 현재에까지 내려오고 있다.
사마씨(司馬氏)는 말을 관리하던 직책이었고 궁씨(弓氏)는 활을 만들던 직업으로부터 성씨(姓氏)가 유래되었다. 정씨(鄭氏)나 곽씨(郭氏) 등씨(鄧氏)는 글자에 고을읍(邑)이 상징하듯이 씨족(氏族)이 거주(居住)했던 지역(地域)의 이름이나 지역(地域)의 특징(特徵)을 따서 성씨(姓氏)가 탄생되고 유래되게 되었다.
우리나라 성씨(姓氏)는
지금으로부터 천오백년경인 신라(新羅)시대의 법흥왕, 진흥왕시대부터 사용되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때의 성씨는 중국(中國)에서 넘어온 중국식(中國式) 성씨(姓氏)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이후 성씨(姓氏)가 계속 생겨나게 되었고 조선시대에는 500여개의 성씨(姓氏)가 생겨났다.
그러나 정확한 자료가 남아있는 것은 「앙엽기( 葉記)」와「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에 성씨에 관한 종류가 나와있다. 이덕무의 「양엽기( 葉記)」에는486개의 성씨(姓氏)가 기록되어있고 「世宗實錄地理志」에는 265개의 성이「東國與地勝覽」에는 79개의 성이 기록되어져 있다.
서로 다른 성씨들이 기록되어 있어 정확한 성씨(姓氏)이 존재여부는 확실치 않으나 대략 500개 정도의 성씨(姓氏)가 존재(存在)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겠다. 그러나 소수만 사용하던 성씨(姓氏)들은 사라지고 유명한 성씨(姓氏)들만 남아 성씨(姓氏)들이 과반으로 줄어들어 현재는 250여 성씨만 남아있다. 이것이 성(姓)의 유래이다.
이름 명(名)의 역사(歷史)를 알아보면
성(姓)이나 씨(氏)는 존재(存在)하는데 이름이 없었던 시절(時節)에는 낮에는 눈짓, 손짓, 또는 몸짓으로 상대를 부를수가 있었다. 그런데 밤이 되면 상대를 부를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행동(行動)으로 부를 수 없는 야간(夜間)에는 필요성이 간절해서 이름이 생겨나게 되었다.
명(名)자를 풀어보면 쉽게 이해(理解)하기 쉬울 것이다.
명(名)자를 풀어보면 저녁 석(夕)과 입구(口)가 합쳐져서 만들어진 글자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명(名)자의 뜻대로 저녁에 어두워 보이지 않을 때 상대를 찾으려 부르던 것이란 뜻으로 생겨났다.
옛 문헌들에서는 이름자에 쓸 수 있는 글자와 이름자에 쓸 수 없는 글자를 정하여 놓고 있다. 예를 들어 나라의 이름이나 관직이름, 강이나 산 이름, 질병의 이름, 가축이름, 그릇이나 물건의 이름들은 사용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러한 내용들은 춘추(春秋)나 예기(禮記)에 쓰여져 있는데 구구절절이 저자의 생각을 정리하는 것보다는 원문(原文)의 내용을 그대로 적고 해석을 해 놓음으로써 의미가 확실하게 드러날 수 있다고 보기에 아래에 원문의 해석을 적어 본다.
이 글은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의 환공(桓公)편에 나오는 내용이다.
구월정묘(九月丁卯), 자동생(子同生). 이태자생지례거지(以太子生之禮擧之). 접외대뇌(接外大牢), 복사부지(卜士負之), 사처식지(士妻食之). 공여문강(公與文姜). 종부명지(宗婦命之). 공문명어(公問名於). 신수(申需), 대왈(對曰), 명유오(名有五). 유신(有信), 유의(有義), 유상(有象), 유가(有假), 유류(有類). 이명생위신(以名生爲信), 이덕(以德), 명위의(命爲義), 이류명대상(以類命 象), 취어물위가(取於物爲假), 취어부위류(取於父爲類). 불이국(不以國), 불이관(不以官), 불이산천(不以山川), 불이은질(不以隱疾), 불이축생(不以畜牲), 불이기폐(不以器幣). 주인이휘사신(周人以諱事神). 명종장휘지(名終將諱之). 고이국즉폐명(故以國則廢名), 이관즉폐직(以官則廢職), 이산천즉폐주(以山川則廢主), 이축생즉폐사(以蓄生則廢祀), 이기폐즉폐례(以器幣則廢禮). 진이희후폐가도(晋以僖後廢可徒), 송이무공폐사공(宋以武公廢司空), 선군헌(先君獻). 무폐이산(武廢二山). 시이(是以), 대물불가이명(大物不可以命). 공왈(公曰),「시기생야(是基生也), 여오동물(與吾同物).」명지왈동(命之曰同). 환공육년(桓公六年).
노나라의 환공 6년 9월 정묘 날에 자동(子同)이 태어났다. 태자 탄생의 예의를 갖추어 생일 잔치를 열었고 태자를 접견하는데 소. 양. 돼지의 음식을 준비하고 점쟁이에게 좋은 선비를 고르게 하여 태자를 업게 하고 선비의 아내를 또한 점쟁이에게 부탁하여 선발하였고 이를 유모로 삼았다. 환공은 부인 문강과 같은 성(姓)의 대부의 아내와 함께 태자에게 이름을 짓기로 하였다. 그래서 환공은 이름을 대부인 신수에게 묻게 되었는데 그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이름을 짓는데는 다섯 가지의 방법이 있습니다. 신(信) 의(義) 상(象) 가(假) 류(類)가 그것으로 이름을 짓기 위하였을 때의 신(信). 장래의 번영을 생각하여 덕의 이름을 지어 주는 것의 의(義). 태어난 아이의 용모에 견주어 지은 이름의 상(象). 태어날 때의 사물에 견주는 류(類)가 됩니다. 제후의 나라 이름이나 벼슬이름이나 산천의 이름. 질병. 제사 지낼 때 쓰이는 짐승, 예물로써 사용하는 그릇의 이름은 아이의 이름을 지을 때 사용하지 않습니다.
주나라 사람은 생전의 이름을 꺼려하고 휘(諱)로써 조상을 섬기고 생전의 이름은 그 사람이 죽자 꺼려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나라 이름으로 이름을 지으면 그 인명을 고치고 관직의 이름을 사용하면 관직의 이름을 고치고 산천의 이름을 사용하면 산천의 이름을 고치고 가축이름을 사용하면 가축을 제사 때 사용하지 못하고 예물에 사용하는 그릇이름을 사용하면 그 그릇을 예물로 쓸 수 없습니다.
진(晋)나라 희공이 사도라는 관명을 빌어 이름을 작명했기 때문에 사도를 중군(中軍)으로 고친바 있고 송(宋) 무공(武公)이 사공(司公)이라는 관직 이름을 사용하여 이름을 작명하여 관직의 이름을 고친바있고 노나라 헌공(獻公)의 이름은 구(具)이고 무공(武公)의 이름은 방(放)이었기 때문에 구산(具山) 방산(放山)의 산 이름을 그 동네 이름으로 바꾸었습니다. 이러한 관계로 이상과 같이 귀중한 것의 이름을 빌어 명명(命名)하는 것은 아니 되는 것입니다. 환공이 말하길「이 아이가 내가 태어난 날과 생일이 같으니 그러면 동(同)이라 하겠다」라고 하였다.
옛날에는 아이의 출생에 관한 것은 매우 신성시했고 아이의 이름을 작명하는데도 매우 신중하게 선택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린애가 출산(出産)한 뒤에는 딴 방을 마련하여 거처하도록 하였고 보모를 둔다고 했다. 3개월이 되면 그 달 그믐께 머리손질을 해 주면서 정식으로 아버지를 만나게 해 주었다.
아버지는 이날 아들의 이름을 지어 주고서 아내와 함께 방에 들어가서 식사를 하였다.
이러한 내용들은 중국의 예절에 관한 이야기를 적어놓은 고전 예기(禮記)의 내칙(內則)에 나타나 있다.
이위유자실어궁중(異爲孺子室於宮中), 택어제모여가자(擇於諸母與可者), 필구기관유자혜(必求리其寬裕慈惠), 온랑공경(溫良恭敬), 신이과언자(愼而寡言者), 사위자사(使爲子師), 기차위자모(其次爲慈母) 기차위보모(其次爲保母), 개거자실(皆居子室), 타인무사불왕(他人無事不往), 삼월지말(三月之末), 택일전발위발(擇日 髮爲髮), 남각여기(男角女羈), 부즉남좌여우(否則男左女右), 시일야(是日也), 처이자견어부(妻以子見於父), 귀인즉위의복(貴人則爲衣服), 자명사이하(自命士以下), 개수한(皆漱瀚), 남녀패흥(男女?興), 목욕의복(沐浴衣服), 구시삭식(具視朔食), 부입문(夫入門), 승자조계(升自 階), 입어조서향(立於 西鄕), 처포자출자방(妻抱子出自房), 당미입동면(當楣立東面), 모선(姆先), 상왈(相曰), 모모감용시일지견유자(母某敢用時日祗見孺子), 부대(夫對), 흠왈유사(欽曰有師), 부집자지우수(父執子之右手), 해이명지(咳而名之), 처대(妻對).
세자가 아이를 출생했을 때에는 임금은 목욕하고 조복(朝腹)을 갈아입는다.
왕비도 역시 이와 같이 한다. 모두 작계(作階)에 서서 서쪽을 향한다. 세자의 부인(아이의 엄마)이 아들을 안고 서계(西階)로부터 올라온다. 임금은 이름을 지어주고 곧 내려간다. 적자나 서자는 외침(外寢)에서 보이는데 임금은 그 아이의 머리를 어루만져주고 어린애의 웃음소리를 듣고 이름을 지어준다.
예절은 세자 때와 같으나 말은 하지 않는다.
대체로 아들에게 이름을 지어 주는데 달(月) 태양(日)을 가지고 짓지 않고 나라 이름을 가지고 짓지 않으며 질병이름으로 이름을 짓지 않으며 대부나 선비의 아들은 감히 세자와 이름을 같게 하지 않는다. 첩이 장차 아들을 낳을 경우 그 달이 되면 남편은 사람을 시켜서 하루에 한 번 소식을 듣는다.
아들을 낳아서 석달이 되면 옷을 갈아입고서 정갈하게 하여 내실로 가서 아버지께 인사를 드린다. 임금은 이미 음식을 먹고 치우면 혼자서 있게 된다. 그리고 나서 들어가서 모신다.
세자생(世子生), 즉군목욕조복(則君沐浴朝服), 부인역여지(夫人亦如之), 개입우조계서향(皆立于 階西鄕), 세부포자승자서계(世婦抱子升自西階), 군명지내강(君名之乃降), 적자서자견어외침(適子庶子見於外寢), 무기수해이명지(撫其首咳而名之), 예사초(禮師初). 무사(無辭), 범명자(凡名子), 불이일월(不以日月), 불이국(不以國), 불이은질(不以隱疾),대부사지자(大夫士之子),불감여세자동명(不敢與世子同名). 첩장생자(妾將生子), 급월진(及月辰), 부사인일일문지(夫使人日一問之), 삼월지말(三月之末), 수한패제(漱澣?齊), 견어내침(見於內寢), 예지여시입실(禮之如始入室), 군사식(君巳食), 철언(徹焉), 사지특준(使之特식), 수입어(遂入御).
공의 서자(庶子)가 출생하면 별실에 나가게 된다.
3개월이 되면 월말에 그 어머니가 목욕하고 옷을 정갈하게 갈아입고서 임금께 뵙는다.
보모가 그 아들을 임금께 뵙게 한다. 임금이 은사(恩賜)를 내궐 일이 있으면 임금은 그 아들에게 이름을 지어준다. 첩의 아들에게는 사령(司令)을 시켜서 이름을 지어준다.
서인(庶人)이 별실이 없는 자는 출산할 날이 되면 아이 남편이 나가서 내실에 거쳐한다.
그 소식을 묻는 것은 아들이 아버지를 뵙는 때와 다를 것이 없다. 대체로 아버지가 있으면 손자가 할아버지를 뵙는다.
할아버지가 손자의 이름을 지어 주는 예절(禮節)은 아들이 아버지를 뵙는 때와 같고 말만 없다.
아들을 기르는 자는 3년이 되면 나가서 임금을 뵙는데 이 때 임금은 그 노고를 치하한다. 대부의 아들에게는 식모(食母)가 있고 선비의 아내는 스스로 그 아들을 기른다.
명사로부터 대부에 이르기까지 모두 아버지에게 이름을 짓게된다.
가자(家子)는 후부인(后夫人)과 식사하기 전에 뵙고 공(公)은 반드시 오른손을 잡는다.
적자나 서자는 이미 식사를 한 후에 보며 공(公)은 반드시 그 머리를 어루만진다.
주역 본문중에는 이름을 말한 곳이 다섯이니,當名(당명),稱名(칭명),成名(성명),辱名(진명),乎:呼名(호명)이 바로 그것이다.
먼저 당명은 開而當名(계사전 하, 6장)으로서 음양,오행,수리에 합당한 과학적인 이름을 말하며, 그 다음 칭명은 其稱名也(계사전 하, 6장)지위,학덕,인품에 따라 남들로부터 불리어지는 이름이고,성명은 不足以成名(계사전 하, 5장)으로서 선행,공적,경륜에 의하여 역사로부터 평가받는 이름이며,반면에 욕명은 名必辱(계사전 하, 5장)으로서 부정,패륜,난적으로 욕된 이름이고,호명은 不成乎名(건, 문초구)으로서 존비,평교,망인에 따라 각기 달리 불리어지는 이름을 말한다.
일상생활에 있어서도 부르는 상대마다 호칭이 다른 점을 알고 불러야 예의와 도에 어긋나지 않는다. 예로부터 부모의 이름자는 귀로는 들어도 입으로는 함부로 부르지 못하였다(耳可得聞,口不可得言). 다만 부득이 남 앞에서 말해야할 경우는 ‘모(某)자 모(某)자’로 말하였다. 또 스승과 존장(尊長)에 대하여도 이름을 피하고 호(號)로써 대신하였다.
이처럼 이름을 중요시 한 조상들은 성인이 될때 올리던 관례에서 자(字)를 지어 그것으로 이름을 대신 불렀던 것이다. 또한 이름을 항렬자에 따라 지음으로써 씨족간 항렬과 촌수를 쉽게 구별하여 서로 예를 지킬수 있도록 하였으며,아울러 이것으로 남의 보첩(譜牒)도 알아 볼수 있는 슬기를 발휘하였던 것이다.
이렇듯 동양에서 이름의 중요성이 강조되어 왔고 이것이 성명학으로까지 발달되었다고 볼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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